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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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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거꾸로 볼가ㅠ... 삐딱하게 볼가ㅠ... 댓글:  조회:2140  추천:0  2017-10-23
거꾸로, 삐딱하게 보라, 그것만이 내 세상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거꾸로 보는 그림과 숨은 그림 글자작게 글자크게 인쇄 목록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은 보는 관점에서 따라 그 진위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거꾸로’ 보거나, ‘비틀어서’ 보면 그때까지 알던 세상과 다른 사실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 순간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거짓이 되고, 거짓으로 알던 것이 진실로 뒤바뀐다. 미술작품 중에도 보는 관점, 방향, 각도에 따라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른 이미지가 드러나는 그림들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15세기 르네상스 미술은 진실다움을 추구했다. 정확한 묘사와 명확한 의미를 지닌 이미지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게 만드는 그림을 그렸다. 한마디로 ‘보이는 것이 진실’임을 전파했다. 그러나 16세기 마니에리스모 시대나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가 인식되는 형식의 그림이 등장한다. 예컨대 보던 그림을 거꾸로 보면 생각하지 못한 이미지로 변환되는 경우이다. 풍경이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하고, 사람 형상이 다른 사물로 보이기도 한다. 특정한 이야기를 전하는데 집중했던 틀에서 벗어나 이면에 감추어진, 혹은 상대적인 의미나 이미지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거꾸로 보기 거꾸로 보거나 돌려 보면 전혀 다른 이미지가 나타나는 그림을 즐겨 그린 화가로 주세페 아르침볼도 (Giuseppe Arcimboldo, 1527~93)가 있다. 이탈리아의 화가로 뛰어난 그림 솜씨 덕분에 황제(페르디난도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에게 발탁되어 궁정화가로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미술애호가들도 재치 있는 해학과 풍자로 가득한 아르침볼도의 그림을 좋아했다. 그의 그림이 당대 인기를 얻었던 비결은 꽃, 동물, 어류, 과일, 채소 등 온갖 사물을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기상천외한 화면을 구성한데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을 보자. 싱그럽고 탐스러운 과일과 채소 등이 바구니와 그릇에 가득 담겨있다. 과일이나 채소들이 마치 붙어있는 듯 연결된 구성이 눈에 띈다. 자연의 풍요를 상징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식탁을 풍성하게 메울만한 양이다.       그림을 한동안 감상했다면, 이번엔 두 그림을 거꾸로 보자. 그러면 생각하지 못한 형상이 나타난다. 순식간에 과일바구니와 채소 그릇이 사람의 얼굴로 변했다. 과일과 채소를 그린 정물화 인줄 알았던 그림이 인간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가 되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반전이다. 현실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이지만, 독특한 구성으로 인간의 형상을 그린 아이디어가 놀랍다. 거꾸로 봐야 알 수 있는 형상을 위해서는 사전에 철저한 계산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 그림을 보면 어떤 과일을 어느 위치에 어떻게 배치할까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자연사물을 의인화한 화가의 의도는 결국 단순 과일바구니나 채소그릇보다 얼굴형상의 이미지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하는 효과를 냈다.     아르침볼도의 이란 작품도 같은 맥락이다. 은빛 쟁반에 놓인 여러 고기(닭과 돼지처럼 보인다)가 쌓여있다. 만찬에 놓일 음식인 듯 고기가 쟁반이 넘칠 정도로 가득하다. 이 그림 역시 거꾸로 보면 새로운 형상이 드러난다. 기괴한 생김새의 사내가 관람자를 쳐다보는 얼굴이 나타난다.  마치 배를 채우기 위해 육식을 탐하는 자를 비웃는 듯. 그래서일까 그림은 식욕을 떨어뜨릴 만큼 섬?하다. 만약 작가의 의도가 여기에 있었다면 성공한 셈이다.         숨은 그림찾기 아르침볼도의 그림처럼 뒤집어보거나 돌려보지 않아도 하나의 그림 안에 또 다른 이미지가 있는 그림이 있다. 어떤 특정한 하나의 상(像)이 전혀 다른 이미지로 인식되는 그림이다. 서로 다른 퍼즐이 숨겨진 형식으로 이른바 '숨은 그림(Vexierbild)'이라 불린다. 이런 형식의 그림은 하나의 사물로 다른 사물을 떠올리게 하는 변환 효과로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한다. 동판화로 유명한 르네상스의 거장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의 그림이 여기에 속한다. 그의 그림은 사실적인 그림으로 유명하다. 특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림이 많은데 1495년에 그린 수채화 아르코의 풍경(View of Arco)도 그렇다. 올리브와 포도원이 펼쳐진 곳을 지나 가파른 산허리를 요새로 만든 아르코의 풍경이 펼쳐진 그림이다. 뒤러에 의해서 각색되어 본래의 풍경과는 다르다. 여기에는 드라마틱한 느낌을 부여하려한 작가 의도가 숨어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르코의 풍경보다 요새를 감싸는 암벽 왼쪽에 살며시 숨어있는 찡그리는 남자(scowling man)의 얼굴이 보인다.   알프레히트 뒤러 .1495년   남자의 옆얼굴이 암벽의 전체 높이로 조각된 듯 그려져 있다. 뾰족한 코와 수염으로 보이는 형태(노인 형상에 가깝다)가 유독 눈에 띈다. 뒤러는 남자의 옆얼굴을 은연중 돋보이게 하려고 주변의 다른 바위보다 표면을 밝게 처리했다. 처음에 발견하기 어려울 뿐 한번 인식되기 시작하면 남자의 얼굴은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는다.(사실 이러한 비슷한 경험은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현실에서 종종 마주한다. 용을 닮았다는 용두암, 여인의 누워있는 얼굴을 닮았다는 산등선, 특정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닮은 자연 등) 궁극에 화가의 붓끝에서 특정한 형상을 닮거나 연상시키는 풍경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자연의 신비로움과 거기에 얽힌 신화까지 듣게 되면 처음 대했던 자연풍경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H. 번의 , 1830년경   다음의 예시 그림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 가능한 그림이다. 조금만 정신을 집중하면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남자의 옆얼굴이 나타난다. 암벽들이 얼굴형상을 만들고, 나뭇잎은 눈썹과 눈이 되었다. 오른쪽 암벽에 기울어져 자란 한 그루 나무는 머리카락이 되었다. 이 그림은 1830년경에 그려진 H. 번의 이란 그림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그림 속 형상은 그리스를 너무도 사랑했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얼굴이다. 그리스의 독립을 위해 참전했다가 그곳에서 죽은(말라리에 걸림) 시인의 정신을 자연과 합일된 모습으로 그렸다. 누구보다 그리스를 사랑했던 시인을 모습이 자연만큼 거대하게 다가온다. 인생은 ‘수수께끼 풀기’, 혹은 ‘숨은그림찾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살아가는 동안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하거나 또 해결방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자신이 찾는 것, 혹은 알고 있었던 것과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 순간 세상이 달라 보인다. 이는 없던 세상이 아니라.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노력하지 않아서 몰랐던, 혹은 감추어졌던 세상이다. 숨겨진 세상이든 감추어진 진실이든 그것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달렸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맞고 틀리다’, ‘옳고 그르다’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차이와 다름을 발견하고 인정해가는 것을 배우는 것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제까지 보는 방법과 다른, 새롭게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눈을 크게 뜨고 익숙하게 보았던, 혹은 보지 않았던 것들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거꾸로 보고, 비틀어 보고, 돌려서도 보자. 그러다보면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 다른 새로운 세상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 참고문헌 및 추천도서 : 진중권 지음『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휴머니스트, 2005.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6), ANCI연구소 부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며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   밀라노 출생. 처음에는 아버지와 함께 밀라노대성당에서 스테인드 글라스 화공(畵工)으로 일하였다. 1562년 프라하로 가서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의 3대를 섬기는 궁정화가로서 1582년까지 체재하였으며, 1592년 백작위(伯爵位)를 받았다. 약 20점의 유화와 많은 소묘를 남겼는데, 동물과 식물을 아울러 사람의 머리를 형용한 괴기한 환상화 《여름》 《겨울》 《물》 《불》 등으로 유명하다. 종전에는 저속한 취미를 가진 화가라 하여 무시되었으나, 초현실주의의 융성과 더불어 재평가되었다.       
