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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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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벨문학상과 시인] - 알을 깨고 새세계를 연 시인 댓글:  조회:6757  추천:0  2017-10-25
스위스 시인 - 헤르만 헤세   출생 1877. 7. 2, 독일 칼프 사망 1962. 8. 9, 스위스 몬타뇰라 국적 독일, 스위스 요약 헤세는 문명에서 벗어나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 문학가이다. 등 많은 작품에서 인간의 내면과 자아에 대해 다루었다.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헤세 194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서, 그의 주요 주제는 인간의 본질적인 정신을 찾기 위해 문명의 기존 양식들을 벗어나 인간을 다루고 있다. 자기 인식을 호소하고 동양의 신비주의를 찬양했으며, 사후에 영어권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동양에 선교사로 있었던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으로 마울브론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모범생이었지만 적응할 수 없었던 그는 칼프 탑시계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있었고 후에는 튀빙겐 서점에서 일했다. 갑갑한 전통학교에 대한 그의 혐오는 지나치게 근면한 학생이 자기 파멸에 이르는 내용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 Unterm Rad〉(1906)에 잘 나타나 있다. 1904년까지 서점 점원으로 일했고 그해 자유 기고가가 되었으며, 실패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극복하는 작가에 관한 〈페터 카멘친트 Peter Camenzind〉라는 첫 소설을 발표했다. 예술가의 내면과 외면의 탐구는 〈게르트루트 Gertrud〉(1910)·〈로스할데 Rosshalde〉(1914)에서 계속되었다. 이즈음 인도를 방문했고 후에 석가모니의 초기 생애를 그린 서정 소설 〈싯다르타 Siddhartha〉(1922)에 반영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중립국 스위스에 살면서 군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독일의 전쟁 포로들과 수용자들을 위한 잡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1919년 스위스의 영주권을 얻었고 1923년 그곳 시민이 되어 몬타뇰라에 정착했다. 인간의 위기에 대한 심오한 감성을 지닌 작가로서, 카를 구스타프 융의 제자 J. B. 랑과 함께 정신분석을 연구했으며 융과도 알게 되었다. 분석의 영향이 〈데미안 Demian〉(1919)에 나타나는데, 이 소설은 고뇌하는 청년의 자기인식 과정을 고찰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곤경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는 유명해졌다. 그의 후기 작품은 그가 융의 개념인 내향성과 외향성, 집단 무의식, 이상주의 및 상징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후기 문학 활동은 인간 본성의 이중성에 몰두했다.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1927)에서는 중년 남자의 유산계급 수용과 정신적인 자기실현 사이의 갈등이 묘사되었다. 〈지와 사랑 Narziss und Goldmund〉(1930)에서는 기존 종교에 만족하는 지적인 금욕주의자와 자기자신의 구원 형태를 추구하는 예술적 관능주의자를 대비시켰다. 그의 최후의 최장편 소설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1943)에서는 극도의 재능있는 지식인을 통해 사변적인 삶과 적극적인 삶의 이중성을 탐구했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헤르만 헤세 (1925년)   헤르만 헤세 서명 헤르만 헤세(독일어: Hermann Hesse, 1877년 7월 2일 ~ 1962년 8월 9일)는 독일계 스위스인이며, 시인, 소설가, 화가이다.   목차   [숨기기]  1생애 1.1성장 1.2교육 1.3방황 1.4글쓰기 1.5휴머니스트 1.6노벨문학상 2헤세의 문학적 특성 3대표 작품 4연보 5 6 7   생애[편집] 성장[편집] 1877년 7월 2일 독일 남부 시인의 고장 슈바벤 주의 뷔르템베르크 소재 소도시 칼프에서 개신교 선교사이던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와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1842-1902년)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전 남편을 잃고 아버지의 제자로 있던 요하네스 헤세와 32세 때에 재혼하였는데, 그녀가 5살 연상이었다. 요하네스 헤세는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는 선교사였고, 외삼촌 빌헬름 군데르트는 일본에서 활동한 교육가로 불교연구의 권위자였다. 이러한 환경은 헤세가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머니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고 헤세의 형제로는 누이 아델레(1875-1949),동생 파울 (1878년 출생 해에 사망), 게르트루트(1879-1880, 같은 이름의 작품이 있다.), 마리(1880-1953) 그리고 한스(1882-1935, 작품 인물 중에 가끔 등장하는 이름이다.)가 있다. [1] 1881년-1886년양친과 함께 바젤로 이사하여 거주했다. 1883년 아버지가 스위스 국적을 얻었으며, 1886년 (9세) 다시 칼프로 돌아갔다. 교육[편집] 1889년까지 실업학교에 다녔으며,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 신학자를 위한 첫 관문 통과했다. 이를 위해 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 국적을 얻었다. 1891년 14세 때인 1891년 명문 개신교 신학교이자 수도원인 마울브론 기숙신학교에 입학했다. 1892년 신학교를 도망쳐 나왔다. 부적응과 신경쇠약증 발병,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는 것이 중퇴이유였다. 6월에 짝사랑으로 인한 자살 기도. 정신요양원 생활. 11월에 칸슈타트 김나지움 입학. 신학교 때의 경험은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되었다. 1893년 10월 학업중단. 방황[편집] 서점원을 이틀만에 그만 두고, 1894년-1895년 시계부품공장 견습공으로 일했다. 2년간 방황하던 헤르만 헤세는 튀빙겐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삶의 안정을 찾았다. 글쓰기[편집] 1899년 첫 시집 낭만의 노래, 산문집 한 밤중의 한시간 발간. 가을에 바젤의 서점으로 옮겼다. 1901년 처음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1902년 어머니가 사망했다. 1904년 『페터 카멘친트(향수)』를 통해 헤세는 일약 독일어권에서 유명한 작가가 되며, 이후 그는 성공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할 즈음에 『페터 카멘찐트』는 6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한다. 휴머니스트[편집]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주의적 태도로 극우파들의 애국주의에 반대했다가 독일에서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돌출된 행동은 당시 지식인들이 전쟁을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을 지지하고 다른 민족에 대한 미움을 부추기기까지 하는 극우성을 보이는 것에 대해 실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를 보면서 환멸을 느꼈지만, 아시아 여행경험(1911년)으로 느낀 사해동포주의도 그의 애국주의 반대집필의 배경이 되었다. 이때 나온 작품이 『데미안』이다. 이 소설은 그가 크게 성공을 거둔 작품 중 하나이다. 노벨문학상[편집]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인쇄에 필요한 종이가 배당되지 않게 한 나치의 탄압을 받았다. 1946년에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헤세의 문학적 특성[편집]  이 이 문단에는 기여자 고유의 독자적인 연구 또는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적절한 참고 자료나 출처를 제시해 주세요.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7년 7월 28일에 내용의 검증이 요청되었습니다.) 헤세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전기 중의 하나는 1927년 위고 발(Hugo Ball)이 써낸 전기인데, 그는 헤세를 "찬란한 낭만주의 대열의 마지막 기사(騎士)라고 표현했다. 그는 또 끝없이 낭만을 추구한 작가로 기억할 만하다. 항상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청춘을 그리워했으며 이성을 향한 동경이나 호기심, 그 시절의 감미로운 심리묘사들이 잘 드러나고 있다. 헤세의 작품이 갖는 자전적 경향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18년 동안에 나온 산문들에서 숨김없이 나타난다. 헤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작중 인물로 본인이나 자기 인생에서 인상 깊게 경험한 인물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헤세의 글에서는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원초적 인간본능이라 할 수 있는 청춘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을 향한 동경, 자유를 꿈꾸는 인간적 해방의 가치가 녹아있기에 현대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현대문명이 자연과 유리되면서 대중은 외톨이로 전락했으며 인간소외는 강화되었고 우울증은 깊어지고 있다. 섬세한 심리의 소유자로서 일찍이 젊은 시절부터 정신병적 고통을 경험한 그는 그런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시, 음악, 그림 등을 통해 자연과 사회에 화합하는 삶의 길을 모색해왔는데, 이러한 그의 경험과 심리과정은 오늘날 정신적 외로움을 호소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영감과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또 그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는 양면성을 발견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통일과 조화를 꿈꾼 것이다.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선과 악, 이성과 감성, 신성과 마성 등 자연과 인간내면 세계의 양면성을 관찰하고 이들의 조화를 꿈꾸었다. 이질적인 대립을 통해 양자가 맞서는 긴장을 아름다운 형태로 지향함으로써 보다 높은 통일을 추구한 것이다. 데미안은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어두운 세계와 밝은 세계가 하나의 세계로 통일하기 위한 싸움이고, 로스할데는 남성과 여성, 속박과 자유, 시민성과 예술성이 끝없는 대립상태로 이어지면서 자유를 얻기 위한 과정이 그려졌고, 크놀프는 인간의 사회적 정주본능과 인간 원초적인 방랑본능의 대립을 통해 인간적 삶의 길이 무엇인가 묻고 있다. 지와 사랑(나르치스와 골트문트)에서도 신학교라는 지성적 세계에 속했던 골드문트가 항상 지성적 인물 나르치스를 그리워하면서도 자유와 감성의 세계를 탐구하고픈 열망으로 끝없이 방랑하였고 그런 감성의 힘을 미술과 조각을 통해 예술적 세계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처럼 그의 많은 작품에서는 안정된 기성의 세계에서 부자유와 억압을 느끼고 끝없이 인간해방을 탐구하는 원초적 인간감성을 향한 그리움과 인간성 복원을 추구했다. 대표 작품[편집]1904년 페터 카멘찐트 Peter Camenzind 1906년 《수레바퀴 밑에서 Unterm Rad》(1906년) 1910년 게르트루트 (봄의 폭풍우. 사랑의 3중주로도 번약) 부제는 - 음악소설 1914년 로스할데 (Rosshalde) - 화가소설 1915년 크눌프 (향수) 1916년 단편 청춘은 아름다워라 1919년 《데미안 Demian -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 1920년 1922년 《싯다르타 Siddhartha》 1927년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 1930년 지와 사랑(나르치스와 골트문트) 1932년 《동방 여행 Journey to the East》 1943년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 연보[편집]1877년 7월 2일 독일 남부 시인의 고장 슈바벤 주의 뷔르템베르크 소재 소도시 칼프에서 개신교 선교사이던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와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1842-1902년)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1년-1886년 양친과 함께 바젤로 이사하여 거주. 1883년 아버지가 스위스 국적을 얻음. 1886년 (9세) 다시 칼프로 돌아감. 1889년까지 실업학교에 다님.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님.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 신학자 위한 첫 관문 통과. 이를 위해 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 국적을 얻음. 1891년 14세 때인 1891년 명문 개신교 신학교이자 수도원인 마울브론 기숙신학교에 입학했다. 1892년 신학교를 도망쳐 나옴. 부적응과 신경쇠약증 발병,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는 것이 중퇴이유였다. 6월에 짝사랑으로 인한 자살 기도. 정신요양원 생활. 11월에 칸슈타트 김나지움 입학. 신학교 때의 경험은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되었다. 1893년 10월 학업중단. 서점원을 이틀만에 그만 두고, 1894년-1895년 시계부품공장 견습공으로 일했다. 2년간 방황하던 헤르만 헤세는 튀빙겐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삶의 안정을 찾았다. 1899년 첫 시집 낭만의 노래, 산문집 한밤 중의 한시간 발간. 가을에 바젤의 서점으로 옮겼다. 1901년 최초로 이탈리아 여행. 발표. 1902년  발간. 어머니가 사망했다. 1903년 서점 그만두고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 1904년 『페터 카멘찐트』 발표. 출세작으로 경제적 안정 속에서 문학의 길 전념.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할 즈음에 『페터 카멘찐트』는 6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한다. 평전 와 발표. 마리아 베르누이(1868년-1963년)와 결혼. 그녀는 헤세보다 9살 연상으로 수학가 가정 출신. 그녀와 사이에 세 아들이 있다. 브르노(1905-?), 하이너(1909-?), 마르틴 (1911년-1968년). 보덴호보근의 가이엔호펜으로 이주. 1906년 《수레바퀴 아래서 Unterm Rad》(1906년). 널리 알려진 자서전적 요소가 많은 작품. 1907년 중단편 소설집 발간. 월 2회 발행 잡지 편집을 1912년까지 함. 1908년 단편집 발간. 1909년 취리히, 독일, 오스트리아로 강연여행. 빌헬름 라베 방문. 1910년 게르트루트 (한국에서는 봄의 폭풍우. 사랑의 3중주로도 번약) 발간. 부제는 . 음악소설. 1911년 시집 도상에서 발간. 부부생활에 환멸 느껴 화가 한스 슈트르체네거와 함께 스위스 수도 베른으로 이사. 단편집 우회로 발간. 1914년 로스할데(Rosshalde). 화가소설. 제 1차 세계대전발발 후 입대 자원했으나 군무불능 판정. 베른의 독일군 포로 후생사업 가담. 극단적 애국주의를 비평하는 글로 매국노 비난을 받음. 1915년 크놀프(향수). 떠돌이 인생 이야기. 시집 고독한자의 음악, 단편집 길가에서 발간. 1916년 단편 청춘은 아르다워라 발간. 아버지의 죽음, 막내아들 마르틴 중병, 아내의 정신병 악화와 입원, 자신의 신병 등이 겹쳐 정신적 위기에 빠짐. 정신분석학자 C. G. 융의 제자인 랑의 치료를 다음 해까지 받음. 1919년 귀향 발표.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데미안 Demian -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발표. 폰타네 문학상은 신인작가에게 수여하기에 반려. , 단편집 작은 정원, 정치평론집 짜라투스라의 복귀 발간. 이 해 봄, 처자와 헤어져 홀로 남 스위스의 몬타뇰라로 이주 후 집필에 전념.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 월간지 공동 편집. 1920년 방랑 및 화가의 시 발간. 정신적 안정 위해 수채화를 많이 그렸음. 단편집 클링조르의 마지막 여름 발표. 화가소설이다. 1921년 혼돈 속으로의 조망, , 텟신에서의수채화 11점 발간. 1922년《싯다르타 Siddhartha 1923년 싱클레어의 비망록 발간. 부인 마리아와 정식으로 이혼. 스위스 국적 획득. 1924년 루트 벵어(1897-?) 와 결혼. 20살 연하였음. 1925년 요양객, 픽토르의 변신 발간. 작가 토마스 만을 방문. 1926년 기행과 자연풍물에 대한 감상집 그림책 발간. 프로이센 에술원 회원에 피선되었으나 1930년 탈퇴. 1927년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발간. 발간루트 벵어와 이혼. 1928년 수상록 관찰, 시집 위기 발간. * 1929년 시집 밤의 위안과 산문집 세계 문학 문고 발간. 1930년 장편 지와 사랑(나르치스와 골트문트) 발간. * 1931년 니돈 돌빈(1895년-1966)과 결혼. 18세 나이 차. 새집으로 이사. 유리알 유희 집필 시작. 1932년《동방 여행(동방순례) Journey to the East 》 * 1933년 단편집 작은 세계 발간. * 1934년 시선집 생명의 나무에서 발간. 1935년 우화집 발간. 1936년 전원시집 전원에서의 시간 발간. 고트프리트 켈러 상 수상. 1937년 회고기 시선집 어린시절의 회상기 불구 소년 발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본격화되면서 1945년 종전까지 헤세의 작품이 독일에서 출판되는 것이 금지됨. 1942년부터 자르캄프 사와 합의하여 취리히에서 헤세전집이 단행본으로 발간. 시집을 전집으로 발간. 1943년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 발간. 1945년 시선집 꽃가지, 동화집 꿈의 발자취, 1907년 쓰여진 미완성 소설 베어 톨트 발간.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괴테상 수상.
