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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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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것이 알고싶다] - 노벨상 이모저모... 댓글:  조회:4129  추천:0  2017-10-29
    제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은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터키의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하지만 터키군의 선전으로 연합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 약 20만5000명, 프랑스군 약 4만7000명 등 연합군의 사상자는 무려 25만2000명에 이르렀으며, 터키군 사상자도 25만여 명에 달했다. 그 수많은 사상자 중에는 영국의 젊은 물리학자 헨리 모즐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제자였던 그는 특성X선을 연구해 ‘모즐리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원자구조론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스승인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더 발전시켜, 현대 원소주기율표를 완성하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7세의 나이로 자원 입대해 갈리폴리 전투에서 터키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만약 죽지 않았다면 그는 다음해인 1916년 노벨 물리학상의 유력한 수상자였다. 실제로 모즐리의 연구를 바탕으로 주기율표를 최종 완성한 스웨덴의 물리학자 칼 시그반은 192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사망 3일 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결정돼 사후 노벨상을 받은 랠프 스타인먼 교수. ⓒ 연합뉴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무려 다섯 차례나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1948년에는 노벨상 수상이 유력했는데, 후보를 선정하기 불과 이틀 전에 암살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후에도 상을 줘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노벨위원회는 결국 그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죽은 사람을 수상 후보자로 지명하지 않는다는 노벨상의 원칙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다. 스웨덴의 시인 에리크 악셀 칼펠트가 바로 그 주인공. 다라나 지방의 사람과 자연을 시로 그려낸 그는 1918년 사실상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내정됐다. 그런데 수상자가 발표되기도 전에 거부했다. 오랫동안 노벨위원회 위원으로 근무했던 그는 자신의 수상자 선정 사실을 미리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1년 4월 에리크가 사망하자 노벨위원회는 그해 11월 노벨 문학상을 그에게 추서했다. 이는 사후 노벨 수상의 최초 사례였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1961년에는 유엔의 2대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셀드가 사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3년에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한 그는 약소국을 보호하는 노력이 유엔의 임무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유엔의 대의와 원칙을 밀어붙이는 모델을 만든 주인공이다. 1974년부터 생존자만 수상할 수 있게끔 규정 개정 유엔평화유지군 창설을 주도한 그는 특히 냉전체제로 재편되는 격동기에 유엔이 독립된 권위를 갖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해 존경받는 국제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는 1961년 9월 아프리카 콩고의 내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지로 가던 중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 노벨위원회는 그를 그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후 호사가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후에 노벨상을 수상한 단 2명이 모두 노벨상 주최국인 스웨덴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노벨위원회는 1974년부터 생존자만이 수상할 수 있게끔 규정을 바꾸었다. 다만 수상자로 결정되고 나서 2개월 후에 열리는 시상식 사이의 기간에 사망할 경우에는 예외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지난 2011년 아주 묘한 일이 벌어졌다. 노벨위원회는 그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미국 랠프 스타인먼 록펠러대학 교수를 비롯해 브루스 A 보이틀러, 율레스 A 호프만이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수상자 발표 후 록펠러대학 측은 성명을 통해 랠프 스타인먼 교수가 3일 전에 이미 사망했다고 밝힌 것이다. 캐나다의 독일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스타인먼 교수는 1973년 쥐의 비장에서 떼어낸 물질에서 이전의 면역계에서 다루지 않았던 세포를 발견했다. 나뭇가지 모양으로 생겨 ‘수지상세포’라고 명명된 이 물질은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세균 등의 항원을 잡는 파수꾼임이 밝혀졌다. 의학계에서는 수지상세포의 발견으로 면역작용을 규명하게 됨으로써 암과 감염질환, 염증질환의 예방과 치료제 개발에 새장이 열렸다고 평가했다. 이후 수지상세포의 다양한 기능을 이용한 신약들이 개발되었는데, 전립선암 치료제로 사용되는 시푸류셀-T 성분의 약품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신이 개발한 치료법 덕분에 사후 노벨상 수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된 보이틀러와 호프만은 외부에서 침입한 병원체를 인식하는 수용체를 발견하고, 이 수용체에 의해 시작되는 선천성 면역반응을 규명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들이 수상자로 선정됨으로써 면역학 분야는 15년 만에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경사를 맞았다. 그러나 스타인먼 교수가 이미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벨위원회는 긴급위원회를 개최해야 했다. 그의 수상자 자격 유지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스타인먼 교수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이유에 대해 노벨위원회 측은 스타인먼의 사망 사실을 수상자 발표 후에 알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즉, 심사가 끝나고 수상자가 결정된 이후의 사망 사실 인지는 수상자 변동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로써 1974년 규정 개정 이후 유지되어온 노벨상의 사후 수상 금지 원칙이 또 다시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실 스타인먼의 노벨상 수상은 그 자신이 발견한 수지상세포 덕분에 가능했다. 그가 췌장암에 걸린 것은 사망 4년 전이었다. 스타인먼 정도의 진행성 췌장암 환자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은 고작 수개월이다. 그러나 그는 수지상세포 백신을 치료제로 사용해 그보다 훨씬 더 수명을 연장했다. 그에게 시도된 여러 가지 치료법 중 어느 것이 그의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그는 당시 사용되지 않았던 수지상세포 백신과 전통적 화학요법의 병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직접 입증해 보이는 등 사후 노벨상 수상 논란을 잠재우기 충분할 만큼 과학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 노벨상 수상자 발표를 앞둔 1964년 10월. 노벨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에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장폴 사르트르가 노벨상을 수여해도 받지 않겠다며 사전 통보한 것이었다. 하지만 편지를 열어보기도 전에 투표가 진행됐고 사르트르는 결국 그 해의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르트르는 이번에는 수상을 거부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노벨위원회의 평가를 인정할 수 없으며 문학적 우수성을 놓고 등급을 매기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습성”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11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벨상은 수상자 선정과정에서 갖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수상 자체를 거부하거나 시상식에 불참하는가 하면 자격 여부를 놓고 공정성 시비에 휘말린 적도 적지 않았다. 사르트르는 실패했지만 수상을 모면(?)한 사례도 있다. 스웨덴의 에리크 악셀 칼펠트는 심사위원을 설득해 문학상 수여를 사전에 포기하게 만든 유일한 인물이다. 조지 버나드 쇼는 1925년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알프레드 노벨을 악마에 비유하며 한때 수상을 거부하는 소동을 벌였다.  1958년에는 ‘닥터 지바고’로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수상을 거부하고 나서 파장을 빚었다. 그는 ‘신성한 러시아 혁명을 비방했다’며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고 국외 추방 압력에 시달렸다. 조국을 등지지 않겠다며 구명운동까지 벌인 끝에 결국 노벨상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을 끝냈던 레둑토 베트남 전 총리는 “아직 베트남에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1973년 평화상을 마다했던 적도 있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밥 딜런이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어 노벨상을 거부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급기야 스웨덴 한림원도 딜런과의 연락을 포기했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그는 무대에서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광대였어요. 왜 지금 저를 바꾸려고 하나요”라고 노래했다. 노벨상의 파격이 또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된 셈이다. /정상범 논설위원   ===================== 유엔이 54년 만에 순직 경위를 재조사하기로 한 고(故)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사후(死後)에 노벨상을 받은 경우다. 노벨상은 1901년부터 수상자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한정했다. 그러나 함마르셸드처럼 매우 이례적으로 세상을 뜬 뒤에 상을 받은 사람이 두 명 더 있다. 최초 사후 수상자는 스웨덴의 시인 에리크 악셀 칼펠트였다. 1907년부터 노벨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던 칼펠트는 1919년 노벨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르자 "위원이 어떻게 상을 받느냐"며 사양했다. 노벨위원회는 그가 사망한 해인 1931년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칼펠트에 이어 함마르셸드까지 사후 수상하자 일각에서는 '노벨의 고국 스웨덴 출신이라 특혜를 준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이에 따라 1974년 노벨위원회는 생존 인물만 수상자로 정하겠다는 기존 방침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한 번 더 예외가 발생한다. 2011년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 3명을 발표한 뒤에야 수상자 중 한 명이 사흘 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면역 체계 활성화에 연구 업적을 낸 공로로 브루스 보이틀러(미국), 율레스 호프만(프랑스)과 함께 수상자로 선정된 캐나다의 랠프 스타인먼(사망 당시 68세)이었다. 논란이 일자 노벨위원회는 긴급회의를 열고서 "그가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애석할 뿐, 우리의 선택은 바꾸지 않겠다"며 예정대로 노벨상을 수여했다. 이 세 명을 제외하고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더라도 죽은 사람에게는 노벨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비폭력 독립운동으로 세계를 감동시켜 노벨 평화상 수상이 유력했지만 1948년 암살돼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대표적이다. =========================== 노벨委 “몰랐다”… 취소 고민보이틀러-호프만 공동수상 올해(2011년)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가 발표됐다. 하지만 수상자 1명은 이미 수상 발표 사흘 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사람에겐 상을 주지 않는 게 노벨상의 규정이다. 수상자가 이미 숨진 걸 모른 채 발표한 노벨상 위원회는 안타까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캐나다 출신의 저명한 면역학자인 뉴욕 록펠러대의 랠프 스타인먼 교수(68)는 4년 전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평생을 감염과 암, 염증에 작용하는 면역반응 시스템 연구에 바쳐온 그에겐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발견하고 설계한 면역제 치료법을 자신의 몸에 적용시켜 생명을 연장해 가며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체내 면역 시스템을 총괄하는 수지상(樹枝狀)세포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2011년도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로 3일 발표됐다. 역시 면역체계 활성화 연구에 기여한 브루스 보이틀러(53·미국), 율레스 호프만(70·룩셈부르크)과 3명이 공동 수상한 것이다.      스웨덴 카롤린스카 의대 노벨위원회는 3일(현지 시간) “스타인먼 교수 등은 면역체계의 비밀을 밝힘으로써 암과 염증, 감염에 대한 치료와 예방법을 발전시키는 데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발표했다.    ▼ 자신이 개발한 면역치료 받으며 암투병 ▼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발표됐으나 발표 3일전 이미 췌장암으로 사망한 미국 랠프 스타인먼 교수가 생전에 대학 면역 연구소에서 활짝 웃고 있다. 록펠러대 = AFP 연합뉴스 세 사람이 받을 상금은 총 1000만 크로나(약 17억 원). 이 중 절반은 1973년 수지상세포의 존재를 처음 규명한 스타인먼 교수에게 돌아간다. 또 이를 바탕으로 선천 면역 활성화 메커니즘을 밝혀낸 공로로 보이틀러와 호프만이 각각 250만 크로나를 받는다고 위원회는 설명했다.   하지만 그 낭보가 전해졌을 때 스타인먼 교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췌장암이 악화돼 이미 지난달 30일 숨을 거둔 것이다. 부인이 대신 노벨상 수상 통보를 받았다.   스타인먼 교수가 재직했던 록펠러대는 3일 성명에서 “스타인먼 교수가 4년간 앓아오던 췌장암으로 지난주 금요일 사망했다”며 “그는 자신이 직접 설계한 ‘수지상세포 면역제 치료법’으로 생명을 연장해 왔다”고 밝혔다.  1943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스타인먼 교수는 캐나다 맥길대에서 과학학사를 받고 1968년 하버드대 의대에서 의학박사를 받았으며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그는 1970년부터 뉴욕의 록펠러대에서 연구원으로도 활동하면서 1973년 후천성 면역 작용을 활성화하는 새로운 면역세포를 발견해 ‘수지상세포(Dendritic cells)’로 명명했다.  1988년 이래 록펠러대 면역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면역학 및 면역계 질환 센터의 소장도 맡아 왔다.   스타인먼 교수의 딸 알렉시스는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수상 사실을 몰랐다”라면서 “아버지의 노력이 노벨상으로 인정받게 된 것에 대해 모두 감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타인먼 교수의 사망으로 노벨상 수상 규정이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다. 노벨위원회가 사망자에게는 노벨상을 주지 않는다는 규정을 1974년 명문화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엔 사후 노벨상을 수상한 경우가 딱 2번 있었다. 1961년 콩고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현지로 가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진 다그 함마슐트 유엔 사무총장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함마슐트 총장은 평화상 수상자 발표를 얼마 앞둔 9월 18일 사망했다. 노벨위원회는 그가 생전에 평화상 수상자로 추천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다른 사례는 1931년 4월 사망해 그해 문학상을 수상한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 시인이다. 카를펠트 시인은 1912년부터 사망한 1931년까지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는 권한을 가진 스웨덴 아카데미 종신 상임서기를 지냈다. 함마슐트 사무총장과 카를펠트 시인은 둘 다 스웨덴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0월에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12월 정식 상을 수상하기 전에 사망한 경우에는 상이 예정대로 수여된다. 1996년 노벨 경제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된 지 불과 며칠 뒤 사망한 윌리엄 비크리 미국 컬럼비아대 경제학 교수는 12월에 예정대로 상을 받았다.  하지만 스타인먼 교수처럼 노벨위원회가 당사자가 숨진 사실을 모르고 수상자로 선정한 사례는 아직 없었다. 이와 관련해 노벨위원회는 이번 경우 어떻게 처리할지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1974년에 사후 수상을 금지한 조항을 명문화했기 때문에 스타인먼 교수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노벨위원회 관계자는 “위원회가 수상자를 발표하기 전 수상자가 사망한 것을 모르기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라고 3일 말했다. 스타인먼 교수가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된 직후 그가 이미 사망했음을 발표한 미국 록펠러 대의 마르크 테시어 라비뉴 총장은 “스타인먼 교수의 수상 소식은 ‘기쁘고도 씁쓸하다(bittersweet)’며 대학도 3일에야 가족들로부터 그가 오랜 투병 끝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신나리 기자   
