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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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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런저런] - 이미 결정된 "노벨상" 취소할 수 있다?... 없다!... 댓글:  조회:2828  추천:0  2017-10-10
 [앵커] ... ... ...이미 결정된 노벨상을 취소할 수는 있는 것인가… 논란은 이런 의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확인했습니다. 오대영 기자! 취소가 가능한가요? [기자] 불가능합니다. 저희가 노르웨이에 있는 노벨위원회에 전화해 확인해봤습니다. 위원회 산하의 노벨연구소는 "노벨상 취소나 박탈은 불가능하다. 노벨 유언과 재단 규정 어디에도 박탈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앵커] "불가능하다"고 아주 뚜렷하게 설명을 했군요. [기자] 구체적인 규정도 확인해봤습니다. 노벨 정관 10조는 "노벨위원회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노벨상의 권위를 유지하고,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의 소지를 막자는 취지입니다. 노벨평화상은 노르웨이에 있는 노벨 위원회에서 수상자를 결정합니다. 매년 수상 경력자와 분야별 전문가 수천 명에게 서한을 보내 추천을 받습니다. 최종 수상자는 총 5명의 위원이 다수결로 정합니다. 심사 내용은 50년간 봉인됩니다. [앵커] 최근에 미얀마에서는 아웅산 수지가 받았던 노벨평화상을 취소해달라는 청원이 일고 있던데, 이 역시도 취소가 불가능하겠군요. [기자] 그렇습니다. 노벨평화상의 첫 수상자가 1901년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117년 역사상 취소된 전례는 없습니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1991년 수상)는 로힝야족 학살을 방관했다는 이유로 인권운동가들로부터 박탈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2009년 수상)은 시리아 공습을 이유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1973년 수상)은 남미 지역 정치 억압 논란을 이유로 취소 청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원회는 "수상 전까지의 공로만 평가한다"며 불가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앵커] 물론 수사로 더 확인돼야 하겠습니다만, 현재까지 정황이 사실이라면 정부 기관이나 혹은 직원이 청원을 모의한 아주 보기 드문 일이군요. [기자] 수지나 오바마, 키신저의 경우는 사회운동가나 민간 단체에서 주도했던 청원입니다. 자국의 국가 기관이나 공무원이 노벨상 취소 운동에 개입한 사례는 지금까지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6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한 아이디어, 한 이미지를 갖고 써라... 댓글:  조회:1751  추천:0  2017-10-10
세계적 작가들이 전하는 글쓰기 조언 41개 ​​​​   1. 누구도 좋은 책을 읽으며 자살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책을 쓰면서는 많은 이들이 자살했다. (로버트 번)   2. 캐릭터가 스타일이다. 나쁘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캐릭터에선 좋은 스타일이 나올 수가 없다. (노먼 메일러)    3. 없애는 건, 남아 있는 걸 응축시킨다. (트레이시 세발리에)   4. 다른 출판물에서 익숙하게 본 비유나 직유, 상징을 절대 사용하지 마라. (조지 오웰)    5. 캐릭터는 작가가 창조하는 게 아니다. 원래 존재하고 있었는데, 발견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보웬)   6. 다 완성하기 전까진, 절대 이렇게 이렇게 쓸거야 남에게 말하지 마라. (마리오 푸조)   7. 우울하지 않으면, 당신은 진지한 작가가 될 수 없다. (커트 보네거트)   8. 언어 사용은 우리가 죽음과 침묵에 맞서 싸우게 할만한 유일한 것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    9. 영감이 찾아오길 기다려선 안된다. 몽둥이를 들고 그걸 쫓아가야 한다. (잭 런던)   10. 작가가 지켜야할 규율은 가만히 서서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는 것이다. (레이첼 카슨)   11. 글쓰기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형태의 정신분열증이다. (E.L. 독토로우)    12. 그 순간 나오는 생각을 적어라. 골똘히 짜내지 않은 생각들이 보통 가장 가치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   13. 내가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냐고? 지어낸다. 다 내 머리 속에서 나온다. (닐 가이먼)   14. 난 글을 쓸 때, 정확한 방향성을 가진 약간의 증오가 유용하다는 걸 발견했다. (앨리스 워커)   15. 너무 멀리 갈지 모를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T.S. 엘리어트)   16. 소설을 써야겠다면 써라. 하지만 돈을 버는 건 우연한 사고(accident)라고 생각해라. 보상은 쓰는 것 자체로부터 얻어라. (펄 벅)   17. 아마추어들이 영감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 프로들은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 (스티븐 킹)   18. 픽션의 문제점은 그게 너무 말이 된다는 점이다. 반면 현실은 결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앨더스 헉슬리)   19.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두려움이 '잘 해내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초월할 때, 비로소 일하기 시작한다.  (알랭 드 보통)    20. 저널리즘은 독자로 하여금 역사를 목격하게 하지만, 픽션은 독자로 하여금 역사를 살게 한다. (존 허시)   21. 난 항상 하나의 아이디어, 심지어 지루한 하나의 아이디어로부터 시작한다. 그건 내가 답을 갖고 있지 않은 질문이 된다. (토니 모리슨)   22. 좋은 작가가 되는 건 3%는 재능이고, 97%는 인터넷에 주의를 뺏기지 않는 것이다. (무명)   23. 재능은 싸구려다. 중요한 건 훈련이다.  (앙드레 드뷔)   24. 아이디어에 대해 큰 소리로 논의하는 건, 종종 그걸 완전히 죽이는 거라는 걸 발견했다. (조앤 K. 롤링)   25. 모든 이야기는 끝가지 계속 가면 죽음으로 끝난다. 그 사실을 숨기려 하는 자는 진정한 스토리텔러가 아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26. 테크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열정을 가져야 한다. 테크닉 그 자체는 수를 놓은 냄비받침대에 불과하다.  (레이먼드 챈들러)   27. 젊은 작가들을 쓰도록 독려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작가라는 생각은 못하게 해야 한다. (월러스 스테그너)    28. 썼을 때와 그걸 고칠 때 사이에 꽤 시간 간격을 둬라. (제이디 스미스)    29. 가능한 한 자주 글을 써라. 그게 출판될 거라는 생각으로가 아니라, 악기 연주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J.B. 프리슬리)   30. 매일 글을 써라. 강렬하게 독서해라. 그리고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보자. (레이 브래드버리)   31. 당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을 존중해라. 심지어 별볼일 없는 캐릭터까지도. 예술에선 실제 인생에서처럼, 모든 이들이 각자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사라 월터스)   32. 매우 일찍 일어나서 바로 일을 시작해라. 먼저 일하고, 씻는 건 나중에 해라. (W.H. 오든)   33. 명확하게 쓰는 사람들은 독자를 갖게 되고, 불명확하게 쓰는 사람들은 평론가를 갖게 된다. (알베르트 카뮈)    34. 의식은 편집자고, 무의식은 작가다. (스티브 마틴)    35. 글쓰기의 목적은 여러분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끄러워서 졸도하게 만드는 데 있다. (J.P. 돈리비)   36. 픽션은 거짓말이다. 좋은 픽션은 그 거짓말 속에 감춰진 진실이다. (스티븐 킹)    37. 핵심 감정(key emotion)을 발견해라. 이게 단편을 쓰기 위해서 알아야할 전부다. (스콧 피츠제랄드)   38. 자기 글을 가차 없이 대해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럴 것이다. (존 베리먼)   39. 내게 작가란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을 뜻한다. (수전 손택)   40. 좋은 작가란 기본적으로 스토리텔러다. 학자나 인류의 구원자가 아닌. (아이작 싱어)   41. 난 한 문장, 한 아이디어, 한 이미지를 갖고 시작한다. 그 이상으론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따라 간다. (데이빗 라비)   
5    "현대시는 암소, 하이퍼시는 암퇘지"... 댓글:  조회:2190  추천:0  2017-10-10
하이퍼시의 10대 촉구[ 1 ] 작성자: 최룡관   하이퍼시의 10대 촉구   하이퍼시는 모방이 아니라 변형과 생성을 촉구     2011년도 노벨문학상을 탄 시인이 있다. 그가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이다. 그의  시 을 보자.   오늘은 건물을 열지 않는 날 태양빛이 창유리로 밀려들어 책상표면을 덥힌다. 인간의 운명을 짊어질수 있을만큼 튼튼한 책상들   오늘 우리는 야외로 나와 , 길고 널직한 경사지에 선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도 있다. 해빛속에 서서 눈을 감으면, 서서히 앞으로 밀려가는 느낌을 가지리라   나는 좀처럼 바다로 내려오지 않지만, 오늘은 이곳 평화로운 등을 가진 큼직한 돌들과  자리를 함께 한다 돌들은 바다로부터 한걸음 한걸음 뒷걸음질쳐 여기에 와있다.          ㅡ 전문   에 음악이 있는것이 아니라 사물의 변형이 있으며 사물의 움직임이 있다 .나름대로 분석해 보자.   오늘은 건물을 열지 않는 날 태양빛이 창유리로 밀려들어 책상표면을 덥힌다. 인간의 운명을 짊어질수 있을만큼 튼튼한 책상들   건물은 은어이다. 책상표면도 은어이다. 책상들도 은어이다. 은어란 변형된 언어를 말하는것으로서 언어자체의 이미보다 다른 의미도 있다는 말이 되겠다. 제목이 이니까 이런 은어들은 어떤 악기를 가리키지 않을가 태양빛이 창유리로 밀려들어 했으니까 그것이 열지 않는 건물인지도 모른다. 그 건물은 책상이다. 인간의 운명을 짊어진 책상들, 가능하게 피아노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은 추측이다. 시는 변형된 언어들이기에 그것을 풀이해보는 재미로 읽어보는것이 아닐가. 그 풀이가 나름대로니까 틀려도 무방할것이다.   