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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唐代 녀류시인들 思夫曲 알아보다...
2017년 02월 05일 18시 38분  조회:2455  추천:0  작성자: 죽림

중국 唐代 여류시인들의 사부곡思夫曲

              --당대唐代, 이야, 설도, 어현기의 사랑과 이별과 그리움

 

                                                                                                                                        이 을

 

Ⅰ.

 중국은 성당盛唐 이래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사회구조가 발달하자, 경제적 상황은 여유로움이 생겨나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안사지란 安史之亂(755~763) 이후에는 농촌경제가 피폐해지고 수많은 아녀자들이 도시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생妓生으로 전락했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노비와 다를 바가 없었으며 매매도 가능했다. 소위 최하위의 천민계급, 부호나 권세가, 문인, 관료들의 성적인 노리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시대가 강요했던 유교의 예법에서 벗어나 보다 많은 남성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고 문학사적으로도 비교적 풍부한 작품을 남겼다.

 

 그 당시 여성들은 사회 통념상 남성들의 부속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대개가 불행한 삶을 살다가는 비련의 여성들이었다. 비록 노리개 정도로 하찮은 여성, 그 속에서도 천한 여성들이었지만 문학사적인 측면, 특히 부녀시가婦女詩歌 쪽에서는 전례 없는 명성을 남기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는 중국의 당시를 모은『전당시全唐詩』가 입증하고 있다. 모두 9백 권이나 되는 이 책은 강희康熙 4년(1705) 칙명勅命을 받들어 팽정구彭定求 등이 그 이듬해에 완성, 1707년 성조聖祖의 서문을 붙여 간행되었다. 작자의 수 2천2백여 명, 시의 수는 약 5만 수로 작자의 선후에 따라 배열하고 약전略傳을 첨부했다. 이 속에 당대 여류시인의 작품도 상당히 많다. 여황제였던 무칙천武則天의 작품에서 일반 가정의 부녀자, 기생, 여도사에 이르기까지 2백여 명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작품의 수가 비교적 많고 내용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여류시인으로, ‘이야李冶, 설도薛濤, 어현기魚玄機’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특수한 신분이라서 궁중이나 일반 규중의 여인들과는 달리, 규범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대체로 자유롭게 남성들과의 교류가 풍부했다. 그래서 자유 분망한 사고를 지녔고, 소재 역시 다양하게 취하여 자신의 감정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당시』에는 이야 18수, 설도 87수, 어현기 50수가 실려 있다.

 

 중국문학사에서 당대는 시의 황금시대였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다. 거개가 중국을 일컬어 ‘시의 나라’라고 한다. 생활의 윤곽과 심미審美경험을 가장 아름답게 응축시킨 중국인 만큼 시를 사랑하고 즐겨 지은 민족도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당시를 두고서 ‘거울 속의 꽃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다고 칭송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당初唐(618~712)에서 힘차게 열린 당시는, 성당盛唐(713~765)에 접어들어 찬란하게 꽃을 피우게 되었다. 맹호연孟浩然과 왕유王維의 시에서는 삶에 대한 관조는 물론 산수시의 진수를 체험하게 된다. 이백李白(701~762)의 시에서는 웅혼한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이 깃들어 있고, 시성으로 알려진 두보杜甫(712~770)의 시에서는 성당인의 기백으로 묘사한 안사의 난 전후의 사회상과 민중의 질고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불세출의 대시인들이 끊임없이 출현, 당이라는 다양하면서 광대무변한 시세계를 형성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세사世事에 초연한 시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대가 드리우는 암류暗流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듯이, 시대의 흐름과 거기에서 건져 올린 다양한 감흥은 시인의 뇌리에 각인되어 시로써 표출되기 마련이다. 이중에는 모순투성이의 시대를 아파한 시, 회재불우적懷才不遇的 정서를 읊은 시, 또는 정체된 역사의 비극,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을 가슴 아파하는 심정에서랄까. 때로는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私道가 횡행하고 용기보다 비겁이 고상한 척도로 저울질 되는, 종내에는 인간성 상실로부터 시작하여 포근한 인간애와 깨끗한 양심이라는 것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이르기까지 비정상적인 세태가 역사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기에 예나 지금이나 시인의 가슴앓이는 여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동양의 전통사상에 있어 이상理想은, ‘천인합일天人合一’과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말한다. 천인합일은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천도天道와 하나 되게 함이다. 즉 이기적인 탐욕을 극복하고 하늘이 준 인심人心을 바탕으로 인덕人德을 세움이다. 수기치인은 먼저 나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고 다음에는 남들을 사랑으로 품고 가르치고 그들도 인격자가 되게 함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상도 남녀평등에 있어서는 크게 이바지하지 못했다. 당대 여류시인들은 남성에 대해 공세적인 대담성으로 남성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적극적인 교류를 가졌다. 현대적 시각에서 평가하자면, 여권주의女權主義(feminism)를 선각한 초유의 페미니스트들이 아니었을까. 천으로 멀쩡한 발을 옥죄었던 전족纏足을 풀어 헤친 지 1세기도 채 안 되는 중국에서…….

 

 서양의 평등권 형성과정의 뿌리 역시 그리 오래지 않다. ‘인류의 보편적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신분과 계급의 대립 및 국가와 교회의 권력 구조적 형태이다. 이런 문화적 산물은 본질적인 인간과 인간을 사랑하는데 이바지하려는 선하고 자연스런 소질을 가려버린다. 그래서 투쟁해야 할 대상은 문화 전체이며 그 사회 전체이다. 이 모든 것은 악이다. 그래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이 자연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이다.’라고 한 칼뱅주의자(calvinist)나 루소(rousseau)의 계몽주의啓蒙主義는 미국의 독립 전쟁에 힘을 가해주고, 나아가 로크(locke)의 사상을 전재로 한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가들에게 하나님도 없고, 주인도 없으며 그러므로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상과 인간만을 만물의 척도로 보는 인본주의 사상을 주지시켜 프랑스 혁명을 완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얻어진 미국의 독립은,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므로 생명, 자유 및 행복을 추구한다’라는 독립선언문을 만들었고, ‘프랑스 구제도의 모순에 대한 혁명도 인간은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 당대에는 기생 이외에도 도사道士라는 특수한 신분이 있었다. 시대가 어지러워 민심이 동요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유교 예법에서 벗어나 불교나 도교 등에 귀의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승려나 도사가 생겨났다. 그것이 유일한 피난의 수단이 된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속박과 법망을 피해 비교적 자유롭고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충실히 수도에 임하며 종교 계율을 엄수하는 불가佛家나 도가道家의 수도자들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극소수의 여인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대체로 개방적이었던 당대의 특수한 역사와 사회적 조건 덕분에 일종의 새로운 부녀자 계층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기생 혹은 도사라는 평범하지 않은 신분을 가진 소외계층의 여인들이었다. 남성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적인 소양을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당대의 기생들은 언변에 능하고 시를 잘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모는 그 다음이었다.