8    [노벨문학상과 시인]생전 수상 거부, 죽은후 수상자가 된 시인 댓글:  조회:3023  추천:0  2017-10-29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 직업 시인 국적 스웨덴 수상내역 노벨 문학상 (1931년)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Erik Axel Karlfeldt, 1864년 7월 20일 ~ 1931년 4월 8일)는 스웨덴의 시인이다. 그는 1931년에 노벨 문학상을 추서받았으며 1918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적이 있다. 그는 달라르나 지방의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본명은 에리크 악셀 에릭손(Erik Axel Eriksson)이었다. 하지만 그는 1889년에 새로운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는 죄를 저질러 유죄 판결을 선고받은 아버지와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그는 웁살라 대학교를 다니면서 스톡홀름 교외 등지의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으며 대학을 졸업한 이후 5년 동안 스톡홀름에 위치한 스웨덴 왕립 도서관에서 근무했다. 그는 1904년에 스웨덴 아카데미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제11대 상임 서기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1905년에 노벨 아카데미 위원, 1907년에 노벨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12년부터 죽을 때까지 노벨 아카데미 상임 서기로 근무했다. 그는 1917년에 웁살라 대학교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웨덴)  에리크 악셀 카르펠트              출생 1864. 7. 20, 스웨덴 폴케르나 사망 1931. 4. 8, 스톡홀름 국적 스웨덴 요약 스웨덴의 시인.   본질적으로는 향토주의와 전통의 틀 속에 얽매여 있지만 그의 시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고, 그가 죽은 후인 1931년 노벨 문학상을 안겨주었다. 앞서 1918년에는 수상을 거부한 바 있다. 고향 시골 농부들의 문화에 강한 유대감을 느꼈으며 평생 동안 이어진 그의 작품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6권의 시집으로 출판되었다. 〈광야와 사랑의 노래 Vildmarks-och kärleksvisor〉(1895)·〈프리돌린의 노래 Fridolins visor〉(1898)·〈프리돌린의 유쾌한 정원 Fridolins lustgård〉(1901)·〈플로라와 포모나 Flora och Pomona〉(1906)·〈플로라와 벨로나 Flora och Belona〉(1918), 그리고 죽기 4년 전에 출판한 〈가을의 호른 Hösthorn〉(1927)이 그것이다. 1938년 그의 시 일부가 영어로 번역되어 〈Arcadia Borealis:Selected Poems of Erik Axel Karlfeldt〉로 출판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숭배자들 가운데서도 그가 자신의 재능을 오로지 스러져가는 지방문화를 위해서만 썼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7    [노벨문학상과 시인]지도자 계급의 어용문인으로 전락된 시인 댓글:  조회:2684  추천:0  2017-10-29
조수에 카르두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수에 카르두치 조수에 알레산드로 주세페 카르두치(이탈리아어: Giosuè Alessandro Giuseppe Carducci, 1835년 7월 27일 ~ 1907년 2월 16일)는 이탈리아의 시인·고전문학자이다. 중부 이탈리아의 발디카스텔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리스·라틴을 위시한 고전작품을 가까이 하였고 근대의 작가로서는 알레산드로 만초니와 조반니 베르셰의 작품을 애독하였다. 피렌체의 로마 가톨릭교회 계열 중학교를 거쳐 피사 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소위 수재 코스 가운데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그러나 1858년에 형(兄) 단테가 자살하고 곧이어 부친도 사망하자 출판 편집에 종사하며 일가를 부양했다. 1860년에는 그 실력을 인정받아 볼로냐 대학 국문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정치 비밀 결사원인 부친의 혈통을 이어 받아서인지 국가 통일시대에는 신 정부를 통렬히 비난하는 시 과 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 후 점차 민족주의자의 성격을 띠어 오히려 지도자 계급의 어용 시인·문학자로 전락하였다. 1890년에는 상원 의원에 임명되고, 1906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       1835 - 이탈리아의 시인 조수에 카르두치(Carducci, Giosue) 출생 카르두치 [Carducci, Giosue, 1835.7.27~1907.2.16] 토스카나주(州) 발디카스텔로 출생. 아버지는 의사이며 애국적인 정치가였다. 아버지를 따라 볼로냐(1839∼1849)·피렌체(1849∼1850) 등으로 옮겨 살았다. 스코로피학교에서 신부(神父) G.바르소티니에게 배우고, G.T.가르가니 및 E.넨초니와 교유(交遊)하였으며, 이어서 1853∼1855년 피사의 사범대학 문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고전문학을 애호하여 당시 전성을 자랑하던 낭만주의 문학을 반대하고 가르가니, 토제티 등과 함께 낭만파인 브라치를 상대로 논쟁을 벌였다. 1856∼1857년 성미니아트의 중학교 교사로 있었고, 1857년 동생의 자살, 이듬해 부친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고교 교사로 있던 중 문교장관의 초청으로 볼로냐대학의 이탈리아 문학 교수가 되면서 많은 저술을 하게 되었다(1860∼1904). 1890년 상원의원에 임명되었고, 1899년부터 반신불수로 고생하다가 교수직을 사임하였고, 19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 그 이듬해 볼로냐에서 죽었다. 그는 국어의 순화, 국민 문학의 제창, 고전연구 등으로 이탈리아 근대문학의 정통적 방향을 잡았으며, 헬레니즘과 소박한 휴머니즘 정신에 입각하여, 순수한 자연과 인간의 생명감, 애국적 정열 등을 추구하고, 그리스·로마의 운율(韻律)을 현대 이탈리아 율격(律格)에 되살려 장중하면서도 명랑하고 전아(典雅)한 고전적 이상주의 시풍을 창조하였다. 주요저서로 《레비아 그라비아 Levia gravia》(1861∼1871) 《악마송가(惡魔頌歌) Inno a Satana》(1863) 《신가집(新歌集) Rime nuove》(1861∼1887) 《의고시집(擬古詩集) Odi barbare》(3권, 1877∼1889) 등이 있다. /naver   
6    [노벨문학상과 시인] - 문학과 언어학의 부흥을 주도한 시인 댓글:  조회:3097  추천:0  2017-10-29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동상 프레데리크 미스트랄(Frédéric Mistral, 1830년 9월 8일 ~ 1914년 3월 25일)은 19세기에 오크어 문학의 진흥을 일으킨 프로방스 출신의 시인이다. 펠리브리지 운동의 중심적 인물이었으며, 190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생애[편집] 그는 1830년 남프랑스의 마이얀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미스트랄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비뇽의 왕립대학(이후 프레데릭 미스트랄 학교로 개명)을 다녔다. 미스트랄은 1851년 액상프로방스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특별히 직업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미스트랄은 일찌감치 프로방스의 문화와 언어 부흥을 위해 힘쓰기로 결정했다. 미스트랄이 프로방스의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에는 아비뇽에서 학교를 다닐 때에 조세프 루마뉴를 만났던 것이 계기로 작용했다.[1]1854년 프로방스와 오시타니아 전체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 진흥하기 위한 조직인 펠리브리지를 세웠다. 미스트랄은 트루바두르들의 오크어 문학전통을 부흥하기 위해 그 자신이 오크어로 많은 작품을 썼으며, 1878년에는 2권짜리 사전을 편찬했다. 미스트랄은 오크어 부흥운동을 하며 프랑스어의 철자법에 맞춘, "미스트랄 표기안"이라는 오크어의 새로운 표기법을 만들어 냈는데, 현재까지도 중세의 표기법에 기준한 "표준안"과 병용되고 있다. 작품 세계[편집]1859년 미레유 1867년 칼랑도 1876년 황금의 섬 1884년 네르토 1886년-1921년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전집(6권) 1897년 론 강의 시 1906년 나의 근원 1912년 올리브 수확 (프랑스)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출생 1830. 9. 8, 프랑스 마얀 사망 1914. 3. 25, 마얀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시인. 19세기에 프로방스 어문학의 부흥을 주도했고, 1904년에는 문학과 언어학에 이바지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프로방스 지방의 유복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아비뇽의 콜레주 루아얄(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고등학교로 바뀌었음)에 다녔다. 이 학교 교사 중 한 사람이었던 조제프 루마뉴는 그에 앞서 프로방스 속어로 시를 쓰기 시작했었고 평생 동안 그의 친구가 되었다. 1851년에 엑상프로방스대학교에서 법학사학위를 받았다. 직업을 갖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했던 그는 일찍부터 프로방스 지방의 생활과 언어를 재건하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854년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프로방스어와 관습을 유지하기 위한 모임인 '펠리브리주'를 창설했고, 나중에는 범위를 남부 프랑스 즉 '오크어의 지방' 전역으로 넓혔다(프랑스 남부지방을 '오크어의 지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대 프랑스어로 '그렇다'를 뜻하는 '위'[oui]가 남부지방 사투리에서는 '오크'로 발음되었기 때문). '오크어'는 음유시인들의 언어로서 남부 프랑스의 문화어였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시인들도 이 언어를 사용했다. 미스트랄은 '오크어'를 문학으로 되살리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그는 전2권으로 된 오크어 학술사전 〈펠리브리주의 보석 Lou Tresor dóu Félibrige〉(1878)을 만드는 일에 20년의 세월을 바쳤다. 또한 아를에 프로방스 민속박물관을 세웠고, 노벨상 상금도 이 박물관을 위해 사용했다. 오크어를 옛날의 지위로 돌이키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시적 재능은 그 언어를 이용하여 오래도록 살아남는 걸작을 만들었고, 오늘날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문학작품으로는 〈미레유 Mirèio〉(1859)·〈칼랑도 Calendau〉(1867)·〈네르토 Nerto〉(1884)·〈론 강의 시 Lou Pouèmo dóu Rose〉(1897) 등 4편의 장편 서사시와, 역사비극 〈잔 여왕 La Reino Jano〉(1890), 서정시집 〈황금의 섬 Lis Isclo d'or〉(1876)·〈올리브 수확 Lis Oulivado〉(1912), 그리고 〈아르마나의 산문 Prose d'Armana〉(1926~29)에 수록된 많은 단편소설 등이 있다. 1848년에 최초의 서사시 〈저택 Lis Meissoun〉을 썼는데, 이 작품은 그가 죽은 뒤인 1927년에 〈르뷔 드 프랑스 Revue de France〉지 7월호와 8월호에 발표되었다. 회고록인 〈나의 근원 Moun espelido〉(1906)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위대함은 첫번째 장시인 〈미레유〉와 마지막 장시인 〈론 강의 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2편의 작품은 12편으로 이루어진 본격적 규모의 서사시이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와 지역을 무대로 한 〈미레유〉는 부유한 농부의 딸이 가난한 바구니 제조공의 아들을 사랑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생트마리드라메르 교회에서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고장에 대한 사랑을 이 시에 쏟아넣었다. 구노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오페라를 작곡했다(1863). 〈론 강의 시〉는 낭만적인 젊은 네덜란드 공작과 가난한 나룻배 사공의 딸이 거룻배인 '루 카뷔를'호를 타고 리옹에서 보케르까지 론 강을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먼저 배에 탄 네덜란드 공작과 나중에 올라탄 사공의 딸 사이에 사랑이 싹트지만, 루 카뷔를 호는 론 강을 오가는 최초의 기선에 의해 뜻하지 않게 침몰당하게 되고, 이와 함께 그들의 연애도 막을 내린다. 승무원들은 강가로 헤엄쳐 가지만, 두 연인은 물에 빠져 죽는다. 이 서사시는 〈미레유〉보다 덜 음악적이고 문체의 밀도도 더 높지만, 생기와 문채(文彩)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은 미스트랄이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며 그가 사랑하는 것 대부분이 그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음을 시사한다. ======================         1914 - 프랑스의 시인 미스트랄(Mistral, Frédéric) 사망        미스트랄 [Mistral, Frédéric, 1830.9.8~1914.3.25]     프레데리크 미스트랄(Frédéric Mistral, 1830년 9월 8일 - 1914년 3월 25일)은 19세기에 오크어 문학의 진흥을 일으킨 프로방스 출신의 시인이다. 펠리브리지 운동의 중심적 인물이었으며, 190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생애 그는 프랑스의 옛 프로방스 출신의 농부였으며, 미스트랄은 아비뇽의 왕립대학(이후 프레데릭 미스트랄 학교로 개명)을 다녔다. 미스트랄은 1851년 액상프로방스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특별히 직업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미스트랄은 일찌감치 프로방스의 문화와 언어 부흥을 위해 힘쓰기로 결정했다. 1854년 프로방스와 오시타니아 전체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 진흥하기 위한 조직인 펠리브리지를 세웠다. 미스트랄은 트루바두르들의 오크어 문학전통을 부흥하기 위해 그 자신이 오크어로 많은 작품을 썼으며, 1878년에는 2권짜리 사전을 편찬했다. 미스트랄은 오크어 부흥운동을 하며 프랑스어의 철자법에 맞춘, "미스트랄 표기안"이라는 오크어의 새로운 표기법을 만들어 냈는데, 현재까지도 중세의 표기법에 기준한 "표준안"과 병용되고 있다. /위키백과    
