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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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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나들이]15. 서해 대교
2013년 06월 05일 08시 28분  조회:1976  추천:1  작성자: 김재진
15.  서해  대교
 
 
한시간 푼히 달리던 차는 드디여 멈춰섰다.
“사모님, 수고하셨어요!”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인사치례를 하였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인사를 받았다. “그냥 하는 일인데요 뭐.”
아름다운 집 한채가 눈앞에 확 안겨왔다. 집뒤로 멀리에는 평택시인지 뭔지 층집들이 어렴풋이 보이고 그 집 한채뿐 보이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 보이고 돋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거니와 확실히 아름답게 꾸민 장원다운 집이였다. 작은 아스팔트 길은 전문 그집으로만 다니기 위해 낸 것인것 같았다. 정차장으로 넓혀놓은 마당에 차가 들어서기 바쁘게 매력이 넘치는 30대 중반의 한 녀성이 달려나와 차문을 열어주며 허리를 굽힌다.
“어서 오세요, 박사장님!”
“잘들 지내시쥬? 이사장.”
“덕분에요!”하며 리사장은 박사장과 악수를 나눈 후 나에게도 웃는 얼굴로 “어서 오세요!” 하며 허리를 굽힌다. 충남과 경기도가 맞붙은 서해안 지역에서 박 종필사장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간첩일 것이다. 이는 내 생각이고 다른 한가지는 앞으로 남의 차에 앉을 때 운전기사 뒷좌석엔 앉지 말아야 함을 느꼈다. 차가 멈추니 영접자가 제일 먼저 열어주는 것이 운전석 뒷문이였다. 만약 내가 박 종필씨가 앉았던 그자리에 앉았더면 얼마나 난처하였겠는가 말이다.
“李朝农园”이라 누른 원목 커다란 나무판에 검은색으로 깊숙히 새겨넣고 반들반들 기름칠을 한 간판이 입구 위에 걸려있었다. 집안 장식 또한 아담하고 아늑하면서도 포근하고 정겨웠다. 우리는 삼면이 유리벽인 작은 방에 들어가 통나무 한토막을 반으로 쪼개여 번져놓은 듯한 상을 사이하고 마주 앉았다. 밑반찬 여섯 접시가 오른 뒤를따라 차거운 차돌 위에 편 생 홍어편과 뜨거운 철판위에 편 구운 소고기편이 올랐다. 생선회나 소고기 구이는 한국치고 꽤나 값이 가는 안주이다.
박사장은 나보다 주량이 컸고 사모님은 운전을 해야하므로 쥬스만 받아놓고 있었다. 셋이서 소주 한병을 금방 다 마셨을 때 고사장이 당도 했다. “어서 오세요!”하며 일어서려는데 나의 어깨를 꾹 누르며 오른켠에 앉았다. 내가 먼저 새 병을 따서 고사장 잔에 술을 따랐다. 그녀도 우리들 잔이 비여 있는 것을 보더니 술을 붓고 잔을 들었다.“불러줘 감사해요! 자, 다 함께 듭시다.”하며 잔을 비웠다.
“친구가 출국하는데 짐이 많아 실어다 달라기에 공항 갔었어요.” 고사장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박사장님의 지시를 받자 초고속으로 달려 왔거든요, 몰카에 찍히지 않았는가 모르겠어요, 마침 길이 열려 거침 없었어요. 참, 오늘 술이 댕기네요, 한잔 더 줄래요?”하며 술잔을 나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내가 “왜 한잔뿐이겠어유?” 하는데 나의 왼켠에 앉은 안해가 술병을 앗아갔다. “나도 한잔 권합시다. 많이 돌봐 주세요.”하며 안해는 먼저 고사장의 잔에 붓고 그다음 박사장의 잔과 나의 잔에 부었다. 고사장 오기전에 박사장하고는 인사술을 나눴기에 제일 년하지만 고사장한테 술잔이 먼저 가게되는 것이였다. 권커니 작커니 술이 거나하게 되였다. 나의 안해와 사모님은 서로 자기가 술값을 치르려고 생갱이질 하다가 결국은 사모님의 승리로 끝났다.