오늘 우리는 야외로 나와 , 길고 널직한 경사지에 선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도 있다. 해빛속에 서서 눈을 감으면, 서서히 앞으로 밀려가는 느낌을 가지리라   장소는 야외행사장이다. 길고 널직한 경사지다. 검은옷 입은 사람도 있단다. 검은옷 입은 사람은 누구를 가리킬가.  피아노리스트일가 아니면 음악연주의 지휘자일가 아니면 청자일가. 나는 해빛속에서 눈을 감는다. 서서히 앞으로 밀려간다. 왜 밀려갈가 음악소리가 그를 앞으로 밀고있는것이다. 그는 음악에  취해서 지금 꿈을 꾸고있는것이 아닌가. 한수의 시가 꿈이란 말이 진실임을 확인하는 제2련이다.   나는 좀처럼 바다로 내려오지 않지만, 오늘은 이곳 평화로운 등을 가진 큼직한 돌들과  자리를 함께 한다 돌들은 바다로부터 한걸음 한걸음 뒷걸음질쳐 여기에 와있다.   어쩌다가 바다로 왔다. 평화로운 등을 가진 큼직한 돌들과 함께 있다.  바다가 밀물이 되여 들어왔다가 썰물이 되여 나가서 생긴 돌들이 아니라 바다로부터 절로 뒤걸음질 쳐서 온 돌들이다. 역사유다. 돌들의 운동이 희한하다.이러고 보면 가 인지도 모른다. 돌들은 감격적으로 피아노연주를 경청하던 청자들일지도 모른다, 하이퍼시는 현실의 초월이라고 한다. 초월자체가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생산해 낸다. 그것을 시적현실이라고 한다. 에 나타난 모든 사물들은 음악에 대한 직접적인 사물들이 아니다. 음악을 감상하는 시인의 령혼속에서 산생된 사물들이다. 령혼에 의하여 산생된 사물들은 죄다 생성에 속하며 그 의식은 무의식에 속한다고 할수 있고 그렇게 씌여진 시는 하이퍼시다. 그 사물들은 모방으로 렬거된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의하여 생성된 변형물들이라겠다.은 음악가와 마찬가지로 기억과 회상이 아니라 변형과 새로운 사물의 산생이다. 음악가와 음악은 기억과 회상을 중시하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선률과 새로운 음악언어를 중시하는것이다.   계절의 숲에서 봄을 쪼아먹고 내 가슴에  보금 튼 사랑 알속에는 하늘과 태양 옹근 우주를 포개넣었다 까낳은것이 자유를 나르고 돛단배 바람따라 파도 가르는  갈피에 끼인 시간의 비늘들이  부서져 반짝이는 소리에 웬 사내가 해일 안고 세월의 잔등우로 걸어올 때 다윈이 여름을 부채질하면서 나에게 진화를 한잔 권한다.                 김파시 의 전문   에서는 하나의 사물이 련속적으로 묘사되는것이 아니라 두행이 멀다하게 새로운 사물이 나타나서 운동한다. 처음에는 사랑새가 태여나서 하늘과 태양과 옹근 우주를 포개넣은 알을 낳는다. 그담에는 자유를 나르는 깃이 나오고, 그담에는 바람을 따라서 파도를 가르는 돛단배가 나오고, 그담에는 파도의 갈피에 끼인 시간의 비늘들이 나오고, 그담에는 해일을 안은 사내애가 세월의 잔등위로 걸어가고, 그담에는 여름을 부채질하는 다윈이 나와서 진화를 한잔 권한다. 시는 여러가지 이미지들로 완성되고 있다. 문덕수는 하이퍼시의 한개내용을 한개의 단위(180쪽) 라고 하였다. 는 이런 단위가 여러개 있다. 단위와 단위사이는 련결인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불연속이다.   이제까지 우리의 적지 않는 사람들은 문학을 모방으로만 보았다.모방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쓰지만 하이퍼시는 사물의 형태나 모양을 변화시킨다.그것이 심상 이다.사물의 모양이나 형태를 변화시키면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둔갑하게 된다. 노벨상을 받은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 이나 김파시 를 읽으면 문학이 모방 이 아니라 변형이라는것이 증명되며 새로운 사물의 생성이라는것이  불보듯 뻔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한다 라는 제목을 달아본다.  모방과 변형은 완연히 다른 개념이다. 모방은 사물의 재현을 추구하고 변형은 사물의 생성을 추구한다고 하겠다. 모방은 어떤 의식의 해설이고 변형은 어떤 사물의 생성으로써 한 사물 리면에 가리워졌던 다른 사물을 독자앞에 나타나게 한다. 모방은 의식의  산물이고 변형은 무의식의 사물생산이다. 모방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의 제한을 받는 회억이지만 변형은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이다. 변형과 무의식은 자식과 부모의 관계인것 같다. 변형도 새로운 사물을 낳고 무의식도 새로운 사물을 낳는다. 변형은 무의식의 표현이고 무의식은 변형의 근본인것 같다.   2)    이란 말은 아리스토텔레스  (127쪽)으로부터나왔다.1500년전에 중국의 류협은 시는 심상에 의존한다고 하 였는데 실은 이 말이 변형이라는 언어와 다름없는 말이라고 할수있다. 무의식이란 언어는 지그문트프로이트로부터 나왔고, 변형은 조루즈 뒤메질에 의하여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구조주의의 대표적인물인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평한다. 라고.( (69쪽) 프랑수아 도스) 사물의 모양이나 형태를 변화시키는 변형이나 사물이 생성되는 장소인 무의식은 다가 상징을 생성하는것을 종지로 삼는다.  변형이나 무의식은 둘다 을 전제로 한다. 시인의 상상속에서 모든 윤리는 제로상태 즉영의 상태여야한다. 이나 에서처럼 언 어가 언어를 넘어서면서 한사물에서 그와 성질이  다른 사물이 생겨나게 하는것이 오늘의 주요한 시작법인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하이퍼시는 모방이 아니라 변형이자 생성이라고 생각된다. 인제 시에서 모방이라고 생각하는 일상적인 견해를 버리고, 그 자리에 변형이나 무의식이라는 관념을 수립할 때가 되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모방이란 관념ㅡ이 낡은 관념은 진작 시적작업에서 력사의 뒤안길에 사라져버린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변형이 현대시의 핵심적수법으로 된지도 100년이 넘었고,  무의식이 시의 핵심적인 근원으로 된지도 인제 반세기가 넘었다. 모방을 버리는것이 문학이나  시가 본질적으로 문학다운것이 되게 하는것이 아닐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변형과 무의식은 새로운 사물을 생성한다는 면에서, 상징에 도달한다는 면에서는 일맥상통한 개념이다.  변형은 하나의 생성으로도 만족할수 있지만 무의식은 여럿의 생성을 대상으로 한다. 변형이 하나의 생성으로 만족되였을 때는 단선구조로 된 현대시라고 할수 있지만  하이퍼시는 무의식으로 쓰는 시여서 단일체에 기대는것이  아니라 다양체에 기대개되는것이 근본이다.    3)    중국고대 5000년전에 이라는것이 있었다. 주역은 우리 고대문화일뿐만 아니라 철학이고 오늘에도 이 철학의 핵심은 여러방면으로 리용되고 있다. 주역이란 말은 여러가지 뜻이다.우리는 주(周)자를 두루주자라고 말하는데 사전을 보면 密,全,环,团结,合,至,循环,救济 등등으로 해석하고, 역(易)은 交换,更改,容易,平坦,轻视 등등으로 해석한다. 필자의 소견에 주역은 문자로써 우주의 생성원리를 말한것이라고 보아진다. 서로  자유롭게 변형되여 생성되며 의미를 전달하는것이 주역이라고 생각한다. 주역에는 무극이 있고, 태극이 있는데 태극은  음과 양으로 나뉘고, 음양의 작용에 의하여 사상이  생긴다고 한다. 상고시대 복희씨는 사상을 발전시켜 8괘로 만들고 감옥에 갇혀있던 주문왕은 8괘를 발전시켜 64괘로 만들었다고 한다.  주역에는 이어진 선
4    중국에서 유일하게 입선된 무용류 문화재 - "조선족농악무" 댓글:  조회:2761  추천:0  2017-10-10
연변, 문예강주로의 ‘룡트림’ 시작 (ZOGLO) 2017년10월10일  다년래 전통문화예술사업, 커다란 진보와 발전 이룩 연변은 문화자원이 풍부하고 선명한 민족특색과 독특한 지역특색을 갖고 있으며 다년래 전통문화예술사업이 커다란 진보와 발전을 이룩하며 문예강주로의 ‘룡트림’을 시작했다. 전 주 민족문화사업회의의 개최를 앞두고 지난 9월 28일부터 29일까지 이틀간 우리 주 문화예술사업의 선두주자로 뛰고 있는 주문련과 주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영화신문출판국, 연변가무단, 연변군중예술관 등 단위들과 연길관광집산센터유한회사를 찾아 우리 주 군중문화예술 정품창작 및 무형문화재 보호 상황에 대해 알아봤다.   주 문련 김욱일 비서장은 “지난 10년 동안 우리 주는 음악, 무용, 희극, 미술, 서예, 촬영, 민간문예, 곡예, 라지오방송예술, 문예리론 등 분야에서 눈에 띄는 발전을 안아왔다”고 말하면서 “특히 예술정품창작에 모를 박고 문예강주 건설에 박차를 가해왔으며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뤘다.”고 소개했다.   연변가무단의 은 건국 60돐 헌례작품으로 지난 2009년에 창작된 이래 전국 각지에서 근 100여차에 달하는 순회공연을 했으며 1800여만원의 경제효익을 올렸다. 대형조선족 창작가무극 은 2012년 국가대극원에서 성공적으로 상연되였으며 길림성을 대표해 제4차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 참가, 극목 금상 등 27개 상을 수상했다. 동시에 문화부 제14회 ‘문화우수극목상’ 및 ‘문화연출상’ 등 3가지 종목상을 수상했다.   연변군중예술관의 , 은 문화부 제16회 ‘뭇별상’을 수상했으며 이 중 는 ‘대지의 정-뭇별상 수상작품 전국순회공연’에 참가했으며 제1회 전국소수민족우수무용작품전시공연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연변가무단의 창극 은 중국조선족창극의 공백을 메운 작품으로서 제3회 중국소수민족 희극공연에서 ‘극목 금상’ 및 ‘우수연출상’ 등 7개 종목상을 수상했으며 요청을 받고 제5회 전국소수민족 곡예전시공연에 참가했다. 또한 최우수 신인상과 최우수 표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화극 은 우리 주 조선족우수화극의 공백을 메웠으며 화극 는 중국화극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으며 동시에 한어로 각색돼 전 주에서 ‘두가지 언어’로 상연됐다. 전국 10대 사회구역 모범-림송숙을 원형으로 한 사회주의핵심가치관을 주제로 한 화극 는 주내에서 21차례에 달하는 순회공연을 열었고 창극 은 제4회 전국소수민족희극공연에 참가했으며 아동극 , 화극 , 단막극 등 창작극들은 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대형 중국조선족창작무극 은 2016년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 참가해 종목금상과 최우수 무대미술상을 수상했으며 인터넷투표에서 근 150만에 달하는 투표수로 1위를 차지했다.   이외에도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의 , 도문시예술단의 , 돈화시예술단의 등 극목들은 에서 ‘전국 10대 우수전시상’을 수상했다.   한편, 최근 을 내놓아 각광받고 있는 연길관광집산센터유한회사는 연변에 표준성문화기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로 4년째 달리고 있으며 연변의 문화산업구축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대형 민족무극 은 화려한 무대효과, 배우들의 생동감 넘치는 연기 등으로 고전의 매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관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했다. 전영익 총경리에 따르면 회사는 또 향후 전국 순회공연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창작극도 준비 중에 있다.   최근년래, 우리 주는 민족특색을 뚜렷이 내세워 전면적으로 무형문화재 보호사업을 추진했는데 일정한 효과를 거뒀다. 주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영화신문출판국 형계파 부국장의 소개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 주에는 민간음악, 민간무용, 민간미술, 민속 등 10가지 부류의 300여개 무형문화재 항목을 수집했으며 기본적으로 전주 무형문화재 자원의 총량과 분포정황, 멸종위기에 처한 무형문화재, 각 부문 무형문화재 자원의 수량, 가치, 특색 및 전승발전 상황 등을 파악했다.   전 주에는 도합 국가급 명록 17개, 성급 명록 83개, 주급 명록 112개가 있으며 이 중 중국조선족농악무는 2009년 련합국 인류비물질문화재 대표명록에 편성, 중국에서 유일하게 입선된 무용류 항목이다.   또한 우리 주에서는 도합 134명의 주급 대표성 전승인을 명명했으며 이 중 국가급 대표성 전승인은 4명, 성급 대표성 전승인은 54명이다.   ///연변일보 박진화 기자