5    바로 볼가ㅠ... 뒤집어 볼가ㅠ... 댓글:  조회:3781  추천:0  2017-10-23
오늘은 주세페 아르침볼도라는 화가 이야기를 해볼게요~^^ 주세페 아르침볼도 바로 보아도 뒤집어보아도 될 것 같은 채소로 그린 초상화, 정말 독특하죠? 주세페 아르침볼도 (1527~1593) 이탈리아 밀라노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주세페 아르침볼도는 어려서부터 미술을 공부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그러다 1562년 그의 나이 35세, 프라하의 왕궁으로 들어가 궁정화가로 일하며 왕족의 초상화 등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아르침볼도는 과일, 꽃, 동물, 사물 등을 이용하여 사람을 얼굴을 표현하는 독특한 기법의 이중 그림으로 유명해요. 그 중 가장 유명한 '봄','여름','가을','겨울'은  황제 루돌프 2세를 그린 그림이예요.     그림만 봐도 어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느껴지지 않나요? 이런 괴기한 초상화이지만 이 그림을 받은 왕은 정말 좋아했다고 합니다^^ 풍성한 곡식, 과일등을 상징한 초상화로 무능했던 자신의 이미지를 변화시킬 수 있었거든요. 주세페아르침볼도 위 작품은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주요한 구성물을 표현한 '4원소'라는 작품인데 물, 불, 땅, 공기 한번 찾아보세요~^^ 주세페 아르침볼도 독창적이고 기발한 그의 그림은 피카소, 달리, 뒤샹 등 초현실주의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해요... ====================   미술을 전공해보신 분들이라면 그의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1527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는데요. 그는 죽기 전까지 고향인 밀라노에서 1m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고향에서 뼈를 묻고 생활했던 것이지요. 어쨌든 그는 화가로 활동하였는데요. 1562년 로마의 궁정화가로 일했습니다. 후에 자신만의 특이한 그림기법으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았습니다.   유럽에서 16세기~17세기로 변화할 무렵, 예술에 대해서도 다양한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주세페 아르침볼도도 이러한 변화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요. 그의 미술 기법과 보여지는 생각들을 관찰해 보면 동시대의 시인인 존 던과 매우 비슷하였습니다. 존 던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마인드를 갖고 있었으며 그에따른 열정도 강력했습니다. 주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극적으로 표현했으며, 놀라운 색채표현으로 여러 곳에 이름을 남겼던 유명한 형이상학파 시인이었습니다.     어쨌든 존 던과 마찬가지로 특이한 그림기법으로 주세페의 그림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꽃이나 채소와 같은 사물들로 사람의 얼굴을 그려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 평범해보이는 형식에다가 참신한 아이디어를 섞어 넣어본 것이지요. 그는 꽃을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배치해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그림에서도 자신만의 생각을 그려넣었는데요. 예를들어 그가 그린 '봄'에 나오는 식물들은 건강함을 상징하며 '겨울'에서 나오는 마른 가지들은 머리가 빠진 노인들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그렸다고 해서 그림을 대충 그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실제로 그의 그림들을 보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간에 개별적인 그림들이 상당히 정교하게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사람의 형상으로밖에 보이지가 않지요. 그가 그렸던 그림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변호사'라는 그림을  살펴보면 털이 뽑혀있는 닭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변호사의 무미한 특성과 탐욕스러움을 나타내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린 것입니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그는 1562년 신성로마제국의 궁정화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밀라노, 몬차에 위치한 스테인글라스 및 프레스코 활동으로 실력있는 미술가임을 증명했지요.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그린 '계절의 신으로서의 루돌프 2세'는 황제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가 그렸던 그림들은 프라하 미술이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이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림들이 출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무려 4세기가 지나서야 살바도르 달리가 이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달리의 일부 작품들을 보면 사물내에 사람의 형상이 들어가있는 것을 볼수가 있지요. 출처:  [가을 하늘] ===================   서프라이즈 주세페 아르침볼도 사계         '서프라이즈'에서 피카소, 마르셀 뒤샹,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이이갸기 소개됐다. 5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이하 서프라이즈)에서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를 만족시킨 기막힌 초상화가 소개됐다. 1566년 막시밀리안 2세는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불안해 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서아시아 대륙까지 차지한 뒤 신성로마제국을 위협했고, 결국 신성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헝가리까지 정복했던 것.  이후 신성 로마제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했고, 1568년 오스만 제국과 굴욕적인 제약을 맺게 됐다.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방을 빼앗기고 해마다 3만 더컷의 조공을 바치게 된 이후 막시밀리안은 무능력한 황제라는 비난을 받게 됐다.   이후 막시밀리안 2세는 뜻밖의 묘안을 떠올렸다. 자신의 권위를 세워줄 그림이 필요하다며 초상화를 요구한 것. 언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초상화는 황실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홍보 수단이 됐다.  명령을 받은 화가 주세페는 고민에 휩싸였다. 이후 주세페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떠올렸다. 사람과 동물, 식물을 뒤섞어 마치 괴물처럼 그린 그의 그림에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렸고 황제에게 4점의 초상화를 바쳤다.   신하들은 초상화를 보고 경악했다. 초상화 속 황제의 모습은 고목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꽃과 입사귀, 과일 등이 얼굴을 이루고 있었다. 황제의 초상화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흉측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2세는 엄벌에 처하라는 신하들의 말을 뒤로한 채 주세페에게 박수를 보냈다.   막시밀리안 2세는 주세페가 그린 4점의 그림이 황제의 전지전능함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던 거다. 그림 4점은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의미하는 '사계'로 '봄'은 다양한 꽃들과 신록의 잎으로 장식돼 있었고, '여름'은 복숭아, 옥수수, 버찌 등 제철과일로 표현돼 있었다.   '가을'은 포도와 호박, 밤송이 등으로 장식돼 있었고 몸에는 포도주 통을 입혔다. '겨울'은 잎사귀가 떨어진 고목으로 표현했다. 목에서 새롭게 자라난 가지에는 오렌지와 레몬이 달려 있었는데 이는 희망을 상징한 것이었다. 기막힌 초상화 덕분에 막시밀리언의 위상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전까지 무능한 황제로 여겨졌던 황제는 초상화 덕분에 태평성대를 이룬 황제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이후 주세페는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루돌프 2세에 이르기까지 궁정화가로 활동하며, 유럽에서 백작 작위를 받는 등 당대 최고의 화가로 유명세를 떨쳤다.  ///티브이데일리 김지하 기자  ========================== 신성 로마제국 황제를 웃긴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 정석범 Mystic Art Story 세상을 꼭 정해진 규칙대로 바라봐야 할까. 때로는 나무가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고 사람 얼굴이 호박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은 위험하다. 