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0월 2017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검색날짜 : 2017/10/28

전체 [ 6 ]

6    [타삼지석] - "세계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는 발신지"... 댓글:  조회:3142  추천:0  2017-10-28
시인 윤동주 마지막 흔적 머문 곳에 日시민들이 기념비 건립 (ZOGLO) 2017년10월28일  시민단체 12년만에 결실… 교토 윤동주 사진촬영지 인근에 詩 '새로운 길' 시비에 새겨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교토(京都)의 한 시골 마을에서 윤동주를 기리는 기념비가 시인의 일본 '팬'들에 의해 세워졌다. 교토 우지(宇治)시 지역 시민들이 중심인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 위원회'(이하 위원회)는 28일 우지천(川) 신핫코바시(新白虹橋) 기슭에서 '기억과 화해의 비'(記憶と和解の碑)를 제막했다.  일본 시민들, 교토에 윤동주 시인 기념비 제막(교토=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28일 일본 시민들이 만든 단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가 일본 교토(京都)부 우지(宇治)시의 우지 강변 인근에서 윤동주 시인에 대한 기념비 '기억과 평화의 비' 제막식을 열고 있다. 2017.10.28 윤동주 시인의 시가 적힌 기념비는 교토부(府) 내에만 도시샤(同志社)대학과 교토조형대 등 2곳에 이미 있다. 도시샤대학은 시인이 다녔던 대학교며 교토조형대는 시인의 하숙집이 있던 자리다.  이번에 설립된 기념비는 일본의 대학 캠퍼스 밖에 세워진 윤 시인에 대한 첫 번째 기념비다. 크기(가로 120㎝·세로 175㎝·폭 80㎝) 역시 가장 크며,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직접 모금을 하고 힘들게 지자체의 협조를 얻어내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우지시는 현존하는 윤 시인의 마지막 사진이 촬영된 장소라는 점에서 시인과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도시샤 대학 재학 중이던 윤 시인은 1943년 6월 대학 친구들과 함께 송별회를 한 뒤 우지천 아마가세쓰리바시라는 다리 위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시인 윤동주가 일본 교토에서 촬영한 마지막 사진(교토=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현존하는 윤동주 시인 최후의 사진. 일본 교토(京都) 우지(宇治)시의 우지천(川) 아마가세쓰리바시에서 촬영됐다. 윤동주는 1943년 자신의 송별회 자리에서 이 사진을 촬영한 다음 1달 후 체포돼 감옥에서 숨졌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윤동주. 일본 시민들은 28일 이 다리에서 멀지 않은 우지강변에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 '기억과 평화의 비'를 세웠다. 2017.10.28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제공=연합뉴스] 이 사진은 1995년 NHK와 KBS가 공동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제작 중 함께 사진을 찍은 친구의 소지품 속에서 발견됐다. 윤 시인은 사진 촬영 한 달 뒤인 1943년 7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송몽규)와 조선문화와 민족의식 고양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체포됐고 1945년 2월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숨졌다. 이날 건립된 시비는 처음 건립이 추진된 이후 12년 만에 힘들게 탄생한 결실이다. 시작은 윤동주 시인과 우지시의 인연을 알게 된 시민들의 모임에서였다. 시인에 대한 관심을 나누던 이들이 2005년 시비를 만들자며 모임(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을 만들었고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힘들게 모은 돈으로 시비 제작까지 마쳤지만, 이번에는 장소가 문제였다. 교토부가 우지시와 시인 사이의 연고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시비 설치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서명운동을 하고 직접 발품을 팔아 우지시와 시인의 인연을 찾는 작업을 펼치며 계속 교토부 등의 문을 두드렸지만 끝내 협조를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시즈가와(志津川)구로부터 설치 장소를 제공하겠다는 소식이 왔고, 결국 모임 발족 후 10년을 훌쩍 넘겨 이날 기념비를 제막하게 됐다.  일본 교토 우지의 윤동주 시인 기념비(교토=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28일 일본 시민들이 만든 단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에 의해 일본 교토(京都)부 우지(宇治)시의 우지 강변 인근에 제막된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 ''기억과 평화의 비'. 윤 시인의 시 '새로운 길'이 한글과 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2017.10.28 한반도와 일본의 화강암 2개로 만들어진 '기억과 화해의 비'에는 윤 시인이 1941년 모교 연희전문학교의 학우회지 '문우'에서 발표한 시 '새로운 길'이 한글과 일본어로 새겨졌다.  윤동주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나무 그루터기라는 뜻의 '주(株)라는 것에 착안해 기념비는 한글이 새겨진 한반도산과 일본어가 새겨진 일본산의 화강암이 각각 윤동주를 상징하는 나무 기둥 모양의 화강암을 떠받치는 형상을 갖췄다. 이날 제막식에는 주민, 시민 활동가, 일본과 한국 언론 등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윤 시인의 유족 중에서는 시인의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가 참석했고 모교 연희전문학교의 후신 연세대의 백영서 인문대학장도 자리에 함께했다. 특히 시비 건립 소식을 듣고 부모와 함께 제막식에 참석한 한국 학생들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제막식에서 안자이 이쿠로(安齋育郞) 대표(리쓰메이칸대 특명교수)는 "기념비 설립은 글로벌 규모의 평화를 생각하면서 지역에서 행동을 일으키는 방식의 시민운동이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기념비를 세계적인 평화 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윤인석 교수는 "이 지역에 '기억과 화해의 비'가 세워지도록 힘써주신 분들께 고맙고 축하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며 "기념비가 세계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는 발신지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일본 교토 윤동주 시인 기념비에 새겨진 '새로운 길'(교토=연합뉴스) 28일 일본 시민들이 만든 단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에 의해 일본 교토(京都)부 우지(宇治)시의 우지 강변 인근에 제막된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 ''기억과 평화의 비'. 윤 시인의 시 '새로운 길'이 한글과 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2017.10.28  
5    [타향문단소식] - "시는 아직 입원 중이다"... 댓글:  조회:3013  추천:0  2017-10-28
조선족 시인 이송령 “한국 살면서 한글 써온 이들은 상상못할 기쁨” (ZOGLO) 2017년10월27일  【서울=뉴시스】 신동립 기자 = 중국 조선족 동포가 시집 ‘나의 시는 아직 입원중이다’를 내고 시인으로 정식 데뷔했다. 지난 8월 서울시인협회 월간 ‘시see’ 특별추천상 첫 수상자 이송령(34)씨다. 목포대 명예교수 허형만, 문학평론가 심상운, ‘시see’ 편집인 민윤기씨의 추천을 받았다.    이씨는 하얼빈 태생이다. 현지 조선족제일중학교(고교)를 마치고 일본 오사카 국제언어학교와 스루가다이 외국어학교 전문여행과정을 졸업한 한·중·일 3국통이기도 하다. 2012년 우리나라로 와 2년 전부터 경기 화성의 무역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씨는 “어느날 지하철 탑승구에 적혀 있는 시를 처음 봤다. 지하철을 얼마나 많이 탔는데 왜 이제야 시가 눈에 띄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시도 세상구경을 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우리글로 시를 쓴다. “내 신분이 비록 지금은 중국 조선족이지만 한글을 통해 나의 영혼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살았던 하얼빈에서도 조선어로 말을 하고 조선어로 글을 썼지만 이곳에 와서 순전한 한국어로, 완전한 한글로 시를 써야겠다는 열망이 커졌다”는 고백이다.  ‘어디까지 채우랴/ 채워도 채워도 넘치지 않는 욕심인 것을// 어디까지 사랑하랴/ 미워도 사랑, 좋아도 사랑인 것을// 어디까지 속상하랴/ 세월에 잠시 맡기면 다 지나갈 것을// 어디까지 따라가랴/ 내버려둬도 혼자 잘만 클 것을// 어디까지 만족하랴/ 이 핑계 저 핑계 본전도 못 찾는 것을// 할 말은 태산인데 털어놓은들 뭣하랴/ 이렇게 묻지 않아도 통하는 것을 어찌 여기까지 통하는 것이냐.’ (그래 말야) “나는 한글을 말하고 쓰는 ‘외국인’이었습니다. 한글로 시를 쓰니까 참 행복합니다. 언어가 통한다지만 조선어와 한국어의 차이에, 외국어 같은 모국어에 표준어의 어려움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나는, 외국어 같은 모국어 속에서 언어의 키를 찾아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떠오르는 글귀들과 잘 놀다가도 과연 내게 언제까지 시상(詩想)이 떠오르는지도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어떤 때는 자신감이 떨어져 불안감에 휩쓸리게 됩니다. 나는 사랑과 사랑이 넘치고 서로가 서로를 치유할 수 있게, 좀 더 솔직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시를 통해 마그마를 토하고 싶고, 어디서든 믿음과 희망을 품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 위에서 반짝이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이씨에게 시작이란, 단순히 자신의 감정의 세계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하며 세상과의 관계에 시를 입힐 때 자신의 편견이 아니어야 한다고 느끼는 수행이기도 하다.         
4    [고향문단소식]-중국 조선족문단 권위적 문학상 "연변문학"상 댓글:  조회:4365  추천:0  2017-10-28
제36회《연변문학》문학상  (ZOGLO) 2017년10월27일 조선족문단의 정통성과 권위성을 자랑하는 최고의 문학상인 "제36회문학상 시상식"이 10월 27일 오전, 연길 백산호텔에서 있었다.   2016년 《연변문학》잡지에 소설 47편, 시 268수, 수필 41편, 평론 14편이 발표되였다.그중 엄선을 거쳐 소설부문에 류정남의 단편소설 “이웃집 널다란 울안”(2016년 9호), 시부문에 한영남의 “무애비죄”(2016년 6호), 수필부문에 김명숙의 “아지”(2016년 8호), 평론부문에 리해연의 “김조규 시의 의식성향 변화양상”(2016년 1호) 가 수상했으며 리순화의 단편소설 “우리의 둥지”(2016년 12호)와  김화, 김설화의 수필 “놀이터만 남기고 황학만 갔을가?”(2016년 12호) 두편의 작품이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제36회《연변문학》문학상 수상자들.   심사위원으로는 연변대학 김병민 전임총장, 중앙민족대학 오상순 교수,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 연변대학 리광일 교수, 《연변문학》 채운산 주필 등 5명이다.   연변대학 리광일 교수는 심사평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류정남의 단편소설 “이웃집 널다란 울안”은 조선족과 한족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일방적이 아니고 평행적이며 옳고그름을 떠나 서로 바라보고 느끼고 인정하는 면이 돋보인다.   한영남의시 (2016년 6호)는 일찍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해 시적 화자를 통해 덜되먹은 호로자식이라는 느낌을 주던데로부터 내면으로는 아버지를 무지 그리고 있음을 파격적으로 보여주었다.   환영사를 하는 연변인민출판사 리원철 부사장.   김명숙의 수필 “아지”는 제멋대로 자란 귤나무아지를 자를가말가 하는 주부의 망설임을 통해 질서와 개성이라는 관계를 설파하였다. 즉 인간세상이나 대자연은 항상 개성을 통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지고 그 질서 속에서 다시 새로운 개성이 나타나고 있다.   리해연의 평론 “김조규시의 의식성향 변화양상”은 해방전 김조규의 시를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른 그의 시의 의식변화를 살폈다.김조규의 초기시는 사실주의경향으로 식민지사회의 불합리에 대한 명확한 비판의식을 표출하였고 중기시는 초현실주의경향으로 세상사를 외면하고 자연에 관심을 돌리거나 내면에 주목하면서 도덕적 타락을 보여주었으며 후기시는 사실주의경향으로 망명객의 비애, 디아스포라로서의 방황, 피식민지자로서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주최측 관계자들과 래빈들 이날 시상식에서 연변인민출판사 리원철 부사장이 환영사를, 연변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영화보도출판국 최홍녀 부국장이 격려사를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김혁주임과 , , 잡지 등 문학잡지사의 주필들이 축사를 했다.   답사를 하는 《연변문학》잡지 채운산 주필   《연변문학》 채운산 주필은 답사에서 “문학잡지는 작가를 떠나서 꾸릴 수 없다. 작가가 중심이고 작가가 문학잡지를 받쳐주는 대들보이다. 헌데 그 대들보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다행히 이번상을 수상한 수상자들중에서 류정남과 한영남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신진들이여서 그나마 안위와 희망을 느끼게 된다.”며 “얼마전에 열린 전주민족문화사업회의에서도 작가들의 로동보수에 관한 파격적인 방안이 출범되여 아주 고무적이다. 더 많은, 더 우수한 작품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연변문학》문학상은 2013년부터 북경송전정과학기술유한회사 림송월사장의 후원으로 펼쳐지고 있다. ///조글로미디어 문야 ============================== 제36회 《연변문학》문학상 시상식 개최   2017-10-27    전체 문학상 수상자 합영. 《연변문학》에서 주최하고 북경송전정과학기술유한회사에서 후원하는 제36회 《연변문학》문학상  시상식이  27일 백산호텔에서 있었다. 2016년에 《연변문학》 에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공정하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류정남의 단편소설 이 소설상을, 한영남의 가 시상을, 김명숙의 가  수필상을, 리해연의 평론 이 평론상을, 리순화의 소설 와 김화,김설화의 수필 가 각각 신인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지녔다.   심사평을 하고있는 연변대학 리광일 교수.     연변대학 리광일 교수는 심사평에서 “ 류정남의 단편소설 은 조선족과 한족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일방적이 아니고 평행적이며 옳고그름을 떠나 서로 바라보고 느끼고 인정하는 장치를 함으로써 그 의미가 더욱 깊다. 