5    [노벨문학상과 시인] - 제1회 노벨문학상 주인공으로 된 시인 댓글:  조회:3753  추천:0  2017-10-29
쉴리 프뤼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르네 프랑수아 아르망 프뤼돔  직업 시인, 수필가 국적 프랑스 수상내역 노벨 문학상 (1901년) 르네 프랑수아 아르망 프뤼돔(René François Armand Prudhomme, 1839년 3월 16일 ~ 1907년 9월 6일) 또는 쉴리 프뤼돔(Sully Prudhomme)은 프랑스의 시인으로, 1901년 노벨 문학상을 처음 수상한 인물이다. 생애[편집] 그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기술자가 되기 위해 과학 기술 전문 학교에 입학했지만 눈병을 앓는 바람에 중퇴했다. 그 후 공장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며 1860년 법대에 입학했다. 그는 1865년 자신의 첫 시집 《구절과 시 (Stances et Poèmes)》를 발표했고 1881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된다. 그는 1901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며 1907년 9월 6일 샤트네말라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는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시집[편집]《구절과 시 (Stances et Poèmes)》 (1865년) 《시험 (Les Épreuves)》 (1866년) 《고독 (Les Solitudes)》 (1869년) 《운명 (Les Destins)》 (1872년) 《프랑스 (La France)》 (1874년) 《헛된 상냥함 (Les Vaines tendresses)》 (1875년) 《꼭대기 (Le Zénith)》 (《양세계 평론》 지에 실린 시, 1876년) 《정의 (La Justice)》 (1878년) 《시 (Poésie)》 (1865년-1888년) 《프리즘, 다양한 시 (Le Prisme, poésies diverses)》 (1886년) 《행복 (Le Bonheur)》 (1888년) 《유고집 (Épaves)》 (1908년)   (프랑스)   쉴리 프뤼돔                  출생 1839. 3. 16, 프랑스 파리 사망 1907. 9. 7, 샤트네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시인. 본명은 Ren-Franois-Armand Prudhomme.   낭만주의의 과도함에 대한 반항으로 시에 우아함과 균형 및 미학적 기준을 회복하고자 했던 고답파 운동의 지도자였다. 학교에서 과학을 공부했지만 눈병 때문에 과학자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맨 처음 얻은 일자리는 공장 사무실의 서기였는데, 1860년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이 직장을 그만두었다. 1865년에는 불행했던 연애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우아하고 음울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절(詩節)과 시 Stances et poèmes〉(1865)에는 그의 대표시 〈깨진 항아리 Le vase brisé〉가 포함되어 있다. 〈시련 Les Épreuves〉(1866)·〈고독 Les Solitudes〉(1869)도 초기의 감상적 문체로 쓴 작품들이다. 이후에는 개인 감정을 서정적으로 표출한 시를 단념하고, 고답파의 보다 더 객관적인 접근을 위해 운문에서 철학적 개념을 표현한 것을 시에 적용했다. 이런 경향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정의 La Justice〉(1878)와 〈행복 Le Bonheur〉(1888)인데, 〈행복〉은 사랑과 지혜를 찾아 헤매는 파우스트의 탐험을 다루고 있다. 후기 작품은 이따금 애매하고, 운문에서 철학적 주제를 표현하는 문제에 있어 너무 순진하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1881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01년 제1회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 “고귀한 이상주의, 예술적 완벽, 그리고 마음과 지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그의 시적 세계를 칭송하며” - 1901년 한림원이 밝힌 노벨문학상 수여 사유 중     제 1회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역사적인 명예를 안은 쉴리 프뤼돔은 프랑스의 시인이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원래 기술자가 되고자 과학 기술 전문 학교에 들어갔지만 눈병을 앓으며 중퇴하고 진로를 수정하여 법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문학에 더욱 몰두하였던 그는 1865년 그의 유명한 시 ‘금 간 꽃병’이 포함된 첫 시집 [구절과 시]를 발표하여 문단의 인정을 받으며 일약 유명세를 얻었고, 시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고독’, ‘시련’ 등 그의 전반기 작품들은 대부분 감상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를 나타낸다. 그러나, ‘정의’, ‘행복’ 등 후반기 작품에서는 철학과 시가 결합된 형태를 보이며 현대사회의 모순과 충돌하는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프뤼돔의 문학 세계는 인간 내면을 다루며 영혼과 감정의 섬세한 묘사뿐만 아니라 미래와 우주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평을 들었다.   1881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01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자, 스웨덴 문단은 노벨상 위원회의 결정에 반발하였다. 당시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가 더욱 유력한 후보였으나 노벨위원회가 그의 진보적인 성향을 이유로 수상자로 선정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또한, 당시 생존해 있었던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에게 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거세게 일어났다.     쉴리 프뤼돔. 노벨 문학상 제 1회 수상자인 그는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상을 수상한 후 상금을 프랑스 작가협회에 헌납하였다.   수상자 선정 과정의 논란을 뒤로하고 프뤼돔은 수상 결정에 감사하였다. 그는 스웨덴 왕립아카데미에 보낸 편지에서 노벨상 수상이 개인적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조국 프랑스 문단에 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 하였고, 실제로 그는 상금을 프랑스 작가협회가 시문학 상을 제정하는 기금으로 헌납하였다.   쉴리 프뤼돔은 1907년 9월 6일 샤트네말라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는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주요작품 설명 [시집1866~1872] 표지 [시집 1865~1866] 내지 [시집 1878~1879] 표지 [시집 1878~1879] 내지     주요작품 설명 시집 시리즈(Poésies) 시기별로 묶은 다섯 권의 시집은 지금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운 1870년대에 출판된 초판본 시집들로 쉴리 프뤼돔의 열정과 땀으로 완성된 그의 작품의 전부이다. 특히, 첫 장의 사진은 오리지널 판화로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 시집들은 이제 세계 유명 도서관에서도 희귀본으로 여겨지는 초판본들이다. 인쇄된 종이들은 당시 최고급으로 인정되던 네덜란드 산 종이와 중국산 종이를 사용하여 인쇄했다.     쉴리 프뤼돔의 작품 리스트 no. 발표연도 제목 1 1865 Stances et poèmes. 2 1930 Les Epreuves : Amour, doute, rêve, action 3 1866 Les Solitudes 4 1869 Les Destins 5 1872 La Révolte des fleurs 6 1874 La France 7 1875 Les vaines tendresses 8 1878 La justice 9 1882 Discours de réception de Sully Prudhomme à l'Académie française 10 1883 L'expression‎ dans les beaux-arts 11 1886 Le Prisme 12 1888 Le Bonheur 13 1892 Réflexions sur l'art des vers 14 1896 La Nymphe des bois de Versailles 15 1896 Que sais-je 16 1898 À Alfred de Vigny 17 1901 Testament poétique 18 1905 La vraie religion selon Pascal 19 1908 Épaves. 20 1909 Le Lien social 21 1911 Lettres à une amie 1865-1881 22 1913 Patrie et humanité 23 1920 Jeunes filles et femmes 24 1922 Journal intime 25 1928 Choix de poésies 표기된 작품년도는 프랑스에서 작품이 출간된 시점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낭만주의의 과도함에 대한 반항으로 시에 우아함과 균형 및 미학적 기준을 회복하고자 했던 고답파 운동의 지도자였다. 학교에서 과학을 공부했지만 눈병 때문에 과학자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맨 처음 얻은 일자리는 공장 사무실의 서기였는데, 1860년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이 직장을 그만두었다. 1865년에는 불행했던 연애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우아하고 음울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절(詩節)과 시 Stances et poèmes〉(1865)에는 그의 대표시 〈깨진 항아리 Le vase brisé〉가 포함되어 있다. 〈시련 Les Épreuves〉(1866)·〈고독 Les Solitudes〉(1869)도 초기의 감상적 문체로 쓴 작품들이다. 이후에는 개인 감정을 서정적으로 표출한 시를 단념하고, 고답파의 보다 더 객관적인 접근을 위해 운문에서 철학적 개념을 표현한 것을 시에 적용했다. 이런 경향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정의 La Justice〉(1878)와 〈행복 Le Bonheur〉(1888)인데, 〈행복〉은 사랑과 지혜를 찾아 헤매는 파우스트의 탐험을 다루고 있다. 후기 작품은 이따금 애매하고, 운문에서 철학적 주제를 표현하는 문제에 있어 너무 순진하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1881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01년 제1회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자료출처-백과사전                                         외모의 품위보다 영혼의 품위를 지켜라/ 쉴리 프뤼돔   파리 근교에 있는 어느 별장. 제1회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한 쉴리 프뤼돔 Sully Prudhomme(1839~1907)은 감격에 겨워 스웨덴 왕립아카데미에 편지를 써 보냈다.  “수상 소식에 자부심과 희열을 느낍니다. 이 상은 작가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하는 최고의 영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수상의 영광을 조국에게 돌리고자 합니다. 저의 작품이 이러한 영예를 안게 된 것은 모두 조국의 은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뤼돔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입에 발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선뜻 내놓은 상금은 프랑스 작가협회에 의해 시문학 발전을 위한 창작기금으로 운영되면서 오늘날까지 프랑스 문학 발전에 공헌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1회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쉴리 프뤼돔(Sully Prudhomme)은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대학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엔지니어와 변호사로 일했지만 시를 만나면서 삶의 궤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 26세이던 1865년 첫 시집 《스탕스와 시》가 출간되면서 ‘당대 시가(詩歌)의 걸작’이라는 호평과 함께 일약 최고의 청년시인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프뤼돔의 전반기 작품은 주로 고독하고 음울한 사랑을 노래하면서 감상적이고 침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대표작으로는 《고독》《시련》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정의》《행복》등으로 대표되는 후반의 작품에서는 현대사회의 모순과 충돌하는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통해 철학과 시의 결합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프뤼돔의 시 세계는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두드리며 영혼과 감정의 미세한 떨림까지 포착해냈을 뿐 아니라, 인류의 미래와 우주에 대한 성찰에까지 다다랐다는 평을 들었다.   프뤼돔은 산문가로도 대단한 활약을 보였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미술론》《시구예술의 단상》등이 있다. 그는 1914년에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말년에는 《한 아이의 회상》《일기》《크리스마스 이야기》등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프뤼돔은 ‘시 작품에서 고상한 이상, 완벽한 예술성, 보기 드문 영혼과 지혜의 실증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1901년 노벨 문학상의 첫 번째 주인공이 된다.   위대한 지혜=  “외모의 품위보다 영혼의 품위를 지키라” • 인간은 하늘을 나는 새를 동경하면서도 정작 스스로가 비상하려는 대담한 의지를 발휘하는 데는 머뭇거린다. • 사랑하는 이의 손바닥이 훑고 지나간 영혼엔 고통만 남을 뿐이다. 영혼은 금이 가고 사랑의 꽃도 시든다. • 달콤한 기억은 죽음보다 두렵다 • 누구나 나이가 들면 반들반들하던 이마에는 주름이 패기 시작하고 촘촘하던 머리도 듬성듬성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장 추악한 것은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박한 영혼이 드러나는 얼굴을 갖게 되는 것이다.       ========================   물가에서         / 쉴리 프뤼돔     흘러가는 물가에 둘이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리  구름이 허공을 스쳐가면, 둘이서  스치는 구름을 바라보리 지평에, 초가지붕에 연기 솟으면,  솟는 연기를 바라보리  근처에서 꽃이 향기 품으면,  그 향기가 몸에 배게 하리 꿀벌들이 맛보는 나무열매가  꾀면 우리도 그 맛을 보리  귀 기울인 나무숲에 어떤새가  노래하면 우리도 귀를 세우고.. 물이 소곤거리는 수양버들 아래서  물의 속삭임을 우리도 들으리 이 꿈이 이어가는 그 동안은,  시간의 흐름을 안 느끼리  차라리 스스로를 못내 사랑하는  깊은 정열만을 가슴에 간직하고  번거로운 세상에 다툼질엔 아랑곳 없이  그것들을 잊으리 그래서 여증나는 모든 것 앞에서 홀로 행복해  지칠 줄을 모르며,  사라져 가는 모든 것 앞에서 사라질 줄 모르는  사랑을 느끼리   ========================= 금 간 꽃병                               - 쉴리 프뤼돔 - 이 마편초꽃이 시든 꽃병은 부채가 닿아 금이 간 것. 살짝 스쳤을 뿐이겠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으니. 하지만 가벼운 상처는 하루하루 수정을 좀먹어 들어 보이지는 않으나 어김없는 발걸음으로 차근차근 그 둘레를 돌아갔다. 맑은 물은 방울방울 새어 나오고 꽃들의 향기는 말라 들었다. 손대지 말라, 금이 갔으니. 곱다고 쓰다듬는 손도 때론 이런 것 남의 마음을 스쳐 상처를 준다. 그러면 마음은 절로 금이 가 사랑의 꽃은 말라죽는다.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온전하나 마음은 작고도 깊은 상처에 혼자 흐느껴 운다. 금이 갔으니 손대지 말라. ========== * 쉴리 프뤼돔 1901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1839년 프랑스 출신이며, 점원의 아들로 태어나 과학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시력에 문제가 있어 포기했다. 실연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감상적인 시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절제와 객관성, 정확한 묘사 등을 추구하는 시 운동 파르나시앙(고답파)의 영향을 받아 서정성을 탈피해 철학적인 사상을 표현하는 시를 썼다. ==========================   깨진 꽃병                / 쉴리 프뤼돔 ​ 이 마편초 꽃이 시든 꽃병은 부채가 닿아서 금이 간 것 살짝 스쳤을 뿐이겠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으니 ​ 하지만 가벼운 상채기는 하루하루 수정을 좀먹어 들어 보이지는 않으나 어김없이 이어나가 야금야금 병 둘레를 돌아갔다. ​ 맑은 물은 방울방울 스며 나오고​ 꽃의 물기는 말라들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까닭을 모르고 있었다 손대지 마라 ! 금이 갔으니     아끼고 귀여워 매만지는 손도​ 때로는 이런 것 남의 맘을 스쳐 상처를 준다 그러면 마음은 절로 금이 가 사랑의 꽃은 횡사를 한다 ​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온전하나 마음은 미세하게 깊은 상처가 자라고 흐느낌을 느끼나니 손대지 마라 !  금이 갔으니​     ​   ♧ 마편초(Verbena) :​ 여러해살이 들풀. 한약재로 쓰임. 허브 향이 있어 분재도 함. ​ ​ ​ [출처] 깨진 꽃병 / 쉴리 프뤼   =========================   사랑에 가장 좋은 순간                     / 쉴리 프뤼돔 ​ ​ 사랑에 가장 좋은 순간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느 침묵 바로 그 속에 있는 것   그것은 남 모르는 마음의 은근한 침묵 속에 있는 것 은밀한 너그러움 속에 있는 것   그것은 파르르떠는  손이 놓여진 팔의 설레임 속에 있는 것 둘이서 넘기는 그러나 아직 읽지 않은 책 페이지의 갈피 속에 있는 것   그것은 다문 입이 수줍음 만으로 그렇듯 말을 하는 유일한 시간 마음이 터지면서 장미눈모양 살며시 소리 낮게 열리는 시간   머리카락의 향긋한 향내만이 얻어진 사랑으로 보이는 시간 공경이 바로 고백이 되는 그지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시간 [출처] 사랑에 가장 좋은 순간/ 쉴리 프뤼돔 =====================================  