3    재외동포문학의 소중한 자산을 외연에 넓히고 장벽을 넘기... 댓글:  조회:2865  추천:0  2017-10-10
재외동포 문인에게 거는 노벨상 기대 (ZOGLO) 2017년10월10일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와 노벨상 메달.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올해의 노벨 문학상이 일본계 영국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은 우리나라 문단을 또다시 우울하게 했다. 노벨 문학상이 문화 국력을 재는 척도가 아니고, 문학 작품의 우열을 올림픽처럼 가릴 수 없지만, 수상자가 다름 아닌 일본인(계)이라는 사실은 100년 넘도록 한 명의 수상자도 내지 못한 한국인의 열패감을 더욱 자극한다. 부족한 번역 인프라와 척박한 독서 풍토 등 우리 문단의 해묵은 숙제도 새삼 거론되고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영국으로 건너간 이민 1.5세다.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영어로 작품을 써왔지만 원폭 투하 이후 일본의 풍경을 묘사한 '창백한 언덕풍경'이나 일제에 가담해 선동적 그림을 그린 노화가의 회고담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등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소설을 여러 편 발표했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프랑스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 폴란드 태생의 미국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 중국 출신의 프랑스 소설가 가오싱젠 등도 이민자로서 노벨상 수상작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나라 밖으로 눈을 돌리면 한국계 문인 가운데서도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명됐거나 노벨상감으로 손색이 없는 인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진 뒤 그의 책 판매가 급증했다. 지난 8일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별도의 판매대를 꾸며 놓았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재외동포 가운데 가장 먼저 세계 문단에 이름을 알린 인물은 강용흘(1903∼1972)이다. 그가 1931년 미국 뉴욕에서 발간한 장편 'The Grass Roof'(草堂·초당)는 한국인이 쓴 영문소설의 효시로 꼽힌다. 그에 앞서 독립운동가 서재필과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이 각각 1921년 'Hansu's Journey'(한수의 여행)와 1928년 'When I Was a Boy in Korea'(내가 어렸을 때)를 미국에서 발표했지만 문학적 요소가 부족한 회고록이어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넘겨주었다.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난 강용흘은 함남 함흥 영생중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상경해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해 12월 캐나다 선교사를 따라 캐나다로 건너간 뒤 미국 보스턴대에서 의학, 하버드대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뉴욕대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하고 틈틈이 동양 시를 영어로 번역하다가 1930년 '아시아 매거진' 1월호에 '초당'의 연재를 시작한 뒤 이듬해 책으로 펴냈다. '초당'은 강용흘의 출생부터 도미까지의 삶을 담은 자전적 소설로 한국의 아름다운 산하와 한국인의 소박한 삶이 일제의 침략 속에서 어떻게 황폐해졌는지를 폭로했다. 한국의 다양한 풍습과 함께 '황조가', '어부사시사' 등 한국의 옛 시와 현대시 90편을 소개하기도 했다. 뉴욕헤럴드트리뷴은 "가장 가치 있는 인간 기록"이라고 극찬하는가 하면 뉴리퍼블릭은 "잘못 알려진 한국 역사를 바로잡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치켜세우는 등 현지 유수 언론의 호평이 줄을 이었다. '초당'은 독일·프랑스·이탈리아·체코 등 10여 개국에서 번역 출판됐고 '금세기의 책'에도 뽑혔다. 한국인이 쓴 최초의 영문소설 '초당'의 표지.   그 뒤로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치며 '재미동포 문학의 아버지'로 불린 강용흘과 비슷한 길을 걸으며 독일 문단에 우뚝 선 인물이 이미륵(본명 이의경, 1899∼1950)이다. 황해도 해주 태생의 이미륵은 1917년 경성의전에 입학했다가 3·1운동에 가담해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자 1920년 독일로 망명했다. 뮌헨대에서 동물학을 전공해 1928년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소설가로 활동하며 뮌헨대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했다. 1934년 아시아인 최초로 구겐하임 창작기금을 받아 유럽 여행에 나선 강용흘이 이미륵을 만나 자신처럼 자전적 소설을 쓸 것을 권유했는데, 그 결과 1946년 탄생한 작품이 'Der Yalu Fliesst'(압록강은 흐른다)이다. 이 장편소설은 독일 교과서에 실렸고 영어와 한국어로도 번역됐다. 가장 먼저 노벨 문학상 물망에 올랐던 한국계 작가는 김은국(1932∼2009)이다. 함흥에서 출생한 그는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1947년 월남해 목포고를 졸업했다. 1950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통역장교로 복무한 뒤 1955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62년 아이오와대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때 발표한 작품을 1964년 개작해 펴낸 데뷔작이 'The Martyred'(순교자)다. 6·25 때 북한군 치하에서 순교하지 않고 살아남은 목사의 이야기를 소재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천착한 이 작품은 20주간 미국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는 등 평단의 찬사와 독자의 인기를 함께 누렸다. 5·16 군사정변을 다룬 'The Innocent'(죄 없는 사람)와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 'The Lost Names'(잃어버린 이름)도 그의 대표작이다. 재미동포 1.5세 소설가 이창래가 2015년 5월 1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데뷔 20주년 기념판 '영원한 이방인'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1995년 장편소설 'Native Speaker'(영원한 이방인)를 출간해 헤밍웨이문학상 등 6개 문학상을 휩쓸며 노벨상 단골 후보로 꼽혀온 재미동포 1.5세 이창래, 톨스토이문학상의 영예를 안은 카자흐스탄 고려인 2세 아나톨리 김,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에 빛나는 재일작가 유미리, 한국으로도 활동 무대를 넓힌 조선족 소설가 허련순 등도 한민족의 뿌리와 이주민의 정체성을 거주국 언어로 표현해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인류 보편적 감성에 좀 더 가깝게 다가서 있고 번역의 장벽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재외동포 문인 중에서 노벨 문학상의 주인공이 먼저 나올 가능성도 있다. 재외동포라고 해서 이주민 정체성을 담거나 디아스포라(이산)를 소재로 한 작품만 쓰라는 법은 없다. 이민자들도 세대가 내려갈수록 그에 관한 기억과 관심이 엷어져가고, 그들도 거주국에서 소수민족 작가로 분류되기보다 주류 문단에 속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도 비록 한국어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한국 문학의 외연을 넓히고 풍부하게 만드는 소중한 자산이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 이시구로의 붐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며 우리도 이를 계기로 재외동포 문학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보면 어떨까 제안해본다.