한영남의 시 는 시인의 일관적인 작법으로 시에서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는 것 같지만 내면은 무지무지 아버지를 그리는 시적 화자의 심리를 읽을수 있고 특히 잔디처럼 애비의 시라는 시적표현이 아주 의미있다. 김명숙의 수필 는 화분을 키우는것을 통해 귤나무아지를 자를가 말가에서 작품은 질서와 개성이라는 관계를 설파하면서 인간세상이나 대자연은 항상 개성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지고 그 질서 속에서 다시 새루운 개성이 나타나는것이라고 했다. 리해연의 평론 은 많이 연구되지 않은 김조규의 시를 의식성향의 시점에서 주목했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리순화의 소설는 독자들로 하여금 둥지의 중요성을 알게하고 안해가 바로 남편과 아들에게 따스함을 주는 둥지이고 그 둥지가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둥지임을 알게 한다. 신인상을 수상한 김화,김설화의 수필은 력사안내서의 성격을 지닌 작품으로 이 작품을 통해 명승고적이 단지 그 자체만으로써 빛나는 것보다 그 뒤면에 루적되여 있는 이야기들이 명승고적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 가치를 높인다는 점을 느낄수 있다. ”고 밝혔다. 장향월 기자  =========================== 제36회 《연변문학》문학상 시상식 연길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 2017-10-27 ]    10월 27일 오전, 연변인민출판사 《연변문학》잡지가 주최하고 북경송전정과학기술유한회사(총경리 림송월)가 후원한 제36회 《연변문학》문학상 시상식이 연길시 백산호텔에서 개최되였다. 2016년 《연변문학》잡지에 발표된 후보작품들이 연변대학 전임 교장 김병민, 중앙민족대학 교수 오상순, 연변작가협회 주석 최국철, 연변대학 교수 리광일, “연변문학” 주필 채운산 등 5명으로 구성된 평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최종 소설부문에서 류정남의 단편소설 (2016년 9월호), 시부문에서 한영남의 (2016년 6월호), 수필부문에서 김명숙의 (2016년 8월호), 평론부문에서 리해연의 (2016년 1월호)이 각각 수상작으로 선정되였고 신인상은 단편소설 (2016년 12월호)를 발표한 리순화와 수필 를 발표한 김화, 김설화가 차지하였다. 연변대학 리광일교수는 심사평에서 수상작들의 수상리유를 밝히면서 “문학의 사회적 지위가 추락되고 쟝르가 다양해지고 매개물이 난삽할 정도로 병존하는 현시기에 있어서 잡지가 문학상을 오래동안 운영하면서 조선족문학의 존속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은 마땅히 긍정을 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된다.”고 밝혔다. 좌로부터 리해연, 김명숙, 한영남, 류정남, 리순화, 김화, 김설화. 류정남의 단편소설 은 조선족에 대해 선의적이고 항상 조선족을 칭찬하는 장곰보의 형상부각을 통해 조선족과 한족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일방적이 아니고 평행적이며 옳고그름을 떠나 서로 바라보고 느끼고 인정하는 조선족농촌의 인간관계의 보편적 현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영남의 시 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내면에는 무지무지 아버지를 그리는 시적 화자의 심리를 너무나도 핍진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김명숙의 수필 는 제멋대로 자란 귤나무의 아지를 자를가 말가 하는 주부의 망설임을 통해 질서와 개성이라는 관계를 설파하였다는 점에서, 리해연의 평론 은 해방전 김조규의 시를 연구대상으로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의식성향의 시점에서 주목하였다는 점에서 평심위원들의 긍정을 받았다. 《연변문학》 채운산 주필은 답사에서 “문학 내지 문화는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부흥기와 침체기가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때까지 문학이 사멸된 적은 없었다. 그것은 시대가 문학을 수요하고 시대가 작가를 수요하기 때문이다.”고 하면서 문학잡지를 더욱 잘 꾸리는 것으로 작가들의 작품창작활동을 지지할 것이라고 표했다. 시상식에서 연변인민출판사 부사장 리원철이 개회사를, 연변대학 교수 리광일이 심사평을, 연변작가협회와 각 문학지 대표들이 축사를, 연변주문화라지오방송텔레비죤신문출판국 부국장 최홍녀가 격려사를 하였다. 1951년에 창간된 《연변문학》은 조선족문단의 대표적인 순수문학지로 국내 조선족작가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신진발굴에 힘을 기울여왔다. 36회를 이어온 《연변문학》문학상은 조선족문단의 정통성과 권위성을 한몸에 지닌 최고의 문학상이기도 하다.
3    시작에서도 싱싱한 화면으로 시정짙은 공간을 펼쳐보여야... 댓글:  조회:2911  추천:0  2017-10-28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9) : 쇠라 Georges Seurat (1859~1891)   신인상파의 진로와 완성의 대변자       퐁트벨의 숲속   쇠라의 초기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화면 전체를 작은 반점(斑點)으로 처리하고 있다. 아직은 색조 분할 이 명확하고도 과학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지는 못하나, 그의 방향성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작품으로서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수직의 나무와 가운데 사선으로 뻗은 나무 역시 수직과 사선의 견고한 구도를 완성하는 쇠라 특유의 화면을 암시하고 있다. 나뭇가지와 줄기가 전체적으로 떨리는 것 같은 색채에 비한다면 딱딱한 느낌을 주고 있으나, 풍경 전체에 일관되는 정적인 요소는 역시 쇠라의 방향성에 일치한다.           손수레와 돌을 깨는 석공     초기의 쇠라 작품 가운데는 노동하는 사람들을 소재로 한 것이 많은데 아마도 쿠르베나 밀레 등 당시 사회적 의식을 드러냈던 화가들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쇠라의 그림 속엔 그런 주제 의식보다는 화면 구성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작품도 실제 돌을 깨는 석공이 갖는 노동의 사회적 의미는 전혀 찾을 수 없고, 밝은 색조와 견고한 구성이 자아 내는 화면의 건축(建築)만이 두드러진다. 말하자면 그는 초기에서부터 엄격하고도 분명한 화면 구성에 열중해 있었고, 그것을 주도하게 추진해 나갔을 뿐이다. 여기서도 색조의 분할이 도입되곤 있지만, 인상파의 경험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주의적인 방법에 의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들 가운데의 말   쇠라가 아직 완전한 분할주의(分轄主義)에 도달하기 전 초기 작품이나, 이미 엄격한 짜임새의 구도와 교착(交錯)하는 터치를 통해 쇠라의 방향성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소재는 극히 단순하다. 들 가운데 몇 그루 나무가 서 있고, 그 앞에 짐수레를 끄는 말이 서 있다. 이 단순한 형태의 설정을 화면 속에 엄밀히 구축해 넣는 일관된 방법상의 징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밝은 색조와 떨리는 터치의 섬세한 구사에서 시정(詩情) 짙은 공간, 싱싱한 화면을 유도해 주고 있다. 자연에 대한 엄격한 관찰과 화면에서의 짜임새 있는 구도 설정에도 불구하고, 쇠라의 화면 뒤쪽엔 언제나 투명한 시정이 깔려 있다.         '아니에르의 미역 감기'를 위한 습작 1   쇠라는 대작 를 제작하기 위해 약 15점의 유채(油菜)와 10점의 데생을 그렸다. 양쪽 둑에서 보는 풍경 속에 몇 사람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물론 이들 습작들은 그 기본적인 구도에 있어서 완성작과는 변함이 없지만, 인물의 배치에 있어선 하나도 같지가 않다. 그러니까 하나의 대작을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구성적 시도를 거듭 했는가를 시사해 보인다. 둑 위에 앉아 있는 사람과 엎드려 있는 사람이 들어와 있고, 오른쪽 끝으로 검은 말과 말을 씻기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물론 완성작에는 이 오른쪽 인물과 말은 생략되고 있다.         '아니에르의 미역 감기'를 위한 습작 2 (강의 말)   이 역시 를 위한 습작 가운데 하나다. 습작 1에 비해 시각이 약간 강 쪽으로 이동했을 뿐, 강을 가운데 둔 양 둑의 풍경이 완성작과 대동소이하다. 왼편 둑에 앉아 있던 인물은 지워지고 대신 강에서 말을 씻기고 있는 두 인물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다. 모양은 약간 다르지만 돛배와 보트는 완성작에도 그대로 연결된 것 같다. 둑과 강과 저쪽 강변의 풍경 등 극히 단조로 운 풍경이면서도 이 배경 속에 등장인물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 풍부한 변화를 기하고 있다. 인상 파풍의 색채 대비와 경쾌한 터치가 극히 단조로운 풍경을 생기 있는 시각적 즐거움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아니에르의 멱감기'를 위한 습작 3   완성작을 위한 습작은 대개 거친 터치로 일관되고 있다. 뚜렷한 윤곽선에 의하지 않고 터치 하나하나로 대상을 포착하기 때문에 그만큼 일필 일필은 그 역할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최소한의 묘사로써 최대한의 것까지를 암시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쇠라는 처음부터 굵은 터치와 반점에 의해 형태의 단순화를 시도했는데, 그것은 섬세한 색조 분할이 이루어지는 완성작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 멱 감기>를 위한 이 습작은 다른 습작들과는 달리 시각이 둑 쪽으로 들어와 있으며, 등장 인물들도 완성작과는 다르다. 시각은 다만 앞 쪽의 둑과 강만을 끌어들인 근경에 두고 있다.           멱 감는 남자,'멱감기'를 위한 습작 4   습작 가운데 가장 완성작에 가깝다. 완성작에 보이는 화면 중심의 나체 인물과 둑에 앉아 있는 남자, 그리고 풀 위에 벗어 놓은 옷이 그대로이며, 멀리 원경의 다리와 공장 굴뚝도 고스란히 완성작에로 넘어가고 있다. 단지 완성작에 비한다면 일종의 부분도 같은 느낌을 주는데, 시각이 나체 인물과 옷을 입고 있는 남자 쪽으로 밀착되어 들어가 있으며, 강 쪽의 풍경이 많이 잘려 있음이 그것이다. 이처럼 쇠라는 같은 지점에서 마치 카메라로 부분 부분을 포착하고 있듯 그렇게 화면을 분절(分節)시킨 시도를 거듭해 보이고 있다. 대상 인물과 풍경과의 관계에 대한 끈덕진 구도 실습일 것이다. 그는 이 여러 장의 습작을 갖고 최종적으로 완성작의 구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양쪽 둑, '멱 감기'를 위한 습작   1883년에서 84년에 걸쳐 쇠라는 쿠르보브와 근처에서 여러 장의 즉사(卽寫)를 했다. 그것은 란 작품을 위한 일종의 현장 답습과도 같은 성질을 띠는 스케치였다. 이 소품도 그 중의 하나인데, 둑에 앉아 있는 인물들의 배치만 없을 뿐 에 나오는 배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단순한 현장 스케치란 점에서 자신의 미학적인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스러운 표현 수단을 보여 주고 있다. 형태나 색채의 분석을 시작하기 이전의, 극히 담담한 스케치 풍이다. 색조에 있어서나 옆으로 문지른 필촉 등에서 어느 정도 인상파의 영향이 첨가되어 있다.       낚시꾼   강변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는 인물들과 강 위에 배를 띄우고 있는 인물들이 한결같이 역광(逆光)을 받은 듯 처리되어 있다. 아마 저녁나절일 것이다. 어둠이 오 기 직전의 강가의 정경이, 실루엣으로 처리되어 있는 낚싯군과 강에 드리운 긴 낚싯대에 의해 더욱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정적인 분위기와 수평선과 사선에 의한 화면 구성은 후기의 작품들과 일치되나, 약간 거친 터치와 굵은 붓자국이 만드는 즉흥성은 초기의 작품들에서 나타나 는 공통점이다. 인상파적인 요소들을 보여 주면서도 견고한 구성에 대한 관심은 안정과 조화라는, 쇠라 예술의 근간(根幹)에로 그대로 이어진다.         그랑드 자트 섬   에 이어 착수한 를 위한 습작 가운데하나, 습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완성된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를 위해 끊임 없는 데생과 습작을 거듭한 것과 같이, 를 위해서도 그는 매일처럼 이 섬을 찾아와 전체적 시각에서부터 각 사물의 하나하나에 대한 포름을 확인하였다. 대작의 무대가 될 풍경만이 독립된 이 작품은, 그러니까 전체 적인 시각 설정에 해당된다. 여기에다 인물들만이 등장되면 곧 완성작이 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세밀한 구성과 색조 등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이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이룰 구도를 예상하고 있다.         걷고 있는 두 사람   역시 습작의 하나로 뒷면의 과 거의 같은 부분도이다. 파라솔을 든 부인과 실크햇을 쓴 남자가 나란히 걸어 나오고 있는 모습인데, 저쪽 풀밭 위에는 완성작에서 볼 수 있는 여인네들 모습이 점경(點景) 된다. 완성작의 거의 반에 해당되는 오른편 화면인데, 보다 더욱 경쾌한 색채와 터치를 보여 준다. 굵은 붓으로 찍어 나간 터치는 어디 한 군데 주저함이 없이 화면 전체로 울려 퍼져 마치 색채의 코러스를 듣는 느낌을 준다. 모든 대상은 정지되어 있다. 심지어 걷고 있는 두 사람 역시 하나의 기념물처럼 그 자리에 뿌리 박혀 있는 듯한 인상이다. 이 정지 가운데서도 끊임없는 유동과 생기는 색채와 터치에서 오는 즉흥성 때문일 것이다.         원숭이를 데리고 있는 부인   의 오른쪽 전경만을 따로 독립한 습작의 하나. 완성작에는 부인 옆에 실크 햇을 쓴 남자가 덧붙여져 있는데, 여기서는 부인만을 다루었고, 원숭이를 데리고 있는 것은 완성작과 같다. 역시 습작에 공통되는 속도감 있는 터치와 즉흥성이 대담한 순색의 사용을 통해 진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중요성은 인물과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과의 관계에 있어 밀도 높은 구성에 있다고 하겠다. 수직의 부인의 몸과 배경의 수목이 파라솔에서 생기는 사선과 원숭이를 맨 줄의 사선에 의해 밸런스를 유지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화면 전체를 수평과 수직의 구조 속으로 끌어들인 견고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랑드 자트 섬'의 마지막 습작   극히 세부를 제외하곤 완성작과 거의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다. 단지 완성작에서 보는 완벽한 마감이 없어 거친 점묘로써 처리된, 즉흥적이고도 생생한 동감(動 感)이 완성작과 대조적이다. 하나의 습작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완성작과는 여러모로 다른 감흥을 얻고 있음이 역력하다. 섬세한 점묘와 그것으로 인한 더욱 견고한 조형적 건축은 완성작에 따르지 못하고 있으나, 즉흥성과 명쾌함은 완성작에 앞서고 있다. 그러니까 똑같은 소재를 각각 다른 표현에 의해 얻어지는 차이라고나 할까. 바로 이 점이 습작이라는 과정보다 이것대로 독립된, 또 하나의 완성이란 느낌을 강하게 주는 것이다.           