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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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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한 나라의 정신은 말과 글에 있다"... 댓글:  조회:2961  추천:0  2017-10-24
휘청거리는 우리 말 우리 글 / 리명수 2017년 10월 23일  작성자: netizin-1        휘청거리는 우리 말 우리 글,                       한글날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자          (흑룡강신문=하얼빈) 추석 연휴를 앞두고 퇴근하면서 한 직원이 "즐거운 연휴 되세요"라고 말했다. 어법에 맞지 않은 말이지만 흔히 들어서 그런지 그 말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즐거운 연휴를 지내라는 뜻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좋은 하루 되세요.",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행복한 명절 되세요."   귀에 익은 말이지만 비문(非文)이다. 이 말을 단순히 풀이하면 화자가 청자에게 '하루', '한가위', '명절'이 되라는 뜻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루가 되고 명절이 될 수 있겠는가? '어쨌든 뜻만 통하면 되지 뭘 그런 것을 따져?'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의미가 통한다는 이유로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의 말글살이가 한없이 어지럽혀지고 망가질 것이다.   어법도 법이고 문법도 법이다. 법은 공동체가 지키자고 정해진 것이다. 어법상, 문법상 맞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쓰는 것은 위법인지 뻔히 알면서도 교통법규를 어기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교통질서가 어지러워져서 사고를 유발한다. 어법 역시 문란해지면 이런저런 사고를 부를 수 있다. 거친 말과 무신경한 말이 씨가 되어 일어난 사고가 그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잘못 쓰고 있는 우리말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다. 습관적으로 굳어져 버린 잘못된 표현들도 있고, 혹은 많은 사람이 그렇게 쓰고 있으므로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는 표현들도 있다. 맞춤법, 어휘, 발음, 높임법, 외래어 표기 등에서 잘못 쓰이고 있는 표현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0년 동안 글쟁이 겸 편집쟁이로 살아온 나도 모르는 것 투성이고, 헷갈리는 문법이 적지 않다. 저명한 국어학자라 할지라도 국어사전을 꿰듯이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수고하세요" 생각해보면 이상한 인사말   "수고하세요"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고 자주 듣는 말이다. 특히 헤어질 때 인사말로 많이 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남발해서는 결례가 되는 말이다. '수고하다'는 '일을 하느라 힘을 들이고 애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어렵고 고된 일, 즉 고생을 상대방에게 하라고 권할 수 없는 말이다. 사전적 의미와 실생활에서 쓰는 것이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단어를 많은 사람이 관용적으로 많이 써서 사전적 의미와 다르게 쓰일 수 있지만, 잘못된 표현을 사람들이 많이 쓴다고 해서 그것이 올바른 표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좋고 친근한 인사말도 많은데 하필이면 '고생'하라는 악담을 한단 말인가.   직장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에게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 열심히 하라고 독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권장할 인사말은 아니다. 그 상황에 맞는 느낌이 좋고 어감도 좋은 작별인사 말을 생각하여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최악의 용법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수고하세요" 하는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직급도 낮은 사람이 윗사람에게 '일 열심히 하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상당히 예의에 어긋나는 말이다. 하지만 과거형인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괜찮다. '고생 많으셨지요?'라는 위로의 뜻으로 해석된다. 일을 하고 들어오실 때 쓰면 적절하다.   "행복하세요", "건강하세요"도 어법에 맞지 않은 대표적인 표현이다. '건강하다, 행복하다'는 형용사이다. 형용사는 청유형이나 명령형으로 활용할 수 없다. 명령형으로 쓸 수 있는 말은 '가다, 먹다, 일어나다' 따위의 동사이거나, '공부, 일, 운동' 따위처럼 '-하다'가 붙어서 동사형으로 쓰이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행복하게 지내세요" 하든지, "건강하게 계십시오"처럼 말해야 한다. 다만, "행복하세요?" 또는 "건강하십니까?"라고 물어보는 말, 곧 의문형으로 쓰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다.   또한, "행복하소서!"는 어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소서'는 간절한 기원을 나타내는 어말어미이다. '-하시기를(-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의 종결어미가 '-소서'이다. '-소서'는 명령형 어미가 아니므로 형용사에도 붙을 수 있다.   남편을 '오빠' 또는 '아빠'라고 부른다   남편을 '오빠' 또는 '아빠'라고 부르는 여자를 가끔 본다. 대단히 잘못된 호칭이다. 남편에 대한 호칭어, 지칭어에 어려움을 느끼는 아내들이 많은 것 같다. 결혼 전의 호칭을 결혼 후에도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는데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듣기에도 거북스럽고, '윤리 도덕을 모르는 사람' 또는 '무식한 사람'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도 있다.   '아빠'는 유아어이고,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를 직접 부르거나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아버님'은 남의 아버지를 직접 부르거나 지칭할 때,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부르거나 가리킬 때,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호칭, 지칭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다.   성인이 되어 시집가고 장가간 사람도 '아빠'라는 유아어를 서슴없이 쓴다. 심지어는 며느리가 깍듯이 모셔야 할 시아버지를 '(시)아빠'라고 부르기도 한다. 철들 나이가 되면 자기 아버지는 '아빠'도 '아버님'도 아닌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 이런 구별도 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철부지다. 성인이 되면 의젓하게 어른 말을 써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유아어를 쓰면 생각이나 행동에서 어린이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제대로 된 호칭은 예절의 기본 요소이다. 자신과 상대편의 나이, 위상, 대화 상황에 걸맞은 호칭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손윗사람에게 반말투로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버릇없고 예절을 모르는 것은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다. 모든 교육의 시작은 가정에서부터 비롯된다. 문제가 있는 아이 뒤에는 문제를 가진 부모가 있다.   요즘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경어법의 관습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상도 심각하지만, 그나마 사용하고 있는 존댓말도 그 원칙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존대를 하지 않아도 될 경우에 높임말을 쓰고, 높임말을 안 써야 할 대목에서 필요 이상의 존댓말을 쓰는 경우가 자주 눈에 띈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뜨거우시니 조심하십시오." 커피숍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극존칭 어법이다. 듣기에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어서 더 문제다. '커피'가 주어인 문장에 '나오시다'나 '뜨거우시다'라는 극존칭을 쓰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말끝에 무조건 '-세요'나 '-시'를 붙이면 다 존칭이 되는 줄 아는 사람이 뜻밖에 많지만, 상품을 높이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자고로 과공은 비례라 했다. 지나친 높임말 사용은 오히려 역효과를 줄 때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일본어 번역투와 영어 직역투 문장 수두룩   우리 사회에서는 일본식 용어나 구문, 일본식 조어,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직역해 놓은 듯한 일어 번역투와 영어 직역투 문장이 수두룩하다. 번역문의 영향은 우리 사회 지식인들이 쓰는 말과 글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 사례는 워낙 많으므로 일일이 바로잡을 수도 없는 지경이다.   없어도 그만인 일본식 조어 '-적(的)', 일본어 주격조사 'の'의 남용 등은 심각한 수준이다. 하지만 조사 '-의'를 쓰면 문장이 짧아지고 간결해지는 효과가 있다. 이미 '-의'를 널리 쓰고 있으므로 남발하지 말고 꼭 쓸 곳에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포용할 것은 포용하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는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을 영어 직역투로 쓰는 대표적인 기형 서술어가 '-을 갖는다'는 표현이다. 우리말에서 잘 어울리는 서술어가 있음에도 '가지다', '갖다'를 남용하는 것은 영어의 'have+명사'를 '가지다' 또는 준말인 '갖다'로 단순 번역하는 데 익숙한 탓이다. 가지다는 소유의 개념 외에도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어 두루 쓸 수 있는 단어이긴 하지만, 잘 분별해서 써야 한다. 전시회나 전람회, 박람회, 품평회, 공청회 등은 '한다', '연다', '개회한다'고 하는 것이 옳다. 워낙 난무하는 영어 번역체에 익숙하다 보니 오히려 우리말이 어색해졌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보며 전부라고 판단하는 오류도 적지 않다. 이 글에서도 몇 번 사용한 '경어(敬語)'라는 단어도 일본어에서 온 말이니 '높임말' 또는 '존댓말'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보았다. 너무 지나친 감도 있지만 우리말을 찾고 지키려는 그런 노력은 평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의도에서 국어사전이나 간행물의 잘못된 부분을 자주 지적하는 그런 분들 덕분에 바로잡힌 부분이 적지 않다. '벤토'가 '도시락'으로, '와루바시'가 '나무젓가락'으로 바뀌었듯이 우리가 쓰고 있는 일본말을 제대로 알려주기만 해도 한글 순화에 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신문과 방송이 퍼뜨린 잘못된 말   현대는 세계화 시대이다. 도도한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지구촌 모든 나라가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세계를 무대로 하는 현실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영어 등의 외국어 교육의 필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학업이나 일에 필요하다면 영어, 중국어, 일어 등을 배워야 경쟁력이 있다. 하지만 근본은 우리말이다. 근본인 한국어를 정확하게 말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외국어도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다. 그런데 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에게 조기 외국어부터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싼 돈 들여 얼치기를 만드는 교육이다.   그래서인지 날이 갈수록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얼치기 인간들이 넘쳐난다. 요즘 잘못 쓰는 높임말부터 정체불명의 외계어까지 일상에서 우리말을 잘못 쓰는 경우가 셀 수 없이 많다. 엉터리로 표기된 낱말이 너무 많다. 일상에서 외국어를 생각 없이 쓴다. 노래 가사는 태반이 영어투성이다. 그것도 우스꽝스러운 K팝 콩글리시 가사라서 국제사회에서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영어 발음과 철자를 틀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 여기면서 우리말을 잘못 쓰는 것에 창피한 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SNS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심각성이 더하다. 비속어와 은어가 난무하다. 절친, 즐감, 열공, 훈남, 완소, 솔까말 등의 줄임말 표현은 빠르게 전달할 필요성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또래끼리 어울리면서 쓰는 그들만의 은어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그것도 한때이고 지나고 보면 추억으로 남는다. 성장기 때 사용하는 은어는 어느 시대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심한 비속어도 많은 듯하다. 존나, 똘추, 열폭, 담탱이, 개, 처, 레알, 찐찌버거 등 알아듣기 어려운 은어와 욕설이 뒤섞여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외계어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비속어를 습관적으로 쓰면 상스럽고 천박한 사람이 된다.   