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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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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어머님께서 떠나시던 날
2013년 06월 19일 09시 05분  조회:1965  추천:0  작성자: 김재진
<부    기>
 
 
어머님께서 떠나시던 날
  
 
인생살이 고닲을 때나 행복 할 때나 마음이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그언제나 잊지 못하는 가장 따사롭고 자애로운 이름, 고요한 밤 깊은 잠속에서도 다정히 불러보고 간절히 웨쳐도보는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런 이름, 이세상에 울음보를 터뜨린 후로 제일 먼저 불러보는 이름, 저세상으로 가는 그 순간까지도 듣기만 하고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뭉클 하고 정열에 불타게 하는 그 이름ㅡ 어-머-니! 어머님께선 떠나가셨다…
공륙년 9월 22일(丙戌年八月初一) 오후 두시경.
“창자이, 어머니 아프셔 퇴근 할 때 들리라구 큰 누님 전화 왔씀다.”
“知道啦(알겠소)!”
나는 공장 회계원의 전화통지에 반마디 대꾸하고는 아무일도 없는 듯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퇴근시 들리라고 하니 아무렇지도 않으신줄로 알았는데 바로 그시각부터 어머님께선 먼길을 떠나고저 서두르며 자식들의 배웅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셨음을 내가 어찌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여든 여덟(1919년 6월) 고령이시니 종종 불편하심은 물론이라 한 시가지에 모여 살고있는 여러 자식들은 자주로 어머님 뵈러 드나들었다. 
약 한주일 전, 그날에도 나는 어머님께서 식사를 잘 못하신다는 큰 누님의 전화를 받고 퇴근길에 들리였었다. 병원에 모시고 가 전면 검진도 받아보고 약도 좀 쓰고 했으면 좋으련만 누님네 말은 좀처럼 따르려 하지 않으시니 아들이 좀 권유 해보라는 큰 누님과 자형님의 지시였다.
“어머니, 안녕하셨습니까?” 나는 어머님 방에 들어서면서 인사드렸다.   
“제지니 왔냐? 내 새끼, 어서 와 앉거라.” 어머님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나에게 자리를 권하셨다.
“예, 어머니.” 나는 어머님이 도닥이는 침대가에 궁둥이를 붙히며 두손으로 어머님의 한손을 꼭 잡았다. 마른 고목 가지마냥 앙상하나 너무나도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이였다. 어머님은 다른 한손으로 나의 손등을 쓰다듬고 얼굴을 어루만지며 “내새끼”만 되뇌이신다.
“어머니, 왜 밥 안 잡수십니까?”
“왜 안 먹어야, 굶고 산다냐? 근디 기계 잔(좀) 팔린다냐?”
“예, 팔리잖구요… 어머니 밥 영 쬐꼼씩 잡순다면서요?”
“늙은이가 그만하면 솔찬한거지(많은거지) 어떻게 더 먹는다냐?”
“‘늙으막에 쌀이 막대’라구 꺽꺽 많씩 잡숴얍니다. 밥 한공기가 보약 열첩보담 낫다고 사람들 많이 말하잖아요.”
도리켜보면 어처구니 없는 소리지, 보약 열첩 당하는 밥 한공기가 어디에 있느냐 말이다. 돈이 없거나 보약 사다 대접 하기가 아까워서 한 소리가 절대 아니고 약이라면 질색하시는 어머님이시라 진지라도 많씩 드시라는 말씀인데 지금 도리켜 보니 말이 아니다. 지난 구정 때 영이 남자친구와 함께 보약이고 로인 보건식품을 엄청 많이 북경에서 사 들고 할머니 뵈러 왔었는데 헛돈 파는거라면서 한알도 안 건드리고 두었다가 건강이 그닥잖은 큰 며느리한테 쓸어 주어버렸다.
“어머니, 봅시다. 제가 손톱 짱커드릴께요.” 어머님은 워낙 깨끗한 분이라서 자식들이 목욕 시켜드리고 손 발톱 깎아드리는 것을 매우 반가워 하셨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은 어머님의 손톱을 천천히 다듬었다.
