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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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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것이 알고싶다] - 맑스는 워낙 기자였다... 댓글:  조회:3670  추천:0  2018-05-07
///중앙일보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고학력자·기자·애주가 마르크스의 개인사 영국 망명 미국신문 유럽특파원으로 일해 경제사정·질병 7자녀 중 4명 어려서 잃어   카를 마르크스(뒷줄 오른쪽)가 후원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뒷줄 왼쪽) 및 세 딸과 함께 망명지인 영국 런던에서 찍은 사진. 5일로 탄생 200주년을 맞은 마르크스주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1818~1883)는 철학자·경제학자·정치이론가·역사학자·사회학자로 과학적 사회주의의 문을 열었다. 블라디미르 레닌과 마오쩌둥 등이 그의 사상을 차용하면서 20세기를 뒤흔들었다. 세계 최대의 영토를 가진 소련과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중화인민공화국이 마르크스 사상을 이념적 토대로 삼았다.      미국 신문 유럽 특파원 마르크스 마르크스에게 유럽 특파원 자리를 주고 생활비를 벌게 해준 미국 신문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지면. 당시 20만 부를 발행해 세계 최대 부수를 자랑했다. 마르크스는 미국 독자를 위해 영어로 기사를 써서 보냈다. 마르크스는 혁명의 시대가 오기 전인 1883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거의 일평생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살았다. 일부 혁명 조직의 설립에 관여했지만 아무래도 그의 주 임무는 글쓰기였다. 1849년 6월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던 마르크스는 미국 신문인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30세이던 1848년부터 1862년까지 14년 동안 영어로 기사를 써서 보냈다. 그 사이 마르크스는 독일 쾰른에서 영국 런던으로 주거를 옮겼다.   이 신문은 당시 20만의 독자를 거느린 세계 최대 매체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유럽 특파원 마르크스에게 섭섭하지 않을 정도의 원고료를 줄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런던 망명 생활 초기에 그나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신문에서 받는 원고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 마르크스가 가장 많은 기사를 쓴 매체도 이 미국 신문이다. 이 기간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기명 기사 350건, 엥겔스 명의 기사 125건, 공동 집필 12건 등 모두 487건의 기사를 이 신문에 실었다. 주제도 노예제도, 제국주의, 혁명과 전쟁, 세계의 사회와 정치, 세계 경제와 금융 등 폭이 넓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등을 쓴 학자이자 저술가이면서 동시에 기자였다.      7자녀 중 세 딸만 성인까지 생존 마르크스의 큰딸 예니 카롤리네(왼쪽)와 둘째딸 예니 라우라의 1865년 모습. 마르크스의 원고료 수입은 상당액이 가족 부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부인 예니와 사이에 일곱 자녀를 뒀다. 가정적으로는 힘들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 온갖 고난이 계속돼 살아서 살아서 '무간도(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의 하나로 괴로움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되는 곳)'를 경험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녀 중 넷을 어려서 잃었고 세 딸만 성인까지 성장했다. 당시 높은 영아사망률을 생각하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19세기에만 해도 출산한 모든 자녀가 살아남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수중에 돈이 부족해 의사도 부르지 못하고 아이를 떠나보낸 일도 있었으니 부모로서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생전에 부인 및 딸 중 한 명을 자신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다. 마르크스의 부인 예니는 간암으로 투병하다 1881년 12월 숨졌다. 큰딸은 아버지 마르크스가 숨지기 두 달 전에 방광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런 불행을 연속으로 당하면서 마르크스는 심신이 쇠약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담배와 술도 육체가 허물어지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감기 등으로 코와 목의 점막에 염증이 생기는 카타르가 악화해 기관지염과 늑막염으로 번지면서 숨졌다. 