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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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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나들이]17. 종돈장과 리 별
2013년 06월 07일 10시 55분  조회:1742  추천:0  작성자: 김재진
17.  종돈장과  리 별   
 
 
우리가 센터에서 일한지 만 일년이 되였다. 일년 사이 애들은 얼마나 많이 바뀌였는지 모른다. 호성이도 안 할란다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둬달 하다가 또 나가버렸다. 리대리 동국이도 나가고 리부장도 나갔다. 우리가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있는 애는 박 재성이와 김 해룡이 둘 뿐이다. 영식이가 아마 제일 늦게 나갔을 것이다. 그애들은 저마끔 쎈터를 떠나면서도 나와 하는 인사말은 꼭 같이 “아저씨, 건강하시고 돈 많이 벌어갖고 가세요!” 한다.
리부장은 호성이보담 두살 아래인 로총각이다. 그는 센터를 떠나 한 양돈장을 임대맡아 새로 사업을 벌리고 있는데 아저씨 아줌마가 가서 일 봐달라고 청구하러 찾아왔었다. 우리는 고사장을 떠나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량해를 구했다.
한번은 회식 후 센터에 돌아 와 두부찌개에 소주를 마시며 호성이랑 같이 밤 새울 때 리부장이 리씨말을 하니 나는 반대표를 던졌다고 “잡담”에서 엿쭈었다.
“리씨가 위대한지 망나니인지는 모르겠으나 리 성계와 리 승만은 아니요. 리 승만이 위대했다면 ‘3.8선’은 없었을 것이고 통일된 부강한 한반도일 것이요…” 나는 리부장의 말이 채끝나기도 전에 말씀거리나 잡았다고 술 한잔을 혼자 쭉 찌우고는 손을 내 저으며 소리를 높였다. “아는가? 고려 말기에 중국 원나라 밑에서 비록 부패하고 무능 했다고는 하지만은 명나라가 고려땅을 침입 할 때 임금 왕 신(王辛)과 재상 최 영(崔莹)은 당시에 도통사(都统使)였던 리 성계더러 명나라 군을 막으라고 명령 했던거요. 리 성계는 앞록강 변까지 갔다가 물이 불어 건널 수 없다며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정변을 일으켰어, 고것이 륙칠백년 전이요. 그때 리 성계가 위대했다면 료녕성 동부부터 길림성 남부, 흑룡강성 서남부까지 모두 지금도 고려나 조선의 땅일거란 말이요! 령토만 지켰더면 그가 정변이고 뭐고 다 ok! 나라 땅 잃고 백성 버리고 정권만 잡으면 단가? 리 성계는 민족의 죄인이고 력사의 죄인이란 말이요!”
나의 열변에 두아이는 할 말을 잃었다. 리부장은 “난 역사 몰라요…”하며 잔을 냈다. 나도 력사라고는 모른다. 20여년전 “고려산 이야기”라는 글을 써보면서 “세계통사”의 한 대목 읽어 두었던 것을 력사학자나 되는 듯 외웠을 뿐이다.  
02년도 5월, 나라에서는 불법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들에게 체류 기일을 일년 연장 해 주었다. 만약 정한 기한내에 수속을 밟지 않고 있다가 잡히면 벌금하고 쫓겨나고 어느 회사에서 채용하다 잡히면 회사측에서도 크게 벌금 할지어라고 통고가 내렸다. 그러기에 고사장도 우리더러 수속을 밟으라고 독촉 하였다. 5월 13일 저녁, 우리부부는 차를 몰고 퇴근하는 성희차에 앉아 기차 타러 천안으로 갔다. 성희란 충남 축목대학을 졸업하고 몇달전에 센터에 온 처녀애인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무실에 앉아 돼지 정액 주문을 받고 주문 받은 즉시로 주문하는 용호 부근에서 뛰고 있는 배달 하는 애 한테 전화 쳐 몇분내로 용호에 가 닿게 한다. 점심 식사는 날마다 우리 둘과 성희까지 셋이다. 그애는 체격도 크고 성격도 일반 남자애 못지 않게 호방하다. 다만 생김새가 다른 처녀애들보담 굵직굵직 하다보니 여자애치고는 깜찍한 멋이 못하다고 하겠다.
