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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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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노벨문학상과 시인] - 중국 상하이, 베이징 주재 외교관 시인 댓글:  조회:3297  추천:0  2017-10-31
  (프랑스)   생종 페르스                 출생 1887. 5. 31, 과들루프 생레제레푀유 사망 1975. 9. 20, 프랑스 프레스킬드지앵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시인·외교관. 본명은 MarieRen-Auguste-Alxis Saint-Lger Lger.   1960년에 '시의 드높은 비상과 생생한 회화적 형상'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보르도와 파리의 대학에서 공부한 뒤, 1914년에 외교관이 되었다. 중국으로 가서 상하이 주재 영사와 베이징 주재 서기관을 지냈으며, 1921년에는 동아시아 문제 전문가로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가했다. 그 후 정치가인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비서(1921~32)가 되었으며, 1933년에는 대사급인 프랑스 외무부 사무국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에 비시 정권이 그를 공직에서 해임하고 프랑스 시민권까지 박탈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국회도서관에서 프랑스 문학 담당고문으로 일했고 1957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가 정식으로 외교관이 되기 전에 발표한 초기 시로는 상징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는 〈찬가 Éoges〉(1911)가 있다. 그후에는 좀더 개성적인 표현 양식을 개발했다. 특히 정확함과 순수함 때문에 시인들의 찬사를 받고 있는 그의 시 언어는 매우 까다로워서, 일반대중에게는 별로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그의 시는 흔히 랭보의 시와 비교되었다. 그는 최면 상태에 빠진 듯한 환상을 기도서와 같은 운율과 특이한 어휘로 전달하고 있다. 초기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장시인 〈원정(遠征) Anabase〉(1924)이다. 망명시절에 쓴 시 〈망명 Exile〉(1942)·〈바람 Vents〉(1946)·〈항로 표지 Amers〉(1957)·〈연대기 Chronique〉(1960)·〈새 Oiseaux〉(1962) 등에서 그는 매우 개성 있는 문체를 구사했다. 어떤 사람들은 생 종 페르스를 프랑스 국민정신의 화신으로 생각한다. 즉 지적이면서도 열정적이고, 삶의 비극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완벽과 균형에 대한 예술가적 감각과 실무적 능력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비교적 잘 알려진 그의 시 가운데 영어로 옮겨진 것은 〈나는 비둘기 나무 옆에 내 말을 세웠다〉·〈그리고 그대, 바다여〉·〈청동색 나뭇잎 아래서 수망아지가 태어났다〉 등이다. ======================     눈            그리고 눈이 왔다,不在의 첫눈이, 꿈과 현실로 짠 엄청난 나비의 피륙들 위에. 온갖 고통은 다 기억 좋은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우리의 관자놀이에는 린네르 같은 시원함이 있었다. 그것은 아침, 새벽의 잿빛 하늘 아래 여섯 시 조금 전 잠시 머무는 항구에서처럼 침묵의 거창한 노래들의 벌떼를 풀어놓을 은총과 은혜의 터전 이었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우리도 모르게, 깃털의 이 눈부신 활동 아래서, 넋의 폐허와 짐을 아주 높이 받쳐들고, 빛나는 곤충들로 구멍난 높다란 속돌의 도시들은, 제 무게도 잊은 채 자라나고 뛰어다기를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기억도 확실찮고 이야기도 엉뚱한 곤충 들만이 이 일의 뭔가를 알았다. 이 어마어마한 일들에 정신이 끼어든 몫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돌 박공 꼭대기에 이 명주 같은 시간의 첫 나타남을, 속눈썹의 스침 같은 이 연약 하고 하찮은 것의 첫 와닿음을. 청동 지붕 위에서도 크 롬강철 뾰쪽탑 위에서도, 흐린 사기 담벼락 위에서도, 두 꺼운 유리 기왓장들 위에서도, 검은 대리석 굴대 위에 서도, 화이트메탈의 박차 위에서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 했다, 아무도 흐려놓지 않았다.         뽑은 칼날의 첫 흥분 같은 이 갓난 숨결의 구름떼 를...... 눈이 오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 놀 라움을 말하겠다. 신령의 숨결에 사로잡힌 전설의 큰 올빼미처럼 제 깃털에 싸인 벙어리 새벽이 그 하얀 다알 리아 같은 몸뚱이를 부풀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낭비와 잔치가 우리에게 오고 있었다. 그래서 건축가 가 지난 여름 쏙독새 알을 우리에게 보여준 그 테라스 를 향해 인사하기를!           詩. /생종 페르스 Saint-John Perse     .............................................................................................................................. 우리는 낮은 곳에 있기에 눈을 감상하는 일이 호사스럽게 느껴질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혹독한 군인 시절에도, 맵고 쓴 생활 전선의 아스팔트 위에서도 우리는 눈을 맞았고 그로인해 자연스레 일어나는 부드러운 감정까지 싸구려 취급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   비 생종페르스 비의 용수(榕树)는 거리에 뿌리 내리고 때이른 호수가의 탁한 물속의 벌레들, 산호의 혼인을 향해 솟아오르고 그물로 싸우는 투우사와 같이 벌거벗은 ‘사고’ 공중의 뜰에서 헝클어진 녀인의 머리카락을 빗긴다. 파도의 웨침에 주제의 절박함을 노래하라 시여, 파도의 출렁거림에 도망하는 주제를 노래하라 시여 예언하는 처녀들의 허리에 지나친 애욕 밤에 황갈색의 늪에서 부화하는 금빛의 알 오 기만이여! 이같은 꿈의 기슭에도 나의 정돈된 잠자리 그곳에서 음란한 장미는 시로 선명히 자라 바퀴 되어 돌기 시작한다. 나의 비웃음인 무서운 주여, 여기에 있는 것은 짐승의 고기 맛에 김 뿜는 땅과 처녀수 밑의 과부의 점토, 잠 못 이룬 내 사내의 발에 다져진 땅이니 포도주처럼 가까이 가 냄새를 맡을 때 그 땅은 진정 기억의 상실을 시인할 것인가? 주여, 내 비웃음의 무서운 주여! 여기에 있는 것은 층을 이룬 바다의 겹쳐진 부분의 높은 모래언덕의 응답과 같은, 지상에서 표현되는 꿈, 여기 이곳에 있는 땅은 모두 씁쓸한 땅 새로 태어남의 시간, 그리고 알 수 없는 모음의 방문을 받는 나의 영혼.    생종페르스의 [비]를 읽노라면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시 행마다 거의 모두가 이질적인 이미지로 나열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는 연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단절되어 있고, 그런 단절들이 모여서 한 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어떠한 통일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외교관이었지만 시에서 그가 추구한 것은 어떤 윤리도, 사상도, 철학도 아니다. 그저 그의 영혼에 떠오른 이미지들을 집합하여 한 수의 시로 만들었을 뿐이다. 한국 태학당에서 출판한 생종페르스의 시집은 [이국의 여인에게 바치는 시]라는 제목으로 되었는데 모든 시가 다 이런 파편문체의 시, 즉 다선시다. [감각적 비실재성이란 말은 생종페르스 시에도 유용한 말이다. 그의 시를 내용상으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독일의 석학 후고 프리드리히는 말하고 있다. 주문처럼 흘러나오는 생소한 이미지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반짝이는 이미지들이 장엄한 소리를 내면서 독자를 아연해지게 한다. 그것은 상상력에 대한 자극이다. 이미지들은 조밀하게 배열되어 어느 한 이미지도 부정할 수도 없다. 영혼 속에서 끓고 있는 이미지들은 낯설고도 환각적이어서 이방의 나라에서 온 사물들의 움직임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덤으로 더...   요약 서정시의 특질을 모두 담고 있으면서도 산문처럼 보이는 짧은 글.   산문시란:= 산문시 형식은 자크 베르트랑(알로이시우스)의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1842)를 통해 프랑스 문학에 소개되었다. 베르트랑의 시는 그당시에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그가 19세기말 상징파 시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보들레르의 〈소산문시 Petits Poèmes en prose〉(1869, 뒤에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이라는 제목이 붙음)로 입증되었다. 산문시라는 명칭은 이 작품에서 유래한 것이며, 스테판 말라르메의 〈여담 Divagations〉(1897)과 아르튀르 랭보의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1886)은 프랑스에서 산문시를 확고하게 정착시켰다. 이밖에도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산문시를 쓴 시인들로는 폴 발레리, 폴 포르, 폴 클로델 등이 있다. 독일에서는 19세기초에 횔덜린과 노발리스가, 19세기말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산문시를 썼다. 20세기에는 프랑스의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의 〈산문시 Poèmes en prose〉(1915)와 생종 페르스의 작품들에서 산문시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노벨문학상과 시인] - "모더니즘 시인들 운동"의 지도자 시인 댓글:  조회:3455  추천:0  2017-10-31
