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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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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쉼터] - 사진으로 보는 세상 요지경... 댓글:  조회:1992  추천:0  2017-10-19
            무순시 망화구 료녕석유화학공업대학교 교정 내 은행나무ㅡ   서장 라싸 부다라궁 50짜리 인민페에 그려져 있는 부다라궁(布達拉宮)과 진짜 부다라궁                       인도네시아 자와바랏주 한 편벽한 산골의 개와 메돼지의 싸움...           2017년 중국 자이언트판다 보호연구센터 야안(雅安) 비펑샤(碧峰峽) 기지에서 태어난 17마리의 판다 새끼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다. (사진 제공: 중국 자이언트판다 보호연구센터)       2017년 중국 자이언트판다 보호연구센터 워룽(臥龍) 선수핑(神樹坪) 기지에서 태어난 19마리의 새끼 판다들이 공개됐다. (사진 제공: 중국 자이언트판다 보호연구센터) [인민망 한국어판 10월 19일] 10월 13일, 2017년 태어난 36마리의 새끼 판다의 모습이 중국 쓰촨(四川, 사천)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중국 자이언트판다 보호연구센터의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현재까지 해당 센터 산하의 여러 기지들에서 총 42마리의 새끼 판다가 태어났으며 그중 쌍둥이 판다는 15쌍이라고 한다. 이는 판다 인공사육 역사상 가장 많은 기록이며 2017년 새끼 판다의 생존율은 98%에 달했다. (번역: 은진호) ====================================   아커싸이(阿克塞) 카자흐(哈薩克)족 자치현은 간쑤(甘肅, 감숙)성에서 유일한 카자흐족 자치현이자 중국 3개 카자흐족 자치현 가운데 하나. 카자흐족 경마에 참가하는 기수들은 대부분 12~13세의 남자아이들...   세계에서 가장 큰 중국 감숙성 카자흐(哈薩克)족 열기구   ‘댜오양(叼羊)’은 카자흐(哈薩克)족 전통 스포츠 가운데 하나. 사진은 카자흐족 남자들이 말 위에서 양을 뺏는 모습           在四川省代表团(2017年)举行会议前,一个工作人员整理熊猫玩具。Thomas Peter/摄       在云南省代表团(2017年)会议上,一名党代表戴着传统头饰。Thomas Peter/摄       透过雕花玻璃看浙江省代表团(2017年)讨论。WU HONG/摄         유목민들 ‘말 타고 병 줍기’    관할구역 유목민들이 ‘말 타고 병 줍기’ 경기를 펼치고 있다. [인민망 한국어판 9월 14일] 8월 31일 중국 서부 국경지역을 지키는 신장(新疆, 신강) 공안 변방총대(邊防總隊) 커저우지대(克州支隊) 하라쥔(哈拉峻) 변방파출소 대원들이 관할 구역에 위치한 경마장을 찾았다. 대원들은 키르기즈족(柯爾克孜族) 유목민들과 함께 ‘말 타고 양 뺏기(馬背刁羊)’ 경기를 펼쳤다. 그 밖에 ‘말 타고 병 줍기’, ‘말 타고 힘겨루기’ 등의 키르기즈족 전통 스포츠도 펼쳐졌다. 그들은 그렇게 말 위에서 전통 명절인 ‘구얼방제(古爾邦節)’를 기념했다. (번역: 은진호) ///출처: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   신장(新疆) 투루판(吐魯番) 지역은 포도 말리기에 한창(8월 28일 촬영)       다인다마(多人多馬) 공연 雪頓節 (설돈절) 행사 중 민족 전통 마술(馬術, 승마 기술) 공연, ㅡ서장 라싸(拉薩) 경마장에서...   나다무(那達慕) 축제에서   몽고족(蒙古族) 전통 의상을 입은 모델이 나다무(那達慕) 축제 개막식에서    몽고족(蒙古族) 버커(搏克, 몽고족 전통 씨름) 선수가 나다무(那達慕) 축제에서 공연하는 모습   8월 31일, 나다무(那達慕) 경마에 참가한 선수의 모습 [인민망 한국어판 9월 11일] 8월 31일 2017년 허린거얼(和林格爾) ‘멍초칭(蒙草情)’ 즐거운 나다무(那達慕) 축제가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허린거얼현에서 개최...   닝샤(寧夏) 회족(回族) 자치구 시지(西吉)현(륙반산) 바이야(白崖)향, 공중에서 바라본 계단식 밭의 모습(8월 16일 촬영)   려지의 3대 품종으로 페이쯔샤오(妃子笑), 눠미츠(糯米糍), 구이웨이(桂味)가 있다 [인민망 한국어판 6월 30일] 려지, 바나나, 파인애플, 룡안(龍眼)은 중국 남방의 ‘4대 과일’이라 불린다. 중국 남방이 원산지인 려지나무는 아열대 과수로 사시사철 푸른 잎을 자랑하며 다 자란 나무는 10m에 달한다. 과일 껍질에는 물고기 비늘처럼 뾰족하고 선분홍색과 자주색이 있다. 뽀얀 속살의 과육은 맛은 훌륭하지만 보관이 쉽지 않다. 려지는 양귀비가 즐겨 먹어 유명해졌는데 시인 두목(杜牧)은 ‘질주하는 말이 일으키는 붉은 먼지를 바라보며, 양귀비가 미소 짓네. 아무도 모르네, 려지가 오고 있음을(壹騎紅塵妃子笑, 無人知是荔枝來)’이라는 시를 남겼다. 뿐만 아니라 각 시대 문인들 역시 리치와 관련한 시구를 남겼다. ‘하루에 려지를 300알 먹으니 영남에 오래 머물라 해도 사양하지 않겠네(日啖荔枝三百顆, 不辭長作嶺南人)’. 소식이 쓴 이 시는 려지의 맛을 가장 잘 묘사한 시라고 평가받는다. (번역: 박민지) 원문 출처: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   광둥(廣東, 광동)성 선전(深圳, 심천) 난산(南山), 려지의 품종 중 하나인 눠미츠(糯米糍)이다. 광둥(廣東, 광동)성의 려지나무 광둥(廣東, 광동)성 선전(深圳, 심천) 현지 과수원에서는 매년마다 려지 축제가 열린다.       이탈리아 로마에서ㅡ 
3    한글 지키기와 한글 바로 세우기 그리고 한글 재통일하기... 댓글:  조회:4674  추천:0  2017-10-19
한글 바로 세우기에 온 정성을 쏟다... 우리 겨레는 세종큰임금이 만들어주신 세계 최고의 글자, 한글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처럼 자유자재로 한글을 쓸 수 있는 것은 한힌샘 주시경 선생과 일제강점기의 조선어학회 그리고 해방 뒤의 외솔 최현배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문제는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80년(1926)이 넘도록 표기법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사람마다 소리 나는 대로 닿소리와 홀소리를 붙여서 쓴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한글학자들은 한글을 바로 세우는 것이 자주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일임을 깨닫고 준비합니다. 특히 1930년 12월 13일 조선어학회 총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의하고, 권덕규·김윤경·박현식·신명균·이병기·이희승·이윤재·장지영·정인승·최현배를 포함한 위원 12명이 2년 동안 심의를 거듭한 결과 1932년 12월 원안을 완성했지요. 그 뒤 1년여 더 갈고 닦아 드디어 1933년 11월 4일 조선어학회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그때 발표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보면 총론 3항, 각론 7장 63항, 부록 1·2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총론에서는 표준어에 대한 기본원칙으로, 현재 서울의 중류사회에서 쓰는 말로써 한다는 규정과 맞춤법 원칙으로 소리 나는 대로 하되 어법(語法)에 맞도록 쓴다는 규정, 단어는 띄어 쓴다는 규정 들이 있지요. 한글을 쓰지 못하게 했던 일제강점기, 그럼에도 한글 지키기와 바로 세우기에 나섰던 조선어학회의 거룩한 뜻을 우리 후손들이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   조선어학회와 조선어학연구회의 활동과 맞춤법 통일안   1. 당시의 국어연구 ⓵주시경- 국문동식회(1896)- 국어연구학회(1908) ⓶지석영-국문연구회(1907 ⓷조선 학부- 국문연구소(1907)   2. 국어연구의 발전 ⓵주시경- 국문동식회(1896)- 국어연구학회(1908)-조선어학회-한글학회(한글) ⓶지석영-국문연구회(1907)·국문연구소(1907)-박승빈·조선어학연구회(정음)   학회명 조선어학회 조선어학연구회 비고 참가자 · 주시경의 제자 · 김두봉(상해)- 울산출신 · 최현배, 장지영, 정인승, 유 렬, 정열모 · 이극로, 이희승 · 지석영 지지자 · 박승빈(변호사- 평양출신) · 최남선, 오세창, 홍기문, 신남철, 윤치호, 최 린, 송진우, 민대식, 유응호, 영친왕   맞춤법(철자법) · 형태주의-기본어미(-다) · 먹다-어간 ‘먹’, 어미-‘다’ · 앉, 넋, 값 사용 · ㅎ받침 사용, · 음소주의-기본어미(-오, - 으오) · 어간 ‘머’, 어미 ‘그’로 나눔 · 앉, 넋, 값 사용 불가-안, 넉, 갑으로 사용 · ㅎ받침 사용 불가-격음 가능   경음표기 ㄲ, ㄸ, ㅃ, ㅆ, ㅉ ᄭᄯᄲᄶᄽ   문제점 · 조선어학회가 역사적 정통성이 있었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었 다. · 신문사와 문인들이 성명을 통하여 지지를 해 주었다. · 비전문가 우리말에 주제넘게 나선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었다. · 역사적 정통성이 없다.   대표 학술지 한글- 한글맞춤법 통일안 강의 정음-조선어학강의 요지, 조선어학, 간이조선어 문법           3. 일제시대의 국어 연구자와 저서 관계 ⓵ 최현배- 『우리말본』-야마다 요시오(山田孝雄-1922)의 『일본문법강의』를 모델로 삼아 우리말 문법서를 기획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 문법서인 『일본문법강의』의 영향 관계를 근거로 『우리말본』의 의의를 깎아내리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면이 있다. 최현배가 정열모와 달리 자신의 문법론에 영향을 준 문법서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것은 문제라 할 수 있지만 『우리말본』에서 아마다 문법을 전적으로 수용한 부분은 원론적인 설명이나 보충설명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우리말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틀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우리말 문법을 체계화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토는 조사로, 어미는 단어로 인정하지 않았다.   ⓶ 정열모-마쓰시타 다이사부로(松下大三郞-1926)의 『표준일본어문법』을 접했고 이에 따라 문법을 체계화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연구 결과는 1927년부터 소논문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정열모는 『조선어문법론』의 서두에서 “조선어문법론이 나의 독창적인 편견이 아니라 내외 문법학을 참와하여 그 합치된 정신을 취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이러한 사실을 암시했다. 이 문법 체계가 이후 『신편고등국어문법-1946』에 이르러 내용적으로 완결됐다. 토를 접사로 보는 견해를 제시했다.   ③ 오구라 신페이- 경성제대에서 조선어학강의- 방언자료 및 고문헌 수집과 정리를 했다. 『방언학』, 『향가 및 이두의 연구』, 『증보조선어학사』 등이 있다.   ④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 언어학의 일반이론에 치중함. 특히 소쉬르의 『일반언학강의』를 1928년에『언어학원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는데 이는 일본 언어학계가 구조주의 언어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게 됨을 의미한다.   ⑤ 고노 로쿠로(河野六郞)-오구라 신페이의 제자이며, 오구라와 같이 진행했던 조선방언 연구에 심혈을 기울임. 한국어와 일본어의 계통적 공통성을 탐색함이 결과적으로 일본의 정책적 판단이 조선어연구의 방향을 결정지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어방언학시고』, 『조선어 한자음 연구』 등이 있다.   ⑥ 관념론과 실증론의 대립· · 관념론-실용적 언어연구, 당시의 조선어학의 실천적 연구의 소임을 다함, 광복 후에는 한자폐지와 언문일치에 최선을 다함. - 조선어학회(한글학회)   · 실증론- 실증적 언어연구, 서구의 역사언어학의 영향을 받음, 조선어 정리와 교육에 철저하게 무관심함.광복 후 민족문화 단절을 우려해 한자 폐지에 반대함, 학교 문법 제정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함. - 경성제국대학교 조선어과(현 서울대학교)   ==================================     조선어학회와 한글학회             조선어학회는 나라를 잃기 2년 전인 1908년 8월 31일 서울 봉원사에서 "말과 글은 홀로 서는 나라됨의 특별한 빛"이라며 "그 빛을 밝히자"는 주시경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1921년 12월 임경재, 최두선, 장지영, 권덕규 등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되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 총회 결의에 따라 조선어학회로 개칭한 한글운동 단체이다. 1926년 한글날의 전신이 되는 ‘가갸날’ 첫 기념식을 거행하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해「큰사전」편찬에 착수하는 한편, (1933), (1936), (1941) 등을 내놓으며 한글의 보급과 연구에 힘썼다. 조선교육협회회관 안에 사무소를 두었다가 1935년 7월 정세권이 제공한 화동 129번지 아담한 2층 양옥으로 회관을 옮겼다.「큰사전」편찬을 비롯한 사업을 추진하던 중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이 발생하자 활동을 중단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일제에 의해 모질게 억눌리고 시달렸으며, 이윤재, 한징 등 숱한 국어학자가 끌려가 고문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 무렵 수많은 자료를 빼앗겼고, 한국전쟁 때에도 숱한 자료가 불타거나 사라졌다. 이후에도 상황은 이후에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한글전용운동, 국어순화운동, 한글말 펴기행사, 세종대왕 숭모행사 등을 꾸준히 진행해 왔지만 정부의 무관심 내지 외면 속에 시민모금으로 1977년에야 겨우 한글회관을 마련할 정도로 존재 자체가 힘겨운 투쟁 아닌 투쟁을 했었다. 나라를 지킬 때 그 얼을 지킬 수 있는 한 방법은 우리나라 언어를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어학회는 우리나라 말을 온갖 탄압 속에서도 지켜왔다는 데에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은 일본 제국이 1942년에 한글을 연구하는 학회인 조선어학회의 회원 및 관련인물들을 강제 연행, 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1921년 창립된 '조선어 연구회'의 명칭이 바뀐 것으로, 조선어와 조선글을 연구하던 학회이다. 1941년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마련, 국어사전 편찬 등 말과 글의 표준화에 주력하였다. 현재는 한글 학회로 남아 있다.     일제는 한국인들을 압박하기 위해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하였다. 1938년 '국어상용화(國語常用化)' 정책으로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한국어(조선어) 사용을 금지,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였다.   일제는 한국인들을 압박하기 위해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하였다. 일제는 1939년 4월부터 학교의 국어 과목을 전폐하고 각 신문·잡지를 점차 폐간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였다. 1941년 12월 하와이의 진주만을 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제는 내부의 반항을 염려하여, 1942년 10월에 조선어학회에도 총검거의 손을 대었다. 조선어학회는1942년 4월부터 한국어 사전을 편찬 중이었다.     함흥 일출여고(또는 영생여고)의 학생이 한국어로 대화하다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취조를 받던 중, 1942년 9월 5일 조선어사전 편찬원 정태진이 관련되었다며 정태진을 증인으로 불러가더니, 이를 빌미로 1942년 10월 1일에 와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단체로 단정한 뒤 관련자들을 일제검거하기 시작하였다. 10월 1일에, 1942년 10월 1일에 이윤재(李允宰)·최현배(崔鉉培)·이희승(李熙昇)·정인승(鄭寅承)·김윤경(金允經)·권승욱(權承昱)·장지영(張志暎)·한징(韓澄)·이중화·이석린(李錫麟)·이고루 등 11사람이 1차로 일제히 서울에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洪原)으로 압송되었다. 10월 18일에는 이우식(李祐植), 김법린(金法麟)이, 20일에는 정열모가, 21일에는 이병기(李秉岐), 이만규(李萬珪), 이강래(李康來), 김선기(金善琪) 4사람이, 12월 23일에는 서승효(徐承孝), 안재홍(安在鴻), 이인(李仁), 김양수(金良洙), 장현식(張鉉植), 정인섭(鄭寅燮), 윤병호(尹炳浩), 이은상(李殷相) 등 8사람이 각기 검거되었으며, 1943년 3월 5일에 김도연(金度演), 6일에 서민호(徐珉濠)가 각기 검거되어 모두 홍원경찰서에 유치되었다. 3월 말부터 4월 1일까지 신현모(申鉉謨)와 김종철(金鍾哲)은 불구속으로 심문을 받았다. 권덕규(權德奎)와 안호상(安浩相)은 신병(身病)으로 구속을 면하였는데, 1943년3월 말경까지 29명이 검거되어 대체로 1년간 홍원(洪原)경찰서 내 유치장에서 온갖 야만적 악형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48명이 취조를 받았다. 33명 중 16명을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한',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기소, 함흥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고 한다. 이윤재, 한징 미결감 옥중 사망 재판 또는 복역 도중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8월 17일 부 석방.   피고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아니한다고 곽상훈(郭尙勳)·김두백을 유치장에 구금한 일도 있었으나, 이들 증인 중에는 어학회 사업을 운조, 협력한 저명한 문화인들도 많았다. 함흥 검사국에서는 범위 축소 지시에 따름인지 모르나, 어학회 관계자를 다시 조사하여 대부분은 석방하고, 이윤재·한징·최현배·이희승·정태진·이고루·김양수·김도현·이중화·김법린·이인·정현식 13명만 공판에 회부하였다.   