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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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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나들이]7. 인생 수업
2013년 05월 24일 08시 53분  조회:1358  추천:0  작성자: 김재진
 7.  인생  수업           
 
세상에 살면서 누구라 없이 이런 저런 고비를 넘고 시련을 겪기가 마련이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인생수업”이라 듣기좋게 이름 지어 부르기도 한다.
일거리는 실로 많았다. 그렇다고 일군이 부족한 것도 아니였다. 모두들 자기에게 불합당한 것이라고 하려하지 않으니 외국인 로동자를 불러들이고는 또 불법 체류자라 붙잡아 보내고 야단인 것이다. 한국인은 열심히들 산다고 많이 들어왔다. 무슨 사물이든 절대적이 아니다. 부도나는 기업의 엄청 많으니 실업자 무직업자도 훨씬 많고 로숙자 범죄자도 썩 많은 것이다. 할 일도 많고 노는 사람도 많고 빈집도 많고 노숙자도 많고 경찰도 많고 범죄자도 많고… 사회적 질환은 일시에 근치 할 수 없는 것이고 또한 영원히 근치 못한채 사회가 끝날지도 모르는 것이라 내가 “훈장앞에 문서질 (班门弄斧)”이라 “왈가왈부,왈시왈비 (曰可曰否,曰是曰非)” 할 짓이 아니다. 자기 주제에 맞게 말을 해야한다. 조카집에 얹혀사니 로숙은 안해도 될거라지만 언제까지 신세만 질거냐 말이다.
6월 7일 오전 명동의 한 직업 소개소에 가 직업 소개비 18만원을 냈다. 아저씨는 로임을 더 탈 것이라며 십만원을 받고 안해 쪽으로 팔만원을 받는다. 
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뻐스를 타고 세시간 가량을 달려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 “종점 갈비점”으로 왔다. 이곳이 우리들의 첫 일터이다. 잠자리 주고 먹여 주고 한달에 90만원씩 보증 해 준다고 한다. 봉금은 낮으나 둘이 함께 있으니 서로간 도울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뿐더러 연길에서 동생이 불고기 가스레인즈를 생산하고 있고 불고기점도 경영하고 있으니 한국의 기계도 보고 경영도 배우면 귀국 하여서도 유용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요즘 놀러다니며 목격한 고기 구이로 두가지를 이미 그림 그려 동생한테 부쳐 보냈다. 물론 우리 가스로에 비기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혹시 어떤 부분이라든가 원리가 참고로 될런지 해서였다.
“종점 갈비점”은 불가마를 놓은 상이 60개도 넘는 큰 가게였다. 한창 재 장식 중이라 손님을 받지 않고 16일에 오픈(개업) 한다고 일손을 다그치고 있었다. 날마다 자가용을 몰고 갈비 먹으러 왔다가 돌아서는 사람들이 푸술하였다. 40대 중반의 사나이가 사장이였는데 키도 크고 인물도 잘났다. 그는 우리 둘을 앉혀 놓고 대개 상황을 소개 해 준 후 인츰 일에 부쳤다. 처음이라서 두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눈치 있게 일 찾아하라”고 사장님이 제시를 주었으니 부지런히 돌면 될 것이다. 나는 그런대로 밀어부칠 수 있을텐데 안해가 어떨런지 근심이다. 
사장님을 비롯하여 여나문 식구들이 모두 마음이 곱고 상냥해 보인다. 우리 말로 할것 같으면 까다로울 것은 같지가 않았다.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데 우리가 올 때 뻐스 정류소까지 데리러 왔던 채구원 같아 보이는 친구가 이불과 베개를 사왔다. 사장님은 “첫날 이불”이라며 롱을 하더니 요자리가 없다면서 캄캄한 밤임에도 불구하고 그길로 다시 가 당장 사오라고 시킨다. 일군이란 어디에 가나 사장님을 잘 만나야 살고 나는 법이다.