2    詩도 세로가로 이등분법(二等分)적 그늘과 양지로 표현해야... 댓글:  조회:2135  추천:0  2017-10-10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3) : 샤갈 Marc Chagall (1887~1985)   혼(魂)의 고향(故鄕)을 찾는 색채(色彩)의 대교향곡         푸른 서커스   1924년부터 샤갈은 서커스를 통하여 많은 그의 심중을 이야기하려는데 열중해 왔다. 그는 그 주제를 때로는 많은 팟슈로, 혹은 아크와틴트의 판 형식으로, 또 유화로 많은 경험을 했고, 또한 서커스는 그의 화면 공간을 그만큼 자유롭게 설정하는데 성공적인 주제이기도 했다. 그의 화면에는 이후 자주 선량하고 우수에 찬 눈이 등장하고, 또 물고기가 등장한다. 투명도가 높은 푸른색 속에 그가 항상 그려오던, 이미 그에겐 일상성을 지닌 여러 형상들이 물 속에 잠기듯 깔려 있다. 그리고 그 표면에는 빨강과 노랑, 초록들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푸른색과 대화를 하고 있다. 그는 이후, 이 몽상적이며 환상적인 랍소디 인블루에 의하여 연인들의 로맨스를 물들일 것이다.         검은 장갑을 낀 피앙세   6년 후 샤갈의 아내가 될 벨라 로젠펠드를 그린 초상 화이다. 이 해에 처음으로 벨라를 그때까지의 여자친구 테아의 소개에 의하여 알게 되어, 그의 영원한 반려자로의 한 여성상을 이 유태 여성으로부터 찾게 되고, 그 선택의 순간을 기념하기 한 초상화로 그려졌다. "돌연 나는 느꼈다. 내가 살아나갈 길은 테아와 함께 라는 것을! 벨라만이 내 아내라는 것을." 샤갈은 바로 전년에 테아를 모델로 한 를 거친 표현주의적 묘법에 의하여 그린 것이 있었으나, 그것을 청산하고 이 작품에서는 엄격하고 부드러운 감정이 서로 융화하듯 한, 샤갈의 독자적인 여성미 표현에 있어 최초의 기념할 만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까만 배경 앞에 하얀 의상, 그리고 까만 장갑의 대조에서 기품 있는 화면을 느끼게 된다.       시인 또는 3시 반   을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샤갈은 아폴리네르 와 친교를 맺게 되어, 아마 이 작품은 아리네를 그린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차츰 큐비즘의 영향에 깊이 들어간 작품으로, 특히 드로네나드 라 프레네 등과 같은 공통의 쾌적하고 간결한 포에지가 여기 흐르고 있다. 그러나, 화면을 단지 기하학적으로 통일된 분할만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입체파적인 분할은, 화면의 긴장과 운동감을 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응했을 뿐이라는 것을 분활 되지 않은 나머지 화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가운데 자리잡은 시인의 상념을 위하여, 비스듬히 넘어지는 술병과 테이블 아래로 흘러내리는 듯한 과일, 칼, 그리고 왼쪽에 앉은 고양이 등이 중앙을 향해 집중되어 있는 구도이다. 초록의 얼굴을 거꾸로 놓는 그 비극적 세계관은 정착되지 않은 곡예의 방랑하는 슬픔 같은 것일 게다.           병사와 촌 여자   이 작품은 1910년 샤갈이 파리에 도착하여 그 다음에 그린 작품이다. 이 무렵 그의 화제가 된 것은 거의가 향수에 젖은 그의 고향 이야기나 풍습 또는 사람들의 일상 생들이었다. 이렇게 상상력이나 기억력에 의존하여 제작을 했기 때문에 대상을 묘사적으로 표현하기보다 극단적인 데포 르마숑에 의한 환성적인 화면을 구축할 수 있었고, 독특한 그의 풍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파리에 서 그린 그러한 작품들 중에는 병사가 여자를 희롱하는 장면들이 더러 있는데,이 작품도 그 중 하나이다. 고향의 추상을 파고 들음으로써 화면의 공간을 하나의 추상공간으로 심리적 깊이를 더해 가려는 의도를 알아볼 수 있다. 전경의 인물이 취하고 있는 손의 모양과 함께 우스운 포즈의 무언극이라도 하는 모양, 뒤쪽에 뛰고 있는 인물과 함께 유머러스 한 화면을 만들고 있다.         아담과 이브   이 작품 샤갈의 작품 중에서 면을 가장 세분화한 작품 일 것이다. 당시 그는 벽에 세잔의 복제화를 몇 장이나 붙여 놓을 정도 세잔의 만년의 입체파의 모체가 된 조형 이념을 동경하였고 "우리들은 모두 세잔에서 출발했다."고 고백한 레제, 브라크에 가장 심취해 있었다. 일찍이 제작을 통해서 다양한 형태의 기하학적인 해체를 철저히 파고들려고 결의하고 있었던 것을 이 작품을 통해서 추측할 수가 있다. 이 작품은 형태가 그렇게 세분화되어도 유동적이고, 음상이 또렷 또렷한, 마치 바하의 토카타를 듣는 것처럼 장엄하다. 이러한 수법은 후일 렝스 성당이나 메쓰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에 되살아난다. 샤갈의 다른 작품에도 그러하지만, 인물의 표정에 있어서 음산한 면은 금단의 열매를 딴 악의 주 제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일곱 손가락의 자화상   이 작품의 부분적으로나마 처음으로 파리에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왼쪽 창밖에 거리와 에펠탑이 그려진 현실로의 파리와, 오른쪽 벽에는 회상으로서의 비테부스크를 나타내어 그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결합시키고 있다. 그가 그린 얼굴은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괴신(怪神)의 것으로, 그 현실성은 일곱 개의 손가락과 함께 조화되고 있다. "나무가 뜻밖에 엉뚱한 것으로 하고, 별안간 자신의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인데 왼 손이 일곱 손가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세계를 나는 극히 의적으로 구성하고 싶습니다."(E. Roditi와의 대화) 하지만 이 일곱 손가락은 누르고 있는 화포(畵布)속에 그려진 그림의 세계와 조화되며 다시 배경의 벽에 그려진 헤브라이 문자에 속하는 신기한 문명의 비밀과 조화되고 있다.         나와 마을   파리에 나온 샤갈이 처음엔 고갱의 원시적인 생명력에 감화를 받기도 하고, 고호의 정적인 표현 특성에 영향 받기도 했으나, 곧 입체파적인 화면 분할기가 시작되어 이 작품을 그린 해부터 3년간 그런 작업 계속된다. 이 작품도 그의 마음 속에 깊이 꿈 비틀거리고 있은 추상의 이미지를 원과 삼각, 사각형의 기하학적 구성을 통해서 평면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점은 그러한 화면 분할의 수법과, 나와 마을의 거리를 이렇게 친밀화시켜 보여주는 심정에 의한 또 다른 질서의 힘이다. 그 힘은 소와 나를 같은 원 속에 접근시켜 과거와 현의 나를 일체화시키며, 나의 얼굴빛을 푸른색으로 한 것은 후의 과 같이 물리적 중심과 다른 중심을 가진 별세계에 상응하게 하기 위한 필연의 변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문팔이   샤갈은 노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작품 테마로 많이 다루고 있다. 그것은 그 유년기에 흔히 마을에서 대하던 친척이나 이웃 노인들을 통하여 뭔가 인생을 이야기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빨간 하늘과 검은 거리를 배경으로, 신문을 팔아서 사는 한 노인을 정면으로 응시하여, 내일이 없는 산 숙명적인 삶을 살고 있는 듯한 한 노인의 상을 화면에 영원화한 듯한 작품이다. 이 노인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에 늘어뜨린 신문의 뭉치로서, 이것이 강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뭉치의 표면에 나타나고 있는 문자 "여기에 유일의 팬터지가 있다."라는 말로써 대신되고 있는 점에서 명백해진다. 그것들은 시간의 추적이며, 오른쪽 멀리 교회가 상징하는 영원과 서로 맞서고 있다.         아크로바트   피카소와 더불어 입체파 화가들이 서커스에 흥미 갖고, 그런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샤갈도 서커스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이 그림을 그린 전년경 부터 인데, 그는 후일 마술적인 세계, 고도의 포에지의 형(形)으로서 서커스에 자신이 끌렸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회화도, 언어도 결코 서커스의 정확함에는 미치지 못한 다."라고도 말하고 있듯이, 역시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매력의 정체는 정확함에 있다. 발레리가 말한 '댄스와 같은 정확함'은, 후일 원숙기에 전쟁, 혁명, 성서적 광경 등을 그린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묵시록 적인 혼돈과 거리가 멀다. 아크로바트의 정확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화면에 대담하게 인물을 배치하고, 큐비즘 분석의 정도(精度)와 결합된 호사하고 장식적인 화면을 만들고 있다.       아이를 밴 여자   화면의 지평선을 아래로 내릴 수 있는 데까지 내리고, 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아기 예수를 속에 가진 성모가 우뚝 섰다. 18세기까지 러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이콘 (聖像)의 전통으로, 아기 예수를 원형이나 타원형의 테두리 속에 넣어 성모의 뱃속에 투시시켜 그리는 것은 넓게 알려진 일이지만, 샤갈은 이 작품 속에 그 전통을 현대적 성상으로 그렸다. 태아 주변에 그려진 타원 속의 소우주와 성모를 둘러싸고 있는 외계와의 교감이 샤갈의 분명하고 우아한 필법에 의하여 잘 표현 되어 있다. 입체파인 화면 분할법은 차츰 화면에서 오히려 내적으로 샤갈의 조형적 의도에 순화되어 공간을 더욱 깊게, 크게 설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성모의 표정이나, 스카프, 치마 등에서 보여지는 세속성은 오히려 속(俗)과 성(聖)의 접근을 느끼게 한다.         바이올린을 켜는 여인   샤갈은 그의 일생동안의 작품 속에 꽃다발, 말, 소, 닭,서커스, 바이올린이나, 첼로 등의 악기를 되풀이하여 등장시키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그가 고향에서 어릴 때부터 대하던 그의 생활 바로 그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도 그의 어린 시절에서 투르기는 해도, 담뿍 흥에 겨워 그리움과 회상에서 그린 것일 게다. 지붕 위에 선 인물은 초자연적인 크기로 그려져 지구를 딛고 선 남자 천사처럼 눈이 내린 지구 저쪽의 마을을 배경으로 흥겹게 선율을 자아내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나무 위 아래에 몇 마리의 새들이 그 소리를 즐기고 있고, 왼편에는 화환을 들고 세 사람의 남매가 소리나는 곳을 찾아 모여 들고 있다. 명확한 흑백 대조의 화면 속에 그 의 유년기의 회상을 듣는 듯하다.           산책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는 대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1914년에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여 그때 샤갈은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갔다. 1917년 페트로 그라드의 미하이로스키 극장에 집결한 시인, 화가, 배우들이 미래의 문화성의 초석을 위하여 샤갈을 미술국장에 추대하였으나, 그는 정치적 위험을 피하여 비테부스크의 벨라 집으로 돌아와 화업에 전심, 사태를 관망했다. 이때 그린 작품 이나 은 이 시기의 사랑에의 찬가이다. 드디어 약탈과 파괴에 멍든 고향의 산하에서 첫딸을 얻은 아내를 넓은 우주 공간에 휘돌리는 이 작품은 매우 대범하게 처리 한 그의 동화적 표현에 의하여 매혹적이다. 그리고 빨강과 초록의 두 계통의 색채로써 그 농담의 변화를 주면서 맑고 커다란 화면을 이루고 있다       술잔을 높이 쳐든 이중 초상   비테부스크의 처가에서 명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그린 작품들에서 가장 대표할 수 있는 그의 사랑의 찬가가 바로 이 이다. 샤갈은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스타일에 있어 명확한 하나의 전기를 가져왔다. 화면 전체에 명쾌한 빛이 넘치게 되고 더구나 억제된 약동감을 가지고 있어 보이는 까닭은, 배경 오른편에 두텁게 노란 마티에르가 왼쪽의 청색과 효과적 불협화음을 이루면서 세 인물을 일체화하는 요소에 의하여 심정의 흐름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딸 이다가 천사처럼 아버지의 머리위 에서 날개치고 있고, 그 주변에서 부부의 몸 쪽으로 붙어서 흐르는 짙은 파랑색은 윤곽이 아니고 피와 살의 결합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선은 처음 나타난 것으로 후일의 서정적 작품에서 더러 나오게 된다.           전원의 창   아늑한 녹색 정원을 창밖에 둔 신혼의 보금자리다. 선명한 초록 화면의 한 중간에 하얀 간이 커튼이 걷어 올려져 있다. 