1943년 1월 이윤재가, 이듬해 2월에 한징이 각각 심한 고문과 추위와 굶주림에 못 이겨 옥사(獄死)하였다. 그 나머지 11명은 함흥 지방재판소에 각각 징역 2년에서 6년까지 판결을 받았다. 그 중 정태진만은 복역(2년)함이 더 빠르겠다고 하여 복역을 마쳤고, 장현식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체형을 받은 이는 공소하였으나 8.15광복을 이틀 앞두고 공소가 기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어학회가 해산되고, 사전 원고는 증거물로 홍원과 함흥으로 옮겨다니다가 여러 부분의 원고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원고는 광복후 1945년 9월 서울역 창고에서 일제가 잃어버린 원고가 발견되어 추후 한글 대사전이 출판되었다.     한글 학회(—學會)는 한글과 한국어의 연구를 위해 이루어진 학술 단체이다. 1908년 8월 31일에 김정진을 회장으로 하여 창립한 ‘국어연구학회’를 모체로 1921년 12월 3일 창립하였다.   한글 학회는 1926년에 한글날을,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고, 한글을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해방 후, 학회는 한글 전용을 주장해 국한문혼용을 한글 전용으로 쓰는 것을 장려했다.     처음의 명칭은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로서 국문연구소(1907년 설치)를 계승하여 만들어졌다. 당시 회원은 장지영·김윤경·최현배·권덕규 등 15~16명이었다. 이들은 동호인들을 규합한 후 학회 활동으로 연구발표회를 가지는 한편, 1927년 2월 8일에는 기관지 《한글》을 발간했다. 1931년에는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고쳤고,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외래어표기법을 제정하고 우리말사전을 편찬했다. 1942년부터 회원들이 여러 차례 독립운동죄로 검거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사건이다. 8·15 광복과 더불어 부활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   (서울=연합뉴스 김은주 기자) "오늘(10월 19일 2017년)은 조선 문화사상 잊지 못할 날이다. 사백팔십칠 년 전(세종 이십팔 년 서기 일천사백사십육 년) 오늘에 조선 문자가 세종대왕의 손으로 창정(創定)되어 처음으로 반포(頒布)되엇고 사백팔십칠 년 뒤인 오늘에 조선어의 철자법이 반포되게 되엇으니 조선사람된 자 다가치 영원히 기념할 오늘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동아일보 1933. 10. 29. '철자법통일안 반포까지의 경과') 1933년 10월 29일 한글날. 당시는 한글날이 10월 29일이었다. 이날 조선어학회는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 487주년을 기념하여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정식으로 공표했다. 이 통일안은 1937년, 1940년, 1946년 세 차례 내용 수정을 거쳐 1948년 정부가 공식적으로 채택, 오늘날까지 올바른 한글 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다. 한글맞춤법통일안(1953)   1894년 11월 21일. 고종은 법률과 칙령, 공문서는 한글을 기본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쓰도록 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이로써 한글은 창제된 지 450여 년 만에 우리나라의 공식 문자가 됐다. 고종은 이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홍범 14조를 한글, 한문, 국한 혼용문 세 가지로 작성하여 발표했다.   당시 한글은 일반 백성 사이에서는 널리 쓰였으나 언문이라 불리며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글은 공식 문자가 되기는 했으나 맞춤법이 통일되어 있지 않아 사용이 제각각이었다. 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하기 위해 1907년 학부 내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고 주시경, 어윤적, 지석영 등이 연구보고서 '국문연구'를 작성했으나 1910년 국권침탈로 국문연구소가 해체되고 '국문연구'도 빛을 보지 못했다. 이후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조선인 학자들과 일본인 학자들이 모여 1912년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을 만들어 초등학교 교과서에 사용했다. 이 맞춤법은 사실상 일본인의 한국어 습득을 쉽게 하고, 조선인의 일본어 학습에 한글을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한글 표기를 일본어의 발음에 맞게 퇴보시켰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가 문화정치로 바뀌면서 조선인 학자들이 연구단체를 구성하고 맞춤법 통일안 제정 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어학회는 1930년 12월 13일 열린 총회에서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 것을 결의하고 최현배, 이희승 등 12인이 맞춤법제정위원이 되어 1932년 12월 원안을 작성했다. 이후 1933년 1월 4일까지 원안을 심의하여 수정안을 만들었다. 이어 같은 해 7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다시 독회를 거쳐 최종안을 마련해 그해 10월 19일 조선어학회 임시총회에서 이를 시행하기로 결의하고 10월 29일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공표했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총론 3항, 각론 7장 63항, 부록 2항으로 구성됐다. 총론은 제1항, 표준말은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하고, 제2항, 표준말은 현재 중류사회의 서울말로 하며, 제3항, 각 단어는 띄어 쓰되 토는 그 앞 단어에 붙여 쓴다는 내용이다. 기관지 '한글'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한글맞춤법이 정비되기까지 실로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 1908년 8월 31일 주시경과 김정진 등이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했다.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몯음'으로, 1913년 3월 23일 '한글모'로 이름을 바꾸어 1917년까지 활동하다가 활동이 중단됐다. 이 단체는 1921년 12월 3일 한글 연구와 보급을 위해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재건됐다. 10년 뒤인 1931년 1월 10일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치고, 해방 후 1949년 9월 5일 '한글학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인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이라 정했는데, 이것이 한글날의 시초이다. 1928년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치고 음력으로 기념하여 오다가 1932년 양력으로 바꿔 10월 29일로 정했다. 그러다가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서문의 반포일 기록을 근거로 양력 10월 9일로 옮겼다. 해방되던 해 한글날이 10월 9일로 확정됐고, 1946년 정부는 한글 반포 500주년을 맞이하여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1927년 2월 10일 당시 조선어연구회는 기관지 '한글'을 창간했다. '한글'은 일제 당국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수차례 휴간됐다가 1946년 4월에 속간됐다. 한국전쟁으로 발행이 중단됐다가 1954년 4월 다시 발행에 들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9년 10월 31일 제4회 한글날 기념식에 모인 유지 108명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돼 사전 편찬이 시작됐다. 1939년 원고가 3분의 1가량 완성되어 총독부에 제출, 다음 해 대폭 수정한다는 조건으로 출판허가를 받았다. 1942년 봄 조판이 시작되고 가을에 원고가 모두 완성되어 교정에 들어갈 무렵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편찬이 중단됐다. 해방 후 사전 편찬사업이 재개돼 1947년과 1949년, 1950년 '조선말 큰사전' 1권부터 4권까지를 출판하고 한국전쟁 이후 1957년 6권으로 완간했다. 1941년 외래어와 외국 인명 및 지명에 관한 표기를 통일하기 위해 '외래어표기법통일안'을 발표했다. 해방 후에는 국어교육을 되살리기 위해 1945년 11월 '한글 첫걸음'을 시작으로 '초등국어교본,' '중등국어독본' 등의 교과서를 편찬했으며 대대적으로 한글강습회를 열었다. 1948년 '세종 중등국어 교사양성소'를 세워 국어교사를 양성했다. '한글첫걸음' 교과서   조선어학회를 이야기할 때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1940년부터 각급 학교에서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했다. 특히 조선어학회를 주시해왔는데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이 어느 정도 결실을 보게 되자 일을 꾸몄다. 1942년 3월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영희의 일기장을 뒤져 국어(일본어) 사용 관련 내용을 트집 잡아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을 맡고 있던 정태진을 9월 5일 검거했다. 고문을 통해 조선어학회가 학술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단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고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 1943년 4월까지 회원 33명을 잡아 28명을 감옥에 가두었다. 모진 고문과 수감생활로 이윤재, 한징 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는 강제 해산됐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재결성됐다. 큰사전 원고   일본이 패전한 직후 1945년 9월 8일, 서울역 조선통운 운송부 창고의 산더미 같은 화물 틈에서 상자가 하나 발견됐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써내려갔던 '조선말 큰사전'의 원고였다. 무려 원고지 2만5천500장 분량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10년 넘게 작성했던 '조선말 큰사전' 원고가 일제 경찰에 증거물로 압수됐으며 재판 중 함흥에서 경성으로 실려 왔을 것으로 추정됐다. 해방되자 감옥에서 풀려난 학자들과 경성제대 학생들이 창고로 몰려와 화물 더미 속에서 애타게 찼던 그 원고였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원고를 찾은 이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글. 이를 지켜내기 위해서 긴 세월 여러 사람이 피와 땀을 흘렸다. 그러나 오늘날 과연 한글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의문이다. 무심코 사용하는 신조어, 은어, 비속어들의 범람이 우리의 언어생활을 해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외래어 오남용이 심각한 것은 물론이고 인터넷, 모바일 등에서 무절제하게 진행되고 있는 도를 넘은 언어파괴가 어느덧 일상적인 것으로 자리 잡아 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단어 하나마다 맞춤법을 고르고, 한 장 한 장 공들여 사전을 꾸렸을까. 모진 고초를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나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서울역 창고로 달려와 화물 더미를 뒤졌을 그들의 절박한 마음, 그리고 마침내 원고를 발견했을 때의 환호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좀 더 언어생활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   [표준어]   표준어는 아주 새로이 만드는 말이 아니라, 이미 그 나라에서 쓰이는 말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고 또 사람들이 가장 좋은 말로 여기는 말을 바탕으로 하여 약간의 손질을 하여 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수도(首都)와 같이 그 나라의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의 말이 흔히 표준어가 된다. 이러한 중심지의 말이라야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기 쉽고, 또 국민들이 우러러보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도 역시 서울말을 표준어로 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표준어가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조선어학회에서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1936년에 <사정한 조선어표준말모음>을 펴내면서부터였다. 이들을 근거로 ≪큰사전≫을 비롯한 국어사전들이 편찬, 간행되면서 우리 나라 표준어가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표준어의 선정에 있어 원칙이 된 것은 <한글맞춤법통일안> 총론 제2항의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는 규정이었다. 서울말을 표준어의 근간으로 삼는다는 것이 여기에 명백히 밝혀져 있다. 다만 광업이나 어업 등에 쓰이는 단어들은 서울에서는 쓰이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서울말로만 표준말을 삼은 것은 아니며, 또 ‘돈’을 ‘둔’이라고 하는 것이 서울말이더라도 글에서 오랫동안 ‘돈’으로 써왔다면 ‘돈’을 표준어로 삼기도 하였다. ===================================== 최현배·이병기·현상윤·김두봉 등이 1908년 8월31일 국어연구학회를 만든 것이 한글학회의 시작이다. 이후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 1931년에 조선어학회, 그리고 1949년에 한글학회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어쩌면 한글학회보다 더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을 조선어학회. 조선어학회의 최대 성과는 바로 우리말 사전의 편찬이었다. 이하 포스팅은 절대적으로 (최경봉 지음, 2005년, 책과함께)에 의지하고 있다. 조선어학회의 제1권(ㄱ~깊)은 1947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이해서 출간되었다. 국가의 성립에 앞서 표준언어작업이 먼저 길을 열었던 것이다. 이 사전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출판기념식(사회:정지용) 때 남북협상요인 편에 북한으로 보내자고 결의되었다. 북한에서도 1948년 6월 조선교육자협회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된 것을 찍은 위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사전은 1957년에 가서야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완성된다. 그럼 시작은 언제였을까?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가 결성된 것은 1929년(위 책에는 1926년으로 잘못 적힌 부분이 있다) 10월 31일이었다. 총 108명의 발기인이 모였다.  그럼 이 이전에는 사전이 없었을까? 조선어사전편찬회 취지서(이은상이 썼다고 한다)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조선민족에게 사전이 없다 함은 이미 상술한 바다. 그러나 서양인 선교사들이 예수교를 전도하기 위하여 조선어를 학습할 목적으로 편성한 사전이 수 종 있으니, 서기 1880년에 불국 파리에서 출판된 이 그 하나요, 1890년에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 씨의 손으로 일본 횡빈에서 출판된 이 그 둘이요, 1897년 영국인 선교사 게일 씨의 손으로 역시 횡빈에서 출판된 이 그 셋이다. 그리고 또 1920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일본어로 대역한 이 출판되었다. 일본어로 대역한 이라는 것은 표제어만 우리말이고 풀이는 일본어로 되어 있는 사전이었다. 이런 사전을 만드는 데만도 총독부는 10년을 소비했었다. 그런데 이 이전에 나온 조선어사전이 있기는 했다. 표제어 6,106개의 소사전 (1925)이 그것이다. 이 사전은 세간에 알려진 것이 얼마 되지 않는데, 학교의 자습서처럼 만들어진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인 모양이다. 지은이는 심의린. 1894년생으로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부를 졸업하여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조선어연구회(1921)에서 활동 중인 사람이기도 했다.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려는 움직임 또한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1911년 주시경을 중심으로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이 진행되었었다. 주시경과 제자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이 참여한 이 편찬작업은 불행히도 1914년 주시경의 사망, 1919년 김두봉의 상해 망명, 1920년 이규영 사망으로 진척을 보지 못했다.  다른 움직임은 최남선에 의해서 일어났다. 일찍이 광문회를 만들어서 주시경과 함께 을 만들기도 했던 최남선은 1918년에 계명구락부를 만들어, 1927년 사전편찬을 위한 위원회를 결성했다. 최남선은 주시경이 만들고 있던 원고를 인수받아 그것에 기초해서 우리말 사전을 만들고자 했다. 