“어머님, 어데 아프십니까?”
“아니, 안 아퍼. 아펐으믄 어서 죽어버리고 느그들 덜 고생시키잖겄냐?”
“웬 말씀을요, 우리가 뭘 고생 한다고? 외할머니 93세까지 앉으셨으니 어머닌 꼭 백세를 넘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따라서 오래 살게 아닙니까?”
“느그 큰 매부 누님 고생이다. 매부 날마다 내방 청소 다하고 내빨래 다 빤다. 매부 같은 사람 시상(세상) 없다. 나중에 나 죽더라도 꼭 잘 해드려야 한다.”
“예, 명심 하겠습니다. 매부네 근심 덜라믄 말씀 잘 들어야 하잼니까?”
“잘 듣는다.”
“근데 어째 병원 가시잔데 마다하십니까?”
“안 아픈디 왜랐다고 병원 가야? 온, 꺽하믄 배랑(벼락) 맞을 놈이 병원 소리야, 병원소리는…”
“병원이랑게 아파서만 가는게 아니구 사람마다 정기적 검사도 받고 예방도 하고 그러는 곳입니다…”
“안 가, 안 가, 헛돈 안 팔아!”
“어머니, 고집 좀 부리지 마시고 자석들 소원 좀 꺼주시요, 예?”
“죽어도 안 간다니깐 그러냐?”
“넬은 출근하고 모레 아침 다시 올랍니다. 병원 가실 준비하고 계셔요.”
나는 주말에 억지로라도 어머님을 모시고 아무 문진이든 가리라 마음 잡았다.
이튿날 아침, 나는 출근하지 않고 어머님 한테로 다시갔다. 하루라도 미루고 싶지 않았다. 누님네 살고계시는 의학원 “교수아빠트”는 나의 집에서 도보로 5분거리도 안되므로 래왕이 편리하였다.
“아침 진지 드셨습니까?”
“오냐, 어째 또 왔냐? 공장 안 가냐?”
“어머니, 병원에 가십시다.”
“나 잔 편히 살게 놔 두거라, 참말로 왜 그라냐? 그 배랑 맞을 병원 소리 송신 나고 몸살 난다.”
우리는 어머님을 이길 수가 없었다. 큰 매부께서 의학원 위생소에 가셔 영양제 주사약을 사고 간호원도 데리고 왔다. 간호원이 점적주사를 꽂아놓고 돌아가자 어머님은 나더러 빨리 주사침을 뽑아버리라고 야단이셨다. 살만큼 다 살았으니 약을 써가며 살 필요는 없으시다는 말씀이였다.
촌에 계시는 나의 장모님은 금년에 춘추가 여든이시다. 그이는 당신 홀로 집 앞 진 병원에 가셔 약도 사고 영양제 주사도 맞군 하신다. 밥 맛 없고 기운이 떨어진다며 약 좀 써야겠다고 한해에 몇번씩 우리한테로 전화가 온다. 그러면 나의 안해는 그자리로 병원에 전화를 걸어 약을 주문하는데 기정된 병원에 기정된 의사, 그리고 처방도 기정된 것이고 수량 또한 기정된 스무첩이다. 이튿날 안해는 병원에가 값을 치르고 이미 다려서 봉해놓은 초약을 찾아메고 친정으로 간다. 어머님을 위하여 무엇이든 조금이나마 해드리는 것이 자식된 최소의 도리이고 최대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자식으로서의 의무이고 천직이며 특권이다.
9월 22일 오후 다섯시 사십분경, “혈액소” 공공뻐스 정류소다. 뻐스에서 내리자 “오빠!” 하는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일곱째 향란이, 그애도 퇴근하는 길로 어머님 뵈러 오는터였다.
“해서이네 집에 가 저녁 먹구 건너와 어머니 침대서 같이 자겠습니다.”
“응, 그래라. 나는 먼저 피끗 들러 뵙구 집에 가겠다.”