 

 당대에 있어 남성 못지않게 여류 시인들의 활약도 대단했다. 하지만 그들의 지위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는 오로지 남편을 위하여 희생과 충성을 다해야만 칭송을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무죄였고 만약 아내가 남편을 때리면 1년 동안 노역을 시킬 정도로 불합리한 구조였다. 그러므로 여기 이 세 여인은 기생 혹은 도사라는 신분으로 특수한 인생을 살았음이 분명하다. 신분 탓인지 생몰연대도 정확하지 않고 비참한 삶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온다. 여인으로서 일반적인 가정생활을 하지 못한 것이 어찌 보면 불행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적 재능은 그대로 작품으로 남았다. 그들이 남긴 처절한 삶의 대가라고 할까. 오로지 삶의 무게와 깊이를 시에 의존했던 것일까. 여하튼 중국의 여류문학 사상 길이 남을 만한 명작이므로 이들의 시세계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Ⅱ.

 이야李冶의 자는 계란季蘭이며 중국절강성 서북에 있는 오흥吳興 출신으로 천보天寶 연간(742)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망년도는 대략 784년이라고 전한다. 어려서부터 거문고를 잘 타고 미모가 뛰어났으며 시적 재능도 뛰어나, 5~6세 어느 날 부친이 이야를 안고 있었는데, 뜻밖에 시를 읊조렸다는 것이다.…때가 지나도/채워지지 않는 바구니/이내 마음/어지럽기만 하다(經未架却 心緖亂縱橫)…「장미를 읊다(詠薔薇)」라는 것이었다. 대번에 놀랜 부친은 부녀자답지 못한 행동이라며 내심 출가시키려고 결심을 했으나 이야는 가정에 매이는 것이 싫었다. 그 당시로서는 유교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도교道敎의 여도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야는 스스로 그 길을 택했다.

 

 도교는 황제黃帝, 노자老子를 교조로 하는 중국의 다신적 종교이다. 무위無爲 자연을 주지主旨로 하는 노장철학老莊哲學의 류를 받들어, 음양오행설과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가미加味하여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술을 구하고, 부주符呪, 기도 등을 행한다. 이러한 도교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을 일컬어 ‘도사’라고 한다. 이야는 도교를 구실삼아 도사가 된 뒤에 여러 남성들과 접촉하면서 자유 분망한 생활을 시작했다. 여성이라는 속박과 유교라는 관습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보다 자유롭고 당당해 보이고 싶었을까. 아니면 애욕의 화신이 되어 방탕하길 작심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관습을 거부하고 모든 속박에서 일탈하고 싶었을까.

 

 가까이했던 고중무高仲武라는 남성은 이야를 평하길, ‘선비에게는 백 가지 행실이 있고, 여인에게는 오직 네 가지 덕이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계란[이야]은 그렇지 못하다. 겉모습은 웅장한 듯하나, 쓴 시는 방탕할 뿐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야의 품행이 시에 비하여 미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생각이 남성을 뛰어넘었던 것일까. 사덕四德, 즉 부덕婦德, 부용婦容, 부언婦言, 부공婦工을 지키지 못한 여인. 이야와 친했던 남자는 육우陸羽와 유장경劉長卿이었다. 육우는 차를 무척 좋아해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다선茶仙’이라고 불렀으며, 그가 다경茶經』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야가 생활에 어려움이 있거나 병들어 누웠을 때마다, 이야를 찾아갔던 사람이 바로 육우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유장경은 이야를 가리켜, ‘여류시인 중의 호걸이다(女中詩豪)’라며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들 사이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여러 문사들이 모인 연회가 열렸다. 당시 유장경이 몹쓸 병에 걸려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이야가 먼저 운을 띄웠다. ‘산 기운은 해질 무렵이 아름다운가요(山氣日夕佳)?’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장경이 이를 받아, ‘온갖 새들이 기탁할 곳이 있어 기뻐한다네(衆鳥欣有托).’라고 답했다. 그러자 좌중에 있던 문사들이 박장대소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고 받은 두 구절은 모두 도연명陶淵明(365~427, 진나라 시인)의 각각 다른 시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엄격한 사회에서 여성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남성들과 어울릴 수 있는 배짱과 즉흥적인 시흥詩興이 얼마나 호방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되자, 이야의 명성이 널리 펴져 궁궐에까지 알려졌다. 궁궐에 들어가서 후한 대접도 받았다. 그러나 이야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을 남겼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 반란군에 잡혀갔다는 설도 있다. 이 반란은 당나라 현종 말엽에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천보 14년(755) 안록산이 먼저 군대를 일으키고, 사사명이 이를 계승하여 숙종肅宗의 광덕원년廣德元年에 사사명의 아들, 조의朝義가 죽을 때까지 전후 9년간이나 계속된 중국 역사상 유명한 큰 반란이었다. 현종은 촉나라에 망명하여 퇴위하고, 반란군도 내부 분열을 일으켜, 763년에 평정되었다. 이로써 당의 중앙집권제는 파탄에 빠졌고, 중국 고대사회의 종말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야가 이때 반란군의 장수에게 시를 지어 올린 것이 발각되어 덕종德宗에 의해 매 맞아죽었다고 한다. 사실여부를 떠나 참으로 기구한 종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이야가 남긴 시 가운데 5편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리움, 그리고 원망 (상사원相思怨)

 

人道海水深 不抵相思半

海水尙有涯 相思渺無畔

携琴上高樓 樓虛月華滿

彈著相思曲 弦腸一時斷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고 말하지만

내 그리움은 반에도 미치지 못하리

바닷물은 끝이라도 있을진대

내 그리움은 까마득히 끝도 없구나

거문고 옆에 끼고 누각에 오르니

누각에는 외로운 달빛만이 가득 하구나.

상사곡을 켜노라니

애타는 간장은 한순간에 끊어지구나    

 

 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한없이 뻗어 나가, 그 깊이와 넓이가 바다보다도 더 막막해옴에 전율한다. 이야의 사모의 정은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무한성을 지향하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불가항력不可抗力, 형언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사로잡힌다. 모든 것이 그리움에 압도되어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야는 가슴 가득한 그리움의 속앓이를 하면서도 그 그리움의 울타리에 갇혀있다. 마침내…거문고를 옆에 끼고 누각에 올라…주체할 수 없는 심경을 달래려고 한다. 하지만 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지우기는커녕 되레 달빛은 더욱더 외로움만 북돋울 뿐 천지가 공허하게 느껴진다. 인용한 시에서는 이야는 그리움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는 무엇 하나 감내할 수없이 몸부림친다. 임에게 의탁할 수  없는 그녀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임에게 기대고 싶어도 기댈 수 없는, 사랑받고 싶어도 사랑받을 수 없는 심화心火. 임을 그리워하는 나머지 생긴 화풍병花風病,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상사곡을 연주해 보지만 애간장만 태운다. 오지 않는 임이 정녕 이야의 임인가. 이 시는 이러한 그리움과 원망이 축을 이루고 있다. 극도의 사랑이 극도의 증오가 된다. 사랑의 늪에 빠진 여인의 일편단심이 전편에 흐르고 측민惻憫의 정을 자아내는 힘, 즉 파토스(pathos)가 아주 굵게 역동하고 있다. 그리고 측은지심이나 연민이나 공감적 비애를 자아내는 정황을 짜임새 있게 묘사하고 있어 애상감哀傷感을 더해준다.

