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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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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나들이]11. 충청남도 종돈장(种腞场)
2013년 05월 30일 08시 45분  조회:1789  추천:0  작성자: 김재진
11.  충청남도 종돈장(种腞场)
 
 
작은 비는 끊을줄 모르고 내린다.
기차역 광장 한 모퉁이에서 우리는 쉽게 사장님을 만날 수가 있었다. 우리가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한창 누군가에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치고 있었다. 하기에 인사말도 건뉠 수 없었고 손따윈 더욱 잡아볼 엄두도 못내였다.
고 미자라고 부르는 사장님은 나이 마흔 넷이고 한메터반 조금 넘는 키에 진짜로 귀염상스런 얼굴을 가졌다. 얼굴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고 노랑 염색을 조금 한 느슨한 파마머리를 뒤에 한줌 모두어 손수건 같은 것으로 대수간 매여 놓았는데 자연스럽고 보기가 좋았다. 두 무릎이 펑 뚫린 색 바래진 청바지 위에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었는데 팔소매를 반쯤 걷어올렸고 한뼘 반쯤 되는 허리끈 끝으머리가 그녀의 오른쪽 큰다리 앞에서 좌우로 그네 뛰고 있었다.
나와 그녀는 서로 머리를 약간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끝내고 나는 그녀가 차문을 열어주는 대로 말없이 뒤좌석에 올라 려행가방을 사이에 놓고 안해와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운전석에 올라 핸드폰을 끄고 시동을 걸었다. 한참을 에돌더니 천안 시내를 간신히 벗어나 국도에 들어섰다.
후시경 속에서 그녀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녀를 내내 훔쳐 보다가 들통 난듯이 나의 눈길은 허둥지둥 차창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얼굴이 달고 가슴이 높뛰였다.
“아저씨,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어요!”
허둥대는 나의 눈길를 안정시켜주는 그녀의 목소리는 챙챙하고 야무졌다.
“수고야 뭐… 바쁘실텐데 이렇게 마중해주어 감사합니다!”
그녀는 후시경 속에서 나를 한동안 뜯어보고는 시선을 전방에 던지며 자기의 얼굴을 나의 시선에 맡겨버렸다. 40대 중반이 아니라 30대 중반 밖에 되여보이질 않는다. 양돈장 사장으로선 나의 상상과 많이 어긋나는 인물 체격이고 나이이다.
고사장의 승용차가 23호 국도(강진ㅡ천안/396.3km)를 따라 남으로 달린다.
마을이 없는 곳에 뭣 하는 것인지 멋진 건축물 하나가 외롭게 서 있었다.
“저것이요,‘독립 기념관’이라요.” 고사장은 눈치도 빠르게 후시경속의 나의 눈길에서 내 머리속의 의문을 읽었던 모양이다. 1919년 3월 1일, 그러니 중국 북경에서 일어난 ‘5.4 청년운동” 두달 전, 애국 지사들은 일제의 침략과 통치를 반대하여 조직하여 일떠났고 “조선 독립 만세!”를 높이 불렀다.
일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제국주의 렬강들은 1919년 1월 파리에서 소위 “화평회의”를 열어 조선 인민과 중국 인민의 반대도 불구하고 일제의 조선에 대한 통치를 확보하며 일제가 중국 산동에 대한 독일의 특권을 넘겨 받기로 결정지었다. 저희들끼리 주고 받고 확보하고 지랄이였다.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쌍둥이 형제임을 보아낼 수 있지만 나라가 다르고 정치가 다르다보니 모르쇠를 하는 것이 아닌가고 이 문외한은 생각 해본다.
