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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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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쉼터] - 죽어서도 떼돈 버는 사람들 톱 10... 댓글:  조회:4643  추천:0  2017-10-17
죽어서 떼돈 버는 사람들 톱10   어떤 사람들은 죽어서도 돈을 번다. 살았을 때보다 죽어서 더 많이 버는 사람도 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이게 바로 ‘이름 값’이다. 미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최신호에서 ‘가장 많이 버는 죽은 사람들 톱 10’을 발표했다. 올해 4회째다. 연간 최소 500만달러씩 돈을 버는 고인(故人)들이 조사 대상이다. 최근 몇달 내에 숨진 맬론 브란도, 에스티 로더 등은 올해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죽었는데 어떻게 돈을 버냐고? 죽은 사람들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은 뮤지션의 음악과 사진을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다운로드 받고, 죽은 작가의 저서를 사다 읽으며, 죽은 배우가 나오는 DVD를 구입한다. 그들이 남긴 유무형적 유산을 죽었다고 해서 향유할 수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1위는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4000만달러)     고금을 막론하고 'King of Rock 'N Roll'로 통하는 엘비스 프레슬리는 포브스가 조사를 시작한 이래로 한번도 변함 없이 1위로 군림해 왔다. (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royalties!) 1977년 심장마비로 사망한 엘비스는 지난 해 자그마치 4000만달러(약 500억원)를 벌었다. 그가 남긴 히트곡은 'Love me tender' 'Are you lonesome tonight'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Don’t Be Cruel' 'Hound Dog' 등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 '프랭키와 쟈니' '러브 미 텐더' 등 여러 영화에도 출연했다. 게다가 이제 그가 남긴 노래들을 소재로 한 뮤지컬까지 만들어졌으니 이변이 없는 한 내년에도 흔들림 없는 1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1~4위가 모두 지난해와 순위가 같다. 하긴 다 죽은 마당에 이제 와서 2등 귀신이 1등 귀신 추월하기가 어디 쉽겠는가. 2위는 ‘피너츠’ 만화가 찰스 슐츠 (3500만달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강아지 ‘스누피’ 캐릭터를 만들어낸 만화가. 그는 더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지만, 그가 지금껏 그린 만화들은 지금도 전세계 2400개 신문에 연재되고 있다. 스누피와 찰리 브라운을 비롯한 ‘피너츠’ 캐릭터들은 지금도 TV시리즈, 캐릭터 상품, 기업 CF 등으로 숱하게 쓰이고 있다.   3위는 영화 ‘반지의 제왕’의 원작 소설가 J. R. R. 톨킨 (2300만달러). 영화 ‘반지의 제왕’은 물론이고 ‘반지의 제왕’과 관련된 인형, 게임 등 모든 캐릭터 상품이 톨킨에게 로열티를 지불한다. (‘반지의 전쟁’ 시리즈로 영화사 뉴라인시네마가 번 돈은 30억달러에 달한다) 영화 때문에 뒤늦게 소설 '반지 전쟁'도 다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4위는 비틀스 멤버 출신 가수 존 레넌 (2100만달러) 역사상 가장 많이 리메이크 되는 밴드인 비틀스의 멤버로서, 또 솔로 가수로서, 그의 신화는 세기가 바뀌어도 멈출 줄 모른다. 광팬의 총격으로 어이없이 세상을 뜬지 어언 24년. 우리나라에서도 레넌의 목소리를 라디오에서 듣는 것은 물론, 그의 음악이 깔리는 영화와 CF만도 한 해에 수차례씩 볼 수 있다. 내년에는 ‘레넌’이라는 이름의 뮤지컬도 개막한다.   5위는 동화 작가 테오도르 ‘닥터 수스’ 가이젤 (1800만달러) 그림동화 ‘모자 쓴 고양이’의 작가. 우리나라에선 덜 알려졌지만 이 고양이는 두편의 영화와 TV영화, 캐릭터 상품, 테마 파크 등으로 만들어졌을 만큼 서양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책도 많이 팔렸지만, 작가가 부자가 되기 위해 꼭 책이 많이 팔릴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게다가 가이젤의 부인 오드리는 영화 수익의 5%라는 큰 몫을 떼어왔을 정도로 ‘뛰어난 협상가’로 알려져 고인이 된 남편을 부자 리스트에 올리는 데 한 몫을 했다.   6위는 영화배우 매릴린 먼로(800만달러) 신세대들 가운데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비비안 리 젊은 시절 얼굴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매릴린 먼로 얼굴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이(36)보다도 오랜 시간(42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섹스 심벌’이다. 그만큼 지금까지도 그녀의 ‘이미지’가 많이 팔리고 있다는 얘기다. 먼로의 재산을 관리하는 회사가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새로 계약을 맺은 파트너사만도 150개에 달한다.   7위는 비틀스 멤버 조지 해리슨 (700만달러)     ‘아니 비틀스 멤버 중에서 폴 매카트니보다 조지 해리슨이 먼저 뽑히다니?’ 하고 의문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 리스트는 ‘죽은 사람들’ 대상임을 잊지 말자. 리드 기타인 조지 해리슨이 작곡이나 노래로는 비틀스에서 기여도가 낮을지 몰라도, 비틀스 앨범이 팔릴 때마다 로열티의 4분의 1이 정확히 해리슨에게 돌아간다. 비틀스가 해체된지 30년이 지났지만 지난해에도 비틀스 앨범은 900만장이나 팔렸다. 8위는 작곡가 어빙 베를린 (700만달러)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스가 되지 못할 바에야 캐롤 남기는 게 최고다. 매년 크리스마스만 되면 팔리고 거의 매년 새로운 가수에게 리메이크 되니까. ('어바웃 어 보이'의 백수 청년 휴 그랜트가 평생 직장도 없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 기억하는가? 바로 할아버지가 만든 캐롤의 로열티다!) 매년 연말이면 전세계에서 흘러나오는 캐롤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국가적 중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불리우는 미국인의 애창곡 ‘갓 블레스 어메리카’의 작곡가인 어빙 베를린은 이스라엘 출신으로 뉴욕 거리에서 동전 몇푼을 구걸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던 가난한 이민자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음악은 이제 ‘어메리칸 뮤직’을 정의한다고 일컬어진다. 9위는 레게의 전설 밥 말리 (700만달러) ‘I Shot The Sheriff’ ‘No Woman No Cry’를 부른 자메이카 출신 레게 가수. 80년까지 10장의 앨범을 냈으며, 1981년 사망한 뒤 3년 만에 나온 그의 히트곡 모음 앨범은 2000만장 넘게 팔렸다. 음악 뿐 아니라 헤어 스타일로도 ‘레게의 전설적 스타일’을 구축했다.(‘레게’라는 이름은 자메이카 토속음악에서 나왔다)   10위는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 (650만달러) 줄리어드 음대의 전신인 맨해튼 음악학교 출신. 대본작가 겸 작사가인 오스카 해스타인 2세와 콤비를 이뤄 ‘오클라호마!’ ‘남태평양’ ‘왕과 나’ 등의 뮤지컬을 작곡했다. ‘도레미 송’ ‘에델바이스’ 등 주옥같은 노래들을 담은 ‘사운드 오브 뮤직(1959)’은 이 콤비의 마지막 작품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고전이 됐으며 줄리 앤드류스 주연으로 영화화된 작품도 뮤지컬 영화의 고전으로 남았다. (사진 출처는 포브스)   미국 어린이들에게 가장 사랑받은 닥터 수스   워싱턴포스트의 2008년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초등학교 1학년생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은 가 아니었다. 초등학생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1위에 오른 책은 1960년 출간된 동화 이었다. 를 제친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의 안데르센’이라 불리는 동화작가 테오도어 수스 가이젤(필명 ‘닥터 수스’)이다. 미국의 웬만한 서점과 도서관에 닥터 수스의 책만 진열한 서가가 따로 있을 정도로 미국 어린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동화작가 중 하나다.   닥터 수스는 1904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중퇴하고 27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라이프’ ‘베니티 페어’ 같은 잡지에 만화를 그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대공황 시기에는 제너럴 일렉트릭, NBC방송 등의 광고 작업에 참여해 생계를 해결했고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엔 좌파 성향의 일간지 ‘뉴욕시티’에 만평을 기고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본격적으로 동화를 썼다. 57년 그의 첫번째 인기작이 된 를 비롯해 등이 출간되는 대로 족족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랐다. 그의 동화는 후일 등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됐다.   닥터 수스는 운율과 리듬감이 살아 있는 문장으로 어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정치적 주제를 동화 소재로 채택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84년 출간한 은 핵전쟁의 위협 속에 사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구 소련과 군비 경쟁에 열을 올리던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행정부를 풍자한 책이다. 앞서 71년 펴낸 에서는 환경문제를 다뤘고 에선 파시즘과 권위주의를 비판했다.   닥터 수스는 91년 9월24일 세상을 뜨기 전까지 48권의 책을 펴냈다. 이는 15개국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적으로 2억권 이상이 팔렸다. 그는 어린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84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    닥터 수스[Dr. Seuss]는 1904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스프링필드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테오도르 수스 가이젤 [Theodore Seuss Geisel]로 독일계 작가입니다.   다트머스 대학과 링컨 대학에서 공부한 뒤, 영문학 교수가 되려고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으로 가서 공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공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의 일을 하게 됩니다. 영국에서 돌아온 뒤로는 갖가지 잡지에 만화를 기고하고 그렸으며, 광고 대행사에서 만화를 그렸습니다. 할리우드에서 만화 영화 시나리오를 썼으며 만화 영화 제작자로도 활동했습니다.   1957년에 펴낸『 The Cat in the Hat 』가 호평을 받으면서 확고한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는 기이한 그림과 뛰어난 상상력, 그리고 허를 찌르는 유머와 재치로써 독특한 작품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랑은 유별나서 초등학교에서 매년 '닥터수스 데이' 행사를 개최하고 있고,  그의 작품은 텔레비전 특집물과 뮤지컬,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어린이 그림책에 주는 최고 권위의 '칼데콧 상'을 비롯하여 세 번의 아카데미상과  1984년의 퓰리쳐상을 수상했습니다. 수스 박사의 그림책은 그림보다도 이야기의 전개에 중점을 두는 '이야기 그림책'으로, 비교적 글의 분량이 많은 편이라 글을 완전히 깨친 어린이들에게 적합합니다. 그의 그림은 이야기의 내용을 묘사하기보다는 인물의 표정과 동작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함으로써 이야기의 흥을 돋우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수스 박사의 그림책이 주로 색상이 제한되어 있고 묘사도 절제되어 있는 반면에 글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점에서 볼 때에 수스 박사는 뛰어난 그림책 작가라기보다는 뛰어난 이야기책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국내에 개봉한 [I am Sam]이라는 영화를 보면 알만한 사람은 영화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책[ Green Eggs and Ham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미국 아이들에게 닥터 수스[Dr. Seuss]는 이미 생활입니다. 미국에서는 그의 책만 모으는 수집광들도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기념우표까지 만들어질 정도입니다.         --------------------------------------------------------------------- 죽어서 돈버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죽어서도 돈을 번다. 살았을 때보다 죽어서 더 많이 버는 사람도 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이게 바로 ‘이름 값’이다. 미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최신호에서 ‘가장 많이 버는 죽은 사람들 톱’을 발표했다. 올해 4회째다. 연간 최소 500만달러씩 돈을 버는 고인(故人)들이 조사 대상이다. 최근 몇달 내에 숨진 맬론 브란도, 에스티 로더 등은 올해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죽었는데 어떻게 돈을 버냐고? 죽은 사람들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은 뮤지션의 음악과 사진을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다운로드 받고, 죽은 작가의 저서를 사다 읽으며, 죽은 배우가 나오는 DVD를 구입한다. 그들이 남긴 유무형적 유산을 죽었다고 해서 향유할 수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1위는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4000만달러)   고금을 막론하고 'King of Rock 'N Roll'로 통하는 엘비스 프레슬리는 포브스가 조사를 시작한 이래로 한번도 변함 없이 1위로 군림해 왔다. (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royalties!) 1977년 심장마비로 사망한 엘비스는 지난 해 자그마치 4000만달러(약 500억원)를 벌었다. 그가 남긴 히트곡은 'Love me tender' 'Are you lonesome tonight'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Don’t Be Cruel' 'Hound Dog' 등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 '프랭키와 쟈니' '러브 미 텐더' 등 여러 영화에도 출연했다. 게다가 이제 그가 남긴 노래들을 소재로 한 뮤지컬까지 만들어졌으니 이변이 없는 한 내년에도 흔들림 없는 1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1~4위가 모두 지난해와 순위가 같다. 하긴 다 죽은 마당에 이제 와서 2등 귀신이 1등 귀신 추월하기가 어디 쉽겠는가. 2위는 ‘피너츠’ 만화가 찰스 슐츠 (3500만달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강아지 ‘스누피’ 캐릭터를 만들어낸 만화가. 그는 더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지만, 그가 지금껏 그린 만화들은 지금도 전세계 2400개 신문에 연재되고 있다. 스누피와 찰리 브라운을 비롯한 ‘피너츠’ 캐릭터들은 지금도 TV시리즈, 캐릭터 상품, 기업 CF 등으로 숱하게 쓰이고 있다. 3위는 영화 ‘반지의 제왕’의 원작 소설가 J. R. R. 톨킨 (2300만달러). 영화 ‘반지의 제왕’은 물론이고 ‘반지의 제왕’과 관련된 인형, 게임 등 모든 캐릭터 상품이 톨킨에게 로열티를 지불한다. (‘반지의 전쟁’ 시리즈로 영화사 뉴라인시네마가 번 돈은 30억달러에 달한다) 영화 때문에 뒤늦게 소설 '반지 전쟁'도 다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4위는 비틀스 멤버 출신 가수 존 레넌 (2100만달러) 역사상 가장 많이 리메이크 되는 밴드인 비틀스의 멤버로서, 또 솔로 가수로서, 그의 신화는 세기가 바뀌어도 멈출 줄 모른다. 광팬의 총격으로 어이없이 세상을 뜬지 어언 24년. 우리나라에서도 레넌의 목소리를 라디오에서 듣는 것은 물론, 그의 음악이 깔리는 영화와 CF만도 한 해에 수차례씩 볼 수 있다. 내년에는 ‘레넌’이라는 이름의 뮤지컬도 개막한다. 5위는 동화 작가 테오도르 ‘닥터 수스’ 가이젤 (1800만달러) 그림동화 ‘모자 쓴 고양이’의 작가. 우리나라에선 덜 알려졌지만 이 고양이는 두편의 영화와 TV영화, 캐릭터 상품, 테마 파크 등으로 만들어졌을 만큼 서양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책도 많이 팔렸지만, 작가가 부자가 되기 위해 꼭 책이 많이 팔릴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게다가 가이젤의 부인 오드리는 영화 수익의 5%라는 큰 몫을 떼어왔을 정도로 ‘뛰어난 협상가’로 알려져 고인이 된 남편을 부자 리스트에 올리는 데 한 몫을 했다.     ============================ 닥터 수스 (Dr.Seuss)  ■ 프로필 1904년 미국 메사추세츠 스프링필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Theodor seuss Geisel. 1925년 다트머스 대학과 링컨 대학에서 수학한 뒤에 옥스퍼드 대학으로 가서 세익스피어를 공부했다. 미국 어린이 모국어 교육에 힘쓴 그림책 작가로 그의 작품들은 최초로 총체적 언어학습법(Whole language)에 기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원래는 영문학자가 되려 했지만, 그림책 화가로, 소설가로, 만화가로, 만화 영화 제작자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자그레브 국제 만화 페스티벌에서 두 차례 수상한 경력이 있고, 미국에서 텔레비전 방송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주는 최고 상인 에미상을 받기도 했다. ■ 지은 책 , , , , , ,   시리즈, 등의 작품이 있다. 1991년 87세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의 책 46권은 2억 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글과 일러스트를 모두 직접 한 그의 책들은 20개 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닥터 수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명 테오도르 소이스 가이젤(Theodor Seuss Geisel, 1904년 3월 2일 ~ 1991년 9월 24일), 간단히 닥터 수스는 미국의 작가이자 만화가이다. 1904년에 태어나 1991년 사망했다. 개요[편집] 독특한 등장인물과 음율이 특징인 동화책을 60권 이상 만들었으며,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때에는 입대하여 미국 공군의 애니메이션 팀에서 일하였으며, 당시 만든 Design for Death는 1947년 오스카 상 최우수 다큐멘터리 상을 받았다. Seuss의 발음은 본래 '소이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수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작품[편집]《로렉스》 《호튼》 《더 캣》 《그린치》(Grinch) 《T 박사의 피아노 레슨》 외부 링크[편집](영어) 닥터 수스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10    길림, 흑룡강 두 성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과기지-훈춘 맹령촌 댓글:  조회:3494  추천:0  2017-10-17
훈춘 맹령촌, 셀렌사과 75만킬로그람 판매     온라인 판매도 활성화 본격적인 가을철 수확의 계절이 다가왔다. 현재 훈춘시 반석진 맹령촌의 셀렌사과 재배기지에 들어서면 사과나무에 주렁지게 달린 셀린사과의 그윽한 향기로 차넘친다.   훈춘시 시구역에서 11킬로메터 상거하고 독특한 산지 특점과 중온대 해양성 기후의 우세를 갖고 있는 맹령촌의 셀렌사과는 독특한 맛과 풍미를 자랑하고 있다.   현재 길림, 흑룡강 두 성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과기지로 거듭난 맹령촌으로 인해 반석진은 ‘셀렌사과 제1진’의 미명을 지니게 됐다.   13일, 맹령촌 촌민위원회 리봉걸 주임에 따르면 올해 맹령촌에서는 10월 1일부터 사과를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75만킬로그람에 달하는 사과를 판매, 판매액이 600만원을 넘는다.   올해 맹령촌에서는 국경절 기간 사과따기 체험활동, 슈퍼판매, 온라인 판매 등 판매 방식을 활용해 소비자들의 구매에 편리를 주고 있다. 아이를 데리고 맹령촌을 찾은 연길시민 왕연은 “예전에 맹령촌의 사과를 사서 맛본 적이 있지만 직접 맹령촌을 찾아 사과를 맛보니 더욱 향기로운 것 같습니다.”고 밝혔다.   리봉걸 주임은 “맹령촌에는 현재 217세대가 살고 있는데 87%에 달하는 188세대에서 사과를 재배해 년간 인당 수입 5만원을 올리고 있다.”고 밝혔다. 올해 이 촌의 사과 생산량은 750만킬로그람에 달하는데 생산액이 5000만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사과재배업으로 치부의 길에 들어선 맹령촌에서는 향후 사과산업과 관광산업을 결부해 브랜드형상을 수립하고 맹령촌의 사과 지명도를 일층 높임과 아울러 투자유치, 심층가공 등 면에 힘을 기울여 맹령촌의 사과산업을 특색화, 규모화, 브랜드화, 전문화에로 발전시킬 전망이다.   ///연변일보 현진국 기자