우리네 말글살이가 날로 거칠어지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교육과 방송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영어 지상주의 교육에 국어가 너무 홀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영어 철자법에는 자신이 있는데 한글 맞춤법은 어렵다고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 듯이 이야기하는 지식인을 본 적도 있다. 그것을 결국 우리말을 소홀하게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영어 공부하는데 썼던 노력과 정성을 10분의 1만 썼어도 그런 말이 나올까?   세계 공용어로 간주하는 영어 교육의 중요성은 공감하지만, 모국어보다 우선시되는 영어 교육은 주객이 전도된 현상이다. 아무리 세계화가 시대적 요청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생활 기반과 터전의 언어 체계는 한국어이다.   인터넷과 방송이 언어 파괴의 주범이라는 말도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주요 언론이 앞장서서 우리말을 파괴하고 있다. 방송 프로 제목과 신문 제목부터 영어투성이고, 그 내용 속에는 온갖 것들이 잡탕이 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서 언론, 특히 방송이 갖는 영향력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정확한 표준어가 사용되는 뉴스 프로그램에서 외래어, 외국어가 불필요하게 많이 사용되는가 하면 어법이 틀린 말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오용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말과 글의 전문가 집단에 있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언어 질서를 파괴해 버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독자와 시청자에게 돌아간다. 방송에서 잘못된 우리말을 지적하지 않고 사용하다 보니 분별없는 국민이나 학생들은 잘못된 말인 줄 모르고 공공연히 사용하는 것이다. 방송 말은 당연히 표준어를 구사하고 한글 맞춤법에 맞아야 한다.   틀린 말도 귀에 익으면 자연스럽게 들린다   어법에 틀린 말도 자주 들으면 자연스럽게 들린다.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들린다고 해서 바른말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연스러운지 아닌지'가 아니라, 그 표현이 우리말 어법에 맞느냐 아니냐 하는 점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쓰더라도 틀린 것을 바로잡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언어 사용자들이 공감하고 자주 쓰면 표준어나 관용구로 자리 잡을 날이 올 것이다.   예컨대 '자장면'이 표준어임에도 한국어 사용자가 주로 '짜장면'으로 쓰기 때문에 언중의 입말을 존중하여 복수 표준어로 인정되었다. 어법이 언어 대중보다 우선하지는 않는다. 표준어는 중요하지만 생활 속에서 쓰는 말도 중요하다. 표준어에 지나치게 매달려서 표준어와 다르다는 이유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도 좋은 자세는 아니다. 이것은 내가 글을 쓰거나 교정을 볼 때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한 나라의 정신은 말과 글에 있다"라고 했다. 문화의 으뜸이 말과 글이다.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멜 선생님이 우리에게 프랑스어에 대해서 차례차례로 말씀해 주셨다. 프랑스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분명하고, 가장 완벽한 언어라고. 이를테면 어떤 백성들이 노예의 신분이 되더라도 자기 나라의 국어를 견실하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자기가 갇힌 감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프랑스어를 우리들은 소중하게 지키고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1870년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프랑스가 패하게 되는 바람에 소설 속 주인공이 살던 알자스 로렌 지역에서 프랑스어 사용이 금지되는데, 그 금지되는 프랑스어로 하는 마지막 수업을 어린 학생의 눈으로 바라본 소설이다. 아멜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을 마치며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고 적어 놓는다. 이 결말 부분에서 가슴이 찡해 오는 비장한 감동을 받는다.   문화 선진국 프랑스는 '국어 보호법'을 제정하여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국어를 보호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거실에 사전을 두고 들춰본다고 한다. 주체성이 있는 민족은 자기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잘 지킨다. 일찍이 주시경 선생은, 말과 글을 정리하는 일은 집 안을 청소하는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집 안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정신마저 혼몽해지는 일이 있듯이, 우리말을 갈고 닦지 않으면 국민정신이 해이해지고 나라의 힘이 약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강점기 때 조선어학회 사건과 같은 한글 탄압 정책에도 꿋꿋하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켜 온 것이다.   자연 생태계가 외래종에 의해 무너지듯이 문화 생태계는 무분별하게 쓰는 말과 글로 말미암아 무너지게 된다. 조야한 언어의 남용은 우리의 정서를 거칠게 하고 사회적 혼돈을 부추긴다. 신문 방송뿐만 아니라 거리의 간판과 상품 이름, 인터넷 포털 사이트도 외국어와 외래어가 넘쳐난다. 교육과 언론이 앞장서서 말글을 오염시키고 있는 관계로 출판도 시나브로 오염되었다. 하물며 자기 이름으로 책을 펴내겠다는 저자들조차 외국어와 외래어를 마구 쓰고 문법이 무시된 글을 쓰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네 말글살이에 종사하는 사람들, 즉 작가와 언론 방송인들은 우리말을 쉽고, 편하고, 아름답고, 세련되게 다듬어야 한다. 그것은 글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책무다. 정지용, 백석 등의 시가 우수한 것은 시 속에서 우리말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말은 그 사람 영혼의 표출이다. 품격 있는 사람은 말도 품격 있게 한다. 하나씩 맞는 표현을 익히고 생활에서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노력할 필요는 있다.       전체 [ 1 ] 1   작성자 : 鄭仁甲 날자:2017-10-24 02:26:24 본 문장에는 동의되지 않는 데가 있다. 1.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는 데는 어폐가 없다. '우리 애기의 아빠'의 준말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이 많은 노인이 식당 종업원의 젊은 아가씨를 '딸아!'라고 호칭하거나,연하이며 나이가 지긋한 아줌마를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틀린 말이 아니다. '누군가의 딸', '아가씨들의 누나'라는 말의 준말이기 때문이다. '좋은 하루 되세요'는 '오늘이 당신에게 좋은 하루 되세요'로 보아야 한다. 즉 듣는 사람은 주어가 아니라 보어이다. 2. 언어는 '约定俗成'이다. 즉 많은 사람이 써서 상당한 시간이 흐르면 그를 표준어로 인정하기 마련이다. 한어에서 '您好'란 말은 '당신은 좋다'라는 뜻이지만 '안녕하세요'라는 뜻으로 쓰기 때문에 역시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투어(套语)라 하며 한어나 조선어에 많고도 많다. 또 지금 한국에서 민중이 '너무'를 '매우', '아주'라는 뜻으로 쓰며 시간이 꾀나 흘렀기 때문에 얼마 전 국어연구원에서 표준으로 한다는 결졍을 내렸으며 TV에서 이 결정을 방송가지 하였다. 그외 '틀리다('맞지 않다'의 뜻으로부터 '같지 않다'의 뜻으로 와전돼 씀)'도 조만간에 표준어로 결정할 것이라고 본다.    
9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긴가민가"... 댓글:  조회:3534  추천:0  2017-10-24
"긴가민가"ㅡ 우리말 어원 작성자: 정음문화칼럼 ///인민넷
8    [쉼터] - 똘똘 뭉쳐야 산다... 댓글:  조회:2937  추천:0  2017-10-24
조선족은 어떻게 "힘"을 합쳐야 할가? / 박광성 2017년 10월 17일  작성자: 정음문화칼럼               20세기초에 미국을 방문했던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미국인들의 생활 곳곳에 “교파”가 영향을 끼치고있음을 발견한다. 례를 들어, 한 치과에서 그는 환자가 의사가 소속된 교파를 확인한후 시름놓고 치료받는 장면을 목격한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그 환자에서 무엇때문에 의사의 교파를 확인하는가 묻는다. 환자는 “그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도덕적수양이 높기때문에 신뢰할수 있다”고 대답한다. 즉 그 당시의 미국에 있어 교파는 단순한 신앙의 공동체가 아니라, 상호 신뢰의 공동체로, 그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을 할수 있는 사회적자본의 장(場)이였던것이다. 베버는 당시 미국의 큰 기업가들이 많이는 “침례회”회원임을 확인하면서, 이 교파는 높은 도덕적수준을 전제로 회원을 발전시키기때문에, 이 교파 회원으로 되는 순간 그 사회적신뢰도가 증명되여 타인들과의 협력이 용이한 점을 발견한다. 이것으로 베버는 서로 신뢰할수 있는 사회적자본의 형성이 기업, 경제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된다.     또 다른 례로, 유태인들은 내부의 단결력이 높기로 소문이 나있다. 족내의 끈끈한 협업과 협력을 기초로, 그들은 2000여년동안 나라도 없이 사처로 헤매고 다녔지만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세계경제의 명맥을 쥐고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합작의 기초를 다져왔을가? 그것은 바로 유태인문화에 률령(律令)이 발달했기때문이다. 세계에서 유태인들처럼 반드시 지키야 할 률령이 많은 민족도 드물것이다. 가령, “갚을 능력이 없이 빚을 내서는 안된다”, “세금을 내지 않은 상품을 매매해서는 안된다”, “당지의 법과 어긋나는 초과리윤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등과 같이 생활 곳곳에 지켜야 할 원칙들이 숨어있으며, 유태인이라면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러한 원칙들이 확립되여있기때문에, 유태인들끼리는 돈을 꿔주든 투자를 하든 사기당할 걱정이 없다.     해외의 화교들도 결집력이 높기로 소문이 나있다. 따라서 그들도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하고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결집력은 원천은 또한 무엇일가? 그 답은 바로 종족(宗族)조직에 있다. 북방의 한족들과 달리 남방의 한족들은 종족문화가 발달되여있어, 그들은 씨족을 단위로 사당(祠堂)을 세우고, 종가를 중심으로 하여 혈연적관계를 유지,확장시켜나간다. 근대에 해외로 흘러나간 화교들의 경우만 봐도, 외국에서 돈만 벌면,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당부터 수건한다. 따라서 그들은 뉴대감이 끈끈한 방대한 친족집단을 형성해갈수 있었다. 가령, “세계허씨총련합회”와 같은 종족조직들은 몇년에 한번씩 세계적인 친족회의를 개최하여 내부적결속을 다진다. 혈연을 매개로 뭉친 집단이기때문에 회원들은 다 친척이 되는 셈이며, 따라서 내부에서 사기를 하거나 하면 아예 사회관계에서 매장된다. 따라서 친족내부에서 다양한 협력이 용이해진다.     상호간에 신뢰형성이 집단내의 “힘”의 결집에서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기때문에 당대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아예 이를 “사회적자본”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돈”만 자본인것이 아니라, “서로 신뢰할수 있는 사회적관계”도 자본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경제적자본”으로 전환될수 있기 때문이다. 우에서 얘기한 사례들이 바로 “사회적자본”이 어떻게 “경제적자본”으로 전환되는가를 보여주고있다.     그렇다면 조선족은 어떠한가? 조선족의 문화모체는 기본적으로 상업문명이 결여된 농경문화이다. 게다가 근대에 일제의 침략을 겪으면서 파산된 상황에서 국제적이주를 경험하다보니 종족(宗族)관계도 거의 단절되다싶이하였다. 파산된 빈농집단이 국제이주를 겪으면서 파란만장한 력사적과정을 거쳤고, 그 와중에서 혈연과 계층을 초월한 “공동체”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삶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한 공동체였다. 힘들 때 위로해주고, 기쁠 때 같이 기뻐해주었는바 이민생활의 고단함을 공동체의 구성을 통하여 해소하였던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의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위로의 공동체”, “정의 공동체”, “놀이의 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 삶이 고단하고 각박하니 서로 “아픔”을 나눌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이러한 아픔을 나누는 과정에서 “정”이 생겨나고, 그것들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으로 “놀이의 문화”가 필요했다. 이러한 조선족공동체는 해방후에 “마을”이라는 안정된 정착지를 찾으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조선족마을은 바로 “위로의 단위”, “정의 단위”, “놀이의 단위”였다.     공동체생활에서 “정”이 강조되다보니, “계산”, “리익”, “계약”, “신뢰” 등과 같은 도구적합리성이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되기 싶상이였다. 가령, 조선족마을에서는 “리익만 따지고”, “계산적이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나쁜 사람의 전형으로 되기 일쑤였고, 반대로 인심이 후하여 다른 사람과 옴니암니 따지지 않는 사람이 좋은 사람의 전형이였다. 따라서 시장경제에 필요한 도구적합리성을 발전시킬수 없었다.     오늘날 조선족은 비록 도시화되여 대부분이 도시에서 살고있지만, 그 “공동체문화”의 습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있다. 조선족이 모여살고 있는 도시들마다 각종 “협회”가 설립되여 “공동체를 재구성”하고있지만, 이러한 공동체들은 기본적으로 합작을 기초로 “힘”을 키우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보다는 여전히 “정”을 나누는데 치중되여있다. 가령, “기업가협회”의 활동들을 보면, 협회를 통하여 유기적인 경제적합작이 이루어지기보다는, 기업인들이 돈을 모아 공익성활동과 문화활동에 열중하고있다. 