독립 기념관에서 조금 더 달려 연출리라는 작은 동네를 지나니 그리 크지 않는 다리 건너에 연출리보담 썩 더 큰 마을이 보이는데 그곳이 북면이라고 고사장이 소개 해준다. 북면이라면 린근에는 남면도 있을 것이고 동면과 서면도 있을것이다. 이렇게 하나를 가르쳐주면 적어도 두 셋을 더 아는 무지하게 똑똑한 놈이라고 사람들은 뒷 공론 할런지 모르겠지만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내가 나서자란 “남도마을”은 바로 서성(西城)진에 예속되여 있고 서성에서 동으로 20여키로메터 내려가면 동성(东城)진이라는 큰 마을이 있는데 그사이에 남고성(南古城)과 북고성(北古城)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그러니 북면이 있으면 동 서 남면도 있을 것이 당연한 리치가 아니겠는가?
북고성에는 가슴 아프게 바야흐로 지워지는 력사 유적지 하나가 있다. 옛날 성터, 70년대 중기였던지 말기였던지 “중화인민 공화국 국무원 력사 유물 보호국”에서 세운 계시판엔 “발해국 옛성터(勃海国古城址)ㅡ국가급 보호 력사 유물”이라 썼었다. 헌데 그 계시판은 어느 때인가 왜서인가 말없이 없어지고 토성의 흔적도 오늘일까 래일일까 사라지기를 재촉한다.
발해국이라 하면 내가 알기로는 고구려나 고려처럼 우리 민족의 고대국인데 왜서 그 유적을 국무원에서는 보호 했다 말았다 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여나문살 소시적 나의 키를 썩 넘어 쳐다 보아야했던 웅장한 토성이 반세기도 안되는 사이에 발목 아래로 꺼져버렸다. 발해성터라면 아마 천년은 되였을텐데 그처럼 거룩하던 모습이 어쩌면 눈 깜짝 하는 사이 급격히 사라지느냐 그말이다. 발해국 력사를 두나라 서로가 자국의 력사라 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은듯 하다. 정치를 모르는 서민이 몇글자 쓰면서 될수록이면 정치에 관한 단어는 회피 하려 애써보지만 자꾸만 말려들게 된다. 그래서 글이란 것이 쓰기가 힘이 든다. 
서성에서 남으로 오리쯤 나가면 구옥촌(九屋村)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었고 일리반쯤 더 나가면 림업국 팔가자(八家子)진이 있다. 구옥촌과 팔가자 두 마을 사이에는 언제인가 먼 옛날 부모가 늙어지면 지어다 버렸다는 넓다란 “고려장터 (高丽葬址)”가 있었다. 두께는 반메터 정도고 사방 한메터 반씩도 넘을 넙쭉한 바위를 아름반씩 되는 둥근 바위 몇개로 궤여 놓았다. 그런 것이 천개는 몰라도 수백개 정도로 널려 있었다. 아이들은 바위 밑을 헤집고 놋 숫가락 놋 그릇을 주어다 팔아서는 놀이감을 샀었고 늙은이들은 바위 사이 흙이 보이는 곳을 파고 콩이나 감자를 심어 빈궁한 가정 생계에 보탰었다. 거기에도 북고성 성터처럼 “국가급 보호 력사 유물”이라는 계시판을 세워 놓았었는데 없어진지가 오래고 그자리엔 팔가자진 아빠트가 줄쳐서서 “구옥촌”이란 지명마저 사라졌다. 옛날 언젠가는 팔가자 보담 한집 더 많다고 구옥촌이라 불렀을텐데 오늘에 와선 이름마저 먹혔다. 후세인들은 고려장터란 어떤 것인지를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후세가 아니라 오늘 사람들도 모르고 있고 믿지 않고 있다. “고려장터”란 이야기는 있을 수 없는ㅡ우리 민족의 과거를 모욕하는 날조라고 근간 KBS 한 어린이 방송프로에서 들은바가 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시적에 본 구옥촌 돌 무덤은 무엇일까? 선사시대의 유물이라고 하는 “고창 고인돌군”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런것들이 퍽 알고 싶다. 알지도 못한채 북고성의 토담과 구옥촌의 바위들이 깜쪽같이 사라진 것이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북면에 닿으니 북고성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분수 없이 사색도 길어진다.