4    [노벨문학상과 시인] - 남아메리카 칠레 녀류시인 댓글:  조회:3192  추천:0  2017-10-25
칠레 시인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출생 1889. 4. 7, 칠레 비쿠냐 사망 1957. 1. 10, 미국 뉴욕 헴스테드 국적 칠레 요약 칠레의 시인. 남아메리카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1945) 여류시인이다. 대표작으로 이 있다.   스페인·바스크·인디언의 혈통을 이은 그녀는 칠레 북부의 한 마을에서 자랐으며, 15세에 교사가 되었고 뒤에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일생 동안 교육자·문화상·외교관을 거치면서 창작활동을 했다.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곳은 마드리드·리스본·제노바·니스 등지였다. 1914년 3편으로 구성된 〈죽음의 소네트 Sonetos de la muerte〉로 칠레상을 받음으로써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굳히게 되었다. 이 작품은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두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와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에서 따온 필명으로 발표되었다. 초기 작품들을 수록한 〈황량함 Desolación〉(1922)에는 연인의 자살로 막을 내린 연애의 후유증을 자세히 그린 시 〈슬픔 Dolor〉이 실려 있다. 이같은 슬픔 탓으로 그녀는 끝내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좌절된 모성애에의 강한 충동이 작품 속에 자주 나타난다. 〈부드러움 Ternura〉(1924, 증보판 1945)과 〈파괴 Tala〉(1938)에서는 인류에 대한 더욱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었으나, 대표적 주제는 여전히 어린이들과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그밖에 시집 〈포도 압착기 Lagar〉(1954)를 출판하기도 했다. 문화사절로서 가능한 한 많은 지역을 여행했으며, 국제연맹 및 국제연합의 사회·문화 위원회에서도 일했다. 풍부한 감정과 자신만의 독특한 비유와 언어로 채색된 그녀의 시는 널리 번역되었다. 1957년 랭스턴 휴스가 영어로 시선집을 번역하여 출판했고, 1971년 도리스 데이너가 또다른 시선집을 펴냈다. =========================   미스트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1889 ~ 1957) 미스트랄 생애 1889년 4월 7일 ~ 1957년 1월 10일 출생 칠레 분야 문학 작가 칠레의 여류 시인, 외교관. 아이를 대하는 엄마의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된 동포에 대한 사랑, 인류를 향한 박애주의가 잘 표현된 작품들을 통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1945년 남아메리카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작품 집 이 시의 배경은 가족들이 식탁 앞에 모이는 식사 시간, 소박하면서도 안락한 분위기의 주방이다. 식탁 위에는 ‘빵’이 놓여 있다.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강한 존재감을 보이는 ‘빵’을 ‘금빛’으로 묘사하고 ‘끝없는 기쁨’을 준다고 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굳은 손가락’으로 집어 ‘부드러운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빵’을 쪼개는 순간, 갈색으로 익은 표면 속에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화자는 이를 ‘검은 땅’이 ‘흰 꽃’을 피워 내는 것으로 비유하여 ‘빵’이 단순히 먹는 음식 이상의 존재임을 내비치고 있다. 2연에서는 자연의 생명력과 인간의 노동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밀’과 ‘빵’의 가치를 ‘신의 얼굴’이라는 시구로 드러내면서, 이러한 ‘빵’을 모두 함께 즐기지 못하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또한 ‘빵’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얻을 만큼 노력하지 않았다면 먹지 않아야 한다고 함으로써 배려와 정당한 노력,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3연에서는 화자가 강조하는 실천의 내용이 적극적인 나눔으로 확장된다. 굶주리고 있는 이웃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그들이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배려와 나눔, 사랑을 실천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해냄 =========================                  미스트랄(1941)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본명은 Lucila Godoy Alcayaga.  1889. 4. 7 칠레 비쿠냐~1957. 1. 10 미국 뉴욕 헴스테드. 칠레의 시인.   남아메리카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1945) 여류시인이다. 스페인·바스크·인디언의 혈통을 이은 그녀는 칠레 북부의 한 마을에서 자랐으며, 15세에 교사가 되었고 뒤에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일생 동안 교육자·문화상·외교관을 거치면서 창작활동을 했다.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곳은 마드리드·리스본·제노바·니스 등지였다. 1914년 3편으로 구성된 〈죽음의 소네트 Sonetos de la muerte〉로 칠레상을 받음으로써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굳히게 되었다. 이 작품은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두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와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에서 따온 필명으로 발표되었다. 초기 작품들을 수록한 〈황량함 Desolaci?n〉(1922)에는 연인의 자살로 막을 내린 연애의 후유증을 자세히 그린 시 〈슬픔 Dolor〉이 실려 있다. 이같은 슬픔 탓으로 그녀는 끝내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좌절된 모성애에의 강한 충동이 작품 속에 자주 나타난다. 〈부드러움 Ternura〉(1924, 증보판 1945)과 〈파괴 Tala〉(1938)에서는 인류에 대한 더욱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었으나, 대표적 주제는 여전히 어린이들과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그밖에 시집 〈포도 압착기 Lagar〉(1954)를 출판하기도 했다. 문화사절로서 가능한 한 많은 지역을 여행했으며, 국제연맹 및 국제연합의 사회·문화 위원회에서도 일했다. 풍부한 감정과 자신만의 독특한 비유와 언어로 채색된 그녀의 시는 널리 번역되었다. 1957년 랭스턴 휴스가 영어로 시선집을 번역하여 출판했고, 1971년 도리스 데이너가 또다른 시선집을 펴냈다.           죽음의 소네트     인간들이 집어 넣은 얼어 붙은 틈새로부터 태양이 비치는 겸손한 대지에 나, 그대를 내려 놓으리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대지 위에 나는 잠들지니 그대와 나는 같은 베개를 베고 누워야만 하니.   잠든 아기를 위한 자상한 어머니와도 같이 태양이 비치는 대지에, 나 그대를 잠재우리. 고통스런 아기와도 같은 그대 육체를 안음에 있어 대지는 부드러운 요람의 구실을 하리. 그 뒤 나는 떠나리. 푸르스름한 연한 달빛에 가벼운 폐물들이 차근차근 쌓여 갈 때 나는 이곳을 떠나리 아름다운 복수를 찬미하면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여하한 손길도 그대의 한 줌의 뼈를 탐내어 이 남모르는 깊숙한 곳에 내려오지 못하리.        밤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아가야, 이제는 잠을 자거라 이제는 석양이 타오르지 않는다. 이제는 이슬밖에 더 반짝이는 것이 없구나. 나의 얼굴보다 더 하얀 그 이슬이 -. 아가야, 이제는 잠을 자거라 이제는 길도 말이 없단다. 이젠 개울밖에 더 웅얼거리지 않는구나 나만 홀로 남아 있단다. 평원은 안개로 잠겨 있는데 벌써 파란 한숨은 움츠러들었구나 이제 세상을 쓰다듬는 건 부드러운 평온의 손길이란다. 아기는 자장가 소리에 맞추어 잠이 들었다. 대지도 요람의 미동에 잠이 들었다.         평온한 말 Serene Words / Gabriela Mistral    Now in the middle of my days I glean 이제 인생의 중간에 와서 나는  this truth that has a flower's freshness: 꽃처럼 싱그러운 진실을 줍는다. life is the gold and sweetness of wheat, 삶은 밀처럼 귀하고 달콤하며 hate is brief and love immense. 미움은 짧고 사랑은 광대하다     Let us exchange for a smiling verse 피와 상처로 얼룩진 시를  that verse scored with blood and gall. . 미소 짓는 시와 바꾸기로 하자. Heavenly violets open, and through the valley 천상의 제비꽃 열리고 골짝 사이로 the wind blows a honeyed breath. 바람이 달콤한 숨결을 불어 보낸다   Now I understand not only the man who prays; 이제 기도하는 이의 마음만 아는 것이 아니라 now I understand the man who breaks into song. 이제 노래하는 이의 마음도 이해하게 된다. Thirst is long-lasting and the hillside twisting; 목마름은 오래가고 산허리는 구불구불하나 but a lily can ensnare our gaze. 한 떨기 나리꽃은 우리의 눈길을 잡아맨다     Our eyes grow heavy with weeping, 우리의 두 눈은 눈물로 무거우나 yet a brook can make us smile. 시냇물은 우리를 웃음 짓게 하고 A skylark's song bursting heavenward 하늘 향해 터지는 종달새 노래는 makes us forget it is hard to die. 죽는 일이 어려움을 잊게 만든다.   There is nothing now that can pierce my flesh. 이제 내 살을 뚫는 것은 없다. With love, all turmoil ceased. 사랑과 함께 모든 소란은 그쳤다. The gaze of my mother still brings me peace. 어머니의 눈길은 아직도 내게 평온을 주고 I feel that God is putting me to sleep. 하나님이 나를 잠재우고 있음을 느낀다           빵을 가지러 가는 네 손을 낮추어라       빵을 가지러 가는 네 손을 낮추어라  네 엄마가 자기의 손을 낮추듯이  아들아, 밀은 공기로 된 것이고, 햇빛과 괭이로 된 것이란다.  그러나, 이 빵 '신의 얼굴'이라 불리는 이빵은  모든 식탁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애들이 그걸 갖지 못했다면  아들아, 그걸 건드리지 않는게 좋고,  부끄러운 손으로 너는 그걸 가져가지 않는게 좋다            작은 일꾼                             엄마 이 다음에 자라나면 나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일꾼이 될거예요. 바람에 춤을 추는 보리 이삭처럼 내 팔뚝도 아주 건강하게 자라날거예요. 힘이 불쑥불쑥 생기면 내 손으로 어여쁜 집 한 채 지어 드릴게요. 포도송이 알알이 영글게 하여 엄마 실컷 드시라고 내놓을게요. 꿀보다 더 맛있고 향기로운 과일도요.   풀 돗자리를 만드실 때는 엄마 대신 내가 짜 드릴게요. 그리고 풍차 집도 지어 드릴게요. 밀가루를 빻아 맛있는 빵을 굽고 대장간 일도 내가 맡을게요. 랄랄라 흥겹게 노래 부르며 조각배로 고기잡이도 나갈거예요.   마을에 있는 집들을 바라보시고 싶으면 창문을 얼마든지 내 드릴게요. 엄마가 “얘야 그만 됐단다” 하실 때까지 베어 온 보리를 하늘 꼭대기까지 쌓아드릴게요.   마을에서 으뜸가는 일꾼이 되어 엄마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거예요. 베어 온 보리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엄마 마음을 즐겁게 해드릴거예요.            발라드                        그이가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을 보았다 바람은 여느때 처럼 부드러웠고 길은 여느때처럼 고요한데 그이가 가는 것을 보았다. 이 불쌍한 눈이여   꽃밭을 지나가며 그이는 그사람을 사랑하였다 신사꽃이 피었다 노래가 지나간다 꽃밭을 지나가며 그이는 그 사람을 사랑하였다     해안에서 그이는 그 삶에게 입을 맞추었다 레몬의 달이 물결 사이에서 미소지었다 바다는 내 피로  붉게 물드는 일 없이   그이는 영원히 그 사람 곁에 있다 감미로운 하늘이 있다 그이는 영원히 그 사람 곁에 있다              아이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당신 아이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 당장 채워져야만 한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기다려준다. 하지만 아이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들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우리는 '내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의 이름은 '오늘'이기 때문이다.          중남미 시연구     1. 낭만주의 문학   중남미의 낭만주의 문학은 대략 1830년에서 1860년까지를 포함한다. 이 기간은 사회적 불안, 내란, 전제주의로 특징지워진다. 또한 지역의 족장들이 국가 권력의 공백을 대신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힘있는 자들이 출현해 정적들과 역경을 이겨내며 통치했다.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Juan Manuel de Rosas)는 모든 공권력을 장악하며 1829년에서 1852년까지 아르헨띠나를 통치했다. 에꾸아도르에서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Gabriel Garcia Moreno)가 1854년에서 1861년까지 신정 정치를 유지했다. 