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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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중편]거미-이 남자가 소설을 만드는 방법 댓글:  조회:643  추천:0  2019-07-19
소설 거미-이 남자가 소설을 만드는 방법 조광명     소설 하나. 똥별 거미- 평범한 아침, 픽션과 논픽션과 시와 노래에 관하여 지극히 평범한 아침이였다. 온 밤 산 너머 동굴 속에 똬리를틀고 앉아 정염으로 몸을 불태우다가  더는참을 수 없어 뜨거운 불덩이 토하려고 나온 뱀처럼 어느새 벌써 산등성이를 스르륵 기여넘은 태양은 ‘이 도시엔 도심 속에 산이 있어서 대부분 곳에서머리만 들면 산을 볼 수 있다’ 뜨거운 혀를 날름거려 짙푸른 나무잎들을 콕콕 찌르며 희롱하고 있고 나무잎들은 해빛의 롱락질이 즐겁기만 하다는듯지레 농염하게 물오른 몸뚱이를 그대로 내맡기고 앗 뜨거, 앗 뜨거, 짙푸른신음을 느침처럼 흥건하게 흘리고 있었다. 빛과 잎이 한데 뒤엉켜 아침부터 뜨거운 헐떡거림이 연출되는 맞은켠산등성이의 질펀한 풍경을 베란다 창문유리 너머로 내다보다가 나는 식탁 앞에 나앉았다. 녀자의 손가방에서 방금꺼낸 작은 손거울이 반사하는 빛화살 같은 것이 맞은켠 건물에서 한줄기 곧게 뻗어나와 베란다 미닫이 샤시문을 통과해서 들어와서 아침 식탁 원목 다리에동그란 빛살 도장을 암팡지게 찍어놓고 있었다. 그 빛줄기 속으로 다리 맨살을 들이밀면 그대로 다리에 나있는체모가 그을러 연기가 피여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실내엔에어컨이 령상 24도를 유지하며 빵빵 돌아가고 있으니까. 시원하다. 멀리 할빈에 있는 친구의 위챗은 령하의 추위를 자랑하고 미지근한 난방 공급을 원망하고 있는데 여기는 아직 뜨거운불볕더위가 기승이고 에어컨 랭방 타령이다. 슈퍼에서 산 믿을 수 없는 요구르트가 아닌, 집에서 가열기구로직접 만든 믿을 만한 자작 요구르트를 한스푼 퍼서 입에 넣는다. 맛을 내느라 요구르트에 섞은 꿀은 장인어른이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순박한 양봉농장 주인에게서 직접 사서 들고 온 무공해 천연 야생꿀이다. 찜통으로속까지 익혀 쪄낸 빨간 도마도 하나가 접시에 담겨 올라온다. 두개를 삶아서 함께 먹자고 하는데 안해는 삶은도마도를 먹지 않는다. 암도 예방하고 건강에 좋다잖아. 난 암걱정을할 나이가 되여서 도마도를 챙겨먹는데 안해는 입맛에 맞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아직 젊어서 건강 앞에 건방지다. 그 건방짐을 꺾을 힘은 내게 있는 게 아니라 세월에게 있다. 세월이 십년 쯤더 지나면 스스로 알아서 건강을 챙기게 될 것이다. 그냥 딱 내 것 하나만 삶는다. 도마도 하나를 익히려고… 가스가 아깝다.  입에 넣자마자 그대로 넘구어버리는 요구르트의 감기는 뒤끝이 말 그대로 달짝지근 꿀맛이다. 속까지 익은 도마도를 우물우물 제대로 씹지도 않고 넘긴다. 위에 부담이 가지않는 가벼운 식사에 천년을 살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백년도 못 사는 인생이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천에서백을 빼고 구백을 허망 날리는 계산 같은 건 해보지도 않는다.  새벽 꿈에 형님이 보여서 잠에서 깬 후 약간 걱정이 생겼었다. 60이다되여가는 형님이 꿈에 보였다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다. 혹시 형님의 건강에 이상이 온 게 아닐가 하는걱정이 은근히 생겼다. 전화를 해볼가 하다가 그만두었다. 형제간이라하지만 왜 별로 할 말이 없는지 모르겠다. 그냥 걱정이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아까 잠에서 깨여 지금 아침식사 시간까지 형님에게서 혹은 형수에게서 혹은 형님네 가까이 한동네에 살고 있는 조카딸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는다는 건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뜻일 게다. 형제니까 뭐 꿈에 보일 수도 있는 거지. 안해가 계란후라이가 담긴 접시를 내  앞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 오늘 오전에 직원 하나 면접 보기로 했어요. 같은 값이면 일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뽑았어야 하는데 일어를 할 줄 모르는 직원을 뽑았더니 매우 비효률적이예요. 딴딴이 내 업무를 서포트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걔 업무 뒤시중을 들어줘야 한다니깐요. 걔뒤치닥거리 해주다 나면 내 할 일 바로 못해요. 일어 잘하는 직원을 새로 한명 더 뽑고 딴딴은 그냥 간단한재고관리나 시키든지 오더관리에선 손을 떼게 해야 되겠어요. 하들하들 감칠맛 도는 후라이다. - 응, 좋은 생각이야. 요구르트와 익힌 도마도와 계란후라이.  다이어트 건강식이다. 그래도 내배는 들어가지 않고 점점 더 나온다. 내 배속에 들어있는 것들이 궁금하다. 배가죽이유리처럼 투명하다면 그 안에 도대체 어떤 것들이 들어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무브먼트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시계가 있듯이 투명한 배가죽 너머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배속의 내용물들. 그러면 나의 식욕은 더러 줄어들 수있을가. 이루는 일 없이, 눈에 띄게 하는 일 없이 식욕만 늘어난다. 올 들어 내 배속에 들어간 요구르트만 해도 십리터는 넘을 것이다. 여보, 슈퍼에서 수입제 요구르트 1리터에 얼마씩 하지? 묻고픈걸 묻지 않았다. 아무튼 맛있는 요구르트다. 혁명을 사랑하는 자의 아침에는요구르트와 빵이 있다고 했다. 아니 뭐, 빵과 우유 어쩌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빵이면 어떻고 도마도면 어떠하며 우유면 어떻고 요구르트면 어떠할 것인가. 그말을 할 때 아마 모택동은 짚신을 신고 있었을 것이다. 이마가 벗겨지고 수염을 기른 레닌이 이 말을 했던가…상관없다. 아무튼 혁명도사가 한 말이여서 빵맛이 무엇이고 우유맛이 무엇인지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문구다. 근데 왜 짚신 신은 모택동의 형상이 떠올랐을가. 수염을 기른 주은래는 분명짚신을 신고 있었다. 중국공산당 혁명승리 선전화보에서 보았던 기억이 분명 있다.레닌은 천으로 된 신발도 신지 않고 가죽구두만을 신었을 것이다. 로씨야, 아니 쏘련이 아닌가. 사회주의경제 먼저 훌쩍 자본주의경제가 발전했던 모택동은천으로 된 신발과 짚신을 엇바꾸어 신었을 것 같다. 모택동은 쌀이 흔한 집안에서 태여났다. 짚신 엮기 좋은 벼짚도 흔했을 것이다. 짚신도 흔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렸을 때, 집에 있을 때, 혁명의길에 오르기 전에는 절대로 짚신을 신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유한 집안이였으니까.천으로 누빈 신발을 신었을 것이다. 장정길에는 짚신을 신기도 했을 것이다. 전사들 먼저 솔선수범으로 짚신을 신었을 것이다. 그만큼 홍군은 가난했고 혁명은간고했다. 물론 혁명이 승리하여 대국의 령수가 된 다음에는 가죽구두도 신었을 것이다. 가죽구두를 오래 신으면 발에 무좀이 생기기 쉽고 짚신을 신은 발에는 절대 무좀이 생기는 일은 없을것이다. 사실 뜨거운 남방의 도시에서 구두를 신으면 무좀에 걸리기 쉽다. 어떤땐 발이 간지러울 때도 있다. 무좀인가. 시인, 무좀에 걸리다. 혹은 소설가, 무좀에걸리다. 이런 소설제목이라면 꽤 재밌는 제목이지 않겠는가. 독자들의고약한 호기심을 꼬드길 수 있는 미끼 제목이 될 것 같다. 무좀으로 소설 한편 써본다꼬? 그러나 무좀에 대해서 전혀 연구해본 바가 없다. 나는 무좀에 걸린 시인일 수도, 무좀에 걸린 소설가일 수도 있겠다. 대안은 짚신 신는 거. 짚신을 신고 광주거리를 활보해볼가. SNS에 빨간 스타로 데뷔할 지 모른다.   광주탑 버전:올 빠리 패션무대를 황홀하게 장식했던 아마니 코트에 루이비통 가죽가방 들고 짚신을 신고 아시아 최고를 자랑하는 광주 타워에 오른다. 타워 정상에서 짚신을 벗어 타워 아래로 활 내던진다. 짚신은 광주 타워 아래흐르는 주강에 두마리 나비처럼 사뿐히 내려앉아 사랑하는 련인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배처럼 둥둥 주강 우에 떠내려간다. 강물은 내 추억을 싣고… 라는 내레이션이아득한 울림으로 멀어져간다.   쌍둥이빌딩 버전: 나뽈레옹 양복차림에 오드리 햅번을 사랑했던 남자의 중절모자를 쓰고 짚신을 신고 자본의 힘으로 우뚝 솟은 아시아 최고높이의 쌍둥이 빌딩을 드나든다. 내 짚신 옆으로 영화필림이 빨리 돌아가듯 총망히 오가는 화려한 하이힐들과먼지 한톨 묻지 않은 반짝이는 신사 구두들. 흐르는 자막.영원한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중산기념당 버전: 호주머니 네개 단 중산복에 개화장 짚고 짚신을 신고 중산기념당을 방문한다. 손중산이신었던 구두를 전시한 옆에 내가 신었던 짚신을 벗어서 놓는다. 아직 살아있는 내가 신었던 짚신은 죽은 지몇십년 되는 손중산이 신었던 구두보다 더 관람객들의 관심을 끄는 력사 유물이 된다. 역시 자막. 력사를읽을 때 당신은 어느 신발을 신을 것인가   끝없다. 짚신 신고 광주 핫플레이스 다 찍고 다니려면. 다 누비고 다닐 필요 없이 대충 이 정도 컨셉이라도 충분하다. 광주가 아니라전 중국 인터넷을 화끈 달구는 스타로 금방 데뷔할 것이다. 중국 정부가 차단한 유튜브를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갈지모른다. 비욘세가 울고 갈 스타로 데뷔할지 모른다. 비욘세가 오르는무대에 짚신을 신은 백댄서들을 세우면 더 멋있을 것이다. 디지털시대 짚신 신은 아날로그 스타. 그 다음엔… 당연히 짚신 장사 해야지. 스타가 뭔데? 스타는 상품이다. 그가치가 한껏 부풀려진 거품 상품이다. 거품이 사라지기 전에 스타를 팔아 자본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별은 별일 뿐이라구. 반짝인다구 돈이 아니라구. 팔아서 돈으로 만들어야 한다구. 빨깍빨깍 새 돈이 아니고 때묻고 구겨진 것이라두 괜찮다구. 돈, 좋은 거잖아. 비단장사 왕서방 아닌, 짚신장사조서방이 되여본다꼬? 해본다꼬? 부자가 되는 건 금방이다. 만약 잘 팔리지 않으면… 넌 그게문제야. 왜 걱정부터 앞세우냐고. 안 팔리면 그냥 안 팔린 짚신 우에누워 자면 되잖아? 시몬스침대를 릉가하는 안락함-짚신침대. 이 컨셉트를 떠올리면 되잖아? 달리는 짚신, 달리는침상. 재밌을 것 같다. 이게 더 돈장사 될 것 같다. 이왕 하는 바엔 크게, 하나씩 팔 게 아니라백개 천개를 한데 묶은 패키지 침대상품으로팔아야 한다. 짚신 침대를 팔아야 한다. 침대 하나면 짚신 천컬레가팔리는 셈이다. 침대가 잘 팔리지 않으면 침대 우의 사랑을 함께 팔면 된다. 짚신침대 우의 사랑은 짚에 찔려 따끔따끔 아플 것이다. 무릎이 까져서 피가 흐를 수도 있다. 그러나 장렬하지 않은가. 피 흘리는 사랑의 처절한 몸부림.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 사랑은 피로 물들여야 한다.피맛을 본 사랑은 더욱 황홀하고 소중하다. 사랑의 가치는 무한하다.돈이 벌어지지 않을 땐 이런 허황한 환상이라도 해봐야 한다. 방금 식탁에 마주앉기 전에 몇천키로  밖의 후배가 위챗으로 사진 한장을 보내왔다.유리상자 안에 갇혀있는(혹은 모셔져 있는) 짚신을 찍은것이였다. 어느 박물관에서 핸드폰 버튼을 눌러 찍은 것 같았다. 후배또래의 세대에겐 신기한 박물일 수도 있었다. 어, 이런 걸 발에 신어? 발 껍질 다 까질 것 같은데. 그래, 당연히까지지. 홍군은 그런 신발을 신고 2만 5천리를걸었다. 너희 세대는 그런 걸 모르지. 나는 어릴 때 그런 짚신을 신어본적이 있다. 우리 집이 너무 가난해서가 아니라, 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솜씨좋은 옆집 할아버지가 하도 심심했던지 벼짚으로 신발을 만들어 내 발에 신겨보았던 것이다. 까칠까칠하고 뾰족한 짚오리에 발등이 찔려서 아팠다. 나는 한번 신어본 그 짚신을벗어서 지붕 우로 휘익 날려보냈다. 시집 가라  멀리 가라, 낡은 신발은 가고 새신발은 오라… 하고 혼을 부르듯 세번씩이나 웨쳤다. 이갈이를 할 때 이발이 빠지면 엄마가 나더러 이발을 짚이영을얹은 지붕 우로 올리던지게 했다. 낡은 이발은 가고 새 이발은 오라 하고 웨치게 했다. 내 이발과 짚신은 지붕 우에서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을가. 신나게 놀았을 것이다. 버린 것들은 소중하다. 그래서 기억에 아직 남아있을 것이다. 후배녀석도 참, 마른 짚신으로 아침 인사 한번 깔깔하게 하는군. 짚신 너무 말랐어. 물 좀 뿌려주세요. 마른 짚신은 물 좀 먹여줘야 녀자처럼 부드러워지거덩. 나는 위챗에 탁 탁 탁 타이핑했다. 오른손 식지 하나로. 요즘 물값도 벌지 못하거든요. 아 그리고 부드럽지 못하고 도끼날보다더 서슬 푸르고 강한 녀자도 많답니다. 지금 막 생수 한박스 광속택배로 보냈으니까 당장 문을 열고 받아요. 물많이 먹어, 물 먹고 힘 내. 가뭄에 단비, 고맙습니다. 구제하는김에 쌀까지… 쌀 먹으면 살쪄. 물만 먹어. 물배채워. 물로 흘러오소서. 선배님 출렁이는 물배 우에 마른 짚신배 띄우리다. 녀석도 이 아침 조금 한가한 모양이다. 날아오는 멘트 속도가 빠르다. 식사와위챗 채팅이 다 맛있다. 이번엔 좀 길게 적어보낸다.   아침 모자는 채양이 떨어져나가고  저녁 옷자락은 때가 꼬질꼬질, 대낮 짚신 바닥엔 구멍이 나서 온 하루 발바닥이 땅바닥에 키스한다네.   짚신신발에 가장 잘 어울리는, 30여년 전 TV 브라운관을 달구었던 핫캐릭터계공济公의 형상이 떠올라 적은 것이다. 다른말 대꾸 없이 후배가 ㅎㅎㅎ 모음이 딸리지 않은 자음 웃음소리만 보내왔다. 내 유머에서 계공의 모습을 제대로읽어내지 못한 게 뻔하다. 그래서 그냥 웃는 시늉을 하는 거다. 나도 모음이 삭제된 웃음을 “ㅋㅋㅋ” 보낸다. 무식이 앞에 유식이 노릇 할 필요 없다. 위챗에서 항상 “ㄹㄹㄹ” 혹은 “ㄷㄷㄷ” 하고 이상하게 웃는 친구가 있다.  “ㄹㄹㄹ” 혹은 “ㄷㄷㄷ”가 어떤 웃음소리인지감이 잡히지 않아서 그대로 친구를 모방해서 “ㄹㄹㄹ”, “ㄷㄷㄷ” 웃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웃음소리가 나가주지 않았다. 그래서 “ㅈㄹ” 하고 적어보냈었다. “ㅈㄹ”가 뭔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여기에 그 발음을 다는 적지말자. 위챗은 지금 한창 줄인말 시대라 하지 않는가. 모음삭제도 일종의줄임현상이다. 어느 교수가 언어사용의 규범화를 강조하며 내 어느 수필 속 모음 없는 웃음소리의 문자화 표현을걱정하는 어투로 따끔히 꼬집어준 적이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자음으로만웃는 시대인 걸. 그래서 언어표준사전은 항상 시대에 뒤떨어진 박물 같은 거다. 교수들의강의내용이 항상 박물관 설명문처럼 따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곰팡이 냄새로 퀴퀴하듯. 짚신 신발 아닌 회색양말을 신고 깊은 수렁 같이 질척이는 혁명의 장정길 아닌 반들반들한 타일바닥을 딛고 나는 지금세월에도 짚신을 엮을 줄 아는 사람 있나보네 하고생각한다. 살아있는 인간문화재의 마지막 솜씨일지 모른다. 혁명엔 더필요 없는 솜씨이겠지만 한세대의 기억을 위해선 소중한 자산이다. 짚신보존연구회 같은 게 이미 설립되여있는지도모를 일이다. 짚신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저 너른 하늘에 넘치는 뜨거운 태양빛과 태양열을 담는 그릇을 만들어빛과 열을 파는 장사를 하면 진짜 더 대박일 건데. 태양에너지팩을 만드는 거다.그 태양에너지팩에 그냥 공짜 태양빛을 물 담듯 공기 담듯 척척 퍼담는 거다.  태양이라는 블랙홀은 퍼도 퍼도 줄어들 줄 모르고 그냥 그만한 거대한 에너지자원이다. 그걸 그릇 용량에 따라 다양한 가격정책을 만들어 도매하고 소매하는 거다. 달리는 차에 그걸 부착하면 휘발유 필요없이 그대로 빵빵 신나게 달린다. 환경도보호되고… 집 천정에 매달면 그대로 환한 등불이 된다. 이렇게 대박 아이템을 하루 아침에 두 세가지씩이나 떠올리는데 돈은 벌어지지 않는다. 아직 내 돈이 세상 어느 구석에 숨어있는지 찾안해지 못했다. 돈 보는 눈은따로 있다고 했다. 돈 벌 놈이면 글쟁이가 되었겠냐  하고 속으로 가난한 스스로에게 피씩 썩은 미소를 날린다. 아차, 오늘이 친구가 어느 문학상 시상식에 수상자의 신분으로서는 날이라는 것이 떠오른다. 상 타러 간다고 어제부터 요란히 위챗을 장식하던 친구다. 그렇게 위챗동네 요란하게 수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친구야말로 진짜 문학을 사랑하는 놈이구나 하고 생각한다. 난 왜 예전에 상을 탔을 때 별로 남들 앞에 자랑 같은 걸 하고프지 않았을가. 주니까받아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냥 받았던 것 같다. 얇은 상금 봉투는 아쉽지만 얇은 대로 챙기고 멋있게 만든상패 같은 건 그냥 다 버렸던 것 같다. 돈 주고 만든 상패, 필요하면돈 주고 다시 더 이쁘게 제작하면 된다. 그걸 무겁게 집으로 들고 가고 좁은 집안에 자리를 차지하게 모셔둘필요가 없다. 상 타려고 글을 쓴 게 아니잖는가. 글에 어떤 내용을썼던지도 생각나지 않는데 그 글로 탄 상패를 박물관에 박물 모시듯 집에다 모셔선 어쩔 건가. 상패가 다시필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리력서에 무거운 상패가 들어갈 것도 아니고. 상패같은 거로 자기에게 최면을 걸 일은 없다. 과거를 모셔둘 일은 없다. 이미탄 상보다 아직 타야 할 상이 더 남아있을 거다. 래일도 나는 글을 쓸 것이니까.상 같은 거 생각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부지런히 쓰다 나면 어느 순간 상은 저절로 차례지게 되여있다.  외로운 문학인의 길이지만 글은 작가를 속이지 않는다. 작가를 작가 대우해주는 건 그 작가의 글이다. 그 외의 것은 다 헛것이다. 친구에게 개톡을 날린다. 오늘 시상대에서 가장 빛나는 별똥이되거래이. 별이 아닌 별똥이라는 표현에 키들키들 웃을 친구의 모습이 련상된다. 똥이라는표현도 별과 함께 나란히 하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이 되는가. 별똥, 별보다아름답게 안겨오지 않는가. 거꾸로 똥별이라고 적어도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이 될 것 같다. 똥별, 별똥 못지 않게 입에 착 감긴다. 느낌좋은 단어다. 그런데, 사전엔 아마 똥별이란 단어가 아직 올라있지 않겠지싶다. 아직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생경한 단어, 완전 새 단어, 팔팔 끓는 물에 갓 쪄낸 두부 같이 따끈따끈한. 내가 올려버려? 출판사에서 우리 말 사전 편집을 하고 있는 친구다. 사전편집을하다가 좋은 단어를 만나면 그대로 참지 못하고 내게 날려보내오거나 드문드문 듣보잡 생뚱맞은 단어를 날려와 유식을 뽐내군 하는 친구다. 나는 그 친구를 살아있는 사전이라고 불러준다. 그 친구더러 슬쩍 사전 속에똥별이란 단어를 끼워넣으라고 꼬드겨볼가. 수만개 단어가 들어가는 사전에 슬쩍 새로운 단어 하나 끼워넣는다고그걸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출판사에 없을 것이다. 그 친구가 최종 교열을 본다고 했으니까. 똥별. 그렇게 그 사전에 들어가서 출판되면 그건 당당한 우리 말 표준단어가되는 거다. 표준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다. 똥별은 그렇게 후대에 길이길이반짝이는 단어가 될 것이다. 재밌을 것 같다. 똥별의 뜻을 어떻게 해석해줄가. 꿈보다 해몽이라 했다. 단어보다 해석이 멋있어야 한다. 뭐, 단어의 뜻은 친구더러 알아서 맘대로 버무려넣으라고 하면 되지 머. 하다못해, 별들이 총총한 밤 엉치를 별하늘 향해서 들고 눈 똥- 이런 식으로 해석해도 멋있지 않겠는가. 아니다, 엉덩이를하늘로 들고 똥 눌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지구는 둥글다 했다. 그뜻은 우리가 머리를 쳐들고 보는 하늘만 하늘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중심 원점으로 해서 우리 주변에 원형으로 구형으로 어디나 우리를 감싸고 있는우주 전체가 다 하늘이 된다는 뜻이 아닐가. 그러면 내가 앉아서 눈 똥이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는 하늘의별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주로 우주 속으로 한없이 떨어지는 똥, 똥이추락하는 속도는 별의 운행속도가 될 것이고 어쩜 가장 황홀한 황금색 별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하늘에서 황금색 별을 찾아본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우주의 유일한 황금색 별-똥별.  이건참 기가 막힌 우주론적인 사유방식이다. 천체론적인 발상이다. 내가 별자리볼 줄은 몰라도 똥별같은 소리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줄 지금 막 발견하고 너무 대견스럽다. 우린 항상 그런 식이다. 니 밥 먹었나 인사보다도 목구멍에기름칠 좀 했냐 하고 묻는 것이 우리 사이엔 더 어울린다. 항상 우리는 그렇게 서로 둘만 빼딱해서 좋았다. 진지함보다 시시함이 가벼워서 좋은 것이다. 나의 아침식탁엔 어느새 깨끗이 비워진 접시만 남았다. - 눈이 깔깔하다고 자기 전에 핫팩을 눈에 붙이군 하면서도식사하면서까지 휴대폰 손에 들고 있어요? 핫팩은 사랑스런 어느 문학후배가 내 시력을 걱정해 보내온 것이다. 자극이심한 한약재로 만들었는지 눈두덩에 올려놓으면 눈껍질이 바늘로 찌르는 듯 따끔따끔 해나고 약냄새도 심하게 고약하지만 그러나 후배의 마음이 고마워서따가운 것도 참으며 저녁마다 열심히 눈에 붙인다. 사용설명서에 적은 권장 부착 시간 20분을 채 마치기 전에 항상 잠들어버리군 한다. 수면제 대용 핫팩으로 팔면더 대박날 아이템이다. - 아, 오늘 냄이 그친구 연문 문학상 타는 날이야. 축하 멘트 한마디 날려줬어. - 당신 오늘 다른 외근 계획 없으면 나 대신 면접을 봐줘요. 난 오전에 세라톤호텔에 가서 사람을 만나 상담하기로 약속이 잡혀있어요.  - 오케이. 안해가 부탁하지 않아도 면접은 항상 내 몫이였다. 사람 보는눈은 나이와 정비례한다. 첫 대면에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내가 안해보다 나았다.  안해가 달랑 계란후라이 하나만 얹어 놓은 접시를 들고 내 앞에 마주앉는다. 저녁 식사량은 내 식사량보다 작지 않은데, 아침 위는 너무 작다. 그런 안해 눈가의 주름살이 눈에 밟혔다. 세월은 곱던 내 녀자의 눈가도 비껴가주지않는구나. 그렇게 가늘던 허리에 나이살이 붙어서 저녁에 뒤에서 안으면 아래배에 뭉친 살집이 몽실몽실 손에잡히듯 눈가의 주름살도 지극히 정상적인 년륜의 기록이겠지만 조금 안스럽다. 못난 남편 만나서 고생하는 것같아서. - 녀자들 눈에 바르는 영양크림 같은 거 있잖아, 그런 거랑 사서 바르고 그래. - 바르는 게 그래요. 별로효과 없어. 괜찮아, 정상이지 머. 이나이에. 오히려 녀자가 태평이다. 하긴 뭐 그 나이에 눈가에 주름이없으면 비정상이지. 내 머리에 어느 날부터 흰개미처럼 기여오르기 시작해 죽죽 흰색을 회칠하기 시작한 세월의심술을 난들 어쩔 수 있었던가. 반백의 나이에 머리가 반백이다. 난 식탁 앞에서 일어섰다. 내가 후루룩 우물우물 한입에 삼켜버릴계란후라이를 안해는 먹네마네 몇분은 억지로 씹어서 삼킬 것이다. 그 사이 나는 구레나룻과 코수염과 턱수염을차례로 깎고 손에 하드 쓰리 레벨의 젤을 묻혀 헤어스타일을 좀 후레쉬하게 만든다. 막 헝클어뜨려 질서없이마구 당겨 세우는 스타일로. 유치원 아이들이 할머니, 할어버지,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가까운 동네 유치원으로 향하고 있다. 노란 경고등을 지붕 우에 네개씩이나 달고 반짝이는 노란색 스쿨뻐스가 여러대 동네 앞에 멈춰서 있었다. 영남신세계라고 이 도시에선 꽤 큰 동네이다. 가로세로 동네 안을 지나는 도로에교통신호등이 네개나 있다. 큰 동네인 만큼 애들도 많다. 남방사람들은아이를 많이 낳는다. 기본이 두 셋은 낳는 것 같다. 번식욕과 종족유지욕혹은 가족번영욕이 무지 강한 사람들이다. 어린 아이들이 많아서 생기찬 동네다. 좋은때지, 좋은 때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슬로우리 슬로우리…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최대한으로 죽여 동네 유치원 앞 그리고 동네 초등학교 앞에 너무 과장되게높게 만들어져있는 네개의 콘크리트 과속방지턱을 다 통과한 후 나는 오른발에 힘주어 엑셀을 밟았다. 차는 부르릉용을 쓰면서 토끼처럼 앞으로 튀였다. 운전할 때면 나는 푸른 들판을 질주하는 야생마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숲에서 뛰여나오는 토끼를련상하군 했다. 언젠가 어느 려행길 어느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그냥 허허벌판 사막한가운데 모래 웅뎅이를 파고 그 안에 등을 누이고 잠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었다. 너무 환장하게 밝은 달빛아래여서그보다도 너무 배고프고 목 마르고 추워서 숙면에 빠져들지 못하고 반수면 상태의 환각 속에 사막에 넘치는 하얀 밥그릇들과 밤하늘에 달처럼 주렁주렁매달린 하얀 박 같은 생수통들을 세여보다가  어떤본능적인 직감에 눈을 떴다. 환각이 아니였다. 정말 칠팔메터 되는 거리에커다란 흰 토끼 한마리가 앉아서 내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저걸 잡아먹어야 한다.혀끝이 쨍해나고 군침이 꼴깍 넘어갔다. 노아의 방주였다, 내지친 육신에 생기를 불어넣어줄. 나는 야외 려행 때마다 옆구리에 항상 차고 다니던 야외 생존용 비수를 슬그머니오른손에 들었다. 한번의 기회 밖에 없었다. 입 안엔 어느새 토끼고기향이머리가 어질어질하도록 차넘치고 있었다. 온몸의 신경과 힘을 오른손에 다 집중해 비수를 날렸다. 교교한 달빛을 가르며 은빛이 번뜩였다. 순간 토끼가 날아올랐다. 기다렸다는듯. 날아가는 비수를 향해 솟구쳐 날아올랐다. 쌩, 비수가 날아가는 소리를 나는 분명 들었다. 그리고 딱! 기적이였다.  토끼가 떨어졌다. 내 비수가 토끼를 맞힌 것이 아니라 토끼가몸을 솟구쳐 날아와서 면바로 내 단도 칼등에 목을 들이대는 걸 나는 똑똑히 보았다. 신화 속인 듯 너무나비현실적이게 환하던 달빛 아래 내 손을 벗어나 쌩하고 날아가던 번쩍이는 단도와 그 단도를 향해 쌩하고 날아와 탁 하고 부딪쳐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모래 우에 곤두박히던 토끼 한마리. 나는 토끼처럼 뛰쳐나가 그 토끼를 손에 들었다. 잠시 쇼크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는지 말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손안에 바둥대던 커다란 하얀 토끼. 나는 토끼가 캑캑 막혔던 숨을 토해내느라 기침을 깇는 소리를 분명 들으며 고개 들어 달빛 향해 킬킬 웃었다. 나를 살리려고 하늘이 보내온 토끼, 감사합니다. 하늘이시여…그 토끼의 절반이 그날 밤 내 배속으로 들어온 그 과정은 더 적지 말자.  그 날 사용했던 비수를 거의 이십년이 되도록 아직도 나는 버리지 않고 건사하고 있다. 차가 속도를 올리며 튀여나갈 때마다 그 토끼가 떠오르지만 그 토끼 때문에 차가 토끼처럼 앞으로 튀여나간다는 비유가머리에 떠오른 건 아닐 것이다. 나는 내 머리 속에 언제든지 뛰쳐나가려고 하는 토끼 한마리가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든지 튀여나갈 것이다. 그러나 비수가 없는 곳을 향하여 토끼처럼 후닥닥~ 쌩~ 내 사무실 내 책상 옆에는 항상 트렁크가 준비되여있다. 언제든지 훌 떠날 수 있게. 떠나기 위해 멈춰있는 인생인 것처럼.  -오늘 면접 볼 녀자애의 리력서를 지금 위챗으로 당신에게 보냈어요.  마침 붉은 신호등이 켜져서 브레이크를밟고 스틱을 N에 밀어놓았다. 100초가 걸리는 빨간 신호등이다. 핸폰을 손에 들고 그 녀자애의 리력을 잠간 들여다보았다.   … … 외국어 수준:일어 일상 대화 정통, 비지니스 고급 일어 정통, 비지니스서류  등 일어 서류 작성과 번역 정통. … …   나는 빙그레 웃었다. - 꽤나 재밌는 친구네. 일어를정통했다고 썼네. 감히 외국어를 정통했다고 장담하는 걸 보면 굉장히 자신감 높은 친구일 거 같으네.  - 그렇게 일어수준이 높으면 왜 작은 우리 회사에 리력서 넣었겠어요? 인재 채용 광고에 우리 회사 규모랑 주요 업무 내용에 대해서 거짓없이 다 상세하게 소개했는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적은 거겠지 뭐. 안해는 항상 이렇게 사람 좋게 해석한다. 아무 생각 없는 애를 왜 직원으로 뽑아줘야 하지? 나는 리력서에 적힌 정통이라는 두글자 때문에 머리 속으로 미리 오늘 면접 올 녀자애에게 마이너스점수를 주고 있었다. - 오전 열시에 도착하겠대요. 당신휴대폰 번호를 줬으니까 련락이 올 거예요. - 오케이. 오면 면접은 봐주는 거다. 알 게 뭔가, 정말 일어수준이 뛰여난 수준일지. 빨간 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는 것과 동시에 스틱을 뒤로 당겼다. 1초만늦어도 뒤에서 빵빵 경적을 울려대는 게 이 도시의 자동차문화 수준이다. 경적을 울려대기 위해서 운전대를 잡은것처럼. 거부기도 운전대를 잡으면 토끼보다 더 성격 급해진다. 그러나벌써 밀리기 시작하는 아침 출근길에 토끼는 없고 거부기들만 잔뜩 늘어져서 엉금엉금 긴다. 거부기보다 더 늦은건 뭘가. 달팽이? 달팽이들의 세상에는 교통체증이 없을 것이다. 등에다 껍질을 업고 다니는 달팽이를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아직내 집이란 것이 없을 때 집을 등에 업고 다녀서 집걱정 필요 없는 달팽이가 부러워서 이라는 시도 썼던 것 같다. 달팽이는 집걱정 없으니까 열심히 달릴 필요가없는 것이다. 집이 없는 자는 집값이 점점 천정을 향해 치솟는 이 시대에 자기 집을 마련하기 위해  토끼보다도 더 빨리 달려야 한다. 그러나 달려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토끼는 적다. 이 도시 대부분 샐러리맨 토끼들에게자기 소유의 집은 너무 먼 꿈이다. 나는 이 도시에 내 이름으로 된 집이 있지만 은행 할부로 분양받은 것이여서아직 그 집의 진정한 소유주는 내가 아닌 은행이다. 월부를 제때에 제대로 갚지 못하면 내 몫의 집은 은행몫으로돌아가고 나는 신용불량자가 되여 이 나라에서 기차표도 비행기표도 예매하지 못할 것이다. 집의 속성에 대해서생각해봤다. 그건 그냥 세멘트와 철근과 벽돌장으로 올리 쌓아진 물리적인 덩어리일 뿐인데. 그렇게 높던 건물들도 무너지면 결국 한무더기 허무한 쓰레기더미일 뿐인데. 무너질때 버섯모양으로 치솟는 먼지 연기는 그 안에 살던 인간들의 한숨일 것이다. 저 앞에 오른쪽에 새로 일떠선 건물 외벽에 어떤 사내가 매달려 유리를 닦고 있다. 동아줄 두 가닥에 의지해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려 건물 외벽에 붙어있는 사내가 꼭 달팽이처럼 보였다. 저 건물 안에 저 사내가 들어가 살 집은 없을 것이다. 사내의 머리에 쓴 노란헬맷이 해빛을 받아 노란 별처럼 보였다. 똥별인가? 노란… 똥별이라면 저 별은 위태로운 슬픈 별일 것 같다. 나는 별도아니고 별똥도 되지 못한 슬픈 것들의 꿈에 똥별이라는 단어를 달아주기로 했다. 아까 식탁 앞에서 반짝 하고떠올랐던, 내 국어사전 안에 장난기로 슬쩍 끼워넣기로 한 똥별이라는 새 단어의 뜻을 저렇게 삶을 위해 위태롭게매달려있는 군상들의 집합체를 상징하는 단어로 해석해주기로 했다. 똥별 같은 인생들.  똥별은 가느다란 거미줄에 의지해 허공에 매달려있는 한마리 거미 같았다.거미줄은 약하고 언제든지 툭 하고 끊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득한 높이에서 툭 하고 거미줄이끊어지면 그대로 아득한 아래로 추락하고 말 연약한 존재.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는 바람에도 그 거미줄이 끊어져나갈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가. 차가 그 건물을 지나갈 때 나는 다시 한번 창문 유리 너머로 그 건물 외벽의 사내에게 눈길을 주었다. 똥별 사내가 지탱해야 할 삶의 무게는 저 사내를 매달고 있는 바줄이 당하고 있는 무게보다도  몇배, 몇십배  더 무거울 지 모른다.   무거운 것이여 가볍게 매달려 대롱대롱   우리 모두는 건물 외벽에 매달린 위태로운 거미 한마리   삶은 무겁고 숨결은 가벼워 우리 숨쉬며 살고 있지만   거미줄 언제 끊어질지 아무도 모르네 바람 앞에 간신히 매달려있는 거미줄 안전 점검 누가 해주는가   치렁치렁 매여달린 인연들은 열줄 스무줄 벗어날 길 없는 씨줄과 날줄 같은 거   그 속에 갇힌 거미는 오늘도 허공에 위태로운 작은 점 하나.   이런 시가 떠올랐다. 나는 시인이였다. 회사랍시고 하나 차려놓고 직원을 몇 명 두고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지만 몸 먼저 마음이 늙어버려서 욕심 없이 법인대표이름은 안해의 이름으로 올려놓고 있었다. 결재 싸인만 내 몫이였다. 안해나 내나 다 저 건물 외벽에 매달려 있는 한마리 거미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라는 명목으로 번 것보다 더 많이 뜯어가는 각종 가렴잡세. 그 잡세 집행행정부문들의 고압적이고 폭력적인 등쌀에도 웃으면서 살겠다고 아득바득 회사를 운영해나가야 하는 가련한 소상공인인 우리는 돈벌이에 눈이 아홉개 되고그 눈마다 혈안이 되여 돌아가는 이 사회의 시스템 안에 어쩜 저 건물 외벽에 매달린 거미 한마리보다도 더 작은 딱정벌레인지도 몰랐다. 밟히면 딱 하고 배 터지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형체없이 이지러지고 뭉개여져 사라질 작은 벌레. 운명공동체인 안해와 나는 이 시스템 안에서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벌레이기나 한 걸가. 나는 간신히 매달려 우로 올라가는 거미이기보다도 어쩜 이제는 더 욕심 없이 안전한 땅으로 기여내려오고픈거미인지도 모른다. 대신 나보다 젊은 안해는 가족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이르려고 애쓰는 것 같다. 행복에도 높이가 있다고 믿고 있고 그 높은 곳의 열매가 더 맛있어보여 따서 맛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 열매를 따서 온 가족이 함께 누려보고픈 것이다. 세 식구 함께 하는 행복. 더 큰 행복. 안해는 아직 꿈이 있고 더 잘살고 싶은 것이다. 더 잘살아보고픈 것이다. 그런 안해가 고맙고 안스럽지만 어쩌겠는가, 포기하면 그대로 뚝 떨어질 수도 있는 생인 것을. 입 벌리고 먹고 살아야 할세 식구 가족의 무게를 안해는 안다. 입에 풀칠해 먹고 사는 짓이라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을. 제도권의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는 소상공인인 우리는 나라를 향해서 손을 내밀 대신 나라에 버는 것 이상으로 가져다바치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런거지 뭐… 하고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위안하면서 그렇게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어느 녀자후배가 그랬다. 더 살 수 없을 때까지 살아보자고살안해니까 살아지더라고. 피 터지게 이 악물고 더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버텨내니까 벼텨지더라고. 그 후배는 어떤 끈을 잡고 그렇게 대롱대롱 삶의 외벽에 악착같이 매달려있었을가. 남편? 아들? 사랑? 가정? 그렇게 버텨서, 그렇게 살안해서, 그후배는 지금 행복이라는 거미줄을 잡은 것일가, 그 거미줄에 매달려 즐거운 그네를 뛰고 있는것일가. 그녀는 어쩌면 지금도 아슬아슬한 삶의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래동안련락이 없다. 후배도 외롭고 아프고 힘든 하나의 똥별인지 모른다. 나는아니겠는가. 안해인들 아니겠는가. 우리는 다같이 빛이 아닌 것을 빛이라고믿고 빛을 내려고 악을 쓰는 똥별들인지 모른다.  벌레는 기여서 어디로 가는가. 분명한 건 꿈을 향해 기여가는거미는 없다는 것이다. 거미는 당장 눈앞의 작은 먹이로 스스로를 먹여살리기 위해서 기여가는 것이다. 하루하루 살안해기 위해서 기여가는 것이다. 작곡가가 아닌데 어떤 곡이 떠오른다. 그 곡에 맞춰 어떤 가사가떠오른다. 항상 그랬다. 시인인 내가 가사를 떠올릴 때면. 그 리듬은 적지 않고 가사만 적는 것이 시인인 나의 몫이다.     거미에게 꿈을 묻지 말아요 오늘의 밥그릇이 아직 비여있어요  배고픔을 길게 뽑아 그물로 펼쳐요  래일도 배고프면 너무 슬프잖아요 슬프지 않은 거미가 되려고 거미는 쉬지 않고 거미줄 쳐요 날개 대신 허공에 그물을 펼쳐 그 그물 속에 한점 마침표처럼 바람 속에 흔들려요 흔들리는 작은 점 하나 바람 앞에 꺼지지 않는 작은 초불 하나 땅에 심어져 꽃으로 피여나고픈 작은 소망의 까만 꽃씨인가요  외줄 그네 우에 흔들흔들 작은 점 하나 거미는 날개 펼치고 날고 싶어요 거미는 슬픈 노래 부르지 않아요    제목을 이라고하면 좋을 것 같다. 거미의 목소리로 슬프게 노래 부를 수 있는 령혼의 가수가 있다면 그 가수에게 이 가사를 주고 싶다.  거미의 슬픔을 아는 처절한 목소리의 가수가있다면 그 가수에게 이 가사를 주고 싶다. 아픔을 아는 자만이 아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아픈 목소리로. 목 아프지 않은 가수가 어데 있겠냐마는… 가슴이 아픈 가수는 목소리의 떨림부터 다르다. 빛이 없는 똥별 거미의 빛을 내고저 하는 그 처절한 몸부림을 담을 목소리의 주인공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 가수도 지금 어느 치렬한 생존경쟁의 거미줄에 매달려 한점의 빛을 내려고 한점의 별이 되려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며싸우고 있는지 모른다. 가느다란 거미줄에 매달린 똥별들의 몸부림.      소설 둘. 거미를 먹는 녀자- 소설을 위한 면접방법 - 그렇게 반시간씩 모모와 마주보며 무슨 대화 나누죠? -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여다볼 뿐이예요. - 그럼 모모가 눈빛으로 전하는 모모의 마음이 읽혀지나요? - 아직 모모의 눈을 찾아 마주본 적은 없어요. 정면으로 마주보는 경우보다 그냥 모모의 옆모습이거나 뒤모습을 볼 때가 더 많아요. 모모는자기 집 안에서  움직임이 생각보다 무지빨라요. - 모모에게도 눈이 있을 거 아니예요? - 있겠죠.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모모와 눈빛을 마주친 적이 없네요. 두 앞다리 사이에 얼굴을꼭 감추고 있어 그런가봐요. - 위챗에 올린 거 보니까 팔에 꼼짝 않고 붙어있던데… - 아, 걔가 무지 겁이많은 같아요. 팔에 올려놓으면 그 많은 다리로 저를 꽉 붙잡는게 확연히 알려요.미끌어떨어질가봐 본능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집게처럼 집는 것 같아요.  - 걔는 떨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거 아니예요. 떨어지는 순간 꽁무니로 거미줄 토하면 되니까. 그 거미줄에 매달리면 되니까. - 안될걸요? 그 큰 몸뚱이를그 가느다란 줄이 견디지 못할걸요… 떨어지는 걸 보지 못해서 모르지만… 취미동아리에 올라온 모멘트들을 보니까 조심하지 않아서 떨군 적이 있는데배 터져 죽은 거미도 있대요. 떨어져서 배가 터져 죽은 거미…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약간 끔찍했다.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그녀는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히 이야기했다.자기가 겪었던 일이 아니여서 자기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는듯… 이제는 감이 잡히리라. 모모는 거미의 이름이고 우리는 지금그녀가 기르는 거미를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우리 회사에 리력서를 제출하고 면접 보기로 했던 녀자가기르는 거미의 이름이 모모였다. 나도 방금 대화를 통해 알아낸 것이다.  나는 지금 펫 스파이더를 사육하는 녀자와 마주앉아있다. 펫스파이더, 애완거미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냥 거미가 아니라반려견처럼 비싼 돈을 주고 사서 집에서 기르는, 비싼 돈 들여 먹이를 사서 먹여주며 사육하는 반려거미. 반려견이 아닌, 반려거미를 기르는 녀자. 그 녀자와 면접이라는 명목으로 처음 만나서 면접에서 상투적으로 물어보는 신상정보에 관한 내용들은 리력서에 적어서보내온 그대로 거의 믿어주기로 하고 대화가 일찍 끝났다. 대신 나는 엉뚱하게 그 녀자가 기르는 반려거미에대한 화제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요로 일본시장을 상대로 하는 작은 무역회사여서 일어를 잘하는 직원이 필요했다. 일본어수준 국제1급, 직장경력 5년 이상의 신선한 피가 필요하다고 HR 커뮤니티 페이지들에 광고를 냈더니 일본어를정통했다는 자신만만한 리력서가 들어왔다. 대우도 4대보험에 기본 월급 15K에 플러스 알파 성과급. 월 기본 2만원이상은 달라는 소리다. 우리 회사 기준 대비 높은 대우 요구에 부담이 좀 가고 너무 자신만만한 어투에 약간믿음이 가지 않았으나 그러나 혹시나 싶어서 면접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면접 보기로 했던 날 약속시간을 반시간 앞두고 녀자에게서 문자가 들어왔다. - 미안합니다. 급한일이 생겨서 오늘은 면접 보러 갈 수가 없네요. 다른 날 잡아서 련락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문자를 받고 나는 이미 그 녀자애를 면접리스트에서 지우고 있었다. 아무리급한 일이라고 해도 약속시간 반시간 전에 일방적으로 면접취소를 통보해오는 건 취직의지가 강하지 못하거나 우리 회사에 취직하고픈 열망이 작다는 뜻일게다. 이곳 저곳 여러 곳에 취직희망서를 넣었다가 오늘 아침 갑자기 우리 회사보다 실력 있어보이고 제시한대우조건도 더 좋아보이는 회사에서 면접통지가 날아오니까 그냥 그 회사로 면접 가기로 마음을 바꾸었을 수도 있었다. 큰떡이 보이면 그 큰 떡 향해 손을 내밀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니 리해해주기로 했다. 면접 약속시간에 얼굴도 내밀지 않고전화 한통, 문자 한줄 없이그냥 무소식으로 면접약속을 무시해버리는 취직희망자들도 많았다. 취직을 그냥 고추장 맛보기로 대하고 회사생활을식은 죽 먹기로 대하는 사회 초년병들이 아직 많은, 아직 상식 이하가 상식으로 통하는 취직시장이였다. 그나마 문자를 보내온 건 최소한의 례의는 갖추고 있는 셈이였다. 취직희망자로서는 영 아니올시다였지만 나는 그 례의에 례의로 좋은 뜻의 답변을 문자로 날려주었다. - 좋은 직장을 찾아서 크게 발전하세요. 그랬는데 며칠이 지난 그저께 저녁 그 녀자애에게서 다시 문자가 들어왔다. - 전번에 제 개인사정으로 취소되였던 면접, 래일 다시 가능할가요?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늦은 밤시간이였다. 나는 즉시 답변하지않고 안해에게 말했다. - 이 친구 재밌는 친구네. 인생자기 편한 대로 사는 친구인 것 같애. 전번에 면접 취소했던 쉬메이라는 녀자애 말야, 래일 다시 면접 보러 와도 되냐고 문자 보내왔네? 여러 곳에 면접 다녀봐도다 맞갖지 않았는 모양이지? - 그럴 수도 있지 뭐. 우리도꼭 뽑아줘야 할 의무가 없으니까 편하게 만나봐요. 일어를 잘하는 직원이 필요하니까… 딴딴의 일효률은 정말아니야. 다른 애들도 다 딴딴과 팀워크하려 않는다니까… 내가 걔 개인번역사 역할 해야 돼요…ㅠㅠㅠ - 알았어. 약속시간잡아보지 뭐. 나도 랠은 좀 바쁘니까 후날로 잡아볼게. 그리고 그 녀자애의 정체성이 조금 궁금해져서 위챗에 추가된 그 녀자애의 위챗 모멘트를 들어가보게되였다. 위챗이 좋은 게 그런 거였다. 자기 개인 계정을 공개하지 않는사람이면 방법 없지만 개인 계정을 공개했을 경우에는 그 계정에 올린 모멘트 내용들을 보면 그 사람의 일상의 모습들을 통해 그 개인의 취향이나 세계관같은 것을 대충 보아낼 수 있었다. 물론 그 모멘트들이 그 사람의 진실 전체가 아니고 이 세상을 향해서 보여주고픈아름다운 것들만 선택되여져 올려지는 내용 혹은 꾸며진 내용이라 할지라도… 그 모멘트를 보면서 나는 약간 충격을 먹었다. 하얗게 이쁜녀자의 팔뚝 우에 붙어있는 커다란 거미의 사진이 오늘 갓 올린 따끈따끈한 이미지로 제일 우에 위치해있었다. 정상적인성인 녀성의 팔뚝 사이즈와의 대비를 통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거미의 크기를 훨씬 릉가하는 커다란 거미임을 이미지를 통해서도 보아낼 수 있었다. 몸뚱이와 다리에 기다랗게 덮여있는 털들이 징그러웠다. 너무 상상 밖의 사진이여서시각적인 충격이 컸다. 그 충격을 머리를 흔들어 털어내며 계속해 모멘트를 밑으로 내려 훑어보니 거미에 관한게시물들이 많았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본 배추벌레 같은 벌레를 거미가 먹고 있는 동영상도 올려져있었다. 나는 등으로 오싹 차가운 랭기가 흘러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징그러웠다. 녀자는 거미를 사육하고 있었다. 거미를 기르는 녀자, 거미와 사는 녀자… 일본어실력이나 업무능력 등을 떠나서 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녀자이구나 하는 생각에 한 회사에서함께 일할 동료로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벌써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동영상을 보여주면 안해도 오싹 몸서리를 칠가봐 그냥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슬쩍 말을 던져보았다. -직원채용 광고를 그냥 반복해 올려서 다른 사람을 찾아보지그래? -리력서 여러장 들어왔는데 다들 초짜야. 월급 많이 주더라도 경험이 풍부하고 일어를 정말 막힘없이 할 수 있는 직원을 뽑아야 돼요. 지금 몇몇 안되는 애들 비교해봐도  그중 그래도 월급을 많이 요구하면서 입사한 쇼천이 그만큼 일어도 잘하고일도 제일 잘해요. 경험과 언어실력 중요하다니깐요. 얘도 진짜 능력있으니까 자신 있게 리력서 넣었을 거 아니예요? 일단 면접 봐줘요… 다른 회사 면접 돌고 돌다 오면 뭐 어때요?  와서 일만 잘해주고 일본어실력만 좋으면 되지뭐. 안해는 능력 있는 조수가 급히 더 필요하다고 호소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거미를 기르는 녀자를선뜻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뽑을 용기는 없었다. 뱀 같은 파충류와 거미 같은 징그러운 절지 곤충들을 나는 제일싫어하고 무서워했다. 위챗 모멘트를 봐서는 개인취미가 독특하고 개성이 강한 취직희망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개성이 강한 사람을 좋아하고 그 개성을 충분히 존중해줄 마음의 준비가 되여있다고 생각했는데 거미를 기르는 녀자는회사 직원으로 영 아닐 것 같은 느낌이 왔다. 너무 개성이 강해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회사 분위기를흐린다면 그것도 미리 경계해야 할 대상이였다. 이렇게 개인취향이 독특한 취직희망자이면 회사에 불러서 사무실이라는딱딱한 환경에서 면접을 보기보다는 다른 열린 환경에서 편하게 만나 대화를 나누며 그 개성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녀자애의 현재 거주지가 우리 회사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다고 전번에 리력서에 적혀있던 걸 기억해내고위챗에 이런 문자를 넣었다. - 늦은 밤인데 아직 쉬지 않고 문자를 주어서 감사합니다. - 아니요, 전 부엉이과에속해서요. - 혹시 모레 시간이 어떠세요? 마침제가 모레 티위시루 쪽으로 일 보러 나가야 되는데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그 때 그쪽에서 편하게 만나보는 것이 어떨가요? 꾸며낸 것이였다. 티위시루 쪽으로 일 보러 나간다는 건. 3개월이라는 수습기간이 있으니까 대충 뽑아서 사용하면서 관찰해보고마음들지 않으면 수습기간 완료 전에 내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그건 회사관리를 너무 우습게 보고 하는 말씀이시다. 사람을 한명 잘못 뽑으면 회사엔큰 랑패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게 조직이라는 생명체의 생리이다. 뽑아서 회사의 식솔로 받아들이는 건 쉬워도능력이 안된다고 내치기는 쉽지 않은 게 인사관리다. 회사운영에서 인사는 그만큼 오너에게 가장 신중성을 요구하는어려운 것이였다. 직원 한명을 더 뽑는 건 쉬워도 그 직원의 인생에 회사로서의 책임을 다 해서 꿈을 심어주고날개를 달아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였다. 회사와 함께 클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했다. 한 밥솥 먹는 식솔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 식솔에 대한 책임을 의미했다. - 오케이. 모레 몇시에티위시루 쪽으로 나오게 되죠? 저는 모레 오전에 시간이 괜찮은데… - 혹시 그럼 아침 아홉시 반이 어떨가요? - 오케이. 미팅 약속이 쉽게 잡혔다. - 장소는 D출구 왼쪽맞은켠에 보이는 스타벅스로 할가요? - 오케이.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녀자와 마주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이미 만난 지 반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리력서에 적은 나이로는 서른살,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해 휴대폰대화로 서로를 확인하며 내가 앉아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녀자는 생각했던 대로 완전 개성 넘치는 신세대였다. 가슴골이약간 로출되게 맞춤하게 패인 아이보리색 면티에 근년에 류행하는 무릎이 훤히 로출되는 청바지를 받쳐입고 나왔다. 꼭면접이라고 못박아서 만든 미팅은 아니지만 그러나 회사 취직을 전제로 오너와 만나는 자리에 입고 나온 복장으로는 대담한 코디였다. 브라운톤으로 염색한 단발머리를 무스를 진하게 발라 남자처럼 뒤로 빗어넘겨 이마 전체를 너무 도발적으로 로출시키고있었고 얼굴에도 이곳 광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컬러화장을 하고 나왔다. 입술에도 충분히 섹시함을 과장해서어필해주는 반짝이는 립스틱을 칠하고 있어 상상으로 남자들의 혀끝을 자극하는 효과를 내기에 충분한 화장이였다. 손가락에도아주 개성이 넘치는 은빛의 금속 해골반지와 마노로 된 가면 반지를 량쪽 검지에 서로 대칭되게 끼고 나와 저도 몰래 눈길이 그 반지 둘을 번갈아향하게 했다. 화장할 줄 아는 녀자였다. 코디에 능란한 녀자였다. 화장과 코디로 자기 개성을 충분히 표현할 줄 알고 그 개성을 감추려 하지 않고 대담히 표출할 줄 아는 녀자였다. 아니, 오히려 그 개성을 어필하려고 한 화장과 코디였다는 인상을 주었다. 너무 임팩트한 첫 인상에 나는 벌써, 이 녀자는 직원으로는 아니겠구나 하는생각이 들었다. 나야 뭐 젊은 직원들의 모든 개성을 다 수용해줄 수 있는 성격이지만 조용하고 약간 보수적인성격의 내 안해와는 어울리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둬마디 인사 나누는 시늉만 하고 그만둬야겠구나하고 마음은 벌써 도리머리를 젓고 있었다. 그런데 스스럼없이 손을 먼저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거라든가, 굳이사양하지 않고 메뉴를 펼쳐 커피를 익숙하게 주문하는 거라든가… 세련된 커리어 우먼의 포스가 확 풍겨왔다. 우리같은 작은 회사가 아닌, 큰 회사에서 단련받은 경력이 자신감으로 표출되고 있었다.그건 꾸며서 되는 게 아니였다. 긴 시간 사회경험으로 몸에 배인 사교능력이였다. 나는 내 첫 인상을 지우고 이 녀자와 좀더 깊이있는 대화를 나누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어쩜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일 수도 있었다. 안해에게 모자라는 파워풀하고모던한 이미지로 회사의 분위기를 바꿔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 쪽에서 먼저 쿨하게그 날 면접약속을 어긴 데 대해 사과를 표시해왔다. - 아, 그 날은 정말미안했어요. 변명 같은 건 안할게요. 단 그 날 분명 면접과 취직보다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생겼다는 것만 말씀 드릴게요. 그 일처리를 위해서 며칠 광주를 비우고 있다가 어제저녁 늦게야 광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오늘 뵐 수 있어서 좋네요. 맞춤한 언어능력과 능란한 사교능력이였다. 한마디로 믿음이 가게만들었다. - 아, 그럴 수도 있죠뭐. 급한 일은 잘 처리되였구요? - 돈과 친구와 사업과 우정이 얽힌 문제예요. 쉽게 풀리진 않겠죠? 녀자는 눈을 한번 과장해 찡긋해보이며 환히 웃었다. 그러나그 웃음 속에 이 며칠 동안 분명 골치 아픈 문제를 처리하느라 피곤했음을 알려주는 피로 같은 것이 묻어났다. 사연이많은 녀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잘 풀렸음 좋겠네요. - 잃느냐 얻느냐, 어느걸 잃고 어느 걸 남기느냐 하는 것들은 항상 골치 아픈 선택거리죠. 녀자는 스스럼없이 자기 고민을 토로하고 있었다. 면접이 아니라면치고 나오는 대화법이 돋보이는 소통능력이였다. 사연이야 어떻든 그 날 면접을 빵꾸낸 데 대한 해석으로선 충분한내용이였다. 비즈니스에 필요한 치고 박고 밀고 당기는 네고 능력이 강할 것 같았다. - 학교 공부를 마치고 거의 십년 동안 몇개 회사 거치면서직장생활 충실히 하시다가 요 2년 동안 공백으로 남겨놓았던데… 혹시 개인사업을 하셨나요? - 예리하시네요. 네…친구와 동업해서 심수에서 베이커리사업 했어요… 결과는… 실패지만… 돈 날리고 시간 투자하고… 좋은 공부 했죠. 남은건 교훈 뿐이고… 사업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다시 취직생활 하려는 거구요… 부담이 가는 대목이였다. 개인사업에 2년을 미쳤던 사람이면 평사원으로 직장생활을 쉽게 시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다고해도 직장의 업무에 충실하기가 힘들 것이다. 자꾸만 시중에 흐르는 돈에 신경이 가고 회사업무보다도 개인사업신규 아이템 발굴에 더 신경을 쓰게 될 것이였다. 사업하다 넘어진 사람은 사업으로 다시 일어서는 게 맞았다. - 아, 대단하시네요. 베이커리사업, 투자금도 만만치 않고…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너무 많을 건데…저희 무역회사 업무보다 열백배는 더 힘들게 신경 쓰고 챙겨야 할 부분들이 많은 사업이였을 건데… - 그렇죠. 직장생활 하면서 모았던돈 다 투자했죠. 결국 다 날렸지만… 직장생활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 배운 것도 많아요. 아쉬움과 여한이 많이 묻어있는 어조였지만 표정은 쿨하게 밝았다. 이제사업 실패가 주는 슬럼프에서 거의 헤여져나온 해탈된 표정이였다. - 넘어진 데서 다시 일어서라는 말 있잖아요? 취직보다도 그냥 사업 쪽으로 신경쓰시는 게 더 맞을 것 같은데요.  - 그럴 수 있으면 좋겠죠. 그런데주머니 사정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타협해야죠 현실과. 그녀는 두손을 내보였다. 다 날리고 이제는 손에 쥔 게 없다는뜻이였다. 로스팅 커피가 드립 완성되였다는 신호가 책상 우에 놓인 알람에 빨간 신호로 반짝였다. 녀자가 내 먼저 그 알람을 들고 일어섰다. 돌아온 녀자가 자리에 앉으며 코로 커피향을 맡았다. - 음… 제가 직접 로스팅한 커피보다 향이 못한 것 같네요. 스타벅스 커피가. 자신 있는 어투였다. - 베이커리 매장보다 오히려 커피숍을 하시지 그랬어요?  - 하하, 요게 모자라잖아요? 그녀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보였다. 투자금이모자랐다는 뜻이였다. 그래, 하고픈 사업 다 할 수 있는 자금력을 충분히갖춘 사람이면 왜 굳이 사업을 시작해야 할가. 내가 원래 하던 사업에서 한번 발목을 접지른 후 나와 안해도정말 어렵게 어렵게 단돈 10만원으로 다시 시작해 몇년 동안 회사를 키워 오늘에까지 이르른 것이였다. 쉬운 사업은 없었다. 판단이 섰다. 이 녀자는 우리 회사에 필요한 능력을 갖춘 인력이였다. 지금 다른 직장에서 커리어우먼으로 출근하고 있다면 스카웃해서라도 데려다가 직접 관리자 책임을 맡길 수 있는 인재였다. 그러나 우리 회사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였다. 회사는 회사와 함께 동고동락하고함께 크면서 회사의 발전과 개인의 성장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녀자는아니였다. 지금은 잠시 사정이 어려워 직장생활로 유턴하려고 하고 있지만 언제든지 기회만 생기면 개인사업을위해서 다시 회사를 뛰쳐나가 독립할 녀자였다. 화제를 돌렸다. -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괜찮은지 모르겠는데… 위챗모멘트에 보니까 거미를 기르시던데… - 아, 모모… 녀자의 눈빛이 금방 빛을 반짝이며 표정이 환해졌다. 거미의 이름이 모모인 모양이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모에 관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어느새 면접을 목적으로 녀자를 만났다는 것을 거의 잊고 녀자가 기르고 있는 거미에 더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징그럽게 생각하던 거미에 관하여… 작은 개인사업체를 운영한다는 건 내겐 어쩜 명색 좋은 허울일 수도 있었다. 기업 운영자이기 전에 나는 글쟁이였다. 먹고 살려고 작은 개인사업체라도 운영하는것이지 나는 먹고 사는 짓 같은 거 전혀 신경쓰지 말고 글에만 미쳐도 된다고 세상이 허용한다면 브라보를 웨치고 책만 껴안고 글만 쓰면서 살고픈인간이였다. 뼈속까지 글쟁이였다. 이 녀자는 어느새 소설가로서의 나의호기심을 강렬히 자극하고 있었다. 거미를 기르는 녀자… 내가 싫어하던 징그러운 이미지의 곤충이길래 더 호기심이발동되였는지 모른다. - 거미가 떨어져서 배가 터져 죽는다구요? 상상이 안 가네요. - 아직 모모가 얼마나 배불뚝이고 모모가 늘이는 거미줄이 얼마나가늘고 약한지 보지 못해서 그래요. 