4    [그것이 알고싶다] - 력대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전공은?... 댓글:  조회:2704  추천:0  2017-10-29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 왼쪽부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오르한 파무크, 르 클레지오, 귄터 그라스, 웰레 소잉카. 사진=조선DB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63)다. 1954년 일본에서 출생해 1960년 영국으로 이민을 떠난 이시구로는 1974년 켄트대학교에 진학해 1978년 '영어학'과 '철학' 학사과정을 마쳤다. 소설 습작과 사회복지사 활동을 마친 그는 이스트앵귈라대학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1980년 그가 석사(碩士)로 졸업한 전공은 '창작문학(Creative Writing)', 즉 지금의 문예창작학(文藝創作學)이었다. 14일 자 《조선일보》 칼럼에서 어수웅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은 프랑스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트윗을 인용하며, 역대 최초로 '문예창작과' 출신 작가가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사실을 특이점으로 꼽았다. 어 차장은 '문창과 최초의 노벨문학상'이라는 제목의 해당 칼럼에서 "노벨문학상의 탄생은 19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문학 창작을 대학에서 가르친다는 발상은 상대적으로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등장할 수 있었던 기록일 것"이라며 이 같은 사실을 흥미롭게 해석했다. 이어 어 차장은 이 사실을 "전 세계 문예창작과의 경사라는 순진한 호들갑이나, 예술 창작이 과연 교육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회의가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라며 "그보다는 최근 스웨덴 한림원의 문학적 태도를 한 번쯤 생각해 보고 싶은 이유가 더 크다"고 칼럼의 취지를 밝혔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문예창작학과(Literary Creation)'는 첫째, 문학의 이론과 창작을 세계문학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둘째 인간 존재의 참모습을 언어를 매개로 해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학문, 셋째 문학의 이론과 창작 과정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우리 문학의 수준을 격상시키는 것에 가치를 두는 학문, 넷째 문학 작품의 실제적인 관찰과 분석을 통한 올바른 창작 교육을 토대로 깊이 있는 안목과 자질을 갖춘 창조적인 작가를 길러내는 것에 교육목표를 두고 있는 학문이다. 방점은 '세계문학 차원의 연구' '문학 이론과 창작 과정의 체계적 연구' '안목과 자질을 갖춘 창조적 작가 양성' 등에 찍힌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는 기성작가들은 물론이겠거니와 문예창작학을 공부하는 국내외 학도들에게 있어서도 대단히 큰 영광일 것이다. 그럼에도 정식 교육기관에서 문예창작학을 전공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올해가 처음이다. 어 차장의 칼럼 내용처럼 '문학 창작을 대학에서 가르친다는 발상은 상대적으로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등장할 수 있었던 기록일 것'이다. 어찌 됐든, 긍정의 눈빛으로 보든 회의의 시각으로 보든 신기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어쩌면 세계적 문학상 당선에 있어, 아니 문학 작가로서의 활동에 있어 자신의 전공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전공이 기기묘묘(奇奇妙妙)하고 백화제방(百花齊放)의 다양함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수상자 이시구로는 영어학, 철학, 창작문학을 공부했다. 2011년 수상자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심리학을 배웠다. 1999년 수상자 귄터 그라스는 조각을 전공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중도하차한 경우는 물론, 자신의 본래 전공과 달리 독학(獨學)으로 문학 공부에 열중한 수상 작가들도 많다. 《월간조선》이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국적, 장르, 전공(專攻) 등을 정리했다. 이하 문헌상으로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 정보의 색인이 가능한 범주 내에서 최대한 정리한 도표다. 혹 부족한 부분이 있거나 바르게 교정해야 할 정보가 있다면 독자분들께서 '댓글' 참여로 조언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연도 수상자 국가 언어 장르 전공 1901 쉴리 프뤼돔 프랑스 프랑스어 시 법학 1902 테오도어 몸젠 독일 독일어 역사 법학, 고고학 1903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 노르웨이 노르웨이어 소설 신극(新劇) 운동 1904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프랑스 오크어 시 법학 1904 호세 에체가라이 스페인 스페인어 희곡 토목 공학 1905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폴란드 폴란드어 소설 의학, 문학 역사, 철학 1906 조수에 카르두치 이탈리아 이탈리아 시 문학 1907 러디어드 키플링 영국 영어 소설 유나이티드서비스 대학에서 공부(전공 미상) 1908 루돌프 크리스토프 오이켄 독일 독일어 철학 고전문헌학(古典文獻學) 및 형이상학 1909 셀마 라겔뢰프 스웨덴 스웨덴어 소설 여자고등사범학교(교육학 추정) 1910 파울 요한 루트비히 폰 하이제 독일 독일어 소설 고전언어학 1911 모리스 마테를링크 벨기에 프랑스어 희곡 법학 1912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독일 독일어 희곡 생물학, 철학 1913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인도 벵골어 시 법학, 문학 1914 수상자 없음 1915 로맹 롤랑 프랑스 프랑스어 소설 철학, 역사 1916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스웨덴 스웨덴어 시, 소설 미술, 문학(독학) 1917 카를 아돌프 기엘레루프 덴마크 덴마크어 소설 신학 1917 헨리크 폰토피단 덴마크 덴마크어 소설 공학 1918 수상자 없음 1919 카를 슈피텔러 스위스 독일어 시, 소설 법학, 신학 1920 크누트 함순 노르웨이 노르웨이어 시, 소설 문학(독학) 1921 아나톨 프랑스 프랑스 프랑스어 소설 문학 1922 하신토 베나벤테 스페인 스페인어 희곡 법학 1923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아일랜드 자유국 영어 시 미술, 문학 1924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폴란드 폴란드어 소설 문학(독학) 1925 조지 버나드쇼 아일랜드 자유국 영어 희곡, 소설 음악, 미술, 문학(독학) 1926 그라치아 델레다 이탈리아 이탈리아어 소설 문학(독학) 1927 앙리 베르그송 프랑스 프랑스어 철학 철학 1928 시그리드 운세트 노르웨이 노르웨이어 소설 상학(商學) 1929 토마스만 독일 독일어 소설 사학, 경제학, 미술사학, 문학 1930 싱클레어 루이스 미국 영어 소설 예일대학교 졸업(전공 미상) 1931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 스웨덴 스웨덴어 시 교육학, 문학 1932 존 골즈워디 영국 영어 소설, 희곡 법학 1933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소련(망명) 러시아어 소설 문학(독학) 1934 루이지 피란델로 이탈리아 이탈리아 소설, 희곡 문학 1935 수상자 없음 1936 유진 오닐 미국 영어 희곡 연극(연구) 1937 로제 마르탱 뒤가르 프랑스 프랑스어 소설 고문서학 1938 펄벅 미국 영어 소설 심리학 1939 프란스 에밀 실란패 핀란드 핀란드어 소설 자연과학 1940~1943 수상자 없음 1944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덴마크 덴마크어 시, 소설 약학 1945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칠레 스페인어 시 문학(독학) 1946 헤르만 헤세 독일 독일어 소설 신학, 문학(독학) 1947 앙드레 지드 프랑스 프랑스어 소설 문학(독학) 1948 T.S. 엘리엇 미국/영국 영어 시 철학, 프랑스 문학 1949 윌리엄 포크너 미국 영어 소설 문학(독학) 1950 버트런드 러셀 영국 영어 철학 수학, 철학 1951 페르 라게르 크비스트 스웨덴 스웨덴어 시, 소설, 희곡 미술, 문학 1952 프랑수아 모리아크 프랑스 프랑스어 소설 문학 1953 윈스턴 처칠 영국 영어 수필 육군사관학교 졸업(군사학) 1954 어니스트 헤밍웨이 미국 영어 소설 문학(독학) 1955 할도르 락스네스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어 소설 문학(독학) 1956 후안 라몬 히메네스 스페인 스페인어 시 법학 1957 알베르 카뮈 프랑스 프랑스어 소설 철학 1958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정치적 압력으로 수상 거부) 소련 러시아어 소설 철학 1959 살바토레 콰시모도 이탈리아 이탈리아어 시 공학 1960 생 존 페르스 프랑스 프랑스어 시 법학 1961 이보 안드리치 유고슬라비아 세르보크로아트어 소설 철학 1962 존 스타인벡 미국 영어 소설 영문학 1963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그리스 그리스어 시, 수필 아테네 및 파리 대학 졸업(전공 미상) 1964 장 폴 사르트르(수상 거부) 프랑스 프랑스어 소설 철학, 사회학, 심리학 1965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 소련 러시아어 소설 문학(독학) 1966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이스라엘 히브리어 소설 문학 1966 넬리 작스 독일/스웨덴 독일어 시, 희곡 문학(독학) 1967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과테말라 스페인어 소설 의학, 법학, 인류학 1968 가와바타 야스나리 일본 일본어 소설 영문학 1969 사뮈엘 베케트 아일랜드 영어/프랑스어 희곡, 소설 불문학 1970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련 러시아어 소설 수학, 물리학 1971 파블로 네루다 칠레 스페인어 시 철학, 불문학, 교육학, 문학 1972 하인리히 뵐 독일(서독) 독일어 소설 독문학, 고전문헌학 1973 패트릭 화이트 오스트레일리아 영어 소설 문학 1974 에위빈드 욘손 스웨덴 스웨덴어 소설 문학(독학) 1974 하뤼 마르틴 손 스웨덴 스웨덴어 시 문학(독학) 1975 에우제니오 몬탈레 이탈리아 이탈리아어 시 문학 (독학) 1976 솔 벨로 캐나다/미국 영어 소설 인류학, 사회학 1977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스페인 스페인어 시 법학, 경영학 1978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폴란드/미국 이디시어 소설 신학, 히브리어학 1979 오디세아스 엘리티스 그리스 그리스어 시 문학 1980 체스와프 미워시 폴란드 폴란드어 시 법학 1981 엘리아스 카네티 불가리아/영국 독일어 소설 화학 1982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롬비아 스페인어 소설 법학, 언론학 1983 윌리엄 골딩 영국 영어 소설 자연과학, 영문학 1984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체코 체코어 시 문학 (독학) 1985 클로드 시몽 프랑스 프랑스어 소설 문학 (독학) 1986 월레 소잉카 나이지리아 영어 희곡, 소설 영문학 1987 조지프 브로드스키 소련/미국 러시아어/영어 시 문학(예일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 1988 나기브 마푸즈 이집트 아랍어 소설 철학 1989 카밀로 호세셀라 스페인 스페인어 소설 의학, 문학(독학) 1990 옥타비오 파스 멕시코 스페인어 시 법학 1991 네이딘 고디머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어 소설 비트워터스랜드대학교 중퇴(전공 미상) 1992 데릭 월컷 세인트 루시아 영어 시, 희곡 불어, 라틴어, 서반아어 1993 토니 모리슨 미국 영어 소설 예술학 1994 오에 겐자부로 일본 일본어 소설 불문학 1995 셰이머스 히니 아일랜드 영어 시 영문학 1996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폴란드 폴란드어 시 문학, 사회학 1997 다리오 포 이탈리아 이탈리아어 희곡 건축학 1998 주제 사라마구 포르투칼 포르투칼어 소설 문학(독학) 1999 귄터 그라스 독일 독일어 소설 그래픽, 조각 2000 가오싱젠 프랑스 중국어, 프랑스어 소설 프랑스어학 2001 V.S. 나이폴 트리니다드 토바고 / 영국 영어 소설 영문학 2002 임레 케르테스 헝가리 헝가리어 소설 문학(독학) 2003 존 맥스웰 쿠체 남아프리카공화국 영어 소설 언어학 2004 엘프리데 옐리네크 오스트리아 독일어 소설, 희곡 미술사학, 음악사학, 연극학 2005 해럴드 핀터 영국 영어 희곡 연극 2006 오르한 파무크 터키 터키어 소설 언론학 2007 도리스 레싱 영국 영어 소설 문학 (독학) 2008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프랑스 프랑스어 소설 프랑스 문학 2009 헤르타 뮐러 독일 독일어 소설 독일 문학, 루마니아 문학 2010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페루 스페인어 소설 문학 2011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스웨덴 스웨덴어 소설, 시 심리학 2012 모옌 중국 중국어 소설 문학 2013 앨리스 먼로 캐나다 영어 소설 법학, 언론학, 영문학 2014 파트리크 모디아노 프랑스 프랑스어 소설 문학 (독학) 2015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벨라루스 러시아어 산문 언론학 2016 밥 딜런 미국 영어 시 미네소타 대학교 자퇴(문학 전공) 2017 가즈오 이시구로 영국 영어 소설 영어학, 철학, 창작문학(문예창작) ///글=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입력 : 2017.10.17    
3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친구와 포도주는 오랠수록 좋다... 댓글:  조회:3161  추천:0  2017-10-29