9    시작에서도 정적인것을 동적인것으로 출구를 찾아 표현해야... 댓글:  조회:1830  추천:0  2017-10-17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9) : 드가 Edgar Degas (1834~1917)   철저하게 집착하는 데상의 명수(名手)       예술가의 초상   19세기의 전형적인 초상화 양식에는 몸체와 두부(頭部)를 비스듬히 돌려 정면을 향하는 다소곳한 모습들이 자주 보이며, 드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 초상화 역시 전통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20세 무렵에 그린 19세기 서구의 전형적인 옷차림 새로 책상 위에 한 쪽 팔을 얹은 채 다른 한 손에는 밑그림 제작용 석묵(흑연)을 가볍게 쥔 모습이다. 이 작품을 제작하던 무렵 약관의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르네상스 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미 고전주의 작가들의 작품에 심취하여 그들의 작품을 차례로 모사한 바 있는 까닭에서인지 그리스-로마의 양식을 답습함으로써 극히 정적이며 차가운 느낌을 주는 고전주의 회화의 경향이 이 작품에서 뚜렷이 엿보인다.         벨렐리 가족   이 작품의 특징은 섬세한 묘사의 고전적 화풍을 따르고는 있지만, 여태까지의 전통적인 구도법에서 벗어난 특이한 점을 보인다. 화면의 오른편에 보이는 드가의 고모부인 벨렐리 씨는 의자에 앉아 등을 돌린 뒷모습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얼굴은 측면만을 보이며, 드가의 고모와 두 사촌 누이 동생들은 시선의 방향을 제각기 달리 하고 있다. 이것은 드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으로서 당시의 보수적인 화풍으로서는 상상치도 못할 파격적이며 대담한 구성을 보이는 것이다. 경직된 정면향의 자세보다는 이처럼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함은 현실의 실제감을 더욱더 강조하며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원래 드가의 회화적 특질은 강한 명암 대비, 활달한 윤곽 선묘, 특이한 시각에서 포착한 대담한 구도, 현실감 넘치는 소재의 선택 등인데, 이 작품에서 그는그 중 의도적인 대담한 구성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奏樂席의 악사들   전통적인 화법으로는 중점이 되는 소재를 강조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부수적인 요소를 끌어들인데 반해, 드가는 어떤 상황의 극적인 한 순간을 포착하여 이를 실감 있게 재현하고 있다. 드가의 그러한 면이 비로소 인상주의 회화와 동질성을 갖는다. 이 작품은 주악석의 악사들에 초점을 두어 한참 연주의 절정에 달한 악사들의 진지한 모습을 담고 있다. 구도는 예의 '우끼요 에'의 영향 탓인지 전경은 의자의 등걸이 면과 간막이 선을 대각시켜 중앙부에 편중된 인물과 악기들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춤추는 무희들을, 그 부분만을 그린 까닭은 그곳이 극장의 내부라는 것을 암시하고자 함이며 또한 무희들에게 각광(脚光; foot-light)을 비춤은 환상적인 화려한 분위기를 조성키 위함이다. 이 작품의 내용적인 면에서 분석해 보면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있어서는 드가의 관찰과 상상이 융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젊은 여인의 초상   이 여인상은 드가가 그린 여인의 초상화중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지적인 느낌마저 주는 이 여인의 인상은 자신 속에 깊이 빠져든 채 무엇인가에 골몰하고 있는 느낌을 주며, 용모에 흐르는 차분한 기품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자극한다. 그러한 느낌의 요인은 어딘가를 향해 차분한 듯 하면서도 날카로움을 보이는 눈매, 오똑 솟은 콧날, 굳게 다문 입술, 모든 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는 듯 곧게 세워진 귀, 학처럼 긴 몸 등 여인의 용모를 이루는 요소들이 짜임새 있게 조형화된 데서 비롯한다고 볼 것이다. 그것들과 더불어 가다듬어 틀어 올린 단정한 머리의 차림새가 여인의 청순미를 일층 고조시키고 있다. 르노와르처럼 여인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적이 없는 드가는 유독 이작품에서만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 애호가   도미에는 여러 점의 를 그린바 있는데, 드가가 이와 같은 소재를 택하게 된 것은 그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작품 속의 벽면, 책상 위, 그리고 화판 속에는 여러 장의 작품들이 보이며, 모자를 쓴채 의자에 걸터앉아 자신의 수집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짙은 수염의 남자가 그려져 있다. 정면을 향해 쳐다보고 있는 강인한 인상의 남자를 그린 드가는 굵고 활달한 필치로 채색하고 있다. 훗날, 드가는 화면에 자신의 의도에 따라 커다란 공간을 구성하곤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면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으며 재래적인 공간 구성 법을 택하고 있다. 인물 상체의 배경을 밝게 채색한 것과 와이셔츠의 옷깃이 검은 옷에 비해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것은 강한 명도 대비 때문이며, 이로 인해 인물의 강인 한 인상이 더욱 강조되어 보인다.       국화의 여인   탁자의 곁에 팔을 기대 앉은 여인과 꽃들은 구도상 서로 양분되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꽃송이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데 비해, 여인이 모습은 화면의 한쪽에 치우쳐져 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당연히 인물이 주제가 되고, 꽃은 부제가 될 터인데 드가는 이를 역이용하고 있다. 불균형의 면적비에 비해, 전혀 한쪽에 치우침이 없어 보이는 짜임새는 드가만이 지닌 대담한 구도 설정의 재치일 것이다. 현란한 색채 및 갖가지 크기의 꽃이 한데 어울림이 부분적으로는 산만해 보이지만, 그 산만함이 오히려 여인의 모습과 표정에 시선을 끌게 한다. 또한 인물의 뒷배경을 창문 밖 멀리의 풍경이 내다보이게 함으로써 가득한 화면의 공간감을 확대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피아노 앞의 디오孃   손에 붓을 쥐지 않고 어떤 대상을 바라봄과 그 대상을 그리면서 그것을 관조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대체적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은 보이는 대로의 것을 붙잡아 그대로 옮겨 놓으려고 들 하였다. 이를테면 그것은 전통적인 화법 즉, 어두운 실내의 조명 아래에서 제작함과 전통적인 관념을 구현하고자 함에서 벗어나, 실제의 대상이 지닌 생동감을 포착키 위해 예민한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상주의 화가들은 순간적인 감흥을 옮기곤 하였는데, 드가 만은 그의 눈에 투영된 현실을 기억 속에 담아 이를 다시 정리하여 표현하곤 하였다. 이 작품은 여인 디오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잠시 뒤돌아보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며, 단순화된 면들과 얼굴 쪽에 시선을 이끌기 위해 악보에 높은 명도의 흰색을 채색한 것이 돋보인다.           파강과 오귀스트 드가의 초상   이 작품에서는 참신한 구도를 모색하기 위해 드가가 골몰하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우선 기타를 가슴에 안은 인물은 파강인데 그의 몸체가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정면이 아닌 측면향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의 인물은 드가의 아버지 오귀스트이며 그는 파강보다는 작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피아노 위의 악보면이 밝은 흰색으로 채색되어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파강과 동등한 비중을 보인다. 또 자유 분방한 거친 붓자국과 명도 조절의 효과 등은 드가가 인상주의적인 빛의 작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예의 날카로운 붓자국의 면이 보인다. 이로 인해 여느 작품과는 또 다른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고빌라르 모리소 부인의 초상   드가는 데상에 대해, '데생과 정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라며 '앵그르의 장점은 조화에만 치중하는 다비드화파에 상반되는 아라베스크식의 형태로 반작용하는데 있었다.'고 한다. 앵그르부터 선묘에 대한 교훈을 얻은 드가는 이 작품에서 숙련된 경쾌한 선묘를 보인다. 침대 위에 비스듬히 팔을 기대 앉은 여인은 인상파의 여류 화가 베르트 모리소의 언니이다. 드가는 이 작품에서도 여인의 피부가 드러나 보이는 부분에만 세밀한 묘사를 보일 뿐, 나머지 부분에는 굵고, 가는 선이나 거친면 등으로 대담하게 화면을 처리하고 있다. 수직과 수평이 교차되는 배경의 면들과 유연한 자태의 인물은 심한 대조를 보인다. 그 강한 대조에 따라 시선이 자극되기 때문이다.         화실에서의 자메 티소   1860년대의 드가는 '일본의 우끼요에(浮世畵; 풍속화 판화)'의 영향으로 그의 회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지금까지 고전적인 좌우 균형을 이룬 안정감 있는 구도법에 익숙해 있던 드가는, 의도적으로 균형을 깨뜨린 것과 같은 불안정한 느낌의 '우끼요에'의 구도에서 새로운 회화 표현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전통적인 화법에서의 시각위치는 주로 관점자의 눈 높이인데 반해, 드가가 이 작품에서 시도한 구도는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려다보는 구도이다. 이로 인해 원근감과 공간감이 확대되는 것이다. 이작품의 윗부분 벽면에 가로로 걸린 것은 일본의 풍속화이며, 이러한 풍속화는 유럽의 많은 화가들이 이국 정서에 이끌려 자신들의 작품 속에 화제로서 끌어올리곤 하였던 것이다. 드가도 예외 없이 그것을 이 작품 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불쾌한 얼굴   지극히 도시적이며 인간적인 주제를 즐겨 택한 드가는 그 자신 스스로가 그러한 분위기 속에 처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러한 갈망은 곧 그의 관심이며, 그것은 회화라는 형식을 빌어 그의 인간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드가가 택한 작품의 소재들은 드가 자신이 그것들을 향수하고 그것에서 미감을 구하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소재도 당시의 여느 사무실에서 빚어진 미묘한 어느 상황에 초점을 둔 듯하며 성장을 한 젊은 여인이 책상에 앉은 남자의 곁에서 실쭉 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 배경의 경마하는 장면의 그림은 날쌘 움직임과 밝은 색채로 어둡고 무거워 보이는 화면을 자극하며 두 사람간의 미묘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화면 뒤쪽의 창구와도 같은 것이 보임은 그들이 처한 실내가 은행임을 짐작케하기도 한다.         무용 연습장   대개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색채에 관한 연구를 거듭함에 비해, 드가는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에 관심을 두었다. 이 작품에서도 드가는 특정한 부분에 관심을 두고 그를 강조함보다는 무희들이 무용 연습에 열중하는 장면과 신발을 신거나 무용복을 입고 있는,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등 극히 일상적인 한 단면을 취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드가는 그것을 화면 속에 작위적인 짜임새로 집약함보다는 그 일부분만을 표현함으로써 실제감을 더욱 돋우는 효과를 거둔다. 역광이 투사된 실내 연습장에 발과 다리를 일직선이 되도록 곧추세워 준비 자세를 취한 무희를 필두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무희, 계단을 내려오는 무희 등과 다른 동세의 무희들이 그려져 있어 넓은 공간, 그리고 분주한 연습장의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로 막대를 잡고 연습하는 무희   '우끼요 에'가 드가에게 미친 영향은, 단순하고 정확한 선묘에 의한 날카로운 형태의 파악과 자유 분방한 구도 등이다. 그것은 통념의 범주에서 벗어난 의도적인 설정의 불안정한 구도를 말한다. 그 불안정한 느낌은 오히려 현실의 생생한 느낌을 강조하는데 주효하며, 그로 인해 드가는 그러한 방법을 자주 활용하는 것이다. 연습장의 벽면에 붙은 횡으로 된 막대를 붙잡고 다리가 90도를 이루도록 앞뒤로 들어올리는 연습을 하는 무희들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도 예의 에서 처럼 바닥면과 벽면의 면적 비의 차가 두드러짐과 사선(斜線)으로 기운 동감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중감(重感)때문에 전혀 불안정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더구나 마루 면의 얼룩이나 물뿜이까지도 넓은 공간의 불균형을 바로 잡는 요소가 되고 있다.         꽃다발을 든 무희           무대에서의 발레 연습   드가의 발레에 대한 중요한 관심은 넓은 공간에서 약동하는 무희들의 군상(群像)에 있었다. 즉 드가는 발레의 세계 그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훗일 차츰 무희들의 개별적인 모습 쪽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연습실에서만 이루어지던 것에서 벗어나 실제의 무대에서 총연습에 임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드가는 이처럼 난무하는 무희들의 모습을 스냅사진처럼 생생하게 포착한 다음 그의 기억에 남은 인상을 아틀리에에서 제작하곤 했다. 드가의 그 박진함은 그야말로 기억의 세계를 통해 어느 정도 초현실적인 세계로 치닫고 있음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중심의 무희는 발끝을 모아 제자리에 잘게 움직이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 작품은 처음 펜으로 그렸던 것 위에 유화구로써 채색한 것이어서 펜의 흔적이 뚜렷이 드러나 보인다.         애수   이 작품에서 드가는 무엇인가 형언키 어려운 슬픔에 잠긴 듯한 여인상을 그리고 있다. 거침 없이 뻗쳐진 날카로운 선묘를 보이고, 측면광은 안부(顔部)를 흐르게 하여 시선을 쫓고 있으며, 활달한 붓의 움직임과 회화용 칼의 흔적 등이 이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짙게 하고 있다. 드가의 작품 속에 반영되는 대개의 여인상들에서는 여성다운 가냘픈 면모를 찾을 수 없는데, 이 작품에서만은 고뇌어린, 그리고 고달픔이 담긴 여인의 자태가 보이고 있다. 어떤 깊은 의미가 내포된 듯한 슬픈 표정의 여인을 통해 드가는 그 자신만이 지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이 작품 속에 반영하려 했던 점이 엿보인다. 여인의 모습이 화면에 가득한 점과 활달하여 간략한 묘법으로 보아 다른 작품을 위한 습작 정도로 보여지기도 한다.         압상트   드가는 현실에서 보여지는 것을 조금도 그자신의 미관 (美觀)에 따라 임의로 변형치 않고 실제의 그대로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을 파악하는 그의 관조력이 냉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리의 평범한 카페, 그 내부에 대리석 탁자가 놓이고 무표정하고 초라해 보이는 여자와 다른 곳에 시선을 보내는 남자가 나란히 앉은 모습이다. '우끼요 에'의 영향이 짙은 이 작품은 제작된지 17년이나 지난 1893년에야 발표되었다. 인물의 뒤쪽에 보이는 거울과 탁자의 가장자리 선 등이 사선으로 기움에도 불구하고 인물이 차지하는 중감(重感)으로 알맞은 균형세를 이루고 있다. 압상트 술 잔을 앞에 놓고 앉은 여인은 창녀이고, 이 두 인물의 모델은 드가의 친구 데브탱과 당시 미모의 여배우인 엘렌 앙드레라고 전해진다.         장갑을 낀 여가수   187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드가는 카페를 자주 출입하는데,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드가를 평소 존경하던 로트랙 역시 이 집의 단골이 되어 수많은 명작을 남기게 된다. 드가는 카페에서 노래를 열창하고 있는 여가수를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다. 드가의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가수 한 사람만을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본 것처럼 크게, 그리고 자세히 몸의 일부만을 그리고 있다. 예의 각광을 받고 열창을 하는 이 여가수는 오른 손에 검은 장갑을 끼고 있어 배경의 화려한 커튼과 극명한 명도 대비를 이룬다. 가수를 근접한 위치에서 올려다보며 그린 이 작품과 같은 경우는 드가의 작품 중 그리 흔치 않다. 아무튼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가 전혀 상반된 동적이며, 현실감 넘치는 표현을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기만 하다.       무대 위의 무희   꿈의 날개를 펴 보이는 듯한 이 무희의 자태는 높은 시각에서 포착되고 있다. 커튼 뒤로 가리워진 남자와 무희들은 간략하게 생략된 묘사를 보이며, 주가되는 무희 이외에는 자유 분방한 거치른 필치로 처리하고 있다. 배경의 오른쪽 저 멀리 산과 같이 펼쳐진 무대 장치는 전면의 공간감을 일층 확대시키며 무대 면과의 원근감을 강조해 주고 있다. 각광을 받고 있는 화려한 의상의 무희는 실제의 공연에 있어 주역인 듯하다. 이 작품에 관한 것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의 소장자였던 귀스타브 카이유 보트는 그가 임종하기 전 유언으로써 그의 소장 작품들을 나라에 기증키를 원하였지만, 그 당시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그것들의 대부분이 거절 당하였으나, 드가의 이 작품만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무용 수업을 받고 있는 장면   빠 드 트르와(세 사람이 함께 추는 춤)를 연습하는 정경을 그린 이 작품 역시 벽과 바닥의 공간 대비가 큰 차를 보인다. 화면의 왼편 상단부에는 세 사람의 무희가 몸의 균형을 잡으려 하고 있거나 준비 자세에 임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지도 선생인 듯한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의 옆머리는 괴이하리만치 길쭉하게 보인다. 머리를 길게 늘여 뜰인 오른편의 무희는 곧 이어 배우게 될 무용 자세를 홀로 연습하고 있으며, 화면의 전경(前景)에는 어느 부인이 신문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어느 무희의 보호자인 듯한 이 여인의 무관심한 모습이 무용에 열중하는 다른 인물들과는 상반된 느낌을 갖게 한다. 가까이 그리고 위에서 내려다본 듯한 시각 위치에서 포착한 구도가 특이하다.       디에고 마르텔리의 초상   드가의 친구 마르텔리를 그린 이 초상화는 널찍한 탁자 위에 화구들이 널리어져 있고, 그 곁의 의자에 걸터앉은 화가 마르텔리가 새로운 착상에 골몰하는지 깊은 명상에 잠겨 있다. 이 작품에서도 드가는 예의 높은 시점에서 대상을 파악하고 있다. 인물의 상반신은 평범하지만 하반신은 지나칠 정도로 작게 보이며 바닥 면에 널리어진 신발의 바닥 면이 들여다보이는 것 등이 드가가 높은 시점에서 대상을 포착하고 있음을 감지케 한다. 인물과 탁자는 수직으로 양분되어 있지만 그것들의 중감 때문에 전혀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 드가는 일반적으로 현실감이 넘치는 등적인 자세에 매우 집착하지만, 초상화에서만은 극히 차분한 정적인 표현을 보이는 것이다.       뒤랑티의 초상   드가가 그린 대개의 초상화는 여느 주문에 의하여 그려진 것들이 아니다. 항시 그와 친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드가 스스로가 그들을 그리고 있으며, 또 그것을 그들에게 선물하곤 하는 것이었다. 이 초상화에서의 주인공도 드가와 같은 시대의 비평가로서 드가 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뒤랑티는 '새로운 회화'라는 그의 평론을 통해 드가의 작품을 인용,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드가는 그의 미망인의 생계를 돕기 위해 뒤랑티의 유품 경매에 자신의 작품 4점을 내놓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의 관계는 매우 절친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서재 속에서 잠시 포즈를 취한 뒤랑티를 그린 이 작품은, 수많은 책들이 굵은 선과 면으로 어우러져 중심된 인물 쪽에 시선을 모으도록 하고 있으며, 얼굴에는 잘게 분할된 붓자국이 보이기도 한다.     분장실 속의 무희   이미 발레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이모저모를 날카롭게 관찰한 바 있는 드가는 무희들의 생태와 그 이면에 이르기까지도 그의 회화에 관한 독특한 눈길을 보내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마치 무대 뒤의 분장실 근처를 지나치다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들여다 보이는 분장실의 무희를 그린 것이다. 현실의 세계를 포착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인상주의 화가들과 동질성을 보이면서도 대상의 범위와 그 파악의 면에서는 전혀 다른 면을 드가는 보이는 것이다. 유난히도 세로가 긴 화면의 3분의 1가량을 출입문으로 하고, 그 나머지 화면만으로 분장실의 정경을 표현함은 명도 대비로써 주제를 강조하려 함이다. 문이 열린 틈 사이로 보여지는 분장실은 마치 출입이 금지된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奏樂席의 악사들   이미 음악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여 여러 음악가들과 교우 관계를 갖고 그들의 모습을 화면 속에 끌어들인 드가는 또 하나의 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1860년대에 그려진 작품보다 시각 거리가 훨씬 더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많은 수의 악사들 중 세 명의 악사들 등 너머로 무대 위의 무희가 객석을 향해 인사를 보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특색으로 보이는 점은 고전적인 균형을 이룬 짜임새 있는 구성이 아닌, 현실의 한 단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구도의 설정이다. 이를테면 화면을 가르는 수평의 선분 위, 아래로 각기 무희와 악사들이 배치되어 있는 점이다. 세 사람의 악사들 중 중간의 악사 머리 부분에는 소용돌이 모양의 악기가 그려져 있어 마치 사람의 귀와 같은 연상을 갖게 하는 것도 흥미롭다.         세탁물을 운반하는 두 세탁녀   1879년 제 4회 인상주의 전람회에 출품된 이 작품을 두고 어느 비평가는 '멀리서 보면 도미에의 것과 같아 보이지만 가까이 접근해서 보면 도미에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격찬했다고 한다. 극히 요약된 활달하며 간략한 선묘로써 인물을 묘사한 이외에는 장식적인 어떠한 요소조차도 포함되지 않은 드가의 작품 중 특색있는 작품이다. 두 세탁녀와 바닥면의 짙은 세피아 색을 주조로 한 색과 샛노란 벽면의 색채가 강렬한 명도 및 채도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가 이렇듯이 대담한 공간을 구성함은 새삼스러울 것은 아니지만, 명도 높은 샛노란 색채로써 색의 대비를 이룸은 여태까지의 그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닥과 벽면을 가르는 수평의 면과 두 인물의 높낮이도 수평의 높이를 보이지만, 무거운 듯 세탁물 바구니를 든 구부린 동세가 그러한 경직된 느낌을 완화시켜 준다.         잘못된 출발   드가는 경주마에서 자기의 본성이나 그 시대가 요구하는 조건에 부합되는, 찾아 보기 힘든 주제를 택하였다. 드가는 뮈 브릿지 대령의 스냅 사진을 빌어, 움직이는 동물의 참모습을 연구한 최초의 화가로 손꼽힌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예술가들이 사진을 외면하고 그것을 이용하기를 엄두도 못 내던 때에, 그것에 관심을 갖고 그의 회화 속에 멋진 사진을 남겨 두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로맨티즘의 화가 제리코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출발이 잘못 이루어져 먼저 뛰쳐 나가버린 말과 기수의 힘찬 동세가 어김 없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말의 진행을 억제하려는 기수의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현실감 넘치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말을 화면의 좌측편에 그려놓음도 말의 운동 방향을 암시하고 동적인 느낌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에 서이다.         외교관들이 감상하는 카페의 여인   지금까지 정확한 데생에 의한 형태 파악에 중점을 두었던 드가는 인상주의 전람회를 계기로 점차 밝은 색채 표현의 경향을 보인다. 인상주의적인 색채 분할법 자체를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1870년대 말경부터는 색채가 급속히 화려한 국면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속도감 있는 선의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는 재료인 파스텔에 매료된 때문이었다. 소용돌이 모양의 악기와 모자가 가로지르는 양분된 면을 연결시켜 주고 있으며, 예의 각광(foot-light)은 밤 무대의 화려함을 더욱 강하게 한다. 제명(題名)으로 보아 당시 사교계의 귀빈들과 각국의 외교관들이 이 카페에 참석하고 있는 듯하며, 정열적인 몸짓의 가수가 입은 샛 빨간 의상과 객석의 어두운 색조는 극도의 강한 색의 대비를 이루고 있다.         분장실의 무희   누구의 도움조차도 없이 스스로 분장을 마친 무희가 두 팔을 올려 머리의 맵시를 가다듬는 순간을 드가는 그리고 있다. 거울 앞에 놓인 가스등의 불빛이 아리따운 무희의 얼굴과 화려한 차림새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 보이는 점은 율동과는 무관한 분장하는 모습에서마저도 무희의 율동적인 발의 움직임, 즉 두 다리를 서로 엇갈리게 놓는다는 점이다. 이는 무희의 연작에서 익숙해진 율동 표현의 습성이 은연 중 그렇게 표현케 되지 않았나 짐작되기도 한다. 분장실 내부의 바닥 면에 널리어진 무질서한 것들이 무희의 아리따운 자태와는 상반되어 이질감(異質感)을 준다. 이는 실제의 분장실이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상호 대비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드가의 의도적인 구성이라고 보여진다.         무용 시험   파스텔의 유연한 질감과 화려한 색채를 알맞게 표현한 이 작품은 인물의 특징, 파악의 방법이 자못 날카로움을 보인다. 예의 작품들과는 달리 화면을 가득 메운 무희들이 자신의 발 동작을 살펴보는 모습이거나, 긴 양말을 고쳐 신은 모습이며, 보호자인 듯한 여인이 이를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드가는 이 작품에서 인체의 동세,그리고 신체의 각 부분의 특징을 강조하여 날카로운 선묘를 구사하고 있다. 사각(斜角)을 이루는 지면의 불안정한 느낌을 보완키 위해 수직으로 곧 추선 인물을 두어 대각(對角)을 이루게 하며, 그 결과 V자 모양의 구도를 이룬다. 시험의 차례를 기다리며 준비 중인 무희들의 새하얀 의상은 유연한 여체의 탄력을 뒷바침이나 하듯 유난히도 밝게 빛나 보인다.         휴식을 취하는 무희들   드가는 지금까지 젊은 무희들의 생기 넘치는 발랄한 동세만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고된 일과를 잠시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지친 모습의 무희도 그리고 있다. 화면의 상단 중간에는 신발을 고쳐 신는 무희를, 그리고 왼편에는 지친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턱을 괴고 있는 무희를 각기 그리고 있다. 마치 초벌 그림을 그리 듯한 거침없는 파스텔의 흔적이 완연히 드러나 보이며, 인체의 윤곽선들을 유연한 선들로써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붉은 색의 긴의자는 화면의 긴장감을 이끌기 위해 사선으로 가로 놓여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상단의 무희가 입은 상의 역시 붉은 색의 복장으로 채색되어 있다. 아마도 드가 만큼 파스텔화에 열중하고 그 재질의 특성을 적절히 구사한 화가는 없으리라 짐작되어지는 것이다.           가로 막대를 잡고 연습하는 무희   드가는 바닥에 중요성을 두는 드문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멋진 마루를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때로는 아주 높은 데서 무희를 포착하며 온갖 형태가 마루 면에 투영된다. 마치 해변가에서 게를 내려다보듯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관점과 참신한 구도를 안겨준다. 1876년에 이은 같은 주제의 이 작품은 예의 작품에 비해 무희의 자세, 벽, 의상, 마룻바닥 등 구도보다는 색채 쪽에 치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각기의 작품마다에서 보이는 색다른 구도의 효과라든가 섬세한 필체가 보이지 않고, 작은 필세로 전체적인 색조를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색채 또한 사실적인 느낌보다는 단순히 화면 조화에 치우치고, 마룻바닥의 질감 표현도 전과 같은 사실성을 잃고 있음이 보여지는 작품이다.        