우리는 모두 사모님이 운전하는 차에 않았다. 안해는 나의 왼켠에 점잔하게 떨어져 앉았는데 고사장은 오른켠에 딱 붙어 앉았다. 얼굴이 뜨거워났지만 그렇다고 밀리여 안해쪽으로 엉덩이를 옮겨놓을 수도 없는 일이였다. “급히 마셨더니만 취하네요”하며 나의 팔을 껴안고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그의 부드러운 가슴이 엷은 옷을 사이두고 나의 큰 팔에 대여 전률을 느끼게 한다. 남들 보기가 좀 민망스러웠지만 결코 그녀를 물리칠 수는 없었다. 나는 몸을 뒤로한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무것도 모를는척 하는 것이 나로선 최선의 방토였다. 겉으로는 모르고 자는척 했지만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곁사람보기가 부끄럽거나 무서워서가 아니임을 누구나 다 알것이다. 두 남녀가 술에 취한척 눈을 감고 붙어 앉아 황홀한 상상을 피르고 있음을 누가 모를라고? 눈이래도 감아야지 부끄러워 어쩔바를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귀 막고 방울 훔치기”나 “눈감고 따웅하기”와 같은 짓이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간 그렇게 앉었고 환상의 나래를 펼치고 싶었는데 차는 인츰 서해 대교위로 달리고 있었다.
다리의 넓이는 30여메터, 길이는 7300여메터, 다리 북쪽은 경기도 평택이고 건너가면 충청 남도라고, 어느 때 착공하고 어느 때 준공했는데 서해 고속도로 남북을 이어놓은 중요한 다리라고 이것 저것 박사장은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는 다리 남쪽머리에서 사진 몇장을 찍고 다시 북쪽으로 건너와 다리목 아래로 내려갔다. 거기가 훌륭히 꾸며놓은 놀이터이고 유람지였다.
대교를 아래에서 사선으로 쳐다보니 참말 멋지였다. 장강대교나 황포대교같은 큰 다리들을 차타고 지났을 뿐 이같이 가까이에서 전문 관상한 일은 없었다.
옛날 우리 “남도마을” 조무래기들은 고동하에 놓인 이도로부터 팔가자로 통하는 “이팔교” 다리 밑에서 낚시질도 하고 미역도 감으며 많이 놀았었다. 그때엔 그다리가 세상에서 제일 큰 줄로 알았었는데 서해대교처럼 크고 아름다운 다리가 있다니! 이다리를 건너 얼마 안가면 내가 땀 흘리던 서해안 고속도로 웅천 구간에는 묻어 둔 추억이 있다. 언제 다시 가서 그 추억을 파 볼 수나 있을런지…
“빨리 와요!”하는 안해의 부름소리에 잡생각에서 깨여나 머리를 돌려보니 많은 사람들이 찌그러진 철근 바자틈 사이를 지나 바다가의 새하얀 모래톱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내가 철근 바자 앞에 다가섰을 때 놀이터 일군이 틈새 출입을 차단하고 넘어진 철근 울타리를 바로 세워 철사로 동이였다. 해수욕장과 같은 울타리 안은 수금 놀이터이고 해가 넘어가야만 개방하는 밤 놀이터라는 그것이다. 헌데 누군가가 일군들이 보지 않는 사이 허술한 거리망을 무너뜨리고 길을 개척해 놓은 것이였고 나의 안해도 약빠르게 건너가 마치도 장하게 “3.8선”이나 뛰여 넘은 듯이 “빨리”를 웨치고 손을 저으며 야단이다. 나혼자 “이북”에 남았으면 어쩌랴싶어 발돋움하며 흰 모래밭 멀리만을 바라보며 안해외의 그누굴 찾으려 애썼다. 멀리라고해도 백메터 안팍, 그다음은 작은 산굽이가 시야를 막아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그들은 벌써 산굽이 뒤에 숨겨진 것이 아닌가… 이때 누군가가 나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아저씨, 뭘 그렇게 봐요?” 고사장이였다. 반가웠다. 와락 끌어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멀잖은 곳에서 안해가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깐.
“속 상해 말아요, 곧 통일 되고 이산가족 상봉 할 날이 올거니깐요!”
“나는 고사장님네 어데 있나 찾고 있었습니다.”
내 말이 사실임을 그녀는 알면서도 짐짓 딴전을 부렸다.
“거짓말, 아줌마 잃어버릴까봐서…”
“다 큰 사람 뭐 잃어질라구요? 고사장님 잃어버릴까봐 찾았는데요 뭐.”