요즘이라면 몰라도 고루한 관념이 지배하던 전통사회에서 그런 시도는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일 수도 있다. 베르트무스’, 1590~1591년, 캔버스에 유채, 스웨덴 스코클러스터 성   그런 점에서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1527~1593)라는 이탈리아 화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만남은 천운이었다. 아르침볼도는 밀라노에서 비아지오라는 잘나가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밀라노대성당의 내부 장식을 수주할 정도로 유명했는데 아르침볼도는 아버지의 조수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레 손재주를 익혔다.  남아 있는 기록이 별로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일찍부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것 같다. 1562년 3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제지인 빈 합스부르크 왕가의 초상화가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그가 그린 그림들은 전통 화법을 충실히 계승한 기독교 성화들이 주류를 이뤘다. 막시밀리안 2세와 만남 이후 새로운 화풍 선보여 아르침볼도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기발한 생각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호기심 많은 군주 막시밀리안 2세(재위 1564~1576)의 궁정에서 자유로운 공기를 흡입한 덕분이었다. 그는 첨단 과학기구를 비롯해 희귀한 동식물의 표본 등 전 세계의 진기한 물건들을 수집, 궁궐 내에 보관했는데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위세를 전 유럽에 과시하는 역할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궁정이 새로운 예술의 중심이 되길 원했다. 르네상스를 연 이탈리아 미술과는 다른 합스부르크만의 트레이드마크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황제의 의중을 간파한 아르침볼도는 그의 권위를 빌어 그간 억눌러왔던 자신의 끼를 발산하기로 결심한다. 1569년 1월 1일 그는 새해맞이 기념으로 황제에게 두 세트의 기발한 인물화를 선물한다. 봄·여름·가을·겨울로 이루어진 ‘4계절’, 공기·불·땅·흙으로 구성된 ‘4원소’ 등 모두 여덟 점이었다. 그림을 받아든 황제는 궁정이 떠나갈 정도로 폭소를 터트린다. 대체 무엇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추상같이 호령하던 대제국 황제의 얼어붙은 마음을 무장해제시킨 것일까. ‘4계절’에서 화가는 각각의 계절에 걸맞은 각종 식물들을 조합해 유쾌한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 ‘봄’은 갖가지 꽃들로, 여름은 과일과 채소의 열매로, 가을은 포도와 곡식의 낟알로, 겨울은 잎사귀가 떨어진 나목으로 표현됐다.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주요한 구성물을 표현한 ‘4원소’에서는 동물과 식물, 생물과 무생물을 조합해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공기’를 보면 갖가지 새를 조합해 사람의 얼굴을 만들었는데 입과 수염이 난 턱은 닭으로, 몸은 날개를 활짝 펼친 공작새로 표현해 그 절묘한 착상과 재치에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황제가 크게 만족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실을 전위미술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는 데 아르침볼도만큼 적당한 인물은 없다고 판단한다. 그는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 아르침볼도의 생각을 높이 샀다. 특히 화가의 유쾌함이 맘에 들었다. 황제는 아르침볼도의 그림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축제 때 그림 속 인물의 모습으로 치장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내친김에 황제는 그를 아예 궁정에 보관할 진기한 물건 구매 담당책으로 임명한다.  ‘4계절’ 세트 중 ‘봄’, 1563년, 캔버스에 유채,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미술아카데미   ‘4원소’ 세트 중 ‘공기’, 1566년경,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피카소·마르셀 뒤샹 등에 영향 끼쳐 막시밀리안 황제의 피를 물려받은 루돌프 2세(재위 1576~1612)도 아버지 못지않은 호기심 덩어리였다. 정치적으로는 무능했지만 그의 프라하 궁정에는 천문학자 케플러, 티고 브라헤 등 혁신적인 이론을 내세운 과학자를 비롯, 한스 폰 아헨 등 전위적인 화가들이 터를 잡고 새로운 문화를 주도해 나가고 있었다.  루돌프 황제 역시 아르침볼도를 지극히 아껴 심지어 자신의 초상화마저 그의 독특한 인물화법에 따라 그리게 했다. 계절의 신인 ‘베르트무스’라고 명명된 이 초상화는 황제를 계절의 신에 비유함으로써 전지전능한 지배자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강낭콩 눈썹, 서양배 코, 사과 볼따구니, 옥수수 귀를 한 베르트무스의 얼굴은 그가 인간에게 베풀어주는 다양한 수확물들로 구성돼 있다. 자신을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리도록 허용한 황제나 자신의 기발한 생각으로 황제의 얼굴을 왜곡한 화가의 자유로운 정신은 르네상스 시대의 개방 정신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아르침볼도는 단순히 대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때때로 작품에 치열한 비판의식을 담기도 했다. ‘장서가’는 책을 읽지 않으면서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려는 귀족과 부유층의 허식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물론 ‘유머’라는 양념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책장을 펼친 모습으로 묘사된 머리카락이나 책갈피로 표현된 손가락은 보는 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게 만든다. 그의 파격적인 작품이 당대인에게 던진 충격파는 대단했다. 그의 희한한 그림을 보고서 사람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이런 기벽을 추구한 사람은 아르침볼도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앞서 밀라노 궁정에서 활약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기형적인 인체와 동물을 찾아다니며 스케치북에 담았다. 매너리스트로 불리는 피렌체의 화가들도 왜곡된 신체의 사람들을 비현실적인 공간속에 배치하기도 했다. 볼록 거울 위에 비친 자신의 왜곡된 모습을 재현한 파르미지아니노는 그 대표적인 예다.  ‘장서가’, 1566년, 캔버스에 유채, 스웨덴 스코클러스터 성   안타깝게도 아르침볼도의 그림은 1648년 신교와 구교가 맞붙은 30년 전쟁 때 스웨덴 군대에 의해 약탈당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이 재능 많은 화가는 300여 년 동안 망각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의 존재가 뒤늦게 알려진 것은 작품들이 문화의 ‘변방’에 흩어져 그 존재가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진가를 처음으로 재발견한 사람은 피카소, 달리 같은 20세기 전위 미술가들이었다. 자전거 핸들과 안장을 조합해 ‘황소’라고 이름 붙인 피카소나 남자용 소변기에 ‘샘’이라고 이름붙인 마르셀 뒤샹이나 그 근본 정신은 아르침볼도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그는 가시적인 세계를 해체해서 또 다른 맥락으로 새롭게 조합한 최초의 근대인이었다. 퓨전이 대세인 오늘날 아르침볼도가 던지는 메시지를 마냥 가볍게 웃으면서 바라볼 수만 없는 이유다. 정석범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    
4    "봄, 여름, 가을, 겨울 - 사계"로 형상화한 신비로운 인물화 댓글:  조회:3063  추천:0  2017-10-23