*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친구로 하고, 나를 가장 잘 모르는 사람을 적으로 삼는  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보나트-   * 우정은 평등한 사람간의 사리없는 거래다. 사랑은 폭군과 노예간의 비열한 교섭이다.                                                    -골드스미스-   * 친구에게 속는 것보다 친구를 믿지 않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다. -라 로슈푸코-   * 우연이 우리들의 양친을 만들며 선택이 우리들의 친구를 만든다.  -채프먼-   * 우정은 날개 없는 사랑이다.  -바이런-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                                                          -성서; 요한복음-   * 내가 친구로 삼고 싶은 사나이는, 우정의 노여움을 각오하고 직언하는 인간이다. 형  제와 같이 친구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인간이다.    -테오그니스-   * 친구란 또 하나의 자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인생으로부터 우정을 없앤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태양을 없애는 것과 같다.                                                      -괴테-   * 세상에는 기묘한 우정이 존재한다. 서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면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평생을 그대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다.  -도스토에프스키-   * 자기를 구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멸망할 것이며, 남을 구하기 위하여 끊  임없이 노력을 계속하는 사람은 불멸이다.  -A.헨드슨-   * 황금은 불로 시험하고 우정은 곤경으로써 시험당한다.  -영국 격언-   * 친구와 포도주는 오랠수록 좋다.     -영국 속담-   * 친구는 기쁨을 배로 늘리고 슬픔은 반으로 줄인다.    -실러-   * 너의 친구를, 그의 결점과 함께 사랑하라.       -이탈리아 격언-   * 사람이 우정을 원하는 것은 자기의 무력함이나 빈곤 때문이 아닌가. 즉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자기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의지하고 또 보답하는 것이 아닌가.                                                        -키케로-   * 진정한 행복을 만드는 것은 수많은 친구가 아니며, 훌륭히 선택된 친구이다.                                                   -벤 존슨-   * 우정이란, 통째가 아니면 주어질 수 없거나 되찾을 수 없는 완전한 신뢰를 예상하고  있다.    -모로아-   * 우정이란, 이해받는 것보다는 이해를 주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 인생에는 우정보다 고귀한 쾌락은 없다.        -플루타르코스-   * 남자와 여자 사이의 우정 관계란 극히 드물지만,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혼 생활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우스만-   * 우정은 자신에 대하여 행하는 행복한 자유 약속이다. 그것은 자연의 공감을 불변의 친화로 바꾼다. 그것은 정념이나 이해 관계나 경쟁심이나 우연을 미리 초월하고 있다.                 -아랑-   * 친구는 근심과 슬픔을 서로 나눠야 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 한 사람 또는 소수의 노예가 되지 말라. 만인의 노예가 되라. 그 때 당신은 만인의  친구가 될수 있다.                -키케로-   * 우정에 있어서의 법칙은 의심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애정은 뒷문으로 달아난다는 것이  다.                            -칸보아모르-   *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성서-       * 우정은 부부 사이에 있어서의 애정과 흡사하다. 피차의 결점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해에, 이해보다는 내용에, 내용보다는 사랑에 입각해 있을 때에 건전하고 그 사랑은 맹목이라는 바탕에서도 존립한다.    -박두진-   * 충고하여 벗을 선도하고, 듣지 아니하면 곧 중지하여, 스스로 욕됨이 없게 하는 것이 참된 우정이다.     -공자-   * 수많은 연인의 정을 모아도 // 내 가슴에 타는 우정의 불에는 미치지 못한다.   항상 이 가슴에 꺼지는 일 없이 / 내 혈맥은 따뜻한 때에 물결친다.                                         -바이런-   * 우정은 천국이며, 우정의 결여는 지옥이다. 우정은 삶이며 우정의 결여는 죽음이다.                                         -로가우-   * 사실 잃어버린 동료를 대신할 만한 것은 절대로 아무것도 없다. 오랜 벗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통된 그 많은 추억, 함께 당한 그 많은 괴로운 시간, 그 많은 불화, 화해, 마음의 격동이라는 보물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우정들을 다시 만들어 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참나무를 심었다고 오래지 않아 그 그늘 밑에서 쉬기를 바란다는 것은 헛된 일이다.     -상덱쥐페리-   * 우정은 참으로 소중한 가치의 하나다. 정다운 친구와 마주 앉아서 허물없이 대화를 즐기는 시간은 인생의 즐거운 시간이다. 진정한 친구란 그리 흔한 게 아니다. 인생의 지기는 참으로 드물다.    -안병욱-   사막이나 사막이 배경이 되는 아름답고 좋은 명언     *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 저 머나먼 아라비아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하게 될지니 /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자탤르 다시 배우지 못하건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 생명의 서-     * 모래의 사막 -- 거부된 생명. 거기에는 꿈틀거리는 바람과 더위 밖에 없다. 모래는 그 늘속에서 빌로오드처럼 보드러워지고 저녁에는 불에 타오르고, 아침에는 재와 같아진다. 언덕과 언덕 사이에는 하얀 골짜기가 있다.  -A.지이드; 지상의 양식-   * 고대의 나라로부터 온 한 여행자는 말했다.- "두 거대하고 동체 없는 돌 다리가 / 사막에 서 있다. 그 옆에, 모래 위엔 / 부서진 얼굴이 반쯤 묻힌 채 묻혀 있고 그 얼굴의 찡그린, / 주름잡힌 입술, 그리고 싸늘한 명령의 냉소는 / 그 조각가가 왕의 정열 없는 물체에 찍혀져, / 그 정열을 비웃은 손과, 그 일을 시켰던 심장보다 더 오래 살아 있다. / 그리고 대좌엔 이런 말이 보인다. / 내 이름은 오지만디어스, 왕 중 왕이로다. / 나의 업적을 보라. 너희 강대한 자들아, 그리고 절망하라! / 아무것도 그 옆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 거대한 잔해의 / 부식 주위로는, 끝없이, 풀 한 포기 없이 / 쓸쓸하고 평평한 사막이 저 머얼리 뻗쳐 있다."  -셀리; 오지만디어스-   * 죽음처럼 쓸쓸하고, 그리고 달의 죽은 빛에 비치어 그의 눈앞에 전개되어 있는 사막.                                     -페르라게르크비스트; 바라바-   * 알파카 무성하여 구렁이 득실거리는 사막, 바람에 물결치는 푸른 벌판.                                            -지드; 지상의 양식-   * 달빛을 받으면 모래는 분홍빛이 돈다. 우리는 우리의 빈곤을 느끼지만, 모래는 분홍빛이다. 그러나 보초의 수하 소리(누구야!)가 세상의 감정을 다시 회복시켜 준다. 한 우격대가 전진하는 중인 까닭에 온 '사하라'가 우리들의 그림자에 놀라고 우리에게 수하를 하는 것이다.    - 상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 여기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 / 바위만 있고 물이 없다. 그리고 모랫길 / 길은 산 사이로 꾸불꾸불 돌아 오르는데 그 산들도 물이 없는 바위만의 산 /  물이 있다면 우리는 멈춰 마실 것을 / 바위 사이에선 사람들이 멈추어 생각할 수도 없다. /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 속에 빠져 / 바위 사이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 뱉는 이빨이 썩은 산의 아가리 / 여기서는 서지도 눕지도 앉지도 못한다. / 산 속엔 정숙조차 없다. / 오직 매마른 불모의 뇌성뿐 / 산 속에 고독조차 없다. / 오직 갈라진 토벽 집 문에서 빨간 성난 얼굴들이 냉소하며 으르렁댈 뿐 / 물이 있고 바위가 없다면------.                                         -엘리어트; 황무지-   * 오 표류하는 모래의 광야, 오 고독한 대상! / 사막의 심장은 분열돼 있어 / 아무도 아는 이가 없구나.    -D.R.아키코우츠; Kismet-   * 무어라 할 수 없는 혼돈된 잡음 / 사막의 목소리는 결코 잦아지지 않는구나!                                             -J.호그; 안네스코트 부인에게-    * -----사방 허허 사막에 / 낙타의 등이랑 뜨거운 사철   -고원; 운하-   * 바다같이 길 없는 무한한 사막의 황폐.   -롱펠로우; 에반제린-   * 오! 저 사막이 나의 안주지였더라면!    -바이런;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   * 사막의 침묵과 고독-----.     -비베카난다; 칼마요가-   * 하나의 사상에 인도되어 진보하는 시대는 사막 속을 진군하는 군대와 같다. 낙오자야말로 불행할진저! 후방에 머무는 것은 곧 죽음이다.  -비니; 시인의 일기-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이육사; 절정-   *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이육사; 꽃-
2    [노벨문학상과 시인]비평가들로부터 절대적 인정을 받은 시인 댓글:  조회:3212  추천:0  2017-10-29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페르 라게르크비스트(Pär Lagerkvist, 1891년 5월 23일 ~ 1974년 7월 11일)는 스웨덴의 소설가·시인이다. 웁살라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일찍부터 프랑스 회화(繪畵) 영향을 받아 표현파 문학을 제창했으며 1914년 시집 로 시단에 데뷔했다. 대전(大戰)을 경험한 그는 시문집(詩文集) 에서 절망에 가까운 고뇌를 노래했으나 그 후 시문집 , 시집 등으로 빛과 자신을 되찾고, 수필 , 소설집 으로 긍정에 이른다. 이는 그가 인간이 갖는 파괴와 건설의 상반된 욕망은 모두 깊숙한 밑바닥에 있는 어둠 속에 뿌리박고 있으며 이 어둠의 세계야말로 생명의 근원(根源)이라고 보는 경지에 도달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는 에세이 으로 이를 확인했다. 그동안에도 그는 나치스 세력이 강해지자 소설 으로 폭력 긍정의 확대에 항의하고 다시 대전 중에는 소설 로 악의(惡意)와 소극주의에 대결했다. 1950년에는 명작 를 썼고, 1951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에도 소설 , 을 비롯하여 그 밖에 시집도 내고 있다. 그는 과작(寡作)으로 장편은 없고 작품에는 태작이 없으며 문체는 모자이크를 연상케 하는 거친 수법으로 특이한 힘을 지니고 있다. 희곡 작가로서도 그는 당대의 일인자라고 불리며 , , , 등의 명작이 있다.   (스웨덴)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출생 1891. 5. 23, 스웨덴 벡시외 사망 1974. 7. 11, 스톡홀름 국적 스웨덴 요약 스웨덴의 소설가·시인·극작가.   20세기 전반 스웨덴 문학계에서의 주요인물로 195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작은 마을에서 전통적인 종교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후에 현대의 과학적 사고를 받아들이고 선조의 종교와 단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년기에 받은 영향은 그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어 〈문학예술과 회화예술 Ordkonst och bildkonst〉(1913)이라는 선언문에 나타나듯이 예술과 문학의 급진주의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극장 Teater〉(1918)과 3편의 단막극인 〈고통스러운 시간 Den Svare Slunden〉에서도 그 비슷한 모더니스트의 관점을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쓴 작품 〈분노 Ångest〉(1916)에 퍼져 있던 극단적 염세주의는 〈영원의 미소 Det eviga leendet〉(1920)와 자전적 소설 〈현실의 손님 Gät hos verkligheten〉(1925)을 시작으로 서서히 진정되어, 독백체 산문인 〈삶에 대한 승리 Det besegrade livet〉(1927)에서 마침내 인간에 대한 신뢰를 선언하게 되는데, 이는 후기 작품의 긍정적 출발점이 되었다. 1930년대초 폭력에 대한 새 법령이 선포되었을 때 그는 곧 그것의 위험성을 알아차렸다. 후에 극화된 산문 〈형리 Bödeln〉(1933)는 세계의 끊임없는 잔인성에 대한 항거를 보여준다. 〈혼없는 사나이 Mannenutan själ〉(1936)라는 희곡 역시 파시즘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1940년대에는 때로 '무대성가극'이라고도 부르는 가장 독특한 희곡인 〈인간을 살게 하라 Låtmänniskan leva〉(1949)를 썼는데 이는 전역사를 볼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동료를 심판하고 죽게까지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그가 스웨덴 비평가들로부터 절대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그의 최초의 베스트셀러였던 〈난쟁이 Dvärgen〉(1944)를 발표하고 나서였다. 그리고 〈바라바 Barabbas〉(1950)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Evening Land=Aftonkand〉(1975)는 레이프 시외뵈리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그의 66편의 시 또한 W. H. 오든이 운문으로 번역했다. 〈결혼축제 The Marriage Feast〉(1973)에는 19종류의 단편 소설이 영어로 번역되어 들어 있다.
1    [노벨문학상과 시인] - "새로운 시"의 동의어를 만들어낸 시인 댓글:  조회:3216  추천:0  2017-10-29
  (영국) - T. S. 엘리엇 .                출생 1888년 09월 26일 사망 1965년 01월 04일 대표작 〈황무지〉, 〈사중주〉, 〈칵테일 파티〉 등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하였다. 20세기 모더니즘을 이끈 대표적인 시인으로 염세적인 정서와 새로운 방식의 시적 기교로 독창적인 시 세계를 펼쳐 나갔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T. S. 엘리엇은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20세기 시와 비평 분야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다. 1922년 그의 시 〈황무지〉가 출판되었을 때, 이 작품은 '새로운 시'의 동의어로 여겨졌고, 그 '새로운 시'의 의미가 '모더니즘'을 지칭하게 되었을 때는 모더니즘 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현대시를 지배했다.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은 1888년 9월 26일 미국 미주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헨리 웨어 엘리엇은 사업가였으며, 어머니 샬럿 챔프 스턴스는 시인이었다. 엘리엇이 태어났을 때 부부는 40대였고, 엘리엇 위로 4명의 누나가 있었다. 시인이었던 어머니가 아이들 양육보다 문학이나 자선 활동과 같은 사회 활동에 열정적이었던 탓에 늦둥이였던 토마스는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 토마스가 자라면서 조숙하고 남다른 지적 능력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어린 아들에게 역사와 문학, 철학 등의 책을 읽히고 시를 쓰도록 독려했다. 모자는 문학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었고, 토마스는 평생 어머니와 편지를 나누고, 어머니에게 시를 바치는 등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은 후에는 인정받지 못한 시인이었던 어머니의 시극 《사보나롤라》에 서문을 붙여 출간해 주기도 했다. T. S. 엘리엇 유년 시절에는 세인트 루이스의 스미스 아카데미와 뉴잉글랜드의 밀턴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1906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해 철학과 불문학을 전공했다. 4년의 학부 과정을 3년에 마쳤으며, 이때 프랑스 상징주의, 특히 라포르그1) 에 심취했다. 졸업 후 1년 만에 하버드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후에는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 독일의 마르부르크필리프스 대학을 거쳐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했다. 프랑스어, 독일어, 산스크리트어, 인도 철학, 독일 철학, 그리스 철학 등을 공부했으며, 아르튀르 랭보 등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15년, 시인이자 비평가인 에즈라 파운드의 추천으로 〈포이트리〉 지에 〈앨프리드 프루프록의 연가〉(이후 〈프루프록의 연가〉)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프루프록의 연가〉는 노년의 화자 프루프록의 내적 독백을 통해 현대 문명의 잔인성과 메마른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자아의 상실과 회복을 위한 자아 성찰을 그린 작품이다. 엘리엇은 비평가로서 '객관적 상관물'의 개념을 공식화시켰는데, 객관적 상관물이란 '어떤 특정한 정서를 나타낼 때 공식이 되는 일련의 사물, 정황, 사건'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이런 시적 방법론과 시인으로서의 주요 관심사와 정서는 초기 시인 〈프루프록의 연가〉에서부터 이후의 시들에 일관적으로 드러난다. 엘리엇은 1915년 비비언 헤이우드와 결혼했으며, 런던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서평을 잠시 쓰다가 이듬해 로이드 은행에 입사했다. 그는 약 9년간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시를 쓰고, 〈에고이스트〉 지의 부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프루프록의 연가〉를 보고 '최초의 현대적 작품'이라고 일컬었던 에즈라 파운드는 엘리엇이 시에만 몰두하기를 바랐고, 그를 후원하는 인물들을 모아 생활을 후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은행 일과 시작(詩作)을 병행하는 생활에 나름대로 만족해했다. 