“나는 아긴가요? 잃어지게.”
“글쎄요… 근데 박사장님네는 어델 갔습니까?”
“취했다고 저쪽에 앉아 쉬고계셔요.”
해지기 전엔 들어 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터라 안해는 하는 수 없이 홀로 모래펄을 거닐어야 했다. 안해의 뒤 모습이 산굽이 뒤로 사라지자 나는 천천히 그러나 힘 있게 고사장의 작은 어깨를 한팔로 껴안으며 “박사장네 계신데로 갑시다.”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박사장네 보는데요.”하며 몸을 돌려 나의 품에서 어깨를 빼버렸다. 차에 앉아선 취한척 나의 팔에 매달려 있더니만 금시에 술을 깼다는 것인지 부끄러움을 탔다. 나는 돌아서서 천천히 그녀를 따랐다.
박사장네 부부는 멀지않은 곳 기념탑 층계에 나란히 앉아 “쌕쌕이”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한통씩 넘겨주었다. “사진 찍어요!”하며 사모님은 음료수 통을 내려놓고 층계 앞으로 몇발자국 나가 돌아서며 사진기를 내들었다. 박사장이 앉은 뒤층계에 내가 고사장의 어깨를 끼고 앉았다. “까치ㅡ하고 불러요! 자, 하나, 둘, 셋! 까치ㅡ” 사모님은 혼자 “까치”를 부르며 샤타를 눌렀다. 나는 속으로 까치를 부르며 웃노라 신경을 썼는데 훗날 사진을 받아 볼라니 운건지 웃은건지 분간이 안된다. 술 취해갖고는 사진 잘 되는 법이 없다.
우리는 몸을 휘청거리며 음식점에도 들어가 보고 큰 슈퍼에도 들어가 보았다. 먹을것도 살것도 없지만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박사장네나 고사장은 서해대교에 한 두번만 와 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를 접대하노라 시간을 팔며 놀아주는 것이 더없이 고마웠다. 
석양에 붉게 물든 바닷물, 작은 산봉과 건물들, 그리고 웅위한 대교, 그야말로 가관이였다. 산뒤로 숨는 해와는 달리 바닷물 속에 가라앉는 해는 재빨리 대지에 먹물을 뿌려놓았다. 전등이 켜졌다. 건물의 변두리 마다에, 대교의 선과 각마다에, 산봉의 바위와 소나무 가지에, 바닷가의 유보도에도 고속도로 량켠과 중심선에도 채색 네온등이 줄을 섰다. 그러고도 설차지 않았던지 건조물과 산봉에는 여러면으로 조명을 비추었고 하늘 밑에 닿은 분수는 불기둥이 솟는듯 옥기둥이 몸부림 치다가 와그르르 무너지는듯 황홀하다. 자연이 던져주는 찬연한 해빛 아래에서나 불타는 저녘 노을 속에서도, 조물주인 인간이 창조한 등불에 잠겨서도 서해대교는 아름다웠다! 비바람 속의 그 모습과 하늘을 가르는 번개빛 속의 그 모습, 그리고 흰 눈으로 덮씌인 그 모습과 눈보라 속의 그 모습은 또한 어떠할까?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나는 완전히 상상 할 수가 있었다. 오늘 본 서해대교의 아름다운 정경을 녀성다운 차분함과 매력이라고 한다면 상상속의 그 모습들은 사나이 같은 기백이고 웅위로움이고 영준함이리라!
대교의 야경까지 구경 한 후 우리는 사모님이 모는 차에 다시 앉아 그리 멀지 않는 원 바닷가로 갔다. 바닷물 위에 감도는 비린내가 시원한 서쪽 바람에 실려 한가슴 안겨온다.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 해진다. 바닷물 속에 몸을 던져 열기를 빼고 피로를 풀고픈 마음이다.
바닷가 둔덕 위엔 해물 먹거리 포장마차가 줄 지어 섰다. 우리는 다짜고짜 첫집으로 들어갔다. 조개구이 전문점이였다. 목탄불 화로에 적쇠를 올려놓고 산조개를 굴리며 구웠다. 조개란 맛 좋은 해산물임을 나는 썩 잘 안다. 가스 구이로 생산을 했었으니 적쇠구이 또한 내항이다.