북면 북쪽 큰 다리를 건너기 전, 승용차는 오른손편의 강뚝 길로 접어들어 십분가량 달리고나서 큰 산 등성이 하나를 넘었다. 산등성이에서 내려다 보니 머잖은 건너편 산비탈에 서면마을이 논밭을 마주하고 옹기종기 앉아있었는데 고사장의 차는 오른켠 산굽이를 돌더니 드디여 목적지인 작은 벌의 북쪽 막바지에 이르렀다. “충남 돼지인공수정센터”라 내려 쓴 나무 간판 앞에서 고사장은 차를 멈춰 세우고 시동을 껐다. 우리고장 같으면 “센터”간판 곁에 이간판 저간판, 그것도 중국글과 조선글로 여러개 걸려 있을텐데 여기엔 간판이 간편하게 하나만 달랑 걸려 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고사장 뒤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대문이 아니라 기실은 창고벽에 달아 지은 앞 뒤벽이 없는 사료 저장실이다. 들어서며 오른손켠 첫 머리엔 높다란 사료 혼합기계가 안치되여 있었고 그뒤를 이어 누른 종이 주머니에 담아 포장한 돼지 건사료들이 벽에 기대여 높고 길다랗게 장져져 있었다. 마당 첫머리는 정차장이였는데 비닐로 된 둬톤 되는 디젤유 탕크가 철제 등발 위에 높이 얹혀져 있었다. 정차장 다음은 깨끗한 잔디밭이고 그 왼쪽 켠에 사무실, 제작실, 주방, 숙소등이 들어있는 길다란 집 한채가 잔디밭을 마주해 있었다. 집은 벽돌이나 콩크리트로 지은게 아니라 포말과 세멘트를 섞어 규격에 맞게 미루 만들어진 회백색 벽자재를 사다가 조립하고 철판을 눌러 포말에 부친 푸른색 기와를 얹어놓은 것이다.
“얘들아! 모두 건너와라!” 고사장의 집합 명령이였다. 젊은이 대 여섯이 텔레비 놓인 큰 방으로 모여왔다. “인제 한집식구 되는건데 인사나 해야지” 하면서 고사장은 이대리 이부장 김실장하며 그애들을 우리에게 일일이 소개하고 나서 김씨 아저씨와 전씨 아줌마도 그애들 한테 소개하였다.
전국 동항업에서 세번째로 크다고하는 이“센터”에는 백 사십 여마리의 종자 숫돼지가 있는데 자가용을 몰고 다니며 돼지 정액을 배달하는 총각 직원 여덟과 집에 앉아 정액 주문을 받는 처녀 직원 하낫, 그외에 고사장과 사육원 아저씨 그리고 새로 온 우리 둘, 도합 열 셋이다.
밥 짓기하던 아줌마는 한달 전에 가버리고 없었다. 그러니 고사장이 급히 수요로 하는 인원은 돼지 사육원이 아니라 밥하는 아줌마였다. 아이들이 아침을 거른대로 차 몰고 나가기가 일수고 두시쯤 배달일을 끝내고 하나 둘씩 돌아와 저절로 라면을 끓여 먹고 또 이튿날 배달해야 할 돼지정액을 채취해야 한다. 저녁 밥은 이애 저애 바꿔가며 대강 해 먹기도 하고 짜장면을 불러다 먹기도 하는데 이러다 보니 애들 건강에도 좋지가 않고 일에도 지장이 많았다.
나의 안해는 손등만큼 두터운 기름때로 장식된 주방을 청결 하느라 큰 고생을 하였다. 애들은 복스럽게 생기고 늘 상냥한 아줌마를 좋아 하였다. 아침에는 시원한 콩나물국에 뜨끈뜨끈한 새밥을 먹고 일 나갈 수 있게 되였고 돌아오는 차엔징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아줌마는 계란을 깨 넣고 라면을 끓여준다. 저녁이면 야채 무침이나 고등어 찜도 있고 계란 튀김도이나 중국식 “마라 두부”도 있는가하면 이따금 양돈호들에서 보내주는 삼겹살 구이나 삼겹살을 넣은 물만두도 먹을 수 있게 되였다. 한달 채소값 50만원이란 적은 돈으로 될수록이면 애들의 구미에 맞도록 하려고 새 아줌마는 무진 애를 썼다.