  (이탈리아)   살바토레 콰지모도                   출생 1901. 8. 20, 이탈리아 모디카 사망 1968. 6. 14, 나폴리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시인·비평가·번역가.   원래 에르 메티스모(er metismo : 20세기초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모더니즘 시인들의 운동) 시인들의 지도자였던 콰시모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당시의 사회 문제를 비판하는 유력한 시인이 되었다. 195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시칠리아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시라쿠사와 메시나에서 교육을 받았고, 팔레르모에서 공학과 수학을 배운 뒤 로마에서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토목 기사가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대학을 졸업한 뒤 10년 동안 이탈리아 정부에서 토목기사로 일하면서도 틈틈이 시를 썼다. 그의 처녀시는 피렌체에서 발행되는 정기간행물 〈솔라리아 Solaria〉에 발표되었다. 처음에 그는 에르 메티스모를 신봉하는 시인 주세페 웅가레티와 에우제니오 몬탈레의 추종자였으나 첫 시집 〈바다와 육지 Acque e terre〉(1930)를 출판한 뒤, 차츰 에르 메티스모 시인들의 지도급 시인이 되었다. 1935년 이후에는 토목기사를 그만두고 밀라노에 있는 예술학교에서 이탈리아 문학을 가르쳤다. 〈가라앉은 오보에 Oboe sommerso〉(1932)·〈유카리나무의 향기 Odore di eucalyptus〉(1933)·〈에라토와 아폴리온 Erato e Apollion〉(1936) 등 콰시모도의 후기 시집들은 딱딱하고 기교에 치우친 문체와 에르 메티스모의 난해한 상징주의를 보여주고 있지만, 개인적인 관심에서 당시의 사회 문제로 전환한 시도 많이 실려 있다. 마지막 시집인 〈시집 Poesie〉(1938)·〈그리고 곧이어 밤이 되려니 Ed é subito sera〉(1942)를 끝으로 그의 에르 메티스모 시대는 막을 내렸다. 전후 〈하루 또 하루 Giorno dopo giorno〉(1947)를 출간한 때로부터 죽을 때까지 콰시모도의 작품세계를 형성한 것은 그의 사회적 신념이었다. 그는 파시스트 정권의 부당함과 전쟁의 공포와 이탈리아의 죄악을 상기시키는 시를 많이 썼다. 동일한 성격을 지닌 후기 시들은 간결한 언어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심상을 표현하고 있다. 후기 작품집으로는 아이스킬로스의 묘비명인 "나는 말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해한다고"가 들어 있는 〈비할 데 없는 지구 La terra impareggiabile〉(1958)·〈시전집 Tutte le poesie〉(1960)·〈주는 것과 갖는 것 Dare e avere〉(1966) 등이 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죽을 때까지 콰시모도는 놀랄 만큼 많은 글을 번역·출판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일련의 〈그리스 서정시 Lirici greci〉(1940), 그리스의 비극 극작가인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을 모은 〈그리스 비극 Tragici greci〉(1963), 로마의 시인인 카툴루스·오비디우스·베르길리우스의 시, 셰익스피어의 희곡 6편, 몰리에르의 〈위선자 Tartuffe〉, 20세기의 시인인 미국의 e. e. 커밍스와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의 시 등이 있다. 그는 2권의 이탈리아 시선집을 편찬하고 중요한 평론도 많이 썼는데, 이 평론들은 〈시인과 정치인, 그리고 기타 시론 Il poeta e il politico e altri saggi〉(1960)이라는 평론집과 〈연극 비평집 Scritti sul teatro〉(1961)에 실려 있다. 1971년 〈시와 시론 Poesie e discorsi sulla poesia〉이 출판되었다. 그의 시는 한국에서도 부분적으로 번역·소개되었다. =========================덤으로 더...        이탈리아 시인 에우제니오 몬탈레(Montale, Eugenio) 1896.10.12~1981.9.12]  1896년 10월12일 이탈리아 시인 에우제니오 몬탈레가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밀라노에서 졸(卒). 몬탈레는 주제페 웅가레티(1888~1970), 살바토레 콰지모도(1901~1968) 등과 함께 20세기 이탈리아 시단을 대표할 만한 시인이다. 첫 시집 ‘오징어의 뼈’(1925)에서 전통적 시형을 깨뜨리는 야릇한 리듬으로 현대세계의 황폐한 내적 풍경을 그린 이래 몬탈레는 난해시 또는 신비주의(에르메티즈모)의 챔피언으로 꼽혔지만, 실상 그의 시세계는 어떤 라벨을 붙여 가두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다. 몬탈레가 신비주의자든 아니든, 그의 시는 음악에서 출발했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징집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지만, 음악은 몬탈레의 일생을 따라다녔다. 음악은 그의 시 속에서 다양한 변주와 밀도로 펄떡거리기도 했고, 시 바깥에서 시인의 생업을 감당하기도 했다. 장년기 이후 몬탈레는 밀라노의 일간지 코리에레델라세라에서 밥벌이를 했는데, 그가 기고한 기사들은 주로 음악평론이었다. 문학에 대한 글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몬탈레는 1922년부터 문학지 ‘프리모 템포’의 창간 멤버로 일했고, 일생 동안 여러 매체에 시 비평을 썼다. 그는 또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셰익스피어, 코르네유, 멜빌, 엘리엇, 오닐 같은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작가들 작품을 이탈리아어로 옮겼다. 몬탈레의 사후 그의 작품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됐지만, 생전에는 자신의 시를 스스로 프랑스어나 영어로 번역했을 만큼 외국어에 능했다. 몬탈레의 시에 정치적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그는 조국의 파쇼 정권에 다부지게 반대했다. 1920년대 말부터 10년 가까이 재직한 피렌체의 가비네토 비외쇠 도서관 관장 자리에서 쫓겨난 것도 정치적 입장 때문이었다. 몬탈레는 197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5    [노벨문학상과 시인] "벌거벗은 시"로 리행과 리정표가 된 시인 댓글:  조회:3044  추천:0  2017-10-31