따라서 “기업가협회”는 “힘을 결집하는 사회적자본의 장”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공동체를 도시에서 부활시키는 역할을 하고있다. 즉 우리는 아직 “사회적자본”을 “경제적자본”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있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뭉칠수는 있지만, 그것이 “믿을수 있는 사회적신뢰”로 되여 “힘”을 결집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지 못한다. 조선족은 “정”과 “아픔”은 같이 나눌수 있어도, “힘”과 “리익”은 같이 나누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공동체생활에서 우리는 “정”을 나누는데에만 습관되여있기때문이다.     인젠 세상도 변했고, 우리도 많이 변했다. 그러나 삶의 환경이 바뀐것에 비하여, 우리의 가치관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다. 조선족의 미래는 물론, 우리 개개인의 미래에 있어서도 어떻게 신뢰를 기초로 “사회적자본”을 형성하고, 이를 “경제적자본”으로 전환하는가에 승패가 달렸다고 볼수 있다. 날로 치렬해지는 시장경쟁속에서 특별한 묘기가 없는 한 령세한 업소는 설자리가 없다. 한 사람의 힘이 부족하니 열사람, 백사람의 힘을 합치여 일단 덩치를 키워야 경쟁에서 살아남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족공동체는 기존의 “정의 공동체”에서 “합작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또한 이러한 진화를 촉진시키는것이 민족을 사랑하는 이 시대 조선족지성인들의 사명이기도 하다.   ///인민넷  ======================= 덤으로  ... (시사저널 유지만 기자)= 1917년 중국 북간도(현재의 옌볜조선족자치주 지역) 명동촌(明東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윤해환. 우리말 ‘해’자에 한자 빛날 ‘환(煥)’자를 붙인 아명(兒名)이었다. 1910년 결혼한 윤영석, 김용 부부 사이에서 7년 만에 태어난 첫 번째 아이였고, 윤씨 집안의 장손이었다. ‘별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는 일제 식민지배하에 조선 땅을 떠나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비록 3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의 시는 지금까지도 생을 이어오고 있다.   시사저널은 9월11일부터 14일까지 나흘간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龍井)시를 찾았다. 룽징은 윤동주가 태어난 곳이자, 가곡 《선구자》에 등장하는 도시이며 ‘항일 투쟁’의 요람이기도 하다. 올해 12월30일은 윤동주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다. 윤동주 생가(生家)와 룽징시 대성중학교, 묘소 등을 찾았다. 또 조선족 현지 인사들을 만나 윤동주가 현재 문학계 및 사회·역사적으로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중국 현지에서 바라 본 윤동주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곳에서 ‘조선족 시인’ 윤동주와 ‘한국 시인’ 윤동주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이미 상당히 진행된 중국의 ‘동북공정’ 흔적도 엿볼 수 있었다. 중국 조선족이 세대를 지나면서 민족적 유대감이 상당히 끊어져가는 느낌도 받았다. 윤동주 안에는 윤동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민족적 유대감과 조선족 정체성 등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다.   중국 지린성 룽징시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생가 기념관 © 시사저널 유지만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은 룽징시에서 차로 10여 분가량 이동해야 한다. 마을 초입에는 ‘윤동주 생가’라고 써 있는 큰 비석과 ‘시인의 고향(詩人的故鄕)’이라 적힌 팻말이 있다. 바로 이곳에서부터 윤동주가 나고 자란 명동촌이 시작된다. 마을 안쪽으로는 예스러운 풍경을 간직한 기와집들이 곳곳에 보였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이곳은 조선인들의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한족들도 많이 섞여 들어온 상태다. 일부 집에는 농사를 짓다가 방치한 옥수숫대들이 우거지게 자라 있었다.   윤동주 생가는 마을 어귀를 따라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입구에는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 적혀 있다. 윤동주의 집은 명동촌으로 이주 온 조선인 중에서도 부유한 편에 속했다. 윤동주의 친동생인 고 윤일주 성균관대 교수는 윤동주 생가에 대해 그의 저서 《윤동주의 생애》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 남매들이 태어난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 마당, 북쪽 울 밖에는 30주(株)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윤동주의 생가는 재정비한 지 오래되지 않아 보였다. 기자와 동행한 중국 옌볜 조선족 인사는 “현재 룽징시에서 문화단위(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윤동주 연구를 활발하게 하고 있는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는 이를 두고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중국에서 윤동주를 일컫는 ‘애국시인’의 국(國)은 중국을 의미한다.   윤동주의 생가 안쪽은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와 윤동주 전시관, 실제 복원한 생가, 예배당 등으로 꾸며져 있다. 지나가는 길 곳곳에 그의 시를 새긴 돌비석들이 있다. 각각의 시는 중국어로 번역돼 있어, 중국인 관광객들이 올 때도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윤동주 전시관은 현재 정비 중이라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예배당 안쪽에는 가곡 《선구자》의 노랫말이 적힌 액자가 보였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해란강’은 바로 룽징에 흐르는 강이다.   윤동주의 실제 생가는 전시관 가장 안쪽에 있다. 생가 안에는 윤동주를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자 서거 72주기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8월초부터 현재까지 약 150명이 다녀갔다. 방명록에는 다녀간 이들이 남겨 놓은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거의 다 한국인이었고, 2~3명의 일본인이 다녀갔다. 관리자는 “요즘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가 불거지면서 한국인들 방문이 부쩍 줄었다. 예전의 10분의 1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자가 생가를 찾은 날에도 백두산 여행을 온 한국인 10여 명이 윤동주 생가를 둘러봤다.   생가 바깥에서는 기념품이 판매 중이었다. 주로 윤동주 평전과 시집, 중국 조선족 전통문화에 관한 책들이다. 조선족 사회에선 나름대로 윤동주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윤동주 평전》은 이미 시중에 나와 판매되고 있었고, 10월에는 조선족 향토작가가 집필한 《송몽규 평전》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들은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윤동주 평전》을 집필한 작가 박아무개씨는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 사람들이 잘 찾아내지 못한 부분들까지 찾아냈다”고 자랑했다.   그들의 이런 자부심에는 조선족과 한국인의 이질감이 깔려 있다. 현지에서 만난 조선족 인사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한국 사람이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중국 조선족은 옌볜 일대에 터를 잡은 지 100년이 넘었다. 세대로 따져도 현재 3대째 내려오고 있는 셈이다. 옌지시에서 사업을 하는 한 조선족 인사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여태껏 자랐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 사람일까. 국적은 ‘중국’이지만 우리는 엄연한 조선족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문화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 지린성 룽징시에 있는 윤동주 생가 기념관의 《서시》 시비(위)와 대성중학교의 《서시》 시비. 두 곳의 중국어 변역은 한자 표기부터 다르다. 이 부분에서 윤동주에 대한 묘한 갈등이 발생한다. 바로 ‘조선족 시인 윤동주’와 ‘한국 시인 윤동주’의 충돌이다. 조선족 현지 문인들은 한국에서의 추모활동에 대한 묘한 반감마저 가지고 있었다. 현지 향토작가인 박아무개씨는 “우리는 한국에 입국할 때에도 ‘외국인’으로 취급받는다. 한국에서 ‘한민족’이라고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이방인이다. 일전에 한국에서 상을 준다고 해서 들어간 적이 있는데,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중국에 사는 조선족’이라고 소개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기념사업에 대한 불만도 터져 나왔다. 현지 인사들에 따르면, 윤동주 기념사업은 1990년대까지 한국의 지원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현재 한국이 합작한 기념사업은 사실상 끊겨 있다고 한다. 현지에서 만난 조선족 유력 인사는 “요즘 진행되는 윤동주 기념사업은 사실상 조선족들이 주도하고 있다. 여기다 룽징시에서도 문화재로 지정해 줘서 지원받고 있다. 현재 남한에서 우리와 협업하는 것은 없다고 보면 된다”고 잘라 말했다.   이러한 갈등은 대성중학교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대성중학교 안쪽에 자리한 기념관 옆에는 이상설의 서전서숙을 기념한 전시관도 있었다. 하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전시관을 구경할 수도 없었다. 입구에 있는 소파에는 하얀 먼지가 자욱이 깔려 있었다. 얼마 전 한국으로부터 ‘서전서숙 기념사업’을 제안받았다는 한 현지 인사는 “서전서숙을 새로 세워주기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라고 해서 거절했다”고 말했다.     “윤동주 詩 중국어 번역, 엉망이다”   윤동주의 시 중 대표작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서시》를 꼽는다. 룽징 현지에서도 윤동주 생가와 대성중학교 전시관 앞에는 《서시》를 새겨놓은 시비(詩碑)를 볼 수 있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일제 치하에서 시인 윤동주가 겪은 고뇌를 잘 표현한 명시로 꼽힌다. 조선족 사회에서도 윤동주를 ‘저항 시인’ 내지는 ‘항일 시인’으로 평가하는 데 이 시가 한몫을 한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번역이다. 윤동주 생가 기념관과 대성중학교에 있는 《서시》의 중국어 번역본은 한자부터가 달랐다. 윤동주 시의 번역 문제는 그동안 늘 제기돼 왔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다. 윤동주 시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에서도 번역 문제는 제기돼 왔다.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려는 의도적인 조작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이에 비해 중국어 번역은 조금 더 원초적인 문제다. 윤동주 생가의 중국어 번역은 전 옌볜조선족자치주 고위급 인사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한 조선족 번역가는 “통탄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조선족 시인으로서 윤동주를 제대로 평가받게 하려면, 중국에서도 충분히 놀랄 만한 번역을 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중국 문학계에선 윤동주 시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조선족 안에서만’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번역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대성중학교 번역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윤동주 생가에 있는 번역본은 시의 의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중국 시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들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고 혹평했다. 기자가 파악한 바로는 윤동주의 《서시》에 대한 세 가지 중국어 번역본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연구해 만들어진 번역본은 없다는 게 중론이다.     “윤동주에 대한 관심 더 커지길”   윤동주 생가와 룽징 시내 대성중학교를 둘러본 후에는 윤동주의 묘소를 찾았다. 윤동주의 묘소는 룽징시 동북쪽 합성리(合成里) 동산(東山) 8부 능선 즈음에 있다. 윤동주의 묘를 찾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동산 어느 부근에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현장에 도착하니 별다른 안내문이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현지인들에게 물어도 중국 한족인 경우에는 전혀 위치를 알지 못했다. 일부 주민들은 “윤동주가 누구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었다. 산책 중이던 조선족 주민에게 물어본 후에야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윤동주의 묘소 바로 옆에는 송몽규의 묘소가 함께 있었다. 송몽규의 묘비에는 ‘청년문사송몽규지묘(靑年文士宋夢奎之墓)’라 적혀 있었고 윤동주의 묘비에는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글귀가 있었다. 1988년 《윤동주 평전》을 펴낸 송우혜 작가는 이를 두고 “윤동주 유족들이 송몽규의 묘에 ‘청년문사’라 표현된 것을 보고 묘한 경쟁심이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윤동주 묘비에는 ‘시인’이라는 표현을 넣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묘비 앞에는 먼저 다녀간 이들이 남긴 꽃이 한 다발씩 놓여 있었다. 윤동주의 묘소 옆에 있는 나무에는 종이를 접어 만든 하얀 꽃도 걸려 있었다.   