 

부부 (팔지八至)

 

至近至遠東西 至深至淺淸溪

至高至明日月 至親至蔬夫妻

 

지극히 가깝고도 멀기 만한

동쪽과 서쪽이여

지극히 깊고도 얕은

푸른 계곡이여

지극히 친하고도 소원한

부부관계여

 

 위 시는 부부관계를 간단명료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1행 6언 4행으로 구성된 이 시는 ‘至(이를 지)’가 8자가 들어 있어 시제詩題를 ‘팔지八至’라고 한다. 부부는 촌수가 없는 남남이면서 특별하고 친밀한 이성異姓 관계로서, 낯익은 것 같으면서 낯설고, 속이 깊은 것 같으면서 얕고, 높은 것 같으면서 밝고, 다정한 것 같으면서 소원한 관계임을, 가까움과 멈, 깊음과 얕음, 친함과 소원함으로 매우 역설적이고 상대적이며 모순적인 상극 관계를 비유하고 있다. 이 시의 밑그림은 부부의 사랑을 막연하게 가깝고 깊고 높고 밝고 친한 것 같이 긍정으로 부각시킨 것이 아니라, 되레 멀고 얕고 소원한 것 같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마치 부부의 사랑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 한 심상을 내비치고 있다.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못하는 이야의 자격지심自激之心에서랄까. 다소 빈축이 엿보인다.

 

달밤의 이별 (명월야유별明月夜留別)

 

離人無語月無聲 明月有光人有情

別後相思人似月 雲間水上到層城

 

떠난 사람은 말이 없고

달은 소리가 없건만

밝은 달엔 빛이 있고

사람에겐 정이 있습니다

이별 뒤엔 임 생각이

달과 같건만

물 건너 구름을 뚫고

하늘에 이르렵니다.

                           *층성層城 : 곤륜산崑崙山의 정상, 즉 하늘을 뜻함. 

 

 현대적 시각에서 이 시는, 시인의 삶과 사실들과 은밀한 경험을 다룬 서정시의 한 유형인 고백시(confessional poetry)이다. 고백 시인은 자기 자신에 관한 충격적인, 또는 임상적인 세부사항을 부끄러움 없이 솔직 담백하게 털어 놓는다. 시의 주제는 형상화된 중심사상이요, 그 의미를 뜻한다. 그러므로 주제는 시를 벗어나 존재하지 않는 불가결한 것이다. 인용한 시의 주제는 석별의 정이다. 유난히 달이 밝은 밤, 이별을 서두르는 사람은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임에 대한 여운은 애달프다. ‘밝은 달빛’과 ‘사람의 정’을 빗대면서 강력한 효과의 압축 은유로 이미지를 확장시킨다. 언제 만날지 기약 없는 이별이기에 더욱 간절한 마음은 달이 되어 임 계신 곳 어디인지 그리움으로 뒤덮고 싶은 심정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아마 이야는 지금도 달이 되어 밤마다 임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봄날의 회한 (춘규원春閨怨)

 

百尺井樓上 數株桃己紅

念君遼海北 抛妾宋家東

 

백 척 난간 위에

붉게 물든 복사꽃

아득한 북녘의 임 그리는 신세

홀로

버려진 몸이로다.     

                    * 요해북遼海北 : 요해, 요동의 남쪽으로, 먼 북방.

                    * 송가동宋家東 : 이야 자신을 초사의 대가인 송옥에게 버러진 여인에 비유.

 

 봄이 되어 누각에 오른다. 여러 그루의 복숭아 나뭇가지엔 어느새 붉은 복사꽃이 사방에 가득한데 떠난 임은 소식이 없다. 봄이 되니 임 생각이 간절하다. 고독한 외톨이, 임에게 버림받은 신세가 아닌가 하면서 한탄하고 있다. 특히 이 시에서 종결 부분이 ‘송가동’이란 표현은 예사롭지 않다. 이야 자신이 마치 송옥宋玉(BC290?~222?, 기원전 3세기 중국 전국戰國시대말, 楚의 문인, 작품형식, 내용 모두 굴원의 계승자로 불린다.)에게 버림받은 여인에 비유하고 있다. 일종의 패러디(parody)이다. 기교로 치면 상당한 기교인 셈이다. 여하튼 이야는 적어도 이 시에서는 자신보다 1천 년여 전의 시인이었던 송옥에게 버림받은 여인에 비유하여 처량한 신세를 읊고 있다.

 

버들 (류)

 

最愛纖纖曲水濱 夕陽移洞過靑

東風又染一年線 楚客更傷千里春

低葉己藏依岸櫂 高枝應閉上樓人

舞腰慙重煙光老 散作飛錦翠裀

                          * 청빈靑? : 부평초.

                          * 연광煙光 : 좋은 시절의 아름다운 경치를 뜻함.

 

연하디 연한 사랑스런 버들가지

굽이도는 물가로 늘어지고

석양으로 옮겨진 그림자

부평초 사이로 지나간다

동풍은 다시 한 해의

푸름을 물들여 주고

초객은 아득한 봄에 더욱 서글퍼진다

바닥의 잎새들은

물가의 노를 숨겨주고

높은 가지는

누각 위의 사람마저 가리운다

가늘고 연한 버들가지도 굵어만 가고

아름다웠던 시절도 다 지나가는데

흩어져 날린 솜

비단자락을 휘감아 도누나 

 

 여인의 가는 허리의 아름다움을, 그 하늘거림을 버들가지에 빗대어 ‘세류미細柳美’라고 일컬었던가. 푸른 버들가지가 가는 허리를 뽐내며 물결 위에 미풍에 살랑거린다. 그처럼 싱그러운 자태로 젊음을 자랑이라도 하듯, 한때 이야도 많은 남성을 두루 차지하면서 당당했었다. 하지만 가는 세월 무엇으로 막으랴. 회한과 탄식만 가득하다. 이야는 쇠락해진 자신의 늙음을 버들가지에 빗대어 비관하면서 읊은 시다. ‘석양으로 옮겨진 그림자’에서 이미 절망의 늪에 빠진 비극적인 처지를 형상화하고 현실적 상황을 ‘부평초’ 같은 삶, 의지할 데 없는 절대고독을 표출하고 있다. 동부새[東風]가 불어와 산과 들은 모두 푸름으로 물들었지만 옛 초나라의 나그네처럼 외려 봄날은 아득하고 서글프다. 물가에 풀잎들은 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랐고 높은 가지는 이제 사람마저 업신여기는 듯 가린다.…버들가지도 굵어만 가고/아름다웠던 시절도 다 지나는데…에서처럼 시의 바탕이 온통 무채색이다. 절망이다. 세월을 원망한다. 초연하게 세월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탄식과 회한으로 자책한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갈망의 끈은 놓지 않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그대로 잘 드러내고 있다.

 

Ⅲ.