8    [그것이 알고싶다] - 어린이들은 "어린이"를 알고 있는지요?... 댓글:  조회:3646  추천:0  2017-10-17
  한국잡지백년 어린이 운동을 일으킨 어린이 1923. 3   목차 32세에 세상을 떠난 소파 방정환 소파가 중심이 된 색동회 일본 잡지계에서 떨친 마해송 김을한이 동경서 본 마해송과 《모던일본》 《어린이》 창간호 (1923. 3. 20) 《어린이》는 1923년 3월 20일자로 창간된 아동잡지인데, 아동문학가요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이 주재(主宰)했다. 창간호는 별쇄(別刷)한 표지도 없고 목차도 없이 알맹이만 B5판(4·6배판) 12면으로 엮어 푸른 잉크로 찍어 냈다. 흔히 《어린이》의 발행인은 방정환으로 알려져 있으나, 창간호에는 간기(刊記)가 없다. 제2호의 판권장을 보면 발행인 김옥빈(金玉斌), 인쇄인 정기현(丁基賢), 인쇄소 대동(大東)인쇄(주), 발행소 개벽사(서울·경운동 88) 정가 5전이다. 제8호부터는 표지에다 ‘소년소녀잡지’라고 박았다. 발행인 김옥빈은 천도교 청년운동의 핵심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소파는 이때 24세, 창간호부터 발행인으로 나서지 않고 실무를 주재하였고 제31호(1925. 9)부터 발행인이 되었다. 잡지의 판형은 후에 B6(4·6판)이 되었으며, 1934년 7월호까지 통권 122호를 발행했다. 이어 1948년 5월호로 복간, 1949년 12월호까지 15호를 더하여 총 137호를 발행했다. 창간호를 보기로 하자. 소파가 쓴 〈처음에〉라는 창간사는 이러하다.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도 같은 어린 입술로,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노래, 그것은 고대로 자연의 소리이며, 고대로 하늘의 소리입니다. 비둘기와 같이 토끼와 같이 부드러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면서 뛰노는 모양 고대로가 자연의 자태이고 고대로가 하늘의 그림자입니다. 거기에는 어른들과 같은 욕심도 있지 아니하고 욕심스런 계획도 있지 아니합니다. 죄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나라! 그것은 우리의 어린이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어느때까지든지 이 하늘나라를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사람이 모두, 이 깨끗한 나라에서 살게 되도록 우리의 나라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위하는 생각에서 넘쳐 나오는 모든 깨끗한 것을 거두어 모아 내는 것이 이 《어린이》입니다.〈하략〉” 창간사 다음에는 동화작가이며 편집을 맡았던 이정호(李定鎬, 1906~1938, 호 미소(微笑))가 〈《어린이》를 발행하는 오늘까지 우리는 이렇게 지냈습니다〉를 썼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방이나 강습소나 주일학교가 아니라 사회적 성질을 띤 소년회가 우리 조선에 생기기는 경상남도 진주(晋州)에서 조직된 진주소년회가 처음이었습니다.(이하 9행 삭제) 재작년 봄 5월 초순에 서울서 새 탄생의 첫소리를 지른 천도교소년회, 이것이 우리 어린이 동무 남녀 합 30여명이 모여 짠 것이 조선소년운동의 첫 고동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씩씩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고 도와갑시다’하고, 굳게 약속하였고 또 이것으로 우리 모임의 신조를 삼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의견을 바꾸고 해나갈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매주 일요일 목요일 이틀씩을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맨 먼저 우리를 지도하실 힘있는 후원자 김기전(金起田)씨와 방정환 씨를 얻었습니다. 두 분은 누구보다도 제일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또 끔찍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든지 좋게 잘되게 해 주시지 못하여 늘 안타까워 하십니다. 우리는 참말로 친형님같이 친부모같이 탐탁하게 믿고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사실로 소년문제에 관하여 연구가 많으신 두 선생님을 얻게 된 것을 우리 운동에 큰힘이었습니다. 〈미완〉” B5판 12면밖에 안 되는 창간호, 많은 기사를 담을 요량에서 전면 8포인트 활자를 썼으며, 자리에 따라서는 콘사이스 글자만한 7호활자를 쓰기도 했다. 이즈음의 잡지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종이가 귀하던 때라 이렇게라도 해서 보다 많은 것을 독자에게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중에는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비롯하여 〈눈 오는 북쪽나라 아라사의 어린이〉, 동화극 〈노래주머니〉(1막 3장) 등 흥미를 주는 읽을거리들, 이는 모두 소파가 기명·무기명으로 쓴 것이다. 또 하나 눈이 가는 곳은 버들쇠가 지은 동요 〈봄이 오면〉이다. 나는 나는 봄이오면/ 버들가지 꺾어다가/ 피리 내어 입에 물고/ 라×라× 재미스러 나는 나는 봄이 오면/ 진달래와 개나리로/ 금강산을 꾸며놓고/ 쏘꿉장난 재미스러 나는 나는 봄이 오면/ 오색 나비 춤을 추고/ 노랑새가 날아와서/ 꾀꼴꾀꼴 재미스러 버들쇠는 다름 아닌 《어린이》제13호(1924. 2)에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의 〈고드름〉과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구요”의 〈설날〉이 윤극영 작곡으로, 한꺼번에 실려 우리 어린이들에게 처음으로 아름다운 우리 동요를 부르게 해 준 바로 그 시인이다. 본명은 유지영(柳志永 1897~1947), 그는 일찍이 일본 와세다대학 중퇴, 동경음악전문학교 졸업, 1919년 5월 《매일신보》에 공채로 입사, 이후 《조선일보》·《시대일보》·《동아일보》등에서 크게 활약한 당대의 명기자이다. (버들쇠와 윤극영 이야기는 뒤에도 나온다) 맨 끝면의 〈사고(謝告)〉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어린이》창간호가 3월 1일에 여러분 어른께 첫인사를 드릴 작정으로 미리 광고까지 하였습니다마는 세상일이란 마음대로 되지 아니합니다. 소위 원고검열이라는 절차가 어떻게 까다로운지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 어느덧 20여일이 획 지나가고 인쇄하는 동안에 또 며칠이 걸리고 하여 이제야 비로소 변변치 못한 면목을 내놓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내용 기사 중에 짭짤한 구절은 원고 검열할 적에 꼭꼭 삭제를 당하여 마치 꼬리 뺀 족제비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가 잘못한 탓으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하략〉” 아동잡지인데도 검열이 그처럼 까다로웠다는 이야기, 당시 편집자들의 고충이 그대로 들어나 있다. 소파는 육당(六堂)이 펴낸 여러 소년잡지를 읽으면서 자란 세대였다. 그는 육당이 씨를 뿌린 ‘소년문학’을 보다 확실한 ‘아동문학’으로 꽃피게 했다. 그는 동경유학 때 이미 세계명작동화를 추려 엮은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냈으며, 《어린이》를 내면서부터는 동요·동화·동극 등 본격적인 아동문학 작품을 많이 써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땅에서 아무도 하지 못했던 아동인권운동이자 아동문화운동인 ‘어린이운동’을 일으켜 주도했던 것이다. 이 《어린이》는 요즘같이 어린이에게 놀잇거리나 주고 지능개발이나 하는 그런 잡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라없는 소년소녀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면서, 일제(日帝)를 왜 미워해야 하고 왜 물리쳐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 때문에 소년잡지이면서도 삭제 압수 발매금지, 편집자 구금 등의 매서운 탄압을 받아야 했다. 그러다가 경영난에 빠져 폐간하고 말았다. 주요필진은 동화에 방정환 마해송(馬海松) 고한승(高漢承) 진장섭(秦長燮) 연성흠(延星欽) 최병화(崔秉和) 이정호, 동요에 한정동(韓晶東) 방정환 유도순(劉道順), 동요 작곡에 홍난파(洪蘭坡) 윤극영(尹克榮) 정순철(鄭淳哲) 박태준(朴泰俊), 동극에 정인섭(鄭寅燮) 신고송(申孤松), 일반 교양물에 차상찬(車相瓚) 박달성(朴達成) 손진태(孫晋泰) 조재호(曺在浩) 이헌구(李軒求) 등이었고, 또 ‘글뽑기’에서 나온 작가로는 윤석중(尹石重) 이원수(李元壽) 서덕출(徐德出) 윤복진(尹福鎭) 박목월(朴木月) 등이 유명하다. 1931년 소파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이정호 신형철(申瑩澈) 최영주(崔泳柱) 등이 편집을 주간했고, 1933년부터는 윤석중이 그 자리를 맡았다. 《어린이》라는 말을 널리 쓰게 된 것은 이 잡지가 탄생한 후부터였다. 32세에 세상을 떠난 소파 방정환 우리 최초의 어린이운동가 방정환 방정환은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그가 한 일은 우리 어린이와 함께 길이 살아 있다. 그의 〈연보〉를 정리해 본다. 방정환의 호는 소파인데, 잔물·몽견초(夢見草)·물망초·몽중인(夢中人)·북극성·은파리·깔깔박사 등의 많은 필명을 쓰기도 했다. 그는 1899년 10월 7일(음력) 서울 야주개(야주현(夜珠峴), 지금의 당주동)에서 방경수(方慶洙)의 장남으로 출생, 1913년 미동(渼洞)보통학교 졸업했다. 그는 자라면서 최남선이 발간하던 《소년》·《붉은 저고리》·《아이들 보이》·《새별》등을 탐독했고, 그 후에 나온 《청춘》의 현상작문에 당선되면서, 아동문학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 1913년 선린(善隣)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으로 중퇴, 1915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사자생(寫字生)으로 취직했다. 1917년 4월 천도교(天道敎) 3세 교주요, 3·1운동 33인의 대표인 손병희(孫秉熙)의 셋째딸 손용화(孫溶嬅)와 결혼했으며, 이때부터 천도교 관계 기관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1918년 보성(普成)전문학교에 입학, 그 해 유광렬(柳光烈)과 함께 《신청년》을 편집 발간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신문》을 비밀히 발행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20년 4월 일본으로 가서 도요(東洋)대학 문화학과에 들어가 아동문학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그해 6월 《개벽》이 창간되자, 동경특파원으로 활약, 1921년 〈안데르센동화〉·〈그림동화〉·〈아라비안나이트〉등을 초역한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편집, 1922년 6월 개벽사에서 발행했고, 여름방학에 귀국하여 전국을 순회 강연하면서 어린이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사랑의 선물》머리글을 이렇게 썼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혼들을 위하여, 그윽히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읽을거리에 굶주리던 어린이들에게, ‘사랑의 선물’로 펴낸 이 책은 마침내 조선 천하에서 제일 잘 팔리는 책이 되어 《어린이》가 폐간될 때까지 10여년 동안에 20여판이 나갔다고 하며, 그후에는 박문(博文)서관에서 맡아 계속 찍어냈다고 한다. 1923년 3월 월간 《어린이》를 창간했으며, 이어서 5월에는 어린이 운동의 모체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색동회〉를 도꾜에서 조직, 발족시켰다. 그리고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했다. 소파는 어린이에게도 존대말을 쓰자고 외쳤으며, 집안의 손아랫사람이며 자녀들에게도 존대말을 썼다. 1924년 ‘전국소년지도자대회’를 열고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의회’를 조직했다. 1928년 3월 ‘조선소년총동맹’의 발족으로 어린이운동이 좌경화하고,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고, 소년운동의 방향이 달라지자 일선에서 은퇴, 강연회·동화 구연대회·라디오 방송 등으로 활약했으며, 1928년 10월에는 세계 20여개국에서 출품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했다. 1929년에 중학생잡지 《학생》을 발간했으나, 격무로 지병인 신장병이 악화되어 1931년 7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검정말이 끄는 검정마차를 가지고 검정옷 입은 마부가 데리러 왔으니 나는 가봐야겠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장례는 3일장으로 천도교당 앞마당에서 지냈는데 식장은 어린이들의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의 묘소는 구리(九里)시 아차(峨嵯)산 기슭에 있다. 그가 살던 당주동 길가에는 ‘소파 방정환 선생 나신 곳’ 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고, 서울 어린이대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또 윤석중이 세운 새싹회에서는 그를 기념하여 1957년 〈소파상〉을 제정,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상하고 있다. 그가 아동문학 활동을 한 기간은 약 10년간으로서 〈가을 밤〉 〈귀뚜라미〉등 많은 동요를 발표했고, 동화로는 〈천사〉 〈마음의 꽃〉 〈농부와 굴뚝새〉 〈흘러간 삼남매〉등 작품이 많다. 〈어린이 예찬〉(《신여성》 1924. 6 게재)은 그의 대표적인 수필로 꼽힌다. 나온 책으로는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비롯하여 《소파전집》 《방정환아동문학독본》 《소파아동문학전집》등이 있다. 《어린이》초창기에는 소파의 동요만이 아니라, 유지영의 〈고드름〉(1924), 윤극영의 〈반달〉(1924)을 비롯하여 많은 동요가 실렸다. 또 ‘글뽑기’에 뽑힌 작품으로는 윤석중의 〈오뚜기〉(1925), 서덕출의 〈봄편지〉(1925), 이원수의 〈고향의 봄(1926)〉, 윤복진의 〈바닷가에서〉(1926) 등이 유명하다. 뽑힌 그해 윤석중은 열네살, 서덕출 윤복진은 열아홉살, 이원수는 열다섯살이었다.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 호 석동(石童))은 《한국근대인물백인선(韓國近代人物百人選)》(《신동아》부록, 1972. 1) ‘방정환(方定煥)’ 항에서 소파의 숨은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義菴孫秉熙先生紀念事業會)’에서 1967년 5월에 발간한 《의암손병희선생전기(義菴孫秉熙先生傳記)》에 실린 연표에서 소파에 관한 다음과 같은 새 사실이 발견되었다. ‘1921년 11월 10일 천도교청년회동경지회장(天道敎靑年會東京支會長) 방정환(方定煥) 피검(被檢)’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찍어 돌리며 숨어서 활약한 것과 아울러 생각할 때, 소파는 단순한 어린이운동가 동화구연가(口演家)가 아니라 항일 독립투사였음이 확인된 것이다. 그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어린이 운동을 벌였고, 남들은 백년 대계(大計)를 꿈꾸었지만 그는 10년 대계를 세워 10년 뒤의 청년을 어릴 적부터 참되고 의(義)롭게 키우는 일에 목숨을 바쳐 일한 것이다.” “소파가 동네 아이들을 ‘소년입지회(立志會)’를 만들어 스스로 회장이 되어 토론회와 연설회를 가진 것이 1908년이었으니 겨우 아홉 살 때였으며, 치렁치렁 땋아 늘인 머리를 강동 잘라버리고 아저씨를 따라 소학교에 든 것이 일곱 살 때였으니 어지간히 일찍 철이 든 소년이었다. 그 당시는 소파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라 할만한 《소년》(1908. 11. 1)을 발행한 최남선은 그때 나이 열여덟살이었고, 집필자 이광수는 열여섯살이었다. 우리나라 개화기의 선구자들은 10대 소년들이었다. 모두가 자립정신에 불타는 애국소년들이었다.” “1923년 5월 1일은 서울에서 첫 어린이날이 마련된 날이다. 어른들에게는 어린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고, 어린이에게는 앞날의 주인공임을 강조해 주는 뜻깊은 명절로, 천도교소년회를 비롯한 서울 안 소년단체들을 총망라하여 ‘조선소년운동협회’란 이름으로 행사를 했다. 그날 뿌린 색색의 종이에 적힌 글을 몇 줄 따오면 다음과 같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싹(어린이)을 위하는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버립니다’/ ‘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가지, 어린이를 잘 키우는 데 있습니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 ” “매양 이런 것들이었는데 어린이를 업신 여기고 어른들의 노리개로 삼던 완고한 가정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는데 이러십시오, 저러십시오하고, 깍듯이 존대를 해주며 위해 기르다가는 후레자식이 돼 버릴 것이라’고 하여 얼굴을 붉혀가며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소파는 항상 어린이 편이 되어 그들과 울고 웃고 하였다. 그러나 3년을 못 가서 우리나라 어린이날은 두 조각이 나섰다. 민족, 무산(無産) 두 진영으로 갈려 따로따로 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1927년에 ‘소년연합회’가 생기고 그 이듬해에는 좌익 세력의 ‘조선소년총동맹’이 나서자, 소파는 눈물을 머금고 일선에서 물러나, 《어린이》잡지와 동화회, 강연회, 보육학교, 동화강의에만 전심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개벽사’ 발전에 온 전력을 쏟았다.〈하략〉” 소파가 중심이 된 색동회 3·1운동을 겪고 난 조선 땅에는 우리의 뜻과는 반대로 일본바람이 점점 드세지고 있었다. 이런 때에 《어린이》가 나오고, 동경서 공부하는 젊은이 몇 사람이 우리 어린이들을 걱정하여 모임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곧 〈색동회〉이다. 《어린이》는 색동회 동인들이 중심이 된 잡지였다. 그때의 이야기를 동인 몇 분에게서 들어보자. 색동회 회원(1923 ?) (앞줄 왼쪽부터) 조재호 고한승 방정환 진장섭, (뒷줄 왼쪽부터) 정순철 정병기 윤극영 손진태 〈색동회〉동인 정인섭(영문학자 1905~1963, 호 눈솔)은 그가 엮은 《색동회 어린이 운동사(史)》(학원사, 1975)에서 ‘색동회 창립준비회’ 때의 일들을 이렇게 썼다. “1923년 3월 16일 일본 도꾜(東京)에서 유학하던 한국인 몇 사람이 첫 모임을 갖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어린이 운동 단체를 만들자고 했는데, 이것이 〈색동회〉창립을 위한 최초의 모임이었다. 방정환이 중심이 되어, 그 당시 자기의 하숙집인 도꾜 시외 센다가야(千駄谷) 온덴(穩田) 101번지 오이누마(老沼) 집에서, 진주(晋州)의 소년운동가 강영호(姜英鎬), 와세다대학 역사과 손진태(孫晉泰), 니혼(日本)대학 예술과 고한승(高漢承), 도요(東洋)대학 음악과 정순철(鄭淳哲 ⇨ 《룡쳔검》), 조준기(趙俊基), 도꾜고등사범학교 영문과 진장섭(秦長燮), 유학생 정병기(丁炳基) 등 8명이 모여 여러 가지 의논을 한 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를 했다. 1. 그 모임의 취지로는 동화와 동요를 중심으로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곧 아동문학을 통해서 일반 아동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 시절은 한국민족이 일본 정치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속에는 민족의 계몽운동을 목적하고 있었지마는, 그 뜻을 노골적으로 밖으로 표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2. 이 첫 회합에서는 명칭에 대해서 아직 정하지 못하고 다만 추상적 상징적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그 시대의 사정으로 보아 회의 이름을 짓는다 해도 그들의 생각을 암시적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러 회원들이 각각 생각을 해서 그 다음 모임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3. 위에서 말한 8인 이외에도 자격있는 회원을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미 모여진 회원 중에 3인이 추천하면 회원이 될 수 있다고 결의했다. 4. 그뿐만 아니라 국내와 해외에서도 그 모임의 취지를 찬성하고 그들이 목적하는 아동문학과 아동문제를 연구하는 동지가 있으면, 같은 회원으로 추천하자는 것이었다.〈하략〉” 두 번째의 모임은 3월 30일 정병기의 하숙방에서 있었는데, 이날 처음으로 나온 윤극영(尹克榮)이 모임의 이름을 〈색동회〉라고 제의했다. 우리의 전통미를 나타내는 아이들의 색동저고리의 ‘색동’을 따온 것으로 모두들 좋다고 하여 대체적으로 합의했다. 세 번째의 모임은 4월 14일 윤극영의 하숙집에서 가졌는데, 회의 이름을 정식으로 〈색동회〉로 결정하고, 발회(發會)식은 5월 1일에 하기로 했다. 발회하던 날의 모습을 정병기는 회록(會錄)에 이렇게 적고 있다. “서력 1923년 5월 1일 오후 3시에 반세이바시(萬世橋)역에 집합하여 가지고 스루가다이(駿河臺) 미와(三輪) 사진관에서 기념 촬영하니 출석하신 회원이 여좌하다. 손진태 윤극영 정순철 방정환 고한승 진장섭 조재호(曺在浩) 정병기. 동일 오후 4시 니시끼마찌(錦町) 나가세껭(長勢軒)에서 축연을 열고 우리 일동은 장래를 공고하게 맹세하고 폐회하니 오후 6시 반. 7시에 일동이 진장섭 씨 댁으로 가서 성대한 주찬으로 9시까지 재미가 진진하니 놀다가 각각 귀가하다.” 우리 최초의 동요작곡가 윤극영 색동회에는 1924년에 마해송(馬海松) 정인섭(鄭寅燮)이, 그후에 최진순(崔瑨淳) 이헌구(李軒求) 최영주 윤석중 등이 가입했다. 또 사랑을 의미하는 하트 속에 태극이 있고 병아리가 있는 색동회의 마크는 조재호(교육자 1902~1990)가 그려냈다. 한편 서울에서는 동경서 색동회가 발족된 것과 때를 같이한 1923년 5월1일, 천도교소년회가 중심이 되어, 불교소년회·반도소년회 등이 참가하여 천도교 강당에서 〈어린이 날〉을 선포하고 기념식을 거행했다.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갑시다.”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10만장이 넘는 삐라를 뿌리며 시가 행진을 했고, 동화회 강연회 등이 있었다. 동인 진장섭(영문학자 1903~1975, 호 학보(學甫))은 〈소파와 나〉라는 글에서 소파와의 인간관계며 당시의 친구들을 말하고 있다. “소파와 나는 1918년 10월경부터 알고 지냈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보성(普成) 고보는 지금 조계사(曹溪寺)가 자리잡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9월 초순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느닷없이 나를 찾아온 젊은 친구가 있었다. 방정환이라고 했다. 어떻게 이름을 알고 왔느냐니까 그 당시 보성 교장이던 고우(古友)선생에게 들었다고 했다. ‘고우(古友)’는 최린(崔麟) 교장의 아호(雅號)이다. 나는 심중에 짐작되는 바 있어 더 추궁하지 않았다. 그후 둘이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둘이서 뜻이 맞았다. 한 달에 두서너번 서로 찾아다녔다. 그때 나는 열여섯살이고, 방정환은 스무살이었다. 그 이듬해가 바로 기미(己未)년이다. 3월 1일에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소파도 나도 독립운동에 직접 참가했다. 그러나 둘이서 속해있는 단위가 달랐다. 그래서 둘이는 약 월여 동안 소식을 몰랐다. 나는 3월 5일 오전 10시에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 앞 광장에서 있은 결사대의 집합에 나갔다. 그러나 그날은 이미 발검령(拔劍令)이 내려져 무력의 제지로 집회는 개회 전에 해산되고 수다한 학생이 체포되고, 경찰의 첨검(尖劒)에 의해 허다한 학생이 부상되었다. ······ 나는 우측 허리에 칼을 맞아 부상을 입고 2개월간 치료를 받은 흔적도 남아 있다. 그해(기미년) 10월에 발행된 소파 주간의 《신청년》제2호에 나는 〈평양 여행의 모양을 소파 형에게〉란 제목의 기행문을 발표하였으니 이것이 내 글이 활자화된 효시(嚆矢)인 것이다.〈중략〉 내가 일본으로 떠난 뒤에 내 고향 개성에서는 몇몇 문학동지의 손으로 동인잡지 《여광(麗光)》이 발간되었다. 동지 2호에 나는 〈야마구찌(山口)서 송도(松都)까지〉라는 기행문을 실었다. 그 글의 말미에 보면 ······ ‘남대문역에 내리니, 방정환 고한승 마해송 제군이 반갑게 맞아주었다’는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나와 그들 사이에는 빈번한 연락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야마구찌에서 1년을 지내고 나는 1920년 9월에 도꾜 아오야마(靑山)학원으로 가서 1922년에 졸업하고, 그 해 4월에 동경고등사범에 입학했다. 거기서 조재호를 처음 만났다.〈하략〉” 동인 윤극영(작곡가 1903~1988)은 〈나의 이력서〉라는 글에서 소파와 처음 만나서, 밤새도록 〈형제별〉을 노래불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 1923년 3월 따사한 봄날이었다. 나는 하숙집 마당에 나와 서산에 지는 해를 쳐다보며 시골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집은 약간 언덕배기에 있었다. 울창한 대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땅딸한 젊은이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는 마치 나의 하숙집을 행해 오는 듯 했다. 가까워질수록 얼굴 모습이 뚜렷해졌으나 누군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중절모의 그 젊은이는 서슴치 않고 나의 하숙집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그러면서 다정한 말투로 ‘당신 윤극영 아냐?’하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 나는 방정환이야. 알겠어?’ 그는 그때 《어린이》잡지의 주간이었다. 33인 중의 한분인 손병희 선생의 사위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날 첫 대면이었지만 이국서 동포를 만나니 퍽 반가웠다. 뭔가 말할 수 없는 훈훈한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소파는 하숙집의 ‘다다미’방에 들어서자 갑자기 ‘이 집에 피아노 어디 있지?’ 하고 물었다. 피아노는 구석진 골방에 있었다. 나는 그를 피아노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방에 들어서자 그는 대뜸 ‘나는 말야, 이 노래를 좋아해’ 하면서 혼자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형제별〉이었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비치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이 둘이서 눈물집니다.’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지만 구슬픈 맛이 애틋하게 났다. ‘윤극영, 어때?’ ‘좋긴 좋은데 누가 번역했나?’ ‘내가 했지.’ 우린 한바탕 웃었다. 그 노래는 나까가와(中川)라는 일본 사람이 작곡한 일본노래였다. 그러나 그 구슬픈 곡조가 나라를 잃은 우리에게 딱 어울리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피아노를 쳐가며 이 노래를 계속 불렀다.〈중략〉 우리는 밤이 이슥한 줄도 모르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열심히 피아노를 쳤다. 그러나 갑자기 소파는 ‘왜 우리가 일본 노래를 부르지?’ 하고 물어왔다. 나는 처음에 멍청했다. 드디어 소파가 나를 찾아온 이유의 본론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라도 빼앗기고 말도 뺏겼는데, 왜 노래마저 일본 노래를 부르지?’ ‘우리 고유한 노래가 없잖아.’ ‘그래, 노래가 없다. 그것이 문제야. 우리는 3·1운동으로 뭔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못하고 실패만 했지. 실패만 했어. 우리는 그래도 괜찮다. ······ 문제는 어린아이들이야. 그들에게는 우리의 노래도 없다. 윤극영, 어린이에게 줄 노래를 지어라. 그들은 10년, 20년이 흐르면 바로 우리나라를 지고 갈 역군이다.’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윤극영, 자네 혼자 음악공부해서 출세하면 뭣하나. 어린이에 대해 무심하면 안 된다.’ ‘알겠다. 