지린성 룽징에 있는 윤동주 묘소(위)와 룽징 시내 대성중학교 전시관에 재현해 놓은 옛 교실 © 시사저널 유지만 윤동주의 묘소는 그가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뒤 40년이 지나서야 발견될 수 있었다. 처음 윤동주의 묘를 발견한 이는 일본인 윤동주 연구가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와세다대 명예교수였다. 그는 1985년 5월14일 윤동주의 묘지를 발견하고 이를 국내 학계에 알렸다.  문제는 이 ‘동산’이라는 단어였다. 당시 윤동주를 다룬 글이나 책에는 윤동주의 묘소 위치를 ‘동산교회 묘지’ ‘중앙교회 묘지’ ‘동산 중앙교회묘지’ 등으로 표현했다. 실제로 룽징에는 ‘동산교회’와 ‘중앙교회’가 있었고, 지명인 ‘동산’도 있는 터라 묘소의 위치를 특정하기 매우 어려웠다. 오무라 교수는 지난(至難)한 과정을 거쳐 결국 이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이후 1990년 송몽규의 묘소를 찾아 윤동주 묘소 옆으로 이장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현지에서 만난 인사들은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인 윤동주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길 기대하고 있었다. 현재 명동촌에는 옛 명동소학교를 재현하는 전시관 공사가 한창이었다. 조만간 일반에 개방될 예정이다. 이 역시 룽징시 주도로 진행되는 사업이다. 현지 공안(公安·경찰) 관계자는 “건물은 모두 완성됐고, 앞뜰 공사를 하고 나면 일반에 공개된다”고 말했다. 조선족 문학계 인사인 김아무개씨는 “중국이 자신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사업”이라고 규정했다. 조선족으로서 독립적인 문화유산을 남기려는 의지와 중국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지적이다.   김씨는 윤동주 연구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더욱 활발해지기를 기대했다. 그는 “윤동주가 조선족 시인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을 하기에 앞서, 윤동주 시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조선족 사회에서 윤동주 기념사업을 한다고 하지만, 이는 미미한 수준”이라며 “여전히 연구하고 알릴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윤동주는 그 자체로 소중한 시인이다. 한글로 이처럼 아름다운 시를 썼던 이가 또 있었던가 싶다.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부터 다시금 관심이 높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역시 덤으로 ... @@ 홍익대 앞 잔다리 윤동주가 산책했던 ‘잔다리 마을’은 서울 홍익대 앞 동·서교동의 옛 이름이다. 현재는 ‘잔다리길’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고 경의선 책거리 등 문화시설과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최혁중 기자    서울 마포구 지하철 홍대입구역이나 합정역 언저리 어디에 그의 자취가 있을까. 젊은 영혼들이 반갑게 만나고 헤어지는 번화한 거리는 1938년 너른 들녘이었다. 이 들녘에 연희전문에 입학하고 두 달 보름 지난, 스물한 살 윤동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내사 이 호수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 것은  참말 이적(異蹟)이외다.  오늘따라  연정, 자흘, 시기, 이것들이  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이적(異蹟)’(1938년 6월 19일)  윤동주는 ‘이적’ 육필 원고 끝에 ‘모욕을 참어라’라는 단말마 같은 글귀를 남겼다.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보리이까’, ‘나를 불러내소서’라는 구절에서 보듯 기도문이다. 아이 적부터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던 사진이 네 장 남아 있는 그의 시에는 성경에서 얻은 모티프가 많다.  ‘이적(異蹟)’이라 하면 죽을병에서 낫거나, 복권이 당첨되는 기적을 떠올린다. 그가 생각했던 이적은 무엇일까. 호숫가에 가기 전에 그는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왔다고 한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십계를 받을 때 신발을 벗듯 윤동주는 터분한 것, 그러니까 지저분하며 개운치 않고 군색한 것을 버리고 섰다는 말이다.      윤동주는 물 앞에 서면 자신을 성찰하곤 했다. 물결 위에 떠있는 달을 보며 내면을 성찰하고(‘달을 쏘다’), 우물 안에 자신을 투영해보기도 하고(‘자화상’), 냇가에 앉아 성찰하기도(‘산골 물’) 했다.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라는 구절은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오는 예수를 보고 자신도 걸어보려 했던 베드로 이야기, 마태복음 14장의 패러디다. 바로 전에 예수는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으로 5000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였다. 게다가 그냥 물 위를 걸었다. 베드로는 예수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있는 서커스 같은 ‘이적’을 흉내 내고 싶었다.  윤동주는 베드로와 다르다. 신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는 ‘부르는 이 없다’는 말과 ‘불리워’ 왔다는 말은 서로 맞지 않는다. 부르는 이가 없는데도, 까닭 모를 이유로 불리어 왔다는 것은 ‘참말 이적’이라고 한다. 신의 부름을 듣지 못했어도, 전혀 모를 황당한 미래 앞에 ‘불리워 온’ 것이 기적이라는 말이다.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는 횡재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살아온 일상 자체가 ‘참말 이적’이라는 말이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기적을 체험하는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보다, 그저 ‘따순 햇살’ 아래 살아가며 운명에 부닥치는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를 ‘참말 이적’이라며 그는 감내한다. ‘내사’는 ‘나야말로’, ‘나 같은 것’이라는 겸손한 표현이다. 나처럼 부족한 존재가 부르는 이도 없는데 이 호숫가로 불리어 온 것이 ‘참말 이적’이란다. 이어서 ‘터분한 것’들이 나온다. 원고를 보면 자긍(自矜), 시기(猜忌), 분노(憤怒)라고 써 있는데, 분노를 지우고 맨 앞에 ‘연정’을 써넣었다. 시를 교정할 때 윤동주에게 심각했던 문제는 분노보다 연정이었겠다. ‘이적’과 같은 날에 쓴 시 ‘사랑의 전당’에 그는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라고 썼다.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먼저 떨어졌습니다.’(‘그 여자’)에서 ‘붉은 능금’이라는 구절은 대단히 유혹적이다.  자기도취인 자홀(自惚)이나 쪼잔한 시기와 함께 터분한 욕구들이 오늘따라 ‘금(金)메달처럼 만져’진다. 바로 그 금메달 같은 ‘모든 것을 여념(餘念) 없이/물결에 씻어 보내’겠단다. 어설픈 너스레를 씻어버리며 ‘참말 이적’으로 살아가겠다니, 당연히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새로운 길’)일 수밖에 없다.  망망한 ‘호수 위로 나를 불러내소서’라고 마무리한다. 퇴고 전에는 원고를 보면 ‘이 호수 위로/나를 불러내소서/걸으라 명령하소서!’였는데 ‘걸으라 명령하소서!’를 삭제했다. ‘걸으라 명령하소서!’라고 하면 특별계시가 된다. 이 문장을 지웠을 때 물 위를 걷지 않아도 시련을 당하겠다는 다짐이 돋아 보인다.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사랑의 전당’)는 깨달음에는 운명에 당차게 단독자로서 나서는 키르케고르의 자세가 겹친다. 이상섭 교수는 이 시를 쓴 배경을 이렇게 추측한다.     “지금의 서교동 일대(1960년대까지 ‘잔다리’라고 했다)에는 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의 홍익대 앞 신촌 전화국 근처에 아주 큰 연못이 있었는데 1950년대에도 거기서 낚시질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느 옛글에 보면 한양 팔경 중에 ‘서호낙일(西湖落日)’이 들어 있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서교동, 합정동 일대, 즉 서강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해 지는 풍경을 가리켰다. 윤동주가 묵던 기숙사에서 잔다리의 연못까지는 약 30분 거리, 거기서 10여 분 더 걸으면 강가(서강)에 도달했다. 아마도 1938년 초여름 어느 황혼녘에 그는 잔다리의 그 연못가로 산보를 나왔다가 순간적으로 놀라운 경험을 한 것 같다.”(이상섭, ‘윤동주 자세히 읽기’)   잔다리 연못가로 윤동주가 산보 갔다는 확실한 증언은 아니지만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다. 옛날 연희동 골짜기에서 흘러내렸던 개울이 지금의 서교동 일대에 여러 갈래로 흘러내렸고, 거기에는 많은 작은 다리가 놓여 마을 이름이 ‘잔다리 마을’로 불려 왔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의통방 세교리계, 현재 마포구 동교동의 창천에 있던 작은 다리 ‘잔다리’, 한자로 고친 것이 세교(細橋)다.      자주 오랫동안 먼 길을 걷곤 했다는 윤동주, 들녘이었던 홍익대 앞 어디쯤을 거닐었을까. 1938년 그가 마주했던 호수는 그 무렵 그가 보았던 ‘해바라기 얼굴’의 여성 노동자나, ‘슬픈 족속’의 흰옷을 입은 한민족이라는 거대한 호수였을 수도 있겠다. 시 원본 끝에 ‘모욕을 참어라’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그에게 어떤 굴욕적 사건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적었을까. 이 메모와 함께 생각해볼 때, 어찌할 수 없는 자신과 민족의 운명 앞에 ‘나를 불러내소서’라는 다짐은 서늘하다. 물이 흐르던 시내는 복개되어 찾을 수는 없으나, 홍익대 근처에 가면 낮고 고독한 고백이 가슴속에 우직하다. 나를 불러내소서.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7    "언어문자를 상실하면 민족정체성도 사라진다"... 댓글:  조회:3443  추천:0  2017-10-24
텔레비 화면 유감1, 2 ,3 2017년 10월 21일  작성자: 오기활 필자는 연변 텔레비(시, 현 텔레비를 포함)를 보면 이런 유감(遺憾)이 뒤 따른다. 유감 1 화면이 백성을 모셨으면... 가장 가까운 두 가지 례다.  올해 연변의 로인절에 주로령사업위원회에서 조직한 “2017년 연변‘가장 아름다운 년장자(最美长者)”표창이란 기사에서 화면이 주 1 급 지도자를 지낸 로간부들로 거의 주체였다.  지난 “2017 룡정 제 8 회 중국조선족농부절 축제”기사도 화면 주체가 문예연출이나 축제관중들이 아닌 현직 각급지도자와 주 1 급 지도자를 지낸 지도자들의 화면이였다.  스위스 화교가 중국기자와 오간 얘기이다.  “나는 해마다 중국신문과 스위시신문을 함께 주문한다. 어떤 날 중국신문 1 면은 거의 3/2 지면이 관리들의 기사였다. 스위스신문은 국왕이나 총리, 부장들의 활동소식은 거의 없다. 있다면 간단한 ‘성냥갑’소식이 아니면 어느 부장이 탈세를 했다, 국비를 랑비했다는 풍자기사이다”  “중국신문은 관리를 위촌하고 스위스신문은 민생을 다룬다.” 유감 2 우리 말을 안 하는 대표와 주인공들이다 금년 1월의 주 3회(당대표대회, 인대, 정협회의)와 지난10월 11일 ‘전주 민족문화사업회의’뉴스에서 출연한 민족복장을 입고도 우리 말을 안 하는 대표와 수상자들로 기분이 잡쳤다. 자기 민족의 말을 하지 않는 지도자. 대표들이 자기 민족을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하겠는가?! “이번에 한복을 3벌을 갖고 갑니다. 래일 환송회에서도 우리 말로 발언하겠습니다.” 어제(12일) 만난 19차 당대표 라철룡(도문시 석현진수남촌 당지부서기겸 촌민위원회주임)의 이 말에 민족애에 머리가 숙여진다.  “언어문자를 상실하면 민족정체성도 사라진다.” 북경민족출판사 우빈희선임사장의 말이다. 유감 3 조선족들이 일하는 화면에 한복을 입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필경 평상시에 입는 평복, 일할 때 입는 로동복, 조상(弔喪)떼 입는 상복, 명절 때 입는 례복이 분명하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조직하는 화면을 보면 조선족들이 한복을 입고 과일을 따고 가을울 하는 화면들이 많았다. 이런 화면을 보고 타민족들은 무엇이라고 말할지는 몰라도 우리 조선족들이 거의 모두가 (저것은 형식인데…)하며 뒤여론을 한다.  “중국송장예술사생협회” 정호표(鄭虎彪)부회장이 연길 “정호표풍경사생전” - 《고향정》 전시회 때 하던 말이다. “오랜 준비 끝에 그토록 그리고 싶었던 고향의 풍경을 마음껏 화폭에 담으면서 무한한 행복과 감동을 느꼈습니다.” “민족화를 그리려면 조선족들이 평상시에는 한복을 잘 입지 않기 때문에 늘 민족복장차림을 하는 장(쫭)족들을 찾아 서장으로 갑니다.” ///오기활 ================== 덤으로 더... 조선말 방언은 우리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 / 김청룡 2017년 09월 20일 작성자: 정음문화칼럼 어릴적에 학교에 이상한 조선말을 하는 학생이 전학해왔다는 소문이 있으면 전교생이 모여들어 목을 빼들고 구경을 했다. 그만큼 타지역 조선족들이 사용하는 방언이 희한했던것이다.  조선말 방언은 19세기 중엽이후 대량의 조선이주민이 중국에 몰려들면서 중국에 자리잡고 차츰 방언구역이 형성된다.  19세기중엽부터 1910년 사이 청나라의 봉금령이 해지되면서 20만명에 달하는 조선이주민이 중국 동북지역에 정착한다. 주로 조선 평안도의 자성, 만포, 초산, 벽동, 창성, 의주 등 지역 출신들이 압록강이북의 집안, 통화, 흥경, 환인, 관전, 안동 등 지역에 정착하고, 함경도의 혜산지역 출신들이 장백지역에 정착하며, 함경도의 무산, 회녕, 종성, 온성, 경원, 경흥 등 지역 출신들이 두만강이북에 정착하고, 함경도의 일부 출신들이 흑룡강성의 무원, 료하, 호림, 보청, 밀산, 동녕, 녕안, 목릉 등 지역에 정착한다.  일본외무성 《재만조선인 개황》(1933년)을 살펴보면 1910년이전 압록강, 두만강이북 지역에 정착한 조선이주민은 대부분이 함경도, 평안도 출신이지만 제주도방언을 포함해 조선어 6대 방언 지역출신들이 모두 존재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이후 조선반도가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많은 애국지사와 땅 잃은 조선농민들이 또 중국 동북으로 대거 류입했다. 이 시기도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이주자가 위주였지만 그중 함경북도, 평안북도, 경상북도 이주민이 함경남도, 평안남도, 경상남도 이주민보다 많았고, 강원도, 황해도 이주민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이주민보다 약간 많았다. 그리고 이주민중 80%가 오늘의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안도 등 지역과 장백, 집안, 림강, 환인, 관전 등 지역에 정착하고 기타 20% 정도가 다른 지역에 정착하였는데 함경도출신들이 주로 오늘의 연변지역에 정착하고 평안도와 경상도 출신들이 주로 오늘의 료녕지역에 정착하였던것이다. 그후 1937년 일제의 “집단이민”정책에 의해 조선이주민이 또 한번 중국에 대량 정착하면서 중국에서의 조선말 방언 구역분포가 기본적으로 형성된다.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출신들에 비해 전라도, 경기도 등 기타 지역 출신들이 인원수가 훨씬 적기에 그 구역분포가 선명하지 않다. 이 시기에 형성된 조선말 방언 구역 분포는 오늘에까지 유지되고있으며 대체로 다음3대 방언 구역을 이루면서 조선반도에서의 방언 지리적분포와 대칭구조를 이룬다.  (1) 함경도방언 구역: 연변지역, 목단강지역, 통화지역의 장백. (2) 평안도방언 구역: 단동지역, 무순지역, 심양지역, 영구지역, 철령지역, 통화지역(장백을 제외한 곳들). (3) 경상도방언 구역: 장춘지역, 길림지역, 사평지역, 할빈지역, 수화지역 등.  조선말 방언은 우리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한국과 조선이 분단되여 상호 방언에 대한 료해 및 연구가 결핍한 상황에서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들이 사용하고 보존해온 방언은 더우기 소중하다.  도시화에 의한 인구류동과 전반 교육질의 향상에 의해 중국 조선말 방언도 위기를 면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우리 사회가 방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연구자들이 그에 대한 연구를 깊이할 필요가 있다. ///인민넷 2017-9-19