해선이란 여섯째 수란이네 무남 독녀 딸님인데 그들도 우리와 한구역 아빠트에서 살고 있었다. 순란이는 한국에 가서 삼년 있다가 돌아온지 댓달밖에 안된다. 향란이 실랑은 지금도 한국에서 일하고 있고 딸애는 일본에 류학 간터라 향란이는 집에서 혼자 산다. 막냉이인데다가 어머님과 함께 농촌에 오래 있으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어머님은 그애를 제일 많이 외우시는 터이다.
우리는 어머님께서 편하시라고 다년간 경로원에 모시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자식마다 앞다투어 어머님을 모시고자 하지만 저마끔 출근해야 했고 일부 퇴직휴양은 했더라도 빈번한 사회활동 때문에 집에 멈춰있을 시간이 적었다. 감옥살이마냥 빈 층집에서 어머님은 홀로 종일을 보내야 하고 점심은 물론 종종은 저녁상까지도 챙겨드릴 수가 없어 어머님께선 그러저럭 에때우기가 일수였다. 반대로 경로원에서는 하루 세끼 더운밥과 반찬을 대접하고 방안 청소는 물론이고 빨래까지 다 해드린다. 말 동무도 많고 재미나는 오락활동도 많다. 작은 병은 그자리에서 치료하고 큰 병 나면 큰 병원으로 모셔다드린다. 로인들은 자식들을 항상 보고싶어 하시니깐 주말만 되면 우리들은 서로 엇바꾸어 륜번으로 어머님 뵈러 가군 하였다.
경로원에 내는 돈이 아깝다고 어머님은 언제나 경로원에서 나오려하시고 한번 나오시면 다시 들어가려 하지 않으셨다. 집에 나오면 인츰 얼굴이 홀쪽해지고 경로원에 들어가면 다시 얼굴에 살기가 오르고 피색이 도신다.
춘절을 함께 쇠려고 년말에 어머님을 경로원에서 모셔왔었다. 헌데 설 후 어머님은 경로원으로 절대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막내가 집에 혼자 있으니 족족하지 않게 함께 있어준다는 것이였다. 그애네 집은 아빠트 1층이라 로인님 계시기엔 4-5층인 다른 집들보담 편리한 편이였다. 그렇지만 향란이도 출근하는 외에 동료나 친구들 활동에 종종 삐쳐야 하니 마음뿐이지 어머님은 경상 홀로 계셔야했다. 그렇다고 점심밥만 챙겨드리는 보모를 쓸 수도 없고하여 3월 말에 큰 누님 집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큰 누님네는 두분 다 정년퇴직 하셨으니 집에 계시는 시간이 동생들보담 많다고 할 수 있다. 향란네 집에서 큰 누님과 함께 어머님의 모든 물건ㅡ 상시옷까지 찾아내여 택시차에 실었다. 인젠 하늘나라로 가실 때까지 큰 누님네 집에서 계시게 할 참이였다. 정말로 뜻밖에 세상 뜨신다면 어린 막내가 혼자서 놀라지나 않을까 하는 큰 누님의 우려다. 상시옷은 둬해전 딸님들이 베천과 붉은 광목을 끊어다가 어머님과 함께 지어 둔 것이다. 상시옷을 미루 지어두면 장수하신다는 민간에 도는 말이 있었으니깐 따르지 않을리 없는 딸들이다.
큰 누님 집으로 옮겨가신지 대개 열흘쯤 된 주말이였다. 어머님은 바람도 좀 쏘일겸 향란이네 집으로 놀러 갈란다고 나섰다. 큰 누님께서는 하시던 일들을 젖혀놓고 배동하여 나섰다.
“인젠 암디도 안가, 그냥 여그서 살다 죽을란다. 너는 집에 가그라.”
막내 딸집에 이르러 쏘파에 앉자 어머님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예? 뭐랍니까? 엄마 어째 그럽니까?”
어머님한테 깜쪽같이 기편당한 큰 딸은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아무리 얼리고 닥치고 빌어도 어머님은 끄떡치 않았다. 막내는 막내대로 어머님께서 불편 하시더라도 계시고 싶은 곳에 계시도록 하자고 큰 언니를 위안했다.