마르크스의 장례식에는 둘째와 막내 딸, 그리고 평생 친구 엥겔스, 첫째와 둘째 사위, 독일 혁명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등 9~12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외로운 최후였다.     첫 딸 먼저 보내고 두 딸은 자살   자식은 누구에게도 살가운 존재다. 마르크스는 어려서 숨진 네 자녀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딸 세 사람만 성인까지 살아남았다. 이들은 모두 혁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모든 딸에게 부인의 이름인 예니(영어로 제니)를 붙였다. 첫째인 예니 카롤리네(영어 제니 캐롤라인, 1844~1883)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성인까지 성장해 1872년 프랑스 혁명가 샤를 롱게(1839~1903)와 결혼했다. 아버지의 글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등 활동을 하다 간암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인까지 성장한 마르크스의 세 딸 중 유일하게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이자 병으로 숨진 유일한 딸이다.   마르크스의 부인 예니의 1830년대 모습. 마르크스는 부인을 고향 트리어 최고의 미인이라고 말했다. 둘째 예니 라우라(영어 제니 로라, 1845~1911)는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성인까지 성장해 프랑스 혁명가이자 의사인 파울 라파르그(1842~1911)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해 활동하다가 1911년 부부 동반으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마르크스의 외손자인 장 롱게(1876~1938)는 프랑스 사회당원으로 활동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넷째 딸이자 여섯째 자녀인 예니 율리아 엘라아노르(제니 줄리아 엘레노어, 1855~1898)는 혁명가로 활동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엘레노어는 사회주의 활동가로 일하면서 동료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영국인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애블링(1849~1898)과 사귀었다. 하지만 애블링은 1897년 6월 엘레노어와 헤어지고 여배우 에바 프라이와 몰래 결혼했다. 그런데 자신에게 신장병이 발병하자 엘레노어에게 돌아갔다. 엘레노어는 애블링을 간호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4개월 뒤 애블링도 숨졌다. 애블링의 장례식에 동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가정부와 사이에 아들 출산설도 나머지 자녀는 성년까지 성장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의 첫아들인 셋째 에드가(1847~1855)는 브뤼셀에서 태어났는데 8살 때 런던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마르크스가 제대로 의사를 구할 수 없어 숨졌다는 주장이 있다. 마르크스의 처남 에드가의 이름을 땄다.    둘째 아들이자 넷째인 헨리 에드워드 가이(1849~1850)는 런던에서 태어나 유아 때 숨졌다. 집에서는 ‘귀도’라는 독일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모든 자녀는 런던에서 태어났다. 셋째 딸이자 다섯째인 예니 에벨리네 프란치스카(영어 제니 에블린 프랜시스, 1851~1852)도 유아 시절에 사망했다. 우유값도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굶어 죽은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도는 이유다.    마르크스의 일곱째 아이가 1857년 태어났지만 이름도 짓기 전 유아기에 사망했다. 마르크스의 막내였다. 인간적으로 이렇게 어려운 삶은 살면서 세상에 대한 증오가 생긴 게 아니냐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개인적인 처지와 무관하게 오래 전부터 철학·경제학을 연구하며 자신의 사상 체계를 닦아왔다.      마르크스의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 그가 1851년 낳은 아들 프레데릭이 마르크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는데 후견인 엥겔스는 자신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마르크스를 감쌌다. 