6    [쉼터] - 귀를 잘라 녀인에게 선물한 광인(狂人) 댓글:  조회:2353  추천:0  2017-10-24
고흐·헤밍웨이·도스토옙스키 … 천재 그리고 ‘환자’ (ZOGLO) 2017년10월22일  당신도 혹시 … 정신질환 다시 보기   후기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유독 노란색에 집착했다. 누런 밀짚모자를 즐겨 썼으며 불타오를 듯 선명한 색감의 해바라기 정물화를 자주 그렸다. 노란 저택에 머물면서 ‘옐로 하우스’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흔들리듯 불안한 붓 터치와 노란색에 대한 선호는 ‘측두엽 간질’의 증상일 가능성이 있다. 스스로의 귀를 잘라 여인에게 선물할 정도로 광인(狂人)이었던 그는 술과 마약 의존증이 있었다. 미국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일가는 4대가 우울증과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헤밍웨이에게 사냥과 낚시 등을 가르쳐 줬던 의사 아버지는 1928년 엽총으로 자살했다. 헤밍웨이 자신도 말년으로 갈수록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망상에 시달렸다. 아버지의 자살을 원망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집에서 엽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했다.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등 전투·싸움과 같은 남성적 소설을 남긴 것은 남성성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과 나르시시즘의 영향이 작용했다.  73세의 나이에 “늙고 추한 것을 견딜 수 없다”며 자살한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설국』 작가)는 결벽증과 나르시시즘이 있었고, 도박벽과 우울증이 있었던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 등 거의 모든 작품에 자신의 살인 충동을 투영했다.  이병욱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전 한림대 교수)는 역사적 인물의 전기와 작품 등을 참고해 정신병리 증세를 추론했다. 그에 따르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예술가와 역사적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정신과적 문제를 겪었다. 과거 제대로 된 처방도, 약물 치료도 없던 시기 천재들이 보였던 행동들이 현대 의학의 시각에선 정신질환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전 교수는 비슷한 증상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들려주던 이야기를 엮어 『위대한 환자들의 정신병리』(2015년), 『자살의 역사』(2017년) 등의 저서를 냈다. 저서의 등장인물만 300명이 넘는다. 스스로 “강박적인 글쓰기”라고 부를 정도로 사례 수집을 해왔다. 올 초 대학병원을 퇴직하고 충북 음성의 정신과 전문 소망병원으로 옮긴 그를 지난 19일 만났다.  Q : 정신질환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데. A : “정신건강은 생물학적 요인, 심리적 요인, 사회적인 요인 세 가지가 작용한다. 타고나기를 뇌 기능에 결함이 있거나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 남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예민하게 캐치하는 기질이 있다. 가정환경이 엉망이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 정신질환이 올 수밖에 없었다. 과거 치료법도 없던 시절 예술가들은 실현될 수 없는 자신의 충동을 글로, 그림으로 표출했고 그것이 위대한 작품으로 남았다.” Q : 창조적인 사람일수록 우울증에 잘 걸릴 수 있다는 말인가. A : “무언가를 자꾸 끄적이고 쓰는 사람들은 자기에 대한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창조적인 욕망이나 환상은 상대적으로 큰데 현실적으로 적절하게 해소되지 못하면 정신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선행 연구 중 예술가 가운데서도 시인(詩人)은 조사 대상의 70~80%가 우울증 전력이 있다는 연구가 있다.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와 이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일례로 ‘오감도’를 쓴 이상의 시 세계는 자아도취적이다. 독자들의 이해는 관심이 없다. 자신의 욕구 불만과 갈등을 해소하는 셀프 큐어(self cure)의 차원이다. 이상은 명석한 두뇌를 타고났지만 아버지는 손가락 일부가 없는 가난한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고아 출신이었다. 태어나자마자 큰아버지 집에 맡겨졌는데 시에서도 분리불안의 흔적이 드러난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사실상 1위인 국가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6.5명(OECD 평균 12명)이었다. 지난달 5일 국문학자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가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유명인의 자살도 끊이지 않고 있다. 반면 정신질환 치료에는 부정적 인식이 크다.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정신질환 관련으로 자살한 사람은 2만728명이었다. 중앙심리부검센터에 따르면 2015년 자살자 121명에 대해 심리적 부검을 진행한 결과 ‘우울증 미치료군(39명·32.2%)’이 경제 문제(29명·24.0%)로 인한 자살자보다 많았다.  Q : 한국은 왜 자살률이 높나. A : “서양 의학에서 말하는 우울증과 한국의 우울증은 엄밀히 다르다. 서양인은 기독교 윤리에 바탕을 둔 죄의식이, 일본을 비롯한 동양은 수치심 때문에 우울증이 생긴다. 한국의 주된 정서는 한(恨)이다. 억울함·분노와 부당함에 대한 호소다. 우울증이라기보다는 울화병이다. IMF 이후 자살률이 늘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가족이 해체되는 환경적 요인으로 인한 분노·적개심·억울함의 정서가 원인이 됐다. 서양 의학에서 말하는 우울증, 곡기를 끊을 정도의 무기력함은 세로토닌을 조절하는 항우울제 처방으로 증상을 완화할 수 있다. 반면 울화병은 약 처방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주변 사람과 전문가가 소위 하소연을 들어주는 과정도 필요하다.” Q : 우울증이라고 모두 자살하지는 않는다. 기질적 영향도 있나. A : “자살 문제는 의사들도 풀기 어려운 과제다. 충동 조절이 잘 안 되고 나르시스틱한 사람에게 자살 충동이 생기면 남겨질 가족이나 주변 사람의 감정보다 자기 감정에 집중하기 때문에 성공 확률이 높다. 헤밍웨이 일가는 우울증의 집안 내력이 있어 보인다. 유전적으로 기질이 전달될 수 있다.” Q : 최근 한국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정신과적 문제는 어떤 것이 있나. 극복하는 방법은. A : “인터넷이 발달하고 대중매체 노출이 잦다 보니 충동 조절과 나르시시즘 문제가 있는 젊은 환자가 늘고 있다. 유치원에서 왕따를 당해 대인기피증이 온 5세 환자도 있었다. 적어도 병원을 찾는다는 건 긍정적 신호다. 자신에게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치유의 길이 생긴다. 한국인들은 워커홀릭(일 중독)이 많다. 강박적으로 업무 성과를 내지만 내면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상대적으로 크거나, 마음속 깊이 열등감이 있다. 혹은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이 작용할 수 있다. 자존심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된다. 전문가를 찾거나 자조 그룹(비슷한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면 고통을 줄일 수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를 알게 되면 두려움이 덜해진다. 스스로의 잠재력을 믿고 용기를 내야 한다.” ///중앙선데이  
5    편지 한통 = 1억 9천 댓글:  조회:2545  추천:0  2017-10-24
"엄마, 궁전같은 배 탔어" 타이타닉 승객 편지 1억9천만원 (ZOGLO) 2017년10월23일  (서울=연합뉴스) 이경욱 기자 = 1912년 북대서양에서 침몰해 1천5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호화여객선 타이타닉의 당시 승객이 쓴 편지가 12만6천 파운드(1억9천만 원 상당)에 팔렸다. 타이타닉 승객들이 쓴 편지 등 기록물 가운데에서는 가장 높은 가격에 영국의 한 경매업체 경매에서 거래됐다. 22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타이타닉 1등실 승객 알렉산더 오스카 홀버슨은 사고 당일 하루 전인 4월 13일 타이타닉 제공 편지지에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써 공책에 보관해 뒀다. 홀버슨은 편지에서 타이타닉을 '궁전식 호텔'처럼 잘 갖춰진 '거대한' 배라고 묘사했다. 홀버슨이 쓴 편지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타이타닉 갑판에 앉아 있는 백만장자 존 제이컵 애스터를 봤다고도 기록했다. 애스터에 대해 "그가 비록 돈은 많이 갖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홀버슨은 "별일 없으면 수요일 오전 뉴욕에 도착할 것"이라고 써 편지를 본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가 편지를 쓴 다음날 타이타닉은 빙산과 충돌한 후 결국 침몰했다. 홀버슨은 그의 아내 메리와 함께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타이타닉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아내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나 홀버슨은 숨졌다. 홀버슨은 뉴욕의 우들론 묘지에 묻혔다. 영국 드비즈의 경매업체 '헨리 올드리지 앤 선'(Henry Aldridge & Son)에 따르면 편지는 그의 시신과 함께 발견돼 어머니에게 전달됐다. 편지는 내용 대부분이 해독 가능한 상태지만 바닷물에 절어 얼룩이 많이 남아 있다. 경매사 앤드루 올드리지는 "편지가 좋은 상태는 아니다"며 "하지만 읽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누가 편지를 샀는지 구체적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상징성이 있는 물품을 구매하는 영국 수집가가 이를 구매했다"고 말했다. 편지 구매자는 개인 소장품에 포함하겠지만 그의 구매 물품 상당수는 세계 각국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타이타닉 물품 가운데 가장 높은 가격에 팔린 것은 바이올린으로 4년 전 110만 파운드(16억4천만원 상당)에 거래됐다. 홀버슨 부부. [연합뉴스 자료사진]
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참대곰아, 나와 놀쟈... 댓글:  조회:2583  추천:0  2017-10-24
                                                                  쓰촨(四川 사천) 워룽(卧龍) 중화판다원 선수핑(神樹坪)기지에서 판다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서 쉬고 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기온이 내려가자 쓰촨워룽중화판다원 선수핑기지에서 국보 판다는 사육사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으면서 한가로운 가을 한때를 즐기고 있다. 이 기지는 중국판다연구보호센터가 2008년 원촨지진 후 새로 지은 판다기지로 쓰촨성 워룽 국가급 자연보호구 관리국 겅다(耿達)향 선수핑에 있는 황차오핑(黃草坪)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부지면적은 약 150헥타르이다. 현재 선수핑기지에는 올해 기지에서 새로 태어난 판다 새끼 19마리를 포함해 50여 마리의 판다가 있다. 신화사 /국제온라인
3    [쉼터] - 민심 = 천심 댓글:  조회:4463  추천:0  2017-10-24