밤에는 커다란 창을 반만 가릴 수 있도록 된 커튼의 백색이, 깨끗한 그들의 신혼의 감정처럼 청결하다. 사랑이 넘쳐 만물을 모두 같은 아름다움으로 찬미하려는 심정의 행복함이 숨김 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 심정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창의 오른편에 쌓아 올려놓은 듯 두개의 옆 얼굴로 샤갈과 부인 벨라가 그려져 있다. 창 밖의 무성한 자작나무의 풍경은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새로운 세계로서 보는 감동을 갈색의 항아리와 빨간 과일을 자연에 바치는 물건으로 창을 통해서 생명이 일고 그 생명 다하도록 온갖 곳에 사랑의 중심이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이 이 화면을 꽉 메운다.       부인기수   1924년 이후 샤갈은 완전히 서커스를 파고 드는데 사로잡혀 있었다. 확실히 이 세계를 주제로 하는 작품을 통하여 유태 예술계와의 협력 시대에 몸에 익힌 새로운, 경쾌하고 대범한 필법을 충분히 소화시켜 나간 것 같다. 이 작품은 같은 해에 그린 이란 작품과 함께 이후 또 한 단계 그의 원숙기에 한 발자국 다가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 함께 곡예사를 그리는 작업을 통하여 그 형(形)의 데생적인 묘사가 아니라 해방된 호방한 필법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 그의 새로운 발견은 형은 데생으로부터 자유이고 색채는 형에서 자유라는 것, 평면적으로 색을 칠하는 가치가 얼룩으로 바 뀌고, 새로운 기호(말의 배면에 있는 기수의 손과 같은)의 발 등... 그는 속박되는 틀에서 한 겹 탈피하는 것이다.           농민의 생활 : 러시아생활   "나는 다른 어떤 사람들처럼도 되고 싶지 않다. 새로운 세계를 보고 싶다.... 고향이여, 너는 에크스(세잔이 태난 고장)의 일을, 귀를 자른 화가의 일을, 큐빅(立體), 4각, 파리의 일을 들었느냐? 비테부스크여, 나는 너를 두고 간다." 자서전 '나의 생애'에 결별사를 놓고 파리에 다시 온 샤갈 이었으나, 프랑스의 자연미를 알게 됨에 따라 다시 살아나는 것은 고향의 산하였다. 이 작품은 1925년의 여름을 몽쇼베에서 지내면서 아름다운 그 풍광에 자신도 모르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 것이리라.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농부와 말의 정다운 관계, 그리고 멀리 보이는 주막, 그 주막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담소하는 사람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 춤을 추는 남녀 등, 꿈결 같은 그리움이 맑게 흐르는 기억의 샘물같이 그려져 있다.           창가의 이다   1923년 샤갈은 두 번째로 파리에 나오게 되고, 다음 해인 24년에 바르바상쥬 오베르 화랑에서 처음으로 회고전을 갖고, 여름을 브르타뉴에서 보냈다. 이 작품은 파리에 나와서부터 시작되는 제2 체불 기간의 새로운 그의 양식이 보여주는, 색채와 형을 사랑으로 융화시키는 수법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그림 이다. 브르뉴 해안의 경승지 브레아섬의 여름이 주는 풍치가 그가 사랑하는 딸 이다와 함께 융화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가 첫 번째 파리 시절에 입체파의 영향으로 그렸던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화면의 분할과 어두운 그림자도 없이, 인물은 외계에 대하여 알맞게 균형 잡혀 안정되고 조용하게 앉아 있다. 전체의 색조와 마티에르는 안개가 스며든 것처럼 부드럽게 어울려 데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색채의 뉘앙스에 의하여 화면을 처리한 듯 부드러운 정감이 가득하다.           천사의 추락         두 얼굴의 신부 LA MARIEE A DOUBLE FACE 1927년 캔버스 油彩 99×72Cm 개인소장         레지스탕스   1937년에 샤갈이 유태인 박해의 현상을 보고, 또 독일과 이태리의 파시스트 대두, 조국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에 의한 숙청이 정점에 달했을 때, 그의 젊은 피를 끓어 오르게 했던 10월 혁명을 상기시키는 대작을 계획, 이란 제목의 에스키스를 남기고 있는데, 그로부터 10년간 그것이 세 개로 쪼개어져 가필되어 완성한 것이 이 와 , 의 삼부작이다. 이 작품에서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려는 의도는 없고, 제목과는 달리 공방하는 적대 관계도 없다. 단지 위대한 수난자의 둘레를 부유(浮遊)하는 민중의 각고가 있을 뿐이다. 는 여기서 항독 (抗獨) 운동이 아니라, 운명에 항거하는, 유동하는 영혼을 의미하는 것 같다. 비테부스크의 광장에 누운 화가 자신에게 향하여 조그만 초록색 벽시계가 흘러내리고 있다.           피안(彼岸) 없는 시간   예감되어 왔던 비극은 드디어 세계대전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 발발의 해에 몇 점의 대작을 그렸는데, 그 중 특히 이 작품이 대표적인 것으로서 새로운 그의 양식의 도래를 알려주는 그림이다. 그가 계속해 오던 주제 '사랑'은 마침내 불길한 것의 그늘에 부각되게 되었다. 여태껏 그가 표현하던 고향 비테부스크를 어슴푸레하게 위에서 내려보게 하는 구도로 뒤에 깔고, 강한 그리고 기묘한 물상의 앙상블을 이루어 놓았다. 커다란 추시계와 함께 날개에 피칠이 된 커다란 청어 는 바이올린을 가지고 사랑의 찬가 아닌 다른 슬픈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듯하다. 날아도 날아도 앉을 곳이 없는, 그래서 쉴 틈없이 날아야 하는 운명의 시간을 이야기하듯, 유태인으로서 당시 절박한, 올 것이 오고 만 비극을 나내고 있다.           첼로 연주가   드디어 샤갈은 이 작품을 통해서 또 한 번의 변용을 가져온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샤갈의 작품 속의 연인들이 아주 몽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일관된 환상 속에 이제는 어떤 괴기적 요소가 섞이기 시작한 것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비테부스크는 첼로를 켜는 인물 뒤에서 황량한 눈이 덮인 고장으로 되고, 혹은 다른 작품 에서는 건물이 눈을 번쩍거리기도 한다. 인간은 동물로 동물은 어떤 괴물로 각각 변모한다. 이 작품에서는 첼로가 샤갈 자신이 되고, 바이올린을 켜는 벨라는 조그만 송아지로 변하여 있다. 그들 자신이 화면에서 곡예를 하며 또한 다음 곡예를 예고하기도 한다. 특히 하늘이나 길에 전율을 느끼게 하는 마티에르, 얼룩지듯 엮어간 화면의 질감은 앞서 제작한 판화집을 통한 기법에서 온 것이다.         에펠탑의 부부 LES MARES DE LA TOUR EIFFEL 1938-39년 캔버스 油彩 148×145Cm 작가 소장       화촉   벨라의 죽음은 샤갈에서 있어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 불행과 고독을 이겨내는 9개월간 그는 붓을 들지 못했고 온갖 그림들을 벽을 향해 돌려놓았다. 드디어 화가(畵架) 앞에 앉을 기력을 회복하여 처음으로 그가 손에 잡은 그림이 12년 전 그가 사랑에 잠겨 살 때 그린 이었다. 시집가는 신부를 거의 중앙에 그리고, 주위에는 여러 형상과 인물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는 작품으로, 이 오른쪽 반쪽의 테마로서는 이라는 이 작품을, 왼쪽 반으로서 앞에 소개한 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앞 쪽의 투명하고 짙은 푸른색에서, 밝게 멀리 배경의 위로 놓은 신부의 모습으로, 그 주위에는 선회하는 듯 여러 형상을 둘러 싸게 한 이 구도는 혼례를 주제로 한 샤갈의 전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록 눈의 집   샤걀의 초기의 작품들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우울한 어두움이 그 동안의 전쟁과 고독의 부조리를 통하여 풀어지고, 세계의 그늘과 융화되어 갔다. 그에게 있어 가장 정다운 회상의 대상이며, 몇 번이나 거듭 화폭에 나타나는 비테부스크까지도 이제는 유령의 마을처럼 그리고 있다. 낮을 비추는지 밤을 비추는지 구별이 되지 않은 초승달이 화면 광경에 초월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주막의 현현한 거안은 젖어 동공이 흐려 있다. 이 무렵에 그린 그의 작품 속에 보여주는 그의 낙원의 동물들은 대부분 이빨을 드러내고, 물고기는 선혈을 벌겋게 흘리는 날개를 갖는다. 이 작품을 그린 해에 사랑하는 벨라를 잃었고, 그래서 외로움에 떨고 있는 집들, 고독하게 혼자 젖을 짜는 여인을 지켜보는 수호의 눈으로서 자기 자신의 눈을 동공이 없는 채 부드럽게 나타내고 있다.           그녀의 주변   이 작품 샤갈의 애처 벨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그려졌다. 파리 해방과 더불어 파리개방의 소식을 듣고 뛸 듯이 좋아하던 벨라가 갑자기 돌아오지 않은 사람으로 그의 곁을 떠나고, 샤갈은 그 슬픔을 통하여 그녀와의 삶을 이 작품에서, 마치 스테인 글라스의 작품처럼 투명하고 심오한 색으로 표현했다. 푸른 밤의 중앙에는 초승달 빛을 받은 비테부스크의 또 다른 밤이 둥글게 따로 박혀 있고, 이 둥근 조그만 지구를 아크 로바트로 변한 딸 이다가 붙들고 있다. 전경에는 피안의 사람들을 봄으로써 그것을 상기하고 있는 듯한 벨라의 표정과, 그피안의 하늘에 시선을 지는 자기 자신의 역전한 얼굴이 그려져 있다. 중앙의 원은 초승달과 함께 해와 달을 상징하고, 이후 많은 작품에 음양(陰陽)의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는 기호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다.       순교자   순교자는 십자가가 아니라 커다란 일자 막대기에 매달려 있다. 순교자의 집은 불타 하늘에 시커멓게 연기로 채워지고 있다. 결혼 이후 25년간 행복하고 안락한 그 의 가정에 피어나던 사랑의 이야기를 환희와 더불어 그려오던 그의 작업은, 정세의 변화와 함께 전해 내려 오는 전설 신화에 그 자신의 현실을 일체화시키는 총합적인 작업으로 변하여 간다. 이 작품에 있어 순교자란 예수가 아니라, 나찌에 의하여 학살되어 간 이름 없는 무수한 유태인들 중의 하나이다. 죽은 자를 한 여인의 눈물, 명복을 비는 아직 살아남은 사람의 기도, 바이올린으로 진혼 음악을 연주하는 녹색 옷을 입은 악사, 그런 것에 의하여 죽음을 보상받는 순교는 유난히 화면 중앙에 강렬한 인상를 주고 있다.           생 잰의 태양   1947년 6세의 샤갈은 프랑스로 돌아간다. 파리, 암스테르담, 런던등지에서 미국의 뉴욕, 시카고에 이어 회고전이 열리고, 6년 만에 새로 대하는 프랑스의 자연을 대하며 새로운 감회에 젖는다. 특히 생 잰 카프 페라에 머무르면서 남프랑스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남프랑스의 밝은 색채에서 다시 광명을 찾은 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후일 봔스나 생 포 르에 결정적으로 새 삶의 터전을 이루게 된다. 이 작품은 별명으로 이라고도 제목이 붙어 있다. 또 이것과 관련된 연작으로 있다. 이 작품의 태양은 샤갈 특유의 새빨간 색으로 바다 위에 해바라기와도 같은 가장자리를 이루고 선명히 떠 있다. 한 여신이 남자의 얼굴을 받들고, 한 손으로는 태양을 붙들고 있다. 