첫날 밤을 잘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안해는 볼라니깐 온 밤을 뒤척이며 제대로 자는것 같지가 않았다. 원래부터 어린애들처럼 잠자리를 바꾸면 잘 자지 못하는 모병이 있다. 그러니 점차 괜찮아 질것이다.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던 그로 말하면 언제 이런 곳에 와서 돈벌이 한답시고 먹고 자고 일 할 줄을 생각이나 해 봤겠는가? 돈이란 뭐길래 인생길을 이렇게 엇바꾸어 놓는지 모를 일이다. “인생 수업”이라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말한다. 그 결과는 어떨런지? 나이 반 백을 넘어 먹고서야 인생 수업을 하다니…
아버지는 18세에 고향을 떠나셨었다.“나무는 옮기면 죽어도 사람은 옮기면 산다.”는 속담도 있다. 잘 살아보려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옮겨가고 옮겨온다.
“제진아, 내등거리 자상히 보거라…”
1985년도, 한달에 한번씩 나는 병환에 계시는 부친님을 모시고 내가 근무하는 공장 목욕탕에 가 등거리를 밀어 드렸다. 마음씨 착한 모욕탕 아줌마와 공장 경비원 아저씨부부는 시끄러워 할 대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세상에 효자요!”를 부르며 칭찬 해주군 하였다. 한번은 내가 아버지의 등거리를 천천히 밀고 있는데 “자상히 보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뭘 보라고 그럽니까? 아버지.”
“칠성별이 보이지 않느냐? 등거리에 검은 짐 말이여.”
나는 이리저리 자세히 찾아 보았다. 오른어깨쪽으로 검은 기미 몇개가 박혀 있었다. 분명히 그 모양도 수자도 칠성별은 아니였다. 허지만 부친님은 친눈으로 등거리를 보실 수 없었으니 그렇게 한생을 속힘 속에서 살아오셨다.
“예, 이제보니 칠성별이네요! 정말 희귀합니다. 아버진 보실 수도 없으신데 어떻게 칠성별이 있는지는 아셨습니까?”
중풍에 걸려 어린애 지력으로 변해버린 아버지를 실망케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런걸 아마 “선의적인 거짓말”이라 하리라. 나는 그의 등거리 빈자리에 손가락을 찍어가며 일곱개를 세여 드리고 눈물을 훔쳤다.
“누구하고도 말 말거라잉? 큰 일 난다, 큰 일 나…”
일본 동경에 계실 때, 스무나문살 혈기의 아버지께서는 꿈도 많으셨을테지…
어느 하루 벨트를 배달 한 후 물품값을 받아가지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한 백발로인이 아버지 앞에서 걸음을 뚝 멈추었다. 아버지도 자연히 걸음을 멈추고 마주 쳐다 보았다. “젊은이 날 따라와 보게.”하고 한마디 위엄 있게 남긴 로인은 아버지를 스쳐지나 앞서 걸었다. 큰 거리를 지나고 작은 골목을 에돌아 한참 가더니 한 자그마한 찻집으로 들어 갔다. 아버지는 미닫이를 닫고 로인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로인은 흰수염을 슬슬 내리 쓸며 아버지를 뜯어보았다.
아버지는 로인이 시키는대로 돌아 앉아 윗통을 벗었다.
“바로 너로구나! 로승은 바다 건너 먼디서 너를 구하러 왔니라. 넌 등에 칠성별을 지고 났으니 하늘이 이세상에 내려보낸 사자(使者)다. 하늘의 뜻을 절대 루설하지 말라(天机不可泄漏), 루설하면 천벌을 받는다. 부모 처자한테 알려서도 아니된다. 나라가 알면 즉각 목을 칠 것이여, 감추고 시기(时机)를 꼭 기다려야 한다…”
아버지께서 늙은 중한테 사례금을 많이 냈을 것만은 사실이다. 일생을 망쳐 놓은 협잡군이고 원쑤임을 모르고 구명 은인으로 여겼을테니깐. 한평생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누구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칠성별”이라는 무거운 보짐을 짊어지고 사시려니 그 심리적 고통이 막심 하셨을 것이고 올지 말지 모르는 “시기”를 기다리시려니 희망도 크셨을테지. 헌데 처자한테도 말해선 안된다는 “천기(天机)”를 왜 나에게 말씀 하셨을까? 병마에 시달리다 못해 희망을 잃으시고 “칠성별”의 진가(真假)라도 알고 싶으셔서? 아니면 그제라도 그 멍에 벗어버리고 싶으셔서였는지도 모른다. “칠성별” 내막은 그 바다건너 먼디서 왔다는 로승과 나밖엔 누구도 모른다. “칠성별”을 등에 지고 지나오신 타향살이, 갖은 고생 다 겪으며 칠남매 키워놓고 복 누릴 날 다가오니 병마가 덮쳐들어 그처럼 그리워 하시던 고향땅도 다시 한번 밟아 보지 못하신채 인생 수업 끝마치시니 불쌍하고 가여울 뿐이다. 참으로 칠성별을 등에 지고 태여나셨더면 그인생 어떻했을까? 물론 그럴 수는 없을 줄을 알면서도 얼림속에서 보내신 아버지의 한생이 너무나도 가슴 아파 그렇게 생각 해 보는 것이다.