직접 보면 믿음이 갈 거예요.  - 갑자기 모모에게 확 관심이 땡기네요. 은근히 보고파지네… 그랬다. 거짓이 아니였다. 나는갑자기 지금까지 징그러운 곤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미가 보고싶어졌다. - 미리 말씀하셨으면 나올 때 모모를 들고 나오는 건데… - 아, 밖에 들고 다닐수도 있어요? 더욱 호기심이 발동했다. - 모모를 넣고 기르는 모모의 집을 그대로 들고 나오면 되여요. - 아, 그러시구나. 궁금해요. 모모가 사는 집, 그리고 모모가먹는 먹이들, 모모가 움직이는 모습이랑… 위챗에서도 봤지만 직접 눈으로 보면 다르겠죠? 나는 어느새 거미와 사는 녀자의 집이 궁금해졌다. 처음 만난녀자가 생활하는 사적인 공간에 관심이 생기다니… 거미와 사는 녀자, 거미와 사는 녀자가 사는 공간은 어떤곳일가. 어쩔 수 없는 소설가 본능으로서의 호기심이였지만 면접 보려고 처음 만난 녀자의 은밀한 생활공간에대한 호기심 발동은 남자로서 충분히 그 동기가 의심받을 만한 대목이였다. 녀자의 눈빛이 잠간 흔들렸다. 거미와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가보고 싶다고 지금 요청해줄 수 없냐고 묻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내 호기심의 바늘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직감으로 정확히 짚어내고있었다.  이 남자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적인 공간에도가보고 싶어하는구나 하는 것을 직감으로 눈치채고 믿고 요청해도 되나 하는 생각을 순간 했던 게 분명했다. 눈빛의흔들림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더 치고 나가면 실례로 이어질 수 있었다. 내 스스로에게 그리고그녀에게도 퇴로를 만들어줘야 했다. - 초면이 아니라면 무조건 지금 모모 보러 가자고 억지를 부릴것 같아요. 그 정도로 모모의 모든 것이 궁금하네요. 저 사실 거미같은 거 굉장히 겁나하는데. - 기회가 되겠죠 뭐. 속으로강렬하게 원하고 기도하면 언젠가는 하늘이 알아서 이루어준다고 하잖아요? 그녀의 얼굴에 잠간 묘한 웃음이 살짝 스쳐지나갔다. 당신이그렇게 원한다면 언제 저와 모모의 사적인 공간에로 당신을 요청할 수도 있어요 하는 표정으로 읽혔다. - 그런데 왜 거미를 무서워하죠?어릴 적 시골에서 사신 경험이 없으신가봐요…전 어릴 적 시골에 살아서 처마 밑에 바자굽에 장독대 사이에 변소 가는 길에 채소밭에…어데 가나 거미를 만날 수 있었어요. 어릴 적 거미는 그냥 저의 동년생활의 한 풍경이고 한부분이였어요. 끝부분이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가지에 거미줄 감아서 잠자리를 잡았고 거미 꽁무니에서 거미줄 뽑아 그 거미줄에 거꾸로매달린 거미를 건드려 그네를 뛰우며 놀기도 했어요. 왕거미가 무릎 관절이 아픈 사람에게 좋다고 해서 온 들판쏘다니면서 왕거미를 한아름 되게 잡아다가 무릎 아파하는 아버지에게 갖다 드려 약주를 담궈서 들게 하기도 했구요… 거미는 그냥 저의 동년과 함께한 친구 같은 존재였어요. 물론 지금 기르는 모모와는 완전히 다르게 생긴 거미이지만요… 지금 기르는 모모는불꽃장미라는 이름을 가진 칠레산 거미로 제가 어릴 적 시골서 가지고 놀았던 거미보다 덩치가 몇 배는 더 큰 놈이죠. 녀자는 거미를 무섭다고 하는 나를 리해하지 못했다. 나도 어릴적 시골서 자랐다. 거미꼬리에서 거미줄을 잡아당겨 누가 더 길게 뽑는가 친구들과 내기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거미를 집안에 들여다가 거미와 함께 살 수도 있다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동네 어느 집 아버지가 무릎관절에 좋다고 왕개미를 잡아 술에 담궈 약주로 해서 마신다는 소문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서로 다른 지역이고 서로 다른 민족이고 서로 다른 문화여서일가. 거미문화라는단어조합이 떠올랐다. 뭐이러루한 제목을 가진 론문 같은 것들이 이미 나와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가면 네이버에서한번 검색해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나는 어느새 스파이더홀릭이 되여가고 있었다. - 근데 왜 굳이 거미를 기르죠?반려견이라든가 반려묘도  많은데…하다못해 앵무새라도… - 아, 걔네들은 털이심하게 날리고 주위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먹이도 많이 먹고 배설물도 많잖아요? 시간에 맞춰 예방접종도 시켜줘야하구 그러다가 아프면 병원에도 데리고 다녀야 하구… 너무 시중들면서 키워줘야 되잖아요? 야근을 밥 먹듯 하는직장인과 하루 24시간을 30시간으로도 모자라게 사용해야 할 자영업자에게그렇게 모셔서 키울 시간적 여유가 어데 있어요? 그냥 작은 집 하나 마련해주면 그 안에서 스스로 알아서 놀아주는거미가 반려용으로 키우는 덴 최고예요. 얘들은 울지도 물지도 않고 먹이도 며칠에 한번씩 주면 되고 집에 털도날리지 않고 배설물 처리도 거의 해줄 게 없어요. 케어가 굉장히 편해요. 그냥습도와 온도를 일정하게 잘 맞춰주기만 하면 돼요.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 모모는 내게서 뭘 빼앗아가려고 하지 않아요. 아무 욕심 없어요. 사랑해달라고 칭얼거리지도 않아요. 며칠씩 집을 비우고 나가야 할 경우에도 애가 혹시 굶어죽을가봐, 배고파할가봐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열흘이고 보름이고 자기 스스로 자기 몸에 저장하고 있던 영양소로 잘 버텨요.  려행길에 며칠씩 나가있다 돌아와도 원망 한마디없어요. 항상 보면 그냥 혼자서 신나게 잘 놀고 있어요. 짝을 찾아주지않아도 외로움을 모르는 아이예요. 모모는 혼자 노는 법을 잘 알고 있어요. 혼자서도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법을 알고 있어요. 친구가 없어도 그냥 그렇게 혼자서 시간을 죽일 줄 알아요. 그게 얼마나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예요? 그리고 모모를 키우면서 저는 그냥 내버려두는법을 배웠어요. 너무 집착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거, 그냥 혼자 내버려두어모모 혼자 스스로 잘 놀고 잘 크는 걸 지켜보면서 그저 빙그레 웃어주는 거,  모모를 키우면서 느끼고 배운 게 그거였어요.가까이 혹은 멀리서  믿고내버려두고 지켜봐주는 거 그것도 사랑의 한 방식이라는 것을요… 나는 녀자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외로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에게서 상처를 입은 자의 냄새가 났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상처입고 많이집착하고 많이 실망했댔구나… 나이 서른을 넘어서는 녀자의 목소리에 충분히 묻어있을 수 있는 여러가지 삶의 냄새들이였다.그걸 한번에 다 맡는 듯한 느낌이였다. 자기가 살아오면서 묻힌 삶의 냄새들을 떨쳐버리려고 일상의목소리에 냄새로 담아서 털어내기에 허둥대는 녀자… 내 머리 속에 어떤 인물의 륜곽이 서서히 잡혀가고 있었다. 마침편집부의 원고 독촉에 시달리고 있던 참이였다. 그 편집부에 써줘야 할 소설의 제목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거미를 기르는 녀자를 앞에 두고 의 이야기를 써야지 하고 떠올리면서 왜서 그런 섬뜩한 제목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그냥 지금 내 앞에 섹시하게 움직이는 녀자의 입 안에 거미의 죽은 시체가 들어가는 장면이 순간적으로 련상되여 떠올라서였다. 녀자의 손에 들려있던 거미가 툭 하고 땅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보였다. 떨어진게 아니라 버린 건가… 클로즈업된 녀자의 눈 그리고 그 눈에 역시 겨울 얼음강판에 짝 하고 금이 가듯 흰 줄이 한줄 쭉 건너간 거미의 큰 배가클로즈업되여 보여지고  그 안에서 하얀거미알들이 미여 터지도록 잔뜩 배여나온다. 그 흰 거미알들에서 금방 투명하게 이쁜 거미새끼들이 우주의 전사들마냥막 밀리듯 달려나왔다. 그 거미들이 순식간에 옆으로 쫘악 퍼지고 그렇게 퍼지는 사이 거미들은 어느새 온몸에시커먼 털을 뒤집어쓴 큰 거미로 변했다. 그 거미들이 녀자가 살고 있는 집 공간을 비좁게 다 차지하고 그리고녀자의 몸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녀자의 팔과 다리 그리고 배와 가슴, 목, 얼굴… 눈 코 입을 다 덮은 거미들… 녀자가 거미들을 털어버리려고 허우적이며 입을 벌리고 소리치는 순간, 녀자의 입이 블랙홀인 듯 거미들이 줄지어 녀자의 입안으로 빨리듯 달려들어간다. 솨르륵솨르륵…거미들이 바람소리를 내며 달려들어가는 소리, 녀자가 놀라서 재채기를 심하게 하자 이번에는 녀자의 입에서녀자의 코에서 녀자의 눈에서 녀자의 귀에서 거미들이 녀자의 입안으로 들어간 거미보다 훨씬 많은 거미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나온다. 밑도 끝도 없는 거미의 동굴, 거미의 행렬… 이젠 녀자의 몸 어데라 없이 구멍이되여 거미들을 온몸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녀자의 몸에서 빠져나온 거미들은 순식간에 다시 녀자의 집을 다 점령하고 이번엔 집 밖으로 나간다. 녀자가 사는 동네를 거미들이 순식간에 점령해버린다. 그대로 거미들에 의해 사각사각먹혀버리는 동네… 거미들은 동네를 벗어나 거리로 나선다. 거리의 차들이 그대로 거미의 포로가 되고 먹이가된다. 도시 전체가 거미들에 의해 점령된다. 이제 거미들은 줄지어 다른도시를 향한 진군을 시작한다…그렇게 도시와 도시가 거미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지구가 거미들의 통치하에 놓인다. 이제거미들은 우주선에 올라 우주 정복의 길에 나선다… 나는 너무 과장된 상상에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언제 우주의운명을 다루는 공상작가가 될 꿈을 꾸기라도 했던 적이 있던가. SF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닌데 이런스펙터클한 환상을 하다니… 그러나 나는 맞은켠에 앉아있는 녀자에게 미안하다거나 내 상상에 내 스스로 오싹 징그러워 몸을 떨고싶다는 생각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그냥 으흠 오늘 면접을 밖에서 보길 잘했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이미 다된 거였다. 미루고 미루어 데드라인을 이미 보름이나 넘긴 소설이실실 웃으며 나를 향해 기여오고 있었다. 소설은 항상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건져지는 것이였다. 이번 소설이 이렇게 거미의 형상으로 나를 향해 기여와줄 줄 오늘 아침까지도 나는 몰랐다. 물론 소설은 과학공상소설이 아닌, 현실제재로 씌여져야 할 것이다. 한 녀자와 한 남자의 뜨거웠던 사랑과 식어가는 사랑의 이야기를 쓰면 될 것이였다. 이미식어버린 사랑이라는 외줄 거미줄에 매달려 위태롭게 억지로 가정이라는 허울을 유지해 가고 있는 녀자와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면 충분히 매리트 있는소설이 될 것이다. 일단 제목이 임팩트하지 않는가. … 얼마나 처절한 사랑의 몸부림으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핥고 씹고 쓰다듬어주었던가.  그러나 언제부턴가 해 진 뒤의 어스름처럼 두사람 사이에 드리우기 시작한 차가운 음영… 두 사람은 해가 다시 뜨면 그 음영이 사라지고 다시 그늘 없는 공간 속에 함께 할 수 있으리라 쉽게생각했는데 그러나 점점 안개처럼 짙어지다가 차거운 얼음벽으로 두 사람 사이에 드리운 령하의 랭랭한 벽. 만져질수 있을 정도로 두터워 진 그 벽의 이쪽과 저쪽에서 남자와 녀자는 서로를 뜨거운 심장이 아닌 차거운 눈으로 바라보고… 서로에게 다시 다가가 대방을껴안는 길은 차거운 얼음벽을 깨뜨리고 그 벽 너머로 넘어가주는 것.  그러나 남자와 녀자 중 그 누구도 먼저 선뜻이 그 얼음벽을 향해 다가서지않는다. 먼저 다가서서 부딪치면 먼저 상처 입고 피를 흘릴 자신의 이마… 주먹으로 그 얼음벽 깨는 방법도있지만 그러나 그 주먹은 이젠 어쩜 얼음벽을 깨기 위해 움켜쥐는 것이 아닌, 서로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향해날리려고 악으로 뭉쳐진 듯, 누군가 먼저 그 얼음층을 향해 이마를 부딪치고 주먹을 날리면 그 얼음벽은 쨍그랑하고 깨여질 것인데… 남자와 녀자는 그 얼음벽처럼 둘의 둘레를 둘러싸고 있던 사랑이라는 허울의 울타리도 함께 허물어질가 두렵다. 어쩜 이미 둘 사이에 점점 두터워지는 얼음벽보다도 더 얇아진 가정이라는 허울 껍데기… 두 사람은 뒤로 넘어져 그허울을 깨뜨릴 용기도 없다. 그냥 마주보면서 서서히 얼음벽처럼 차거워지고 식어갈 뿐이다. 사랑의 온기가 완전히 다 사라질 때까지… 이미 말라버린 사랑의 껍질을 두 손안에 마저 부숴버리는 엔딩작업은 누구의몫으로 남을 것인가… 파멸이라는 단어는 소설 속에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녀는 사랑 안에 완성될 수 없으면사랑 밖에서라도 완성의 방식을 찾을 수 있는 것일가. 완성이 없는 사랑과 인생,그 명제를 글에다 풀어서 담안해야 할 일이였다. 상처주기도 결국은 사랑이라고 믿는 그래서 아픈상처도 그냥 받아안는… 사랑이라는 거짓명제로자기를 변명하기에만 성급하고 상처를 합리화하는 데만 영악한 상처주기의 달인들. 그들이 바로 가정이라는 껍데기안에 헛것을 지키고 사는 피멍 든 주인공들이 아닌가.  결혼 생활 15년, 나도이제야 겨우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 조금씩 깨우쳐가고 있는 중인지 모른다. 내 글에 남녀의 위태로운 외줄타기같은 혼인사와 가정사를 담으려고 하는 걸 봐선. 이젠 나도 마음이 많이 여려져 이제야 허황한 먼곳이 아닌가까운 곳을 들여다보며 서서히 철 들기 시작하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철 들긴 개뿔… 나는 내 자신에게 커다란 X표를 꺼내들었다. 철 들기는커녕 나는 어쩜 더 고약해지는 나쁜 놈인지 몰랐다. 내 녀자의 속을너무 썩여 그 속을 야금야금 먹어들어가는 독거미인지도 몰랐다. 내가 얼마나 고약한지는 내가 가장 잘 안다. 안해는 이 녀자처럼 무독성 반려거미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거미보다 몇백배 덩치 큰 그리고 악독성 독극물을내쏘고 있는 거미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독거미와 살며 그 거미의 독극물에 서서히 잠식당하고 그 거미의독성 강한 이발에 야금야금 인생 전체를 다 씹히고 소진당하고 있는 가장 불쌍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매번 부부간말다툼 때마다 정제되지 못한 독한 말을 참지 못하고 안해에게 독화살처럼 날리군 하는 나. 그 때마다 내 독설에눈가에 핑 눈물이 맺히군 하던 안해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악독성 거미일지언정 그나마 가슴 한구석에 량심과 후회의 게놈인자를 조금이나마 남겨놓고있다는 뜻일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이들수록 점점 더 늘어만 나는 내 고약한 심술과 독설… 근데 내가 왜 지금 오늘 처음 보는 녀자 앞에서 거미에 대한 소설을 구상하며 안해에 대한반성모드일가. 나는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체크하며 녀자에게 말했다.  - 어느새 점심식사 시간이 다되였네요. 우리 함께 점심식사나 하고 모모 이야기 좀더 해요. - 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초면에 제가 너무 모모 이야기 많이 하고 있었네요. 모모 이야기에 홀릭되여있은 자신을 그제야 깨달은 듯 녀자가 얼굴에 약간 민망한 기색을 띠였다. 그만큼 녀자는 많이 외로워져있었다. 다치면 톡 하고 터질 거미의 커다란 배처럼.  - 아니예요. 모모에대해서 더 많은 걸 들을수록 모모와의 만남이 즐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오늘 오후 꼭 모모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녀자는오후에 꼭 나를 자기와 모모가 함께 하는 은밀한 공간으로 안내해 데려갈 것이였다. 모모는 느닷없이 나타난제3의 침입자를 반겨줄 것인가. 녀자가 방금 거미도 탈피한다는 이야기를 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 려행으로 며칠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 거미집 안을 들여다보니 안에거미 두 마리가 있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분명 한 마리만 기르고있었는데 느닷없이 두마리라니요? 그래서 숨 죽이고 거미집 안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더니 한마리만 성수나게 그냥돌아다니고 한마리는 그냥 땅에 착 엎드려 꼼짝 않고 있는 거예요. 얘가 왜 아프나? 지붕 문을 열고 손가락으로 살짝 그 엎드려있는 놈을  눌러보았더니 도톰히 부풀어있던 등이 푹 꺼져내려앉는 거예요. 너무 놀랐죠. 그리고 깨달았죠. 모모가껍질을 벗었다는 것을. 그제야 모모를 분양받을 때 모모가 해마다 껍질을 벗고 새로 태여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기억이 떠올랐어요. 제가 려행을 다녀오는 며칠 사이 모모가 껍질을 벗고 새로 태여났던 거예요. 아, 모모가 새로 태여날 때 옆에 함께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했어요. 껍질을 벗을 때 꼭 충분한 먹이로 영양을 잘 공급해주고 습도와 온도를 잘 맞춰줘야 한다고 당부하던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잘 보살펴줬어야 하는데… 평생 가슴에 빚이죠. 꼭 필요할 때 주지 못한 사랑, 그 사랑을 녀자는 한으로 남기고있었다. 그보다도 내게 더 중요한 건 거미 껍질이라는 이미지였다.  됐다. 껍질을소설에 담으면 될 것이었다.   녀자는 거미집 문을 열어 거미를 바깥으로꺼내줬다. 낯선 세상 앞에 거미는 잠간 주춤하는듯 싶더니 기다렸다는듯 쏜살같이 발을 움직여 순식간에 어데론가사라져버렸다. 둘러보아도 거미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증발하듯 사라져버린남편처럼. 거미집 안에는 거미가 벗어던진 거미의 빈껍데기만 과거의 어느 한 시간을 상징하듯 죽은 듯 엎드려있었다. 남편이 떠나고 없는 텅 빈 집안에 빈 껍질처럼버려져 홀로 남겨져있는 녀자처럼.   이렇게 결말을 맺으면 소설이 될 것이였다. 아니, 이런 구절 한마디를 더 보태도 괜찮을 것 같다.   녀자는거미집 안으로 팔을 뻗쳐 그 거미 껍질을 손에 들었다. 속 빈 그것을 조심스레 작은 비닐용기에 담았다. 그리고 그 비닐용기를 이미 려행준비로 잘 정리되여있는 트렁크 한쪽 구석에 담았다. 거미와의려행을 떠나야 할 시간이였다. 텅 빈 껍질 끼리의 려행은 이제 시작이였다. 바람에 날릴 일은 없었다.    소설 제목을 이라고 바꿔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내 려행 트렁크에 녀자를 착착 접어서 담는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상상은자유, 무죄이지 않은가.   소설 셋. 무적의스파이더 패밀리- 다른 한 소통의 방식과 채널 토요일, 기숙사 생활을 하는 딸아이가 학교에서 오후 일찍 집으로돌아오는 날이여서 그나마 날 어두워지기 전에 일찍 퇴근하는 날이다. 그런데 저쪽 칸에 있는 안해가 걸상을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미가 소리로 들려오지 않는다. 직원들은 쉬여도 우리 부부는 쉬지 못하고 그냥 회사에 나와서 일을 해야 했다. 회사랍시고 자그마한 실체를 꾸려놓고 보니 뭔 일이 그리 끝이 없고 신경써야 할 게 그리 많은지… 듣기 좋아 오너이고사장이지 직원들 다 쉬는 시간에도 우리 둘은 그냥 일을 찾아해야 하고 일을 만들어해야 했다. 직원들이 오히려사장이고 우리 둘은 직원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라도 몸을 쉬울 수가 없었다. 점점 더 일의 노예가 되여가는안해의 모습이 안스러워서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벽을 하나 사이에 둔 안해의 사무실로 건너갔다.   -오늘은 날 어둡기전에 일찍 퇴근하지 그래. 윤초도 이젠 집에 왔겠는데. 일주일중 토요일 저녁 한끼니만 세 식구가 한데 앉아 그나마 밥 같은 밥을 함께 얼굴을 마주보며 먹을수 있는 기회였다. 아이는 일요일 아침 식사는 늦잠으로 훌쩍 건너뛰고 점심시간이 다되여서야 자기 방에서 나와과일과 건과류 같은 군것질로 허기를 달래군 했다. 점심에는 밥상앞에 나앉기는 하되 이미 군것질로 거의 불러진배에 더 식욕이 별로 없는지 엄마가 정성껏 차려주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몇숟가락만 퍼넣는 시늉만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기숙사에 머무를 일주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먹을 우유와 사과 같은 간식을 챙기고 책가방을 훌 들고 다시 학교에 가버리면끝이였다. 집에서 미처 완성 못한 주말숙제를 학교에 일찍 가서 저녁 자률학습시간 전에 완성해야 한다는 게그 리유였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토요일 저녁 퇴근길에는 항상 동네 전통시장에 들려서 평소에 우리 둘 뿐일 때면거의 먹지 않는 육류랑 생선류 같은 것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가군 했다. 일주일에 한번만 차례지는 아이와의저녁식사상을 그나마 밥상꼴 나게 차리기 위해서였다. 그 한끼 ‘풍성한 집밥 밥상’으로 우리 부부는 일주일동안 학교 식당 음식에 질린 애의 위도 달래주고 일주일 동안 애를 학교에 내맡기고 가슴에 따스하게 한번 안아주지도 못한 마음의 빚 같은 걸 갚는셈이였다. 엄마가 해준 밥을 맛있게 먹는 딸애를 보는 토요일 저녁식사 시간이 우리 부부에게는 힐링과 위로와행복의 시간이였다. 토요일마다 나보다 안해가 더 들떠서 일찍 퇴근하려고 서두르곤 했는데 오늘은 아니였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벌써 혼자서 불닭면 한봉지 끓여먹고 있겠는데뭐, 걍 내삐둬… 오늘은 그냥 라면 한봉지 더 배부르게 먹게 놔둬. 안해는 잔뜩 골이 나있었다. 아까 애의 학급 학부모 동아리 대화방에 학급담임이 이번 달 시험성적을 올린 걸 보고 안해가 화가 난 것임을 나는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낮게 나오고 등수에서도 전번보다 훨씬 뒤로 밀려나있는 성적이였다. 뜻밖의 성적에 아까 나도 잠간 속에서 망연한 무엇인가가 불끈 하고 치솟으려고 했었다. 성적은 행복순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애가 그냥 명랑하고 당당하게 자라만 주면 된다고, 애의 공부성적에 절대 연연하지 말자고, 애를 입시교육의 희생양으로 만들지 말자고잘못된 교육 시스템에 애를 끼워맞추지 말자고 약속한 우리 부부였다. 그래놓고도 정작 애가 중3이 되여 고중 입학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선 안해도 나도 은근히 애의 성적에 신경을 쓰게 됨을 어찌할 수 없었다. - 우리가 이렇게 당황한데 애도 얼마나 당황하겠어. 당사자가 더 속상해할 거니까 집에 가서 아무 말 말고 그냥 맛있는 거만 해주자. 쳐도쳐도 끝없는 게 시험이니까 한번 시험에 애가 기가 죽고 주눅이 들게 하지 말자. 그냥 안아주고 다독여주면애가 다 알아요 부모 마음을… - 아는 애가 이렇게 시험을 엉망으로 쳐?이번엔 애가 좀 너무 심했어. 중3인데 아직 긴박감 같은거 모르는 것 같애. 집에 오면 일요일 점심이 다될 때까지 늦잠 자고…  애가 위기감 같은 거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야? 왜 이러지? 우리 윤초… 안해는 많이 억울해져있었다. 그렇게 믿었던 딸아이의 시험성적이앞으로 치고 나간 게 아니라 뒤로 밀려졌다는 사실을 너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있었다. - 아 주말인데 나도 좀 맛있는 거 얻어먹자. 정리하고 일어나. 집 가자. 우리 딸기다리고 있는 우리 집으로.  - 토요일이면 윤초를 맛있는 거 해준다는 핑게 대고 당신이 폭식하군하는 거 당신 알아? 당신 배 좀 봐… 건강 좀 챙겨요… 안해는 이번엔 나를 향해 불만을 토로해왔다. - 그래서 내가 배짱이잖아. 얼굴못나서 얼짱 못하는 대신 배라도 잘나서 배짱이라도 해야지… - 배포 하나는 짱이다. 그래, 인정해줄게요. 당신 그 배짱. 드뎌 안해도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아이는 낮은 성적 앞에 생각보다 기가 죽어있지 않고 당당했다. 중2 때심하던 사춘기 반항심리가 이젠 좀 숙어들었는지 얼굴 표정도 1년 전보다 많이 풀려있었다. 돼지갈비에 감자를 넣어 푹 익힌 료리를 애는 엄지를 추켜세워 보여주며 맛있게 먹었다. - 감자가 그렇게 맛있어? 나를 닮아서인가, 애는 감자료리를 무척 즐겼다. 내가 묻는 말에 안해가 대신 대답했다. - 누가 아빠 딸이 아니랄가봐… 부녀가 감자라면 오금을 못써요. - 윤초, 아빠 딸이잖아? 내가 제일 듣기 좋아하는 말을 윤초가 뱉어냈다. 그렇지? 하는 뜻으로 눈을 찡긋하며 나를 바라봤다. - 그래, 아빠도 딸아빠잖아? 그치? 딸 아빠, 아빠 딸이니까 둘 다 감자 좋아하는 거 당연한 거지, 안 그래? 거의 매주일마다 되풀이되곤 하는 나와 딸아이의 딸 아빠- 아빠딸 레퍼토리였다. 그 순간 만큼은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윤초는 아빠기분이 뭘 원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윤초, 아빠 딸이잖아- 한마디의 위력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세살 때부터 지금까지 몇마디 할 줄아는 한국어중에 가장 아빠 속을 후련하게 해주고 달콤하게 해주는 완벽한 한국어 표현이였다. - 아빠는 윤초 아빠 딸이잖아 그 한 마디면 그냥 룰랄라 딩동댕이야. - 윤초도 그냥 룰랄라 딩동댕이야. 꼭 세살둥이 윤초를 무릎 우에 앉히고하던 그 레퍼토리 그대로 유치한 부녀간의 대화였다. 제발 유치할 수 없을 때까지 유치하자, 변함없는 이 유치버전 레퍼토리로… 이쯤에선 안해도 행복한 웃음을 얼굴에 피워올릴 수 밖에 없다. 엄마의 표정이 부드럽게 펴지자 윤초가 입을 열었다. - 아빠, 엄마… 아빠와 엄마를 동시에 부를 때면 애가 꼭 부모에게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는 뜻이였다. 두 사람의 동의를 동시에 얻어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였다. 안해와 나의 눈빛이동시에 애의 얼굴로 향했다. 부모의 눈에 비친, 뭘? 혹은 왜? 의 뜻을 딸애는 잘 읽어냈을 것이였다.윤초가 중국어로 말을 했다. - 나 펫 하나 기르고 싶어. - 펫? 뜻밖의 제안에 나와 안해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딸애는 어려서부터 강아지를 너무 기르고 싶어했다. 동네에 산책하러나온 강아지들을 볼 때마다 가까이 다가가서 귀엽다고 쓰다듬어주군 했다. 개의 본능인 공격성을 많이 잃고 인간과친하게 지내는 반려견이지만 그러나 억제되여있던 공격성이 언제 어떻게 튀여나올지 알 수 없는 것이여서 나는 애가 낯선 반려견들에게 너무 친근하게다가가는 것을 항상 경계했다. - 강아지털 집에 날리는 거 아빠가 제일 싫어하는 거 너도알잖아? 어망간에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여나갔다. - 아! 빠! 윤초의 목소리가 갑자기 짜증기를 확 담고 톤이 높아졌다. - 아빠, 내가 지금강아지를 기르고 싶다고 말했어? 아니잖아? 나는 어망결에 되물었다. - 강아지가 아니면? 아이는 내 물음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내게 따지듯 물어왔다. - 아빠는 왜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해석해? 아빠는 내가 왜 아빠가 싫어하는 강아지를 기르겠다고 말하려 한다고 미리 단정지어버리지?아빠가 그렇게 내 마음을 다들여다보고 잘 알고 있어? 아빠는 내가 지금 뭘 기르려고 하는지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으면서 자기가 싫어하는것부터 내게 강조해주려고 급해하잖아? 애는 화산처럼 폭발해서 불만을 분노처럼표출하고 있었다. 너무 뜻밖이였다. 딸은 아직까지 질풍노도 반역병을앓고 있는 민감한 사춘기 15세였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위험한 폭발물이였다. 억이 막혀 대답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나를 대신해 안해가 목소리를 높였다. - 아니면 그럼 뭐야? 초중 3학년인데 정신차리고 공부나 열심히 해야지, 공부에만 매달려도 시간이 모자랄판에 뭔 펫 타령이야? 안해를 향하는 아이의 눈에 불꽃이 번뜩이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 안해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아이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있었다. 아니, 이미 건드린 것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아이가 들고 있던 저가락을 식탁 우에 탁 하고소리나게 내려놓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 공부, 공부… 일주일에 집에와있는 단 하루라도 제발 공부타령 듣지 않고 살게 내버려두면 안돼? 꼭 공부야?꼭 공부 뿐이야? 난 공부외 다른 걸 생각하면 안되는 거야?  공부가 그렇게 내 인생 전부여야만 해? 아이는 신경질적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내뱉고는 훌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그 뒤에 대고 안해가 역시 발작하듯 꽥 소리를 질렀다. - 윤초야, 너 나오지못해? 하!내 입에서 땅 꺼지는 한숨이 터져나갔다. 갑자기 온몸의 탕개가 탁 풀리는 느낌이 왔다. 행복하던 저녁식사 시간이 살벌한 고함소리가 오가는 전쟁의 시간으로 바뀌는 순간이였다. 애의말을 끝까지 다 들어주지 못하고 성급히 내 생각을 애에게 강요하려고 한 내 불찰로 시작된 불화였다. 아빠가 잘못했으면 엄마라도 참고 애를 달래고 난처한 장면을 슬기롭게 풀어줘야지 엄마가 덩달아 애하고소리지르면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왜 하필 건드려서는 안될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냐 말야… 속으로 갑자기 안해에 대한 원망이 검은 연기처럼 콱 솟아올랐다. 저가락을내려놓는 내 입에서 자기도 몰래 이런 말이 튀여나갔다. - 왜 덩달아 야단이야? 왜 하필공부타령이야? 우리가 애를 공부만 하는 애로 키우려고 낳은 거야? 학습성적때문에 애에게 스트레스 주는 일은 없도록 하자고 애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날부터 약속했었잖아? 그렇게 공부로애를 윽박질러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뭐야? 애가 지금 당장 책상 앞에 나앉아서 열심히 공부할 것 같애? 애가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애와 한판 붙으려고 작정하고 있었던 거였어? 아, 내 입은 이미 독극물을 분사하기 시작한 독사의 입이였다. 터지면 막을 수 없는 무너진 방파제였다. 애가 들을가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시작한 말이 어느새 내가 듣기에도 놀랄 정도로 노기를 띠고 높아져있었다. 이번엔 안해가 저가락을 탕 하고 내려놓았다. - 당신이 왜 내게 목소리를 높여?당신이 먼저 애가 하는 말을 중간에서 잘랐잖아? 당신이 애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뜻부터 애에게강요했잖아? 벌둥지는 당신이 쑤셔 터뜨려놓고 왜 잘못은 항상 내 몫이야? 당신은왜 항상 자기만 옳다고 생각해? 아… 이쯤 되면 부부의 싸움이였다. 욱 하고 올리치미는 분노를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때려부시고 싶었다. 그러나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폭력은 절대 불가였다. 그러나 부들부들 온몸이떨리게 치솟는 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쨕 하고 내 오른쪽 얼굴을 힘주어 때렸다. 그렇게 자학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였다. 쨕 소리가 미쳐가는 신경을더 흥분시켰다. 이번엔 왼손바닥 차례였다. 쨕. 그리고 쨕, 쨕… 죽어라 힘주어 치는데 아프다는 감각은 없었다. 그냥 얼얼하게마비되는 느낌뿐이였다. -꼴 좋다… 더 쳐. 으으으, 미쳐. 안해도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미쳐가기를기다려온 듯한 사람처럼 서로를 자극주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신발을 발에 신었다. 조금이라도 더 이 집안에머무른다면 방안에 들어가있는 애를 끄집어내여 일을 더 크게 벌이고야 말 것 같은 느낌 때문이였다. 나는 나로서도분노하고 있는 나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빨리 이 화약냄새 나는 공기 속에서 벗어나야 했다. 한시간 즈음 후, 나와 안해는 애의 침대 우에 애와 나란히비좁게 붙어 누워있었다. 나는 왼팔에 내 딸 윤초를 안고 있었다. 나도안해도 애에게 량해를 구하고 있었다. 애도 생각보다 선선히 우리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윤초는 말없이 내 팔에 뜨거운 눈물을 쏟고 있었다. 울음소리 참아가면서 아빠의팔을 눈물로 적실 수 밖에 없게 억울하고 외로운 딸애의 립장이 너무 안스러웠다. 이제 인생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기 시작하는 나이, 칠색무지개로아롱지기만 했던 네 동년의 즐겁기만 하던 세상은 갑자기 어데로 가고 세상은 어느 순간 너에게 문득 얼마나 거대하고 황당한 그림자와 무게로 다가왔을것이냐. 그것을 갑자기 감당하기엔 아직 너무나 여리고 약한 너의 작은 심장. 그심장에 따스한 사랑의 입김 대신 차거운 못을 박아준 아빠 엄마가 미안하구나. 그러나 그 못을 뽑고 그 심장안의 피를 더 끓여서 이 세상과 대담히 맞서고 맞짱 뜨고 이겨나가야 하는 것은 네 몫. 아빠 엄마는 그냥옆에서 그걸 안스럽게 지켜보면서 박수를 쳐주고 응원만 보내주는 응원군 역할 밖에 더해줄 게 없구나. 그래, 울거라. 울어서 눈물로라도 갑자기 다가온 네 청춘의 방황과 분노를 조금이라도달래줄 수 있다면 실컷 울거라. 한참 지나자 윤초의 소리없는 흐느낌도 멈춘 것 같았다. - 다 울었어?   - 응. 다 울었어.  - 우니까 좀 시원해? - 응, 좀 나아졌어. 엄마의 물음에 대답하며 윤초는 나의 목을 더욱 꽉 끌어안아왔다. - 아까는 아빠 엄마가 정말 잘못했다고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할게. 그리고 아까 윤초가 기르고 싶다던 거 뭐였어? 이젠 알려줄 수 있지? 안해가 다시 애에게 물었다. - 아니야, 기르지 않기로했어. - 아빠 엄마가 미안하다고 사과했잖아? 이제부터는아빠 엄마하고 속생각을 속임없이 공유한다고 방금 약속해놓고서는… - 아니야, 사주겠다는아빠 엄마의 마음만 있음 됐어. 사지 않을 거야. 선선히 포기하고 나서는 아이가 철들어보여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애가 정말 속으로 상처를 입고 아직도마음을 닫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닫아버린 아이의 마음의 빗장을 열 수 있는 대화법을 찾을수 없어 안타까웠다. 이럴 땐 안해의 대화법이 효과를 보았다. - 음, 강아지가 아니라면고양이는 더욱 아닐거구… 맞지? - 응, 고양이도 아니야. - 그럼 혹시 뱀?  언젠가 우리 셋이 모봉산에 갔을 때 파란색 죽엽청 뱀을 보고 네가 이쁘다고잡아다가 집에서 기르고 싶다고 했잖아? 아빠가 그 뱀이 독사라고 질겁해서 소리치면서 너랑 엄마를 끌고 막멀리로 도망친 적이 있잖아? 그 날 덩치 큰 아빠가 남자라는 게 가장 호들갑 떨면서 뱀이 무서워서 멀리 도망치던 기억을 떠올렸는지애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 뱀도 아니야. 뱀은다리도 없고 털도 없잖아? 내가 기르고팠던 건 다리도 여러개고 털도 나있어. 어쩌면아빠가 뱀보다도 더 징그러운 거라고 더 무서워하고 싫다고 할지도 몰라. 순간 내 머리 속에는 며칠 전 보았던 모모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상체를 들고 고개 숙여 윤초를 내려다보며 자신 있는 어투로 말했다. - 아, 알 만해. 아빠 딸 거미가 기르고팠던 거지? 또 아빠가 잘못 추측했다고 화내기 없기. 윤초의 눈이 반짝했다. - 어, 아빠가 어떻게알아? 거미 맞아. 언제 울었더냐 싶게 윤초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 흐흠. 아빠 딸 마음을알아맞추는 데는 그래도 아빠가 엄마보다 한수 우지. 나는 일부러 득의연한 목소리를 냈다. - 등이 빨간 장미색이여서 불꽃장미라고 불리는 거미, 원조는칠레산, 성인 거미의 길이는 15센치에서20센치 사이. 령상 20도에서 25도 사이의 온도와 60% 좌우의 습도만 유지시켜주고 그늘진 곳을 만들어주면스스로 알아서 잘 잠자고 뛰여놈. 먹이는 징그러운 배추벌레 혹은 빵벌레. 맞어? 윤초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 맞아. 아빠가 어떻게 그렇게잘 알아? 아빠가 지금 내 머리 속에 들어와 내 메모리 기억장치를 다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윤초가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나는 속으로 며칠 전 면접을 위해 만났던 쉬메이라는 녀자애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녀자는 내게 소설 한편을 주었을 뿐 아니라 오늘 이렇게 또 내 사랑하는 딸과 내 사이에 소통과 화해의 채널 하나를제공해주고 있었다.  안해도 놀란 눈길을 내게 보내왔다.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안해가내게 물었다. - 희한하네. 당신이어떻게 애 마음을 그렇게 잘 맞추고 그리고 언제 거미에 대해서 그렇게 연구했어? 딸과 안해 앞에 더 으시댈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였다. - 윤초 말 맞아. 윤초가원하는 게 무엇일가 알게 해달라고 하늘에 대고 간절히 소원하니까 방금 하늘이 아빠더러 잠간 윤초 머리 속에 들어가보게 했어. - 피, 아빠 뻥. 그런데 진짜 너무 신기하다. 아빠 오늘 정말 갑자기 슈퍼맨 된 게 아니야? 아니야, 갑자기 스파이더맨 된 게 아니야? - 윤초 눈에 아빠는 항상 윤초네 세대 생각을 읽을 줄 모르는고태라고 생각했댔지? 아빠도 충분히 윤초네 세대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 믿어? 안 믿어? - 아 믿어. 윤초가 급히 대답해왔다. 이거였다. 내가 노린 건. - 그럼 이젠 아빠랑 대화가 통하는 거지? - 응. 윤초는 이제 무조건 예쓰였다. 속으로 너털웃음이 나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딸과의소통이 가능해 진 것이다. 나는 말했다. - 근데 아빠 딸은 어떻게 펫 스파이더로 불꽃장미에게 관심을가지게 됐지? - 스파이더맨의 특징이 뭐야? 어데나착 달라붙으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거잖아. 그리고 거미줄 쫙 뻗치면 날아가고픈 어디나 날아가서 착 달라붙을수 있는 것. 그게 우리 중3들의 소망이기도 하잖아? 고중 입학 시험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붙고픈 고중에 턱 하고 붙을 수 있는 신비의 힘, 그걸 애들은 비는 거지. 그래서 요즘 중3학생들에게가장 인기있는 펫이 스파이더야. 아, 그렇구나… 갑자기 중3인 내 딸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입시교육의 압력이 컸으면중3의 롤모델이 스파이더맨이고 중3들은 스파이더맨의 공상적 힘에라도의지해 이 힘든 시간을 이겨내려 할가. 나는 다시 몸을 뉘여 내 딸 윤초를 꼬옥 안아주었다. - 그래, 펫 스파이더사줄게. 그리고 아빠도 윤초를 지켜주는 스파이더맨이 되여줄게. 그리고 한마디 더 장난기 섞어 이야기 했다. - 우리 세식구 다 스파이더가 되면 어떨가? 스파이더파파, 스파이더맘, 스파이더걸로 뭉쳐진 스파이더패밀리. 아마이 세상 가장 강력한 무적의 파워풀 패밀리가 될 걸. - 굿 아이디어. 윤초가 벌떡 일어나앉으며 오른손을 펼쳐들었다. 윤초는 지금아빠 엄마와 하이파이브가 하고픈 거다.  나도벌떡 일어나 앉아 오른손을 내밀어 마주오는 윤초의 손바닥을 향해 힘있게 부딪쳤다. 안해도 어느새 일어나서윤초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바닥을 보내왔다. 안해와나의 하이파이브를 바라보는 윤초의 눈에 어느새 행복의 물결이 찰랑이고 있었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금방 다시 서로를 꼭 보듬어안고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가족이라는무적함대.   누가 거미를 징그럽다고 했는가. 거미는 사랑스러운 것이다. 출처:2017 제6호
21    [중편]위대한 밥(1) 댓글:  조회:618  추천:0  2019-07-18
위대한 밥(1) 조광명   1. 엄마의 술 어, 내가 지금 깜빡 졸았었나? 잠간 눈 감았던 거 같은데 아주 악몽을 꾸었던 것 같으네. 어느세 횐히 다 밝아있는 창문을 뿌연 눈 슴벅여 바라보며 복희씨는 분명방금 그 창문으로 허연 형체가 사라지는 걸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모습도 어슴푸레 잘 떠올려지지않는 남편의 모습이였다. 날마다 창문이 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할 때 쯤이면 눈을 뜨곤 하는 복희씨였다. 아까도 분명 눈을 뜨고 또 하루 죽지 않고 살아있구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침대에서 내려서 화장실을  다녀온 것 같은데 다녀와서 조금만 더 자리에 몸을 누인다는 게 그만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잠 속에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넘기 힘들다는 아홉굽이를 넘기지 못해 마흔을 코앞에 둔 서른아홉 나이에 아들 셋, 딸 둘 다섯 자식남겨놓고 먼저 훌쩍 저세상으로 가버린 남편이 분명 꿈에 나타난 것이다. 함께 살았을 적 모습도 이젠 다 기억 속에서 지워져 원래 모습을 떠올리기도 힘든데 젊었을 적 모습과 전혀 상관 없이 허연 수염을 한 령감 모습으로 나타난 사람을 대번에 남편이라고 알아봤던 게 참 이상하다. 귀신이 되여서도 늙남? 마흔도 안된 한창 나이 때 죽었는데 그 귀신도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백발이 허연 령감으로 늙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데도 몇십년 전에 죽은 령감이 찾아온 거다 하고 대뜸 척 알아볼 수 있다는 게 꿈속에서도 신기했다. 그 령감이 침대에 누워있는 복희씨에게로 다가와 왼쪽 손을 잡았다. 가자, 혼자 이만 고생하고 이제는 내 따라 내 사는 곳으로 가자. 다짜고짜 복희씨를 잡아일으키려고 했다. 꿈 속에도 복희씨는 그게 싫었다. 죽은 령감이 허연 옷 입고 와서 손목을 잡아끄는 건 죽은 사람들 사는 동네로 데려가겠다는 뜻이 아닌가. 복희씨는 누운 채로 버티며 령감의 손을 탁 뿌리쳤다. -살아있는 내가 왜 죽은 당신을 따라가야 하는데. 당신 가고 난 후 나 혼자 남아서 다섯 자식 키우며 별의별 설음 다 겪다가, 스무살 넘게 다 키운 큰아들 지병으로 고생시키다가 끝내 지키지 못하고 먼저 앞세우고, 그러고도 남아있는 네 자식 불쌍해서 죽지 못하고 허리 부러지게 고생만 하다가, 네 자식 다 씩씩하게 키우고 시집 장가 보내고 손자들 업어키우느라 또 늙은 허리 부러질 지경이다가, 손주들도 하나 둘 시집장가 가기 시작해서 이제야 증손주들 엉덩이나 두드리며 늘그막 천륜지락 좀 누려보려 하는데 왜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훼방질 하노? 내가 왜 당신 따라가야 하는데? 나는 싫다마. 내사마 당신 따라가지 않을라칸다. 그보다도 지금 몹쓸 지병에 걸려 누워앓는 막내딸이 눈에 밟혀서 나 그 녀석 놔두고 못 간다. 당신 따라갈 수가 없어. 그렇게 매몰차게 말하면서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 두 다리 사이에 바람이 일게 씽하니 방구석으로 달려가 벽에 세워놓은 몽당비자루를 들어 령감의 어깨인가 뒤잔등인가를 마구 때렸던 것 같다. 가라구 가, 꼴도 보기 싫응께. -참 욕심두, 내가 살았던 나이보다 한배 더 넘게 살았음 됐지 뭔 미련 그리 많이 남아서 더 살려고 그래? 그럼 혼자 조금만 더 살아봐. 조만간 다시 데리러 올 테니께 떠날 준비랑 해놓고 날 기다리라구. 령감은 그렇게 말하며 복희씨 손에서 몽당비자루를 가볍게 빼앗아들고  스르륵 미끌어지듯 뒤걸음질쳐 안개처럼 사뿐히 창턱에 올라섰다. 복희씨를 보고 고개 끄덕여 씽긋 웃어보이고는 유리창 속으로 스르륵 스며들어  유령처럼 사라졌던 것 같다.   -망할 놈의 령감태기, 그 어린 것들 활 다 내버려두고 자기 혼자 훌쩍 저세상으로 가버릴 때는 언제고 뭔 렴치로 이제 와서 자기 따라가자고그래? 미쳤지. 내가 왜 자기를 따라가? 죽어서도 나는 지가 사는 동네를 피해 다른 동네에 가서 살라칸다. 복희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꿈속에 령감을 쫓아버리려고 손에 들었던 몽당비자루가 정말 아직 현실 속 벽구석에 그대로 세워져있나 눈길을 벽구석으로 주었다. 그러나 그 벽에는 아무것도 세워져있지 않았다. 어, 그 귀신두상이 정말 몽당비자루를 들고 가버렸남? 순간 복희씨는 원래 저 벽구석에 몽당비자루가 세워져있기나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집으로 이사온 그때부터 아예 몽당비자루라는 건 없었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며 꿈과 현실이 마구 헛갈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꿈에 손에 들었던 그 몽당비자루는 너무 눈에 익숙하고 손에 익은 몽당비자루였다. 언제 적의 비자루였나. 애들 어릴 때 초가집에 아직 장판도 아니고 까래를 깔고 살던 시절 구들을 쓸던 몽당비자루였던 것 같다. 아니면 맨흙바닥 봉당을 쓸던 부엌용 비자루였나? 령감이 몽당비자루 귀신이 되여서 꿈속에 나타나서 그 비자루로 령감을 쫓아버릴 수 있었던 것일가. 복희씨는 정말이지 오늘 당장이라도 동네 시장에 나가서 비닐로 된 비자루를 자루 튼튼한 거로 하나 새로 사서 벽구석에 세워놓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나는 무서울 게 없이 만만하니까 감히 데리러 와도 비자루에 매 맞는 건 무섭다 그거지∼ 그래, 다시 와봐. 내가 두발 장대 비자루로 더 심하게 때려서 쫓아보내지 않나.   꿈속에 령감에게 잡혔던 왼손에 아직도 불쾌한 저승사자의 기운이 그냥 묻어있는 것 같아 오른손으로 그 왼쪽 손을 탁탁 쳐서 털었다. 그것만으로는 성차지 않아서 끙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많이 굳어지고 뻣뻣해진 다리를 움직여 주방으로 향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큰아들을깨울가봐 주방 찬장을 소리내지 않게 조용히 열고 안을 살펴보았다. 다행이였다. 반병 좀 넘게 흰술이 담겨져있는 술병이 찬장 한쪽 구석에 서있는 게 보였다. 큰아들이 반주술로 마시다가 남긴 걸 넣어놓은모양이였다. 복희씨는 그 술병을 내려 마개를 열었다. 밥공기 하나를 찾아 거기에 술을 절반쯤 부었다. 그 공기안의 술에 오른손을 넣어 술을 퍼서 왼손에 부었다. 그리고 술에 젖은 왼손을 오른손으로 슥슥 문대여 씼었다. 저승기를 씻어내는 것이다. 남편이 죽었을 때도 큰아들을 앞세웠을 때도 시체 우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묻혔던 저승기를 나중에 흰술로 씻어내군 했던 기억이 아직 머리 속에 남아있어서였다. 그래, 날 저승으로 데려가려구? 안 따라간다 안따라가. 당신이 꿈 속에 와서 묻혀놓은 저승기 빡빡 다 씻어내고 깨끗이 더 오래 살라칸다. 왼손이 깨끗이 씻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 복희씨는 술에 젖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쓱쓱 문대여 씻었다. 온몸을 다 씻지는 못해도 령감의 눈길이 멈추었던 얼굴은 술로 씻고 싶었다.   코구멍으로 술냄새가 막 비집고 들어오고 입술에 술이 묻어 촉촉해졌다. 향기롭고 시원했다. 정신이 확 드는 것 같았다. 혀를 내밀어 입술에 묻은 흰술을 빨았다. 어휴, 흰술맛도 참 오랜만에 맛보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흰술맛이다. 남편이 먼저 저세상으로 갔을 때 기절해 쓰러졌었다. 그러다 귀 째지게 들리는 애들의 울음소리에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칠성판 우에 모셔져누워있는 아버지 옆에 엄마를 따라 엉엉 멋모르고 울다가 엄마까지 기절해서 쓰러지자 엄마도 죽은 줄 알고 놀라서 더 기절할듯 왕왕 대들보 무너져라 하고 울어대는 올망졸망한 다섯 자식을 보면서 복희씨는 더욱더 하늘이 무너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저것들을 다 어쩌노, 저것들을 다 어쩌노∼ 한품에 다 안고 집에다 활 불을 질러버릴가∼ 그러나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저것들을, 애비 잃은 저것들을, 불쌍한 내 피덩이들을 어찌하노∼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그대로 딱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아예 입안에 혀를 씹어 그대로죽어버릴가. 아아, 그러나 그것만은 차마 못할 짓이였다. 안되지. 불쌍한 저것들을 두고 나까지 죽어서는 안되지. 저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구, 제대로 기르지도 못할  거면서 펑펑 이 세상에 내싸지른내가 죄인이지. 복희씨는 벌떡 일어나앉았다. 칠성판 앞에 간소하게 차려놓은 제사상 우에 놓여있는 술병을 손에 들었다. 그대로 입에 대고 목을 뒤로 젖혔다. 꿀럭꿀럭 콸콸 쏟아져 입안으로 들어오는 술을 그대로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마셔보는 배갈이였다. 원래 수줍음 많은 성격이라 동네 잔치집 술상에서랑 너무 독해서 감히 입에도 대지 못하던 배갈이였다. 그러나 그 배갈이 전혀 독하지 않았다. 그냥 물 같았다. 숨이 찼다. 가슴이 터질듯 심하게 풀무질했다. 물 한병을 다 끝까지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조차 받아삼키기 힘든 가슴이 그대로 탁 터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터지지 않는 가슴에 쉬지 않고 그냥 꿀럭꿀럭 술을 부어넣었다. 그랬다. 배속에 삼킨게 아니라 터질 것 같은 가슴에 쏟아부은 술이였다. 드디여 술병이 굽이 났다. 술병을 내리고 뒤로 한껏 젖혔던 목을 다시 숙였다. 숨결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다섯 자식들이 울음을 딱 그치고눈물 코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놀라서 엄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길들을 보며 생각했다.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엄마는 일어서야한다. 그랬다. 일어서야 했다. 저기 저렇게 죽어서 누워있는 애비 대신 엄마는 다시 당당히 일어서야 했다. 입술을 피나게 깨물며 이를 악물었다. 휴- 하고 가슴 안에 터질 것 같이 쌓여있는 한숨을 땅 꺼지게 길게 내뱉으며 벌떡 일어섰다. 조금도 휘청거리지 않았다. 맥 잃고 쓰러졌던 두 다리에 힘이 되돌아 생기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없이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이 새까맣던 머리속이 오히려 더 말갛게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놀라서 따라 일어서서 두 다리를 붙안고 두팔에 매달리는 자식들에게 이를 악물고 말했다. -엄마 안 죽어. 엄마는 살 거야. 살아서 너희들 다 안고 다 잘 키울거야. 애비 없이 자란 호로자식들이라는 말 안 듣게 당당하고 씩씩하게 잘 키울거야. 오른팔 들어 술병을 활 부엌 북데기더미 우에 던지고 두 팔 벌려 새끼들을 한품에 안았다. 아이고, 내 새끼들아, 이 원쑤놈들아∼ 그제야 막혔던 가슴이 터져열리며 오열이 터져나왔다. 낮은 처마에서 흙이 놀라 부스러져 떨어지도록 울어댔던 그 캄캄했던 날∼ 언제 어떻게 다 이겨내고 지금 이렇게 늙어버려 제몸 하나도 맘대로 움직이기 버거워졌노. 힘들었던 세월, 다섯 자식 먹여살리려고 너무 뼈빠지게 일해 정말 밥숟가락도 들기 힘들게 지쳤을 때면 저도 몰래 흰술을 찾게 되였다. 남편잃은 불행 앞에 다섯 자식 한품에 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었던 흰술이 아닌가. 그 흰술을 식전에 한잔씩 하면 막혔던 숨구멍이 다시트이군 했다. 막막한 세상에 다시 숨 쉴 수 있었다. 그 한잔 배갈 주량이 차차 늘더니 어느 날엔가 7푼짜리 술잔 석잔 주량으로 굳어졌다. 해마다 청명, 추석 두번과 남편의 제사날과 구정까지 네번 남편의 무덤 앞을 찾아 제사 지내고 차례를 지내며 석잔씩 붓고 남편 대신 마셔주던 딱 그 주량이였다. 저녁마다 지친 몸을 흰술 석잔으로 달래군 했다. 안주도 따로 없이 밥이 그냥 안주였다. 쌀알이 막대고 밥알이 안주였다. 그리고 술이 힘이고 술이 위안이였다. 자식들 다 키워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 보내고∼과부인생 30여년 남편 대신 가녀린 한 녀자의 인생을 강하게 지켜준 것이 흰술이였다. 그런데 그 흰술도 어느날인가 갑자기 입안에 쓰고 목구멍에 너무 따가워서 넘기기 힘들어졌다. 그때 복희씨는 얼마나 서글펐는지 모른다. 어이쿠, 내 인생도 이젠 맛이 다 가는가 보네. 내 몸 속의 진도 이젠 다 빠져나갔는가 보네. 어쩜 그렇게 맛있던 흰술도 이렇게 넘기기 힘들어졌노? 자신이 늙었음을 인정하고 채 비우지 못한 흰술병을 찬장 안에 서글픔과 함께 다시 넣어두었다. 그러고도 나 지금 몇년 더 살았노? 질긴 게 사람 목숨이라 흰술 마시지 못하는 인생도 10여년은 더 산 것 같다. 아 이만하면 살 만큼 살았는디∼ 새끼들 다 커서 시집 장가 갈 때까지만 죽지 않게 살게 해주십사 하고 빌었는데, 쓰러지지 말고 이 악물고라도 살자 했는데∼이젠 손주녀석들도 시집 장가가기 시작해서 증손주들 엉덩이까지 두드리는 나이까지 살다니∼일찍 죽은 령감 몫까지 다 사는가부다 했다. 큰아들 앞세운 죄로 죽고 싶어도 못 죽나부다 했다. 어이쿠, 내가 살이 센 년이지. 령감 잃고 자식까지 앞세우고∼ 내가 전생에 지은 죄 너무 많은 년이여∼ 그래서 그 죄를 다 갚느라 두번씩이나 제 손으로 살붙이에게 상복 입히며 남보다 열배 되는 불행을 겪고 허리 휘게 고생만 하며 살아온 거여. 그러면서도 참말로 나이 여든 되도록 징하게 오래도록 산 거여. 이러다 어느 날 기력이 뚝 진해서 벌커덕 드러누워 똥오줌 건사도 바로 못하면 큰일인디.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기 전에 어서 죽어야 하는디∼ 그런데 왜 방금 꿈 속에 령감이 데리러 왔을 때 순순히 따라가지 못했을가. 왜 죽은 령감 따라 저세상으로 가기가 그렇게도 몸이 오싹해나도록 싫었을가. 왜 꿈 속에서도 그렇게 더 오래 살고싶었을가. 죽은 령감이 손을 잡는 것조차 오싹 싫고 무섭고 진저리 쳐졌을가.   사람 목숨이란 게 참 치사하고 질긴 거지 제 마음대로 안되는 게 죽는 일이지∼드러누워 대소변 못 가려 자식들 고생시키기 전에 어서 죽어야 하는디∼ 왜 이리 더 살고 싶어지노∼ 복희씨는 내려놓았던 술병을 오른손에 들고 저도 몰래 입가로 가져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술잔 아닌 병나발 그대로 흰술 한모금을 입안으로 부어넣었다. 시원하고 달착지근하고 쨍한 술향기가 입안에 돌았다. 아참, 오랜만에 흰술에 적셔보는 혀였다. 입안의 모든 감각들이 다 살아나는 듯했다. 그래, 못 마시겠던 흰술을 다시 또 마실 수도 있고∼ 사람이 오래 사니까 별 희한한 일 다 있네∼복희씨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흰술을 꿀꺽 목구멍으로 넘겼다. 목구멍이 알싸해나며 아직 새벽이여서 텅 빈 속이 그대로 흰술 도수만큼 따뜻해지고 뜨거워져왔다. 어이쿠, 딱 한모금이네, 더 마시지는 못하겠네. 그래도 술맛이 다시 돌아오다니∼ 복희씨는 한모금이라도 더 마시고프지만 더 마셔서는 안된다는 몸의 신호를 그대로 받아들여 술병을 내려놓으며 아쉬운듯 입을 쩝쩝 다셨다. 그 때 복희씨의 귀에 환갑이 다되여가는 큰아들의 침실에서 울리는 전화벨소리가 들려왔다. 희한하네, 늙으면서 청각도 이전보다 많이 못해져서 옆에서 울리는 전화벨소리도 듣지 못하고 놓칠 때가 많았는데 오늘 새벽엔 왜 침실안에서 울리는 전화벨소리가 주방에까지 잘 들리지? 방금 목구멍으로 넘긴 새벽술 한모금이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마시군 하던 귀밝이술보다도 더 귀를 밝게 해준 모양인감? 갑자기 귀가 뻥 뚫려 열린 것이 이상했다. 복희씨는 어느새 큰아들의 침실 밖으로 새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2. 술병에 기대여 일어서라 -오, 하은이구나. 이 새벽에 어쩐 일로? -엉? 뭔 소리냐. 갑자기∼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 넘었다고?∼ 근데 왜 이제야 알려주냐?∼ 의사가 그래? -음∼ 울긴∼ 울지 말고∼그래, 큰외삼촌 지금 당장 비행기표 알아볼게. 안되면 기차를 타고라도 달려갈게. -응, 작은외삼촌이랑 이모랑 내가 전화해서 련락할 테니까 너는 엄마만 잘 돌봐.   -아버지에겐 알려줬냐? 응, 잘했다. 알려줘야지. 