(스페인)  히메네스                    출생 1881. 12. 24, 스페인 모게르 사망 1958. 5. 29,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국적 스페인 요약 주로 시인으로 유명하며, 어떤 사람과 그의 당나귀에 관한 산문인 〈플라테로와 나〉(1917)도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195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살라망카대학교에서 잠시 공부한 뒤 1900년 시인 루벤 다리오의 초청을 받아 마드리드로 갔다. 같은 해 〈제비꽃의 영혼〉·〈수련〉 등 그의 초기 시집 2권이 출간되었다. 결혼한 후 〈갓 결혼한 한 시인의 일기〉(1917)를 펴냈는데, 이것은 1948년 〈한 시인의 일기와 바다〉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서 그는 모든 비본질적인 문제들에서 탈피해 형식적인 운율이 없는 더욱 순수한 성격의 자유시 창작을 시도함으로써, 이른바 '벌거벗은 시'로 이행해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스페인 내란(1936~39)중에 공화파와 제휴했다가 후에 자발적으로 푸에르토리코로 망명하여 이곳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히메네스 195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살라망카대학교에서 잠시 공부한 뒤 1900년 시인 루벤 다리오의 초청을 받아 마드리드로 갔다. 같은 해 〈제비꽃의 영혼 Almas de violeta〉·〈수련 Ninfeas〉 등 그의 초기 시집 2권이 출간되었다. 보라색과 녹색으로 인쇄된 이 2권의 시집은 너무나 감상적이어서, 말년에 크게 당혹한 히메네스는 인쇄본을 닥치는 대로 없애버렸다. 체력이 약했던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마드리드를 떠났는데, 〈목가시 Pastorales〉(1911)·〈머나먼 정원 Jardines lejanos〉(1905)·〈순수한 엘레지 Elegías puras〉(1908) 등 이 시기에 출판된 시집들은 자유시로 개성과 주관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다리오의 영향을 뚜렷이 반영하고 있다. 1912년 마드리드로 돌아와, 그후 4년 동안 레시덴시아데에스투디안테스에 거주했으며 이 교육기관에서 발행되는 간행물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1916년 뉴욕 시를 여행했고 힌두 시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작품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제노비아 캄프루비 아이마르와 그곳에서 결혼했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직후에 〈갓 결혼한 한 시인의 일기 Diario de un poeta reciéncasado〉(1917)를 펴냈는데, 이것은 1948년 〈한 시인의 일기와 바다 Diario de un poeta y mar〉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서 그는 모든 비본질적인 문제들에서 탈피해 형식적인 운율이 없는 더욱 순수한 성격의 자유시 창작을 시도함으로써, 이른바 '벌거벗은 시'(la poesía desnuda)로 이행해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스페인 내란(1936~39)중에 공화파와 제휴했다가 후에 자발적으로 푸에르토리코로 망명하여 이곳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주로 시인으로 유명하나, 미국에서는 어떤 사람과 그의 당나귀에 관한 산문인 〈플라테로와 나 Platero y yo〉(1917)가 번역되어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그는 부인과 함께 아일랜드의 극작가인 존 밀링턴 싱의 〈바다로 간 기수 Riders to the Sea〉(1920)를 함께 번역했다. 일생 동안 그는 엄청나게 많은 시를 썼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영혼의 소네트 1914~15 Sonetos espirituales 1914~1915〉(1916)·〈돌과 하늘 Piedra y cielo〉(1919)·〈운문시 1917~23 Poesía, en verso 1917~1923〉(1923)·〈산문과 운문으로 된 시 Poesía en prosa y verso〉(1932)·〈나의 노랫소리 Voces de mi copla〉(1945)·〈막다른 길의 동물 Animal de fondo〉(1947) 등이 있다. ==========================   나 홀로 神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여.  나는 밤낮으로 새로 내 취향에 맞게  나 자신을 만듭니다.  나는 더한 내가 될 것입니다. 나 스스로를 갖고 나를  만들기 때문이죠.  오로지 나하고 함께 한  아들, 형제, 동시에 어머니  아버지, 神.  나는 전체가 될 것입니다.  나의 영혼은 무한하기 때문이지요.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전체이기 때문이지요.  이 새로운 의지로서  나 자신을 갖고 영원한 나를  만든다는 사실이  이 얼마나 큰 영광이며  희열이며  기쁨인가요.  개울의 풀을 짓밟고 흐르는  황금의 물이여  흐르는 것은 그대가 아니고  나의 마음이라네.  신선하고 자유로운 날개들이여  푸른 무지개의 깃을 펴는 것은  그대들이 아니고  나의 마음이라네.  보드랍고 붉은 나뭇가지들이여  순풍에 흔들리는 것은  그대들이 아니고  나의 마음이라네.  높고 맑은 물소리들이여  저 석양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그대들의 것이 아니고  나의 마음이라네  - 후안 라몬 히메네스-  -후안 라몬에게 특히 나타나는 禪적 특성 중 비합리성, 직관적인 예민성, 순간적인 것, 갑작스러움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후안 라몬은 진정한 詩는 보이지 않는 실재 속에 뿌리를 내리고 터전을 가지고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실재를 염원하고 전체 세계 속에서 현실과 상상을 융합시켜 포착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어린이 시절은 마치 천국에서 떨어져 나온 영혼의 조각 같은 황금기이다. 거기서야 말로 詩人의 마음은 날개짓 할 수 있는 것이다......"    응, 프라테로,  언제였던가 모게르의 혼은 포도주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모게르의 혼은 빵인 것이다.  모게르는 한 덩어리의 소맥빵과 같다.  안쪽은 빵 속처럼 새하얗고, 바깥쪽은 뭉실뭉실한 빵껍질처럼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는 - 아아, 노르스름한 그 색이여!-  점심때, 태양은 한층 더 타오르고 마을에서는 연기가 피어 올라서  소나무와 갓구운 빵내음이 난다.  마을이 입을 연다. 마치 커다란 빵을 먹는 큰 입 같다. 빵은 무엇과 먹어도 그것을 한층 더 맛있게 해준다.  올리브 기름에도 가스파쵸에도  치즈와 포도의 배합에는 입맞춤의 맛을 더해주기도 하고,  포도주, 스프, 햄, 그리고 빵과 빵의 어울림 그 자체에도  물론 희망과 같이 그만큼 먹어도 좋고 혹은 꿈과 함께라도......  빵장수들은 말을 타고 속보로 달려온다.  거의 닫힌 집집의 대문 앞마다 멈추어서서,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외친다.  '빵 어떻습니까!......' 소매를 걷어 붙인 팔뚝으로  커다란 빵바구니를 들어올리면,  안에서 네 쪽으로 자른 빵이 떨어져서 단빵에 부딪치거나  대형빵이 도너츠형의 빵에 부딪치거나 할 때의 울퉁불퉁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곧장 문에 붙어 있는 작은 종이나 현관의 초인종을 두드리며  집안을 향해서 길게 울며 외치는 것이다.  (빵 사줘요, 조금만이라도 좋으니까......!)  -후안 라몬 히메네스-  * 이 글은  -김현창 著, 서울대학교 출판부-  에서 한 구절 옮겼습니다. 세계문학 속에서 禪과道적인 동양사상에 심취해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체계화, 작품화 시킨 시인 후안 라몬의 詩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가 인도의 타고르와 정신적 교류를 나누었고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한 일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보르헤스, 홀리오 코르타사르, 로맹 롤랑, 헤르만 헷세, 옥타비오 파스, 칼 융, 비트겐 슈타인, 카프라, 니체, 칸트, 플라톤, 스피노자, 루소, 이오네스코 등 동양의 서적을 탐독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간 사상가와 시인, 작가들의 세계를 비교하면서 읽어나가는 기쁨도 컸습니다. 그들은 불교, 힌두교, 도교의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후안 라몬의 시를 두 편 옮겨 올려보았습니다.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세계는 문인수 시인의 '神이옵신 그리움'에 아주 가까운 시인입니다. 참고로 오늘 읽은 그의 대표시집는 참으로 아름다운 결과 깊이, 그리움을 지녔더군요. (천진성과 神적인 나) 후안 라몬의 시집을 한 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4    [쉼터] - 세상은 넓디넓고 세상은 매력적이다... 댓글:  조회:1753  추천:0  2017-10-31