그랑캉의 오크 곶(岬)   1885년 3월 대작 를 완성하고 그 해 가을에 다시 손질하기까지의 막간의 여름을 노르망디의 그랑캉에서 보낸 쇠라는 최초의 바다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바다 풍경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전경에 불쑥 솟아 오른 거대한 암괴(巖塊)가 단연 화면을 압도하고 있으며, 멀리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평선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가없는 바다 위로는 몇 마리의 새들이 날고 있다. 그리고, 암괴 끝부분 쪽 원경의 바다 가운데 아물거리는 돛배의 모습이 들어온다. 거대한 것과 미세한 것, 광대무변한 자연과 그 속에 존재하는 생물과의 대비 등, 단순하면서도 의미 깊은 구도 설정을 엿보게 한다.       쿠르보브와의 세느 강   역시 세느 강변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와 이어지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수목이 선 근경과 강가를 거닐고 있는 부인, 그리스도 피안의 풍경등에서 의 그것과 유사성을 나타낸다. 여기서도 정적이 깔린 한가로운 강변의 정경을 엿볼 수 있는데, 부인 앞에 그려진 뛰어가는 개가 유일한 동감을 대신한다. 밝은 색조의 경쾌하게 떨리는 터치가 어울려 화사한 강변의 분위기를 효과있게 묘출해 주고 있다. 강둑과 피안의 모래밭이 이루는 수평의 구도 속에 부인과 원경의 가옥들이 갖는 수직의 선감(線感), 그리고 약간 사선을 이루면서 솟은 나무가 화면을 긴밀하게 조여 주고 있다.           옹플뢰르의 바 뷔탕의 모래톱   이전과 다름없는 점묘법(點描法)이 사용되고 있으나, 점묘가 더욱 조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체의 색조도 이전보다는 약해지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강조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구성은 더욱 견고함을 보여주는데, 필촉 분할과 구성의 견고함은 쇠라 특유의 화면의 완성이라고 할 만하다. 아침 햇빛을 나타내기 위한 청색의 기조는 상쾌한 빛의 효과를 더해 주면서 맑은 대기감을 전달해 주고 있다. 이런 대기감에 대한 배려는 쇠라의 새로운 색체 체계에 대한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 더욱 분할적인 점묘의 유도와 일치하고 있다. 가파른 벼랑의 사선과 약간 경사진 모래톱, 그리고 툭 트인 수평선이 화면 분할의 미묘함을 드러낸다.         옹플뢰르의 등대   약간 사선의 모래톱과 먼 원경의 수평선 구도는 쇠라의 해안 풍경에서 가장 많이 눈에 뜨인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조로운 구도이면서도 이 커다란 구도의 골격 속에 작은 수평과 수직의 대상물을 점경(點景)시켜 구성의 밀도를 기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 다 조탁(彫琢)한 듯한 점묘(點描)의 효과는 완벽한 짜임새에 반응된다. 수평과 사선의 구도 속에 우뚝 선 등대가 단조로움을 깨면서 근경의 모래밭에 세워져 있는 단순한 나무 받침대와 시각적인 견인(牽引)을 유지해 준다. 더없이 밝은 색조와 떨리는 듯한 빛의 반영은 인상파의 그것을 그대로 이어주면서도, 화면의 짜임새는 인상파에서는 볼 수 없는 세심한 계산 위에 이루어져 있다.         '포즈를 취한 여인들'의 습작 (뒷모습)   완성작에서 보는 세 사람의 여인은 실제로는 한 명의 모델을 각각 다른 포즈를 취하게 하여 화면에 합성시킨 것이란 설이 있다. 쇠라의 애인 마드레느 노브로크가 그 모델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각 세 개의 포즈가 독립된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도 이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청색과 심홍색의 대비, 그리고 보색 관계를 이용한 생기 있는 색채 효과와 시각적 혼합에 의한 중화된 색채의 화음이 돋보인다. 필촉(筆觸)의 크기는 부분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머리털 부분에서는 크고, 어두운 부분에서는 작고 똑똑하게 상감(象嵌)하여 넣었다. 마치 모자이크에 의한 견고하면서도 화사한 벽화를 대하고 있는 느낌이다.         '포즈를 취한 여인들'의 습작 (옆모습)   그랑드 자트 섬의 야외 풍경에서 실내로 옮겨진 풍경인데, 제작 연대는 거의 비슷하다. 이 작품은 완성작 을 위한 습작 중의 하나로, 하나의 완성작을 위해서 사물 하나하나를 따로 독립해서 그리는 쇠라의 방식을 엿보게 한다. 완성작에서는 화면 오른쪽에 위치한 이 옆모습의 여인은 완성작에서 뿐만 아니라 여기서도 완전히 독립된 작품으로 나타나고 있다. 단지 완성작에서는 스타킹을 벗고 있는 포즈인데, 여기서는 맨발이란 차이가 보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이 일련의 포즈는 이미 전통적인 누드의 포즈에서는 볼 수 없는 직업성이랄까, 현대적인 세련미가 넘쳐 흐르고 있다.         '포즈를 취한 여인들'의 습작 (앞모습)   완성작에서 보는 화면 가운데의 여인. 이 습작은 완성 작과 거의 같은 점묘법에 의한 것과, 아직 거기까지 나가지 않은 단계의 습작의 것이 있는데, 이 작품은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두 손을 치부 앞에 모으고 두 다리를 오므리고 벽 앞에 서 있는 포즈는 완성작에서 보는 약간 벌린 두 다리의 포즈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인은 거의 세부를 알아볼 수 없는 하나의 커다란 형태로만 느껴질 뿐이다. 색채는 완성작에서와 같은 섬세한 분해가 아니고 마치 색 종이를 잘게 잘라 흩어놓은 것 같은, 분망한 필촉에 의하고 있다. 색조는 옥외의 오렌지 빛이 아니라 청색과 황색을 대비시켰다.         옹플뢰르 항구에서   항구 도시 옹플뢰르에서 제작한 선창의 풍경이다. 의 부분도 같이 느껴지지만 전혀 다른 시점에서 붙잡은 풍경이다. 선창의 구조물들과 배의 마스트, 그리고 마스트와 배에 이어진 줄들의 복잡한 구성이 눈에 뜨인다. 쇠라의 취향은 단순히 선창의 풍경에 있지 않고, 풍경 속에 들어있는 수직선과 사선을 이용한 구성의 시도에 있음을 엿보게 한다. 색조 분할의 과학적인 방법에 있어서 쇠라는 인상파에서 벗어난 새로운 경지를 열어 보였지만, 한편 인상파가 거의 무시해 버렸던 화면의 짜임새 있는 구성에서도 그 독자적인 시도와 정진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그림은 사각형의 면 속에 이루어지는 구성이라는 사실을 가장 철저하게 자각했다고 할까.           옹플뢰르, 세느강 하구의 석양         옹플뢰르 항구   1886년 6월부터 8월까지 쇠라는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옹플뢰르에서 제작에 전념했다. 일련의 바다 풍경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점묘(點 描)를 조직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강변 풍경에서도 자 주 나타나지만 특히 해안 풍경에선 수직선과 사선을 교묘하게 결구(結構)시킨 구성을 보여 주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배의 마스트와 굴뚝과 깃대 등 수직선의 밀집과 화면 왼편에서 시 작되어 오른편으로 뻗어 올라간 사선을 엿볼 수 있으며, 수직선과 사선의 교차가 완벽할 정도로 긴밀한 유대를 형성하고 있음은 쇠라의 취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쿠르보브와의 다리   1886년 겨울에서 다음 해에 걸쳐 제작된 이 작품은 더 욱 엄격하고도 밀도 있는 구성과 색의 아라베스크를 보여 주는 쇠라의 완숙한 경지의 작품이기도 하다. 쇠라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수평과 수직, 그리고 사선의 변화에 의한 구성적 관심이 여기 선 더욱 밀도 있게 나타나고 있다. 부두와 다리의 수평선과 배의 마스트와 그 그림자가 만드는 수직선의 잔잔 한 화면 분절(分節)은 이미 현실적 풍경에 대한 관심보다 선에 의한 구성과 색점(色點)의 조화라고 하는 화면 자율성(自律性)을 강하게 반영해 주고 있다. 회화의 발전의 한 단계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포르 앙 베생의 다리와 부두   포르 앙 베생은 노르망디의 해안선에 있는 항구 도시로, 쇠라는 1888년 여름을 여기서 보내면서 6점의 작품을 그렸다. 이른 아침이면 북적거리던 항구도 정오가 되면서 한적해지는데, 이 작품은 그런 정적의 한때 를 묘출하고 있다. 가운데, 다리를 두고 이 쪽 모래밭과 저쪽의 화면들로 화면이 분절되고 있는데 선창의 건물들과 방파제, 다리 등 구조물들이 보여 주는 구축적인 엄격한 선의 조화에 비해 앞 쪽의 모래밭의 정적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역시 다시 점적(多視點的) 요소를 볼 수 있는데, 왼편 끝으로 걸어 나가는 남자와 가운데 다리 위로 가고 있는 땔 나무를 진 여인의 모습, 그리고 앞 쪽에 우뚝 선 어린 소녀의 모습이 각각 흩어져 있다.         봄의 그랑드 자트의 세느강   강변이나, 해안의 풍경을 즐겨 다루는 것은 인상파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쇠라의 작품 가운데서도 강변과 해안 풍경이 적지 않다. 에서 보는 시각에서 강 쪽으로 더욱 나간 장면이고, 화면의 중심은 강에 떠 있는 돛배와 카누에 있다. 원경의 해안의 수평선과 근경의 둑이 보여 주는 사선은 쇠라의 풍경화에서는 자주 나타나는 구도인데, 수평과 수직, 그리고 사선을 통한 긴밀한 화면의 밀도를 엿볼 수 있다. 점묘는 더욱 세분 화되어 마치 상감(象嵌)을 하듯 색채를 조탁(彫琢)해 넣었다. 화창한 봄날의 신록과 빛나는 강 물, 그리고 흰 돛의 조화는 풍부한 계절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샤이 춤'을 위한 습작   쇠라의 거의 태반의 작품들이 움직임이 없는, 정적을 일관되게 추구해 오고 있는 점에 비해 본다면, 확실히 이 작품은 예외적이다. 또한 수직선과 사선에 의한 밸런스와, 수직, 수평의 구조 속에 부동의 대상을 끌어 넣었던 이전의 작품과도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는 곡선적인 요소, 소용돌이치는 패턴이 기조가 되고 있다. 후기로 오면서 실내의 풍경, 그 가운데서도 서커스단과 카바레의 장면을 그린 작품들에서 이런 요소가 공통된다. 완성작과 거의 같은 장면을 보이고 있지만, 완성작이 구성과 색조의 완벽한 조화를 추구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습작에선 색조 자체의 즉흥성이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샤이 춤   같은 밤의 유흥가를 모티브로 한 와는 매우 다른 표현을 보여 주고 있다. 가로, 세로의 직선의 분할에 의한 화면 구성과 거기서 일어나는 정적인 무거움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는 곡선을 주로 채용한 화면의 패턴이 매우 리드미컬한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인물들의 표정과 그림 전체의 디자인에 깔려 있는 유머는 확실히 쇠라의 새로운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특징은 아마도 당대의 종합주의, 아르누보 등이 추구한 종합성과 평면성, 그리고 양식화의 일반적 경향의, 극히 자연스런 반영이 아닌가 싶다. 환락가의 장면은 특히 세기 말의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였는데, 쇠라 역시 그런 시대적인 분위기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에펠탑   에펠탑은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 때 세워졌는데, 이 작품은 바로 그 해에 제작되었다. 그러니까 에펠탑을 소재로 한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일찍 그려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에펠탑은 건립 직전부터 세워지고 난 뒤로 굉장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쇠라는 에펠탑으로 상징되는 근대 문명의 개화에 찬성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 것이다. 에펠탑이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특성으로서의 수직과 수평, 그리고 사선은 쇠라의 풍경화에서 찾을 수 있는 기본적인 것이기도 한데, 쇠라의 구성적 특성을 떠올려 볼 때 에펠탑의 작품화는 극히 자연스럽고도 당연 한 것이라 생각된다.         서커스   쇠라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이기도 하다. 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직선적인 요소는 많이 후퇴하고 대신 원과 나선과 타원 등 곡선적인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전보다 윤곽선도 뚜렷해진 것이 특색이다. 쇠라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서커스 메드라노에 열심히 다녔는데, 지금까지의 정지된 이미지와는 상반된 동적인 것에 대한 동경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수평과 수직, 그리고 사선에 의한 밸런스를 유지한 균형감각을 추구했던 지금까지의 의도를 곡선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려는 의욕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 시도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중단되어 버렸다. 앙데팡당전(이 작품이 출품된)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죽었다.           일요일의 포르 앙 베셍   쇠라의 다른 풍경들에 비해 포르 앙 베셍의 일련의 해안 풍경은 복잡하고 그만큼 구성적 풍부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선창의 건물과 방파제 그리고 마스트가 만드는 직선의 구성에 의해 화면은 극도의 짜임새를 기하고 있는데, 위쪽의 펄럭이는 깃발의 다양한 곡선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물에 비친 난간 구조물들의 그림자는 오후 한때의 항구의 정적을 더욱 실감 시켜주며, 물빛과 푸른 하늘에 피어오르는 흰 구름의 투명함이 청징(淸澄)한 세계의 결정(結晶)같은 고요함을 시사한다. 수직과 수평의 단정한 조화와 세밀한 점묘가 더욱 완벽성을 지향하고 있다.           그라비린의 水路   1890년 여름, 쇠라는 벨기에 국경 근처 해안 도시인 그라비린에서 몇 점의 풍경화를 제작하였다. 아마도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풍경화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90년에 들어오면서 실내의 풍경으로 옮겨진 그의 관심에서 본다면 과거의 해안 풍경에 맥락되는 것으로 다소 이질 감을 주지 않는 바는 아니나, 종전의 풍경에서 보는 일반적인 특징으로서 수평과 수직, 그리고 사선에 의한 안정된 구도의 추구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더욱이 밤의 장막이 내리기 직전의 엷은 빛으로 물든 해안의 고요함이 안정된 구도에 의해 더욱 잔잔한 정감을 유도해 주고 있다. 과학을 초월한 투명한 시의 세계이다.           그라비린의 水路             화장하는 여인   쇠라의 애인 마드레느 노브로크를 그린 작품인데 후기의 양식성이 농후하게 나타나 있다. 인물의 객관적인 묘사와 인물과 배경 전체를 에워싸는 분위기에 깃들어 있는 문양적(紋樣的) 패턴이 기묘하게 어우러져 일종의 음악적인 톤을 형성해 주고 있다. 이 점은 이나, 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성이다. 여인의 모습과 화장대의 모양, 그리고 배경의 곡선적 패턴이 상승하는 무드를 타고 있는데, 쇠라는 이 상승적 무드를 즐거움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그 즐거움은 다른 실내 작품에서와 같이 유머를 곁들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화면 왼쪽 위에 그려진 꽃이 있는 곳에는 원래 쇠라 자신의 얼굴이 그려졌다가 지워 버렸다.        