  저작자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 제작시기 〈봄〉 1573년 제작 〈여름〉 1573년 제작 〈가을〉 1573년경 제작 〈겨울〉 1573년 제작   이 신비로운 그림 앞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인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계절의 이치에 걸맞은 나무와 꽃과 열매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2세 황제이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처음엔 스위스 인근 지역의 소영주 집안이었으나 훗날 오스트리아로 거점을 넓히면서 지속적으로 정략결혼을 감행, 스페인 지역까지 통치하는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가문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 왕가는 세력 확장과 유지에 너무나 골몰한 나머지 근친혼도 마다하지 않아 선천적인 기형이나 단명하는 후손도 많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 가문의 출신으로 흔히 카를로스 대제라고 불리는 카를 5세가 있다. 주세페 아르침볼도 〈봄〉 캔버스에 유채 / 76×63cm / 1573년 제작 /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 1층 8실 주세페 아르침볼도 〈여름〉 캔버스에 유채 / 76×64cm / 1573년 제작 /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 1층 8실 주세페 아르침볼도 〈가을〉 캔버스에 유채 / 77×63cm / 1573년경 제작 /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 1층 8실 주세페 아르침볼도 〈겨울〉 캔버스에 유채 / 76×63cm / 1573년 제작 /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 1층 8실 막시밀리안 2세는 그다지 출중한 왕은 아니어서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해 꽤나 안팎으로 시달렸던 모양이다. 늘 술에 취해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로 살았던 그는 하마터면 역사에 묻힐 그저 그렇고 그런 존재에 불과했지만,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의 이 기발한 그림 덕분에 후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여전히 받고 있다.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루돌프 2세도 아르침볼도를 궁정화가로 연임시켜 자신의 초상화 역시 이런 식으로 제작하도록 지시했다. 그림을 퍼즐처럼 조각내어도 하나하나가 완벽한 정물화가 될 정도로 화가의 뛰어난 기교가 놀랍다. 대체로 알프스 남쪽 화가들보다는 북쪽 지역 화가들이 이와 같은 세밀한 정물화에 능통했다. 아르침볼도는 밀라노 태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림을 입히는 일을 했다. 알프스 남쪽에 속하면서도 정교함을 보여주는 그의 붓질은 아마도 그 일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여름〉의 목 칼라 부분에는 자신의 이름 ‘GIUSEPPE ARCIMBOLDO’를 새겨 넣었고, 어깨 부분에는 작품의 제작 연도를 감쪽같이 그려 넣었다. ===============================     출생 1527년경, 밀라노 사망 1593년경, 밀라노 국적 이탈리아 요약 16세기 이탈리아의 풍자화가이자 궁정화가로, 주요 작품은 사물을 배열하여 초상을 그린 과 . 밀라노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디자이너로 출발해 프라하로 옮겨간 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2세와 루돌프 2세의 궁에서 궁정화가가 되었으며 궁정극장의 무대배경을 그리고 착각을 일으키는 눈속임 기법을 개발했다. 우의적인 의미와 익살, 해학을 담고 있어 당대 사람들에게는 인기 있었으나 후대에는 20세기의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에게 칭송받기 전까지 관심 받지 못했다.   화면에 과일·채소·동물·책 등의 사물을 배열하여 인물 초상을 닮은 기괴한 그림을 그렸다. 이런 그의 이중 이미지는 20세기에 와서 살바도르 달리와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밀라노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디자이너로 출발했으나, 프라하로 옮겨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자인 막시밀리안 2세와 루돌프 2세의 궁에서 인기 있는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곳에서 또한 궁정극장의 무대배경을 그렸으며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눈속임 기법을 개발해냈다.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그의 그림은 우의적인 의미와 익살, 해학을 담고 있어서 당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었으나, 후세에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의 독특한 시각은 초상화 〈여름 Summer〉·〈겨울 Winter〉(빈 미술사박물관)에 잘 나타나 있다.   주세페 아르침볼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르침볼도 주세페 아르침볼도(이탈리아어: Giuseppe Arcimboldo 또는 Arcimboldi, 1527년 ~ 1593년 7월 11일)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과일, 꽃, 동물, 사물 등을 이용해 사람의 얼굴을 표현하는 독특한 기법의 화풍으로 유명하다. 생애[편집] 아르침볼도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일찌감치 그림의 길로 들어섰다. 독서를 좋아하고 시학, 철학, 고문헌 등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던[1] 그는 1562년 페르디난트 1세의 눈에 띄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아르침볼도의 해박한 지식과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해 그를 자신의 궁정화가로 삼았고,[2] 아르침볼도는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와 손자 루돌프 2세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화가로 일했다. 특히 루돌프 2세의 총애를 받았는데, 궁정화가에서 은퇴한 뒤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본 루돌프 2세는 크게 만족하여 아르침볼도에게 백작의 작위를 내리기도 했다. 프라하 궁정에 있던 그의 작품들은 1648년 30년 전쟁 당시 프라하를 침공한 스웨덴군에 의해 전리품으로 약탈되었다. 현재 그의 작품은 루브르 미술관, 빈 미술사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 등 유럽의 여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품[편집] 『겨울』(1573), 루브르 박물관, 파리   『봄』(1573), 루브르 박물관, 파리   『여름』(1573), 루브르 박물관, 파리   『가을』(1573),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플로라』(1591), 개인소장, 파리   『베르툼누스 : 루돌프 2세』(1590-91), Skokloster Castle, 스웨덴  
3    화가 다빈치가 자전거를 최초로 발상했다?... 아니다!... 댓글:  조회:1890  추천:0  2017-10-23
    밀레의 [만종]   장 프랑수아 밀레   19세기 프랑스의 화가이자 빈센트 반 고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장 프랑수아 밀레, 그리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만종'   국내에서도 가장 유명세를 떨치는 그림 중 하나인 만종은 멀리 교회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를 올리는 부부, 그리고 그들 가운데로 보이는 바구니 속 감자들로 하여 수확의 기쁨을 참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허나, 밀레의 만종을 바라보는 스페인의 천재 화가이자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견해는 이와 달랐다.     살바도르 달리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부터 강하게 매료되었던 달리는 늘 의구심을 품었는데 특히 부부의 가운데 놓여져 있는 감자가 든 바구니를 보며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만종에 매료된 달리는 1935년에 자신의 저서 '밀레 만종의 비극적 신화'를 통해 놀라운 주장을 펼치기에 이른다.   " 부부 사이의 감자가 든 바구니는 사실 아기의 시신이 든 관이다. "   " 밀레는 한 부모가 죽은 아기를 담은 관 앞에서 기도하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가 이를 감자 바구니로 수정했다. "   밀레의 만종이 수확의 기쁨을 그린 서정적인 작품이 아닌, 굶주림에 죽고만 아기의 시신을 묻기 전 추모를 하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달리의 주장은 그의 평판만큼이나 기괴하기 짝이없었다.   그 후로 수십 년 후, 만종이 보관되어 있던 루브르 박물관 측의 관계자가 해당 그림을 X선 투시로 감정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 밀레의 만종은 유화로 X선 투시를 통해 유화의 특징인 '덧칠' 전의 본래 모습을 확인할 수있다. "   " 그리고 만종을 X선 투시한 결과 감자가 들어있는 바구니가 원래는 작은 나무상자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   이런한 결과에 힘을 얻기 시작하는 주장들...   " 밀레는 본래 굶주림으로 죽은 자신들의 아이를 추모하는 부부를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   " 그러나 당시 심화되었던 계급 갈등으로 인해 오해를 통한 신변의 위협을 걱정했던 친구의 만류로 밀레는   아이가 든 관을 다시 덧칠해 감자를 담은 바구니로 바꾼 것 "   " 밀네는 자신의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인 '이삭 줍는 여인들'을 통해서도 그림 전면에 곤궁에 처한 민중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멀리 배경으로 말을 탄 채 일꾼들을 부리는 지배층의 모습을 그리며 당시   시대상의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밀레가 마음먹고 만종을 통해 일종의 '고발'을 한 것 "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   " 밀레사 진정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수확의 기쁨이 아닌 당시 사회를 살던 부모의 슬픔 "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들   " 밀레는 나무상자로 된 관을 그렸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구도를 위해 감자가 든 바구니의 밑그름을 그렸을 뿐 "   " 그림에 표현된 장소와 도구들도 장례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 "   " 밀레는 만종을 회고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레빌아그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종소리에 맞추어 행하던 천사의     기도에서 영감을 얻은 것' 이라고 했다. "   " 태어나서부터 농부들의 삶을 관찰하며 자랐던 밀레를 농민들 편에 선 '서구 최초의 민중예술가'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 밀레는 이데올로기에 큰 관심이 없었다. "   과연 밀레는 부부 사이에 무엇을 그려 넣고자 했던 것일까?   