       조회:536 ]                                         하남성 濟源 王屋山에서ㅡ       10월 30일, 구이저우(貴州)성 첸둥난(黔東南) 먀오족둥족자치주 단자이(丹寨)현 양우(揚武)진 파이머(排莫)촌, 먀오족 여성들이 명절날 분장을 하고 있다. 당일, 구이저우성 첸둥난 먀오족둥족자치주 단자이현 양우진 파이머촌에 먀오족의 전통적인 명절 ‘츠신절(吃新节)’을 맞이했다.      =워싱턴 백악관에서ㅡ                   10월 12일 길이 10m, 무게 10톤에 달하는 흑단(음침목) 작품 ‘실크로드’가 정저우(鄭州, 정주) 전국 상품 교역회에 등장했다. [인민망 한국어판 11월 1일] 쓰촨(四川, 사천)성 야안(雅安, 아안)시에 등장한 해당 나무 작품은 수공으로 2년 동안 조각해 완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속을 파낸 나무 중앙에는 고대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사막을 뚫고 이동하는 모습과 많은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중국 상인들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해당 작품은 9,999만 위안(한화 약 168억 원)으로 책정됐다. (번역: 은진호) ///출처: 중국신문사(中國新聞社)      조회:530 ]           미국 파리아 사암계곡ㅡ        
3    시작할 때 기하학적 립체도 수용할줄 알아야... 댓글:  조회:1900  추천:0  2017-10-31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21) : 피카소 Picasso, Pablo Ruizy (1881-1973)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21) : 피카소 Picasso, Pablo Ruizy (1881-1973)   마르지 않는 조형(造形)의 샘         아비뇽의 아가씨 1907년 캔버스 유채 245X235Cm 뉴욕 근대 미술관 소장   입체파에 들어선 피카소의 대표작이다. 흔히들 이 작품을 두고 20세기 회화 사상 가장 주목할 작품이라고 들 하는 것은 이 그림에는 기하학적 포름으로 환원된 인체와 반추상의 형태가 나타난 까닭이다. 최초의 습작에는 나부들 속에 두 사람의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그것은 창부의 집이었을까. 한 남자는 뱃사람이고, 다른 한 남자는 두게골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다. 두개골이 죽음의 상징인 까닭에 필경 피카소는 남녀의 영원한 육체의 연옥을 그리려고 했을 것이다. 차츰 남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여자들만이 남았다. 이 작품은 형태상의 문제도 있지만, 여성들의 근원적인 생명력의 강한 호소도 보인다.           인생   이 그림의 스케치에는 남자의 얼굴이 피카소 자신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완성된 에는 피카소의 얼굴이 없어지고 친구인 카사헤마스의 얼굴로 변했다. 카사헤마스는 바르셀로나 시대의 동료 화가이며, 1900 년 가을 피카소와 함께 파리의 땅을 최초로 밟은 사이인데, 실연한 나머지 자살 미수 소동을 벌인 장본인이다. 이 사건 때문에 피카소는 카사헤마스를 데리고 급히 파리를 떠나야만 했고, 피카소는 이 쓰라린 경험을 잊을 수 없어 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배경 위의 그림은 고갱풍이고, 아래쪽 웅크린 여인은 고호풍으로 그려졌다. 그의 청색 시대의 중요한 모티브인 부성애와 청춘의 격렬한 사랑의 표시를 표출시켜 '인생 축도'의 한 다면을 보인 또 하나의 걸작이다.         늙은 기타수   피카소의 이 시기가 그레코에 심취하던 때였다. 굶주리고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성자의 그늘이 있다. 왼쪽 어깨를 강조한 것은 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라, 피카소의 '청색 시대' 인체는 메마를 대로 메마르고 손가락도 뼈만이 앙상하다. 이 손으로 기타를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타는 노인의 신체의 일부처럼 달라붙어 있다. 노인은 장님이다. 그를 둘러싼 세계와는 이미 창문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이 밀폐된 상태의 사나이의 조형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다림질하는 여인   1901년 피카소가 파리를 떠나기 전 이 을 제작하여 사바르테스에게 헌정했다. 피카소는 이 시기에 있어서 화면 구성에 큰 변화가 있었다. 왼 쪽 어깨를 강조한 것이 마치 사원 실내의 건축적 구조와 같다. 이러한 이유로 이 그림은 '청색 시대'의 한 기념비 적인 작품으로 되었는데, 왼쪽 팔의 만곡이 작품의 깊이를 효과 있게 하고 있다. 여인은 매우 피곤 하다. 여인의 눈은 장님과도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인은 이상하리만큼 씩씩한 모습을 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피카소의 극과 극의 융합 능력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어부의 이별   노란색과 푸른색이 아름다운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청색 시대'의 경향인 이 작품은 짙은 모성애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파리의 술집 광경이나 스페인의 어느 바닷가 같은 곳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바르셀로나에서 제작되었다. 가난한 사람,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과 같은 테마를 그리던 시기에서 이 작품에서도 지나치리만큼 생략된 풍경이 쓸쓸하고 허전하여, 오히려 그것이 짙은 모성을 느끼게 한다. 피카소는 예술이란 고통과 슬픔에서 낳아지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별이란 인간의 숙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국풍의 오르가니스트   얼굴을 옆으로 하고 왼쪽 어깨가 강하게 불거져 있으며, 양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있는 이 늙은 손풍금 타는 사람에게서 젊은 피카소가 매혹당했던 카다르니야의 로마네스크 미술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 목조각 같은 노인과 아직은 어리디 어린 소년과의 대조를 준 것은 보는 이의 가슴에 무엇인가 여운을 준다. 손풍금을 중심으로 하여 노인과 소년을 삼각형으로 배치한 구도는 화면을 시원하고 안정되게 하고 있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오랜 세월에 퇴색한 것 같은 색조이면서 밝고 소박하다는 것이다.         카날 부인의 초상   얼굴의 부분들은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신체는 큼직 큼직하게 처리한 것은 피카소가 제작한 초상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이다. 이 작품에서는 섬세하고 날카로운 표정과 거의 반원형에 가까운 신체의 선과의 대조가 독특한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검정, 갈색, 황토색 등을 주조로 한 색조에서는 피카소에 흐르는 스페인 사람의 피를 보는 듯하다. 피카소의 뛰어 난 데상력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바이나, 특히 이 작품에서는 그의 타고난 천분이 번쩍이고 있다.         가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프랑스와즈 지로는 이 초상화가 티벳의 승려를 닮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분명히 표정에서 금욕적이며, 엄격함을 보여 주는 초상화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가 누구의 초상이라는 것보다는 그 당시의 피카소의 흑인 조각연구에 연유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1906년 봄, 피카소는 이 작품을 그리다가는 지워 버리고,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그녀를 닮겠지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비로 이 초상화의 모델은 아메리카의 여류 작가 스타인이었다. 구도나 표현의 박력에서는 피카소의 초상화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이나, 과연 스타인 자신이 만족했느냐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 없다.         푸른 옷의 여인   1901년 마드리드에 머문 피카소는 일련의 부인상을 연작했다. 그것들은 대체로 모자를 쓴 무용수 같은 여인들로서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다. 콤포지션도 대담 하지만 묘사력도 능란한 작품이다. 피카소의 부친이 피카소에게 인물을 묘사할 때는 특히 손을 정확히 그리라고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서도 왼쪽 손의 묘사가 뛰어난다. 피카소의 '청색 시대' 때 작품 가운데 대부분은 인물이 주제로 되어 있는 데, 그 많은 인물 작품들에서 보여 주는 것은 손의 멋진 묘사력이다. 