새로운 광명을 가져다 주는 여신이리라.         썰매와 마돈나   벨라가 죽고 난 이후 몇 점의 작품에서 샤갈의 색채가 얼마나 투명하며 깊이 있고, 아름답게 발색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그의 내면 속에 깊이 깔린 슬픔을 그가 얼마나 알뜰하게 소화하며, 정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 작품에 있어서도 화면의 부분을 메운 투명한 푸른색 속에 몇 가지 드러낸 강렬한 대비색이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샤갈이 돌연 화면에 매를 그리게 된 것은 어느 친구의 '천야일야(千夜一夜)'의 삽화를 경험에서라 한다. 어쨌든 그의 즐겨 쓰는 나선구에 의하여 두 갈래로 갈라진 모자의 하강과 썰매와 말의 상승운동을 통하여 어떤 리얼리티와 결합한 점에서, 이 작품은 깊은 의미를 지닌다. 썰매를 타고 가던 마돈나는 상승하는 썰매에서 떨어져 땅에 떨어지고 있다.         다윗왕   후에 로서 통괄되는 작품의 중핵이 되는 3점의 회화가 바로 이 과 , 그리고 이다. 1951년 이 작품을 그린 해에 이스라엘을 재차 방문한 것을 계기로, 샤갈은 20년만에 판화집 성서의 못다 한 부분을 완성하고, 그 여세로 조각과 스테인드 글라스에 이르는 대하(大河)와도 같은 광범위한 제작에 들어간다. 그러나, 음악을 연주하는 의 작품은 예루살렘의 언덕을 앞에 하고 탄식하는 교부의 모습을 빼고는 종교적 요소는 전혀 없다. 샤갈의 종교화는 협의의 종교 성을 나타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전 작품에도 공통적으로 인간의 비극성과 결합하여, 그의 독특한 조형세계를 펼치는데 성공하고 있다. 샤갈 나름의 엄격성, 샤갈 나름의 비극성을, 샤갈 나름의 포에지와 팬터지를 통해서 엮고 있다.         십계판을 부수는 모세   이 작품을 앞에 소개한 , 과 더불어 대작 3폭의 기념적인 작품 중의 하나이다. 산에 올라 주(主)의 손으로부터 증표가 되는 십계판을 받고 있는 사이, 아론의 선동에 의하여 황금의 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의 대상으로 한 민중이 화면 우측에 보인다. 이에 너무 화가 나서 십계판을 던져 깨어 버린 모세의 모습을 화면 중앙에 세워 화면을 좌우로 갈라 놓았다. 이 작품은 이중으로 어떤 뜻을 시사하고 있다. 왼편 아래쪽에서는 거룩한 분노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 오른쪽 쪽에는 모세가 주(主)로부터 십계판을 받는 장면이, 다음 왼편 위쪽에는 십계에 따라 살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이 그려져 있어, 마치 헤브라이적인 의미의 천의의 달성의 시간을 펼치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바바를 위하여   "이제야 제2의 청춘이 열렸다."라고 결혼식장을 나오면서 노화가(老畵家 65세)는 부르짖었다. 25세 연하의 검은 눈의 어여쁜 러시아 여성 바바를 위하여 이 그림이 그려져, 그녀에 의하여 보존되고 있다. 샤갈의 바바에 대한 헌신의 정도는 감동적인 이야기거리가 될 정도로서, 같은 제목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 작품은 검은 색을 배경으로 한, 유난히 정결한 얼굴과 시원하고 맑은 눈이 노란 말의 초록색 눈과 대조를 이루며, 괏슈 특유의 수수한 맛을 풍겨준다.             당나귀가 있는 에펠탑   샤갈은 차츰 악몽에서 깨어나 1952년 제 2의 벨라라고 할 수 있는 발렌티나 브로스키와 재혼을 하고 광명의 세계를 얻는다. 그의 색채는 도기(陶器)와 스테인드 글라스의 제작에 발을 들려 놓으면서 그의 화면에 그런 기법을 효과적으로 적용시켜 독자적인 색채감을 개척 해 나갔다. 이 작품은 재혼을 한 다음 해 시작한 연작 중의 하나로서, 역시 3년 전에 그렸던 와 함께 투명한 도자기의 유약을 통해 빚어져 나오는 광택의 마티에르를 느낄 수가 있다. 에펠탑은 강철로 구성되어 하늘 위를 향하여 힘차게 뻗어 있는데도, 온갖 것을 꺾어 휘어서 그리는 만곡증 (彎曲症)의 샤갈에게 그려지는 에펠탑은 역학적(力學的)인 강철(鋼鐵)의 결구(結構)가 아니라 그 화면에 나타나는 말이나 닭과 같은 성질로 휘어진 달 모양에 대응하여 곡선으로 휘여 거꾸로 서 있게 된다.         홍해 횡단   모세에 의하여 홍해(紅海)를 가르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는 그라나파를 위시하여 몇 몇 종교 화가들의 영감을 고취하기도 했고, 또한 영화까지 만들어져 우리의 흥미를 돋군 적이 있다. 이 이야기를 샤갈은 그 나름의 대단한 구성법에 의하여 작품 화하고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 모세의 힘으로 바다를 두 쪽으로 갈라, 해안과 해안 사이에 길을 이루어 피난민을 건너게 하고, 신의 사자인 모세는 다시 되돌아와 그들을 뒤따라 절박하게 추격하여 온 파라오의 군세(軍勢)위쪽에 서서 구름과 어둠을 내려 그 진격을 저지한다. 날이 밝아 모세가 그의 지팡이를 휘둘러, 주의 힘은 좌우로 갈라졌던 바닷물을 일시에 되덮게 한 광경을 그리고 있다. 강렬한색 대비의 화면이 아니라, 아주 부드러운 하모니를 이루는, 그의 원숙기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大서커스   최만년(最晩年)의 샤갈 예술의 스타일은 무엇보다도 이 한 점의 작품에 집약되어 있다. 그는 많은 서커스 작품을 남겼고, 또한 그의 독특한 환상을 서커스에 결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서커스에서 얻은 경험의 형태나 색을 다시 그의 다른 작품에 소화시켰다고 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흰색, 회색, 검정의 무채색 (無彩色)을 주조(主調)로 하고 그 속에 군데 군데 유채색(有彩色)의 채도(彩度) 높은 투명색(透明色)을 놓았다. 그리고, 화면의 여러 형상도 여태껏 보아오던 기호(記號) 상호(相互)의 결합이 전적으로 새로운 불가지(不可知)의 의미를 느끼게 해 준다. 새는 땅에서, 말은 하늘에서 서로 성체 배수(聖體 拜受)의 관계에 들고, 말은 천사와 결합되어 천사는 거룩한 손 위에 있다. 성속(聖俗)을 하나로 묶어 보는 이 양식은 서커스의 광경을 하 나의 종교화로서, 그리고 긴장이 가득 찬 굵은 선은 그의 에칭의 인열선(引裂線)을 응용한 것으로, 그의 온갖 서커스 작품의 총합체라 할 수 있다.       부활제   "마티스 이후 샤갈만이 색이 무엇인가를 아는 유일한 화가가 될 것이다." 이것은 피카소가 한 말이다. 샤갈은 물감의 순결이 심정의 순수와 일체화하려고 했고, 작품을 성실히 제작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여 성실을 가지고 자기 표백을 하는 것을 염원으로 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은 색채의 폭력에 있다고 그는 생각하며, 그런 색을 "코에 역겹게 다가온다."고 했다. 이작품은 극히 억제된 색으로 별세계(別世界)의 깊이를 강조하고 있다. 부활제의 헤브라이어의 원의(原意)인 '통과', 초월자(超越者)의 놀라운 통과를 이 천사는 나타내고 있는 것인지? 오른손을 올려 희생된 어린 새끼 양을 부르고, 가난한 에스파냐 사람들은 이를 환송한다. 모든 것이 여기서는 희생에의 축성(祝聖)을 낮은 소리로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부조리의 초극(超克)은 이리하여 최고의 축성(consecration)의 의의와 합치된다.           푸른 얼굴   이 작품은 화면을 세로로 이등분(二等分)하여 그늘과 양지로 표현하고 있다. 7년전에 을 그렸는데, 같은 모티브로서 피리 부는 사람, 꽃들, 이러한 제재(題材)들은 60년 전 그가 초기에 붓을 손에 잡던 그 시절에 마음이 끌렸던 테마들이다. 그가 좋아하는 일체의 색들은 그동안 전쟁과 혁명을 통하여, 결국 역사가 화폭에 비극적인 찰과상을 남기고 지나갔으며, 다시 이렇게 하여 그 엘리멘트를 되살리고 있다. 그 동안에 샤갈은 판화와 스테인드 글라스, 도예(陶藝) 등을 통하여 애당초부터 체질적으로 우러나던 그의 색채들을 갈고 닦았다. 그늘 속에 잠긴 푸른 얼굴은 잔잔한 호수 같고, 그 위에 삼각형의 더 깊은 심연을 이루는 순박하고 선량한 얼굴이 양지 쪽으로 꽃다발을 내어 밀고 있다. 건너편에는 아기를 안은 어머니가 황홀한 얼굴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곡예사   1940년, 파리의 독일군에 의한 함락과 유태인 학살 때문에 남불(南佛)로 피난을 했다가, 다음 해에 뉴욕 근대 미술관의 초청에 의하여 샤갈 부처는 미국으로 건너 간다. 그래서 그 다음 해인 42년에 수주일간 멕시코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아레코'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담당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샤갈 자신의 현실적 내면을 무대의 극적장면을 통하여 이야기하려 하고 있는 듯하다. 이 무대의 극적 장면도 서커스와 발레의 총합적 장면이다. 새 모양을 한 인물이한 손에 시계를 걸치고 나타나, 뭔가 자기정체를, 또는 어떤 다가오는 시간을 알리려는 듯 둥글게 된 무대 중앙에 지금 막 뛰어나왔다. 오른편에는 자그만 소녀가, 말 위에서 유도하는 대로 말이 된 아가씨가 수줍음을 가지고 등장하고 있다. 불길(不吉)을 느끼게 하는 환상미의 극치에 이르는 작품이다.   ///출처:[톰과 제리 아지트]    
1    하늘은 시간의 진리가 투사되는 진실의 장소이다... 댓글:  조회:2129  추천:0  2017-10-10
시, 사산된 꿈과 환멸의 수식 사이에 흐르는 죽음의 광시곡                                                             김석준 문학평론가   뜬금없이 광주와 아우슈비츠를 노래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시인이 보고 말하고 싶은 언어의 실재는 무엇이며 왜 환상의 언어를 죽음의 언어로 치환시켜 인간학적 실재를 응시하는가?  함기석의 시적 도정을 살펴볼 때, 죽음에 관한 몽상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의 이입 같은데, 그것은 어떤 언어의 운명인가? 여여한 시간 앞에 인간의 무상함을 느꼈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람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즉 죽음의 “익사체”(「오르간」중)에 심혼이 포획되었기 때문인가?  분명 함기석의 시말운동은 이제까지 진행된 것과는 전혀 다른 시적 차원으로 이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말의 운명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인가? 진리에 도달할 수 없고 진리를 수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요원하다. 늘 말할 수 없는 잔여가 공리 앞에 매개되어 진리의 수식을 혼돈으로 이끈다. “말해질 수 없는 말들의 저 흰 거품”(「수직선 = 수평선」중)들이 진실을 포획하고 있는 한, 혹은 모든 수식이 “저승 시(市)”(「유령 슈뢰딩거」중)에서 소거되어 인간학을 불능으로 표기하는 한, 말―세계는 늘 분열의 표상만을 시말 속에 응고시키게 된다. 따라서 꿈이 사산되고, 환상의 공식에 죽음이 대입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말들은 불길하고 낯설었으며, 꿈이 완벽하게 절멸한 곳에 언어를 위치시키게 된다. 특히 함기석의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꿈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서글픈 악령”(「광주에서」중)에 사로잡힌 환멸의 노래에 다름 아니다. 