진위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엥겔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마르크스의 독일 출신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1820~1890)가 1851년 출산한 프레데릭 루이스 데무트(1851~1929)가 마르크스의 자식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독신이던 엥겔스는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면서 친구인 마르크스를 감쌌다. 진위는 지금도 알 수 없다. 프레데릭은 야금공으로 살다 런던에서 사망했다. 평생 '예언자의 아들' 소리를 들었다.      자신은 맥주·포도주 마시며 토론 마르크스의 일생을 학자이자 저술가이자 기자였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을 살지는 않았다. 풍족하지는 못해도 기자로서의 수입과 엥겔스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품위는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포도주와 맥주를 좋아했고 친구들과 한잔 마시며 토론하기를 즐겼다. 아버지의 유산을 탐내기도 했다. 19세기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중산층 남성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저서는 그렇게 평범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그의 사생활이 아닌 저서와 주장으로 평가돼야 한다. 그의 저서와 주장을 입맛대로 해석하고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멋대로 도용한 수많은 후세인들이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불순물을 빼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마르크스(왼쪽)와 엥겔스의 동상.    23세에 철학박사 받은 고학력자 마르크스의 삶을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고학력자’다. 마르크스는 지금 기준으로 봐도 가방끈이 무척이나 길다. 17세에 대학에 들어가 23세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독일 서부 트리어 출신이다.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였던 트리어는 프로이센, 그리고 독일의 서쪽 끝이었다. 룩셈부르크와의 국경에서 10㎞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1835년 트리어에서 110㎞쯤 떨어진 도시인 본의 본 대학에 입학했으며 이듬해 당시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의 베를린 대학 법학부로 옮겼다. 마르크스가 법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아버지인 하인리히 마르크스(1777~1838년)의 영향 또는 요구 때문으로 보인다. 하인리히는 헤르셸 레비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마르크스의 할아버지인 마르크스 레비 모르데차이(1743~1804)는 유대인 성직자인 랍비였다. 할아버지의 랍비 자리는 마르크스의 백부에게 대물림됐다. 결혼 전 이름이 에바 리보프(1753~1823)였던 마르크스의 할머니는 결혼 전 이름으로 볼 때 우크라이나의 리보프에서 독일로 이주한 유대인의 후손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는 개신교로 개종한 유대인 변호사 헤르셸은 1814년 변호사 자격을 얻었지만, 이듬해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된 프로이센의 절대 왕정은 유대인이 법률가를 맡지 못하도록 했다. 프로이센 왕국은 1812년 3월 13일 칙령을 내려 유대인에게도 국적과 시민으로서 권리와 지위를 부여했다. 하지만 법률가는 유대인에게 한동안 허용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그에게 예외를 인정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지만, 프로이센 법무부는 이를 기각했다. 그러자 헤르셸은 1817~1818년 무렵에 이름을 독일식인 하인리히 마르크스로 바꾸고 종교도 유대교에서 개신교인 루터교로 개종했다.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1824~1825쯤 세례를 받고 개종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르크스도 유대인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 부친의 뜻에 따라 기독교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 서부 트리어의 브뤼켄 슈트라세 10번지에 있는 마르크스의 생가. 중산층 변호사였던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1층의 방 2개와 2층의 방 3개를 사용했다. 부친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마르크스는 23세 때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법률가가 되기를 바라는 부친의 뜻과 달리 철학에 관심을 쏟았다. 