아버지는 “칠성별”을 등에 지었다고 언제 한번 교만하거나 라태하는 일이란 없었다. 낮이면 생산대 밭일을 하시고 밤이면 가마니를 짜거나 족닥기를 만드셨다. 날마다 새벽 두 세시에 쉬시고 날 밝기전에 일어나군 하셨다.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늘 아버지의 좌우에 나란히 앉아 벼짚으로 가마니줄새끼 꼬는 일을 하군했다. 그때면 아버지의 옛 이야기가 자연히 흘러 나온다. 주제들은 모두 효도와 충성, 선량함에 관한 옛말들이다. 우리들이 아버지의 옛말을 들으며 새끼를 꼬기 시작하면 어머님은 언제나 가마뚜껑을 번져놓고 그위에 가마니를 두겹으로 접어 높이 쌓는다. 가마니 짜는 일은 기계소리가 시끄러우니 량변을 꿰여매는 일을 하실 참이다.
재미진 옛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며 우리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벼짚을 부벼댄다. 아버지께서는 인생 수업 리치에 대해서도 늘 말씀 하셨다.
“아침에 잠 자리에서 일어나면 오늘 뭘 해야하나 한번만 생각 해봐, 저녁에 눕기전에는 다 했는가 생각 해보고 빠진것이 있으면 해버리고 누워야 한다.”
“하나를 베풀면 열이 돌아온다고 한다. 돌아 오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구차한 사람에게 베풀어야 한다.”
“뭐든 하자꾸나 맘 먹으면 된다, 결심하구 노력 있으면 못 할 일 없다.”
아버지께선 말로만이 이니라 행동으로도 우리들에게 그렇게 본보기를 보이셨다. 족닥기도 구차한 집엔 무료로 만들어 주었고 수일령감네 외동 아들이 서방 간다고 돈 이백원을 꾸어갔는데 돌려받을 형편도 못 되였고 받을 념도 하지 안으셨다. 그때 돈 이백원이면 모르긴해도 지금 돈 이삼만원은 쉬히 될 것이다.  
나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뭐든 하면 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인생 수업”의 좌우명으로 삼고 자기를 채찍질 하군한다.
안해는 “종점갈비점”에서 이틀간 겨우 일 하고는 손을 바짝들고 남 보기가 부끄럽다고 새벽차로 가버렸다. 직업 소개비만 팔만원을 버린 것이다. 나만 남겨두고 돌아서려니 뭐 영별이나 하는듯한 표정이다. “인생 수업”이라며 큰 맘 먹고 달려들더니만 이틀 낮 사흘 밤 지나니 끝났다.
“호불아비로 되는건 시간적 문제구먼, 허허허…” 아침상에 앉아 실장님이 롱담을 한다. 두시간 전에 나의 안해가 가고 그자리에 없었던 것이다.
“호불아비유? 이산 가족이지, 호호호…”
“아저씨 홀아비믄 참 좋은 아줌마 있는디…”
내가 아무런 응대도 않으니 롱담은 여기에서 끝나버리고 몸이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돌아간 것이라고 나는 묻는 말에 대답했다.