“그래우! 엄마 맘대루…” 큰 누님께선 성이 머리끝까지 났다. “이제는 엄마 상새 난대두 모르오, 볼라두 안 올거니깐 큰 딸년은 죽었거니 하오! 막내가 아무리 곱구 허물 없다해두 그렇지, 갸 생각은 어째서 쪼끔두 안 해주는가 말이요! 양? 답답하재이요? 글쎄…” 큰 딸은 가버렸다.
“좋아 하십데? 그런데 어째 벌써 왔는가? 점심두 안 줍데?”
큰 자형님은 생각보담 일찍 돌아온 안해를 반기며 의아쩍은 표정을 지었다.
“깜쪽같이 속았습니다, 속상해서 월래…”
“속다이? 누긴데?”
“바람 쐴라 간다든게 거기서 영 산다우, 우리가 그렇게 싫은 모이지?”
“동무 딸들하구 하든 버릇대루 쩍하믄 어머이하구 떽떽거리는게 무슨 좋겠는가?”
“아이, 내 언제 떽떽거립디까? 원래 목소리 높아 그렇지 누기 제에미 미워 그러겠는가? 육십년 넘었어두 딸 성질 모른단 말이? 오망 써두 분수 있지…”
“그만한 년세에 치매두 안 오구 그렇게 깨끗한 노인이 어디 있소? 제 늙어보오 어찌는가. 사실 말이지 노망은 지금두 당신이 더 쓴다구.”
“뭐랍니까? 내가 어쨌다구… 아이구 算啦,算啦!(됐소, 됐어!) 당신 모실라 간다메? 모셔다 놓구 잘하는 싸우재 다 하우, 이 오망쓰개 노치는 모르갰소…”
큰 누님은 나에게 자초지종을 전화 해주었다. 아침에 나설 때 어머님은 향란이네 집에서 하루 쉬고 이튿날 사위가 가서 다시 모셔오기로 약속 되였던 것이다. 나는 그길로 어머님을 찾아갔다.
“어머니, 누님하구 다퉜습니까?”
“아니, 다툴일 뭐 있다냐?”
“그럼 누님이나 매부한테 무슨 노여운 일이라도 있는겝니까?”
“아니, 뭐가 놉다냐? 느그 매부 너무 잘 해 줘서 미안해 그런다. 제새끼도 가뜩한디 왜 매부 고생시키겄냐? 눈치 봄수로…”
“어머님두 참, 사위두 자식인데 무슨 체면이 그리도 많습니까? 눈치 볼 것두 미안 할 것두 없씀다. 어머니는 뭐나 다 좋은데 그냥 쌩애 부리시는게 통 문제란 말입니다.(부모님께서 쓰시던 ‘쌩애’란 ‘체면’이라는 절라도 말로 안다.)”
 88세 고령이신데 어머님은 체면을 너무 차려서 자식들로 하여금 골머리 앓게 한다. 어머님께선 오래전부터 “기관지 천식”이라는 고질로 불편을 겪고계셨다. 많은 약을 잡수셨고 입원치료도 받아 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층계를 오르거나 길을 조금만 걸으시면 숨이 차 하기에 나는 쭈크려 앉으며 등을 들이대곤 하였으나 단 한번도 성사하지 못 하였다. 억지로 업으려들면 옛날 산으로 달래 캐러 갔다가 넘어져 다쳤던 가슴이 눌리여 숨 넘어가게 아프시다는 것이였다.
“어머닌 누구게나 시름 안 끼칠라구 그러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시름만 더 끼치는겁니다. 지금 누님네 내외간네 큰 야단 났습니다. 서로 네탈 내탈하며 어머니 땜에 쌈하는데 그러믄 좋습니까?”
“죽어버려야 느그들 편할텐데 죽어지질 않으니…”
“죽어지질 않으니 서로 생각 해주메 삽시다, 어서 누님 집에 도로 갑시다.”
“넬 매부 오믄 갈란다. 오늘은 여그서 자고.”