죽음의 광시곡이 시말 내부에 산종된 채, 불길하게 언어의 횡단면을 종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죽음의 수식은 무엇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되는가?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죽음을 수식의 연산작용으로 표현하고 증명할 방법은 존재하는가? 함기석의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죽은 빛”, 즉 “빛의 사체”(「화가 난다」중) 어디쯤에서 발화되는 불길한 노래인데, 그것은 바로 시간의 본질과 상면하는 인간학적 운명 그 자체를 지시하는 존재의 언어임에 틀림없다. 시간의 표현이 사산되고, 시간의 증명은 완벽하게 유산된다. 왜냐하면 너―나를 포획하는 시간의 정체가 “생의 늑골”을 지나 “0시의 바깥 세계”(「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중)로 탈주하는 주검의 노래만이 시의 진실을 정확하게 지시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공간으로 굴절되고, 공간은 시간의 표현법을 완수하지만, 인간학은 “무의 미궁”(「화가 난다」중)으로 침몰하여 “침묵”(「밤의 실내악」중)의 공간으로 사라지게 된다. “유산된 아기”의 “환청”(「종이비행기」중)이 “허공의 길”(「즉은 새를 위한 첼로 조곡」중) 위에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 전체를 죽음의 광시곡으로 탄주하기에 이른다. 주검들이 널브러진 “고통의 땅”(「괴델 플라워」중) 위에 레퀴엠이 울려 퍼진다. 물론 시간의 흔적 전체가 “주검의 연속체”(「괴델 플라워」중)로 자신의 수식을 증명하겠지만, 함기석이 바라본 언어의 운명은 그리 밝은 것이 되지 못한다. “서로의 아픈 꿈”(「백령도」중)이 시말에 침전되고, 치유될 수 없는 존재의 “깊은 상처”(「미스 모닝과의 아침 식사」중)가 언어로 발화된다. 어쩌면 시인이라는 숙명과 마주선 시살이는 “죽음이 다니는 전용 도로”(「얼굴」중)에서 만난 미지의 기호들을 수식으로 환원시키는 숭고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언어가 죽음을 포획하고, 죽음은 “몸속 더 깊은 우주”(「훌라후프 돌리는 여자」중)의 신비와 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노래하는 “사람의 문장보다 아픈 저녁”(「저녁의 비행운(飛行雲」중)은 어떤 운명의 시간인가? 물론 함기석의 그것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단 한 사람”(「단 한 사람」중)의 환멸의 세계상을 시말화한 것이기는 하지만, 따라서 언어의 심연에 “고통에 살다 백골”(「백발의 고독이 마루에 혼자 앉아 있다」중)로 탄화된 원혼들의 노래가 저며져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늘의 문체”(「허공의 장례」중)가 직조한 인간학적인 현실에 다름 아니다. 환상이 사라지고, 인간학적인 실재가 선명하게 부조된다. 하늘은 시간의 진리가 투사되는 진실의 장소이다. 물론 함기석의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가 “언어와 죽음”(「코흐 해안」중)이 서로 맞물려 있는 존재의 주름을 미지의 기호로 응결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바로 “태고의 시간”(「조약돌」중)으로 재귀하는 존재의 운명을 반복의 형식으로 술회한 것이라 하겠다. 흑조가 저 하늘을 난다. “아내의 아픈 속살”에 기입된 “울분”(「아내가 내온 육면체 큐브」중)이 매만져지고, 또 “생의 가파른 칼바위 능선”(「튜브」중)에 기입된 “차갑고 아픈 시”(「이타사(利他寺) 입구」중)의 운명선이 감지된다. 역시 흑조가 시간을 타고 온 세상을 배회한다. 말하자면 함기석이 형상화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언젠가 나도 가야 할 저 연기의 길”(「모래가 쏟아지는 하늘」중)을 언어의 수식으로 코드화한 진리의 전언임에 틀림없다. 시간의 저편으로 흑조가 사라진다. 불길하고 흉흉하다.   첫눈이다 먼 훗날, 죽음이 빈 배를 나의 집 마당으로 밀고 올 때 노을 속에서 들려올 물새 소리 「부음(訃音)」일부   수식은 몸속에서 자라는 뼈, 죽음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이다 발발아, 너는 너의 죽음을 어떤 수식으로 증명할 거니?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와 발발이π」일부   사람의 속말은 자신조차 볼 수 없는 자기 생의 해구로 쓸쓸히 침몰하는 배다 관 뚜껑을 열어 마지막으로 흰 옷을 입고 잠든 자신의 손을 어루만지듯 바람이 물과 빛으로 쓰는 모래의 백색유서를 읽고 있다 「코흐 해안」일부   누가 또 이유도 모른 채 참살된다. 「낯선 실내악」일부   빛과 어둠 사이에서, 말의 여백과 공포 사이에서 나의 육체는 파동이 되어 가고 「장지(葬地)에서」   생은 무엇이고, 또 죽음은 어떤 사태인가? 우리는 왜 언어의 순수한 도정을 생이 아닌 것으로 응결시켜 인간과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근원을 탐문하는가? 특히 함기석의 그것은 “비문”과 “법문” 사이를 배회하는 “우울한 짐승”을 알레고리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론”과학(혹은 수학)과 종교 사이에서 생성된 죽음의 소리이다. 여기저기서 “부음(訃音)”이 들려온다. 이 세계는 타나토스로 향하는 비가역적인 공간이다. 말은 “성기”의 에로틱한 반복적인 운동이고, 진리는 미필적 고의로 가득 찬 “사고의 살인”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직조하는 저 반복의 운동만이 인간학을 증명하는 진실의 수식이자, 나―너를 포획하는 존재의 “파동”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세계의 표현법은 힐베르트나 슈뢰딩거 그리고 괴델이 만든 수학적 수식이 아니라, “발발이 π”에 응고된 확정 불가능한 잔여의 운동임에 틀림없다.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말하지 못한 채 “참살”되어 죽음에 포획된다. 까닭은 시간의 운동 전체가 “침몰하는 배”처럼 “백색유서”만을 남겨놓은 채, 생 전체를 “공중의 묘역”으로 가볍게 소거시켜 무(無)만이 진실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난폭한 운동이 죽음의 “빈 배”를 끌고 와 레테의 강 언덕 어디쯤에 생 전체를 부려놓게 된다. 마치 “지름이 0보다 작은 마이너스 원”으로 생을 증명하는 미궁의 방식처럼, 인간학은 그저 아스라한 “빛의 환각”으로 소진되는 소멸의 운동일 따름이다. “마지막 숨”소리가 온 천하를 가득 채운다. “검은 새”가 “빛과 어둠” 사이를 가르며 날아다닌다. 불길하다. 음험하다. 생은 이미 선험적으로 불길한 징후들로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함기석이 도달한 언어의 실재이다. “떠도는 꽃, 말, 눈동자”에 미처 다 말하지 못했던 회한의 “눈물”이 서린다. 그렇다면 대저 어떤 생을 살아낼 때, 나라는 “( )”를 풍요롭게 채울 수 있는가? 생의 과정 전체가 무로 수렴한다고 할 때, 인간은 채우는 자가 아니라, 적멸에 순응하는 무위의 산책자가 아닌가? 오늘도 인간은 미지의 죽음에 포획된 채, 다만 “왜 과학도 종교도 시도 인간의 뿌리를 구원하진 못할까”(「살모사 방정식」중)라는 존재론적 회의만을 반복할 따름이다. “차고 흰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 모골이 송연해진다. 시는 불길하고 말은 차갑다. 불연 듯 죽음이 온 세계를 포획하고 있으리라는 느낌이 뇌리를 스친다. 불길하고 낯설었으며, 마침내 “피를 연주”하는 죽음의 광시곡이 탄주된다. 점점 “육체”는 하나의 “파동”으로 변해 물질과 생명의 경계를 허물어트린다. 만약 생의 변주곡이 그와 같다면,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실 함기석의 시적 도정을 살펴볼 때, 죽음에의 탐구는 아주 낯선 것이거나 의외의 결과물인데, 그것은 어떤 의도를 함의하고 있는가? 분명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의 주조음이 힐베르트나 고양이가 아닌 제로에 있다 할 때, 제로가 도달하는 의미의 체계는 무엇인가? 여기저기서 “탄식과 울음”이 들려온다. 왜냐하면 생의 곡면에 위에 기입된 그 모든 변주곡들은 측량이 “불가해한 도형의 넓이”처럼 삶 전체를 아포리아에 구속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은 힐베르트와 고양이 사이에서 파생되는 미묘한 의미의 체계가 아니라, 아직 제대로 포획되지 않은 제로와 영원히 해명이 불가능한 발발이π 사이에서 생성되는 미완의 기획인지 모른다. 그러나 생에의 진리를 온전하게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아니 역으로 모든 진실은 힐베르트와 고양이 알레고리에 침전된 그 무엇이 아니라, 제로와 발발이π에 들러붙어 생 전체를 미궁에 빠트리는 불온한 기획이다. 물론 여전히 생에의 운동이 “폐곡선” 위에서 표현되어 인간학 전체를 불모의 지대로 이끌어가겠지만, 따라서 생의 표현법이 고통과 비문 사이에서 자신의 수식을 완성해 가겠지만, 그것은 “먼지와 거품”처럼 허망한 것이거나 혹은 “진흙과 한숨”으로 이루어진 조야한 구성물에 다름 아니다. 생은 침몰의 운동이다. 생은 상승이 아닌 몰락의 운명이다.   정오다 까마득한 지평에서 탄환이 날아온다   정오다 바람은 없다 구름도 태양도 없다   정오다 도시는 없다 인간도 언어도 없다   정오다 정오는 정오에 정오로 영원히 사살된다   정오다 까마득한 허공에 흑조가 떨어진다 「흑조」전문   “비린 꿈 비린 울음”(「여름밤의 푸가」중)이 삶의 정오에 매개된다. “담배 ”을 피고 있는 “죽은 마야코프스키”(「리치빌라 404호」중)의 초상도 정오의 하늘 위를 우러르고 있다. 정오에 레퀴엠이 울린다. 정오는 죽음의 공간이다. 정오는 반어이자 역설의 시간이다. 말하자면 함기석에게 정오는 생의 역동성과 공명하는 초인의 시간이 아니다. 니체에게 정오가 진리를 교설하는 대망의 시간이라면, 함기석의 그것은 죽음을 욕망하는 소멸의 시간이다. 네크로필리아가 선호되고, “지옥 놀이”(「이륙」중)가 전개된다. 마치 “미친 시계”와 “죽은 시계”(「장기 놀이」중) 사이에 파시즘이 있고 아우슈비츠가 있었던 역사의 시간처럼, 시인에게 정오의 시간은 “생의 마지막 곡선”(「살모사 방정식」중) 위를 질주하는 “증발”(「無」중)의 시간이다. “인간도 언어도” 사라진다. 아울러 “태양”도 비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흑조조차 추락하여 더 이상 날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정오는 천지창조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상태이거나 모든 에너지가 완벽하게 소진 고갈된 무의 상태인지도 모른다. 