한편, 밀레의 만종을 보유하고 있던 루브르 박물관 측이 X선을 투시 한 이유는   1932년 만종을 관람하던 한 정신이상자가 갑작스레 칼로 해당 그림을 찢는 일이 생겨 복원작업을 위해 만종의 훼손 전 상태를 파악하고자 X선을 투시했던 것.   그리고 어린 시절 루브르 박물관에서 만종을 처음 보고는 비명을 지르며 발작하다시피 한 '만종 아기관설'을 주장했던 화가 살바도르 달리.   그렇게 만종에 그려져 있는 감자가 든 바구니를 볼 때마다 불안감을 느꼈던 천재 화가라 불린 달리를 향한 또 다른 평가   " 그는 미치광이였다. "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   대부분의 이들이 나폴레옹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주황색 망토를 휘감고 앞발을 치켜든 백마에 올라탄 위엄있는 모습'일 것이다.   바로 나폴레옹 시대에 예술과 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 중 하나였던 궁전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 속 모습처럼 말이다.   1800년, 나폴레옹이 북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마랭고에서 승리를 하기 전 알프스를 넘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에는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며 궁정 화가로써 비호를 받던 다비드는 황제에게 명을 받게 된다.   " 자크 루이, 내가 알프스를 넘는 초상화를 하나 그려주게 내 모습은 스페인 카를로스 4세 국왕의 초상화처럼 그리고   앞발을 든 말 위에 평온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주게나 "   " 황제 폐하, 그렇다면 그림을 위해 직접 모델을 서주시겠습니까? "   " 아니, 그럴 필요 없이 자네의 '천재적 상상'에 맡기겠네 "   그리하여 멋지게 미화된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그림은 가장 유명한 나폴레옹 초상화가 되기에 이른다.   허나, 나폴레옹이 백마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모습은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알프스의 험한 산길을 넘기 위해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병사들은 해당 지형에 강한 당나귀를 타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은 병사들이 알프스를 먼저 넘어간 후에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당나귀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던 것이다.   결국, 다비드의 그림 속 나폴레옹의 모습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1850년에 동시대의 화가인 폴 들라로슈에 의해 그려진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Bonaparte Crossing Alps)' 속 나폴레옹의 모습이 실제와 비슷했을 것이다.     폴 들라르슈의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   " 초상화와 내가 닮고 안 닮고는 의미가 없다. 위대한 화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림에 생명을 불어 넣으면 된다. "   - 나올레옹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   천재의 걸작이었던 이 그림은  21세기 들어 가장 'Hot'한 소설 속 '장치'로 등장하며 예수의 비밀스러운 코드를 지니고 있는 작품으로 다시금 알려져 유명세를 얻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 유산으로써 가장 영향력있는 예수 그리스도 작품에는 우리가 알지 뭇했던 사실이 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   12사도 들과의 마지막 저녁 식사에서 다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 과연 그들은 그날 마지막 저녁 식사로 무엇을 먹었을까?   본래 레오나르도의 작품 최후의 만찬은 그 훼손 정도가 심각해 만찬에 오른 음식이 무엇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다만, 최후의 만찬 당일이 유월절이라는 유대인들의 기념일이었기 때문에 예수와 12사도들이 마지막 저녁 식사로 양고기를 먹었을 것이므로 레오나르도의 작품 속에도 다른 많은 최후의 만찬을 소재로 한 작품들 처럼 식탁에 양고기가 올려져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었다.   허나, 1999년 이루어진 복원 작업으로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 속 테이블에 어떠한 음식이 올려졌는지가 밝혀졌는데 놀랍게도 양고기가 아니 바로 생선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어째서 유월절 이루어졌던 최후의 만찬에 양고기가 아닌 생선을 그려 넣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들어보면 무릎을 치며 '역시 수수께기와 암호가 가장 어울리는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야"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예수(Iesus), 그리스도(Christos), 하나님의 아들(Theon Uios), 구세주(Soter)의 각 단어 앞글자를 연결한 'ICHTHUS'가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뜻을 지닌다는 것에 주목했으며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마치 예수가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살과 피로 비유하여 사도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것처럼 예수가 자신을 희생양으로 신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다면 최후의 만찬에 가장 어울리는 요리야말로 바로 예수를 상징하는 생선만큼 어울릴 수 있는 음식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밀라노 칙령' 이전 기독교가 박해를 받을 당시 물고기는 예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비밀기호였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유월절 만찬의 상징인 새끼 양 대신 생선 요리를 그려넣음으로써 예수의 희생과 기독교 박해 당시 사용되던 상징물로 최후의 만찬 당시 예수 그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담으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상태였던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1977년 시작되어 1999년까지 이어졌던 복원작업으로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지만, 복원을 두고 비판도 적지 않다.   일부 전문가들은 복원팀이 원본에 없는 색을 덧칠했으며 레오나르도의 것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드로잉을 참조해 예수의 얼굴에서 수염을 제거하는 등 원작의 20%만이 살아남은 실패한 복원이라는 비판이 바로 그것.   실제로 2011년 7월, 본래 레오나르도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졌던 예수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가 레오나드로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밝혀지며 그 가치가 45파운드(약 7만 7천원)에서 2억달러(약 2,134억원)로 뛰어올라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일이 있었는데 작품 속 예수에게는 비교적 덥수룩한 수염이 존재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   한편, 화가뿐만 아니라 건축,물리학,기계 발명,해부학,화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능통했던 이 위대한 천재는 화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 요리사로 생계를 꾸렸으며 요리솜씨 또한 탁월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전거 스케치   다양한 분야에서 상상도 못할 만큼의 천재성을 발휘했던 위대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런 그가 생전에 자신의 방대한 연구 기록을 기록했던 수첩에서 놀라운 스케치가 발견되는데 바로 체인과 페달까지 상세하게 스케치 되어 있는 현대식 자전거가 그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자전거가 최초로 발상 되었던  1831년보다 300년 이상 먼저 현대식  자전거를 도안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위대한 천재 그 이상이었던 것일까?       