정인보, 임규, 이윤재, 변영로 등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업은 만만치가 않았다. 1929년이 되자 모두 나가떨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주도한 인물은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귀국한 이극로였다. 이극로는 1912년 20세 때 만주로 가, 박은식, 신채호 등을 만나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고 1915년 고려공산당 영수 이동휘와 동행하여 모스크바로 갔다가 베를린까지 가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까지 딴 독특한 경력의 인물이다. 그는 1927년 제1회 세계약소민족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고, 귀국할 때 미국을 거쳐 이승만, 서재필도 만나고 돌아왔다. 해방 후 그는 김구 주석과 함께 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북한의 첫 내각 무임소상이 되어 북한 언어연구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극로의 제자 유열(한국전쟁때 월북)이 환단고기 식의 국수주의 사학에 빠져든 것도 사실 이극로의 민족주의 성향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리라.  사전 편찬이란 결국 말을 모으는 것이다. 조선어학회는 기관지를 통해 전국 각지의 말을 보내달라 했고 전 조선민의 호응 아래 사전 편찬 작업이 진행되었다. 또한 이를 위해서 맞춤법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일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개입했고 한글학자 장지영, 권덕규, 정열모, 최현배, 신명균 등이 모두 심의위원으로 참여했다. 총독부 산하 기관에 참여한 일로 국수주의자들에게 역사학계만 두들겨 맞는 일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맞춤법이 정해지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조선어학회와는 달리 발음나는 대로 표기하자는 조선어학연구회(박승빈 설립)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1934년 7월 9일 문인(조선문예가일동)들이 "한글 철자법 시비에 대한 성명서"를 냈다. 문인들이 조선어학회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조선어학연구소의 힘이 약화되었다. (성명에는 김동인, 전영택, 양주동,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오상순, 박태원, 피천득, 정지용, 모윤숙, 주요섭, 현진건, 채만식, 윤석중, 심훈, 이상, 임화, 노천명, 염상섭, 김광섭, 이은상, 이광수 등의 쟁쟁한 문인들이 포진했다.) 그런데 이때 한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최초의 우리말 사전이 조선어학회가 아닌 한 개인의 이름으로 출판된 것이다.  저자는 청람 문세영. 이 사전의 출판에는 두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세영이 조선어학회에 원고를 가지고 와 출판을 요청했으나 조선어학회가 이것을 거부하고, 원고를 기증하라고 했다는 것이 첫번째 이야기다. 문세영은 원고 기증을 거부하고 독자 출판을 감행했다. 1938년 10월. 출간. 그러나 일석 이희승은 이에 대해서 다른 증언을 남기고 있다. 문세영이 환산 이윤재의 작업을 도용하여 출간을 했다는 것이다. 이윤재는 이때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이때 문세영이 이윤재가 거의 해놓은 작업을 낼름 가로챈 것이 아닌지 의심이 있다.  문세영 역시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조선어학회 안에서 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다.  1939년 조선어학회의 준비도 모두 끝났다. 1940년 조선총독부의 검열도 받았다. 1942년 드디어 조판도 끝났다. 그러나 사전은 발간되지 못했다.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을까? 그것은 자금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일제의 문화정책 변화도 한 몫하고 있었다. 극도의 궁핍으로 자살하는 학자까지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시점에서 난데없는 사건이 터졌다. 조선어학회 사건. (사건의 내용은 한글학회 창립 100주년과 조선어 학회 사건 [클릭] 해명님 포스팅 참고)  이 사건으로 사전 원고도 증거물로 압수되었다. 해방이 된 뒤에도 원고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1945년 9월 8일 경성역의 역장이 원고를 발견했다. 2만6천5백여장의 원고가 조선어학회로 돌아갔다. 지금은 이름모를 그 역장이야말로 우리말을 살린 숨은 공로자가 아닐까? 사전 각권의 발간 연월일  첫째권 1947년 10월 9일  둘째권 1949년 5월 5일  셋째권 1950년 6월 1일  넷째권 1957년 8월 30일  다섯째권 1957년 10월 9일 어휘수 164,125 에는 지금 길게 정리한 글보다 더 풍부한 우리말의 비밀이 그려져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우리말의 탄생 -  최경봉 지음/책과함께 =====================================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 (1933-1988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 法統一案, 발표 당시에는 ‘한글 마춤법 통일안’)은 1933년에 조선어 학회(지금의 한글 학회)가 정한 한글 맞춤법이다. 이 맞춤법은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쓰는 맞춤법의 바탕이 되었다. 여기서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초판)의 과정과 표기법의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대한제국에서는 1894년 11월에 칙령 제1호 공문식을 공포하여, 공문서를 국문(한글)으로 적기로 결정한 후 1907년 학부에 국어 연구소를 설치하여 한국어 맞춤법을 정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1910년에 대한제국이 일제의 지배를 받자 이러한 사업은 모두 중단되었고 그 사업은 조선 총독부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총독부에서는 1912년에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그 때까지 사용되던 관습적인 표기법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21년에 조선어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발족되고 1931년에 이름을 바꾼 조선어 학회는 1930년 12월 13일의 총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성을 결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시경 등이 주도하는 ‘한글파’와 박승빈 등이 주도하는 ‘정음파’의 주장 간에 대립이 있었다. 한글파는 형태주의, 즉 으뜸꼴을 밝혀 적는 방법을 주장하였으며, 정음파는 표음주의, 즉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방법을 주장하였다. 형태주의란 현재 대한민국의 한글 맞춤법 총칙에 명시되어 있듯이, ‘표준어를 소리나는 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뜻이다. 된소리의 표기에서 한글파는 각자 병서(ㄲ)를, 정음파는 ㅅ계 합용 병서(ㅺ)를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통일안에는 대부분 한글파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3년 동안의 논의를 거쳐 1933년 10월 29일(당시의 한글날)에 한글 반포 487돌을 기념하여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그 후 1940년, 1946년, 1948년, 1958년에 개정판을 냈다. (1958년은 용어 수정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초판은 총론, 각론, 부록으로 구성되며 각론은 7장 65항으로, 부록은 표준어, 문장 부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자모   자모자모의 종류와 순서는 현행 맞춤법과 같으며 합성 자모는 정식 자모로 삼지 않는다. 다만 합성 자모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실려 있다.   ㄲ, ㄸ, ㅃ, ㅆ, ㅉ, ㅐ, ㅔ, ㅚ, ㅟ, ㅒ, ㅖ, ㅘ, ㅝ, ㅙ, ㅞ, ㅢ     2. 표의주의의 반영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는 종전의 관습적 표기법을 수정하였으며, 주된 사항은 어중 된소리를 받침과 초성으로 나눠 적지 않고 된소리 자모로 적는 것, ‘ㄹㄹ’ 연속을 발음대로 적는 것, ‘이, 히’가 붙어 구개음화되는 경우에 원래 형태를 밝혀 적는 것, 어원이 뚜렷하지 않은 받침소리 [ㄷ]은 ‘ㅅ’으로 적는 것 등이 있다. 이들은 현행 맞춤법과 공통된 내용이다. 한자어 표기에서도 관용적인 표기법이 수정되었으며, 두음 법칙에 따라 어두의 ㄹ, ㄴ을 표기하지 않는 표기법을 이때 함께 정했다. 또 관용음이 통용되는 것에 관해서 관용음대로 적는 것도 현행 맞춤법과 동일하다.   오빠 (○) ← 옵바 (×) 걸레 (○) ← 걸네 (×) 밭이 (○) ← 바치 (×) 짓밟다 (○) ← 짇밟다 (×)   3.형태주의의 반영   또한 현행 맞춤법과 마찬가지로 체언과 조사, 용언 어간과 어미, 접미사를 분리 표기하는 형태주의적 표기법을 채택했다. 형태주의적 표기법은 1930년에 조선 총독부가 정한 ‘언문 철자법’에서도 채택되었으나 일부 표기가 아직 불완전했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는 철저한 형태주의로 일관했다. 다음은 현행 맞춤법과의 차이점이다.   4.의문형 문제   의문형 어미 ‘-ㄹ까, -ㄹ꼬’를 ‘-ㄹ가, -ㄹ고’로 적었다(제8항). 그러나 이 기술은 제2판(1937년) 이후에 사라졌다.   5.두 글자로 된 받침 표기   두 글자로 된 받침 표기로 ‘ᇚ’을 인정했다(제11항). 이 표기는 옛말에 쓰는 것인데 현대 국어 표기에는 쓰이지 않았다.     5.사이시옷 문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합성어의 사이시옷 규정은 현행 맞춤법과 동일하다. 다만 1940년 개정판에서는 된소리화와 [n] 삽입이 일어나는 합성어의 경우 ‘ㅅ’을 한 글자로 표기했는데(담배ㅅ대, 담ㅅ요), 1948년 개정판에서 종전의 표기로 다시 돌아갔다. 참고로 북조선에서 1948년에 제정한 《조선어 신철자법》에서는 1940년 개정판의 사이시옷을 사이표(’)로 부호화했으며, 1966년까지 유지되었다.   6.준말   준말의 경우 ‘하다’가 줄어서 격음화되는 경우의 표기법이 현행 맞춤법과 크게 다르다. 어간과 어미 사이에 한 글자로 ‘ㅎ’을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하면서 어간말에 받침으로 ‘ㅎ’을 적는 것을 허용했다. 그 한편 현행 맞춤법처럼 격음 자모로 적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7.띄어쓰기   띄어쓰기 규정은 다섯 항목의 간단한 규칙뿐이다. ‘단어 단위로 띄어쓰되 조사, 어미는 붙여쓴다.’는 원칙은 현행 맞춤법과 마찬가지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현행 맞춤법과 차이가 난다.   8.문법   보조 용언은 바로 앞의 용언에 붙여 쓴다. 의존 명사(단위성 의존 명사 포함)는 바로 앞의 단어에 붙여 쓴다. 숫자는 10진법에 따라 띄어 쓴다. 보조 용언과 의존 명사에 관한 규정은 1948년 개정판부터 띄어 쓰도록 바뀌었다.   9.문장 부호문장 부호   구두점은 초판에서 ‘、。’만 인정했으나 1940년 개정판에서 가로쓰기에 맞추어 ‘, .’도 인정했다. 따옴표는 초판에서 꺾쇠(「 」, 『 』)만 인정했으나 1940년 개정판에서 가로쓰기에 맞추어 현행 맞춤법과 같은 따옴표 (‘ ’, “ ”)도 인정했다. 고유 명사에는 줄을 그었다(세로쓰기에서는 글자 왼쪽에, 가로쓰기에서는 글자 아래쪽에).                                                                         V. 현행 한국어 맞춤법     한글로써 우리말을 적는 규범으로 1933년 이 만들어진 이후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50여 년 사이에 다른 사회적인 변화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간 이러한 변화에 따른 맞춤법의 부분적인 개정이 있어 왔음도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여기서는 그 동안 사용해 오던 의 제정과 수정의 경위를 간단히 살펴보고, 아울러 이 확정되기까지의 사정을 알아본 다음, 과 사이의 차이점을 대강 정리하여 봄으로써 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그간 사용해 오던 은 1930년 12월 13일, 현 한글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 학회 본회 총회의 결의로 만들게 된 것이다. 그 경의에 따라 권덕규, 김윤경, 이병기, 이윤재, 이희승, 장지영, 정인섭, 최현배 등 12인의 위원이 2년 여의 심의를 한 결과 1932년 12월에 의 원안이 작성되었고, 다시 김선기, 이탁 등 6인의 위원이 증선되어 모두 18인의 위원이 원안을 축조, 토의하여 제1독회를 마쳤으며, 그 내용을 권덕규, 김선기, 김윤경, 이희승, 이윤재, 장지영, 최현배 등 수정 위원 10인이 검토하여 약 6개월 후 제2독회를 마쳤다. 권덕규, 김선기, 이희승, 이윤재, 최현배 등 정리 위원 9인이 그 결과를 전체적으로 정리하여 그 해, 곧 1933년 10월 19일 임시 총회를 검쳐 확정했고, 그 해 10월 29일에 단행본으로 세상에 공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정된 은 그 후 몇 차례의 수정을 거치게 된다. 1937년 3월 1일의 첫 번째 수정에서는 1936년 10월 28일(한글 기념일)에 이 발표되었으므로 부록에 실린 표준말 제7항과 제8항의 표준말 어례 전부를 삭제하고, 의 각 항 용어와 어례를 모두 사정된 표준말로 고쳤다.   1940년 6월 15일 두 번째의 개정에서는 본문 제19항 중의 ‘후’를 ‘추’로 고치는 동시에 의 명칭 표기 중 ‘마춤법’을 ‘맞춤법’으로 쓸 것과, 제29항의 문구 수정과, 제30항의 ‘사이ㅅ’을 쓸 것 및 부록 의 증보 수정을 행하였다.   이후 1946년 9월 8일에 있었던 세 번째 개정에서는 ① 제10항에 ‘다만’ 줄을 넣고, ② 제30항을 고쳐 정하며, ③ 제48항에 ‘다만’ 줄을 넣고, ④ 제61항에 ‘다만’ 줄을 넣으며, ⑤ 제62, 63, 64항의 세 항을 없애고, 제65항을 제62항으로 삼으며, 새로 제63항을 두는 등의 여섯 가지를 종전과 다르게 고치게 되었다.   그 이후 있었던 네 번째(1948년 한글날)와 다섯 번째(1958년 2월 20일)의 개정은 엄밀하게 따져서 개정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1948년에는 단지 1946년의 개정본의 전문을 순 한글로 바꾸었을 뿐이며, 1958년의 개정은 의 본문 가운데의 문법 용어만을 문교부 제정의 문법 용어로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은 약간의 수정이 있었으나 골격은 1933년에 제정, 공표된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공표된 직후부터 사회적 호응을 받아 우리 문자 생활의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해방 이후부터는 문교부의 국정 교과서에 채택됨으로써 그 자리는 더욱 굳어져 은 바로 정서법이라 부르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신문, 잡지 등 언론 매체는 물론이고, 심지어 문교부의 국정 교과서에서도 의 표기에 따르지 않은 예가 나타나는 일이 있었다. 의 제정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일어난 말의 변화와, 그 당시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자 생활에 맞추어 에 대한 검토와 수정이 문제로 제기된 것이다.   이에 문교부는 1970년 2월에 국어 심의회의 건의에 따라 한글 학회를 주간으로 하여 6개 국어 연구와 관련된 학회의 대표들로서 국어 조사 연구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 한글 맞춤법 재심 위원회를 두어 을 수정하게 하였다. 그 재심 위원회는 2년여에 걸친 검토와 심의 끝에 작성된 수정안을 1972년 11월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이를 기초로 문교부에서는 여러 과정의 심의를 거쳐 1979년 12월에 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런데 약 10년에 걸쳐 마련된 에도 상당한 문제점이 있어, 문교부는 이 안을 학술원에 이관하여 다시 연구, 검토하게 하였다. 학술원은 1982년 1월에 인문 과학부회 제2분과회 회원을 중심으로 어문 연구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 맞춤법 소위원회를 두어 그 안을 수정한 을 1984년 12월에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문교부에서는 맞춤법의 개정 문제가 국가적인 사업일뿐 아니라, 국민의 문자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한 점에 비추어서, 학계와 언론계 등 국민의 여론을 다시 수렴할 필요가 있다고 하여, 1985년 2월에 국어 연구소에 의 검토를 위촉하였다.   국어 연구소에서는 맞춤법 심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을 비롯하여 위의 여러 개정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한편, 전국의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심의에 반영하였다. 국어 연구소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87년 4월에 이 완성되자, 국민의 여론을 들을 필요가 있다고 하여 세상에 발표하였다. 이와 동시에 맞춤법에 식견이 높은 각계각층의 인사들의 검토를 받고자 각 관계 기관의 추천을 받아 맞춤법 심의 의원회 위원과 합동으로 맞춤법 검토 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에서 최종안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검토 위원회와 약간의 미진한 문제의 조절을 위한 조절 위원회 및 보완 심의회를 거쳐서 1987년 9월에 국어 연구소의 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어 문교부에 제출되었다.   