 인명사전에 설도薛濤(770~850)는 중국 당대의 명기名妓, 여류시인, 만년에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초당으로 유명한 성도成都 서쪽의 완화계浣花溪 근처에 은거, 그곳에서 많이 나는 양질의 종이에 붉은 빛깔로 부전附箋을 만들어 촉의 명사들과 시로 증답贈答했는데, 이런 식의 전지가 후세에 내려오면서 ‘설도전’으로 유명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설도에 대한 기록은 현재 부분적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의견이 분분하고 정확한 생몰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대략 대력大曆 연간(768 혹은 770)에 태어났고 대화大和 6년(832)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자면 거의 60세 이상을 산 것 같다. 설도의 자는 홍도洪度(혹은 弘度)이며 원적은 장안長安으로 되어 있다. 어려서 관리직에 있었던 부친을 따라 여러 곳으로 옮겨 살다가 부친이 일찍 사망하자, 의지할 곳이 없었던 설도는 16세에 관가의 기생이 되어 기적妓籍에 들어갔다. 설도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했다. 8세에 이미 시를 읊고 지울 줄 알았다. 시적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설도의 명성은 날로 유명해져 꽃을 찾는 벌들처럼 사방에서 남정네들, 특히 문인들이 몰려들었다.

 

 설도와 가깝게 문인들은 원진元?, 백거이白居易(772~846), 유우석劉禹錫(772~842), 왕건王建(768~830), 장적長籍 등이었고, 장수들은 위고韋皐, 고숭문高崇文, 무원형武元衡, 은문창殷文昌, 이덕유李德裕 등 20여 명이 넘었다. 서천 절도사였던 위고는 설도를 기생으로 인도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설도를 ‘여교서女校書’라 칭하며, ‘재색을 겸비한 여인’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원형은 설도의 시문의 재능을 높이 사서 ‘교서랑校書郞’이란 벼슬을 내려달라고 조정에 건의했지만 기생에게 벼슬을 줄 수 없다며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설도를 여교서고라 불렀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기생을 ‘교서’라 부르게 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설도의 미모에서랄까 시적 재능에서랄까, 그녀의 주변에는 많은 연인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리고 연가戀歌를 읊었다. 왕건은「설도에게(寄蜀中?濤校書)」라는 시를 통해…먼 곳 교변에 있는 여교서 설도/비파 꽃 안에서 문 닫아 걸고 살아가는가./재색을 겸비한 그대 이제는 보기 힘드니/봄바람 다스리는 자도 모두 그대만 못하구나(萬里橋邊女校書 枇杷花裏閉門居 掃眉才子干今小 管領春風總不如)…라고 하며 사모의 심정을 그렸다. 설도가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를 다했을까. 청대淸代 건강乾降 연간에 성도成都 통판通判 왕준汪雋(?)은 이 시를 벽도정?濤井의 돌비석에 새겼고, 그 비석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는 설도가 당시 대단한 여류시인이면서 명기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 아닐까. 원진 역시「설도에게(寄贈薛濤)」라는 시를 통해…임의 말 아름답기가/앵무새 입술을 훔친 듯하고/문장은 봉황의 털을/나눈 듯하다(言語巧倫鸚鵡舌 文章分得鳳凰毛)…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설도는 그런 원진에게 시를 보내어 정을 통했다. 원진보다 10여 살 연상의 여인. 설도가 원진을 만난 시기는 이미 중년의 나이를 넘긴 때였다. 특히 설도의 시 중에는 이별 노래의 연작이 대단히 유명하다. 수많은 남자들과의 짧은 만남, 그리움과 원망, 이별의 슬픔들이 여기에 녹아 있다.

 

 설도는 시를 지어 종이에 적어서 틈틈이 여러 연인들에게 보내곤 했다. 지극한 정성이 깃든 시를, 그 종이는 자신이 직접 만든 붉은 색종이였다. 그리고 당시 이 종이를 ‘설도전薛濤箋’이라고 부를 정도로 이름을 떨쳤다. 비록 비천한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자기 관리에 있어 충실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한 평생 가정을 가져 보지 못하고 혼자서 살다간 여인, 그러나 많은 문인이나 풍류객들과 시문을 주고 받으며 자유 분망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만년에는 기적妓籍에서 나와서 완화계에 은거하며 지내다가 여도사로 변하여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연인 중 마지막이었던 단문창이 설도의 묘를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설도의 생몰년대나 사적이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있음은 기생이라는 평범하지 못했던 비운의 결과가 아닐까. 지금도 성도에는 설도정이라는 우물이 있어서 이 우물에서는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붉은 종이, 설도전도 이 물로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설도의 시는 주로 남자들과의 음풍농월, 자유로운 사생활, 그런 반면에 신세 한탄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담고 있다.

 

봄날의 그리움 (춘망사사수春望詞四首)

 

花開不同賞 花落不同悲

欲間相思處 花開花落時

 

攬草結同心 將以遺知音

春愁正斷絶 春鳥復哀吟

 

風花日將老 佳期猶渺渺

不結同心人 空結同心草

 

那堪花滿枝 作兩相思

玉箸垂朝鏡 春風知不知

                     * 결동심結同心 : 중국 고대에 사람의 징표로 비단 띠를 허리에 두르는 것.

                     * 지음知音 : 자기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한 친구로 그리운 임을 뜻함.

                     * 옥저玉? : 옥으로 만든 젓가락으로 미인의 눈물에 비유.

 

꽃 피어도 함께 즐길 수 없으며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수 없어라

묻고 싶구나 어디에 계시는지

꽃 피고 꽃 지는 이 계절에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

임에게 전하려했던가

봄날 그리움을 이제는 접으려하니

저 꾀꼬리조차 서글피 지저귀는 구나

바람에 꽃은 시들고 또 시드는데

만날 기약은 아득하기만 하구나

임과 함께 사랑 나눌 수 없어

실없이 홀로 이 마음 달래본다

날마다 방울지는 쓰라린 눈물을

살랑대는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질게 추운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봄날을 맞이하여, 피고 지는 꽃을 바라보면서 사랑과 그리움의 정취를 읊은 시다. 예나 지금이나 시인들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사계 중에서도 특히 가을을 많이 읊었고 다음으로는 봄을 많이 읊었다. 가을은 주로 낙엽을 보면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삶의 유한성에 대한 우수와 고뇌를 읊었다면, 봄에는 인동忍冬 내지 염정과 그리움을 주로 읊었다. 설도는 이 시에서 그리움, 외로움, 회한, 실망, 비애 등 다양한 심경을 그렸다. 자연현상을 빌려, 봄날에 꽃이 피고 지고, 새가 지저귀고, 봄바람이 살랑대는 변화 속에 투영된 설렘이 기약 없이 떠난 임, 그리움의 대상과 아울러 절대고독을 고조시킨다. 이 시는 상당하게 감성에 빠져 있는 듯하다. 보들레르(1821~1867, 프랑스 시인, 소설가)의 말을 빌리자면, 아동과 회복기의 환자와 예술가가 공통적으로…‘사물에 대하여, 지극히 사소하게 보이는 것까지도, 생생하게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본다고 했다. 그래서 감성은 오관을 통해 사물의 체험을 생생하게 느끼는 데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서의 능력이라기보다 감각적 체험의 능력이다. 진정한 시인은 이성과 감성, 지성과 감각이 혼합된 심상을 지녀야 한다. 이 시는 지나친 감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만 비애만 증폭시킨다.