온다냐? -울지 말고∼ 잘 버텨. 니가 고생 많다. 가담가담 끊겼다 이어지며 들려오는 큰아들의 통화내용이 꼭마치 옆에서 듣고 있는듯 생생히 귀가에 맞혀왔다. 그걸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다 들었다. 복희씨는 아래다리가 떨려 더 제자리에 서있을 수가 없었다. 급히 두 손으로 싱크대를 붙잡았다. 외손녀딸 하은의 전화. ∼올 것이 왔구나∼ 복희씨는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방 바닥에 무너져내렸다. 마침 옆에 작은 플라스틱 쪽걸상이 보여서 팔을 뻗쳐 그걸 끄당겨서 그 우에 엉덩이를 얹었다. -불쌍한 것∼ 깡충깡충 재롱 떨며 밥상 앞에 나비처럼 춤을 추던 막내딸 순영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타고난 무용수로 그렇게 이쁜 춤 팔랑팔랑 잘 추더니∼ -엄마, 술 맛있어? 술잔 기울이는 엄마를 빤히 두눈 반짝이며 쳐다보던 량태머리 막내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도 한잔 하련? -선생님이 학생은 술을 마시면 안된다고 그랬어. -그래, 선생님 말 잘 들어야지. 근데 너희 선생님, 진짜 술맛 어떤 건지 모를 건디. -술맛에도 진짜 맛 가짜 맛 있어? -있지, 진짜 술맛 알고 마시는 사람과 진짜 술맛 모르고 마시는 사람 있지. -그럼 진짜 술맛은 어떤 거야? -그걸 어떻게 말로 해? 니가 직접 마셔봐야 알어. 조금 한모금만 마셔봐. 방금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작은딸의 입가로 술잔을 가져다 대였다. -괜찮아. 엄마가 맛보라고 입에 넣어주는 걸 받아마시는 건 나쁜 짓 하는거 아니야. 막내딸은 그래도 될가 하고 묻는듯 눈을 반짝이며 술잔의 술을 한모금 호록 입안에 빨아들였다. 옆에 빙 둘러앉아있던 나머지 네 아이들의 눈이 동시에 놀라서 동그래지고 숟가락질하던 손길들이 다 뚝 멈춰버렸다. -뱉지 마, 그대로 입에 머금었다가 꿀꺽 삼키는 거야. 막내딸의 두 눈이 놀란듯 올롱해지고 량쪽 볼이 금세 빨개졌다. 그래도 입을 벌려 술을 토해 내뱉지 않았다. 캬 하고 입술을 벌려 뜨거운 술열기를 토해내지도 않았다. 엄마가 시킨대로 아래우 입술을 꼭 앙다물고 입안에 술을 머금고 있었다. -이젠 넘겨도 돼. 기특해서 눈빛으로 격려해주며 꿀꺽 넘기는 시늉을 시범 보여줬다. 꼴깍. 막내딸의 예쁜 목선이 꿈틀했다. -넘겼어? -응. -참 용하다. 우리 순영이. 술맛 어때? -음∼ 독해. 근데∼ 맛있어. 너무 뜻밖의 대답이 막내딸의 입에서 튀여나왔다. -맛있어? -응. -진짜루다? -진짜루. 다른 네 아이들이 믿기 어렵다는듯 고개를 빙빙 돌렸다. -흰술이 맛있어? 독해서 쓰거운 거 아니구, 맛있어? 네 아이들이 중구난방 물었다. 막내딸이 고개를 딸랑방울처럼 끄덕였다. -응. 진짜 맛있어. 복희씨도 너무 뜻밖이여서 입이 딱 벌어지려 했다. 니가 술맛을 아네. 니가 술맛을 알아뿌렸네. 엄마의 쓴 술맛을 단맛으로 알아뿌렸네. 오른손을 뻗어 귀여운 딸애의 얼굴을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괜히 코등이 시큰거려왔다. 괜히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밥상 앞에서 눈물 보이면 안되는데. 눈을 비집고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억지로 목구멍으로 꿀꺽 눌러 삼키며 딸애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밥 식는다.어서 밥 먹어. 밥 먹어야 우리 순영이 빨리 크지. 그런 딸애가, 그런 순영이가 지금, 지금 많이 아파서 다시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복희씨는 갑자기 온몸의 맥이 탁 풀리며 사지가 해나른해나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숨구멍이 막힌듯 가슴이 답답해났다. 그대로 옆으로쓰러질 것만 같았다. 내가 이러다 오늘 정말 아까 꿈속의 령감을 따라 저세상으로 가는 건가. 눈앞이 까무룩해지려 했다. 복희씨는 급히 속으로 부르짖었다. 안돼, 안돼, 아직은 안돼. 가기 전에 내 새끼들 얼굴 다 내 눈에 다시 비벼넣고 담아야 돼. 순영이, 내 새끼 순영이, 순영이를 안아주러 가야 돼. 복희씨는 힘을 모아 고개를 흔들었다. 억지로 고개 들어 싱크대 우에 놓인 술병에로 눈길을 던졌다. 그 술병에라도 기대여야 했다. 구원병 같이 서있는 그 술병에라도 기대여야 했다. 남편을 잃었을 때도, 큰아들을 앞세웠을 때도 쓰러진 복희씨를 다시 일으켜준 술병이였다. 술병을 향해 오른팔을 뻗었다. 간신히 손에 닿는 술병을 놓치지 않으려고 꽉 손안에 거머쥐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용케도 술병을 떨구지 않고 입까지 가져왔다. 꿀꺽. 흰술 한모금을 크게 목구멍으로 넘겼다. 술은 입안에 머물새 없이 목구멍을 적시고 가슴을 지나 그대로 명치끝까지 쨍하니 뜨겁게 가닿았다. 술에 데여 뜨거움을 느낀 몸속 기관들이 꿈틀꿈틀 살아움직이는게 느껴졌다. 죽지 않았구나. 다시 살아났구나. 휴- ∼ 막혔던 숨구멍이 열렸다. 들이마시고 내쉬지 못하고 있던 숨을 드디여 다시 토해낼 수 있었다. -순영아, 엄마를 기다려. 엄마가 니 입에 맛있는 술 넣어줄게. 엄마와 맞술 한잔 해야지. 이것아. 그렇게 속으로 넉두리가 나오는데 그 넉두리는 목소리로 밖으로 터져나가지 않았다. 복희씨의 입에서 후여후여 하는 바람소리가 눈물 없이 말라버린 갈대의 흐느낌처럼 터져나왔다. 큰아들의 방에서는 큰아들이 여러 곳으로 전화를 돌리는지 통화소리가 한참 더 이어져 흘러나왔다. 이젠 그 소리들이 다 환청같이 웅웅웅 들려왔다. 이제 더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복희씨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스스로 내리쓸어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수십번은 무너졌던 고난의 세월 스스로 익힌 재활 호흡법이였다. 서서히 다시 호흡의 리듬이 회복되여졌다. 드디여 손이 떨리지 않아 싱크대를 다시 붙잡고 일어설 수 있었을 때 복희씨는 큰아들에게 발각될세라 아까보다 열배는 더 무거워진 다리로 그래도 소리나지 않게 사분사분 조용히 걸어 자기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옷장문을 열고 작은 보따리 하나를 꺼내여바닥에 내려놓았다. -순영아, 엄마가 니 보러 가려고 옷보따리 언녕 준비해놓고 있었걸랑. 이제 엄마 니 보러 가도 너무 늦은 것 아니지? 엄마를 기다려줄 수 있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복희씨의 눈가로 눈곱보다 더 진한 것이 피눈물인듯 축축히 배여나왔다.   3. 엄마의 밥 여기저기 여러 곳에 새벽전화를 돌리고 방안에 딸린 화장실에 들어가 대충 씻고 방문을 열고 나오는 순철의 코에 진한 청국장 냄새가 확 달려들었다. 주방 옆 식탁우에는 어느새 아침밥이 차려져있었고 엄마가 벌써 의자에 앉아 아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엄마, 어느새 아침밥 다 해놓으셨네요. 그러잖아도 오늘아침 좀 일찍 출장 나갈 일이 있는데∼ 시치미를 뚝 떼고 엄마 앞에 마주앉았다. 수저를 들고 뜨거운 된장찌개를 한숟가락 푹 떠서 후후 불어 식히고 입안에 쏟아넣었다. -앗 뜨거워. 역시 엄마가 끓인 청국장 맛 최고야. 근데 엄마 언제 이렇게 청국장 끓이고 상도 다 차려놨어요? 나 엄마 움직이는 소리 방안에서 하나도 듣지 못했는데.   -맛있음 됐구나. 어서 먹자. 먹고 기운 내야지. 복희씨의 목소리에 어떤 결연함 같은 것이 묻어있는 걸 아들 순철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어제 목소리에 비해 갑자기 진이 많이 빠진듯 탁하게 말라있고 갈라질듯 많이 쉰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철이 다시 엄마의 얼굴을 보니 눈확도 어제보다 갑자기 많이 안으로 푹 더 꺼져들어간 것 같았다. 크게 열병을 앓고 난 사람처럼 하루밤 새 갑자기 너무 많이 늙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신 엄마의 옷차림새는 너무 정갈하게 깔끔했다. 웬간해서는 잘 꺼내입지 않으시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한복을 입고 계시고 머리도 한올 헝클어질세라 가운데로 쪽 하얀 가리마를 길처럼 내고 뒤에 쪽진 머리에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흰색 코신 모양의 악세사리가 달랑달랑 매달려있는 하얀 은비녀를 꽂고 계셨다. 언젠가 막내동생 순영이가 아시아 문화교류 중국대표 무용수로 한국과 일본 등 7개국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와서 엄마에게 선물한 옷과 은비녀였다. 엄마의 인생을 모티브로 창작한 독무 을 무대에 올렸고 그 무용 공연 때 무대우에서 무용복으로 입었던 한복이라며 그 무용으로 공연 때마다 극장을 메운 외국 관중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자랑했다. 어릴 적 재롱 부리느라 춤추기를 즐긴 딸에게서 무용 재능 끼를 보아내고 그 힘든 세월에도 기어코 무용수로 자라나도록 밀어주고 힘을 주신 엄마의 은공이라며 그 날 순영이는 엄마 앞에서 그 한복을 입고 이라는 그 무용의 마지막 한단락을 신들린듯 춤춰보였다. 그 무용의 진짜 주인공인 엄마가 가장 이 한복의 영원한 주인공이여야 한다면서 엄마에게 그 한복을 선물하고 직접 입혀드리기까지 했다. 그 후 당연히 엄마 당신인 복희씨는 그 한복을 애지중지 주름 갈세라 옷장안에 정히 걸어 아끼셨고 둘째 순호네 애가 장가갈 때 그 한복을 정히 입고 앉으셔서 손주며느리의 절을 받으셨다.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한복을 오늘 입으시다니? 순철은 느낌이 약간 이상했다. 혹시 아까 통화내용을 다 들으셨나? 속으로 그런 의문이 떠올랐으나 그러나 급히 속으로 도리머리를 저었다. 몇년 전부터 가는 귀 먹어서 바로 면전에서 아니고 뒤쪽에서 말씀드리면 일상 대화 나누는 정도의 목소리라 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작년에 만원 넘게 돈을 들여 독일제 보청기까지 맞춰드렸는데도 오히려 말소리가 더 윙윙 울림소리로만 들려서 불편하다며기어코 끼지 않고 그냥 어두운 맨 귀를 고집하시는 엄마였다. 그런 엄마의 청력으로 방금 방안에서 나눈 통화내용을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침실에서, 먼 주방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다 알아들었을 리가 만무했다. 순철은 엄마에게 롱담을 건네였다. -혹시 오늘 동네 로인활동실에서 무슨 중요한 행사가 있어요? 새각시처럼 곱게 한복까지 차려입으시고∼ -아니다. 나 오늘 좀 멀리 다녀올 곳이 있어서 그런다. -네? 어디루요? -나 순영이 보러 다녀와야겠다. 애비 니가 좀 비행기표든지 기차표든지 알아서 수고해줘야 되겠다.   -네? 엄마! 순철은 놀라서 입안에 우물우물 씹던 밥을 그대로 넘기지도 못하고 하 입을 벌리고 엄마를 바라봤다.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한 것 같은 엄마의 얼굴에는 더 상의할 여지 없이 이미 결정내린 일이라는 뜻의 결연함이 묻어있었다. 방금, 먹고 기운내야지. 하던 목소리에서 결연함을 느끼며 약간 이상하다고 느꼈던 건 틀린 게 아니였다. -엄마! 순철은 목소리에 힘을 넣었다. 뜬금없이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고 모르쇠를 대고 꾸며서 말하려면 목소리부터 꾸며야 했다.   -됐다. 어서 밥 먹자. 밥 먹고 기운 내야지.  엄마는 다시 식탁에 마주앉을 때 했던 그 말을 반복했다. 담담하나 더 결연해진 어투였다. 순철은 더 다른 말이 필요없음을 깨달았다. 아, 엄마는 다 알고 계시는구나. 그런데 어떻게 아신 걸가. 하은이 그 녀석 그 경황에 직접 외할머니에게까지 먼저 전화를 드렸을 리는 없고. 엄마, 순영이 많이 아픈 걸 이미 다 아셨어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이미 씹은 밥과 함께 다시 눌러 삼켜버렸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입안으로 부지런히 밥숟가락을 날라 청국장 한그릇과 공기밥 하나를 비웠다. 밥 한알도 남기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그릇에 밥알 하나 남기는 걸 절대로 용서하지 않던 엄마의 엄한 식사법 례의범절 훈육에 자기 앞의 밥그릇을 철저히 깨끗하게 비우는 데 습관된 순철이였다. 순철이가 수저를 놓을 때 쯤 엄마도 반그릇 담으셨던 당신의 밥그릇을 깨끗이 다 비우셨다. -오늘 비행기표 다 매진되여서 고속기차로 움직여야 될 것 같아요. 다섯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인데 엄마몸으로 견딜 만하겠어요? -그럼. 그보다 더 험한 시간도 다 이겨내고 지나왔을려니∼ -알았어요, 엄마. 설겆이는 내가 할 테니까 들어가서 약병이랑 다 잘 챙기세요. 신분증 챙기는 것도 잊지 마시고. -이미 다 챙겼네라. 작은 보따리몇개 만들어서 바퀴 달린 트렁크 하나에 다 담아놓았으니까 애비 니가 오늘 좀 고생해야겠다. -뭔 짐을 보따리 몇개씩이나 싸요? 간단히 싸면 될건데. -다 필요한 것들이고 이 어미가 생각 있어서 싼 거니까 무겁고 귀찮더라도 수고해줘야겠다. 아, 엄마는 오늘 따라 그 언제보다강하시구나. 무엇인가 각오하고 결연해지신 것 같아서 그래서 순철은 막내녀동생 순영의 지금 건강상태가 더 걱정되였다. 순철은 더 아무 말도 못하고 네-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멈에겐 련락했냐? 순철은 속으로 꿈틀했다. 딸 순영의 상태가 위급한 상황인것도 엄마는 다 알고 계시는구나. 과연 마음에 이미 어떤 각오를 하고 계시는구나∼ 어떻게 아셨는가고 감히 묻지 못했다. 건너오는  엄마의 물음이 너무 조용하고 차분해서 순철 역시 모든 감정의 기복을 감춘 채 조용히 대답했다. -네. 비행기표 알아보고 있대요. 퇴직 후, 아직 몸에 힘이 남아돌고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을 때 하나라도 더 벌어서 자식들 뒤바라지 해준다고 늙은 시어머니와 남편을 집에 두고 외국에 일하러 나가 있는 안해였다. 순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순영아, 엄마도 오늘 니 보러 가신댄다. 엄마에게 알려주지 않고 나 혼자 니 보러 가려 했는데. 2년 전 공연중 무대 우에서 쓰러진 것이 불치의 근위축증으로 진단내려졌고 발견했을 때는 이미 병이 거의 골수 속까지 스며든 상태라 별로 어찌해볼 방법이 없었다. 의사와의 상담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 현대 의학으로는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는 현실을 인정한 순영이가 입원해서 아직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강한 화학약품들을 사용해 치료하는 걸 거부했고 주변에서도 환자의 의견을 존중해 입원치료하지 않고 집에서 한달에 한번씩 병원에 검진을 다니며 약처방을 받아 보수적으로 치료하는 데 동의했다. 그 사이 병세가 점점 악화되여 근육이 뒤틀리는 통증을 이기기 힘들 때마다 입원치료도 서너번 했고 그때마다 소식을 들은 순철은 녀동생에게로 달려가 힘이 되여주군 했었다. 예술혼을 불사르느라 집안 살림에 좀 등한했는지 부부가 늘 불화를 겪더니 어느날인가 조용히 리혼 사실을 통고해와서 형제들 가슴을 아프게 했고 엄마 복희씨의 가슴에 탕탕 큰 대못질을 했다. 딸아이를 기어코 자기가 맡아 기르며 더욱더 혼자 그냥 춤에만 미쳐살던 동생 순영이 뜻밖에 뛰쳐나온 불치의 병으로 더는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된 것이 너무 가슴에 아파 순철이도 막내녀동생 순영이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에서 검은 연기 솟아나도록 한숨을 쉬곤 했다.   4. 내 엄마가 너무 가벼워 눈물 나네 유리창 밖으로 언뜻언뜻 지나가는 풍경들을 하염없이 내다보던 복희씨가 환갑이 다 되여가는 아들 순철에게 말했다. -허이구, 내가 왜 순영이 그걸 춤군으로 키워놔서∼∼ 뒤말을 잇지 않았지만 순철은 그 삭제된 뒤말의 뜻을 충분히 다 알 수 있었다. 허이구, 내가 왜 순영이 그걸 춤군으로 키워놔서 그렇게 정신없이 무대우에서 춤을 추다가 기어코 무대 우에 쓰러지게 만들었노? 그냥 평범한 녀자로 키웠음 무대 우에 껑충껑충 춤추느라 몸을 혹사할 일도 없고, 그러면 살림살이 등한히 한다고 남편과 다툴 일도 없고 리혼할 일도 없고, 춤추다 지쳐서 근위축증에 걸릴 일은 더구나 없었겠는데∼ 엄마는 지금 딸 순영이가 리혼하고 근위축증에 걸린 모든 책임이 엄마인 당신이 딸을 기어코 무용수로 키워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계시는 것이였다. -엄마는 왜 부질없는 생각 하고 그러세요? 다 순영이 지가 좋아서 춤을 춘 거구, 지가 춤을 추면서 행복해했던 거구, 지가 춤에 미쳐서 무용가로 성공했던 거 아니예요? 리혼하고 근위축증 걸린 건 걔가 무용 했던 것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엄마 말 대로라면 이 세상 그렇게 많은 무용수들이 다 근위축증에 걸려야 되게요? 순철은 늙은 엄마를 위안해줄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다. 후유∼ 이 에미 살이 너무 세서 그런 거다. 이 에미 몸에 배여있던 액운을 순영이가 물려받아서 그런 거다. 내 대신 걔가 죄를 받는 거지 뭐. 그렇게 대답하는 복희씨의 머리속에 어린 딸 순영의 목소리가 들리는듯했다. -엄마 대신 내가 아플게. 순영이 그것이 진짜로 했던 말이였다. 복희씨 눈앞에 엄마 아프지 마 하고 울면서 엄마 손을 꼭 붙들고 부르짖던 막내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였던가∼ 복희씨가 뜨거운 땡볕 아래 논에 분무기로 농약을 치다가 더위도 먹고 농약냄새에도 중독되여 논두렁에 쓰러졌던 그 날이∼ 아, 맞다. 그 날은 순영이 대학입학 시험을 마치고 시내 학교에서 짐을 싸들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였다∼ 다행히 동네사람들에게 발견되여 진 중심병원으로 실려가 구급조치로 눈을 떴을 때 복희씨 눈에 안겨온 건 근심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는 동네 이웃 사람과 그리고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엄마 손을 꼭 붙들고 눈물을 찔찔 짜고 있는 막내딸 순영이였다. -순영이, 네가 돌아왔구나. 시험은 잘 쳤고? -응, 엄마, 내가 왔어. 엄마 딸 순영이 왔어. 응응, 시험은 잘 쳤어. 무용실기 시험도 잘 봤고∼ 걱정 마, 가고팠던 대학에 꼭 붙을 수 있어. 순영은 흐느끼며 엄마 말에 대답했다. -울긴, 못나게. 더위 먹고 잠간 어지러워서 그런 건데∼울지 마. 그렇게도 보고 싶던 막내딸의 얼굴을 어루쓸었다. -엄마, 아프지 마. 이젠 엄마 대신 내가 아플게. 엄마 딸 순영이 다 컸으니까 이젠 내가 엄마 대신 아플게. 엄마는 이제 더 아프지 마. 순영이 더욱 흑흑 흐느끼며 엄마 가슴에 얼굴을 비벼댔다. -못난 것. 그래, 엄마 아프지 않을게. 우리 순영이도 다 커서 이젠 대학생이 다됐는데 엄마가 왜 아파. 이젠 안 아플  거야. 엄마 다 나았어. 우리 집으로 가자. 엄마 맛있는 거 해줄게. 복희씨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발에 신을 신었다. 하루 쯤 더 링게르를 맞고 치료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도 물리치고 기어코 병원문을 나섰다. 딸이 고중 공부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내 딸이 대학시험 잘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혼자 의젓하게 시내 학교서 기숙사 생활하면서 공부하다가 몇달 만에 짐 다 싸들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엄마인 내가 병원에 누워있을 수만은 없지. 딸 얼굴이 가장 좋은 약이고 아픔을 잊게 해주는 처방이였다. 복희씨는 온몸에서 다시 샘 솟듯 솟구치는 힘을 느꼈다.   -가자, 집으로. 우리 순영이 뭐 먹고 파? 엄마가 니 먹고프던 거 다 해줄게. 엄마인 자기를 닮아 키도 딱 엄마만큼 크고 몸에 살집도 전혀 붙지 못하고 가냘픈 몸매를 유지하는 막내딸이 안스러워 복희씨는 그동안 학교서 돈 아끼느라 먹고픈 것도 마음껏 사먹지 못하고 더욱 여위였을 딸애에게 해줄 수 있는 료리를 다 해서 배불리 먹이고팠다. -난 먹고픈 거 없어. 엄마를 보니까 배불러. 엄마만 아프지 않으면 돼. 엄마가 아프면 나 무서워. -엄마 이젠 안 아프다니까. 봐봐, 다 나았잖아? 믿기지 않어? 엄마가 우리 막내딸 순영이를 오랜만에 업어볼가, 대학시험 치르느라 수고했는데. 시험 잘 봤다니까 엄마도 너무 기뻐 축하해서 업어줄가. -아니야, 이젠 순영이가 다 컸으니까 순영이가 엄마를 업어줄게. 순영이 보기엔 약해도 춤을 춰서 다리힘은 좋아. 순영이 엄마 앞에 무릎을 굽히고 등을 들이댔다. 복희씨 미처 뒤로 피할 새 없이 순영의 두팔이 뒤로 와서 엄마를 당겨 등뒤에 업었다. 끙 하고 힘을 쓰더니 정말 엄마 복희씨를 업고 일어섰다. -순영아, 니 허리 상한다. 빨리 내려놔. 복희씨가 다급히 소리 질렀다. -아니야, 엄마 하나도 안 무거워. 엄마 너무 가벼워. 엄마 너무 가벼워. 울 엄마 너무 가벼워. 엄마 왜 이리 여위였어? 엄마 우리를 키우느라 너무나 여위였구나∼이제 내가 대학 마치고 돈을 많이 벌면 엄마에게 날마다 맛있는 거 사줄게. 그래서 엄마가 삐둥삐둥 살찌게 해줄게. 엄마를 뚱뚱보로 만들어줄게. 딸 순영의 목소리가 다시 물기를 머금고 목멘 소리로 바뀌는 걸 복희씨는 딸의 등에 업혀서 느낄 수 있었다. 복희씨 가슴에서도 더 걷잡기 힘든 감정의 파도가 솟구쳐올랐다. 다 컸구나 내 새끼, 철들었구나 내 새끼∼ 그대로 딸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고파지는 자신을 간신히  추스리며 복희씨 기어코 딸의 등에서 내렸다. 내려서 이미 딸의 얼굴에서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며 억지로 얼굴에 웃음을 만들었다. -그래, 우리 딸 해주는 맛있는 거, 우리 딸 사주는 맛있는 거 엄마 다 먹고 피둥피둥 살이 찔게. 뚱뚱보엄마 돼서 우리 순영이 엄마 무거워서업지 못하게 할게. -아니야, 그래도 업을 거야. 엄마, 너무 가벼워. 엄마,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순영의 손이 엄마 복희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어느새 눈가에 맺힌 엄마의 눈물을 딸 순영의 손이 닦아주었다. -엄마는 울지 마. 그동안 엄마 흘린 눈물 얼마인지 나 다 알아. 이젠 엄마를 울지 않게 할 거야. 이젠 엄마를 웃게만 할거야. 순영이 말하면서 더는 참지 못하고 엄마 품에 안겨 오열을 터뜨렸다. 그런 딸을 품에 안고 등을 다독여주며 복희씨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 하늘이 푸르구나, 하늘이 푸르게 열려있구나∼복희씨도 더는 참지 못하고 딸의 등에 후둑후둑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살아오는 세월 그동안 참았던 눈물들이 더는 걷잡을 수 없이 줄줄줄 흘러내렸다. 그래, 오늘은 실컷 울자. 그동안 참았던 눈물 다 흘려버리고 그리고 이제부턴 웃자. 우로 세 자식 다 키워 공부 다 시켜 대학생 만들고 시내사람으로 만들고 이제 막내도 큰 대학 가서 큰 무용가가 될 거다. 이젠 힘든 시간도 거의다 지나가고 이젠 정말 웃을 일만 남은 거다. 복희씨는 눈물 흐르는 얼굴에 기꺼운 웃음을 떠올렸다. 품에 안겨 우는 딸 순영의 얼굴을 두 손에 잡고 말했다. -순영아, 엄마 잘 웃지? 엄마 이제부턴 정말 활짝 웃으면서 살 거야. 꽃같이 이쁜 우리 딸 순영이처럼 정말이지 활짝 활짝 웃기만 하면서 살 거야. 순영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였다, 반짝이는 눈물에 젖은 웃음꽃이 활짝 피였다. -응, 엄마, 다신 아프지 마. 엄마가 아파지려 하면 대신 내가 아파줄거야. ∼다신 아프지 말라고 그렇게도 엄마와 다짐받던 딸이, 딸 순영이가 이젠 거꾸로 저렇게 자기가 앓으며, 몹쓸 병을 앓으며 늙은 엄마의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었다.   5. 밥힘 복희씨 중얼거렸다. -못된 년, 왜 그렇게 엄마 대신 아프면서 오히려 엄마 가슴에 못을 박는 거야? 어시 가슴에 못을 박는 게 얼마나 고약한 짓인지 지는 모르지? 맞은켠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큰아들- 원래 둘째이다가 큰아들이 죽으면서 맏이가 되여버린-순철이가 눈을 뜨고 복희씨에게 한마디 했다. -엄마두 잠간 눈을 붙이고 쉬세요. 거기 가면 잠자리랑 다 불편할 건데. 그 때 량쪽 좌석 사이 통로로 쟁반에 도시락을 든 승무원아가씨가 지나가면서 식사 주문을 받았다. 순철이 복희씨에게 물었다. -엄마, 기차가 도착하려면 아직 한시간 좀더 남아있는데 식사하셔야죠? 기차음식 맛 없어도 식사는 하셔야죠. -나보다도 애비 네가 식사는 꼭 해야지. 순영이 그 애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으니까 병원에 도착하면 애비 네가 정신없이 바빠질 수도 있잖겠냐. 밥 먹고 속을 든든히  만들어서 기차에서 내려야지. 복희씨가 오히려 아들걱정을 앞세웠다. -난 별로 생각 없어요. 엄마만 드세요. 도시락 하나만 주문할게요. -둘이 함께 기차에 올라서 엄마 혼자만 식사하라는 법 어딨냐. 맛 없고 식욕 없어도 산 사람 끼리는 밥을 함께 먹는 거다. 혼자선 넘어가지 않아도 함께 먹으면 넘어가는 게 밥이다. 두 사람 몫으로 주문해라. -네, 알았어요. 엄마. 순철은 더 아무 말 않고 도시락 샘플 두가지중 그나마 기름져보이지 않고 담백하게 입에 맞을 것 같은 도시락을 골라 두개 주문했다. 엄마앞에서 때시걱이면 무조건 밥은 먹어야 했다. 그건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였던 가난했던 시절 엄마가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며 반드시 지켜왔던 인생신조였다. 밥은 먹어야 했다. 엄마 앞에선. 어떤 일이 있어도 밥은 먹어야 하는것이였다. 그걸 오늘 깜빡 하고 엄마 앞에서 어길 번한 것이다. 밥힘. 엄마는 밥힘을 믿고 있었다. 힘든 때일수록, 불행한 때일수록 엄마는 밥힘을 믿어 밥을 억지로라도 씹어삼키군 하셨다. 밥을 먹는 건 살아있다는 것이고 밥을 먹는 건 살아있는 자들만의 권리라고 하셨다. 밥을 먹는다는 건 오늘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오늘을 버텨낼 힘을 몸에 만들 수 있다는 것이고 오늘을 이겨 래일로 살아 닿을 수 있다는 것이였다. 오늘 먹은 밥은 래일을 분명 오늘보다 더 좋은 거로 만들 수 있다고 밥힘으로 알려주군 했다. 그 래일엔 분명 오늘 먹는 밥보다 더 맛있는 밥이 기다리고 있음을 순철은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희망처럼 몸에 익혔다. 그 고난의 세월 엄마에게 밥은 이를 악물고 씹고 삼켜 산 자는 반드시 더 살아가야 한다는 악 같은 거였다. 그것은 순철에게도, 밑으로 남동생 순호에게도, 큰녀동생 순복에게도, 그리고 지금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을 막내 순영에게도 다 한집안에 한구들에 비비고 볶으며 살던 그 시절에는 진리 같은 것이였다. 잠시 후 배달되여온 도시락 밥을 순철은 밥 한알 남기지 않고 깨끗이 다 먹었다. 엄마도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이 맛없는 알량미 밥을 꽁꽁씹어 끝까지 다 비우셨다. -역시 위대하신 우리 엄마야. 속으로 이렇게 중얼대며 순철은 엄마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꼈다. 엄마는 오늘도 밥힘으로 아픈 딸 앞에까지 쓰러지지 않고 잘 지탱해서 이를 것이였다. 전혀 식욕 없이 먹은 밥인데 먹고 나니 속이 든든해지고 두 다리에 힘이 생기는 걸 순철은 느꼈다. 역시 밥은 위대하고 밥은 위대한 힘이였다. 그 위대한 힘을 씹고 넘기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 줄 알고 자식들에게 가르쳐준 엄마는 밥보다위대했다. 밥보다 위대한 힘이였다. 엄마는. 순철은 여든이 다된 엄마와 함께 하는 이 길이 너무나 속이 든든해졌다. 앞에 건강한 모습으로 앉아계셔주는 것만으로도 아들에게 든든한 힘이 되여주고 계시는 줄 엄마 당신은 알고나 계시는 걸가. 순철은 강인함을 감추고 억지로 담담한 표정을 짓고 앉아계시는 엄마의 주름살 깊은 얼굴이 너무나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내밀어 엄마의 고운 그 얼굴을 만져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순철은 대신 엄마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엄마의 손으로부터 열배 강한 힘이 순철의 손에 전해져왔다. 엄마는 오늘도 자식에게 힘을 넘겨주고 계셨다. 출처:2017 제5호
20    [중편]위대한 밥(2) 댓글:  조회:398  추천:0  2019-07-18
위대한 밥(2) 조광명   6. 집밥  택시에서 내리자 미리 입원병동 문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하은이가 다가왔다. 반쪽이 된 하은이 얼굴에 피곤이 꽉 끼여있었다. 택시 안에서 문자로 미리 약속한 대로 하은이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 활짝 웃는 얼굴로 할머니를 맞이했다. 그 웃음 뒤에 뚝뚝 떨구고 있을 눈물을 생각하며 순철은 아직도 대학교도 마치지 못한 어린 하은이가 너무 측은하고 안스러웠다. 병실로 이동하며 하은이가 외삼촌에게 조용히 속삭여 알려줬다. 엄마와 거의 날마다 영상채팅을 하는데 그 날 갑자기 아무런 련락이 안되여서 느낌이 이상했다고. 그래서 생활담당 교수에게 청가를 맡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더니 역시 집문은 잠겨있었고 무작정 엄마가 이전에 입원했던 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달려왔더니 아니나 다를가 엄마는 병원에 입원해있더라는 것. 이전보다 훨씬 엄중한 상태인 데도 엄마가 누구한테도 알리지 못하게 해서 지금까지 일주일 넘게 련락드리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일주일 사이에 세번이나 쇼크하며 고열이 내리지 않고 어제부터는 환각상태에서 온몸에 경련까지 일으켜서 너무 무섭고 놀랐다는 것. 오늘 새벽에도 다시 또 쇼크가 와서 긴급구호 수단으로 겨우 안정을 찾았고 의사선생이 주변 친척들에게 다 알리라고 해서 련락드렸다는 것∼  등을 이야기해줬다. 순철은 서로 다른 도시에 멀리 떨어져있다는 리유로 아픈 녀동생에게 너무 등한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원망스러워졌다. 당장이라도 어린 하은이에게 미안하다고 빌고 싶었다. 그러나 겉으로 너무 내색할 수는 없었다. 하은의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엄마 복희씨의 귀에 들릴가봐 무척 신경이 씌였다. 오늘 새벽에  순철이 전화내용을 알려주기 전에 엄마가 상황을 어떻게 다 알고 길 떠날 준비까지 식사전에 미리 해놓고 계셨던 사실이 순철에겐 아직까지 미스터리였다. 가는 귀 먹었던 엄마의 귀가 언제 다시 뻥 뚫려진 것인지도 모를 일이였다. 옆에서 부축해주는 손녀 하은의 한쪽 손을 꼭 잡은 복희씨의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가 피여있어서 순철은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영은 깨여있었다. 복희씨가 딸 하은의 손을 잡고 들어서는 걸 보자 엄마! 하고 목메여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거의 기진맥진 탈진한 상태라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아 고개만 약간 들려다가 다시 힘을 놓아버렸다. 그러는 순영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고, 내 새끼∼ 엄마가 다가가서 순철이 먼저 순영의 손을 잡았다. 검버섯과 주름살로 뒤덮인 야윈 손이 딸의 얼굴을 어루쓸었다. -못난 것, 아프면 엄마를 부르지∼엄마가 아직 살아있는데 혼자 누워서 아팠어? 못된 것, 첨부터 엄마를 불렀으면 엄마가 언녕 이렇게 달려와 내 새끼 옆에 함께 해줬지∼못난 것, 못된 것∼ 엄마의 눈에서도 드디여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에게 아직 채 흘리지 못한 젖은 눈물이 남아있었던 것일가. 눈물 없이 마른 울음소리로만 꺼이꺼이 자식들 몰래 우는 모습을 숨어서 여러번 보았던 순철이였다. 그런 엄마에게도 자식을 위해서 흘려줄 젖은 눈물은 남아있었구나. 순철은 참으로 오랜만에 엄마의 눈물을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코등이 시큰거려 눈을 슴벅여 참았다. -순영아, 오빠가 늦게 와서 미안하구나. -아니야, 오빠, 내가 못나서 번마다 오빠를 고생만 시키고∼미안해. -미안하긴∼ 순철도 순영의 다른 한손을 잡고 억지로 눈물을 안으로 삼켜 참고 있었다. -작은삼촌이랑 이모랑 다 저녁전에 도착할 거예요. 다들 비행기에 올랐대요. 외숙모도 저녁 늦게 도착한대요. 하은이 말했다. -다 오는구나∼ 그래, 잘됐다. 다 볼 수 있겠네. 다 모이고 다 볼 수 있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겠다는듯 순영의 얼굴에 서글픈 웃음이 피여올랐다. 그 표정이 더욱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순철은 일부러 화제를 다른데로 옮겼다. -하은아, 이 주변에 호텔 같은 거 있음 방 몇개 예약해줘. 너희 젊은애들 휴대폰으로 그런 거 잘하잖냐. 순철은 우선 엄마를 호텔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동생 순호가 도착하고 녀동생 순복이가 도착하면 그 땐 정말 형제들끼리 끌어안고 울음이 터질지 알 수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순영이 언제 다시 쇼크가 오고 경련을 일으킬지도 알 수 없는 일이였다. 그런 장면을 늙은 엄마에게 보여선 안될 일이였다. -네. 하은이 휴대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복희씨가 순영에게 물었다. -그래, 밥은 끼니 거르지 않고 먹고 있냐? -응, 먹고 있어. 먹으니까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지. 순영이가 억지로 웃었다. 순철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먹긴 뭘 먹어? 영양제 주머니를 링게르에 걸어놓고 있는 주제에. 녀동생 순영이 영양제 힘으로 버티고 있는 줄 순철은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상황판단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 하은이도 엄마를 돌보느라 반쪽이 다됐구나. 하은이도 집밥 먹어본 지 오래지? 엄마 같이 그냥 병원 밥으로 에때운 거지? 이젠 할매가 왔으니까 이 할매가 끼니마다 맛있는 집밥 해줄게. 순영이가 웃었다. -아, 맛있겠다. 나도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팠는데∼ 복희씨가 순철이더러 끌고 온 트렁크를 열라고 하셨다. 순철이 트렁크를 침대 옆 바닥에 눕혀놓고 지퍼를 열었다. 엄마 복희씨가 무릎을 굽혀 쪼그리고 앉으시더니 안에서 큰 비닐봉지 두개를 꺼냈다. 엄마의 손에서 비닐봉지 포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한겹 또 한겹∼ 얼마나 여러겹으로 싸고 또 쌌는지 바닥에 금세 빈 비닐봉지가 여러개 널려졌다. 하은이 허리 굽혀 그 봉지들을 다 주어서 그중 하나에 담았다. 드디여 복희씨가 비닐봉지들을 더는 버리지 않고 큰 비닐봉지 안에서 올망졸망 작은 비닐봉지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건 순영이 니가 어릴 때 좋아하던 고추떡 쪄서 말린 거구, 이건 하은이가 들어서면서 입덧이 심해서 밥 먹지 못할 때 니 입덧을 한방에 날려주던 영채김치고, 이건 우리 하은이 할매 보러 올 때마다 맛있다고 잘 먹어주던 총각김치고∼ 이건 가지 말린 거, 이건 마늘장아찌∼ 순철이는 깜짝 놀랐다. 엄마가 언제 저런 걸 다 준비하셨을가. 그리고 또 다른 큰 비닐봉지는 열어볼 필요 없이 입쌀이였다. -이건 시장에서 파는 걸 산 게 아니구 전번에 순철이 니 오빠가 고향에 다녀오면서 한마대 얻어온 쌀을 다 먹지 않고 더러 덜어내서 보관해놓고 있었던 거다. 너희들이 먹고 자란 그 맛 그대로 고향쌀이다. 고향쌀 맛을 순영이 네게 다시 맛보게 하려고 네 큰오빠 순철이가 무겁게 끌고 오느라 고생 많았다.    엄마는 공로를 큰아들 순철에게 돌리고 있었다. 순영이 고개를 돌려 오빠 순철에게 고마움의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 앞에 순철은 아니라고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오히려 안에 무엇이 들어있길래 이렇게 무거운 건가고 속으로 투덜대며 겨우 끌고왔다고 말해줄 수 없었다. 그냥 빙그레 웃어주었다. -오늘 엄마가 해주는 집밥 먹고 우리 순영이 기운 내고 벌떡 다시 일어나는 거다. 알았지? -네. 엄마. 순영이 눈물 참으며 가까스로 얼굴에 웃음을 다시 피워올렸다. -하은아, 큰외삼촌 왔으니까 이젠 엄마 걱정 말고 하은이 너는 할매를 모시고 집에 가자. 집에 가서 집 밥솥으로 밥을 따끈하게 지어서 엄마에게 가져다주자. 우리 하은이도 할매가 해준 밥 배부르게 먹고 힘내야지. -그래, 하은이 할머니 모시고 집에 가. 가서 너도 오랜만에 씻고 옷도 갈아입고 푹 한잠 자고 와. 엄마 걱정 말고. 순영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 자식새끼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어시의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배여있었다. 그래, 사랑은 내리사랑이지. 아파서 병원신세 지느라 자식새끼한테 자기 손으로 밥도 해 먹이지 못하며 오히려 그 자식의 돌봄을 받고 그 자식을 고생시키는 엄마 마음인들 오죽했으랴∼ 순철은 순영의 마음이 같은 부모 마음으로 넘짚어 리해되였다. 조금 후 호텔 예약을 마친 하은이가 커다란 비닐봉지 두개를 들고 할머니를 모시고 병실을 나섰다. 그 뒤모습을 눈빛으로 바래며 순영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정말, 정말 엄마가 해주는 엄마밥 먹고팠는데, 엄마가 해주는 집밥 먹고팠는데∼ 오빠는 정말 좋겠다. 날마다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먹을 수 있어서∼   7. 밥&집 형제들이 다 모이는 날인 줄 알고 정신력으로 버텨서인지 다행히 순영은 오후 낮을 돌발상황없이 무사히 넘겼다. 피곤을 못 이겨 잠간 눈을 감고 잠 속에 빠졌던 걸 제외하곤 작은오빠 순호 내외가 도착할 때도, 언니 순복이네 부부가 도착할 때도 맑은 정신상태로 눈을 뜨고 웃음으로 형제자매들을맞이했다. 그러는 순영이 앞에 다들 정서를 잘 억제하고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나누어  병실이 눈물바다가 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순철은 그러는 동생들이 고마웠다. 역시 굳센 엄마의 자식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철의 안해 지연이도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국제선이라 해도 거리가 멀지 않아서 국내 다른 도시들에서 달려오는 시간과 엇비슷하게맞먹었다. 엄마를 밤낮 없이 옆에서 간호하기 위하여 하은이가 환자용 침대 옆에 돈을 따로 더 내면서 설치한 접이식 간이침대에도 걸쳐앉을 자리가 모자라게 병실에 갑자기 사람이 넘쳐났다. 지쳤는지 순영이 잠감 눈을 감고 있을 때 순철이 모두를 복도로 불러냈다. 작은 회의를 조직했다. 세 가정에서 밤과 낮을 나누어 교대로 환자를 돌보는 거로 하고 오늘 밤은 일단 맏이인 순철이네가 순영의 옆을 지키고 순호네와 순복이네는 하은이가 예약해놓은 호텔에 가서 짐을 풀고 쉬도록 했다. 세 가정 경제실력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이번 순영의 병원치료비는 나중에 세 가정에서 골고루 분담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대신 이번에 발생하는 호텔비용과 매일 세끼 식사비용은 맏이인 자기네가 부담할 거라고 했다. 안해 지연이도그런 비용은 당연히 맏이인 자기네가 부담하는 게 맞는 일이라고 남편의 말에 따라주고 힘을 실어주었다. 순호네와 순복이네가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치료비와 기타 발생 비용을 충분히 예상하고 준비하고 왔으니까 서로 돈걱정은 하지 말자고 했다. 순철은 그러는 동생들이 고마웠다. 안해 지연이도 동생들과 함께 호텔에 가서 짐을 풀고 씻은 다음 다시 병실에 모이기로 했다. 이 때 복도 저쪽 끝에 하은이가 할머니를 모시고 들어섰다. 여럿은 우르르 그리로 달려갔다. -엄마 -어머님 -장모님 -하은아 -삼촌 -숙모 -이모 -하이고 내 새끼들아 -하이고 우리 사위 -하이고 아가들아 ∼부름들이 오가고 눈물 섞인 포옹들이 오갔다. 혈육은 그렇게 정해진 부름 대로 불려지는 것이였고 혈육들은 만나면 얼싸안게 되는 것이였다. 잠시 후 병실 안 간이침대 우에 복희씨가 준비해온 하얀 천이 펴지고 그 우에  조촐한 저녁식사상이 마련되였다. 다 복희씨 손으로 만들어진 음식들이였다. -밖에 나가서 사먹으면 되는데 이렇게 번거롭게 준비했어요? 큰딸 순복이가 엄마를 아끼는 마음으로 말했다. -밖에 나가 먹는 음식 산해진미인들 엄마 손맛 배인 음식에 비하겠냐. 엄마가 아직 살아있는데 내 새끼들 밥은 내가 해 먹인다. 어서들 먹거라 식기 전에. 그리고 순영의 침대 옆에 작은 걸상 놓고 앉아 자신이 직접 순영의 입에 밥을 퍼 넣어주었다. -사람이 죽어도 밥은 먹으라 했다. 아플 때일 수록 힘들 때일수록 억지로라도 더 밥을 먹어야 돼. 쌀이 막대라고 산 사람은 밥을 먹어야 힘이 생기고 힘든 시간을 이겨낼수 있어. 너도 밥을 먹고 아픈 거 이겨내고 다시 일어나야지. 머리 쪽을 많이 높여 비스듬히 누운 순영이 엄마가 입에 넣어주는 밥과 반찬을 받아 꽁꽁 씹었다. 한모금 넘기고는 엄마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순영의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눈물을 감추고 촉촉하게 피여올랐다. -어이구 내 새끼 용타∼ 제비새끼처럼 입 짝짝 벌리고 잘도 받아먹네. 복희씨 기분이 좋은지 롱담을 했다. -정말 오랜만이다. 엄마가 해준 집밥 먹어보는 거∼ 순영이 숨이 가쁜지 잠시 음식 씹기를 멈추고 숨결을 가누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맛있어? -응. 진짜 맛있어. 혀에 감각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애. 순영이 다시 입을 벌려 엄마가 넣어주는 밥을 받아 씹었다.    -급해 말고 천천히 씹어서 조금씩 넘겨. 옆에서 언니 순복이가 마시기 맞춤한 온도로 식힌 물을 숟가락에 담아 녀동생의 입에 넣어주었다. 너무 가슴이 찡해나는 광경이였다. 그러나 누구나 다 웃었다. 그리고 간이침대 우에 차려진 음식들을 입에 넣고 맛보며 다들 엄마표 음식맛이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내들었다. -장모님 음식점 꾸리면 대박 난다니까. 사위가 장모를 올리 치켜주는 롱담에 분위기가 한결 더 훈훈해났다.    복희씨가 한마디 했다. -좋은 일로 모인 게 아니고 사람이 아파서 이렇게 모인거지만 다들 모이니까 이 에미는 기분이 좋구나. 이렇게들 다들 모이니 다 한데 둘러앉아서 한솥 밥을 먹어보게 되구. 한집식구라는 게 뭐냐. 한집안에 얼굴 마주보면서 한솥의 밥을 함께 나눠먹는 게 한집식구 아니냐. 지금 이곳이 병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먹으면 따스한 집밥이 있는이곳이 곧 집이 아니겠냐. 밥을 많이 해왔으니까 집이라고 생각하고 다들 배불리 많이 먹거라. 순철은 엄마가 늙어가면서 점점 깊은 철리가 담긴 말씀을 철학가처럼 잘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엄마에게 대꾸했다. -엄마 말씀 다 맞아요. 그런데 그보다도 더 정확한 건 엄마가 오셨으니까 집인 거예요. 엄마가 계시니까 집인 거예요. 엄마의 밥이 있는 곳, 그 곳이 저희에겐 집인 거예요. 순철은 자기가 참 복받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해 지연의 립장에서는 자신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아들인 순철의 립장에서는 엄마를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엄마가 해주는 엄마 밥을 받아먹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따스한 밥을 날마다 얻어먹고 있는 가장 행복한 아들이였다. 순영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랑 오빠네랑 언니네랑 다 와서 함께 하니까 오늘은 정말 이곳이 병원이 아니고 집인 것 같애. 엄마가 해주는 집밥 먹으니까 옛날 우리 함께 살던 따스한 고향집에 다 모인 것 같구. 정말 좋네. 이렇게 얼굴 다 보면서 밥 먹으니까∼   8. 향기로운 밥춤 그 날 저녁 다들 자리를 비우고 순철이네 부부만 남았을 때 순영이 오빠에게 속삭였다. -오빠, 자기 살림 하느라 다들 바쁠 건데 이렇게 다 달려와줘서 고마워. 이제 난 죽어도 될 것 같애. 엄마 앞에 먼저 간다는 게 너무 불효인 것 같아서 미안하구 하은이 저거만 아니면∼ 순철이 일부러 어성을 높이는 체했다. -얘가 지금 무슨 엉뚱한 소리 하고 있어? 니가 지금 엄마 걱정, 하은이 걱정 하고 있을 때냐. 그럴수록 힘 내서 다시 일어서야지. 하은이 걱정을 니가 왜 하냐. 애가 너무 밝게 크고 당당하고 의젓한데두. 옆에 든든한 외삼촌과 이모들 잔뜩 있는데 뭔 걱정이냐. 엄마도 그렇지. 울 엄마 어떤 엄마냐 이 세상서 가장 강인한 분 아니냐? 엄마 걱정, 하은이 걱정 다 붙잡아 매여두고 니 병치료나 잘하자. -아니야, 오빠, 내 상태 내가 잘 알아. 나 오래 못 가. 나 아까 오후에 잠간 잠들었을 때 죽은 순기오빠 봤어. 순기오빠 죽어서 아버지 사는 동네로 가서 아버지랑 함께 사나봐.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오라고 순기오빠를 보냈대. 순기오빠가 그랬어. 아버지가 날 데려가기전에 엄마를 먼저 데리고 가려고 엄마를 찾아갔댔는데 엄마가 화를 펄펄 내며 비자루로 아버지 등을 때려 쫓더래. 울 엄마 아무래도 백년장수 하시려나봐. 그래서 아버지가 이번엔 아파서 고생하는 나를 해탈시키려구 오빠를 보냈대. 그런데 그때 엄마가 저녁밥 준비해서 오빠랑 언니랑 다 함께 문 열고 들어오신 거야. 나랑 이야기 나두던 오빠가 엄마가 들어온다며, 엄마가 해준 밥을 맛있게 먹고 엄마 소원 꺼주라며 오늘은 날 데리고 가지 않겠다 했어. 며칠 후 다시 데리러 오겠다 하면서. 엄마를 보니까 자기도 눈물 난다면서 눈물 흘리는데 너무 꼭 현실 같아서 나 막 순기오빠 손을 잡고 따라갈 번했어. 난 아무래도 엄마 먼저 아버지와 오빠 사는 동네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애. 하은이만 아니면 나 정말 사는데 아무 미련두 없는데. 순철이 화가 치밀었지만 억지로 참고 태연한 척했다. -니가 아프니까 생각이 많아져서 그래. 엉뚱한 생각만 하니까 꿈도 그렇게 엉터리 꿈을 꾸는 거야. 나도 꿈에 드문드문 아버지도 보고 순기형도 보고 그래. 왜 안 보겠냐. 나를 만들어준 친아버지이고 내 우에 태여나서 나를 업어주던 친형인데. 친혈육은 그렇게 음지와 양지에 갈라져 살아도 서로 잊지 못해 꿈에 찾아오고 꿈에 만나보고 그렇게 하는 거구나 하고 좋게 생각해. 그리구 꿈을 꾸고 나면 난 그 꿈 내용 기억하지 않고 일부러 다 잊어버려. 훌훌 털어 잊어버리면 다 아무것도 아니잖냐. 그래서 꿈이잖냐. 꿈 같은 거 믿지 마. 너 몸이 너무 허약해져서, 꿈이 무서워져서 그래. 이 오빠 니 옆에 왔잖냐. 꿈을 무서워하지 마. 꿈에 순기오빠 다시 나타나면 나를 불러. 내가 그 꿈속으로 달려들어가서 순기형 쫓아보내줄게. 아니다. 내가 오늘 밤 꿈에 미리 순기형 찾아가서 욕 좀 해놓을게. 괜히 아픈 막내녀동생 꿈속에 찾아와서 엉뚱한 짓 하지 말라고. 불길한 꿈얘기를 하는 순영을 이렇게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로 달래며 순철은 정말 순영의 남은 나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아까 엄마가 하은이랑 집으로 돌아갈 때 꼭 엄마를 붙잡고 싶었는데. 딱 하루만이라도 엄마품에 안겨서 잠 자고팠는데∼ 근데 나 밤에 또 호흡장애를 일으킬가봐, 그런모습 엄마에게 보여드릴 수 없어서 그냥 엄마를 보내드렸어. 아, 나 죽어도 엄마 품에 안겨서 죽는 게 소원인데∼오빠, 나 참 나쁜 딸이지? 엄마 품에 안겨서 죽어 엄마 가슴에 너무 아픈 대못 박으려 하는 세상 제일 고약한 나쁜 년이지? 순영이 말하느라 너무 지쳤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렸다. 그러면서도 그냥 더 말하려 했다. 그러는 순영의 이마 땀을 닦아주면서 순철이 달래였다. -그래, 니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나 엄마를 모시고 가지 않을게. 당분간 엄마가 니 옆에 머무르게 할게. 그 때 마음껏 엄마품에 안기고 마음껏 응석도 부리고 해봐. 순영이 빙그레 웃었다. -정말 그랬음 좋겠어. 그런데 그럴 수 없는 걸 내가 잘 알아. 나 오빠한테 한가지 청이 있는데 들어준다고 약속해줘. -무슨 부탁이냐. 이야기해봐야 대답하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니야? -아니야, 오빠가 진짜로 나를 고와하구 아낀다면 내 청을 꼭 들어줘야 돼. -글쎄, 일단 말을 해봐야 알지. 이렇게 무조건 청을 들어준다고 미리 답복부터 하라는 생어거지가 어딨어? 말해봐, 뭔지. -오빠. 불러놓고 순영이 간절한 눈빛으로 오빠를 쳐다봤다.   -오빠, 나 한번씩 호흡장애 오고 근육에 경련이 올 때마다 정말이지 지옥에 갔다오는 것 같애. 죽기보다 더 힘들어. 너무 힘들어서 그때마다 힘을 활 놓고 죽어버리고 싶었는데 하은이가 불쌍해서 못 죽었어. 이제 오빠랑 언니랑 다 와서 하은이를 맡아주겠다니까 나 한시름 놨어. 만약 나에게 호흡장애가 오면 이번엔 제발 그대로 내버려둬. 강제로 호흡기 자극해서 숨 쉬게 하고 산소호흡기 들이대서 다시 살아나게 하지 마. 내가 아직 제정신이고 조금이라도 원래 모습 얼굴에 남아있을 때 그대로 훌 맥 버리고 떠나가게 내버려둬. 살겠다고 버둥대는 치사한 모습 그냥 더 하은이에게 보여주는 것도 미안해. 오빠 말 대로 내가 죽으면 하은이 제일 불쌍하지만 그래도 우리 하은이너무 당당하니까 반드시 다시 씩씩한 아이로 이 세상 멋지게 살아가겠지 뭐.   순철이를 쳐다보는 순영의 눈빛이 너무 애절하게 애처로웠다. 그러나 그 눈빛은 거부할 수 없게 너무나 강렬한 힘을 담고 있었다. 아까 낮부터 지금까지 순영의 눈빛에 이렇게 강력한 힘이 담긴 적이 없었다. 창백하던 얼굴빛도 발가우리하게 상기되여 피색이 돌고 있었다. 이런 걸 반조현상이라고 하는가 하는 생각이 얼핏 순철의 뇌리를 스쳐지났다. -순영아, 너는 떠날 준비가 되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엄마랑 언니랑 오빠랑은 전혀 너를 보낼 준비가 되여있지 못하구나. 너 많이 아프고 힘들어도 우리를 위해서라도 더 살아야 해. 반드시 힘 내서 다시 일어서야 해. 늙은 엄마를 두고 니 먼저 가겠다는 건 말도 안되는 걸 알지? 하은이 대학 마치고 남자친구 사귀고 시집가는 것도 다 봐야지∼ 순영이 허구피 웃었다. -아니야, 나 사는 거 정말 힘들어. 이젠 훌 가버리게 그냥 놓아줘. 오늘 다 봤잖아? 엄마가 해주는 밥도 먹어보고. 아, 아까 엄마가 해주는 집밥 정말 맛있었는데∼ 순영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엄마의 밥맛을 기억에 담고 눈감으면 마지막 길 따스하고 아름다울 것 같애. 순영이 얼굴에 그냥 행복한 미소를 담고 살풋이 눈을 감았다. 그 얼굴이 점점 더 이쁘게 피여나고 있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순영이 순철에게 속삭였다. -오빠, 나 방금 눈 감고 무대 우에 춤 추는 내 모습 떠올려봤어. 을 주제로 독무를 만들었어. 아 참, 너무나 아름답고 향기롭고 에너지 충만한 생명의 찬가로 관중석에까지 밥향기 넘치게 하는 무용인데∼아쉽네∼ 무대에 올릴 수 없고 직접 출 수 없다는 게∼ 순영이 정말 아쉽다는듯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 눈에 춤에 대한 동경이 골똑 담겨있었다.   9. 자장가  그 날 밤 자정을 넘기면서 순영이 고열에 시달리며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순철이 급히 호출버튼을 눌러 야근 당직 의사를 불러 긴급구호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정말이지 눈앞에 직접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의 모습을 대한다는 건 죽기보다 더 괴로운 형벌이였다. 보는 사람이 그렇게 괴로운데 호흡장애로 거의 한시간동안 온몸이 비틀리는 발작을 일으키는 환자 본인은 얼마나 괴로울 것인지 순철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심장과 페를 자극하는 강력한 약물투약으로 거의 한시간 만에 다시 호흡을 찾아 숨결이 겨우 다시 고르로와지기 시작한 순영의 온몸은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아니, 그것은 땀이 아니였다. 죽음과 맞서 싸우느라 온몸을 비틀어 쥐여짠 생명의 진액이였다. 또 한고비를 넘겼음을 확인한 지연이가 탈진 상태로 축 늘어진 순영의 몸을 더운 물에 수건을 적셔 닦아주었다. 순영은 죽은 것 같이 아무 것도 몰랐다. 순철이 의사 사무실을 찾아 상담을 요청했다. 의사는 의덕의 각도에서 환자가 위험할 경우 의사로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환자를 살려내고 무조건 그 생명을 연장해야 하는 의무와 직업도덕을 지켜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더 회복의 가망이 없고 생명을 연장해봤자 환자의 고통만 연장해주는 치료수단 밖에 되지 않는 경우, 환자 가족의 동의와 요구하에 긴급구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호출버튼을 눌러 의사가 환자 앞에 도달했을 때는 환자 가족의 그런 요구가 먹히지 않는다고 했다. 환자를 앞에 두면 의사는 무조건 환자를 살리기 위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의 말뜻을 순철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의사도 우리 순영이가 더 가망이 없다고 하는구나. 의사도 우리더러 순영이를 보내주라고 하는구나. 의사 사무실을 나서는 순철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철은 그대로 병실로 돌아가 순영이를 내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순철은 직접 병실로 돌아가지 않고 복도 끝 비상계단 쪽으로 내려가 입원병동을 나섰다. 건물 한쪽 구석 보안등 불빛이 비치지 못하는 곳을 찾아 드디여 왕왕 참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 순영이 불쌍해서 어쩌냐∼ -우리 순영이 불쌍해서 어쩌냐∼ -우리 하은이 불쌍해서 어쩌냐∼ 순철의 머리 속에 어렸을 적에 잃은 아버지의 모습과 다 커서 잃은 순기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순철은 아버지, 순기형 하고 부르며 더욱더 슬피 왕왕 울었다. 이튿날 아침, 엄마가 지어온 아침밥을 순영은 더는 한숟가락도 받아먹지 못했다. 생명의 의욕을 잃어버린 퀭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고 하은이를 바라보며 그냥 주르륵 주르륵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 눈빛은 순철에게 낯선 것이 아니였다. 20대 한창 나이에 지병으로 앓다가 죽은 형 순기가 죽기 전날 엄마를 쳐다보고 동생들을 둘러보던 눈빛이 저러했다. 엄마 복희씨도 딸의 그 눈빛과 눈물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억지로 더 먹으라고 권하지 않았다. -불쌍한 것, 불쌍한 것, 불쌍한 내 새끼∼ 하시며 딸 순영의 옆에 몸을 누이셨다. -엄마가 안아줄게. 엄마가 우리 순영이를 안아줄게. 엄마가 우리 순영이를 꼭 안아줄게. 엄마가 우리 순영이를 꼭 품에 안고 있을게. 무서워하지 마,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순영이 옆을 꼭 지켜줄게∼ 복희씨는 그 말을 그냥 딸 순영의 귀에 대고 반복해 속삭여줬다. 그러는 복희씨의 귀가로 피눈물같이 진한 것이 그냥 흘러내렸다. 엄마의 그 넉두리 같은 속삭임이 자장가인듯 순영이 엄마 손을 꼭 잡고 다시 잠속에 빠져들었다. -자장 자장 잘 잔다 우리 애기 잘 잔다 자장 자장 잘 잔다 엄마 애기 잘 잔다 복희씨의 입에서 정말 자장가가 흘러나왔다. 어린 시절 그 자장가소리 들으면서 자란 자식들 모두 침대 옆에 둘러서서 그 자장가 노래 들으며 소리없는 눈물을 흘렸다. 순영이를 안은 복희씨의 몸이 물기를 잃어가는 벌레처럼 점점 작게 졸아들었다. 그런 엄마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어린 하은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목소리 죽여 오열했다. 순철이 동생들을 복도에 불러냈다. -순영이 오늘 저녁을 넘기기 힘들 것 같구나. 각자 애들에게 전화해서 이곳 상황을 알려주고 정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직장에 청가를 내고 오늘중으로 다 오라고해라. 애들에게 순영이는 고모이고 이모이지 않냐. 고모와 이모가 가는 길을 조카들이 와서 바래줘야지. 그리고 그보다도 우리 세대는 우리 세대끼리 다 통하지만 다음 세대는 다음 세대 끼리 통하고 정을 나누고 서로 힘이 되여주고 의지해야 할 게 아니냐. 하은이를 위해서라도 하은이 형제들을 다 불러주는게 좋겠구나. 순영이 외롭게 가는데 남은 하은이를 너무 외롭게 만들순 없잖냐. 우리가 다 간 다음 애들끼리의 세상이 그냥 끈끈한 혈육의 정으로 묶여지게 해야 할 게 아니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각자 전화를 돌려 자기 자식들을 불렀다. 