2    시작에서도 조각적 회화공간의 미를 창조해야... 댓글:  조회:5260  추천:0  2017-10-28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8) : 미켈란젤로 Buonarroti Michelangelo (1475~1564)   조각적(彫刻的) 회화공간의 창조(創造)         시스티나 예배당(정면)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궁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를 의뢰받았을 때(1508년) 성당 옆벽에 이미 15세기 화가에 의해서 모세전(傳)과 그리스도전(傳)의 주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 그는 구약성서 속의 장면들로써 이를 완결지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셈이다. 그것은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노아의 이야기에 이르는 장면,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예언하는 사람들, 즉 선지자들의 여자 예언자격인 무녀(巫女)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조들의 모습이 이에 해당한다. 그때 그는 율리우스 2세 묘당을 위해 열심히 제작을 추진 중에 있었다. 그것이 중단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 천정화(天井畵)를 위해 조각 아닌 회화(벽화)의 세계에 들어서야 했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도 와 같은 전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천정화를 입구에서 제단 쪽으로 진행하였고 표현 형식도 4단계로 나누어 발전시켰다.         최후의 심판   한 팔을 들고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군림한 심판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천상(天上)과 지옥(地獄)의 세계가 함께 하는 거대한 공간과 그 속의 군상이 전개되고 있다. 그 규모는 자그만치 2백 평방의 벽에 391인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 그런 것이다. 이전의 어느 심판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규모와 구상이다. 이 일을 위촉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했지만 누구보다 미켈란젤로의 특성을 잘 이해하는 파울러스(Paulus 3세)가 교황이 되고 나서 새로 의뢰하여(1534년), 그는 더 없는 제작에의 의욕을 불어넣을 수가 있었다. 이때는 또 개혁적 정신주의자 비토리아(Vittoria Colona)를 사귀게 된 시절이라 행복하던 때이기도 하다. 당초의 계획은 제단 벽의 이 최후의 심판과 아울러 입구 벽에 장식할 이 들어 있었으나, 다음 제작할 파올리나 예배당 일로 그를 데려가 버려서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최후의 심판   한 팔을 들고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군림한 심판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천상(天上)과 지옥(地獄)의 세계가 함께 하는 거대한 공간과 그 속의 군상이 전개되고 있다. 그 규모는 자그만치 2백 평방의 벽에 391인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 그런 것이다. 이전의 어느 심판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규모와 구상이다. 이 일을 위촉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했지만 누구보다 미켈란젤로의 특성을 잘 이해하는 파울러스(Paulus 3세)가 교황이 되고 나서 새로 의뢰하여(1534년), 그는 더 없는 제작에의 의욕을 불어넣을 수가 있었다. 이때는 또 개혁적 정신주의자 비토리아(Vittoria Colona)를 사귀게 된 시절이라 행복하던 때이기도 하다. 당초의 계획은 제단 벽의 이 최후의 심판과 아울러 입구 벽에 장식할 이 들어 있었으나, 다음 제작할 파올리나 예배당 일로 그를 데려가 버려서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예레미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미래에의 희망을 강조하면서 살던 선지자 예레미야가 무녀(巫女) 리비아 맞은 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앞선 무녀와는 대조적으로 조용히, 그리고 생각에 잠긴, 정적인 포즈를 하고 있는 노인상(老人像)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에서와 같이 시스티나 천정화에서 여러 가지의 독자적인 해석과 조형적인 표현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규모와 작업의 범위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범인(凡人)들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은 그 하나하나의 그림의 내용과 도상(圖像)과 그들이 전하는 사상을, 특유한 인간과 인체의 표현으로 매개하면서, 한편 전체의 구성에 대한 그 나름의 리듬에 한 몫을 담당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형태의 표현만이 아닌 특유의 미적 색채감을 남기고 있다.         리비아의 巫女   고대의 여자 예언자격인 시빌라(Sibylla)라는 무녀(巫女)들은 열 명 정도가 세계 여러 곳에 살면서 앞으로 닥쳐올 일을 말하였던 것으로, 후에 와서 그리스도나 그의 가르침에 관한 예언으로도 가끔 인용되었다. 여기서는 남자 예언자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예언자 연작에서 다른 부분과는 구별되게, 대개가 책이나 종이 두루마리를 펴고 있거나 들고 있는 포즈를 취하게 함으로써 그 부분의 특성을 뚜렷이 보이고 있다. 여기서도 '그때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모든 일들을 기록한 책을 내놓을 것이다.' 커다란 책을 두 손으로 들고 뒤에서 옆으로의 움직임의 공간을 예상케 하는 이 리비아의 무녀의 그림에서 앞의 예언자 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격렬한 움직임의 '요나'에 가까운 커다란 움직임의 자태를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이 그림을 위한 습작에는 남성상(男性像)의 데생이 돋보인다.         에리트레아의 巫女   노아의 이야기를 둘러싼 선지자 그룹, 즉 입구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이 는 이사야와 마주하는 비교적 정적인 표현 세계에 속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에게서는 육체와 영혼의 표현상의 균열이나, 도상(圖像)내용과 표현 형태 사이의 일치의 초극이라 는 문제가 그의 중요한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런 면의 한 경우를 이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후의 심판을 말한 에리트레아의 무녀가 비록 책장을 넘기면 서 무시하는 모습에 그의 그 놀랍고도 엄숙한 예언의 기미를 담고 있다고도 하겠으나, 역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체의 움직임이 그다지 크지 않은 조용 함이라 하겠다. 뒤의 기대의 박공을 떠메고 있는 장식 조각의 푸토(putto)들이 입구 위의 예언자 군에서 보는 바와 같은 정면성을 넘어서 사선으로 움 직이고, 그에 못지 않는 배경의 어린이의 움직이는 포즈도 이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노아의 만취   '방주에서 돌아온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 셈과 야벳에게 고하매 이들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는 창세기 9장의 이야기 내용이 하나의 화면에 동시에 묘사되었다. 커다란 포도주 통이 놓여 있는 막사 안에 취해 있는 노아와 그 앞에 세 아들이 서 있고, 밖에는 '씨를 뿌리고 거두어 들이는 일에, 덥고 춥거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낮과 밤을 끊이지 않는' 농사를 짓는 노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림 네 귀퉁이에는 다름 아닌 4계절의 의인상(擬人像)이 그 의미의 내용에 일치시키고 있다. 봄(右下), 여름(右上), 가을(左下), 겨울(左上).         빛과 어둠의 창조   천정화 중간축(中間軸)의 마지막에 해당되며, 구약성서 순서로는 첫째 장면이 되는 이 그림의 장면은 바로 창세기 1장 45절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빛과 어둠의 창조 내용이다. '-하나님의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 내용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담홍색의 옷에 싸인 신령이 두 팔을 들고 위를 쳐다보며 빛과 어둠을 만들고 있는 것이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의 그림 내용에 일치하고 있는 듯이 사방 귀퉁이에 낮(右下), 아침(右上), 저녁(左上), 밤(左下)을 나타 내는 것으로 보이는 의인상(擬人像)이 있고, 그 각각 한 쌍씩이 끈으로 메다이용에 연결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한쪽 팔을 머리 뒤로 가져가서 몸을 옆으로 틀고 있는 의 상에서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정신적인 상태를 육체적으로 표출할 때 많은 움직임도 보인다.         델포이의 巫女   에서 노아의 이야기들에 이르기까지 9구분으로 된 구약성서 내용의 천정 중심 화면 전 후 좌우에 12체의 선지자, 그리고 무녀가 그 아래 건축적인 틀에 억눌려 있는 그리스도의 선조 그림들보다 훨씬 위풍있게 그려졌다. 그런 예언자의 위치는 입구 바로 위에 있는 선지자 자카리아(Zaccaria)를 비롯하여 첫째 그림, 를 두고 왼쪽에 와 오른쪽에 , 그 다음의 삼각 벽면을 건너서, 를 두고 왼쪽에 선지자 이사야와 오른쪽의 에리트레아의 무녀와 그림을 두고, 구마의 무녀와 선지자 에제키엘, 를 두고, 선지자 다니엘과 페르시카의 무녀, 를 두고, 리비아의 무녀와 선지자 예레미야, 그리고 제단 바로 위에 선지자 요나가 위치하게 된다. 는 후반 이후의 표현이 전체적으로 대담해지고 커지는데 반하여, 균형이 잘 잡힌, 전반의 그림 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이다.         천체의 창조   미켈란젤로는 이 천정화의 가운데 축에 해당하는 그림의 구분에 4체의 나체상이 있는 작은 형태의 것과 그것이 없는 큰 형태의 경우를 교대로 배열하면서 예배당 안쪽에서부터 내용의 순서가 시작되어 입구에서 끝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내용상으로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것이 달과 해를 창조하고 식물을 창조하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19절까지의 이야기가 되겠다. 밝음을 안고 달과 해를 창조하는, 역동감에 넘친 성난 표정의 하나님의 비상하는 모습과, 식물을 창조하는 하나님이 등을 보이며 사라지는 모습이 한 장면 안에 동시적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서는 입구 쪽의 노아의 장면에서 보는 바와 같은 실내 장면이 외부 공간으로 바뀌고 그 표현은 여기에서 그 절정을 맞이하는 역동감(力動感)이 넘치는 공간감(空間感)에 가득 차 있다.         이브의 창조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창세기 2-21, 23). 커다란 망토에 둘러싸인 하나님은 오른손을 들어 그야말로 나무 밑에 자고 있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오는 듯한 이브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에서 그가 볼로냐(Bologna)에서 본, 그가 많은 영향을 받은 쿠엘치아(Gacopo della Querciar)의 힘찬 구약성서 부조와의 유사점을 지적받기도 한다. 주위의 나체상은 인체 속에 흐르는 네 가지의 액체 내지 네 가지의 인간의 기본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혈액으로서의 다혈질(右下), 황담즙으로서의 담즙질(右上), 점액으로서의 점액질(左下), 흑 담즙으로서의 우울질(左上) 등으로 지적된다.         요나   천정화의 입구에 위치한 선지자 자카리아(Zaccaria)와 마주 보며, 안쪽 제단 위의 중요한 벽면에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다. 조용하고 균형이 잡힌 전자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표현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고 심한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뒷배경의 유동성도 이에 호응하여 한층 더 고조되는 공간을 낳게 한다. 요나는 큰 물고기에게 먹혀 하나님에게 기도 한 결과 3일 만에 그것에서 토해 내어졌다. 그런 뜻에서 부활의 상징이 덧붙기도 한다. 커다란 입의 물고기가 요나 옆에 보인다. 이와 같이 12체의 선지자와 무녀(巫女)의 배치라는 구성이 타에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이들 선지 자 내지 무녀를 그리는데서 보여주는 미켈란젤로의 해석이나 의미 부여도 독자적인 데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요나가 있는 천정에 붙은 벽에 바로 최후의 심판 그림이 위치한다.         이사야   메시아를 기다린 선지자 이사야가 정면을 향해 옆을 내려다보면서 앉아 있는 데서 드러난다. 직각에 가까운 팔과 다리의 포즈는 등뒤로 둥글게 윤곽을 주는 망토의 곡선과 함께 이 천정 벽황서 미켈란제로가 여러 번 시도하던 경향으로, 여기서도 반영시키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가만히 앉아 있는 좌상에서도 주로 그 포즈나 형태감의 흐름에서 정적인 고전주의를 초극하고 있다. 그런 예를 이 천정화에서는 수없이 헤아린다. 조각가인 그가 그림 세계에서 보여주는 조상적(彫像的)인 것 속에서 나타내고 있는 그와 같은 특수 경향은 그의 예술로 하여금 고전적 이상주의 속에 이미 싹트고 있는 매너리즘적인 특성을, 그것이 나아가서는 과장되는 공간감과 더불어 바로크적인 특성을 지닌 것의 근거로 지적 받기도 한다.         