베네스엘라에서는 안또니오 구스만 블랑꼬(Antonio Guzman Blanco)가 1870에서 1887년까지 독재 정치를 자행했으며 빠라구와이에서는 후란시아(el doctor Francia)가 1840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잡았다. 한편 멕시코에서는 군주제로 복귀하는 현상이 있었다. 이뚜르비데(Iturbide)와 합스부르가의 막시밀리아노의 군주제가 있었으나 막시밀리아노는 1876년 베니또 후아레스(Benito Juarez)에 의해 제거되었다. 폭력으로 대변되는 내란의 시대가 지나고 정치적인 안정의 시대가 도래해 국가권력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낭만주의 특징으로는 자기 중심적, 이국적 요소, 독창성, 개인주의, 상상력, 자연과 사랑을 노래하는 것 등이 있다.   1)시    낭만주의자를 시와 동일시하는 것은 거의 절대적이다. 인간의 가장 고양된 정신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는 시보다 더 좋은 표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인은 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슬픈 심적 상태를 표현할 욕구를 느낄 때에는 고통을 토로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랜다. 따라서 주정적인 한 편의 시가 사회에 주는 영향은 점점 커진다. 주요 작품으로는 에스떼반 에체베리아(Esteban Echeverri -a)의 『포로』(La Cautiva), 『도살장』(El matadero), 호세 안또니오 마이띤(Jos Antonio Maitin)의 『시집』, 후안 소리야 데 산 마르띤(Juan Zorrilla de San Martin)의 『따바레』(Tabare), 가우쵸 문학6)으로 호세 에르난데스(Jos Hernandez)의 『마르띤 휘에로』(Martin Fierro)가 있다.   2. 사실주의, 자연주의 문학   중남미대륙의 19세기는 역사적 정치적으로 3시기로 나누어 진다. 첫째 독립기(100-1830), 둘째, 지방 호족의 시대 또는 무정부 시대(1830-1860), 셋째, 국가 확립기(1860-1890) 등이다. 첫째 시기가 신고전주의 시대에 해당되었고 낭만주의가 둘째 시기,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셋째 시기에 각각 해당된다. 낭만주의는 국가적 특징을 추구하였고 후에 국민의 생활상과 습관을 반영하는 사실주의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이 시기가 바로 초기 산업주의의 개혁과 이민의 물결이 있었던 때이다. 또 이 때부터 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전까지의 과도기에 후기 낭만주의 작품이 나타난다. 소리야 산 마르띤의 『따바레』가 그 한 예이다. 이렇게 신대륙에서는 새로운 문학 조류가 뒤 늦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문학 사조가 유행하였다.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사에서 나타나는 동질성의 결여는 정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실주의나 자연주의 시대에는 소설이 문학의 흐름을 주도한 결과 상대적으로 시가 매우 위축되었다.     3. 모더니즘   모더니즘 문체를 특징짓는 요소들은 상징주의(simbolismo)와 고답주의(parnasianismo)에서 영향을 받은 혁신과 새로운 언어의 추구이었다. 원래 고답주의는 사회적 측면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면서 언어적 측면에서는 형식의 잔잔함을 옹호하였다. 그리스 고전 신화에서 작품의 주제를 삼아 시를 통해 정적이고 대리석같은 미를 표현하였다. 불란서의 T. 고띠에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한편 상징주의는 불란서에서 1870년에서 1880년까지 고답주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문예 운동이다. 음악적으로 영혼의 상태를 표현하는 순수한 언어를 찾는다. 언어는 더이상 이성의 언어가 아니고 상징으로 짜여진 환상의 언어이다. 한 담론의 논리적 구문적 연결은 서정적 음악적 연결로 대치된다. 운율, 리듬, 유성 현상, 첩운법 등이 상징주의자들의 시에서는 관능적인 이메지의 부각을 위해 무시된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폴 발레리 등이 문학에서 음악성을 추구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모더니즘 문체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면은 루벤 다리오가 언급했듯이 시에다 ‘언어의 조화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운율감이 있는 세련된 시어들을 사용하여 시의 형식에서 자연스러운 음악성이 베어 나오게 하는 것이다. 고답주의에서 회화적인 면으로 중요시 되었던 시어들과 상징주의자들 사이에서 음악적으로 가치를 부여 받았던 시어들이 모더니즘의 시인들과 산문가들에 의해 새로운 운율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자들이 주창했던 단순한 언어적 표현과 귀족적인 시각에서 요구되어온 교훈적 내용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언어의 구사를 지향했다. 모더니즘 시인들은 상아탑의 주인임을 자각한다. 그 상아탑은 일상적인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대상으로 하지는 않는다. 루벤 다리오(Ruben Dario)는 ‘나의 시에서 공주, 왕, 황실의 일, 먼 나라와 상상적인 나라들의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무엇을 바라는가! 나의 삶과 내가 태어난 시간을 나는 혐오한다…’라고 말했다. 속세에서 격리된 시인의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예술이외의 다른 목적에는 무관심한 예술, 다시 말해서 소수를 위한 예술의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모더니즘 초창기에 등장한 무관심의 예술, 이름지어 ‘세련주의예술’(preciosista)은 사실주의와 실증적 물질주의에 반발하여 나타난 예술 운동이다. 세게적인 예술가의 의지는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는 길목을 준비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문학 운동도 그들에게 남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고답주의의 변화없는 형식과 상징주의자들이 추구한 시에 내재하는 음악성을 그들 나름대로 수용해서 모더니즘을 완성시켰다. 이밖에도 예술가를 일반인과 차별하여 예술가의 낭만적인 정신을 고양하여 고독한 영웅으로 만들었다.   신의 탑이여! 시인이여! 하늘의 피뢰침이여! (루벤 다리오)   모더니즘주의자들은 사실주의를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아름다움의 순수한 형태를 형상화할 수 있는 먼 도시, 신화, 상징, 이국적인 이름 등을 찾아나섰다. ‘모데르노(moderno)’라는 용어도 불란서의 상징주의에서 택했고 복잡하고 모순적인 하나의 광범위한 지적, 예술적 운동을 이루었다. 중남미의 모더니즘은 하나의 문학운동을 넘어 19세기와 20세기의 과도기로서의 ‘한 시대’를 뜻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성격이 매우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1) 시   19세기 말부터 라틴아메리카 제국들은 독립국가체제 정비에 들어갔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예술가들 사이에는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미국 문학도 월터 휘트만과 에드가 알렌 포우의 시와 함께 더 이상 영국 문학의 아류가 아님을 선언했다. 라틴아메리카 제국들의 작가들도 모더니즘의 첫 세대들로서 불란서의 고답주의와 상징주의를 소화해내며 중남미 문학이 스페인 문학의 음지가 아님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루벤 다리오의 『푸름』(Azul)으로부터 이러한 문학적 독립은 중남미 대륙에서 커다란 물결을 이루며 진행되었다. 주요 작가와 작품으로는 호세 아순시온 실바(Jose Asuncion Silva)의 『야곡 III』(Nocturno III), 호세 마르띠(Jos -e Marti)의 『이스마엘리요』(Ismaelillo), 『자유시』(Versos libres), 『유배지의 꽃들』 『Flores del destierro), 『황금시기의 시』(Versos de la edad de oro), 마누엘 구띠에레스 나헤라(Manuel Gutierrez Najera)의 『슈베르트의 세레나데』(La serenata de Schubert), 『그 때를 위하여』(Para entonces), 『공작부인 욥』『La duquesa Job), 루벤 다리오(Ruben Dario)의 『푸름』(Azul), 『불경스런 산문들』(Prosas profanas), 『삶과 희망의 노래들』(Cantos de vida y esperanza), 아마도 네루보(Amado Nervo)의 『흑진주』(Perlas negras), 『작은 목소리로』(En voz baja), 『고즈넉함』(Serenidad), 훌리오 에레라 이 레이시그(Julio Herrera y Reissig)의 『시간의 빠스꾸아』(Las pascuas del tiempo), 『밤의 근행』(Los maitines de la noche), 레오뽈도 루곤네스(Leopoldo Lugones)의 『황금산』(Las montanas del oro),『가축과 과일 예찬』(Oda a los ganados y las mieses), 『마른 강의 로만세』(Romances del Rio Seco) 등이 있다.     4. 현대시   중남미 현대시는 20세기 예술이 경험했던 모든 혁신적인 면들이 그대로 반영했다. 모더니즘의 정신을 최초로 그려낸 루벤 다리오를 선두로 전위시를 선 보인 바예호(Vallejo), 네루다(Neruda), 우이도브로(Huidobro), 보르헤스(Borges), 히론도(Girondo) 등의 낯설지 않은 시인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새로운 감수성’을 소개한 위에 언급된 시인들의 노력으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안목이 젊은 세대의 시인들 사이에 심어졌다. 시기적으로 볼 때 중남미 시의 발전 단계는 후기 모더니즘(Posmodernismo), 전위주의(Vanguardismo), 후기 전위주의(Posvanguardismo)로 나뉘어진다.     1) 후기 모더니즘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모더니즘과 전위주의 사이의 세대를 일컫는다. 구체적인 시기는 1910년에서 1930년 사이에 해당된다. 후기모더니즘의 문체적 특징은 간결함이다. 다시 말해서 감정적인 표현형식과 내용을 순화하는 것이다.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발도메로 훼르난데스 모레노(Baldomero Fernandez Moreno)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생이며, 의사이면서 시인이었다. 두 직업 사이에서 시를 선택하기까지의 고뇌를 노래한 『한 의사의 삶과 사라짐』을 1957년에 발표한 데 이어 『꽃 한송이 없는 70개의 발코니』를 선보인다. 몬떼비데오 태생인 델미라 아구스띠니(Delmira Agustini)는 『흰 책』(El libro blanco, 1907), 『아침의 노래』(Cantos de la manana, 1910), 『빈 성잔들』(Los calices vacios, 1903) 등이 있다. 『아침의 노래』의 시집은 인간 내면의 세계, 꿈의 비젼, 힘의 원동력으로서의 삶, 감정을 담은 어둠의 세계를 주제 면에서 다루고 있다. 라몬 로뻬스 벨라르데(Ramon Lopez Velarde)는 멕시코풍의 시를 남긴 시인으로 중남미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직설적인 감정 표현을 심오한 시적 형상으로 옮기는 빼어난 면이 돋보였다.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현란한 장식을 피하면서 구어체 표현법을 견지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숭고한 피』(La sangre devota, 1919), 『비탄』(Zosobra) 등이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은 칠레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남긴 예술가의 십계명을 보기로 하자. 첫째, 우주 위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 둘째, 무신론적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그와 유사한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를 섬기라. 셋째, 아름다움을 감각의 미끼로 주지 말고 정신의 자연식으로 주어라. 넷째, 방종이나 허영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말고 신성한 연습으로 삼으라. 다섯째, 잔치에서 너의 작품을 찾지도 말 것이며 가져가지도 말라. 아름다움은 동정성이며 잔치에 있는 작품은 동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너의 가슴속에서 너의 노래로 끌어올려라. 그러면 너의 가슴이 너를 정화할 것이다. 일곱째, 너의 아름다움은 자비라고 불리울 것이며 인간의 가슴을 기쁘게 해줄 것이다. 여덟째, 한 어린아이가 잉태되듯이 네 가슴 속 피로 작품을 남겨라. 아홉째, 아름다움은 너에게 졸리움을 주는 아편이 아니고 너를 활동하게 하는 명포도주이다. 네가 남자나 여자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는 더이상 예술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열째, 모든 창조물 중에서 너는 수줍어할 것이다. 너의 창조물은 너의 꿈보다 열등했으며 동시에 경이로운 신의 꿈인 자연보다도 열등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요 작품으로는 『황폐』(Desolacion)가 있는데 이 시집은 「예술가의 십계명」을 비롯해 불후의 명작인 「시골 선생님」(La maestra rural), 「바램」(El ruego) 「죽음의 소네트」(Sonetos de la muerte) 등의 시를 담고 있다.   2) 전위주의(El vanguardismo)   일 이차 세계대전(1914-1918, 1939-1945)기간 동안의 전 세계적 위기상황에서 비롯된 20세기의 혁신적인 예술 경향을 일컫는 용어가 바로 전위주의이다. 이러한 경향은 주로 비이성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며 회화, 음악, 문학 분야에서 다양한 예술 운동으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가 바로 그 예이다. 