맏이 순기가 죽고 둘째 순철이 맏이가 됐을 때부터 엄마 복희씨가 가정의 률법처럼 가르쳐온 것이 있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맏이 순철이를 가장처럼 여기고 믿고 따르고 어려워하고 잘 받들어야 한다. 아버지 없는 우리 집에 맏이는 곧 엄마 다음의 어른인 거다. 다들 맏이 말 잘 들어야 한다. 그 날부터 순철은 가장의 책임을 어깨에 무겁게 받아안았고 아래 동생들은 순철의 말을 무조건 따르며 맏이를 받들었다.     10. 마지막 밥 그 날 저녁 순철이는 엄마 복희씨를 하은이네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했다. 젊어 남편을 잃고 큰아들을 눈앞에 먼저 앞세워 보낸 엄마를, 다시 또 막내딸을 눈앞에 피눈물로보내게 할 수 없어서 어떻게 하든 하은이더러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가라고 했는데 손녀도 할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복희씨는 끝내 품에 안은 딸을 놓지 않았다. 딸의 옆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순영이 마지막 숨을 간신히 톺을 때 복희씨 들고온 트렁크에서 수의 한벌을 꺼냈다. 그 옷을 당신이 직접 딸의 몸에 입혀주면서 이렇게 넉두리를 했다. -엄마가 이 세상 떠날 때 입으려고 준비한 수의를 자식놈이 먼저 빼앗아 입는 법이 어디 있냐. 세상이 무심해도 너무 무심하구나∼ 엄마 옷 입고 추워하지 말고 따스한 곳으로 찾아가라∼ 못난 네 아버지 찾아가고 네 오빠 순기 있는 곳을 찾아가서 세식구 오손도손 재밌게 살아라. 엄마도 이제 곧 네 뒤를 따라서 가마. 네 오빠 순기한테 엄마 마중 나오라고 잘 전해줘라. 순영이 니가 팔랑팔랑 나비 되여서 날아와서 황천길 잘 안내해주면 더 고맙구∼ 당신이 입으려고 준비했던 수의를 직접 자식의 몸에 입혀주고 복희씨 이번엔 트렁크에서 깨끗한 동전 한잎과 주먹 만하게 작은 하얀 천주머니를 꺼냈다. 그 동전을 딸 순영의 입에 물려주고 하얀 천주머니에서 흰쌀을 꺼내여 순영의 입에 세번에 나누어 넣어주었다. -순영아, 엄마가 마지막으로 니 입에 넣어주는 밥이다. 황천길 머니까 익힌 밥은 쉽게 상할가봐 오래오래 상하지 말라고 생쌀을 넣어주는 거다. 저세상에서도 배고프지 말고 굶지 말고 항상 배불리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 알았지, 내 새끼야∼ 그리고 왼손으로는 떨어지려는 순영의 턱을 올리 받들어 입을 꼭 다물게 하고 오른손으로는 감지 못하고 그냥 뜨고 있는 딸의 눈을 내리쓸어 감겨주었다. 그렇게 딸의 턱을 올리받친 자세로 침대 옆에 허리 굽히고 지탱하기가 몇분, 복희씨의 입에서 드디여 아이고, 내 새끼야, 이놈의 웬쑤야! 하는 오열이 터져나올 때 복희씨의 몸이 옆으로 꺾이듯 무너졌다. 옆에 서있던 순철이 엄마 몸을 받아 옆 간이침대에 눕히고 의식을 잃어가는 엄마의 인중을 엄지 손톱으로 꾹 눌렀다. 복희씨 입에서 후유 하는 긴 한숨소리가 터지고 복희씨 눈을 뜨고 주변에 둘러서있던 자식들과 손주들의 모습을 둘러볼 때 드디여 여럿의 입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11. 가훈 그리고 가문의 전통  그리고 이틀 후 저녁. 음식점 대형 룸. 20명은 넉근히 둘러앉을 수 있는 대형 원형 식탁에 사흘 전보다 절반은 왜소해진 복희씨를 가운데 모시고 순철, 순기, 순복이네 세 가정 그리고 죽을 때는 보지 못했지만 장례식에는 달려와준 하은의 아빠 준수까지 3세대 도합 15명이 빙 둘러앉았다. 망자를 화장해서 그 령혼을 하늘에 날려보내고 골회를 강물에 띄워보내고 돌아와 모여앉은 자리였다. 순철이 쓰러질듯 그러나 쓰러지지 않고 드팀없이 앉아있는 엄마를 대신해 엄마 앞의 잔을 들고 일어섰다. 하은이 량옆에 나란히 앉은 아들 세대를 빙 둘러보며 입을열었다. -자, 이제 간 사람은 갔고 산 사람들은 여기 다 모였다. 산 사람은 살기 위해서 밥을 먹어야 한다. 그 밥을 먹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모였다. 오늘 이 밥은 내가 사는 게 아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강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계시는 우리 엄마, 너희들의 할머니 김복희씨께서 사는 거다. 설명절 때랑 너희들이 할머니에게 챙겨준 용돈을 모아두었던 것으로 오늘 이 밥 한끼를 할머니께서 사시는 거다. 왜 할머니 이름을 직접 호명하는지 너희들은 그 뜻을 잘 모를 거다. 그래, 할머니의 이름 김, 복, 희, 오늘부터 그 이름을 너희들 가슴에 영원히 기억하고 새겨야 한다는 뜻에서 특히 호명해서 부르는 거다. 너희들 할머니 김복희씨가 이 큰아버지 어렸을 적부터 늘 귀가에 못이 박히도록 하셨던 말씀이 있다. 사람이 죽어도 밥은 먹으라 했다. 이 한마디다. 기억해라. 너희들. 이 한마디- 사람이 죽어도 밥은 먹으라 했다- 평생 동안 가슴에 꼭 새기고 살아있는 내내 떠올리고 그 뜻을 새겨보아야 될 말씀 한마디다. 너희들 할머니 김복희씨 인생이 얼마나 불행했고 굴곡 많았고 고생많았고 한과 피눈물로 얼룩진 인생이였는지는 이 자리에서 더 말하지 않겠다. 서른여섯 나이에 남편을잃고 생과부로 나셨고 그리고 후에는 다 큰 자식을 한명 자기 앞에 앞세우는 불행도 겪으셨다. 그러나 그 때마다 너희들 할머니 김복희씨는 밥을 드셨고 그리고 그 밥힘으로 밥상을 차리셨다. 죽은 사람은 죽었지만 살아있는 네 자식을 위해 본인이 밥을 먹고 힘을내야 했고 그리고 그 힘으로 자식들을 위한 밥상을 차리셨다. 그 고난의 세월에도 너희들 엄마와 아버지 세대들 우리는 밥 한끼 굶어본 적이 없다. 지금 너희들 앞에 앉아계시는 이 왜소한 체격의 할머니- 김복희씨께서 자기의 살과 피를 흘려 쌀을 마련하고 밥을 지으셔서 자식들 배를 불리고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그 밥을 먹고 그 자식들다 씩씩하고 건실하게 자라서 후에 너희들 엄마가 되고 너희들 아버지가 된 거고. 그 엄마들 밑에 너희들 태여났고그 아빠들 밑에 너희들 태여났다. 우리가 너희들 입에 밥을 넣어주었고 우리 세대가 너희 세대를 키웠다. 너희들 세대가 이제 너희들아래 세대 손에 밥숟가락 쥐여줄 것이고 그 밥숟가락으로 너희들 자식들은 세상을 헤쳐나가는 힘을 얻는 방법을 깨우칠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도는 거다. 그렇게 돌고 도는 인간사에 가장 지켜야 할 도리가 하나 있다. 그것이 우리 가문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밥은 먹으라 했다”이다. 친혈육을 잃는 아픔이 아무리 커도 그 슬픔앞에 산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을 먹고 나면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만만찮고 지치더라도 살아나갈 힘과 삶의 의욕이 다시 생기게된다. 그게 인간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친혈육 한 사람을 하늘나라로 보냈다. 슬픈 날이다. 슬퍼서 목이 메는 날이다. 그러나 그런 날이길래 우리는 더욱더 밥을 먹어야 한다. 너희들 할머니 김복희씨가 자기의 인생사로 쓰고 지켜온 가르침“사람이 죽어도 밥은 먹으라 했다”를 오늘부터 영원히 가슴에 새기며 우리 지금 이렇게 밥상 앞에 밥을 먹으려고 모여앉은 거다. 자, 슬픔은 안으로 삼키고 밥을 먹고 힘을 내자. 순철이 목을 젖혀 잔을 굽냈 다. 그리고이를 악물고 앉아버티고 계시는 엄마에게 한 말씀 드렸다. -자, 엄마부터 한술 드셔야죠. 엄마 김복희씨가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뱉었다. -자, 다들 함께 밥을 먹자. 김복희씨가 숟가락을 들어 앞에 놓인 밥그릇의 밥을 한술 떠서 옆에 놓고있던 빈 밥공기에 담았다. 그리고 그 우에 아까 복희씨가 특별히 주문한 감자채를 집어서 올려주었다. 순영이가 끼니마다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던 감자채였다. 못난 것, 천당에 가서 감자밭 농사나 지어 먹고픈 감자나 마음껏 먹어라. 김복희씨가 속으로중얼거렸다.  -순영아, 네 몫이다. 엄마가 끓인 밥 아니지만 그래도 엄마가 퍼주는 밥이니까한숟가락 받아먹어. 너때문에 한데 모여앉은 온 집 식구다. 너도 끼여서 함께 먹어야지. 옆사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 듯 말하고 김복희씨가 다시 앞그릇의밥을 한숟가락 퍼서 입에 넣었다. -다들뭐 하냐?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기는 거다. 밥은 누가 대신 먹여주지도않고 대신 자기 밥그릇 누구한테 빼앗겨서도 안된다. 자기 입은 자기가 책임지는 거다. 룸 안에 온 집 식구 함께 밥 먹는 소리 하모니로 넘쳐났다. 식사가 끝난 후 김복희씨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식사하는 사이 다리맥이 풀려버린 것이다. 숨결도 많이 약해져있었다. 옆에서 부축해 일으키려는 순철이와 순호에게 김복희씨가 말했다. -나 방금 밥상에서 잠감 눈 감았는데 너희들 아버지 찾아왔더구나. 요 며칠 벌써 몇번째다. 번마다 쫓아보냈는데 오늘은 쫓아보내지 못하고 손에끌려서 따라가더구나. 아무래도 나도 이젠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내수의는 순영에게 입혔으니까 순영이 내게 선물한 한복을 내가 떠날 때 맏이 네가 직접 수의  대신 내게 입혀주면 되겠다. 그리고다들 고맙다. 아무래도 지금 나를 순영이 입원했던 병원으로 데려다 주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순철이 아무 말도 못하고 빈 껍질만 남은 엄마를 부서질가봐 조심스레 품에안았다. -엄마, 아직은 아니잖아요? 엄마가 해주는 밥 나 아직 다 먹지 못했는데∼ 순철의 목이 메여 목소리가 나오지 못했다. 출처:2017 제5호
19    [중편]코코타타로 가는 뻐스(2) 댓글:  조회:431  추천:0  2019-07-18
코코타타로 가는 뻐스(2) 조광명   사라진 엠마 크리스탈 프리힐공항은 생각보다 작지 않았다. 브릿지를 통해 공항 건물에 들어섰다. 건물 내부 역시 깔끔하게 현대식으로 디자인되고 인테리어되여 있었다. 한쪽 벽은 국제 대형 최신 공항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천정부터 바닥까지 투명한 유리벽을 세워 시야를 시원하게 탁 틔워주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 일몰이 바야흐로 그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려고 서서히 몸에 물감을 감고 있었다. 그 장관을 통유리 너머로 구경하며 지나가는 인파를 살폈다. 그러나 엠마 크리스탈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방금 비행기에서 내릴 때 내 뒤에 금방 따라붙지 못하고 비좁은 기내 통로를 밀고 나오는 뒤쪽 인파에 밀려 한참 뒤에 처진 모양이였다. 좀 있다 이미 그레이션을 통과하고 세관을 통과할 때 쯤이면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지겠지 하고 그냥 스적스적 인파를 따라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실내 왼쪽 벽에 이곳의 관광지를 소개하는 이미지들이 사진작품으로 커다랗게 확대되여 걸려있는게 눈에 띄였다. 엠마 크리스탈도 기다릴 겸 그 사진작품들을 한장한장 구경하고 그 아래 문자설명들을 다 읽으며 나는 엠마 쥬가 참고용으로 만들어준 이번 려행 스케쥴에 저 사진들 속의 풍경이 다 포함되여있는지를 기억을 들춰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 사진들 속에는 코코타타 호수 사진이 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엠마 쥬에게 문자를 날렸다. -프리힐공항 도착.   조금 후 딩동 하고 메시지 도착음이 울렸다. -안전 착지 축하. 이젠 땅과 물과 하늘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기.   나는 풉 하고 웃고 말았다. 착지라니? 내가 뭐 구름 타고 날아오다가 그 구름에서 땅을 향해 사뿐히 뛰여내린 것도 아니고… 여하튼 비행기로 하늘길 날다가 안전하게 착륙했으니 착지가 맞긴 맞다. 하루하루 진보하는 엠마 쥬의 유머감각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땅과 물과 하늘 먼저, 사람부터 사랑해줘야 할 듯. 이런 문자를 날리고팠다. 그 문자를 받아보는 엠마 쥬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가? 저도 몰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엠마 쥬는 내가 이번 려행의 스타트를 젊고 싱싱하고 시크한 두 녀성과 함께 시작한 줄 아직 모르고 있다. 내 왼쪽에 앉은 녀성의  이름이 엠마 크리스탈이고 그 녀성이 충분히 지적이고 육감적인 녀성인 걸 알려준다면 엠마 쥬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가를 상상하는 것도 은근히 재밌었다. 오른쪽에는 하쿠나 마샤샤라는 완전 모던 프리 스타일의 흑인 녀성이 앉았는데 엠마 크리스탈보다 더 젊고 쾌활한 스타일이여서 아직 싱싱한 내 남성호르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고, 네가 고집하는 퍼품향으로 내 후각을 즐겁게 하고 내 엔돌핀을 팍팍 생성시켜줬다고 알려주면 엠마 쥬는 나처럼 묘한 웃음을 얼굴에 떠올릴 수 있을가. 환상적인 비행시간은 끝났지만 그 환상 속에 나는 충분히 사랑하고 행복하고 즐거웠노라. 그새 업무 스트레스로 많이 밀렸던 수면부족을 확 날려주는 깊은 수면에 빠져서 정신없이 잠을 잘 수 있었던 것도 너무 좋았노라. 잠 속에도 엠마 크리스탈과 하쿠나 마샤샤와 함께 했던가? 꿈속에 그네들과 어떤 젊음의 유희를 놀았을가. 생각나지 않았다. 숙면은 꿈속의 아름다웠을 장면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했다. 그게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분명 현실보다 더 아름다운 꿈을 꾸었을 것이다. 아직 꿈이 있어 청춘이 아닌가. 꿈속의 사랑을 두고 누가 감히 뭐라 하겠는가. 생각나지 않는 꿈을 향하여 나는 나만의 주해를 달아주었다. 만났노라, 사랑했노라, 행복했노라.   려행은 묘하게 새로 대하는 모든 것에 대해 거부감 대신 호기심으로 경계를 풀게 만들고 두려움 대신 즐거운 환상을 가지고 접근하게 만든다. 생경함이 주는 신선함은 낯선 것을 향해 더 가까이 접근해 익숙한 내 것으로 만들고 싶도록 잠자던 어떤 본능을 자극한다. 냄새 맡고 싶게 코를 꼬드기고 터치하고 싶게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특히 길 우에 만난 아름다운 녀자는 혹시 그 녀성 뒤에 숨어있을 모든 위험요인을 감내하면서라도 한번 모험을 치르고 싶게 길에 올라선 남자를 용감한 투우사가 되라고 등을 떠민다. 려행의 힘이다. -그런데 아직 코코타타 냄새를 맡지 못했음. 나는 즐거운 환상 대신 이런 현실적인 문구를 적어 날렸다. -로컬 피플들의 슬로우 걸음과 느긋한 미소를 느긋한 눈으로 바라보면 코코타타 냄새가 맡아질 것임. 엠마 쥬에게서 금방 답신이 날아왔다. 그제야 옆을 지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보니 총총히 걷는 사람이 몇명 없었다. 그래그래, 슬로우 모션. 나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며 로컬 피플들의 느긋한 걸음걸이를 모방하려고 애썼다. ㅋㅋ, 이곳에 와서 퀵 서비스 아닌 슬로우 서비스 택배회사 차리면 대박이겠네. 어제까지만 해도 정장 양복에 목에 넥타이를 맨 채 전화기에 매달리고 컴퓨터 모니터에 눈길을 처박은 금융맨이던 내가 지금 청바지 차림에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흐느적흐느적 타국의 공항 건물 안에 여유를 부리는 투어리스트로 변신해 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바다를 건느고 대륙을 날아 건너니 내가 다른 세상 속에 다른 한 나로 바뀌여져 있었다. 거의 걸음을 멈추다 싶이 하면서 천천히 걸으며 엠마 크리스탈을 기다렸다. 그러나 내 뒤에 듬성듬성 따르던 사람들이 다 지나고 더는 내 뒤에 사람이 없을 때까지 엠마 크리스탈은 보이지 않았다. 꼭 엠마 크리스탈을 기다려야 할 리유는 없었다. 꼭 다시 만나기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것도 아니였다. 복잡한 기내에서 순서대로 내가 먼저 내리다나니 그냥 이메그레이션에서 줄 서서 대기하다나면 만날 수 있겠거니 하고 그때 쎄이 굿바이 하자고 내가 일방적으로 약속했을 뿐이였다. 좁은 기내가 아닌, 좀더 너른 곳에서 여유있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얼굴표정과 목소리에 더 진심을 담고 함께 한 려행길에 즐거웠던 것에 대한 고마움과 남은 생에 대한 축복을 담은 작별인사를 고하고 싶었다. 이제 갈라지면 서로 다시 볼 일이 없는 남남으로 다시 돌아서게 된다 할지라도 엊저녁 비행기에 올라서부터 첫눈에 필이 꽂혀 환상으로 가슴 설레일 수 있던 녀자가 아닌가. 스쳐지나듯 려행길에 얼핏 잠간 만난 녀자에게 필이 꽂혔다면 내가 너무 카사노바 기질을 가진 놈일가. 숙면에 빠져들기 전까지의 대화와 술 한잔 나눌 때 나누었던 눈빛으로 나는 엠마 크리스탈의 매력에 충분히 빠져들고 싶어졌고 나를 바라보는 엠마 크리스탈의 눈빛 속에도 나에 대한 호기심이 불꽃처럼 반짝하는 것을 분명 보았다고 믿고 싶었다. 혹시 내가 잠간 려행지 스팟 사진을 보는 사이 엠마 크리스탈이 나를 지나친 것일가. 그럴 리 없겠는데 하면서도 나는 다시 발걸음을 빨리 해서 이미그레이션 앞에 도착했다. 줄 지어선 인파들 속에서 엠마 크리스탈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엠마 크리스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하쿠나 마샤샤의 모습은 쉽게 눈에 띄였다. 라인 맨 뒤에 설 대신 앞으로 다가가 하쿠나 마샤샤에게 말을 건넸다. -하쿠나 마샤샤, 혹시 엠마 크리스탈이 앞에서 먼저 이미그레이션 통과하는 걸 봤어? -아니, 못 봤는데… 뒤에 함께 내리지 않았어? -아니… 이미그레이션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정식 쎄이 굿바이도 안했는데… 뒤에는 없어. -그럴 리가 없는데 내 앞에 섰을 리 없는데. 섰으면 내가 봤지. 분명 내 뒤에 줄 서있을 거야. 뒤쪽으로 가 다시 잘 찾아봐. -그래, 그럴 수 밖에 없겠지. 하쿠나 마샤샤, 함께 한 비행기 옆자리 동행, 너무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애. 다시 만날 수 있었음 좋겠어. -나도 즐거웠어. 나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게.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내 기도는 항상 령험했으니까. 하쿠나 마샤샤가 눈을 장난스레 깜빡이며 오른손을 펼쳐 내밀어왔다. -항상 행복하기를 빌게. -유 투. 하이파이브로 하쿠나 마샤샤와 진심 담긴 축복인사를 나누고 다시 뒤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대기줄 제일 마지막까지 가면서 한사람 한사람 얼굴을 다시 체크해 봐도 엠마 크리스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였다. 분명 어제저녁부터 아까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기내에서 함께 했는데 증기처럼 증발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엠마 크리스탈.   하쿠나 마샤샤    공항 밖은 이미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새 보안등이 환하게 켜져 공항 건물 외벽과 차도를 비치고 있었다. 택시 승강장 쪽으로 움직여 줄 맨 뒤에 대기순으로 서기 전에 혹시나 엠마 크리스탈의 모습이 보일가 싶어서 앞쪽부터 주욱 훑어보았다. 그러나 역시나였다. 엠마 크리스탈의 모습은 택시대기라인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데… 혼자 중얼거리며 줄 제일 뒤에 가서 섰다. 기다리는 사람은 많고 공항으로 들어서는 택시는 적었다. 딱 내 앞 사람까지 택시에 오르고 택시가 끊겼다. 한참 기다려도 더 들어오는 택시가 없었다. 랑패였다. 핸드폰을 뒤져 캡처해두었던 호텔 예약페지 이미지를 찾았다. 그 이미지에 나와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혹시 공항에서 그 호텔 부근까지 가는 리무진 뻐스가 있는가 묻기 위해서였다. 있으면 그 리무진 뻐스라도 타고 움직이려고. 그러나 전화는 걸리지 않았다. 몇번 걸어도 그냥 뚜뚜뚜 하고 통화중 신호만 울리고 뚜- 하는 련결음으로 바뀌지 않았다.   이상하네, 호텔 예약전화가 울리지 않다니. 공항 리무진 뻐스가 멈춰서는 곳을 찾으려고 안내판을 두리번거리는데 옆에서 끼익 하고 금속끼리 부딪쳐 브레이크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사람이 두발로 밟아서 달리는 릭샤가 옆에 멈춰서고 있었다. 얼굴이 감실감실한 현지인 남성이 릭샤 운전석에 앉아 나를 향해 손짓했다. -타세요. 이젠 더 기다려도 택시를 잡기 어려울 거예요. 그런데 그 뒤 손님석에서 뿌려져 오는 환한 미소가 내 가슴을 환히 비추는 빛으로 내 눈에 맞혀왔다.   하쿠나 마샤샤였다. 내 가까운 어느 곳에 숨어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듯 구원의 손길 내밀며 감쪽같이 등장한 하쿠나 마샤샤. -타세요, 하쿠나 마타타. 그래, 하쿠나 마타타, 그 주문의 힘을 믿으마. 나는 귀신에게 홀리우기라도 하듯 아무 주저 없이 냉큼 하쿠나 마샤샤 옆자리로 올라탔다. 릭샤 기사가 호각을 불듯 휘파람을 불었다. 날카로운 휘파람소리에 공항의 밤공기가 유쾌하게 떨었다. 기사가 웨쳤다. -하쿠나 마타타. 그래, 가는 거다. 잠간 막막해 헤매려 하는 나에게 때맞춰 혜성처럼 나타난 하쿠나 마샤샤. 너를 믿어 너의 주문의 힘을 오늘 밤 믿어보마. 나도 기분 좋게 웨쳤다. -하쿠나 마타타. 사람의 두 다리 힘으로 달리는 릭샤가 아니라 말들이 쩔렁쩔렁 방울소리 울리며 달리는 마차라고 한들 마다하겠냐. 더 성수나서 쨩 하고 밤하늘 향해 채찍을 날릴 것이다. 쨔, 신나게 달리는 거다 하고. -나보다 썩 앞에서 이미 그레이션 통과했잖아? 그새 어데 가 있다가 이렇게 별처럼 나타난 거야? -에릭 홍을 기다리고 있었지 뭐. -에잇, 롱담 말고 진짜 신기하네. 택시도 아니고 릭샤로 내 앞에 짠 하고 나타나다니? 공항에서 릭샤라니?… -진짜라니까. 믿어 안져? 내가 아까 그랬잖아? 내가 기도하면 꼭 다시 만나게 된다고. 아까 에릭 홍과 다시 쎄이 굿바이 하고 나서 내가 속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지, 오늘 저녁 에릭 홍을 꼭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그랬더니 진짜 이렇게 만나게 된 거야. 하쿠나 마샤샤의 얼굴에 흥분과 환희의 물결이 출렁이는 것이 불빛에도 보였다. 하쿠나 마샤샤도 우리의 재회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하쿠나 마샤샤의 손을 꼭 잡고 싶어졌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하쿠나 마샤샤의 손이 건너와서 먼저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냥 날 믿어. 오늘 밤, 지금 이 시각엔 우리의 만남만 믿는 거야. 1분 후의 일은 나도 몰라. 지금은 그저 굴러가는 릭샤 바퀴만을 믿는 거야. 하쿠나 마샤샤가 속삭였다. -오케이. 나도 하쿠나 마샤샤의 손을 꼬옥 힘주어 마주잡았다. 릭샤를 달려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이미 나는 하쿠나 마샤샤의 포로였다. 이 밤 예측불허의 운명처럼 굴러가는 릭샤에 실린 낯선 이방인이였다. 순한 양이 되여 릭샤 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앉아만 있으면 되였다. 프리힐공항에서 벗어나면 공항 밖 또 다른 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 다른 한 세상이 어떤 마법의 상자로 문을 활짝 열고 내가 걸어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수 없었다. 운명이 어떤 트릭을 걸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건 나는 오늘 저녁 하쿠나 마샤샤의 손을 잡고 그 속으로 주저없이 걸어들어갈 것이다.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운명의 노예가 되여보는 거다. 오늘 저녁엔. 하쿠나 마샤샤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나를 향해 의미 있는 웃음을 던져오더니 릭샤의 흔들림에 맞춰 웃몸을 좌우로 살살 흔들기 시작했다. 하쿠나 마샤샤의 입에서 노래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 있다네 밤의 정령들은 그 사다리 타고  별 따러 간다네 날쌘 밤의 전사들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둥근 달은 하얗고 커다란 우물  정령들은 별을 따다가  하얀 달 우물 속에 던져넣기 한다네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우물 속에 뛰놀던 하얀 강아지 두마리  별에게 얻어맞고 입술이 부었네 놀라서 달 속에서 뛰쳐나왔네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밤하늘에 함부로 올라가 뛰놀지 말아요 입술 부은 흰 강아지에게 발뒤축 물려요 발뒤축 물리면 별 따러 가지 못해요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선조들은 바위에 새겼네 강아지는 인류의 벗이라고  별 하나에 열생명 숨결이 들어있다고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비행기 안에서의 첫 만남에서 받아안았던 파워풀한 록가수 스타일의 하쿠나 마샤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뜻밖에 선률도 너무 심플해 음치라 해도 대번에 따라할 수 있는, 노래보다도 읊조림에 가까운 찬트 같은 것이였다. 우리를 태운 릭샤 바퀴가 구르는 소리 외 아무런 소음이 없는 밤길 우에 그 노래는 상쾌한 밤공기 립자들에 부딪쳐 원시림 속 속 빈 원목통을 통과하고 되돌아오듯 과장된 울림으로 되돌아왔다. 어느새 나도 하쿠나 마샤샤의 음조를 따라 하쿠나 마타타를 반복해 부르고 있었다. 노래소리에 성수났는지 릭샤 아저씨도 하쿠나 마타타~를 한번 소리높이 웨치더니 날카로운 휘파람소리를 길게 뽑아냈다. 밤하늘 정령들이 다 놀라서 부르르 몸을 떨며 뛰여내려 우리를 태운 릭샤에  초롱초롱 별들처럼 다닥다닥 매달릴 것만 같았다. 깔깔깔, 하쿠나 마샤샤의 웃음소리가 그 휘파람소리 꼬리를 잡고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얀 강아지 두마리 뛰여놀던 흰 달 우물 속의 물들이 그대로 다 쏟아져 우리들 머리 우에 하얀 폭포로 쏟아질 것 같았다. 릭샤 아저씨는 급할 것 없다는 듯 그냥 느적느적 페달을 밟아댔다. 이젠 공항을 떠난 지 한참 지난 것 같은데 거리상으로는 공항에서 도대체 얼마나 멀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상관이 없었다. 이 밤이 다 가도록 이렇게 길 우에 릭샤 투어를 해도 싫지 않을 것이였다. 둥근 바퀴가 급해하지 않는데 두발 인생이 조급해할 건 없었다. 기내에서 충분히 숙면을 취했던 덕분에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하쿠나 마샤샤, 노래가 너무나 듣기 좋아. 하쿠나 마샤샤의 목소리에는 인간의 령혼을 관통하는 묘한 힘이 들어있어. 더 들었으면 좋겠어. 나는 이 밤 하쿠나 마샤샤의 노래로 내 령혼의 깨끗한 세례식을 거행하고 싶어졌다. -좋아. 오늘 저녁 에릭 홍 한사람을 위한 아리아 가수가 되여줄게. 내 영광이야. 하쿠나 마샤샤는 내 손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두 손으로 자기의 무릎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 길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였는 지 묻지 마세요 그대는 언제 이 길에 올랐나요 어데로 가느냐고 묻지 않을게요 길은 다 알고 있어요 그대 운명의 방향과 생명의 무게    이 길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묻지 마세요 그대가 멈추는 곳에 길도 끝나요 길은 그대를 위해 뻗어있는 것 우린 누구나 몰라요 우리 운명의 방향과 생명의 가벼움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우린 모두 우주의 아침에 태여난 아이들 우린 누구나 우주의 큰 기적이죠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우리 함께 기적을 만들어가요 우주의 밝은 아침과 어두운 저녁 방금 불렀던 노래와 완전히 풍격이 다른 노래였다. 노래말에 담고 있는 뜻도 이번엔 더 직설적이고 그리고 더 교훈적으로 깊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하쿠나 마타타의 상쾌한 절주는 꼭같았다. 공항 지역을 완전히 벗어났는 지 길 옆에 물에 잠긴 논이 펼쳐졌다. 달빛과 별빛들이 밤의 정령들과 함께 물 속에 반짝이면서 놀고 있는 것이 반사광으로 눈부셨다. 그 별빛들 속에서 개굴개굴 하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개구리가 있는 동네, 개구리 합창이 요란한 밤하늘 아래. 나는 그 개구리들 속에 들어앉아 제일 극성스레 열심히 울어대는 노란 피부의 커다란 인간 개구리 모습을 상상했다. 오늘 밤 나는 그 개구리 왕이라도 되고 싶어졌다. 개굴개굴  나는 그 무슨 사연을 열심히 울어댈 것인가.   저 앞에 밝은 불빛이 켜져있는 작은 건물이 보였다. 이 밤 길옆에 등불 밝히고 잠들지 못하고 있는 저 건물 속에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가. 그 건물을 향하고 있는 내 눈빛에 담긴 궁금증을 읽었는지 하쿠나 마샤샤가 상큼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도착했어요. 우리 여기에 내려요. 로컬 푸드 레스토랑이예요. 하쿠나 마샤샤는 이곳에 익숙한 듯 했다. 공항에서부터 아예 이곳을 목적지로 릭샤에 나를 태웠는 지도 몰랐다. 상관없었다.   레스토랑이라는 말에 나는 갑자기 배속에서 꿈틀하는 식욕을 느꼈다. 어느새 나는 적당히 배고파져있었던 것이다. 입안에 확 침이 감돌며 아무 음식이라도 좀 먹어줘야 할 때가 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천천히 구르던 릭샤 바퀴가 브레이크를 밟지도 않고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면바로 딱 그 건물 처마 밑에 켜져있는 등불앞에 멈춰섰다. 내가 먼저 내리고 하쿠나 마샤샤가 따라서 내렸다.   샤바시향 나무 처마밑에는 변두리를 다듬지 않고 거치른 그대로 사용한 나무 판자에 노란색 페인트를 칠하고 우에 붉은 페인트로 두줄 상호를 적은 간판이 매달려있었다. 전에 대해본 적 없는 글씨체로 씌여진 간판이여서 그 앞에 서서 영어자모를 한글자 한글자 확인해서 읽어봐야만 했다. 자모 하나하나를 스펠링해 읽은 간판의 내용은 라는 웃줄 내용과 이라는 아래줄 내용이였다. 나는 허걱! 하고 놀란 숨을 들이쉬여야만 했다. 아니, 들이쉬던 숨결이 저절로 딱 멈춰섰다고 하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엠마 쥬. 여기에서 엠마 쥬를 만나다니. 엠마 쥬라는 이름이 이 밤 이곳에서 레스토랑 이름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나는 어떤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 엠마 쥬가 려행 떠나는 내게 자기의 이름으로 주문을 걸어놓은 게 분명했다. 출입문은 애초부터 닫아본 적이 없다는 듯 이 밤에도 활짝 열려있었다. 스스럼없이 안으로 들어가는 하쿠나 마샤샤의 뒤를 따라 나도 실내로 들어섰다. 실내는 텅 비여있었다. 레스토랑인데 식탁 하나 없는 텅 빈 공간이였다. 별로 밝지 않은 백열등 하나가 파릿한 빛을 뿌리는 실내는 아무런 장식 없이 천정에 원목 대들보가 그대로 드러나보이고 네 벽은 거칠은 황토로 마무리되여있었다. 바닥 역시 잘 다져진 황토로 마무리되여있었는데 주인이 날마다 물걸레질해서 그 표면을 반들반들 다듬어주는지 신선한 흙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주인 없는 텅 빈 레스토랑이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레스토랑과의 조우여서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지금 들어와 서있는 이 공간이 꼭 비현실적인 가상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느껴지는 이 아늑함이라니…정말이지 너무 오랜만에 맡아보는 신선한 흙내음이 하쿠나 마샤샤의 몸에서 풍겨져오는 데메테르 향과 함께 이방인인 나의 신경줄을 편안하게 이완시켜주고 있었다. 다시 눈길을 돌려 빙 방안을 둘러보자 출입문 반대 쪽에 뒤쪽으로 빠져나가는 작은 쪽문 같은 것이 뚫려져있는 것이 눈에 띄였다. 문 전체에 벽 색갈과 꼭같은 황토를 발라놓고 있어서 첫눈에는 쉽게 띄지 않았던 것이다.   멍 때리고 서있는 내 눈빛을 마주보며 하쿠나 마샤샤가 눈빛으로 물어왔다. 어때요? 나는 두 손을 펼쳐보이며 뭐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쿠나 마샤샤가 활짝 웃었다. 뒤쪽으로 작은 쪽문이 나있는 것을 언녕부터 알고 있다는 듯 하쿠나 마샤샤는 내게로 향했던 고개를 돌리고 곧장 그쪽으로 향했다. 아마도 그 문 뒤쪽에 료리를 만드는 작업공간이 있거나 혹은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여있는지 모를 일이였다. 혹은 레스토랑 주인의 생활 공간이 그 쪽문 뒤쪽에 마련되여있어서 하쿠나 마샤샤가 주인을 부르러 그 쪽문 쪽으로 향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 때였다. 방금 우리 둘이 들어온 출입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등뒤에서 년륜의 중후한 무게가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웰컴. 내 사랑하는 아들과 딸 자식이여… 고개를 돌리자 아래우 구분 없이 통으로 된 로컬룩을 그레이 톤으로 맞춰 입은 로자가 흰 수염과 주름 속에 자애로운 미소를 담고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부처님 같이 자애로운 그 미소 앞에 엉겁결에 두 손을 합장하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나를 로자가 다짜고짜 한품에 안아주었다. -많이 보고 싶었단다, 내 아들. 엉겁결에 로자의 두 팔 안에 안긴 채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답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들이라고 하는데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오 할 수도 없고 보고 싶었다고 하는데 본 적도 없는 사이에 뭐 보고프고 자시고 할 일이 있는가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로자의 품은 아늑했다. 그 년령대 로인들 몸에서 풍기기 쉬운 늙은이 냄새 대신 로자의 몸에서는 오랜 세월 옷에 배고 피부에 배고 뼈속에까지 배였을 것 같은 은은한 들꽃향기 같은 냄새가 맡아졌다. 그 냄새에는 낯선이와의 첫 만남이 주는 어색함과 본능적인 경계심 같은 것을 단번에 부리워놓도록 하는 신기한 기능이 들어있었다. 내가 어정쩡 로자의 품에 안겨있는 사이 쪽문 쪽으로 향하고 있던 하쿠나 마샤샤가 돌아서서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로자는 나를 안고 있던 두 팔을 풀고 이번엔 하쿠나 마샤샤를 한품에 안아주었다. -보고 싶었다, 내 사랑하는 딸아. 하쿠나 마샤샤가 깔깔깔 명랑하게 웃었다. -맡고 싶었어요. 이 냄새. -오냐, 내 딸아. 그럴 줄 알고 내가 오늘 특별히 백년 웃자란 령혼수의 완숙한 가을잎으로 만든 샤바시를 선물로 준비했구나. 로자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원래부터 들고 있었던 듯 그 손에는 네 벽의 색갈과 꼭같은 황토색 질그릇이 들려있었고 질그릇에는 속이 통통 여물게 말아진 잎담배 같은 것이 두대 놓여있었다. 난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하쿠나 마샤샤는 그것이 처음 대하는 물건이 아니고 이미 너무나 익숙한 것인지, 이곳에 온 목적이 그것을 취하기 위함이기라도 하듯 다짜고짜 오른손을 내밀어 그것을 손에 들었다. 로자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로자는 미소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머지 한대는 나에게 속하는 것임을 알려줘왔다. 전혀 억지 강요하는 빛이 아니고 자애로움만 가득찬 눈빛인데도 그 속에는 거절할 수 없는 힘이 들어있어서 나는 나도 몰래 손을 내밀어 그것을 손에 들었다. 요술을 부리기라도 하듯 이번에 로자의 손에는 어느새 성냥개비 같은 것이 들려져 있었다. 로자가 그것 두개를 대고 마주 비비자 금방 확 하고 불길이 일었다. 하쿠나 마샤샤가 잎담배 같은 것을 입에 물고 로자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불을 붙였다. 길게 빨았다가 입을 벌리자 하쿠나 마샤샤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토해져 나왔다. 담배가 옳았다. 흡연을 하지 않음에도 나는 마법에라도 걸린 듯 하쿠나 마샤샤가 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했다. 독한 담배연기에 내 페가 견디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이끌리듯 잎담배를 입에 물고 로자 쪽으로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첫모금부터 길게 강하게 빨아들였다. 전혀 독하지 않았다. 데메테르 퍼품향이 가슴 속을 뻐근하게 밀고 들어오 듯 순식간에 가슴 속이 달콤하게 뻐근해났다. 하쿠나 마샤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두마일 쯤 걸어 들어가면 엠마 쥬 빌라지라는 마을이 나와요. 그 마을 주변에 이 세상서 유일하게 가지 없이 나무 꼭대기에 잎만 자라는 신비의 나무가 있어요. 그런데 그 잎도 무성하게 여러 잎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루마다 꼭대기에 딱 두잎씩만 서로 마주보며 자라요. 바람이 불면 동시에 설레이는 것이 아니라 꼭 두 잎이 서로 엇바뀌여 설레이는 것이 특징이죠. 꼭마치 상대를 위해 서로 부채질을 해주듯이 한 잎이다른 한 잎을 향해 펄럭이고 제자리로 돌아가면 이번엔 가만히 있던 다른 한 잎이 상대 잎을 향해 몸을 날려 펄럭이죠. 그렇게 살랑살랑 서로 부채질해주는 사이 숲에는 어느새 안개처럼 그윽한 향기가 차오르고 세상엔 평화와 사랑이 넘치죠. 이곳 사람들은 그 나무를 샤바시향 나무라고 불러요. 몇년 전 첫 려행 때 우연히 엠마 쥬 빌라지를 지나다가 샤바시향 잎담배를 맛본 후 해마다 한번씩 찾아와서 한번씩 그 향기로 가슴 속을 뻐근히 채우고 령혼까지 깨끗이 씻고 가군 하죠. 하쿠나 마샤샤의 눈빛이 하얀 연기 속에 행복을 담고 몽롱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하쿠나 마샤샤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고 맞은켠 벽 쪽으로 걸어가더니 그대로 반들반들한 맨흙 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았다. 편안히 벽에 기대였다. 나도 하쿠나 마샤샤 옆에 퍼더버리고 앉아 벽에 기대였다. 너무나 편안했다. 딴딴한 맨흙 바닥이 그 어떤 쿠션 좋던 쏘파보다도 열배 백배 더 편안했다. 더 말이 필요없다는 듯 하쿠나 마샤샤가 연기를 크게 빨아들이고 그대로 꿀꺽 가슴 속까지 삼켰다가 아까운 듯 천천히 토해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도 하쿠나 마샤샤처럼 아주 끽연가이기라도 하듯 길게 연기를 빨아들이고 꿀꺽 그것을 가슴 속 깊이까지 삼키였다가 다시 천천히 내뱉았다. 연기가 혈관을 따라 온몸 구석구석을 다 한바퀴 돌고 나오는 듯 온몸에 해나른한 행복감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나는 내 몸이 그대로 향기로운 나무로 변하고 있는 중인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내 몸이 나무잎처럼 가벼워졌다. 나는 설레이고 싶어졌다. 내 옆의 하쿠나 마샤샤가 하나의 커다란 향나무잎으로 보였다. 나는 그 향나무 잎을 향해 내 몸을 숙여 사랑의 부채질을 해줄 차례임을 깨닫고 있었다.         하쿠나 마샤샤 쪽으로 고개를 숙여 내 가슴 속 뿌리 끝까지 길게 들이마셨던 연기를 아낌없이 하쿠나 마샤샤의 얼굴을 향해 내뿜었다. 하쿠나 마샤샤가 입을 크게 벌려 행복하게 그 연기를 다시 자기 입 안으로 빨아마셨다. 이번엔 하쿠나 마샤샤가 평화의 잎으로 설레며 내게로 고개를 향해왔다. 이번엔 내가 하 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어느새 로자는 방에서 나가고 없었다. 방안엔 벽에 기대고 앉은 나와 하쿠나 마샤샤 뿐이였다. 나는 저도 몰래 중얼거렸다. 아, 너무나 편안한 이 평화, 이대로 영영 잠들었음 좋겠어. 하쿠나 마샤샤가 속삭여왔다. 아, 너무나 아름다운 이 사랑, 이대로 사랑하다 잠들었음 좋겠어요. 우리는 서로의 몽롱한 눈 속에 비친 자신을 찾아보며 마주보고 낄낄 웃었다. 행복했다. 그 행복으로 훨훨 이 황토로 바른 네 벽 안의 공간 안에 서로 마주보며 날아옐 수 있을 것 같았다. 뒤쪽으로 난 쪽문을 열고 나가 함께 엠마 쥬 빌라지로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내밀어 하쿠나 마샤샤의 손을 잡았다. 하쿠나 마샤샤가 속삭여왔다. -잠들면 안돼요. 좀 있다 샤바시 잎으로 만든 샤바시 떡과 샤바시 잎을 소금 없이 그냥 호수물에 절여서 만든 샤바시 료리를 맛봐야 해요. 그 식사까지 마쳐야 진짜 이 엠마 쥬 레스토랑을 찾은 보람을 느낄 수 있어요. -하쿠나 마샤샤가 말하는 그 호수의 이름을 나도 잘 알고 있다구. 코코타타 맞지? 그 호수 이름이 코코타타가 맞지? 하쿠나 마샤샤가 놀랍다는 듯 소리쳐왔다. -어마나 알고 있었나요? 어떻게 알았나요? 점점 더 몽롱해져가는 가운데 나는 이제 다 알수 있을 것 같았다. 요술의 트릭 한가운데 들어와있는 내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의 모든 배치와 답안들을. 나는 중얼거렸다. -알지, 다 알지. 엠마 쥬라는 요술 미녀가 언제부턴가 나를 데메테르 향으로 서서히 마취시키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운명의 마술 쇼는 이미 펼쳐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몸이 너무 가벼워져서 훨훨 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눈등은 무거워져 나는 까무룩 잠속으로 빠져들 것 같았다. 그 때 하쿠나 마샤샤의 목소리가 귀가에 들려왔다. -잠들지 말아요, 눈을 떠요. 우리 손을 잡고 이 방안을 한바퀴 돌면서 춤을 추고 나면 다이닝 타임이 될 거예요. 샤바시 떡과 샤바시 밥을 먹고 샤바시 잎 료리까지 맛보면 이 세상 그 어떤 산해진미도 다 무색해질 거예요. 진짜 지금까지 몸에 쌓였던 모든 독소가 다 배출되고 새 삶에 대한 동경과 희망만으로 충만된 새로운 에너지로 온몸에 힘과 활기가 넘치게 될 거예요. 이 세상 그 어데 가서도 맛볼 수 없는 몸과 령혼의 힐링연이 될 거예요.    나는 하쿠나 마샤샤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름을 밟은 듯 발밑이 푹신푹신 가벼웠다. 나는 어느새 나무잎처럼 쫙 펼쳐진 내 두 팔을 새의 날개처럼 펄럭이기 시작했다. 방안에 나와 하쿠나 마샤샤가 토해낸 청춘의 향기가 령혼의 하품처럼 차고 넘쳤다.   코코타타로 가는 뻐스  너울너울 훨훨. 하쿠나 마샤샤의 말 대로 둘이 손 잡고 춤추며 방안을 딱 한바퀴 맴돌았을 때 아까 우리가 걸어들어왔던 출입문이 아닌 반대쪽 황토색 쪽문이 열렸다. 그 쪽문으로 누군가의 손이 파란색 떡과 파란색 잎절임 같은 것이 놓인 황토색 질그릇을 들여보냈다.    나는 센스 있게 얼른 다가가 그 질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허리 굽혀 그 질그릇을 들고 들어오던 사람이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내 입에서 환호 같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오 마이 갓. 엠마 크리스탈. 하쿠나 마샤샤가 뒤에서 손벽을 치며 깔깔깔 웃어댔다. 자기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엠마 크리스탈이 례의 그 차분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정겹게 바라봤다. -어서 드세요. 내가 아까 먼저 도착해서 직접 만든 료리예요. 나는 옆에 다가온 하쿠나 마샤샤에게 음식이 담긴 질그릇을 넘겼다. -도대체? -도대체는 없어요. 우리는 다 운명의 트릭 안에 만난 행운아들일 뿐이예요. 엠마 크리스탈이 대답했다. 나는 두 팔을 벌려 엠마 크리스탈을 안았다. 이번엔 엠마 크리스탈이 하쿠나 마샤사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깔깔깔 웃었다. 너무 행복한 표정의 얼굴로 내 얼굴을 마주보고 비비며 내 품안에서. -두 사람 뭐하는 거예요, 맛있는 료리를 놔두고. 어느새 떡을 한입 베여문 하쿠나 마샤샤가 꾸지람하듯 그러나 축복이 담긴 어투로 나와 크리스탈에게 속삭여왔다. 나는 엠마 크리스탈을 풀어주고 집게손가락 맨손으로 떡을 하나 집어들어 엠마 크리스탈 입에 넣어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료리를 만드느라 자신도 꽤나 배가 고팠댔다는 듯 엠마 크리스탈이 전혀 사양하지 않고 한입 크게 떼여물었다. 그렇게 엠마 크리스탈의 입자욱이 남은 떡을 나는 이번에 내 입으로 날라왔다. 엠마 크리스탈처럼 역시 한입 크게 떼여 입안에 물었다. 아직 씹지도 않았는데 벌써 알싸한 향기가 온몸으로 퍼지며 포식감이 그들먹이 차올라왔다. 이 떡을 씹어 삼키면 온몸에 이 세상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자신감으로 넘쳐오를 것 같았다. 단 한입으로도 충만한 이 포식감이라니.  질그릇의 료리가 다 비워지자 엠마 크리스탈이 내게 물었다. -아까 선물한 책 펼쳐봤나요? -아니, 아직. -펼쳐보세요. 그 책의 제목이 뭔지. 나는 펼쳐보지 않고도 그 책의 제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코코타타로 가는 뻐스? -빙고. 엠마 크리스탈이 다시 한번 환하게 웃었다. -펼쳐봐요. 그 첫 페지에 코코타타로 가는 뻐스 운행시간이 적혀있을 거예요. 나는 아까 들어오며 문어구에 내려놓았던 내 배낭을 찾아 그 안에서 엠마 크리스탈이 선물한 책을 꺼내들었다. 새로 씌운 리커버 밑에 원래 책 커버에 적혀있는 제목은 가 옳았다. 너무 신비하게 착착 맞물려 돌아가는 이번 려행의 트릭에 내가 지금 현실이 아닌 꿈속에 신비의 체험을 하고 있는 게 아닐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믿고 안 믿고 할 필요도 없었다. 운명이 나를 위해 커다란 마술쇼 스테이지를 만들어놓고 나를 그 무대 한가운데 세워놓았다면 나는 이미 정해진 트릭 대로 내 역할을 충실히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반드시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씩씩한 연기자로 되여야만 했다. 첫 페지를 펼쳤다. 엠마 크리스탈 말대로, 과연 첫 페지에는 코코타타로 가는 뻐스 운행 시간표가 적혀있었다.   -어? 밤에 출발하는 뻐스도 있네. 가만있자…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오늘이 그날이네. 지금이 몇시야? 나는 핸드폰을 꺼내여 시간을 확인했다. 당금 뻐스 출발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있었다. 아, 드디여 코코타타로 가는 뻐스에 오르게 되는구나. 나는 핸드폰을 꺼내여든 김에 내게 이번 신비의 려행을 추천해준 엠마 쥬에게 문자를 날려야 함을 깨달았다. 나는 엠마 쥬에게 문자를 날렸다. -드뎌 골인. 이제 곧 코코타타로 가는 뻐스에 오르게 됨. 핸드폰을 바지 호주머니에 넣는데 딩동 하는 문자 도착음이 울렸다. -뻐스는 이미 엠마 쥬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어요. 코코타타로 가는 뻐스는 엠마 쥬 빌라지에서 출발해요. 배낭을 메고 아까 들어왔던 출입문을 나섰다. 앙증맞게 귀여운 동화 속 빨간색 뻐스가 샤바시향 나무일 것 같은 나무 이미지를 외벽에 페인트로 드로잉하고 바로 레스토랑 문 앞에 서있었다. 엔진음도 듣지 못했는데 언제 도착해있었던 것일가. 나는 성큼성큼 걸어 뻐스 앞으로 다가섰다. 그 때 뻐스 문이 열렸다. -웰컴 투 코코타타. 뻐스 운전석에 앉아서 환영 멘트를 날려오는 운전기사는, 나와 한 사무실에 앉아있었던 엠마 쥬였다. 나는 더 놀라지 않기로 했다. 나 이럴 줄 알았어 하는 표정으로 엠마 쥬를 향해 벙실 웃으며 성큼 뻐스 우로 몸을 실었다. 하쿠나 마샤샤와 엠마 크리스탈까지 탑승하자 엠마 쥬가 상큼한 목소리로 웨쳤다. -고고고 코코타타. 하쿠나 마샤샤가 대답했다. -하쿠나 마타타. 우리 넷이 다같이 합창했다. -하쿠나 마타타 코코타타. 남자는 그 순간 눈물이 터져나오려 하는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출처:2017 제4호
18    [단편]무등을 켜라 댓글:  조회:398  추천:0  2019-07-17