결국 1841년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210㎞ 떨어진 예나의 예나 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 차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3세 때의 일이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본에서 25㎞쯤 떨어진 쾰른에서 창간된 라인 신문에 기고하다 이 신문에서 일하게 됐으며 편집국장을 맡았다. 하지만 지역 주민의 여론에 맞춰 베를린의 중앙정부를 비난하는 논조를 유지하던 라인 신문은 1843년 3월 프로이센 당국의 검열과 탄압으로 폐간됐다.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 폐간을 맞아 자신을 프로메테우스로 묘사한 시사만평을 신문에 실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가혹한 언론 탄압을 계기로 마르크스는 혁명 없이도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지막 희망을 버린 것으로 분석된다. 그 뒤 그는 전제군주제를 타도할 수단은 혁명밖에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게 된다.     독일 쾰른에서 발행하던 라인 신문이 프로이센 왕국의 언론 탄압으로 발행이 중지될 처지가 되자 편집장인 마르크스는 이런 만평을 지면에 게재하게 했다. 마르크스 자신을 인간에게 불을 넘겨준 죄로 독수리에 심장을 쪼이는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로 묘사한 내용이다. 그전까지 개혁으로 입헌군주제 국가를 꿈꿨던 마르크스는 이를 계기로 혁명만이 전제군주제를 극복할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게된 것으로 보인다. 신문이 폐간되자 마르크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했다. 1843년 6월 19일 고향 트리어 출신으로 네 살 연상인 약혼녀 예니 폰 베스트팔렌(1814~1881)이 상대였다. 예니는 마르크스의 학교 동급생인 에드가 폰 베스트팔렌(1819~1890)의 누나였다. 마르크스는 아버지 친구의 딸이자, 자신의 친구 누나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836년 부모 몰래 약혼했으며 이듬해 예니의 아버지 루트비히 폰 베스트팔렌(1770~1842)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마르크스의 장인인 루트비히 폰 베스트팔렌은 남작에 해당하는 프로이센의 귀족으로 공직자였다. 자유주의적인 성향이던 루트비히는 마르크스의 아버지인 하인리히의 친구였다. 루트비히는 마르크스가 사위가 되기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어렸을 때부터 서로 잘 알았으며, 청소년 시기의 마르크스와 산책하며 철학과 영국 시를 주제로 대화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루트비히의 아버지이자 예니의 할아버지, 즉 마르크스의 처할아버지인 크리스티안 필립 하인리히 폰 베스트팔렌(1723~1792)은 프로이센이 강대국으로 부상한 7년전쟁 기간 동안 프로이센 육군원수였던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1721~1792)의 측근이었다.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은 당시 프로이센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림. 1712~1786년, 재위 1740~1786년)의 매제로 정부와 군대의 실세였다. 마르크스의 처할머니인 지니 위샤트(1742~1811)는 종교 문제로 독일로 망명한 스코틀랜드 귀족의 후손이다.    언론탄압으로 입헌군주제에서 혁명으로 돌아서 마르크스는 결혼 직후 부인을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사실상 망명이었다. 마르크스는 1844년 2월 파리에서 독불연보(Deutsch–Französische Jahrbücher)라는 매체를 창간했지만 단 1회만 내고 더는 발행하지 못했다. 독일로 몰래 들여가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1845년 2월 벨기에 브뤼셀로 이주한 마르크스는 1845년 7월 중순 영국 사회주의 활동가들인 차티스트 운동가들을 만나기 위해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영국을 방문했다. 엥겔스는 독일 방직 공장주의 아들로 아버지가 지분을 보유한 영국 맨체스터의 방직 공장에서 2년간 일한 적이 있어 영어가 가능했고 영국 사정에 밝았다.   마르크스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이 혁명의 열기에 사로잡혔던 1848년 4월 독일로 돌아가 쾰른으로 향했다. 그는 과거 일했던 라인 신문이라는 제호에 애정과 애착을 보였다. 그래서 1848년 6월 1일 라인 신문의 맥을 잇는 신라인신문(Neue Rheinische Zeitung)을 재창간했다. 급진적인 내용의 기사를 게재하면서 1849년 5월 19일까지 계속 발행했다. 하지만 혁명의 열기는 이내 반동적인 분위기로 돌아섰다.   마르크스는 1849년 6월 브뤼셀을 떠나 영국 런던으로 향했다. 영국에 망명한 마르크스는 1850년 1월 ‘신라인 신문-정치경제 리뷰(Neue Rheinische Zeitung: Politsch-ökonomische Revue)’라는 이름의 월간지를 창간했다. 영국 런던에서 편집하고 독일 함부르크에서 인쇄하는 형식이었다. 이 월간지는 6호를 내고 폐간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스스로 운영한 마지막 매체다. 이후 그는 미국 신문 특파원으로서 기사를 쓰면서 자신만의 저서를 쓰는 저술 작업에 몰두했다. 무간도에 살면서 쓴 마르크스의 저서들은 21세기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출처: 중앙일보] 『자본론』남긴 마르크스, 사생활은 거의 ‘무간도’였다