노아의 燔祭(번제)   노아의 번제의 주제로 알려진 내용은 홍수에서 구제된 노아가 그의 처와 딸, 그리고 식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에게 감사의 번제를 올리는 장면으로 창세기 8장 20-21절에 나온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알려진 바와 같이 미켈란젤로는 이 천정 벽화에서 캇시나 전투 하도(下圖) 이후 처음으로 프레스코 벽화 제작에 임하였고, 힘든 경험을 겪게 되었다. 방주 문 앞에 딸과 처 사이에 서서 하늘을 가리키며 준비를 지시하고 있는 흰 수염의 노아의 모습에는 상의 요셉과 닮은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표현은 후기의 작품에 비하여 딱딱하다. 둘레에는 인간의 네 가지 감각 [후각, 시각(右下), 촉각(右上), 청각(左上), 미각(左下)]이 나체 의인상(擬人像)으로 표시되고 있다.         하늘과 물의 분리   하늘에서 물을 분리하는 일은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창조하신 다음 둘째날에 이룬 일이지만, 앞서 말한 그림의 순서로서는 천체(天體)의 창조 다음에 배치하였다. 그 이유는 네 귀퉁이에 물질계의 상징으로 보이는 4원소의 의인상을 함께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창세기 1-9, 10) 이런 내용에 그림의 주제를 맞춘 것으로 추측되는 것은 나체상의 상징과 어느 정도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람, 즉 공기의 상징과 물, 불과 흙의 상징을 이들 속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푸른 옷을 둘러 쓴 여자같은 상은 물(左上)을 나타내고 곱슬머리는 불(右下)이 아닐는지. 두 손을 번쩍 든 하나님은 아래를 보면서 부유하고 있다.         원죄   여기서는 두 가지의 장면이 동일화면에 나타나고 있다. 중앙의 지혜의 나무를 중심으로, 왼쪽은 나무를 감고 있는 뱀에 유혹되어 이브와 함께 나무 열매를 따려는 아담, 오른쪽에는 천사에 의하여 낙원에서 추방되는 두 남녀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거기에 열매를 따려는 아담의 뻗은 파로가 유혹하는 뱀의 팔, 그리고 천사의 검 (劍)을 피하려는 아담의 뻗은 팔에서 다시 양 면(面)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균 제감과 나무를 이중(二重)으로 감고 있는 여자 얼굴의 뱀과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천사로 두 부분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오른편의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는 브란카시(Brancasi) 예배당의, 울면서 쫓겨나는 마사치오(Masaccio)의 같은 주제의 상을 방불케 하는 바 없지 않다. 그러나, 젊은 시절 흠모하던 이 작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은 감정이 흐르고 있다.         에제치엘 EZECHIELE 1510년 355X380Cm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 부분     성 베드로의 책형   앞서 본 티토스의 소묘에서처럼 전체로 묶여 있거나, 매여 있거나, 또는 추락하는 걷잡을 수 없는 부자유스러운 육체 속에 정신적인 고통을 내뱉고 있는 것이 경험상으로 봤을 때의 그 당시의 미켈란젤로의 예술 원리라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그의 특성은 오늘날 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는 여러 미완성 작품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이런 정신과 육체의 싸움에는 거의 비극적이라 할 성향마저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것에 속하는 화제(畵題)로서 적절한 것이 후기 작의 에서도 드러난다. 화면에는 사선(斜線)으로 구획하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린 베드로가 중심이 되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미 중앙의 그와 같은 장면에 대 응할 만한 격렬한 움직임을 주위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무거운 하늘이 짓누르는 것처럼 모두가 속으로 침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울의 回心   그림은 바울의 다마스커스에서 있은 회심(回心)사건 을 다룬 것이다(사도행전 9장). 70살 가까운 미켈란젤로는 교황 파울러스 3세의 명에 따라서 벽화가 거의 완결되려 할 때 이것을 다시 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교황의 이름에 따른 바울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다. 기독교에 강한 반감을 가진 사울이 전도하는 제자들을 박해하려고 대사제(大司祭)의 편지를 가지고 그들이 활동하는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도중,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빛이 내려와서 눈이 어두워지고 땅에 넘어졌다. 그때 '사울, 사울, 왜 나를 박해하는가?'의 소리가 들려와서 누군가고 물었더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그 후 기도한 그가 3일 후 다시 눈이 뜨이게 되자, 그는 신력(神力)에 감동하여 기독교로 개종(改宗), 이름을 바울(Paul)이라 하였다. 화면에는 하늘의 빛으로 넘어진 사울이 부축을 받고 있고, 하늘에는 예수와 더불어 이 기적을 보는 성자들이 있다.         미래의 왕 우지아와 그의 어머니 IL FUTURO RE OZLA 1510년 245X340Cm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 부분         미래의 왕 에제치아와 그의 어머니 IL FUTURO RE EZECHLA 1510년 245X340Cm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 부분         미래의 왕 조로바벨과 그의 양친 IL FUTURO RE ZOROBABEL 1509년 245X340Cm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 부분         미래의 왕 요시아와 그의 양친 IL FUTURO RE GIOSLA 1509년 245X340Cm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 부분         티토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칙서로 일단 고된 일에서 해방된 미켈란젤로가 1532년 후반 로마에 들렸다. 거기서 여러 즐거운 친교를 맺은 것을 그 때의 편지에서 전하고 있다. 그 중에는 카발리에리(T. Cavalieri)와의 깊은 우정도 경험했다. 그 해 겨울이 미모의 귀공자가 와병에 들자, 위문으로 보낸 두 소묘가 가니메드(Ganymed)와 이 티토스라 전한다. 욕망에 쫓기던 거인 티토스가 벌을 받아 지옥에 떨어져 두 마라의 독수리에게 밤낮으로 간을 쪼아 먹히는 이야기이다. 이는 불법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사랑에 대한 형벌과 그 고통을 나타낸 것이다. 억센 독수리가 가하는 고통 속에 허덕이는 몸뚱이가 돌에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이 소묘의 내용이다. 후에 그린 머리를 아래로 십자가에 못 박힌 베드로는 이런 고대 신화의 기독교적 해석으로 옮긴 것이라 말할 수 있다.         聖요셉이 있는 聖家族   피렌체의 부유한 예술 애호가인 도니(A. Doni)의 혼례를 위해 그린 그림으로 속칭 라고 한다. 여기에서 성 안나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아기 요한이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같은 주제의 성가족 그림(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과 비교할 때 그 특징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뒤에 우뚝 솟은 성 요셉의 상에서다. 전통적인 구성에서는 요셉이 이런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바닥에 앉은 성모 마리아가 중심이 되어 몸을 뒤로 젖혀 요셉이 받들고 있는 그리스도를 안아 내리려는 모습에서 주요 인물 세 사람의 보다 밀접한 구성체가 성립된다. 이와 같은 군상의 구성체를 통해 드러나는 인체의 젖히거나, 굽히거나, 기대는 포즈는 그의 조각 작품에서 즐기는 기본 포름의 경향으로, 여기서 이미 그 기미 가 드러나고 있다.         켄타우루스族의 싸움   로렌초 데 메디치 궁정에서 우대받고 살면서 그곳 신 플라톤 학파 사람들과 교제하던 때의 작품이다. 네 발 달린 말의 상체(上體)가 인간 모습을 한 야수적(野獸 的)인 켄타우루스족(族)은 그 이웃 라피드 족(族)을 위협하던 족속이었다. 미녀 히포더마이어(Hippodamia) 혼례연에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그들 라피드 족의 아 낙네를 약탈했다는 켄타우루스 족의 신화 이야기가 주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보여주는 미켈란젤로의 관심은 켄타우루스족과 싸우는 라피드족이 얽히고 설키면서 드러내 놓고 있는 나체(裸體)의 어지러운 군상(群像)이다. 가운데 팔굽을 들고 있는 켄타우루스 족의 에우류도스를 향해 손에 돌을 쥐고 던지려는 왼쪽의 라피드족과, 목을 조르고 머리칼을 잡아뜯는 오른쪽의 무리들 뒤로 달아나는 여자들이 함께 보인다.       계단의 聖母   일찍부터 표현력을 인정받은 미켈란젤로가 당시 피렌체 국부(國父)인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의 비호를 받고 공부하던 초기의 작품이다. 수유(授乳)받고 있는 듯한 그리스도를 품고 계단 앞에 앉아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 반 이상을 차지하며 전면(前面)에 부각되어 있다. 마리아의 거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옷의 감촉은, 옆을 응시하고 있는 긴장되면서도 정적인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유동적인 포름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 교체의 성격은 옆에서 위로 오른 계단과 그 뒤의 아이들의 모습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국부적으로 암시되거나, 부분적으로 형태감이 완성되어 드러나는 이 초기의 부조 형식에서는, 그의 이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유한 경향이 이미 엿보이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몸을 감싸는 옷과 무릎의 역할이라 할 것이다.           피에타   미켈란젤로의 초기 작품이며, 동시에 르네상스 전성기의 대표작이다. 그리스도의 시신(屍身)을 무릎 위에 앉은 어머니 마리아의 군상(群像)이 자연스럽고도 이상적인, 특유한 아름다움을 띠며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후기에 가서도 같은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그가 보여준 것은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상(大理石像)이었던' 이 작품과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이 피에타상 형식의 직접적인 계보는 중세 북구(독일) 형식의 개신(改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물 크기 이상의 마리아가 보통 크기의 그리스도를 크게 포개진 옷의 무릎 위에 비스듬히 사선으로 안고, 슬픔과 고통을 내면화(內面化)시키고 있는 청정하면서도 부드러운 아름다움은 당시의 미켈란젤로가 보여준 독특한 이상적 조화미의 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하겠다.         다윗   '젊고 불고 용모가 아름다운' 다윗은 골리앗의 목을 벤 승리의 청년상(靑年像)으로서 조각가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 발 아래 골리앗의 목을 누르고 검(劍)을 가지고 서 있는 부드러운 소년상(少年像)은 그런 일반적인 다윗상의 형식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가로서의 자신을 충분히 발휘한 것도 역시 다윗상에 서였다. 그러나 그가 1501년 8월 피렌체 대성당의 의뢰를 받고 제작하게 된 그 커다란 대리석상은 그와 같은 승리의 상과는 그 취향을 달리하고 있다. 망태를 메고 옆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서서 돌을 쥐고 막 던지려는 순간의 나체(裸體) 청년상이 균형감을 지키면서 드러나 있다. 그 자신 같은 때에 청동(靑銅)의 다른 다윗상을 만들었다고 전하나 실물은 없어졌다. 1495년 메디치가에서 일단 나온 그는 실물보다 큰 헤르쿨레스 상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모두 이 작품 제작의 환경을 들려주는 것이다.         피에타   이 피렌체 성당 피에타를 최초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바자리(G. Vasari)의 예술가전(傳)에서다. (1550) 부성(父性)의 사랑이랄까 권위 같은 것을 띤 머리 수건을 쓴 니코데모의 모습이 뒤에서 떠받들 듯, 흐트러지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앞으로 안고 있는 상이 지배적이다. 이 는 마리아 무릎 위에 안긴 고전주의 적인 방식의 그의 초기 피에타와는 그 취향을 아주 달리하고 있다. 여기서는 의 형식을 빈 새로운 중세(中世) 해석인 매너리즘의 배경이 커다랗게 부각된다. 그것은 더 이상 이상화(理想化)하지 않는 세계에로의 복귀라 할 수도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의 이 거친 군상(群像)작업을 보고 곧 부러질 것 같은 불안을 느끼기도 했다. 