“아저씨, 저의 희망이 뭔지 아세요?” 성희가 핸들을 돌리며 곁좌석에 앉은 나와 묻는데 내가 어찌 알고? 돈 많이 버는것? 얼굴 이뻐지는것? 좋은 남자 친구 만나는것? 아니면 축목학 박사나 축목 기업가가 되는것? “글쎄 무얼까?…” “모르시겠죠?”그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호호호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요, 개인의 목장 하나만 가지는거라요, 자그마한 목장 말이얘요.”
“그래? 문제 없지뭐, 성희는 자산이 많으니까!” 하는 나의 말에 성희는 “녜?”하며 의아쩍은 표정으로 나를 힐끗 곁눈질 했다.
“돈 없어요, 돈 있으믄 뭐 희망이고 소망이고 하겠어요? 사면 될걸.”
“성희는 돈만 자산이라고 봐? 돈은 작은 재산이고 쓰면 줄어들고 없어 지지만 성희에겐 쓰면 쓸 수록 늘어나는 무궁무진한 자산이 있는거야, 지식과 열정, 젊음과 패기 그리고 아름다운 그 꿈! 이거면 자그마한 목장 하나가 무슨 문제여? 더욱 큰 것도 이룩 할 수 있을거야!”
“아저씨 말씀 딱이얘요, 마구 힘이 솟는 감각입니다. 그런 무형의 재산으로 희망을 실현 할거얘요! 그때 아저씨 아줌마 내 목장에 놀러 와요, 제가 귀빈으로 모시겠습니다.”
“오케이! 목장주님의 휘황찬란한 내일을 미리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호호호…”
얼마 후, 성희는 일이 자기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며 동창생이자 친구인 정애를 소개하여 자기가 하던 일자리에 앉혀놓고는 센터를 떠나버렸다. 자기의 꿈을 실현하러 갔을 것이다.
정애라 부르는 처녀애는 성희와 모든 것이 너무도 달랐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회물을 몇해 먹었다는 그애는 인물체격이나 말투나 행실이나 그 뭣이든 비할바 없이 매혹적이였다. 성희와 사귀려는 애는 하나도 없더니만 정애가 오니 불찬놈은 한결같이 그애 주위에서만 맴도는데 일까지 젖혀놓고 맴돌다가 사장의 된욕을 먹는 애도 있었고 해고 당하는 애까지도 있었다.
성희는 천안 기차역 광장에 우리를 내려주며 “두분께서 잘 다녀 오세요!” 하고는 차머리를 돌렸다. 성희 나이 우리딸 금화와 정 동갑이다. 금화도 저애처럼 꿈을 품고 그것을 실현 하고저 분투 할 것이다. 우리는 딸애가 99년도 일본으로 류학 간 후로 만나보지 못했다. 센터의 애들은 방학에라도 딸님을 놀러 오도록 하라고 야단들이다. 비용은 자기들이 처리 할거라면서.
부천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이 우리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으로 연기 수속하러 갔다. 학교 마당이라 볼라니 주위에 학교같은 건물이 보이지 않고 체육장이라 여길라니 관람석도 없고 한 별란 곳에 인산인해를 이루어 파도치고 있었다. 그마당이 축구장 두개올치는 될 듯한데 그 둘레에 너덧 겹으로 싸리나무 울바자마냥 빼곡히 사람들이 줄 섰다. 행렬의 첫 머리를 찾아 큰길을 따라 한참 가다가 작은 굽인돌이 길목에서 줄을 서지 않은 탓에 경찰한테 쫓기우고 말았다.
