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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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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나들이]23. 어머님의 슬하에로
2013년 06월 18일 08시 33분  조회:1845  추천:0  작성자: 김재진
23.  어머님의 슬하에로
 
 
고대하던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집으로, 어머님의 슬하로 돌아간다! 큰 누님께서 한국에 나오시기만 하면 우리는 떠날 수 있도록 준비가 다 되였다.
 
어머님께선 복수(腹水)가 와 배가 엄청 커지고 숨이 차고 음식을 드실 수가 없는 형편이였다. 두주일이나 큰 병원에 입원해 검진을 받았으나 진단도 내리지 못하고 많은 돈만 팔았다. 의사들은 어머님의 페를 조금 뜯어내여 검사하자고 제기하였다. 큰 누님을 비롯하여 모든 자식들이 동의하지 않았다. “아무런 일도 없는 페를 왜 뜯어낸단 말인가? 그랬다간 어머님의 건강하시던 페까지 상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였다. 진단도 내리지 못하는 병원에 그냥 누워 헛 돈만 팔 수는 없는 일이라 자식들은 어머님을 출원시켰다.
우리가 한국에서 돌아왔을 때는 어머님께서 병환에 계신지 이미 달포가 지난 후였다. 향란이네 집에 누워계시는 어머님은 전신에 살이 싹 빠지시고 배만 둥둥 불러계셨다. 병원에 가서 주사기로 두번이나 물을 뽑기도 하였다는데 그때 뿐이지 하루만 지나면 또 그대로 커진다는 것이였다.
연길엔 큰 종합병원도 많고 전문병원도 많고 교수문진이요 전문가 문진이라는 것도 많고 개체 진료소는 더욱 많다. 그많은 병원, 그많은 의사와 전문가들이 나의 어머님의 병환을 진단 못 하고 치료 못한단 말인가? 큰 병원에서 진단 못 했으니 어데 가도 안될거라고 착각 한다. 연변에서 안되면 북경 상해라도 모시고 가야 한다.
2002년 12월 초, 한국에서 돌아온 며칠 후 나는 택시차로 연길시내를 한바퀴 돌기로 작심하고 나섰다. 먼저 “무역청사” 뒷거리에 있는 교수문진부로 갔다. 차를 세우고 간판에 라렬된 글들을 읽어보니 소아과요 부산과요 치과요하는 것들만 적혀있는 것이 어머님의 병환과는 하나도 맞는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차머리를 돌려 “우전호텔” 동쪽거리에 자리한 전문가병원으로 갔다. 현관대청 계시판에서 내과 문진실을 찾았고 책임의사에 대한 소개도 상세히 읽어보았다.
리씨이신 60대 중반의 녀의사였다. 나는 흉부투시 사진한장을 그의 앞에 내밀며 인사하였다.
“수고 많으십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여기에 앉으시죠.”
“선생님, 제가 아픈게 아니구요, 왕진 좀 가주실 수 없겠습니까?”
“죄송한데요, 보시다 싶이 자리를 비울 수 없잖습니까? 어떤 환자십니까?”
나의 소개를 듣고난 리의사는 반드시 어머님을 모시고 와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였다. 맥이나 짚어보고 결론 내릴 증상이 아니니깐.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다. 큰 병원에서 많은 교수들이 보름동안 해도 진단 내리지 못한 병을 왕진으로 해결 받으려니 철딱서니가 없는 일이다.
나는 즉시 어머님을 모시고 다시 찾아갔다. 리선생님은 어머님을 침대에 눕히고 배도 만져보고 등거리에 청진기도 대보고 하더니 혈액 화험단 한장을 떼주었다. 화험실에서 혈액 채취를 받은 후 어머님을 집으로 모셔갔다. 몇분 안 걸려 진찰이 끝난 것이다. 신심이 가지 않았으나 당일 오후 화험단이 나올무렵 나는 세번째로 리의사를 찾아갔다.
“어머님의 병은 결핵성 흉막염입니다. 큰 병원에서 이런걸 진단 못했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니기다 불편하시니 주사약은 쓰지 않고 드시는 약만 뗍니다. 이것은 우리병원에서 사면 되고 이쪽 처방약은 결핵병 방치소에 가야 합니다. 그곳에밖에 없는 약입니다. 설명서들을 잘 보시고 그대로 대접하시요.”
리선생님은 약처방 두장을 써주며 설명했다. 나는 연신 감사 드리며 허리 굽히고 뒷걸음질로 내과 진찰실에서 나왔다. <우리 어머님 인제는 사셨구나!> 나는 기뻤다. “큰 병원에서 이런걸 진단 못했다고…”하는 리선생님의 한마디에 나는 신심을 가진 것이다. 큰 병원이라는 간판에 속히워 병을 키우고 돈을 잃고 죽어지고 하는 억울한 환자들이다. 우리어머님도 하마트면 당하고 말번하였다.
어머님의 병환은 기적처럼 사라졌다. 리선생님께서 떼여준 알약 서너가지를 드셔 일주일 전인데 어머님의 불렀던 배는 줄기 시작하였고 열흘도 안되여 통군 300원도 들이지 않고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말끔히 나아지셨다. 내가 한국에서 오기전 큰 병원에서 어머님의 페를 오벼내여 검사하려 할 때 동의하지 않은 큰 누님과 형제들이 잘 한 것이였다. 세상 뜨실줄로만 알았던 어머님께서 다시 건강을 찾으시니 온 집안이 기쁨에 넘쳐 난리였다. 