【19대 보고서 원문】 취업은 가장 큰 민생이다. 취업 우선의 전략 및 적극적인 취업정책을 견지하고 더욱 높은 질과 더욱 충분한 취업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직업기능 훈련을 대규모로 전개하고 구조적인 취업 모순을 해결하는 것을 중시해야 하며 창업을 통한 취업 확대를 격려해야 한다. 【19대 보고서 원문】 경제의 성장과 함께 주민의 소득도 함께 증가시켜야 하고 노동생산성을 제고시키는 동시에 노동보수도 같이 늘려가야 한다. 당의 모든 업무는 반드시 가장 광범한 인민의 근본이익을 가장 높은 기준으로 간주해야 한다. 인민대중의 작은 일을 자기의 큰 일로 생각하고 인민대중이 관심을 가지는 일, 인민대중이 만족을 느끼는 일에서 시작해 인민들을 거느리고 끊임없이 아름다운 생활을 창조해야 한다.     2017년 8월 16일, 산시(陝西)성 양(洋)현 차오바(草壩)촌 마을 주민 왕젠훙(王建紅)이 배나무 밭에서 조생한 황금배를 따고 있다. 차오바촌은 ‘주환후(朱鹮湖) 과일산업 전문 합작사’를 설립해 ‘당 지부+합작사’의 관리방식과 ‘합작사+회사+기지+농민’의 경영방식을 통해 자원을 자산으로, 자금을 지분으로, 농민을 주주로 만드는 ‘3가지 변화’를 가져왔고 집단경제의 끊임없는 성장과 농민수입의 지속적인 증가를 실현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2명의 농민공이 산둥(山東)성 이위안(沂源)현 루춘(魯村)진의 한 플라스틱 백 생산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2017년 6월 8일, 장쑤성 쑤첸(宿遷)시 쓰훙(泗洪)현 저우타이(周台)촌의 양식업자 저우강(周剛, 오른쪽)이 안해 천룽미(陳榮米)와 함께 쪽배로 수확한 작은 가재를 운송하고 있다 2017년 1월 10일, 왕위치(王宇琦)가 산시(山西)성 진청(晉城)시 시웨(喜閱) 북 카페에서 책장을 정리하고 있다. 왕위치는 산시 진메이(晉煤)그룹에서 10년 근무했었다. 2015년, 그가 소속된 기업은 진로 조정을 실시하면서 직원들의 무급휴직을 권장했다. 탄광에서 나온 왕위치는2015년 말에 24시간 북 카페—시웨 북 카페를 오픈했고 2016년은 다퉁(大同)과 윈청(運城)에서 또 북 카페 체인점 두개를 더 오픈했다.  산시 루안(潞安)그룹 쓰마(司馬)탄광의 안전등 실에서 수갱 종합기계화설치팀의 옌젠핑(閆建平)이 헤드램프를 벗고 있다. 옌젠핑은 원래 스거제(石圪節)탄광에서 근무했지만 전국 석탄산업의 생산량 과잉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스거제탄광은 석탄 생산량이 많은 산시에서 폐쇠시킨 몇개 탄광 중 하나로 되었다. 하여 옌젠핑은 스마탄광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2017년 9월 11일, 수강생들이 후난(湖南)성 장자제(張家界)시 우링위안(武陵源)구 과이야오메이(乖么妹) 면직 기지에서 면직 기술을 배우고 있다. 2017년 5월 19일, 에베레스트 밑의 자시쭝샹(紮西宗鄉)에서 온 줘마(卓瑪)가 자기집에서 운영하는 텐트여관에서 관광기념품을 정리하고 있다. 2017년 7월 14일, 저장(浙江)성 더칭(德清)현 모간산(莫干山)진 라오링(勞嶺)촌 주민 차오수이잉(曹水英, 왼쪽)과 그의 딸 캉원친(康文琴)이 자기집에서 경영하는 ‘젠치(澗棲)민박’에서 객실을 청소하고 있다. 10여년 전 까지만 해도 라오링촌은 현지에서 유명한 빈곤마을이었다. 저장의 ‘아름다운 농촌’ 건설이 현지의 농촌관광과 민박경제를 발전하게 했다. 2017년 7월 19일, 관광객들이 허베이(河北)성 관타오(館陶)현 량화(糧畫) 마을에서 참관하고 있다. 2017년 6월 30일, 닝샤(寧夏) 구위안(固原)시 위안저우(原州)구 펑바오(彭堡)진 야오모(姚磨)촌 주민들이 채소 기지에서 양배추를 수확하고 있다. ///신화사     10월 9일, 여행객들이 둔황(敦煌, 돈황) 밍사산(鳴沙山, 명사산)에서 낙타를 타고 사막 풍경을 감상하며 실크로드 풍경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하남성 106세 할머니 지금도 바늘에 실 꿸 수 있어 [ 2017년 10월 26일 09시 08분   조회:2432 ]     하남성 내황현 장룡향 전달촌(田达村)에 살고 있는 올해(2017년) 106세 할머니가 바늘에 실을 꿰고 있어 화제. 1911년 전달촌에서 태여난 장운 할머니는 올해 106세로 슬하에 5명의 딸을 두고 있다. 올해 73세인 둘째딸이 로모를 모시고 있다. 할머니의 건강상태는 매우 량호한편이였다. 눈만 밝은게 아니라 귀도 밝은 상태이며 자체로 거동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각뉴스/봉황넷           50년만에 찾아온 태풍 "오펠리아"가 휩쓸고 간 영국의 한 과수원에서ㅡ 올림픽 성화 채화 올림픽의 발원지서 [ 2017년 10월 26일 08시 ]     그리스 여배우 카테리나 레후(앞줄 오른쪽) 대제사장 역을 맡아 성화. 이날, 평창동계올림픽 성화 채화가 그리스 올림피아경기장 헤라신전에서ㅡ 
2    예술창작은 자연과 인간의 결정(結晶)에의 충동이다... 댓글:  조회:2098  추천:0  2017-10-24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5) : 뭉크 Edvard Munch (1863~1944)   생(生).사(死).애(愛).증(憎)에 넓은 공감대(共感帶)       불안   뭉크의 분열증 증세는 1890년 도라 라우젠과의 연애로 고민과 알콜에 의해 더욱 심화되어지면서 신경 쇠약 상태가 한때 계속되어지기도 하는데, 공허한 듯하면서도 무엇의 의미를 찾으려는 기묘한 눈을 크게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옷의 군상(群像)의 표정은 뭉크의 자주 다루어진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면성(正面性)에 대하여 혹간 말하기를 분열병 심리에서의 표현성, 친화성(親和性)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나, 뭉크의 근원적인 위문이나 불안이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을 창작토록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저녁놀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산과들에서의 곡선적 효과는 불안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유화에서 뿐만 아니라 목판화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표현을 많이 남기고 있다.         절규   뭉크의 작품에서는 항시 사랑, 죽음, 불안 등이 내재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정신 분열적 두려움에 대한 자신의 고백이면서 또한 생활과 심리학적인 발전의 사건들과 깊은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이 작품은 뭉크의 대표적인 것 중 하나로서 원근법적인 방법을 구사한 중에 화면 구성을 대담하게 사선으로 구획하였으며, 강렬한 색채의 대비는 의외적이라기보다 상호 관계에 의한 다이내믹한 효과를 보여 주고 있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과 입을 크게 열고 있는 것은 절규하고 있는 상태로 느껴오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연을 통해 크게 부르짖는 소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유연한 곡선과 강직한 직선과의 대비는 아아르 누보의 장식의 한 형태이며, 붉은 구름은 마치 불타고 있는 것처럼 일몰의 빛남과 동시에 공포의 화면을 나타낸다.         절규   뭉크는 판화를 회화 못지 않게 중시하였으며 회화만큼 판화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유화에서의 테마를 판화로 옮기기도 하였으며, 제목을 바꾸기도 하고, 석판이나 목판으로 변화시켜 표현하였다. 뭉크는 판화의 기법적인 면에 여러 가지 혁신을 가져다 주었는데, 동일한 작품 속에 몇 가지 기법의 판종을 병용하기도 하고, 합성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혁신을 실행하였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판화에 대한 기술을 크게 연마하였는데, 이 작품도 이 때 제작되어진 석판화로서 부드러운 모필(毛筆)에 의한 풍요로운 곡선은 장식적인 윤곽을 지니는 한편, 동세에 의한 조형적 화면 구성은 긴장된 가운데 현대인의 불안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여 주고 있다. 유화에서와 같이 동일한 구도를 채택하였는데 석판화에서는 더 한층 힘있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마돈나   '여자의 사랑은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죽음과 동등시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듯이 뭉크에게 있어서 여자의 헌신적인 사랑이란 수태(受胎)하여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바탕을 발전시킨 모티브가 이다. 작품에서 보여지듯이 마돈나 상(像)을 둘러싸고 정충을 그렸으며 왼쪽 아래 부분 구석에는 뼈만 앙상한 태아가 웅크리고 있다. 풍만한 육체에 자유 분방한 머리카락의 곡선의 의미, 여기에서 사랑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때마저, 죽음에 대하여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은 서로 공존하며 동시에 나타나고 여자는 남자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위험케 하는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로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 '사랑'의 연작은 확대되어 '이것은 사랑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라고 하면서 평생 다루었다.         마돈나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으로 보았는데 하나는 꿈꾸는 여인, 또 한편으로는 삶을 갈망하는 여인, 또 체념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 에 나타난 여인에 대하여 '몸을 바치는 여자-성모의 고통스런 아름다움에 싸인다.' 라고 쓰기도 하고, '모든 세계의 움직임이 정지하는 순간, 너의 얼굴은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포함하고 있다. 익어가는 과일처럼 새빨간 너의 입술은 고통 때문이기도 한 것처럼 달싹 벌어진다. 그것은 시체의 미소이다. 바야흐로 삶이 죽음에게 손을 내민다. 죽어서 사라진 무수한 세대와 미래의 세대와의 사이에 인연이 맺어진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뭉크의 나이 30세이던 1893년 12월, 베를린에서 연작, , , , 등의 연작을 발표하였는데 중심이 된 것은 이 였다.         그랑 카페의 입센   이 작품을 그린 1906년(43세)에 베를린에서 공연한 입센의 '유령', '헤다 가블러'를 위한 무대 장치의 밑그림을 제작하였다. 당시 32세이던 1895년 오슬로의 브롬쿠비스트 화랑에서 개인전이 개최되었는데 이때에 보이콧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논란의 대상이 된 후 전시 일주일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 때 개인전을 방문한 입센의 지지와 격려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내게는 매우 즐겁군, 나를 믿게. 사태는 내 편을 든 것과 같이 틀림없이 자네 편을 들게 될거야. 적이 많을수록 친구도 많은 법이라네.'하고 입센은 격려를 하여 주었는데, 이 때 뭉크의 마음에 강한 용기를 갖게 하였다. 전체의 구성이 불안정한 어지러움을 특성있게 주입시켜 주고 있다. 석판화 작품에서는 뭉크의 섬세한 소묘의 우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사춘기   뭉크는 소녀의 모습을 통하여 성(性)에 눈뜬 청춘기의 첫 반응의 특징인 성적인 자기 암시와 또 한편으로는 움츠러드는 애틋하면서도 청순한 사춘기 소녀를 표현하려 했다. 이 모티브는 뭉크가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한 작품에서 선택하여 등장시키고 있다. 유화로 처음 제작한 것은 1886년인데, 1890년 공교롭게도 불에 타 없어지므로 해서 다시 이 작품을 제작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뭉크의 여성 초상화나 또 일반적인 여성을 표현한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여성 내면을 감추려는 듯 손을 앞에 가지런히 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 이 작품에서 표현되어진 소녀는 사춘기 특유의 감수성이 강한 동경과 불안이 혼합되어진 내면 세계를 풍부하게 나타내고 있다.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과 불안을 상징한 듯한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누이동생 잉게르의 초상   당시 29세 때 잠시 귀국하여 9월에 오슬로의 토스톨프고렌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갖게 되는데 이때 발표한 초기의 대표작이다. 라는 제목으로 출품되었던 초상화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눈에서 외부로부터 내면 세계를 투영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정면성에 의한 시선의 초점은 뭉크 세계의 특색이기도 하다. 인물의 표현을 정교하게 나타내고 있는 듯하면서도 특징적인 것 외에 불필요한 요소는 생략하였고, 간결한 형태와 조화를 갖춘 색채는 조형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 구도적인 면에서 좌우 대칭으로 이루어진 형태는 강인하면서도 엄숙한 고전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인물 하단부에 바닥을 가로지르는 수평선과의 관계는 화면의 긴장을 강하게 느끼게 하면서 순수한 감동을 더 한층 주고 있다.         입맞춤   이 주제는 목판화, 유화 등에서도 잘 표현되어지고 있기는 하나, 동판화에서 볼 수 있는 간결한 선에 의한 담백한 효과를 특징있게 나타내고 있다. 사랑에 향한 눈과 마음은 상식성을 벗어난 인간화된 깊은 존재의 엄숙한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창가에서 밝은 빛을 받으며 애무하고 있는 나체상은 매우 정성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동일한 모티브를 다양한 기법을 통하여 추구한 가운데 각각 다른 개성적인 면을 개척한 영역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두 연인이 포옹하고 있는 상황은 에로틱한 장르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에로틱한 행동에서 개별성을 제거한 상태로 변화시켜 양성의 만남의 보편적 상징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다양한 판법에 의한 기법으로 드라이포인트, 에칭, 애쿼틴트 등을 결합한 혼합 방법에 의한 표현 효과를 갖고 있다.         입맞춤   뭉크의 작품은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서 항시 비롯되었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 개인적 체험에 의해 채색과 내용으로서 표현되어졌다. 남녀가 열렬한 사랑에 빠져 한몸이 되어 키스를 하고 있는데, 사실적 소묘에서 시작하여 에칭, 석판화에서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간결하면서도 장식적인 나뭇결을 갖는 목판화에 결정은 최고에 이르고 있다.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모티브로 즐겨 이용되어지고 있는데, 합일화 되어진 전체 형태의 뉘앙스가 미묘한 감정을 불러주는 한편, 대상의 데포르마시옹에 의한 동감(動感)과 리듬을 생명감 있게 전개시키고 있다. 배경의 불필요한 묘사를 생략하고, 고운 나무결의 자국이 인물의 효과를 돋보이게 하는데, 전체적으로 요약한 단순한 형태로서의 포착은 깊은 애정을 지니게 한다.         죽음과 소녀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무수한 세대와 장래의 세대와의 보이지 않는 연결을 상징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나타내고 있다. 벌거숭이의 천진한 소녀가 죽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해골과 포옹을 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이 서로 공존하는 가운데 환희에 잠겨있는 소녀는 죽음을 외면한 채 현실에만 충실하려 한다. 가장자리에는 정충(精蟲)이 그려져 있기도 하며, 태아가 웅크린 모습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사랑, 죽음이 동존 속에 같이 나타나며 남자, 여자 모두가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죽음을 느끼게 하는 테마는 후에 표현주의 회화에 간혹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원형(原型)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뭉크의 작품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작품으로, 유화 작품 외에도 동판화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이 있다. 