90도 각도로 뻗은 팔과 양산을 잡은 왼손만 보아도 이 모델의 활달한 성격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아비뇽의 아가씨   에 직접적으로 힌트를 준 것은 이 벨리아 조각과 흑인 조각이라고 전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는 의 오른 쪽 여인의 얼굴 습작이며 다분히 흑인 조각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가면을 쓴 여인으로서 가면 뒤 쪽의 목 처리로 보아서 가면에 숨겨진 머리는 가면보다, 훨씬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피카소는 왜 의 오른쪽 두 여인의 코를 그렇게 과장해서 그렸으며, 또 삐뚤게 했을까. 피카소는 이렇게 말을 남기고 있다. '사람들이 내 그림의 삐뚤어진 코를 보고 그들의 코는 삐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근위기병과 나부     피카소의 최근작에는 이로우터메니아(erotomania)화한 작품이 많고 이것도 그중의 하나다. 나부의 얼굴이 이전과 같이 정면상과 프로필의 융합이면서도 아무래도 정면상으로 살아있지 않은 흠이 보인다. 이런 종류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피카소가 감상자를 향하여. "두 개의 유방 말입니까?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감상자에게 영합이라고 하는 것인지 색채도 품격을 다 잃어버리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피카소의 성적 절망으로까지 논하기도 하나, 아무튼 지난 날의 그토록 번쩍이던 피카소는 보이지 않고, 낙서같이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두 형제   '분홍색 시대'는 1905년에 시작되어 주조색은 오크로 루즈이다. 이 작품은 1906년에 제작되었으며 또다른 라는 작품과 쌍을 이루고 있다. 소년의 몸은 언뜻 보기에 해부학적인 정확성이 결여된 것같이도 보이나, 아직 성숙하지 않은 아이의 몸으로 사실성이 있고 따뜻한 색이 더욱 즐겁다. 피카소가 이 시기에 있어서는 처음 모델을 정확하게 묘사한 다음 점차적으로 자기화한 제작 방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도 초상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특징적인 소년을 표현하고 있다. 좋든 나쁘든 간에 피카소가 오늘날에 있어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된 그 뿌리는 '피카소화'라는 조형적 역량일 것이다.         앉은 나부   앉은 나부로 되어 있지만 의자의 형태도 분명치 않아, 실제로는 여인이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볼륨 표현이 극도로 억제되어 있는 까닭에 남자로도 보여진다. 이 작품은 전후에 제작된 일련의 나부상으로서 단순 명쾌한 화면이 특징이다. "회화는 나 보다 힘이 세다. 회화는 생각하는 대로 나를 질질 끌고 다닌다."라고 말했다. 피카소의 경우 회화란 별 수 없이 형태인데, 그 스스로가 만들어 낸 형태가 피카소를 끌고 다니는 것만 같다.         긴 머리의 아가씨   이 작품이 제작된 1906년은 피카소의 필생의 걸작 이 시작된 해이며, 또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벨리아 조각을 처음 만난 해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이때부터 '청색 시대' 때의 섬세한 감각을 떠나, 중량 감 있는 한 덩어리로서의 육체 표현을 했다. 청색 시대가 도회적 세련된 감각이라면, 프리미티브 (primitive)한 태양에 그을린 건강한 '흑인 조각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와 '흑인 조각 시대'는 같은 시기여서 이때 묘사된 여인의 육체는 조형적으로 씩씩하고, 그 힘참 속에 원시의 생명력이 숨어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은 지극히 조각적이라는 점이다. 평면 구성이라기보다는 입체 구성이며, 여기에서 큐비즘의 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배와 과일 그릇   아메리카의 여류 작가 가트루드 스타인은 스페인과 큐비즘의 내적인 관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페인의 건물은 언제나 풍경의 선을 단절시키고 있다. 인간의 영위 또한 여기에서는 풍경과 조화한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풍경과 적대 관계이다. 바로 이 점에 큐비즘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닌지." 큐비즘이 세 잔에서 출발한 것은 사실이나 스타인의 말도 일리는 있다. 이 작품에서도 세잔의 정물을 보다 의식적으로 입체화한 것이니까. 큐비즘, 그것은 형태가 화면을 지 배한다. 그것은 자립한 형태, 독자의 묘미이며 허구의 세계이다.           목기 위의 정물     피카소는 이 작품에서 정확한 '자연주의'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앵그르풍의 그림이나, 종합적 큐비즘의 작품들을 같이 제작하고 있어서, 이러한 자연주의 경향의 작품을 제작했다 해서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1920년대 초 '신고전주의 시대'의 풍만한 육체 묘사와 병행하여, 큐비즘을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기 위의 정물을 매우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그 배경에 있어서는 흐려 뜰이고 있다. 피카소의 인물화에 있어서 얼굴은 정밀하게 묘사하면서도 다른 부분에 대충 끝맺고 마는 것과도 같다. 피카소는 골고루 다 그리면 오히려 포인트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물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하여 배경을 단순한 분위기로 만들어 버린다.       안락의자의 올가의 초상   올가는 러시아 육군 대령의 딸로서 1912년에 디아기레프 발레단에 있었다. 피카소는 1917년 이탈리아 여행 중 올가를 만나서 이듬해인 1918년 7월에 결혼하였는 데 시인 쟝 콕도, 아폴리네르등을 초청하였다. 피카소가 올가를 맞이한 후부터 그 생활은 규칙적이 되었고, 의복도 단정하게 변하여 그의 벗들을 놀라게 했다. 피카소는 이러한 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와 자식간의 애정 어린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에서도 다분히 앵그르풍의 리얼리즘이 보인다. 이 밖에도 올가를 그린 작품들이 있으나 그표정들은 한결같이 우수에 잠겨있다.         마 졸리   우리들은 어떤 물체를 한눈에 모든 각도에서 볼 수는 없으나, 큐비즘 작품들은 어느 정도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형태들을 상호 침투하면서 공간을 전개하며, 정지하지 않고 조용히 호흡하는 것은 분석적 큐비즘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종합적 큐비즘 시대에 들어서면 화면은 또다시 조용해진다. 다시 평면적인 데로 복귀하는 것이다. 색채의 수도 많아지며, 물론 그 색채란 화려하지 않고 친숙하며 소박한 분위기로 감싸여 진다. 시인 폴 엘뤼아르는 큐비즘에 있어서 "색이란 공간에서 낳아진다기보다는 '색' 그 자체가 공간인 것이다."라고 했다. 분석적 큐비즘 다음에 제작된 비교적 차분한 작품이다.         앉아 있는 피에로   1917년 쟝 콕도의 무용극 '파라드'의 무대 장치와의 상을 맡아 피카소는 무대 위의 인물들에 크게 흥미를 지녔다. 이 발레의 무대 막은 비현실적인 강력한 색채로써 만들어졌다. 그와 같이 이 작품도 노랑, 빨강, 주홍과 같은 소리 높은 색채들이 피에로의 하얀 의상에 흩어져, 비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피카소 '청색 시대' 때도 피에로를 즐겨 그렸으나, 대상이 같다고 하더라고 그 결과는 판이한 것을 보여 준다. 청색 시대의 피에로가 현실이 모습이며 그래서 공감을 더했다면, 는 실인생과 무대의 상이한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피에로는 인형일 뿐이다.         소의 두개골   피카소는 1946년 12월 이렇게 말했다. '밤의 빛의 효과는 매우 매력적이다. 자연 광선보다는 더 좋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서도 밤에 한 번 찾아와 주기 바란다. 대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광선, 내 그림을 둘러싸고, 뒤 벽에 비치는 깊은 그늘, 이 빛을 당신은 내가 거의 밤에 제작하는 정물화에서 발견할 것이다. "전쟁 중에 피카소는 인간이나 두개골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도 그 중의 한 점이다. 또 4월 16일에는 피가 흐르는 두개골, 새하얗게 바랜 염소의 두개골을 흑백의 단순한 구성으로 제작하였다. 흑과 백, 낮에 대한 밤, 폭력에는 결코 굴할 수 없는 피카소의 저변이 있다.         앉은 아를캥   이 그림의 모델은 피카소의 벗인 화가 살바드이다. 피카소는 그를 아를캥으로 몇 점의 작품을 제작했으나, 한결같이 초상화로서의 성향이 짙고, 차분히 가라앉은 인물화였다. 아를캥은 원래 이탈리아 희극의 어릿광대 역이나, 여기에서는 웃기기는커녕 오히려 엄숙한 분위기마저 보인다. 