3    [이런저런] - 착오나 결점을 알고 제때에 시정하는것이 더 좋다 댓글:  조회:3977  추천:0  2018-05-07
중학 교과서용 한자 잘못 읽은 베이징대 총장의 사과문 [중앙일보]  2018.05.06    기자 신경진 기자 SNS 공유 및 댓글 SNS리      중국 최고 명문대학인 베이징대 린젠화(林建華) 총장이 지난 4일 열린 개교 120주년 기념식에서 중국 중학생용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인 홍곡(鴻鵠·큰 기러기와 고니)을 홍호(鴻浩)로 잘못 읽어 구설에 올랐다. 파문이 커지자 린 총장은 5일 베이징대 인트라넷에 사과문을 올려 학생 시절 경험한 극좌 정치투쟁인 문화대혁명(1966~76)으로 기초 어휘가 부족하다며 진솔하게 사과했다.  홍곡→홍호로 잘못 읽어 네티즌 비난 직면 문혁 탓에 기초 실력 낮다며 진솔하게 사과 린젠화 베이징대 총장    이번 사건은 지난 4일 베이징대 교정의 추더바(邱德拔) 체육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린 총장의 축사 초반에 벌어졌다. 린 총장은 지난 2일 베이징대를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당대 청년은 홍곡의 뜻을 세우고 분투하는 사람으로 전투 정신을 배양해야한다”는 발언을 인용했다. 그는 “베이징대 학생은 스스로 분발하고 홍곡(鴻鵠·중국식 발음 훙후[hónghú])의 뜻을 세워야한다”고 말할 시점에서 1~2초 가량 머뭇거린 뒤 “홍호(鴻浩·중국식 발음 훙하오[hónghào])”라고 읽어내려갔다. 린 총장은 연설 중 또한 “많은 학생”이란 뜻의 “신신학자(莘莘學子·선선쉐즈[shēnshēnxuézǐ])”까지 “근근학자(斤斤學子·진진쉐즈[jīnjīnxuézǐ])”로 잘못 읽었다. 그러자 중국 네티즌들은 ‘글자도 모르는 총장’이란 뜻의 “백자교장(白字校長)”란 별명을 붙이며 비난했고, 인터넷 쇼핑몰에는 “베이징대학, 홍호지지(鴻浩之志)”라 적힌 티셔츠까지 등장했다.             큰 기러기와 고니라는 뜻의 홍곡(鴻鵠)은 중국 중학생용 교과서에 나오는 기본 단어로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한자다.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중 ‘진섭세가(陳涉世家)’의 고사에 나온다. 진(秦)제국을 무너뜨리는 농민 반란을 주도한 진승(陳勝)이 같이 일하던 농부에게 “제비나 참새 따위가 큰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燕雀安知鴻鵠之志·연작안지홍곡지지)”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다.     5일 중국 베이징대 도서관 앞에 세워진 개교 120주년 기념 엠블럼에서 졸업생과 자녀가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신경진 기자]       반전은 다음날 일어났다. 린 총장이 교내 인트라넷인 미명(未名·베이징대 교정의 호수 이름) 게시판에 ‘동학에게 보내는 편지’를 올리면서다. 편지에서 린 총장은 “매우 미안하다. 개교 기념 행사 치사 중 홍곡의 발음을 잘못 읽었다”며 “솔직히 정말로 이 글자의 발음을 숙지하지 못했다. 이번에 배웠지만 비용이 무척 비싸다”고 한탄했다. 그는 초중 시절 문혁을 겪으며 정상적인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며 1977년 대학 입학고사에서 어휘와 어법에서 20점을 맞았지만 운이 좋아 베이징대에 합격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사과 편지를 쓴 목적은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고자 함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알리고 싶어서라고 적었다. 문혁 10년 동안 베이징의 지식청년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낸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이 펼쳐졌고 초·중·고·대학 등 모든 교육 과정은 중지됐다.        린젠화 베이징대 총장의 축사 오독 파문 직후 중국 인터넷 쇼핑몰에 등장한 풍자 티셔츠. ‘홍곡지지’ 대신 ‘홍호지지’라는 글자가 북경대학이란 글자와 함께 인쇄했다. [사진=홍콩 명보]    린 총장의 해당 축사 영상은 파문이 커지자 중국의 각종 동영상 사이트와 소셜네트워크(SNS)에서 모두 삭제됐다. 하지만 6일 오후부터 문제된 발언이 편집돼 잘린 21분8초 분량의 연설 전체 영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린 총장은 1978년 베이징대 화학과에 입학해 1986년 베이징대 화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독일과 미국 등에서 박사후 과정을 마치고 93년부터 베이징대 화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2010년 충칭(重慶)대 총장에 취임한 뒤 2013년 시진핑 주석이 근무했던 저장(浙江)성의 명문대학인 저장대 총장을 거쳐 2015년 베이징대 총장에 취임했다.     