내성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에 신경쇠약 증상까지 있던 엘리엇에게 이 두 생활을 양립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현실 생활과 문학 생활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1922년 10월 엘리엇은 계간지 〈크라이테리언〉을 창간하고 편집을 담당했으며, 이 잡지에 〈황무지〉를 발표했다. 433행의 이 장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정신적으로 황폐화된 유럽을 황무지로 상징화한 것으로, 라틴어, 희랍어, 산스크리트어 등 6개 언어를 사용하고, 셰익스피어, 단테, 보들레르 등 고전 시구에 대한 암시와 인용을 비롯해 J. S.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J. L. 웨스턴의 《제의에서 로망스까지》 등에서 나타나는 제의, 성배 전설 및 신화와 종교적 관점, 성경 등을 토대로 한 수많은 상징으로 뒤덮여 있다. 역사와 문명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화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로 재편성하는 엘리엇의 작품 세계가 확립된 작품이다. 또한 엘리엇은 낭만성을 제거하고 철저하게, 병적일 만큼의 정확성과 논리성, 지적인 태도를 지니고 언어와 다양한 자료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시를 썼는데, 이는 그의 비평론적 태도이기도 하며, 이후의 소설, 희곡, 예술 비평의 주요 방식이 된다. 〈황무지〉가 발표되었을 당시 평론가들은 시의 난해함과 새로움에 당혹해 마지않았으나, 젊은이들은 오히려 엘리엇의 시에 담긴 염세적인 정서와 새로운 시적 기교에 열광했으며, 현대의 정신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엘리엇을 '시대의 대변인'으로 추앙했다. 1925년에 엘리엇은 로이드 은행을 그만두고, 파버 앤드 파버 출판사의 이사로 일했다. 1927년에는 영국 국교회로 개종하고 영국으로 귀화했다. 그리고 영국 국교도로서의 종교적 시각을 투영한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다. 〈재의 수요일〉(1930), 〈사중주〉(1943) 등이 그것이다. 또한 엘리엇은 이 시기부터 무대 상연을 고려한 시극2) 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시들은 시극으로 불리는 새로운 장르가 된다. 〈바위〉(1934), 〈대성당의 살인〉(1935), 〈칵테일 파티〉(1950) 등이 대표적이며, 이 작품들은 연극으로도 공연되었다. 비평 분야에서도 엘리엇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문학적 취향을 재규정했다. 예술에 있어 낭만성을 배제하고 고도의 지적 사유를 좇으며, 존 던과 같은 형이상학파 시인들을 칭송한 그의 비평론은 빅토리아 시대 낭만주의 문학의 모호성과 도덕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대 고전주의의 비평 체계를 수립했다. 비평집으로는 《단테론》(1929), 《시의 효용과 비평의 효용》(1933), 《고금 평론집》(1936) 등이 대표적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엘리엇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계속 글을 쓸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당시 그는 시극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시극 〈가족의 재회〉가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고, 전쟁 때문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회의감에 빠져 있었다. 전후의 혼란스런 상황, 정신질환 성향이 있던 아내와 불화 끝에 결별을 한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30년 전부터 지녀온 유럽 문명에 대한 회의, 미래에 대한 염세적인 관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계속 시를 써 나갔고, 말년의 걸작 〈사중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전쟁 후 그는 엄청난 명성을 누리며 행복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1950년 영국에서 발행된 〈칵테일 파티〉 초판 표지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해 영국의 문화훈장인 메리트 훈장을 받으면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그의 시극들은 계속 무대에 올려졌고, 특히 말년의 대표작 〈칵테일 파티〉가 브로드웨이에서 200회 이상 공연 기록을 세우는 등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1947년 아내 비비언이 세상을 떠난 뒤, 1957년에는 8년간 비서로 일하던 29세의 발레리 플레처와 재혼했다. 1965년 1월 4일, 영국 런던의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고향 이스트 코커의 성 마이클 교회에 안장되었다. 2년 후 영국 정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의 구역에 엘리엇의 기념석을 놓았다. =============================     출생 1888. 9. 26, 미국 미주리 세인트루이스 사망 1965. 1. 4, 런던 국적 미국/영국 요약  같은 시와 · 등의 희곡을 통해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했다.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0세기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시어·문체·운율 등의 실험으로 영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일련의 평론들을 통해 과거의 정통적 견해를 타파하고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다. 엘리엇의 편집자로서의 활동은 그가 주로 관심을 쏟은 일에 부수적인 것이었지만, 그가 맡았던 계간 비평지 은 당시 가장 탁월한 국제적인 비평지였다. 엘리엇은 제2차세계대전 중에 발표한 로 당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영국의 시인이자 문학가로 인정받아 1948년 메리트 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목차 접기 개요 가정 배경과 초기생애 초기의 출판물 〈황무지〉와 비평 후기의 작품활동과 영향   개요 〈황무지 The Waste Land〉(1922) 같은 시와 〈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Cathedral〉(1935)·〈칵테일 파티 The Cocktail Party〉(1950) 등의 희곡을 통해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했다. 성공적인 뮤지컬 〈캣츠 Cats〉는 〈늙은 주머니쥐의 고양이에 관한 책 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1939)을 기초로 한 극으로, 1981년 영국에서 막을 올렸고 1982년 뉴욕에서 상연되었다. 시인·극작가·문학평론가·편집인으로서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0세기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시어·문체·운율 등의 실험으로 영시(英詩)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일련의 평론들을 통해 과거의 정통적 견해들을 타파하고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다. 또한 사회적·문화적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했으며, 페이버앤드페이버출판사의 이사로서 젊은 시인들을 관대하면서도 분별력있게 도와주던 후원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발표된 〈4개의 4중주 Four Quartets〉로 당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영국의 시인이자 문학가로 인정받아 1948년 메리트 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가정 배경과 초기생애 엘리엇의 첫 미국 조상은 앤드루 엘리엇으로 그는 영국 서머싯 이스트코커의 구두제조공이었으며, 1670년 보스턴으로 이주했다. 할아버지인 윌리엄 그린리프 엘리엇 목사는 1834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즉시 보스턴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했다. 그는 열렬한 연방주의자·유니테리언교도였으며 노예제도가 허용된 주에서 활동했던 반노예주의자로서, 워싱턴대학교를 창설했으며 그가 반대하지만 않았다면 그 대학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을 것이다. 1872년 그는 워싱턴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아버지인 헨리 웨어 엘리엇은 가문의 전통을 깨고 사업을 했다. 어머니인 샬럿 챔프 스턴스는 어느 정도 이름이 났던 다작(多作) 시인으로서 시아버지의 전기를 썼다. 또한 15세기 이탈리아의 종교개혁자인 사보나롤라의 순교를 소재로 한 시극을 짓기도 했는데, 1926년 그녀의 아들이 이 시극에 서문을 붙였다. 엘리엇이 태어날 무렵, 그 가문은 54년 동안이나 미주리 주에만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남부나 서부의 영향을 배제하고 뉴잉글랜드의 정치적·신학적 문화를 보존하고 있었다. 엘리엇은 말년에 자신이 보스턴이나 뉴욕·런던에서 태어나지 않고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뉴잉글랜드인이었다. 엘리엇의 가정 배경은 시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실무적'이 되거나 사업에 투신하지 않은 채 당시 가능했던 가장 광범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세인트루이스의 스미스 아카데미를 다닌 후 매사추세츠 주의 대학 예비학교인 밀턴 아카데미를 다녔고, 그곳을 졸업한 뒤 1906년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했다. 보통 대학 수학 기간이 4년이었지만 그는 3년 만에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하버드대학교 재학 당시 그에게 깊은 감화를 준 사람은 철학가이자 시인인 조지 산타야나와 비평가인 어빙 배빗이었다. 그는 배빗으로부터 반낭만주의적 태도를 흡수했는데, 훗날 영국 철학자들인 F.H. 브래들리와 T.E. 흄의 사상을 전공함으로써 반낭만주의적 태도가 더욱 심화되어 그의 일생 동안 지속되었다. 1909~10년에 그는 하버드대학교 철학과 조교를 지냈다. 1910~11년은 20세기 초반의 위대한 시인인 엘리엇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그 해를 보내면서 소르본대학교에서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 강의를 들었고, 알랭 푸르니에와 함께 시를 읽었는데, 그의 '가르침'으로 프랑스어를 완전히 익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샤를 보들레르에서 쥘 라포르그를 거쳐 스테판 말라르메에 이르는 상징주의 시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1914년 처음으로 에즈라 파운드를 만났다. 1946년 〈포이트리 Poetry:A Magazine of Verse〉에 그의 정치성을 무시한 채 파운드의 문학 경력을 옹호하는 글을 기고했는데, 그 글에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10년 동안 젊은 미국 시인들이 처했던 무미건조한 문학적 환경을 묘사했다. 엘리엇과 파운드는 모두 외국 시인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파운드는 투르바두르(중세 남프랑스의 음유시인)와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인들을, 엘리엇은 라포르그와 단테를 사숙(私淑)했는데, 이들은 엘리엇이 자신의 문체를 발견하는 데 있어서 존 웹스터와 존 던 이상으로 영향을 주었다. 1911~14년 그는 하버드대학교로 돌아와 인도철학을 전공하고, 탁월한 학자인 찰스 랜먼으로부터 산스크리트를 배웠다. 1913년 그는 브래들리의 〈현상과 실재 Appearance and Reality〉를 접하게 되었고, 1916년 유럽에서 〈F.H. 브래들리의 철학 지식과 체험 Knowledge and Experience in the Philosophy of F.H. Bradley〉이라는 표제의 논문을 완성했다. 이 논문은 1964년에야 비로소 출판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박사학위 취득에 필요한 최종 구두시험을 치르기 위해 하버드대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초기의 출판물 엘리엇은 편집인, 극작가, 문학비평가, 철학적 시인이라는 4가지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아마도 당시 영어권 시인들 중 가장 해박한 시인이었을 것이다. 대학 재학시절에 쓴 그의 시들은 '문학적'이고 관습적이었다. 그의 최초의 중요한 출판물이며 영어로 씌어진 '모더니즘'의 첫 걸작은 〈J. 앨프레드 프러프록의 연가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였다. "자 우리는 가세, 그대와 나,/저녁은 마취되어 수술대 위에 있는 환자처럼/하늘에 몸을 뻗어 누워 있는 이때……" 엘리엇은 이 시의 복사본을 그의 친구인 콘래드 에이컨에게 주었고, 그는 이 시를 에즈라 파운드에게 전했으며, 파운드는 다시 이 시를 〈포이트리〉지의 편집장인 헤리엇 먼로에게 보냈다. 먼로가 그것이 시의 장르에 속한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1년 이상이나 발표가 늦어지게 되었다. 비록 파운드가 1908년에 개인적으로 소책자 〈A lume spento〉를 이미 출간했었지만, 〈J. 앨프레드 프러프록의 연가〉는 이 문학적 개혁가들이 실험 단계를 넘어 완성한 첫 시였다. 이 시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윌리엄 워즈워스의 〈서정 민요집 Lyrical Ballads〉(1798)과 같이 과거와 철저한 단절을 이루었음을 보여주었다. 20세기 시의 혁명은 엘리엇의 첫 시집 〈프러프록 외(外)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를 출간한 1917년에 성숙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표제시 〈프러프록〉 이외에도, 이 책에는 〈서시 Prelude〉·〈어느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 등의 원숙한 작품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시의 혁명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 혁명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콜리지와 워즈워스의 낭만주의 혁명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엘리엇과 파운드는 이 18세기 시인들인 콜리지와 워즈워스처럼 시어를 개혁하면서 혁명을 시작했다. 워즈워스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엘리엇은 교육받은 사람이 쓰는 '현학적이지도 않고 천박하지도 않은' 시어를 추구했다. 그는 스윈번에 대해 "그렇듯 탁월한 시에서 최초로 의미 없는 소리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1년 동안 그는 하이게이트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쳤다. 1917년 그는 잠시 로이드은행의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그동안에도 그는 문학비평과 전문적인 철학분야에서 많은 평론을 썼다. 1919년 〈시집 Poems〉을 발표했는데, 무운시 형식으로 씌어진 명상적 내적 독백시 〈제론션 Gerontion〉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시는 영시 사상 유례없는 것이었다. 〈황무지〉와 비평 1922년 〈황무지〉가 출판됨으로써 엘리엇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5부로 구성된 이 시는 서유럽의 거대한 현대도시들의 20세기적 감성의 단편적인 경험을 반영한 '수사적 불연속성'의 원칙에 따라 전개되어간다. 엘리엇은 스스로를 영원한 도시가 타락하여 생긴 세속화된 도시의 시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황무지〉의 궁극적인 주제이며, 지속적인 수사학적 전환과 대조적인 문체의 병행으로 주제가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 시는 초기의 비평가들이 예측했던 대로 훌륭했던 과거와 타락한 현재를 단순히 대조한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도덕적 위엄과 도덕적 타락을 시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인식한 것이다. 원래 800행쯤 되었던 이 시는 에즈라 파운드의 제의로 433행으로 줄었다. 〈황무지〉는 엘리엇의 가장 유명한 시이지만 가장 위대한 시는 아니다. 엘리엇은 시인비평가는 불가피하게 '계획적인 비평'(programmatic criticism)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즉 이는 역사적 학문과는 매우 다르게, 시인으로서 시인 자신의 관심사를 표현하는 비평을 말한다. 의식적으로 의도했든 아니든 이러한 종류의 비평은 시인비평가 자신의 시가 이전 세대의 비평기준이 지배적인 문학적 풍토에서 발표된 경우보다는 더 잘 이해되고 감상될 수 있는 분위기를 창출했다. 엘리엇의 첫 비평집 〈거룩한 숲 The Sacred Wood〉(1920)에 실려 있는 평론 〈전통과 개인의 재능 Tradition and Individual Talent〉은 워즈워스의 〈서문 Preface〉만큼 역사상 중요하고 역사적으로 유사한 점이 있다. 