남새라던가 기름, 간장, 라면, 닭알, 두부, 고기등 무엇이든 북면 슈퍼에 전화를 치면 오토바이를 타고 즉각 가져다 준다. 아줌마는 밥 짓는 일을 하는 외에 날마다 주숙방부터 사무실까지 칸칸이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하고 애들의 이불과 작업복으로 부터 속내의까지 세탁기로 빨래하고 해볓에 말리여 차곡차곡 개이여 주군 하였다. 양말은 애들 모두가 네것 내것 없이 성하고 깨끗한 것으로 주어 신는터였다. 하루만 신고 화장실에 벗어버리면 아줌마가 세탁기에 굴려서 말리운 후 제 짝 씩 맞추어 이불장 서랍에 넣어둔다. 그러면 애들은 아무 때이건 제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신고 나간다. 그녀는 아줌마 노릇을 썩 잘 하고 있었다. 애들은 새 아줌마 앞에서 먼저 아줌마는 청소도 안 하고 빨래는 해본적도 없었다고 흉 보곤 하였다.
나는 이튿날부터 리아저씨와 함께 돼지 먹이는 일을 하였다. 저마끔 외바퀴 밀차로 사료 혼합기에서 배합된 사료를 받아가지고는 돈사로 밀고 들어간다.
돈사는 사무실 뒤에 둬메터 간격 두고 너비 열메터 길이 5-60m되게 지은 푸른색 양철기와를 얹은 조립식 집이다. 돈사와 사무실 사이 좌우에 벽을 세우고 여전히 푸른색 양철기와를 얹었다. 거기가 정액 채취실이고 집 원채 뒤벽에 작은 미닫이를 두겹으로 달아 놓았는데 그안이면 곧 정액 제작실이다. 제작이란 현미경으로 정액을 검사하고 비례맞게 희석제를 섞어서 진공밀봉하면 된다.
종돈들은 륙푼 바이프를 용접하여 만든 칸막이에 한마리씩 두줄로 벽을 향해 갇히여 있다. 두줄 칸막이 사이에는 현관처럼 둬메터 간격이 나 있는데 철판을 깔았고 철판 밑 함도엔 전동식 분변 송출기가 장치되여 있었다.
벽쪽에 난 철제 구유통이 달린 앞문을 열기만 하면 이미 훈련을 거쳐 습관이 돼 있는 종돈은 정액 채취실로 쏜살같이 뛰여가 가짜 암컷한테 업히워 용을 쓴다. 이때 채취원이 그놈의 페니스를 잡고 자극을 주면 유리컵에 대고 정액을 쏜다. 맥 빠진 놈은 자각적으로 채취실을 나와 이미 열어둔 뒤문을 거쳐 자기 칸으로 천천히 들어가 누워버린다. 백 이십마리가 륜번으로 돌다보니 4-5일에 한번씩 정액을 뽑게 되는 것이다. 슈퍼돈과 뭐라고 했던지 명칭이 기억나지 않는데 그 두가지 종돈뿐이다. 미국이나 카나다 그리고 유럽에서 한마리에 한화 백만원도 넘게 주고 수입해온 것들도 얼마간 있었는데 자국에서 개량한 십만원짜리가 다수다. 20여마리 미숙 예비 종돈은 커다란 남새 하우스같은 집에서 따로 키우고 있었다. 철관을 휘여서 박고 그 위에 비닐박막을 씌우고 그 밖에 또 방수포를 덮어 해볓을 가리웠다. 바닥은 콩크리트도 하지 않은 흙땅이다.