후싱더우(胡星鬪) 베이징이공대 교수는 “지금의 베이징대는 옛날의 베이징대가 아니다”라며 “이런 저급한 잘못은 중국 지식분자의 문화적 소양의 단층과 시대의 비극을 반영한다. 1949년 전과 같이 박학하며 기품있는 학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며 개탄했다.           다음은 린젠화 총장의 사과문 전문           친애하는 동학 여러분  매우 미안합니다. 개교 기념 행사에서 축하 연설 중 ‘홍곡’의 발음을 잘못 읽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정말로 이 글자의 발음을 숙지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배웠지만, 비용은 확실히 무척 비싸네요.  이번 잘못이 많은 동학과 친구를 실망하게 했습니다. 베이징대 총장으로 어휘 기초가 이렇게 낮아서는 안 됩니다. 솔직히 내 문자 기초는 좋지 않습니다. 이번 잘못으로 이 문제가 폭로됐을 뿐입니다.  나의 초중 시절에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교육이 멈췄습니다. 시작된 몇 해 동안 교과서도 없었고 이후 교과서는 있었지만, 무척 단순했습니다. 내가 받은 기초 교육은 완전하지도 체계적이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네이멍구(內蒙古)의 수십 가구에 불과한 작은 농장에서 지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당시 불편함을 상상하기 어려울 겁니다. 농장은 도시에서 수십 ㎞ 떨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는 마차를 타고 온종일 나가야 할 정도로 멀었습니다. 당시는 지금 같이 발달한 인터넷도 없었고 책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최근 나는 『총장관념-대학의 개혁과 미래』란 책을 냈습니다. 책에서 당시 상황을 언급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됐을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수년간 교과서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마오쩌둥) 어록과 노삼편(老三篇·마오쩌둥의 저술 세 편으로 “배쑨을 기념하여”(纪念白求恩), “우공이산”(愚公移山),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爲人民服務)”)만 외우도록 했습니다. 배움에 대한 욕심이 가장 강렬하던 십 대에 다른 책은 없었습니다. 마오쩌둥 선집과 당시 간부 교육용 소비에트 사회주의 교과서만 반복해 읽었습니다. 중국 근현대사 지식도 처음에는 모두 마오쩌둥 선집과 주석에서 얻은 것입니다. 모순론과 실천론을 읽은 뒤 중학교 정치 과목에서 다른 한 편을 배웠을 뿐입니다.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되고 대립을 통일하고, 주요모순과 2차 모순 등, 이들 개념은 줄줄 외웠고 우리 세대의 사상과 관념에 깊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나는 운이 좋아 1977년 대입 어문 과목 중 작문에서 80점을 받았지만, 단어와 어법은 20점에 불과했습니다. 아니었다면 베이징대에 합격하지 못했을 겁니다. 시험 며칠 전에 어법 책 한 권을 읽고 주어와 서술어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어법 개념은 분명하지 않았고 대학 입학 뒤에야 영어를 배우며 무척 고생했습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에게 말하려는 점은 내 무지나 실수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진짜 나를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의 총장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며 결점이 있고 부족하며 잘못을 범한 사람입니다. 또 여러분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 언급한 책을 포함해 모두 내가 쓴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내용과 사상은 모두 여러분이 알아주길 바랍니다.  나는 노력하겠지만 이후 이런 잘못이 또 출현하지 않으리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문자 수련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내 나이의 사람은 짧은 시간 안에 문자 수준에서 큰 진보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진정 나를 실망하게 하고 부끄럽게 한 것은 나의 잘못에만 관심을 불러 치사를 통해 여러분께 알리려던 사상을 홀시하게 만든 것입니다. “간절함과 질의는 가치를 만들지 못합니다. 반대로 미래를 향한 걸음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걸음을 미래로 향하게 하는 것은 확고한 믿음, 현실에 직면할 용기와 미래와 직면할 행동입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총장 린젠화.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2    [동네방네] - 절친의 죽음을 아는 돼지 댓글:  조회:4558  추천:0  2018-05-07