큰 길가에는 먹거리 장사군들과 려행사 장사군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람 많은 곳엔 장사군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복잡한 인파 속에서도 면목 있는 연길 사람들을 몇몇 만날 수가 있었다. 어떤 치들은 밤 새워 줄을 선 것이라 피로해 죽기 직전이라 했다. 일년 후의 배표를 먼저 귾어야 수속을 해 준다는 것도 알게 되였다. 행렬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뒷꼬리에 서서 따른다면 밤을 새워도 작은 굽인돌이 길목에 닿을 수가 없을 것임이 뻔연하였다. 아뭏든 배표는 먼저 끊어야 했다. 비행기로 가려는데 왜 배표를 끊어야 하는지 전혀 리해 할 수는 없으나 하라는대로 해야만 했다. 배표 장사는 각 려행사들에서 도거리 맡고 있었다. 어떤 장사군들은 자기한테서 표를 사면 줄을 서지 않고 수속을 밟을 수 있도록 해준다고 우리의 옷깃을 끄당긴다. 길목 지키는 경찰의 형님이나 되는지 모를 일이다. 속히울까 두려워 따라가지 못하고 길가에 탁상를 놓고 앉아 파는 장사군한테서 배표를 샀다. 배에 올라야 할 날자는 03년 3월 17일로 찍혀져 있었다. 우리는 02년 말에 비행기로 돌아 오면서 려행사에 가 배표를 물렸는데 50%밖에 환불 받지 못하였다. 세상엔 별이별 장사아치들이 다 있는 법이다.
배표를 끊은 후 안해는 고사장한테 전화를 쳤다. 아마도 온 밤 줄을 서야 하겠으므로 계획대로 사흩날ㅡ15일 오전에 센터로 돌아 갈 수 있으지 모를 일이라고 보고 하였다. 고사장은 우리더러 크게 근심 할 것 없이 수속이나 잘 해 가지고 돌아오라 하였다.
우리는 점심 먹으러 미옥이 한테로 갔다. 남을 대신하여 불고기점을 경영하고 있는 외사촌 처제 미옥이는 우리를 반갑게 맞고 대접 해주었다. 그들 부부는 한국으로 일하러 온지 다섯해를 넘기고 있었다. 점심 다 먹었을 때 고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더러 경기도 안산시로 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옥이와 갈라져 뻐스에 올랐다.
안산 뻐스역에서 시작해 둬번 물으며 가니 고사장이 가르켜 준 “이마튼”지 무슨 마트던지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일층은 쑈핑광장 같은 곳이고 이층에 올라가 보니 커다란 빈 방에 책상과 컴퓨터들을 갖추어놓고 외국인 출입국 관리 업무를 림시로 보고 있는듯 하였다. 수속 하러 온 외국인보다 컴퓨터에 마주앉아 놀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저마다 우유를 마시고 빵을 먹으며 한담 하고 있었다. 세시가 되였으니 아마도 참을 먹고 있는 모양이였다.
우리의 려권과 배표를 번지작거리더니 컴퓨터에 몇글자 쳐넣고는 려권에 커다란 사각형 남색 도장 하나와 배표에 손톱눈굽만큼 작은 붉은색 삼각 도장 하나를 찍어주더니 “됐어요.”한다.
“여보세요, 내가 대전 외국인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 잡혀가서 싸인해주었던 각서는 잃어버렸어요? 돈벌이 안 할거구 불법 체류 안 할거라던 그것 말입니다. 아무런 문이도 없으니 멋 없는데요.”하고 나는 말하고 싶을 지경이였다. 려권에 찍어준 도장에는 “출국 준비기간 부여”라 쓰고 출국일은 배표와 같이 “2003. 3. 17.”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출국 기한까지 출국하지 않는 경우 5년 동안 입국금지”라고 한글과 영문으로 뚝 찍어놓았다. 뚝 찍던 떡 찍던 내보기엔 형식이고 배표 값이나 뜯어 먹자는 것이 진실인듯 싶다.
한달 후인 6월 16일, 이틀간 말미를 맡고 강남구 분당에 있는 처조카 전 홍네 집으로 놀러갔었다. 그애의 부모님께서 연길에서 놀러오셨고 월드컵 관람권을 사놓았던 것이다.
우리는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 가서 스페인대 아일랜드의 16강전을 보았다. 우리는 원래부터 축구 구경을 퍼그나 즐긴다. 텔레비에서 축구경기를 중계 할 때면 드라마프로를 뒤로 하고 축구를 본다. 우리 연변대가 대방에 선꼴을 넣으면 우리는 “이겼다!”고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치는데 축구를 모르시는 어머님께선 “이겼을 때 그만 차라 하그라, 그냥 차다 또 질란디…”라고 한다. 