피카소의 연구가들은 살바드의 정면상 아를캥과 독일 르네상스의 화가 한스 홀바인이 초상화 와 비교를 하고 있으나, 오히려 앵그르의 초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무튼 피카소의 신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꿈   "그림이란 당초부터 이미지 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정착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제작을 하다보면 점점 떠오르는 상념을 좇아서 완성했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앞이 나타나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림이 그것을 보는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1923년 피카소는 이 해에 졸고 있는 여인을 많이 제작했다. 피카소의 말대로 정면상과 프로필이 일체가 되어 감상 자의 기분에 따라서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은 그것들 시리즈 중의 걸작이다. 정면상과 프로필의 이중 상은 형체의 묘미와 동시에 현실과 꿈의 이면성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소나무 아래의 나부   1955년의 이나, 57년의 의 연작에서 어느 것이든 실내가 무대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피카소는 화면을 가득 채우는 나부를 풍경 속에 배치하고 있다. 나부의 육체의 선은 배경의 언덕의 선과 하나로 되어 있다. 소나무 가지는 화면 오른쪽 앞에 푸른 그늘을 떨어뜨리고 있다. 나무는 대지 그것인 양 엷은 갈색이며, 피카소의 저의는 '대지=어머니' 라는 것으로만 보인다. 피카소 이때 나이는 78세였다.         앉은 여인   1920년이래 이따금 피카소는 남 프랑스의 앙티브 지방들을 들르고 있었다. "나는 예언자라고 자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실 내가 여기에 와서 놀란 것은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이 일찍이 내가 파리에서 그리던 그 모든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곳의 풍경은 일찍이 내것이었다고 말해야겠다."라고 피카소는 말 했다. 피카소의 독특한 조각적인 형태를 말하여 지중해적인 인간의 특색이라고도 한다. 피카소가 그린 여인은 지중해의 여신이며, 푸른 배경, 거침없이 당당한 여성상, 피카소에 있어서는 그림이란 우상에 가깝다.         새를 잡아먹는 고양이   "나는 전쟁을 그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카메라처럼 한 가지 주제만을 좇는 화가가 아닌 까닭에, 그러나 내가 그린 그림 속에 전쟁이 존재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필경 후세 역사가들은 내 그림이 전쟁의 영향 아래서 변화한 것이라고 지적할 것이나, 이 또한 내 알 바가 아니다." 제 2 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피카소는 이와 같은 피카소다운 말을 남겼다. 피카소는 1930년 말, 브뤼겔이나 고야의 를 거쳐, 이어지는 유럽의 정신적 위기에 대한 경고라도 하듯이, 전쟁의 암시적 주제를 많이 택한 것이다. 피카소에 있어서 역사는 이러한 무수한 희생에 의하여 성립되는 시간의 경과일 뿐이다.       아침의 곡   오바드(aubade)란 말은 어떠한 사람에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집 앞에서 새벽에 연주하는 주악을 말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이 주는 인상은 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둡고 불길하다. 옆으로 누운 사람은 죽은 사람 같고, 만돌린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꼬박 밤을 새우고 외롭게 보인다. 1942년 피카소는 61세로서 이 해에 연작을 발표했다. 그것은 피카소 작품에서의 얼굴의 경우와 같이 이중 상으로서 구성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피카소의 일관된 조형의 수단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후일에 제작된 걸작 < 납골당>의 선구적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화가의 초상         화가와 모델         여인과 개         피아노         화가와 모델         화가와 모델   '화가와 모델'은 그리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이라는 관계에서 화가에게 있어서는 영원 주제의 하나에 틀림 없다고 피카소가 말했다. "나는 나부를 만들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사람이 단순하게 나부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리려고 한다." "화가에게는 끝이 없다. 오늘은 작업이 끝났으니, 내일은 휴일이라는 것이 화가에게는 없다. 가령 화가가 제작을 중지하면,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화가는 화면 속에 '끝'이라는 것을 써넣을 수가 없다." 방법은 한 가지, 즐기면서 제작하는 도리밖에 없다.         지중해의 풍경         손수건을 쥐고 우는 여인   '우는 여인'은 의 습작에서 시작된다. 피카소를 매료시킨 주제로서 완성 후에도 피카소는 여러 점 제작했다. 피카소는 여인들에게 많은 변화를 주어 작품을 만들었다. '잠자는 여인' '춤추는 여인' '독서하는 여인' '거울을 보는 여인' '포옹하는 여인' '울부짖는 여인' 등 그 변화는 더 많다. 배경의 검은 색 속에서 선명하게 얼굴과 손이 부상하고 있다. 눈물을 그린 것도 사실적인 것을 피하고 추상적이며, 기호적 눈물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을 매우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 아동화같이 소박하고 그리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납골당   이후 가장 주목할 작품이다. 1946년 2월 파리 근대 미술관에서 개최된 '예술과 혁명'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에서 전사한 스페인 무명 전사를 추도하는 전시회이다. 납골당의 내부는 회색과 보라, 푸른색의 3색으로 요약하여 이 정적한 톤은 의 경우와 같이 색채의 잔소리를 극도로 억제하고 정신적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묶여진 팔, 어린 아기의 목, 겹겹이 쌓인 시체더미 위에 지금 새벽이 찾아오고 있다. 그들의 죽음 위에 찾아드는 아침은 자유의 커다란 아침이다.         파이프를 문 사나이   피카소는 프랑스와즈 지로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유방은 시메트리가 아니다. 무엇이나 그러하다. 여성은 누구나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유방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현실적으로는 시메트리로 되어 있을지는 모르나, 회화에서는 똑같이 그려서는 안된다." 피카소에 의하면 두 개의 비슷한 것을 구별하는 하나의 팔, 하나의 유방이 나타내는 제스처이다. 그래서 피카소의 얼굴, 피카소의 인체는 남녀 구별 없이 온갖 제스처의 집적이다. 그러면 피카소가 그린 인간은 산산조각이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형태는 연쇄 반응과 같이 밸런스를 허물어뜨리고, 균형을 만드는 것으로, 이 작품의 경우에서는 눈, 코 와 파이프와의 관계이다.         실베트의 초상   실베트는 피카소가 리베라에서 알게 된 젊은 아가씨로서 그는 12점의 연작을 만들었다. 실베트는 금발의 북 유럽계 미인으로서 피카소는 그녀를 회색의 단조로운 색조로 처리하였으며, 이것이 연작의 최대 매력이기도 하다. 연작 속에는 실베트를 입체파 시대와 같은 기하학적인 포름으로 환원하여, 그녀의 얼굴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은 품격도 있고 사실적인 화면으로서, 피카소는 그 당시 유행하던 이 소녀의 머리형에 매혹 당한 듯하다. 피카소의 인물화로서는 새로운 양식이기도 하다. '포니 델'이라는 유행하던 머리형에 착안하는 등, 과연 피카소 다운 인기의 비밀이 있다.         궁녀들 (벨라스케즈에 의한)   벨라스케즈의 은 프라도 미술관의 보물이며, '회화의 신학'으로까지 평가된다. 1952년 계획하여, 실제로 착수한 것은 1957년이었다. 이 해에 피카소는 연작 44점을 제작하였다. 피카소는 "같은 주제에 의한 연작으로 최초의 두 점 중의 한 점, 최후의 두 점 중의 한점을 최고의 작품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1957년 8월 17일에 완성한 첫 번째 작품으로 검정, 흰색, 회색만으로 처리하였으며, 벨라스케즈의 원작과는 화면의 규격이나 내용에 있어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다.            