나도 어린이를 위해 힘쓰겠다.’ 소파는 기뻐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이 글썽했다. 그는 어린이 운동을 위한 동지를 모으고 있다고 했다. ······ 나는 무조건 찬동했다. 그리고 또 우리는 피아노를 치며 소파가 번역한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를 밤새도록 불렀다. ······ 〈하략〉”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있은 후부터 윤극영은 우리 동요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윤석중 저 《어린이와 한평생》(범양사, 1985)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따위 창가밖에 없던 그 시절에 우리나라 어린이의 마음을 파고드는 아름다운 동요곡이 처음으로 우리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1924년 2월에 나온 《어린이》지 제13호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의 〈고드름〉(버들쇠 작요·윤극영 작곡)이 발표되었다. 같은 호에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제께구요’의 〈설날〉 곡도 났다. (〈설날〉 노래말이 1월호에 먼저 난 것을 보면 이 작품은 그 전해인 1923년에 된 것일까?) 그런데 윤극영의 〈반달〉 곡은 《어린이》지 그해 11월호에 났으니, 첫선을 보인 동요곡은 〈설날〉과 〈고드름〉이었다.” 동경에 있던 색동회 동인들은 참으로 열심이었다. 작품을 써서는 서울로 보내고, 매달 《어린이》를 읽은 합평회를 열어 의견이나 작품평을, 마해송이 모아 등사해서 돌리고 본사에도 보냈다. 그때 나온 의견 중에는 “어린이를 좀더 씩씩하게 기르자면 눈물나는 읽을거리를 많이 할 것이 아니라,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내용을 70%, 눈물나는 이야기는 30% 정도로 하자” 고 결의한 바도 있었다. 또 마해송은 소파의 ‘눈물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1931년 9월 《조선일보》에 실은 세상 떠난 소파를 추도하는 글 가운데서 이렇게 따지고 있다. “방 군과 우리들(우리들이란 주로 색동회 동인)은 근년에 와서 오히려 상반하는 사이에 있었다. 우의는 여전히 두터우면서 방 군의 《어린이》편집 방침, 아동지도 방침에 대하여는 우리는 오히려 대립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군의 영웅주의와 눈물주의를 극력 배척한 것이다.” 마해송의 주장은 ‘현실을 과학적으로 똑똑히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지니도록 어린이들을 지도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일본 잡지계에서 떨친 마해송 일본서 활약한 잡지인 마해송 아동문학가로 수필가로 유명한 마해송(1905~1966, 본명 상규(湘圭))은 ‘색동회’를 중심으로 한 어린이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그보다는 잡지인으로서 그 명성이 더 알려졌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의 문학적 업적은 접어두고 그가 잡지인으로 활약하던 당시의 이야기를 오늘의 우리 잡지인들에게 들려 주고 싶다. 그는 1921년 니혼(日本)대학 예술과에 입학, 당시 일본 문단의 대가(大家)인 기꾸찌 히로시(菊池寬 1888~1948)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 제자가 된다. 1923년 기꾸찌가 주재하는 《문예춘추(文藝春秋)》창간 편집에 참여, 후에 편집장이 되고, 또 《문예춘추》의 임시 증간호로 내는 읽을거리 잡지 《올 요미모노(オ-ル讀物)》를 혼자서 기획 편집하여 공전의 히트를 친다. 그러다가 1930년 문예춘추사에서 젊은이의 잡지로 내다가 그만둔 《모던 일본(モダン日本)》을 인수, 기꾸찌 사장의 후원을 받으면서 독립하여 크게 성공시킨다. 요즈음 같은 국제화시대도 아닌 그 시대, 더구나 식민지의 한 청년이 동경 한복판에다 내로라하는 잡지사를 경영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담하고 당당한 일인가. 그저 흥미 본위의 잡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 때로는 기개가 넘치는 바른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때 나이 26세, 더구나 지금 일본이 자랑하고 있는 큰 잡지 《문예춘추》의 초창기 편집장이었다는 사실, 이런 일들은 지금 생각해도 우리 잡지인들에게는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비록 우리 잡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한 시대의 문화를 짚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겠기에 이 자리에서 소개한다. 우선 그가 지은 자전적 기록인 《아름다운 새벽》(성바오로출판사, 1974)에서 실감나는 그때의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생각난 것이 임시 증간호였다. 다달이 나오는 잡지 외에 한권을 더 내기로 하고, 그 일을 내가 맡아 그 몫으로 생긴 돈을 받아가지고 여름 한 달 새너토리엄에 휴양을 했으면 했다. 봄철 경마를 보러 교또(京都)에 갔을 때에 경마장 잔디밭에서 넌지시 그런 말을 했다. 스승은 내 생각보다도 더 좋아했다. ‘잘해 봐, 잘 팔릴 거야, 한 번도 한 일이 없는 우리 사의 임시 증간이니 인기를 끌 수 있을 거야. 이익은 반타작하지.’ 이익을 잡지사와 편집하는 나와 반반으로 해주겠다니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시 증간호 편집 일은 거의 아파트 방에서 혼자서 끙끙거렸다. 편집뿐이 아니라 종이 장수도, 인쇄소도 아파트 방으로 불러서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다. 당돌하고 대담한 일이었다. 본지가 10만을 훨씬 안 트는데 15만부를 발행하기로 했다. 누구에게 의논하는 일이 없이 모두 혼자 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이것이 팔리지 않는 날이면 잡지사는 형편없이 쓰러지고 큰 빚을 스승 혼자 짊어져야 할 판인데, 의논 한번 하는 일 없이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것이 대성공을 했다. 15만부가 불과 닷새 동안에 팔렸던 것이다.” 이것은 스승인 기꾸찌 사장과 함께 경마를 보러 갔다가 푸른 잔디밭에서, 편집장은 아이디어를 내고 사장은 응낙하고 그것을 크게 성공시키는, 손발이 척척 맞는 참으로 멋진 장면이다. 이것이 바로 《올 요미모노》의 창간호였다.(‘올 요미모노’란 ‘All 독물(讀物)’ 즉 ‘전부 읽을거리’란 뜻). 또 그가 《올 요미모노》 편집장을 할 때의 이야기 하나를 옮겨 본다. “어느날 기꾸찌 사장이 편집장을 보고 《올 요미모노》 필진에 요시까와 에이지(吉川英治)도 끼워 주라고 당부했다. 아무리 사장의 부탁이라도 탐탁스럽지 않다는 듯 묵묵부답이었다. 2, 3개월이 지나서 사사끼 모사꾸(佐佐木茂索) 총편집장을 통해서 요시까와의 소설을 싣도록 다시 사장의 독촉이 내려왔다. 그래도 편집장 마해송은 가부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편집장은 사장으로부터 추궁을 당한다. 그때서야 편집장은 《올 요미모노》의 필진 명단을 펼쳐 놓는다. 그것은 고정 필진으로 시라이 교지(白井喬二), 무라마쓰 쇼후(村松梢風),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나오끼 산주고(直木三十五) 등이었고, 자유필진으로는 노무라 고도(野村胡堂), 아꾸다가와 류노스께(芥川龍之介), 오까모도 기도(岡本綺堂), 그리고 말석에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로 짜여져 있었다. 당대 기라성 같은 필진이었다. 즉 이러한 일류 필진 속에 이제 초년병인 요시까와 에이지의 소설을 어떻게 싣고 또 어떻게 이 필진에 넣으라는 것이냐는 항변이었다. 갑론을박 끝에 편집장 마해송은 요시까와 에이지 스스로가 작품을 가져오면 게재 여부를 고려해 보겠지만, 편집장의 이름으로 그에게 원고청탁을 하여 원고를 받을 생각은 아직은 없다고 대답했다. 기꾸찌 사장도 마해송 편집장의 고집을 알고 있었던 터라 그럼 그런 방향으로 매듭짓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기꾸찌 사장은 마해송 몰래, 사사끼 총편집장으로 하여금 밀사를 보내 요시까와의 작품을 받아오게끔 지시한다. 이렇게 해서 마해송의 고집을 누구려뜨려 《올 요미모노》의 필진으로 요시까와 에이지가 첫 등장을 하게 된 것이다.” 청년 마해송은 그만큼 고집이 있었고 줏대가 서 있던 잡지 저널리스트였다. 이러한 성품은 사내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 문단에서도 소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말석에 있었다는 가와바다(1899~1972)는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또 요시까와(1892~1962)는 훗날 역사소설의 대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다음은 1930년 문예춘추사에서 새로 낸 젊은이의 잡지 《모던 닛뽕》(Modern 日本)이 넉달만에 수지가 맞지 않아 자진 폐간하는데, 그것을 살리겠다고 고집을 부려, 마침내는 일본에서 5대 잡지, 3대 잡지로 꼽히게까지 이룩해 놓은 이야기가 된다. “겨울이 왔다. 9월에 또 새로 창간한 젊은이의 잡지는 12월호로 폐간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넉달 동안에 결손이 너무 컸기 때문에 아예 폐간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젊은이의 잡지 하나쯤은 조금 적자를 보더라도 끌어 나갔으면 싶었다. 또 어느 정도 수지를 맞출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폐간하는 것을 적극 반대했다. 그러나 폐간을 결정한 것이다. 내가 혼자 해보겠다고 했다. 가망이 없으니 단념하라고 했다. 나는 고집을 부렸다. 잡지를 넷이나 발행하는 대잡지사에 젊은이를 위한 것도 하나쯤 있어야 좋지 않겠느냐, 편집하기에 따라서 또 기획을 새로이 하면 수지가 맞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고집을 부렸다. 나중에는 ‘사에서 안 하면 내가 혼자서라도 해보겠다’고 내친 말을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사장은 승낙하지 않았다. 사에 긴한 사람이니 내보낼 수 없다고 했다.〈중략〉 나는 이를테면 최후 담판을 하러 온 셈이요, 무엇 때문에 승낙을 안 하느냐고 잔뜩 토라져 있었기 때문에 긴장이 지나쳐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사장은,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도 좋아.’ 이건 어이없는 대답이었다. 이렇게 쉬운 일을 십여 일을 두고 초조해 했던 것이 억울했다. 직접 만날 것을 그랬다고 생각했다. ‘누구하고 하려는 거야? 같이 할 사람이 있어? 돈은? 돈도 있어?’ 사장은 낮은 소리로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나는 토라진 채로 투덜거렸다. 아파트에서 혼자 하고 있다, 사람도 돈도 소용 없다고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호호, 돈 없이 어떻게 독립경영을 한담? 내 한 천원 주지. 이건 투자야. 사람도 마음에 드는 사원이 있으면 돌려주지.’ 내내 웃는 얼굴로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람도 주고, 본사 한구석에 자리를 주고, 테이블 등도 주었다. 송별회라는 것도 전에 없던 일었다.〈중략〉 사실 사람도 소용 없고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일은 천둥벌거숭이었다. 본사에서 임시 증간을 혼자 계획 세우고 인쇄소랑 제지회사랑 광고대리업 회사를 아파트로 불러서 일하던 때와는 형편이 달랐다. 종이나 인쇄소 대금, 광고비는 90일 기한의 수형(手形 : 약속어음)으로 거래했었고, 잡지 판매 대금은 그달 월말에 일부가 벌써 들어오고 두달 후면 깨끗이 청산되었던 것이다. 이런 전례만을 믿고 나는 일을 시작했는데, 얼씨구 인쇄소도 제지 회사도 광고대리업도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었다.〈중략〉 ‘당신이 하시면 꼭 성공하시리라고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수인사는 들으나마나다. 종이를 왜 빨리 넣어주지 않느냐 말이다. 다음 말이 청천의 벽력이었다. ‘그런데 ······, 수형거래도 좋습니다만 기꾸찌 선생이 뒷도장을 찍어 주시겠죠?’ ‘아뿔싸!’ 이건 참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이마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으나 안색을 변하지는 않았다. 나부랑이 회사원에게 투덜거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 걱정으로 지체하고 있었소? 염려 말아요, 찍으나마나지만 꼭 필요하다면 얻어드리지.’ ‘참 무어라고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 2, 3개월 만이라도 뒷도장을 찍어주시면 ······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서 ······.’ 그런 말을 다섯 회사 사람이 판에 박은 듯이 했다. 기막히는 일이었다. 수형을 써 가지고 사장실을 찾아갔다. 뒷도장을 찍어달라고 안 나오는 말을 했다. ‘그것 봐! 돈 없이도 할 수 있다고 뻐기더니 ······’ 그러나 웃음 띤 눈을 곧 수형면으로 돌렸다. 내가 너무 긴장해 있었기 때문에 더 핀잔을 주기가 안 되었다고 생각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긴장해 있었다. 그런 경우를 생각해 본 일조차 없었지만, 혹시나 ‘뒷도장을 찍어줄 수 없다’고 한 마디 나온다면 만사는 끝이기 때문이었다. 웃음 띤 얼굴만이 구원이었다. ‘굉장한 금액인데! 이렇게 많이 박았어? 자신 있어?’ 10만 부를 발행했기 때문이었다. 정가 10전짜리가 팔리지 않아서 폐간해버린 것을 맡아 속간하는데, 정가를 15전으로 올리고 10만부를 발행했으니 배짱에 놀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지나가는 말처럼 자신 있느냐고 한 마디 했을 뿐, 지배인에게 뒷도장을 찍어주라고 했다.〈중략〉 선생은 원고료를 두둑이 받았을 때면 가까이 있는 아무에게나 ‘돈 있어? 좀 줄까?’ 하며 호주머니 속에서 집히는 대로 주는 사람이었다. 가난한 살림을 겪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인정이 많았다. 그때는 문단의 대가로 다른 문학가들에 비하면 엄청난 수입이 있었지만, 학생시절에는 남의 신세를 졌었고 졸업 후에도 가난살이를 겪은 사람이었다. 신혼 가정은 2층 한 칸 방 셋방살이였다는 것이었다. 출세해서 재벌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때에도 주위의 사람을 돌봐주기를 좋아했다. 잡지사에서 돈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순전히 작가로서의 수입이었다.” “1939년에는 주식회사를 만들었다. 10만원 전액 불입의 회사는 주금(株金)을 모집하는 것이 아니었다. 독립 경영한 결과 그만큼 돈이 남아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법인체를 만든 것이었다. 내가 신세를 진, 말하자면 좋은 원고를 써준 사람, 그림을 그려준 사람과 사원에게 주식을 나누어 준 것이다. 기꾸찌 선생에게 3만원어치 주(株)를 증정하기로 했다. ‘아이구, 이렇게 많이 주어? 그리고 과반수는 사장이 가져야 할 텐데?’ 내 이름으로 과반수를 차지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조금씩 주식을 고루 나누고 나니 내 앞으로 2만5천여원의 주가 남았다. 사업은 날로 발전했다. 5대 잡지 중의 하나라는 말도 들었고, 3대 잡지에 든다는 말도 들었다. 10주년에는 〈조선판〉이라는 임시 증간을 두 번 발행했다. 내 조국의 역사와 문화와 풍물과 문학과 인물을 자랑하는 기획이었다. 일본 안에서 발행한다고 해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구나 조선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의의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왜곡했고 말살하려 했고, 우리의 성명조차 일본 이름으로 창씨 개명을 강요했고, 우리말을 못 쓰게 했던 때인 만큼 그 임시 중간의 내용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도 새로운 놀라움이었다. 〈조선〉의 옳은 모습을 전하려고 애써 편집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그러했다. 20대의 젊은이라 하더라도 어려서부터 내내 말로 일본의 식민지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제 조국의 진정한 모습을 얻어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애써 편집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수지에 있어서도 장사가 아니라 잔치로 생각했었다. 다 팔려도 크게 밑지는 계산은 10주년을 자축하는 한턱으로 생각했던 것이다.〈중략〉 총판은 네 군데였다. 인쇄소에서 네 군데 총판으로 배본이 끝나면 배본 전표와 용지 전표를 보내온다. 제지회사에서 들어온 수량과 사용한 수량과 남은 수량의 전표다. 배본 전표는 말하자면 총판의 영수증이다. 팔리지 않은 잡지는 두 달 후면 깨끗이 돌아오고, 그러니 두 달 후면 대금도 깨끗이 청산되는 것이었다. 잡지사에는 40명이나 사원이 있었지만 업무 관계는 한두 사람이면 족했다. 머리를 써서 좋은 편집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1945년 1월까지 거의 15년 동안 사장 노릇을 했지만 주판을 가져보지 않았다. 잡지사에 주판이 있었는지 조차 모른다.〈하략〉” (여기까지의 마해송 이야기는 앞의 책 《아름다운 새벽》에서 옮겼음) 앞에서 말한 〈조선판〉은 주식회사로 새출발을 하고, 잡지도 10년째 되는 마당에서 ‘조선의 자랑을 담은 잡지를 만들어 고국에 선물하자’는 뜻이 담뿍 들어 있었다. 제1차 〈조선판〉은 1939년 11월에 나왔는데 A5판 300여 페이지의 두툼한 부피였다. 평판이 좋아 재판을 내려고 했으나 판을 헐었기 때문에 나오지 못했다. 제2차 〈조선판〉은 1940년 8월, 서울에 편집진을 파견, 현지 취재를 하면서 편집을 했다. 제1차와 같은 체제와 분량으로 냈는데 역시 곧 매진되었다고 한다. 이 두 차례의 〈조선판〉에 대하여 해방 후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도야마(富山)대학 교수 가지이 노보루(梶井陟)는, “아동문학가 마해송을 사장으로 하는 모던일본사가 두 차례에 걸쳐 〈임시 대증간 조선판〉을 편집하였다. 그 특집의 내용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역사 민속 등 인간 생활 주위의 모든 분야에 걸쳐 문자 그대로 ‘이것이 조선이다’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제까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두 차례의 〈조선판〉이 민족문학, 순수문학을 주장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당시의 조선문학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조선문학 번역의 발자취 [8]〉, 1982) 김을한이 동경서 본 마해송과 《모던일본》 한국 신문계 원로 중의 한사람인 김을한(金乙漢 1906~1992, 호 동명(東凕), ⇨ 《신문춘추》(1929. 9?) 발행인)은 1939년 4월 동경(東京)에서 조선문화사를 세우고 《조선화보》를 발행했는데, 그 무렵 일본 잡지계에서 크게 떨치던 마해송의 《모던일본》을 현지에서 본 그대로를 《신태양》(1957. 7)에다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그 이야기를 드문드문 옮겨 본다. “당시 일본에는 수많은 잡지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모던일본》은 가장 모던(현대적)한 잡지로서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표지는 미국잡지와 같이 아트지를 썼고, 거기다가 당대 일류 화가들의 유화를 원색판으로 인쇄해서 언뜻 표지만 보아도 그것이 《모던일본》임을 알 수 있을만큼 이채(異彩)가 있었다. 일본잡지계에서 표지에다 저명 화가의 그림을 원색으로 인쇄한 것은 《모던일본》이 효시였던 것이다. 내용도 참신하고 편집도 재치가 있었고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모던일본》은 제일 많이 팔리고 가장 인기있는 제1류에 속하는 잡지였다. 그 사장이 바로 마해송이었다. 일인이 아니고는 사람 노릇을 못하던 그 판국에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한국사람이 잡지를 발행한고, 일본의 대중들이 제일 많이 본다고 하니 얼마나 재미나는 일이냐? 그래서 나는 《모던일본》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통쾌한 생각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내가 동경에서 일하는 동안에 차차 마해송에 대한 지식이 늘게 되었다. 그의 스승 기꾸지(菊池寬)가 경영하는 문예춘추사에서 오락잡지로 시작한 《모던일본》이 몇 달 아니가서 폐간하게 되자, ‘기왕 버릴 바에는 나에게 달라’고 해서 그 잡지를 맡았다는 것과, 적수공권으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한 결과 그가 경영한 뒤부터는 거짓말같이 잘 팔려서 필경엔 《문예춘추》이상으로 《모던일본》이 더 유명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염파 정인익(念坡 鄭寅翼 1902〜1950 납북, ⇨ 《문예시대》(1926. 11) 발행인) 형을 만났더니, 연상 마해송을 칭찬하면서 함께 가보자고 하였다. 그후 얼마 아니되어서 나는 마해송을 찾아갔더니, 그도 나의 이름은 들어서 아노라고 하면서 매우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때 모던일본사는 동경에서도 일류라는 오오사까빌딩에 있었는데 4층인가 5층인가의 어지간히 넓은 방을 여러개 쓰고 있었으며, 남녀 사원이 50여명이나 되었었다. 마해송은 키가 작은 편이었으나 얼굴이 총명하고 영롱하게 생겨서 겉으로만 보아도 교양이 높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침착한 표정과 세련된 태도는 흡사히 어떤 귀공자를 대하는 듯하였다.” “마해송은 개성(開成) 양반의 집 출생인지라, 10여살 때에 벌써 초립동(草笠童)으로 장가를 들었으며 신교육을 받고 지각이 나면서부터 어떤 여성과 열렬한 사랑을 했으나 끝내 성공을 하지 못하고 실련의 상처를 안은 채 홀아비로 지냈으며, 폐병까지 앓게 되어 사선(死線)을 헤매이다가 겨우 재생하게 된 것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일본은 여자가 흔한 나라이고 당시의 마해송은 청년 사장으로서 일본 문화계의 중진이었음으로 그를 아는 사람들은 혼인 중매를 들려고 애를 썼다.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직접 프러포즈하는 일도 많았다. 그렇지만 무슨 결심인지 마해송은 여성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면 그럴수록 여성들의 그에 대한 모정(慕情)은 더욱더 높아질 뿐이었다.” “그는 저녁마다 수많은 문사들을 데리고 빠에 가서 양주를 마시고 요정(料亭)에 가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주 일과(日課)처럼 되었었다. 술값은 얼마든지 잘 지불할 뿐더러 행하(行下 : 팁)도 후하게 주었다. ······ 그는 마실 것을 마시고 먹을 것을 먹고는 절대로 그곳 여성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던 마해송이 갑자기 약혼을 발표하게 되니 모두가 놀랐었다. 오랫동안의 독신생활을 비로소 청산하는 것인데, 그의 신부될 사람은 당시 최승희(崔承喜)무용연구소에서 가장 유망하던 박외선(朴外仙) 양(후일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이었다. 마해송은 일본에서 사업에 성공하고 잡지 관계자가 전부 일본사람들이니까 누구나 그는 꼭 일본여성과 결혼할 줄을 알았는데, 한국여성을 아내로 선택하였다는 데에 또 한번 놀랐었다. 이 한가지만 보아도 마해송의 민족적 자부심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거니와, 그의 스승 기꾸지(菊池寬)는 일대의 문호(文豪)답게 제자의 심중을 헤아린듯, '남오(南烏) 택남지(澤南枝)' (남쪽나라 새는 남쪽 가지를 택하듯이, 한국 남성은 한국 여성을 짝한다는 뜻)라는 축하 휘호를 주었다.” 그는 일본 안에서 앞서가는 잡지 사업을 하면서도 ‘조선’을 잃지 않고 살았다. 많은 유명인사들이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뜯어고치고 일본사람 행세를 하며 우쭐대던 그 시절 그 바람 속에서도, 그는 끝끝내 ‘마해송(馬海松)’으로 버티면서 8·15해방을 맞았다. 마해송은 어느 해 설날 다음과 같은 유언장을 썼다. “유언(遺言), 공부도 재주도 덕(德)도 부족(不足)한 몸으로 외롭단 인생(人生)을 외롭지 않게 제법 흐뭇하게 살고 가게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아껴 주신 여러분 댁내(宅內) 만복(萬福)을 빕니다. 일월(壹月) 일일(壹日) 마해송(馬海松)” 그후 1966년 11월 6일 선종(善終), 향년 61세였다.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의 조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어제 당신을 찾았을 때는 이미 늦었더이다. ······ ‘진로’ 병을 내놓고 한잔 하자고 권하지도 아니하였소, 마지막 껄껄 웃고 갔다지요. 참으로 훌훌하게 가버렸구려. ······ 그 정의, 그 조촐, 그 매력있는 고집을 다시는 바라볼 수 없게 되었구려. 오늘은 삽을 들어 당신의 무덤을 이루는 날, 친구들이 한줌 흙을 던지고 발길을 돌이킬 때, 가을바람은 낙엽을 흩날리고, 당신은 웃는지 조는지 비웃는지 다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구려. 당신의 일생의 큰 공적은 모든 친구가 울면서 이야기했소.” [네이버 지식백과] 어린이 운동을 일으킨 어린이 -   
7    "어린이"와 방정환 그리고 "강도" 댓글:  조회:4369  추천:0  2017-10-17