무등을 켜라 조광명   1. 불륜이라는 이름의 사랑  잠간 숨을 고르고 씻으려고 몸을 일으키는 남자에게 녀자가 다시 안겨왔다. -일어나지 말아요. 꼬옥 안아줘요. 씻는 게 그렇게 급해요? 녀자가 오른손으로 남자의 오른팔을 억지로 당겨 자기 머리밑에 팔베개를 했다.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려 무릎을 남자의 배 우에 올려놓고 아래다리로 남자의 몸을 감았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힘주어 옥죄였다. 남자는 칭칭 감겨오는 문어발을 상상했다. 도망치지 못하게 점점 더 옥죄여오는 문어발의 힘. 녀자의 입술과 혀가 문어의 빨판처럼 남자의 오른쪽 어깨와 가슴을 핥고 빨았다. 몸을 나누기 전에는 남자가 이렇게 녀자를 애무했다. 진하게 몸을 나누고 난 후에는 항상 녀자가 더욱 관능적으로 나왔다. 녀자의 손이 남자의 턱을 만지고 입술을 만지고 코등을 만졌다. -너무 오랜만에 올랐어요. 아직도 몸이 조여져요. 왜? 남편하고는 잘 안돼? 남편이 나보다 열살이나 어리니까 힘도 나보다 더 좋을 것 아냐, 한창 나이인데… 그렇게 묻고픈 걸 참았다. 번마다 몸을 나누고 난 후 녀자가 미열에 떨듯 몸서리 치고 만족을 표시해오면서 더욱 감겨오면 항상 떠오르군 하던 궁금증이였다. 그러나 정작 한번도 묻지 못했다. 그렇게 묻는다면 방금 몸을 나눈 녀자에 대한 례의가 아닐 것 같았다. 동갑둥이 남편이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 배려해줄 줄 모른다고 남편에 대한 원망을 녀자 스스로 토로해온 적이 있었다. 녀자는 열살 년상 남자의 자상함이 부성애처럼 너무 따스하고 푸근해서 행복하다고 했다. 열살 년상의 남자, 남편보다 10년은 더 늙은 몸뚱이. 그런 남자의 몸에서도 남편 이상의 성적인 만족을 느끼고 숨막힐 정도로 행복하다고 흐느끼듯 속삭이는 녀자가 때로는 리해되지 않기도 했다. 오십이 넘어서면서 몸에 생기기 시작하는 변화를 남자는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안해도 그걸 가끔 느끼는 것 같았다. 당신 좀 이전보다 힘들어하네. 부부 사이의 일을 마친 후 옆에 누워 숨을 고르는 남자에게 안해가 말했다. 요즘 회사 일이 많이 피곤해? 그렇게 걱정스레 물어왔다. 그러나 안해의 관심과 걱정은 그 정도였다. 회사일에 지쳐서 그러는 줄로 아는 데에 그쳤다. 남자 나이 오십이 넘으면서 생기는 생리로화현상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로화현상을 막아주려고 안해의 립장에서 할 수 있는 노력 같은 걸 생각조차 않았다. 남자는 반백이라는 나이가 남자에게 육체적으로 하나의 큰 문턱임을 느꼈다. 내리막길이 보였다. 반백의 문턱을 넘어서니 올리막보다 더 지치기 쉬운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멋대로 달려온 삼십대와 멋 모르고 달려온 사십대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였다. 벌써 이러면 안되는데, 아직은 아닌데… 그러나 몸은 이미 내리막길에 들어섰다고, 브레이크가 고장났다고 빨간 불을 깜박이고 있었다. 남자는 세월이 몸에 가해오는 반격을 느끼고 있었다. 이젠 늙었어. 힘에 부쳐.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녀자에게 오면 싱싱해졌다. 지칠 줄 모르고 정신없이 내달릴 수 있었다. 아직은 되네. 녀자의 몸이 젊어서 그런가. 그러나 역시 녀자에게 이런 생각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래, 아직 젊었을 때, 몸이 생각을 따라줄 때 많이 만날 수 있도록 하자. 내 몸이 아직 니 몸을 감당할 수 있을 때 아직 니 몸이 내 몸에 실망하고 짜증을 내고 피하고 싶어하고 떠나고 싶어하기 전에 많이 만나고 많이 달리자. 남자는 속으로 녀자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 녀자에게서 버림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닌가. 아무리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누고 령혼으로 사랑한다고 해도 부부가 아닌 남녀의 만남은 결국은 만나면 옷부터 급히 벗고 육체적으로 더 매달리게 되는 사이. 몸으로 그리워하고 몸으로 그 그리움을 풀고 몸으로 더 그리움을 만드는 사이. 몸은 진실했고 몸은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모든 고상한 체하는 허위를 몸은 몰랐다. 가장 낮고 비렬한 자세로 상대방 앞에 꿇어 엎드릴 줄 알았고 자존심 같은 걸 다 버리고 사랑 앞에 신음소리를 내고 몸부림칠 줄 알았다. 그 몸이 이제 사랑에 대한 호소력을 잃고 시들어버린다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몸은 먼저 시들어버린 몸을 더 사랑한다고 붙잡고 있어야 할 리유를 찾지 못하리라. 그때가 되면 그냥 서로 자연스레 멀어지고 알아서 스스로 떠나게 되리라. 쓸쓸한 결말인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게 아닐가. 남의 눈을 피해서 몸을 불사르는, 남의 눈에 불륜일 뜨거운 사랑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이 세상 구석구석 얼마나 많을 것인가. 숨어서 헐떡이는 육체들, 그 육체들이 질러대는 신음은 환희의 열락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오히려 결국은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내지르는 탄식이고 비명이리라. 그 많은 사랑들이 남의 눈에 띄지 않아 불륜으로 들통나지 않고 소문나지 않을 뿐, 해빛 아래 드러나지 않는 남녀 몸뚱이의 교합은 너무나도 많고 많으리라. 그러다가 육체가 시들었을 때 결국 그 뜨거웠던 사랑의 시간들 아예 없었던 듯 시치미 뚝 떼고 돌아서서 다시 남남으로 멀리 지켜보며 담담히 웃어줄 수 있는 사이. 죽을 때까지 끝까지 영위하는 불륜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와 녀자의 만남은 항상 뜨겁고 치렬한 몸뚱이의 싸움이였다.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파고들고 탐닉하는 연소와 재연소. 그러나 오늘은 아니였다. 안고 누워서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재충전할 시간을 가지고 몸에 다시 불을 붙여 또 정신없이 달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아쉽지만 빨리 돌아가야 했다. 이미 아까 만나서 호텔로 이동하면서 차안에서 녀자에게 이야기해줬었다. 오늘은 시간적으로 좀 급한 일이 있다고. -빨리 씻고 돌아가야지, 벌써 세시가 다 되여가. 길이 밀리지 않아도 두시간은 운전해야 도착 가능해. 저녁식사 전에 도착하기로 약속했단 말야. 사실이였다. 오늘 저녁에 동생네 부부가 오기로 되여있다. 집 부근에서 만나 밖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약속되여있었다. 그때 아버지를 양로원에 보내는 일로 동생의 의견을 들어볼 계획이였다. 물론 일방적인 통보로 끝날 것이였다. 아버지의 신상에 관한 일에 동생은 역시 나 몰라라 랭정하게 고개를 돌리며 형이 알아서 해 하고 남자에게 모든 재량권을 넘길 것이였다. 그래도 만나야 했다. 형제이니까 만나서 알려줘야 했다. 의견을 묻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어제 아침 문을 나서는데 안해가 남자의 옷깃을 잡아당겨 펴주며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한마디 툭 던지듯 건네여왔다. -아버님 양로원으로 모시는 걸 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대답 대신 눈빛으로 안해에게 물었다. 왜? 또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그냥. 안해도 눈빛으로 대답해왔다. 그러나 그 아니요 눈빛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물음에 대답하기조차 싫다는 뜻의 아니요 이였지 양로원으로 모시자고 방금 한 말을 거두어들이겠다는 뜻의 아니요는 결코 아니였다. 안해의 눈빛은 오히려 이번엔 무조건 꼭 시아버지를 양로원으로 모셔야 한다는 강인한 의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말해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마음속으로 그 존재를 많이 지워버렸던 아버지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로친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에도 못 들은 척 혼자 잘 지내보세요 하고 련락도 않고 들여다보지도 않았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다리맥이 풀려 운신이 불편하고 식사도 여의치 못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못해 모시러 갔었다. 가보니 무너진 육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미 어느 정도 심해진 치매증상이였다. 10여년 만에 대하는 아들을 알아보고 놀라서 우는가 싶더니 이내 횡설수설하며 웃었다. 병원에 모시고 가니 이미 예방치료가 불가능한 단계까지 발전해있다고 했다. 그래서 버림받았구나, 조강지처 버리고 바람 나서 새로 살림을 차렸던 녀자에게서도 더는 쓸모 없어진 페인으로 버림받은 거구나. 남자는 그런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세상에 생명으로 올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키워준 분이 아닌가. -어제 저녁 당신이 늦도록 들어오지 않으니까 당신 대신 얼굴과 손발이라도 씻어드린다고 물을 들고 들어갔더니… 안해는 말끝을 사렸다. 그래서? 말해봐. 눈에 날을 세워 생략된 뒤말을 뱉어내도록 강요했다. -내 손을 덥석 잡았어요. 그런데 당기는 힘이 너무 강했어요.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당신의 며느리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치매가 심해졌구나. 그러나 알아보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였다. 안해의 말 속에는 다른 뜻이 들어있었다. 징그러워요… 더는 한집안에서 못살아요. 안해의 눈이 그렇게 말해오고 있었다. 그 나이에, 거동조차 힘든 그 몸에도, 아직 녀자에 대한 욕망은 남아있어서 며느리를 녀자로 보고, 그래도 남자노라고 덥석 손을 쥐였을 아버지… 젊어서도 밖에 나돌며 다른 녀자에게 빠져 조강지처 버리고 자식들 다 버리고 난봉군으로 녀자 치마자락에 파묻혀 살더니…그렇게라도 다 태우지 못한 욕망이 아직 남아있었단 말인가. 그 시들어 쭈글쭈글한 몸뚱이 속에도 녀자에 대한 욕망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단 말인가. 인간은 참으로 너무너무 루추하고 치사한 존재구나… 속으로부터 썩어가는 냄새가 풍기는 몸에도 수컷의 본능은 살아있다는 게 같은 남자로서도 너무 추악하게 생각되였다. 며느리 립장에서 그렇게 당하고 얼마나 당황했을가. 아버지의 그런 치사한 로망행위를 아들의 립장이 아닌 남편의 립장으로 들어주기에도 남자는 심한 치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남자라는 수컷은 얼마나 치사한 본능의 동물인가. -알았어. 당신 뜻대로 하자. 남자는 결연히 대답했다. -왜 내 뜻으로 해요? 당신 형제들 뜻으로 해야지. 안해는 자기가 시아버지를 모시기 싫어서 집에서 내쫓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해오고 있었다. -알았어. 그 자리에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번 만나자고 식사를 함께 하고 서로 얼굴이라도 보자고 했다. 그게 어제 일이였다. 녀자의 혀끝이 남자의 젖꼭지를 간질여왔다. 아직 뜨거운 녀자의 몸은 다시 불붙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시들은 남자를 다시 세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돌아가지 못한다고, 후에 다시 만나서 식사하자고 하면 안돼요? 오늘 저녁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자요. 녀자가 목을 감아오며 칭얼대듯 물었다. 묻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는 것이였다. 하루밤이라도 안고 있자고, 함께 자자고, 그저 낮에 몇시간 함께 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고, 부족하다고, 사랑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고 칭얼대고 있었다. 더 진한 사랑을 달라고, 조금만 더 길게 함께 하자고, 적어도 하루를 뛰여넘고 밤을 뛰여넘는 사랑을 하자고 호소해오는 것이였다. 남편은 어쩌고? 하는 물음이 떠오르는 걸 묻지 않았다. 그냥 아쉬워서 칭얼대느라고 그러는 줄 알고 있었다. 운전해서 두시간 정도의 거리여서 만나려면 너무 어려운 것도 아니였다. 처음엔 하청업체가 이쪽 도시에 있다는 리유로 거의 매주 달려와 만나서 몸을 나누었다. 남자가 일이 바빠서 오지 못할 때엔 녀자가 남자가 있는 도시로 달려오기도 했다. 둘 다 서로 남편 있고 안해가 있는 육체끼리 왜 그렇게 서로 성에 굶주린 사람처럼 서로의 몸이 그리워 몸을 불사르지 못해 미쳐있었을가. 안해와의 부부생활이 조화롭지 못해서가 아니였다. 그냥 그렇게 녀자를 안고 싶고 녀자가 보고팠고 녀자를 만나면 녀자의 몸이 좋았다. 녀자 우에서 헐떡이고 녀자 밑에서 폭발하는 게 좋았다. 다를 게 없는데 달랐다. 위험한 불장난인 줄 알면서도 그 위험한 장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새로 생긴 녀자에게 빠져 안해와 자식들을 다 버리고 따로 살림을 차리고 나간 아버지의 바람기가 리해되기도 했다. 이렇게 좋은 거구나. 이렇게 빠질 수도 있는 거구나. 그래서 더 깊이 빠지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을 다잡았다. 그래, 그냥 불장난일 뿐이야. 지켜야 할 선이 있어. 그 선을 넘어서선 절대로 안돼. 서로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돼. 서로의 가정을 깨뜨릴 정도로 빠져선 안돼. 서로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녀자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만나주는 것 같았다. 만나면 아낌없이 몸을 불사르며 흐느낄 정도로 사랑했지만 갈라져야 할 시간이 되면 결국 놓아주군 했다. 아쉽다고 함께 더 있자고 투정질은 더러 했지만 그러나 결국 웃으며 놓아주고 씩씩히 돌아서군 했다. 집에 가서 안해와 아이에게 잘해주라고 오히려 챙겨주군 했다. 그런데 오늘 녀자는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한번 사랑으로 불태웠던 몸을 다시 한번 불사르고 말겠다는 듯 다시 꿈틀거리고 다시 뜨거워지고 있었다. 남자도 아래배에 다시 힘을 주어보았다. 다행히 아래배 근육이 다시 뭉쳐지는 게 알렸다. 흐물흐물 맥없이 풀리지 않아서 고마웠다. 남자는 오른팔에 힘주어 녀자를 몸우로 끌어당겨 올려놓았다. 녀자의 눈길은 벌써 다시 몽롱해져있었다. 그래, 달리는 거다, 달릴 수 있을 때. 달려주마, 너와 함께. 아버지 당신도 이렇게 달리는 게 좋아서 달리다가 결국은 안해도 아이들도 다 버리는, 세상의 질타에도 두려움 없이 가정을 버린 ‘용감한 투사’가 되였던 것일가. 자식들에게서조차도 바람쟁이라는 저주를 들었을가. 그러나 당신의 아들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당신의 아들은 절대로 조강지처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의 아들은 결코 자식을 버리는 애비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온  지 몇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아버지 방에 들어가 기저귀를 새로 갈아드리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뒤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강지처를 버리지 말라. 벌 받는다. 그 소리를 듣고 흠칫했다. 그 날은 녀자를 만나러 가기로 약속된 날이였다. 녀자를 만나 함께 하는 시간을 좀더 가지려면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와야 하길래 더군다나 아버지 당신의 기저귀를 새것으로 바꿔 깔아주러 들어갔던 것이였다. 아니면 안해가 고생이였다. 어, 당신의 아들이 바람 나서 외간 녀자 만나러 가는 줄 어떻게 알았을가. 당신의 젊었을 적 바람기가 아직까지 살아있어서 치매에 걸렸어도 바람 난 아들의 몸에서 풍기는 바람기를 본능적으로 냄새 맡은 것일가. 아버지 당신은, 당신의 아들도 지금 당신이 젊었을 적처럼 바람이 나서 온몸을 바람기로 붕붕 부풀리고 있는 줄 보아낸 것일가. 치매에 걸리셔 가지고도… 수컷이 수컷을 알아보듯… 바람쟁이가 바람쟁이를 알아보듯 … 그러나 이내 머리를 저었다. 걱정 마세요. 당신처럼 조강지처는 버리지 않습니다. 그때 등뒤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날아와 꽂혔다. -제 새끼는 버리지 말라. 벌 받는다. 그래요, 당신은 조강지처와 제 자식을 버린 죄로 지금 그렇게 운신도 바로 못하고 치매에 걸려 허덕이고 있나요? 속으로 그렇게 콱 대꾸하고 싶었다. 그 후에도 아버지는 자기 방에 들어왔다 돌아서서 나가는 남자의 등에 대고 몇번이고 더 중얼거렸다. -조강지처 버리지 말라. 벌 받는다. -제 새끼는 버리지 말라. 벌 받는다.  그때마다 속으로 대꾸하군 했다. 걱정마세요. 당신처럼 조강치처 버리고 새끼들 가슴에 못 박는 인생은 안 살 거니까.   2. 용서라는 이름의 복수  남자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 때는 이미 오후 네시가 막 지나는 시간이였다. 늦겠군… 마음이 급해지려 했다. 길이 밀리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새 안개가 많이 내려앉아있었다. 짙게 끼였다가 막 흩어져가는 안개가 아니라 지금 막 더 진하게 짙어가는 안개였다. 해변가 도시여서 이런 안개의 습격은 늘 있었다. 이 정도 안개면 혹시 고속도로가 봉쇄될지 몰랐다. 남자는 그게 걱정되였다. 출발하기 전 미리 안해에게 전화해서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 언질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마침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리고 마침 안해에게서 온 전화였다. -당신 지금 어디야? -왜? -아버님이 안 보여요. -엉? 뭔 소리야? 아버지 거동이 불편하시잖아? 지팽이 짚고도 혼자선 움직이기 불편하시잖아? -그니깐요. 그런데 집에 안 계세요. 아까 점심식사 챙겨드리고 잠간 머리 손질하러 나갔다 오니까 안 보여요. 집안 어디에도 안 보여요. -어, 이상하네. 급해 말고… 동네에 나가 잘 찾아봐. 운신이 불편하시니까 어데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야. -네, 당신도 빨리 일 끝내고 빨리 돌아와요. 안해의 목소리가 당황해서 떨리고 있는 것이 전화로도 알렸다. -응, 당황해하지 말고 나도 일 끝내고 지금 막 하청업체 대문을 나서는 길이야. 거짓말로 안해를 달랬다. 전화를 끊고 엑셀을 밟았다. 호텔 주차장을 벗어나 호텔 앞 큰길에 들어섰다. 아직 시야가 영향받을 정도로 안개가 짙어진 건 아니여서 앞차들을 추월하며 무섭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아직 시야 확보는 충분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오는지 차들이 밀리기 시작하여 신호등 몇개를 지나 시내를 벗어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국도에 들어서자 길 우에 달리는 차들이 좀 적어졌다. 그새 안개는 더 짙게 내려앉아있었다. 블루투스로 련결된 네비게이션으로 안해에게 전화를 걸었다. 련결되자마자 물었다. -동네를 찾아봤어? -네, 그러잖아도 지금 막 전화를 넣으려던 참이였어요. 동네 40여동 건물 한바퀴 다 돌고 동네 놀이터랑 한 바퀴 샅샅이 다 뒤졌어요. 동네 어디에도 없어요. 그래서 방금 동네 입구 출입구 경비아저씨에게 물어봤어요. 지팽이 짚은 어떤 로인 한분이 아까 한시간 전에 나가는 걸 봤대요. 아버님이신 것 같아요. -엉? 그게 뭔 소리야? 아버지가 혼자서 지팽이 짚고 동네를 벗어났다구? 말이 돼? -그니깐요. 나도 믿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사실이잖아요? 경비아저씨도 별로 본 기억이 없는 로인이 거동도 좀 불편한 것 같아서  어느 동에 사는가고 물었대요. 그랬더니 우리가 사는 동 번호를 정확하게 이야기해주더래요. 정신은 멀쩡해 보이더래요. -알았어.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치매걸려서 자기 이름도 바로 기억 못하는 량반이 사는 집 동수를 기억해서 알고 있다니? 참… 당장 동생네한테 전화해 알려주고,  당신은 너무 급해 말고 동네 주변 상가들을 한번 돌아봐요. 난 아마 거의 둬시간 되여야 도착 가능할 것 같아. 거동이 불편해서 화장실 다니는 것도 사람이 부축하지 않으면 힘들었다. 옆에 사람이 없을 때 화장실이 급하면 미처 혼자서 움직이지 못해서 실례하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 그래서 아예 미리 기저귀를 대주군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혼자서 집문을 나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동네를 벗어나기까지 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였다. 치매의 여러가지 증상중 하나가 집에서 탈출해 가족들의 시야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사지가 멀쩡하게 성한 치매병 환자에게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때로 실수해서 속옷을 더럽히면 아들인 자기가 직접 그 옷을 벗기고 몸을 다시 다 씻기고 닦아주고 새옷을 갈아입히곤 하면서도, 그때마다 냄새에 이마를 찌프리군 하면서도 오히려 그렇게 운신이 불편해서 집에 가만히 누워계셔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군 했었다. 다른 치매환자들처럼 자꾸만 집에서 실종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증기처럼 증발해버린 치매로인이 어데 가서 어떻게 헤매고 있는지 어떻게 알고 어데 가서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그 끔찍한 일이 오늘 자기 집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아버지에게 사드린 지팽이가 요술지팽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 요술지팽이의 마력으로 걷기 힘든 아버지가 씽씽 날아 감쪽같이 실종되였단 말인가.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나 아까 형수 전화 받았는데, 나 오늘 마침 바쁜 날이야. 오늘 형이랑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 전에 일을 마무리하려고 지금 정신없이 일하고 있어. 다그쳐 해도 저녁 약속시간 전에 이르긴 힘들 것 같애. 근데 형은 지금 어디길래 형수 혼자 고생이야? 동생의 목소리엔 짜증이 묻어있었다. 벌컥 하고 속에서 뭔가 치솟아오르려 했다.   얌마, 난 지금 둬시간 떨어져 있는 곳에 와있으니까 날아갈 재간이 없어서 차로 달려가는 거지만, 넌 한 도시 안에서 그렇게 일 핑게로 꼼지락대며 늑장을 부리는 거냐. 아무리 정 떨어져 꼴도 보기 싫은 아버지라고 해도 지금 상황이 상황이잖냐. 남이라면 찾으러 나서주지 않겠냐. 네 형수 혼자 급해하는 걸 좀 도와주면 못쓰냐. 전화기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욱 밀고 올라오려 하는 것을 꾸욱 눌러 참았다. -그래, 알았다. 나도 최대한 빨리 밟을 테니까 네가 형수랑 통화도 자주 하면서 상황파악 좀 하고, 형수가 허둥대지 않게 달래라도 줘라.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네가 아버지를 찾으려고 달려와주리라고는 기대도 안하마. 아버지가 지은 죄가 크긴 해도 오늘 같은 날은 그 죄를 따져야 할 날이 아니잖냐. 네 같은 놈을 자식이라고 낳은 죄도 죄라면 아버지 죄가 또 하나 늘어나는구나. 이런 말이 튀여나오려 하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응, 형, 운전 조심해. 동생은 어렸을 적 집 나간 아버지를 한 번도 입밖으로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망 없는 미움은 더 무서운 것이였다. 크면서 한번도 아버지를 찾지 않는 그 시간동안 동생은 기억에서 아버지를 지워가고 있었다.  남자가 아버지를  모시러 찾아가자고 동생을 찾았을 때도 동생은 랭정하게 나왔다. -난 내 기억에서 아버지를 지운 지 오래 됐어. 내게는 없는 사람이야. -그래도 아버지잖냐, 낳아주고 키워준 은공이 있잖냐. -낳아주고 키워준 은공보다 버린 죄가 더 커. 더 볼일 없어. 동생의 가슴에 생긴 그 큰 아픔과 원망을 더 건드릴 수 없어서 남자는 혼자 가서 아버지를 모셔왔다. 모셔온 후에도 동생은 아버지를 보러 오지 않았다. 모셔온 후 드문드문 정신이 멀쩡한 상태로 돌아올 때면 아버지는 꺼이꺼이 울군 했다. 미안하다고 했다. 용서해달라고 했다. 자식들 얼굴 뵐 면목 없는데  그래도 애비라고 모셔다 함께 살아줘서 고맙다고 울었다. 장가간 두 아들이 억지로 령감을 소개해서 시집보낸 본처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 로친이 새로 만난 령감과 정 좋게 잘살고 있어서 너무 기쁘다고 했다. 작은아들이 보고 싶다고 했다. 장가갈 때 얼굴도 못 본 작은아들의 얼굴이 보고 싶고 그 아들과 살고 있는 며늘아기가 보고 싶고 작은 손주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남자는 천륜은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혈연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그런 아버지가 측은하게 보여 속으로 아버지에게 묻군 했다. 그럴 거면 왜 그렇게 앞뒤 헤아리지 않고 불 본 나비처럼 죽을둥살둥 모르고 불속으로 뛰여들었어요? 조강지처 다 버리고 어린 자식들 다 버릴 정도로 그렇게 그 녀자 외에 눈에 보이는 게 없었어요? 바람도 적당히 피웠어야지 그렇게 가정을 다 버리도록 눈이 먼 바람을 피우면 어떡해요? 바람을 피워도 눈을 뜨고 피웠어야죠. 천으로 눈 꽁꽁 싸매고 눈봉사처럼 달려들면 어떡해요? 그래서 행복했어요? 그래서 인생이 즐거웠어요? 결국은 버림받았잖아요? 결국은 커다란 짐덩이가 되여서 자식에게 부담으로 되돌아왔잖아요. 그렇게 당신이 버린 자식의 품이 아니면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잖아요? 그러나 꺼이꺼이 울면서 후회하는 로구의 몸을 보면서 이 모든 원망의 소리들을 다 토해낼 수는 없었다. 동생에게 전화했다. 아버지가 많이 후회한다고, 지은 죄가 너무 크다고 사과한다고… 웬만하면 며느리와 손자 얼굴이라도 아버지에게 보여드리는 것이 그래도 이 세상에 오도록 만들어준 이에 대한 례의가 아니냐고 남자가 이야기했을 때도 동생의 대답은 역시 얼음처럼 차거웠다.   -자신 있으면 아버지더러 그 며느리와 손자 앞에 본인이 두발로 찾아와서 나서라고 해. 시아버지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며느리야. 할아버지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손자들이야. 그런 며느리와 손자 앞에 나설 수 있을 정도로 뻔뻔스럽기라도 하면 내가 얼굴 한번 잠간 빌려 보여주는 시늉은 할 수 있겠지. 아니지, 아버지라고 불러달라고 할 자격이 있냐고 물어보겠지. 그 물음에 대답할 자신 있으면 날 찾아오라고 그래. 그러나 아니잖아. 이제 와서 용서해달라고? 말이 돼? 너무 뻔뻔스러운 거 아니야? 난 용서 안돼. 동생은 꽁꽁 닫은 마음의 문을 다시 열어주려 하지 않았다. 남자에게도 비웃음의 독설을 날려왔다. -형은 그런 아버지가 용서돼? 용서가 되여서 집으로 모셔간 거야? 누굴 고생시키려고? 형수는 그런 시아버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형만 바라보고 결혼했을 거 아니야? 그런 형수더러 제 몸도 바로 못 가누고 치매에 걸려 사람도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늙은이를 시아버지로 모시라고? 말이 돼? 직접 양로원으로 모셔갔다면 몰라, 집으로 모셔가다니? 형이 너무 자사자리한 거 아니야? 효도를 해도 그렇게 하는 건 아니잖아? 형이 바라는 게 뭐야? 늙었을지언정 그래도 친아버지이니까 그 아버지가 주는 사랑? 어려서 못 받은 아버지 사랑 이제라도 보상해서 받으려고? 아니잖아? 형도 너무 렴치없이 욕심부리는 거잖아? 아버지는 자식을 버렸어도 자식은 그 아버지를 용서해서 다시 받아들이고 효도로 모신다는 그런 자아위안으로 만족을 느끼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위안하려고 한다는 게 더 맞잖아? 그런 세상 울리는 효도로 자기를 버렸던 아버지에게 오히려 복수하는 거잖아? 그냥 내버려두지 그랬어? 스스로 선택한, 버리고 버림받은 인생인데. 그렇게 버림받은 인생을 버린 만큼 버려진 대로 살다가 혼자서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게 하는 게 더 하늘의 뜻에 맞고, 본인에게도 더 편안하고 어울리는 것일 수도 있었잖아? 그런데 형이 훼방군으로 나선 거야. 효도한답시고 오히려 더 고약하게 복수하고 나선거야. 동생은 자기 가슴속에 쌓였던 울분을 그렇게 형을 시까스르고 비웃고 형편없이 호도하는 것으로 풀었다. 그런 동생의 비웃음을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남자는 과연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람을 용서해서 모셔온 것일가 자신에게 물었다. 아니다, 나도 용서 못한다는 소리가 가슴 밑바닥에서 들려왔다. 동생의 말대로 어쩜 동생보다도 더 고약한 방식으로 아버지의 죄를 묻고 따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동생은 령하 20도 꽝꽝 언 얼음의 차거움으로 아버지의 죄를 단죄한다면 자기는 그렇게 얼어붙은 부자 사이의 얼음을 인간의 체온으로 녹이려고 인간적으로 노력하는 체하고 오히려 아버지 당신을 집에다 불러들여 남들의 눈에 효도로 보이는 행위로 아버지의 죄를 눈앞에 문초하고 벌을 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동생은 아버지를 기억속에서 지워버리고 그 죄를 묻지도 않고 포기하고 있다면 큰아들인 자기는 오히려 그 죄를 기어코 눈앞에 직접 따져보고 눈앞에 직접 참회하게 만들고 구걸하듯 용서를 구하게 만들고파서 이렇게 모신다는 명의로 집에다 가두어넣고 형벌을 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쩜 회피보다도 더 고약한 보복행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돌아설 수 없는 길  안개는 점점 더 두터워지고 있었다. 하긴 도심 속까지 침범해 들어왔을 안개이면 도시를 멀리 벗어날수록 그 횡포가  더 심해질 것이였다. 바다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안개의 농도도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차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이제는  속도를  내여도 좋을 정도로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짙은 안개군. 그때 블루투스로 련결된 전화음이 울렸다. 녀자였다. -여보세요? 지금 어데까지 갔어요? -안개가 짙어서 빨리 달리지 못했어. 아직 고속도로로 빠지지도 못했어. -그래서 전화드렸어요. 당신이 떠나고 지금 막 집으로 돌아와서 TV를 켜고 확인했는데 안개 적색 경보가 발령되였네요. 황색 경보도 아니고 오렌지색 경보도 아니고 최고 엄중한 적색 경보예요. 모든 고속도로 페쇄 조치가 내려졌고 차량들 국도 진입도 차단되였대요. 차를 달리면 위험하대요. -난 이미 국도에 들어섰으니까 괜찮아. 걱정하지 마. 천천히 달리지 뭐. -안돼요, 위험해요. 지금 당장 돌아서세요. 내가 남편에게 거짓말하고 아까 그 호텔에 가서 다시 방을 잡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빨리 돌아서세요. 도로상황은 이미 많이 엄중해져있었다. 녀자와 통화하는 사이 모든 차량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굼벵이처럼 기다 싶이 하고 있었다. 이미 차들은 달리지 못하고 기고 있었다. 남자는 차에 올라 교통방송 라지오를 켜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짙은 안개였다. 안개는 이제는 아예 장막처럼 두텁게 바다 쪽에서 어둠의 뭉치로 침략군처럼 쓸어서 밀려오고 있었다. 안개의 립자들이 차 유리창에 물기처럼 매달리는 게 알렸다. 심하군. 와이퍼를 작동시키고 무등을 켰다. 앞차가 쌍방향 비상등을 깜빡이는 걸 보고 덩달아 삼각형 비상등 버튼을 눌렀다. -곧 시야 확보가 거의 제로상태가 되게 어둠처럼 안개가 눈앞을 가로막을 거래요. 이런 짙은 안개가 삼십년 만에 처음이래요. 녀자의 목소리가 그냥 울렸다. 여긴 이미 거의 시야 확보 제로상태야. 속으로 그렇게 대답하며 그러나 전화에 대고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여긴 아직 괜찮아. 아직 앞이 잘 보이니까 걱정하지 마. -아, 그러면 다행이네요. 여긴 지금 막 창밖이 캄캄해져요. 빨리 돌아서세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만난 날이 안개 낀 날이였잖아요? 돌아와서 우리 아예 우리의 만남을 기념하는 자축파티 해요. 안개 속의 축하파티,  낮에 못다한 사랑 더 해요. 급해졌던 녀자의 음성이 사랑에 물젖어 촉촉해지고 있었다. 속으로 대답했다. 이미 돌아설 수 없는 길에 들어섰어. 이젠 그냥 앞으로만 달려야 해. 남자와 녀자와의 사이도 돌아설 수 없는 사이로 발전해있는 걸가. 남자의 안전을 걱정해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면서라도 남자더러 되돌아서서 밤을 함께 하자고 호소해오는 녀자. 녀자는 지금까지 건너지 않았던 위험한 강을 대담히 건너려 하고 있었다. 그 강을 건너서 이제는 안개 속의 첫 만남을 기념하는 자축파티를 아예 안개속에서 몸을 불사르며 하잔다. 안개 속에 만났던 녀자와의 첫 인연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 날도 오늘처럼 안개가 짙은 날이였다. 영업건으로 출장을 나갔다가 돌아선 길이였는데 뜻밖에도 복병처럼 기다리고 있던 안개와 조우했다. 너무 짙은 안개는 아니였다. 그러나 속도를 내서 달릴 수 있는 정도로 시야를 확보할 수는 없는 안개였다. 앞차 뒤꽁무니에 붙어서 낮은 속도로 달리는데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던 앞차가 갑자기 급정거했다. 남자도 급히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런데 그 순간 차체 뒤쪽에 탕 하는 충격이 가해지는 게 느껴졌다. 차들의 흐름이 워낙 완만해서 큰 충격은 아니였다. 그래도 남자는 인츰 상황파악이 되였다. 아, 뒤차가 미처 급정거하지 못하고 내 차를 들이박았구나 하는 생각이 순각적으로 들었다. 비상등을 급히 켜고 스틱을 파크위치로 밀었다. 브레이크를 걸어놓고 차문을 열었다. 뒤차 운전석에는 젊은 녀성이 놀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내릴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차량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남자의 차는 뒤쪽 범퍼가 약간 변형되고 거의 멀쩡했는데 녀자의 차가 오히려 앞쪽 왼쪽 라이트가 깨져 나가있었다. 너무 가벼운 접촉사고는 아니였다. 그러나 그 정도만으로도 다행이였다. 두 차 다 사람이 멀쩡해서 다행이였다. 뒤쪽 차량의 유리창을 두드렸다. 놀란 녀자가 눈을 올롱하게 뜨고 차 안에서 내다 올리보며 감히 유리창도 내리지 못했다. 차를 보니 새로 뽑은 차 같았다. 음, 초보운전이군. 혹시 접촉사고 경험도 처음일 수 있겠군. 남자는 자기의 초보운전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 저렇게 놀라서 차 안에서 감히 밖으로도 나오지 못하고 유리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녀자의 모습에 화가 나는 대신 오히려 재밌어졌다. 아직도 몇번 더 접촉사고를 내고 몇번 더 긁혀봐야 운전이 뭔지를 깨달을 것이였다. 남자는 소리치고 화를 낼 대신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피워올렸다. 표정과 손짓을 섞어 내 차는 괜찮고 오히려 당신의 차가 좀 찌그러진 것 같다고 말하자 그제야 유리창이 내려졌다. -상하신 데 없죠? 다행이네요. 사람이 상하지 않아서. 운전하다 나면 접촉사고 나는 거 정상이니까 놀랄 필요 없어요. 백프로 뒤에서 들이박은 차량 과실이지만 저도 무등을 켜지 않은 책임 조금 있으니까 책임 추궁 안할게요.  생각보다 예쁘장하고 섹시한 얼굴이여서 그랬을가, 남자는 접촉사고를 당하고도 오히려 대범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놀라서 얼어붙었던 녀자의 얼굴 근육이 조금 펴졌다. 도어를 열고 내려와 사고상태를 점검했다. -내 차는 범퍼 조금 찌그런든 거 보험처리할 필요 없이 직접 차량 서비스업체 찾아 손 좀 보면 되니까 걱정 마세요. 대신 그쪽 차량은 라이트 커버 하나는 교환해야 할 것 같아요. 역시 그래봤자 돈이 얼마 들지 않을 거니까 귀찮게 보험처리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얼마 되지 않는 돈 보험처리 받으려면 돈도 돈이지만 거기 들어가는 시간과 보험회사와의 신경전 더 짜증날 수 있을 거예요. -아, 네… 그때까지 녀자는 어쩔 줄 모르고 말 한 마디 못하고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여 사고 현장 모습을 둬장 사진으로 담았다. 곁에서 긴장해서 쳐다보는 녀자에게 한마디 했다. -그쪽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혹시 모르잖아요? 혹시 그쪽에서 보험처리 하려고 해도 사건 현장 사진은 필요하니까 제가 대신 찍어드리는 거예요. 필요하시면 제가 사진 보내드릴게요. 아니면 그쪽에서도 직접 사진을 찍어서 남기는 게 좋을 거예요. 이렇게 습관하는 게 나중에도 도움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호주머니에서 명함장을 한장 꺼내여 녀자에게 건네였다. -작은 접촉사고로 뒤차들 밀리게 시간 지체할 필요 없어요. 사진으로 사건 현장 증명을 남겼으니까 혹시 보험처리 할 일 있으면 련락주세요. 잘 협조해드릴게요. 책임을 회피하고 책임에서 도망치고만  싶을 과실 책임 차량 운전기사 쪽에서 먼저 련락 올 일은 없을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너무 당황해하는 녀성 운전자를 배려하는 뜻에서 명함을 건네어준 것이였다. 그리고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 이미 앞차가 멀리 앞쪽으로 움직여있어서 뻥 뚤린 길로 차를 몰았다. 그게 남자와 녀자의 첫 인연이였다. 어쩌면 고마운 안개 덕분에 자기의 생에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애인이라는 녀자를 만들게 됐고, 그건 함정 같은 것이였다. 빠지면 헤여나오기 힘든 깊은 수렁 같은 것이였다. 바람 나서 가정을 버린 아버지를 닮아 다른 녀자에게 눈길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일편단심 죽을 때까지 내 안해에게만 사랑을 주고 충성해야 한다고 결혼 전부터 자기 자신에게 약속했는데 그러나 유혹으로 녀자가 다시 나타났을 때 그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다. 자책도 했다. 처음엔 안해에게 미안해서 갈등도 많이 했다. 그러나 한번 벗은 옷은 두번 세번 더 쉽게 벗어졌다. 녀자에게 점점 더 빠져드는 자신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이젠 멈춰야 한다고 이성에 브레이크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헤여나올 수 없었다. 더 녀자의 매력에 빠져 허덕이게 되였다. 안해와 녀자 사이, 미안함과 유혹 사이… 안개 속을 부유하듯 멍한 시간이기도 했다.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는 자신의 욕망에 놀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을 바꾸게 되였다.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돌아설 길은 없다. 갈 데까지 가는 거다. 그러나 단 하나, 안해와 아이에게 상처 주지는 말자. 철저히 숨기는 길 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바람 나서 집을 나갔던 아버지를 리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조강지처 버리고 자식들 버릴 정도로 용감했던 아버지의 그 눈 먼 용기조차 리해해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저지르는 불륜은 녀자를 만나게 된 계기처럼 그냥 가정을 이룬 한 남자가 가정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우연히 저지른 작은 사고일 뿐이라고 자기 자신을 위안했다. 사랑이라는 운명의 길에 피해갈 수 없이 저지른 작은 접촉사고일 뿐이라고 말도 안되는 리유를 만들어 자신을 위안했다. 사고를 냈으면 사고 당사자들 끼리 조용히 그 사고에 책임져야 했다. 불륜을 남들에게 들켜 남들을 웃기고 가정을 파탄시키는 건 너무나 무책임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피해갈 수 없이 내버린 접촉사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둘만 아는 방법으로 처리하면 되였다. 이미 바람이 난 걸 어찌하라구,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걸 어찌하라구. 이제 보험회사 찾아가서 상대방의 차실과 책임을 따지며 요란히 공개처리하는 건 작은 접촉사고를 대형사고로 만들어버리는 못난 처리방법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아위안했다. 그렇게 안 개속에 만난 사랑, 그리고 지금 안개 속에 자기 쪽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해오는 녀자. 아버지의 실종만 아니라면 녀자의 말대로 돌아서서 녀자 쪽으로 다시 달려가고 싶어졌다. 녀자와 만나면서 지금까지 남의 눈이 무서워서 한번도 밖에서 대담히 녀자를 안고 걸어본 적도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이면 가능할 것 같았다. 오늘같이 안개가 짙은 날이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안개 속에 녀자의 손을 잡고 녀자의 허리를 안고 하늘아래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남들 눈 의식하지 않고 걸어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남자는 속으로 녀자에게 말했다. 나도 네 손 꼬옥 쥐고 거닐고 싶어. 하늘이 허락한다면 네 손 꼬옥 쥐고 이 세상 끝까지 가고 싶어. 그러나 그게 안되잖아? 안개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들 눈이잖아? 우리 서로의 가정은 지켜주기로 했잖아? 남자는 전화 저쪽의 녀자에게 대답했다. -나도 오늘 너무 아쉬워. 그러나 오늘은 정말 안돼. 꼭 집에 돌아가야 돼. -아, 난 너무 당신과 안개속 사랑 진하게 해보고픈데. 아쉽지만 방법 없지 뭐. 그런데 당신 안개 속 운전 괜찮아요? -걱정 마. 나 안개 속에 녀자 사냥하는 재간 있잖아? 오늘 당신보다 백배 아름다운 녀자가 내 차를 박아올지 알게 뭐야… 롱담을 하고 껄껄 웃었다. -그러기만 해봐요. 내가 가만 두나. 당신 가슴털 면도기로 다 밀어버릴 거야. 녀자도 전화기 저쪽에서 호호 웃었다. -꼭 안전운전해야 되여요. 안전을 부탁해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녁식사 맛있게 해 드시고… 오늘 땀 많이 흘렸는데… 남자는 롱담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안해에게 전화를 다시 넣었다. -어때? 아버지를 본 사람 있대? -본 사람 더러 있어요. 그냥 쭉 동네 밖 큰길로 내려간 것 같아요. 저도 지금 큰길 쪽으로 가고 있어요. -거기도 안개가 많이 꼈어? -아니요, 전혀 안개가 없는데요. -그럼 다행이네. 여긴 지금 갑자기 안개가 심해. 길이 많이 밀려. 고속도로도 봉쇄되고 국도도 거의 정체상태야. 많이 늦어질 것 같으니까 급해 말고 천천히 찾아봐. 살아있는 사람이 갑자기 하늘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누구 눈에든 띌 거니까 좀 더 찾아보고 못 찾으면 파출소에도 신고하든지 해요. 혼자 헤매지 말고. 한숨이 터져나갔다. 남자는 이게 도대체 무슨 황당한 상황인지 현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왜 오늘 기어코 녀자를 보러 이 도시로 왔고, 이럴 줄 알았으면 왜 아버지를 하루 일찍 더 양로원으로 보내지 못했던가. 아니, 왜 동생의 말처럼 처음부터 양로원으로 모셔가지 않고 집으로 모셔왔던가. 이런 상황을 만들려고 내가 그런 효도를 자처한 것이였을가. 이런 상황에 안해를 혼자 고생시키려고 이렇게 그냥 녀자를 쫓아 이 먼곳까지 운전해 달리는 것일가. 아까까지만 해도 녀자와 뒤엉켜 열락으로 헐떡이였던건 뭐고 지금 이렇게 안개에 갇혀 굼벵이처럼 기고 있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앞이 안 보이는 안개처럼 지금 상황이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시야는 이제 불과 3~4메터만 확보 가능했다. 헤드라이터를 다 켰는데도.   4. 갓길에 잠간 멈춰서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라 아직 어둠이 내려앉을 시간이 아닌데 태양빛의 통과도 차단해버린 안개 때문에 앞은 밤처럼 캄캄했다. 이렇게 짙은 안개를 조우하기는 운전하면서 처음이였다. 이 짙은 안개 속을 탈출할 길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차선도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달리는 차들도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시야는 이제 1메터 확보도 어려웠다. 앞차의 미등을 놓치면 완전 까만 세상이였다. 그 차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으려고 조금만 엑셀을 살짝 밟으면 안개에 둘러싸인 빨간색 미등이 금방 코앞에 들이닥쳤다. 자칫하면 앞차 뒤꽁무니를 들이박고 충돌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브레이크를 급히 밟을 수도 없었다. 역시 남자의 차 미등을 방금 코앞에 붙잡고 뒤쫓던 차가 미처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고 쾅 하고 충돌해올 수 있기 때문이였다. 남자는 앞차의 미등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개 속에 귀신불처럼 몽롱하게 흔들리는 빨간 색을 향해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놓치면 안되였다. 동서남북이 구분되지 않고 앞뒤 좌우 방향감각이 다 날아나고 없었다. 완전 안개의 바다 속을 헤매는 기분이였다. 눈 감고 미궁을 헤매는 것이면 이 안개 속의 운전 만큼이나 어려울 것인가. 앞쪽 차의 미등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달린 지 거의 한시간… 너무 눈에 힘을 주고 부릅뜨고 있었는지 눈알이 막 알알하게 아파왔다. 그새 안해에게서 전화가 와서 아버지가 차들이 쌩쌩 달리는 차도를 건너 위험하게 길 저쪽으로 건너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전해왔다. 그리고는 다른 동선 파악이 더 안된다고 했다. 남자는 안해더러 더 찾지 말고 파출소에 신고하고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파출소에서 련락이 오면 알려달라고 했다. 안해와 통화하다가 신경줄을 잠간 놓는 바람에 앞차를 깜빡 놓칠 번해서 식은땀이 쫙 흘렀다. 아버지가 실종된 마당에 나까지 잃어버려선 안된다고 남자는 자신에게 웨쳤다.남자는 블랙홀 같은 이 안개 속에 자칫 자신이 빨려들어가 실종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개 속에 흔적없이 안개처럼 사라질 수도 있는 존재. 안개처럼 그렇게 사라지면 세상은 어데 가서 나를 찾을 것인가. 남자는 안개가 두려웠다. 이 안개의 깊은 함정이 두려웠다. 빨리 이 안개의 포위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게 제일 급했다. 남자는 숨도 바로 못내쉬며 눈을 부릅뜬 채 앞차의 미등만 노려봤다. 그때 남자의 귀가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짙은 안개 속에서는 안개를 헤치며 달리려 하지 말고 길옆에 차를 세우고 안개가 좀 걷혀지기를 기다려야 하는 거야. 아버지는 그 세월 흔치 않던 트럭운전수였다. 어느 날인가 차에 남자랑 남자의 엄마랑 태우고 산 너머 대처로 나가셨다. 산 너머 대처에 큰 시장이 열리는 날이였다. 남자에게 새 가방과 새 신발을 사주고 남자 엄마에게 고운 머리수건도 사주었다. 그리고 남자의 동생에게도 선물로 남자의 것과 비슷한 새 가방과 새 신발을 사서 차에 실었다. 점심에 세식구가 함께 음식점에 들어가서 맛있는 료리를 시켜 먹었다. 남자는 그 날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오후가 되여 돌아올 때 산자락에 이르렀을 때 그 산 아래 강처럼 넓게 펼쳐진 저수지에서 짙은 안개가 피여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모는 트럭이 오불꼬불 산길을 올리 톺기 시작할 때 안개들은 벌써 산을 두텁게 에워싸고 있었다. 아침에 시장으로 나올 때 롱담도 잘하고 노래도 성수나게 불러 엄마와 남자를 깔깔 웃게 만들고 신나게 해주던 아버지는 얼굴근육에 잔뜩 힘을 주고 앞이 잘 안 보이는 유리창 앞만 긴장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엄마와 남자도 아버지의 그 눈빛과 표정에 압도되여 숨 쉬기 힘들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차를 잘 몰았다. 드렁드렁 그냥 용을 쓰며 차는 굽이굽이 몇굽이를 돌아 끝내 산등성이로 올라섰다. 그때 아버지는 차를 벼랑쪽이 아닌 바위쪽으로 세웠다. 차 안에서 내다보는 안개는 장관이였다. 룡처럼 꿈틀꿈틀 치솟으며 쫙 산을 덮고 올라오는 안개가 다 내려다 보였다. 엄마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여보, 이러다 우리 안개에 완전히 갇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거 아니예요? -걱정 마, 안개는 아무리 짙어도 흩어지게 되여있어. 이런 짙은 안개 속에서는 안개를 헤치며 달리려 하지 말고 오히려 길옆에 차를 세우고 안개가 좀 걷혀지기를 차분히 기다려야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아버지는 남자에게 아까 시장에서 산 과자를 봉지 채로 내밀었다. -먹거라. 한창 먹을 때인데 많이 먹고 쭉쭉 키가 커야지. 남자는 그 과자가 맛있어서 안개가 무섭다는 생각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때 그 기억이 지금 이 안개 속에서 되살아나는 게 신기했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귀가에 되살아난 아버지의 말대로 남자는 차를 갓길에 세우려고 눈길을 오른쪽으로 주었다. 이미 많은 차들이 갓길에 주차해 서있는 것이 안개의 벽을 뚫고 눈에 띄였다. 너무 짙은 안개에 더 달릴 엄두를 못 내고 아예 길가에 눌러앉아버린 차들은 적지 않았다. 아버지의 운전경험의 말은 옳았다. 이럴 땐 갓길에 차를 세우고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현명할지 몰랐다. 남자는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갓길 쪽으로 조심히 방향을 틀었다. 그러면서도 앞차의 미등을 놓치면 안되였다. 혹시 갓길 옆의 가드를 들이박을가봐 갓길에 차를 들이대는 것도 등에 땀이 나게 조심스러웠다.   5. 안개밭 벗어나니 당신이 기다리고 계셨네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일가, 남자는 아버지가 지팽이를 짚고 고속도로 우 갓길로 허청허청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위험해요, 아버지. 고속도로에 올라서면 어떡해요?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씨익 웃었다. -괜찮다. 니 애비 지금까지 남들이 걷지 않는 위험한 길 골라 올라서 걸은 게 아니냐. 그 길보단 지금 이 길이 훨씬 더 안전하고 너르고 편하구나. 아버지는 이제 지팽이도 버리고 씨잉씨잉 걷고 있었다. -위험해요, 아버지. 비켜요. 남자는 아버지를 갓길에서도 밀어내고 고속도로에서 내려서게 하려고 급히 아버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이 두 발로 달리는 게 아니라 차우에서 운전하고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자기 몸 대신 차가 아버지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남자는 깜짝 놀랐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바로 코앞에 아버지를 들이박으려는 순간 차가 멈춰섰다. 아버지가 뒤를 다시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이젠 괜찮다. 나 살 만큼 살았으니 니도 이젠 이 애비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직접 나를 이 길에서 밀어내라. 남자가 창밖으로 내다보니 고속도로 밖은 깎아지른 벼랑이였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어요, 아버지. 어서 내 차에 올라타요. 왕 하고 울음이 터졌다. 그때 눈이 떠졌다.   참 꿈도 황당하네. 꿈속이지만 죽음의 길에 오른 듯 그렇게 씩씩하게 걷는 아버지를 죽지 말라고 웨치며 눈물을 흘린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이 정말 꿈속에서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 느꼈다. 어깨까지 떨며 미세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자기의 귀에도 들렸다. 남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고 눈을 비볐다. 눈물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언제 잠들었던 것일가. 이 위험한 상황에 잠이라니? 아까 낮에 녀자와 너무 심한 사랑을 나눠서 몸이 많이 피로해졌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잠간 눈을 붙인 것 같은데 기적같이 안개가 많이 걷혀있었다. 어느새 시야가 이삼십메터 확보 가능하게 안개가 걷혀있었다. 남자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길에 올라야 했다. 전화를 보니 그새 미확인 전화가 몇개나 들어와 있었다. 녀자와 안해와 남동생 그리고 회사에서 온 전화였다. 남자는 옆에 놓인 물병을 열어 목을 적셨다. 그리고 일일이 전화해 상황 확인을 했다. 아버지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었다. 동생이 도착해서 안해도 더 실종된 시아버지 찾기를 포기하고 함께 파출소에 가서 신고하고 집에 들어갔단다. 남자는 지금 안개가 걷히고 있으니 다시 길에 오르마 알려주고 차를 왼쪽으로 틀어 서서히 차에 속도를 올렸다. 방금까지 이삼십메터 시야로 걷혀있던 안개가 어둠이 장막으로 내려앉을 때처럼 걷히는 속도도 빨랐다. 드디여 가로등이 환히 켜진 교차로가 저 앞에 보였다. 안개는 이미 거의 다 걷혀진 상태였다.   남자는 집 쪽으로 향하는 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 남자는 길옆 가로등 밑에 지팽이를 짚고 서있는 어떤 그림자를 발견했다. 아버지다! 남자의 직감이 웨쳤다. 아버지라니? 집에서 10키로는 떨어진 곳인데, 집안에서는 혼자서 화장실까지 걸어가는 것도 불편한 몸인데. 남자는 다시 가로등에 비쳐 실루엣으로 보이는 그림자의 얼굴을 보려고 차를 그 그림자 쪽으로 서서히 몰았다. 아버지가 옳았다. 남자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아버지! 하고 소리치며 차문을 열고 뛰여내렸다. -아들아, 니가 살아 돌아왔구나. 돌아왔음 됐다. 그 칠흙 같은 안개 속을 헤매지 않고 잘 헤치고 나와서 다행이다. 고맙다, 아들아. 한손으로 지팽이를 짚은 아버지가 다른 한팔을 벌렸다. 남자는 달려가서 그 팔에 안기듯 두 팔로 아버지를 안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여기까지 나왔어요? 아버지가 어떻게 내가 안개 속을 헤맨 걸 알았어요? 아버지가 어떻게 내가 이 길을 달릴 줄 알았어요? -내 다 안다, 아들아. 내가 니 애비잖냐. 니가 내 아들이잖냐… 아버지의 얼굴에서 눈물이 좔좔 흐르고 있었다. 남자는 기적 같은 이 현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자, 타요. 집에서 다 기다리고 있어요. 민혁이 그 녀석도 색시 데리고 집에 와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어요.   민혁은 동생의 이름이였다. -안다, 내 다 안다. 내 지은 죄 많다. 아버지는 흐득흐득 흐느끼며 남자의 부축을 받고 차에 올랐다. 남자는 급히 안해의 번호를 눌렀다. -여보, 아버지를 찾았어. 아버지 내 마중을 나오셨어. 길에서 만났어. 이십분 전에 도착해. -네, 뭐라구요? 안해의 놀란 목소리가 귀청을 때려왔다. 남자는 팔을 뻗어 아버지의 안전벨트를 조여줬다. -자, 아버지, 이젠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 집으로. 남자는 그 순간 눈물이 터져나오려 하는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출처:2017 제3호
17    [단편]겨울낚시1 댓글:  조회:212  추천:0  2019-07-17