2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메달 출시되다... 댓글:  조회:1791  추천:0  2017-10-31
한국조폐공사가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메달'을 출시했다. 풍산화동양행은 한국조폐공사가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메달'을 출시했다고 30일 밝혔다. 이번 기념메달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및 한글 창작 혐의로 체포됐던 윤동주 시인을 기리고 그의 작품을 재 조명하고자 기홱됐다.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와 '시집디자인' 그리고 '필명 서명' 등의 원본을 그대로 담아냈고 시집의 초판본 형태의 케이스를 적용했다. 특히 윤동주 시인의 젊은 시절 졸업사진과 후쿠오카 감옥의 옥중 윤동주의 상상 초상을 대비시켜 치열했던 그의 삶을 표현했다. 기념메달은 △금메달(31.1g) △대형은메달(120g ) △은메달(31.1g )3종류로 구성됐다. 금메달의 앞면에는 연희전문학교 졸업 때의 초상과 필명 서명 '東柱'의 육필체,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본 디자인과 함께 명문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 1917-2017'이 새겨졌다. 뒷면에는 서거 10주년 증보판 시집의 디자인과 탄생년인 '1917' 및 100주년인 '2017'이 명문으로 들어갔다. 대형 은메달은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인 '서시'와 ‘별 헤는 밤’의 육필원고와 필명서명 '東柱'가 새겨졌다. 또 윤동주의 대비된 초상과 시집 초판본의 디자인을 담았으며 터치가 가능한 앤틱피니쉬 기법으로 완성됐다. 대형 은메달의 케이스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초판본 크기 및 형태, 디자인을 차용해 메달의 육필원고 부분 일부가 노출되는 디자인으로 고안되었다. 은메달은 옥중의 상상 초상과 졸업사진 초상을 대비 시킨 초상 중 졸업사진 부분을 금도금해 젊은 날의 윤동주를 표현했다. ///송주용 기자
1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가문은?... 댓글:  조회:4588  추천:0  2017-10-31
                    노벨상 수상자 배출한                인도 교육명문 - 타고르 가문 엄청난 재력을 소유한 타고르의 할아버지는 캘커타에 교육 시설을 세웠고 종교 개혁가이자 사업가였던 타고르의 아버지는 문화예술의 후원자였다. 캘커타의 르네상스를 연 가문에서 태어난 타고르는 어린 시절 학교교육에 적응하지 못해 졸업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아버지와의 히말라야 여행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키울 수 있었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가문은 어떤 자녀교육을 했을까?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여느 날 아침보다 한 시간이 더 지나도 하인이 오지 않았다. 타고르는 시간이 갈수로 점점 화가 났다. 그는 하인에게 줄 여러 가지 벌을 생각했다. 세 시간이 지나자 타고르는 벌에 대해서는 그 이상 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여러 말 않고 해고시켜서 내쫓기로 마음먹었다. 한낮이 되자 마침내 하인이 나타났다. 하인은 말 한마디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을 했다. 타고르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다 그만 두고 나가!” 하인은 그제야 뒤돌아서서 마지막 인사를 올린 후 “정말 죄송합니다. 어젯밤 제 딸년이 죽었습니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캘커타의 르네상스 연 타고르가 타고르는 하인의 말을 듣고 경솔했던 자신을 크게 책망했다. 부끄러워 하인을 볼 수 없었다. 이 충격적인 일이 있은 후 타고르는 어떠한 경우라도 상대방의 사정을 알아보지 않고는 남을 탓하거나 독단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동양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도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가 하인에게 화를 낸 이 일화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하는 에피소드이다. 타고르 가문은 우리나라 경주 최부잣집이나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같이 엄청난 재력을 가진 양반계급의 부자였다. 타고르가는 인도의 명문가였지만 종교적 요인으로 브라만 계급에서 추방당했다가 타고르의 할아버지가 캘커타의 대부호가 되면서 가문의 명예를 되찾았다. 타고르의 할아버지 드와르카나드는 자선 활동뿐만 아니라 캘커타 국립도서관과 캘커타주립대학을 세웠으며 캘커타 최초의 병원과 의과대학 설립에도 큰 기여를 했다. 현재 이 대학은 인도 의학교육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바로 시인 타고르의 아버지인 데벤드라나드 타고르이다. 데벤드라나드는 종교 개혁가이자 사상가였다. 그는 사업수완을 이어받아 사업가로서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후원자 역할도 물려받았다. 그의 대저택에는 늘 시인과 학자, 종교개혁가, 철학자, 무용가 등 예술인, 화가와 천재들이 몰려들었다. 음악가들이 초대되어 연주회도 끊이지 않았다. 즉, 타고르의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도 캘커타의 르네상스를 연 후원자 역할을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업수완과 문화예술에 대한 후원 등을 배우고 자란 타고르는 정치가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가, 문학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존경받는 부자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주 최부잣집은 12대 300여 년 동안 재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을 도왔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15세기에서 18세기 초반까지 300여 년 동안 피렌체를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예술인들을 지원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열었던 것이다. 타고르가는 바로 인도의 메디치가라고 할 수 있다. ‘왕따’가 근대교육의 기틀 만들어 타고르가를 보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명문가들처럼 3대에 걸친 노력과 헌신으로 명문가로 발돋움 했고 그 중심에는 사회에 대한 기여와 함께 남다른 자녀교육의 열정이 있었다. 어린 시절 타고르는 학교에 대해서 좋지 않은 기억을 갖게 되었다. 타고르는 7살이 되기도 전에 당시 명문가들이 그렇듯이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를 했다. 학교에 입학한 타고르는 얼마 안 돼 선생님에게 그만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선생님은 늘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적이었고, 학생들을 편애하거나 불공평하게 대했다. 타고르는 유년시절 학교교육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14살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타고르는 17살에 영국에 유학을 갔지만 거기서도 적응을 하지 못했다. 타고르는 단 한 개의 졸업장도 따지 못했다.  이는 타고르가 평생 교육문제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타고르의 학교에 대한 좋지 않은 추억이 오히려 인도 국민들에게는 약이 되어 인도 근대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초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왕따’를 당했던 타고르를 동양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로 만든 것은 아버지의 지혜 덕분이었다. 먼저 타고르를 키운 것은 학교가 아니라 집이었다. 학교교육을 그만 둔 타고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당시 캘커타의 문화예술인들을 초청해 거의 매일 산스크리트어 경전과 철학, 과학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한쪽에서는 인도의 전통 음악이 연주되었다. 타고르가의 응접실은 어린 타고르에게 ‘살아있는 학교’ 그 자체였다. 또한 타고르는 집에서 독서를 통해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과 사상을 흡수했다. 집은 타고르에게 더할 나위 없는 산교육의 장소였다. 음악가이자 사상가, 수학가인 형들(타고르는 14남매 중 막내)의 도움도 컸다.  타고르 아버지의 이러한 자녀교육으로 형제들은 대부분 자신만의 재능을 폈다. 형제들은 각자 화가와 시인 또는 음악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타고르의 큰형은 시인이자 음악가, 철학자, 수학자이면서 사상가로 타고르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둘째 형은 인도 고등문관(고시)을 통과한 최초의 주인공으로 산스크리트 학자였다. 다섯째 형은 음악가이자 시인, 극작가, 화가로 이름을 날렸고 다섯째 누나는 음악가이자 작가로서 벵골 최초의 여류 소설가였다.  우연인지 몰라도 막내 가운데 위대한 인물들이 많다. 우리나라는 퇴계 이황은 8남매 중 막내였고, 톨스토이는 4남 1녀 가운데 4남으로 태어났다. 공자는 이복형제가 10남매 있었고 아들을 원한 아버지가 세 번째 부인을 맞이해 낳았다. 공자 역시 막내인 셈이다. 세계적인 가족기업인 발렌베리 그룹을 일군 안드레 발렌베리도 막내였다. 300년 가까이 음악명문가를 이룬 바하는 8남매의 막내다. 이는 막내의 경우 성장기를 통해 형들로부터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집안의 분위기에서 자란 타고르는 동양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한 시집 〈키탄잘리〉를 비롯해 소설, 단편, 희곡, 평론, 전기, 철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책을 냈다. 또 뮤지컬을 비롯해 2000여 곡의 음악뿐만 아니라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국가도 작곡했다. 그림에 대한 열정도 남달라 수채화 3000여 점을 남겼다. 성공의 원동력 된 히말라야 여행 어린 시절 어린 타고르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사건은 아버지와 떠난 4개월 동안의 히말라야 여행이었다. 타고르는 11살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타고르 부자가 처음 도착한 곳은 샨티니케탄으로 후일에 타고르의 대안학교가 세워져 세계적으로 알려진 바로 그곳이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먼저 아들에게 대자연의 한가운데서 우주의 신비와 무한한 상상력을 맛보게 했다. 