아침 식사는 보통 열시 반에, 점심은 세시 반에, 저녁은 일이 끝난 후, 아침 출근은 열시에 한다. 출근전 나는 세칸(변소) 청소를 하고 분무기로 집 주위에 파리약을 쳐야 한다. 그러니 여덟시 좌우에 깨여나면 될걸 습관 되지 않아 그냥 다섯시나 여섯시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식 영업 할 때면 밤 열 두시를 넘겨야 한다니깐 그때엔 늦잠을 자야 할 것이다. 날이 새더라도 손님만 많았으면 한다. 요즘은 늘 아홉시 좌우에 저녁을 먹고 헤여진다. 랭수욕을 하고 열 두시까지 텔레비 보고 잠자리에 든다.
안해한테서 전화가 왔다. 연변으로 돌아가는 오빠를 따라 집에 가라고 했더니 오빠는 15일날 간다면서 너무 이르니 자기는 좀 더 있어보고 갈지 말지 결정 지을 것이라 한다. 앓지만 않는다면 아무 때까지든 놀아도 별일 없지만 그 몸이 어떨런지 근심이 태산이다. 그런 주제에 나더러 밥도 잘 먹고 약도 잘 먹고 몸 조심 하라고 부탁도 많다. 부부니깐 그러는 것이겠지.
11일부터 시험 영업을 하고 16일에 정식 개업을 하였다. 개업식 날은 참으로 굉장 하였다. 아침에 해가 뜨니 삶은 돼지머리를 상에 놓고 제를 지내는데 나도 그들의 식대로 돈 2만원을 감아 돼지귀에 꽂아넣고 절을 세번 하였다. 다른 일군들은 모두 멀리에서 구경만 한다. 가족들이 하는 제사에 나같은 불청객이 절을 하여도 되는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일군도 가족이라 생각하였고 마음이 내키는대로만 행동 했을 뿐이다. 저녁에 주방장이 돈 2만원을 나에게 돌려주었다.  
오전 열시쯤 되니 축구장 반 만큼 큰 주차장에 하객들의 자가용이 꽉 차고 가게 앞 길옆에도 몇십메터 늘어섰다. 사람의 키를 썩 넘는 생화 꾸러미도 몇십개나 들어왔는데 사장님의 친구들은 물론이고 구리시 시장으로부터 세무국 국장, 경찰서 서장, 공상회 회장등 하나 빠짐 없이 축하의 꽃무더기를 보내왔다. 울긋불긋 생화로 장식한 입구 앞에선 어깨와 등거리 배꼽까지 드러내고 제일 짧은 치마를 입은 애들이 스피커의 음악에 맞추어 하루 내내 쉬지 않고 춤 추며 꽃을 흔들어댄다. 아마 구리시에서는 제일로 이쁘고 춤 잘 춘다는 애들일 것이다.
새로 개업한 16일부터 사흘간은 손님이 어찌도 많은지 목탄불을 피우고 적쇠 부시는 일만 하는 내가 너무바빠 당금 숨 넘어갈 지경이였다. 손님들이란 대개가 가족별이다. 친구나 동료끼리 짝지어 오는 것도 조금씩 있긴 한데 많지가 않았다. 한가족이라면 보통 부부간에 아이 둘 셋이다. 그러면 갈비 4-5인분에 삼겹살 2-3인분, 그다음 맥주와 음료 몇개다.그외엔 소주 뿐 메뉴도 없다.
“종점 갈비”란 수입제 랭동 소갈비를 길이 8cm 정도 되게 기계톱으로 끊은 후 고기를 한뼘 정도 길이 되게 엷게 바른다. 그걸 도루 감아 차곡차곡 용기에 담고 양념간장을 부어 래장고에서 스물 네시간 숙성 시키면 곧 손님상에 오른다. 비밀은 그 양념간장에 있다. 생강, 마늘, 고추, 감초, 양파, 계피등등 수십종의 물건들을 넣고 잔잔한 불에 늘늘이 고아 뽑아낸 즙인데 뭐가 뭔지 아는 사람은 실장님(주방장)과 사장님 뿐이다. 그렇게 만든 갈비 한토막이 바로 일인분인데 이만원이고 삼겹살 일인분은 둬냥가량인데 삼천원이다. 돼지 뱃살을 엷게 썰어서 아무런 양념 처리 없이 숫불에 구워 깻잎에 싸 먹는다. 이런 삼겹살은 어데 가나 다 있는 메뉴인데 “종점 갈비”는 이집에서만 하는 특종이다. 너무 아끼니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리 대단한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그들의 홍보문에는 “맛 없으면 내살을 저며 구우시우!”하곤 사장님의 환히 웃는 사진과 이름, 주소, 전화 번호를 적어 놓았다.