'안녕 내 사랑'.. 절친의 죽음에 슬퍼하는 돼지 2018.05.03.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스팟이 두눈을 살며시 감은채, 먼저 세상을 떠난 신쳬를 애도하고 있다. 이별과 상실의 아픔에 대한 반응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어린 나이에 만난 '소울메이트'를 먼저 떠나보낸 돼지도 그 아픔은 마찬가지 였다. 현재 벨기에 아우벨 지역에 사는 돼지 스팟은 생후 8개월 때, 레이첼 보스 가족에게 입양됐다. 그리고 새 가정에서 조그만 새끼돼지 신쳬를 처음 만났다. 레이첼은 둘 사이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어린 나이에 입양돼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만난 스팟. 레이첼의 예상처럼, 이후 13년 동안 스팟과 신쳬는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목초지에서 풀을 뜯을 때도 햇볕 아래 누워 선탠을 즐길 때도 스팟은 신쳬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바짝 뒤따랐다. 어디든 항상 함께 였던 신쳬와 스팟. 스팟의 헌신은 신쳬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여전했다. 당시 신쳬는 심각한 골관절염을 앓고 있었는데, 증세가 심해져 보스 가족들은 ‘안락사’라는 힘든 결정을 내려야했다. 신쳬가 얼마나 고통 속에 있는지, 스팟이 신쳬 없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잘 알고 있었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해 10월 운명의 날은 결국 찾아왔고, 가족들은 신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담요로 신쳬의 몸을 감싸주었다. 신쳬 몸 주위에 밝은 색 꽃도 흩뿌렸다. 후에 소울메이트가 자신을 떠난 것을 뒤늦게 안 스팟은 언제나 그랬듯 신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스팟은 그저 신쳬 옆을 오랫동안 지키고 섰다. 자신의 얼굴을 신쳬의 몸에 올린 채 두 눈을 감았고, 신체의 얼굴에 코를 비벼댔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듯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코를 신쳬에게 가져다 대고 잠시 묵념하는 듯한 스팟. 스팟은 신쳬가 떠나고 나서 가족들과 애완견의 도움으로 아픔을 극복 중이다. 레이첼은 “처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 못하는 스팟을 보며 울음이 멎질 않았다. 그들은 항상 함께였다”며 슬퍼했다. 이어 “신쳬가 죽은 지 몇 주가 지났지만 스팟은 여전히 슬픔에 빠져있다. 명랑한 스팟으로 돌아오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는데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사진=더도도 //안정은 기자
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산림방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490  추천:0  2018-05-07
[슬라이드 포토] 강릉·삼척 대형 산불 1년..                          그래도 봄은 온다  2018.05.06.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6일로 대형 산불이 발생한 지 1년을 맞는 강원 강릉시 성산면의 한 야산이 죽음의 숲으로 변해 있다. 강릉 성산에서는 지난해 5월 6일 발생한 산불이 나흘 동안 계속되면서 울창했던 소나무 숲 252㏊가 숯덩이로 변했다.  6일로 대형 산불이 발생한 지 1년을 맞는 강원 강릉시 성산면의 한 야산에서 불에 탄 나무들을 베어내 옮기는 작업이 한창이다. 강릉과 삼척에서는 지난해 5월 6일 발생한 산불로 축구장 면적(0.714㏊)의 1천424배에 달하는 산림 1천17㏊가 잿더미로 변했다.  6일로 대형 산불이 발생한 지 1년을 맞는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의 한 야산에서 불에 탄 나무들을 베어내 옮기는 작업이 한창이다. 강릉과 삼척에서는 지난해 5월 6일 발생한 산불로 축구장 면적(0.714㏊)의 1천424배에 달하는 산림 1천17㏊가 잿더미로 변했다.  6일로 대형 산불이 발생한 지 1년을 맞은 강릉시 성산면의 한 야산에서 불에 타 죽은 소나무 주변으로 야생화들이 피어나고 있다. 강릉과 삼척에서는 지난해 5월 6일 발생한 산불로 축구장 면적(0.714㏊)의 1천424배에 달하는 산림 1천17㏊가 잿더미로 변했다.  6일로 대형 산불이 발생한 지 1년을 맞은 강릉시 성산면의 한 야산에서 어린나무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강릉과 삼척에서는 지난해 5월 6일 발생한 산불로 축구장 면적(0.714㏊)의 1천424배에 달하는 산림 1천17㏊가 잿더미로 변했다.  ☞ SBS뉴스 (SBS 뉴미디어부/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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