 

연못가 연정 (지상쌍조池上雙鳥)

 

雙樓綠池上 朝暮共飛還

更憶將雛日 同心蓮葉間

 

푸른 연못가

오리 한 쌍

아침저녁

함께 노닙니다

 

아기오리 탄생할 날

생각하고 생각하며

연꽃 사이에서

마음을 함께 합니다.

 

 연못가에서 노는 한 쌍의 정겨운 오리를 바라보며 자신의 외로움과 기생으로서의 앞날을 탄식하며 읊은 시다. 설도는 많은 남성을 상대하면서 지내던 신분이라, 오직 한 남자만 섬기며 살아가는 여염집 여성들과는 사뭇 다른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대수롭지 않은 미물들도 모두 제 짝을 이루는데 설도는 그렇지 못하다.…아침저녁/함께 노닙니다…에서는 부러움이 가득 찬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쌍의 오리보다 더 못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자탄하듯 후회가 서려있기도 하다. 물가에 오리도 보금자리를 틀고 제 새끼를 낳고 기를 수 있는 처지에 비해 설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님을 탄식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여느 부부들처럼 정녕 살가운 가정을 갖고 싶은 것이다.

 

 정상적인 인생살이는 결혼을 통하여서 생명과 삶의 구실을 실천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천도천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예기禮記』에,…‘혼례는 모든 문화와 예절의 근본’…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말하는 예는 내면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도리지만 설도에겐 먼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곤순坤順의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여성들을 부러워하는 심리가 밑그림으로 깔려 있다. 

 

능운사 (賦陵雲寺二首)

 

聞設凌雲寺裏苔 風高日近絶織埃

橫雲點染芙蓉壁 似待詩人寶月來

 

聞設凌雲寺裏花 飛空撓逐江斜

有時鎖得娥鏡 鏤出搖臺五色霞

                     * 능운사凌雲寺 : 사천성 樂山縣에 있는 절. 

                     * 상아0娥 : 달 혹은 달에 사는 선녀.

                     * 보월寶月 : 당 개원 때의 詩僧으로 無畏法師와 더불어 불경을 번역했다고 함.

                     * 요대搖臺 : 중국 신화에 나오는 곤륜산 위에 있는 단상. 그곳에서 신선이 살고 있으며 해와 달이 나온다고 함. 여기서는 능운사 달빛 아래 흩날리는 꽃을 형용하고 있음.

 

능운사의 이끼

센바람 따가운 햇살에

온갖 먼지 털어낸다

가로 놓인 구름

부용벽을 물들이고

시인 보월을

기다리는 듯하다

 

능운사의 꽃

하늘에 날아 비탈길 감아 돌아

강가로 달려 간다

때로는 달빛 거울

잡아 놓은 듯하고

하늘의 오색 무지개

새겨 놓은 듯하다   

 

 세월 속에 단아한 자태를 지니고 있는 능운사의 경내를 둘러보다가 임의 숨결을 느끼면서 읊은 시다. 능운사는 설도가 사모하는 장수, 위고가 완성한 절이다. 그래서 설도에게 있어 능운사는 예사로운 절이 아니다. 능운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임, 그 자체이다. 위고의 흔적 속에 그의 체취까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능운사의 이끼, 구름, 꽃, 달, 바람 등등은 영원히 버릴 수 없는, 아주 소중한 사랑의 일부이다. 그리움이고 기다림이며 속삭임이다.…때로는 달빛 거울/잡아 놓은 듯하고/하늘의 오색 무지개/새겨 놓은 듯하다…에서 설도는 능운사에 압도당했다. 그녀가 능운사를 대함은 곧 오매불망寤寐不忘, 그 꿈이 현실 같기 때문이다.

 

 비유比喩는 시인의 특수한 직관능력이다. 직관이 없이는 시를 쓸 수가 없듯이 그 직관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이미 부여받은 천부적 소질이다. 그리고 시에 있어 여타 기교는 여벌이다. 문법과 수사학修辭學을 파고든다고 모두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사학은 말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말을 꾸미는 방법에 불과하다. 그래서 수사학은 천재의 능력이 아니고 누구든지 배우면 터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시를 가르친다고 해서 시인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수사학적 비유는 명백한 유사성類似性을 근거로 하여 한 낱말을 다른 말로 대치代置하면 끝나는 것이지만, 시작 비유는 그러한 대치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낱말이 각각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의미의 배경이 그대로 강하게 느껴지도록 남아 있다. 시「능운사」는 이 점이 돋보이는 수작秀作이라고 하겠다.   

 

멀리 계신 임에게 (증원이수贈遠二首)

 

芙蓉新落獨山秋 錦字開緘到是愁

閨閣不知戎馬事 月高還上望夫樓

 

擾弱新蒲葉又齊 春深花落塞前溪

知君未轉秦關騎 月照千門掩袖啼

              * 금자錦字 : 비단에 짜 넣은 글씨로, 아내가 남편을 사모하여 띄우는 편지를 뜻함.

               * 융마戎馬 : 전쟁, 軍事.

               * 진개秦開 : 진나라의 관문을 뜻함. 이 시에서는 장안 일대를 듯함.

 

연꽃 피고 지니

촉산에 가을 젖어 들고

비단 편지 열어보니

온통 그리움뿐 입니다

아녀자

전장의 일, 알 수 없어

달 밝은 밤

망부루에 오릅니다

 

여린 부들 새싹

가지런히 돋아 오르고

봄 깊어 떨어진 꽃

앞개울을 막았습니다

임은 여직 변방에서

돌아올 수 없으니

달빛 가득 문에 비출 때

눈물로 옷소매만 적십니다

 

설도는 많은 남성을 임으로 삼았다. 그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게 되면 으레 붉은 색종이나 비단에 시를 지어 보내곤 했다. 여기서는 인용하지 않았지만, 설도의 시에 있어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연작시「이별노래, 十離詩十首」는 수많은 짧은 만남 속에서 이별이 설도의 생활이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는 원진元?에 대한 사랑을 그린 시다. 10가지의 소재로 10가지 이상의 비유로 간절함과 쓰라림으로 전율하고 있는 여인의 심중을 그렸다. 설도가 중년에 마난, 원진은 10 살이나 어린 연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나이를 뛰어넘어 절실한 사랑에 빠졌다.