우리 형제는 1989년부터 4년간 대련 바닷가에 공장을 세우고 조개만 가공 하였었다. 우리 자체로 연구 개발한 식품으로서 전국에 소문이 났다. 국내의 일곱개 큰 매체에서 소비자들의 투표를 받아 평의한 결과 금상을 따냈다. 우리는 그런 평의 활동이 있는줄도 몰랐는데 증서와 상컵이 날아왔다. 두해 후, 일본에서 현대적인 설비를 만들어 중국에 팔았다. 우리가 장춘 의료 설비 공장에가 만든 토박이 기계는 인민페로 이천원밖에 들지 않았는데 한대에 인민페로 20만원이나 하는 일본기계를 그당시 돈내고 사기는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이 없었다. 하기에 물물무역 형식으로 일본기계와 갓 잡은 산조개를 교환 하는 것이였다. 가공용 기계를 들여오고 가공해야 할 원자재를 내보내니 그 기계는 어데다 쓴단 말인가? 일년 사이에 전국적으로는 잘 모르겠으나 대련지구에만 그런 기계가 일곱대나 들어왔다. 일년 사이에 백 사십만원어치의 산조개가 일본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 조개 또한 아무 조개나 다 되는 것이 아니였다. 품종이나 크기는 딱 우리가 개발한 그 표준이였다. 맛과 영양가치가 으뜸인 “화합(花蛤)”이라 부르는 그품종 조개는 그지역에 제일 많았고 제일 쌌었는데 제일 비싸졌고 인츰 멸종 되여버렸다. 물론 일본에서 들여온 기계들도 인츰 페철로 되여버렸다. 실제상 그런 기계가 전국적으로 두석대만 있으면 족한 것이였다.
토박이 기계로 당금 멸종 돼가는 “화합”만 바라고 있다간 망하는 길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감촉한 우리형제는 새로운 개발을 구상하였다. 바닷가에 공장과 연변대학 교수 휴양소를 짓기위해 산지를 사기로 유관 부문들과 협의 하고 건물설계도 초본을 그린 후 대련에 있는 “중국설계원 동북분원” 전문가들을 찾아가고 불러오고 현장에 함께가 답사도 하였다.
바다를 향한 산비탈의 땅 한평방메터에 10원씩, 만 오천평방메터를 사기로 했으니 십오만원이 수요된다. 이돈을 마련 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우둔하게도 당시 현대그룹 총재인 정 주영 회장님 앞으로 서한을 보냈다. 우리의 구상을 알려드리고 도움을 청구했다. 가망이 없는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물에 빠진놈이 지프라기라도 잡는다는 격으로 천만분의 일의 요행이라도 바라며 글을 썼다. 일생 성공 할만한 기회는 누구나 세번밖에 없는 법이라고, 그것을 잡아야 한다고 누가 연구 했는지 말 한다. 우리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우리가 사려던 땅은 이듬해에 대련시 경제 개발구에 귀납되여 값이 20여배로 뛰여 올랐다.
대련에서 실패하고 우리는 연길로 돌아와 인츰 액화가스용 불고기 구이로 생산 회사를 세웠다. 우리가 자체로 연구 설계하고 국가 특허권을 받은 환보식 구이로였다. 그것 역시 두해도 못 가 모조품이 나오고 우리의 발전을 제압 하였다. 우리가 만든 구이로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 연기에 그을린 고기에는 연기에 그을리지 않은 고기보담 암 유발 물질인 “carcinogen”이 36배나 더 많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으름 냄새에 먹는거라고 곰같은 소리를 한다. 
밤 열시, “이조농원”에 다시 왔을 때 대리기사 두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사장을 집에까지 바래고 센터에 이르니 밤 열두시가 지났다.
달포가 지났을 때 나는 또 박사장네 집으로 봉침술(蜂针术) 배우러 가게 되였다. 봉침술이란 벌을 핀센트로 집어 돼지의 혈위나 환위에 가져다 대면 벌은 궁둥이의 침을 돼지의 피부에 박고 독을 쏜 후 죽어버린다. 이 방법으로 돼지의 많은 질환을 치료 할 수 있는 것이였다.