문교부에서는 곧바로 국어 심의회에 회부하여 그 안을 다시 심의 검토하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확정된 맞춤법은 1989년 1월 19일 으로서 ‘문교부 고시 제88-1호’로 공포되었는데, 그 부칙에 따라 1989년 3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되었다. 이로써 약 20년에 걸친 의 개정 작업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은 의 개정이라 하기보다는 부분적인 보완에 지나지 않는다. 의 근본적인 개정을 주장하는 의견도 없지 않았지만, 문자 생활의 변혁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꼭 필요한 부분만 손질한 결과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 의 적절한 개정이라 할 것이다.     1.한글맞춤법 통일안(1933)과 현행 맞춤법(1988년)과의 차이점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한글 맞춤법》과의 비교를 통한 변화 조항 및 그 이유와 문제점에 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33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1988년 《한글 맞춤법》으로 바뀌면서 달라진 표기는 그리 많지 않다. 분철을 하며 기본 형태를 밝혀 적는다는 대원칙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사문화된 규정이라든가 미비한 규정, 언어 변화를 따르지 못한 규정, 일관되지 못한 처리 등에 대해서는 정비를 하였고 이에 따라 표기가 달라진 예가 일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전면 개정이라기보다 보완의 성격을 띤다.   이제 과 종전의 의 각 항을 비교하여 보기로 하자. 그러나 여기서의 비교는 대강의 내용에 국한하고 구체적인 내용의 비교는 각 항을 찾아가서 보도록 하였다. 다음의 도표에 보인 관련항의 제시는 그에 대한 도움이 될 것이다. 두 가지 맞춤법안을 다음과 같이 큰 틀로 정리할 수가 있다..   과 의 비교   *은《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한글 맞춤법》에는 없는 조항임   내용 체제 총론, 각록 7장 63항 부록(표준말, 문장부호) 본문 6장 57항 부록(문장부호) 원칙 총론 제1장 총칙 맞춤법 1. 제1항 띄어쓰기 3. :토에 대한 언급 제2항 외래어 표기 각론 제60항:원칙 제시 제3항 으로   각론   한글 자모 제1장 자모 제2장 자모 자모 제1항:수, 순서 제2항:이름 제4항:수, 순서, 이름 ※사전에 올릴 적의 순서 명시 소리 제2장 성음에 관한 것 제3장 소리에 관한 것 된소리 제1절 된소리 제3항:환경 구분 안함. 제1절 된소리 제5항:된소리 환경 구분 구체화 구개음화 제3절 구개음화 제5항 [붙임1]과 일치 제2절 구개음화 제6항:구개음화 인정 ‘ㄷ’ 소리 받침 제6항:관용의 인정, 유형 구분 제3절 ‘ㄷ’ 소리 받침 제7항:관용의 인정, 유형 구분 안함. 모음 제4장 한자어 제36항:‘ㅖ’ 제39항:[의, 희] 제4절 모음 제8항:[ㅖ, ㅔ]→‘ㅖ’ 제9항:[ㅢ, ㅣ]→‘ㅢ’ 두음 법칙 제42항:[ㄴ] 제43항:[ㄹ] 제44항:[ㄴ] 제5절 두음 법칙 제10항:[ㄴ] 제11항:[ㄹ] 제12항:[ㄴ] 겹쳐 나는 소리 * 제6절 겹쳐 나는 소리 제13항:한 낱말 안에서의 음절의 중복 형태 제3장 문법에 관한 것 제4장 형태에 관한 것 체언과 조사 제1절 체언과 토 제7항:원형을 밝혀 적음 제1절 체언과 조사 제14항:구별하여 적음 어간과 어미 제2절 어간과 어미 제8항:구별하여 적음 제2절 어간과 어미 제15항:구별하여 적음 cf. ‘-오’와 ‘-요’ 포함 어미 ‘-아/어’, ‘-요’ * * 제16항:‘-아’와 ‘-어’의 구별 제17항:어미 뒤의 ‘-요’ 불규칙 용언 제10항 제18항:cf.18.4의 ‘ㅜ, ㅡ’가 줄어질 적 보완 ※18.6 단음절 어간 뒤의 ‘-아’만 ‘-와’로, 그 밖에는 모두 ‘-워’ 파생 명사, 파생 부사 제6절 어원 표시 제12항:‘-이’, ‘-음’;‘-이’ 제13항:‘이’, ‘음’ 이외의 모음 제3절 접미사가 붙어서 된 말 제19항:‘-이’, ‘-음/ㅁ’;‘-이/히’ cf.19.4[붙임] 명사+‘-이’ 제14항:품사 전환 여부로 구분 제15항:‘-이’ 이외의 접미사 제20항:부사와 명사로 구분 cf.[붙임] 자음 접미사 제16항:명사와 어간 경우 구분 제21항:명사와 어간의 경우 구분 피․사동, 강세 접미사 제9, 17, 18, 19, 20항:유형별로 구분 제25항:용례 많음 제22항:접미사의 기능 구분 안함 22.1 ‘다만’ 규정:어원에서 먼 것 ‘-하다, -거리다’ 제21항 2. cf 1은 부사 제22항 유형별로 구분 제23항:‘-하다, -거리다’→‘-이’ 파생 명사 cf.[붙임]‘-하다, -거리다’가 붙지 못하는 것 ‘-이다’ 제24항:‘-이다’ 제24항:‘-거리다’→‘-이다’ ‘-이/히’ 제21항 1. cf 2는 명사임 제25항:‘-이/히’ 부사 ‘-하다, -없다’ 제23항:‘-하다’만 제27항 [붙임]:‘-없다’ 제26항:1. ‘-하다’ 26.2. ‘-없다’ 합성․파생어 제7절 품사 합성 제28항:[붙임3]의 ‘이(齒, 虱)→니’는 없음 제4절 합성어 및 접두사가 붙은 말 제27항:합성어, 접두 파생어의 원형 cf.[붙임3]‘이(齒, 虱)→니’ ‘ㄹ’ 탈락 제29항:‘ㄹ’→∅ 제28항:‘ㄹ’→∅ ‘ㄹ’→‘ㄷ’ * 제29항:‘ㄹ’→‘ㄷ’ 사이시옷 제30항:윗말의 끝소리가 모음일 때에 된소리로 발음되면 사이시옷 사용 제30항: 순 우리말 합성어, 순 우리말과 한자어의 합성어, 두 음절로 된 한자어(6개만) ㄱ.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는 것 ㄴ. ‘ㄴ’ 소리가 덧나는 것 ‘ㅂ’, ‘ㅎ’ 제31항 제31항:‘ㅂ’이나 ‘ㅎ’ 소리가 덧나는 것 모음 탈락 제52장 준말 제52항 제5절 준말 제32항:단어 끝 모음 탈락→앞음절의 받침 체언과 조사 제53항 제33항:체언과 조사의 축약→준대로 적음 모음 축약 제56항 2. * * 제56항 2. * * 제56항 4. 제56항 1. ‘ㅡ’+‘-이-’ 제56항 3. ‘ㅗ, ㅡ’+‘-이어, -이었’ * 제56항:‘ㅎ’을 그 자리에 두거나 윗음절의 받침으로 * * 제57항 제34항:‘ㅏ, ㅓ’+‘-아/어’;‘-았/었-’ cf.[붙임1]:‘애, 에’+‘-어, -었-’ [붙임2]:‘하여’→‘해’ 제35항:‘ㅗ, ㅜ’+‘-아/어’;‘-았/었-’ cf.[붙임1]:‘놓아’→‘놔’ [붙임2]:‘외’+‘-어, -었-’ 제36항:‘ㅣ’+‘-어’→‘ㅕ’ 제37항:‘ㅏ, ㅕ, ㅗ, ㅜ, ㅡ’+‘-이-’ 제38항:‘ㅏ, ㅗ, ㅜ, ㅡ’+‘-이어’ 제39항:‘잖’, ‘찮’ 제40항:‘하’의 ‘ㅏ’ 탈락→거센 소리로 cf.[붙임1]:‘ㅎ’을 어간 끝소리로 [붙임2]:‘하’의 탈락 [붙임3]:부사의 경우 띄어쓰기 제7장 띄어쓰기 제5장 띄어쓰기 조사 제61항:용언의 어간과 어미 포함 cf.‘다만’:의존 명사 붙여쓰기 허용 제1절 조사 제41항:‘명사, 부사’+‘조사’ 의존 명사 * 제2절 의존 명사,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 및 열거하는 말 등 제42항:띄어 쓴다 단위 제61항:‘다만’ 제61항 ‘다만’:띄어쓰기 허용 제43항:띄어 쓴다 cf.‘다만’:붙여 쓰기 허용 수 제62항:십진법에 따라 제44항:만(萬) 단위로 연결어 * 제45항:띄어 쓴다 단음절 단어 제61항:‘다만’ 제46항:붙여 쓰기 허용 보조 용언 * 제3절 보조 용언 제47항:붙여 쓰기 허용 성명, 호칭어 제63항:띄어 쓴다 제4절 고유 명사 및 전문 용어 제48항:성과 이름, 성과 호는 붙여 쓴다. 호칭어, 관직명:띄어 쓴다 성명 이외 제63항:띄어 쓴다. 제49항:붙여 쓰기 허용 전문 용어 * 제50항:붙여 쓰기 허용 ‘-이’와 ‘-히’ *cf.제12항 2. 제14항 1. 제21항 7. 부록 5 참조 제6장 그 밖의 것 제51항:‘이’로 발음되는 것만 ‘-이’로 본음․속음 제47, 48, 49, 50, 51항 제52항:소리에 따라 어미 보유 첫째:구분은 따로 하지 않음. 제53항:예사소리로 표기하는 경우와 된소리로 표기하는 경우 접미사 * 제54항:된소리 표기 접미사 어휘 * 보유 둘째:‘-든’으로 통일 제55항:‘맞추다, 뻗치다’ 제56항:‘-더라, -던, -든지’ 동음 이의어 * 제57항 부록 부록:문장부호 부록:문장부호 문장부호 39개 항의 나열 규정 보완, 불필요한 부호 삭제     1. *표는 에는 없는 조항임. 2. 총론 2의 표준어에 관한 규정은 따로 이 마련됨으로써 삭제됨. 3. 에 있던 제33, 34, 37, 38, 40, 41, 45, 46, 47, 48, 50, 51항 등은 에서 제외됨. 4. 에 항 표시만 한 것은 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음을 의미함.     2. 현대 표기법의 기본 원리   1) 주시경 선생의 本音 이론   1906 대한국어문법에서는 예외없는 본음 표기를 적용하였고, 1910 국어문법에서는 기본 원리는 본음 표기이지만, 몇 가지 경우의 예외를 인정. 변칙 용언 어간, 어미와 조사, 예외적인 파생어 본래 어법 자체가 예외이므로, 표기에서도 예외를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겼다. 1914 ‘말의소리’에서는 '본음' 판단에 변화(혼란)가 일어나 '높'과 '놉'을 모두 본음으로 인정했다. 1933년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은 1910년 국어문법 당시의 원리를 적용하였다. 한글맞춤법의 규범이나 설명에서 본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서양이론의 용어와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맞춤법의 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어려워짐.   단어나 형태소의 음가를 '본음/임시의음'으로 구별하고, 표기에서는 '본음'을 적어야한다. 형태음소적 원리를 따른다.   예)밭, 높고, 곶 놓삽고 (표의적 표기법) 예) '높-'의 경우 '높'과 '놉' 두 가지로 발음이 되지만, '높'을 본음으로 봄.     3.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   이러한 띄어쓰기는 문장의 중의성을 피할 수 있다.   예) 나물좀다오 >나 물 좀 다오/나물 좀 다오   4. 가로쓰기   최초 가로쓰기 문헌으로는 '예슈 셩교 누가복음 전셔'로 추정된다. 이는 영국 성서 공회에서 기증한 것으로 최초의 한글 성서이다. 1950년대 들어서는 주시경과 지석영 등 한글 보급에 힘쓰는 학자들이 가로쓰기를 주장하며 '신정국문' , '자전석요'등을 발표했다.   위 내용은 교재에서 다루는 중세국어 표기법과 근대국어 표기법 그리고 현대국어 표기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더 나아가 중세국어의 문법상의 특징과 어휘상의 특징, 음운상의 특징,                                                       VI.현행 맞춤법의 문제점   1. 총칙에 나타난 문제점     한글 맞춤법의 총칙은 한글 맞춤법의 세부 규정을 모두 포괄하는 대원칙으로 3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제1항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제1항은 한글 맞춤법의 대원칙으로, 무엇을 어떻게 적을 것인가를 규정한 조항이다. 그러면 여기서 제1항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어법에 맞도록’이라는 개념은 문제가 있다. 일반 언중의 입장에서 ‘어법’이라는 개념은 너무 포괄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총칙이 갖는 포괄성이란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제1항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임홍빈(1997: 36~7)이 제시한 언어규범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건을 고려해 볼 때 명료성의 원리와 자족성의 원리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글 맞춤법 해설(1998: 38)에서는 ‘어법’의 개념을 ‘언어 조직의 법칙, 또는 언어 운용의 법칙’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어법에 맞도록’ 한다는 것은 결국 뜻을 파악하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각 형태소의 본 모양을 밝히어 적는다고 하면서, 정작 명료해야 할 규정 전문에는 그 규정 자체로 설명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점에서 한글학회의 맞춤법 규정 총론1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총론 1: 한글 맞춤법은 표준말의 각 형태소를 소리대로 적되, 그 원형을 밝힘을 원칙으로 한다.   이 조항은 두 가지 면에서 현행 맞춤법 규정과 다른데, 첫째, ‘형태소’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이고, 둘째, ‘어법에 맞도록’이 ‘원형을 밝힘’으로 대치된 것이다. 즉 현행 맞춤법 규정의 ‘어법에 맞도록’이 한글학회 안에서는 ‘형태소의 원형을 밝힘’과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형태소’라는 언어학적 용어를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규정에 도입하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하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형태’라는 개념이 한글 맞춤법에 들어 와 있다는 점을 참고하면,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에서 그 형태소를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 용어 자체는 낯설지만, 언어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고, 한글 맞춤법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문법 지식이 필요한 상황에서 ‘형태소’라는 개념을 도입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연규동, 1998: 17)   또한 ‘형태소’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한글 맞춤법의 여러 부분이 훨씬 설명력 있고 간단해진다. 즉 제1항에서 ‘형태소의 원형을 밝히어’라고 적는 것이 명시적으로 규정되면, 현행 한글 맞춤법의 다음과 같은 조항들은 원칙적으로 필요 없게 된다.   제14항 체언은 조사와 구별하여 적는다. 제15항 용언의 어간과 어미는 구별하여 적는다. 제19~26항 접미사가 붙어서 된 말은 그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 제27항 둘 이상의 단어가 어울리거나 접두사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은 각각 그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   이들은 모두 형태소가 결합할 때에 소리가 바뀌는 일이 있더라도 그 바뀐 소리대로 적지 않고 언제나 기본 형태를 밝혀 적는다는 조항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첨가하자면, 북한의 조선말 규범집 총칙에 제시되어 있는 ‘관습을 따르는 것을 허용한다.’는 표현을 참고할 만하다(연규동, 1998: 24). 이는 현행 한글 맞춤법 제7항과 같은 조항들에 적용되는 표현이다. ‘한글 자모의 음가대로’의 원칙도 아니고, ‘원형을 밝히어’의 원칙도 아닌 관습에 의한 표기도 있으므로, 이 같은 것을 밝히는 것이 더욱 명시적인 총칙의 역할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한글 맞춤법은 ‘한글 자모의 음가대로’, ‘원형을 밝히어’, ‘관습에 따라서’의 세 가지 원리에 의해 표기된다고 할 수 있다.    제2항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   이 항은 단어를 기준으로 하여 띄어 쓸 것을 규정하고 있는 조항이다. 그런데 이 조항에서 ‘문장의’라는 말은 불필요한 표현이다. 만약, 이러한 표현에 중점을 둔다면 ‘문장 속에서 사용되지 않는 단어의 띄어쓰기는 어떻게 하느냐?’도 규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문장 안에서나 문장이 아닌 경우나 그 둘을 구별할 필요도 없으므로 굳이 ‘문장의’를 덧붙일 필요는 없겠다.   또한, 제5장(제41항~50항)에 따로 띄어쓰기 규정이 세부적으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제2항이 과연 총칙에서 따로 규정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원칙적으로 총칙에서는 제1항만을 다루고 이 띄어쓰기에 관한 조항은 제5장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북한의 조선말 규범집이 아예 ‘맞춤법 총칙’과 ‘띄어쓰기 총칙’으로 나뉘어 있음에 주목할 만하다.    제3항 외래어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는다.   우리말을 크게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로 나눈다면, 우리말을 이루고 있는 모든 어휘에 대해 맞춤법이 규정되어야 한다. 고유어와 한자어는 대부분 맞춤법으로 표기가 가능하지만, 외래어의 경우 각 언어가 가진 특질이 고려되어야 하므로 ‘외래어 표기법’을 따로 두기로 한다는 규정이다.   그런데 현행 규정이 고유어 표기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지만, 한자어 표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외래어 표기를 위해 맞춤법에 한 조항을 배려할 정도라면 외래어보다 훨씬 더 많은 한자어 표기에 대한 언급이 한글 맞춤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은지 이해할 수 없다.   혹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외래어도 한글 맞춤법이 표기해 내야 할 우리말의 일부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하겠지만, 우리말에는 외래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글 맞춤법에서 외래어가 언급된다면, 한자어는 물론이고 역시 한글로 주로 적히는 방언, 옛말 등도 언급되어야 형평에 맞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조항은 삭제해도 무방할 것이라는 생각이다(연규동, 1998: 27).   또한 “한글 맞춤법”과 따로 정해지는 규정을 매번 그 총칙에 명시해야 하는 것이라면 “표준어 규정” 혹은 “표준어 사정 원칙”이나 “표준 발음법”에 대해서도 동일한 대우를 해 주었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임홍빈, 1997: 51).   총칙 제3항 외래어 표기법은 한글 맞춤법 총칙에서는 다루지 않아도 될 것을 다루고 있다. 외래어 표기법은 한글 맞춤법의 제1장에서 6장까지와 부록의 문장부호의 항 중 어느 곳에서도 언급이 없다. 