아니 역으로 정오는 생성의 과정인 동시에 소멸의 순간이거나, 인간학적 진실이 응고된 가장 강렬한 죽음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흑조의 추락은 불길한 동시에 상서롭고, 한 세계의 몰락을 의미하는 동시에 신세계의 출현을 예고하는 전조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까닭은 인간에게 “내생”(「마지막 해변」중)이라는 마물이 시간의 곡면 위에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생의 시간은 늘 이중성 위에 매개된 모순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네 시에 네가 없고 네 시에 사라진 빈 하늘 가득 아름답고 슬픈 노을이 번진다 「첫 데이트」일부   약지를 만지며 창가에서 캄캄한 밤하늘 통장을 바라본다 먹구름 뒤에서 천천히 이마를 내미는 달 잔고 제로를 가리키며 웃는 저 둥근 얼굴 「찡찡공주가 잠든 봄밤」일부   꽃은 피가 낭자한 식물의 광대뼈야 화인(火印)이야 유서야 죽고 나서야 난 알았어 하지만 넌 이 땅속의 메아리조차 듣지 못하겠지 디디, 미안해 이번 생일엔 갈 수가 없어 「할머니의 안부」일부   불안하게 반대편 차창 밖으로 눈을 돌린다 검은 눈이 내리는 들판이 보인다 불길에 휩싸인 집들도 보인다 들판 위 공중으로 수많은 레일들이 깔려 있고 열차가 달린다 나를 태운 무수한 열차들이 달린다 폭풍 속으로 폭풍 속으로 「폭풍 속으로 달리는 열차」일부   “육체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영혼의 모든 상처”(「약속」중)가 아물게 만드는 것은 가능한가? ”죽음의 손가락”이 “배후의 배후”(「오래오래 레스토랑」중)를 지시할 때,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면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수식이나 정리는 삶을 증명하고, 죽음을 증거하는 최적의 장소인가? “관측 가능한 대상”(「함박눈 함수」중)이 존재하지 않을 때, 인간학은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함기석은 스스로를 괄호로 간주하면서, 진실과 “거짓말”(「뱀장어」중) 사이의 관계를 심문하고 있는데, 그것은 언어가 감당할 수 있는 참된 과제인가? 더 나아가 이 세계를 표상하는 다양한 수식들은 그것의 합당한 근거를 완벽하게 제시하여 이 세계가 진리의 구현물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미망에 포획된다. 사라진다. 죽음이 “아름답고 슬픈/노을”처럼 온 세상을 뒤덮는다. 세 시와 네 시 사이에서 설레던 “첫 테이트”의 안온한 몽상도, 혹은 향기로운 “라일락의 농담”에 화기애애했던 추억도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포획되어 소스라치게 된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특히 함기석의 그것은 사라져 소멸하는 운명의 자리에 기입된 인간학적인 음영을 죽음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괴델이고 힐베르트이자, 존재가 형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수식이다. “찡찡공주”라고 명명되는 딸아이의 잠든 모습을 무량하게 바라다본다. 도대체 이 세계의 진실을 포획하고 있는 죽음의 정체는 무엇이고, 통장 “잔고 제로”에 침전된 “아내의 눈물”은 어떤 인간학적 진실을 지시하는가? 대저 죽음과 “지폐”와 환한 “봄밤” 사이에 매개된 저 존재의 알 수 없는 “깊이”는 오렌지 기하학 너머로 비약하여 우주의 심연을 응시할 수 있는가? 이 세계의 진실은 밝고 투명한 “아이의 웃음”에 투사된 희망의 체계인 동시에 “얼굴 잃은 해바라기”의 절망인데, 그것이 바로 시간에 기입된 시의 얼굴이다. 이 세계는 이중적이다. 이 세계는 역설의 표상이다. 힐베르트의 얼굴도, 모든 존재를 비문으로 이끄는 발바리π의 역동적인 운동도 미지의 제로에 접근하는 죽음의 통로이다. 마치 “할머니의 안부”가 생이 아닌 저승의 세계에서 발화되는 환상의 언어인 것처럼, 함기석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어둠”의 “집”으로 명명되는 “태반”에 응고된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측량하는 비릿한 숙명의 노래라 하겠다. “폭풍”이 몰아치고, 마침내 죽음의 길에 승선하게 된다. 까닭은 인간에게 허여된 시간이 소진되어 완벽하게 제로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길은 외길이고 질주는 필연이다. 마치 “폭풍 속으로 달리는 열차”가 미궁으로 소거되는 시간의 운동을 의미하듯이, 함기석의 그것은 “일곱의 아이”와 “아흔 살의 나” 사이에서 파동치는 시간의 문양을 시말 속에 응고시킨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나를 바라보는 나”는 어떤 나인가? 대저 나는 어떤 운명을 살아낸 시간의 타자인가? 도대체 나는 어떤 시간의 단면도를 통과하는 숙명의 열차인가? 무량하고, 쓸쓸하였으며, 너와 나 사이의 모든 구분이 사라진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시간의 함몰과 함께 나는 나인 동시에 나 아닌 것으로 물화되는데, 그것이 바로 제로와 발바리π에 응고된 존재의 비문이다. 우리는 그저 시간의 선상을 질주하다가 미망의 덫에 포획된 채 침몰하는 것으로 한 생을 증명하게 된다.   첫 장을 열면 광활한 설원이 보이고 글자들은 모두 검은 새가 되어 날아간다   하늘엔 무늬 잃은 기린의 눈빛으로 나를 보는 낮달 지상엔 무더운 눈보라   끝 장을 덮으면 끝없는 우주가 보이고 글자들은 모두 유성이 되어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어떤 시집」전문   인간에게 의미라고 간주되었던 기호들이 백년 후에 무의미로 소거되어 사라진다면,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과연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의미의 잔여를 도발하는 영원의 기호로 고양될 수 있는 작품집인가? “죽은 자들의 꿈이 얇게 저미어져 쌓인/시집”(「도미노」중)에 “검은 새”가 날 때, 그것은 어떤 인간학적 진실을 고지하는가? “말할 수 없는 말들의 울음”(「백발의 고독이 마루에 혼자 앉아 있다」중)이 온 천하를 가득 채운다. 까닭은 “아픈 기억”(「그녀의 뒤뜰」중)이 언어의 심연에 침전되었기 때문이다. 참회의 말들을 사색해야 하고, “참회의 시”(「마지막 해변」중)를 써야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함기석에게 시란 참회의 기록이다. 마치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균열을 성찰하며 반추했던 윤동주의 그것처럼, 시인도 시간의 안과 밖에 기입된 비문을 존재의 언어로 풀어내면서,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심도 있게 측량하고 있다. 그렇다면 함기석에게 시란 무엇인가? 꿈이 사산되고, 환멸의 광시곡이 인간학을 주재할 때, 도대체 시가 말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어떤 시집”이 백년 후에 사라지는 것들로 명명될 때, 시가 지시하는 말들은 의미의 전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라짐과 정전 사이에 어떤 시집이 위치할 때, 그것은 “우주 저편 본색(本色)의 우주로 귀소(歸巢)”(「흑조가(黑鳥歌)」중)하는 절대 언어인가? 순백으로 표상되었던 “아이의 영혼”(「잃어버린 편지」중)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말하자면 어떤 시집의 “첫 장”과 “끝 장” 사이엔 사라지는 것들만이 포획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에 묘파된 말의 형상이다. “광활한 설원” 위에 무만이 매개된다. 아니 힐베르트의 수식은 진리를 정확하게 지시하지 못한 진실의 저편으로 소거되는 운명의 전언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수식이 곧 삶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식으로 이 세계를 설명해낼 수 있는 개연성은 있겠지만, 그것으로 말과 세계 사이의 균열을 완벽하게 봉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말―사태는 힐베르트나 괴델의 그것과 달리 반어나 역설로 진실을 지시하는 절대 언어이다. “무더운 눈보라”가 내린다. 말이 어그러진다. 이를테면 “무더운”과 “눈보라” 사이에 전혀 매개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것은 “끝없는 우주”가 만든 비문, 즉 새로운 시말문법이다. 秘文이 非文이 되고, 飛文이 되어, 마침내 碑文으로 소거된다. 말하자면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행위의 주체인 힐베르트와 고양이에 의해 포획된 의미를 시말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변항을 창조하는 제로에 기입된 흔적을 추적하는 죽음의 비문이다. 죽음이 말하고, 변항에 의해 의미가 유예된다. 파동 친다. 마치 어떤 시집의 구성물들이 수식과 물리력과 인간학의 혼합물이듯이, 함기석의 그것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문자의 운명을 죽음의 구성물로 재현한 슬픈 존재의 언어라 하겠다.   아무것도 풀리지 않는 풀이 노트는 백야의 시다 사막이다 핏덩어리 의문부호고 계단으로 떨어져 나간 죽은 자의 목뼈다   제로의 자취를 찾는다 「제로와 푸리에」일부   시는 불길하고, 나의 존재론적 태도는 음험하다. 나는 “나는 새”인 동시에 제로이고, “죽은 낙타”이다. 나는 가역과 비가역 사이에 위치한 문제의 중심이다. 나는 아포리아다. 나는 “∞”인 동시에 “원형 거울”이다. 나는 “푸리에”, 즉 “곡선 방정식”에 표현된 죽음의 자취이다. 나는 “죽은 자들의 목뼈”이고, “의문부호”이다. 나는 나의 정체를 말할 수 없다. 나는 불완전의 표상이다. 힐베리트, 괴델, 슈뢰딩거의 “수식 기호”와 상관없이, 나는 이 세계의 표현법을 실천하는 “허공”이다. 나는 “제로의 자취”이다. 따라서 나는 늘 미궁에 휩싸인 채 존재의 흔적만을 촉지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에 묘파된 언어의 진실이다. 따라서 온갖 수식으로 장식된 “풀이 노트”엔 시간의 흔적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 인간학적 진실이 무엇인지 전혀 말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변환”된다. 모든 것이 비가역적인 “탄젠트곡선”으로 변환되어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망각된 주검”으로 묘사하기에 이른다. 미지에 사로잡힌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함기석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생이 아닌 곳에서 발화되는 존재의 목소리, 즉 죽음의 형식을 부조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설령 그 모든 것이 제로의 자취를 추적하는 무위의 덫인 것만은 분명하지만,따라서 “말과 존재, 빛과 어둠” 사이에 “무수한 피살자들”이 남긴 생에의 흔적들이 풀리지 않는 채 남아있지만, 그 풀리지 않는 아포리아만이 시말이 압박하고 포획해야만 하는 숙명의 언어임에 틀림없다. 오늘도 제로에 포획된 채, 시를 쓰며 ( )를 채워간다. 죽음의 수인으로 갇힌다. 시간이 사라진다. “백야의 시”엔 “눈먼 까마귀”만이 날아다니며 죽음의 노래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휘발”된다. 적멸에 이르러 공간이 시간과 함께 공멸하게 된다. 무만이 욕망된다. 무만이 노래된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들의 숙명이다.   김석준 출생 : 충남 아산 약력 : 1999년 시와시학(시), 2001년 시안(평론) (시집) ,,, (평론집) 2011년 미네르바 작품상(평론)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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