종돈은 체중이 큰데다가 물청소로 인해 습해진 콩크리트 바닥에 하루종일 엎드려 있다보니 관절염에 걸리는 페단이 많았는데 관절염에 걸리면 바로 서기도 바쁘므로 페돈으로 되고 마는 것이였다. 이런 돼지가 종종 생겨나 천안에 있는 통졸임 공장이나 소시지 공장에서 기중기와 트럭을 몰고 와 실어가군 하였다. 한창 정액을 많이 생산 할 돼지인데 서지를 못하니 아까운대로 버려야하는 것이다. 며칠 련속 끗어내고 하루에 두마리씩 끗어낼 때 고사장은 급해났다. 리부장 동국이 영식이등 몇이 급사한 돼지를 고사장 몰래 웅덩이를 파고 묻어버린 일도 있었다. 고사장이 알게되면 그애들이 괜히 욕을 먹어야하니깐 그러는 것이였다.
고사장은 천안에서 유명하다는 보살,풍수쟁이, 점쟁이들을 데려 오군 하였다. 센터 네귀퉁이에 향불을 피우고 둬뼘되는 쇠꼬챙이를 땅에 박아놓고 가버리는 이가 있는가하면 수맥을 끊는다며 방 귀퉁이 장판 밑마다에 붉은 차돌같은 것을 깔아놓고 가버리는 이도 있었고 밤 열두시에 센터 주위에 막걸리를 뿌려 굶주린 귀신을 막으라 하고 가는 점쟁이도 있었다. 밤중에 막걸리를 뿌려 굶주린 귀신을 고시는 일은 매번 나에게 맡겨졌는데 고양이한테 생선 맡기는격, 애들이 다섯병 사오면 내가 몰래 한병 마셔버리고 남은 네병만 뿌려주군 하였다. 다섯 귀신한테 네병만 주어서 그런지 잡혀갈 놈은 여전히 잡혀가고 효험이 없었다.
고씨는 미신도 믿어보고 과학도 믿어보는 그런 사람이였다. 관절염에 봉침이 최고라는 조언을 얻어듣고 참고서적을 얻어다 나한테 주더니 인츰 꿀벌을 한통 사다놓고 얼굴을 가리우는 망사모자와 고무 장갑, 벌 채집통과 핀센트도 사왔다. 나는 인츰 돼지한테 차례로 관절부위와 회음혈(会阴穴)에 벌침을 놓기시작 하였다. 회음혈에 벌침을 놓으면 정액 수량과 질량을 높인다고 책에 씌여있다. 
“아저씨, 박사장한테로 봉침 배우러 가십시다. 옷을 바꿔 입고 나오세요.”
고사장은 깨끗한 돈사를 둘러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천정의 먼지를 털고 고압 분무기로 물청소 하고 돼지마다 샤워시키고 소독수까지 분무했으니 깨끗하지 않을 수 없다. 고사장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차의 앞문을 열었다. 그와 나 둘뿐이니 그의 곁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박사장이 아줌마를 꼭 뎃고 오라네요, 불러와야겠어요.” 퍼그나 달갑잖은 표정이였지만 어쩔 수 없는 그였다. 나는 안해를 불러오고 뒷자리에 함께 올랐다. 안해는 안해대로 박사장한테 간다고하니 흥이나서 야단이다. 박사장 또한 나보담 왕누님을 더 반길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깐 할 일도 없이 꼭 데리고 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래도 봉침인지 벌침인지 구실 달고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나의 안해와 박사장이 무슨 특수한 관계라도 있다고 암시 하는 듯 보인다. 글이란건 원래 남자 여자 서로 좋아 하는 것을 써야 재미진 법인데 박사장이나 안해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안지가 나보다 몇년 앞이니 서로가 구속이 없고 안해 또한 작은 산골짜기 센터에서 일로 시간을 보내려니 밖으로 놀러 나간다고만 하면 박사장이 아니라 누구라도 좋다고 날뛰는 성미다. 
박사장은 설사하는 갓난 새끼돼지 회음혈에 봉침 놓는 것을 간단히 보여주네 마네 하고는 또 사모님과 함께 우리들을 평택시에서 제일로 크다는 음식점으로 싣고 갔다. 센터에 있는 사이 박사장네부부와 여러번 함께 술을 마셨다. 중국에 돌아온 후 박사장과 연길에서 한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다섯금화”의 배동하에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도 갔었다. 배사장과도 한번 만났다. 고사장도 백두산 관광으로 재성이 해룡이를 데리고 연길에 왔었다는데 섭섭하게도 련락이 없었다. 술 한잔이라도 사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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