뭉크의 숙명관을 보는 듯하다.         질투 DER NEID 1896년 석판 46.5X56.5Cm 오슬로 밍크 미술관 소장     프르치비제우스카의 초상   뭉크는 이탈리아 여행 후 독일로 가게 될 기회를 갖게 된다. 1892년 베를린에서 예술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단체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신비주의와 환상적인 경향의 감정을 발표하고 있다. 이 무렵 제작한 것으로 실재적인 인간을 표현하면서도 공간 속에 떠 있는 듯한 인물의 묘사는 탐미적(耽美的)인 세계에 몰입되어지는 내면 세계를 느끼게 한다. 뭉크는 많은 인물화를 그렸는데, 항시 생존의 의미를 존중하며, 인간을 위한 예술을 창조하였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형태에 의한 단순한 표현은 주제를 확대시켜 주는 반면에 얼굴의 섬세한 사실성과 손, 발의 생략되어진 묘사는 상반된 조화를 강하게 느끼게 하여 준다. 주관적인 감정이 내용과 형태를 결정한다는 기조를 적절하게 나타냈으며 뭉크의 내재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병든 아이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며 살아 있는 인간을 그리 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친 뭉크는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여 표현한 것이 많은데, 이 모티브도 가장 많이 선택 한 내용 중의 하나이다. 처음 작품의 모티브를 후에 다른 기법으로 변화시켜 표현하든가, 유화와 똑같은 내용으로 판화를 제작하고는 하였다. 그에게서는 그림의 다양한 양식에서 생기는 어떤 내용보다 중요시 처리되었던 것은 회화의 주제였다. 이 두 점의 석판화들은 같은 판에 잉크색을 바꾸어 찍어낸 것으로 색채의 상반된 표현 효과도 있겠으나, 그보다 특정한 모티브를 고집하고 거기에 종속되어진 속에 색을 바꾸어 찍어낸 판화로 보는 것이 의의가 있겠다. 병상에 누운 누나 소피에의 모습에서 찾아낸 강렬한 인상을 작품화 한 것으로 보여진다. 섬세한 선묘에 의한 얼굴 표정이 특색있다.         실내   뭉크는 동일한 제재를 반복하여 표현한 것이 많은데,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북유럽의 일반 가정의 실내 풍경은 주제에 있어서나 표현 양식에 있어 특유성을 지니고 있다. 뭉크의 미술 전개 과정은 초기에는 인상 주의적인 경향과 만년에 가서는 풍경화를 대할 수 있는 약간의 주제의 변모는 있을 수 있겠으나, 전 생애를 통해서 양식의 변천은 큰 변화를 갖고 있지는 않다. 맑은 색조에 의한 주관성을 지닌 빛에 대한 처리는 나중에 인상파에 매혹되어지는 관련성을 갖게 되는 암시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다. 뭉크의 부친은 비정상적이면서도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뭉크가 장래 기사(技師)가 되 기를 원하였는데, 이러한 뜻에 의해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얼마 후 그만두고 화가가 되 기를 지망할 무렵 제작한 소품(小品)이다.         여자의 마스크 밑의 자화상   '나의 가정은 병과 죽음의 가정이었다. 확실히 나는 이 불행에 이길 수가 없었다.' 라고 어린 시절을 말하듯이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것으로써 항시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항시 내부에는 깊은 불안 속에 잠겨져 있는 상태에서의 운명적인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물 배경의 붉은 벽면 위에 침통한 표정을 한 여자의 대형 마스크가 걸려 있으며, 자화상은 무표정한 채 정면을 응시한 채 간단하게 표현되어져 있는데,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곧 덮칠 듯한 마스크의 상징은 압박과 고뇌에 대한 이야기처럼 전하여진다. 그의 그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빨간색은 인상적이라기 보다 그의 몸 내부에 흐르고 있는 피에 대한 관심과 죽음을 항시 생각하는 뜻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다. 독특하면서도 암시적인 채색에 의한 집중적 표현이다.         귀가하는 노동자들 1915년 캔버스 유채 200X228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저승에서, 자화상   생에 전체를 통해 볼 때 뭉크는 훌륭한 초상화가였으며, 항시 즐겨 다루는 그 자신으로써 일생의 대 시리즈가 되는 자화상을 남기고 있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거친 필세에 의한 빨간 배경과 누드, 머리 부분의 강한 형태를 만든 선과 왼쪽의 검은 연기인 듯한 그림자가 대담하게 처리되어져 있는데, 명제 그대로 '저승에서'만난 인간의 실존처럼 주관성이 강하게 묘 사되어져 있다. 뭉크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초 기에는 엄격한 양식에 낭만적인 우울함에 차 있는 자 신을 나타냈으며, 젊었을 때는 자유로운 형태감 추구에서 자의식(自意識)이 넘쳐 나게 표현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저승이라는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모 든 불안과 고뇌에서 해방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의 내면적 고백으로서의 죽음의 상징화를 수용하려는 자세가 나타나고 있다.         자화상 1895년 캔버스 유채 110.5X85.5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소리   본래는 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사랑의 연작 중 한 작품이다. 뭉크는 간혹 자연 속에 인물을 상징화 시킴으로써 자연에 대해 공명(共鳴)하는 한편, 인간의 심리적이고 정신적 경험을 시각화하려 하였다. 여기서 표현된 여인은 체념한 여인으로서, 고독과 슬픔에 찬 모습으로서의 삶을 갈망하는 상(像)인 것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달기둥이 자주 등장 되어지는데 이것은 달에서 해로, 음(陰)에서 양(陽)으로 변화하여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동경(憧憬)과 고독, 불안에 차 있는 여인이 소나무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멀리서 보트놀이 하 는 남녀의 행복의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수직적인 나무와 수평선의 바다 구성은 여인을 친근 성 있으면서도 더욱 돋보이게 하여 준다. 독특한 기법에 의한 좀 색다른 개성있는 작품이다.         병실에서의 죽음   그의 작품은 문학적이기는 하나 문학적이면서도 동시 에 반사실적 성향이 뭉크 예술의 기본 요소인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의 개인적 일들을 비유적으로 재현하였으며, 개인적 체험을 근본으로 하여 승화시켜 환원화된 창조력을 보였다. 여기에서의 내용이 뭉크 자신의 가 족의 죽음을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낸 것인지는 불확실하나, 과거 가정 내에 있었던 병과 죽음에 대한 불행적인 기억을 상기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병실 내의 무력감(無力感)이 가득 차게 톤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 개개인 표정은 실의에 찬 가운데 슬픔, 기원, 상념의 모습들을 강한 형태로서 요약시켜 주관성있게 나타내고 있다. 찾아든 흑의(黑衣)의 천사였던 것처럼 이를 적절히 표현한 작례(作例)라 하겠다.           빨간 덩굴풀   노르웨이 풍경 중에서도 특히 오슬로 시가와 오스가르 스트란드의 바닷가 풍경에서 뭉크는 정신적인 생명감을 표현하였으며, 자연을 통해 외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자연 속의 분위기를 찾아냈던 것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해가 1900년으로서 이 때에는 베를린 화단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 문인과의 교류가 왕 성하였으며, 한편 뭉크의 주관성의 강조가 고호 등과 함께 포비즘이나 표현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화면 중심부에서 약간 휜 듯한 수직적인 나무와 불규칙한 듯한 울타리의 직선적 효과가 중앙 건물 덩굴풀의 빨간색의 강렬함과 상호 대립을 가지면서도 공간 변화를 강하 게 주고 있다. 원근법의 강조, 불규칙한 형태 변화, 주관성에 의한 곡선 표현과,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의 심리 상태로 뭉크의 내면에 고조(高潮)된 심리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은 사람을 누인 베드   과 깊은 연관을 갖는 듯한 계열의 작품으로 여기에서도 역시 고통, 죽음, 불안에 대한 내용을 시각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대담 한 콤포지션으로 왼쪽 상단 부분에 침대를 놓고 나머지 아래 부분은 빈 공간으로서 처리하고 실의에 찬 사람들을 오른쪽 부분으로 몰아 놓은 것이, 허탈한 공간 감과 긴장된 중압감이 대비를 이루면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단조로운 색채와 강직한 형태감은 대담한 구도와 조화를 이루면서 상징적 표현 효과를 주고 있다. 드라마틱한 모습을 적절하게 나타내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둘러싼 허(虛)와 실(實), 공백과 실재(實在)의 대조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간결하면서도 생략되어진 인물의 표정과 단조로운 필세는 희화화(戱畵 化)된 것처럼 단순화되어 보이는 것이 충격있게 전달되어지고 있다.         다리 위의 소녀들   강렬한 색채의 처리와 빛, 명암 관계를 조화있으면서 도 대담하게 나타낸 것은 상당히 명쾌한 느낌을 주며, 뭉크의 작품들 중에서 보기 드물 정도의 선명한 색 감 각을 발휘하고 있다. 원근법을 강조하였으며 비스듬히 놓여진 다리와 난간에 나란히 서 있는 소녀는 단순화의 형태를 보여 주며, 동감(動感)과 리듬을 화면에 도입시켜 구성하고 있다. 뭉크는 자연을 주관적 분위기에 의한 반영으로 보았으며, 낭만적인 자연 속의 인간의 무의미를 투영하려 했다. 곡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도 필세는 간명(簡明)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 외에도 판화로도 표현시키고 있는데, 구도는 거의 같으나 좌우가 완전히 반대로 된 동판화와 같은 제명으로 된 목판화 (1920년)가 있다. 뭉크는 판화를 유화에 필적(匹敵)하는 것이라 고 생각하며 중요시하였다.         다리 위의 소녀들 2 DIE MADCHEN AUF BRUCKE 1901년 캔버스 유채 136X125.5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마라의 죽음   마라는 프랑스 혁명 시대의 정치가로서 자코방 당(黨) 을 이끌고 앞장서서 지롱드 당을 공격했으나 지롱드 당에 동조한 샬로트코르데라는 여자의 칼에 찔려 죽었다. 이외에도 여자에 의해 배반당하는 남자를 주제로 한 작품이 있는데 , 등의 일련의 내용이다. 뭉크 자신이 여자에 의해 불신과 굴욕을 겪게 되는데, 1902년 오스가르스트란드에 살고 있을 때 부유한 사업가의 딸 투라 랄손과 연애를 하게 되는데 결혼 문제로 다투던 중 그녀의 손에서 권총을 뺏으려다 왼쪽 약손가락의 일부를 잃게 된다. 그 후로 여자를 악마의 화신으로 보는 습관적 이유가 생기게 된 것 같다. 죽음과 증오와 사랑이 동시에 표출되어진 내용은 그의 심리를 적절히 묘사했다고 하겠다.         마을의 큰길   이 작품을 제작하던 시기인 1905년은 뭉크가 주로 독 일에서 지낸 때로서, 그의 회화나 판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주관성이 강한 그림으로 대상 표현이 특이하다. 색조의 대비 관계를 중요시 처리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무리를 형성시켜 움직이는 동세는 간결한 형태면서도 힘차고 전체적인 구성은 중후함마저 느끼게 한다. 눈 이 내린 마을의 광장을 집회가 끝난 뒤인지, 아니면 축제일에 남녀가 기쁨을 나누고 있는 집단 행사인지, 전면에 무리지어 움직이는 오리와 대조적으로 강약의 하모니를 느끼게 한다. 풍경화에 있어서 중요한 근경, 중경, 원경에 대한 공간 처리를 오리, 인물, 건물 등을 통하여 공감있게 표현했다. 뭉크에게 있어 이러한 화풍은 보기 드문 것으로써 집단이 지니는 힘에 대한 압도력을 호소하기 위한 그림이 아닐는지!         야곱슨 교수의 초상화   뭉크가 45세 되던 해, 오랜 외국 생활의 제작 활동으로 인하여 긴장, 음주 등에 의한 알콜 중독 증세가 보인다. 또 천성이기도 한 내적 갈등, 정서적 어려움, 강박관념 등은 그를 위기로 몰고 가게 된다. 이 작품은 1908년 코펜하겐의 야곱슨 교수로부터 치료를 받게 되고, 병원에 머물며 치료 중에도 제작 활동을 하게 되는 이즈음의 작품이다.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듯이 붉은 색조에 의한 필세는 강렬한 느낌과 함께 고조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치료소에서 퇴원한 후에는 건강한 가운데 풍경과 사회적인 모티브를 제작함과 동시, 벽화 등 다작(多作)에 들어가는 의욕적인 자세를 보인다. 야곱슨 교수의 위엄있으면서도 강직한 모습이 다른 초상화 작품에서보다 세밀하면서도 명료하게 표출되었고, 색채의 조화있는 다양한 변화에서 새로운 의지를 보는 듯하다.         멱감는 남자들   만년에 뭉크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내가 얻은 건강의 이런 약한 것도 나의 부분이며 더불어 나의 예술이 크게 그 약함의 탓이므로 나의 병을 고치길 원치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뭉크의 극한적인 상황은 강인하면서도 희망찬 남성을 동경의 대상으로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1907년과 1908년 여름에 뭉크가가 있었던 북 독일의 바르네뮌데에서 제작한 3장으로 된 그림) 가운데 한 가운데의 성인(成人) 부분을 나중에 다시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머지 두 장은 과 이다. 그 당시 무질서하면서도 거친 생활에 술만 마시고 방황하던 때로, 건강을 되찾기 위해 바르네뮌데에가 있었다. 뭉크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내면적이면서도 요약된 강인한 형태와는 다른 밝은 색채가 풍요스럽게 나타나 있다.         베르겐의 자화상   자화상을 통하여 뭉크는 생의 불안을 극복하려 하였으며 자신의 인생 시리즈로 자기 변천과 자아 의식을 찾았던 것이다. 그가 말했듯이 '자화상에는 자아 그것을 그리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 이미지 표현의 진실성이 있다.' 이렇듯 엄격한 양식에 자기애적(自己愛的) 경 향과 자의식(自意識)에 찬 인물 자신을 표현하였다. 