 

 원진이 809년(元和 4년)에 지방의 감찰어사로 파견되었을 때, 설도를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원진은 조정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여러 곳으로 자리를 옮겨 다녔기에 둘은 이따금 만나곤 했다. 서로 이성에 대한 각별한 심정과 시를 주고받았다. 위 시는 설도가 많은 임들 중에 원진을 유달리 사랑했고, 그에게 보낸 시 중에서 가장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이다.…비단 편지 열어보니/온통 그리움뿐 입니다.…에서는 여직 참고 견디어온 그리움이 활화산의 마그마처럼 뜨겁게 용솟음치며,…달 밝은 밤/망부루에 오릅니다…그 외로움을 달래려고, 임을 기다리던 망루에 올라, 임을 향해 바라본다.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임은 오지 않는다.…봄 깊어 떨어진 꽃/개울을 막았습니다.…는 가까이하길 소망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음을, 탄식괴 체념으로 답답함을 대신한다.…달빛 가득 문에 비출 때/눈물로 옷소매만 적십니다…에서는 감정이 고조되어 눈물로 변한다. 이 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외로움의 한이 짙게 서려 있다. 

 

가을 샘 (추천秋泉)

 

冷色初澄一帶煙 函聲遙瀉十絲弦

長來枕上牽情思 不使愁人半夜眠

 

서늘한 빛 맑은 샘에

한 줄기 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열 줄 현의 그윽한 소리가

아득히 울려 퍼집니다.

 

베갯머리에 길게 드리운

한없는 그리움에

임 그리워

긴긴 밤 잠 못 이뤄 뒤척입니다

 

 쓸쓸한 가을밤, 끊임없이 솟아나는 맑은 샘,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설도는 또다시 외로움에 젖어든다. 샘에서는 서늘한 기온에 아랑곳하지 않고 , 마치 설도를 비웃기나 하듯, 수증기를 피운다. 허허한 심정을 지우기 위해 거문고를 키니, 그 소리마저 구슬프다. 잠자리에 들지만 머리맡엔 그리움만 가득하다. 도대체 임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외로움을 달랠 수 없는데. 잠을 청해도 그리움이 몸부림치게 만든다. 이 시는 설도 자신의 외롭고 허전한 심경을 ‘가을 샘’에 비유하여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긴긴 밤, 독수공방에 젖은 심경을 잘 드러내고 있다. 대개 시작에 있어 어떤 사물이나 상황도 본질적으로 어떤 정서의 공식이 아니라, 시인이 그 사물이나 상황을 표현하는 방식에 의해 그 정서적 의의와 효과를 얻는 것이 아닌가.     

 

Ⅳ.

 어현기魚玄機 역시 생몰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함통咸通 연간(844~868)으로 짧은 생애를 살다간 여류시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는 유미幼微, 별명은 혜란彗蘭인 어현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남달랐다. 그녀는 미천한 집안의 출신이 아니었으나, 일찍 이억李億의 소실로 들어갔다가 본부인과의 마찰로 인하여 결국 이억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리고 도교의 여도사가 되었다. 하지만 유명무실한 도가에 불과했다. 그리고 수도생활에 관심도 없었다. 다만 여러 문사들과 풍류객 등과 교분을 나누면서 자유 분망한 생활에 여념이 없었다.

 

 어현기는 많은 남성들 중에 특히 온정균溫庭筠(812~·870)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온정균은 이름은 기, 자는 비경飛卿이며 산서성山西城 출생이었다. 그가 여덟 번 팔짱을 끼면서 8운시 한 수씩 짓는다하여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온팔우溫八又’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화미염려華美艶麗한 만당晩唐 시풍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가사 창작에도 손을 댔다. ‘사’라 불리는 새로운 운문 양식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웃 여인에게 (증린녀贈隣女)

 

菓日遮羅袖 愁春瀨起粧

易求無價寶 難得有心郞

枕上潛垂淚 花間暗斷腸

自能窺宋玉 何必恨王昌

         * 송옥宋玉 :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굴원屈原과 더불어 초사의 대가로 꼽힘. 후대 사람들이 실의한 문사文士를 비유할 때에 종종 사용함.

         * 왕창王昌 : 당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임’을 상징하는 말로, 어느 시대 어떤 인물인지 불분명함.  

 

가려진 해 소맷자락 덮고

근심스런 봄날 게을리 일어나 단장해본다

귀한 보석도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마음에 드는 임은 만나기 어렵구나

 

베갯머리에 남몰래 흘린 눈물

꽃잎 사이 어둡게 드리운 서러움뿐

스스로 송옥을 넘겨다본 탓인지

어찌 임을 탓할 수 있겠는가

 

 이 시는 일명, ‘이억에게 부치는 시「기이억원외寄李億員外」’라고도 한다. 어현기가 이억(자는 子安)의 첩으로 살다가 이억의 본부인의 질투로 인하여 결국 버림을 받았다. 중국의 뿌리 깊은 사상 중에 아녀자가 질투를 하는 것은 시집온 아내라도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유교사상에서는 칠거죄악七去罪惡 중, ‘투기가 심하면 보낸다[妬去]’는 것이다. 삼종지도三從之道, 역시 남자는 양으로 보고 여자를 음으로 보는 사상을 바탕을 한 것이어서 남녀평등은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시대였다. 서양의 물질주의, 무력주의, 개인주의에 반하여 동양의 전통적 부녀관婦女觀이나 부녀도婦女道는 가족주의로 해석되었고 이를 우주의 도리道理, 즉 천도天道로 생활화를 강요한 것이었다.

 

 어현기는 불행한 여건에서 가정의 버림을 받아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자의든 타의든 도교의 여도사를 자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격한 가족주의 사회로부터 외톨이가 되어 자신의 처지를 자탄하는 시를 읊었다. 일찍이 초왕에게 버림받았던 송옥을 자신에 대칭시키고, 왕창이란 역사속의 연인을 이억에 대칭시켰다. 이렇게 사실적 비유로 차명借名한 기교야말로 현대의 여류시인들의 시보다 훨씬 앞선 기교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 시에 나타난 송옥은 시의 내용이나 형식이나 모든 면에서 굴원의 계승자로 불린다. 굴원(BC 343?~283?)은 중국 전국시대의 시인이다. 초회왕楚懷王, 경이왕頃裏王때, 벼슬을 하다가 참소를 당하여 방랑생활 뒤에, 멱라강(호남성 상음현)에 빠져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시는 대개 울분의 정이 넘쳐 고대문학 중에서 보기 드문 서정성抒情性을 내포하고 있다.

 

늦은 봄날, 벗에게 (모춘유감기우인暮春有感寄友人)

 

鶯語驚殘夢 輕粧改淚容

竹陰初月薄 江靜晩煙濃

濕觜衡泥燕 香鬚采蕊

無限思 吟罷亞枝松

                          * 아지송亞枝松 : 소나무 가지의 끝.