허나, 이후의 조사에서 이 자전거 도안이 실은 1960년대 이루어졌던 필사본 복원 과정 중 다른 이의 고의적인 덧칠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1961년까지만 해도 본래 두 개의 원이 그려져 있던 것에 불과했던 스케치에 한 수도사가 페달을 그려넣었고 이후 또 다른 누군가가 페달과 바퀴살 등을 추가로 그려넣어 완전한 현대식 자전거로 둔갑시켜버린 것이었다.         즉, 실제로는 레오나르도의 동성 연인이자 조수였다고 주장되어지는 지안 지아코모 카프로티가 스케치 한것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원에 1564년 발견되어 연필심의 원료로 사용되는 흑연에 의해 덧칠되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1519년 사망, 지안 지아코모 카프로티는 1524년에 사망)     지안 지아코모 카프로티   그러나 이러한 고의적인 사기가 드러났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위대한 천재가 당연히 최초의 자전거를 발명했을 것이라고 믿는가 하면 그를 주제로 한 박물관에 해당 자전거 도안을 복각한 전시물이 버젓이 전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 외에도 위대한 천재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이들로 인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현대 문명이 낳은 많은 발명품들과 지식들을 최초로 '직접적인 구상'을 했던 불가사의한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출처] [이상한 옴니버스] 번외단편 - Mystery of Gallery|
2    유명한 본 종가집 그림은 새끼에 새끼를 낳는걸 알가 모를가... 댓글:  조회:2124  추천:0  2017-10-23
그림   다양한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   2017. 10. 17.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린 20여점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 개인 소장 작품인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가 1천억원이 넘는 고가에 경매가 부쳐질 즈음에 세계에 널리 널려 있는 다양한 '살바토르 문디'를 한 데 모아 보아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 Albrecht Durer의 Salvator Mundi Thomas Tallis의 Salvator mundi, Salvanos An unknown Flemish artist의 Salvator Mundi(1550~1575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 Andrea Previtali의 Salvator Mundi(1519년) Hans Memling의 Salvator Mundi Palma Vecchio의 Salvator Mundi(1520년) Thomas Schoen의 Salvator Mundi(Sophia Musik 2013년) Mansi Magdelen의 Salvator Mundi(1510~1530년) Domenico Fetti의 Salvator Mundi Giovanni Bellini의 Salvator Mundi(1450~1520) Joos van Cleve의 Salvator Mundi(1540년) Fiz essa pintura의 Salvator Mundi(2012) Leia mais의 Salvator Mundi Rafael Sanzio (1506년) Correggio (1515년) Andrea Previtali Marie Madeleine
1    "나는 한번도 뚱보를 그린적이 없다"... 댓글:  조회:3222  추천:0  2017-10-23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1932~   보테로가 직접 한국을 찾았을때. 이번에도 그에게 똑같은 질문이 쏟아졌지요. “왜 뚱보를 그리는가?” 그의 그림만큼이나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답변을 기대한 이들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노老화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만큼은 정색을 하며 말합니다. “나는 한 번도 뚱보를 그린 적이 없다. 색감과 양감(볼륨)을 중시하다 보니 풍만함이 강조됐을 뿐이다.” 그는덧붙입니다. “내 스타일의 목적은 규모를 키우는 데 있다. 그래야 더 많은 색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고, 형태의 관능성과 풍만함을 더 잘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본인의 개성을 풍만함에서 찾았을 뿐 단순한 재미나 풍자를 위해 ‘뚱보’를 그리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이 부분에서 어떤 이는 서운함을 드러냅니다.  그림을 감상하는 자의 입장에서 작가의 진의와 철학을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그림은 두뇌가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작가의 뜻과 말, 배경과 생각에 관심을 둘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림 감상이 훨씬 충만해지기 때문이지요. 이제껏 보테로의 그림에서 풍만한 몸매만 보셨다면 이번에는 몸매 대신 여기 소개하는 다른 ‘이야기’들에 귀 기우려 보십시요. (왼쪽) ‘Rubens and His Wife’, 2005년作, 205×173cm (오른쪽) ‘After Velazquez’, 2006년作, 205×176cm 1. 도망자 보테로 vs. 기증자 보테로  콜롬비아에서 나고 자란 보테로는 이런 현실을 한탄하면서 ‘내 고향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의견을 수차례 피력했다. 평화를 갈구하는 그 ‘목소리’가 그를 범죄 조직의 표적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합니다. 실제 보테로는 그간 수차례 위험에 처했습니다. 1994년에는 보고타에서 납치될 뻔했다가 간신히 탈출했고, 1995년에는 그가 고향 메데인에 새운 조각품 ‘새Bird’가 폭탄 테러로 파괴되었습니다. 보테로는 폭파된 조각품을 제거하지 않고 그 옆에 또 하나의 조각품을 설치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 같은 테러의 위협 때문에 보테로는 콜롬비아에 자주 가지 않습니다. 부득이 가야 할 때는 친구 차와 경찰차를 앞뒤에 두고 움직인답니다.  콜롬비아가 범죄로 얼룩지는 세태를 안타까워하는 심정은 그림에도 투영됩니다.  ‘거리Street’를 볼까요? 언뜻 보면 사람들이 오가는 일상적인 거리 풍경을 스케치한 것 같지만 서로를 감시하는 듯한 딱딱한 표정의 수녀, 경찰, 정치인, 창녀를 통해 보테로는 권위와 정치에 짓눌리고 경직된 사회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Street’, 2000년作,200×139cm   ‘말을 탄 남자Man on a Horse’는 또 어떤가요? 포동포동 살찐 말 위에 역시 포동포동 살찐 남성이 올라탄 모습이 피식 웃음을 짓게 하지만 창문을 열고 이 남자를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듯한 또 한 명의 남성을 보면 묘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보테로는 서로가 서로의 감시 대상이 되는 독재 체제의 불편함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테로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바티칸의 욕실’이란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최고위급 성직자는 욕조에 누워 있는 반면 또 한 명의 성직자는 타월을 들고 욕조 밖에 서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타월을 든 이의 모습을 새끼 원숭이만큼이나 작게 그렸다는 겁니다. 고위 성직자는 백인, 시중을 드는 하급 성직자는 흑인으로 그린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보테로는 이 그림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와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교회 간의 불평등한 ‘서열’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물론, 이 같은 무거운 메시지에도 보테로의 그림은 따뜻하고 유쾌합니다. 한껏 부풀어 오른 그림 속 인물들 덕분입니다. 범죄 조직에 연루돼 살해를 하거나, 자살을 하는 세태를 꼬집은 ‘자살Suicide’같은 작품에서조차 암울함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힘은 ‘애정’에 있습니다. 따뜻한 색감, 빵빵한 몸매의 그림 속 주인공은 무표정하지만 차갑거나 매섭지 않습니다. 보테로는 2000년 콜롬비아의 보고타와 메데인에 있는 미술관에 자신의 조각, 회화 작품 200여 점과 피카소, 모네, 마티스, 샤갈, 미로, 클림트, 르누아르 등의 작품 100여 점을 기증했습니다. 그 답례로 콜롬비아 정부는 보테로에게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주었습니다.     2. 명화에도 주눅 들지 않는 보테로의 자존심과 ‘스타일’    도슨트는 “흔히 보테로의 그림을 보면 별 생각 없이 쓱쓱 쉽게 그린 것 같지만 그만큼 미술사와 고전에 해박한 사람도 없다. 고전에 대한 치열한 연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보테로 스타일도 없었을 거다”라고 말합니다. 