겨울낚시(1) 조광명   1.  ‘묻지 마’ 겨울데이트 남자는 차 안에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차에서 내려 트렁크 뒤쪽으로 가 서있었다. 커다란 벤츠 SUV 차는 뒤꽁무니로 허연 김을 기세 좋게 토해내고 있었다. 그 흰 김이  남자의 청바지 아래부분에 부딪쳤다가 우로 연기처럼 피여오르며 바람에 휘휘 휘날려 흩어지는 것이 꼭 영화 속 어느 한 장면처럼 보여서 순간 문자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도 그 영화의 남자주인공처럼 꽤 멋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두 다리로 건강하게 서있는 남자가 부러웠다. 남자는 하얀색 두툼한 패딩을 입고 있었다. 그 나이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환한 색이 오히려 너무 생기차게 보기 좋았다. 눈에 맞혀오는 환한 옷색갈이 문자의 기분까지도 밝혀주는 것 같았다. 그 눈 시린 하얀색 옷에 비해 오히려 짙은 회색 등산복을 입고 검은색 두툼한 캐시미어 머플러까지 두른 자신의 옷차림이 너무 생기 없는 색갈로 둔중해 보이는 것이 아닐가 살짝 로파심이 들어 문자는 저도 몰래 고개를 숙여 머플러를 다시 다듬었다. 어제 남자가 전화 와서 오늘 옷을 최대한 가장 두터운 것으로 골라 입고 신발도 가장 따스한 것으로 골라 신으라고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서 든든하게 차려입은 겨울 옷차림이였다. 아직 남자와 눈이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괜히 얼굴이 약간 화끈거려나며 가슴 속에서 콩콩 작은 강아지 한마리가 뛰노는 것 같았다. 아 뭐 나쁜 사람 만나는 것도 아니고 어데 나쁜 일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그냥 잘 알고 지내던 동네 오빠를 한번 편하게 만나는 것 뿐인데. 급히 속으로 변명을 찾는 자신을 발견하며 이제라도 돌아서서 다시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게 옳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잠간 스쳤다. 그러나 문자는 자신의 그런 생각에 강하게 반기를 들고 뭐가 어때서? 괜찮아. 하고 더 강하게 자신의 오늘 외출을 두둔해 나서며 남자 쪽으로 걸어나가도록 두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주는 힘을 느꼈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문자를 발견한 남자의 눈빛이 금세 부드러워지며 얼어서 굳어졌을 얼굴이 환한 미소로 활짝 펴졌다. -생각보다 날씨가 많이 춥네. 그래도 괜찮지? 추운 날 불러낸 것이 미안하다는 듯 남자는 사과의 뜻부터 전해왔다. -아니요, 시원하고 좋네요. 문자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 청량한 겨울하늘의 공기 만큼이나 시원하게 울려나오는데 움찔 놀랐다. 나도 연기기질이 있나 봐. 이렇게 씩씩한 체 대답할 줄도 다 알다니. 문자는 그런 자신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남자는 차 앞쪽 오른쪽 도어를 미리 열고 문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려줬다. 문자의 몸뚱이가 그래도 꽤 사뿐하게 올라앉기를 기다려 오른손을 뻗어 직접 안전벨트를 당겨 핸드백을 들지 않은 문자의 왼손에 쥐여주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꽤 자상한 남자네… 집 실내처럼 이미 충분히 덥혀져있는 차 안의 공기가 방금 잠간 찬바람에 움츠러들려 했던 얼굴 근육을 다시 편안하게 간질여 펴주었다. 문을 닫아주고 차 앞쪽으로 돌아 운전석에 올라탄 남자가 자기의 몸에 안전벨트를 감고 운전대를 잡으며 어떤 버튼을 살짝 터치하자 차는 미끄러지듯 앞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지금껏 문자가 앉아봤던 차들과 다른 조작방식으로 출발하는 차였다. 그제야 차 실내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차에 대해서 별로 연구가 없어서 잘 모르긴 해도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무척 고급스러웠다. 좋긴 좋은 차였다. 이 작은 시가지에 이런 차량이 몇대 되지 않을 정도로 비싸고 성능 좋은 호화급 차량이라는 건 예전에 동창들 모임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남자의 부인은 문자네 한 학과 한 학급 동창이였다. 단연 그래서 이 차량도 한때 동창들 입에 회자되였던 적이 있었다. 작은 시가지이지만 그래도 집값이 웬간히 오른 이 도시에 웬만한 아빠트 두채 값보다도 더 비싼 자가용을 굴리는 남편을 둔 동창을 녀자동창들은 부러움 반 질투 반 담아 입에 떠올리군 했었다. -자 출발합니다. 어데로 모실가요? 차가 문자네 동네를 벗어나 도로에 들어서자 남자가 옆에 앉은 문자를 돌아보며 경어체로 익살스럽게 물어왔다. 그제야 문자는 어제 남자가 전화 왔을 때 오늘 목적지에 관해 물어오지도 알려주지도 않고 무작정 오늘 낮시간을 몇시간 빌려도 괜찮냐고만 물어왔던 걸 떠올렸다. 남자의 물음에 작은 소리로 네,  괜찮아요. 하고 대답하기만 했지 어데로 가서 뭘 할 건지는 묻지 않았던 자신을 그제야 떠올리며 그렇게 쉽게 대답해버린 자기의 어떤 내면을 들킨 것 같아 괜히 약간 어색해났다. 어제는 왜 묻지 못했을가, 무슨 일이냐고, 어데로 갈 거냐고… 당연히 물어야 할 것을 왜 묻지 못하고 그리 쉽게 대답했을가. 왜 그리 못나게 남자가 일방적으로 약속해오는 대로 “좋아요”만 대답했댔을가. 쉬운 녀자처럼. 기다렸던 녀자처럼.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데 괜히 부끄러워지며 뭐라고 대꾸할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문자의 입에서는 어느새 다른 엉뚱한 대답이 부끄러움이나 궁색함 같은 것을 하나도 담지 않은 목소리로 위장되여 튀여나가고 있었다. -그니까,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궁금했고 그 궁금함이 지금 이 순간 더 궁금해져서 꽤나 재밌다는 어투였다. 추운 날이지만 따스하게 미리 가열되여있은 차 시트의 온기가 엉덩이로부터 노긋하게 온몸으로 올리퍼지기 시작해서일가, 마음도 함께 많이 느긋해졌다.   -그럼 추운 날이니까 더 추운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남자는 이번에도 말끝에 경어체를 사용하며 아직은 비밀을 채 털어놓을 수 없다는 어투로 신비스럽게 내뱉았다. 몸이 등받이 쪽으로 밀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 차는 이미 저만치 앞에 달리던 차를 왼쪽으로 추월해 앞으로 튕겨나가고 있었다. 이틀 전 눈이 적지 않게 내렸는데 도심 속 아스팔트길에는 눈이 쌓여있지 않았다. 차량이 별로 많지 않아 뻥 잘 뚫린 포장도로가 예전보다 많이 넓어진 것처럼 앞쪽 시야가 확 트이여서 문자의 가슴도 시원히 열리는 것 같았다. 시내 중심가를 지나 먹거리골목도 지나고 다시 외곽으로 뻗어나가는 한적한 도로로 차가 접어들었을 때 문자는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데로 가는 거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문자의 의중을 읽었는지 왼손을 핸들에 올려놓은 채 느긋하게 앞을 보며 운전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문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멀지 않아. 시내를 벗어났으니까 이제 20분 쯤 더 달리면 도착해. 역시 목적지가 어딘가는 말해주지 않았다. 이전처럼 돌아가 편하게 말을 놓고 이야기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문자도 고개를 끄덕여 웃어주었다. 무슨 꿍꿍이속이 이리도 깊지? 아무려나… 오늘은 그냥 바퀴 따라 굴러가는 인생이 되는가 보다.   몰라도 좋았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도 목적지를 알고 달려온 게 아니였다. 잘되겠지, 힘든 시간은 끝나겠지, 더 나아지겠지, 태여났으니까, 사는 거니까… 그냥 그렇게 살다 보니 웃는 날도 많고 우는 날도 더러 있으면서 지금 이때까지 벌써 60년 넘게 살아오고 있었다. 이제 더 살아가야 할 나머지 인생은 어떤 것일가는 더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 궁금해 한다고 바뀌고 해결될 건 하나도 없었다. 하물며 옆에 앉아 차를 몰고 있는 남자는 문자보다도 인생을 몇년은 더 살아온 인생 선배였다. 지금 차 안에 두사람중 한사람은 목적지를 모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중 한사람은 목적지를 잘 알아 헛길 달리지 않고 그 목적지를 향해 곧장 잘 달려가고 있지 않는가. 함께 길에 오른 이상 믿고 함께 달려가주면 될 것이였다. 그 상대가 누구든. 지금 달리는 것도 오늘의 삶이고 도착해 내릴 곳 역시 오늘의 삶이 펼쳐지는 곳일 것이다. 그것만 믿으면 되였다. -오빠랑 함께 진짜 오랜만이네. -그래, 한 40년 되였지? 어렸을 적 문자와 남자는 원래 한 동네 아래웃집에 살았었다. 남자는 문자의 오빠 친구였고 동네서 키꼴이 제일 장대하고 덩치도 우람져서 중학교 때 현성에 있는 체육학교에 권투 특기생으로 뽑혀갔다. 후에 문자네가 현성으로 이사하면서 주말이면 늘 문자네 집으로 친구를 찾아 놀러 왔고, 그때 문자 눈에 남자는 참으로 다부지고 훤칠하게 멋진 오빠였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한때 잠간 남자답게 어깨가 떡 벌어진 오빠 친구를 작은 가슴 활랑이며 쳐다보기도 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제부터였던가 대학교에 붙어서 지금의 남편이 된 한 학급의 남학생과 련애를 시작하면서 그렇게 덩치 크고 멋졌던 오빠의 친구는 문자의 가슴에서 잠간 들어오려 했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그냥 그렇게 증발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되였겠죠…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근데 문자 너, 어렸을 적 모습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거 알고 있어? -그래요? 간직하고 있어선 뭘해요? 이젠 늙어서 주름살 주글주글한 로파가 다 되여가는데. 저도 몰래 고개를 기웃해 앞쪽 천정에 매달려있는 백미러에 눈길이 가며 그 속에 비쳐진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였다. -꼭 혼자 늙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그럼 나는 뭐 안 늙냐. 하긴 우리 다 늙었지. 아니야, 그래도 넌 그냥 어릴 때 귀여운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귀여웠던가 내가… 문자는 어렸을 적처럼 지금도 그냥 귀엽다는 남자의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차는 이제 차량이 다닌 바퀴자욱 두줄로만 흙모래가 드러나 있고 다른 곳은 흰눈으로 덮여 있는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2.  얼음호수 우에 작은 궁전 하나 남자가 차를 세운 곳은 그렇게 몇분 달리던 비포장도로에서도 오른쪽으로 새여나간 좁은 흙길로 몇분 더 달려서 도착한 황량한 들판 같은 곳이였다. -자,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남자가 버튼을 눌러 안전벨트를 풀며 다시 출발할 때의 그 익살궂은 표정을 얼굴에 피워올렸다. 계기판 아래 수납케이스를 열고 그 안에서 두툼한 장갑을 꺼내여 문자에게 넘겨주었다. -끼고 온 그 장갑, 얇아서 손이 시려 안될 거야. 그 우에 이걸 한층 더 끼면 많이 따스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어떤 버튼 하나를 눌렀다. 뒤쪽에서부터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들어오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더니 차량 백도어가 자동으로 우로 올라가고 있었다. 뭐야, 이 황량한 벌판에… 이 추운 날… 뭘하러… 의문이 들었으나 묻지 않고 머플러를 꼭 다시 여몄다. 그러건 말건 남자는 차에서 내려 차 뒤쪽으로 가더니 미리 실어놓았던 배낭 같은 커다란 짐 두개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남자가 마지막으로 손에 든 건 끝이 창끝처럼 뾰족하게 날이 서있는 길다란 금속체였다. 어렸을 적 많이 보아왔던 물건이였다. 어렸을 적 집에도 저런 게 하나 있었던 것 같았다. 거의 자기 손목 만큼 실하고 길이가 자기 키보다도 더 길게 큰 그 무거운 쇠몽둥이 같은 것을 아버지가 가뿐하게 손에 들고 겨울 뒤간에 얼어붙은 배설물들이랑 쾅쾅 곡괭이질 하듯 두엄장처럼 떼여내군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걸 뭐라 하던가? 토박이말로 빙창이라고 했던가 쇠창이라고 했던가. 문자는 그냥 쇠창이라고 불렀던 것 같이 기억되였다. 차키에 있는 버튼을 눌러 백도어를 잠근 남자가 차에서 내려 옆에 다가오는 문자의 손에 그 쇠창을 넘겨주었다. -잠간 이걸 들어줘. 배낭을 두개 량손에 들더니 옆에 약간 올리솟은 둔덕 우로 올라섰다. -눈이 신발안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 내가 디뎠던 발자욱 그대로 밟고 따라와. 그렇게 성큼성큼 걷는 남자 뒤를 문자는 코 꿰여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졸졸 따라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추운 날, 눈 덮인 황야. 인적 없는 이 황량한 들판을 걷는 두 늙은 남녀의 모습이라니… 문자는 스스로도 지금의 이 상황이 꼭 극중의 어느 한 장면인 것 같아서 못내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몇십메터 쯤 걷자 눈에 덮였지만 그래도 번뜩번뜩 얼음날들이 보이는 겨울호수가 왼켠에 나타났다. 남자는 그 호수를 향해 낮은 언덕을 내려갔다. 아… 문자는 이제야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혹시 저 겨울호수에 얼음구멍을 내고 산소를 찾아 그 구멍으로 몰려드는 물고기들을 그물로 건지러 온 것일 수도 있었다. 어렸을 적 집에서 학교를 오가는 길옆에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는 그 호수 우에서 얼음지치기도 놀고 썰매도 타군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얼어서 잘 다져진 흙길로 걷지 않고 일부러 그 호수우를 가로질러 걸으며 학교를 가는 아침이면 오빠는 호수 옆 마른 풀숲에 숨겨두었던 커다란 돌멩이를 찾아들고 남들이 잘 다니지 않는 호수 썩 안 쪽으로 걸어들어가 두텁게 언 얼음을 쾅쾅 두드려 댔다. 열번, 스무번 찧었던 곳을 자꾸 찧으면 얼음에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을 둘레 두뼘 쯤 되게 더 넓혀 뚫고 오빠는 맨손으로 그 얼음구멍에 떠있는 얼음조각들을 건져서 눈밭에 던졌다. 그 때 쯤이면 개털모자를 쓴 오빠의 이마에서 흰 김이 몰몰 솟아올랐다. 다시 그 돌멩이를 마른 풀숲에 감추고 돌아와서 문자 손에 들려 있던 책가방을 받아 어깨에 메면서 오빠는 성취감이 넘치는 뿌듯한 목소리로 말하군 했다. -저녁에 돌아올 때 보면 저 구멍에 물고기들이 잔뜩 얼어붙어있을 거야. 그거면 오늘저녁 맛있는 반찬이 돼. 정말 그랬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얼음구멍을 찾아가 보면 신기하게도 손바닥 만한 붕어랑 버들치들이 주둥이를 우로 향하고 벌린 채 다닥다닥 얼어붙어있었다. 꼭마치 오빠가 그 얼음구멍에 대고 물고기들아 이 곳에 집합해라 하는 주문을 걸어놓은 듯이 열마리, 스무마리도 더 되게 촘촘히 얼어붙어있던 물고기들. 낮 사이에는 밤 사이보다 얼음이 덜 얼어붙어 아침때보다 얼음을 까는 돌멩이질이 훨씬 쉬웠다. 오빠가 손을 넣어 건져서 눈밭에 던지는 물고기들을 주어서 더러 아직 대가리에 붙어있는 얼음을 털고 탁탁 눈까지 털어 미리 준비했던 주머니에 주어담는 건 항상 문자의 몫이였다. 잊고 있었던 그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이 문자는 신기했다. 그 때 그 오빠는 반년 전에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고 지금 문자 앞에는 그 오빠의 장례식장에서 몇십년 만에 다시 얼굴을 대했던 어릴 적 동네 오빠가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다. 호수 중앙쯤 되는 곳에 이르자 남자는 발걸음을 멈췄다. 바람에 날려 눈이 아직 둥지를 틀지 못했는지 투명하게 얼음이 드러나 있는 곳이였다. 오랜만에 밟아보는 투명한 얼음이였다. 미끌어져 넘어질가 몸을 낮춰 조심하며 문자는 얼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얼음 아래로 썩어가고 있는 듯 생기를 잃고 축 처진 수초들이 보이고 그 수초들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검은색 흙모래 바닥이 다 내려다 보였다. 밑바닥이 보일 정도로 물이 얼마 없이 얕은 호수였다. -자, 도착했습니다. -겨울 물고기잡이 하려구요? -그래. 이젠 눈치챘구나. 날씨가 좀 춥긴 하지만 오랜만에 재밌지 않겠어? -이렇게 얕은 물에 물고기들이 있겠어요? -옛날엔 호수마다 물이 넘쳤는데 지금은 시골에도 물이 많이 줄어서인지 깊은 호수가 별로 없어. 얕아도 물이니까 물고기들은 놀고 있겠지 뭐. 설마 다 얼어죽기야 했겠어?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더니 그중 한 배낭을 열고 그 안에서 잘 접힌 오렌지색 천 한다발을 꺼냈다. 그리고 세뼘 쯤 길이로 꺾어 한웅큼 묶어 담고 있던 새끼손가락 굵기의 쇠줄토막 같은 것도 꺼내들었다. -문자 너 춥겠는데 텐트부터 치자. 남자는 그 오렌지색 천들을 펼쳐 땅에 펴고 꺾어져 있던 쇠줄토막 같은 것을 펴서 한데 이어 길게 만들었다. 문자가 옆에서 거들자 금방 투명한 비닐창문까지 달린 텐트가 완성되였다. 눈 덮인 얼음강판 우에 오렌지색 작은 ‘집’이 생겨났다. 남자는 그 안에 두툼한 방석까지 넣어주었다. -자, 우리 문자녀사님을 이 바람막이 겨울궁전 안으로 모십니다. 오른손으로 지퍼가 달린 ‘앞문’을 들어 열고 어서 안으로 드세요 하는 포즈를 취했다. 남자의 그 나이에 걸맞지 않는 익살스런 행동이 재밌고 우스웠으나 문자는 선뜻 그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색했다. 아무 인적 없는 이 허허벌판에 늙은 몸이지만 그러나 달랑 남녀 단둘인데 잠간새 만들어진 ‘집’ 그리고 녀자더러 그 집안으로 들어가라는 남자, 들어가면 꼼짝없이 잡히고 말 신세가 되고 만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던 건 아직 마음속에 녀자로서의 방어본능이 조금이라도 남아있기 때문이였을가. 아직 내게 남자를 찌를 가시 같은 것이 남아있기나 한 걸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안 들어가겠다고 피해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서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문자를 보며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들어가면 범에게 잡혀 먹힐가봐 겁나셨구나. 호랑이래도 이젠 이 빠진 호랑이니까 무서워 마세요. 호랑이굴 아니니까 걱정 말고 어서 들어가세요.   문자의 마음을 다 읽고 있다는 듯 골려주었다. 그 호탕한 웃음과 롱담은 문자의 어색함을 풀어주는 묘한 전염성을 띠고 있었다. 문자도 덩달아 웃을 수 있어 좋았다. -아니요, 왔으면 함께 움직여야죠. 나도 겨울고기 어떻게 잡는지 알아요.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고 문자는 명랑한 목소리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목소리로 자신을 해방시키자 괜히 기분이 들떠지며 진짜로 방금 전까지도 예상 못했던 겨울 물고기잡이에 문자도 이젠 적극적으로 참여해 즐기고 싶어졌다. 참으로 몇십년 만인가. 추워서 손발이 시리고 코등이 얼어들고 머리에 두른 수건에 흰 성에가 두툼히 앉아도 즐겁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겨울 물고기잡이.   -아직은 문자가 할 일이 없으니까 그냥 들어가 앉아있어. 옷 속으로 한기가 배여들면 추우니까 아직 몸이 추워지기 전에 어서 들어가. 달래듯 문자의 어깨를 다독여 텐트 안으로 밀어넣었다. 별로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 같았는데 두겹으로 만든 것이 튼튼한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는지 텐트 내부는 생각보다 바람기 한점 없이 아늑했다. 찬바람이 직접 얼굴을 덮쳐오지 않고 옷 속으로 파고들지 않아 좋았다. 문자가 들어가 앉자 남자는 다른 한 배낭에서 담요 하나까지 꺼내여 문자의 무릎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젤리 같은 내용물이 들어있는 손바닥 크기의 비닐 포장물을 두개 꺼내더니 문자의 손에 쥐여주었다. -핫팩이야. 두 손으로 힘주어 주무르면 금방 따스해 날 거야. 그걸로 얼굴도 덥히고 손도 덥히고 해. 난 얼음구멍을 끌게.   남자는 문자가 눈판 우에 내려놓은 쇠창을 주어들더니 텐트 앞 둬메터 쯤 되는 곳의 얼음을 묘준하고 높이 들었다 힘있게 내리박기 시작했다. 탕, 탕… 창끝이 얼음을 내리찍을 때마다 호수를 두텁게 덮은 얼음 전체가 다 꿈틀꿈틀 놀라 잠에서 깨는 듯 쩌렁쩌렁 청청-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크게 울려퍼졌다. 문자는 남자가 알려준 대로 핫팩을 두 손 안에 주물렀다. 진짜 금방 따스해 났다. 세상에 신기하게… 별난 게 다 있었다. 문자는 그 핫팩을 얼굴에 댔다. 따스한 온기가 금방 가슴 속에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커다란 덩치대로라면 그리고 한때 주먹이 세기로 소문났던 남자로 보면 너무나 독단적이고 데면데면할 것 같은데 답지 않게 너무나 자상한 남자였다. 문자의 의사 같은 건 묻지도 않고 행선지를 혼자 정하고 오는 길 내내 알려주지도 않고 이 황야의 얼음판 한가운데 훌 ‘던져놓은’ 건 좀 독단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독단’도 문자에게 뜻밖의 놀라움을 선사하기 위한 깜짝이벤트 내용으로서의 준비된 ‘잔꾀’였다면 충분히 그 ‘독단’에 속으로 박수를 보내줄 만했다. 문자는 그 독단으로 이렇게 자신이 겨울텐트 안에 방석 깔고 담요를 덮고 앉아 예전에 누려보지 못했던 ‘호강’을 누리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설화 속에 나오는 백설공주인들 이런 호강을 누려보았을가. 실감이 나지 않아 혹시 자신이 지금 비현실 속에 들어와 앉아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문자 앞에 두 다리를 튼실하게 벌리고 우뚝 서서 쇠창으로 얼음을 힘차게 내리찍고 있는 남자는 문자에게 이 모든 것이 믿어도 좋은 현실진행형임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남자의 두 다리가 지금 이 호수 우의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처럼 튼튼하게 보여 너무 부러웠다. 드디여 남자의 쇠창이 두터운 얼음층을 뚫고 구멍을 내기 시작했는지 남자는 다시 허리를 숙여 가방에서 그물조리를 꺼내들었다. 그 그물조리에 방금 깬 얼음들을 담아 건져 옆의 흰눈 우에 부어 던졌다. -그 정도 크면 이젠 됐지 않아요? 앉아있기 심심해진 문자의 입에서 ‘잔소리’가 나가기 시작했다. -그치? 이 정도면 되겠지? -오빠가 힘들면 내가 도와드려요? -네가? 하하하, 쇠창이 배 끌어안고 웃다가 부러지고 말겠다. 남자가 쇠창을 지팽이처럼 짚고 서서 문자를 내려다 보며 껄껄 웃었다. 허연 입김이 남자의 입에서 연기처럼 피여올랐다. 다시 쇠창을 들어 몇번 힘차게 내리찍더니 남자도 힘들었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쇠창을 옆에 던졌다. -고기들이 안에 노는 게 보여요? -아니, 아직 먹이를 던져주지 않았는데 벌써 모이겠어? -먹이를 던져줘야 모여요? -그럼. 먹이를 안 주는데 고기들이 왜 모여? 먼저 뭔가를 줘야지. 고기들도 인간들과 꼭같애. 공짜에 약해요. 남자는 높임말과 낮춤말을 맞춤하게 잘 섞어 전혀 어색함 없이 사용했다. 말을 하며 남자는 텐트 쪽으로 걸어와 텐트 옆에 눕혀놓았던 배낭에서 비닐봉지 하나를 찾아서 꺼내들고 다시 얼음구멍 쪽으로 갔다. 봉지에서 가루 같은 것을 한줌 꺼내여 방금 만든 얼음구멍으로 흘려넣었다. 문자는 그것이 고기들을 유인해 올 고기밥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다시 텐트 쪽으로 오더니 가방에서 앙증맞게 생긴 낚시대 두개를 꺼내들었다. 아, 산소를 찾아 얼음구멍으로 몰려드는 물고기들을 그물로 건져서 잡으려는 게 아니구, 얼음구멍에 낚시를 드리워 고기를 낚으려 하는 것이였구나. 문자로서는 처음 해보는 겨울낚시여서 부쩍 구미가 동했다. 륙십이 넘은 가슴에 동심이 다시 파릇파릇 살아나려 하는 것 같았다.   -자, 이젠 슬슬 본격적으로 낚시준비 해봅시다. 이미 방석에서 엉치를 떼고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온 문자에게 아이들 놀이감 같은 짧은 파란색 낚시대 하나를 넘겨주며 남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문자는 그 낚시대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 낚시대가 어쩜 이렇게 앙증맞게 귀여울 수가 있지? 아기낚시대, 귀여운 아기낚시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낚시대에 감겨져 있던 낚시줄을 풀자 겨우 50센치도 안되게 짧아보였다. 그래서 더욱 장난감처럼 보였다. 문자의 가슴에 대뜸 그 낚시대 색갈 같은 파란 물이 들었다. 문자는 아기낚시대를 든 아기가 되여 아기물고기들과 놀고 싶어졌다. 어제 남자의 전화를 받고 무조건 네 하고 응대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며칠 전 남자를 병원에서 다시 만났을 때 전화번호를 주고받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 그렇게 련락처를 주고받으며 미리 오늘의 이런 얼음구멍 겨울낚시질을 예견하고 이 며칠 동안 이 남자의 전화를 기다렸던 것일가.   3.  녹쓸어 삐꺽거리는 몸뚱이인 것을 어제아침까지만 해도 그랬다. 일어나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안치고 전기를 누른 후 남편 몸을 닦아줄 더운 물을 받으려고 순간온수기가 설치되여 있는 화장실로 향하며 문자는 저도 몰래 바지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여 혹시 그 사이 미확인 전화가 없나 확인해 보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지금 누구의 련락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아버지 건강이 걱정되여 문안전화를 드문드문 해오는 아들과는 어저께 통화했으니까 며칠 내로 다시 전화 올 일은 없을 거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자 나흘 전 병원 문앞에서 마주쳤던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는 데 약간 놀랐다. 내가 지금 정말 그 남자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걸가? -며칠 내로 련락 꼭 할 거니까, 만나서 식사도 함께 하고 그래. 나흘 전 병원 문앞에서 마주쳤을 때 련락처를 달라고 하며 그 남자가 했던 말을 아직 머리속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다시 떠올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문자는 입가에 쓴웃음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귀가에 얇은 여운의 보호막처럼 달라붙어 잘 털어지지 않는 건 이상했다. 몇십년 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남자였다. 물론 그 사이 매스컴을 통해 사진으로 더러 얼굴모습을 보고 그 남자의 부인이 대학동창이여서 그 동창 부부에 관한 이야기들을 심심찮게 들어오긴 했지만 정작 몇십년 만에 다시 얼굴을 본 건 반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오빠의 장례식장에서였고 그리고 그 후 반년 동안은 역시 서로 래왕 없이 지내오던 사이였다. 그런 남자를 나흘 전 우연히 병원 문앞에서 마주쳤고 남자의 손에 약을 가득 담은 비닐봉지가 들려있는 것을 보고 문자는 얼떨결에 물었다. -오빠가 병원에 웬 일이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아님 누가? 머리 속에 얼핏 남자의 부인 모습이 떠올랐으나 딱 집어서 물으면 결례가 될가봐 그냥 스쳐지나가듯 물었다. -그냥 내가 좀 불편해서. -세상 사람들 다 앓음자랑 해도 오빠는 건강해야죠. 오빠가 아프다면 누가 믿겠어요? -세월 이기는 장사 있어? 나도 이젠 약병과 친해질 나이가 됐지. 늙으면 약보따리 안고 산다는 말 있잖어? 남자는 서글픈 내용인데도 씩씩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남자는 오늘은 시간이 안되니까 후에 보자고 하며 문자의 련락처를 요구했었다. 그래, 며칠 내로 꼭 련락을 해오겠다 했었지. 어쩜 흘리듯 그냥 인사치례로 했을 수도 있는 남자의 말을 진짜처럼 믿고 련락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참 어이없이 생각되였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약속 같은 걸 함부로 쉽게 흘리며 다닐 남자는 절대 아닐 것이였다. 오빠의 친구였던 동네 오빠가 언제 문자의 가슴에 믿음이라는 두 글자로 각인되였는지 문자도 알 수 없었다.    거울 속의 녀자는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염색을 한 지 아직 두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세월의 진실은 염색으로 가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시위를 하는 듯 어느새 다시 하얗게 밀고 올라온 뿌리부분이 그 우로 검게 염색되여진 머리칼들을 비웃으며 유난히 눈에 밟혀왔다. 문자는 그 하얀 색갈 우에 지금 당장 치솔에 물감을 묻혀서라도 검은색을 입혀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긴 머리칼 몇오리가 어지러이 감겨진 채 세면대 옆 빈 공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얼레빗을 손에 들었다. 엊저녁 샤워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누웠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아까 대충 손에 물을 묻혀 얼굴과 목만 적시고 아직 머리도 감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호-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도 힘주어 내쉰 것이 아니라 꼭마치 세월의 먼지와 앙금이 잔뜩 가라앉아있던 생기 없던 호수에서 거품 하나가 맥없이 솟구쳐 오르듯 그렇게 가슴 속 밑바닥에서 꾸역꾸역 밀려올라온 것이였다. 올라와 목구멍에 답답하게 걸려있는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벌려 호- 하고 그 거품 같은 것이 가고파 하는 길로 사라지도록 내보내줬을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시도 때도 없이 하루에도 수없이 그렇게 꾸역꾸역 리유없이 크르륵 거품 같이 올리솟는 한숨이였다. 그걸 굳이 자기 귀에도 거슬릴 정도의 소리로 내보내지 않고 꾸욱 눌러도 될 것이겠건만 그렇게라도 내보내지 않으면 정말 가슴속이 짙은 연기 같은 것으로 가득 들어찬 것 같이 답답해서 참다가 정말 가슴을 감싸고 있는 갈비뼈 하나가 가슴밖으로 툭 부러져 튀여나가며 그대로 가슴이 펑 하고 터져버리고 말 것 같아서 심호흡 삼아 그렇게 토해내군 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한번씩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뿌연 연기 같은 형체 없는 것을 토해내고 나면 잠간이라도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거울 속 윤기를 잃고 부시시한 머리결이 요즘 생기를 많이 잃고 푸석푸석 말라 부스러지는 소리를 내는 건조한 일상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처럼 눈길에 밟혀와 기분이 덩달아 푸석푸석 말라 부스러지는 것 같았다. 자기 몸에도 마음에 들지 않고 거슬리는 게 너무 많았다. 빗이 머리 정수리 부분을 지나 뒤쪽으로 향할 때 문자는 오른쪽 어깨가 다른 날보다도 유난히 많이 당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요즘 따라 팔다리도 옛날 같지 않게 많이 뻣뻣해지며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며칠 전 어느 날인가는 몇십년 동안 날마다 습관처럼 기계적으로 손을 등뒤로 해서 채우던 브래지어를 두 팔이 뒤로 잘 꺾어져 올라가주지 않고 두 손이 제대로 맞닿지 않아 한참 만에야 겨우 채웠던 적도 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두 팔 돌리는 련습을 했다. 아직은 이렇게 빨리 팔다리가 굳어져서는 안되는데 하고 생각하며 하루에도 몇번씩 두 팔을 앞으로 뒤로 휘휘 돌려대군 했다. 꺾이고 펴지는 역할을 해주는 관절들이 하루 다르게 물기를 잃고 뻑뻑해지는 걸 느끼기 시작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였다. 더구나 날씨가 많이 차가워지는 겨울에 들어서부터 손발 뿐이 아닌 온몸의 뼈마디들이 다 삐꺽거리고 달그락소리를 내며 잘 맞물려 돌아가주지 않는 느낌을 많이 받고 있었다. 하긴 세월의 힘을 이기는 장사는 없지… 그 힘을 이기지 못해 남편도 1년 전에 쓰러졌다.   그리고 지금 저렇게 안방 침대 우에 누워있다. 문자는 세면대 아래에 넣어두었던 세수대야를 꺼내여 화장실 절반을 차지한 샤워 부스 안에 들어갔다. 순간온수기에 련결한 수도꼭지를 열어 더운물을 받았다. 누워있는 남편의 몸을 수건에 물을 묻혀 닦아주어야 했다. 남편이 쓰러진 다음부터 문자는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번씩 남편 몸을 닦아주는 걸 견지해오고 있었다. -내 몸에서는 냄새가 나도 당신 몸에서는 냄새가 나게 하지 않을 거야. 처음으로 남편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던 날, 남편이 쑥스러워하며 등 돌려 누울 때 문자가 남편에게 했던 말이였다.   4.  미녀와 야수 -문자 너 아직도 소설이랑 쓰고 그래? 이제 문자와 남자는 텐트 안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얼음구멍에 낚시를 드리우기 전 텐트를 얼음구멍 앞으로 바싹 당겨 옮겨놓았던 것이다. 둘은 텐트 안에 앉아서 바로 코앞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물고기가 와서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요,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글 쓰기 거의 그만뒀어요. 근데 오빠가 어떻게 내가 글 쓰기 좋아했다는 걸 알아요? 작은 공간 안에 남녀 단둘이 나란히 앉아있는다는 건 아무래도 좀 어색했다. 허허벌판이여서 주변에 아무 보는 눈 없고 아무리 둘 사이가 어렸을 적부터 아래웃집에 오빠동생 하며 가까이 살아 스스럼 없던 사이라 해도 그러나 남녀는 남녀였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말과 상관없이 이젠 칠십세를 바라고 사는 남녀의 동석이긴 하지만 꼭 남의 눈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저 둘 뿐이니까 둘이니까 더 서로 어색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그런 어색함을 깨는 데는 침묵이 아닌 대화가 최고의 약이였다. 그걸 깨달아 둘은 대화거리를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다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왜 너희 집이 방금 현성으로 이사왔을 때 내가 주말마다 너네 집으로 쫓아가군 했었잖아? 너희 엄마가 해주는 밥이 맛있다고 하면서. -네… 생각나요. 오빠가 전국 복싱대회에 대표선수로 나가서 일등을 했다고 와서 자랑하던 것두요. -그래 맞어. 아마 한창 그 때 쯤이였겠지 싶다만 내가 거의 주말마다 너네 집으로 쫓아가니까 어느 날 너의 오빠가 내게 그러더구나. 문자 너는 나중에 위대한 소설가가 될 거니까 황소처럼 힘자랑이나 하는 주먹대장 나와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구.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예 쳐다보지도 말라는 뜻이였지. 너 오빠가 눈치를 챈 거였지. 내가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핑게로 널 더 보고파서 쫓아다니는 줄. -네? 그런 일도 있었어요? 첨 듣는 소리여서 문자도 꿈틀했다. 그저 멋있는 동네 오빠라고 가슴 한쪽 구석에 조금 담고 은근히 주말마다 기다려지군 했던 거 같은데 그 때마다 달려왔던 동네 오빠도 은근히 자기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이. -넌 몰랐겠지 아마. 그 때 네 오빠 말을 듣고 난 내가 너처럼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하는 착한 학생이 아니고 머리가 단순해서 주먹자랑 밖에 할 줄 모르는 복서인 것이 얼마나 저주스러웠는지 몰랐어. 전국 경기에 나가서 일등을 한 게 무슨 소용이 있어? 아마 그 때부터 너네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도 줄이고 네 오빠와도 조금 거리가 멀어졌던 거 같아. 너는 내가 쳐다보지도 못할 높은 곳에 앉아있다는 걸 깨닫고부터는… -그랬어요? 난 전혀 몰랐어요. 언제부터 남자가 오빠 보러 뜸하게 놀러 다니기 시작했는지 문자는 눈치를 채지도 못했었다. 그냥 그렇게 문자의 가슴 문전에서 맴돌다가 맴돈 흔적조차 없이 문자가 모르는 사이 사라지고 기억에서 그냥 지워져갔던 남자였다. 오빠도 죽을 때까지 문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아, 오빠… 고기가 보여요. 문자가 급히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끊었다. 얼음구멍으로 물고기 두마리가 꼬리를 하늘거리며 헤염쳐오는 것이 보였다. 작지 않은 체구를 자랑하는 버들치 같았다. -버들치 맞죠? 버들치가 저 정도면 작지 않은 거죠? -그럼. 버들치 몸통이 저 정도면 어린 놈은 아니지… 몸통은 다 여문 놈이지. 버들치 두마리는 낚시에 꿴 미끼를 발견하고 다가온 게 분명했다. 둘이 어깨를 가지런히 하고 문자가 드리운 미끼 주변을 한바퀴 돌고 이번엔 남자가 드리운 미끼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다. -단번에 확 달려들어 입에 덥석 물지 않고 입질도 급히 하지 않는 놈들인 걸 보면 여간내기들이 아니야. -그러게요. 덥석 물면 안되는 줄 감이 오나 보죠? 물고기들도. -생명의 본능이겠지. 자기보호 방어능력. 저 투명하고 차거운 물 속에 느닷없이 유혹의 미끼가 탁 던져졌으니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앞서고 조심스러워지는 것이겠지. -그니까, 인간만 생각할 줄 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것 같아요. 저것들도 생각이 있으니까 저렇게 조심하겠죠. 안 그러면 언녕 미끼를 입에 물었겠죠. -재밌지 않어?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 그대로 확 덮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빙빙 돌며 위험요소가 있나 없나를 관찰해보는 거. 그게 자기가 싫어하는 물건이면 저렇게 가까이 다가왔겠어? 아예 무관심으로 멀리 피해버렸겠지. 그러면 저렇게 맴돌 일도 없을 거 아니야? 자기가 좋아하고 정복하고프고 소유하고픈 대상에 대한 접근과 우유부단… 생명에게는 다 저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사냥군의 본능이 숨어있고 좋아하길래 오히려 그 앞에 다가서면 주눅이 들어 경계심을 앞세우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지. 역시 오른손에 든 낚시대를 살살 움직여 미끼가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가장해 물고기를 유인하며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 저 물고기들만을 가리켜 그냥 하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살아온 인생에서 깨달은 뭔가를 담은 목소리였다. 문자도 남자를 따라 손에 든 낚시대를 조금씩 살살 움직였다. 그래서 그때 오빠도 나에게 어떤 호감을 가지고 주위를 맴돌며 나를 관찰하고 나에게 어떤 경계심을 앞세웠던 거였어요? 하고 묻고 싶었다. 어서 와서 덥석 미끼를 물어주길 기다렸지만 물고기들은 쉽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 놈들 참 영악하네. 지금은 물고기들도 다 지능만점이라니까. 여름에 낚시군들이 많이 와서 낚시에 놀란 적 있던 놈들임에 틀림없어. 배고픈 본능을 참고 저렇게 그냥 주변만 어슬렁대면서 쉽게 먹이사냥에 나서지 않잖아? -그러게요… 입에 물어도 안 보고 입질 해봐야 맛있는 건지 독인지 알게 아니예요? 문자는 문득, 이 남자가 철없던 그 때 자기에게 덥석 입질을 해왔다면 자기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가 궁금해졌다. 그냥 맛있는 먹이로 남자에게 넘어갔을가 아니면 안에 뾰족한 가시를 감추고 있다가 콱 쏘았을가. 아직 철없던 그 때, 남자가 먼저 접근해오고 입질을 해왔다면 멋 모르고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까지 문자의 가까운 주변에서 가장 남자답게 멋지게 보였던 동네오빠였으니까. 아니, 어쩜 놀랍고 당황해서 멀리 도망쳐 버렸을 수도 있겠지 싶기도 했다. 자기도 몰래 소녀의 본능으로 감추고 날 세우고 있던 장미가시 같은 것을 겉으로 뾰족이 드러내고 남자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던 철부지 사춘기였을 때니까. -젊었을 적엔 낚시질도 할 줄 모르고 그냥 그물로 반두질만 할 줄 알았으니깐 미끼를 던질 줄도 모르고 먹이감이 보였을 때 확 덮칠 줄도 몰랐지.    남자가 꼭 문자의 생각을 들여다 보고 대답하는 듯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둘은 어쩜 지금 같이 낚시질하며 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일단 고기가 미끼를 물면 확 낚아야 돼. 기회는 한번 뿐이라 생각하고 지체없이 과감히 낚아야 해. -알았어요. 그러나 문자는 속으로 그걸 이제야 깨우치셨나요? 하고 묻고 있었다. 아니, 나이 칠십이 다되도록 살아오기까지 남자는 그 도리를 언녕 깨우쳤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그래서 문자네 대학에서 퀸카로 소문난 녀자를 확 낚아채여 자기 녀자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행복했을가, 이 남자는. 그 퀸카를 자기 녀자로 만들어 살면서 행복했을가. 대학 졸업 후 한 도시에 남은 동창들끼리 가지는 모임에 학교 때 그렇게 도고하던 남자의 안해는 잘 나오지 않았다. 잘 나가던 권투선수로 활동하다가 은퇴 후 체육학교의 복싱코치로 남아 역시 문하에 훌륭한 제자를 양성해내는 복서명장으로 활동력을 자랑하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인가 이 도시의 첫 개인복싱관을 개업하고 그 복싱관 운영으로 번 돈을 기초자금으로 다른 장사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 잘 풀리기 시작하여 몇년 사이 몇개의 계렬사를 운영하는 기업인으로 화려하게 탈바꿈하여 잘 나간다는 소문이 들리면서 그 부인인 동창생 역시 각종 매스컴에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매스컴은 ‘미녀와 야수’를 패러디하여 “이 시대의 최고의 주먹과 최고의 미녀의 만남”을 개혁개방 초기 성공의 행복모델로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동창들끼리의 모임에서는 항간에 들리는 소문으로 남자의 주먹이 녀자의 이쁜 미모에 대한 경계로 휘둘러져서 늘 가정불화가 일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오갔고 남자는 주먹 휘두르기에도 지쳐 집보다 밖에서 더 나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부인은 남자의 돈 때문에 리혼도 못하고 억지로 붙어 겨우 부부의 명목만 유지한다는… 그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문자는 그 주먹이 자기가 잘 아는 어릴 적 옆집 오빠여서 안타까웠고 그 녀자가 자기와 한 학급에서 공부했던 동창이였음에 안타까웠다. 가장 잘 나가는 성공한 기업인 남자와 대학에서도 소문 높았던 퀸카 녀자, 뭐가 모자라서 그렇게 남들의 말밥에 가십거리로 오르내리며 불쾌한 소문의 주인공으로 되여야 한단 말인가. 오죽하면 미녀 안해를 놔두고 밖에서 나돌가? 아무리 돈이 좋다 하지만 어떻게 돈을 위해 그 주먹도 참아낼 수 있을가? 부럽지 않았다. 평범하지만 정부기관에서 꾸준히 승진의 길을 걸으며 아침이면 정해진 시간 맞춰 집에서 나가고 저녁이면 늦더라도 외박을 하지 않으며 집으로 들어와주는 남편과 남들 웃기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녀자동창이 다시 동창들 모임에 나서기 시작한 건 주변 여러 도시로 사업을 확장하여 부동산개발에까지 손을 댔던 기업가 남편이 아들에게 기업 경영권을 거의 다 물려주고 이 도시로 다시 돌아와 골프나 치면서 거의 은퇴에 가까운 삶을 산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몇년 전부터였다. 녀자동창의 그 도도함은 아직도 남아있는 미모와 함께 여전했고 녀자동창을 모임에 모셔다 주고 모셔서 돌아가는 승용차는 이 도시에서 최고의 부자들만 탄다는 엄청 비싼 고급차량이라는 사실이 동창들의 입에 더 잘 씹히는 가십거리로 등장했다. 밖으로 나도는 남편과 갈라서지 않고 꾹 버티고 참아온 보람을 늘그막에라도 누리는 그 퀸카 동창을 녀자동창들은 거의 다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 부러움도 잠간, 작년 년초 구정을 앞두고 가진 동창들 모임에 퀸카가 나오지 않아 이상했는데 후에 다른 동창생이 전화 와서 퀸카의 건강이상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출처:2017 제2호
16    [단편]겨울낚시2 댓글:  조회:222  추천:0  2019-07-17
겨울낚시(2) 조광명   5.  아웃복서, 인파이터 드디여 두마리중 한마리가 꼬리를 스윽 한번 크게 휘저으며 느긋하게 문자가 드리운 미끼 가까이로 접근해왔다. 물려고 접근하는 거다. 낚시질이라고 난생처음인 문자에게도 어떤 촉이 왔다. 문자는 저도 몰래 어서 확 물어줘 하고 속으로 빌며 낚시대를 든 손에 힘을 가하게 되였다. 바로 그 때 물고기가 주둥이를 벌려 내밀며 미끼를 향해 확 달려들었다. 이 때다! 문자는 얼떨결에 확 낚시대를 우로 잡아챘다. 잡았다! 하는 환성이 저절로 터져나가려는 순간, 손바닥에 전해지는 느낌이 너무 텅 빈 것 같이 허무했다. 그 허무한 느낌은 준확했다. 고기는 딸려 올라오지 않았다. 빈 낚시만 크게 요동치며 흔들렸다. 역시 긴장해서 문자의 손놀림을 지켜보던 남자가 아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아, 0.1초가 빨랐어. 녀석이 직접 미끼를 문 것이 아니라 톡톡 입질해 본 것이였는데… 한들거리는 낚시줄을 잡고 살펴보니 역시 미끼 한쪽이 거의 뜯기워 먹혀 없어진 것이 보였다. -와… 엄청 빠르네요. 물고기가. 이렇게 입질 한번에 그 질긴 낙지다리살이 뭉청 뜯겨나갔네요. -그놈 버들치,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야. 아주 선수야. 복싱으로 말하면 아주 프로급의 아웃복서야. 확 달려드는 체하고 슬쩍 빠져나가는 폼이 아주 잽에 능란한 놈이야. 남자는 버들치를 복서에 비교하고 있었다. 낚시질에도 복싱용어를 사용하며 비유하는 걸 보면 이 남자의 몸은 링을 떠났어도 생각은 아직 그 살벌한 주먹질이 오가는 링을 떠나지 않고 있는지 몰랐다. 문자는 남자가 하는 말의 뜻을 다는 리해 못해도 버들치가 아주 치고 빼고 도망치는데 뛰여난 놈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한마디 했다. -오빠도 저렇게 잘 치고 빼고 달아나군 했어요? 링 우에서. -아니, 난 오히려 인파이터였지. 훅과 어퍼킷에 능한.   문자는 남자가 입에 떠올리는 복싱용어를 자기가 거의 다 알아듣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빠 장례식을 마친 후부터였을가 문자는 TV를 볼 때 남자들처럼 스포츠 채널을 즐겨보기 시작했고 스포츠 채널에서 복싱경기 장면이 나오면 아주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군 했다. -후에 장사를 하고 다른 비즈니스로 사업을 확장하면서도 나는 늘 링 한가운데를 지키는 인파이터였지. 중심을 잃지 않고 항상 내 위치를 단단히 지키며 내 공간을 확보하고 내 공격 반경을 넓혀가는. 낚시코에 다른 낙지다리살을 끼우며 남자가 말했다. 다시 얼음구멍에 낚시를 드리웠을 때 방금 그 두마리 고기는 이미 멀리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놈들 놀라서 도망쳤는 모양이네요. 그림자도 안 보이네요. -아마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한번 미끼맛을 제대로 본 놈이면 그 맛 못 잊어 다시 돌아올 지도 몰라. 멀리 도망 안 가고 가까운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이쪽 동태를 관찰하고 있을 수도 있어. 한번 놀랐다고 아예 꼬리 내리고 포기해 버리는 건 프로의 근성이 아니지. 링 우에서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서 챔피언의 월계관까지 따안았던 복서답게 남자는 물고기들에게도 미끼를 뜯어먹기 위한 프로근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장사도 그렇게 프로근성으로 했을가? 장사에서는 프로이기보다 오히려 아마추어였을 남자. 그 남자가 눈알이 돌아가는 소리 들리도록 리해득실 계산과 리속 챙기기에 빠른 장사군들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어쩜 쉽게 포기하지 않고 목표물을 향해 끈질기게 접근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복서의 프로근성 덕분이였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오늘 이 남자의 말들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깊게 생각하지? 꼭 남자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세상과 삶을 고기잡이에 빗대여 이야기해오는 것처럼 들리고 거기에 자기 좋은 식으로 꿰여맞추어 해석해 생각하는 자신이 속으로 약간 민망스러웠다. 소설을 쓴답시고 시를 쓴답시고 감성에 예민하던 십대 후반과 이십대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가을락엽 한잎에도 슬픔을 담았던 그 순수했던 감성의 시절… 아 그리고 언제부터였던가, 그 감성이 무뎌지기 시작하고 그 감성의 표현을 위한 글쓰기보다 일상에 더 신경을 쓰고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쫓겨서 살기 시작했던 때가. 대학에 입학해서 만난 남편은 작은 손짓 하나, 눈길 한번으로도 문자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따스한 숨결로 문자의 넋을 송두리채 빼앗아가기에 충분했다. 문자는 소설 대신 그 사랑을 읊는 시를 쓰기 시작했고 그 사랑을 세상 높이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저 했다. 그러나… 그리고 대학졸업 그리고 취직 그리고 결혼생활 그리고 직장생활 그리고 아들의 출생 그리고… 그리고… 아들의 결혼… 그리고… 그리고… 퇴직… 그리고 그리고 지금… 남편은 침대에 누워있고 문자는 지금 그 남편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가슴에 숨긴 채 이렇게 어린 시절 옆집 오빠였던 남자와 오늘아침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겨울호수에 와서 얼음구멍 앞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있는… 이 현실… 문자는 자신에게 물었다. 만약 저 남자 대신 내가 링 우에 올라선 복서였다면 나는 아웃복서였을가 인파이터였을가… 주어진 삶에 대한 반항 같은 거 한번도 해보지 않으며 그냥 주어진 대로 잘 적응하면서 살아온 세월. 힘든 시간들도 더러 있어서 그 때마다 남편과 힘을 합쳐 잘 이겨내왔다고 자부해온 인생인데 그러나 그게 정말 강하게 맞서서 이 악물고 싸워서 이겨냈던 게 맞는 것일가. 그냥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자신을 위안하면서 그냥 그렇고 그렇게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왔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소설은 어데로 가고 시는 어데로 갔을가 하고 자기 자신에게 물었던 적이 몇번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생활이 네모칸 원고지에 쓰는 소설이 아니고 삶이 격정으로 읊는 랑만의 시가 아님을 깨달아 다시 필을 들 용기를 내지 못하였는지 모른다. 아니, 다시 감성의 날개를 펼쳐 펄럭이기도 귀찮아지고 그냥 격정없이 무감각한 시간들을 무덤덤하게 사는 것이 더 편해서 그냥 그 날이 그 날 같이 대충대충 살아왔다는 게 더 맞을지 몰랐다. 남편이 사랑이노라고 던져온 미끼에 입질 한번도 해보지 않고 의심 같은 거 한번도 해보지 않고 낚시라는 거 구경도 못해본 철부지 물고기처럼 덥석 물어버렸던 자기의 사랑선택. 과연 그 선택이 잘된 선택이였을가 아니면 잘못된 선택이였을가에 대해서는 살아오면서 한번도 의심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퇴직 후 남편과의 단둘의 삶은 외롭기보다 오히려 늦게 찾아온 행복처럼 좋았고 살아온 날들에 대한 후회 같은 건 해보려고조차 않았다. 그런데 그 행복을 오래동안 이어가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남편. 문자는 지금도 남편이 쓰러지던 그 날의 정경을 떠올리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퇴직 후로 부쩍 새벽잠이 적어서 항상 새벽 서너시면 일어나서 어성대며 문자가 일어나서 머리정돈을 마치기를 기다려서 꼭 함께 아침시장에 다녀오군 하던 남편이였다. 그날도 그렇게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시장에 가서 날마다 먹던 때시걱거리를 신선한 거로 골라 사들고 돌아왔고 건강관리를 한다고 일부러 엘레베터를 리용하지 않고 함께 걸어서 3층 층계를 오르고 있던 중이였다.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며 계단 방향이 바뀌는 데서 남편이 어이쿠 숨차하면서 쇠로 된 란간을 붙잡고 섰다. 문자는 별 생각없이 숨을 고르는 남편의 손에서 채소가 든 비닐봉지들을 받아들고 몇 층계 남지 않은 계단을 마저 먼저 올라가 집 출입문에 열쇠를 꽂았다. 열쇠를 돌려 문을 밀어 열고 채소를 문어구 현관쪽에 내려놓을 때 문자의 귀에 어-어- 하는 남편의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고 허리를 펴고 고개를 돌려 층계 아래를 내려다 보는 문자의 눈에 가슴을 부여잡고 옆으로 쓰러지는 남편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이구 여보, 웬 일이예요? 문자의 입에서 놀란 울부짖음이 터졌고 엎어지듯 달려내려가 남편을 붙들고 당신 왜 이래요? 하고 아우성치듯 련발하는 소리에 옆집 문이 열리고 잠옷바람의 옆집 젊은 남자가 달려 내려왔다. 이미 입이 한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남편을 안아들다 싶이 해서 집으로 들여다 침대에 눕혀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앰불러스가 도착했었다. 악몽 같던 그 날 새벽의 일… 20여일 간의 입원치료로 한쪽으로 돌아갔던 입은 거의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으나 그 때 힘을 잃은 왼쪽 다리는 지금도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지탱하기에는 력부족으로 아직 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날부터 시작된 남편과 문자의 어두운 시간들. 그러나 그 어두운 시간도 문자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아무런 불만 없이 남편의 병수발을 들고 있었다. 오히려 남편이 자신에게 갑자기 닥친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주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화를 내군 했다.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억울하고 답답했으면 저럴가. 문자는 남편의 그런 화도 다 고스란히 받아주었다. 함께 한집에 살아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고마워하기로 했다. 평생을 함께 한 남편인데… 남편 옆을 지킬 건 안해인 문자 자기 밖에 없음을 문자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장가간 아들에게 쓰러진 남편을 부담으로 떠넘길 수는 없었다. 가령 남편과 내가 링 우에 선 선수였다면 우리 둘은 어떤 복서에 가까웠을가. 우리는 어떤 주먹을 주고박는 파이터 상대였을가. 분명한 건 문자는 절대로 남편을 쓰러뜨린 파이터 상대가 아니였다는 사실이였다. 그렇다면 남편은 운명의 어느 주먹에 맞아 그렇게 어이없이 예고없이 쓰러지고 말았던 것일가. 남편을 향해 치명적인 강타 한방을 날린 운명의 심술은 도대체 어떤 이름을 가진 심술의 주먹질이였을가.    문자는 피터지게 치고박는 그 치렬한 복싱 링 우에 한번 올라서보고파 지는 자신을 느꼈다. 이제라도, 이제라도 이 세상을 향해 주먹 한번 날려보고 싶었다. 상대를 맞히지 못하는 헛주먹질이라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그저 자기의 온 힘을 다 담고 한번 주먹이란 걸 날려보고 싶었다. 남편을 쓰러뜨리고 문자 자기의 생활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준 그 운명의 파이터를 향해 주먹 한번 날려보고 싶었다.   6.  사랑하는 모든 령물을 사랑하여라 -그 봐, 내 말 맞지? 저기 두마리가 슬슬 다가오기 시작하는 게 보이지?  틀림없이 방금 그 두놈이라니까. 꼬옥 붙어서 다니는 폼이 영낙없이 아까 그 놈들 맞아. 남자가 말했다. 문자도 다시 신경을 그 두마리 물고기에게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남자 말 대로 슬슬 다가오는 두마리 물고기는 꼭 방금 왔다 간 그 두마리가 옳았다. 물고기에게도 낙지다리 미끼 맛의 유혹은 너무나 큰 것이구나. 그 유혹 밑에 목숨을 앗아갈 낚시코가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는 걸 물고기들은 아직 간파하지 못하고 있구나. 문자는 두마리 중 어느 놈이 방금 자기의 낚시코에 꿰여 매달았던 낙지다리 미끼를 한입 크게 물어 떼여간 놈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느긋한 꼬리질로 선자리 맴돌 듯 앞으로 나왔다 뒤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오는 놈이 꼭 아까 번개같이 달려들어 미끼만 뜯어먹고 낚시코는 묘하게 피해 도망친 놈일 것이였다. 그렇게 혼난 놈이면 다시 드리워진 미끼를 보고 그 미끼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그 죽음의 냄새에 민감하기보다도 당장 다시 입술을 감미롭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미끼의 맛이 더 유혹적인 모양이였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 문자 자기에게도 저렇게 치명적이도록 유혹적인 미끼가 앞에 던져져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소설 쓰기가 소녀 때의 문자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것 같았고 시 쓰기가 문자 가슴을 뜨겁게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다 치명적인 유혹은 아니였던 모양이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끝까지 도전해 보고픈 욕망으로 문자를 괴롭혔던 것들은 아니였다. 그럼 무엇이였을가, 문자를 오늘의 인생에까지 오게 한 그 치명적인 유혹은. 지금 집 안방 침대에 누워 안해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남편? 그래, 남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편에게 빠져 인생을 이날이때까지 송두리채 바쳐 그 남편이 이끄는 대로 그 남편과 함께 살아오고 만들어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치명적으로 유혹적이고 벗어날 수 없는 유혹이라면 지금 얼음으로 뒤덮인 겨울호수에 이렇게 겨울낚시대 달랑 들고 다른 한 남자와 앉아 낚시질 즐기고 있는 문자 자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남편이라는 유혹이 아닌 다른 어떤 유혹의 덫에 걸려 이 곳에 와 앉아있단 말인가. 누워있는 남편이래도 그 남편이 있는 집이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공간이고 따스한 공간이여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을 내놓고는 이 세상 어떤 다른 공간에도 더 가보고 싶지 않고 들려보고 싶지 않아지는 문자였다. 집에 장기환자 한명 있으면 그 환자보다도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더 지치고 힘들어져 먼저 쓰러지고 말 거라며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지만 그러나 문자는 무거운 남편을 부축해 식탁 앞에 앉히는 일도, 화장실 변기에 앉히는 일도, 침대에 눕혀주고 몸 닦아주고 씻어주는 일도 힘들지 않았다. 내 남편이니까, 나에게만 의지하는 남편이니까.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고 나와 함께 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손자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니까. 함께 살아온 거의 40년 인생을 함께 이야기 나누는 사람이니까. 그냥 그 남편과 함께 하는 공간. 그 공간 이외의 다른 공간을 남편과 함께 할 수 없길래 문자도 점점 바깥세상과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자신을 집안에 가두어가고 있었다. 구정에 아들네 부부가 와서, 자기네가 와있는 며칠 동안만이라도 아버지를 돌보겠으니 엄마더러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라고 했지만 문자는 정작 자기가 나가서 찾아가볼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가볼 곳도 많고 그래서 찾아가봤던 곳도 많았던 세상인데 그러나 그렇게 찾아갔던 모든 곳들도 다시 혼자 찾아가기에는 너무나 자기와 상관 없는 세상 같이 아득히 먼곳에 있는 것 같았고 굳이 찾아가보고픈 욕망 같은 것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문밖의 세상은 이제 자기와 상관 없는 세상 같았다. 