 

꾀꼬리 노랫소리 단꿈을 깨우고

살며시 분바르며 슬픈 얼굴 고쳤지

엷은 초승달에 대나무 그림자

고요한 강가 저녁연기 가득하고

촉촉한 부리 진흙 머금은 제비들

향기로운 꽃술에 꿀을 따는 벌들

쓸쓸히 한없는 생각에 빠져

소나무 가지만 흔들어보았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어김없이 봄의 정취를 접하면서, 새삼 세월의 무상함 속에 자신의 무료함을 대치시켜 읊은 시이다. 어현기의 눈에 비친 몸은 시작이고 분주한 계절이다.…꾀꼬리소리, 꿀을 따는 벌, 초승달, 대나무 그림자, 해질 무렵의 강변, 진흙 머금은 제비, 향기로운 꽃술, 등 모두가 제 일을 찾아서 힘차게 움직이는 데 유독 어현기만이 이렇다 할 소일거리가 없이 외로움을 탄다. 일종의 심리공황일까. 그러한 봄은 더더욱 심란해진다.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전율하고 있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이며 신프로이드파라고 불리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탐욕을 구성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 탐욕스러운 인물은 결코 충분히 가질 수는 없으며, 만족할 수가 없다. 공복감에 의한 육체의 생리적 욕구 충족으로 생겨나는 포만감과는 대조적으로 정신적 탐욕[가령 육체를 통해 만족될지라도 모든 탐욕은 정신이다.]의 충족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완전히 충족시켰다할지라도 그것이 극복해야 할 내적 공허감, 권태, 고독, 우울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인간 심리에 대하여 극복하기 어려움을 설명했다. 이 시에서도 그러한 불만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봄의 정취를 잘 그려내고 있다.    

 

가을밤의 원망 (추원秋怨)

 

自歎多情是足愁 澤當風月滿庭秋

洞房偏與更聲近 夜夜燈前欲白頭

 

정도 많고

근심도 많음을

스스로 탄식했더니

뜰 가득 불어오는

가을바람

달빛마저 처량하구나

 

방안 곳곳

임의 소리

스며있는 듯한데

밤마다

등불 앞에

흰머리만 느는 구나

      

 여름철 무성했던 푸름이 가을에 접어들어 나뭇잎 붉게 물들어 떨어지니, 사뭇 서늘해져 쓸쓸하다 못해 울적하다. 그래서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탄식한다. 그간에 바람처럼 스쳐간 많은 남성들에게 정을 주고 사랑을 나누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없다. 스산한 가을바람만 주위를 감돌고 달빛마저 차갑게 느껴지는 밤, 어현기의 가슴 속은 온통 고독과 한으로 가득해진다.…달빛마저 처량하구나.…는 절망적인 소외감, 견딜 수 없는 한계상황에 접어든 자신의 심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어현기는 이억에게 버림을 받아, 어쩔 수 없어 도교의 도사가 되었지만 애당초 수도생활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다. 오직 임에 대한 정념밖에 없었다.…방안 곳곳/당신의 소리/스며있는 듯한데…처럼 임의 체취가 그립다. 하지만 임은 보이지 않고 늙음만이 찾아든다.…밤마다/등불 앞에/흰머리만 느는 구나.…에서 세월 무상에 대한 절망과 초라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겨울밤, 그대에게 (동야기온비경冬夜寄溫飛卿)

 

若思搜詩燈下吟 不眠長夜寒衾

滿庭木葉愁風起 透幌紗惜月沈

疏散未閑終遂願 盛哀空見本來心

幽樓莫定梧桐處 暮雀啾啾空繞林

        * 온비경溫飛卿 : 온정균의 자字.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온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유명한 시인.  

         * 오동처梧桐處 : 오동나무가 자라는 곳, 즉 햇빛이 잘 드는 땅.

 

슬픈 생각 밀려와

등불 아래 시 한 수 읊조린다

긴긴 밤 잠 못 들고

차가운 이불 두렵기 만하여라

뜰에 가득한 낙엽

근심어린 바람에 일어나고

창문 사이 휘장에 비추어지는

애석한 달빛만이 침침 하구나

흐트러진 마음 한가롭지 못해도

끝내 소원 이루었어라

솟아났다 무너짐이 부질없음을

이제사 내 보았어라 

외로운 이곳 오동 깃든 따스한 곳

마음 정할 길 없어

짹짹거리는 저녁 새 소리만이

공허하게 수풀 사이로 맴 돈다

 

 어현기는 깊은 관계를 맺었던 온정균을 멀리 떠나보내면서 읊은 시이다. 온정균이 장안을 떠나 지방으로 부임되어 가자, 이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전했다고 한다. 온정균은 이상은李商隱(813~858)과 더불어 이름 난 시인이다. 이상은은 자는 의산義山이며, 하남河南출생이다. 시풍詩風이 정밀 화려하여, 송대宋代의 초기의 화려한 서곤체시西崑體詩의 기본이 되었다. 그의 시의 특징은 역사 사실을 빌려 시사時事를 풍자, 영탄詠嘆하였고, 영탄과 영물詠物의 형식으로 자신의 불우를 우의寓意하였으며 ‘무제無題’란 시체를 개발하여 순수한 애정과 실연의 고통을 승화시켰기에 중국 시가사詩歌史에 있어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상은처럼 온정균 역시 ‘사’라 불리는 새로운 운문양식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사고 있다. 온정균은 이상은보다 한 살이 맣은 동시대 두드러진 시인이다.

 

 어현기는 삭막한 겨울을 맞아 떠나간 온정균을 그리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외로움에 젖어있다. 그의 체온이 사라진 이부자리가 낯설고 무섭기까지 하다.…근심어린 바람에/…/애석한 달빛만 침침하구나.…에서 뼈저린 외로움을 토로한다. 무엇 하나 의탁할 것도 위로받을 것도 없는 황량한 공간, 어현기는 그 비정非情 속에 갇힌다. 어현기는 고독의 정점에서…마음 정할 길 없어…극심한 불안과 초조에 잠긴다. 임과 함께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자위하려고 하지만, 점점 상사병相思病은 깊어만 간다.      

 

반가운 임 소식 (문이단공수조회기증聞李端公垂釣回寄贈)

 

無限荷香染暑衣 阮郎何處弄船歸

自慙不及鴛鴦侶 猶得雙雙近釣磯

                 * 완랑阮郞 : 여기서는 이단공을 뜻함.  

 

한없는 연꽃향기

여름옷을 물들이고

임은 어느 곳에

배를 묶고 돌아 오셨나

 

원앙 같은 부부 인연

맺을 수 없음이 부끄러워

쌍쌍이 낚시터를

맴돌고 있구나

 

 앞서 인용한 어현기의 시 중에는 거개가 짙은 고독감과 소외감 그리고 한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나, 이 시는 반가움과 설레는 기쁨과 그리고 부끄러움이 뭉클하다. 애타게 기다렸던 임, 그는 어현기의 연인 중에 한 사람인 이영李?이었다. 이영은 장안 사람으로 시어사, 속칭 단공端公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어현기도 이야나 설도처럼 연인들이 많았다. 이영이 낚시터로 어현기에게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어린애처럼 마냥 설렌다.…한없는 연꽃향기/…/원앙같은 부부 인연…처럼 다감다정하지만 왠지 부끄러움마저 든다. 어현기는 이영에 대한 기다림과 흠모欽慕의 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Ⅴ.

 동서고금,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이며 동시에 가족의 한 사람인 동시에 국가와 세계의 한 구성원이다. 안타깝게도 근세기 이전엔 동양사상에 있어 여성은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기보다 단순한 씨받이에 불과했다. 암울한 시대를 살다간 세 여류 시인이 남긴 흔적은, 모두 한 맺힌 사랑의 여운뿐이다.