                                                        ★ 소파 방정환 선생 ★   1. 생애와 활동   방정환선생은 1899년 11월 9일 서울 당주동에서 경수(慶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소파(小波)이다.  소파는  ‘어린이’라는 말과  ‘어린이날’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동문학가, 독립운동가, 문학가, 사회ㆍ문화운동가, 동화구연가, 언론인, 출판인, 교육자, 아동교육 사상가이다. 1908년 10살 때 ‘소년입지회 (少年立志會)’를 조직하여 토론ㆍ연설회를 개최하였고, 1917년 천도교 제3대 교조인 손병희(孫秉熙)의 셋째 딸 용화(溶嬅)와 결혼하였다. 1918년 보성전문학교 입학하였고, 1919년 3ㆍ1운동 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0년 3월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였다. 1920년 8월25일 ‘어린이’라는 말을 『개벽』지에 처음 사용하였고,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 하였다.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1922년 6월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간행 하였다. 1923년 3월 우리 나라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고,  ‘색동회’를 창립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장을 배포하였다. 1925년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를 개최하였고, 1928년 10월2일 세계 20여 개 나라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 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어린이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일생을 오직 어린이를 위한 사업에 바친 그는 1931년 7월 23일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한다.’ 는 말을 남기고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어린이’와 ‘어린이날’ 제정의 배경 소파는 처음에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났으나, 종조부의 사업 실패로 생가가 파산 하게 되자 밥을 굶고 쌀을 꾸러 다닐 만큼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이렇듯 판이하게 다른 두 가지의 성장과정에서 당시의 어린이들이 단지 어른들의 편리한 도구로밖에 인정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고 어린이의 인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란 유교의 가부장적 가족제도 밑에서 어린이들은 천대받고 억압당하는 존재였다. 소파는 어린이들이 좀더 자유롭게 뛰놀 수 있고, 티 없이 밝게 자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로 뜻을 세웠다. 그래서 ‘늙은이’, ‘젊은이’와 같이 아동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격상시키는 뜻이 담긴 낱말인 ‘어린이’라는 호칭을 쓸 것을 주창하였다.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여 어린이의 권익 옹호에 앞장섰는데, 이후 5월 첫째 공일로 바뀌기도 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금지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지만, 그 뜻이 이어져 1946년 5월 5일로  ‘어린이날’을 확정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소파는  어린이날에 배포한 「어린이날의 약속」에서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를 어른보다 더 높게 대하십시오. 어린이를 결코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즐겁게 해주십시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가며 기르십시오. 어린이의 몸을 자주 주의해 보십시오, 어린이에게 잡지를 자주 읽히십시오.” 라고 하여 어린이는 새시대의 새인물로서 인식되고 존중받아야 하는 인격체임을 지적하였다.    3. 소파 방정환 선생의 업적  소파 방정환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화운동가요, 사회운동가였다. ‘소년입지회’를 조직하고 3ㆍ1독립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천도교소년회’를 결성 및 육성하였으며, ‘어린이’라는 호칭을 만들고, 아동문제 연구단체인 ‘색동회’ 조직,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는 등 어린이를 잘 키우는 것만이 우리 민족이 살길이라고 믿어 어린이를 위한 다양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또한 번안 및 개작작가ㆍ동화작가ㆍ동화구연가ㆍ아동 잡지 편집인으로서의 활약도 뛰어났다. 『사랑의 선물』을 비롯한 본격적인 개작 번안, 창작동화를 남기며 최초의 대표적인 구연동화가로 활약하였고 『어린이』잡지를 통하여 윤석중(尹石重)ㆍ이원수(李元壽)ㆍ서덕출(徐德出) 등 아동문학가의 발굴, 육성에 힘썼다. 소파는 어린이를 소박하고 천진난만하며 순진무구한 존재로 보고 감성적ㆍ 교훈적ㆍ권선징악적인 작품을 통해서 사회교화와 어린이들의 자유로운 감성해방을 추구하였다.   4. 추모  1957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새싹회에서 ‘소파상(小波賞)’을 제정하였고, 1971년 40주기를 맞아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을 세웠으나, 1987년 5월 3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능동에 있는 서울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 으로 이전되었다. 1983년 5월 5일에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리 묘소에 이재철(李在徹)이 비문을 새긴 ‘소파 방정환 선생의 비’가 건립되었으며, 1987년 7월 14일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1991년에는 아동문학평론사에서 ‘방정환문학상’을 제정하였다. 1978년 금관문화 훈장, 1980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그가 생전에 발간한 책은 『사랑의 선물』이 있고, 그밖에 사후에 발간된『소파전집』(박문출판사, 1940)ㆍ『소파동화독본』(조선아동문화협회, 1947)ㆍ『방정환아동문학독본』 (을유문화사, 1962)ㆍ『칠칠단의 비밀』(글벗집, 1962)ㆍ『동생을 찾으러』(글벗집, 1962)ㆍ『소파아동문학전집』 (문천사, 1974) 등이 있다.      강도를 감화감동 시킨 방정환(1899~1931)선생  어느 날 밤 소파 방전환 선생님 집에 칼을 든 강도가 들었다. "돈을 있는 대로 내놔! 안 그려면 찔러 죽인다." "돈이 필요하면 달라고 하면 되지 무슨 칼을 들이대고 그러시오?" "돈이 필요하다면 주겠오" 너무나 부드럽고 친절하기까지한 방정환 선생의 말에 오히려 강도가 당황하였다. 방정환 선생은 침착하게 돈을 꺼내 주었고, 강도는 주섬 주섬 돈을 챙겨가지고 나가려고 할 때 방정환 선생은 강도에게 다시 말했다."여보시오! 달라고 해서 돈을 주었으면 고맙다고 인사는 하고 나가야지 않소?" "예 감사합니다." 하지만 강도가 밖으로 나가다가 때마침 근방을 지나던 경찰에게 강도는 잡히고 말았다. 경찰은 강도를 데리고 방정환 선생 댁을 갔다. 현장검증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경찰과 강도를 본 방정환 선생은 태연하게 "또 오셨네그려. 방금 준 돈을 벌써 다 썼단 말이오?" 경찰은 "아닙니다. 이 자가 여기서 강도질을 했다고 자백을 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강도가 아닙니다. 사정이 딱한 것 같아서 내가 돈을 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준 돈을 받고 나가면서 고맙다고 인사까지 한걸이오" 고맙다고 인사한 사람이 어떻게 강도란 말입니까?" 경찰은 의아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강도를 풀어주었습니다. 그제서야 강도는 무릎을 꿇고는 눈물을 흘리면 용서를 빌었습니다. "제가 정말로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나쁜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어린이날 노래 * ( 윤석중 작시 / 윤극영 작곡 )             어린이날 노래     윤석중 작시 윤극영 작곡       - 아름다운 황혼열차에서 모셔온 글 -           1.방정환의 일생 방정환(方定煥, 1899년 11월 9일 ~ 1931년 7월 23일) 독립운동가, 아동문화운동가, 어린이 교육인, 사회운동가. 방정환 선생의 호 소파(小波)는 일본 유학 시절에 선생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일본의 아동 문학가 이와야 사자나미(岩谷小波)의 사자나미(小波)를 따온 것이다. 일본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소파 외에도 잔물, 몽견초, 몽견인, 삼산인, 북극성, 쌍S, 서삼득,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 김파영, 파영, ㅈㅎ생이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방정환 선생은 1899년 11월9일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경수(方慶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를 잃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이고, 그 대신 그림그리기와 글짓기에 재미를 얻었다. 방정환의 집안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마음씨 좋은 고모에게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가난하였다.   방정환이 7살 때인 1905년 삼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중환 교장의 설득으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 보성소학교에서는 입학하는 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하였는데, 이를 본 할아버지는 전통을 단절해야 할 구습으로 보는 진보 지식인들의 급진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매우 화를 내었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손주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하였다고 한다.     1908년에는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9년에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이듬해 1910년 서울 미동보통학교로 전학, 1913년에 졸업했다. 졸업후 방정환은 아들이 상업을 전문적으로 배워서 가업을 이을 것을 바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13년 이광수가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게재되었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2년 만인 1914년 선린상고를 중퇴하였다.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은 아들이 공부를 계속하기 바랐으나,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게 된 것이다     1916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에서 취직하여 서류 필사 업무를 하였는데,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은 토지조사사업 즉, 조선인의 토지수탈작업을 담당하여 지탄을 받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곧 사직하고 천도교 청년회, 개벽사, 천도교 소년회 등의 천도교 기관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가 천도교 기관에서 일한 이유는 부친이 성실한 천도교 신자였고, 방정환 자신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7년 유광렬(柳光烈)·이중각(李重珏)·이복원(李馥遠) 등과 청년운동조직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했다. 1918년에는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인 손용화 여사와 중매 결혼하였다. 결혼하던 해에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여기서 구락부는 Club의 음역이다.)를 조직하여 이듬해부터 기관지 〈신청년〉을 펴냈다. 5년간 활동하면서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으며, 당시 손병희가 지도하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등사판 '독립선언문'을 인쇄해서 중학생들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주일 간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일본경창이 들이닥치기 전에 등사기를 우물에 버렸기 때문에, 일주일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것이었다. 하지만 같이 독립신문 발행에 동참한 청년구락부 동료들은 일경의 고문으로 옥사하였으며 방정환도 고문을 당했다.   1919년 말, 일본 도쿄의 도요 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 문학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했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방정환》전기에 따르면, 당시 일본 경찰은 독립 운동 경력이 있는 유학생 방정환에게 형사를 보내 감시하였다. 1920년~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계급 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하였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으며, 사회주의자가 쓴 글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1921년에는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외국 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다.《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만든 유일한 단행본이며, 다음과 같은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해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이때 〈개벽〉 도쿄[東京]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그해 7월호에 시 〈갈마반도〉와 12월호에 소설 〈그날 밤〉을 발표했다. 1921년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한편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1923년 창간- 1934년 7월 통권 122호를 마지막으로 발간 중지)를 창간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보내 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 준다고 선전해도 불과 8명이 신청할 만큼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대다수의 민중들이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 그래서 민중들에게는 독서가 사치로 여겨지던 조선의 현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정환은 자신의 특기인 재미있는 구연 동화로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였다.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잡지를 선전했다. 《어린이》는 이원수, 마해송 등 아동 문학가들이 이름을 알리는 기회가 되어, 한국 아동문학계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5월 1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였는데, 색동회라는 이름은 후에 동요작가로 활약하게 되는 윤극영 선생이 예쁜 색동저고리를 떠올리며 제안한 이름이다.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 역임하며 〈아기별 삼 형제〉등의 동요·동화·추리소설인《칠칠단의 비밀》등의 소년 소설·동극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에 힘썼으며,세계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아동잡지에 기고 활동을 하면서 소설가 현진건(玄鎭健), 소설가 심훈(沈熏) 등과 문우(文友)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1931년 7월 23일 동화집필, 구연동화, 어린이대상 출판활동 등으로 인한 과로와 비만으로 건강이 나빠진 방정환은 구연동화 활동 중에 쓰러져 경성제국대학병원(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겼으나, 고혈압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간호사들에게 동화를 들려줄 만큼 성격이 밝았던 그는 '문간에 검은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사후 1940년 5월 1일에 마해송(馬海松)·최영주(崔泳柱)가 〈소파전집〉을 펴냈고, 1957년 '새싹회'에서 그의 아동문화운동과 아동문학의 업적을 기리는 '소파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1978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1971년에는 색동회가 주관하고 전국 어린이들의 성금을 기금으로 하여 2년간 제작한 동상이 남산 어린이회관 옆에 세워졌다. 1983년 어린이날 망우리 묘소에 「소파방정환 선생의 비(碑)」가 세워졌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2.방정환에 대한 평가 방정환의 아동문화운동은 어린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한 문필활동으로 나누어진다. 1920년대 한국 사회전반에 나타나 있던 어린이에 대한 불합리한 의식을 계몽하는 활동을 펼치는 한편 유교적 가부장제 아래에서 희노애락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던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감성의 해방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그는 〈어린이〉 등 여러 아동잡지에 창작작품은 물론 해외 아동문학작품을 번역해서 실었다. 그의 번역작품은 선량·정직·노력 등 권선징악의 교훈을 바탕으로 한 해학과 풍자를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사회교화와 어린이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창작동화는 비록 양적으로는 번역동화에 미치지 못하나 가난과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명랑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일제의 지배와 유교적 전통 아래에서 고통받는 어린이에 대한 독자의 인식을 일깨워주는 노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불우한 어린이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극복해나가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채 독자들의 감상에 호소함으로써 소극적인 감상주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번역동화와 창작동화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어린이를 지나치게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존재로 보았는데, 이는 1920년대 한국 아동문학의 일반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967년의 신동아 5월호에 따르면 일본 고등계 경찰관 미와(三輪)는 방정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고 윤극영이 인용하였다.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한 놈이지만 밉지 않은 데가 있어… 그놈이 일본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 //////////////////////////////////////////////////// ========================= 목차 글을 시작하며 출생과 성장 민족운동에 투신 맺음말 조선의 소년 소녀 단 한 사람이라도 빼지 말고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 되게 하자. - 방정환 - 글을 시작하며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운동의 창시자, 선구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방정환에 대한 연구는 주로 어린이운동과 문학이라는 측면에 주목한 것이 대부분이고 그의 민족운동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따라서 방정환의 삶을 정리하면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의 삶의 다른 측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야 하며 이 글을 통해 방정환의 삶을 민족운동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해 보려고 한다. 이 글에서는 방정환의 출생과 성장을 짧게 살핀 후 그의 민족운동을 청년운동, 3·1운동, 소년운동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민족운동가로서의 그의 삶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천도교의 계대교인이며, 교주 손병희의 사위라는 것만 보아도 그의 삶이 천도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방정환의 활동이 천도교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은 그의 천도교 활동을 전제로 전개하였다. 출생과 성장 방정환선생 생가터ⓒ독립기념관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음력 10월 7일) 서울의 야주개(지금의 당주동)에서 출생하였다. 족보 및 방정환이 자신에 대해 남긴 기록들을 보면 방정환은 2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의 방정환은 증조부, 증조모, 조부, 조모, 큰고모, 작은 고모, 삼촌 등과 4대가 함께 거주하는 대가족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1) 방정환 집안의 성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그가 태어났을 무렵 그의 집안은 “장사를 크게 하였고 대단히 큰 기와집을 하나 가지고는 부족하여서 두 집을 사서 사이를 트고 한 집을 만들어 쓰고 있었다.”는 그의 술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2) 그러나 아홉 살 때에 별안간에 그 큰 집에서 쫓겨3)나면서 몰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세가 기운 이후 방정환의 집은 사직동 도정궁 앞의 초가로 이사했고, 그의 조부와 부친은 권병덕4)의 소개로 인쇄소 직공으로 취직5)하여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매우 궁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매우 명랑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1908년에 조직된 소년입지회의 활동을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방정환 소년시절ⓒ독립기념관 한편 방정환은 5세 때인 1903년부터 7세 때인 1905년까지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는 한편 1905년 두 살 위인 삼촌을 따라 보성소학교에 갔다가 교장 김중환(金重煥)의 눈에 띄어 머리를 깎고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6) 이후 방정환은 1909년 사직동에 위치한 매동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고 사직동에서 근동으로 이사하여 12살 때인 1910년 10월 미동보통학교 2학년으로 전학하였으며, 1913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7) 1913년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할아버지의 권유로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은 가난한 방정환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0년 일본 유학을 떠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교수로 재직 중이던 도요대학(東洋大學)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나 학업보다는 천도교 활동에 치중하여 졸업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민족운동에 투신 방정환의 민족운동은 천도교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소년입지회와 경성청년구락부는 물론이고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청년회 활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년입지회와 경성청년구락부는 천도교가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었으나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청년회의 활동은 천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 청년운동 방정환이 최초로 사회운동에 참여한 것은 1908년 조직된 소년입지회를 통해서였다. 방정환의 일생에서 최초의 조직 활동8)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소년입지회는 일종의 토론회로서 8~9명의 회원으로 조직되었다.9) 소년입지회는 점차 규모가 커져서 1910년에는 회원수가 16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방정환은 이 소년입지회의 총대장으로서 훈련원에서 대운동회를 개최하거나 대한문에서 경축행사를 가진 일, 장충단으로의 소풍, 성북동에서의 밤줍기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10) 방정환은 1913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공부에는 뜻이 없었고, 신문화를 흡수하기 위해 독서에 주력하였다. 14살 때인 1914년을 전후로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 『붉은저고리』, 『새별』 등을 탐독하였다.11) 그러던 중 방정환은 졸업을 1년 앞 둔 시기에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였다. 이후 그는 토지조사국에 사자생으로 취직하며, 독학할 것을 결심하였다. 사자생의 임금은 하루에 20전, 한 달에 대략 5원 내외였다.12) 이시기 방정환은 적은 월급으로 인해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17년 그는 권병덕의 중매로 천도교주인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하면서 경제적 곤궁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사회경제적으로도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1918년 7월 7일 방정환은 이중각과 함께 경성청년구락부를 발기, 조직하여 회장 이복원(李復遠), 부회장 이중각(李重珏)을 선출하고, 문예부, 체육부, 음악부를 두었다.13) 경성청년구락부는 방정환이 소년입지회의 활동의 연장선에서 조직된 것으로 판단된다. 소년입지회를 졸업할 정도의 나이인 14세부터의 청소년들로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유광렬은 이 경성청년구락부가 1918년 무렵 회원이 200여명이었다고 증언하였다.14) 이로 보아 방정환은 소년운동단체를 청소년운동단체로까지 확장하여 지속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경성청년구락부는 음악회 개최, 연극 공연, 회원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 등 계몽활동을 주로 전개하는 한편 기관지 성격을 갖는 잡지『신청년』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경성청년구락부의 활동은 1920년대 초 우리 실력양성운동의 흐름과 일치한다. 특히 잡지『신청년』의 발행을 통해 자신들의 논리와 활동을 전파하였다. 한편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지도한 천도교는 3·1운동 이후의 제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문화통치를 선언한 일제의 지배정책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신지식을 수용한 천도교의 젊은 지도층을 중심으로 1919년 9월 2일 경성에서 이돈화, 정도준, 박래홍, 박달성 등이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이하 교리강연부)를 조직하였다. 방정환은 박래홍, 손재기, 이돈화, 황경주, 최혁, 박용회와 함께 간의원으로 선출되어 교리강연부의 지도부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교리강연부는 1920년 4월에는 보다 구체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천도교청년회라 개칭하였다. 천도교청년회는 1920년 6월에는 개벽사를 설립하여 이돈화, 박달성 등이 중심이 되어 월간지 『개벽』을 발간하였다. 방정환도 『개벽』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개벽사 전경(방정환, 이정호, 최영주, 윤석중) 1921년 일본 유학을 위해 동경에 도착한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동경지회는 1921년 1월 10일 발기인 대표 방정환을 비롯하여 김상근, 이기정, 정중섭, 박달성 등이 발기한 후 1월 16일 오후 1시 조도전(早稻田) 학권정(鶴券町) 302호 대선관(大扇舘)에 모이라고 광고하였다. 