사료는 아침 저녁, 하루에 두끼니씩만 주는데 마른사료를 밀차로 밀고가면서 칸막이 철문에 달린 철통에 비닐바가지로 하나씩 퍼담아주면 끝이다. 돼지가 사료를 먹을 때 우리는 철편 갈퀴로 칸칸이 바닥의 돼지 분변을 “현관” 철판 밑으로 긁어내린다. 날마다 애들이 배달하러 나간 후 우리는 며칠간 예비돈 우리를 쳐 내는 일을 하였는데 충남 농업대학 필업 전인 대학생 아르바이트 애 둘도 우리와 함께 하였다. 그중 박 재성이라 부르는 애는 한달 후 축목학부를 졸업하고 우리 센터에 와 취직 하였다. 그애는 아버지가 규모 상당한 돼지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터라 장래에 그걸 물려받을 것이라 한다. 센터의 애들 거개가 대학을 나왔다는 것은 후에 안 일이지만 이로부터 한국 국민 문화 교육이 많이 벌전 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비돈우리 바닥을 깨끗이 쳐낸 후 하루 두끼 사료를 주고 분변을 긁어내고 나면 할 일이 별반 없었다. 창고에 들어가 둘러보니 마침 용접기와 용접봉 몇가치가 있는지라 할 일을 찾게되였다. 큰돈사엔 커다란 에어콘 두대를 량켠에 세워놓고 사용하는데 출입문 철제 문턱 안으로 지나간 실팍한 에어콘 전선과 동관이 로출 되여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의 발에 밟히우고 사료밀차 바퀴에 마구 깔리우면서 위험을 보이고 있었다. 문턱이란 것이 밀차 넘나들기를 고려하여 한 것이다보니 평지와 별반 차이가 없고 반면에 에어콘은 엄청나게 큰 것이라서 그 전선과 동관 또한 가늘지가 아니하다. 나는 페철 무더기를 뒤져 “ㄷ”자형 규격철을 찾아내다가 전선과 동관을 덮고 문턱과 함께 용접 해 버렸다. 그날 오후 고사장 눈에 그것이 뜨인 것이다. 아마도 오래간 근심 해 오면서도 누구하나 해결책을 찾지 못한 문제였던 모양이다. “이걸 아저씨 고쳤어요?” 하고 뻔한 의문을 던지며 흡족한 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은 매혹적이였다.
“사장님, 용접봉 한보루만 사다 주시요, 고쳐야 할게 많구만요.”
“그러세요. 그리구 앞으로는 다른것들두 뭐든지 수요되시믄 애들을 시켜 직접 사오라고 그러세요.”
그날 저녁 저녁상 앞에서 고사장은 분부하였다.
“너희들 잘 듣거라, 앞으로 아저씨가 뭣이 수요된다고 하시면 누구든 뭐든 총알같이 사다 드려야한다. 알았어?”
“옛! 알았습니다!”는 애들의 이구동성이다. 누구나 없이 군생활을 겪은터라 그맛이 났고 사회 습성이 그러하듯 사장님은 직원들 앞에서 절대적 권위이다.
“그리구 방 호성, 넬 들어 올 때 잊지 말고 용접봉 한보루만 사와라.”
“예, 알았어유.”
방 호성은 센터 애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서른 아홉살 로총각이다. 애는 마음도 곱고 일도 잘 하는데 술을 너무 하는 것이 흠이였다. “술 좋아하는 사람 마음 나쁜게 없다”고들 말은 하지만 술 많이 마시는 남자를 좋아하는 녀자 어데 있을까? 그래서 로총각으로 되고 로총각으로 되니 술과 동무하고… 호성이는 술 먹은 날 밤이면 먹을 알도 없는 랭장고 문을 열번도 더 여닫는다. 그리곤 아침을 굶은채 차를 몰고 나간다. 처음엔 홀로 살고있는 나의 처제와 짝 지어 주려고 하다가 그자식 술을 너무 하는 탓에 아쉬운대로 단념 했다. 원 남편도 술이 문제여서 헤여지고 만 것이니 술이 과한 남자라면 처제는 당초에 도리질이다.