병든 남편이 누워있는 공간, 그 공간 이외의 공간은 이제 문자 자기의 공간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게 이제 자기의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느껴지기 시작한 답답함, 답답함… 답답해서 창문을 열어 실내공기를 환기시켰고 답답해서 옷장 문을 열고 안에 걸어놓았던 옷들을 다시 깨끗이 씻어 해볕에 널어 말렸다. 답답해서 다시 또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고 답답해서 겨울인데도 앉아 부채질을 했다. 답답해서 오전에 닦았던 바닥을 오후에 다시 또 닦았고 답답해서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앞의 녀자를 멍하니 들여다보군 했다. 거울 속의 녀자가 낯설게 보여서 당황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독서를 즐겼는데 책읽기도 심드렁해지고 귀찮아졌고 머리를 다듬는 일에도 게을러졌다. TV 화면을 멍하니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한참 보고도 뭘 봤는지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냥 창문 앞에 서서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 창밖세상이 뿌옇게 보여서 닦은 창문유리를 자꾸자꾸 또 닦았다. 남편이 짜증내고 화를 내도 더 어르고 달래고 다독이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닦아주고 옷 갈아입히고 부축해줬다. 문자는 자기가 마시는 공기에도 색갈이 있다고 생각했다. 회색빛 공기라고 생각했다. 짙은 담배연기 같은 회색빛 공기. 그래서 들이마실수록 답답해지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문자는 시도 때도 없이 답답한 가슴을 작은 주먹으로 콩콩 두드려대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도 답답해서 후유- 후유- 큰숨을 내쉬였다. 한숨이라고 인정하기 싫었다. 그냥 큰숨을 내쉬는 거라고 스스로 변명했다. -저 두놈,  참 정이 좋네. 꼭 붙어서서 꼬리질도 구령에 맞춘 것처럼 꼭같이 치네.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감탄의 어조로 말했다. 문자는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두마리 지금 한창 련애하는 사이겠죠 뭐. 물고기들도 눈 맞는 놈들끼리 련애하겠죠. -그래, 그런 것 같애. 죽어도 꼭 둘이 함께 붙어 죽으려고 환장한 것처럼 둘이 꼭같이 움직여요… 남자는 다시 경어체를 말끝에 붙이며 물고기를 유인하느라 살살 움직이던 낚시를 더 움직이지 않고 정지시켰다. -정 좋은 물고기들이네요. 그런 걸 잡으려고 미끼 던져놓고 기다리는 우리도 참 조금 너무한 거 아니예요? -하긴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런데 하필 왜 련애하는 두놈이 우리 미끼를 탐내서 기웃거리는 거라냐… 남자가 참 어이없다는 어투로 말했다. -우리 그냥 저 물고기 두마리 잡지 말아요. -어떻게? 자기네가 잡히겠다고 자꾸만 슬슬 접근해 오는데 우리가 뭐 저들 둘을 오라고 했남? -쫓아보내면 되잖아요? 미끼를 꿴 낚시 드리우지 말고 낚시대로 물을 휘저어 쫓아보내면 되잖아요? 문자가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가… 그래, 우리 둘 오늘 좀 덕을 쌓아야 되겠네. 물가에서는 잡은 물고기를 놓아줘 방생도 하려니…잡기 전에 쫓아버리는 심술 피워주는 것 쯤이야 뭐. 남자가 먼저 얼음구멍에서 낚시를 꺼냈다. 낚시줄을  낚시대에 감고 다시 물에 넣어 휘휘 저었다. 커플 물고기가 놀라서 후닥닥 꼬리를 쳐 달아났다. 도망치는 데는 정말 빠른 놈들이였다. 문자는 고기를 잡은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아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오빠, 참 잘했어요. 고기잡이 와서 고기를 잡는 것보다 놓아주는 것이 더 멋있고 기분 좋은 일인 줄 오늘에야 알았네요. -그래, 사람이 살아가면서 놓아줄줄 아는 것도 큰 지혜중 하나지. 하나라도 더 쥐려고 더 가지려고 아득바득하느라 미처 놓아줘야 할 것들을 보아낼 줄 모르고 보았다 해도 아쉬워서 놓아주지 않고 기어코 자기 것으로 붙잡고 있어서 그렇지… 그런데 그게 행복으로 이어지겠냐. 원래 자기 것이 아닌 건 억지로 내 것으로 만들어봤자 결국은 나를 괴롭히는 거로 될 뿐이지. 남자가 말 속에 말을 깔고 이야기해왔다. 이 남자 참, 주먹질만 잘하고 장사만 잘하는, 그래서 돈만 많은 부자로만 알았는데 물고기 잡이에 인생도리를 곁들여 멋지게 풀이해내는 재간이 있구나. 장사하고 기업을 하면서 느끼고 깨우친 게 너무 많은 남자구나. 문자는 어렸을 적 공부 잘하고 총명하다고 칭찬받았던 자기보다도 이 남자가 열배 백배 더 지혜롭고 세상을 깨우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참 멋지게 살아온 거 같아요. 하는 말씀 참 값진 인생 경험담인 거 같아요. -그래, 경험담이겠지… 남자가 허구피 웃었다. -멋지게 살아봤자 역시 다른 사람과 꼭같은 한평생이 아니겠어? 늙어서 돌이켜보면 다 부질없고 덧없는 인생이지 싶어. 왜 그렇게 남보다 더 멋진 걸 가지고 싶고 더 많은 걸 가지고 싶어서 싸우고 빼앗으며 달려왔는지 모르겠어. 내 이 두 손안에 쥐여봤자 얼마를 쥐겠다고… 남자가 두 손을 펼쳐보이며 도리질했다. 남자의 입에서 후유- 하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갑자기 정서가 다운되여 한숨까지 내쉬는 남자가 문자는 너무 안스러워졌다. 내 남편보다는 백배 더 건장하고 우리보다는 천배 더 풍부한 물질을 누리고 살고 있을 이 남자에게도 이렇게 큰 한숨으로 이어져야 할 아픈 사연이 있구나. 그래, 있겠지. 왜 없을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인생에도 남 모를 아픔과 슬픈 사연은 다 감추어져있겠지. 그저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게 다를 뿐이지.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왔을 이 남자는 누구보다도 아픈 시간들을 많이 이겨내고 견뎌냈는지 모를 일이였다. 남자의 단 한번의 한숨의 무게가 너무 문자의 가슴에도 무겁게 맞혀와서 문자는 남자가 펼쳐보이는 그 두 손을 꼭 잡아 위로해주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오빠니까, 걍 동네 오빠니까. 지금 이 곳에 단둘 뿐인 이 공간에 그 한숨을 들어주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니까. 그러나 문자는 손을 내밀지 못했다. 속으로 남자를 향해 속삭였다. -오빠, 나도 걍 오빠 손 잡고 5분이고 10분이고 아무 말 없이 앉아있고 싶어요. 그러면 내 가슴도 많이 시원히 열리고 편안해지고 따스해질 것 같애요.   7.  약속할 수 있어 아름다운 인생 -문자야. -네. -저 놈들 다른 겨울 낚시군들에게 잡히지 않고 이 겨울 무사히 잘 나겠지? -아무렴요. 세상 챔피언 복서가 둘이 행복하게 잘살라고 특별사면을 베풀어 놓아준 생명인데 잡히면 안되죠. 이 겨울도 무사히 잘 나고 추위가 끝나고 봄이 와서 얼음이 다 녹으면 아마 이 호수에서 가장 영악한 두마리 물고기로 힘차게 꼬리치며 생명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거예요. 문자는 시를 읊조리듯 정서를 한껏 담아서 호소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느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자신의 물기 어린 촉촉한 목소리인가. 문자는 그렇게 속삭일 수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아직도 그렇게 감성적일 수 있는 자신이 고마웠다. -네 남편은 좀 어떠냐? 남자가 드디여 남편의 안부를 물어왔다. 어쩜 이 남자는 아침에 문자를 만나서부터 첫마디로 이 물음을 던져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자는 했다. 문자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잘 이겨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이제 이 추운 겨울이 가고 따스한 봄이 오면 그이를 휠체어에 태워서 해볕쪼임도 자주 나오려구요. -그래야지… 아직 젊은데… -오빠 집의 언니는 어때요? 건강이 좀 안 좋다더니… 문자는 동창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동네 오빠의 안해이니까 남자 앞에 그냥 언니라고 칭했다. -아, 좋아지겠지 뭐. 치매가 그리 쉽게 낫는 병도 아니구… 석달 전에 병원에서 나와서 지금 집에 와있어. 간병인을 불러서 잘 간호하면서 약물치료 꾸준히 하고 있어.     문자는 흠칫 놀랐다. 아픈 줄은 알았지만 치매인 줄은 몰랐다. 그렇게 이쁘고 그렇게 도고하던 녀자가 치매라니… 벌써 치매라니… -치매였어요? 전혀 몰랐는데… -그래, 살아오면서 맺힌 한이 너무 많았겠지. 그 맺힌 한을 풀지 못하고 가슴에 쌓아놓기만 했던 것이 너무 많았겠지. 화났던 것들, 억울했던 것들, 이루지 못했던 것들… 그 모든 것들 다 가슴에 한으로 쌓아만 두고 미처 삭일 수가 없었겠지. 그래서 다 잊어버리고 싶어서 기억을 버리기 시작했겠지… 이제는 나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10년은 늙어버린 사람의 것처럼 들려왔다. -아 오빠, 정말 전혀 몰랐어요. 알았으면 언녕… 남자가 문자의 말을 끊었다. -알았던들 어쩌겠냐, 다른 병도 아니고 치매인데… 어쩜 그렇게 다 잊고 기억에서 비우고 사는 게 그 사람에게는 편안한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옆에서 바라보는 우리는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정작 당사자는 아픈 줄 모르고 편안한 일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오히려 위로가 좀 되기도 해. 남자가 다시 씩 얼굴에 웃음을 피워물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냐… 왔다가 가는 인생, 그 사이 거의 누구나 다 한번 쯤 겪게 되는 로년기 병이라는 거… 나만 아프지 말란 법 없고 누구만 건강하란 법은 없으니까… 다 자기 아플 만큼만 아프고 다 덜 아프고 다 차츰 나아지고 다 더 잘되겠지.   -그럼요. 생명이 그리 쉽게 무너지겠어요? 어떻게 이겨온 세월인데… 문자도 씨익 웃었다. -오빠, 우리 오늘 낚시질 그만해요. 우리 그이 점심식사 내가 덥혀줘야 해요. -그래? 그렇겠구나. 점심이라도 한끼 맛있는 거 사주려 했는데. -알아요. 그 맘 알았으니까 후에 다시 기회 잡아서 꼭 사달라고 할게요. -오케이. 약속하는 거야. 이번엔 니가 내게 련락해줘라. 사람이 서로 목소리도 주고받으며 수다라도 떨어야지… 남자도 명랑한 목소리로 흔쾌히 대답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서 앉아있는 문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문자는 그 손을 주저없이 받아쥐였다. 으쌰! 남자가 일부러 과장해서 힘쓰는 모습을 하며 뒤로 당기자 문자도 씩씩하게 벌떡 일어섰다. -알았어요, 오빠. 이젠 내가 오빠에게 전화 걸게요. 우리 전화로 자주 련락해요. 아, 그리고 오빠, 우리 낚시질 언제 다시 한번 와요. 겨울낚시 안되면 여름낚시라두요. -조오치… 아까 놓아준 두놈 그때 와서 다시 잡을가? 남자가 장난기 섞인 어조로 눈을 찡긋해왔다. -안돼요. 그 애들은 그냥 사랑을 이어가게 건드리면 안돼요. 아이들이랑 많이 낳고 오손도손 잘살게 내버려둬야 해요. -알았습니다. 문자녀사님… 남자가 다시 익살 섞인 어조로 경어를 사용했다. 타이밍 잘 맞게. 그 롱담에 문자도 더 크게 활짝 웃어줄 수 있었다. 문자는 남자를 마주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다음번엔 오빠네 언니도 많이 좋아져서 함께 낚시질 왔음 좋겠어요. -조오치… 내가 대신 약속하마. 남자가 과장된 목소리로 시원하게 대답하며 오른손을 활짝 펴고 내밀었다. 그 손에 문자도 오른손을 내밀어 힘껏 마주쳤다. 겨울날 얼음호수 우에서의 멋진 하이파이브였다. -오빠 참 멋있는 남자예요. 문자는 남자를 향해 오른손 엄지를 척 내들었다. 출처:2017 제2호
15    [단편]두팔을 펼치면 날개인것을 댓글:  조회:271  추천:0  2019-07-16
두팔을 펼치면 날개인것을 조광명   1. 검사를 받는 내내 안해는 멀쩡했다. 오히려 일 바쁜 사람에게 도움은 못 주고 페만 끼친다고 미안해했다. 그런 안해를 보며 홍은 또 한번 참 헛갈렸다. 괜히 멀쩡한 안해를 억지로 데리고 병원에 온건 아닌지 안해에게 약간 미안해지려 했다. 그러나 분명 안해의 증상은 더 심각해지고있었다. 어제 퇴근해 집에 들어섰을 때 홍은 현관에 놓인 신발장의 문들이 다 열려있고 그 안이 텅 비여있는것을 발견했다. 묻지 않고도 짐작할수 있었다. 신발장에서 부패한 냄새가 난다고, 신발장안에 곰팡이들이 꼈다고 안해가 신발장 문들을 다 활짝 열어놨을것이고 신발장안의 신발들은 안해에 의해 다 버려졌을것이다. -이젠 신발들이군. 도대체 다음번엔 어떤것들이 버려질가? 이젠 버려질것도 별로 없을것 같은 가장집물이였다. 그러나 몰랐다. 안해의 민감한 코에 의해서 언제 어느것들에게서 부패의 냄새가 감지되여 버려질것인지. 안해가 두통을 호소해온건 약 일년전부터였다. 홍이 이 도시에 와서 꾸린 작은 피혁제품제조업체에 함께 출근하며 제품의 출고전 품질관리를 꼼꼼히 체크해주던 안해는 일년전부터 갑자기 두통을 호소해오기 시작했다. 가죽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라서 본드사용은 필수적일수밖에 없었고 홍은 생산에 사용되는 모든 접착제를 다 국가 환경보호부문의 인증을 받은 환경보호제품으로만 구매해서 사용하고있었다. 뿐만아니라 생산라인 작업실은 하루 24시간 환기시스템을 가동시키고있어서 실내작업하는 현장 작업자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그런 냄새 같은건 전혀 맡아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현장근무하는 직원 그 누구도 본드냄새가 불편하다고 불만 같은것을 제출해온적이 없었다. 국가 표준 미달의 불량접착제를 사용해서 직원들의 건강에 해가 가게 할수는 없다는것이 오너로서의 홍의 기업경영륜리 최저기준이였고 안해 역시 이 몇년 동안 공장 현장라인에서 거의 직원들과 동고동락하고 지내면서도 한번도 불쾌한 본드냄새가 맡아진다고 이마를 찡그려 표현해온적이 없었다. 그러던 안해가 언제부턴가 본드냄새가 싫다고 이마를 찡그리기 시작했고 그런 증상은 어느날 두통으로 이어졌다. -공장 울안에만 들어서도 본드냄새가 너무 강해서 숨이 콱콱 막혀요. -태양혈이 팽창해 터질것 같이 툭툭 뛰고 뒤통수가 땡길 지경이예요. -아 또 두통이 와요… 안해는 신경질적으로 공장의 모든 창문들을 활활 열어제꼈다. 그러고도 두통이 풀리지 않고 더 심해지자 공장과 가까운 공단내 약방에 가서 진통제를 사왔다. -당신 본드품질 철저히 체크해봤어요? 언제부턴가 안해는 품질체크에 너무 민감해져있었다. 아무리 품질관리에 신경을 쓴다고 해도 그러나 회사에 생기는 사고의 대부분은 품질문제때문에 생겼다. 원부자재 구매에서부터 완제품 출고에 이르기까지 사람 손을 수십번도 넘게 거쳐야 하는 생산과정 어느 환절에서 구멍이 생기면 그건 곧장 제품의 하자로 이어졌고 그건 곧 완제품 페기로 이어져야만 했다. 공장으로서는 대단한 손실이 아닐수가 없었다. 생산과정중에 그 문제를 발견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완제품으로 나와서 포장작업전에 진행되는 마지막 인스팩션단계에서 품질문제가 발견되면 그건 정말 환장할노릇이였다. 그러나 홍에게 경제적손실 같은건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였다. 제품 납기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바이어로부터 쏟아지는 책망과 클레임, 그보다도 신용상실이 더 큰 문제였다.   제품 페기로 인한 경제적손실은 품질관리를 책임진 안해에게 그대로 스트레스로 이어지는것 같았고 안해는 그때마다 공장이 받아안는 손실때문에 속으로 끙끙 앓으며 괜히 신경이 예민해지군 했다. QC라인을 책임지고있는 안해로서는 그 모든 스트레스를 다 자기 책임으로 받아안고 삭여내는것 같았다. 손실때문에 가슴 졸이고 그 손실을 미연에 발견해서 차단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것 같았다. 그런 안해가 생단단계의 품질관리뿐 아니라 원부자재 구매에도 신경이 예민해져있음을 홍은 잘 리해할수 있었다. -우리 회사 초창기때부터 수많은 본드업체들중 선정해서 그냥 꾸준히 납품 받아오던 업체야. 몇년사이 품질이 업그레이드되면 됐지. 그리고 지금까지 한번도 본드문제로 상품검사에 걸리거나 세관검사에 걸린적이 없잖아? 본드문제로 바이어들로부터 클레임당한적도 한번도 없고 말야. 당신도 몇년 동안 본드냄새 싫다는 이야기 전혀 없다가 요즘 와서 왜 갑자기 그래? 당신의 후각 어느 신경계통에 문제가 생긴게 아니야? 한번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해봐. 그러나 안해는 그냥 참으며 스스로 약방에서 구매한 진통제로 뻗쳤고 더 날카로와진 신경으로 품질관리에 더 철저히 림했다. 그러다 어느날 그 두통증상이 심해져 오바이트로 이어지던 날 홍은 안해를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달렸다. 병원에서는 온 하루 모든 최신 첨단설비를 다 사용해가며 이런저런 검사를 수도 없이 해대더니 결론은 아무 증상도 발견되는것이 없다는것이였다. 정상이라니 다행이였다. 병원 1층에서부터 6층까지 몇번이나 오르내리며 대기해 줄을 서고, 피를 뽑고, 소변을 검사하고, 처음 보는 최첨단 설비들앞에 서거나 그 설비들 밑에 누워서 검사를 받느라 기진맥진해진 안해는 그러나 정상이라는 검사결과에 오히려 의아해했다. 그 정상이라는 결과를 이상한것이라고 했다. 심한 두통을 못 이겨 눈알이 빠질 정도로 오바이트할 정도인데 정상이라니… 홍도 병원의 검진결과가 믿어지지 않았다. 정상인 사람이 왜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본드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것인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교수라고 진찰비도 다른 의사들에 비하여 몇배 넘는 특진비로 받는 담당의사는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홍에게 간단히 한마디 했다. -본드냄새에 민감하다면 환자를 출근시키지 말고 집에서 쉬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각종 의료기기들의 검사결과가 프린트된 종이 여러장을 이리저리 뒤집어보고난 의사는 심드렁한 어조로 모든게 정상이라는 안해를 환자라고 칭하며 집에서 쉬라고 권고해왔다. 홍은 그날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안해의 요구를 무시하고 차를 병원에서 직접 집으로 몰고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며칠동안 홍은 아침마다 함께 집문을 나서려는 안해를 억지로 윽박질러 집에 떼여놓느라 언성을 높여야 했다. 집에만 돌아오면 멀쩡해지는 안해는 심심해 견딜수가 없다며 부득부득 공장으로 다시 나가겠다 했으나 홍은 제발 집에서 쉬며 사람속 덜 태워달라고 어르고 달랬다. 안해는 마지못해 홍의 말을 따랐고 홍은 안해가 담당하던 인스팩션 업무를 QC라인에 몇년간 근무한 녀성직원에게 맡겨 잘 처리해나가고있었다. 그리고 안해는 가정주부로서의 배역에 충실하려 애썼고 홍은 안해가 일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본드냄새를 맡지 않으면 두통의 시달림에서 벗어날수 있을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였다. 안해는 본드냄새뿐이 아닌, 모든 냄새에 민감해져가고있었다. 1년사이 여러차례 발작한 안해의 냄새에 대한 민감한 반응과 그때마다 표현되는 안해의 과격한 행동은 안해를 완전 낯선 사람으로 만들군 했고 그런 안해의 모습은 마침 그때마다 공장에 터지는 여러가지 사고들로 가뜩이나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홍의 마음을 더욱 지치고 힘들게 만들고있었다.      홍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듯 그 큰 신발장안에 달랑 자기의 신발만 넣고 거실로 향했다. 안해는 주방에서 한창 료리중이였다. 낮시간사이 신발장과의 전투를 벌였을것임에도 아무 일도 없은듯 보글보글 된장국을 끓이고있다가 들어서는 남편을 바라보며 따스한 미소를 보내왔다. 안해의 이마에 질끈 동여져있는 머플러를 보며 홍은 오늘도 안해가 심한 두통을 앓았음을 짐작할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편인 자기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않은 안해, 안해는 웬간한 두통은 홀로 진통제를 먹고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스스로 그 고통의 고비를 잘 넘겨주고있었다. 남편의 저녁퇴근시간에 맞춰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며 남편을 챙겨주는 안해의 사랑은 변치 않고있었다. 홍은 웃는 얼굴로 안해와 눈길을 마주치고 지친 몸을 그대로 쏘파에 던졌다. 그리고 오늘아침 홍은 잠간 공장에 들려 하루 생산일정을 체크해 포치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안해를 달래서 차에 앉혔다. 작은 두통이니까 괜찮다고, 잘만 치료하면 금방 나을거라고 위안하며 병원을 찾아 전번에 했던 검사들을 다시한번 쭈욱 받도록 했다. 여러가지 선진의료장비들을 리용해 진행한 검사결과는 역시 정상이였다. 정상이지만 두통이 있다니까 꾸준히 사용해보라며 의사가 다시 처방해준 신경안정제와 두통치료제 등 약을 병원 1층 약방에서 잔뜩 구매한후 안해를 집에 다시 데려다주고나니 벌써 오후 2시가 훌쩍 넘었다.   2. 홍은 점심도 먹지 못하고 차를 돌려 소방행정서비스기관으로 달렸다. 혹시 회의에 늦어지면 또 어떤 불리익을 당할지 알수 없어서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차를 달려 참가한 기업소방안전교육 회의는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싱겁게 끝났다. 곧이어 전번 소방안전검사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기업체들의 벌금납부가 이어졌다. 소방안전 교육은 명색을 위한 허울일뿐이고 진짜 목적은 “소방안전 블랙리스트” 기업들로부터 벌금을 거두기 위한 회의임을 홍은 잘 알고있었다. 그 벌금을 내기 위해서 달려온것이였다. 회의에 불참하거나 지각해서는 절대 안되고 그리고 반드시 업주가 참가해야 하고 반드시 현금으로 벌금을 내야 한다고 못박은 회의통지였다. 며칠전 검사때 받은 4만원 벌금고지서와 함께 요구대로 현금으로 들고온 4만원을 돈다발 네뭉치로 내고 받은 령수증에는 벌금액이라는 항목 대신 기업소방안전전문가초청교육비 및 안전설비 종합세트비용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회계장부 처리조차도 불가능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 한장일뿐이였다. 회의장 좌석수로 어림짐작해도 오늘 회의에 참석한 업체수가 500여개는 될것 같았다. 20여분 회의에 2000여만원의 수입이 생기는셈이였다.  20여명 직원을 거느리고 날마다 피터지게 일하는 소형기업의 10년 매출액의 합계로도 감히 넘보지 못할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리윤액으로 따지려면 몇십년에도 이루지 못할 “순수 마진”이였다. -토비같은 놈들… 속으로 이런 욕이 나갔으나 행정부문 갑앞에 을의 신세인 소형업체 사장인 홍은 그 욕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어쩜 행정부서들은 이번의 화재 같은 사고들이 기업에 더 자주 발생하기를 바라는것인지도 몰랐다. 그 사고들마다가 행정부서들의 공공연한 기업갈취에 명분과 “합리성”을 부과해줄것이기때문이였다. 그리고 행정부서들은 자기들이 정한 관리규정을 따르지 않고 어기는 기업이 더 많기를 원하는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야 벌금을 때릴수 있으니까. 수입창출이 되니까.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행정부문들이 수입창출단위로 변색되여 운영될 때 그 행정부문들의 감독과 령도를 받아야 하는 기업들이 허리를 펼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썩은 행정은 건강한 기업의 기둥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벌레 같은 존재였다.   생각해보면 참 뜻하지 않게 당한 봉변이였다. 홍이 안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오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들이닥친 소방안전검사였고 생산라인 관리자가 변명 같은것도 못해보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채 덜컥 받아안은 벌금고지서였다. 며칠전 홍의 공장이 위치한 공단과 10여키로 떨어진 공단의 한 공장에서 작은 화재가 발생했고 그 화재로 당직 근무중이던 직원 한명이 질식사당하는 사고가 터졌다. 그 소식은 이튿날로 주변 공장들로 쫙 퍼졌고 홍은 그때 속으로 대충 짐작했었다. 또 소방안전검사가 대대적으로 한번 진행되겠군. 그러나 홍은 별로 걱정될것이 없었다. 생산기업 공장건물 소방안전규정에 따른 소방안전시스템을 홍의 공장은 이미 다 갖추어놓고있었던것이다. 구정후 년초에 진행된 년례 소방안전검사에서도 아무 탈 없이 패스되였길래 걱정할게 없었다. 그날 그 검사팀을 맞이했던 관리자에 의하면 벌금의 리유가 공장에 비치한 소방장치가 이미 로후해져서 소방기능을 잃은것이기때문이라는것이였다. 관리자가 올 구정후 새로 구매해서 비치한 장비들이라며 회계에게 가서 구매령수증까지 찾아다 보여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자기들의 검사를 경과하지 않은, 그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업체의 제품을 사사로이 구매해서 비치했길래 소방안전에 큰 우환이 있다는게 리유였다. 검사는 5분도 되지 않아서 끝났고 무작정 벌금고지서가 발급되였다. 무조건 벌금을 안기기로 작정하고 진행하는 불의습격식의 검사에서 기업이 피해갈 방법은 아무데도 없었다. 우에서 정한 각종 규제와 규정에 따라 업체들이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놓고있어도 그 열가지 규정외 림시로 벌금을 안길수 있는 리유를 백가지라도 더 만들어낼수 있는게 검사관들의 직업능력과 권한이였다.   -수업료 한번 또 멋있게 왕창 냈군. 이번달도 또 장부가 아주 마이너스로 가겠군… 또 한달 애끓이면서 뼈빠지게 일해서 거꾸로 밑지는 사업을 하고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속으로 허구피 웃고 차에 올랐다. 키를 돌려 시동을 걸며 홍은 참고참았던 한마디를 드디여 뱉아냈다.    -에잇, 거지같은 놈들. 온 하루 거의 자리를 비운 공장에도 빨리 돌아가봐야 했고 홀로 집에 있는 안해도 걱정이 되였다.   3. 이번에 새로 뽑은 디자인으로 만든 샘플은 기대처럼 그 프레임의 옆선이 탄탄하게 나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디자이너와 샘플실 직원을 불러 원인을 분석하고있는데 전화가 왔다.   휴대폰 화면에 뜬 전화번호가 안해의 전화번호임이 확인되는 순간 홍은 느닷없이 꿈틀해나는 가슴속의 당황함 같은것을 느껴야 했다. 홍은 미팅중이던 두 직원을 퇴근하라고 내보내고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당신 빨리 집으로 오세요. 안해는 다짜고짜 홍의 귀가를 호소해왔다. -응? 왜? 집에 무슨 일 있어?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집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사실 홍의 물음은 당신에게 무슨 일 있어? 였다. 애써 태연하게 물었지만 이미 홍의 가슴은 후두둑 뛰고있었다. 어투로 이미 홍은 안해가 또 발작했음을 알수 있었다. 이번엔 또 어떤것에서 자극을 받고 발작한것일가. 전번 신발장 사건후 안해가 거의 한달 동안 두통을 호소해오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였다. 그런데 좀 마음의 탕개를 늦추려고 하는데 또 걸려온 안해의 전화. 홍은 느닷없이 가슴이 꽉 막혀오는것 같았다. -아, 미쳐, 이 냄새… 온 집안에 곰팽이냄새가 골똑 찼어요… 음식 썩는 냄새… 당신 들어올 때 슈퍼에 들려 세척제랑 소독수 사오는거 잊지 마세요. -뭔 소리야, 당신… 또 두통이 와? -머리가 터질것 같아요… 홍은 정신없이 차를 집으로 몰았고 안해가 사오라는 세척제와 소독수 사러 슈퍼에 들릴 사이 없이 차를 주차하기 바쁘게 직접 집으로 올라가는 엘레베터에 몸을 실었다. 출입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 홍에게 안겨온건 너무나 뜻밖의 광경이였다. 안해는 주방에서 랭장고 문을 활짝 열고 그 안을 향해 선풍기를 돌리고있었다. 이미 랭장고안은 아무 음식물도 담겨있지 않은채 깨끗이 정리되여 새것처럼 닦여져있었다. 머리에 질끈 머플러를 동여맨 안해는 들어서는 홍을 보자 더욱 신경질적으로 선풍기를 랭장고앞으로 더 당겨 세워놓았다. -온 집안에 썩는 냄새예요. 집이 다 썩고있어요… 안해는 못 찾고있던 분노의 표출구를 마침내 찾은듯 씩씩대고있었다. 막 투우장에 뛰여들려고 하는 투우처럼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아무것도 없는 랭장고안을 들여다보고있었다. 정말이지 안해의 눈에는 뻘건 피발이 서있었다. 얼마나 두통이 심했으면 저렇게 안구 모세혈관까지 다 터졌을가… 홍은 그런 안해가 안스러워 안해를 품에 안아주고팠으나 독살스런 안해의 눈빛때문에 아무 행동도 감히 할수가 없었다. -당신 이 선풍기 거꾸로 들고 랭장고 아래쪽 칸을 말리세요. 말려야 냄새가 빠져요… 안해는 홍의 손에 선풍기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싱크대우에 설치된 붙박이문을 열고 그 안의 그릇들을 들어내렸다. -그릇들에도 다 곰팡이가 끼였어요. 곰팡이냄새가 심하게 나요.   안해는 싱크대 수조에 물을 넘치도록 받아 그 물에 세척제를 아낌없이 섞었다. 내려놓은 그릇들을 그 물에 넣고 행주로 빡빡 문대여 씻기 시작했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홍은 거의 망연자실 상태로 멍하니 안해가 하는 짓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인지를 빨리 판단하느라 안해가 넘겨준 선풍기옆에 멍때리고 서있었다. 안해는 홍에게 꽥 소리질렀다. -당신 멍해서 뭘해요? 선풍기 거꾸로 들고 랭장고 아래칸을 말리라 했잖아요? 홍은 안해에게 조심히 물었다. -당신 괜찮아? -괜찮게 생겼어요? 집이 다 썩어나가는 판인데… 안해는 홍더러 주방에서 나가라고 지시했다. 씻던 그릇들을 활 팽개치고 자신이 직접 선풍기를 거꾸로 들고 섰다. 선풍기 팬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랭장고 아래칸을 향해 바람을 날렸다. -다 썩고있어, 세상이 다 썩고있어… 모든게 다 부패하게 썩어가고있어… 안해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중얼거렸다. 홍은 안해의 몸에서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결전에 나선 투사의 모습이면 지금 선풍기를 거꾸로 든 안해의 저 결사적인 자세보다 더 전투적인 자세일가. 자칫 더 건드려선 안될 폭발 직전의 기운앞에 홍은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당신 뭐해요? 거실 바닥을 물걸레질이라도 하지… 바닥이 다 썩고있잖아요? 바닥 썩는 냄새 안 맡아져요? 거실바닥은 타일로 되여있었다. 홍은 차라리 집문을 박차고 나가고싶어졌다. 그날 밤 안해는 홍의 품에 안겨 울었다. 집이 썩고있는것 같다고. 옷장에서도 곰팽이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난다고… 옷장도 썩고있어서 래일 새거로 바꿔야 할것 같다고… 온 집안에 풍기는 부패의 냄새때문에 미칠것 같다고… 세상이 다 썩고있다고… 썩고있는 세상이 무섭다고… 홍은 안해를 달랬다. 당신이 너무 민감해서 그렇다고. 며칠전 홍이 퇴근길에 사온 2.5리터짜리 식용유도 안해는 개봉하자마자 사용도 하지 않고 내다 버리라 하였다. 식당에서 사용하고 버린 기름을 다시 사용해 만든 띠꺼우유地沟油라고. 신선하고 달콤한 땅콩기름냄새가 아닌 썩은 냄새가 난다고 홍더러 내다버리라고 했다. 홍은 안해의 말을 무시할수 없어서 개봉한채 한방울도 사용하지 않은 기름통을 그대로 들고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그래도 그냥 그대로 버리기 아쉬워 쓰레기통에 던져넣기전에 기름통 아구리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홍의 코에는 고소한 기름냄새만 가슴 뻐근하게 맡아졌다. 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금 산 기름을 통채로 버리고 다시 슈퍼에 가서 제일 비싼 올리브유를 사와야 했다. 안해는 그 기름도 백프로 순도 높은건 아니라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지못해 사용하는듯 료리에 조금씩만 넣었다. 홍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해주며 안해에게 냄새에 너무 민감하면 이 세상을 살기 힘들다고 이야기해줬다. 가짜가 살판치고 불량품이 활개치는 세상에 당신 혼자만 너무 정품 코를 가져서 그렇다고… 그러면서 홍은 자기 코도 어쩜 안해의 코에 비하면 짝퉁코인지 모르겠다며 안해더러 홍 자기의 코 냄새를 맡아봐달라고 했다. 짝퉁코 냄새가 맡아지냐고… 그렇게 억지로 안해의 코에 자기 코를 대고 코끼리 맞대고 킁킁대며 안해의 입에 입맞추는데 성공했다. 드디여 안해의 울음이 멈추고 안해가 홍의 몸에 팔을 둘러왔을 때 홍은 참으로 오랜만에 안해의 옷을 벗겼고 그렇게 몸을 불태우던 중간중간 홍은 안해가 자기 몸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본다는 느낌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안해는 남편인 내 몸에서도 부패의 냄새를 맡고있는걸가? 그리고 그날 사랑놀음이 끝난후 안해의 샤워시간은 이전에 비해 배나 길게 이어졌다. 홍은 사랑뒤의 나른함보다도 몇배 더 심한 비애 같은것을 느끼며 그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었다. 부패의 냄새가 나는 남편과 한이불 덮고 잔다는것이 안해에게는 얼마나 큰 고역일가…    4.  캔톤페어 전시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이 붐볐다. 전시회에 출품한 업체들과 세계 각지에서 메이드인차이나의 새로운 제품 정보를 찾아 모여온 무역회사와 바이어들로 전시장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상업 정보의 각축장이였다. 홍은 비록 이번 전시회에 부스를 임대해서 출품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자체브랜드를 런칭해 이런 국제급 전시회에 출품해서 전세계 바이어들을 상대로 무역을 해보아야지 하는 꿈이 있었다. 그보다도 당장은 중국 각지의 우수업체들이 참가하는 이런 대형 박람회에서 가죽제품의 세계적인 패션흐름 트랜드를 읽기 위해 어제부터 오늘 이틀째 공장 모든 업무를 관리자들에게 맡기고 이렇게 파주 캔톤페어 컨벤션센터에 몸을 담고있었다. 점심이 지나도록 발바닥이 아플 정도로 전시장을 돌며 구경하다가 더는 걷기가 힘들어서 잠간 전시장 한쪽 코너에 마련된 커피숍에 앉아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전화가 울렸다. 공장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회사에 일이 생겼을 때 관리자들 선에서 해결할수 있는 일은 될수록 관리자들이 방법을 강구해서 해결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온터라 이렇게 홍이 자리를 비운 사이 공장에서 전화가 걸려올 때는 꼭 관리자들 차원에서 해결할수 없는 문제가 공장에 발생했음을 의미했다. 무슨 문제가 생겼지? 은근히 걱정되였으나 홍은 차분한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   재무담당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래일이 가죽원단 업체들의 결제일인데 회사 계좌의 잔금이 얼마 안된다는 내용이였다. -오늘이 H무역회사에서 전번달 수입해간 물량에 대해 결재해줄 날이잖아? 그 금액이면 원단값 충분히 결제해주고도 더러 남을건데. -H무역에 어제 이미 결제청구서를 넣었고 오늘 결제독촉 전화도 했습니다. 그런데 H무역도 해외바이어로부터 받은 신용장에 문제가 생겨서 은행결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리유로 이번달은 결제해줄수가 없다는 답변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이변이였다. 홍은 갑자기 뒤목이 뻣뻣해지는 느낌에 전화기를 손에 든채 눈을 감고 목을 좌우로 둬번 움직였다. 그러나 머리속은 쉬지 않고 빨리 회전시키고있었다. 이런 경우를 처음 접하는건 아니였다. 생산업체에 항상 필요한건 류동자금이였다. 아무리 많이 생산하고 아무리 많이 출고하고 아무리 많이 수출해도 그것이 현금으로 빨리 이어져 회전되지 않으면 공장은 돌아가기 힘들었다. 그래서 홍은 아무리 어려워도 항상 회사 계좌에 현금을 어느 정도 보유하고있었다. 그런데 어제 직원들에게 월급을 발급하고 오늘 아까 전시에 새로 나온 새로운 자동화 설비 몇대를 구매하며 예약금으로  몇만원을 걸어놓는바람에 당장 회사 계좌가 거의 바닥나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오늘이 H무역의 회계결제일이여서 별로 걱정하지 않았던 일이였다. 열심히 만든 제품이 출고와 함께 현금으로 바꿔지는 경우는 없었다. 오더를 발주해오는 회사마다 다 결제조건이 있어서 짧아서 한달, 길게는 석달만에야 출고제품에 대한 결제가 이루어지는것이 업계의 불문률이였다. 그 결제일대로 결제가 이루어지면 그나마 다행이였다. H무역은 지금까지 한번도 결제일을 미룬적이 없이 꾸준히 좋은 합작관계를 이어오던 업체였다. 그런 업체가 난색을 표시해올 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기때문일것이였다. 믿어줘야만 하고 기다려줘야만 했다. 홍은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K패션은? K패션은 근년래 국내 패션업계에서 두각을 내밀기 시작해 거족적인 발전을 자랑하는 대형업체로 향항증시 상장 준비중이라는 소문도 업계에 나돌고있었다. 홍의 회사는 업계에서는 아무 이름도 없는 작은 업체이지만, 그래서 아직 자체 브랜드 제품을 런칭할 정도는 못되지만 언젠가 자기의 브랜드로 된 제품을 시장에 내놓고싶은 꿈을 가지고 품질관리를 꾸준히 해오고있었다. 그런 덕분에 작년부터는 국내 1선도시 일류백화점에만 백여개의 자체매장을 가지고있는 K패션으로부터 OEM 생산요청이 와서 그 오더를 받아 납품해오고있었다. - K패션은 갑자기 국세국에서 세무조사가 들어와서 모든 은행업무가 다 동결되였답니다. -뭐? 홍은 저도 몰래 목소리톤이 높아지는걸 어쩔수 없었다. 홍의 공장 생산량의 절반은 K패션에 납품되고있었다. 국내 패션업계에서 알아주는 일류기업인 대신 결제조건은 까다로워서 납품후 3개월을 결제일로 정해놓고있었다. 대형회사의 갑질이면 갑질일수도 있었지만 그런 대형업체들의 오더발주에 의뢰할수 밖에 없는 소형생산업체로서는 그 결제조건을 따라줄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석달치 결제액이면 소형제조기업인 홍의 공장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적지 않은 금액이였다. -언제 발생한 일이야? -국세국에서 며칠전에 K패션 총부 재무부에 갑자기 들이닥쳤대요. 그리고 곧바로 은행업무 동결처분이 내려졌고요… 그래도 믿겨지지 않아서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확실한거야? -K패션 총부 재무부가 지금 야단도 아니랍니다. 재무부 총경리 리명박리사가 세무국에 조사받으러 불려가서 며칠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있다는 이야기도 우리 회사 결제담당인 박근혜양으로부터 직접 확인받은 내용입니다. -음… 좀 심각하군… 혹시 향항증시 상장을 위한 기업정보공개내용을 작성하면서 전체 그룹 재무구조에 대한 회계조작이 있었을수도 있는 상황이였다. 기업정보공개내용을 거짓으로 부풀리는건 증시 상장을 노리는 회사마다 거의 진행하는 사전작업중의 한가지 “관행”임을 홍 역시 얻어들은 상식으로 알고있었다. 혹시 웃선을 잘못 찾았나? 증시 상장을 밀어줄 배경인물을 잘못 잡으면 저렇게 재수없이 세무조사에 걸려들수도 있는것이였다. 아무쪼록 K패션이 이번 위기를 잘 넘겨야 할건데… 홍은 K패션에 관한 더 불길한 소식이 더는 들려오지 않기를 바라며 저도 몰래 새여나오는 한숨을 느꼈다. 머리속에 떠올릴수 있는 업체들의 리스트를 재빨리 회전시켰다. 그러나 결제 프로세스에 갑자기 생긴 구멍을 메워줄 업체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찾아야 했다. 결제를 제때에 해주지 못해서 원단을 공급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여서는 절대 안되였다. 전화기를 다시 귀가에 대고 역시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상황을 알겠으니까 회계로서도 다른 대안이 있나 잘 검토해보고, 나도 될수록이면 빨리 회사로 들어가도록 할게. 홍은 샌드위치와 커피잔을 손에 든채 박람회장을 빠져나왔다. 차를 원단시장쪽으로 향했다. 원단시장행은 원래 오늘 스케줄에 계획 없던것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잘 지켜오던 원단구매금액 결제시간을 지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뒤로 미룰수 밖에 없었다. 그건 자칫 원단공급상들에게 신용을 잃는 결과로 이어질수도 있는것이였고 원단공급업체앞에 신용을 잃는다는건 공장운영을 하지 말라는것과 같은 결과로 이어질수도 있는 상황이였다. 당연히 래일 회계가 원단공급업체들마다에 전화를 해서 량해를 구하고 결제일을 뒤로 미뤄달라고 사정해보겠지만 그러나 상황을 이미 보고받은 이상 사장인 자기가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홍은 결단내렸다. 전화상으로가 아닌, 직접 방문으로 매장마다를 일일이 찾아서 돌며 량해를 구하고 원단의 지속적인 공급을 요청해야만 하는 상황이였다.      5. 이번엔 바퀴벌레였다. 아까 전화에서 안해는 홍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침실 옷장안에 바퀴벌레가 숨어있는것 같아요. 다행히 두통을 호소해오는것이 아니여서 약간 안도의 숨이 나가기는 했으나 그러나 홍은 안해의 목소리에서 두통을 호소해올 때보다도 더 큰 불길함을 감지해야만 했다. 가슴을 와당탕 치고 올리받치는 순간적인 고통의 관통을 느껴야 했다. 그래도 아무 일 아니라는듯 껄껄껄 웃음을 전화에 쏟아부어넣었다. -아 그럼 사람 사는 집에 바퀴벌레 한두마리 함께 사는것도 정상이지… 그놈들도 사람 사는 집이니까 찾아들지 사람 없는 빈집이면 찾아들겠어? 그놈들도 좋은 사람의 따스한 인정이 그리웠던 모양이지 뭐. 당신 좋은 사람이잖아… 아빠트 엘레베터앞 복도에서도 그리고 주방에서도 바퀴벌레는 심심찮게 발견되군 했다. 아열대지방의 무더운 기후는 음식물 쓰레기들을 쉽게 부패하게 했고 그래서 이 도시에서 바퀴벌레와 쥐를 발견하는건 일상 다반사였다. 안해도 집 주방에 가끔 바퀴벌레가 출몰하고있는걸 언녕부터 알고있었다. 바퀴벌레가 발견될 때마다 녀성 특유의 호들갑을 떨며 징그럽다고 진저리치군 했던 안해였다. 그런 안해가 꼭 마치 오늘 처음 바퀴벌레의 존재를 발견한듯 전화까지 해오는건 냄새에 과민반응을 보여오던것 못지 않게 홍에게 미리 불안한 긴장감을 던져왔다. -여보, 롱담할 때가 아니라니깐요. 정말 우리 집에 바퀴벌레가 살고있는것 같단 말이예요. 당신 휴대폰을 귀 가까이 대고 잘 들어봐요. 사락사락하는 소리 들리지 않아요? 바퀴벌레가 옷장안에서 옷을 갉아먹는 소리라니깐요… 홍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숨이 컥 막히는것을 느꼈다. 다리맥이 풀리며 그 자리에 물앉고싶어졌다. 그러나 홍은 용케도 잘 버텼다. -알았어. 나 화과산에 가서 손오공한테서 금방망이 얻어서 돌아갈테니까 당신은 아무짓 하지 말고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있어요. 나 저녁에 가서 금방망이 휘둘러서 그놈들 다 잡아서 납작하게 두드려줄테니까… 홍은 그렇게 롱담으로 안해를 달랬다. 그러나 가슴은 숨을 들이쉴수 없게 답답했다. 좁은 공간의 엘레베터에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전비상구 층계를 찾아 걸어내리는데 층계가 휘청휘청 하늘로 들리는것 같아서 벽을 짚고 한참 서서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저녁에 집에 도착했을 때 안해는 멀쩡했다. 이미 저녁 밥상을 다 준비해놓고 방긋 웃으며 홍을 맞이했다. 그러나 안해에게 가방을 넘기고 옷을 갈아입으려고 옷장문을 연 홍은 경악하고말았다. 옷장에는 옷이 한벌도 걸려있지 않았다. 옷장안은 텅 비여있었다. 돌아보는 홍에게 뒤에 따라섰던 안해가 조용히 한마디 던져왔다. -옷에 바퀴벌레들이 알을 너무 쓸어놔서 아까 다 내다버렸어요. 그리고 바퀴벌레 약을 사다 놨어요. 옷장안을 다시 들여다보니 과연 옷장안 바닥에는 가루약 같은것이 한층 뿌려져있었다. 고개를 둘러보았다. 벽을 따라 바닥 모서리로 약가루가 쭈욱 선을 그으며 뿌려져있었다. 홍은 갑자기 가슴이 꺽 막혀오는 통증을 다시한번 느꼈다. 오늘만 해도 두번째였다. 그러나 이번 통증은 아까 가죽도매시장에서 느꼈던 통증보다도 훨씬 더 강한것이였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나며 어지럼증이 왔다. 이대로 쓰러지고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속을 스쳤다. 안돼. 쓰러져선 안돼. 무너져선 안돼. 하늘이 무너져도 넌 버텨야 돼. 홍은 자신에게 웨치며 팔을 뻗어 옷장에 기대여 섰다. -당신 괜찮아요? 안해도 홍에게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급히 물어왔다. -아, 괜찮아. 나 좀 시원한 물… -얼음정수기도 버렸어요. 그 안에 바퀴벌레들이 둥지 틀고있어서요… 홍은 갑자기 안해를 그대로 안고 창문을 열고 아래로 뛰여내리고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너무 섬뜩한 충동에 스스로도 놀라며 홍은 아래입술을 피나도록 깨물었다. 입속에 흘러드는 그 피비린내 나는것을 꿀꺽 삼키고서야 홍은 숨을 내쉴수가 있었다. -잘했어. 밥 먹자… 홍은 웃으며 안해와 함께 식탁에 마주앉았다. 속으로 빌었다. 제발 오늘밤, 오늘밤만 무사해라. 정말이지 래일은 안해를 데리고 정신과병원에 다녀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홍은 이러다가 내가 오늘밤 먼저 미쳐버리고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밤 안해는 온 밤 자지 않았다. 남편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배려심으로 왼손엔 손전등을 켜들고 오른손엔 스프레이 살충제를 들고 집안 구석구석을 비추며 바퀴벌레사냥에 나섰다.   그런 안해를 말리지도 못하고 누워서 바라보며 홍 역시 온 밤 거의 실면했고 새벽에 잠간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홍은 침대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혼곤히 잠들어있는 안해를 차마 깨울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만 무사해라, 오늘 하루만 무사해라…   6. 홍은 그렇게 빌며 조용히 집문을 나섰다.   비가 내리고있었다. 아열대기후라 여름 우기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스콜처럼 비가 쏟아지군 했다. 그러나 이미 초겨울에 들어선 건조기때 내리는 아침비는 뼈속까지 오싹하도록 차거운것이였다. 다행히 크게 내리지 않아 홍은 가방안에 항상 넣고 다니는 우산도 펼치지 않은채 주차장까지 걸어서 갔다. 차에 오르기전 홍은 차옆에 서서 비에 씻겨 시원해진 겨울의 아침공기를 몇모금 더 심호흡해 들이마셨다. -그래, 괜찮을거야. 좋아질거야. 그랬다. 괜찮아져야 했다. 좋아져야 했다. 더 나은 삶을 살려고 이렇게 아득바득하는것이 아니던가.   차에 시동을 건 홍은 기분전환이라도 하려고 카오디오를 켰다. 홍이 운전할 때 즐겨 듣는 뮤직전문방송 채널에서는 미국 가수 스팅(Sting)이 부른 노래 프레절(Fragile)이 흘러나오고있엇다.   Fragile 연약한   If blood will flow when fresh and steel are one 날카로운 쇠붙이에 살이 부딪쳐 흘린 피 Drying in the color of the evening sun 저녁의 태양 빛과 함께 굳어진다면   Tomorrow's rain will wash the stains away 래일의 비가 그 피의 얼룩을 지워주겠죠   But something in our minds will always stay 그러나 언제나 우리 맘속에 머물러있는 그 무엇 Perhaps this final act was meant 아마도 그 마지막 행위는   To clinch a lifetime's argument 우리 한평생의 론쟁을 끝내려는것이겠죠.   That nothing comes from violence and nothing ever could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이룰수 없고   For all those born beneath an angry star 불운을 타고난 모든것들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깨우쳐주죠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계속해서 비는 내리리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떨어뜨리는 눈물처럼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떨어뜨리는 눈물처럼   On and on the rain will say 쉼없이 비는 속삭이리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쉼없이 비는 내리리  Like tears from a star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흘리는 눈물처럼   On and on the rain will say 계속해서 비는 말하겠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트럼펫과 첼로와 기타가 함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선률에 실려 흘러나오는 보컬 스팅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그 뜻깊은 가사로 더욱 홍의 가슴을 후줄근히 적셔주었다. 홍은 갑자기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걸 느껴야 했다. 억지로 눈을 슴벅이며 좌우로 흔들리는 와이퍼사이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래, 연약해선 안되였다. 보이지 않는 폭력에 둘러싸인 세상에 인간은 정말이지 너무나 연약한 존재였다. 저렇게 알수 없는 리유로 언제부터인가 무너져가고있는 안해와 그리고 그 안해옆에 강한 남자로 서있어주기에 너무 힘이 부쳐가는 요즘… 더 연약해져서는 안되였다. 홍은 량볼에 힘주어 어금이를 꽉 악물었다.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계속해서 비는 내리리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떨어뜨리는 눈물처럼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떨어뜨리는 눈물처럼   On and on the rain will say 쉼없이 비는 속삭이리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쉼없이 비는 내리리   Like tears from a star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흘리는 눈물처럼   On and on the rain will say 계속해서 비는 말하겠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눈앞 멀리 도로변에 새로 일떠서는 56층 고층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홍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그래, 새롭게 시작하는거야. 다 이겨내고 새롭게 시작하는거야. 그 고층건물 20층에는 홍과 안해가 이 도시에 와서 지금까지 분투해서 쌓아온 결과물이 300평방메터 면적의 사무공간으로 확보되여있었다. 날마다 치솟는 제조원가때문에 이제는 단순히 제조업만으로는 더 버티기 힘들었다. 중국도 이제는 제조업이 갈 때까지 간 시점이였다. 이젠 제조업에서 벗어나야 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다. 홍과 안해는 합의를 보았다. 홍은 그냥 제품제조를 책임지고 공장운영을 이끌어가고 안해는 사무실을 따로 내고 온라인상거래 부서를 새로 구성해서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직접 온라인에서 판매하는데 도전해보기로 했다. 만들기만 해서는 기업을 살려나가기가 점점 힘들었다. 팔줄 알아야 했다. 시장에서 팔줄 아는자가 살아남을수 있는자였다. 그래서 홍은 재작년부터 지하철역을 옆에 끼고 새로이 일떠서기 시작하는 오피스텔 고층건물을 눈여겨보다가 작년 년말 과감히 투자했다. 지금까지 공장을 경영하면서 모아온 돈을 탈탈 털어 선불금을 내고 십년 은행 할부 조건으로 300평방메터의 공간을 분양받았다. 그 건물이 한달전에 업주들에게 공식적으로 사용 인계되였고 홍은 그 즉시로 사무실 인테리어에 들어갔다. 인테리어회사에 맡겼지만 그러나 업주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자칫 눈속임 부실공사로 이어질수 있어서 홍은 이틀이나 사흘에 한번씩 지나가는 길에 그 건물에 들려 인테리어 진행상황을 체크하군 했다. 인테리어가 끝나면 당장 사무기구를 갖추고 안해에게 그 사무실 키를 넘겨줄 작정이였다. 그런데 그 새로운 중임을 한몫 맡아줘야 할 안해가 지금 저렇게… 후유… 다시 터져나오는 한숨을 고개를 저어 털어버리며 홍은 그 고층 오피스텔 건물을 지나쳐 공장이 있는 공단으로 향했다.   7. 아직 채 끝나지 않은 스팅의 프레절 노래 후렴구가 딱 멈춰지며 높은 오디오소리로 전화벨소리가 울린건 그때였다. 블루투스로 휴대폰과 카오디오가 자동 련결되여있었던것이다. 홍은 전화벨소리에 훌쩍 놀라는 자신을 발견했다. 리유없이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온 하루 거의 전화기를 붙들고 싸우다싶이 해야 하는 홍에게 전화벨소리는 절대 기피대상이 되여서는 안될것이였다. 그러나 요즘 홍은 전화벨소리에 많이 민감해져있었다. 혹시 또 하는 마음속으로 미리 밀고 들어오는 불안함때문이였다. 네비게이션 액정 화면에 뜬 번호는 역시 혹시나 했던 안해의 번호였다. -당신 미안해요… 아침도 챙겨드리지 못하고… 안해의 목소리는 멀쩡했다. 목소리로만으로는 안해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있는것 같았다. 혹시 안해는 간밤 자신이 온 밤 자지 않고 바퀴벌레사냥을 했다는것을 모르고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그랬으면싶었다. 자신이 저질렀던 그 기이한 행각들을 다 기억하고있다면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온 지금 안해 스스로도 자신의 그 이상한 행동을 리해할수 없어서 더욱 미치고싶어질것이였다. 홍은 그게 더 걱정이 되였다.   -아, 괜찮아… 당신 혼자 아침을 꼭 챙기고… 나 오늘 될수록 일찍 집에 들어가도록 할게. -그런데 당신 지금 어디예요? 안해는 느닷없이 홍의 위치를 물어오고있었다. 홍은 또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응… 지금 막 우리 새로 분양받은 오피스건물을 지나고있어. 이십여분이면 공장에 도착할거야… -아아악… 갑자기 카오디오에서 안해의 울부짖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신 그 건물 빨리 지나쳐요. 그 건물 지금 막 무너지려 하고있단 말이예요. 안해는 전화기 저쪽에서 막 다급히 소리지르고있었다. 아닌 밤중에 이 무슨 홍두깨 내미는 소리란 말인가. 그래도 홍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방금 지나친 그 건물을 뒤쪽 유리창너머로 얼핏 쳐다보았다. 멀어져가는 그 고층건물은 멀쩡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야? 지금 막 새로 일떠선 건물이 왜 무너진단 말이야… 홍은 저도 몰래 흥분되여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건물 불량시공으로 지어진 위험한 건물이란 말이예요. 그 건물 지하받침 구조물이 무너지고있는 소리가 지금 막 들린단 말이예요. 홍은 갑자기 숨이 꺽 막혀오고 귀가 멍멍해나면서 오디오에서 터져나오는 안해의 그 다급한 고함소리가 메아리로 멀리서 맞혀 들려오는것처럼 들렸다. -건물 멀쩡하니까 걱정 잡아매고 당신 잠 좀 더 자요… 당신 잠이 모자라서 그래요… 자신의 목소리도 먼 산에 부딪쳤다 되돌아오는 울림처럼 들려와 홍은 아뜩한 현기증을 느꼈다. 마침 옆골목으로 새여나가는 갓길이 보였다. 무조건 깜빡이를 켜고 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차들이 뜸해진 곳까지 어떻게 차를 운전했는지 모르며 홍은 브레이크 밟아 차를 세우며 왼손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숨이 막혀 막 터질것만 같은 가슴이였다. 운전석과 조수석사이에 있는 수납공간에 항상 비치하고있던 물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안돼, 안돼, 숨을 쉬여야 해. 