이 자화상을 제작할 당시 53세로서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을 때였건만 어딘지 고독 속에 불안에 찬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 굴을 돌아보고 있는 것을 인상파 풍의 속필로 묘사하였으며, 인물 뒤에 보이는 노르웨이 서해안의 도시 베르겐의 거리와 집들, 널따란 광장의 선명한 색채가 대조 적인 변화를 준다. 풍경화에서 볼 수 없는 초조감이 엿보이고 있는 것이, 그의 정신 상태인 불안을 외적으로 투영시켜 주고 있다.         선박 풍경   단순한 색채에 의해 화면을 평면적으로 특징있게 다룬 것이 초기의 풍경에서 보이는 상징적 표현으로서의 범 주에서 탈피한 이색적인 작품으로 명쾌한 감정을 준 다. 뭉크의 풍경은 거의가 공포의 요소로서의 상징으로 나타났고, 정신 세계의 풍경으로 정신적 생명을 표 현하였다. 풍경은 대개 노르웨이를 대상으로 그렸으며, 특히 오슬로 시가와 오스가르스트란드의 바닷가 풍경을 즐겨 그렸다. 이 작품은 신경정신 치료를 야곱슨 교수로부터 받고 회복된 후 오슬로 피요르드 연안의 크라게뢰에 체재하면서 풍경과 사회적인 모티브를 새로 추구할 때 제작한 것 중의 한 작품이다. 배를 만들고 있는 인부들의 동 세와 산언덕에 구축적으로 표현된 집, 나무들, 독특한 선묘와 생략되어진 색채의 담백한 효과는 새로운 조형성을 지니게 하는 세련된 작품이다.           빨간 깔개 위에 앉은 소녀   '예술 작품은 결정(結晶)같은 것이다. 결정과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도 역시 영혼과 광휘(光輝)를 내뿜는 힘을 가져야 한다. 예술 작품에서는 정확한 외관(外 觀)의 면(面)이나 선(線)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뭉크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 이런 주장을 내세울 무렵 그의 나이는 66세(1929년)로서 에에켈리에 겨울 아틀리에를 짓고 만년을 보내면서 고독과 쇠약해진 건강과의 고투 속에 있었다. 외로움을 달래면서 제작을 하게 되는 가운데 내적 상태가 표면에 드러나게 된다. 청순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 빨간 깔개 위에 손을 짚고, 두 다리를 편하게 뻗고 휴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붉은 색면이 강렬하다. 회화의 형식으로서의 붉은 색채가 아니라, 지향하는 욕구로서의 정신을 존재시켜 주는 독특한 형상을 느끼게 한다.           생명의 춤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연작을 통하여 예술적 생명 성을 나타내려 노력하였는데 1894년 스톡홀름에 서,1895년 베를린에서 사랑 연작을 발표한 후 1902년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연작으로 확대되어 발전한 다. 이 작품 역시 사랑과 죽음을 바탕으로 그의 체험적 심성(心性)을 표현한 것으로 내부적 사고 (思考)에서 생겨 난 것이다.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像)으로 보았는데 꿈꾸는 여인, 삶을 갈 망하는 여인, 체념하는 여인의 상으로서 여기에서 표현되어진 여인들을 통해 생명의 기쁨과 슬픔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매월 6월 23일마다 개최되는 하지제(夏至祭)의 무도회에서 느낀 것을 시도한 것으로써 인물의 대담한 배치, 색채의 강렬함, 해안선을 통해 나타난 강직함은 생명감이 충만하다.         눈 속의 빨간 집   만년에 뭉크는 외면적인 화려함과는 대조적으로 1916 년 오슬로 교외의 에에켈리에 집을 사서 거기서 보내 게 되는데 사람을 피하고 사는 그의 생활은 고독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평온한 생활을 찾을 수 있었으며, 고향의 자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되었고, 자연으로부터 풍요로움을 느끼게 되면서 자연에 직면하는 자세도 갖게 된다. 뭉크가 '예술과 자연'에 대하여 쓴 글 중 '자연은 거 기서 예술이 영양을 듬뿍 섭취하는 유일하고 위대한 왕국이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 마음 속의 내적인 영상, 눈의 뒤쪽의 영상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자 연과 심상(心象)이 융합된 풍경으로서 가치가 높다. 평온한 교외 풍경을 주제로 하여 투철한 표현 적 화경(畵境)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등의자(藤椅子) 곁에 선 裸婦   바르네뮌데에서 1907-8년에 쓴 글 중 '예술은 자연에 대립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다만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온다. 예술은 인간의 결정(結晶)에의 충동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또 1929년에 에켈리에서 한 말 중 '색이나 선이나 면에 의해 재편성을 재현하는 일이 예 술이나 회화의 모티브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주관의 표출을 항시 주장하였던 것이다. 만년에 제작한 모델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서, 서 있는 누드를 중심으로 하여 착색되어진 억제된 빨간색, 회색 등의 톤은 원근법을 미묘하게 처리한 공간 속에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밀도있게 표현되어졌다. 뭉크가 여성을 주제로 그린 작품에는 몸을 보호하듯 손을 앞에 놓고 있는 경우와 손을 뒤로 돌린 경우의 두 모양이 있다.         바닷가의 여자들   이러한 주제는 뭉크가 일관해서 채택한 것 중의하나로서 판화뿐만 아니라 유화로도 남겨지고 있다. 뭉크 가 판화를 한 이유로는 개인 소유인 회화의 숙명이던 고립성을 극복하려는 뜻에서 연유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바닷가에 서 있는 두 소녀가 수평선을 바라 보며 미래의 인생 여정을 생각하며, 부푼 희망을 일깨우고 있는 상징적 내용이다. 목판화 제작을 많이 했는데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바다 부분의 판목(版木)은 잘라내고 찍었다. 이 외에도 어떤 경우는 다른 판목과 합성을 하거나 구도가 다른 목판을 붙여 찍은 시도적인 작품도 있다. 유화 작품은 목판화를 바탕으로 하여 그린 것으로써 부분적 표현이 복잡하다. 유화작품 상단부의 노란색 형상(形象)은 월주(月柱)라고 불리는 것으로 성(性) 의 영원한 심볼로서 등장된다.         바닷가의 여자들   이러한 주제는 뭉크가 일관해서 채택한 것 중의하나로서 판화뿐만 아니라 유화로도 남겨지고 있다. 뭉크 가 판화를 한 이유로는 개인 소유인 회화의 숙명이던 고립성을 극복하려는 뜻에서 연유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바닷가에 서 있는 두 소녀가 수평선을 바라 보며 미래의 인생 여정을 생각하며, 부푼 희망을 일깨우고 있는 상징적 내용이다. 목판화 제작을 많이 했는 데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바다 부분의 판목(版木)은 잘라내고 찍었다. 이 외에도 어떤 경우는 다른 판목과 합성을 하거나 구도가 다른 목판을 붙여 찍은 시도적인 작품도 있다. 유화 작품은 목 판화를 바탕으로 하여 그린 것으로써 부분적 표현이 복잡하다. 유화작품 상단부의 노란색 형상(形 象)은 월주(月柱)라고 불리는 것으로 성(性)의 영원한 심볼로서 등장된다.       병든 아이   석판화로 얼굴 부분은 이미 제작하였었는데 여기에서는 주제에 대한 확대보다 구도의 중심부분이 뭉크의 라이트 모티브였다고 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다. 뭉크 가 5세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일로 인하여 뭉크의 생애는 불행하게 된다. 부친의 성격은 편 벽(偏僻)하고 비뚤어진 세상을 등진 성격의 소유자였고, 어머니 대신에 집안의 살림을 맡아 보살피던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에도 뭉크가 14세 때 어머니와 같은 병으로 죽었다. 멀지 않은 죽음이 찾아올 누나 소피에의 모습과 곁에서 고개를 숙이고 고뇌에 차 있는 사람은 뭉크의 가정을 돌봐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여동생 칼렌 표르스 타아드로 짐작이 간다. 누나에 대한 뭉크의 사모의 정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동질의 이미지이며, 죽음에 대한 응시와 직결되는 것이다.         자화상   뭉크의 예술에 대한 지지와 평가는 만년에 가서 높아 지는데, 1912년 쾰른에서 개최된 분리파(分離派) 대전 람회에서 세잔, 고호, 고갱과 더불어 방이 하나씩 배 당된 것을 비롯하여 같은 해 뉴욕에서 개최된 현대 스칸디나비아 전람회에도 초대 출품하는 등 국제적 명성을 갖게 되었다. 이 외에도 뉴욕에서 개최된 아몰리 쇼에 출품, 1922년에 취리히 미술관, 1927년에는 베를린 국립 미술관에 회고전이 개최되었으며, 1933년 70 세의 생일에는 대작가로서의 유럽 각지로부터 축사를 받았다. 37년 한때는 나치스에 의해 '퇴폐적인 예술' 이란 낙인이 찍히기도 했으나, 격동하는 제 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도 아랑곳 없이 불굴의 의지로 제작에 몰두함으로써 확실한 예술 경지를 이루었다. 파스텔로 섬세하게 소묘식으로 표현한 뭉크의 마지 막 자화상이다.         뼈가 있는 자화상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80년 미술 수업을 하 던 첫해 동안이었는데, 그 후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다. 뭉크에게 있어 자화상은 객관적인 사실성을 넘어 그 자신의 내적 혼과 정신관계를 표현함으로써 자 기 완성에의 도표(道標)를 이루고 있다. 석판화로 표현한 이 자화상 외에도 , , , , 등이 있는데 자기 내적 고백이나 죽음과의 갈등과 대결, 죽음의 상징화를 거쳐 생명을 조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있다. 많은 자화상들 중에서 이 작품은 가장 유명한 것으로써 아름다운 검은 바탕에 정성들여 소묘식으로 표현한 얼굴만이 나타나고 있다. 항시 죽음을 의식하고 늘 응시해 온 그에게 해골은 죽음에 대한 마음의 '내적인 영상'이었던 것이다.            
1    약의 "오남(람)용[誤濫用]"은 건강을 해친다... 댓글:  조회:2949  추천:0  2017-10-24
지자체들 치적 쌓기용 경쟁적 유치...  문학에 대한 관심 일깨운다지만 되레 문학의 가치 훼손할 우려도... 방문객의 호평을 받고 있는 경기도 양평의 황순원문학관, 경북 청송의 객주문학관, 강원도 평창의 이효석문학관, 전북 전주의 최명희문학관, 충남 부여의 신동엽문학관, 서울 종로의 윤동주문학관(왼쪽 위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국민일보DB Q. 하루가 멀다 하고 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린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 문학상이 400개 넘는다고 한다. 매일 한 사람 이상의 수상자가 나올 수 있는 얘기다. 여행을 하다보면 크고 작은 문학관도 많이 만날 수 있다. 전국에 200곳이 넘는다. 시·군·구가 220여개라는 걸 고려하면 기초단체 별로 하나씩 둘 수 있는 수치다. 문학상과 문학관이 왜 이렇게 많을까. A. 전남 고흥군은 다음 달 말쯤 두원면에 조정래가족문학관을 개관한다. 이미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주제로 한 문학관이 전남 보성과 전북 김제에 각각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대표작을 기념하는 문학관이 있는 상황에서 그의 이름이 붙은 문학관을 또 짓는 게 과하다는 것이다. 고흥군 관계자는 23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조 작가의 부친이 고흥에서 태어난 유명 시조시인 조종현인데 그의 문학세계를 기리기 위해 논의가 시작됐다”며 “추진 과정에서 잘 알려진 아들과 며느리 김초혜 시인을 모두 기리는 게 낫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 가족문학관을 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국내 문학관은 문인의 생가나 연고지, 작품의 배경이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적극 나서 추진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 ‘소나기’의 배경이 된 경기도 양평의 황순원문학관, ‘메밀 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 생가가 있는 강원도 평창의 이효석문학관 등이 대표적이다. 다음 달 중순 개관하는 기형도문학관도 시인이 20년 넘게 살았던 경기도 광명에 생긴다. 각 지역 문학관은 문인의 자취와 그 작품을 기억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문화적 자산이 된다. 또 지자체 입장에서는 방문객을 유치할 수 있는 관광자원이다. 하지만 각 지자체들이 치적을 위한 문학관 유치에 급급하면서 본래 취지가 무색해지기도 한다. 안도현(56) 시인은 지난달 고향인 경북 예천군이 추진한 본인 명의 문학관에 반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학상도 마찬가지다. 문인들을 격려하고 문학에 대한 관심 일깨운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무분별한 설립과 제정은 문학의 정신을 훼손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기존 문학상은 해당 기관의 이름을 알리거나 지자체 성과로 홍보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제정된 문학상의 높은 상금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소설가 윤후명(71)은 지난달 말 한 강연에서 “한국 문학상은 큰 상금이 있어 작가들이 ‘한탕주의’ 심리에 기대면서 문학이 실종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심사 과정의 불투명성도 문제다. 한 중견시인은 “지자체 등이 제정한 상은 상을 주는 것 자체에 치중하다 보니 선정 과정이 베일에 가려진 경우가 많다”며 “예심부터 본심까지 심사위원을 공개하는 등 문학상 운용에 투명성이 확보돼야 한다”고 말했다. 서구 선진국의 경우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존경하는 이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문학정신을 기리는 차원에서 생가를 보존하고 문학상을 제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국내처럼 충분한 논의 없이 관(官) 주도로 문학관을 세우고 문학상을 제정하는 것은 자칫 문학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신중한 접근을 주문한다. 신동엽문학관 사무국장인 김형수 작가는 “문학관이 기억할 만한 문학세계를 보존하고 문학상이 문학의 진로를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도록 해야 한다”며 “지자체의 문학상 제정과 문학관 건립 의지는 중요하지만 무분별하게 접근할 경우 약의 오남용이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문학의 건강성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강주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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