아버지는 이미 샨티니케탄에 땅을 사둔 상태였다. 타고르가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캘커타에서 약 100마일 정도 떨어진 샨티니케탄의 친구집을 가다 광대한 평원을 접했다. 그는 그만 그 광경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는 결국 그 땅을 친구로부터 사들였다. 요즘처럼 단순히 땅 투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 집을 짓고 ‘평화의 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미래에 타고르 가문이 학교를 세운 교육도시 샨티니케탄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첫 여행지로 타고르를 데리고 샨티니케탄에 들른 것은 아들을 위해 미리 계산된 여정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아버지는 그 여행지에서 타고르에게 산스크리트어나 영어로 된 문학작품을 가지고 가서 읽게 했다. 그리고 밤하늘에 찬란한 별들이 빛나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우주의 신비로움 등 천문학을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여행지에서 타고르에게 특별한 체험을 하게 했다.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상인집안의 후예답게 돈에 대한 책임감을 길러주기 위해 여행경비를 관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돈지갑을 맡기고 매일 지출을 적게 하면서 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경제교육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상업으로 거부가 된 가문답게 어릴 때부터 돈 관리 교육을 철저하게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실전경험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타고르 부자는 히말라야로 가는 도중에 시크교도의 성지에도 오래 머물렀다. 인도는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의 발상지이다. 또 힌두교와 이슬람의 신비사상을 접목한 시크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다양한 종교로 인해 종교 간 갈등이 심한 인도에서는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와 존중심이 중요하다. 다른 신을 존중하는 것은 갈등을 해결하는 중요한 길이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가였던 타고르의 부친은 아들에게 시크교의 황금사원을 참배하고 때로는 신도들의 모임에 참석해 찬송가를 불렀다. 이는 후일 타고르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아이에게 종교에 대한 포용성을 갖게 해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게 하는 기본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 중에도 계속된 자녀교육 집을 떠나 한 달간 여행을 한 타고르 부자는 4월 초봄에 히말라야에 도착해 3개월을 보냈다. 해발 2000m 고지의 산장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곳은 온통 히말라야 삼나무로 울창했고, 소년에게는 처음 보는 꽃들로 가득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곳에는 흰 눈에 덮인 히말라야 봉우리의 신비스런 모습이 눈앞에 다가왔다. 11살 소년은 대자연의 신비로움에 매료돼 절로 경탄의 감정이 일렁거렸다. 소년 타고르는 히말라야의 아름다움과 웅대함에 빠졌고, 대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여행의 목적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소년은 대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호흡하게 하면서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 공부하게 했다. 대자연속에서 뛰놀게 하면서도 교만이나 나태함, 게으름을 피우지 않게 자녀교육에 나선 것이다.  타고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정신을 차린 후에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공부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기원전 1000년 전에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우파니샤드〉를 읽었다. 아버지가 낭송하면 소년은 이를 들으면서 음률을 듣게 했다. 이어 태양이 떠오를 때쯤 아버지와 아들은 히말라야의 정기를 호흡하면서 아침 산책에 나섰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시 영어를 가르치고 히말라야의 눈을 녹인 찬물에 목욕을 하게 했다. 오후에도 수업을 진행하며 마냥 놀게 하지 않았다. 히말라야의 대자연으로 여행을 가서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교육방침대로 아들을 교육했던 것이다.  요즘 자녀들과 함께 세계일주 여행에 나서는 일부 부모들의 경우 여행 그 자체만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년이나 6개월 혹은 한 달 등 기간을 잡아 해외여행을 하더라도 타고르의 아버지와 같이 대자연속에서 모험을 체험하게 하면서도 정해진 계획이나 원칙에 따라 공부하는 여행을 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여행이나 모험의 경험만 강조하다보면 단순한 여행으로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무리한 일정으로 심신이 지쳐 제대로 여행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아버지와 함께 한 대자연속에서 머문 4개월 동안의 모험여행은 소년 타고르에게는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다. 특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타고르에게 아버지는 최고의 스승이 되어주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학교에서 배워야 했던 모든 것들을 짧은 4개월간의 여행기간에 배울 수 있었다. 캘커타에 돌아온 소년 타고르는 더 이상 4개월 전의 철없는 소년이 아니었다.  요즘도 도보로 전국 산하를 누비면서 극기여행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방학에는 초등학생 대상의 도보체험도 있다. 이러한 여행을 다녀오면 아이들이 훌쩍 자란 것을 볼 수 있다. 인내심과 책임감이 강해질 뿐만 아니라 단체 활동에서 오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심도 높일 수 있다. 아이들은 여행을 하면서 온몸으로 체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 단계 성숙한 아이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한 타고르의 여행은 훗날 그를 시인이자 사상가, 교육가로 만들게 한 원동력이 됐다.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신뢰, 대자연에서 호흡한 경이로움, 아버지로부터 흡수한 지식에의 열정, 종교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 대한 배려 등은 모두 이 여행에서 비롯되었다고 타고르는 훗날 회상했다.  100년 전 대안교육 시작한 교육가 타고르의 아버지는 여행지에서 타고르로 하여금 자유롭게 자연과 호흡하게 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히말라야 산장에서조차 영어수업을 직접 할 정도로 자녀교육에 원칙과 목적을 가지고 실천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녀교육으로 타고르 가문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타고르라는 큰 인물을 배출했다. 그리고 타고르는 인도에 근대교육을 뿌리내리게 하면서 시인뿐만 아니라 교육가로도 큰 명성을 얻게 됐다. 현재 캘커타의 중심부에 있는 타고르의 저택은 대학교로 변모했다. 또 샨티니케탄은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대안교육도시로 각광받고 있다.  타고르는 샨티니케탄에 우리나라의 ‘간디학교’와 같은 대안학교를 이미 100여 년 전에 세워 자연 속에서 교육을 시작했다. 그는 1901년 그곳에 학교를 세우고 그의 다섯 자녀를 비롯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21년에 비슈바바라티대학교로 확대되어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연구하는 대학으로 발전했다. 특히 이곳에서 두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타고르가 191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데 이어 빈곤 문제로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1998년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또 세계적인 영화감독, 예술가들이 이곳 출신들이다.  오늘날 교육이 단순히 획일적인 인간보다 창의적인 인간을 원한다고 볼 때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배우며 상상력을 키우는 샨티니케탄은 그 어느 곳보다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아이들은 규제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 더 궁합이 맞다. 억압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상상력을 자극하는 분위기에서 더 성숙하는 것이다.  자녀교육은 성적이 아니라 ‘원칙’이 중요하다. 아이에게 상상력을 키워주면서 지식을 풍부하게 해야 한다. 원칙만 있다면 아이가 입시나 성적 지옥에서 벗어나 독서와 다양한 산 체험을 통해 재능을 키울 수 있다. 아이들의 성적이 뒤처져 고민에 빠져있는 부모라면 한번쯤 노벨상 수상자를 두 명이나 배출한 타고르의 샨티니케탄을 떠올려보자. 그곳에 해법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끝으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르 드블레는 어머니와 자녀 간의 친밀한 관계를 ‘신비적인 관계’라고 표현했다. 아버지와 아이의 관계가 서먹서먹하다면 타고르처럼 아빠와 자녀만의 여행이나 등산을 떠나보자. 부자유친과 함께 아이에 대한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최효찬 자녀교육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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