이처럼 한글 맞춤법 규정 전문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 항을 총칙에 두고 있는 것은 일관성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한글 맞춤법 규정에 해당 사항이 있으면 한글 맞춤법 규정 전문에 외래어 표기에 해당하는 항을 삽입시키든가 아니면 외래어 표기에 관한 사항을 총칙에서 제외시켜야만 총칙과 본 규정간의 일관성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외래어 표기는 한글 맞춤법 총칙에 두지 말고, 외래어 사정 문제, 외래어 표기와 발음 문제 등 여러 문제를 고려하여 외래어 표기법의 항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2. 제2장 자모에 관한 규정의 문제점      제4항 한글 자모의 수는 스물넉 자로 하고, 그 순서와 이름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   ㄱ(기역) ㄴ(니은) ㄷ(디귿) ㄹ(리을) ㅁ(미음) ㅂ(비읍) ㅅ(시옷) ㅇ(이응) ㅈ(지읒) ㅊ(치읓) ㅋ(키읔) ㅌ(티읕) ㅍ(피읖) ㅎ(히읗) ㅏ(아) ㅑ(야) ㅓ(어) ㅕ(여) ㅗ(오) ㅛ(요) ㅜ(우) ㅠ(유) ㅡ(으) ㅣ(이)   [붙임 1] 위의 자모로써 적을 수 없는 소리는 두 개 이상의 자모를 어울러서 적되, 그 순서와 이름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   ㄲ(쌍기역) ㄸ(쌍디귿) ㅃ(쌍비읍) ㅆ(쌍시옷) ㅉ(쌍지읒) ㅐ(애) ㅒ(얘) ㅔ(에) ㅖ(예) ㅘ(와) ㅙ(왜) ㅚ(외) ㅝ(워) ㅞ(웨) ㅟ(위) ㅢ(의)   [붙임 2] 사전에 올릴 적의 자모 순서는 다음과 같이 정한다.   자음 ㄱ ㄲ ㄴ ㄷ ㄸ ㄹ ㅁ ㅂ ㅃ ㅅ ㅆ ㅇ ㅈ ㅉ ㅊ ㅋ ㅌ ㅍ ㅎ 모음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ㅠ ㅝ ㅞ ㅟ ㅠ ㅡ ㅢ ㅣ   이 조항은 아주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온 자모의 순서와 이름을 다루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한글 자모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순서도 지금의 것과는 달랐다. 자모의 이름이 지금과 같은 식으로 불리게 된 것은 (1527)에서부터이다(연규동, 1998: 30). 에서는 초성종성통용팔자(初聲終聲通用八字)와 초성독용팔자(初聲獨用八字)라는 이름으로 배열하고 있는데, 조금 차이는 있지만 현재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 자모의 순서와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한 듯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ㄱ, ㄷ, ㅅ’의 이름으로 ‘이으’ 유형의 명칭을 기본으로 하는 전체의 흐름에 벗어나 일관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명칭이 일관성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헷갈려하고, 일일이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한다는 측면에서 이와 같은 이름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기역, 디귿, 시옷’처럼 예외 명칭이 생긴 이유가 당시 ‘윽, 읃, 읏’에 해당하는 한자어가 없어 부득이 유사음 ‘역, 귿, 옷’을 찾아 이에 해당하는 한자어 ‘役, 未, 衣’를 음독 또는 훈독하여 차용한 궁벽한 조치의 결과로 볼 때 한자 문화가 지배하던 옛 시대 상황의 산물이므로, 한자 문화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오늘날의 상황에서 불균형하고 혼동과 불편을 주는 일탈된 명칭을 계속 고집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특히 이것을 ‘기윽, 니은, 디읃……’ 방식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한국어의 세계화와 관련지어서도 그러하다. 자모 명칭부터 헷갈리게 하느니 간결하게 통일하여 주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북한 방식이 참고할 만하다. 북한의 조선말 규범집에서는 자모 명칭을 두 종류로 하여 ‘기윽, 니은, 디읃……’ 식으로 통일하고, ‘그, 느, 드……’ 방식도 허용하는데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때 ‘그, 느, 드……’ 방식이 ‘가’와 같은 음결합을 설명할 때 ‘ㄱ+ㅏ>그아>가’처럼 설명하면 음절 발음 이해가 훨씬 수월하다고 한다.   다음에 자모의 수를 각 자모 형태가 단일 자형으로 된 것 24자를 들고 복합 자형으로 된 것을 [붙임 1]에 추가하는 식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자모음자를 단일 자모 24자(자음 14+모음 10), 복합 자모 16자(자음 5+모음 11)로 하여 도합 40자로 규정하는 방식도 고려함직하다. 이 부분도 북한의 규정을 참고할 만하다 하겠다.   그런데, 보다 근본적으로 이 규정은 한글 맞춤법과 관련된 조항이기에 음운의 명칭이나 배열순서보다는 초성, 중성, 종성이 모여 음절을 이루는 부서법을 중심으로 기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문 규정에는 받침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는데, 받침 27자도 본문에 추가하여 명시함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외래어 규정에는 7종성의 받침으로 제한한다는 받침 규정이 있으면서 ‘한글 맞춤법’에 받침 규정이 빠져 있는 것은 불균형하게 보일 수 있다.      한국어 어문 규범의 변천사에 대한 이해[1].   출처 :한국다문화사회연구소 ============================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터                                  Original site of                             the Joseon                           Language Society  조선어학회는 1921년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의 제자들이 한글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발족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한글학회로 이어졌다.
2    조형언어가 추상적으로 표현된 형태시의 력작 그림... 댓글:  조회:2104  추천:0  2017-10-19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2) :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i (1866~1944)   추상(抽象)창조의 선구자         여자들이 있는 무르나우의 거리   작가들이 생활 환경의 대상물이나 일상 생활에서 얻어 진 체험들을 작품 모티브로 사용하는 예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무르나우는 뮌헨의 남쪽, 알프스의 산들로 싸인 아름다운 마을이다. 무르나우에 서 제작된 작품들은 자연의 외관이 눈에 띄게 주관적으로 처리되어 표현주의적인 화풍으로 대담한 전환을 시도했다. 형태의 단순화, 선명한 색상의 대비, 폭넓고 개성 있는 터치, 이미 칸딘스키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주관을 강하 게 나타내는 것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주관적인 '안으로의 응시'는 억제하기 어려운 욕구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 때문에 생긴 것으로써, 늘 검증되고 있다.           나무줄기가 있는 풍경     이 작품에서는 공간감의 표현과 형의 대조로써 원근법적 묘사를 기피하고 화면에 수직으로 내린 굵은 나무 가지와, 중앙 부분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어두운 색 면, 그것들이 교차하는 십자형(十字型)의 강조는 화면에 큰 구조를 느끼게 한다. 아직 대상은 남아 있으나, 단순한 색면으로 환원되고 색채는 매우 절제되어 단순하고 간결함을 본다. 빨강·노랑·파랑·초록 등 색채들이 어울리고 있는 점은, 독일에서 그렸지만, 유럽적인 아니면 러시아 적이라고 할까. 어딘지 짙은 노스탤지어가 스며 있어 모스크바의 황혼, 붉은 환상의 지붕들을 연상시켜 향수와 시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차원 높은 조화는 독창적인 세계의 구축을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아라비아 1 (아라비아의 묘지)     칸딘스키는 서구적인 것에 강하게 끌리면서도, 동시에 러시아의 이콘(聖像)이나, 민예품의 장식적인 요소의 색채들을 잊지 못했으며, 과학적이 되게 하려고 하면서 일종의 동양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비주의적 인식을 줄곧 가지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상징성이 강한 장식성이 느껴진다. 이 상징성이 강한 장식성은 칸딘스키가 그 작풍을 변모시켜 가는 과정에서 표현을 바꾸면서도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큰 특색 가운데 하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평선과 수직선을 기조로 하여 약간의 곡선을 이입한 구도에 정리된 인물이 배치되어 있다. 다소 굵은 윤곽선이 사용되고 있으나, 형태는 단순하고 억양이 있는 터치로 칠해진 화면에 강렬한 색의 대비에 의해 음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리듬감을 지니고 있다.       푸른 산     대담하게 설정한 구도는 종래의 구도론을 떠나 우리에게 중량 감 마저 느끼게 한다. 좌우의 균형을 맞춘 큰 나무는 하늘을 덮듯 큰 면적으로 처리하고, 그 사이 중앙에 피라밋 형의 푸른 산이 원형으로 그려져 있는 독특한 구도이다. 아래쪽에는 원경으로 그려져 있는 푸른 산을 앞에 두고 하늘을 향하여 질주하는 군마(軍馬)의 약동적인 형태가 인상적이다. 크고 작은 수많은 점들로 그려진 이른바 색점묘법(色 點描法)의 기법은 화면을 장식적인 세계로 이끌어가는 한편, 강렬한 원색의 대비는 포비즘의 영향을 받은 듯하나, 러시아의 민속 예술의 연상과 실현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아무튼 끝없는 실험의 연속으로 보아야 할 작가의 태도는 대담하고 특이한 구도에서 충분히 읽을 수가 있다.       로맨틱한 풍경     칸딘스키가 질주하는 기마(騎馬)를 작품의 모티브로 하여 제작한 것을 많이 볼 수가 있다. 말을 좋아해서 그렸다기보다는 화면에 속도와 힘을 주기 위해서 말이라는 대상물을 차용한 듯하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발견인가. 화면에는 사선으로 비탈길 같은 것을 설정하여 한층 속도감을 고취시키면서 터치 또한 온통 사선으로 경사지게 표현하고 있다. 붉은 점으로 나타낸 태양과 주위의 점들은 엑조틱한 분위기를 짙게 감돌게 하며, 여러 방향에 걸쳐 실험적인 시도가 나타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칸딘스키는 내부에서 솟아 나오는 감흥을 되도록 강렬하게 표현하려 했으며 그것은 '내적 필연성'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     표현은 재료의 매체에 따라 많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유채란 캔버스에서 가능하지 않은 표현이 수채와 종이에서는 훌륭한 표현이 되는 예가 많기 때문에 작가들은 재료에 대한 관심이 높다. 화면에서 구체성을 띠는 대상물은 그 상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 때문에 감상자에게 이미지 전달로써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칸딘스키는 화면에서 이러한 대상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도하게 되는데 유화에서는 좀처럼 대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내부에서 솟아 나오는 감동, 즉 '내적 필연성'을 형상화하는 실험으로서 종이 위에 자유로운 붓의 놀림과 수채의 부드러운 침투는 표현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위대한 발견을 맛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이며 칸딘스키 자신도 예견하지 못 했던 현대 회화의 큰 수확을 얻은 것이다.       콤포지션 5   시리즈와 시리즈와 아울러 시리즈도 칸딘스키에겐 중요한 계통적 작품군(作品群) 이다. 은 내적 필연성이 무의식적·우발적·음악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상태이며, 은 대상을 평면적으로 용해 하여 새로운 표현의 전개를, 은 1910년 최초로 발표한 이래 죽음에 이를 때까지, 10점이 제작된 연작은 칸딘스키 예술의 중핵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군이다.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작품이다. 무엇인가를 연상케 하며 여러 가지의 자유롭고 유기적인 형태가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어떤 운동성을 나타내기도 하는 형태시(形態詩) 또는 드라마를 전개하고 있다. 칸딘스키의 조형언어가 유감없이 표현된 역작이라고 하겠다.       즉흥 '19'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궁전 극장에서 바그너의 '로엔그 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바이올린의, 베이스의, 관악기의 깊은 울림, 나의 마음속에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그것은 나의 눈앞에 있었다. 야성적이며, 거의 미친 것 같은 선이 눈앞에 그려졌다. 바그너가 '나의 시간'을 음악적으로 그렸다고 하는 표현을 나는 감히 사용하지 않겠다. 그러나 분명한 일은 예술이란 것은 내가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힘찬 것이며,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일이었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칸딘스키는 예술의 이론이나, 제명에 음악과 관련이 있는 말을 잘 사용했는데 즉흥도 그 중의 하나이다. 시리즈에서 칸딘스키는 내부에서 솟아나오는 감흥을 자유롭게 화면에 정착시키려 했다.           인상 5   1909년 3월에 야울렌스키의 노력으로 뮌헨에서 신(新) 예술가 동맹이 결성되었는데, 칸딘스키가 의장이 되어 제 1회 전람회와 제 2회 전람회를 열었다. 이 때에 피카소, 브라크, 브라망크, 루오 등도 출품하여 국제 전위 미술 전람회의 성격을 보였으나, 제 3회 때 의견 대립이 생겨 신 예술가 동맹에서 탈퇴하여, 곧 새로운 그룹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청기사)'를 결성한 해에 제작된 작품이다. '공원'이란 부제가 붙어 있으나 구상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평면적으로 용해시켜 전개함과 동시에, 임의 곡선과 두 개의 힘이 교대로 작용하는 각(角)이 있는 선의 등장 등은 자기의 사색에 확신을 가지는 시기였다. 칸딘스키는 이 작품에서 가장 간결한 형태를 표현함으로써 회화에 새로운 표현이 전개될 것을 비쳐 보이고 있다.       하얀 테두리가 있는 繪畵(회화)를 위한 밑그림   뮌헨의 신 예술가 동맹으로부터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 (靑騎士)에 이르는 시기, 즉 1909년부터 1914년까지에 칸딘스키는 한 작품마다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면서 많은 작품을 제작한 가장 충실한 시기에 해당하며, 추상적 표현주의를 전개해 나갔다. 이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규칙적인 선과 형태와 색채가 서로 응집과 확산이 교감하는 상황을 이루고 있다.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의 전개는 내적 감동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오토매틱한 표출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이 전체의 질서 속에 통일되어 있는 점이 커다란 특색의 하나이다. 이러한 특색은 제 2차 세계 대전 후 앙포르멜이라든가 액션 페인팅 등 추상 표현주의가 대두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선구자적 성격을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검은 곡선이 있는...   칸딘스키의 예술에 있어서 무대상(無對象)의 추상이 확고하게 성립된 것을 보여준 역작이다. 불규칙적인 작고 큰 선이 교차하면서 불가사의한 형을 안고 있으며, 색채들은 형체를 안고 울려 퍼져 나오고 있다. 화면 구성의 중심은 명제가 말해 주듯이 검은 곡선이다. 칸딘스키는 곡선에 관하여 '점, 선, 면'에서 '임의의 곡선에 주어진 자유 자재인 악센트 한계는 똑똑하지 않으면서도 확실히 존재하는 것. 선에 대해 서도 일체가 대비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은 점의 경우와 다름이 없다. 절대적인 것도 상대적인 것에 의해서, 똑똑하지도 않고 또한 울림이 약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계까지 간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이론상으로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것보다 차라리 실제상으로 훨씬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즉흥 '30'   시리즈는 1909년에 시작하여 13년 말까지의 사이에 34점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대단한 열성에 의한 작업량이다. 선과 면의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교차에 있어서 전체가 가장 생생하게 잘 짜여져 있다. 색채가 다양하며 미세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화면 여러 군데에 자유로운 곡선들은 주위의 형태들을 용해시켜 응결된 응집력을 구축하면서, 그 사이에 강하고 다양한 색으로 메워 가는 비교적 섬세한 작업의 하나이다. '대포'라는 부제가 붙어 오른쪽 아래편에 대포의 형상이 보이기는 하나, 화면 전체의 구성상 빌어온 것인지 제 1차 세계 대전의 시대적 상황, 긴장과 불안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 것인지 보는 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푸가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靑騎士) 시대 말기의 대작이다. 