전위주의는 시기적으로 1920년과 1940년 사이에 유행한 예술 운동으로 공통적인 미적 특징은 시적 언어의 혁신, 전통적 형식의 포기,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부합하는 새로운 감각의 옹호 등이다. 중남미에서 일어난 전위주의 시 운동으로는 칠레에서 비센떼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의 창조주의(Creacionismo),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과격주의(Ultraismo), 뿌에르또 리꼬에서 루이스 요렌스 또레스(Luis Llorens Torres)의 빤깔리스모(Pancalismo), 도미니까에서 도밍고 모레노 히메네스(Domingo Moreno Jimenez)의 뽀스뚜미스모(Postumismo), 꼴롬비아의 레온 데 그레이프(Leon de Greiff)가 주도한 ‘로스 누에보스’(Los Nuevos)그룹, 꾸바에서 마리아노 브불(Mariano Brull)의 순수시, 뻬루에서 알베르또 이달고(Alberto Hidalgo)의 단순주의(Simplismo), 멕시코에서 마누엘 마쁠레스 아르쎄(Manuel Maples Arce)의 에스뜨리덴띠스모(Estridentismo) 등이 있다.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비센떼 우이도브로는 1931년 『알따소르』(Altazor)를 발표한다. 그의 창조주의는 형식의 자유로운 면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언어의 일관성을 무시한 면에서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 순수한 은유로써 경이롭고 환상적인 그의 시세계를 창조했다.   내가 한 개의 명멸하는 별 또는 반딧불이라면. 가슴엔 나비들이 머물고 상승하는 노래를 타고 한 줄기의 빛은 사막을 식민지로 삼고 이 눈빛 종달새는 나로부터 사라져만 간다.7)   뻬루의 세사르 바예호(Cesar Vallejo)는 젊은 시절에 혁명적 사상가들과 교류를 통해 시적 안목을 다졌다. 1918년에 『검은 전령들』(Los heraldos negros)을 발표하고 뒤이어 1922년 『뜨릴세』(Trilce)를 발표했다. 『뜨릴세』는 표현법, 그림, 심상, 구어체 언어, 연금술적 언어기법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고어, 교양어, 속어, 기교, 토착어 등을 사용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창조했다. 그의 시는 단순한 언어의 기교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조각내어 조망함으로써 각 시행마다 끊임없이 사상이 파편화되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나 지금에야 점심을 먹었고 가진 게 없네 어머니, 소원, 음식을 권하는 말, 물, 혼혈인이 달변으로 봉헌기도할 때, 심상의 늦음과 소리의 커다란 이음매 단추들에 관해 질문하실 아버지조차도 없네8)   빠블로 네루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20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sperada, 1924), 『땅에서의 거주』(Residencia en la tierra), 『총 가요집』(Canto general), 유고집인 『내가 살았음을 고백한다』(Confieso que he vivido)가 있다. 『땅에서의 거주』는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은 시집으로 이성을 배제하고 소위 ‘자동기술법’을 도입했다. 세계를 해체해서 보는 시각을 견지했으며 외부적인 현실을 답습하는 전통적인 규범을 파괴했다. 자유시는 연금술의 언어속으로 숨어버렸지만 비교법, 심상, 수사법, 그림자와 공간 사이에 위치한 ‘하나의 심장’의 시각에서 사물을 투영하는 몽상적인 상징법은 이해될 만하다. 20세기 예술의 새로운 경향은 원초적인 문화의 재평가이었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아프리카 예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아폴리네르는 그들의 시를 ‘검은 시’(poesia negra)라 명명했다. 중남미에서 검은 시는 스페인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결합되어 독특한 형태의 시를 낳았다. 1930년경 꾸바, 뿌에르또 리꼬, 도미니까는 흑인들의 검은 혼을 그들의 리듬, 춤, 음악, 역사, 미신을 통해 표출하는 중심 무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의 검은시가 출현하였다. 대표적인 시인과 작품으로는 루이스 빨레스 마또스(Luis Pales Matos)의 『검은 춤』(La danza negra), 꾸바의 민속적인 요소들을 시에 담은 니꼴라스 기옌(Nicolas Guillen)의 『군인들을 위한 노래와 관광객을 위한 소리』 (Cantos para soldados y sones para turistas, 1937), 『송고로 꼬송고와 다른 시들』 (Songoro cosongo y otros poemas, 1942), 『전체의 소리』(El son entero, 1947), 흑인적인 요소와 정치적요소 그리고 사회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대중의 몸짓으로 날으는 비enf기』(La paloma de vuelo popular, 1958)가 있다.   3) 후기전위주의(El posvanguardismo)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시는 전위주의 추구와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구어체와 일상적인 언어를 선호하지만 단지 사실묘사나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서사적 담론의 형태로 현실의 비리를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증언한다. 중남미 후기전위주의 시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시의 구조가 열려져 있다. 한 편의 시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독자들이 자기나름대로 시를 해석할 수 있다.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는 열려진 시를 ‘움직이는 시’라고 했다. 둘째, 시어가 이미지와 은유법의 사용이 아니라 다양한 글자의 혼합인 ‘꼴라쥬’ 라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셋째, 주제의 선택은 현실에서부터 시작한다. 후기전위주의자의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멕시코의 옥따비오 빠스는 오늘날 중남미의 시와 비평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인간의 뿌리』 (Raiz del hombre, 1937), 『단어속에 자유』(Libertad bajo palabra, 1949), 산문으로는 『고독속의 미로』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 『활과 칠현금』(El arco y la lira) 등을 비롯한 많은 작품이 있다. 니까노르 빠라(Nicanor Parra)는 칠레에서 ‘반시’(antipoesia)를 주창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는 현실을 증언하는 시각과 초현실주의의 시각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태동되기 시작해 신중한 산문시가 되거나 놀람과 유머가 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와 반시』(Poemas y antipoemas, 1954), 『러시아의 노래들』(Canciones rusas, 1967)이 있다.   ///출처: 문학아카데미      =====================   죽음의 소네트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인간들이 집어 넣은 얼어 붙은 틈새로부터 태양이 비치는 겸손한 대지에 나, 그대를 내려 놓으리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대지 위에 나는 잠들지니 그대와 나는 같은 베개를 베고 누워야만 하니.   잠든 아기를 위한 자상한 어머니와도 같이 태양이 비치는 대지에, 나 그대를 잠재우리. 고통스런 아기와도 같은 그대 육체를 안음에 있어 대지는 부드러운 요람의 구실을 하리. 그 뒤 나는 떠나리. 푸르스름한 연한 달빛에 가벼운 폐물들이 차근차근 쌓여 갈 때 나는 이곳을 떠나리 아름다운 복수를 찬미하면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여하한 손길도 그대의 한 줌의 뼈를 탐내어 이 남모르는 깊숙한 곳에 내려오지 못하리.        밤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아가야, 이제는 잠을 자거라 이제는 석양이 타오르지 않는다. 이제는 이슬밖에 더 반짝이는 것이 없구나. 나의 얼굴보다 더 하얀 그 이슬이 -. 아가야, 이제는 잠을 자거라 이제는 길도 말이 없단다. 이젠 개울밖에 더 웅얼거리지 않는구나 나만 홀로 남아 있단다. 평원은 안개로 잠겨 있는데 벌써 파란 한숨은 움츠러들었구나 이제 세상을 쓰다듬는 건 부드러운 평온의 손길이란다. 아기는 자장가 소리에 맞추어 잠이 들었다. 대지도 요람의 미동에 잠이 들었다.          평온한 말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Serene Words / Gabriela Mistral    Now in the middle of my days I glean 이제 인생의 중간에 와서 나는  this truth that has a flower's freshness: 꽃처럼 싱그러운 진실을 줍는다. life is the gold and sweetness of wheat, 삶은 밀처럼 귀하고 달콤하며 hate is brief and love immense. 미움은 짧고 사랑은 광대하다     Let us exchange for a smiling verse 피와 상처로 얼룩진 시를  that verse scored with blood and gall. . 미소 짓는 시와 바꾸기로 하자. Heavenly violets open, and through the valley 천상의 제비꽃 열리고 골짝 사이로 the wind blows a honeyed breath. 바람이 달콤한 숨결을 불어 보낸다   Now I understand not only the man who prays; 이제 기도하는 이의 마음만 아는 것이 아니라 now I understand the man who breaks into song. 이제 노래하는 이의 마음도 이해하게 된다. Thirst is long-lasting and the hillside twisting; 목마름은 오래가고 산허리는 구불구불하나 but a lily can ensnare our gaze. 한 떨기 나리꽃은 우리의 눈길을 잡아맨다     Our eyes grow heavy with weeping, 우리의 두 눈은 눈물로 무거우나 yet a brook can make us smile. 시냇물은 우리를 웃음 짓게 하고 A skylark's song bursting heavenward 하늘 향해 터지는 종달새 노래는 makes us forget it is hard to die. 죽는 일이 어려움을 잊게 만든다.   There is nothing now that can pierce my flesh. 이제 내 살을 뚫는 것은 없다. With love, all turmoil ceased. 사랑과 함께 모든 소란은 그쳤다. The gaze of my mother still brings me peace. 어머니의 눈길은 아직도 내게 평온을 주고 I feel that God is putting me to sleep. 하나님이 나를 잠재우고 있음을 느낀다           빵을 가지러 가는 네 손을 낮추어라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빵을 가지러 가는 네 손을 낮추어라  네 엄마가 자기의 손을 낮추듯이  아들아, 밀은 공기로 된 것이고, 햇빛과 괭이로 된 것이란다.  그러나, 이 빵 '신의 얼굴'이라 불리는 이빵은  모든 식탁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애들이 그걸 갖지 못했다면  아들아, 그걸 건드리지 않는게 좋고,  부끄러운 손으로 너는 그걸 가져가지 않는게 좋다            작은 일꾼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엄마 이 다음에 자라나면 나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일꾼이 될거예요. 바람에 춤을 추는 보리 이삭처럼 내 팔뚝도 아주 건강하게 자라날거예요. 힘이 불쑥불쑥 생기면 내 손으로 어여쁜 집 한 채 지어 드릴게요. 포도송이 알알이 영글게 하여 엄마 실컷 드시라고 내놓을게요. 꿀보다 더 맛있고 향기로운 과일도요.   풀 돗자리를 만드실 때는 엄마 대신 내가 짜 드릴게요. 그리고 풍차 집도 지어 드릴게요. 밀가루를 빻아 맛있는 빵을 굽고 대장간 일도 내가 맡을게요. 랄랄라 흥겹게 노래 부르며 조각배로 고기잡이도 나갈거예요.   마을에 있는 집들을 바라보시고 싶으면 창문을 얼마든지 내 드릴게요. 엄마가 “얘야 그만 됐단다” 하실 때까지 베어 온 보리를 하늘 꼭대기까지 쌓아드릴게요.   마을에서 으뜸가는 일꾼이 되어 엄마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거예요. 베어 온 보리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엄마 마음을 즐겁게 해드릴거예요.            발라드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그이가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을 보았다 바람은 여느때 처럼 부드러웠고 길은 여느때처럼 고요한데 그이가 가는 것을 보았다. 이 불쌍한 눈이여   꽃밭을 지나가며 그이는 그사람을 사랑하였다 신사꽃이 피었다 노래가 지나간다 꽃밭을 지나가며 그이는 그 사람을 사랑하였다   해안에서 그이는 그 삶에게 입을 맞추었다 레몬의 달이 물결 사이에서 미소지었다 바다는 내 피로  붉게 물드는 일 없이   그이는 영원히 그 사람 곁에 있다 감미로운 하늘이 있다 그이는 영원히 그 사람 곁에 있다              아이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당신 아이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 당장 채워져야만 한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기다려준다. 하지만 아이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들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우리는 '내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의 이름은 '오늘'이기 때문이다.                  