실제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20세에 ‘해변에서On the Coast’란 작품으로 콜롬비아 살롱에서 2등을 수상한 그는 상금 7000페소를 받는데 이 돈으로 스페인행 여객선의 3등석 표를 구입합니다. 그리고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벨라스케스나 고야 같은 대가의 작품을 공부하지요. 여행객을 대상으로 대작의 모사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 그는 돈이 모이자 파리로 날아갑니다. 루브르 박물관이 목적지였지요. 스페인과는 또 다른 스타일의 작품과 질릴 만큼 실컷 마주한 그는 이번에는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날아가 조토나 카스타뇨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을 섭렵합니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꼿꼿한 주관입니다. ‘Musical Instruments’, 1998년作, 133×172cm 대가의 작품에 기가 죽을 법도 하지만 그는 “나는 유럽인의 그림을 더 대단하게 상상해왔다. 그러나 작품들의 규모는 나를 실망시켰다”라고 말합니다. 대가의 작품에 주눅 들지 않은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대가의 작품을 재해석합니다. 마치 “나에겐 나만의 스타일이 있다”라고 강조하는 듯한 그의 그림들은 볼수록 재미있고 매력적입니다.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를 따라서’를 보지요. 원작을 기억하는 이라면 이 작품이 원래 얼마나 성스럽고 경건하며 진지한 분위기를 발산하는지 아실 겁니다. 결혼식을 올리는 부부 주변으로 십자가, 신 등의 상징이 가득한 데다 색감도 어두워 무척 엄숙하지요. 보테로는 이러한 분위기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전히 바꾸어놓습니다. 풍성한 몸매에 보름달처럼 둥근 얼굴의 남녀가 살포시 손을 잡고 있는 풍경은 어른들의 소꿉놀이처럼 정겹지요. 원작에서는 천장의 샹들리에에 불이 켜져 있지만 보테로는 그 불을 모두 껐습니다. 당시, 샹들리에의 촛불은 결혼을 상징함과 동시에 결혼식을 지켜보는 하느님의 눈을 상징했다는데 보테로는 개의치 않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를 패러디한 보테로의      고야의 ‘오수나 공작부인’을 재해석한 ‘고야를 따라서’, 루벤스의 1609년작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이사벨라 브란트’를 재해석한 ‘루벤스와 아내’ 역시 원본과는 판이한 느낌으로 미소를 짓게 합니다. 보테로는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정통했지만 이 역시 여느 화가처럼 신성하게 그리지 않았습니다. 덕수궁 미술관 2층에 전시된 ‘에우로페의 남자’를 보세요. 에우로페의 미모에 취한 제우스가 황소로 변신해 에우로페를 납치한다는 것이 신화 내용이지만 보테로의 그림 어디에서도 에우로페가 납치당하는 듯한 분위기는 풍기지 않습니다. 몸이 워낙 육중한 데다 나체로 황소의 뿔을 움켜쥐고 있어 되려 에우로페가 황소를 납치하는 듯한 느낌이지요. 보테로는 젊은 시절부터 ‘나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것에 골몰했다고 합니다. 미술사와 대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연구한 것 역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던 거지요. 그의 스타일은 포크나 병, 컵, 의자, 꽃병 같은 소품에서도 나타납니다. 고야를 따라서   2006   캔버스에 유채   '루벤스와 아내'   에우로페의 납치  1998   캔버스에 유채  218x184 3.내 사랑, 라틴 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 그의 그림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뜨겁고, 정열적인 이미지가 어떻게 일관되게 투영됐는가를 유심히 보면 그림 감상이 훨씬 풍성해집니다.  ‘벨라스케스를 따라서’를 볼까요? 벨라스케스가 1956년에 그린 작품 ‘흰 옷의 왕녀 마르가리타’가 원본인데 그림 속 인물의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원래의 왕녀가 캔버스 가득 우아한 분위기를 풍긴다면 보테로가 그린 왕녀는 소녀 분장을 한 아줌마 같은 모습이지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분명 흰 옷을 입고 있어야 할 왕녀가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귀에는 큼지막한 빨간색 딸기 모양 귀고리를, 머리에는 빨간색 헤어 코르사주까지 하고 있죠. 유럽의 왕녀가 순식간에 라틴 아메리카의 왕녀로 변신한 듯한 모습입니다.   흰 옷의 왕녀 마르가리타    술 마시고, 안고, 사랑을 나누고, 노래를 부르는 그네들의 일상을 기분 좋게 묘사한 작품들은 하나하나 라틴 사람들의 삶의 모토인 ‘만자레(먹고), 칸타레(노래하고), 아모레(사랑하고)’를 대변하지요. ‘애인들’이란 작품을 보세요. 털이 복슬복슬한 남자가 앙증맞은 귀고리와 헤어 리본을 한 애인을 꼬옥 껴안고 있습니다. 캔버스를 가득 메운 여성의 풍만한 엉덩이가 살짝 부담스럽지만 어쨌거나 사랑스럽고 따뜻합니다.   춤추는 사람들   1999  캔버스에 유채  185x122  ‘파티의 끝’은 언뜻 야합니다. 침대에 벌러덩 나체로 누워 있는 남자 주변으로 핑크빛 언더웨어를 걸친 여성 두 명과 기타를 연주하는 남성 한 명이 자리하죠. 방바닥에는 브래지어와 담배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요. 하지만 그 모습은 보테로 특유의 따뜻한 색감 덕분에 욕망의 공간이라기보다 파티 공간처럼 보입니다. 이 같은 흥겨움은 소풍을 나온 남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여인들, 수건으로 중요 부위를 살짝 가린 욕실의 여인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투우’ 시리즈에서 역시 라틴 아메리카를 향한 보테로의 애정과 그리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보테로는 투우와 굉장히 관련이 깊습니다. 열성적인 투우 팬이던 보테로의 삼촌은 보테로가 최고의 투우사가 되길 원해 그를 투우사 양성 학교에 보내기도 했지요. 비록 투우사 학교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데만 열중했지만 그곳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그는 투우를 향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그 뿌리가 작품에 의미와 진실함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주제라도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그리는 모든 것에 라틴 아메리카의 정신이 깃들길 바란다.” 뚱뚱하지만 사랑스러운 인물을 통해,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매력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투우   2006  캔버스에 유채  180x128     El quite, 1988 ‘Picnic’, 2001년作, 113×165cm 보테로 작품을 더욱 즐겁게 즐기는 Tip 3 1.야외 조각품 열심히 보기 덕수궁 내 중화문 앞에는 보테로의 거대한 고양이 조형물이 놓여 있다. 류지연 학예사는 왕릉을 지키는 십이지신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중화문 앞에 이 조형물을 세웠다고 한다. 덕수궁 미술관 앞에도 풍만한 여체 조각상 하나가 이 놓여 있다. 보테로는 몬테카를로의 카지노, 파리의 샹젤리제에서 조각 전시를 할 만큼 조각가로서도 탄탄한 명성을 갖고 있으니까. 그는 샹젤리제에 작품을 전시한 최초의 외국인이기도 하다.  2.서커스 단원의 표정과 배경 면밀히 보기 이번 전시에서 보테로는 최신작인 ‘서커스’ 시리즈도 여럿 선을 보인다. 이 그림들을 볼 때는 인물과 배경 구석구석을 면밀히 볼 것. 언뜻 행복한 단원들의 모습을 그린 것 같지만 무대 안쪽에서 고독한 표정을 지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는 단원 등 서커스의 슬픔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많다. 이번 전시의 메인 포스터 이미지로 쓰인 두 명의 서커스 단원은 언뜻 결혼식을 올리는 남녀 같지만 자세히 보면 남자 중 한 명이 여자로 분장한 것을 알 수 있다. 가슴과 겨드랑이의 무성한 털이 그 증거!  3.여성의 머리카락이 짧다고 가정하고 보기 보테로의 그림 속 여성을 자세히 볼 것.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귀고리와 머리핀 등이 없다고 가정하고 다시 한번 보면 남성과 별반 다를 게 없음을 알게 된다. 특히 작품 ‘아담과 이브’ 속의 이브는 남성보다 허벅지와 발이 더 크다. 이처럼 보테로는 남녀의 얼굴을 거의 똑같이 그리고, 귀고리와 머리핀 등의 장식적 요소를 통해 성별을 구분하는 것을 즐긴다.           자화상  1992  193x130     자화상                 개를 데리고 있는 남자 / 2007 / 캔버스 유채       거리 / 2008 /캔버스 유치       고야를 따라서 /  2006 /캔버스 유채       곡예사 / 2008 /캔버스유채       노란꽃(꽃 3연작) / 2006 / 캔버스 유채       루벤스와 아내 / 2005 / 캔버스 유채       마타도르 / 2006 /캔버스 유채         모나리자       벨라스케즈를 따라서 / 2006 / 캔버스 유채       서커스 단원들 / 2007 / 캔버스 유채       소풍 / 2001 /캔버스 유채       반 아이크의(아르놀피 부부)를 따라서 / 2006 / 캔버스 유채       악기 / 1998 / 캔버스 유채       얼굴 / 2006 / 캔버스 유채       에우로페의 납치 / 1998 / 캔버스 유채       우는 여인 / 1998 / 캔버스유채       자화상 /  1992 / 캔버스 유채       죽마를 탄 광대들 / 2007 / 캔버스 유채       춤추는 사람들 /  2000 / 캔버스 유채       카드놀이 / 1999 / 캔버스 유채   비정상적인 형태감과 화려한 색채의 화풍은 인간의 천태만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라틴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현존하는 라틴 미술의 거장, 페르난도 보테로 콜롬비아의 대표 작가로 소개된 바 있는 그는 유럽 사조에 휘말리지 않는 라틴 아메리카식 표현 방식의 신형상주의(Neo-Figuration)을 구사하며 라틴 아메리카 일상 문화 체험을 현대적 해석으로 이끌고 있다. 