스스로 즐기면서 제작한 이 작품 속의 니코데모에서 작가의 자화상을 보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승리   율리우스 2세 묘당을 위한 조각 가운데는 1505년 최초의 계획 이후 여러 번 그 계획이 바뀌거나 축소됨으로써, 제외되거나 방치되거나 새로 계획되는 조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 가운데에 의 이름으로 불리는 조각은 같은 시기에 만들다 미완성한 채로 남아 있는 4체의 노예상(수염이 있는 노예, 젊은 노예, 아틀라스 노예, 잠이 깬 노예)과 의미 내용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 의 상이 나타내고 있는 상 자체에서 부터다. 노인(老人)을 발 아래 밟고 있는 젊은이의 나체상, 거기에서 그는 단순히 한 노인에 대한 승리가 아니고, 적어도 노인으로 상징되는 내용에 대한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중세(中世) 이래 내려오는 '시간의 할애비'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나타내는 4체의 의인상과 더불어 이를 초극하는 승리를 말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브루투스   브루투스의 이름으로 우수가 섞인 남성 흉상(胸像)이 미완성이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제작 중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외형화(外形 化)된 인물상이, 즉 하나의 이상(理想)의 상(像)이 새겨져 있다. 당시의 미켈란젤로는 거대한 시스티나 제단 뒤의 벽화를 그리면서, 기품있는 비토리아 콜로나 (Vittoria Colona)와의 은혜에 찬 친교 관계를 맺고 있을 때라, 많은 편지와 시작(詩作)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에 압제자 코지모(Cosimo 1세) 때문에 고향을 등지게 되어 로마에 피신해 온 피렌체 친구들을 그곳에서 만나게 됨으로써 오랜만에 여유 있는 시절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 속에 압제자 알레싼드로(Alessandro)를 살해한 로렌초 (Lorenzo de Medici), 즉 피렌체 공화국만의 자유의 보복자를 본 도나토(Donato Giannoti)가 있었다. 여기에 자극이 된 것이 압제자의 살해자로 이상화된 였다.         묶여 있는 노예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를 완성한 직후 미켈란젤로는 그간 중단되었던 율리우스 2세 묘당을 위한일을 계속 했다. 이때 만들어진 작품으로 이외에 , 와 같은, 노예의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벌의 나체상이 전한다. 묶여져 있거나 인간의 고통스러운 상태, 또는 부자유스러운 인간의 상태는 사실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에서 특히 자주 논의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이것이 대리석 조각을 주요 표현 수단으로 하는 조각가의 자기 과제라는 각도에서 보면 그 내용과 재료에 관한 예술적 연관성을 강조할 수도 있다. 이 노예상에는 분명히 계획된 묘당을 위한 조각이라는 목적이 있고 보면, 사체(四體)가 하나의 구성 단위로서 인간의 기질이나, 4대 원소를 곧 잘 의 인화(擬人化) 했던 당시의 표현상의 관습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여러 이뉴도의 경우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         로렌초 데 메디치(아침, 저녁의 擬人像)   1505년 이래 단속적인 추진을 해오던 율리우스 2세 묘당의 계획이 또 한 번 대폭적인 축소를 본 때가 1516 년이다. 같은 해에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피렌체의 성 로렌초 성당의 정면을 장식하는 일을 맡게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파기되어 버렸다. 이러한 심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카라라대리석을 사들여 준비에 열중하던 그의 실질적인 피해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에 수락하게 된 것이 레오 10세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을 합한 메디치가의 4인을 위한 묘당 계획이 되겠다. 처음 이 계획에서 미켈란젤로에게는 성 로렌초의 성당 자체가 가건축의 형편이었기 때문에 조각 분야의 일만을 담당시킬 작정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여기에 자신의 조각과 건축이 일치하는 하나의 통일적인 작품을 계획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상과 아침, 저녁의 의인상은 그런 것 중의 한 부분이 된다.         로렌초 데 메디치(아침, 저녁의 擬人像)   1505년 이래 단속적인 추진을 해오던 율리우스 2세 묘당의 계획이 또 한 번 대폭적인 축소를 본 때가 1516 년이다. 같은 해에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피렌체의 성 로렌초 성당의 정면을 장식하는 일을 맡게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파기되어 버렸다. 이러한 심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카라라대리석을 사들여 준비에 열중하던 그의 실질적인 피해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에 수락하게 된 것이 레오 10세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을 합한 메디치가의 4인을 위한 묘당 계획이 되겠다. 처음 이 계획에서 미켈란젤로에게는 성 로렌초의 성당 자체가 가건축의 형편이었기 때문에 조각 분야의 일만을 담당시킬 작정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여기에 자신의 조각과 건축이 일치하는 하나의 통일적인 작품을 계획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상과 아침, 저녁의 의인상은 그런 것 중의 한 부분이 된다.         聖母子   고딕적인 해석에 어울리는 장엄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성모자상(聖母子像)이다. 아기를 데리고 정면으로 앉아 있는 마리아상(像)은 '장엄한 마돈나'의 모습을 그 대로 지니고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풍요로운 치마폭으로 아기 예수를 감싸면서 한쪽 발을 내려 디딘 마리아와 그의 무릎 사이에서 내려올 듯 말 듯 하면서 자연스러운 자태를 지니고 서 있는 아기 예수에서 전 체에의 조화로운 분위기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아기 예수를 보호하는 마리아의 역할이 이중삼중(二重三 重)으로 강조되고 있다. 옷으로 보호받는 나체의 아기 예수, 무릎 사이에 그를 감싸고 있는 성모 마리아, 그 리고 마리아의 왼손이 아기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그 자태가 이를 모두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고전적인 성 모자상이 완성될 수 있는 이유를 당시의 주 문장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세   시스티나 천정화가 완성되고 얼마있지 않아서 당시의 교황 율리우스 II가 사망했는데, 그때 유언에, 1505년에 계약한 바 있는 미켈란젤로의 율리우스 II 묘당을 위해 10,000 두카덴(Dukaten)을 남겨 놓았다. 사실 이 묘당을 위해서 계획하고 추진하던 미켈란젤로의 그간의 노력은 그 시스티나 천정 벽화의 고난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식은 적이 없었다. 그곳에 안치될 상의 하나로 예정된 것이 바로 이 모세상이다. 머리 위의 뿔과 십계의 石板(석판)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고자로서의 모세는 그 위엄의 모습을 대리석에서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여기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여러 예언자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감을 넘어서서, 평생 대리석을 유일한 매체로 삼던 미켈란젤로의 조각가로 서의 본격적인 대결이 그의 응집된 量塊(양괴) 속에서 이 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론다니니의 피에타   같은 만년기 작품의 , 특히 피렌체의 같은 경우에서처럼 여러 인물의 군상이 아니고, 이 에서는 단지 마리아 혼자서 그리스도를 앞으로 떠받들고 있는 형태이다. 그 두 인물이 겹쳐져 있는 이 상은 이미 하나님 아들의 시신을 안고 지키고 있는 마리아의 인상으로서도 박약하고, 또 마리아에 안긴 그리스도의 인상도 박약하리만치 그야말로 특이한 자태의 미완성 상이다. 여기에 더욱이 흥미로운 것은 1974년에 발견된 그리스도의 頭部(두부) 부 분이다. 그것과 이 상을 연결시켜 볼 때 많은 수수께끼의 문제점이 제시된다. 그 가장 현저한 경우는 이 상의 上半身(상반신)이 더욱 더 가느다란 형태감으로 바뀌어, 어느 조형 형태상의 극단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두 만년의 그가 애쓴 자연스러운 인체의 표현에 중점을 둔 그의 표현 형식상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1    시작에서도 선과 리듬으로 독자들을 끌어야... 댓글:  조회:2709  추천:0  2017-10-28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7) : 마티스 Matisse Hemi (1869~1954)   정신성을 높여주는 선(線)과 리듬     화실의 裸婦   1898년에서 99년에 걸쳐 파리에는 새로운 미래적 조형에 열을 띤 젊은 화가들이 아카데미즘에서 근대 회화에로의 최초의 돌파구로서, 인상파적인 화풍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거기에서 각자 자기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마티스는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리더격으로, 런던으로 신혼 여행차 건너가서 터너를 연구하고, 시냑의 논문 '들라크로아에서 신인상파주의까지'를 읽는 등, 색채의 실험을 거듭했다. 이 작품도 당시의 프레 포비즘에 속하는 것으로서, 나부의 거의 빨간 색채와 그 배경의 강렬한 초록의 대조에 의하여, 점묘풍의 화면을 이루고 있다. 전체의 화면은 격렬한 터치로 되고, 순수한 색채에 의존한 화면 구성을 하려는 마티스의 시도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라 할 것이다.         豪奢   마티스에 있어서 포비즘의 시기는 1905년 부터 8년까지의 짧은 기간동안이었고, 그 이후 차츰 '균형과 순수함과 그리고 조용함'의 예술로 전환되어 간다. 그 무렵의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의 진정제가 될 수 있는 그러한 예술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의 '화가 노트'에 적고 있다. 이 작품은 수채화의 담채(淡彩)처럼 미완성으로 느껴질 정도로 엷게 처리되어 있다. 색채는 어느 때보다도 가장 억제되어 있고, 그 대신 마티스는 자연계의 속에서 나부가 나타내는 움직임을, 한순간 사이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곡선 속에 포착하려 하고 있다. 이 작품에 있어 그는 색채보다 극히 단순하게 데포르메된 데생에 의하여 한순간의 자연과 인간과의 상관 관계를 생명있는 영원성에 부각하려 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 상태가 빚는 약동감이 화면을 흐르고 있다.         푸른 나부         드랑의 초상   마티스가 드랑을 최초로 알게 된 것은 국립 미술 학교를 그만두고 그가 서른 살이 되던 해(1899년)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나가면서였다. 1905년 여름을 스페인의 국경지대의 지중해안에 있는 어촌 코리우르에서 함께 지내면서 포비즘의 꽃을 피우고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들은 거기서 서로의 초상도 그렸는데, 마티스는 이 작품에서 드랑을 젊고 생기 넘치는 동료로 표현하였다. 이 초상에서 그는 그늘 부분에도 어두운 색을 넣지 않고 동일 색가(色價)의 대립되는 색을 놓아, 사물의 명암이 아닌, 색과 색의 관계를 형성하는 색채적 구성으로서의 색면으로 표현했다. 배경의 색도 이등분되어, 그것은 주황, 노랑, 빨강의 주제가 가지고 있는 색과의 대비적 효과로서의 보색 관계를 형성하려는 것이다.         自畵像   1899년에 스승 모로가 죽고, 그 다음 해에 미술 학교를 그만 두고 카리에르의 화숙 (畵塾)에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면서 드랑과 비에트와 가까워진다. 그리고 화상 보라르로부터 세잔의 작품 를 사서 간직한 것도 이때이다. 이 작품은 그 다음 해 그가 31살이 되던 해의 작품으로, 정기(精氣)가 넘치는 자화상이다. 명쾌한 필치와 색채의 미묘한 뉘앙스, 명암의 적절한 배분 등 종래의 고전에서 배운 화법에서 차츰 탈피하고, 단순하고 명쾌한 색면에 의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등 마티스의 조형적 의지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납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얼굴의 처리는 코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 명암의 표현 의도에서가 아니라, 색채 그 자체의 가치를 발현한 듯 하다. 상체의 하얀 셔츠 위에 여러 가지 색 터치를 한 것은 색채 그 자체의 언어를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노트르담 寺院   1899년 마티스가 국립 미술 학교를 퇴학한 것은 그가 예술에 있어 혁명적인 하나의 투사가 될 것을 예견한 것 같다. 이 작품에서 그는 분명히 포비즘에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자네는 회화를 단순화하게 될 것이다.'라고 미술 학교 때의 스승 구스타브 모로로부터 지적받은 마티스가 '단순화'에의 충동을 어떻게 작품에 나타내고 있는가를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정면 양쪽에 두 개의 종루(鐘樓)가 서 있는 노트르담 성당이 있고, 그 앞을 세느 강이 흐르고 있다. 이것은 당시 세느 강가의 보르테르 거리에 있는 아틀리에의 창에서 내다본 조망(眺望)이다. 거기에 보이는 사원도 다리도 배도 물도 모두 활기 넘치는 필치로, 구체적인 사물의 고유형이나 고유색을 떠나 화면상에 생겨나는 회화적 감동의 요소로서 순화된 형과 색채로 변하여 있다.         