이튿날 호성이는 용접봉 한통을 사왔다. 나는 돈사의 떨어져 거덜거리는 칸칸의 앞뒤 철문들을 모두 다시 용접하여 새것처럼 만들어 놓았고 마당 서쪽 모퉁이에 세워진 개우리도 새로 고쳐 놓았다. 센터에서는 “진도깨”등 명종견을 다섯마리나 가두어 기르고 있었는데 길다란 견사는 몽땅 새끼손가락만큼한 철근을 용접하여 만들어 놓은 쇠살창이였다. 헌데 그것을 그대로 땅바닥에 방치하였기에 보기가 싫거니와 엄중한 위생불결이였다. 나는 애들 차에 쓰는 쟈끄(千斤顶) 두개를 가져다 개우리 귀퉁이를 파고 넣었다. 벽돌을 주어다 받치면서 조금씩 떠 올리고는 한쪽켠에 먼저 한메터씩 되는 두 다리를 용접 한 후 또 다른 한쪽을 떠 올려 용접 하였다. “허, 진도깨도 인젠 빌딩에서 살게 되였네요!”하며 애들은 나의 앞에 엄지를 내밀군 하였다. 땅바닥에 딱 붙어 있던 철살창 개우리가 파아란 양철기와 밑에 반키 가량 허공에 뜨니 보기 좋고 깨끗한 것이 마치 한개의 멋진 경물과도 같았다.
나는 리아저씨와 함께 쎈터 주위의 잡초들을 깨끗이 베여버리고 휘발유 모터로 돌리는 팔랑개비식 낫으로 마당의 잔디밭도 가쯘하게 다듬어 놓았다. 앞산에 올라가 진달래 꽃나무도 두그루 파다가 안해와 함께 마당 앞 변, 주방 창문으로 환히 볼 수 있는 자리에 한그루씩 옮겼다. 누가 심은 꽃나무가 더 잘 피나 내기 하자며… 센터로 들어오는 차길과 산 사이로 물도랑이 났는데 큰 비가 올라치면 골물이 터져 내리면서 굽인돌이 길을 조금씩 핥아가군 하였다. 나는 비닐오리 주머니 서른여개를 주어모아 리아저씨와 함께 산비탈의 흙을 파담아서는 돌아 서서 굽인돌이 길목에 쌓아 놓았다. 인젠 아무리 큰 비가 쏟아져도 길목이 끊길 근심은 없게 되였다.
하루에 몇번씩 철편 갈퀴로 긁어내리고 고압물로 쏘아내린 돼지 분변은 반달에 한번씩 전기기계로 “현관” 철판 밑에서 돈사 밖의 커다란 콩크리트 구덩이에로 밀어낸다. 거기에서 분변과 오줌물이 자연 분리되여 물은 오수 정화 시스탬으로 흘러 들어가고 걸죽한 분변만 다시 외바퀴 밀차에 담아 분변 발효장에 가져간다. 콩크리트 구덩이와 분변 발효장의 직선 거리는 5메터밖에 안되지만 밀차를 밀고 에돌다 보니 30메터가량 된다. 원래는 전기 고압진공 뽐프로 흡입해서 발효장에 뿜어버리면 되는 일이였는데 그것이 고장 난지가 썩 오래 되였다고 애들이 알려주었다. 뜯어보니 여러 종류의 전기 뽐프를 수리 했었던 기계 전문가인 내 능력으로도 고칠 수 있는 것이 못 되였다. 오수 정화처리 시스탬의 고장 난 양수기도 고쳤었고 돈사 바닥을 물로 불고 돼지를 샤워시키는데 사용하는 고압 분사뽐프와 센터의 지하수를 빨아올리는 흡입뽐프도 손질 했으며 옛날엔 연길 공장에서 150메터도 넘는 깊은 땅밑의 물을 끌어올리는 큰 양수기(深井泵)도 사람들과 함께 수리 했었다. 헌데 분변 수송 진공뽐프는 깨여진 부속품을 바꿔야하고 그걸 바꾸려면 반드시 전문용 공구가 있어야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물로 깨끗이 씻은 후 배사장의 차에 싣겨 보내여 천안 시내의 전문점에 가서 수리 해 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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