여기에는 방정환, 김상근, 이기정, 정중섭, 이태운, 박춘섭, 김광현, 박달성 등 10여 명이 모였고, 5~6명은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주소와 성명을 통지하였다. 1921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것을 기념하는 천일기념식을 올리고 오후 3시부터 소석천정(小石川町) 차고 앞에 있는 보정(寶亭) 2층에서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발회식이 개최되었다. 보정의 문기둥에는 궁을기가 내걸리고 정면에는 ‘천도교청년회동경지회발회식’이라고 하는 간판이 걸렸다. 회장 방정환의 개회사에 뒤이어 내빈으로는 학우회 회장 김종필, 동우회 회장 김봉익, 동아일보 특파원 민태원, 매일신보 특파원 홍승서, 각 대학 동창회 대표, 여자흥학회 회장 유영준, 그리고 10여 명의 축사가 있었다.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의 조직 이후 방정환은 1921년 11월 10일 태평양회의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혐의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15)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외에도 동경에는 1922년 1월 천도교 동경전교실을 설치하였다. 동경전교실의 주요 구성원은 방정환을 비롯하여 민석현, 박달성, 이기정, 김상근, 이태운, 구중회, 고경인, 박영환, 강영호, 김의진, 배기원, 정일섭, 정중섭 등이었고, 박사직이 동경전교사로 임명되어 1922년 7월 부임하였다. 이렇게 조직된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는 1921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3개반의 강연대를 조직하여 천도교 진리의 선전과 현대사상의 고취를 목적으로 조선 각지를 순회하는 강연회를 조직하였으며, 방정환은 이와 같이 천도교 청년단체의 변천과 활동 과정에서 각 지역에서 이루어진 강연회의 강사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2) 3․1운동 한편 경성청년구락부 조직 이후 방정환은 천도교주 손병희의 사위로서 교내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방정환은 손병희가 기독교세력과 3․1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의 민족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젊은 지식인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었다. 경성청년구락부는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 송년회 자리에서 이들은 청년구락부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일으키자는 논의를 하였다. 방정환 역시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였는데 1918년 송년회에서 그가 연출한 연극 ‘○○령’의 ‘○○령’은 ‘민족동원령’을 의미하였다. 즉 전 민족을 동원하여 일제의 지배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이 연극의 대본은 방정환이 쓴 것으로 청년기에 접어드는 민족에 대한 방정환의 생각을 잘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나 아쉽게도 현재 이 연극의 대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뒤인 1919년 1월 유광렬이 방정환을 방문하였을 때 방정환은 유광렬에게 경성청년구락부의 민족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청년구락부를 동원하여 한번 소리쳐 보자고 한 것은 어른들이 아무 소식이 없으니까 답답하여서 우리들로라도 무엇이나 하여 보려 하였던 것인데 손선생님은 벌써 지난해 여름부터 세계적 대조류인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지하여 조선민족도 독립운동을 일으키도록 여러 수제자들과 지방 두목에게 지시하여 지금 모든 준비가 집행 중이니 우리 청년들이 섣불리 하는 것보다 어른들이 하는 일에 심부름이나 힘써 하자는 것이었다.”16) 이러한 언급에서 우리는 방정환이 장인인 손병희를 통해 3․1운동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3․1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청년들의 역할로 ‘어른들의 심부름이나 힘써 하자’는 것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방정환은 3․1운동에서 청년들의 역할은 민족지도자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것에 두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정환의 주장에 대해 경성청년구락부의 회장과 부회장이었던 이복원과 이중각의 반응은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 경성청년구락부가 3․1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으므로 방정환의 주장이 수용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방정환은 어떠한 방법으로 민족지도자들의 활동을 뒷받침하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역시 유광렬과 이태운의 회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유광렬과 이태운의 회고에 따르면 방정환은 유광렬과 함께 재동의 방정환의 처가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출판하여 시민에게 돌렸다고 한다. 『독립신문』은 1919년 3월 1일 이른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며 인쇄소 보성사의 사장이던 이종일이 발의하여 윤익선의 명의로 발간된 지하신문이다. 『독립신문』은 1만장 혹은 1만 5천장이 발행되었는데, 시가행진하는 군중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새벽에 15~16세의 남녀학생들이 다른 신발은 소리가 난다 하여 짚신을 신고 밤을 새워 배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경찰이 방정환의 집을 포위하고 수색하려 하자 방정환이 민첩하게 등사판과 원지를 자기 집 마당의 우물에 넣어 증거를 없애 무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경찰은 방정환을 체포하여 일주일 동안 구금하면서 온갖 고문을 가하였으나 방정환은 자백을 하지 않았고, 석방된 이후 방정환은 비밀장소에서 계속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고 한다. (3) 소년운동 방정환은 1920년 「어린이 노래」(『개벽』3, 1920)를 번역하여 소개하면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즉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용어를 ‘늙은이’, ‘젊은이’라는 용어와 대등한 의미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는 어린이를 비하하거나 낮추어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여 부르자는 의미라 생각된다. 이렇게 어린이라는 용어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강조했던 그이지만 소년이라는 용어도 계속 사용하였다. 그는 어린이를 대략 10세 정도로, 10세 이상의 연령이 높은 어린이는 소년이라 구분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회적으로 보통 인식되는 어린이와 소년의 연령은 그로부터 비롯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 창간호ⓒ독립기념관 어린이 7호ⓒ독립기념관 혜성 창간호ⓒ독립기념관     방정환의 소년운동은 잡지 『어린이』의 창간 및 그와 관련된 활동, 천도교소년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 활동, 그리고 색동회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동화, 동요 등의 창작과 번역, 번안 등의 활동도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방정환의 소년운동은 『개벽』을 통해 그 필요성이 주장되고 논의되었다. 천도교 소년운동의 이론을 이끈 김기전은 「장유유서의 말폐」에서 전통사회의 유교적 제도와 체제가 소년의 인격을 말살했으며, 조선이 해방된 근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소년을 해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바탕에서 이돈화는 소년교육에 대해 언어 교육, 유희를 통한 교육, 의복과 침식 교육 등의 가정교육을 강조함과 동시에 유치원과 소년단 등을 통한 교육을 촉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의 개조 본위는 온전히 아동문제에 있다”고 하였다.17) 그리고 이돈화는 어린이에게 경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18) 김기전, 이돈화 등 천도교의 이론가들은 소년, 즉 어린이에 대해 ‘인간’으로서 대우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천도교의 이론적 흐름을 실천하여 어린이운동의 선구가 된 인물이 방정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적 틀 속에서 천도교청년회 포덕부 산하에 1921년 4월 지육체의 발육 방법과 실행을 강구하기 위해 소년부를 설치하였고, 5월 1일 어린이의 인격 옹호, 어린이의 정서 함양, 건전한 사회성의 함양을 목적으로 이를 천도교소년회19)로 개칭했던 것이다. 일본 유학 중이던 방정환은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지도하여 방학이 끝나고 일본으로 떠날 때 400~500명에 달하는 회원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방정환은 1921년 무렵까지 강연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방정환이 강연보다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동화구연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강연이라 하더라도 1922년 이후의 주제는 주로 어린이와 관련된 것이 많았다. 특히 1925년 3월 20일부터 30일까지 『어린이』 창간 2주년 기념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구, 마산, 부산, 김천, 인천 등지에서 ‘소년소녀대회’를 열었을 때 그 선전포스터에 ‘방정환씨 출장 참석합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만으로 대단한 광고 효과를 얻었다. 또 그가 천도교당에서 동화회를 열 때 입장권을 1,000매 발행했으나 늘 2,000여 명씩 와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그의 동화회는 각지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이와 같이 소년운동이 활발해지자 방정환이 이를 보다 확산시키기 위해 소년운동의 지도적인 잡지라 할 수 있는 『어린이』를 1923년 3월 20일 창간하였다. 창간 이후 『어린이』는 독자가 급증하여 1925년 신년호의 경우 발간 7일만에 매진되어 3판까지 발행할 정도였다.20) 이와 같이 3판까지 인쇄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개벽』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방정환이 『어린이』 창간부터 편집을 담당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방정환이 일본 유학 중인 관계로 김옥빈(金玉斌)을 편집 및 발행인으로 두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방정환이 담당하였다고 한다.21) 방정환은 1925년 8월에 발간된 『어린이』31호부터 1931년 2월에 발간된 82호까지 『어린이』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하였다. 방정환이 병으로 눕고 사망하기 전까지 『어린이』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방정환은 『어린이』의 창간부터 자신의 사망 때까지 『어린이』와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방정환은 1923년 3월 16일 동경 센다가야 온덴(千駄谷穩田) 101번지 방정환이 하숙하던 집에서 방정환, 강영호, 손진태(와세다대학), 고한승(니혼대학), 정순철, 조준기(이상 도요대학), 진장섭(도쿄고등사범학교), 정병기 등과 함께 어린이문화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였다. 색동회 조직 과정에서 진장섭과 방정환의 제안에 따라 어린이날 제정을 주장하였다. 색동회 회의록(1923.3.16.)     이와 같이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소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과정에서 조선소년단, 조선소년군, 불교소년회 등도 조직되었다. 방정환은 1923년 4월 17일 이들 단체 등 40여개의 소년운동단체와 함께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어린이날을 조선소년운동협회가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방정환과 색동회 회원ⓒ독립기념관 방정환 어린이날 기념식ⓒ독립기념관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소년운동계에 사회주의가 확대되고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함에 따라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계열에서는 조선소년협회, 사회주의계열에서는 오월회라는 소년운동의 연합기관을 조직하여 소년운동은 분열되었다가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방정환을 위원장으로 한 조선소년연합회가 10월 16일 조직되었다. 맺음말 이상에서 방정환의 민족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의 삶을 정리하면, 첫째, 그는 상인집안의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9살 무렵 가세가 몰락하여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는 한편 보성소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매동보통학교를 거쳐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하였고, 손병희의 사위가 된 이후에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둘째, 그는 시천교 계통의 소년입지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18년에는 경성구락부를 조직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 천도교청년회, 천도교청년당, 천도교청우당 등 천도교의 청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유학과 잡지 『개벽』의 기자로서도 활동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종 강연회의 연사로서 참여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강연주제는 크게 천도교와 관련된 주제, 소년 혹은 어린이와 관련된 주제, ‘잘 살기 위하여’와 같이 삶의 방향성에 대한 주제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그가 천도교라는 종교 속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경성청년구락부 활동 과정에서 이른바 ‘민족대표’ 등의 어른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것이 청년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3·1운동 때 ‘민족대표’를 뒷받침하여 『독립신문』을 출판하여 시민에게 돌리는 활동을 전개하다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넷째, 그는 소춘 김기전과 함께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였고, 1923년에는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등 소년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어린이날은 그가 일본에서 색동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추진한 일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여타의 민족운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계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소년운동에서도 민족주의계열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년운동단체는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계열에서는 조선소년협회, 사회주의계열에서는 오월회라는 소년운동의 연합기관으로 분화하였다. 1931년 7월 10여년에 걸쳐 소년운동 뿐만 아니라 청년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였던 그는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만 31세의 짧은 삶을 마감 하였고, 대한민국정부는 1990년 방정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방정환 영결식 방정환의 묘(망우리) [네이버 지식백과]방정환 [方定煥] - 어린이의 영원한 벗, 건국훈장 애국장 1990 (독립운동가)  
6    "내 쓸개를 잡아 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댓글:  조회:1854  추천:0  2017-10-17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 시인 오장환의 발자취를 찾아서         오장환문학관과 생가 전경           오장환시인은 백석(1912~1955), 이용악(1914~1971)과 더불어 193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시인이지만  월북작가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었기에  우리사회에서는 이름을 부르는게 금기시돼 있었으니까요.          오장환 시인의 생가   1918년 보은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시인은 안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향수"로 잘 알려진 정지용에게서 시를 배웠습니다.    1933년에는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실으며 문단에 정식 데뷔했고 서정주(1915~2000) ,  이용악과 더불어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 또는 삼재(三才)로 불렸답니다.   1930년대 데뷔 당시에는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활동을 시작하였고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정적인 시와 동시를 발표했으나 해방 후에는 현실적인 참여시를 많이 발표했습니다.   시집으로는 성벽1937년), 헌사(1939년), 병든서울(1946년), 나사는곳(1947년) 등이 있구요.    오장환은 서정주, 유치환과 함께 생명파면서도 식민지 현실, 이 땅과 사람들에 대해서  치열한 현실인식을 가졌기에 생명파에 속하면서도 생명파와 구분되며  모더니즘 시에 속하면서도 모더니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적 성취를 보여줍니다. -오장환문학관 홈페이지 발췌           오장환문학관              오장환의 시는 리얼리즘 시가 많으며 현실에 대한 관심이 시에 스며 있는데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대와  전쟁의 비참한 현실 고발, 반봉건의식, 식민지 근대도시에 대한 비판, 농촌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합니다.          휘문고 2학년 재학시 문예반과 함께 한 오장환(맨 오른쪽)      휘문고등학교가 한국문화의 요람이었네요.  저는 소월 김정식을 배출한 저의 모교인 배재가 한국문학의 요람인줄 알고 있었는데........   어린이 1923년 3월에 창간되어 1949년 12월에 통권 137호로 폐간, 창간 초기에는  천도교소년회의 "새싹회" 회원들이 주관하였으며 방정환이 중심 인물이었다. 주요 집필자는 고한승, 마해송, 정인섭, 윤극영, 이원수 등의 아동문학가들이었고  1930년대에는 이광수, 주요한, 주요섭, 이태준, 정지용 등의 문인들이 참여하였다.     삼일기념시집 1946년 3월 문학가동맹 시부의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김광균, 김기림, 이용악, 서정주 등 16명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으며   오정환의 시 "나의 길(부제-삼일기념일을 맞으며)"이 실려 있다.   인문평론 1939년 10월에 창간, 1941년 4월에 통권 16호로 폐간, 편집겸 발행인은 최재서이고 인문사에서 발행했다.   주요 집필자는 김기림, 김남천, 박영희, 백철, 이원조, 임화였다. 1940년 1월 1일 신년특대호 10권에 오장환의 시 "신생의 노래"가 실려 있다.    해방기념시집 1945년 12월 "중앙문화협회"에서 광복을 맞아 해방후 3개월간 발표되었던 작품을 한데 모은 시집 오장환의 시 "연합군 입성 환영의 노래"가 실려 있다.     오장환 시인이 최초로 쓴 작품으로 보이는 시   1937년 발간한 첫 시집 "성벽"   1939년 발간한 두번째 시집 "헌사"   1947년 발간한 네번쩨 시집 "나사는곳"         ♧순수한 시어를 사용한 오장환 시인의 동시들을 감상해 보세요.                            아뭏든 감사드리고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오장환문학관을 만들고 운영 중인 보은군 관계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오장환 문학관 주위에는 감나무가 많아 10월 중순 무렵이면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다는데 그 때 다시 가거들랑 시 한 수 지어볼까 합니다.      그리고 위의 동시와는 또 다른 파격적인 오장환 시인의 "병든 서울"을 감상해보세요.             병든 서울                                                오장환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蕩兒)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그러나 하루 아침 자고 깨니 이것은 너무나 가슴을 터치는 사실이었다. 기쁘다는 말, 에이 소용도 없는 말이다. 그저 울면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나는 병원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어째서 날마다 뛰쳐나간 것이냐. 큰 거리에는, 네거리에는, 누가 있느냐.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는 줄 알았다.   아, 저마다 손에 손에 깃발을 날리며 노래조차 없는 군중이 만세로 노래를 부르며 이것도 하루 아침의 가벼운 흥분이라면…… 병든 서울아, 나는 보았다. 언제나 눈물 없이 지날 수 없는 너의 거리마다 오늘은 더욱 짐승보다 더러운 심사에 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나다니는 사람에게 호기 있이 먼지를 씌워 주는 무슨 본부, 무슨 본부, 무슨 당, 무슨 당의 자동차.   그렇다. 병든 서울아, 지난날에 네가, 이 잡놈 저 잡놈 모두 다 술취한 놈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를 하다시피 아 다정한 서울아 나도 밑천을 털고 보면 그런 놈 중의 하나이다. 나라 없는 원통함에 에이, 나라 없는 우리들 청춘의 반항은 이러한 것이었다. 반항이여! 반항이여! 이 얼마나 눈물나게 신명나는 일이냐   아름다운 서울, 사랑하는 그리고 정들은 나의 서울아 나는 조급히 병원 문에서 뛰어나온다 포장친 음식점, 다 썩은 구루마*에 차려 놓은 술장수 사뭇 돼지 구융*같이 늘어선 끝끝내 더러운 거릴지라도 아, 나의 뼈와 살은 이곳에서 굵어졌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무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8월 15일, 9월 15일, 아니, 삼백예순 날 나는 죽기가 싫다고 몸부림치면서 울겠다. 너희들은 모두 다 내가 시골 구석에서 자식 땜에 아주 상해 버린 홀어머니만을 위하여  우는 줄 아느냐.  아니다, 아니다. 나는 보고 싶으다.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하늘아 그때는 맑게 개인 하늘에 젊은이의 그리는 씩씩한 꿈들이 흰구름처럼 떠도는 것을……   아름다운 서울, 사모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 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 나는 고향까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길거리에서 자빠져 죽는 날, ‘그곳은 넓은 하늘과 푸른 솔밭이나 잔디 한 뼘도 없는’ 너의 가장 번화한 거리 종로의 뒷골목 썩은 냄새 나는 선술집 문턱으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 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내 눈 아 그 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쓸개 내 눈깔을 뽑아 버리랴, 내 쓸개를 잡아 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상아탑 창간호, 1945.12)                  * 구융 : ‘구유’의 사투리로 마소의 먹이를 담아 주는 나무 그릇.  
5    시비(詩碑)에 또 시비(是非)를 걸어보다... 댓글:  조회:2373  추천:0  2017-10-17