두해 후인 04년 12월 중순께였다. 룡연 “천애양로원”에 계시던 어머님은 허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기침을 조금 깃어도 숨넘어갈 지경으로 통증이 난다는 것이였다. 골질증식이나 허리 척추뼈 돌출일 것이라는걸 누구나 다 안다. 절대 다수의 로인들이 겪어야 하는 질환이니깐. 많은 자식들을 낳아 키우시고 그 자식들을 위해 평생 허리 굽히고 농사 지어온 그이들 허리에 이상이 오지 않으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어머님은 또 향란네 집에 누워계시게 되였다. 얼마간 견디면 절로 나아진다며 절대 병원에는 가시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그처럼 모질게 아프시면서도 간신히 몸을 굴려 화장실로 기여 가 볼 일을 보시군 하셨다. 어머님께선 원래 여간만 불편하셔선 내색을 내지 않는 분이시다. 지통제를 잡수며 반달간 누워계셨으나 나아지질 않았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라디오 방송광고를 통해 “골영양소”가 중로년의 허리 척추병을 잘 치료 한다는 것을 알게되였다. 많은 사람들이 “광고약”이란 값만 비싸고 효과 저질이라고 여기듯 나도 례외가 아니였다. 허지만 어머님께서 아프신데 비싸면 어떻고 효과가 없다면 어떤가? 자식으로서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시는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05년 1월 1일 아침, 나는 “신약 대약방” 앞에 서서 문 열기를 기다려 첫 손님으로 들어갔다. 한개 료정에 두곽, 값은 2원 없는 300원이다. 효과가 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태산 같은데 신심은 5%이다. 무슨 약이나 광고사대로만 된다면 세상에 앓는 사람이라고는 없을 것이고 병원은 죄다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또 기적이 나타났다. 어머님께서 일주일간 약을 복용하시더니 일어서실 수 있게 되였고 두주일(반개료정)이 지나니 아픈데 없이 말끔히 나아졌다. 광고약이 이같은 기적을 낳아 사람을 놀라게 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드시 새해의 첫 날 첫 사람으로 약을 사다가 어머님께서 완쾌 하시기만을 기원하며 드렸더니 감천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내아들 효자요, 두번이나 죽을걸 살렸어…” 어머님은 감탄, 치하, 자랑을 아끼지 않으셨다. 내가 무얼 해드린 것이 있다고? 편찮으신 어머님께 약 조금 사다드리는건 너무나도 지당하고 작은 일인데. 어머님께서 평생 자식들을 위해 쏟은 사랑과 고생에는 비길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큰 누님께서 드디여 한국에 나오셨다.
우리가 돼지농장에서 일년간 벌어 모아둔 돈 천 칠백만원을 찾아내여 인민페와 바꾸었다. 둘이 일년반 꾸준히 일해 번돈이 인민페로 십만원이다. 한국에 나온 많은 친구들은 한사람이 백만원을 목표로 한다고 들었다. 우리부부는 5만원씩 벌고서도 만족하였다. 친척들을 다 만나보았고 곳 구경도 실컷 하였고 생활체험도 마음대로 하였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돈보다 더욱 소중하고 얻기가 힘든 것이다. 삶에 있어서 돈이 없어서는 안되지만 전부는 아니다. 어머님께서 오늘일까 래일일까 하신다는데 돈을 더 벌겠다고 눌러 앉아 있는다면 사람도 아닌 삶이다. 큰 누님께선 “엄마는 인젠 년세가 많아 그러시니 방법이 없다.”고 하셨다. 이미 실망 한 것이였다.
“아닙니다, 외할머님 93세에 돌아가셨으니 어머니는 아직 적어도 10년은 더 앉으셔야합니다. 백세까지 사시면 더욱 좋구요.” 이는 모든 자식들이 그러하듯 나의 욕심과 소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였다. 뭐든 욕심과 소망대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세상만사는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 큰 누님의 실망도 지당한 것이라 나는 더욱 한시급히 어머님 슬하로 돌아가야 했다. 어머님의 병치료를 하더래도 내가 해야하고 후사를 치러도 내가 있어야한다.
한국에 나오시자마자 큰 누님께서는 허리가 아파 들어눕게 되였다. 이역시 년세 탓이다. 나이 들고 탈 없는 사람이 드물다. 마침 전해 봄에 남산타워 오르는 길에서 만났던 김원장님께서 다시 나와계시기에 전화를 쳤더니 찾아 와 침도 놔주고 약도 주어 누님께선 인츰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큰 고모님께선 여전히 건강하셨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날 저녁 우리는 큰 누님을따라 윤현형님 집으로 작별 인사드리려 갔었다. 한국에 와서 돈 좀 벌었노라고 고모님께 용돈 10만원 드리면서 큰 절 하고 나왔더니 형님께서 따라나와 우리에게 기어이 10만원을 도루 넣어주는 것이였다. 그것이 그것이지만 “느그한티서 용돈 다 받어본다 잉, 고맙게 잘 쓰것다.”하며 기뻐하시는 고모님을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도 더없이 기뻣다. 이렇게 헤여지면 언제 다시 뵐지? 고모님 생전엔 다시 뵐 수 없을 것은 사실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그나마 서로에게 기쁜 마음을 남길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였다.
고향에도 한바퀴 다시 돌면서 절 올렸으면 좋으련만 어머니에 대한 근심으로 한시가 급한지라 전화를 걸어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2002년 11월 29일 오후 세시반, 우리는 고국에 대한 련민의 정을 한가슴 가득 품고 하늘 높이로 날아 올랐다. 안녕히, 대한민국이여! 가슴으로 웨치며 구름위에서 날았다.
 
2007년 07월(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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