17일 밤, 영업이 결속 된 후 나는 사장님을 찾았다.
“김씨아저씨, 무슨 일 있으시유?” 사장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기보담 몇살 위라고 그는 언제나 “김씨아저씨”라 부르며 존경어를 썼다.
“사장님, 만난진 얼마 안 되지만 많은걸 배우고 관심도 많이 받았습니다. 헌데 죄송하게도 더 못하고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일군을 찾으시오.”
“바쁜목 인제 다 지났는데 왜 고생만 하시다 갈실라구 합니까? 뭐 좋잖은 일이라도 있으시믄 말씀 하세요, 손잡구 잘 해 보자구요.”
“뭐 좋잖은 일이 있겠습니까? 와이프가 아파서 할 수 없이 중국으로 돌아 가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사장님께 미안하게 되였습니다.”
“사연이 정 그러시다면 정말 섭섭하게 됐군요, 돌아가 잘 치료하시구 후제 다시 한국에 오신다면 여기에 놀러라도 오세유, 잘 모시겠습니다.”
암병으로 이미 수술을 세번이나 받았었다는 말에 사장님은 더 만류 할 말을 찾지 못 했고 왔다가 사흘도 채 안돼 가버린 것도 아는 사실이다. 안해가 아퍼 중국으로 돌아 가련다는 것은 순 거짓말이였다. 룡정에서 안해와 함께 있던 친구 광수한테 좋은 일자리가 있다더라고 안해한테서 전화소식이 온 것은 일찍 16일 밤이였다. 김 광수는 나와 동갑인데 나의 안해와 동창이고 안해는 연길로 전근해 오기전에 몇해간 룡정 한회사에서 그와 동료로 있었다.
광수에겐 자녀가 없었다. 그도 남 못지 않게 파란곡절의 “인생 수업”을 받았다. 룡정에 있던 그 큰 회사가 부도나자 사장님의 승용차를 몰던 광수는 정기 실업자로 사회에 나오게 되였고 처음엔 실업비로 차 한대를 사서 택시업을 하여 돈 좀 벌었다. 한생을 차만 몰려 하니 지겨웠던지 그는 작은 음식점을 꾸렸었는데 얼마 안가 택시업을 해서 모은 돈과 택시차를 판 돈까지 다 비벼먹고 나앉았다.
그는 거금을 꾸어 넣고 “로무수출”로 싱가포르에 갔다. 헌데 그들을 데리고 간 놈팽이가 돈만 떼여 먹고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불법 출국이였다. 려권도 돈도 없는 그들은 중국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붙혀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빚을 물고자 또 빚을 내여 한국으로 왔다. 자기와 모양새와 나이가 비슷한 다른 사람의 려권과 비자를 팔만원이란 비싼 값으로 사 갖고 온 것이다. 단속에 걸려 쫓기울까봐 두려워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 양마장에서 일 하다가 반년이 지나니 담이 좀 커진 것도 있으려니와 로임이 너무도 적어 근 20만원이나 되는 빚을 갚자면 4-5년 남짓이 걸려야 하겠기에 산에서 내려온 것이다. 말먹이군의 한달 봉금이 고작 60만원이니 그당시 환률로는 중국돈 4천원도 안된다. 둬 해에 빚을 다 털어버리고 2-3년을 더 벌면 중국에 돌아가 뭐든지 다시 해 볼만한 자금이 모아진다.
광수는 연길에 가면 자동차 몇대를 사고 자동 고층 승강기를 만들고 몇사람 모여 “이사짐 회사”를 함께 꾸리자고 하였었다. 그 많은 억울한 빚을 걸머지고서도 추호의 실망이나 비관이 없이 꾸준히 억세게 싸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실망하고 맥을 버리면 자멸의 길밖에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술 담배도 하지 않고 말수도 적고 마음이 어진 친구이다. 허지만 그는 모질은 “인생 수업”의 무서운 역경 속에서 추호도 굴할 줄 모르는 꿋꿋한 사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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