어머님은 하는 수 없이 수그러드셨다. 이튿날 자형님께서 어머님을 다시 모셔 갔다. 어머님께서는 간혹 객실 쏘파에 앉아 텔레비를 보시다가도 사위가 밖에서 들어오는것 같으면 인츰 방으로 들어가버리군 하셨다. 사위는 전혀 불편이라든가 부담을 느끼지 않는데 장모님은 미안스러워 안절 부절 못하시는 판국이였다.
22일, 퇴근하여 뻐스에서 내린 향란이는 해선이네 집으로 가고 나는 먼저 복권 투입소에 들렸다. 나는 해선아비의 영향을 받아 복권놀이를 시작한 지난 봄부터 한번도 빠짐 없이 매기마다 열 다섯주 30원어치씩 샀다. 일년반 사이 6천원 넘게 날려보냈다. 복권 중독증에 걸린 것이다. 헛돈을 쓴다고, 바보라고 이따금 안해의 바가지 긁는 소리도 들리지만 나같은 바보가 없다면 “늙은이를 부축하고 장애인을 도우며 고아들을 구하고 곤난을 구제하는(扶老 助残 救孤 济贫)” 나라 복권사업이 기로에 빠지고 말게 될것이 아니겠는가? 복권을 안 산다고해서 돈이 남는 것이 아니다. 복권을 사기전에는 경상적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다녔었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 술과 놀이, 아가씨들한테 버리던 돈을 복권에 넣는 것이다. 나도 남들처럼 자가용도 갖고싶고 멀리 유람도 다니고 싶다. 자가용에 어머님 모시고 안해와 함께 우리가 살던 “남도마을”도 가보고 어머님께서 가보지 못하신 북경 상해에도 가보고 어머님께서 가보고 싶으시다는 곳이라면 그 어디 하늘끝에라도…
8월 15일, 광복의 날을 현재 이곳 사람들은 “로인절”이라 정해놓고 년마다 크게 경축 한다. 이곳에는 한해에 구정을 빼고 “6.1아동절”과 “8.15로인절” 큰 명절이 딱 두번밖에 없다. 예로부터 “로인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尊老爱幼)”것은 우리 민족의 미풍량속이다.
지난 로인절날 우리부부는 새벽시장에 들리여 찰떡과 방금 볶은 료리 몇가지 사들고 어머님 계시는 큰 누님 집으로 명절 쇠러 갔다. 동생들이 몰려오리라 짐작한 누님네는 개 한마리 사다 솥에 안쳐놓았었다. 아침상에서 어머님은 우리가 부어올리는 술 한잔을 마시고 밥 둬숫가락 뜨신 후 수절을 놓으시는 것이였다.
“어머니, 맛 없으셔도 조금만 더 드시요, 우리 다같이 공원 구경 갑시다. 속이 든든하셔야지요.” 나는 숫가락을 도루 그의 손에 잡어드리며 말하였다.
“공원 갈거냐?” 나의 한마디 말에 어머니는 어린애마냥 희색이 만면하셨다.
“예, 바람도 쐬시고 구경도 하시고 그럽시다.”
어머니는 내가 집어드리는 반찬을 받으며 밥 한그릇을 다 잡수셨다. 그리곤 좀 누워 쉬시련다면서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침상을 끝낸 후 들어가 보니 어머님은 술에 취하셨는지 밥에 취하셨는지 곤히 쉬고계셨다. 사실 나는 공원으로 모실 생각은 없이 어머님께서 밥 좀 더 드시도록 어린애 달래듯이 한 말이였는데 어머님께선 참으로 믿으신 것이였다.
어머님께선 따스한 명절날 곱게 차려입으시고 맛나는 음식들을 챙겨들고 자식들 무리에 휩싸여 공원놀이하며 로인들이 둘러앉은 마당에 나가 노래장끼도 부려보고 북장단에 맞추어 두둥실 춤도 추어보고 하는 것을 제일로 즐겨하셨다. 헌데 몇해째 어머님께서는 기력상 공원으로 놀러가실 수 없는 형편이시다. 공원 문앞까지는 택시로 모신다고해도 공원안에 들어가서 다니는 것이 문제이다.