  문인들의 기념비는 당사자에게나 그 문인을 배출한 고장에나 참으로 자랑스러운 조형물이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전국적으로 문인들의 기념비 건립이 유행처럼 번져서, 최근에는 살아있는 문인들의 기념비도 심심찮게 건립되는 추세다. 기념관이나 문학관은 비용도 많이 들고 보기에도 거추장스럽기 때문에 생가나 동네 입구, 또는 모교 교정에 간소한 기념비 하나쯤 세우는 건 보기에도 정겨울 듯하다. 우리 고향 문경에도 김시종 시조시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文名을 드날리는 분이 여럿 계실텐데 기념비는 세웠는지…     문인들의 기념비 가운데는 시비(詩碑)가 압도적으로 많다. 기념비에 관한 한 소설가 수필가 평론가 등은 완전히 찬밥이다. 시비에는 앞면이나 뒷면에 그 시인의 대표시를 새기는데, 글자 수가 많은 소설 수필 평론 등은 다 새길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고 보니 시 낭송회는 들어봤어도 소설 수필 평론 낭송회는 들어본 적이 없으며, 시화전(詩畵展)에는 참석해봤어도 소설화전 수필화전 평론화전은 가본 적이 없다. 소설 낭송회에 가서 원고지 1200장 분량의 장편소설 한 권을 다 들어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우리나라 시비의 효시는 1948년 대구 달성공원에 건립된 이상화(1901~1943) 시인의 시비다. 이상화는 소설가 평론가 번역가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다. 그의 대표시 는 왜정치하의 젊은이들에게 독립 의지를 고취시킨 웅혼한 정신을 담고 있다. 그는 대구 수성못 언덕에서 수성들판을 내려다보며 이 시를 지었는데, 현재는 수성못 언덕에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상화의 동생 이상백은 우리나라 사회학계의 선구자로서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IOC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전국적으로 1100여 기의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책에는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시비가 건립된 시인은 박목월로 전국에 모두 16기가 건립되어 있고, 뒤를 이어 한용운 김소월 조지훈 유치환 정지용 이은상 서정주 윤동주……순으로 복수의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박목월의 시비는 내가 본 것만도 16기가 넘는다. 대전에서 계룡산 동학사 가는 길가에는 라는 주막이 있는데, 그 집 화단에도 주인이 화강암에 새긴 박목월의 아담한 시비를 세워놓았다. 책에서 언급한 시비 숫자는 아마도 문단에 등록된 공식 시비만을 집계한 모양이다.           기념비를 조성하는 장소로는 생가, 연고지, 모교 또는 재직한 학교, 작품의 배경이 된 장소, 출생지나 거주지의 공원, 묘지 등 다양하다. 박목월이나 김소월처럼 전국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시인은 연고가 없는 곳에도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전국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에는 강소천 마해송 방정환 윤극영 이원수 등 아동문학가들의 기념비가 있고, 대구에 있는 시비공원에는 이름에 걸맞게 무려 35인의 시비가 모여 있다. 시비공원에는 시인들의 육필원고를 입수하여 그 필체대로 시비를 새겼다니 탁월한 발상이라 하겠다.                                         실적도 없는 생존 문인의 시비가 우후죽순처럼 조성되는 현상도 문단의 우려를 사고 있다. 돈푼이나 있는 작가는 겨우 한두 편의 작품만 발표하고도 제 돈으로 여기저기 문학비를 세운다니, 문인의 가치를 싸잡아 깍아내리는 짓이다. 시비에 새기는 시도 생각해볼 문제다. 어딜 가나 김소월의 시비에는 만 새기고 박목월의 시비에는 만 새기는 것도 문제지만, 대표작이 아닌 시를 아무렇게나 골라 새기는 것도 문제다.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그 작가를 대표하고 기념비를 세우는 장소와 연고에 맞는 작품을 신중하게 골라서 새겨야 할 것이다. /////////////////////////////////////////////////////////     돌에 새겨서 세운 돌, 이것을 비석(碑石)이라고 한다. 이렇게 비석에 새긴 글자는 금석문의 하나로, 또는 역사적인 자료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비는 중국에서 먼저 시작이 되었는데 한나라 이전에는 자연형의 돌에 새긴 각석(刻石)이 있었으나 정방형으로 돌을 다듬어 새긴 정식의 비는 한나라시대 묘비에서 발달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비는 글자를 돌에 그대로 새긴 갈(碣)이 있고, 일정한 형태로 돌을 다듬어 글자를 새긴 비(碑)가 있다. 비의 모양은 몸체인 사각기둥 모양의 비신(碑身)이 있고, 머리 갓 부분인 뿔 없는 용을 조각한 이수(螭首)가 있고, 비석을 기반으로 받치는 거북모양의 귀부(龜趺)가 있다. 비신의 앞, 겉면을 비양(碑陽), 뒷면을 비음(碑陰)이라고 하고, 새겨진 글을 명(銘), 비음부분에 새겨진 글을 음기(陰記) 또는 비음이라고 한다. 비의 종류에는 능에 세우는 능비, 묘에 세우는 묘비,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 그 외로 순수비, 기념비 등이 있고, 최근에는 시비, 노래비 등이 있다. 이러한 비에 쓰인 문장들은 대체로 한자를 많이 썼으나 최근에는 한글을 많이 쓰게 되었다. 최근의 한글비문은 다양한 서체의 발달로 과거 궁체 일변도에서 한글 판본체나 활자체를 많이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글씨는 금석문으로의 가치를 고려해서 대체로 수준 높은 명필가의 필적을 많이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한글서체의 변천사적 연구에서 비문의 서체는 대단한 가치로 인정받게 되었다. 최근에 이르러 한글사용이 일상화되면서 많은 한글비석이 건립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한자비문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세운 한글비문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조선시대에 건립한 한글 비문 두 가지를 밝히고,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50여 년간 전국에 걸쳐 건비한 문학비, 시비, 노래비 등 한글비석을 대상으로 비석의 형태, 비문 내용과 서체적 특징, 조형미 등을 시도별로 나누어 밝혀보고자 한다.     2. 조선 시대 한글 비석   1. 양주 영비 최초의 한글 비문으로 밝혀진 것은 현재 서울 노원구 하계동 산 12-2(전: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일명 영비(靈碑)이다. 양주(楊州) 영비각자(靈碑刻字)라고도 하는 이 비는 조선 초기 중종31년(1536년)에 세운 한문으로 새긴 묘비의 측면에 경고성 한글 문장을 새긴 것이다. 이 비문이 있는 묘는 중종 시기에 조광조의 제자이며 학자로 승지(정3품)를 지낸 성주인(星州人) 묵재(墨齋) 이문건(李文楗 : 1494-1567)의 부모인 윤탁(允濯)부부(부인-고령신씨)를 합장한 것이다. 비문을 “靈碑” 라고 한자로 적고 그 아래에 세로로 다음과 같은 한글 문장을 옛 서체로 음각을 하였다. 「녕 비라 거운 사 ㅣ화를 니브리라 이 글모 사려 알위노라」 이 말은 이 비문은 ‘신령한 비이므로 파손하면 화를 입게되니 손대지 말라’ 라고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알아보도록 남긴 경고문이다. 이 비문 글씨는 한글 비문 중 최초의 것이며 한글 반포 직후의 상원사 권선문(1464년) 필사체와 비슷하다. 이 비문은 이문건이 짓고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 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27호(1974년지정)로 크기는 높이가 175cm, 폭 80cm이며 본래의 위치에서 20여m 떨어진 공원에 옮겨 비각을 세워 안치(1998년)하였다.   2. 포천 인흥군 묘계비 1685년에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에 세워진 인흥군 묘계비는 조선 시대 선조의 제12왕자 인흥군(仁興君) 영(瑛)의 묘의 남쪽으로 250m 떨어진 묘역진입로 주변의 경작지에 서 있는 한글 비석이다. 인흥군의 본래의 비가 아니고 묘지 경계에 세워 묘역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한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려고 세운 경고문 형식의 금표라고 볼 수 있는 비석이다. 금석학적인 가치가 있는 이 비의 북면 하단에 20자 5행으로 한글 고어체로 새긴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이비가극히녕검니심도사람이거오디말라」 풀이 : 이 비가 극히 영검하니(영묘한 위력이 있으니) 생심도(어떠한 생각으로라도) 사람이 거오하지(거만스럽게 낮추어 보지) 말라.           3. 현대 한글 비석   1. 서울지역 문학비 비문 글씨 서울지역의 한글 또는 한자와 한글을 혼용하여 쓴 시비로는 박목월, 김수영, 오상순, 윤동주, 김소월 등의 것이 있고, 문학비로는 강소천, 이원수, 방정환, 이상, 윤극영 등의 것이 있으며, 시조비로는 정몽주, 한용운 등의 것이 있다. 또 노래비로 윤선도의 오우가비도 있다. 이러한 비석들의 규모는 대부분 상하로 긴 전통적인 옛 비석보다는 자연석이나 가로로 긴 사각형 모양의 비가 많이 있다. 이 비석을 건립한 장소는 출생지, 근무지, 생거지, 대학, 또는 공원이나 대로 가장자리에 세운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비석의 문자는 한글과 한자를 부분 배자 한 경우, 한자와 한글을 혼서한 경우, 순수 한글로만 각을 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문장의 서체로는 한글은 직접 필사한 판본체가 많고, 한자는 대체로 비문 제목에 사용했는데 전서체와 예서체로 나타냈고, 특수한 경우에는 한글 활자체를 그대로 사용한 경우도 있다. 전체 문장의 문자 배자는 세로쓰기보다는 가로쓰기를 많이 했고, 문자의 조각은 음각을 많이 했으나 양각을 한 것도 나타난다. 어린이 대공원에는 비 제목과 내용을 한글판본체로 쓴 강소천(1915-1963) 문학비(닭)와 방정환(1899-1931) 문학비(어른들에게 드리는 글..,), 이원수(1911-1981) 문학비(고향의 봄) 가 건립되어 있다. 남산에는 전체 제목은 한자예서로 내용은 한글판본체로 자연스런 모양의 돌에 음각을 한 김소월(1902-1935) 시비(산유화),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제목은 한자예서, 내용은 일반 필기체로 나타낸 김수영(1921-1968) 시비(풀)가 있다. 학교 구내에 세운 비문으로는 한양대학교 교정에 세운 제목은 한자 전서체, 내용은 산도화를 한글판본체로 나타낸 박목월(1917-1978) 시비(산도화), 연세대학교 교정에 제목을 한글판본체로 조각하여 나타낸 윤동주(1917-1945) 시비(죽는날), 동국대학교 교정에 제목은 한자, 내용은 한글로 음각을 한 이안눌(1571-1637) 시단, 송파구 보성고등학교 교정에 제목(이상문학비)은 한자예서체, 내용은 한글워드서체(안상수체)로 오석에 음각을 한 이상(1910-1937) 문학비(오감도) 등이 있다. 도봉구 수유리에 제목은 한자, 내용은 한글 판본·예서체로 육면체돌에 음각을 깊게 한 오상순(1898-1693) 시비(방랑의 마음), 윤극영의 반달문학비, 옛 서울대학교 자리에 한글판본체로 나타낸 윤선도(1587-1671)의 오우가비가 있다. 삼청동 공원에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여 조각한 정몽주(1337-1392) 고전 시조비(이몸이)와 파고다 공원에 1967년에 건립한 한용운의 시조비(시조3수)가 있다. 그 외에 공원, 교정, 대형건물, 유적지 등에 조병화, 김현승, 최남선, 윤곤강, 김기림, 김종길 등의 한글,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여 조각한 기념비, 시비, 문학비 등이 세워져 있다.           2. 경기지역 문학비 비문 글씨 경기도내의 시비나 문학비는 각 시군에 산재하여 있다. 비석의 종류는 묘비, 문학비, 기념비, 시조비, 추모비 등 다양한 편이다. 시비로는 파주시에 황진이, 김종문, 김광섭, 고양시에 노천명, 광주시에 허난설헌, 용인시에 정몽주, 이하윤, 안성군에 조병화, 화성시에 홍사용 등의 시를 조각한 비가 있고, 문학비로는 파주시에 주요섭, 과천시에 차천로, 시흥시에 이상노, 한정동, 양주시에 박종화, 이수광, 남양주시에 이광수, 여주군에 유주현, 이색 등의 비가 세워졌다. 또 부천시에 변영노 기념비, 포천에 양사언 시조비, 안산시에 오상원 추모비, 남양주시에 이광수 기념비, 용인에 정몽주 시조비 등 연고지에 여러 종류의 한글 또는 한글과 한자를 혼용한 비석을 세웠다. 시비, 문학비는 비석의 형태가 다양하고 기념비나 시조비는 상하가 긴 전통적인 형태로 만들었으며, 글씨의 서체는, 제목은 한자의 경우 예서체와 전서체, 한글인 경우 판본체가 많다. 그리고 문장 내용을 쓴 서체는 판본체가 가장 많고, 궁체와 작가의 친필체도 있다. 몇 가지 시비의 건립장소와 서체 등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김기팔(1937-?) 방송인의 방송비는 1993년에 파주시 조리면 장곡 2리 휴게소 입구에 한글판본체로 음각하여 현대적 느낌이 나는 조형물로 만들어 세웠고, 김동리(1913-1995) 묘비에 “김동리 찬” 이란 제목으로 서정주 글과 김충현 글씨로 전통적인 비석으로 만들어 광주시 오포면 신현 2리에 세웠다. 노천명(1911-1957) 시비(고별)는 김충현 글씨로 새겨서 고양시 벽제면 가톨릭묘역에 세웠고, 박종화(1901-1981) 문학비는 양주군 장흥면 부곡1리에 김구용 글씨로 새겨서 세웠으며 변영노(1897-1961) 기념비는 부천시 원미동 23통에 제목은 한자로, 문장은 “논개”를 한글 판본체로 사각형 오석(검은 색의 비석 재료 돌)에 새겨 세웠다. 양사언(1517-1584) 시조비는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금수정에 1989년 한글 예서체로 자연석에 새겨 세웠고, 정몽주(1337-1392) 단심가비, 즉 시조비(이몸이....)는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그의 묘역 부근에 한문부분은 예서체로, 한글부분은 판본체로 자연석에 음각을 하여 세웠다. 오상원(1930-1985) 추모비는 한자와 한글판본체로 “증인”을 안산시 옛 향교 터에 세웠고, 이광수 기념비는 양주시 광릉 세조 묘역 아래에 “춘원 이광수 기념비” 라고 김기승 글씨체로 전통적인 비석에 새겨 세웠다. 이하윤(1906-1974) 시비는 용인 한국민속촌에 蓮圃詩碑라는 한자 제목으로 내용은 “물레방아” 시를 한글 판본체로 조각하여 세웠고, 조병화(1921-) 시비는 친필의 필기체로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문화마을에 세웠다. 주요섭(1902-1972) 문학비는 1984년에 파주 탄현면 법흥리 기독교묘지에 한글판본체로, 홍사용 시비는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에 한글 판본체로, 황진이 시비는 1982년에 파주 임진각에 6수의 시조를 한글로 조각하여 건립하였다.         3. 강원지역 문학비 비문 글씨 강원도 지역의 한글 시비나 문학비는 다른 시도에 비해 적게 건립된 편이다. 시비로는 화천군에 이태극, 평창군에 이효석, 인제군에 한용운, 강릉시에 정철, 허엽, 허균, 허낭설헌, 신사암당, 김동명 등의 것이 있고, 시조비로는 영월군에 김삿갓과 왕방연 등의 대표작을 조각한 것들이 있다. 강원도에는 다른 시도에 비해 작가위주의 비석보다는 지방의 문학적 특색을 기념하기 위한 비문이 건립되었는데 정선군의 정선아리랑, 아우라지비가 대표적인 예이다. 김동명(1900-1966 ) 시비(파초)는 제목을 한자로 문장을 한글 궁서체 비슷하게 나타내어 강릉 미노리와 주문진사이의 시비공원에 건립했고, 허균의 스승 이달의 시비는 1983년에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문장을 한문부분과 한글부분으로 나누어 조각하여 건립하였으며, 이태극(1913- )시비는 화천군 길동면 구만리고개 파로호 부근에 “산딸기” 시를 한글판본체로 새겨서 세웠다. 한용운의 시비는 인제군 백담사 경내에 “나룻배와 행인” 한글 궁체와 유사한 서체로 새겨 세웠고, 허난설헌과 허균의 남매 시비는 강릉 초당동(교육연수원입구)에 한문과 한글로 조각하여 세웠다. 김유정 문학비는 춘천시 의암호 의암댐 인암리에 세웠고, 왕방연 시조비는 제목은 자연석에 한글판본체로, 내용은 사각형의 오석에 조각하여 영월군 영월읍 청령포 선착장에 세웠으며. 정철의 시비는 “관동별곡”을 조각하여 강릉 경포대와 삼척 죽석루에 세웠다. 지방의 특색을 살린 아우라지 노래비는 정선군 북면 유천리 여랑5리에 제목은 한글판본체로, 내용은 한글궁체로 새겨 세웠고, 정선아리랑 민요비는 1977년에 정선군 정선읍 봉양7리 비봉산 입구에 전통적인 비석에 한글판본체로 새겨 세웠다.           4. 대전ㆍ충남지역 문학비 비문 글씨 대전광역시에는 비석이 많지 않아 충청남도와 같이 묶어서 살펴보았다. 대전광역시에는 시비로 건립한 것에는 한성기, 박용래, 김관식, 한용운, 이덕영, 정훈 등의 것이 있고, 서산시에 윤곤강, 부여군에 김시습, 신동엽, 홍사준, 천안시에 심훈, 윤동주, 이상화, 이육사, 홍대용, 공주시에 임현도, 정한모, 논산군에 김관식 등의 것이 있다. 문학비로는 서산시에 민태원, 홍성군에 한용운, 이달, 김동욱, 부여군에 무왕 등이 것이 있다. 기념비로는 한용운, “관촌수필” “흥타령” 등이 있다. 충남지역은 시비를 많이 건립하였는데 독립 기념관에는 한용운 어록비를 포함하여 40여 개가 있고, 각 시·군의 공원, 사찰, 고개 등에 많이 건립한 것으로 파악된다. 김시습 매월당 시비는 부여군 부여읍에, 심훈 시비는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필경사와 필경사 산길에, 윤곤강(1911-1950)의 시비(나비)는 서산시 읍내동 서산문화회관에, 이달(1561-1618)시비는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남산공원에, 이덕영 시비는 대덕구 미호동 신탄진 대청댐에 각각 한글 일반체나 판본체로 조각하여 세웠다. 정한모의 시비는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입구에 이곤순이 쓴 한글판본체로, 정훈의 시비는 대전에서 금산으로 가는 만인산 머들령고개에 자연석에 네모진 오석을 붙여 “머들령”과 내용을 한글판본체로 조각했고, 기초석에는 “丁薰詩碑” 라고 예서체로 새겨 세웠다. 한성기 시비는 대전 문화동 시민회관 광장에 시 문장을 세모진 자연석에 한글판본체로 새겨 세웠다. 홍사준의 시비는 부여군 부여읍 국립 박물관에 한글 판본체로 새겨서 세웠다. 한용운의 시비는 홍성읍 성곡리 출생으로 홍성읍의 남산공원과 천안독립공원, 대전 중구 사정공원(판본체-조종국 글씨) 등 여러 곳에 세웠다. 천안 독립 기념관에는 한용운(어록비)을 비롯하여 이상화(빼앗긴...), 윤동주(서시), 심훈(그날이...), 이육사(광야) 시비 등 40여개의 시비나 어록비를 건립하였다. 천안 흥타령비와 홍대용(1731-1783)의 시비가 천안삼거리 공원에 한글판본체로 새겨져 세워졌고, 김동욱의 문학비는 홍성군 남산공원에 있으며, 관촌마을 표지석(이문구 소설-관촌수필 무대)은 보령의 특산물인 오석에 글씨가 새겨져 1995년에 보령시 대천역에 세워졌다.           5. 충북지역 문학비 비문 글씨 충청북도에 건립된 시비는 충주시에 이상화, 박재륜, 권태응, 음성군에 구상, 옥천군에 정지용, 단양군에 신동문, 김삿갓, 보은군에 오장환, 영동군에 이영순, 구석봉, 권구현의 것이 있고, 문학비로는 음성군에 이무영, 권근, 진천군에 조영희, 조벽암, 청원군에 김기진, 제천시에 권섭 등의 것이 있다. 기념비나 표지석으로는 괴산군의 홍명희 고향 표지석, 보은군 우리 마을 자랑비 등이 있다. 박재륜(1910-)의 시비는 충주시 충주체육관 앞에, 권태응(1918-1951)의 시비(감자꽃)는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에, 정지용의 시비는 옥천군 옥천읍 옥천체육공원에 각각 한글궁체 또는 한글판본체로 사각형이나 자연스러운 모양의 돌에 새겨 세웠다. 같은 영동군 출신인 구석봉, 이영순, 권구현의 시비는 영동군 양산면 송호리 국민관광단지에 한글판본체로 새겨 건립하였다. 권섭(1671-1749)의 문학비는 1993년에 제천시 신동공원에 “영삼별곡”을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여 김응현이 판본체로 새겨 세웠다. 또 권근(1352-1409)의 문학비는 “성대별곡”을 사각기둥모양의 오석에 음각하여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세웠다. 김기진(팔봉 1903-1985)의 문학비는 그의 고향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에 네모진 오석에 한글판본체로 조각하여 세웠고, 이무영의 문학비는 그의 고향 음성군 음성읍 설성공원에 비제목은 한자로 음각을 했고, 내용은 여러 편의 오석에 한글 정자체로 조각을 하여 세웠다. 정철(1536-1593) 시비는 진천군 문백변 봉죽리 은골 송강사에 세웠고, 김병연(김삿갓) 유적비는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에 한자예서와 한글판본체를 혼서한 김응현의 글씨로 새겨서 세웠다. 조선 시대 문인 김정(1486-1520)출생지를 기리기 위한 “우리마을 자랑비”는 보은군 보은읍 종곡리에 세웠다. 이 비의 형태는 머리와 몸통 부분은 전통적인 비석모양이고 좌대와 기초석은 현대적 멋을 나타낸 모양이다. 홍명희 고향 표지석은 네모진 사향면에 한글판본체로 조각하여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그의 고향마을에 세웠다.           6. 광주ㆍ전남지역 문학비 비문 글씨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작가 연고지 또는 집단 시비 건립지역에 세운 시비 및 문학비와 노래비, 가비, 기념비, 안내비 등을 살펴보자. 시비로는 광주시에 김영랑, 박용철, 조지훈, 윤선도, 정충신, 이순신, 박상, 김덕령, 임제, 이동주, 김현승, 김삿갓 등의 것이 있고, 담양군에 정철, 나주시에 임제, 김혜성, 박성건, 해남군에 이동주, 구례군에 박목월 등 20개, 고흥군 한하운, 장흥군에 한승원, 이청준 등의 것이 있다. 문학비로는 목포시에 김현, 김진섭 등의 것이 있고, 노래비로는 목포시에 “목포의 노래” 고흥군에 목일신의 것이 있으며, 기념비로는 광주시에 “영호남 사랑과 우정의 기념비”가 있다. 광주시에 있는 비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김병연(김삿갓)의 시비로 광주 북구 무등산 아래에 제목을 금강산(金剛山)이라고 한자로 쓰고 본문은 한문과 한글로 나누어 가로로 긴 사각형 오석에 새긴 것이 있고, 한쌍으로 세운 김영랑과 박용철의 시비는 광주시 남구 광주공원에 한글 판본체 글씨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사직공원에는 박봉우(조선의 창호지), 박상(시구), 김덕령(시조), 임제(시조) 등 옛 충절 문인들의 글과, 이동주(강강술래), 이수복(봄비) 등 현대 문인들의 다양한 형태의 비석과 서체의 한글 시비가 있다. 전남지역에 있는 비석은 대부분 각 시군 지역과 연고가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김영랑(1903-1950.김윤식) 시비인 “모란이 피기까지”는 그의 생가가 있는 강진군 강진읍 내에 한글 판본체로 가로로 긴 돌에 새겨져 있다. 소록도와 관련 있는 한하운(1920-1975) 시비(보리피리)가 고흥군 소록도중앙공원에 있고, 해남이 고향인 이동주의 시비(강강술래)가 해남군 삼산면에 있다. 김진섭(1903-1950)의 문학비가 목포시 남교동에 한글과 한자 혼서체로 새겨져 있고, 문일석의 노래비(목포의 눈물)가 목포시 유달산에 가로폭이 긴 네모꼴 오석에 한글궁체로 조각되어 있다. 조선 시대 문인인 백광홍(1522-1556)의 가비인 관서별곡을 장흥군 안양면 풍재고개에 세웠고, 정철(1536-1593)의 성상별곡을 자연석에 한글판본체로 조각하여 담양군 창평면 식영정에 세웠다. 구례군 화엄사 길에는 시의 동산을 조성하여 국내 저명시인 박목월, 김영랑, 김소월, 조병화 등 20인의 시비를 세웠고, 광주시 망월동 입구에는 “영호남 사랑과 우정의 기념비“를, 장흥군 장흥읍에는 장흥읍성 표지석을 한글 궁체로 조각하여 세웠다.         7. 전북지역 문학비 비문 글씨 전주시를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에는 시비와 문학비가 서부지역과 동부지역에 편중되어 있고, 중부지역인 완주군, 김제시, 임실군, 순창군, 정읍시 등에는 아주 드문 것으로 나타난다. 한글로 조각하여 세운 시비로는 익산시에 이병기, 전주시에 이병기, 신석정, 김해강, 이철균, 부안군에 이매창, 신석정, 고창군에 서정주, 정읍시에 정극인, 남원시에 산의당김씨, 장수군에 변영로, 무주군에 공병호, 진안군에 삼의당부부, 이성계 등의 것이 있다. 문학비로는 무주군에 김환태, 군산시에 채만식 등이 있고, 노래비는 고창군에 신재효의 것이 있다. 따라서 전라북도에는 시비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난다. 김해강(1903-1987)의 시비는 전주시 시민공원에, 변영노(1897-1961)의 시비(논개시비)는 장수군 장수리 의암사 입구에, 서정주의 시비(선운사가)는 전북 고창 선운사에, 신석정(1907-1974)의 시비(네 눈방울에서는)는 1975년에 전주시 시민공원에 건립하는 등 각각 다양한 형태의 돌에 한글의 여러 가지 서체로 조각하여 시비들이 건립되었다. 이병기(1891-1968) 시비(가람시비-별)는 생가가 있는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 동상(흉상)과 더불어 자연석에 한글예서체로 조각했고, 전주시 시민공원에는 가람시비라는 제목으로 가리개식 형태로 만든 오석에 조각을 하여 세웠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시비는 진안군 마이산 이산묘 부근에 속금산이라는 제목으로 한문부분과 한글부분으로 나누어 배자하여 세웠다. 조선초 학자 정극인(1401-1481)의 상춘곡 가사비는 정읍시 원촌마을 무성서원에 가로폭이 큰 네모진 오석에 비제목을 한자예서, 내용은 한자와 한글을 혼서한 서체로 조각하여 세웠다. 채만식(1902-1950)의 문학비는 군산시 월명동 월명공원에 비제목은 한자예서, 문장제목은 한자, 문장은 한글판본체로 쓴 강암 송성용 글씨로 조각하여 건립하였다. 정읍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정읍사비는 정읍시 내장사 길목에 비제목을 井邑詞碑라고하여 전서체로, 내용은 한글로 원형 오석에 조각을 하여 세웠다. 또 흥부의 출생지를 알리기 위해남원시 동면 성산리 마을 입구에는 “흥부마을-출생지”라는 제목의 큰 글자를 자연석에 음각하여 세웠다.           8. 부산ㆍ경남지역 문학비 비문 글씨 부산광역시의 시비는 공원에 집중적으로 건립하였다. 부산시 용두산 공원에 유치환, 최계락, 원광, 조향, 홍두표, 손중행, 박태문 정하보 등의 시비, 금강공원에 이주홍, 최계락, 이영도의 시비, 어린이대공원에 박목돈, 박화목, 김남조, 이황, 이형기, 박두진, 이은상, 윤선도, 노천명, 김소월 등의 시비, 동백공원에 최치원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경상남도에는 문인들의 연고지가 많아 시비, 문학비, 노래비, 기념비 등 다양한 비문들이 많이 건립되었다. 시비로는 진주시에 변영로, 이경순, 설창수, 사천시에 박재삼, 통영시에 유치환, 이순신, 마산시에 이원수, 이은상, 김수돈, 김용호, 정진업, 박재호, 김태홍, 이일래, 진해시에 김달진의 것이 있다. 문학비로는 함양군에 박지원, 하동군에 김필곤, 울산광역시에 오영수의 것이 있고, 노래비로는 울산시에 서덕출, “처용가”, 양산군에 이원수의 것이 있다. 부산시에 건립된 비문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양한 형태와 서체로 이루어졌음을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시대 최치원의 시비를 동상, 유적비와 같이 해운대에 건립하였고, 이광수의 시조비를 “해운대에서”라는 제목으로 자연석에 조각하여 부산 해운대 달맞이고개에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여 조각 건립하였다. 또 조선시대 학자 겸 수군이었던 노계 박인로(1561-1642) 문학비(선상탄 중에서)를 둥근 자연석에 새겨 부산 해운대 수영성에 세웠고, 수영부근에 정과정 시비를 네모진 돌에 새겨 세웠다. 부산 용두산 공원에는 유치환(1908-1967)의 시비(그리움)를 둥근 돌에 한글 예서체로, 최계락의 시비(바위)를 가로폭이 큰 오석에 한글 판본체와 궁체로, 유치환의 시비(바위)를 자연석에 한글예서체로 음각하여 세웠다. 어린이대공원에는 네모진 오석에 조각한 김정한 문학비, 자연석에 오우가를 조각한 윤선도의 시비와 김정한, 박화목, 김남조, 이황 등 여러 학자, 문인들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경상남도 진주시에는 변영로(1897-1961)의 논개시비가 1991년에 진주시 진주성 촉석문에, 설창수(1916-)의 시비(의랑 논개의 비)가 1954년에 진주시 진주성 촉석루에 한글 궁체로, 이경순(1905-1985) 시비(저언덕)는 1989년에 진주시 남강서편에 제목은 한자예서, 본문은 한글판본체로 자연석에 새겨 세웠다. 또 진주시 금산면에는 1996년에 “덕의 마을” 이란 제목의 한글 판본체(정문장 글씨)로 조각을 한 강희근 시비가 세워져 있다. 유치환의 시비는 부산 수정가로 공원과 남도여상, 통영시 남망산공원 등 여러 곳에 세웠고, 이원수의 노래비(고향의 봄)도 양산군 양산시 교동 춘추공원과 마산시 산호공원에 세웠다. 이일래의 시비는 마산시 산호공원 시의 거리에 한글판본체로, 박재삼의 시비는 사천시 삼천포 노산공원에 오영수의 문학비(노고지리의 꿈)는 울산시 울산문화원에 각각 한글판본체로 조각하여 세웠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비(한산섬..)는 통영시 남망산 공원에 세웠다.           9. 대구ㆍ경북지역 문학비 비문 글씨 대구와 경북지역은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한 곳으로 시비, 문학비, 기념비 등의 건립이 많은 편이다. 대구광역시의 시비로는 이상화, 이호우, 문학비로는 백기만의 것이 있고, 경북지역에는 시비로 경주시에 박목월, 고유섭, 이경록, 박종우, 유치환, 안동시에 우탁, 이육사, 상주시에 황오, 김천시에 정완영, 조위, 배병창, 군위군에 일연, 칠곡군에 조지훈, 장석모 등의 것이 있고, 문학비로는 청도군에 이호우, 영양군에 조지훈, 오일도의 것이 있으며, 시조비로는 문경시에 이우출, 포항시에 한흑구, 노래비에는 안동시에 이현보, 경주시에 박목월의 것이 있다. 대구지역의 시비를 보면 백기만(1901-1967)의 시비(산촌모경)는 대구시 달서구 두류공원에 비제목을 한자예서체 양각으로, 본문은 한글판본체로 오석에 음각을 해 세웠고, 이상화(1901-1943)의 시비(나의 침실로..)는 대구 중구 달성공원에 비제목 尙火詩碑는 한자전서체로 양각을 했고, 본문은 한글 일반필기체(친필)로 음각을 해 세웠다. 경북지역의 경주시에는 건천면 모량리 출신 박목월의 시비(달)가 보문단지 목월공원에 비제목은 朴木月詩碑라고 한자예서체로, 본문은 목월의 친필글씨로 조각하여 세웠고, 황성공원에도 그의 노래비가 있다. 유치환의 시비(석굴암대불)은 경주시 불국사 정문 옆 자연석에 비제목은 한자 전서체로, 내용은 한글 일반체로 자연석에 조각하여 세웠고, 이경록의 시비(사랑가)는 경주시 불국사 입구 우정의 동산에 사각형 돌에 한글 판본체로 조각하여 세웠다. 문경시에는 문경새재 민요비가 문경새재 제2관문에 자연석에 한글서체로 조각하여 세웠고, “산불됴심비”가 문경시 문경새재 제2관문 직전에 자연석 조선 후기 옛 한글체(지방문226호)로 세워있다. 안동 출신 이육사의 시비(청포도)가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 부근 생가터에 제목은 한자예서체로, 본문은 한글판본체로 써서 세웠다. 조선 시대 무관 박인로(1562-1642)의 노계가비가 영천시 도계서원에 비제목은 한자예서로, 문장은 한글과 한자를 혼서한 일반체로 조각하여 세웠고,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1206-1289)의 시비가 그가 있던 군위군 고로면 화북동 인각사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호우(1912-1970)의 시비는 청도군 남성현 고개에 자연석에 한글판본체로 조각하여 세웠고, 정석모(1922-1987)의 시비(능금두벌꽃)는 칠곡군 지천면 신동 사양서원 부근 청구공원에 자연돌을 쌓고 네모난 오석을 붙인 조형물에 새겨 세웠다. 영양군 출신의 조지훈 시비(다부원중에서)가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다부전적기념관에 한글 판본체로 새겨 세웠고, 그의 문학비는 생가가 있는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세워졌다.   10. 제주지역 문학비 비문 글씨 “시가 있는 동산”에 건립한 시비로 한하운시비, 오성찬시비, 노천명시비, 김영랑시비, 장윤우시비 등 54개의 국내 현대시인 시비가 있다.           4. 맺음말   전국에 산재하여 있는 한글비문은 조선 시대의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현대의 비문은 많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대의 한글비문은 일반적인 유적지, 전승지, 명승지, 건설공사지 등의 기념비나 안내비가 있고, 문인들의 시비, 문학비, 문학기념비 등이 있는데 이번 글에서는 문학비와 시비를 대상으로 비문의 서체, 비석구조물의 특징, 비문의 내용 등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조선 시대에 건립한 비문으로는 서울 중계동의 양주 영비, 경기도 포천의 인흥군 묘계비, 경상북도 문경의 산불조심비 정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양주 영비나 포천 묘계비는 본래의 비를 보호하기 위한 주의 경고문으로의 한글비이고, 산불조심비는 계몽 안내비로 정규적인 비석들이 아니다. 현대에 건립된 문학비, 시비, 노래비는 조선 시대나 일제시기에 태어난 학자, 문인, 무인등의 문학과 시를 알리는 비문으로 전국에 걸쳐 출생, 성장, 체류를 했던 연고지의 생가, 공원, 학교, 고개, 마을 입구 등에 건립했다.  저명작가 일수록 비석이 여러 곳에 세워졌고, 대도시에 세워진 비석 중에는 주변 도(道)의 시군에 세워진 비석을 중복하여 세운 경우가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건립시기는 5, 60년대 보다는 70년대이후 최근에 건립한 비문이 많고 최근의 비문일수록 한글전용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비문의 주제목은 “ㅁㅁㅁ의 시비” 또는 “ㅁㅁㅁ의 문학비”라는 제목으로 한자의 경우는 전서체와 예서체로 썼고, 한글은 판본체로 나타냈다.  비문의 내용은 시, 동시, 시조, 노랫말 등 짧은 글이 대부분이고, 이러한 글을 세로로 배자하여 한글판본체 또는 한글궁체로 음각으로 조각하였다. 비문의 형태는 자연스러운 모양도 가로폭이 조금 큰 사각형이 많으나 그 외로 원형을 비롯한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낸 것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상하폭이 긴 전통적인 직사각형의 돌에 새긴 비석은 적은 편이다.   참고문헌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엮음, 1996, 한국문학지도- 상하, 계몽사. 박병천 외, 예술의 전당 엮음, 1994, 조선시대 한글서예, 미진사. 예술의 전당, 1991, 한글서예변천전 도록, 예술의 전당. 함동선, 1997, 함동선의 문학비 답사기.    박병천 (인천교육대학교)      