월드컵 경기장에 들어선 우리는 축구도 축구이지만 그보담도 경기장 구경이 더욱 좋았다. 그같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기장에 앉아 본다는 것은 우리 일생에서 처음이고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센터에 돌아와 자랑 했더니 “아저씨는 제주도 관광도 하고 세계 일류의 경기장에서 일류의 뽈 차기도 구경하고 참으로 세상에 태여난 보람이 있게 사네요, 우리는 제 나라래도 고작 텔레비죤 화면밖에 보지 못했는데…” 하며 애들은 부러워 하였다.
“출국 준비기간 부여”를 받은 후 우리는 쎈터에서 두달 더 있다가 떠났다. 전해 7월 10일에 오고 이듬해 7월 13일에 떠났으니 만 일년하고 이틀이 더 된 것이다. 12일 저녁에 여전히 로임을 타고 회식을 하였고 나로서는 마지막 회식이라고 애들이 부어주는 술을 다 받아 마셨다. 13일 마지막으로 하루 일 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박 종필 동서의 차에 앉아 북면까지 오고 북면에서 뻐스를 타고 천안까지 왔다. 고사장은 언녕부터“아줌마 보내드리고 다시 와요.”하더니 마지막에 짐을 다 들고 센터문을 나서는 나를 보고 “다시 오시란데 안 오실 참이군요.”하며 서운한 표정을 짓는 것이였다. “글쎄 보구요, 나는 오고 싶지만 일이 어떻게 될런지 가 봐야 알겠습니다.”라고 나는 얼버무려넘겼다.
대개 반달 전 나의 안해와 고사장이 또 하찮은 일로 서로 얼굴을 붉힌 일이 있었다. 그때에 아무런 내색도 내지말고 이달만 시간을 채우고 떠나자고 둘은 약속이 섰던 것이다. 그래서 한주일 전에는 안해의 몸이 불편하여 중국으로 돌아가야 하니 일군을 새로 찾으라고 고사장과 말 했었다. 고사장은 아줌마의 신체 정황을 잘 알고 있는터고 또 자기와 다툰 것이 속에 내려가지 않아 떠나려 하는 것임도 눈치 챘을 것이다. 허지만 그도 아무런 내색을 내지 않고 사흘 전엔 내 일을 대신 할 30대 초반의 젊은이를 데려다 나한테 붙혀주었다. 나는 사료 주는 일부터 모든 설비를 작동하는 방법, 돼지 정액 채취술까지 하나하나 시범 해 보이며 가르켜주었다. 그는 인츰 익숙하고 감당 할 수 있을것 같았다. 헌데 우리가 떠날 때까지도 주방일을 하고 거둠일을 할 사람은 오지 않았다.
일년이란 우주의 광음 속에서나 인류 력사에서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한 인생에 있어서는 짧지 않는 보귀한 시간이라 여겨진다. 이제 나의 앞날에 몇개의 일년이 더 있을런지? 열? 스물?…“光阴似箭(광음은 화살과도 같다)”이라 우리는 분초를 아껴야 한다. 화살처럼 빠르고 다시 돌아 올 줄 모르는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 나는 지난 일년을 괜찮게 열심히 살았노라 자아 평가 하게된다. 물론 위대한 발명을 했거나 천재적 학설을 펴낸 것도 아니고 남들처럼 돈을 많이 벌었거나 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 것도 아니지만 일개 보통 인간으로서 할 만큼은 거의 다 한 것이 아니겠는가고 자기를 위안하게 된다. 눈 깜박하면 꺼져버릴 한생을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살고 보면 뭘 남긴 것은 없더라도 후회는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련을 품고 안해와 함께 센터를 떠났다. 혹시 문밖까지만이라도 배웅 나오지 않을까하여 나는 몇번 뒤돌아 보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룩 할 수도 없고 이룩 해서도 아니 될 가슴속의 련정이니 이룩 못 한 채 떠나지만 쉽사리 지워 지지는 않을 것이고 몽롱한 추억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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