조형 요소 중에서 가장 감각적인 것은 색채라고 할 수 있다. 보는 순간에 마음을 움직이고 갖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조형의 매력을 주는 것은 뭐라고 해도 색 채이다. 색채는 다른 조형 요소보다 생명적·본능적인 것이며, 천부나, 체질 또는 생활 감정에 더욱 직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칸딘스키는 무대상(無對 象)의 추상에서도 색채 화가라고 불릴 만큼 색채의 구사에 노력함을 엿볼 수가 있다.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곡선들이 색조와 복합적으로 뒤섞여 공간 속에 한데 어울려 음악적인 리듬과 멜로디를 울리게 하는 장대한 심포니를 듣는 듯하다. 중앙에는 흰색의 내밀한 도식적인 선과 조그마한 여러 형태를 가지면서 노란 색조의 커다란 운동은 화면을 긴장과 리듬으로 이끌고 있다.       밝은 바탕 위의 형상   1914년 7월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 칸딘스키는 러시아 사람이므로 뮌헨을 떠나야 했다. 뮌헨은 그 의 예술적 자기 발견의 실현과 예술의 성숙과 그의 일생에 하나의 전환기를 가져다 준 도시였기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사실은 가혹한 충격이었다. 상심(傷 心)한 칸딘스키는 취리히를 거쳐 16년 스톡홀름에서 개인전을 마치고 가브리엘 뮌터와도 헤어져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화풍도 점점 정적(靜的)으로 변화하고 색채는 더 어두워져 갔다. 이 시기의 칸딘스키는 제작이 적었으나, 이 작품은 몇 점 안 되는 비교적 큰 작 품이다. 불규칙적인 커다란 형상 속에 가두어 넣은 색과 형태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다. 이 무렵의 작가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듯 우수와 상심이 화면에 깃들고 있다.           빨간 달걀 모양   꺼질 줄 모르는 전쟁과 미래에의 불확실한 전망은 칸딘스키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식히고 있었다. 1915년 과 1921년 사이에는 다른 창작기와 비교해서 극소수의 작품만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후, 소련 정부는 예술 부문에도 변혁을 하려고 혁신적인 예술가를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1918년에 소련 정부의 미술 행정위원이 된 칸딘스키는 그 전부터 열망하고 있던 종합 예술의 실현을 기대하여, 창립 주창자로서 교육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중앙 또는 지방 미술관을 정비하는 일에 힘쓰는 한편, 모스크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크게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점차 도식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훗날 독자적인 상징적 기호성이 하나 둘씩 얼굴을 내밀고 있다.             파란 활 모양   칸딘스키는 1921년에 모스크바에 '예술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예술을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등용된 미술가는 말레비치, 타트린, 페브스너, 가보 등 대부분이 구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메카닉한 예술 이론에 비판적인 칸딘스키는 고립하게 되었으며, 소련 예술은 1920년에 페브스너·가보 형제가 '리얼리즘 선언'을 한 것을 고비로 하여 급속히 정치적 이데올로기 지배로 기울어졌다. 환멸을 느낀 칸딘스키는 21년 12월에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옮겼다. 그러나 페브스너·가보 형제와의 교류는 칸딘스키 예술의 전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하학적인 형태나 구성적인 요소가 칸딘스키 예술의 주요한 과제가 되는 계기를 거기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명쾌한 평면성을 해석하여 간결하고 명확한 형태들이 나타나고 있다.         검은 綱版(강판)   1922년 6월 바우하우스의 창립자 윌터 그로피우스는 칸딘스키를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초빙했다. '모든 예술적 창작의 종합'을 목표로 삼고 그로피우스가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예술가를 교수로 초빙한 것은 유명하지만, 칸딘스키도 '공간과 씨름하는 일, 즉 건축과 협력하는 것은 나의 오랜 꿈이었다. 바우하우스에 부임하였을 때 나는 이 꿈이 꼭 실현되리라 믿었다.' 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수 생활에 큰 기대와 만족을 가지며 가장 결실이 많은 바우하우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23년에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서 개최된 전람회 출품작으로 여러 가지 형상 가운데 명확한 윤곽을 갖는 것이 늘고 사각형의 선이 교차한 그물 같은 것이 강조되어 기하학적인 요소가 서서히 강해지고 있다.           검은 정방형의 안에서   1917년 니나와 재혼한 칸딘스키는 바이마르에 자리를 잡은 후에 그제서야 정신적으로 안정을 얻어 창작 의욕은 고조되었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직선과 원을 기본적인 형태로 하고 조형 단위를 한층 더 승화시키고 공간을 시원스럽게 처리하였다. 직선과 곡선, 예각과 둔각, 원 등 거의 기하학적인 요소만이 밝은 배경 위에 떠돌아 다니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다. '점, 면, 선'의 한 구절에 각(角)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세 가지 각은 저마다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훌륭하게 도면적으로 번역한다. 1. 예각(銳角)-내면의 상면의 날카로움과 극도의 능동성. 2. 직각(直角)-노련한 완성(예술적 구상화) 때의 냉정함과 감정의 억제. 3. 둔각(鈍角)-제작을 완성한 후의 불만 스런 감정과 무력감.'           원 속의 원   원에 의한 구성을 탐구하고 있던 칸딘스키가 여러 가지의 원을 들고 별도의 방법으로 전개시켜 보고 있다. 원 그 자체가 기본적 모티브가 되어 화면 중심에 집중하고 교차, 중단 등으로 '4차원 공간' 즉 칸딘스키가 말하는 '정의하기 어려운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하여 원은 끝내 각양 각색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으로 변해 가며 점과 선과 원의 조합, 크기를 달리하는 원의 병치, 색채를 달리하는 크고 작은 원의 중첩, 이 중 어느 것인가가 원이 아닌 무엇인가를 여기에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포의 세계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곡예사의 공 타기나, 가볍게 떠 있는 애드벌룬이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인공 위성까지도 연상케 하면서 그 빛나고 선명한 화면은 우주 공간을 보는 것과도 같다.           노랑=빨강=파랑   니나 부인이 분류한 원의 시대(1925년-1928년)의 초기 작품이다. 노랑을 주조로 한 바탕 위에 빨강과 파랑이 간결하게 자리잡은 위에 직선, 곡선, 원 등이 여러 가지 형태로서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기하학적인 요소가 강한 왼쪽 부분과 오른쪽의 유기적이고 불규칙한 현장의 연출로 화면은 성격이 다른 형태들로 양분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대립되고 있는 것들과 총체적인 통합으로써의 노력이 강조되고 있다. '대립과 모순-이것이 우리들의 하모니인 것이다. 이러한 하모니에 바탕을 둔 콤포지션이 색채와 데생의 결합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그때 이들 색채와 데생은 각각 독립하면서 게다가 내적 필연성에 따라 꺼내어지며, 그리하여 그곳에 탄생하는 공통의 생명 속에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즉 회화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칸딘스키는 썼다.           단단하고 부드러움   1926년에 '점, 선, 면'을 출판하여 60세를 맞이한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 부교장으로서 그로피우스를 보좌하였다. 이 작품은 마치 우리 나라 민화(民話)를 보는 듯한 도식적 요소를 느낄 수 있다. 한참 의욕적인 제작에 몰입할 때 종이와 수채와 잉크에 의해 이 시기의 특색인 원을 화면에 구성시켜 가면서 곡선적인 형태와 예각적인 직선으로써 대조적인 형태를 공간에 떠 올려 조형적인 음악을 생각케 하는 심리적인 조화의 세계를 생성시키고 있다. 간결하고 정리된 화면은 추상을 초탈하고 생명적 형태만이 그려져 있다. 또한 화면 가득히 운무법(뿌리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방법이나, 이것은 끝없는 조형 언어의 실험적 연구로 받아 들여진다.             앞 끝의 위에   높은 이상을 내세우고 발족한 바우하우스의 혁신적인 운동은 바이마르의 보수적인 기풍과 맞지 않아, 데사우 시의 호의로 바우하우스는 1925년 4월에 데사우로 옮겼다. 칸딘스키 부부는 데사우에서 파울 클레 가족들과 이웃에 살았으며, 좋은 자연 환경 속에서 충실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바우하우스가 기능 주의로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예술 창조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의 비합리적인 요소를 중시한 칸딘스키는 끝까지 그의 예술 주장을 밀고 나갔다. 학생들은 칸딘스키가 벽화, 클레가 스텐인드 글라스를 담당한 이외에 1주일에 한 번씩 연 자유화 학급에 참가하였다. 이 작품은 무중력 상태에 떠 있는 애드벌룬을 지상에 강한 선으로 매고 있는 듯한 중력과 구조에 대한 해석으로 풀이된다.           여러 개의 원   칸딘스키는 '그 많은 기하학적 형태 중에서도 유독 원을 선택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원은 첫째, 가장 겸양하는 형태이면서 어디까지나 자기 주장도 하고 둘째, 간결한 반면 무한히 변화하며 셋째, 안정되어 있음과 동시에 불안정하기도 하고 넷째, 무수한 긴장을 갖고 있는 하나의 긴장이기 때문이다. 원은 최대한으로 대립하는 것의 종합이며, 이는 구심성과 원심성을 하나의 형태로, 더욱이 균형을 유지하며, 통일되고 있습니다. 세 가지의 기본적인 형태(삼각형, 정방형, 원) 중에서 원은 4차원에의 가장 명료한 지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원에 대한 조형 연구의 연속으로서 큰 원 안에 다수의 대(大)·소(小)원을 그리는 시도이다. 원이 우주적 요소를 띠고 마치 위성처럼 무한 공간을 떠오르고 있다.           다리   두 건물을 연결하는 것 같은 다리와 그 위의 삼각형도 인체인 것처럼 연상케 하고 있으나, 연상 작용을 유발 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칸딘스키는 일체를 조형적 해석으로서 나타내고 있다. 그는 '추상 예술은 이미 자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당신도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아닙니다. 추상 회화는 자연의 껍데기는 버리지만 그 법칙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술은 우주적 법칙과 결부하고 또 그것을 따르고 있을 경우에만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외면적으로는 자연에 가까운 경우에 말입니다-자연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체험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대상을 사용하는 일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답니다. 절대로 관계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연속   칸딘스키의 음악을 회화에 이입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는데 '음의 강약은 선이 가지는 날카로움의 증감 내 지는 농담으로 표현할 수 있다. 활(弓)에 가해지는 손의 가감은 연필에 가해지는 손 힘의 경우와 완전히 일치한다. 오늘날 널리 행해지고 있는 음악의 도형적 표현-기보법(記譜法)-이 점, 선을 사용하는 여러 가지 조합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특히 흥미 있는 일이며, 또한 특기할 일이다.' 이 작품은 마치 오선지 위의 음표를 보는 듯하다. 형태 와 색이 만들어내는 도형적인 형상이 수평선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울려 퍼져 자유롭고 명확한 윤 곽으로 그려져 있어 자유 분방하고 태평스러우며, 생생한 생명감을 느끼게 하는 한편, 전체는 어떤 질서 속에 멋지게 통일되어 있다.         伴奏가 딸린 중심   노란색을 주조로 하여 바탕에 칠한 다음 복잡한 형태들이 자유롭게 자리잡고 있으나, 매우 정리되고 단순하게 요약되어 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엄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칸딘스키의 회화의 구도가 평면성의 강조를 기본으로 하고, 형태의 도상학적(圖像學的)인 배치를 목표로 삼고 있는데 대해서는 러시아의 이콘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사실 칸딘스키는 '나의 예술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원천, 그것은 오직 러시아의 이콘이다.' 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또한 이 해에는 나치스 정부는 칸딘스키 작품 57점을 '퇴폐 예술'이라고 압수했다. 칸딘스키만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 뭉크도 같은 일을 겪었는데, 만년에 접어든 예술가에게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주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둘 사이   1932년에 데사우에서 베를린으로 부득이 옮긴 바우하우스는 더 한층 심해진 나치스 정권의 억압 때문에 33년 3월에 마침내 폐쇄당하고 말았다. 이 때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의 최후를 끝까지 본 후 파리 근교인 누이이 쉬르 센에 영주하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67세나 되었다. 칸딘스키가 오랫동안 고대했던 해외 여행의 실현으로 고대 동양 세계로부터 그리스, 로마, 그리고 근대 회화의 발상지 파리에 안착하기까지 이 귀중한 체험과 여러 가지 시도, 실험 등이 파리 시대로 옮김과 동시에 그의 예술은 '대종합 시대'를 맞고 현란하게 비치는 커다란 한 송이의 꽃을 차례로 피우게 되는 것이다. 불규칙적인 두 개의 형태를 대립적으로 대치시켜 긴장과 역학적 구조로 이끌면서 개개의 형태가 자립하여 제각기의 위치에서 응결하고 있다.           섬세한 고정   '예술가는 인생의 행운아가 아니다. 즉 그에겐 책무(責務)를 면하고 살 권리가 없다. 그는 종종 그 자신의 십자가가 되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일을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의 행위와 감정과 사상, 이들 모두가 섬세하여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확고한 소재를 형성하고, 거기서부터 자기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을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자유로운 것은 인생에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예술에 있어서라는 것을 그는 알아야 한다.' 라고 자각한 그대로 칸딘스키는 실천에 옮겼다. 수직과 수평으로 평행해서 달리는 직선의 교차와 간단한 형상들을 되풀 이해서 그려 놓은 이 작품은 어딘가 건축 장식의 에스키스를 연상케 하나, 각각의 다른 음색이 서로 겹쳐지면서 몇 가지 모티브를 만들어 내는 오케스트라의 악곡을 스케치한 것처럼 보인다.           빨간 형태   '내가 자연을 지나치게 과장한다. 그래서 내 그림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니까 나를 구하는 길은 '색을 파괴하는 일인 것이다' 라는 비평을 듣고 얼마나 이상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뮌헨의 비평(부분적이 긴 하지만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다)은 나의 색채의 화려함을 내가 비잔틴 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려고 했다. 러시아 비평가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난폭한 표현으로 비방을 했다. 내가 뮌헨 미술의 영향으로 타락했다고 비난했다. 대부분의 비평가는 아주 뻔뻔스럽고, 심술궂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알았다. 이 사실은 반대로 말하면 영리한 예술가는 악의가 있는 비평에 견디어 낼 만큼의 냉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칸딘스키가 걸은 길은 시대와 역사를 앞선 외로운 개척의 길이었다.           검은 원 속에             결합   1928년에 그로피우스가 사직하고 마이어가 교장이 되는 한편, 기능주의로 방향을 바꾼 바우하우스는 30년에 마이어로부터 미이스 판 델 로에로 다시 교장이 바뀌어 처음의 이념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시렌머, 클레 등 주요 스텝이 잇달아 떠나고, 강대해진 나치스의 압박도 심해져서 고난의 길을 더듬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곤란한 가운데서도 칸딘스키의 화풍은 무르익어 갔다. 이 작품은 직선을 주로 사용하여 힘차고 간결한 구성적인 표현을 보이고 있다. 구성은 잘 계산되어져 훌륭히 짜여져 있지만, 칸딘스키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시원한 공간이 설정되지 않아 다소 답답한 느낌을 준다. 큼직한 기하학적 형태들이 유기적으로 교착하여 하나의 구조를 얻고 있는 색다른 부류의 작품이다.           하늘 색   매우 투명한 그림이다. 푸른색의 공간에 여러 가지 유기적인 형태가 난무하고 있다. 첫눈에 민족적인 요소가 대단히 진한 형태이며, 추상을 벗어나 생명의 원초적 형태 같은 것에 가까워지고 있다. 젊은 시절에 민족학 조사단에 참가하여 북쪽 지방을 여행하였을 때 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흥미를 가진 민예품이나 이콘, 장식무늬, 공예품에서 영향을 받아, 오랜 시간 형태 연구를 통하여 칸딘스키의 내부에서 자라난 형태일 것이다. 그것을 상징적인 기호로써 배열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칸딘스키는 하나의 코스모폴리탄 이었지만 이국에서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독한 노년을 보내며,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러한 동화적 세계에 탐닉되었을 것이다.           상호의 화음         정확한 대비   지나치게 정선되어 단조로움마저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복잡한 형태가 매우 간결하게 요약되어 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엄밀하게 놓여져 있다. 중앙에 강조된 율동적인 커다란 형태의 내부에 즉흥적으로 보이는 묘선과 아무 생각없이 배치되어 있는 것 같은 기호적인 형태에 대해서도 그 자신을 철저히 검토하고 논리 적으로 검증하려고 하였던 것은 '점, 선, 면' 등의 저작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칸딘스키가 즉흥적으로 그린 것 같지만 그의 조형 언어를 확인하고 검증해 보이고 있다. 초기의 사실주의로부터 표현주의, 비구상 표현에서부터 기하학적 추상으로 표현형식을 변화시킨 칸딘스키가 만년에 기호적 배열까지 나타낸 화풍은 고향에서의 체험으로 회귀해 갔다고 하겠다.      