오후의 노트르담 寺院   과 위치에서의 조망인데, 구도상에 약간의 변화를 일으켜 그의 아틀리에 옆에 나란히 선 건물의 일부가 수직으로 들어와 있다. 2년 전의 거칠고 중후한 화면에서, 조용하고 맑은 평면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전작에 비하면 대상을 훨씬 객관적으로 묘사하려는 화가의 의도가 나타나 있다. 세느 강의 다리가 물에 비친 것이라든지, 원근에 의한 공간 구성이 보다 확실해진 느낌이라든지, 강둑을 따르는 거리의 묘사도 훨씬 분명하게 그려 지고 있다. 그러나 그 구성 방법은 어디까지나 색채의 알 맞는 배분에 의한 것이지, 형태의 객관적 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의 마티스는 그 나름대로 이러한 같은 주제에 의한 그의 독자적 표현 방법을 찾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보기라고 할 수 있다.         호사 정숙 쾌락   1900년 이후 마티스는 지중해안의 밝은 광선에 강하게 끌리고 있었다. 신인상파의 지도자 시냑이 있는 생 트로페와, 스페인의 국경 지대에 가까운 지중해안의 마을 코리우르에 드랑과 함께 체재한 마티스는 그의 화면 색채에 있어 눈부시게 명쾌한 혁명을 가져오는 계가가 이루어졌다. 많은 포비즘의 회화는 인상파적인 전통을 이어 받아 현실 세계의 환희를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04년 생 트로페에서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하여 제작한 신인상파의 점묘 화법을 활용한 것으로, 그의 작품 발전에 있어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명한 수작이다. 풍경에 인물을 배치한 구도는 시냑이나 크로스의 작품, 세잔의 , 혹은 샤반느의 등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지적되고 있다.         窓   1905년 여름, 드랑과 함께 스페인의 국경 근처에 있는 지중해안의 마을 코리우르에 체재하면서 마티스는 그의 작품상에 큰 비약을 가져온다. 이 작품도 그 무렵의 점묘적 분할주의의 수법으로 그린 에 이어 제작한 그의 포비즘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에 속한다. 신인상파적인 영향에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순수한 원색을 대담한 터치에 의하여 시원스럽게 화면을 처리하고 있다. 색채는 자연 속의 대상 고유의 색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화면 안에서 완벽한 조화의 실현을 위하여 재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포비즘을 실현한 색채 해방, 색채 독립인 것이다. 여러 색채에 의한 화면 구성은 필연적으로 사물을 평면화하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 있어 화면 아래쪽 중앙에 있는 화분과 꽃은 무늬처럼 평면화하고, 창밖의 경치도 모두 그런 효과로 그려지게 되었다.         마르케의 초상   마티스의 최초의 마르케와의 만남은 1892 년 10월, 장식 미술 학교의 야간 클라스에 서였다. 그후 모로의 교실을 목표로 국립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함께 배우며, 그 우정은 두터워졌다. 마르케는 마티스와 함께 1905년에 처음으로 열렸던 포비즘 전에 출품했으나, 후에는 새로운 인상파풍의 화가로서 단순한 풍경을 그리는 화가로 안정된다. 색채의 발루르에 예민한 감각을 나타 낸 마르케는 온건한 성격으로서, 마티스의 한 동반자였다. 이 작품이 주는 느낌은 배경의 분할된 빨강과 보라색, 그리고 얼굴에 여러 가지 색면으로 표현된 점은 포비즘적인 수법이지만, 색조는 마치 친구 마르케의 성격을 나타내려는 듯이 안정되고 있다. 빨강에서 보라까지의 색채의 해조(諧調)는 강한 대립보다는 무리없는 조화로 느껴진다.         마티스 부인의 초상   마티스는 1905년 과 을 살롱 도똔느에 출품하고, 이어서 이 작품은 그 전시 기간 중에 그렸다. 출품했던 작품들은 색채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발적이고 다채로운 초기의 포비즘적 경향인데, 이로써 당시 포비스트들이 살롱에 첫인정을 받는 기회도 주어졌다. 그러나 이 작품은, 상당히 억제된 수법으로 화면을 구축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를 교묘한 밸런스에 의하여 구사한 이 작품에 있어서, 마티스는 그가 단지 감각적인 색채가 아니라, 색채에 의하여 건실한 화면을 구성하는 화가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색채의 단순하고 평탄한 색면에 얼굴은 중앙의 녹색 가르마를 중심으로 양쪽을 구분하고, 경쾌한 터치에 의하여 단숨에 완성한 듯한 생생함을 지니고 있다.         녹색 눈의 젊은 여인   1908경 이후의 마티스 작품은 필요없는 세부 묘사를 완전히 벗어나서 볼륨이나 명암의 표현에 마음을 쓰지 않는 단순한 수단에 의한 표현에 정진한다. 화려한 것, 호화로운 것을 추구하려고 할 때, 마티스는 멈출 줄을 모르는 관능(官能)의 기쁨에 빠진다. 그것이 틀림없는 하모니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지극히 관능적이고, 동시에 조금의 틈도 없는 구성이 마티스라는 화가의 특성을 이루게 된다. 이 작품도 그러한 그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작품으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얼굴과 그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위쪽 화면과 목 아래의 화면이 양분되고, 또 아래쪽은 오른쪽과 왼쪽을 나누어 호방한 색으로 처리하고 있다. 얼핏 보면 조형 요소를 무시한 듯 앞에 있는 인물의 주제와 배경이 서로 맞싸우는 시끄러운 화면 같으나, 그의 '장식'과 '표현'이라는 2대 요소의 결합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마닐라 쇼올을 걸친 마티스 부인   마티스는 1906년경부터 몇 번에 걸친 아프리카 여행에서 아라베스크 무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차츰 그의 내면 속에 근동취미(近東趣味)의 엑조티시즘을 크게 자극하였고, 그것이 곧 색채의 단순화를 통하여 장식성(裝飾性)을 달성하게 된다. 이 작품도 그러한 장식적인 무늬의 호화로운 쇼올을 화면 중앙에 클로즈업시키고, 단순한 배경 처리를 했다.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색채가 마티스의 손에서는 놀랄 만큼 맑은 해조(諧調)를 가진 울림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그는 색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색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표현에 쓸모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선입견을 갖지 않고 색을 캔버스에 놓아 간다.' 마티스 부인의 그림자가 벽 위에 얼마나 맑은 청색으로 놓이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온 화면을 얼마나 투명하게, 화려하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둑   이 작품에서 마티스가 얼마나 대상이 가진 고유의 형이나 색에서 해방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어느 쪽에서 밝은 빛이 비치고, 또 어는 쪽이 그늘져 있는지, 사물의 묘사를 위한 명암에는 관심이 없고, 화면 자체의 구성상 필요로 하는 명암만 있을 뿐이다. 둑 위에 있는 나무들이 물에 비쳤지만, 비친 나무나 하늘이 더 짙은 색으로 그려져 있다. 색면 하나하나는 그 자체가 평면으로 장식되어, 풍경의 현실이 전연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밝고 축축하게 젖은 듯한 색들이 서로 어울려 그 자체적인 뉘앙스가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현실과는 다른 훨씬 처량하고 맑은 공기와 화려한 정경을 느끼게 하고, 그리하여 그것은 화면 독자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이르고 있다. 대상에 충실한 색이 아니라 화가가 필요로 하는 언어로서의 색을 대담하게 구사하고 있다.         빨간 조화   1907년에서 8년에 걸쳐 마티스는 여러 가지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스타일을 시도하면서, 이 란 작품에서 포브의 스타일에 최종적인 고별을 했다. 그것은 3 차원의 실내 공간을 표현한 것임에도, 화면의 거리감은 부정되고 벽고 탁자도 실내의 바닥도, 모두 동일의 평면 위에 놓여 있다. 탁자 위에만 있어야 할 식탁보의 무늬가 그대로 벽지의 무늬로 연속되고, 색채도 음영이나 명암은 거부한 채 색종이를 발라 놓은 듯 단순한 평면으로 되어 있다. 이런 일은 19세기적인 미학으로 보면 하나의 혼란으로 보이겠지만, 평면적인 이론에서 말한다면 훌륭하게 통일된 명쾌한 화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처음에 였으나, 곧 로 변경되고, 다음 해에 다시 로 되었다.         이본느 란베르 양   마티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입체파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색감에 있어서도 그의 화려하고 유려 하던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에서 설명했듯이 당시의 입체파의 영향을 그 나름대로 받아 들인 결과일 것이다. 1908년 전후의 피카소를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피카소가 인물의 얼굴을 무수히 강한 선으로 분해하여 재구성한데 대하여, 마티스의 경우 이 작품에서 선을 흐르는 빛의 율동으로 쓰고 있다. 날카로운 쇠붙이로 긁어낸 둥근선은 원을 그리며 운동하고, 볼륨의 표현과는 관계 없이 그것은 모델의 젊고 우아함을 강조하는 선으로서, 그녀의 둘레를 흐르고 있는 음향적인 빛과 공기를 눈에 보이는 것처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다. 마티에르 효과에 있어서도 날카롭게 긁어 낸 자국이 금관악기의 화음을 느끼듯 시원스럽다.         室內, 금붕어 어항   이 작품을 제작할 무렵부터 마티스의 화면에는, 검정이나 짙은 회색의 무채색이 도입되고 있다. 무채색과 유채색의 적적한 배색에서 화면을 보다 품위있게, 때로는 고전적으로 이끌어감을 느낄 수 있고, 특히 이 작품에 있어서는 당시의 화단으로부터 그 나름대로 받아들여진 입체파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즉, 실내의 구도를 보면 원근법적으로 처리하고 있으나, 벽이나 창문, 테이블 등의 시점을 약간 어긋나게 함으로써 화면의 분위기를 이상하게 부유성(浮遊性)을 강조한 듯하다. 1914년 가을, 마티스는 코리우르에 체재하면서 종합적 큐비즘 시대의 팡 그리스와 친교를 맺었는데, 그와 열렬한 회화론을 주고받았던 영향으로 느껴진다. 마티스는 금붕어 어항을 자주 그렸는데, 이 작품도 그 중 하나로, 창밖의 풍경과 연결시켜 화면 깊숙이 시선을 끌어가고 있다.           댄스   그의 이라는 작품과 함께 러시아의 무역상인 시츄키의 의뢰에 의하여 그려졌다. 모스크바에 있는 저택의 계단을 장식하기 위하여 그려진 것으로서, 활기 있는 리듬과 생명감이 넘치는 대작이다. 극도로 단순화된 푸른 하늘과 언덕의 초록으로 색면 대비를 이룬 배경 속에 다섯 명의 춤추는 댄서들이 손을 마주 잡은 형태는, 생명적인 무한을 갈망하는 암시적 무의로서 화면에는 유동하는 활기로 차 있다. 그것들은 마치 아라베스크 무늬로 화면 전체를 꿰뚫는 어떤 생명적 통일의 리듬을 시각화하고 있다. 색채는 단지 세 가지로, 격렬함과 풍부함을 가지고 있어, 마티스 자신이 '나의 파랑과 빨강과 녹색의 조화는 충분히 스펙트르와 등가(等價)의 것을 만들어 낸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모르풍의 가리개와 젊은 여인들   이 작품은 호화스러운 장식의 극치이다. 작품 에서 언급했지만, 그의 화가노트에서 말한 '균형과 순수함과 조용함의 예술'을 마티스는 이 작품에서 달성한 듯한 느낌이다. 부자집 실내를 야하지도 않고 또 부담감도 주지 않는 안정되고 편안한 분위기로 만들고 있다. 화려한 실내의 분위기에 맞추어 부드러운 흰색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의 느슨한 화제는 서로의 행복한 로맨스라도 이야기하는 듯하다. 배경에 서 있는 모르풍의 가리개는 마티스가 1912년에서 13년에 걸쳐 체재한 모로코의 항구 도시 탄지르에서 사온 것이 아닌지. 마티스는 탄지르의 화려한 색채와 이국 정서에 꼭 1세기 전의 들라크로아처럼 매혹 되었다. 그의 오달리스크를 주제로 한 작품과 함께 이 작품에서도 모로코 체험의 여운을 나타내고 있다.         피아노 레슨   이 작품은 조용한 평면 위에 몇 개의 직선과 장식적인 무늬 모양의 곡선으로 구성된 온화한 그림이다. 입체파적인 영향에서 다시 극도로 화면을 간결하게 절제하여 꼭 필요한 조형적인 어휘만으로 이 대작을 말끔히 마무리지은 마티스의 역량을 감탄하게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에서 왼편은 시원스럽게 열어젖힌 커다란 창이 있고, 오른편은 뒤쪽에서 높은 걸상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앞 쪽의 메트로놈의 박자에 맞춰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지켜 보고 있다. 왼편 아래쪽에는 테라코타의 여인 조각상이 앉아 있다. 이 작품 속에 스며있는 조용한 오후의 분위기에 억제된 색의 알맞은 배색과, 전체를 지배하는 기하학적인 구도가 서로 작용함이고, 실내로 비쳐 들어오는 듯한 정원의 반사광인 듯, 초록색의 은은한 분위기가 시원하다.         하얀 깃털   1917년에 시작되는 마티스의 지중해 시대는 양광(陽光)과 미녀, 그리고 꽃에 둘러 싸인 행복한 기간이었다. 1917년부터 29년 까지 12년간의 그의 작품의 특징은 '오달 리스크'의 주제에 평안과 우아의 작품을 형성한 시대였다. 1918년 11월에 제1차 대전이 종결된 감격과 함께 그의 화면은 비약적으로 밝아져 빛이 넘치고 내면에 잠재 해 있던 관능에 현저한 해방적 효과를 미치게 된다. 1916년부터 18년까지 마티스의 작품은 색조도 극히 억제되어 엄격했고, 구도도 큐비즘적인 냉정한 화면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의 화려함과 부드러움은 상당히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델 앙트와네트가 쓰고 있는 모자는 마티스 자신이 밀짚 모자에 깃털과 리본을 핀으로 꽂아 만든 것으로, 그것을 중심으로 가벼운 선의 아라베스크가 그림 전체에 행복감을 덮어씌우고 있다.         