4    예술의 흔적 래일의 유산, 민간 복원 주도 자랑스럽다... 댓글:  조회:4475  추천:0  2017-10-17
[오늘의 기억 내일의 유산] = '예술의 흔적'과 만나다 민간 복원 주도 '이상의 집' 10년 걸려 오픈   아버지는, 칸트의 산책처럼,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났다. 하루 두끼 식사와 산책을 빼면 일과는 독서로 채워졌고 저녁 8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아버지도 당신의 누이처럼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를 타고 저세상으로 떠났지만, 그의 독서와 함께했던 철재 스탠드와 무릎을 덥혀주던 스토브는 오랜 기간 이 집에 머물게 됐다. 어린이들이 ‘윤극영 가옥’에서 ‘반달’과 ‘따오기’를 부르고, 어른이 되면 또 자기 애들을 데려오겠지. 아버지의 노래는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국내 첫 창작동요 ‘반달’을 작사·작곡한 윤극영(1903~1988)의 장남 윤봉섭(82)씨는 ...서울시에 수유동 집을 매각. 아버지가 1977년에서 88년까지 말년을 보낸 집에서 살며, 아들은 수많은 유품을 보관해왔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아버지만큼 나이가 들어버렸다. 이 많은 유산을 어쩌나 고민하던 차에 서울시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고 한다.    서울시는 ‘지금을 사는 시민의 기억이 담긴 근·현대 문물을 보존해 미래세대에게 남긴다’는 목표를 세우고 지난해부터 미래유산 사업을 시작했다. 미래유산보존위원회는 박경리·마해송·윤극영 가옥 등 역사적 가치가 큰 작가의 집을 우선 매입해 보존키로 했다.  하지만 일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건 아니다. 작가의 집은 대부분 제3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해송 가옥의 감정가는 평(3.3㎡)당 1000만원이었지만 집주인은 1600만원을 불렀다. 박경리 가옥 주인은 감정가(평당 600만~700만원)의 2배를 고집했다. 감정가를 받아들인 건 아들이 집주인인 윤극영 가옥(5억9800만원) 뿐이었다. 그렇게 매입돼 리모델링을 거친 ‘반달 윤극영 가옥’이 일반인에 공개...  관(官) 주도의 공공프로젝트인 ‘윤극영 가옥’이 1년 만에 마무리된데 반해 재단법인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의 ‘이상의 집’ 보존 작업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10년 넘게 걸려 지난 4월 오픈했다.  작가 이상이 우리 문학에 기여한 공로가 큼에도 ‘이상의 집’ 이전엔 그를 기념하는, 그 어떠한 공간도 없었다. 2002년 중앙일보가 “이상의 집터가 개발업자에게 팔릴 위기에 놓였다”고 보도하자 이를 막으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건축가 김원이 발벗고 나서면서 이듬해인 2003년 김수근문화재단이 집터를 매입했다. 이후 ‘이상이 태어난 집은 아니다’는 생가 논란이 번지면서 문화재 지정이 취소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름지기 등 민간의 노력으로 이 집터는 결국 지켜졌다.  장영석 아름지기 사무국장은 “이상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보다 27세에 요절한 이상이 21년간 이 집터를 밟고 하늘을 보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완성했다는 사실이 더욱 가치 있다”며 “중요한 건 그들의 작품과 스토리이고, 그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안창모 경기대 교수도 “예술은 시공간을 초월해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라며 “예술인의 집과 그가 거닐던 거리, 자주 가던 카페는 단순한 얘깃거리가 아니라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가치 있는 자산”이라고 말했다. ///강인식 기자    
3    "반달할아버지"가 "반달"로 은행에서 돈을 빌리다?!... 댓글:  조회:1706  추천:0  2017-10-17
  윤극영의 '반달'    이 나온 192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근대 음악의 싹이 트는 시기로 창가, 예술가곡, 동요, 유행가가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서양음계와 박자로 된 노래는 어떤 종류든 함께 애창되었다.  어른들도 을 즐겨 불렀고 와 같은 예술가곡과 함께 , 같은 유행가도 인기를 모았다.    1923년은 이 땅의 어린이들에겐 기념비적인 해였다. 이 해 소파 방정환에 의해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낱말이 지어졌고 그 해 5월 1일에 기해 '어린이 날'이 마련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동화집인 이 출판되었고 뒤이어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동요 이 나왔던 것이다. 이 땅의 어린이들이 우리 동화를 읽고 우리 동화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요 이 나오기까지 우리 어린이들은 우리 동요를 부를래야 부를 노래가 없었다. 있었다면 고작 방정환이 외국 곡조에 맞추어 지은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가 어린이들을 위한 유일한 노래였다.  은 작곡된 직후 나이의 구별없이 온 겨레의 노래가 되었다.    을 작사, 작곡한 윤극영은 당시를 회상하며 "전혀 뜻밖이었어요. 그렇듯 짧은 세월에 그렇게 까지 널리 퍼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을 작곡한 날까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23년 9월 9일, 21살의 청년이던 윤극영은 서울 삼청공원에 이웃한 소격동에 살고 있었다. 그에겐 누님 한 분이 있었다. 그 누님은 그보다 10년이나 위인데 다가 일찍 경기도 가평으로 출가하여 얼굴조차 잊어 버릴 정도였다 한다.    "그 누님의 시집은 가운이 기울어 가는 양반집이었지요. 가난 속에서 무척 고생스러운 시집살이를 하고 있어 평소 저의 양친께서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있었지요. " 79살의 주름진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 누님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밤을 지샌 그에게도 새벽이 왔다. 윤극영은 삼청공원으로 가 남몰래 실컷 울었다.  의 악상이 떠오른 것이 바로 이 때였다 한다. 울음이 끊어져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은하수 같은 엷은 구름 너머로 반달이 걸려 있고, 그 멀리로 샛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누님을 잃은 슬픔 속에서 태어난 은 나라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당시의 온 겨레의  마음 속에 파고 들었다. 돛대도 삿대도 없이 정처없이 흘러가는하얀 쪽배는 곧 조국의 슬픈 모습이요, 간도, 중국으로 유랑하는 겨레의 외로운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사람들은 로써 빼앗긴 나라의 쓰리고 아픈 마음을 달랬던 것이다.    이 노래가 불길처럼 퍼지게 된 데에는 당시 윤씨가 주재했던 소녀 합창단인  '다리아회'의 힘이 컸다.  이 노래엔 일화가 많다. 윤씨가 만주에 있을 때 아시아 전역의 일본화를 지원키 위한 일본 연예단의 공연이 있었다. 한 가수가 을 부르고는 "이 곡은 조선인이 작곡했다고 잘못 전해지고 있는데 일본인의 작곡이요."라고 설명을 했다.  이 자리에 있던 윤극영과 그의 동료들이 항의를 했다.   그 일본인은 몰래 윤극영의 집으로 찾아와 "작곡자가 이런데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하며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윤극영은 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도 했다. "담보물은 없소.  그러나 나는 의 작곡가요."라고 했더니 돈을 빌려 주더라는 것이다.  "의 후광으로 살고 있는 거죠."하며 윤극영은 쓸쓸히 웃는다.    자료 출처: 명곡해설에서.......  
2    [그것이 알고싶다] - 반도(半島)의 첫 동요집 "반달" 댓글:  조회:2764  추천:0  2017-10-17
   윤극영(尹克榮, 1903년~1988년) 동요작가         ▲ ‘윤극영 가옥’ 현장사진 : 서울 강북구 인수봉로 84길 5(수유동 566-26)                   아동문학가 윤극영(1903~1988)의 전집 출간을 계기로 그의 친일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윤극영은 1940년대 간도 룽징에서 살 무렵 친일단체인 오족협화회에 가입해 활동했던 경력 때문에 사후 후배문인들로부터 적극적 친일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전집의 편찬자이자 고인의 둘째 며느리인 이향지 시인(62)이 처음으로 공식 해명하고 나서면서 그의 친일 여부에 대한 검증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다음달 3일 윤극영 전집(2권·현대문학) 출간을 앞두고 월간 ‘현대문학’ 5월호에 마련된 윤극영 작가특집에서 이향지씨는 “문단 일각에서 일고 있는 친일논의는 불충분한 고증과 일방적인 시각에 의해 지나치게 폄하되거나 매도당한 면이 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윤극영의 친일논의를 주도한 사람은 소설가 조정래씨와 아동문학평론가 이재철씨이다. 조씨는 1990년 한국일보에 실렸던 ‘만주벌기행’이란 글에서 룽징의 윤극영이 살던 700평짜리 집터를 돌아본 뒤 친일한 대가로 영화를 누렸다는 식으로 매도했고, 이재철씨는 1992년 ‘아동문학평론’이란 잡지를 통해 조정래의 글을 유일한 근거로 제시하면서 윤극영의 문학을 일제식민잔재로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향지씨는 윤극영의 행적과 관련, 당시 일본군정의 강압으로 오족협화회에 가입해 회무를 보기는 했으나 오히려 한국인 교회가 일본 재향군인회에 넘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등 한국인만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일본 군정의 요시찰 인물이 됐다고 해명했다. 또 그가 넓은 집에 살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것은 도쿄에 건너가 극단의 성악과 연출을 맡아 인기몰이를 했고 친구의 광산매매를 도와 큰 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조씨가 보았다는 집터가 윤극영의 소유가 아니라 일본인의 집을 맡아서 생활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향지씨는 또 고인이 생전에 회고록 등을 통해 협화회 가입 및 활동 사실을 밝히고, 그것을 평생의 상처와 고통으로 간직한 만큼 새삼스런 친일시비로 명예를 실추시키는 문단의 처사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이재철씨는 “윤극영은 작고할 때까지 가까운 후배들에게조차 자신의 친일사실을 철저히 함구해 민족주의자로만 알았다”면서 “그가 오족협화회 책임자로서 적극적 친일을 한 것은 90년대 중국과의 국교수교 이후 조선족 아동문학계의 자료와 증언을 통해 속속 드러나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강원룡 목사도 월간 ‘신동아’ 2003년 12월호 인터뷰에서 “윤극영이 협화회 활동을 안하면 잡혀갈 입장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능동적으로 나섰고 나에게도 협조해달라고 협박했다”며 그를 상황논리에 따른 수동적 친일자와 달리 능동적 친일자로 분류했다.     이에 대해 황현산 고려대 교수(불문학)는 “고인의 친일행적은 자신이 남긴 기록위에서 철저히 밝혀질 때 생산적 논의가 가능하다”며 “상황논리이든, 의식착오이든 친일은 개인의 잘못일 뿐 아니라 역사가 개인에게 지운 짐이므로 똑같은 역사적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꼭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윤극영 전집에는 고인의 시가 들어있다. 그는 생전에 300편이 넘는 시를 남겼으나 아동문학가로 남기 위해 전혀 공식지면에 발표하지 않았다. 이번 전집에는 264편의 시가 동시 142편, 동요 188곡과 함께 실렸다. 또 중편소설 ‘누구의 제물이냐’를 비롯, 동화 시나리오 수필 사회평론 회고록 등 산문이 따로 묶였다. 이향지씨는 고인의 사후 한 보따리의 유고를 간직해오다 지난 1년6개월동안 전산입력작업과 정리를 거쳐 전집을 출간했다.     윤극영은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경성법전(서울법대 전신)을 중퇴하고 일본 동양·동경음악학교에서 작곡, 성악을 공부한 뒤 간도 동흥중학·광명여고 교사(1926~35년)를 지냈다. 1923년 방정환 등과 색동회를 창립하고 이듬해 한국 최초의 본격 동요인 ‘반달’ ‘설날’을 만들어 보급했다. 해방후 색동회를 부활시키고 회장을 지낸 그는 600여곡의 동요를 남겼다.     우리나라 첫 동요집 '반달' 원본 찾아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민족의 애환을 달래주던 동요 '반달'이 수록된 동요곡집'반달'의 원본을 찾았다. '반달'은 한국 동요 작사·작곡의 선구자인 윤극영(1903~1988·사진) 선생이 작곡한 동요 10곡을 수록한 노래책으로 1926년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 동요곡집이다.   근대서지학회 김현식 이사가 일본에서 구해 어린이날을 앞두고 4일 본지에 처음 공개했다. 동요곡집 '반달'은 1950~60년대 일부 언론을 통해 표지 사진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그 전모가 실물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동요곡집 '반달'은 가로 19㎝ 세로 26㎝ 크기에 표지와 뒷장을 제외하고 모두 22쪽.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로 시작하는 '설날'을 비롯해 '고드름''꼬부랑 할머니' '꾀꼬리' '흘으는 시내' '소금쟁이' '가을서곡' '귓드람이' '두루미' 등 주옥같은 동요 10곡의 악보와 가사가 실렸다. '두루미'는 오늘날 '따오기'로 알려진 동요다. 전체 10곡 중 3곡은 윤극영 자신이 직접 작사했다.   ◇ 푸른 하늘 은하물…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동요 반달 원곡에는 가사가 '푸른 하늘 은하수'가 아닌'푸른 하늘 은하물'이라 적혀 있다는 점. 또 '삿대도 없이'에 해당하는 음의 경우, 지금 불리는 곡은 내림 마장조의 '미레미 라솔'인데 반해 원곡은 '미솔미 라솔'로 돼 있다.     '가을서곡'은 이번에 처음 알려지게 된 곡으로, 국내 최초 아동 창가극인 '파랑새를 찾아서'의 삽입곡임이 확인됐다. 제목 아래에 '창가극 〈파랑새를 차저서〉중 1절'이라고 부연 설명이 돼 있다. '파랑새를 찾아서'는 윤극영이 곡을 쓰고 연출을 맡은 총 5막의 어린이 창가극. 윤극영 선생은 생전 회고록에서 창가극 공연을 밝혔지만, 극에 사용된 곡의 면모가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첫 동요곡집 ‘반달’의 표지. 수록곡인 ‘반달’의 가사가 지금의 ‘푸른 하늘 은하수’가 아닌 ‘~ 은하물’로 돼 있다. /근대서지학회 제공     내지 첫 장에는 '도라간 누이 동생 덕윤이 영전에!'라고 적혀 있다. 윤극영은1924년 반달 창작 당시, 맏누이의 부고를 듣고 슬픈 마음에 곡을 썼다고 한다.   ◇ "동요박물관에 갈 자료"   원로 동요학자 한용희씨는 "윤극영 선생 생전에 가까이 모셨는데도 1988년 돌아가실 때까지 동요곡집 '반달'은 보지 못한 채 들은 이야기로만 책을 썼다. 실물이 발견됐으니 동요박물관에 둘 만한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윤극영 선생의 맏아들인 윤봉석(79)씨는 "우리 집에도 그 책은 소장하고 있지 않아 소재가 궁금하던 차에 너무나 반갑고 기쁘다"고 했다.   ...구비문학회에서 동요곡집 '반달'을 주제로 연구 논문을 발표...장유정 단국대 교양기초교육원 교수는 "이번에 깨끗한 상태의 동요곡집이 일본에서 발견된 것은 출간 당시 일본 내에서도 반달이 인기가 높았다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보여준다"고 했다.      
1    "반달할아버지"와 룡정 댓글:  조회:1708  추천:0  2017-10-17
우리 민족의 한을 담은 동요《반달》은 항일가요의 하나로 오늘날까지 널리 불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 동요의 작곡가 윤극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의 《음악대사전》,《중국조선족아동문학》등 문헌들을 참조하면서 우리 민족 음악교육과 아동문학의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한 저명한 작곡가 윤극영에 대한 일화를 수집해 보았다. 이야기에 앞서 그가 작사, 작곡한 노래 “반달”의 가사를 적어본다.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그루 토끼 한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추이는건 새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윤극영작곡가는 1903년 9월 6일 경성(서울)종로구 소격동에서 아버지 윤정구(尹政求)와 어머니 청송 심씨(青松沈氏)사이에 1남 3녀중 막내아들로 태여났다. 1917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한 2년 후인 1919년의 《3.1》반일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자 반일시위에 참가하였다. 1920년 윤극영은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갑자기 중퇴하고 음악공부를 하기 위하여 동료들과 함께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련락선에 몸을 실었다. 일본에 건너간 윤극영은 일본 도꾜음악학교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한편 1923년부터는 방정환, 정순철 등 동료들과 함께 도꾜에서 어린이 문화재단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를 작곡하면서 어린이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말 가사로 된 노래는 찬송가뿐이였고 나머지는 정부노래였다. "색동회"회원들과 윤극영(뒤줄 오른쪽 두번째) 윤극영은 조선 최초의 노래단체인 《다리아회》를 조직하고 지도해갔다. 1924년 윤극영은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민족적 비운을 그린 동요 《반달》을 창작하였다. 1924년에 동요《반달》은 조선 최초의 아동가요로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민족의 애환을 달래주었으며 조선반도는 물론 중국에 있는 조선인들에게도 재빨리 보급되여 나이 구별이 없이 아동이거나 성인이거나를 물론하고 모든이들이 널리 애창하는 동요로, 류행가로 되였다.  세계명곡 200수에까지 기록된 동요 《반달》이 창작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윤극영의 어린 시절에 극영이보다 나이가 10년 이상 되는 누님 한분이 경기도 가평군으로 시집갔다. 째진 생활난으로 하여 누님은 10년이 퍽 넘도록 한번도 집에 오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병으로 세상떴다. 그때 누님의 나이는 30세밖에 안되였다. 윤극영은 그토록 보고싶던 누님의 죽음으로 하여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너무도 울어 퉁퉁 부은 두눈으로 멍하니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윤극영은 은하수같은 엷은 구름너머에 반달이 걸려있고 그 멀리로 새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때 윤극영의 머리에는 《반달》 악상이 떠올랐다. 윤극영은 즉시 가사를 써내고 곡까지 지어냈다. 그는 21세 어린나이에 천재적 음악재질로 최초의 가요를 세계명곡으로 탄생시킨것이다. 연변대학의 우상렬교수는 《이(반달) 동요는 전통적인 7.5조 가사에 달에 깃든 전설을 곁들여 천진란만한 상상속에서 일종 희망찬 미래를 약속하기도 하였다.》고 평하고있다. 한국의 《아동문학사전》에는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우리 민족의 망국의 설음과 타향살이의 슬픔을 그린 이 동요는 그 시대가 안겨준 음률이였다.》고 적혀있다. 1924년에 처음으로 동요 《반달》을 조선 최초의 아동가요로 탄생시킨 후 윤극영은 《설날》,《고기잡이》,《고드름》,《따오기》등을 작곡하였다. 그는 1926년 조선 최초의 동요곡집 《반달》을 출간함과 동시에 같은 제목의 음반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1926년 1월, 윤극영은 일본의 간섭과 집탈이 심해지자 간도(지금의 연변) 룡정에 건너와 동흥중학, 광명중학, 고등녀자학교 등에서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약 10년간 음악을 가르쳤다. 1936년, 윤극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 음악활동을 하다가 193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공부를 하면서 극장가수로 취직하기도 하였다. 그때 일본에 있던 윤극영은 룡정에 있는 안해 오인경을 그리면서 《두만강의 노래》를 지었다. 노래가 나오자 절찬을 받았다. 일본에서 지명도가 가장 높은 《요미우리》신문에서 《한국예술인의 도꾜진출》이라는 제목으로 윤극영과 우리 민족 무용계 거목인 최승희(崔承喜)에 대한 특집을 싣기도 하였다. 1940년에 다시 중국에 온 윤극영은 북간도(지금의 흑룡강성) 할빈에 할빈예술단을 설립하고 만주(지금의 동북3성) 지역과 서울 등지에서 공연활동을 벌리려고 하였으나 일제놈들의 잔혹한 탄압으로 결국 해산되고말았다. 더는 예술단을 경영할수 없게 된 윤극영은 다시 룡정에 돌아와 아동가요를 창작하고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광복을 맞이했다. 《하늘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풍운이 있고 사람의 인생은 조석으로 뒤바뀐다.》고 일본이 관여하는 협화조직에 가입한것이 죄가 되여 1946년 겨울에 그는 경비대에 체포, 룡정에서 비판 투쟁을 받고 사형판결까지 받게 된다. 이 대목 이야기는 연변주당위에서 촬영사로 활약하셨던 황범송선생이 2005년 여름 한국에 갔을 때 저명한 작사자이며 작곡가인 가수 반야월(원명 박창오, “번지 없는 주막”, “울고 넘는 박달재”, “유정천리” 등 5000여수의 곡을 창작) 선생에게서 들은후 옮겨놓게 된 것이다. 황선생은 반야월선생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고 그의 집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첫 이야기로 윤극영에 대해 문의하였다. 반야월선생은 《윤선생이 간도에 오래동안 계셨으니 모두 알고있나봐요. 세상뜬지 10년이 많이 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광복후 룡정에서 있은 사형집행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일파로 당장 사형에 처하게 된 윤극영은 마지막 유언을 이렇게 남겼다.“나는 생활난으로 일제를 위한 노래도 많이 지었고 상도 많이 타다보니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러니 무슨 할말이 있겠소만은 지금 와 보면 공산당을 위해서도 공로를 세웠습니다. 한가지 남기고 싶은 말이라면 내가 죽은 후에도 내가 작곡한 동요들을 계속 불러준다면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 한 사형집행자가 “당신은 공산당을 위해 무슨 좋은 일을 했는가?”라고 묻자  윤극영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동북인민의 해방의 봄이 왔네’ 이 노래도 내가 지은것입니다.” 당시 룡정현 현장으로 지내던 문정일선생은 사형장에서 사형수들의 명단을 하나하나 검토하던중 윤극영이 노래《반달》과 “동북인민의 해방의 봄이 왔네”의 작곡가임을 확인하고 사형결정을 당장에서 취소하였다. 《죽이지 마시오. 그의 음악재질이 아깝지 않습니까? 이러한 인재들은 사상을 개조해서 유용하게 써야 합니다.》 문정일현장의 그 한마디에 윤극영은 사형선고를 피면할 수 있게 되였다. 윤극영은 3년 도형을 받고 연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얼마후 보석으로 풀려나왔다. 그 후 윤극영작곡가는 한국에 살면서 자기의 생명의 은인 문정일선생을 늘 외웠다고 한다. 1950년대 북경에서 김정평과 김철남 부자간이 《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하여 음반(音盘)을 내기도 하였고 1979년에 《반달》은 《하얀 쪽배》(小白船)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한문)통용 음악교과서에까지 수록되였다. 아동가요 선구자중의 한 사람인 불멸의 작곡가 윤극영은 1988년 11월 15일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윤극영선생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작곡한 노래는 우리 민족 어린이들과 어른들 할 것 없이 영원히 즐겨 부르는 명곡으로 울려퍼질것이다. / 김원범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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