엘리엇은 "전통은 반드시 시인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지, 과거에 씌어진 작품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참신한 것이 반복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호메로스에서 현재에 이르는 모든 유럽 문학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영어로 글을 쓰는 시인은 과거의 시대나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자료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전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여러 언어로 인용하고, 다른 시인의 문체를 심각하게 패러디했던 개혁적인 참신성을 독자에게 수용시킨다는 점에서 '계획적'이다. 또한 〈거룩한 숲〉의 〈햄릿과 그의 문제들 Hamlet and His Problems〉에는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관계 이론이 설명되어 있다. "예술의 형식에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 상관관계', 즉 그 독특한 감정을 나타내도록 관습적으로 정해진 한 무더기의 사물들, 상황, 일련의 사건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각적인 체험으로 끝나는 그 외적인 사실들이 주어질 때 감정이 즉시 환기된다." 엘리엇은 그 어구를 산타야나, 미국의 화가이자 작가인 워싱턴 올스턴으로부터 차용해 자신의 일반적인 시이론에 알맞게 적용시켰다. 그것은 단어와 대상과의 대응을 중시함으로써 후기 빅토리아 시대 수사법의 모호성을 수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거룩한 숲〉이 출판된 다음해에 처음 발표된 다른 두 평론들은 엘리엇의 비평 기준을 거의 완성시킨 것이다. 이 〈형이상파 시인 The Metaphysical Poets〉·〈앤드루 마블 Andrew Marvell〉은 〈비평선집 1917~32 Selected Essays, 1917~1932〉(1932)에 실려 있다. 이 평론에서 그는 영시의 계급적 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17세기 형이상파 시인들을 최상의 위치에 두고, 18, 19세기 시인들의 위상을 격하시키고 있다(마블, 형이상파 시인). 엘리엇의 2번째 유명한 어휘인 '감수성의 분열'도 이 비평문에 나와 있는데, 이 말은 존 던과 앤드루 마블 이후 영시에서 일어났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창안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상과 감정의 조화로운 일치를 상실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졌다. 이 어휘는 비난받기는 했지만 이러한 어휘가 생겨나게 된 역사적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더욱이 엘리엇과 파운드의 시는 17세기의 몇몇 시인들에게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엘리엇 비평의 최초의 단계, 즉 계획적 단계는 〈시의 효용과 비평의 효용 The Use of Poetry and the Use of Criticism〉(1933)이라는 하버드대학교에서의 찰스 엘리엇 노턴에 대한 강연으로 마무리짓게 된다. 이보다 얼마 전에 그는 신학과 사회학으로 관심의 폭을 넓혔으며, 3권의 짧은 비평집들인 〈램버스절(節) 이후의 명상 Thoughts After Lambeth〉(1931)·〈그리스도교 사회의 사상 The Idea of a Christian Society〉(1939)·〈문화 정의론 Notes Towards the Definition of Culture〉(1948)은 그결과를 보여준다. 이러한 비평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걸작인 〈단테 Dante〉(1929)와 더불어 문학의 기본영역을 신학과 철학으로 확대했다. 즉 어떤 작품이 시인지 아닌지는 문학적인 기준으로 결정해야 하지만, 위대한 시인지 아닌지는 문학적인 것보다 더욱 높은 기준으로 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비평과 시는 너무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통합된 지성과 감성의 산물이므로 이들을 따로 떼어 논의하기는 어렵다. 단테에 대한 위대한 평론은 엘리엇이 영국성공회의 고교회파가 된 지 2년 후에 발표되었다(1927). 그해에 그는 또한 영국 국민으로 귀화했다. 개종한 뒤에 쓴 첫 장시는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1930)로, 그의 이전 시들과는 전혀 다른 문체로 씌어진 종교적 명상시이다. 사실상 엘리엇의 시들은 모두 그 자신이 쓴 작품들임이 분명하지만 엘리엇은 절대로 같은 주제나 형태의 시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재의 수요일〉은 아직도 시는 자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엄격히 비종교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시절에는 호평받지 못했다. 특히 에드먼드 윌슨 같은 비평가가 그러했듯이, 개인의 환멸감을 표현한 것으로 잘못 해석되기도 했다. 후기의 작품활동과 영향 엘리엇의 걸작은 〈4개의 4중주〉이다. 이 작품은 각 〈4중주〉가 모두 완성된 시들이기는 해도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1935~41년에 간격을 두고 출간된 이 4편의 시들은 1943년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으로 엘리엇은 194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희곡으로는 1926년 출간되었고 1934년 초연된 〈스위니 아고니스테스 Sweeney Agonistes〉가 엘리엇의 첫 작품이며, 1958년 초연되었고 1959년 출판된 〈원로 정치가 The Elder Stateman〉가 마지막 작품인데, 그의 서정시나 명상시보다 뒤떨어진다. 세속적인 소재를 다룬 극이라도 무의식적으로 종교를 찾던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야 하며, 사실상 모든 극은 자기인식·화합·정화로 향하는 종교적 발전구조를 갖고 있다는 엘리엇의 신념 때문에, 그는 극을 다른 시형들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의 극들은 모두 그가 고안한 무운시이며, 그 의미는 그 운율적 효과와 분리되어서는 이해되지 못한다. 즉 그는 '시극'을 다시 대중무대에 올려놓은 것이다. 〈가족의 재회 The Family Reunion〉(1939)·〈성당의 살인〉은 그리스도교적 비극들로 전자는 복수 비극이며, 후자는 교만의 죄악을 다루고 있다. 다른 극들은 희극인데, 플롯은 그리스의 극에서 가져온 것이다. 가장 성공적인 극작품으로 1949년 초연되었고 1950년 출판된 〈칵테일 파티〉를 들수 있는데 이 극의 기본적인 줄거리는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 Alcestis〉이다. 엘리엇의 편집자로서의 활동은 그가 주로 관심을 쏟은 일에 대한 부수적인 것이었지만, 그가 맡았던 계간 비평지 〈크라이테리언 The Criterion〉(1922~39)은 당시 가장 탁월한 국제적인 비평지였다. 그는 페이버앤드페이버출판사의 '이사', 즉 사무직도 수행하는 편집인으로서 1920년대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했다. 엘리엇의 사후에 출간된 비평집 〈비평가에 대한 비평 외(外) To Criticize the Critic, and Other Writings〉(1965)에는 매우 중요한 2편의 평론이 수록되어 있다. 〈비평가에 대한 비평〉은 평론으로, 자신의 문학비평에 대한 진지하고도 겸손한 평가이다. 〈미국 문학과 미국어 American Literature and the American Language〉는 미국 영어가 독립된 언어라는 국수주의적인 통념을 다루고 있으며, 그와 같은 확신으로 영국문학과 미국문학이 하나의 문학에서 생겨난 것임을 논하고 있다. 18세기 중반이 존슨 시대라고 불리고 있듯, 20세기 전반은 아마도 역사가들에게 '엘리엇의 시대'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새뮤얼 존슨은 신고전주의 시대의 마지막에 활동하면서 그 시대를 요약했지만, 엘리엇은 비평가 겸 시인으로서 자신의 시대를 창조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사생활을 가능한 한 표면에 드러내지 않았다. 1915년 비비언 헤이우드와 결혼했고, 1933년 이후 그녀가 정신질환에 걸리자 그들은 별거했으며, 그녀는 1947년 죽었다. 1957년 1월 그는 발레리 플레처와 재혼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와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 -------------------    황        무        지   T.S 엘리엇 의 장시 ((황무지))는 20세기 정신문화사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으로 이렇게 시작된다.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일깨운다 차라리 겨울에 우리는 따뜻했다 망각의 눈이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작은 생명만 유지했으니. 황무지는 미국문학사의 과정 속에서 일대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준다. 뿐만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모나라 그리고 세계와 모든 문학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제공한다.  휘트먼의 시((풀잎), ((내 자신의 노래))가 미국 민주주의 정신과 자연에의 사상을 건강하고  폭넓게 담아 영향을 끼쳤다면 에리엇은 20세기 대표적인 문예사조인 모더니즘을 자신의  시작품과 해박한 이론으로 여실히 밑바탕을 다져 놓은 시인이다. 1922년에 발표된 이 장시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 전역을 강타한 죽음과 절망의 황폐함,  그리고 저 세계문화의 붕괴를 새로운 시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곳곳에 널려있는 문명의 파편들을 잘못된 역사의 쓰레기더미인 양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시는 절묘한 음악성 순간적인 기억에로의 활기장치, 문학적인 상상력을 풍부하게 펼쳐놓는다.  원래 이 시는 엘리엇이 미국에서 영국으로 귀화한 직후 썼는데 용양중인 스위스의 로잔이란 도시다.   자동차 사고의 휴유 증으로 로잔의 한 요양소에서 정신의학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의 신경장애  현상을 통해서 시인은 전후 유럽문명의 황폐함을 처절하게 깨달은 나머지 방대한 주석과 시적  사건들의 담긴 ((황무지))를 노래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엇은 이 책의 첫 구절에서 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언급했을까?  일 년이 열두 달인데 하필이면 무슨 이유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 이라고 단정지어버린 것이었을까?  미국이나 유럽 또한 4월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고 꽃이 피는 봄이 아닌가.  왜 잔인하다고 했을까? “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라는 시구의 비밀을 알고 나면 사실상 ((황무지)) 전편의 궁금함이 눈 녹 듯 사라진다.  이 시를 쓸 당시 스위스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던 엘리엇은 어느 날 산책을 나선다.  아. 그런데 읻게 무엇인가? 눈 쌓인 알프스 봉우리들을 바라보면서 사색에 잠겨 걸음을 옮기던  시인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보게 된다. 때는 바야흐로 4월 겨울 동안 쌓인 눈들이 녹고 있었는데 시인은 자신의 바로 앞에서 제1차  세계대전, 그러니까 지난 전쟁의 잔해를 발견한 것이다.  녹슨 철모와 총칼, 죽은 시체들의 뼈가 눈 덤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목격한다.  참으로 잔인한 주검들 차라리 눈을 감고 있을 걸, 봄이 오지 않았으면 눈이 녹지 않았을 것을  망각 속에 영원히 파묻혀 있어도 좋을 그것들이 들어온 것이 아닌가.  시인은 그러한 장면을 목격하고 한숨을 쏟아 냈던 것이다. 시인은 잔인한 4월을 노래한다.  “아아. 봄이 오는 4월은 잔인하구나! 차라리 봄비가 내리지 않는다 면 전쟁과 잔인한 기억의  잔해들이 모두 파묻혀 있었다면 몰랐을 것인데,” 엘리엇은 그런 괴로운 생각을 하면서 자신과 독자들에게 묻는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들은 따듯하게 했었다.”라는 역설 혹은 역발상적인 표현으로 길게 한숨을 짓는다.   메마른 돌 틈엔 물소리도 없다. 다만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려므나) 그러면 나는 아침에 너를 뒤따른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마주서는 그림자와는 다른 무엇을 보여주리라 오늘날 인류의 문명을 ‘기억과 욕망“이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서 뿌리 채 흔들리는  그것으로 파악한 엘리엇 그는 전쟁과 문명으로 상징되는 인간들의 삶의 현장을 ’돌더미  쓰레기‘로 비유하다가 자욱한 안개 속의 런던교(런던 브리지)를 이렇게 묘사한다. 전쟁 후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마저 ’죽은 사람‘으로 바라본다. 공허의 도시 겨울 새벽 갈색 안개 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런던브리지 위로 흘러간다. 저렇게 많이 주검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시는 1920년대 영미시의 모더니즘을 대표한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엔 1930년대에 들어와  모더니즘을 본격적으로 수입하게 되는데 김기림. 김광균. 정지용에 이어 1940년대  중반기((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란 동인지를 펴낸 김수영과 박인환 등이 모더니즘의 깃발을 내건다.  모더니즘은 과거의 전통과 형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미학을 내세운 문예운동의 하나인데 물론  ‘주지주의’란 말을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귀납법’을 창시한 것으로 유명한 F.베이컨인데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에겐 오성(悟性)에 반하는 비이성적인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전통을 이어받은 20세기의 시인 엘리엇은 ‘지적 정보’ 가 대거 출현하는  주지주의적 모더니즘을 크게 옹호하거나 강조한 시인으로 나선다.  특히 그의 시의 경우 언어적 기법에선 감정억제와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한 이미지즘을 선호한다.  이미지란 ‘심상(心象)이란 것인데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감정을 ‘눈에 보이듯이  그린다.’는 뜻에서 ‘마음의 그림’으로 번역할 수 있는 어휘가 아닐까?  영국으로 귀화한 엘리엇은 런던 은행에 취직, 거기에서 남은 돈으로 ‘크라이티 어리언’이란  출판사를 차려 유명한 ((황무지))를 간행하기에 이른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감수 아래에서 출간을 하게 되는데 엘리엇이  원래 썼던 원고의 반절이 바로 파운드의 붉은 색연필로 지워져 나간다. “고전이란 말을 최대한 압축시켜 정의를 내린다면 그것은 ‘원숙(圓熟)이라는 말일 것이다.  고전은 문명이 원숙하고 언어와 문학이 원숙할 때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고 원숙한 정신의  소산이다.”라는 담론을 시종일관 엘리엇은 강조한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시로 평가를 받은((황무지))로 1948년에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작품의 감동은 전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다고 할 것이다.  엘리엇이 목격한 ’가장 잔인한 4월‘이 다시 오지 않을까 조바심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 ======================= /////////////////////////////////// 엘리어트 1888 - 1965   금세기 최고의 시인이며 비평가, 극작가로 꼽힌다.   시인·극작가·문학평론가·편집인으로서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0세기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시어·문체·운율 등의 실험으로 영시(英詩)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일련의 평론들을 통해 과거의 정통적 견해들을 타파하고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다. 또한 사회적·문화적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했으며, 페이버앤드페이버출판사의 이사로서 젊은 시인들을 관대하면서도 분별력있게 도와주던 후원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발표된 〈4개의 4중주 Four Quartets〉로 당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영국의 시인이자 문학가로 인정받았다.     황무지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I. 