1    전생애에 오직 4점의 풍경화만 그린 "인물화가" 댓글:  조회:1925  추천:0  2017-10-19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0) : 모딜리아니 Amedo Modigliani (1884~1920)   고독한 혼의 소리와 관능미(官能美)         자화상   다른 화가들의 관례와는 달리 모딜리아니는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나는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을 봐야만 일을 할 수 있다.'던 이른바 '만남의 화가'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가 이 작품처럼 매우 조심스러운 붓놀림으로 자화상을 그렸다는 건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이것이 유일한 그의 자화상이며, 1919년 작이다. 화가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모델의 인상으로 보아 1920년 1월 24일(그가 죽은 날)은 멀지 않은 것 같다. '카라 이탈리아 (그리운 이태리)'를 남기고 보잘 것 없는 자선 병원의 침대 위에서 한 많은 이승을 등진다.         유태인 여자   과 함께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작품이지만, 전자와는 현저한 표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지기 어렵다. 이것은 모딜리아니의 과도기를 말해 준다 하겠다. 처음 파리로 왔을 때 그는 조각가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단테와 니체, 그리고 다눈치오를 암송하고 15세기(콰트로첸토) 르테상스의 고전을 규범으로 했던 교양인이기도 했다. 여기서의 교양 즉 그의 문학성은, 조각과 회화 사이인 입체와 평면 사이의 미련(未練)의 가교 같은 구실을 한다. 이 작품이 풍겨 주는 표현주의적인 어두운 분위기는 이러한 그의 미련을 바로 반영해 주고 있다. 세기말 의식인 고뇌의 그림자가 역력하다. 고뇌는 젊은 예술가의 특권이었으며, 그 궁극에 멜랑콜리의 존중이 움트고 있다.       젊은 여인의 얼굴   1906년 21세 때 파리로 진출한 모딜리니아가 23세 때 그린 작품이며, 그로서는 파리 정착 이후 첫 번째의 공식 작품이 되는 셈이다.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굶주리고 외로운 유랑기를 2년 동안 보내면서 그는 자신 속에 잠재하는 영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피카소의 변모를 싫어했고 미래파의 권유를 뿌리치면서 그는 자신의 독자성만을 모색하고 있었다. 1907년 살롱 도똔느에서 개최된 세잔의 대회고전은 그에게 큰 감명을 준다. 이 첫 번째 공식 작품은 그 다음해인 1908년에 앙데팡당전에 출품하게 된다. 아직 모딜리니아의 유연한 데포르마숑인 생(生)의 곡선(曲線)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경직된 지적(知的)인 성찰(省察)로서의 주제 파악이 역력하다. 세잔과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頭像   의 에스키스와 함께 이 조각 작품은 1912~14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당시 모딜리아니는 조각가가 되는게 꿈이었고, 오른쪽의 두상은 1912년 살롱 도똔느에 출품했던 일곱 점의 석상 가운데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그는 브랑쿠지와 립시즈로부터 조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인 긴장은 극에 달했었다고 한다. 폐가 나쁜 그는 조각에 대한 열의를 저버리지 못했으며, 죽는 날까지 언제인가는 유명한 조각가가 되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며, 수직으로 길쭉한 코의 선맥과 원통형의 목줄기가 신선한 조형미를 유발시켜 주고 있다. 어딘지 먼 시대로의 환상이 맥박처럼 들려오는 이 두상은, 당시의 파리 미술가들이 심취하기 시작했던 아프리카의 원생 미술인 그 충실감과 데포르마숑을 연상시킨다.         젊은 하녀   파리라는 도회지로 나온 시골 처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녀라는 직업이며, 이런한 유형은 동. 서가 같다. 하루 종일 허름한 옷차림으로 근면하게 일 해야만 되는게 이들의 인생이었다. 특히 유럽인들의 사람 씀씀이는 고약할 정도로 가차 없고 지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일들, 어린애를 돌보고 주부의 잔심부름을 도맡고 하는 것을 묵묵히 감당해 낸다. 이들을 프랑스 말로 본느라고 부른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살고있는 애환의 표정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이웃을 사랑했고 그가 즐겨 그린 서민의 한 표정을 그녀는 대표하고 있다. 이 모델은 카뉴슐멜 출신이며, 마리훼레라는 이름의 처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이 젊은 처녀의 삶을 모딜리아니는 공감했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첼리스트   한눈에 보아서 세잔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세잔의 의 왼쪽 인물을 그대로 모사한 듯한 착각마저 일게한다. 다만 그려진 첼로가 화면의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것을 연주하는 인물의 내면의 깊이를 암유하는 듯도 싶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음조를 듣는다는 것인가. 역시 전기한 멜랑콜리의 읊음이며, 짙은 인간애의 색조라고 해야겠다. 이 작품의 뒷면엔 브랑쿠지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브랑쿠지로부터 조각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일깨웠으며,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첼리스트의 면모가 뒷면에 그린 브랑쿠지(정면으로 된 크로키)의 옆 모습과 불가사의하게도 일치하고 있다. 미술은 문화적 유산이며, 세잔의 유산을 모딜리아니가 상속한다는 역사를 이 작품은 증명해 주고 있다.         카리아티드   그리스의 건축 용어로 여상(女像)으로 된 석주를 뜻한다. 그리스어로는 '카리아티데스'라고도 한다. 에렉티 옹의 여상주가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데 통상적으로 착의의 여상으로 되어 있으나, 모딜리아니는 나상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캔버스 위에 유채로 된 에스키스를 보여 주고 있지만 석회암으로 된 조각품도 따로 있다. 카리아티데스는 '아틀란티데스(남상주,男像柱)'의 대응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여상석주는 전설적인 유래가 있다. '카류아이'라는 그리스 마을이 페르샤와 전쟁했을 때 이적 행위를 범했다고 해서 그 마을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어 이처럼 공공 건물의 엔태블러처를 떠받치는 중벌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여체상을 각 분절의 특성을 살려서 이처럼 조형적으로 재구성해 보이고 있다.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   현재 상파울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본격적인 유화는 아니며 두꺼운 종이 위에 그려진 초벌 그림 형식의 작품이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작품이지만 리베라의 인물이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누르퉁퉁한 살갗과 몽유병 환자인 리베라는 어렸을 때 멕시코의 열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사회의 도그머를 극도로 혐오했던 맥시코의 화가였다. 그는 '파리의 예술도 빈사 상태에 있다. 자바타의 농민(멕시코의 혁명조)들은 기계를 본 적이 없지만 포앙카레(당시 프랑스 수상)보다 백배로 현대적이다. 나는 믿고 있지만 우리들의 그림을 보여 주면 멕시코의 농민들은 반드시 이해해 줄 것이다. 고딕 교회나 아즈테카 신전은 누가 건설했는가. 만인이다. 백성들이다. 농민들이 건설한 거지 뭔가.'         파블로 피카소의 초상   이 작품도 리베라의 초상처럼 두꺼운 종이 위에 그려진 습작풍의 작품이다. 이것은 리베라를 그린 다음해의 작품이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양식이 극도로 제약된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우수에 찬 조용한 서민들의 표정과는 달리 피카소의 눈은 짙은 눈동자가 끼워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앙드레 살몽과 피카소를 도움의 카페에서 자주 만났으며, '피카소는 우리들보다 언제나 2년을 앞서 있었다.'고 그 재기를 찬양하기도 했다. 모딜리아니의 피카소는 여기서처럼 그시스 신화의 목신처럼 그려져있으며, 그처럼 급진적인 변모를 싫어했던 그의 중용적이고 고전적인 입장이 이처럼 피카소를 어떤 어두운 환영처럼 느끼게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이 퐁파두르 부인은 본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게 아니라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 (1914~16) 비아트리스를 대용해서 그린 것이다. 영국 여성인 비아트리스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였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 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자이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사기를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가 광분하면 '모딜리아니, 명심해요, 당신은 신사라는 걸. 당신의 어머니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것을 .'하며 타일렀다는 것이며, 이 말은 주문처럼 모딜리아니의 광기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럴 듯하게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처럼 차린 이 그림을 퐁파두르 부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의 정경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부부   모딜리아니의 전(全)작품은 언제나 한 인물의 초상화이고 한 화면에 두 인물이 등장하는 건 의 작품말고는 이것이 나머지 예이다. 또한 그의 모티브는 항상 서민적인 애환이 조용하게 표정짓는 삶의 모습들인데, 여기서처럼 정장한 한 쌍의 부르조아가 등장하는 경우도 이것이 마지막 예이다. 앞에 적은 조각상인 길쭉한 수직선과 견주어 보면 매우 흥미롭다. 당시의 그는 조각을 위한 에스키스를 무수히 제작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두드러지던 징후는 입체파적인 조형 감각이었다. 화면을 좌우 대칭으로 구성한 다음 각기의 인물의 중앙선을 관통한 선상에서, 가령 남자의 오른쪽 뺨 위의 원형의 선과 여자의 그것이 대응한다는 게 여기서의 예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묘는 불필요한 색채의 텐션(tension)을 효과적으로 제약하고 있으며, 동시에 선맥의 제어를 자율적으로 살리고 있다.         모이스 키슬링의 肖像   1910년대의 파리는 '에콜 드 파리'의 전성기였다. 에콜 드 파리는 프랑스인이 아닌 미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어서 각자의 자율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화가들의 모임을 이름한다. 고향을 떠나 온 미술가들이 객지인 파리에서 오직 자신들의 예술적 잠재만을 밑천삼아 그 내용을 신장하던 그룹을 뜻한다. 따라서 에콜 드 파리는 하나의 유파로서의 미술 표지를 가르키는 것은 아니다. 서로 미술에 대한 견해라든가 주장은 다른 것이었지만 고향을 등졌다는 이방인이라는 데서 이들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노스텔지어의 이들은 숙명으로 했었다는 이야기이다. 키슬링은 폴란드에서 온 유태인이며,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온 유태인이었다. 이들은 그래서 모태의 혈연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막스 쟈콥의 초상   막스 쟈콥은 브르타뉴 출신의 시인이자 미술 비평가로 당시의 파리 화단을 형성했던 주요 인물의 하나이다. 그도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사랑했으며 폴 기욤이라는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즈보르스키처럼 관대한 이해자는 아니었으며, 얼마간 이재(理財)에 바른 시인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비아트리스와 동거하고 있을 때 자주 찾아 왔던 쟈콥은 모딜리아니의 무절제한 생활을 염려했고 그래서 제법한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여 건실한 작가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고한 것도 쟈콥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럴 때마다, '농담 말게' 하면서 이 연상의 이해자를 어렵게 만드는 게 예사였다고 한다. 쟈콥은 비아트리스를 모딜리아니로부터 떼어 놓으려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쟈콥은 40이 넘은 대머리지만 모델의 지성과 감수성이 부드러운 표현으로 묘사되어 있다.           빌호르스키의 초상   이 작품의 모델이 취하고 있는 포즈는 사람이 마음을 가다듬고 앉을 때 보이는 그러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세를 회화로 표현할 때 자칫 굳어진 포즈로 재현될 우려가 있다. 가령 표현되지 않는 리얼리티는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상은 그 자체로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은 회화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미술은 그것을 창조하는 미술가의 마음의 굴절을 통해서 나타나며 그래서 성격적인 것이 된다. 미술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사람이 그것을 본뜨는 게 아니라 사람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미술이 그 사람을 본뜬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퍼스낼리티로서의 모딜리아니의 표지가 빌호르스키에 의해서 여과된 변형이라고 해야겠다.       모자를 쓴 여자   미남자였던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의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 이게 했었다는 것은 그의 전기의 어디서나 발견된다. 몽마르트르의 라팽 아질의 카페에서 그리고 망파르나스의 로톤드나 도움의 카페 같은 데 앉아 있는 모딜리아니의 모습을 처녀들은 빠져들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다. 이 작품의 모델인 로롯트라고 불렸던 파리잔느는 얼마간 바람기들은 용모를 띠고 있으며, 양가집의 처녀 같지는 않다. 필경 술집 같은 데서 활달하지만 내던지듯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여성상인 깊고 우수에 찬 여느 침정으로서의 표정은 이 모델의 경우 어디에도 없다. 다만 로롯트의 왼쪽에 그려진 꽃은 모딜리아니가 마음먹고 정물화를 그렸다면 훌륭한 작품을 그렸으리라는 아쉬움을 남겨 주게 한다.         블론드의 여자(르네)   르네라는 이름은 한국의 옥순이처럼 프랑스 여성의 이름이며, 파리의 여기저기에 르네가 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러한 한 프랑스 여성의 초상화이면서 모든 르네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점차로 무르익어 가는 모딜리아니의 원숙한 기량을 나타내고 있으며 모델을 포근하게 포용하는 표현력이 넘쳐 흐르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의 모델인 르네는 키슬링의 처이며 모딜리아니의 미술을 순심으로 이해했던 모델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다. 