3    "마지막 잎새에도" 그는 "빛"이였다... 댓글:  조회:2270  추천:0  2017-10-25
/ 마광수 정지용의 서문이 붙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가 처음 간행된 것은 1948년이다.  그러나 해방이 가져다준 감격의 소용돌이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윤동주를 문학적으로 재평가하고, 그에게 정당한 위치를 찾아주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윤동주의 생애는 지극히 짧은 것이었다.  그는 1917년 12월30일 북간도 용정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고 애국정신이 강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간도로 이주하여 개척사업과 교육사업에 공헌한 지도적 인사였고,  아버지 또한 학교 교원으로 일했다고 돼있어 지사적 기개가 넘친 집안임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조부와 부친이 똑같이 그곳 교회에서 장로직을 맡은 것으로 보아 윤동주의 성장배경에는 가정적으로  기독교적 분위기가 상당히 강했던 것 같다. 아동잡지 `어린이'의 애독자였던 그의 어릴 적 이름은 해환이었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마치고 중국인 관립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전입했다. 그 러나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문을 닫고 일본 사람손에 접수되자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에 전입하였다. 그즈음부터 동시를 많이 써서 `카톨릭 소년'지에 `빗자루'(36년) `병아리' (36년) 등을 `동주'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1938년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41년 11월에 졸업한다.  이때 스스로 추려 뽑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자비출판하려 했으나 일본경찰의 단속을 걱정한 스승  이양하의 만류로 단념하고 후일 1942년 초 `평소동주(平沼東柱)'란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으며  동년 4월 일본 동경의 입교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가을에 경도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1943년 여름방학에 귀국하려던 그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고문섞인 취조를 받았다.  결국 그는 1945년 2월16일 28세의 나이로 운명하고 만다. 그는 한.일합방이후에 태어나서 민족광복을 맞이하기 직전에 죽었다.  그가 시를 썼던 시대(1936년~1943년)는 모든 사람들이 시를 외면했던 때였다.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그가 즐겨 바라보던 하늘에서는 공습 경보가 울리고 있었고  거리에는 군가가 흘러넘쳤다.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의 이미지, 그리고 `병원'이나 `위로'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소외의식에 넘친 절망적인 몸부림은,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창백하고 무기력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자신을 한탄하는 윤동주의 처절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자연을 소재로 한 상징적 어구들이 자주 보이는 것도 그 당시 문학인들에게 만연했던 현실도피,  자연귀의의 사조와 아주 무관하진 않다.  그러므로 윤동주는 저항시인이 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로 보아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의 시 어느 곳에도 저항의 기백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가 옥사한 것은  시대를 잘못 태어난 양심적 지식인의 억울한 비명횡사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는 깊은 애정과 폭넓은 이해로 인간을 긍정하면서도 실제로는 회의와 혐오로 자신을 부정한,  어찌 보면 결벽증에 가까운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해보고 낭만적인 폭음 또한 멀리했던, 당시로 보면 `시인답지 않은 시인'이었다.  기독교 가정에 기독교 학교로만 일관한 그의 환경이 그를 청교도적 죄의식으로 이끌어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남에 대한 애정이 곧 자기자신에대한 자괴감(自愧感)과 부정의식으로 변모하는 그의 인생관이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 있다.  `투르게네프의 언덕' `간' `쉽게씌어진 시' 같은 작품이 그 보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윤동주를 투쟁적 이미지의 저항시인으로 보지 않고 회의적 휴머니스트로 본다고 해서 그의 시의 가치가 깎여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스스로에 진짜로 `솔직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의 가치가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함께 생각될 수는 없다.  시는 시인의 자기통찰과 자기연민,그리고 본능적 욕구의 대리배설로 이루어질 때 한결 진솔한 감동을 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윤동주의 저항은 끊임없는 자기 내면 또는 본능적 자의식과의 투쟁이었다.  이러한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저항'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스스로의 시인 기질에 따른 시인으로서의 역할을 잘 자각하고 있었던 그는 시 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참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욕구와 비애를 시창작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했으며  철저한 자기분석을 통해서 자아의 변증법적 발전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가 목표했던 저항의 대상은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압박이나 조국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이었다.  `자화상' `참회록' `또 다른 고향' 등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내적 투쟁의 기록을 역력히 읽을 수가 있다. 특히 그의 시에 나타나는 자학적이며 자기부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 보기를 들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앞서 말했듯 `부끄러움'이란 시어가 나오는 작품이 10편이나 되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표피적 정서나 표피적 이데올로기(또는 사상)만을 좇는 경향과 비교해 보면  가히 파격적이리만큼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무언가를 `부르짖거나' `가르치거나' `과장적으로 흐느끼는' 대신 스스로를 `발가벗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윤동주의 `발가벗기'는 다분히 실존적 현학의 냄새나 종교적 형이상성의 냄새를 풍기는 발가벗기이다. 그래서 좀더 자신의 심층아래로 내려가 본능적 욕구를 발가벗기는 데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그는 `퓨리터니즘'이라는 옷을 태어날 때부터 두텁게 입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 당시 지식인들의 정신적 정황이 본능보다는 관념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윤동주의 `발가벗기' 정도만 가지고서도 우리 문학사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문학은 이광수류의 계몽적 시혜주의에서 한발자욱도 못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의 또 다른 장점은  그가 어느 계파나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의 독자적 시세계를 구축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라면 대부분의 시들이 정지용류의 감각적 서정주의나 카프식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시, 둘 중 하나일 때였다.  또 자연을 노래한다고 해도 전원주의적 회고주의가 고작이었고  윤동주처럼 자연을 내적 갈등의 상징으로 응용한 시인은 없었다.  남들이 모더니즘이니 초현실주의니 하고 외국의 유행사조에 민감해 있을 때  그는 다만 일기를 써나가는 형식이나 경향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의 심경을 담담히 고백해 나갔던 것이다. 나는 문학은 문학일 뿐 그것이 문학이상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엄청난 힘'이란 문학이 혁명가나 사제의 역할까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문학은 문학 나름대로의 `힘'을 어찌됐든 가지고 있다.  그 힘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요, 정신중에서도 이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이나 감각 또는 본능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처럼  단기간에 효력을 나타낼 수는 없다. 문학의 효력은 서서히 나타나 인간의 의식 자체를 변모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이란 이성과 감성, 본능과 도덕이 합쳐서 이룩되는,  보다 통체적인 직각(直覺)의 양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윤동주는 옥사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총각귀신'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상하게도  `투사'보다는 `유약하지만 솔직한 사람'을 한 시대의 상징적 희생물로 만드는 일이 많다.  윤동주는 바로 그러한 역사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일제말 암흑기,우리 문학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 (마광수 저 : (철학과현실사 발행) 중에서)        =========================덤으로 ...       윤동주의 부끄러움과 마광수 /김동렬     마광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말이다. 마광수의 제자 되는 분이 팟캐스트에 나온 적은 있지만 의미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마광수는 떠났다. 나의 궁금증은 영영 풀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마광수가 규명한바 윤동주의 시를 관통하는 정서인 부끄러움이 동성애 코드와 관련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의 궁금증은 묻힐 것이다. 윤동주는 27살에 죽었다. 기형도 시인은 28살에 죽었다.     나는 마광수의 얼굴에서 쓸쓸한 그림자를 보았다. 나만 그의 얼굴에서 그것을 본 것은 아닐 터이다. 그는 운명적으로 외로웠다. 사회의 냉대 때문만은 아니다. 냉대는 오히려 맞대응의 투지를 불러일으킨다. 그 이상이다. 기형도 시인은 마광수가 발굴해 등단시켰다.     그는 28살에 지금은 없어진 파고다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죽었다. 게이들의 집합처로 알려진 곳이다. 윤동주, 기형도, 마광수 셋 다 자녀도 없이 외롭게 살았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필자가 말하려고 하는건 세 사람에게 공통으로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다.     그것은 자기애다. 나르시시즘이다. 왜 그들은 자신을 탐닉하는 것일까? 자신에게 흥미가 있으니까. 야한 여자가 좋다는 마광수의 말은 모순된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나는 권력이 좋더라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권력을 빼앗기는 수가 있으니까.     야한 여자가 좋다고 선언하면 야한 여자가 도망간다. 그것은 마치 호랑이가 나는 사슴이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슴이 그 말 듣고 호랑이를 피한다. 위험한 자기소개다. 필자가 자기소개를 말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상대방의 호응을 구하는 절차가 필요한 거다.       일방적인 호소는 무례하다. 마당쇠가 주인집 마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멍석말이를 당한다. 마광수는 다수의 호응을 기대했지만 한국인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남자도 호응하지 않았고 여자도 호응하지 않았고 제자들은 교재를 구매하지 않았다. 외로워진 거다.        왜 남자들은 야한 여자가 좋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까? 좋지 않으니까. 사실 대부분 남자는 야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 좋아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위선이 아니다. 남자에게 야한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것은 판타지 속에나 머물러야 한다.     가슴이 강조된 여자 게임 캐릭터처럼 말이다. 비현실이 현실에 쳐들어오면 남자는 당황하게 된다. 예컨대 이런 거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여자는 입구 쪽에 서고 남자는 뒤쪽에 가서 선다. 남자는 자기 뒤에 누가 서 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왜? 공격당할까 봐.     누가 뒤통수를 흉기로 가격할지 모른다. 여자는 반대다. 여자는 등을 돌려 남자의 음흉한 시선을 방어한다. 남자가 운전하는 승용차의 뒷좌석에 여자가 앉으면 결례가 된다. 뒷좌석은 조폭 보스가 앉는 자리다. 뒤로부터 공격받을 일이 없는 안전한 자리가 되니까.     무엇인가? 야한 상황은 남자에게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해했는가? 개를 데리고 산책을 가보자. 개는 자기 냄새를 감추려고 하므로 집에서는 배변을 하지 않는다. 주인과 산책을 나가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몰래 배설해야 한다. 주변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한다.     빙글빙글 맴을 돌다가 배변하는 개도 있다. 그 순간은 개 입장에서 취약한 상황이고 공격받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새끼를 낳는 동물은 신음소리도 내지 않는다. 극심한 출산의 고통을 느끼지만 절대 고통을 표현하지 않는다. 나의 출산사실을 알리지 말라.     출산한 즉시 태반을 먹어치워 증거를 인멸한다. 새끼가 배설을 하면 핥아서 냄새를 지운다. 자신의 약한 고리가 되는 지점을 들키지 않는 것이 동물의 살아남기 전략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야한 상황은 인간에게 위태로운 상황이다. 들키면 안 된다. 말하면 안 된다.     야한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자다. 야하다는 것은 여성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야한 것을 무기로 삼아 남성을 조종할 수 있다. 