 

 고대 동양에서 이처럼 과격한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생겨나 많은 여성이 한 서린 일생을 보냈을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무제武帝(BC 141~87) 때, 어용학자 동중서董仲舒를 주목하게 된다. 광천廣川출신이며 호는 계암자桂巖子이다. 그는 춘추공양春秋公洋을 수학하여 하늘과 사람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했다. 무제는 동중서의 저서『춘추번로春秋繁露』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삼아, 과격한 남존여비 사상을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과격한 남존여비 사상은 공자의 인애仁愛 사상과도 어긋나는 점이 많았다. 인륜지도人倫之道의 근본, 즉 공자는 인간의 본성을 인으로 보았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사람다움이라는 뜻이다. 인을 행하는 방법은 효제孝悌로 나타나는데, 효는 어진 마음과 태도로 부모를 봉양하는 도리이고, 제는 어진 마음과 형제간에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교는 남성을 중심으로 한 도덕정치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정치의 표면에 여성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가정이나 부부를 소홀히 보진 않았다.『시경詩經』의 일부가 왕비의 덕을 칭송한 시라는 점에서 더욱 아이러니컬한 뉘앙스를 풍긴다.

 

 동중서는 노골적으로 남존여비 사상을 합리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이론을 주장했다. ‘귀한 것은 양이고 천한 것은 음이다.(貴陽而賤陰也)’라고 했으며, 또한 ‘장부는 비록 신분이 천해도 양적인 존재이고, 부인은 비록 신분이 고귀해도 음적인 존재다.(丈夫賤皆爲陽 婦人雖 貴皆爲陰)’라고 했다. 이렇듯이 가부장 중심의 가족제도가 확립됨에 따라 여성의 위치가 낮아지고 차츰 예속화된 제도가 악용되어 악한 사람들에 의해 굳어졌던 인습이었다. 굳이 동중서를 들추어 내지 않아도 중국에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남존여비 사상이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 있었다. 한자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기원전 10여 수세기의 은나라 때,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상용문자인 중국의 고유문자, 그 한자에서도 쉽사리 발견할 수가 있다. 몇 가지 그 예를 찾아보기로 하겠다.

 

 한자의 ‘여(계집 녀)’는 여자가 앉은 모양을 나타낸다. 그러나 소리와 뜻이, ‘너 여()’, ‘같을 여, 쫓을 여()’와 같다. 여기서 ‘계집녀는 좇을 여의 뜻, 남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좇는다.(女子如也 如男之敎也)’는 뜻이다. ‘모(어미 모)’는 여자의 젖무덤을 그린 문자다. 자식에게 젖을 먹여 키우는 사람의 뜻으로, ‘기를 목()’의 뜻과 소리가 같다. ‘부(아내 부)’는 여자가 손에 비를 들고 있는 모양을 나타낸 문자다. 그러나 소리와 뜻이, ‘복종할 복()’, ‘엎드릴 복()’과 같다. 아내는 어른에게 복종하고 섬김을 주로 한다(婦, 主服事人者也), ‘처(아내 처)’는, ‘여자는 손에 비를 들고 집안일을 다스린다(妻者齊也 治內職也).’는 뜻이다. 이렇듯이 태곳적에 불평등한 부녀의 계율이 숨어 있는 문자가 아직도 통용되고 있으니 결코 웃을 일은 아닌 듯하다.

 

 여도사였던 이야, 기생이었던 설도, 첩이 되어 살다가 버림받아 여도사가 되었던 어현기는 불행한 일생을 마쳤지만 그들이 남긴 시는 아직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지금까지 한시의 정형적인 5언 또는 7언으로 되어있는 세 사람의 많은 시 가운데 각각 다섯 편을 살펴보았다. 이들 시의 주제이자 공통분모는 무상한 계절의 변화와 그 속 화조월풍花鳥月風에 깃든 아주 특별한 외로움의 정한情恨이다. 이 정한의 질감은 겉보기엔 따스하고 부드러운 솜처럼 느껴지는 듯하지만, 실상은 차갑고 까칠까칠한 서리처럼 느껴진다. 이면에 숨어 있는 이미지는, 싸늘한 여심女心이 두껍게 깔려 있다.

 

 임(특정 또는 불특정)을 향해 손짓하며 전율하거나 절규하는 듯 한 애상감哀傷感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각자의 목소리로 연모의 심정을 자유로이 드러낸다. 더러는 우아함과 온화함을 담은 정감에 젖어 있으나 대개가 회색 바탕에다 먹물로 채색되어, 안전감과 정지감에서 벗어나 독자로 하여금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시가 그들 생활의 일부이고 삶, 그 자체여서 불안으로 인해 균형을 상실한 탓일까. 웃음보다 울음이,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사랑보다 원망이 그들의 일상이었을까. 겉으론 화려했을지 모르나 그들의 삶이 낭만적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비애悲哀였으리라. 외려 단기간의 자유로움과 활기 넘치는 의욕으로 인해 죽음을 자초했을지도 모른다. 맞아 죽었다는 이야나 처형을 당했다는 어현기, 설도의 말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 당시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하여 경직된 관습을 허물기 위해 몸부림쳤던 중국 초유의 여권주의자는, 이야, 설도 어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도 아니면 자신들의 의지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여성들이 아니었을까.

 

 루마니아의 소설가 게오르규(gheorghiu, 1916~1992)는 수차례 한국을 방문했었다. 그는 ‘한국찬가韓國讚歌’라는 글을 통해, ‘지상에서의 시인의 운명은-암에 걸린 조개의 운명-과 같은 것’이라고 전제하고서, ‘마치 암에 걸린 조개만이 진주眞珠를 만들 수 있듯이, 일생을 신음하며 고통 겪는 이가 바로 시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시인들에겐 의미심장한 것이다. 바닷가 모래밭에 수없이 많은 빈 조가비들이 모래톱에 널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모르긴 해도 그중에 극히 일부는 암에 걸려 속앓이를 하지 않았을까. 정상이 아닌 이상한 분비물의 결정체인 진주를, 찬란한 슬픔의 시를 품지 않았을까.

 

 소[牛]를 생각해 보자, 속앓이를 하면서도 성자마냥 조용한 소를, 담낭이나 담관膽管에 결석結石이 생겨 일어나는 병을…돌같이 단단한 고형물을…뜻하지 않게 담석증으로 고통을 받았던 소가 우황을 남기는 것처럼, 조개에서 진주 또는 소에서 우황의 성인成因이 심각한 아픔 속에서 잉태되었다면, 지금의 시인들은 얼마만큼의 고통 속에서 한 편, 아니 한 줄의 시를 성인하기 위해 전율하고 있는가. 아픔이 몽치고 굳어져 찬란한 구상球狀의 보물, 진주가 그처럼 아름답다면, 고뇌의 산물이자 정조의 결정체인 시는 적어도 목젖을 달래주는 정안수이거나 시대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시가 바로 시인의 보물이라면 시인은 모두 병들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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