나는 일찍부터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휄차를 하나 사고 싶었다. 길에 나서면 어머님을 앉혀 밀고다니고 층계에 오를 때는 앞뒤에서 들어 모시고 집에 들어서면 접어서 세워두고, 어머님께서 다 쓰신 후 큰 누님께서 쓰시고 그다음은 그다음 누님… 나의 안해도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찬성 하였었다. 휄차만 하나 있어도 어머님과 함께 그 어데든 다 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님께서 그처럼 가고퍼 하시는 공원놀이도 모시고 못가는 불효한 자신을 한탄하며 어머님 방에서 소리 없이 나왔다. 어머님은 어느때쯤 잠을 깨셨는지 하루 내내 공원 이야기는 다시 더 없었고 우리들은 마작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머님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자가용도 휄차도 다 있어야 한다. 헌데 빈 털털이이니 복권에나 당첨되기를 바라는 그길밖에 무능한 나로서야 무슨 수가 더 있더란 말인가? 만날 아글타글 뻐덕이여봤자 공장이란게 그꼬라지이고 나이 드니 외국 나가기도 싫고…
22일 오후 다섯시 사십 오분경, 큰 누님집 층층계 문앞에 닿았을 때 내 허리에서 핸드폰이 진동하였다. 어데까지 왔느냐는 자형님의 독촉 전화였다. 온 오후 누님께서 어머님을 안고 계신다는 말에 나는 한걸음으로 4층까지 뛰여 올라갔다. 상황이 위태로움을 그제야 느낀 것이다. 그런 줄만 알았더면 복권은 무슨놈의 복권이고 전화 받은길로 뛰여 왔어야 했을걸…
큰 누님께선 침대에 앉아 뒤로 어머님을 품안은채 울고계셨다.
“어머니, 제가, 제진이가 왔습니다.”나는 어머님의 앙상한 손을 잡아 흔들며 조용히 불렀다. “엄마,재지 왔소, 눈 좀 떠보오, 엄마! 엄마!”누님도 어머님의 얼굴을 만지며 불렀다. 어머님은 가쁜 숨을 몰아 쉴 뿐 눈을 뜨지 않으셨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약도 마다하고 주사도 꽂으면 뽑아버리라고 야단이시더니 오늘 아침엔 주사를 놓아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엄마, 오래 살고싶으죠?”하고 큰 누님이 롱담 하니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이시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맥이 없고 힘 드셨으면 주사를 다 자청하셨을까? 인츰 피로 회복제인 아미노산(氨基酸) 점적주사를 꽂아드렸다.“수고 참 많았수!”라고 주사침을 꽂고 돌아가는 호사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오전에 순란이가 건너와 어머님을 배동하다가 별 탈 없으시니 점심에 집으로 갔다한다. 오후부터 불시로 힘들어 하시니 나한테 전화를 걸고 내내 안고 앉었다는 것이다.
“누님 허리 아프시겠습니다, 내 좀 안어드립시다.”
“응 그래, 한국에서 볼라니깐 부모들이 운명하자 할 때문 모두 자식들이 와서 이렇게 안고 있더라, 그래야 편하구 복하게 가신다구 말이다.”
“참 누님두, 어머니 뭐 운명 하실라구…”
말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듯 하였으나 누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참말로 운명 하시면 어쩌랴 싶어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눈물이 왈칵 솟구쳐 올랐다.
큰 누님은 한국서 입원한 로인을 돌보는 간병인일을 오래 하셨고 세상 뜨는 로인을 많이 보았다. 하기에 그는 만일에 대처해 몇시간이나 울면서 안고 계셨다. 허지만 그도 믿지 않았기에 나만 알리고 다른 동생들에겐 전화도 하지 않았다.
내 나이 먹고 머리털이 다 희도록 여직껏 어머님께 해드린것 하나 없고 큰 근심 작은 근심 하냥 근심만 끼쳐드린 불효자식이였다. 이제라도 뭐든 조금씩 해드려야지 절대 이대로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낮은 소리로 어머니를 련속 불렀다. “오냐, 제진이 왔냐? 공장 기계 잔 팔리냐?”하고 매번 볼 때마다 묻듯이 또 물어봐주기를 얼마나 바랬던가!