그렇다. 마광수는 남자 마음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 여자의 입장을 대변한 거다. 여자들이 차마 못 하는 말을 대신해준 것이다.       레이디 가가나 마돈나, 김완선의 전성기 패션에는 야한 것을 무기로 삼아 남성을 조종하겠다는 권력자의 카리스마가 있다. 여성들은 강렬한 호피무늬 옷이나 땡땡이 의상 혹은 가죽벨트에 번쩍거리는 금속성 악세서리를 달아서 그러한 동물적 카리스마를 표현한다.        과거에 정양이라는 예명으로 수술한 가슴을 내세워 화보를 찍은 연예인이 있었는데 온라인으로 사진을 다운받아 볼 수 있었다. 돈을 내고 사진을 다운받은 사람은 당연히 남자였을 거라는 편견은 보기 좋게 깨졌다. 여자의 가슴을 훔쳐보는 사람은 다수가 여자다.         여자가 여자의 가슴을 훔쳐보는 사진은 인터넷에 많다. 제인 러셀의 가슴을 훔쳐보는 마릴린 몬로의 사진이 그러하다. 남자가 야한 것을 보면 마음이 끓어오른다. 그것은 강한 스트레스다. 왜냐하면 그 순간 숨을 쉬지 않기 때문이다. 100미터 경주는 무호흡경기다.     사람은 중요한 순간에 본능적으로 호흡을 멈춘다. 호흡을 하면 에너지를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격선수는 호흡을 멈추고 총을 발사한다. 타자는 호흡을 멈추고 자세를 잡는다. 권투선수는 호흡을 멈추고 가격한다. 격투기 선수는 상대방의 호흡을 읽고 들어간다.     호흡을 읽히면 죽는다. 이런 것을 액션영화로 묘사할 줄 아는 제대로 된 감독을 나는 발견하지 못했으니 유감이다. 이소룡 영화에 살짝 묘사되기는 하지만. 풀쩍풀쩍 뛰면서 리듬을 타면서 척 노리스를 두들겨주는 것이다. 상대방을 자기 리듬에 끌어들여 패준다.     웃을 때 웃음소리가 크게 나는 이유는 놀라서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추었다가 알고 보니 별거 아니라서 발작적으로 호흡을 재개하기 때문이다. 미소를 지어보면 알 수 있다. 어린이가 TV에서 야한 장면을 보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눈을 가리는 것과 같다.     어린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순수한 본래다. 그러므로 남자는 야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내숭 떠는 게 아니라 진짜로. 왜? 그 순간은 극도로 취약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공격받을 수 있다. 개도 자기 약점을 드러내는 행동을 대놓고 하지는 않는다.     부끄럽다는 말은 취약하다는 말과 같다. 민망하다는 것은 타인에게 약점을 들킨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럴 때 얼어붙는다. 마광수는 남자를 오해했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남도 생각할 것으로 믿었다. 뭐든 위에서 내려다보면 작아 보인다. 모니터로 테스트할 수 있다.     눈높이에 따라 피사체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맹수가 공격할 때는 눈동자가 작아진다. 눈동자가 작으면 김완선 눈처럼 무섭다. 조폭의 사백안이다. 양아치들이 눈 깔어 하고 겁주는 게 그 때문이다. 양아치는 눈을 야린다. 눈동자를 작게 하여 째려본다.     그게 동물의 공격신호다. 상대방이 작아보여야 공격할 수 있다. 상대방의 동작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동건처럼 눈이 크면 복서로 성공할 수 없다. 동체시력이 안좋게 된다. 날아오는 공의 궤적을 읽을 수 없다. 상대방의 다음 동작이 전혀 읽히지 않는 것이다.     목욕탕에서 다른 사람의 것을 보면 커 보이고 자기 것을 내려다보면 각도 때문에 작아 보인다. 그래서 남자는 성기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다. 욕설에 성기가 등장하는 게 이유가 있다. 욕설은 그것이 공격신호다. 초컬릿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성기를 떠올리면?        당연히 불쾌하다. 초컬릿도 좋고 섹스도 좋은데 왜 초컬릿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고 성기를 떠올리면 기분이 나빠질까? 섹스는 취약한 상황이다. 누가 쳐다보면 하던 섹스도 멈추게 된다. 포르노배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사람이 힘을 쓸 때는 피를 모아야만 한다.       피가 하체로 이동해 있으므로 힘을 쓸 수 없는 취약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능적인 불쾌감을 느낀다. 마광수는 남자의 원초적 본능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는 한국이 야한 사회가 될 것으로 전망했지만 그렇지가 않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한국 남자들은 공격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다. 공격당할 위험이 없어져야 야할 수 있다. 마광수의 오해다. 야한 상황은 유쾌한 상황이 아니라 자객에게 습격당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며 남자들은 여자의 야한 공격에 방어태세로 가서 자세가 굳었다.     인터넷에 음란물이 넘쳐나지만, 남자들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몰래 본다. 그 순간은 외부의 침입자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는 취약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마광수가 꿈꾸었던 야한 사회는 당분간 오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여전히 안전하지가 않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야한 것은 여자의 무기다. 여자는 얼마든지 야할 수 있다. 공격받을 걱정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 공격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제왕은 옛날부터 야했다. 이건희도 여자를 끌어들이다 죽은 판에 말이다. 이런 건 진지하게 토론해봐야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은 인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부끄러움이 취약함과 동의어이며 그것이 정글에서 살아남는 과정에 발달시킨 인간의 생존본능임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모르고 있고 필자 역시 모르고 있다는 사실만 확실히 알게 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야한 상황은 여자의 카리스마에 남자가 심리적으로 제압되어 위축된 상황이며 극도로 안전한 경우에만 남자가 이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삶에 찌들어 있는 대다수의 한국인 남자에게 그런 정신적 사치는 비현실입니다. 해외 신혼여행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런 극도로 편안한 심리상태로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광수는 정신적 귀족인 거죠. 반대로 그런 극도의 편안하고 안전한 무방비 심리상태를 경험하는 방법으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자들도 있지요. 샤크티 신앙의 탄트라가 그렇습니다.        탄트라에서 강조하는 야한 상황은 이런 것입니다. 샤크티 신도들이 섬기는 두르가 여신이 마히사 아수라를 제압하고 있습니다. 아수라의 왕 마히사는 시바의 은총을 받아 모든 적을 이기게 되어 있지만, 오직 여자에게만 패배합니다. 섹스를 은유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2    시도 "4분의 3"의 립상이 좋을 듯... 댓글:  조회:2127  추천:0  2017-10-25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6) :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이상미(理想美)를 뒤엎은 생활속의 미       버찌의 少年   초기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27세 때 그린 이 그림 속에는 지금까지의 회화 수업 역정(繪畵修業歷程)을 규지(窺知)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고, 반면 '마네 초기의 경신작'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델인 알렉산드르 소년은 마네의 작업장에서 잔심부름도 하고 붓도 빨아주는 사동이었는데 어느 날 이 소년이 마네의 작업장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감수성이 강하고 예쁘장한 미소년의 사체를 보고 마네는 겁에 질려 작업장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그 작업장 기둥에 굵은 못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누가 여기서 목을 매었느냐?'고 무심결에 묻자,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대답하여 마네는 대경실색, 다른 아틀리에로 옮겼다는 일화도 있다.           스페인 발레   보들레르가 마네에게 말했다. '마드리드 왕립 극장 무용단의 인기가 대단한데, 한번 구경해봐.' 마네는 1862년 8월 12일부터 11월 2일까지 무려 80일 동안 롱런한 이 '세빌리아의 꽃' 공연을 보고 감동, 이 장면을 화폭에 담기 위해 특별히 교섭, 공연이 없는 3일 동안 단원들이 포즈를 취해 주기로 약속받았다. 마네는 친구의 넓은 아틀리에를 빌려 스케치, 이 해 늦게 이 그림을 유채로 완성시켰다. 마네의 열성도 대단했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마네를 위해 사흘씩이나 포즈를 취해 준 성의도 무던하다. 친해지기 쉬운 정경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그렸는데 간결, 자유로운 필촉의 리듬이 발레의 리듬과 잘 어울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압상뜨를 마시는 사나이   1858년에 제작을 개시하여 다음해 관전(官展)에 낸 마네 최초의 살롱 출품작. 57년 에 만 들라크로아만이 찬표를 던졌고 나머지 심사 위원들은 모두 부표를 던진 불운한 대작이다. 마네와 아는 체하고 지내는 주정뱅이 불량아를 아틀리에로 모셔(?)와 강한 술에 취해 의식이 몽롱한 상태를 그린 것인데, 모델의 발, 무릎, 얼굴 등 몸가짐이 어쩐지 딱딱하게 꾸민 것 같으나, 정면에서 비친 광(光)이 허수아비 같은 그림자를 낳고, 버려진 상징적인 술병과 어울리지도 않는 복장과 모자, 그리고 술잔 등이 대도시의 퇴폐를 은유적으로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정신적인 황폐를 화제(畵題)로 구한 것은 '惡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와의 교분으로 미루어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추측이 강하다.         기타 演奏者   마네의 28세 때의 작품, 다음해 살롱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는데 교과서식 전통 도식에서 벗어난 혁신적인 명암 처리, 신선한 색조의 대비로 창출시킨 살아 있는 듯한 화면 구성 등 그의 재능과 예술적 특질이 잘 나타나 있는 문제작이다. 대담한 필촉과 사실주의적인 색채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이 등신대의 인물상에서 기타 반주에 맞춘 흥겨운 가락이 흘러나오는 듯하며, 밝은 빛과 어두운 배면과 오른쪽의 붉은 병과는 서로 대비되면서 이곳이 무대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인물의 배치, 묘법 등에서 스페인 취미가 엿보이나, 생기 있고 발랄한 모티브의 포착, 강렬하면서도 평면적인 마티에르에 이미 마네의 독자성이 형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특질은 3년 후의 , 등으로 발전하게 된다.         롤라 드 발렌스   '스페인 발레'에 등장한 몰라라는 발레리나를 그린 것인데 우측(右側)으로 무대와 객석이 보인다. 스커트의 적(赤), 흑, 황, 녹의 대담한 채색법은 형태나 음영(陰影)과의 유기적인 연관을 제일의(第一義)로 삼았던 전통적인 채색법에의 반역으로, 당시 평론가들에 의해 '잡탕 칠'이란 혹평을 받았다. 스커트의 색깔과는 대조적으로, 롤라의 팔과 다리의 상아색(象牙色)은 배면의 불꽃 같은 색깔과 스커트의 눈부신 색깔의 영향을 받아 이 그림을 부는 위치에 따라 신비로울 정도의 미묘한 색으로 변한다. 쿠르베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사실적인 '살 붙임'도 간과할 수 없다. 보들레르는 롤라의 야성적인 표정, 대담한 채색으로 생긴 선려한 인상을 '4행시'로 써서 그의 유명한 '惡의 꽃'에 수록했다.         테이블 위의 과일   과일, 나이프, 컵 등 여러 마티에르의 상호간의 밸런스, 이런 사물들의 구성에 견고한 토대를 부여하는 테이블의 수평선과 배경의 절단 방법 등이 마네의 스승인 샤르당(Chardin)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한 샤르댕은 면밀하고 무게있는 필치로 파리 시민들의 생활상을 주로 그렸고, 그의 정물화는 '완벽'하기로 유명하다. 마네는 수많은 풍경 화와 인물을 그렸으나, 이에 비해 정물화는 극히 적은 편이다. 1846년에서 66년 사이에 그린 10여 점의 정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는 샤르댕의 를 모사한 것처럼 닮았다. 마네는 인물화에도 레몬, 컵, 포도 등을 장식물로 등장시켜 때로는 주제인 인물 이상으로 집요하게 묘사, 화면 전체를 대위법적으로 풍요하게 만드는데, 이 그림에서는 '견고한 구성'을 직감할 수 있다.         거리의 악사         기구하는 修道士   한 수도사가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기구(祈求)하고 있다. 바닥에 있는 두개골은 수도사의 경건한 얼굴표정과 대비(對比)되어 기구하는 내용이 얼마나 절박하고 처절한가를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다. 화면 전체가 암갈색(暗褐色)의 색조로 이루어져 표현주의풍(風)의 강한 감정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이 작품을 순수한 종교화(宗敎畵)로 볼 것인지는 의문이다. 마네는 평생을 통해서 몇 점밖에 안 되는 종교화를 그렸고, 또한 수작이라고 내놓을 만한 작품은 하나도 없다. 이탈리아파(派)나 네덜란드파의 선인(先人)들의 작품을 모사한 습작조차 별로 없는데, 이 작품 역시 어떠한 동기에서 그렸는지, 또 언제 완성했는지 분명치 않다. 여러 장르의 그림을 그린 마네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1867년의 파리 만국박람회   건물, 인물, 거리, 동물 등의 고유색(固有色)이 한낮의 햇볕을 받아 검푸르게 변한색채의 매치(match)를 취급하여 색채 상호간의 탄력성 있는 관계를 회화적 차원에서 소화시킨 작품이다. 그림 오른쪽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소년은 에서 언급된 아들 레옹 코에라이고, 높이 떠 있는 기구는 사진작가 나다르가 타고 파리 상공을 공중 촬영한 기구인데, 파리 만국 박람회를 구경하는 여유 있는 시민들의 동세(動勢)와 아름다운 풍광을 그린, 이른바 '현실적인 일상성'이란 마네의 묘화 태도(描畵態度)를 잘 나타낸 작품이다. 나폴레옹 3세가 1867년에 마련한 만국 박람회를 능가한 대(大)박람회를 대작으로 그린 마네의 시대 감각을 이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다.         鬪牛   1865년 의 악평에 번민한 나머지, 스페인으로 피신(?)한 마네는 마드리드에서 벨라스케즈와 고야의 그림에 감명을 받고, 투우(鬪牛)에도 열중했다. 파리로 돌아온 마네는 스페인의 추억들을 캔버스에 옮겼는데 이 그림도 그때의 것이다. 경쾌하고 거친 필촉 등 즉흥적인 묘사로 보이나, 드높은 하늘, 햇빛을 듬뿍 받은 밝은 대지, 소의 검은 고체(固?), 붉은 피를 흘리고 쓰러진 말이 적절히 대비되고, 또한 투우사의 화려한 복장과 새빨간 물레타와 긴 칼 등이 푸른 하늘색과 해조(諧調)를 이루어 투우장의 속성인 잔혹성(殘酷性)과 시원한 맛을 직감할 수 있게 한다. 마네는 당시의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이 라는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표현한 듯하다.         