찬장   마티스는 이 작품을 그리기 20년 전에 '가장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정물도 풍경도 아니고 인물이다. 인물만이 내가 생에 대하여 간직하고 있는 종교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보다 더 가능케 해준다.'라고 그의 화가 노트에 썼다. 그러나 그는 많은 정물화를 그렸다. 찬장 위에 커다란 넥타이 모양으로 접힌 테이블 클로드가 바둑판무늬로 장식되고, 그 위에는 역시 무늬 모양의 배가 하나 놓이고, 그 옆에는 네 개의 배를 담은 비딱하게 놓여 불안한 모양의 접시가 화면 전체를 흔들고 있다. 칼의 손잡이는 찬장에서 바깥으로 나와 조금만 건드리면 떨어질 것 같다. 칼이 놓인 방향 때문에 찬장의 바닥은 역투시법에 의한 화면으로 착각되기도 한다. 배치된 정물을 이렇게 마음대로 변모시켜 자기 감흥을 표현하는 마티스의 정물화에 대한 생각을 잘 알게 하여 주고 있다.         벽무늬 속의 장식적인 인물   이 작품은 니이스에서 지중해적인 밝은 광선과 색에 도취하여 그린, '평안과 우아의 예술'을 위한 그의 작풍(作風)을 이루는 그림이다. 여인의 몸매는 직각이 서로 교차하는 직선을 중심으로, 견고하고 힘찬 형태로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화면은, 그가 좋아하는 장식적 요소를 가득 채워 호화스럽고 사치한 조용함이 있는 기념적인 아름다움을 이루어 놓았다. 이 작품에 있어 그는 확실히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힘과 장대(壯大)함의 세계에 새로운 창이 활짝 열린 것처럼 눈부신 광경을 이룬다. 바닥에 놓인 카페트의 비스듬히 그어진 직선의 연속은, 벽에 장식된 꽃무늬와 아라베스크의 선과 충돌되는 듯하지만, 그 대조가 한층 마티스가 노리는 장식적 효과를 더해 주고, 더욱 힘있는 화면 효과를 이루게 하고 있다.           꿈   1930년대의 마티스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닌 것은 벽화 였다. 이 그림은 1931 년부터 33년 사이에 제작한 가운데의 춤추는 나부의 일부분을 그대로 옮겨놓은 작품이다. 단순한 구도에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색조로 나타낸 이 작품은, 대담하고 커다란 화면으로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팔과 머리로 형성된 역삼각형은 그 형태를 따라 순환하는 운동감과 조용히 잠자고 있는 여인의 정적인 모습이 서로 모순된 양상으로 느껴지게 한다. 지금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피부처럼, 상기된 분홍의 살빛에 가늘고 부드럽게 그어진 윤곽선, 바닥에는 바둑판 무늬를 이룬 짙고 옅은 푸른색이 맑게 얼룩져, 깊은 잠에 빠진 젊은 육체를 받들고 있다.         王의 슬픔   마티스의 만년의 작업 중에 그의 색채적 천재성을 자유 분방한 감각과 함께 발휘하게 하여 준 것이 시리즈다. 그는 이전부터 유화 제작의 준비 단계에서 포름이나 색을 연구하기 위하여 색종이를 잘라 붙여 보는 일을 해왔으나, 1941년에 큰 병을 앓으면서 침대 위에서 붓 대신 가위를 들고 많은 걸작을 남기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시리즈의 서커스의 정경을 나타낸 20점의 잘라 붙인 색종이 그림을 만들었는데 작품은 그 작업의 절정을 이루는 기념비적 대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어떤 의미로는 유화보다 순수하게 울려 퍼지는 색과 형태의 교환(交歡)을 느끼게 하는 이런 방식이 마티스의 이념에 더욱 밀접하게 잘 맞았는지 모른다. 이 작품은 농후한 설화를 아라베스크적 색과 형의 드라마로 꾸민 실로 감탄할 걸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안락의자에 앉은 여인   1908년경부터 마티스의 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국적인 무늬가, 1920년대에 와서 화면에 가득 찰 정도로 마티스는 장식무늬에 찰 정도로 마티스는 장식무늬에 열중하고 있다. 그 장식성이 조형적인 질서를 잃었을 때엔 단지 하나의 싸구려 장식에 끝 나지만, 마티스의 경우는 그가 의도하는 화면 효과를 위한 철저한 질서에 의하여 독특한 경지의 격조를 지니는 장식으로 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에 있어서도,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바닥과 벽면의 무늬는 등뒤에 있는 흰 줄무늬와 대조를 이루면서 리드미컬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또 그것은 몇 군데의 무늬가 그려지지 않은 색면에 의해서 종지부와 같은 역할을 하게 하고, 어떤 흐름의 질서를 찾는다. 그러한 화면 속에 부드럽고 경쾌한 필치로 여인을 그림으로써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음악   이 작품은 마티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음악적 대위법(對位法)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제목을 이라고 했고, 화면에 악보와 기타를 그려 넣은 것은, 연주하며 그것을 즐기는 음악적 주제를 취하기 위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마티스가 이 작품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화면에서 연주하고 있는 음악적 설명이 아니라, 초록 파랑 빨강 노랑 검정색에 의한, 그리고 유동적인 곡선 형태와 딱딱한 직선 형태와의 대립을 통한 대비적인 하모니를 화면에 연출하여, 선명한 음색을 통한 불협화음의 음악적 분위기를 실현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화면에는 가냘픔과 연약함이 전연 없다. 더구나 푸른 옷의 기타를 든 여인의 데포르마숑은 그녀를 의자에서 일으켜 지금 막 춤을 추게 하려는 듯, 그 두 다리는 춤추는 다리 모양으로 공중에 떠서 움직이는 듯하다. 건강미가 화면에 가득하다.         연보라색의 드레스   온 화면이 강한 생명력에 넘치는 리듬으로 가득 차 있다. 역시 이 작품에서도 마티스가 만년에 집념적으로 다루던 조형 요소와 제재가 모두 총합되어 있다. 그것은 꽃과 화려한 미녀, 그리고 오달리스크 등 즐겨 택해 온 제재들을, 직선과 곡선, 점들을 익히 써온 아름다운 색들에 의하여 한 화면 속에 총합적으로 다루어, 한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마티스가 간직하고 있던 생명에의 외경심을 경건한 자세로 찬탄한 것이 그의 만년의 작품에 간결하게, 또는 힘차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감동적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도 여인의 육체를 흐르는 생명적인 율동감 그리고 지금 막 피면서 꽂힌 듯한 싱싱한 꽃들, 그것을 받치고 있는 리드미컬한 형의 꽃병 등이 화면에서 생기 발랄하게 생명의 찬가를 부르는 듯, 싱그럽고 향기롭다.         검은 배경의 독서하는 여인   1914년경부터 마티스가 종종 써오던 검정색이, 이 작품에 와서 가장 풍부하게 검정색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화면 전체를 검정색으로, 꽉 채우고 여기 저기에 필요로 하는 형태와 색을 알맞게 배분하여 정말 격조 있는 회화적 효과를 이루는데 성공하고 있다. 중앙에 초록, 보라, 노랑색 들이 검정과 흰색이라는 무채색과 절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왼편 아래쪽에 독서하는 여인의, 아름다운 주홍색을 중심으로 한 금빛 노랑과 분홍색은, 대담하게 평면화된 담백한 형체와 함께 호화로우면서도 우아한 맛을 준다. 완전히 평면화된 화면이면서도 거울에 비친 여인의 뒷 모습이 그려져, 공간의 깊이를 느끼게 한 마티스의 회화적인 기량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되는 작품이다. 추상적인 공간 구성과 설득력 있는 구상적 주제와 멋진 화합이다.         생굴이 있는 정물   1940년 마티스는 71세의 고령이었고, 봄에 잠깐 파리에 머물렀다가 나치스의 프랑스 침공으로 니이스로 내려가 정착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제작 시간을 줄여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의 작품은 대작을 피하고, 화면은 점점 더 음악적 하모니를 기조로 한 상태가 된다.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개개의 사물을 취급하는 방법이나, 색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하모니는 음악적인 울림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에 있어서도 접시에 담겨진 생굴과 신선한 레몬, 칼과 물주전자가 주제이나, 그것들은 중앙에 거칠게 칠해진 파랑 색 테이블 클로드와 연분홍의 테이블, 그리고 진홍색의 평탄하게 칠해진 배경과 대비적인 조화를 이루며, 매우 신선한 배열에 의한 안정된 구도를 이루고 있다. 냅킨의 초록과 빨강은 화면의 인상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정물   아마 실제의 과일이, 또는 실제의 꽃이 아무리 신선하다 하더라도 이 그림이 주는 신선감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작품이 주는 감동은 그런 신선감이 모여 이룬 가장 멋진 음악적 하모니이다. 마티스는 그런 신선미를 효과적으로 더하기 위하여 테이블 위의 정물들 사이사이를 자유 분방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붓자국으로, 마치 붓에 묻은 색들을 지워 버리기라도 하듯 그어 놓았다. 정물이란 소재를 통해서 작가의 '기분', '상태' 그런 것들을 충분히 그려내고 있다. '내가 화면에 놓는 모든 색조로부터, 마치 음악의 화음과도 같은, 색의 살아 있는 화음이 연주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한 마티스의 말이 이 작품에서 말 그대로 실현된 듯한 느낌이다. 작품 속에는 주된 정물이 없다. 즉 구심적이 아니라 원심적으로 온갖 요소가 산적하여 전체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붉은 室內   최만 년에 와서 마티스는 화면 전체의 색을 한 가지 색으로 통일하여 칠하고, 거기에 데생을 하듯 사물의 형태를 그려 넣어 필요한 색 변화를 주는 수법을 쓰는 작품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이 작품도 바로 앞에 소개한 작품 와 같은 해의 작품으로, 검정색의 효과를 빨강으로 바꾸었다. 빨강이 주조가 된 실내 풍경으로, 테이블이나 의자, 벽이 모두 타는 듯한 빨강 속에 삼켜져 버리고, 마티스의 관능과 정서의 순수한 표현으로 화하고 있다. 뒤쪽 왼편에는 그림 같은 창이 그려져 있고, 오른편에는 자신의 작품 이 창보다 약간 크게 걸려 있다. 그는 종종 자기의 작품을 화면에 등장시켜 새로운 작품 속에서 색다른 어울림을 나타내고 있다. 최만 년의 그의 작품은 모두 이처럼 커다란 자유 속에서 해방된 조형을 즐긴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달팽이   마티스는 '가위는 연필보다 한층 감각적' 이라고 말하면서 색종이 그림 작업을 계속 했다. 그는 생에 대한 종교적 감정을 나타 내기 위해 이와 같은 대작을 제작했는데, 이 작품은 그랜드 오르간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울림을 자아낸다. 1940년대부터 계속해 온 그의 색종이 그림은 기존의 오브제를 화면에 도입한 꼴라쥬와는 다른 단색 괏슈를 칠한 종이에서 스스로의 이미지를 오려내어 그것을 풀로 붙여 구성하는 형식이다. 당초 이 는 '현실에 뿌리박은 추상적 패널'이라고 이름 붙여 있었다. 색종이의 배열이 휘도는 모양으로 움직여 나가게 하여 달팽이의 껍질을 연상케 하고, 그 운동은 연속적이 아니라 쉬었다가 움직이고 움직이다가 쉬는 영원한 반복을 상징하는 듯하다.         로제르 예배당의 내부   니이스의 서북쪽 20km 지점의 반스에 있는 도미니쿠스파의 수도원인 로제르 예배당의 벽화와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작하게 되는 것은 1948년이다. 이 작품들은 그동안 마티스가 해온 유화와 조각, 그리고 색종이 그림 일을 총합하여 이루어 놓은 것이라 할 것이다. 왼편의 초록, 노랑, 파랑의 신비로운 색유리를 경계로, 그 저쪽에는 하얀 타일을 붙인 벽에 검고 진한 선묘(線描)로 입과 코와 눈이 없는 성 도미니쿠스라고 불리는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와 떨어진 한쪽 벽에는 여러 가지 무늬와 기호가 집성한 '기호의 패널'을 이루고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그 하얀 유약한 타일에 투영되어 생명을 불어넣는다. 로제르 예배당은 마을과 떨어져 있어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루마니아풍의 블라우스   얼핏 보면 왼편으로 쏠려 불안한 느낌을 주는 포즈를 그린 것 같으나, 그러한 포즈가 화면에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아마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를 그리면서, 의자의 등받이를 생략함으로써 느껴지는 불안감일 것이다. 오히려 풍선 같은 블라우스의 부풀음과 함께, 그 불안감은 유머러스한 맛을 주기도 한다. 블라우스에 그려진 무늬의 인상은, 마치 여인의 청순한 심성과도 같이 여리고 깨끗하다. 이 작품은 마티스의 부인상 중 하나의 정점을 이루는 것으로, 작가는 이 그림에 압도적인 단순.명쾌를 주입하고, 통일감있는 장식적 평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색조에 있어서도 꽤 많은 여러 가지의 색을 쓰면서도 단순하게 느껴지도록 배려했고, 블라우스의 부풀은 어깨나 소매를 처리하는 선은 아주 경쾌한 맛을 준다. 이 작품을 이 경지에 가져오기 위하여 마티스는 15점의 습작을 거쳤다.         이집트풍의 커튼이 있는 실내   한 편의 섬세하고 웅장한 교향곡을 듣는, 여러 악기들이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작품이다. 투명하여 속에서 빛이 비쳐 나오는 것 같은 검정색의 바탕에서 꽃불과도 같은 무늬들이 소용돌이치고, 창문에는 가득히 정원을 메운 남불(南佛)의 소철나무가 힘껏 그 생명을 다하여 약동하고 있다. 그러한 평면적인 화면 아래에 원근법이 알맞게 표현된 탁자가 그려져, 공간의 깊이를 느끼도록 함으로써, 입체와 평면이 서로 도와 단조로움을 면하게 하고 있다. 마티스가 즐겨 써오던 검정색이 이 작품에서도 아주 효과적으로 성공하고 있다. 테이블 위의 석류 접시 아래의 검정, 오른쪽 커튼의 바탕색으로서의 검정, 창문 아래위의 벽색으로서의 검정은 모두 동일 색이지만, 거기에 놓여진 주변의 유채색에 따라 각각 다른 검정으로 느끼게 작용하고 있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