특히, 터질듯한 절대적 볼륨, 보테로식 패러디 등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 세계를 선보이며 전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32년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페르난도 보테로는 콜롬비아 작가로는 거의 전례가 없을 정도로 미술사적 위치와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이룬 작가이다.  콜롬비아의 안데스 산맥 깊숙한 곳, 메데진이라는 스페인 식민 문화의 잔재가 남아있는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보테로는 세상과 고립되어 정통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8세 때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의 미술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새로운 현대 미술을 접하게 된다.  세계적인 거장, 피카소(Pablo Picasso)와 지오토(Giotto di Bondone)의 사본을 보게 되면서 형태의 왜곡을 통한 신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이 후 유럽으로 떠나 미술 학교의 정통 교육 과정 대신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거나 분석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현재까지도 미술사 전통 속에 자신을 확인하는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는데 특히 벨라스케스의 견고하고 세밀한 묘사 기법과 고야의 위트 있는 풍자적 표현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내 그림들이 뿌리를 갖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뿌리가 작품에 어떠한 의미와 진실함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내가 손을 댄 모든 것이 라틴 아메리카의 영혼으로부터 침투한 것이기를 바란다.”  이처럼 보테로는 라틴 아메리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세계 미술과의 접목을 이루어 낸 작가이다.  어린 시절을 지낸 콜롬비아의 엄격한 시골의 모습과 생활상을 표현하고, 10년 이상 이어진 현대 콜롬비아의 일상의 잔혹함과 마약으로 망가져 가는 고국 상황에 대한 간접적인 묘사로서 ‘폭력’ 이라는 테마를 등장시켰다.   자주 사용한 콜롬비아 국기색인 빨강, 노랑, 파랑의 표현 등은 그의 미술 저변에 깔려있는 라틴의 영향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그는 영향을 받은 작가로 멕시코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를 꼽는다.  젊은 시절 유럽에서 콜롬비아로 돌아와 열린 개인전에서 평론가들로부터 시대에 뒤떨어진 양식이라는 혹평을 받았고 생계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어렵게 생활하다 결혼과 함께 멕시코시티로 이주했다.  그 당시 멕시코 벽화운동으로 남겨진 프레스코화들을 보게 되고, 이를 통해 형태의 왜곡을 사용하는 라틴 아메리카 미술의 감각적이고 통통한 데포르마(Deformation), 특히 멕시코 벽화운동의 주요 인물인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형태를 최대한 과장시키는 보테로 양식을 구현하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그의 작업 특징인 데포르마숑 형태는 풍선처럼 터질듯한 형태의 풍만함에서 오는 볼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형태를 증대시키는 것은 더 많은 색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넓히고 표현하고자 하는 형태의 관능미와 풍부함을 잘 전달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또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표정과 부동 자세 또는 정면을 향한 시선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인물의 개성에 집중되지 않고 하나의 극단적 볼륨으로만 존재하기를 원했던 그의 조형세계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기능에 따라 혹은 공간 구성의 필요에 따라 인물의 형태 비율을 자유롭게 구사하는데, 동물이 인형처럼 아주 작은 크기로 표현되거나, 정물들이 크게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남성보다 여성을 더 크게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자유로움은 구상에만 머무는 고전주의적 양식이 아니라 현대적 모더니즘의 새로운 신구상주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는 고유의 색을 파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림자가 거의 표현되지 않는다.  대신 색을 이용하여 면을 만들고, 그림자 대신 어두운 색 톤을 이용하여 볼륨을 만들어 마무리하는데, 이를 통해 정물이나 인물을 생기 있게 보여준다.  보테로는 17세기 네델란드의 정물화 걸작들에서 힌트를 얻어 대상의 크기를 확대하고 단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정물을 그렸다고 한다.  인물과 마찬가지로 정물 표현에서 몰개성적인 특징이 나타나는데, 꽃다발이나 과일들을 화면 중심에 위치하게 하고 비현실적인 배치를 통해 풍만함을 더 강조하기도 한다.  구형이나 원형 형태로 단순화된 구성 혹은 최소한의 구성으로 주제는 하나의 덩어리로서만 존재한다. 이처럼 애매모호한 비례와 환경 설정으로 그의 작품은 신비로움을 더한다.  또한 우리는 고전미술의 패러디 작품에서 그만의 독창적인 매력을 발견 할 수 있다.  벨라스케스, 투벤스, 반아이크, 마네, 보나르에 이르기까지 고전작품을 패러디 하거나  일부를 차용하는 다양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현대 미술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팝아트 성향의 패러디 작품들과 달리 미술 양식의 원류를 보여주고자 조형에 대해 끝없이 연구하여 보테로식 패러디를 창조해 냈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양식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결국 신 양식과 구 양식의 혼합을 통해 그의 조형 세계의 깊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작업 특성은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에서도 이어진다.  터질듯한 절대적 볼륨, 이를 입체로 구현시키는 것은 그의 작품 철학의 귀결이라 볼 수 있다.  1963년부터 볼륨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후 대형 조각들의 무게를 줄일 수 있는 청동주물 시스템의 발견으로 대형 야외 조각 설치가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햇살이 조각에 비추거나 혹은 빗방울이 표면에서 미끄러져 나갈 때의 효과는 그림자와 함께 매끄럽게 흐르는 청동의 선을 환상적으로 연출한다.  콜롬비아에서 경험한 바로크 양식의 영향으로 대형 동물 형상, 누워있거나 서있는 뚱보여인과 함께 아담과 이브는 특히 조각에서 많이 등장한다.  필자가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서 받은 감동은 80세를 앞둔 세계적 거장의 진지하되 부지런한 작업 태도였다. 그는 전 세계 주요도시에 본인의 스튜디오를 갖고 있으며 그만의 규칙에 따라 봄에는 프랑스 파리, 여름엔 이태리 피에트라산타, 다시 파리로 돌아와 가을 끝 무렵까지 지내다가 겨울에는 뉴욕, 그 후에는 봄까지 몬테카를로의 작업 여정을 돌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이젤 없이 작업하는 독특한 작업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작업실의 높은 천정 도르래에 걸려있는 캔버스 천은 시간의 효율성을 위해 그가 고안한 것이다.  벽에 천을 고정시키고 캔버스 중심에서부터 주제를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구성을 하고 부수적인 이미지를 첨가하며 작업을 완성한다.  이후 필요 부분만 잘라 캔버스 틀을 만든다.   그의 자유로운 형태의 변형 스타일이 작업 방식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에게 스케치는 스케치로서 존재한다.  완벽함을 중시하는 그는 드로잉 작업에서도 세밀한 부분까지 완성된 형태로 등장한다.  “난 뚱보를 그린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확고한 예술 철학을 실험하고 또 다시 창조한다.  누가 보아도 뚱보를 그린 것이지만 그는 언제나 말한다.  라틴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 그가 앞으로 세계 미술사에 남길 위대한 예술을 기대해 본다.                                                 ---아트저널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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