테오도르 뒤러의 초상   마네의 전생애를 통한 친구이며 유언 작성자인 테오도르 뒤러의 초상이다. 뒤러가 인상주의 그림의 철저한 옹호자이며, 세계적인 미술품 수장 가라는 점을 감안, '사려 깊은 지성', '상류 사회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전 화면을 짙은 회색으로 처리하고 손의 위치로 동세(動勢)를 표현했다. 이 작품도 에밀 졸라의 경우처럼 우정어린 정성이 포인트이다. 1865년 8월, 스페인 마드리의 한 호텔에서의, 마네와 뒤러의 만남에는 재미있는 삽화도 전해지고 있다. 마네가 정성을 들여 이 그림을 끝내자 뒤러가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그림의 내용보다 이름을 보고 모으는 경향이 있으니 당신 사인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마네는 분명하게 서명했다. 요즘 우리 나라의 비슷한 풍조는 백 년 전의 파리에서 따온 것일까?         자카리 아스트륙의 초상   화면 우측은 정면에서 본 초상화이고, 화면 좌측은 거울에 비친 실내(室內)이다. 벨라스케즈의 대표작 에서처럼, 마네도 이따금 거울의 효과를 그의 그림에 원용(援用)했는데, 화가들이 전통적인 대상을 그릴 때 거울을 이용한 점은 공통적인 특색으로 지적되고 있다. 초상화 부분을 검정색으로, 거울에 비친 실내를 올리브색으로 메운 것은 이 두 색을 대비시켜 주제 인물(主題人物)의 내면적인 성격과 지성적인 분위기를 표출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문제작 에서처럼, 베네치아파(派) 회화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티지아노의 작품 와 이 그림을 비교해 보면 퍽 재미있을 것이다. 마네의 성실한 지지자였고 비평가, 조각가, 작곡가, 시인인 아스트륙을 정성들여 그렸는데, 아스트륙 부처의 마음에 들지 않아 오랫동안 마네의 아틀리에에서 묵었던 작품이다.           인사하는 투우사     1865년 스페인을 여행했던 마네는 귀국 후 수 점의 '투우' 시리즈를 발표했다. 과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인물이 '배경이 없는 공간에 홀로 서 있는 구성이다. 마네는 투우사의 모험적인 성격보다도, 화려한 의상 등 엑조틱(exotic)한 요소에 이끌려 이 시리즈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을 친구인 테오도르 뒤러에게 1천2백 프랑에 팔았는데, 30년 후인 1894년의 경매에서 뒤랑 뤼엘 화랑이 10배 인 1만5백 프랑에 낙찰시켰다. 모자를 벗어 들고 열광하는 관중에게 인사하는 투우사의 영웅적인 표정, 이 표정을 살아있는 눈망울과 균형 잡힌 몸매, 화려한 의상이 돋보이게 강조해주고 있다. 이 작품의 제작 연도에 대해 이설이 있었으나, 1866년에 그린 대작임이 확인되었다.         피리 부는 소년   손과 발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을 표출시킨, 마네의 재주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대표작의 하나, 검정, 빨강등 몇 개 안되는 색면이 각기 다른 음을 내는 듯한, 이른바 음악적 효과를 겨냥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배면처리도 원근법이나 수평 감각을 배제, 종이를 바른 듯 '없어진 배경'인 이러한 단순함이 오히려 실재감을 강조한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대상을 이와 같은 '공기로 감싸는' 수법은 그가 1865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 벨라스케즈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는 사실이 마네의 편지에서 밝혀졌다. 이 1866년 살롱에서 거부되자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자청해서 변호에 나섰다. 모델은 마네와 보들레르의 친구 근위대 사령관이 데려온 근위군의 소년병.         에밀 졸라의 초상   36세가 된 마네가 28세의 에밀 졸라를 그린 초상화인데, 당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되어 고민하는 마네를 백방으로 옹호해 준 졸라에의 보은과 우정의 표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지적인 정열과 불퇴전의 의지이며, 이러한 졸라의 인상 속에 고마움과 사심 없는 우정, 즉 정성을 쏟은 점이 이 초상화의 포인트다. 졸라가 여덟 번이나 와서 포즈를 취한 곳은 마네의 아틀리에인데 도, 서재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고, 벽에는 그의 작품 의 사진과 벨라스 케즈의 모사도(模寫宜), 일본의 우끼요 에(浮世畵)가 걸려 있어, 마네의 취미를 엿볼 수 있다. 책 읽는 자세를 실물 크기로, 상의(上衣)를 검정 단색으로 처리, 인품을 강조했는데 살롱에서도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발코니   발코니의 네 남녀, 이들이 왜 이곳에 모였는지? 네 사람의 시선이 각각 다른 방향을 보고, 표정도 다르며, 대화조차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구도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이 한 작품이라고 생각한 그림이다. 이 작품을 1869년의 살롱에 출품했는데 시에스노는 '일반인들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백, 청, 흑의 색조가 아름답고, 특히 청색의 난간이 툭 튀어나와 발코니임을 입증시켰다. 마네는 불로뉴에 체제중 발코니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이 장면의 역광 효과(逆光效 果)에 흥미를 느껴 모티브로 택했는데, 모델은 머리에 꽃 장식을 꽂고 녹색 양산을 든 여인이 마네의 부인이고, 그 옆이 부인의 음악 친구이며, 남자는 카페 게르보아의 친구 화가인 기르메, 어둠 속에 있는 소년은 아들로 전해진 레옹 코에라이다.         아틀리에에서의 식사   좋아하는 모티브를 자유롭게 그려 넣은 마네의 고심작이다. 그림의 왼쪽 테이블 위에 있는 투구, 장검, 검은 고양이, 그리고 그 뒤의 화분, 마네 부인이 들고 있는 물병과 식탁 위의 여러 가지 메뉴가 인물 못지 않게 흥미를 끈다. 마네는 검은 고양이를 그리기 위해 16번이나 습작을 그렸을 정도이다. 노랑, 검정, 하얀 색과 엷은 푸르름이 놀랄 정도로 훌륭한 하모니를 이루고, 부드러운 음영(陰影)이 화면 전체를 뒤덮어 아틀리에의 격조를 높이는 한편, 방안 공기를 아늑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친밀감이 감돌도록 표출시켰다. 마네는 1868년 여름 불로뉴에서의 스케치를 토대로 파리에서 이 그림을 완성시켰는데, 전면의 소년은 그의 아들로 전해지는 레옹 코에라, 그 뒤가 부인, 식탁에 앉은 사람은 친구인 오귀스트 르스랭이다       에바 곤잘레스의 초상   모델 에바는 파리 명문의 딸이다. 이 여인은 나중에 유명한 판화가 게라르와 결혼, 규수 화가로 활약한다. 당시 프랑스 문예가 협회 회장이었던 소설가 엠마뮤엘 곤잘레스의 딸인 에바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1869년 2월부터 마네의 아틀리에의 내제자 (內弟子)로 들어간다. 이 그림은 에바가 '40회 이상 포즈를 취했다.'고 불평한 난 산 중의 난산 작품인데, 은백색의 복장, 백장미, 깨끗한 살결, 그림 속의 하얀 꽃 등 백색에 의한 바리에이션이 아름다우며, 이러한 백색의 반복을 검은머리, 검은 눈동자, 검은 띠 등으로 조여 매 화면을 짜임새 있게 조화시켰다. 1869년 3월에 시작하여 다음해 살롱 마감일인 3월 12일에야 완성시킨 이 작품은 살롱에서 악의에 찬 혹평을 받았으며, 이후 에바에게 기증되었다.         독서   마네 부인이 그의 아파트에서, 책을 읽어 주는 아들의 목소리에 만족해하고 있는 행복한 정경이다. 살갗이 비치는 하얀 옷, 커튼, 의자의 커버 등 백색을 주조로 한 그림으로 화면 전체에 전개되는 백색의 다양한 반영(反映)이 잔잔한 물결처럼 화사하고 음악적이다. 마네는 이 여인과 10년 이상 동거 생활을 하면서 부모와 친구들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극비에 붙였고, 부친이 사망한 3년 후에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그림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들 레옹 코에라는 마네가 죽은 후에도 표면적으로는 동생으로 행세, 진짜 마네의 아들인지, 부인의 동생인지, 또 딴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의부 자식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마네는 1858년에서 80년까지 이 부인을 여러 번 그렸는데,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다.         불로뉴 숲의 競馬   마네는 1872년 여름 네덜란드의 처가를 방문하고 파리로 돌아와, 스포츠맨이며 수집가인 발레의 주문으로 이 그림을 그려, 당시 파격적인 3천 프랑을 받았다. 질주하는 말의 지체가 어떤 모양인가를 연구해서 그린 드가의 경마와는 달리, 마네는 이 그림에서 달리는 말의 모습을 거의 일직선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며, 또한 질주하는 적토마의 기수가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은 모습도 좀 이상스럽다는 게 평론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전경과 원경과의 색채 대비는 훌륭하며, 특히 엷은 살색으로 하늘을 처리한 점이 특이하다. 마네는 영국의 '경마 판화'를 참고로 해서 질주하는 말의 모습을 그렸고, 말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다고 실토했다 한다.         아르쟝뚜유   외광 표현(外光表現)을 시도한 작품, 1875년의 살롱에 출품했으나 세느강의 물빛이 너무 푸르고 원근법이 무시되었다는 악평을 받았다. 새로운, 밝은 회화의 창시자로 추앙받던 마네는 1874년 여름 아르쟝뚜유에 있는 모네의 작업실을 찾아 모네와 함께 옥외 제작(屋外製作)을 했는데, 이 그림은 그 때의 작품 중의 하나이다. 차분한 필촉으로 세분화된 분할(分割), 색채와 빛의 반짝임 등을 빠짐없이 포착하려고 노력 한 흔적이 보인다. 마네는 1874년 봄에 열린 제 1회 인상파전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뜻을 같이하는 화우들, 특히 모네의 열성적인 제작 태도에 이끌려 이 그림을 정성껏 그려 살롱의 심판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마네는 한 평론가가 물이 푸르게 보이는 때가 있으면 푸르게 그려도 좋다는 평을 받고 자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게임   인상파풍(風)의 필촉을 느끼게 하는 화면이지만, 색채가 프리즘 적으로 분해(分解) 되어 있지는 않다. 그림 속의 인물들도 어느 우연한 순간을 스케치한 것 같이 보이나 넓은 공간과 원근(遠近)을 고려한 의도적인 배치이며, 따라서 화면 전체가 퍽 안정감 있게 보인다. 파리에 있는 화우 스티반스의 넓은 뜰에서 크로켓 게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스티반스와 그의 모델, 마네의 옛 친구 등 우정에 넘치는 모임이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게임 장면을 포착, 하늘은 보이지 않고 파랑, 노랑, 흰색이 주조를 이루어 화면을 뒤덮고 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분실되었다가 1912년 베른의 헌 옷집에서 배우 도리 봐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마네가 그린 수많은 풍경화 중에서 이색적인 모티브이다.         세느강의 두 욕녀   이 주제는 그의 친구 르노와르에게는 흔한 것이지만 마네에게는 진귀한 것이다. 하지만 르노와르와는 달리 배경을 짙은 녹색으로 입혀 놓았기 때문에 욕녀의 크림빛 육체가 어쩐지 차가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목욕 후의 상쾌한 느낌 같은 것이 감득되는 듯도 하다. 이 그림은 욕녀들의 피부 빛깔에 무척 신경을 쓴 듯한데, 크림 계(系) 빛깔의 미묘한 전조(轉調)에 의해서 촉감성리라든가, 또는 양감(量感)이 물씬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수법은 르네상스 이래의 서양 회화의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는 3차원적인 양체(量?)나 공간의 표현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마네는 처음에는 욕녀를 그릴 때 갈색의 담채(淡彩)로 소묘적(素描的)인 표현을 즐겨 왔었다.         푸른 긴 椅子에 앉은 마네 부인   파스텔화(畵)가 지닌 표현력에 마네가 어느 정도 정통해 있었는가를 전해 주는 작품이다. 백색, 회색, 청색, 남색의 보드라운 뉘앙스와 상호간의 메아리가 무지개처럼 아름다워, 마네 부인을 선녀처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양식적(樣式的) 견지에서 1878년도에 제작했다는 주장과 마네 부인의 모자, 의상 등으로 미루어 보아 1874년 경에 그렸다는 주장이 맞서 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 아직 분명치 않다. 이 그림을 최초로 입수한 사람은 드가 인데, 드가는 1870년대 초반부터 파스텔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 물감의 효과와 매력을 여러 차례 설명, 파스텔화를 그리도록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면 하단에 보이는 'S. Manet'란 연필 사인은 마네 사망 후에 미망인이 써 넣은 것이다.         나나   파리의 상류층 사회의 퇴폐 풍조를 전하는 작품으로, 속옷바람의 육욕적인 여인이 거울 앞에 서서 루즈를 바르고 있다. 커다란 등받침, 침대로도 쓸 수 있는 긴 의자에는 야회복 차림을 한 중년 신사가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인의 생명력이 응축된 튀어나온 엉덩이와 이 엉덩이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사나이와의 대조가 해학적이다. 배면에 한국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학(鶴) 그림이 보인다. 부도덕(不道德)을 주제로 했다는 이유로 거부된 작품이다. 모델은 은퇴한 여우(女優) 앙리에트 오제르, 발랄한 젊음은 사라졌으나 당시의 세도가 오렌지 공(公)의 정부였다.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와 동명(同名)인 것으로 미루어 이 소설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만취한 여인     만취한 정신 상태를 상징한 듯 옷도 피부도 분위기도 모두 핑크색이다. 무엇 때문에, 얼마나 마셨는지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앉아 있는 폼이 허탈 상태에 가깝다. 그러나, 술꾼으로서는 나무랄 데 없는 포즈다. 오른손 등으로 턱을 괴고, 왼손가락 엔 담배를 끼웠으며 그 사이에 가득 찬 술잔이 놓여 있다. 마네는 만취한 이 여인을 처절하리만큼 외로운 상(象)으로 부각시키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나타내 보였다. 마네는 당시의 파리 시민들의 생활상을 그리기 위해 카페, 비어 홀 등에 자주 출입했고, 이 술집에서 창녀, 취녀, 취남, 무희, 악사, 여종업원을 직접 보았다. 이러한 시각 체험(體驗)은 시대 감정을 묘파한 많은 걸작들을 낳았는데, 은 그 가운데서도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카페에서   이 그림과 은 한 장의 그림으로 구상되어 제작되다가 완성 단계 때 2점의 작품으로 나뉘어 그려졌다. 같은 모티브인 마네의 초기 작품 와는 여러 가지 점에서 판이하다. 3각형의 대리석 테이블에 앉은 3명의 남녀가 각각 세 방향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데, 이들은 이 비어 홀의 흥청대는 분위기를 흥미롭게 관찰하는 표정이다. 4명의 상반신(上半身)만으로 메운 특이한 화면 구성은 사진 작품에서 원용한 구도로 보이며, 후면의 포스터와 서로 몸이 닿을 정도로 비좁은 비어 홀의 성업(盛業)이 당시 파리의 모습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묘사되어 있다. 가운데 남자는 에바 곤잘레스와 약혼한 판화 작가인 앙리 게라르.         