어머님의 작은 등이 나의 가슴에 맥없이 안기여 가늘게 숨 쉬고 있다. 이 작은 등으로 일곱살 넘은 아들을 업고 몇십리 엄동설한 눈보라를 헤쳐다니며 썩어가는 발을 구해주었고 이 작은 등으로 일곱 남매를 업어 키우셨다. 그 고난의 년대에 우리들을 남만 못지 않게 키우려고 어머님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이러하기에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리라. 헌데 “상팔자”와 “효도”는 왜서 반비례 되는지? 무자식이라 아무런 근심걱정 없는 나라지만 “대를 끊음이 최대의 불효(绝后不孝为大)”라 했거늘 손주 하나 키워드리지 못한 나는 부모님과 조상님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마음을 앓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님께선 나하고 마주 앉으면 늘 “너 자식 하나 없어 늙어지면 어떡 하겄냐?”하고 근심을 표하신다. 운신 못 할 때 돌봐주고 저세상 갈 때 보내주는 자식이 있어야 한다는 이것이 인간사회의 전통이니깐.
내가 누님 대신 어머님을 안은지 2-3분 되였을 때 어머님은 드디여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듯 입을 여셨다. 헌데 숨만 둬번 올리 톱으시더니 아무런 말씀도 없이 조용히 숨을 거두시였다. 자형님께서 눈까풀을 번져보고 가슴에 청진기도 대여보았다. 심장 박동이 멈춰버리고 만것이다.
어머님께서 이렇게 운명 하셨다는 것이, 말씀 한마디 없이 영영 떠나셨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큰 누님의 대성통곡이 터졌다. 그는 어머님의 어깨를 잡아 흔들기도 하고 어머님의 빰을 때려보기도 하며 넉두리쳤다. “아이고ㅡ이렇게 가믄 어떻게 하오?ㅡ 엄마, 엄마ㅡ 눈 좀 떠보오ㅡ 금년까지만이래두 좀, 소영이 잔치 할 때까지 이제 한달만이래두 좀 참으란데 이렇게 가믄 어떻게 하는가 말이오! 아이고ㅡ 그잘란 새끼두 아들이라구 바꿔 안자마자 숨을 거두고 마오?ㅡ 그럴줄 알았드믄 내 그냥 안고 있을거… 아이고ㅡ 우리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ㅡ 숨 거둘 때까지두 그저 새끼들을 생각해서 이렇게 깨끗하게, 소변 한점 안 흘리구 냄새 하나 없이 가오? 아이고 우리 엄마ㅡ 딴집 노친들처럼 쏘고 뭉개고 욕도 하고 정이래두 좀 떼고 갈게지, 아이고…”
큰 누님께서 넉두리 하는 사이 자형님의 전화를 받고 셋째 누님네와 동생들 모두가 달려왔다. 네딸이 통곡치며 더운물로 목욕 시켜드리고 새옷을 갈아 입혀 드렸다. 따스하고 부드럽던 어머님의 몸은 나의 품속에서 천천히 식어가고 천천히 굳어지고 있었다. 아아! 나의 어머님!ㅡ정녕 이렇게 떠나신단 말씀이옵니까?!
우리는 두만강을 민족의 강, 백두산을 겨례의 산이라 부르고 또한 어머니의 강, 아버지의 산이라 부른다. 멀잖은 어젯날 어머님은 나의 큰 누님을 등에 업고 아버지를 따라 눈물 뿌리며 두만강을 건너왔고 피땀 흘리며 백두산 기슭에 뙉밭을 일구었다. 우리들은 두만강의 맑은 물을 마시며 몸과 마음을 키웠고 백두산의 싱싱한 풀을 먹으며 힘과 지혜를 키웠다. 두만강처럼 맑고 도도한 어머님의 사랑, 백두산같이 싱싱하고 숙엄한 아버지의 사랑, 그사랑은 영원 할 것이다!
어머님! 고이고이 잠드소서!
이자식은 래생에 다시 당신의 아들로 태여나 이생에 못한 효도 다 하리다!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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