죽은 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슈타른버거 호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랑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들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이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어려서 사촌 태공집에 머물렀을 때   썰매를 태워 줬는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죠,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산에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에 갑니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인자여, 너는 말하기는 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그 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바람은 상쾌하게 고향으로 불어요   아일랜드의 님아 어디서 날 기다려 주나?"     '일년 전 당신이 저에게 처음으로 히아신스를 줬지요 다들 저를 히아신스 아가씨라 불렀어요'   -하지만 히아신스 정원에서 밤늦게 한아름 꽃을 안고 머리칼 젖은 너와 함께 돌아왔을 때   나는 말도 못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빛의 핵심인 정적을 들여다보며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     유명한 천리안 소소스크리스 부인은 독감에 걸렸다. 하지만   영특한 카드 한벌을 가지고 유럽에서 가장 슬기로운 여자로 알려져 있다.   이것 보세요, 그네가 말했다. 여기 당신 패가 있어요. 익사한 페니키아 수부군요. (보세요, 그의 눈은 진주로 변했어요.)   이건 벨라돈나, 암석의 여인 수상한 여인이에요. 이건 지팡이 셋 짚은 사나이, 이건 바퀴 이건 눈 하나밖에 없는 상인   그리고 아무것도 안 그린 이 패는 그가 짊어지고 가는 무엇인데 내가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교살당한 사내의 패가 안보이는군요. 물에 빠져 죽는 걸 조심하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군요. 또 오세요. 에퀴톤 부인을 만나시거든   천궁도를 직접 갖고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요새는 조심해야죠.     현실감 없는 도시,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밑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런던 교 위로 흘러갔다.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음이 망쳤다고 나는 생각도 못했다.   이따금 짧은 한숨들을 내쉬며 각자 발치만 내려보면서 언덕을 넘어 킹 윌리엄 가를 내려가   성 메어리 울노스 성당이 죽은 소리로 드디어 아홉시를 알리는 곳으로.     거기서 나는 낯익은 자를 만나 소리쳐서 그를 세웠다.'스테슨!   자네 밀라에 해전때 나와 같은 배에 탔었지! 작년 뜰에 심은 시체에 싹이 트기 시작했나? 올해엔 꽃이 필까?   혹시 때아닌 서리가 묘상을 망쳤나? 오오 개를 멀리하게, 비록 놈이 인간의 친구이긴 해도   그렇잖으면 놈이 발톱으로 시체를 다시 파헤칠 걸세!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와 같은 자 나의 형제여!'       전쟁은 살인과 파괴로 인해 외부 세계를 황폐케 하듯이 인간의 내부 세계에도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이 내부의 전쟁 체험에 의해 비로소 전쟁의 황폐의 의미와 평화의 가면과 참다운 평화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이 시는 1차세계대전 후 유럽의 황폐를 유럽인들의 정신적인 황폐로써 조명하려는 강렬한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엘리어트도 길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 "지난 해 자네가 마당에 심은 시체는 싹트기 시작했나?  금년에는 꽃이 필 듯 하던가?" 하고 이 시에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의 시체에서 어떤 문명이 싹트고 어떤 꽃이 필 것인지는 유럽 문명의 과거 전통을 지켜보고, 절망하면서 뭄직이는 인간들의 회화나 유희, 또는 비즈니스나 전설, 그리고 미신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엘리어트는 이 시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1922년에 발표된 이 시는 전체가 5장으로 되어 있고 1장 죽은 자의 매장 2장 체스놀이 3장 불의 설교 4장 익사 5장 천둥의 말 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433행의 장 시이며   유럽인의 풍습, 전설 및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이해하기 힘든다. 첫머리의 "4월은 가장 잔인 달"로 시작되는 선명한 이미지나, "사람의 아들이여, 너는 말도 추측도 할 수 없다."로 시작되는 폐허 속의 인간 내부 세계의 이미지, 붙어다니는 죽음의 그림자의 이미지는 누구나 공감을 느낄 것이다.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만일 나의 대답이 저 세상에 돌아갈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내 생각한다면 이 불길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러나 내가 들은 바가 참이라면 이 심연에서 살아 돌아간 이 일찍이 없으니, 내 그대에게 대답한들 수치스러운 염려 없도다.     그러면 우리 갑시다, 그대와 나 지금 저녁은 마치 수술대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갑시다, 거의 인적이 끊어진 거리와 거리를 통하여 값싼 일박 여관에서 편안치 못한 밤이면 밤마다 중얼거리는 말소리 새어 나오는 골목으로 해서   굴껍질과 톱밤이 흩어진 음식점들 사이로 빠져서 우리 갑시다. 음흉한 의도로 싫증나게 질질 끄는 논의처럼 연달은 그 거리들은   그대를 압도적인 문제로 끌어 넣으리다. 아아, '무엇이냐'고 묻지는 말고 우리 가서 방문합시다.     방안에선 여인네들이 왔다 갔다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며   유리창에 등을 비벼대는 노란 안개, 저녁의 구석구석까지 혀를 핥고서   수채에 괸 웅덩이 위에서 머뭇거리다가, 굴뚝에서 떨어지는 그을음을 등에 받으며,   테라스곁을 살짝 빠져 껑충 한 번 뛰고선, 아늑한 10월달밤인 줄 알았던지, 집 둘레를 한바퀴 핑 돌고선 잠이 들어 버렸다.     유리창에 등을 비벼대며 거리를 미끄러져 가는 노란 안개에도 확실히 시간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만날 얼굴들을 대하기 위하여 한 얼굴을 꾸미는 데에도 시간은 있으리라, 시간은 있으리라.   살해와 창조에도 시간은 있으리라.   백번이나 망설이고 백번이나 몽상하고 백번이나 수정할 시간은 있으리라. 토스트를 먹고 차를 마시기 전에.     방안에서 여인네들이 왔다갔다.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며     정말 생각해 볼 시간은 있으리라. '한번 해 볼까?' '해 볼까?'하고 망설일 만한 시간은   한복판은 대머리가 벗겨진 내 머리를 끄덕이며 발을 돌려 계단을 내려갈 만한 시간은 (여인들은 말하리라, 저이 머리는 어쩌면 저렇게 벗겨진담.)     내 모닝코트, 턱까지 빳빳이 치받치는 내 칼라 화려하고 점잖지만 수수한 핀 하나로 그 것을 나타내는 넥타이 여인들은 말하리라. '참 저이 팔다리는 가늘기도 하지?'   한 번 해  볼까? 천지를  뒤흔들어 볼까?   이 일순간에도 시간은 있다. 일순간에 의하여 역전하는 결단과 수정의 시간을.     나는 이미 그 것들을 다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 저녁과 아침과 오후를 알고 있다.   나는 내 일생을 커피 스푼으로 되질해 왔다. 저쪽 어느 방에서 음악에 섞여   갑자기 낮아지며 사라지는 목소리들도 나는 안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감히 해 볼 것인가?     그리고 나는 이미 그 눈들을 알고 있다. 그 것들을 모두 알고 있다. 공식적인 문구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노려보는 눈들을   그리고 내가 공식화되어 핀 위에 펼쳐질 때 내가 핀 꽂혀 벽위에서 꿈틀댈 때   어떻게 나의 생활 나의 태도의 한토막 한토막을 비로소 모조리 뱉어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그 팔들을 알고 잇다. 그것은 모두 알고 있다. 팔지 낀 허옇게 드러나 팔들을 (그러나 램프 불에 보며, 엷은 갈색 솜털로 덮인)   내가 이처럼 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는 것은 옷에서 풍기는 향기 때문인가?   테이블에 놓인 팔, 쇼올을 휘감은 팔 그러면 한번 해 볼까? 그러나 어떻게 말을 꺼낼 것인가?     이렇게나 말해볼까, 나는 저녁때 좁은 거리를 지나왔습니다. 샤쓰만 입은 외로운 사나이들이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뿜어대는 파이프의 연기를 나는 보았습니다라고     나는 차라리 고요한 바다 밑바닥을 어기적거리는 한 쌍의 엉성한 게 다리나 되었을 것을.     그런데 오후도 저녁도 저렇게 편안히 잠들었구나. 긴 손가락들도 쓰다듬어져서! 잠이 들었거나, 피곤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앓은 체 하는 것이다.   그대와 내 곁 여기 마루 위에 펼쳐서 차도 끝내고 케이크도 아이스크림도 먹고 났는데, 이제 내게 무슨 힘이 있어 이 순간을 한 고비로 몰아 가겠는가?   그러나 나는 울기도 하고, 단식도 하고, 울며 기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 머리(조금 벗겨지긴 했지만)가 쟁반 위에 놓여 들어오는 것을 보긴 했지만,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여기에 별로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나는 나의 위대한 순간이 가물거리는 것을 보았고,   영원한 '하인'이 내 코트를 잡고 킬킬 거리는 것을 보았다. 결국 나는 두려웠었다.     도대체 그 것이 보람이 있었겠는가? 잔을 거듭하고, 마말레이드를 먹고, 차를 들고 나서,   화병을 옆에 놓고 내 그대와 주고 받는 이야기에서 그 것이 보람있었겠는가?   미소로써 문제를 물어 뜯어 버리고 우주를 뭉쳐서 공을 만들어   어떤 어마어마한 문제로 그 것을 굴려 간다한들 또는 '나는 주검으로부터 살아나온 나자로다.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알리기 위하여 돌아왔다, 모든 것을 말하리라'고 말한들.   만약 어느 여인이 머리맡에 베개를 놓고서 '나 조금도 그런 뜻에서 말한 것 아네요, 조금도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한들,     아니다! 나는 햄릿 왕자가 아니다, 될 처지도 아니다. 나는 시종관 행차나 흥성하게 하고 한 두 장면 얼굴이나 비치고   왕자에게 진언이나 하는, 틀림없이 만만한 영장, 굽실굽실 심부름이나 즐겨 하고,   빈틈 없고, 조심정 많고, 소심하고 큰 소리치지만, 좀 머리가 뜨고   때로는 정말 바보같기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때로는 틀림없이     나는 늙어 간다... 늙어 간다. 바짓가랑이 끝이나 접어 입을까     머리를 뒤에서 갈라 볼까? 복숭아를 한번 먹어볼까? 흰 플란넬 바지를 입고 해변을 걸어 볼까?   나는 인어들이 서로 노래를 주고 받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인어들이 날 들으라고 노래 부르는 것은 아니겠지.     그 것이 물결타고 바다 안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흴락 검을락 물결이 바람에 불릴 때   뒤로 젖혀지는 파도의 흰 물머리를 빗질하며 우리는 적색 갈색의 해초를 두른 바다 처녀들에 섞여   바다의 방안에서 지금까지 머뭇거리다 그만 인간의 목소리에 잠이 깨어 물에 빠진다.     히스테리                          그녀가 웃으면,나는 그녀의 웃음속에 휘말려 그것의 일부분이 된다는 건 알았지만,   그녀의 이는 分隊敎練의 재능을 가진 우연의 星群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갑작스런 가쁜 숨결 속에 끌려들었고,게서 빠져나려 하면 그때마다 들이마셔져,   마침내는 캄캄한 그녀의 목구멍 속에서 떠돌아 다니다 보이지 않는 근육의 파문에 상처입었다.   늙수그레한 웨이터가,녹이 슨 초록빛의 철제 식탁위에,손을 떨며, 핑크빛의 흰 격자무늬를 수놓은 식탁보를 급히 펴면서 말했다.   '만일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싶으시다면,만일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싶으시다면....'하고.   그녀 가슴의 진동을 멈출 수만 있다면,나는 오후의 단편을 얼마간 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세심하고 교묘하게 나의 주의를 이 목적에 집중했다   바람 부는 밤의 광시곡   열두 시. 달의 종합 속에 들어있는 쭉 뻗은 거리를 따라 속삭이는 날의 주문은 기억의 심층과 그 모든 뚜렷한 관계와 그 구분과 정밀성을 용해하고,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은 저마다 숙명적인 북처럼 울리고, 어둠의 공간을 통하여 한밤은 기억을 뒤흔든다, 광인이 죽은 제라늄을 흔들듯이.     한 시 반. 가로등은 침을 튀겨대고, 가로등은 중얼대고, 가로등은 말했다. "저 여자를 보라 방긋 웃는 듯이 열려 있는 문간의 불빛 아래서 그대를 향해 망설이고 있는 저 여자를,   그녀의 옷자락이 찢겨져 모래로 더렵혀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눈꼬리가 구부러진 핀처럼 비틀린 것도 볼 수 있다.     추억은 많은 뒤틀린 것들을 높이 밀어올려 마르게 하고, 해변의 비틀린 가지는 매끈히 벌레에 먹히고 반들반들 닳아 마치 세계가 희고 빳빳한 그 뼈대의 비밀을 내던져 버린 것 같다.   공장 마당의 부서진 용수철, 힘이 빠져 막막하게 구부러지고 꺾일 지경이 된 그 형체에 달라붙은 녹.     두시 반, 가로등이 말했다.   "보라 도랑에 납작 업디어 혀를 쑥 내밀고 한 조각의 썩을 버터를 탐식하는 저 고양이를"   그렇게 어린 아이의 손이 자동적으로 쑥 나와 부두를 따라 달리는 장난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그 아이의 눈 뒤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거리에서,불켜진 덧문 사이로 들여다보려고 하는 눈들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날 오후 웅덩이 속에서 게 한 마리가, 등에 조개삿갓이 붙은 늙은 게 한 마리가,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막대기 끝을 움켜잡았다.     세시 반. 가로등은 침을 튀겨대며, 가로등은 어둠속에서 중얼댔다. 가로등은 흥얼거렸다--   "저 달을 보라, 달은 아무런 원한도 품질 않는다, 그녀는 약한 눈을 깜박이며 구석구석에 미소를 보낸다. 그녀는 풀의 머리털을 쓰다듬는다.   달은 기억을 잃었다. 색이 바랜 천연두로 그녀의 얼굴은 금이 가고 그녀의 손은 먼지와 오 드 꼴로뉴의 냄새를 풍기는 종이 장미를 비튼다.   그녀는 다만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오랜 밤의 온갖 냄새와 더불어 있도다"   추억이 밀려온다 햇빛 받지 못하는 마른 제라늄과 갈라진 틈바구니의 흙과   거리의 밤 냄새와 덧문 닫힌 방의 여자의 냄새와 복도와 담배와 술집과 캐테일 냄새 등의 추억이.     가로등은 말했다. 지금은 네 시, 여기 문 위엔 번호가 있다. 추억이라고!   열쇠를 가진 것은 그대, 작은 등불이 계단에 원을 펼쳤으니, 올라오라. 침대는 비었고,칫솔은 벽에 걸려 있다 신일랑 문간에 놓고,잠자라,그리고 내일의 삶에 대비하라     나이프의 마지막 비틀림         버언트 노오튼 I. - '4중주곡'에서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된다.   모든 시간이 끊임없이 존재한다면 모든 시간은 보상할 수 없는 것이다.   있을 수 있었던 일은 하나의 추상으로서 다만 사색의 세계에서만 영원한 가능성으로서 남는 것이다.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은 일은 한 점을 향하여, 그 점은 항상 현존한다.   발자국 소리는 기억 속에서 반향하여 우리가 걷지 않은 통로로 내려가 우리가 한 번도 열지 않은 문을 향하여 장미원薔薇園속으로 사라진다. 내 말들도 이같이 그대의 마음속에 반향反響한다.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장미 꽃잎에 앉은 먼지를 뒤흔드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 밖에도 메아리들이 장미원에 산다. 우리 따라가 볼까?   빨리, 그걸 찾아요, 찾아요, 모퉁이를 돌아서. 새가 말한다. 첫째문을 빠져,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로 들어가, 우리 따라가 볼까   믿을 순 없지만 지빡새를?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로 들어가. 아 있구나. 위엄스럽게, 눈에도 안 보이게, 죽은 잎 위에 가을 볕을 받으며, 하늘거리는 대기 속에 가벼이 움직인다.   그러나 새는 노래한다, 관목 숲속에 잠긴 들리지 않는 음악에 호응하여. 보이지 않는 시선이 오고간다. 장미는 우리가 보는 꽃들의 모습이었다.   그건 영접받고 영접하는 우리의 빈객이다. 우리들이 다가서자 그들도 하나의 정형의 패턴으로 텅 빈 소로小路를 따라 변두리 황양나무 숲속으로 들어가 물마른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연못은 마르고, 콘크리트는 마르고, 변두리는 갈색 햇빛이 비치자 연못은 뮬로 가득차, 연꽃이 가벼이 가벼이 솟아오르며, 수면은 광심光心에 부딪쳐 번쩍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의 등 뒤에서 염못에 비치고 있었다. 그러자 한 가닥 구름이 지나니 연못은 텅 빈다. 가라, 새가 말했다. 나뭇잎 밑에 아이들이 가득 소란하게 웃음을 지니고 숨어 있다.   가라, 가라, 가라, 새가 말한다. 인간이란 너무 벅찬 현실에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니.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 끝을 지향하는 것이고, 그 끝은 언제나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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