비어 홀의 女從業員   마네는 46, 7세 때 자연주의적(自然主義 的)인 테마를 취급한 8점의 유채화와 카바레, 카페 등의 수많은 데생을 남겼다. 이 그림도 그 때의 작품인데, 당초는 와 함께 한 점의 대작으로 그리다가 완성 단계에서 2점의 작품으로 쪼갰다. 후면인 무대에는 한창 춤을 추는 무용수와 연주에 열중하고 있는 악사들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맥주를 나르는 여종업원의 시선과 술잔을 앞에 놓고 담배를 피우는 상념에 잠긴 남자의 시선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실내 조명(室內照明)을 받아 붉은 색으로 변한 얼굴들과 홀을 메운 손님들이 지껄이는 소리, 음악, 무용 등이 한데 어울려 들려오는 듯한 흥겨운 분위기와 음악적인 효과가 엿보인다. 마네와 그의 친구들도 이 술집에서 자주 만났고, 또한 화상(畵想)을 얻었다 한다.         가슴을 내놓은 블론드 아가씨   마네의 그림 가운데에서도 특히 유명한 작품의 하나로서, 그가 곧잘 쓰는 크림 빛 아닌 볼그스레한 피부의 아가씨는 한결 고혹적이다. 대담한 필촉(筆?)으로 사뭇 조형적으로 포착한 이 그림은 마치 공기와도 같이 가볍게 표상하면서도 튼튼하고 짜임새 있는 터치를 도처에 가미시키고 있다. 살결 빛깔이 두드러지게 아름다워 보이는 이 여인은 마치 진주처럼 빛나 있고, 그 광휘는 담록(淡綠)의 배경으로 말미암아 한결 더 돋보이는 것 같다. 빛 속에 녹아 내린 핑크와 백색의 육체는 귀스타브 제프 로아의 말을 빌린다면, '살아 있지만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육체의 아름다운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과 과실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다. 모델 이름은 마그리트이다.       스케이팅 링크에서   마네가 자주 다닌 스케이팅 링크에서 잡은 현대 생활의 에피소드. 꽃다발을 든 전면의 여인은 작품 의 모델 앙이에트 오제르이고, 우측(右側)의 여인은 그녀와 자매간인 빅토리느인데, 이 자매는 밤의 환락가에서 남성들의 인기를 양분했던 고급 창부(?)였다. 이 작품의 특질은, 앙리에트의 정력적이고 요염한 표정 외에 백색과 흑색의 아름다운 조화를 그녀의 옷과 모자, 안색(顔色)에서 찾아 낸 대담한 하모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반인상파적인 흑색의 매력은 그가 카페 게르보아의 젊은 화가들과 끝내 동조하지 않은 이유도 된다. 마네는 파리의 환락가를 연작으로 그렸다. 검은 복장을 기조로 한 군중의 무명성(無名性) 속에 색채와 개성을 지닌 빛나는 존재로서의 여성, 문자 그대로 대중의 '히어로'로서의 현대 여성을 그렸다는데 파리의 화가 '마네의 영광이 있다.         조지 무어의 초상   조지 무어는 시인, 극작가, 소설가, 미술 평론가이며, 술을 좋아하는 천재(?)이자 방랑자이다. 또한 랭보, 뒤랑티 등 상징파 시인들과도 가깝게 지낸 '몽마르트르의 영국인'이기도 하다. 그는 마네가 자주 다니는 카페의 단골이었으며, 마네와도 자주 어울렸다. 마네는 유채와 파스텔로 만든 무어의 초상화 2점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그 중의 하나다. 이 시기에 마네는 극히 적은 2,3점의 스케치풍의 인물화를 경쾌한 필촉으로 그렸는데 이 작품도 바로 이에 속하는 것이며, 폭음가인 무어의 취생 몽사하는 몽롱한 모습을 리얼하면서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지쳐 빠진 중로(中老)의 묵객(墨客), 깡마른 몸집, 전혀 패기라곤 찾을 곳 없는 파리의 방랑객을 연상시키는 멋진 분위기다.         보트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스타킹을 신는 여인   마네나 드가가 끝내 인상파에 동조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에 여체(女?)가 있다. 이 그림에서 보는 곡선의 아름다움과 육감적인 유방과 풍만한 육체는 한마디로 관능의 화신이다. 마네는 인간이 지닌 다양한 선(線), 그 선의 아름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화가이다. 1878년 파리는 만국 박람회로 떠들썩했고, 마네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 파티를 열었는데 이들은 자작시에 자작곡을 붙여 소리 높이 합창했다. 이 무렵 마네는 소품을 그리는 기분으로 이 그림을 제작했는데, 화면 전체가 막 피어나는 꽃처럼 청색과 자색으로 꾸며졌고, 이 감미로운 분위기 속에서 솟아오른 듯한 여체가 스커트를 걷어올린 채 스타킹의 끈을 매고 있다. 우아한 곡선, 돋보이는 유방 등이 기조색(基調色)의 보호를 받아 비속하지 않은 관능미를 표출시킨 이색적인 작품이다.         생 라자르驛   파리 시내를 철마(鐵馬)가 달리던 1830년대 말, 철도를 둘러싼 여러 정경들이 새 시대를 알리는 풍속으로, 도미에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모티브로 채택됐다. 방금 철책 너머로 연기를 남긴 채 사라진 기차를, 곱게 차려 입은 소녀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그 옆에 어머니로 보이는 책을 든 부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소녀의 목 언저리와 부인의 얼굴이 감미로운 해조를 이루고, 소녀의 흰색에 가까운 회색 옷과 부인의 검은 옷이 대조되면서 상이한 마음속의 이야기를 읽게 하고 있다. 마네는 이 회화 언어(繪畵言語)로 이별을 그린 모양이다. 구시대(舊時代)와 새 시대의 이별을- 이 작품이 라는 제목으로 1874년의 살롱에 출품되자 찬반 양론으로 갈려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배에서   와 함께 1874년에 옥외 제작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처럼 섬세한 분할, 색채와 빛의 반짝 임보다는 외기(外氣)의 감각을 색조로써 표현하려고 한 그림이다. 청, 백색을 주조로 황, 흑색에 악센트를 준 시원스러움이 툭 트인 잔잔한 수면과 해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이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재미있는 구도인데, 배의 후미(後尾)만을 남긴 대담한 절단이나, 중앙에 흰옷의 남자를 앉히고 좌우에는 저쪽을 응시하는 여인과 돛대의 한 토막만으로 균형을 잡은 것 등이 인상적이다. 단 두 사람만의 세계, 그것도 방해꾼이 없는 끝없는 바다 위에서의 만남을 통하여 마네는 헤아릴 수없는 사랑과 행복감을 회화적 차원에서 만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얀 보우를 맨 이자벨   마네는 1870년대 말에 이자벨 르모니에의 초상화를 6점 그렸는데 이 그림을 포함한 5점은 암스테르담가(街)의 아틀리에에서 제작했다. 이자벨 양은 대보석상의 딸이며, 출판업을 하는 미술품 수장가 샤르팡티에의 의매(義妹)로, 마네는 이 모델이 마음에 들었던지 1점의 좌상을 뺀 5점의 초상화는 모두 무릎 근처까지 그린 4분의 3입상이다. 이 작품은 그 가운데 로 젊은 아가씨의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을 쫓은 듯한 얼굴의 표현에 주의력을 집중시켰으며, 의복과 손등은 경쾌하고 빠른 필촉으로 단숨에 그려 치운 흔적이 보인다. 동양적인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자벨의 얼굴 윤곽과 눈, 코, 입은 물론 안면(顔面)의 처리에 세심한 신경을 쓴 수작으로 알려졌다.        
1    "백성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 리유가 없다"... 댓글:  조회:3061  추천:0  2017-10-25
[경향신문] ㆍ부탄, 행복에 특별한 비밀은 없다 부탄의 관문 도시인 파로 교외 밭에서 지난 15일 농부들이 갓 수확한 가지와 고추 등 유기농 농산물을 들어 보이고 있다. 부탄 정부는 2015년 GNH(국민총행복)지수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은 직군인 농민들을 위해 보조금 지급, 농산물 판로 확대 등을 추진하고 있다. 파로(부탄) | 정지윤 기자 그들에겐 지겨울 법한 질문을 조심스레 던졌다. “부탄은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인가요?” 부탄이 2010년 영국 신경제재단(NEF) 행복도 조사에서 1위에 오른 사실은 늘 회자된다. 부탄 패키지여행 상품은 ‘행복의 아이콘 부탄 여행’ ‘지상 최후의 샹그릴라로 떠나자’ ‘행복지수 1위 부탄으로!’라며 환상을 부추긴다. 정작 행복정책을 관장하는 부탄 관료들은 ‘부탄 유토피아설’을 부인했다. 지난 12일 수도 팀푸에서 만난 부탄 경제부의 경제정책 담당 관료인 소남 도르지는 “지구상에 유토피아는 없다. 부탄도 다 똑같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라고 했다. 부탄이 ‘행복한 나라’가 된 과정을 보면 사실과 허구, 오해가 뒤섞여 있다. 부탄이 전부터 ‘행복’에 유독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1729년 만든 옛 부탄 왕국 법전에는 “백성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 이유가 없다”고 쓰여 있다. 1972년에는 부탄의 4대 국왕이 현재 부탄 정책에 반영되는 ‘GNH(Gross National Happiness·국민총행복)’ 개념을 처음 만들었다. 유엔이나 유럽, 영미권에서도 행복지수를 만들려는 시도가 없던 시절이었다. 최근 부탄은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15년 세계보건기구(WHO) 자살률 통계를 보면 부탄은 인구 10만명당 13.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률이 세계 20위권이다. 약물중독 문제도 불거져 팀푸 시내 곳곳에는 약물중독 방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청년들의 이농현상도 가속화하고 있다. 부탄은 2010년 1위였던 신경제재단 행복도 조사에서 지난해 56위로 떨어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푼초 왕겔 GNH위원회 평가조사팀장은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지구상 어디에 유토피아가 있겠는가”라며 “부탄 정부는 시민 개개인 행복의 총합을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했다. 부탄이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아닐지라도 시민 행복을 위해 적극 노력하는 나라라는 솔직한 말이다. ■ 가장 불행한 사람에게 정책 초점 부탄 정부의 ‘행복한 나라’를 향한 노력은 4대 국왕이 창안한 GNH를 기반으로 한다. 부탄이 활용하는 GNH는 다른 국가나 기관에서 만든 행복지수와 달리 모든 정책에 실질적으로 반영하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GNH가 국가 정책에 적용될 때 출발점은 GNH 설문조사다. 부탄연구원(CBS)은 시민들의 행복도를 측정하기 위해 2008년, 2010년과 2015년 세 차례 표본을 뽑아 GNH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전체 인구 79만명의 약 10%인 7153명을 최대 2시간씩 심층 인터뷰했다. 2015년 GNH 설문조사 항목은 크게 4개 축과 9개 하위 지표로 나뉜다. 지속 가능하고 공평한 사회 경제 발전, 문화 보전과 증진, 생태계 보전, 투명하고 참여도 높은 의사결정과정(굿 거버넌스)이 4개 축이다. 9개 지표는 생활수준, 교육, 건강, 문화적 다양성과 복원력, 공동체 활력, 심리적 웰빙, 시간 사용, 생태적 다양성과 복원력, 굿 거버넌스다. 9개 지표는 다시 33개 세부 지표와 148개 질문으로 나뉜다. 33개 세부 지표는 가중치가 서로 다르다. 노동시간과 수면시간(50%), 도시문제·정치참여(40%) 등의 가중치가 높다. 1인당 소득·자산·주택(33%)의 가중치도 높은 편이다. 흔히 부탄은 ‘가난해도 행복한 나라’쯤으로 여길 수 있지만, GNH는 경제적 요소도 간과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2015년 GNH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소득이 낮은 농촌 지역이 상대적으로 행복하지 않은 경향이 뚜렷이 나타났다. 단적인 예로 지난해 부탄에서는 9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이 중 35.4%(34명)가 농촌 거주자였다. 이 같은 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정부 정책은 고부가가치 작물 재배 장려, 보조금 지급, 농산물 판로 확대를 위한 도로 건설 추진 등을 전보다 강화하기 시작했다. 올해 2월 을 출간한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은 “GNH는 아직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며 “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GNH의 기본적인 목적”이라고 말했다. ■ 정부 정책 ‘스크리닝’도 하는 GNH 님 도르지 부탄 재무부 차관은 인터뷰에서 “GNH로 정책 방향만 잡는 것이 아니다”라며 “모든 정책은 GNH를 통해 다시 한번 스크리닝된다”고 말했다. 정부가 GNH 설문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해 내놓는 정책은 GNH위원회 심사를 받는다. 위원회는 설문조사에 사용한 9개 지표에서 형평성, 경제적 안전, 반부패, 성평등, 공공 건강, 토양 파괴, 문화, 스트레스 등 22개 하위 지표를 추출해 각 지표별로 1~4점을 매긴다. 위원회는 총 점수가 66점(평균 3점)을 넘지 못하면 ‘불완전한 정책’으로 간주한다. 총리와 10개 부처 장관은 위원회가 매긴 점수를 받아본 뒤 평균 점수가 66점 아래라면 대개 낮은 점수를 받은 지표를 보완토록 권고한다. 위원회 권고에 따라 관계 부처는 해당 정책의 약점을 보완해 다시 위원회에 제출하는 과정을 거친다. 부탄 경제부의 경제정책팀 당국자 소남 도르지는 “가장 최근에는 광산 개발정책이 GNH를 통과하기까지 1년 가까이 걸렸다”며 “광산 개발이 환경오염을 불러오고 노동자보다는 개발자들의 이익에 기울어져 있다는 GNH위원회의 지적에 수차례 정책 수정을 거쳤다”고 밝혔다. 다만 위원회의 권고에는 구속력이 없다. 국무총리는 10개 부처 장관들과 협의해 66점에 미달한 정책을 그냥 추진해도 무방하다. 왕겔 GNH 평가조사팀장은 “권고를 무시한 정책 추진에 따른 정치적 책임은 총리와 집권 여당이 감수해야 한다”며 “이에 총리와 장관들이 위원회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 행복을 위한 지난한 여정 부탄이 GNH 설문조사를 하며 본격적인 행복실험에 나선 지 이제 막 10년이 지났다. 10년 사이 부탄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왕이 통치에서 손을 뗀 뒤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고, 국내총생산(GDP)은 지난 10년간 연평균 8.64% 성장했다. 부탄의 지난해 1인당 GDP는 2804달러다. 다만 다른 경제지표가 보여준 결과는 밝지만은 아니다. 눈높이가 높아진 청년들이 만족할 수 있는 일자리가 부족해 지난 10년 동안 실업률은 3% 내외였지만 청년실업률은 10% 안팎을 유지했다. 수치가 높을수록 소득분배가 불평등함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도 2003년 46.78에서 2007년 38.09로 크게 감소했다가 2012년 다시 38.81(세계 72위)로 소폭 증가했다. 공교육 무상교육이 기본 방침인 부탄 사회에서 10세 미만 어린 자녀들을 사립학교에 보내려는 학부모도 늘고 있다. 국공립학교는 학비가 무료지만 사립학교는 매달 20달러(약 2만2500원)씩 내야 한다. 사립학교는 한 반이 20명 정도로 국공립학교보다 10~15명가량 적다. 이로 인해 점차 교육격차가 커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모두 내년 국회의원 선거로 들어설 차기 부탄 정부가 행복정책을 통해 해결해야 할 과제다. 지난 10년이 GNH를 통한 행복정책의 과도기였다면 부탄의 행복실험은 이제 막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왕겔 팀장은 “정책을 통한 시민의 행복 달성은 행복에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는 “행복정책은 이해 관계자가 많은 현대사회에서 길고 긴 여정이 될 수밖에 없다”며 “부탄이 북유럽 국가처럼 행복정책을 펼 수는 없지만, 제한적 조건하에서 정부는 시민들의 행복을 위한 지난한 여정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팀푸(부탄) | 김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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