키슬링은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 화가였으며 나중에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되지만 모딜리아니는 이 무렵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자주 제작했었다. 필경 이 작품도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제작된 게 아닌지...         쟈크 립시즈 부처의 초상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파리에 정착한지 꼭 십년이 되는 해에 제작한 것이다. 그의 본령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무렵의 일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이들 립시즈 부처가 자신들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10프랑을 요구했다고 한다. 다음날 모딜리아니가 찾아와서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도로 이들 부처의 데생을 여러 장 그렸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과 같은 구도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들의 결혼 사진을 본 떠서 이러한 구성으로 작품을 완성했는데, 붓을 놀리던 손이 자주 술병 있는 곳을 더듬더라고 한다.         한카 즈보로스카의 초상   폴란드의 옛 귀족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즈보로스카는 1914년 유럽 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파리로 피신했으며, 그후 파리장들은 그녀를 프랑스 식으로 안나라고 불렀다. 모딜리아니의 최상의 이해자였던 레오폴드 즈보로스키를 알게 된 그녀는 이 동포에게 시집 가게 되며 앞으로 모딜리아니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부가 된다. 이 작품은 이들 부부가 모딜리아니를 알게 된 일년 후에 그려진 것으로 병약한 몸매의 즈보로스카였지만 그녀의 마음씨 고운 자태가 모딜리아니의 심상을 통해 불가사의할 정도로 우아하게 표현되어 있다. 기품 있게 흐르는 목의 사선과 맑게 가라앉은 얼굴 표정이 검은 의상과 검은 머리의 대비를 통해 긴장된 구도로써 표현되어 있다.         샤임 스틴의 초상   러시아의 리토아니아 출신은 스틴도 역시 유태인 미술가였으며, 1911년 파리로 나와 동국인이자 유태인인 샤갈과 모딜리아니와 친교를 맺는다. 남 프랑스의 세레라는 지방에 일시 정착하여 강렬한 원색만으로 뭉개듯 그리는 그의 광열적인 감정의 독자적인 작풍은 당시의 파리의 화단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그의 화면과는 정반대로 그는 투박하리만큼 순정의 사람이었다고 하며,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그의 순심에 깊은 애정과 우정을 느꼈다고 한다. 쟌느 모딜리아니는 아버지의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포즈는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으며, 높은 코와 두터운 입술은 두드러지지만, 고뇌로 차 있는 눈길이 모델을 비극적일 만큼 고독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         큰 모자를 쓴 쟌느 에퓨테른느   여학생처럼 청순한 처녀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았던 이 처녀는 모딜리아니 등의 예술가들이 모여 앉아 떠들고 있는 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들리는 말로는 그림 공부를 해보려고 몽파르나스에 온 것이라고 들 했다. 얼마 후 이 청순한 처녀인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와 서로 팔짱을 끼고 몽파르나스 거리를 지나가는 정경을 사람들은 목격하게 된다. 드디어 모딜리아니도 행복을 잡았구나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라 . 비 . 에 . 벨...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생의 반려가 되며 앞으로 삼 년간 로톤드의 맞은 편 그랑 쇼미엘거리에 셋방을 얻어 같이 살게 된다. 한때나마 안정된 시기가 찾아오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표현 양식은 급속도로 만개하게 된다.           반 뮈덴 부인의 초상   이 작품의 구도는 회화의 자율적인 운영만으로 잡혀진 것이라기보다 모델인 대상의 인간과의 교류를 통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는 화면이다. 가령 크로드 로와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모델은 흔히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긴장을 푼 상태의 가을 날씨처럼 가라앉은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여기서 100퍼센트의 이탈리아 적인 유화한 풍취를 찾아볼 수도 있겠고 또는 100퍼센트의 현세적이고 식물적인 무관심을 찾아볼 수도 있겠으며, 혹은 온화한 몽상적인 육감을 맛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모딜리아니의 모델들이 모두 틀에 박힌 듯한 하나의 유형으로 그려졌다는 이른바 매너리즘으로만 간주될 때 야기되며, 미술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태도 여하로 결정된다는 관념론자의 경우를 대표한다 하겠다.         앉아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가 나부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16년경부터이며, 그가 죽기 전의 1919년 경까지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겨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모델이 된 나부들은 앞에 소개한 안나 즈보로스카, 비아트리스, 쟌느 에퓨테른느 등이었다고 한다. 1917년 말인 12월 3일부터 30일까지 모딜리아니로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벨트 에일 화랑에서 열게 된다. 그런데 초대날 그의 나부상들이 너무 관능적이어서 풍기 문란이란 죄목으로 경찰의 신세를 지게 되며 결국 다섯 점의 나부가 철거되는 스캔들이 일어난다. (모딜리아니와 화랑의 여주인은 일시 체포된다.) 검은 배경 에 모델의 곡선은 무겁게 흐르고 있으며, 다른 나부들과는 달리 삶의 애환을 짙게 풍겨 주고 있다.       젊은 농부의 초상   모딜리아니의 나부상은 대략 35점 가량 그려진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특히 1917년에 그 대부분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상상해 보건대, 14살이나 손아래인 쟌느 에퓨테른느와의 사랑이 그를 생명감 넘치는 화가로 다시 재생시켰고 이러한 활기가 그로 하여금 정력적으로 많은 나부들을 그리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점차 그의 관심은 온건한 모델에 대한 조용한 애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용한 애정의 대상이 되는 모델들은 여기서의 작품처럼 일상적으로 대하는 생활 주변의 표정들이다. 비록 그들의 인생은 행복한 게 아닐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나 선량함의 강력한 증인들이라고 모딜리아니는 믿었던 모양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모딜리아니의 마음씨를 나타내고 있으며, 선량함을 표지한다 하겠다.           서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의 다른 나부와는 달리 이 서있는 알몸의 여성은 잔잔한 정감이 마치 여울물의 흐름같은 파문의 무늬로 숨쉬는 것만 같다. 그것은 여체가 갖는 생명의 비의를 들려 주는 짧고 낮은 소토보체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오히려 예술의 신비라고 해야겠다. 금새 없어질 것만 같은 아쉬움의 청순함 이라고나 할까.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여자의 나체란 단도 직입적인 관능의 외모도 아니며 여러 가지 기복으로 무겁게 덩어리짔는 복잡한 조형도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생의 풍요 혹은 그 찬미였는지도 모른다.       어린애를 안고 있는 여자   섬세한 선묘와 얼마간 즉흥적인 터치의 관례적인 화면과는 달리 이 작품은 비교적 두꺼운 마티에르를 가지고 있다. 흰 바탕의 수병복의 자주색 칼라가 화면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 모델의 주인공은 집시이고 마약 중독으로 집을 뛰쳐나온 여자였다는 풍문도 있다. 모딜리아니는 때로 자신의 선묘 때문에 화면이 그 표면성에서 튕기듯 가벼워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그의 일회성(一回性)으로서의 섬세한 선조(線條)가 마음처럼 되어 주지 못했던 것 같으며, 그 결과로 두꺼운 겹칠이 불가피했었는지도 모른다. 어린애를 안고 애처로울 정도로 고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여자가, 전기한 풍문처럼 집시였다면, 고향은 있지만 나라가 없는 세파르당의 후예로서 자신의 처지를 그녀의 모습에서 모딜리아니는 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裸婦   이 작품의 원명은 로 불려지고 있다. 이 작품에선 다른 나부의 경우와는 달리 그렇게 자율적 구성으로서의 회화를 강하게 느낄 수 없다. 말하자면 현실의 벌거숭이 여인에 가까운 숨결을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화가로서의 모딜리아니가 그린 작품이라기보다 젊은 남자로서의 모딜리아니가 그렸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의 독자적이고 유니크한 선맥의 흐름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으며 대신 나부의 얼굴 표정으로 구성이 집중된다. 여체의 아래 부분을 손으로 가리고 얼굴의 표정만 보아도 이 여성은 알몸이라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숨결인 관능의 뜨거움이 와 닿는 듯 싶으며 서로 다른 구형(球形)의 모임으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노랑 스웨터의 쟌느   1918년은 쟌느가 임신한 해이다. 1918년 작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따라서 모델이 임신 중임을 암시한다. S자 형의 구도는 조형상의 유연성을 겨냥한 것일 테지만 앞으로 닥쳐올 어떤 불행을 풍겨 주는 듯만 싶다. 엄격한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태인인 모딜리아니에게 시집 간 그녀는 붉은 기미의 밤색 머리와 대조적으로 흰 얼굴 빛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야자 열매'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조용한 성격의 여성이었다고도 전한다. 이해 11월말 니이스의 병원에서 쟌느는 딸을 출산하며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준다. 충실한 반려자였던 그녀는 앞으로 만 일년 2개월 후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자 6층 창밖으로 임신한 몸을 던져 사랑하는 이의 뒤를 쫓는다. '천국에서도 모델이 되어 달라' 던 남편의 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파이프를 가진 니이스의 노인   이 작품 역시 니이스 체재 중에 그린 것이며 매우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파리의 즈보로우스키에게 보낸 이 무렵의 모딜리아니의 편지를 보면 당시의 그는 흑인처럼 제작에만 열중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만년의 그의 주옥 같은 걸작들이 제작된 것은 그의 말처럼 여기서의 일이며, 다음 면의 의 경우처럼 그는 남프랑스인들의 소박한 모습들을 즐겨 그렸다. 이 작품의 화면의 구성은 마치 용암처럼 불쑥 솟아오른 듯한 붕기가 엷은 오렌지색을 배경으로 간결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처리되어 있다. 살짝 얹어 놓은 듯한 뱃사람 모자로 미루어 보아 이 노인은 니이스의 바닷 사람인 것 같으며, 길쭉한 담뱃대가 얼마간 과장된 손의 구도를 조절해주고 있다. 선량하고 소박한 인물이 무언가 이야기해 올 것만 같다.         앉은 나부 NU ACCROUPI 1916년 캔버스 유채 92X60Cm 런던 대학 부속 미술연구소 소장         푸른 옷의 소녀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와 쟌느 사이에 여자 아이가 생기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이다. 웨르나의 해석에 의하면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의 그의 이웃에 살고 있는 하층 계급의 어린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많이 그렸으며 이것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 소녀의 푸른 옷은 필경 그녀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때때옷인지도 모른다. 소녀의 얼굴은 밝지도 쾌활하지도 않다. 그녀의 표정은 훨씬 연상의 다른 모델들의 경우처럼 조용하게 가라앉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은 참다운 자애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이 소녀는 천진 무구하지만 애처로움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화면을 통해 우리는 모딜리아니의 진심을 엿볼 수 있으며, 깊은 애정을 함께 느낀다.         작은 농부   모딜리아니의 결핵이 악화되자 즈보로우스키 부처는 무리를 해서 그를 남 프랑스의 니이스로 보낸다. 1918년의 일이었다. 지중해의 해맑은 요양지에서 오래만에 안정을 얻은 모딜리아니는 제작에만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시골의 농부와 소년 소녀들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모딜리아니는 그려 나간다. 이 작품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며, 소박하고 건강하며 사랑스러운 농부 아들의 모습이 밝게 그려져 있다. 이 밝음새는 당시의 모딜리아니의 삶의 건강성을 바로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겠다. 한편 이 화면에서 우리들은 세잔의 기법과 매우 유사한 터치를 발견하게 된다. 세잔을 존경했던 그는 남 프랑스의 적막한 전원 속에서 문득 엑상, 프로방스에서의 세잔의 농부의 그림을 회상했는지도 모른다.         에브테르느 부인의 초상 PORTRAIT DE MADAME HEBUTERNE 1919년 캔버스 유채 92X73Cm 뉴욕 개인 소장       레오폴드 즈보로우스키의 초상   즈보로우스키는 폴란드 귀족의 후예이며 문학 공부를 위해 파리의 솔본느 대학으로 온 시인이었다. 최종적으론 화상이 되지만 당시 화가들을 등쳐 먹는 화상들이 우글거리던 몽파르나스에서 즈보로우스키 부처만은 진실로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이해했고 그의 예술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생애를 걸다시피한 갸륵한 인품이었다. 1916년에서 1919년까지의 모딜리아니의 작품의 거의는 즈보로우스키의 원조 밑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이 초상화에 대해 웨르나의 매우 적절한 해설을 인용해 보자. '이것은 모딜리아니의 가장 성공한 작품의 하나이다. 즈보로우스키가 실제로 가지고 있었던 정신과 영혼의 고귀함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이야말로 진실된 우정의 표시이다. 늘어진 콧수염이며 정돈된 턱수염 그리고 유연하게 기운 어깨의 키 큰 우아한 사람...'         남 프랑스의 풍경   인간만을 그려왔던 모딜리아니의 작품 중 이것은 매우 희귀한 예이다. 그는 풍경화를 미술의 장르가 아니라고까지 경원했으며, 자연은 미술가가 참여하는 곳이 못 된다고까지 극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결핵을 치유해 주는 요양지인 남 프랑스의 해맑은 대기는 얼마간 오만했던 그의 인간본위를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전생애를 통해 오직 4점의 풍경화만 그렸다.) 한눈에 세잔의 기법을 연상시켜 주는 이 작품은 이를 데 없이 간소한 풍경화이다. 해안으로 통하는 오솔길과 한 채의 집과 한 그루의 나무가 모두이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이 여느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임은 그의 인물처럼 그의 마음이 거기에 투영되었기에 그럴 것이다.         부채를 가진 루니아 체호우스카   모델은 즈보로우스키 부처의 친구이며, 기품있는 몸매의 여인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 여인을 삼십 회 가량 그렸고 이 작품 외에 비교적 모델의 외형을 충실하게 뒤쫓은 초상이 또 있다. 그녀의 부친은 폴란드인 이었으며 혁명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남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러한 인과가 그녀를 사려 깊고 조용한 신비의 여인으로 성장시켰다고도 전한다. 그녀는 모딜리아니 이상으로 그를 사모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고 그것은 신성한 일이었다.]고 자신의 애정을 돌려서 고백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최만 년의 걸작을 대표하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데포르마숑은 거의 완벽한 경지까지 도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겠다. 모딜리아니의 신변에 있던 증인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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