막힌 숨을 뚫어야 해… 눈앞이 캄캄해져오는 자신에게 홍은 악을 바락바락 쓰며 속으로 웨쳤다. 전화가 끊어진 카오디오에서는 다시 스팅의 프레절 노래가 후렴구로 반복되여 울려나오고있었다.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계속해서 비는 내리리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떨어뜨리는 눈물처럼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떨어뜨리는 눈물처럼   On and on the rain will say 쉼없이 비는 속삭이리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쉼없이 비는 내리리   Like tears from a star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흘리는 눈물처럼   On and on the rain will say 계속해서 비는 말하겠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8. 그날 오후 홍은 날이 어두워지기전에 공장 사무실을 나섰다. 오랜만의 조기퇴근이였다. 아까 점심때부터 홍이네 공장이 위치한 블럭의 건물들에만 느닷없이 정전사태가 발생하여 홍은 아예 오후 휴업을 선포했다. 그리고 온 오전 걱정된 안해때문에 자신도 일찍 집으로 돌아가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홍은 손에 들었던 가방을 다시 내려놓고 혼자 사무실에 남아 그새 밀린 일들을 처리하는데 몇시간을 보냈다. 아침 출근길에 안해의 전화 사태로 갑갑해진 가슴은 온 하루 더해만 지는 불안감으로 더욱 숨을 들이쉬기도 힘들게 답답함을 호소해왔고 홍은 몸은 공장에 있어도 신경은 온통 안해에게로 향해져있었다. 아침에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안해에게 전화를 걸어 무사히 공장에 도착했음을 알렸었다. 그러자 안해는 전화기 저쪽에서 엉엉 울었다. -당신이 안전하면 됐어요. 너무 걱정되였단 말이예요. 당신이 그 건물옆을 지나다가 무너지는 건물에 혹시 봉변이라도 당했을가봐… -여보, 나 지금 멀쩡하잖아… 당신 혹시 옅은 잠속에 꿈을 잘못 꾼것일수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 건물 멀쩡해. 무너지지 않아. -아니예요. 꿈이 아니예요. 지금도 그 건물이 밑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고 건물이 옆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모습이 내 눈에 보인단 말이예요. 안해의 증상은 심각했다. -당신 오늘 그 오피스텔 건물 부근에 절대로 다시 가선 안돼요. 우리 그 사무실 분양받은거 포기하면 돼요. 미련 갖지 말아요. 사무실 인테리어 걱정되여서 다시 가보면 절대 안돼요. 홍은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서 안해를 둘쳐업고 병원으로 달려가고싶었다. 그러나 그러나 홍은 두려웠다. 그렇게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는 안해를 대하면 자신이 먼저 미쳐버리고말것 같았다. 그런 안해를 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홍은 온 하루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꿈틀꿈틀 놀라면서도 그때마다 그 전화들이 안해에게서 걸려온것이 아님에 안도의 숨을 내쉬군 했다. 차에 올라 키를 돌려 시동을 걸며 홍은 하아… 하고 장탄식을 토했다. 막막했다. 집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기 겁났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고있었다. 안해는, 안해는 오늘 또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있을것인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아 아니, 감히 상상을 할수가 없어서 홍은 그렇게 멍하니 운전대앞에 앉아만 있었다. 도대체 어데서부터 잘못된걸가.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렇게 일욕심 많고 살림욕심 많던 안해였는데. 그렇게 자기 몸 헤아리지 않고 일에 매달려 둘이 함께 뭔가 자그마한걸 하나 만들어놓고 함께 그걸 키워가는데 그렇게 열성을 부리고 보람을 느끼던 안해였는데. 그런데 그런 안해가 지금…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싶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안해가 미쳐가고있는 집을 내놓고는 갈 곳이 없었다. 그래, 미치자. 같이 미치자. 나도 당신과 함께 미쳐주마. 홍은 그렇게 중얼대며 파크위치에 두었던 스틱을 드라이브 위치로 당겼다. 한창 퇴근시간대여서인지 길에 차가 많이 밀렸다. 엑셀을 밟는 시간보다 브레이크를 밟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렇게 굼벵이 기여가듯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는 차안에 홍은 그냥 후유~ 후유~ 가슴이 꺼질듯한 한숨을 이어갔다. 그렇게 해도 가슴속은 조금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분양받은 오피스텔 고층건물과 가까워질수록 그 한숨의 두께는 점점 두꺼워져갔다. 아침 안해의 전화때문일것이였다. 얼마를 기였는지… 멀리 그 건물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물들기 시작하는 석양빛을 받아 찬란한 빛을 눈 시리게 반사하는 건물을 바라보며 홍은 더구나 억장이 무너지는듯한 한숨을 토해내야만 했다. 이 도시에 와서 분투한 그 모든 피눈물의 시간들이 응고되여있는 저 건물속의 300평방메터 되는 작은 공간, 그 공간에서 새롭게 새롭게 시작하려 했는데 그 공간의 주인공이 되여야 할 안해는 무너짐을 호소해오고있었다. 무너질거라고, 그렇게 쌓아온 모든 시간들이 허무하게 다 무너질거라고 호소해오고있었다. 아, 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홍은 느닷없이 차의 속도를 높여 그 건물을 향해 돌진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안해가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기전에 자신을 먼저 파괴해버리는게 나을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나 그건 안될  짓이였다. 홍은 저앞에서 빛을 반사해 찬연한 건물을 바라보며 속으로 웨쳤다. -여보, 다 잊고 다 버리고 우리 다시 시작해… 우린 아직 젊잖아, 충분히 다시 멋있게 시작할수 있다구. 홍은 안해를 향한 그 호소가 역시 자신을 향한것임을 깨달으며 등받이 깊숙이 묻었던 허리를 쭉 펴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홍은 그 찬연한 석양빛속에 하얀 날개가 펼쳐지는것을 발견했다. 건물 꼭대기에 하얀 날개가 우아하게 펼쳐지고있었다. 홍은 갑자기 숨이 꺽 막혀오고 오금이 저려왔다. 아니야, 잘못 본거야. 착시현상이겠지싶어 급히 왼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눈을 크게 뜨고 차창너머로 그 건물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잘못 본게 아니였다. 직감으로 홍은 웨쳤다. 안돼! 안돼! 안해였다. 안해가 하얀 치마를 입고 그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서있었다. 홍은 본능적으로 오른발에 힘을 주었다. 엑셀을 콱 밟았다. 차가 튕기듯 앞으로 치고 나갔다. 쾅! 하고 앞차를 들이박으며 홍은 터져나오는 에어백의 충격에 정신을 잃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때 홍의 눈에는 자기 차를 둘러싼 사람들 너머로 저 앞에 고층건물에서 날아내리는 하얀 날개의 모습이 맞혀왔다. -안돼!!!! 홍은 울부짖으며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옆 문을 뛰쳐나갔다. 날개를 펼치고 날아내리는 안해를 받아안으러 두팔을 날개처럼 펼치고 그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간 홍은, 안해가 날아내린 그 건물의 밑에서부터 화산연기 같은 먼지파도가 치솟으며 건물이 기우뚱 도로쪽으로 크게 기우는것을 감지했다. 새로 일어선 건물이 정말 거짓말처럼 무너지고있었다. 스스로 긴 목을 꺾어 무너지는 기린처럼 그렇게 옆으로 살풋이 기울어지며 쓰러지고있었다. 홍은 무너지는 그 건물밑으로 두팔을 펄럭이며 날아 들어갔다.   출처:2017 제1호
14    [단편] 겨울낚시 (조광명) 댓글:  조회:526  추천:0  2017-10-03
단편소설   겨울낚시   조광명   1.  ‘묻지 마’ 겨울데이트   남자는 차 안에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차에서 내려 트렁크 뒤쪽으로 가 서있었다. 커다란 벤츠 SUV 차는 뒤꽁무니로 허연 김을 기세 좋게 토해내고 있었다. 그 흰 김이  남자의 청바지 아래부분에 부딪쳤다가 우로 연기처럼 피여오르며 바람에 휘휘 휘날려 흩어지는 것이 꼭 영화 속 어느 한 장면처럼 보여서 순간 문자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도 그 영화의 남자주인공처럼 꽤 멋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두 다리로 건강하게 서있는 남자가 부러웠다.   남자는 하얀색 두툼한 패딩을 입고 있었다. 그 나이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환한 색이 오히려 너무 생기차게 보기 좋았다. 눈에 맞혀오는 환한 옷색갈이 문자의 기분까지도 밝혀주는 것 같았다.   그 눈 시린 하얀색 옷에 비해 오히려 짙은 회색 등산복을 입고 검은색 두툼한 캐시미어 머플러까지 두른 자신의 옷차림이 너무 생기 없는 색갈로 둔중해 보이는 것이 아닐가 살짝 로파심이 들어 문자는 저도 몰래 고개를 숙여 머플러를 다시 다듬었다. 어제 남자가 전화 와서 오늘 옷을 최대한 가장 두터운 것으로 골라 입고 신발도 가장 따스한 것으로 골라 신으라고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서 든든하게 차려입은 겨울 옷차림이였다.   아직 남자와 눈이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괜히 얼굴이 약간 화끈거려나며 가슴 속에서 콩콩 작은 강아지 한마리가 뛰노는 것 같았다. 아 뭐 나쁜 사람 만나는 것도 아니고 어데 나쁜 일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그냥 잘 알고 지내던 동네 오빠를 한번 편하게 만나는 것 뿐인데.   급히 속으로 변명을 찾는 자신을 발견하며 이제라도 돌아서서 다시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게 옳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잠간 스쳤다. 그러나 문자는 자신의 그런 생각에 강하게 반기를 들고 뭐가 어때서? 괜찮아. 하고 더 강하게 자신의 오늘 외출을 두둔해 나서며 남자 쪽으로 걸어나가도록 두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주는 힘을 느꼈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문자를 발견한 남자의 눈빛이 금세 부드러워지며 얼어서 굳어졌을 얼굴이 환한 미소로 활짝 펴졌다.   -생각보다 날씨가 많이 춥네. 그래도 괜찮지?   추운 날 불러낸 것이 미안하다는 듯 남자는 사과의 뜻부터 전해왔다.   -아니요, 시원하고 좋네요.   문자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 청량한 겨울하늘의 공기 만큼이나 시원하게 울려나오는데 움찔 놀랐다. 나도 연기기질이 있나 봐. 이렇게 씩씩한 체 대답할 줄도 다 알다니. 문자는 그런 자신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남자는 차 앞쪽 오른쪽 도어를 미리 열고 문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려줬다. 문자의 몸뚱이가 그래도 꽤 사뿐하게 올라앉기를 기다려 오른손을 뻗어 직접 안전벨트를 당겨 핸드백을 들지 않은 문자의 왼손에 쥐여주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꽤 자상한 남자네…   집 실내처럼 이미 충분히 덥혀져있는 차 안의 공기가 방금 잠간 찬바람에 움츠러들려 했던 얼굴 근육을 다시 편안하게 간질여 펴주었다.   문을 닫아주고 차 앞쪽으로 돌아 운전석에 올라탄 남자가 자기의 몸에 안전벨트를 감고 운전대를 잡으며 어떤 버튼을 살짝 터치하자 차는 미끄러지듯 앞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지금껏 문자가 앉아봤던 차들과 다른 조작방식으로 출발하는 차였다.   그제야 차 실내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차에 대해서 별로 연구가 없어서 잘 모르긴 해도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무척 고급스러웠다. 좋긴 좋은 차였다. 이 작은 시가지에 이런 차량이 몇대 되지 않을 정도로 비싸고 성능 좋은 호화급 차량이라는 건 예전에 동창들 모임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남자의 부인은 문자네 한 학과 한 학급 동창이였다. 단연 그래서 이 차량도 한때 동창들 입에 회자되였던 적이 있었다. 작은 시가지이지만 그래도 집값이 웬간히 오른 이 도시에 웬만한 아빠트 두채 값보다도 더 비싼 자가용을 굴리는 남편을 둔 동창을 녀자동창들은 부러움 반 질투 반 담아 입에 떠올리군 했었다.   -자 출발합니다. 어데로 모실가요?   차가 문자네 동네를 벗어나 도로에 들어서자 남자가 옆에 앉은 문자를 돌아보며 경어체로 익살스럽게 물어왔다. 그제야 문자는 어제 남자가 전화 왔을 때 오늘 목적지에 관해 물어오지도 알려주지도 않고 무작정 오늘 낮시간을 몇시간 빌려도 괜찮냐고만 물어왔던 걸 떠올렸다. 남자의 물음에 작은 소리로 네,  괜찮아요. 하고 대답하기만 했지 어데로 가서 뭘 할 건지는 묻지 않았던 자신을 그제야 떠올리며 그렇게 쉽게 대답해버린 자기의 어떤 내면을 들킨 것 같아 괜히 약간 어색해났다. 어제는 왜 묻지 못했을가, 무슨 일이냐고, 어데로 갈 거냐고… 당연히 물어야 할 것을 왜 묻지 못하고 그리 쉽게 대답했을가.   왜 그리 못나게 남자가 일방적으로 약속해오는 대로 “좋아요”만 대답했댔을가. 쉬운 녀자처럼. 기다렸던 녀자처럼.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데 괜히 부끄러워지며 뭐라고 대꾸할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문자의 입에서는 어느새 다른 엉뚱한 대답이 부끄러움이나 궁색함 같은 것을 하나도 담지 않은 목소리로 위장되여 튀여나가고 있었다.   -그니까,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궁금했고 그 궁금함이 지금 이 순간 더 궁금해져서 꽤나 재밌다는 어투였다.   추운 날이지만 따스하게 미리 가열되여있은 차 시트의 온기가 엉덩이로부터 노긋하게 온몸으로 올리퍼지기 시작해서일가, 마음도 함께 많이 느긋해졌다.     -그럼 추운 날이니까 더 추운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남자는 이번에도 말끝에 경어체를 사용하며 아직은 비밀을 채 털어놓을 수 없다는 어투로 신비스럽게 내뱉았다.   몸이 등받이 쪽으로 밀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 차는 이미 저만치 앞에 달리던 차를 왼쪽으로 추월해 앞으로 튕겨나가고 있었다. 이틀 전 눈이 적지 않게 내렸는데 도심 속 아스팔트길에는 눈이 쌓여있지 않았다. 차량이 별로 많지 않아 뻥 잘 뚫린 포장도로가 예전보다 많이 넓어진 것처럼 앞쪽 시야가 확 트이여서 문자의 가슴도 시원히 열리는 것 같았다.   시내 중심가를 지나 먹거리골목도 지나고 다시 외곽으로 뻗어나가는 한적한 도로로 차가 접어들었을 때 문자는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데로 가는 거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문자의 의중을 읽었는지 왼손을 핸들에 올려놓은 채 느긋하게 앞을 보며 운전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문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멀지 않아. 시내를 벗어났으니까 이제 20분 쯤 더 달리면 도착해.   역시 목적지가 어딘가는 말해주지 않았다. 이전처럼 돌아가 편하게 말을 놓고 이야기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문자도 고개를 끄덕여 웃어주었다. 무슨 꿍꿍이속이 이리도 깊지? 아무려나… 오늘은 그냥 바퀴 따라 굴러가는 인생이 되는가 보다.   몰라도 좋았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도 목적지를 알고 달려온 게 아니였다. 잘되겠지, 힘든 시간은 끝나겠지, 더 나아지겠지, 태여났으니까, 사는 거니까… 그냥 그렇게 살다 보니 웃는 날도 많고 우는 날도 더러 있으면서 지금 이때까지 벌써 60년 넘게 살아오고 있었다. 이제 더 살아가야 할 나머지 인생은 어떤 것일가는 더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 궁금해 한다고 바뀌고 해결될 건 하나도 없었다. 하물며 옆에 앉아 차를 몰고 있는 남자는 문자보다도 인생을 몇년은 더 살아온 인생 선배였다.   지금 차 안에 두사람중 한사람은 목적지를 모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중 한사람은 목적지를 잘 알아 헛길 달리지 않고 그 목적지를 향해 곧장 잘 달려가고 있지 않는가. 함께 길에 오른 이상 믿고 함께 달려가주면 될 것이였다. 그 상대가 누구든.   지금 달리는 것도 오늘의 삶이고 도착해 내릴 곳 역시 오늘의 삶이 펼쳐지는 곳일 것이다. 그것만 믿으면 되였다.   -오빠랑 함께 진짜 오랜만이네.   -그래, 한 40년 되였지?   어렸을 적 문자와 남자는 원래 한 동네 아래웃집에 살았었다. 남자는 문자의 오빠 친구였고 동네서 키꼴이 제일 장대하고 덩치도 우람져서 중학교 때 현성에 있는 체육학교에 권투 특기생으로 뽑혀갔다. 후에 문자네가 현성으로 이사하면서 주말이면 늘 문자네 집으로 친구를 찾아 놀러 왔고, 그때 문자 눈에 남자는 참으로 다부지고 훤칠하게 멋진 오빠였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한때 잠간 남자답게 어깨가 떡 벌어진 오빠 친구를 작은 가슴 활랑이며 쳐다보기도 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제부터였던가 대학교에 붙어서 지금의 남편이 된 한 학급의 남학생과 련애를 시작하면서 그렇게 덩치 크고 멋졌던 오빠의 친구는 문자의 가슴에서 잠간 들어오려 했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그냥 그렇게 증발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되였겠죠…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근데 문자 너, 어렸을 적 모습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거 알고 있어?   -그래요? 간직하고 있어선 뭘해요? 이젠 늙어서 주름살 주글주글한 로파가 다 되여가는데.   저도 몰래 고개를 기웃해 앞쪽 천정에 매달려있는 백미러에 눈길이 가며 그 속에 비쳐진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였다.   -꼭 혼자 늙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그럼 나는 뭐 안 늙냐. 하긴 우리 다 늙었지. 아니야, 그래도 넌 그냥 어릴 때 귀여운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귀여웠던가 내가…   문자는 어렸을 적처럼 지금도 그냥 귀엽다는 남자의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차는 이제 차량이 다닌 바퀴자욱 두줄로만 흙모래가 드러나 있고 다른 곳은 흰눈으로 덮여 있는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2.  얼음호수 우에 작은 궁전 하나   남자가 차를 세운 곳은 그렇게 몇분 달리던 비포장도로에서도 오른쪽으로 새여나간 좁은 흙길로 몇분 더 달려서 도착한 황량한 들판 같은 곳이였다.   -자,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남자가 버튼을 눌러 안전벨트를 풀며 다시 출발할 때의 그 익살궂은 표정을 얼굴에 피워올렸다. 계기판 아래 수납케이스를 열고 그 안에서 두툼한 장갑을 꺼내여 문자에게 넘겨주었다.   -끼고 온 그 장갑, 얇아서 손이 시려 안될 거야. 그 우에 이걸 한층 더 끼면 많이 따스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어떤 버튼 하나를 눌렀다. 뒤쪽에서부터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들어오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더니 차량 백도어가 자동으로 우로 올라가고 있었다.   뭐야, 이 황량한 벌판에… 이 추운 날… 뭘하러…   의문이 들었으나 묻지 않고 머플러를 꼭 다시 여몄다.   그러건 말건 남자는 차에서 내려 차 뒤쪽으로 가더니 미리 실어놓았던 배낭 같은 커다란 짐 두개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남자가 마지막으로 손에 든 건 끝이 창끝처럼 뾰족하게 날이 서있는 길다란 금속체였다. 어렸을 적 많이 보아왔던 물건이였다.   어렸을 적 집에도 저런 게 하나 있었던 것 같았다. 거의 자기 손목 만큼 실하고 길이가 자기 키보다도 더 길게 큰 그 무거운 쇠몽둥이 같은 것을 아버지가 가뿐하게 손에 들고 겨울 뒤간에 얼어붙은 배설물들이랑 쾅쾅 곡괭이질 하듯 두엄장처럼 떼여내군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걸 뭐라 하던가? 토박이말로 빙창이라고 했던가 쇠창이라고 했던가. 문자는 그냥 쇠창이라고 불렀던 것 같이 기억되였다.   차키에 있는 버튼을 눌러 백도어를 잠근 남자가 차에서 내려 옆에 다가오는 문자의 손에 그 쇠창을 넘겨주었다. -잠간 이걸 들어줘.   배낭을 두개 량손에 들더니 옆에 약간 올리솟은 둔덕 우로 올라섰다.   -눈이 신발안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 내가 디뎠던 발자욱 그대로 밟고 따라와.   그렇게 성큼성큼 걷는 남자 뒤를 문자는 코 꿰여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졸졸 따라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추운 날, 눈 덮인 황야. 인적 없는 이 황량한 들판을 걷는 두 늙은 남녀의 모습이라니… 문자는 스스로도 지금의 이 상황이 꼭 극중의 어느 한 장면인 것 같아서 못내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몇십메터 쯤 걷자 눈에 덮였지만 그래도 번뜩번뜩 얼음날들이 보이는 겨울호수가 왼켠에 나타났다. 남자는 그 호수를 향해 낮은 언덕을 내려갔다.   아…   문자는 이제야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혹시 저 겨울호수에 얼음구멍을 내고 산소를 찾아 그 구멍으로 몰려드는 물고기들을 그물로 건지러 온 것일 수도 있었다.   어렸을 적 집에서 학교를 오가는 길옆에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는 그 호수 우에서 얼음지치기도 놀고 썰매도 타군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얼어서 잘 다져진 흙길로 걷지 않고 일부러 그 호수우를 가로질러 걸으며 학교를 가는 아침이면 오빠는 호수 옆 마른 풀숲에 숨겨두었던 커다란 돌멩이를 찾아들고 남들이 잘 다니지 않는 호수 썩 안 쪽으로 걸어들어가 두텁게 언 얼음을 쾅쾅 두드려 댔다. 열번, 스무번 찧었던 곳을 자꾸 찧으면 얼음에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을 둘레 두뼘 쯤 되게 더 넓혀 뚫고 오빠는 맨손으로 그 얼음구멍에 떠있는 얼음조각들을 건져서 눈밭에 던졌다. 그 때 쯤이면 개털모자를 쓴 오빠의 이마에서 흰 김이 몰몰 솟아올랐다. 다시 그 돌멩이를 마른 풀숲에 감추고 돌아와서 문자 손에 들려 있던 책가방을 받아 어깨에 메면서 오빠는 성취감이 넘치는 뿌듯한 목소리로 말하군 했다.   -저녁에 돌아올 때 보면 저 구멍에 물고기들이 잔뜩 얼어붙어있을 거야. 그거면 오늘저녁 맛있는 반찬이 돼.   정말 그랬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얼음구멍을 찾아가 보면 신기하게도 손바닥 만한 붕어랑 버들치들이 주둥이를 우로 향하고 벌린 채 다닥다닥 얼어붙어있었다. 꼭마치 오빠가 그 얼음구멍에 대고 물고기들아 이 곳에 집합해라 하는 주문을 걸어놓은 듯이 열마리, 스무마리도 더 되게 촘촘히 얼어붙어있던 물고기들. 낮 사이에는 밤 사이보다 얼음이 덜 얼어붙어 아침때보다 얼음을 까는 돌멩이질이 훨씬 쉬웠다. 오빠가 손을 넣어 건져서 눈밭에 던지는 물고기들을 주어서 더러 아직 대가리에 붙어있는 얼음을 털고 탁탁 눈까지 털어 미리 준비했던 주머니에 주어담는 건 항상 문자의 몫이였다.   잊고 있었던 그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이 문자는 신기했다. 그 때 그 오빠는 반년 전에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고 지금 문자 앞에는 그 오빠의 장례식장에서 몇십년 만에 다시 얼굴을 대했던 어릴 적 동네 오빠가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다.   호수 중앙쯤 되는 곳에 이르자 남자는 발걸음을 멈췄다. 바람에 날려 눈이 아직 둥지를 틀지 못했는지 투명하게 얼음이 드러나 있는 곳이였다. 오랜만에 밟아보는 투명한 얼음이였다. 미끌어져 넘어질가 몸을 낮춰 조심하며 문자는 얼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얼음 아래로 썩어가고 있는 듯 생기를 잃고 축 처진 수초들이 보이고 그 수초들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검은색 흙모래 바닥이 다 내려다 보였다.   밑바닥이 보일 정도로 물이 얼마 없이 얕은 호수였다.   -자, 도착했습니다.   -겨울 물고기잡이 하려구요?   -그래. 이젠 눈치챘구나. 날씨가 좀 춥긴 하지만 오랜만에 재밌지 않겠어?   -이렇게 얕은 물에 물고기들이 있겠어요?   -옛날엔 호수마다 물이 넘쳤는데 지금은 시골에도 물이 많이 줄어서인지 깊은 호수가 별로 없어. 얕아도 물이니까 물고기들은 놀고 있겠지 뭐. 설마 다 얼어죽기야 했겠어?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더니 그중 한 배낭을 열고 그 안에서 잘 접힌 오렌지색 천 한다발을 꺼냈다. 그리고 세뼘 쯤 길이로 꺾어 한웅큼 묶어 담고 있던 새끼손가락 굵기의 쇠줄토막 같은 것도 꺼내들었다.   -문자 너 춥겠는데 텐트부터 치자.   남자는 그 오렌지색 천들을 펼쳐 땅에 펴고 꺾어져 있던 쇠줄토막 같은 것을 펴서 한데 이어 길게 만들었다.   문자가 옆에서 거들자 금방 투명한 비닐창문까지 달린 텐트가 완성되였다. 눈 덮인 얼음강판 우에 오렌지색 작은 ‘집’이 생겨났다. 남자는 그 안에 두툼한 방석까지 넣어주었다.   -자, 우리 문자녀사님을 이 바람막이 겨울궁전 안으로 모십니다.   오른손으로 지퍼가 달린 ‘앞문’을 들어 열고 어서 안으로 드세요 하는 포즈를 취했다.   남자의 그 나이에 걸맞지 않는 익살스런 행동이 재밌고 우스웠으나 문자는 선뜻 그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색했다. 아무 인적 없는 이 허허벌판에 늙은 몸이지만 그러나 달랑 남녀 단둘인데 잠간새 만들어진 ‘집’ 그리고 녀자더러 그 집안으로 들어가라는 남자, 들어가면 꼼짝없이 잡히고 말 신세가 되고 만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던 건 아직 마음속에 녀자로서의 방어본능이 조금이라도 남아있기 때문이였을가. 아직 내게 남자를 찌를 가시 같은 것이 남아있기나 한 걸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안 들어가겠다고 피해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서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문자를 보며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들어가면 범에게 잡혀 먹힐가봐 겁나셨구나. 호랑이래도 이젠 이 빠진 호랑이니까 무서워 마세요. 호랑이굴 아니니까 걱정 말고 어서 들어가세요.     문자의 마음을 다 읽고 있다는 듯 골려주었다. 그 호탕한 웃음과 롱담은 문자의 어색함을 풀어주는 묘한 전염성을 띠고 있었다. 문자도 덩달아 웃을 수 있어 좋았다.   -아니요, 왔으면 함께 움직여야죠. 나도 겨울고기 어떻게 잡는지 알아요.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고 문자는 명랑한 목소리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목소리로 자신을 해방시키자 괜히 기분이 들떠지며 진짜로 방금 전까지도 예상 못했던 겨울 물고기잡이에 문자도 이젠 적극적으로 참여해 즐기고 싶어졌다. 참으로 몇십년 만인가. 추워서 손발이 시리고 코등이 얼어들고 머리에 두른 수건에 흰 성에가 두툼히 앉아도 즐겁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겨울 물고기잡이.     -아직은 문자가 할 일이 없으니까 그냥 들어가 앉아있어. 옷 속으로 한기가 배여들면 추우니까 아직 몸이 추워지기 전에 어서 들어가.   달래듯 문자의 어깨를 다독여 텐트 안으로 밀어넣었다. 별로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 같았는데 두겹으로 만든 것이 튼튼한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는지 텐트 내부는 생각보다 바람기 한점 없이 아늑했다. 찬바람이 직접 얼굴을 덮쳐오지 않고 옷 속으로 파고들지 않아 좋았다.   문자가 들어가 앉자 남자는 다른 한 배낭에서 담요 하나까지 꺼내여 문자의 무릎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젤리 같은 내용물이 들어있는 손바닥 크기의 비닐 포장물을 두개 꺼내더니 문자의 손에 쥐여주었다.   -핫팩이야. 두 손으로 힘주어 주무르면 금방 따스해 날 거야. 그걸로 얼굴도 덥히고 손도 덥히고 해. 난 얼음구멍을 끌게.     남자는 문자가 눈판 우에 내려놓은 쇠창을 주어들더니 텐트 앞 둬메터 쯤 되는 곳의 얼음을 묘준하고 높이 들었다 힘있게 내리박기 시작했다.   탕, 탕…   창끝이 얼음을 내리찍을 때마다 호수를 두텁게 덮은 얼음 전체가 다 꿈틀꿈틀 놀라 잠에서 깨는 듯 쩌렁쩌렁 청청-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크게 울려퍼졌다.   문자는 남자가 알려준 대로 핫팩을 두 손 안에 주물렀다. 진짜 금방 따스해 났다. 세상에 신기하게… 별난 게 다 있었다. 문자는 그 핫팩을 얼굴에 댔다. 따스한 온기가 금방 가슴 속에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커다란 덩치대로라면 그리고 한때 주먹이 세기로 소문났던 남자로 보면 너무나 독단적이고 데면데면할 것 같은데 답지 않게 너무나 자상한 남자였다. 문자의 의사 같은 건 묻지도 않고 행선지를 혼자 정하고 오는 길 내내 알려주지도 않고 이 황야의 얼음판 한가운데 훌 ‘던져놓은’ 건 좀 독단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독단’도 문자에게 뜻밖의 놀라움을 선사하기 위한 깜짝이벤트 내용으로서의 준비된 ‘잔꾀’였다면 충분히 그 ‘독단’에 속으로 박수를 보내줄 만했다.   문자는 그 독단으로 이렇게 자신이 겨울텐트 안에 방석 깔고 담요를 덮고 앉아 예전에 누려보지 못했던 ‘호강’을 누리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설화 속에 나오는 백설공주인들 이런 호강을 누려보았을가. 실감이 나지 않아 혹시 자신이 지금 비현실 속에 들어와 앉아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문자 앞에 두 다리를 튼실하게 벌리고 우뚝 서서 쇠창으로 얼음을 힘차게 내리찍고 있는 남자는 문자에게 이 모든 것이 믿어도 좋은 현실진행형임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남자의 두 다리가 지금 이 호수 우의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처럼 튼튼하게 보여 너무 부러웠다. 드디여 남자의 쇠창이 두터운 얼음층을 뚫고 구멍을 내기 시작했는지 남자는 다시 허리를 숙여 가방에서 그물조리를 꺼내들었다. 그 그물조리에 방금 깬 얼음들을 담아 건져 옆의 흰눈 우에 부어 던졌다.   -그 정도 크면 이젠 됐지 않아요?   앉아있기 심심해진 문자의 입에서 ‘잔소리’가 나가기 시작했다.   -그치? 이 정도면 되겠지?   -오빠가 힘들면 내가 도와드려요?   -네가? 하하하, 쇠창이 배 끌어안고 웃다가 부러지고 말겠다.   남자가 쇠창을 지팽이처럼 짚고 서서 문자를 내려다 보며 껄껄 웃었다. 허연 입김이 남자의 입에서 연기처럼 피여올랐다.   다시 쇠창을 들어 몇번 힘차게 내리찍더니 남자도 힘들었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쇠창을 옆에 던졌다.   -고기들이 안에 노는 게 보여요?   -아니, 아직 먹이를 던져주지 않았는데 벌써 모이겠어?   -먹이를 던져줘야 모여요?   -그럼. 먹이를 안 주는데 고기들이 왜 모여? 먼저 뭔가를 줘야지. 고기들도 인간들과 꼭같애. 공짜에 약해요.   남자는 높임말과 낮춤말을 맞춤하게 잘 섞어 전혀 어색함 없이 사용했다.   말을 하며 남자는 텐트 쪽으로 걸어와 텐트 옆에 눕혀놓았던 배낭에서 비닐봉지 하나를 찾아서 꺼내들고 다시 얼음구멍 쪽으로 갔다. 봉지에서 가루 같은 것을 한줌 꺼내여 방금 만든 얼음구멍으로 흘려넣었다. 문자는 그것이 고기들을 유인해 올 고기밥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다시 텐트 쪽으로 오더니 가방에서 앙증맞게 생긴 낚시대 두개를 꺼내들었다.   아, 산소를 찾아 얼음구멍으로 몰려드는 물고기들을 그물로 건져서 잡으려는 게 아니구, 얼음구멍에 낚시를 드리워 고기를 낚으려 하는 것이였구나.   문자로서는 처음 해보는 겨울낚시여서 부쩍 구미가 동했다. 륙십이 넘은 가슴에 동심이 다시 파릇파릇 살아나려 하는 것 같았다.     -자, 이젠 슬슬 본격적으로 낚시준비 해봅시다.   이미 방석에서 엉치를 떼고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온 문자에게 아이들 놀이감 같은 짧은 파란색 낚시대 하나를 넘겨주며 남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문자는 그 낚시대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 낚시대가 어쩜 이렇게 앙증맞게 귀여울 수가 있지? 아기낚시대, 귀여운 아기낚시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낚시대에 감겨져 있던 낚시줄을 풀자 겨우 50센치도 안되게 짧아보였다. 그래서 더욱 장난감처럼 보였다. 문자의 가슴에 대뜸 그 낚시대 색갈 같은 파란 물이 들었다. 문자는 아기낚시대를 든 아기가 되여 아기물고기들과 놀고 싶어졌다.   어제 남자의 전화를 받고 무조건 네 하고 응대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며칠 전 남자를 병원에서 다시 만났을 때 전화번호를 주고받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 그렇게 련락처를 주고받으며 미리 오늘의 이런 얼음구멍 겨울낚시질을 예견하고 이 며칠 동안 이 남자의 전화를 기다렸던 것일가.     3.  녹쓸어 삐꺽거리는 몸뚱이인 것을   어제아침까지만 해도 그랬다. 일어나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안치고 전기를 누른 후 남편 몸을 닦아줄 더운 물을 받으려고 순간온수기가 설치되여 있는 화장실로 향하며 문자는 저도 몰래 바지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여 혹시 그 사이 미확인 전화가 없나 확인해 보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지금 누구의 련락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아버지 건강이 걱정되여 문안전화를 드문드문 해오는 아들과는 어저께 통화했으니까 며칠 내로 다시 전화 올 일은 없을 거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자 나흘 전 병원 문앞에서 마주쳤던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는 데 약간 놀랐다.   내가 지금 정말 그 남자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걸가?   -며칠 내로 련락 꼭 할 거니까, 만나서 식사도 함께 하고 그래.   나흘 전 병원 문앞에서 마주쳤을 때 련락처를 달라고 하며 그 남자가 했던 말을 아직 머리속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다시 떠올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문자는 입가에 쓴웃음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귀가에 얇은 여운의 보호막처럼 달라붙어 잘 털어지지 않는 건 이상했다.   몇십년 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남자였다. 물론 그 사이 매스컴을 통해 사진으로 더러 얼굴모습을 보고 그 남자의 부인이 대학동창이여서 그 동창 부부에 관한 이야기들을 심심찮게 들어오긴 했지만 정작 몇십년 만에 다시 얼굴을 본 건 반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오빠의 장례식장에서였고 그리고 그 후 반년 동안은 역시 서로 래왕 없이 지내오던 사이였다.   그런 남자를 나흘 전 우연히 병원 문앞에서 마주쳤고 남자의 손에 약을 가득 담은 비닐봉지가 들려있는 것을 보고 문자는 얼떨결에 물었다.   -오빠가 병원에 웬 일이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아님 누가?   머리 속에 얼핏 남자의 부인 모습이 떠올랐으나 딱 집어서 물으면 결례가 될가봐 그냥 스쳐지나가듯 물었다.   -그냥 내가 좀 불편해서.   -세상 사람들 다 앓음자랑 해도 오빠는 건강해야죠. 오빠가 아프다면 누가 믿겠어요?   -세월 이기는 장사 있어? 나도 이젠 약병과 친해질 나이가 됐지. 늙으면 약보따리 안고 산다는 말 있잖어?   남자는 서글픈 내용인데도 씩씩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남자는 오늘은 시간이 안되니까 후에 보자고 하며 문자의 련락처를 요구했었다. 그래, 며칠 내로 꼭 련락을 해오겠다 했었지. 어쩜 흘리듯 그냥 인사치례로 했을 수도 있는 남자의 말을 진짜처럼 믿고 련락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참 어이없이 생각되였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약속 같은 걸 함부로 쉽게 흘리며 다닐 남자는 절대 아닐 것이였다. 오빠의 친구였던 동네 오빠가 언제 문자의 가슴에 믿음이라는 두 글자로 각인되였는지 문자도 알 수 없었다.     거울 속의 녀자는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염색을 한 지 아직 두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세월의 진실은 염색으로 가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시위를 하는 듯 어느새 다시 하얗게 밀고 올라온 뿌리부분이 그 우로 검게 염색되여진 머리칼들을 비웃으며 유난히 눈에 밟혀왔다.   문자는 그 하얀 색갈 우에 지금 당장 치솔에 물감을 묻혀서라도 검은색을 입혀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긴 머리칼 몇오리가 어지러이 감겨진 채 세면대 옆 빈 공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얼레빗을 손에 들었다. 엊저녁 샤워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누웠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아까 대충 손에 물을 묻혀 얼굴과 목만 적시고 아직 머리도 감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호-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도 힘주어 내쉰 것이 아니라 꼭마치 세월의 먼지와 앙금이 잔뜩 가라앉아있던 생기 없던 호수에서 거품 하나가 맥없이 솟구쳐 오르듯 그렇게 가슴 속 밑바닥에서 꾸역꾸역 밀려올라온 것이였다. 올라와 목구멍에 답답하게 걸려있는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벌려 호- 하고 그 거품 같은 것이 가고파 하는 길로 사라지도록 내보내줬을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시도 때도 없이 하루에도 수없이 그렇게 꾸역꾸역 리유없이 크르륵 거품 같이 올리솟는 한숨이였다. 그걸 굳이 자기 귀에도 거슬릴 정도의 소리로 내보내지 않고 꾸욱 눌러도 될 것이겠건만 그렇게라도 내보내지 않으면 정말 가슴속이 짙은 연기 같은 것으로 가득 들어찬 것 같이 답답해서 참다가 정말 가슴을 감싸고 있는 갈비뼈 하나가 가슴밖으로 툭 부러져 튀여나가며 그대로 가슴이 펑 하고 터져버리고 말 것 같아서 심호흡 삼아 그렇게 토해내군 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한번씩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뿌연 연기 같은 형체 없는 것을 토해내고 나면 잠간이라도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거울 속 윤기를 잃고 부시시한 머리결이 요즘 생기를 많이 잃고 푸석푸석 말라 부스러지는 소리를 내는 건조한 일상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처럼 눈길에 밟혀와 기분이 덩달아 푸석푸석 말라 부스러지는 것 같았다. 자기 몸에도 마음에 들지 않고 거슬리는 게 너무 많았다.   빗이 머리 정수리 부분을 지나 뒤쪽으로 향할 때 문자는 오른쪽 어깨가 다른 날보다도 유난히 많이 당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요즘 따라 팔다리도 옛날 같지 않게 많이 뻣뻣해지며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며칠 전 어느 날인가는 몇십년 동안 날마다 습관처럼 기계적으로 손을 등뒤로 해서 채우던 브래지어를 두 팔이 뒤로 잘 꺾어져 올라가주지 않고 두 손이 제대로 맞닿지 않아 한참 만에야 겨우 채웠던 적도 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두 팔 돌리는 련습을 했다. 아직은 이렇게 빨리 팔다리가 굳어져서는 안되는데 하고 생각하며 하루에도 몇번씩 두 팔을 앞으로 뒤로 휘휘 돌려대군 했다.   꺾이고 펴지는 역할을 해주는 관절들이 하루 다르게 물기를 잃고 뻑뻑해지는 걸 느끼기 시작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였다. 더구나 날씨가 많이 차가워지는 겨울에 들어서부터 손발 뿐이 아닌 온몸의 뼈마디들이 다 삐꺽거리고 달그락소리를 내며 잘 맞물려 돌아가주지 않는 느낌을 많이 받고 있었다.   하긴 세월의 힘을 이기는 장사는 없지…   그 힘을 이기지 못해 남편도 1년 전에 쓰러졌다.    그리고 지금 저렇게 안방 침대 우에 누워있다.   문자는 세면대 아래에 넣어두었던 세수대야를 꺼내여 화장실 절반을 차지한 샤워 부스 안에 들어갔다. 순간온수기에 련결한 수도꼭지를 열어 더운물을 받았다. 누워있는 남편의 몸을 수건에 물을 묻혀 닦아주어야 했다. 남편이 쓰러진 다음부터 문자는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번씩 남편 몸을 닦아주는 걸 견지해오고 있었다.   -내 몸에서는 냄새가 나도 당신 몸에서는 냄새가 나게 하지 않을 거야.   처음으로 남편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던 날, 남편이 쑥스러워하며 등 돌려 누울 때 문자가 남편에게 했던 말이였다.   4.  미녀와 야수   -문자 너 아직도 소설이랑 쓰고 그래?   이제 문자와 남자는 텐트 안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얼음구멍에 낚시를 드리우기 전 텐트를 얼음구멍 앞으로 바싹 당겨 옮겨놓았던 것이다. 둘은 텐트 안에 앉아서 바로 코앞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물고기가 와서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요,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글 쓰기 거의 그만뒀어요. 근데 오빠가 어떻게 내가 글 쓰기 좋아했다는 걸 알아요? 작은 공간 안에 남녀 단둘이 나란히 앉아있는다는 건 아무래도 좀 어색했다. 허허벌판이여서 주변에 아무 보는 눈 없고 아무리 둘 사이가 어렸을 적부터 아래웃집에 오빠동생 하며 가까이 살아 스스럼 없던 사이라 해도 그러나 남녀는 남녀였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말과 상관없이 이젠 칠십세를 바라고 사는 남녀의 동석이긴 하지만 꼭 남의 눈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저 둘 뿐이니까 둘이니까 더 서로 어색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그런 어색함을 깨는 데는 침묵이 아닌 대화가 최고의 약이였다. 그걸 깨달아 둘은 대화거리를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다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왜 너희 집이 방금 현성으로 이사왔을 때 내가 주말마다 너네 집으로 쫓아가군 했었잖아? 너희 엄마가 해주는 밥이 맛있다고 하면서.   -네… 생각나요. 오빠가 전국 복싱대회에 대표선수로 나가서 일등을 했다고 와서 자랑하던 것두요.   -그래 맞어. 아마 한창 그 때 쯤이였겠지 싶다만 내가 거의 주말마다 너네 집으로 쫓아가니까 어느 날 너의 오빠가 내게 그러더구나. 문자 너는 나중에 위대한 소설가가 될 거니까 황소처럼 힘자랑이나 하는 주먹대장 나와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구.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예 쳐다보지도 말라는 뜻이였지. 너 오빠가 눈치를 챈 거였지. 내가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핑게로 널 더 보고파서 쫓아다니는 줄.   -네? 그런 일도 있었어요?   첨 듣는 소리여서 문자도 꿈틀했다. 그저 멋있는 동네 오빠라고 가슴 한쪽 구석에 조금 담고 은근히 주말마다 기다려지군 했던 거 같은데 그 때마다 달려왔던 동네 오빠도 은근히 자기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이.   -넌 몰랐겠지 아마. 그 때 네 오빠 말을 듣고 난 내가 너처럼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하는 착한 학생이 아니고 머리가 단순해서 주먹자랑 밖에 할 줄 모르는 복서인 것이 얼마나 저주스러웠는지 몰랐어. 전국 경기에 나가서 일등을 한 게 무슨 소용이 있어? 아마 그 때부터 너네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도 줄이고 네 오빠와도 조금 거리가 멀어졌던 거 같아. 너는 내가 쳐다보지도 못할 높은 곳에 앉아있다는 걸 깨닫고부터는…   -그랬어요? 난 전혀 몰랐어요.   언제부터 남자가 오빠 보러 뜸하게 놀러 다니기 시작했는지 문자는 눈치를 채지도 못했었다. 그냥 그렇게 문자의 가슴 문전에서 맴돌다가 맴돈 흔적조차 없이 문자가 모르는 사이 사라지고 기억에서 그냥 지워져갔던 남자였다. 오빠도 죽을 때까지 문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아, 오빠… 고기가 보여요.   문자가 급히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끊었다.   얼음구멍으로 물고기 두마리가 꼬리를 하늘거리며 헤염쳐오는 것이 보였다. 작지 않은 체구를 자랑하는 버들치 같았다.   -버들치 맞죠? 버들치가 저 정도면 작지 않은 거죠?   -그럼. 버들치 몸통이 저 정도면 어린 놈은 아니지… 몸통은 다 여문 놈이지.   버들치 두마리는 낚시에 꿴 미끼를 발견하고 다가온 게 분명했다. 둘이 어깨를 가지런히 하고 문자가 드리운 미끼 주변을 한바퀴 돌고 이번엔 남자가 드리운 미끼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다.   -단번에 확 달려들어 입에 덥석 물지 않고 입질도 급히 하지 않는 놈들인 걸 보면 여간내기들이 아니야.   -그러게요. 덥석 물면 안되는 줄 감이 오나 보죠? 물고기들도.   -생명의 본능이겠지. 자기보호 방어능력. 저 투명하고 차거운 물 속에 느닷없이 유혹의 미끼가 탁 던져졌으니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앞서고 조심스러워지는 것이겠지.   -그니까, 인간만 생각할 줄 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것 같아요. 저것들도 생각이 있으니까 저렇게 조심하겠죠. 안 그러면 언녕 미끼를 입에 물었겠죠.   -재밌지 않어?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 그대로 확 덮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빙빙 돌며 위험요소가 있나 없나를 관찰해보는 거. 그게 자기가 싫어하는 물건이면 저렇게 가까이 다가왔겠어? 아예 무관심으로 멀리 피해버렸겠지. 그러면 저렇게 맴돌 일도 없을 거 아니야? 자기가 좋아하고 정복하고프고 소유하고픈 대상에 대한 접근과 우유부단… 생명에게는 다 저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사냥군의 본능이 숨어있고 좋아하길래 오히려 그 앞에 다가서면 주눅이 들어 경계심을 앞세우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지.   역시 오른손에 든 낚시대를 살살 움직여 미끼가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가장해 물고기를 유인하며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 저 물고기들만을 가리켜 그냥 하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살아온 인생에서 깨달은 뭔가를 담은 목소리였다.   문자도 남자를 따라 손에 든 낚시대를 조금씩 살살 움직였다.   그래서 그때 오빠도 나에게 어떤 호감을 가지고 주위를 맴돌며 나를 관찰하고 나에게 어떤 경계심을 앞세웠던 거였어요? 하고 묻고 싶었다.   어서 와서 덥석 미끼를 물어주길 기다렸지만 물고기들은 쉽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 놈들 참 영악하네. 지금은 물고기들도 다 지능만점이라니까. 여름에 낚시군들이 많이 와서 낚시에 놀란 적 있던 놈들임에 틀림없어. 배고픈 본능을 참고 저렇게 그냥 주변만 어슬렁대면서 쉽게 먹이사냥에 나서지 않잖아?   -그러게요… 입에 물어도 안 보고 입질 해봐야 맛있는 건지 독인지 알게 아니예요?   문자는 문득, 이 남자가 철없던 그 때 자기에게 덥석 입질을 해왔다면 자기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가 궁금해졌다. 그냥 맛있는 먹이로 남자에게 넘어갔을가 아니면 안에 뾰족한 가시를 감추고 있다가 콱 쏘았을가.   아직 철없던 그 때, 남자가 먼저 접근해오고 입질을 해왔다면 멋 모르고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까지 문자의 가까운 주변에서 가장 남자답게 멋지게 보였던 동네오빠였으니까. 아니, 어쩜 놀랍고 당황해서 멀리 도망쳐 버렸을 수도 있겠지 싶기도 했다. 자기도 몰래 소녀의 본능으로 감추고 날 세우고 있던 장미가시 같은 것을 겉으로 뾰족이 드러내고 남자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던 철부지 사춘기였을 때니까.   -젊었을 적엔 낚시질도 할 줄 모르고 그냥 그물로 반두질만 할 줄 알았으니깐 미끼를 던질 줄도 모르고 먹이감이 보였을 때 확 덮칠 줄도 몰랐지.     남자가 꼭 문자의 생각을 들여다 보고 대답하는 듯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둘은 어쩜 지금 같이 낚시질하며 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일단 고기가 미끼를 물면 확 낚아야 돼. 기회는 한번 뿐이라 생각하고 지체없이 과감히 낚아야 해.   -알았어요.   그러나 문자는 속으로 그걸 이제야 깨우치셨나요? 하고 묻고 있었다.   아니, 나이 칠십이 다되도록 살아오기까지 남자는 그 도리를 언녕 깨우쳤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그래서 문자네 대학에서 퀸카로 소문난 녀자를 확 낚아채여 자기 녀자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행복했을가, 이 남자는. 그 퀸카를 자기 녀자로 만들어 살면서 행복했을가.   대학 졸업 후 한 도시에 남은 동창들끼리 가지는 모임에 학교 때 그렇게 도고하던 남자의 안해는 잘 나오지 않았다. 잘 나가던 권투선수로 활동하다가 은퇴 후 체육학교의 복싱코치로 남아 역시 문하에 훌륭한 제자를 양성해내는 복서명장으로 활동력을 자랑하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인가 이 도시의 첫 개인복싱관을 개업하고 그 복싱관 운영으로 번 돈을 기초자금으로 다른 장사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 잘 풀리기 시작하여 몇년 사이 몇개의 계렬사를 운영하는 기업인으로 화려하게 탈바꿈하여 잘 나간다는 소문이 들리면서 그 부인인 동창생 역시 각종 매스컴에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매스컴은 ‘미녀와 야수’를 패러디하여 “이 시대의 최고의 주먹과 최고의 미녀의 만남”을 개혁개방 초기 성공의 행복모델로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동창들끼리의 모임에서는 항간에 들리는 소문으로 남자의 주먹이 녀자의 이쁜 미모에 대한 경계로 휘둘러져서 늘 가정불화가 일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오갔고 남자는 주먹 휘두르기에도 지쳐 집보다 밖에서 더 나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부인은 남자의 돈 때문에 리혼도 못하고 억지로 붙어 겨우 부부의 명목만 유지한다는… 그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문자는 그 주먹이 자기가 잘 아는 어릴 적 옆집 오빠여서 안타까웠고 그 녀자가 자기와 한 학급에서 공부했던 동창이였음에 안타까웠다. 가장 잘 나가는 성공한 기업인 남자와 대학에서도 소문 높았던 퀸카 녀자, 뭐가 모자라서 그렇게 남들의 말밥에 가십거리로 오르내리며 불쾌한 소문의 주인공으로 되여야 한단 말인가.   오죽하면 미녀 안해를 놔두고 밖에서 나돌가?   아무리 돈이 좋다 하지만 어떻게 돈을 위해 그 주먹도 참아낼 수 있을가?   부럽지 않았다. 평범하지만 정부기관에서 꾸준히 승진의 길을 걸으며 아침이면 정해진 시간 맞춰 집에서 나가고 저녁이면 늦더라도 외박을 하지 않으며 집으로 들어와주는 남편과 남들 웃기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녀자동창이 다시 동창들 모임에 나서기 시작한 건 주변 여러 도시로 사업을 확장하여 부동산개발에까지 손을 댔던 기업가 남편이 아들에게 기업 경영권을 거의 다 물려주고 이 도시로 다시 돌아와 골프나 치면서 거의 은퇴에 가까운 삶을 산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몇년 전부터였다.   녀자동창의 그 도도함은 아직도 남아있는 미모와 함께 여전했고 녀자동창을 모임에 모셔다 주고 모셔서 돌아가는 승용차는 이 도시에서 최고의 부자들만 탄다는 엄청 비싼 고급차량이라는 사실이 동창들의 입에 더 잘 씹히는 가십거리로 등장했다. 밖으로 나도는 남편과 갈라서지 않고 꾹 버티고 참아온 보람을 늘그막에라도 누리는 그 퀸카 동창을 녀자동창들은 거의 다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 부러움도 잠간, 작년 년초 구정을 앞두고 가진 동창들 모임에 퀸카가 나오지 않아 이상했는데 후에 다른 동창생이 전화 와서 퀸카의 건강이상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5.  아웃복서, 인파이터   드디여 두마리중 한마리가 꼬리를 스윽 한번 크게 휘저으며 느긋하게 문자가 드리운 미끼 가까이로 접근해왔다.   물려고 접근하는 거다. 낚시질이라고 난생처음인 문자에게도 어떤 촉이 왔다. 문자는 저도 몰래 어서 확 물어줘 하고 속으로 빌며 낚시대를 든 손에 힘을 가하게 되였다.   바로 그 때 물고기가 주둥이를 벌려 내밀며 미끼를 향해 확 달려들었다.   이 때다!   문자는 얼떨결에 확 낚시대를 우로 잡아챘다.   잡았다! 하는 환성이 저절로 터져나가려는 순간, 손바닥에 전해지는 느낌이 너무 텅 빈 것 같이 허무했다.   그 허무한 느낌은 준확했다. 고기는 딸려 올라오지 않았다. 빈 낚시만 크게 요동치며 흔들렸다.   역시 긴장해서 문자의 손놀림을 지켜보던 남자가 아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아, 0.1초가 빨랐어. 녀석이 직접 미끼를 문 것이 아니라 톡톡 입질해 본 것이였는데…   한들거리는 낚시줄을 잡고 살펴보니 역시 미끼 한쪽이 거의 뜯기워 먹혀 없어진 것이 보였다.   -와… 엄청 빠르네요. 물고기가. 이렇게 입질 한번에 그 질긴 낙지다리살이 뭉청 뜯겨나갔네요.   -그놈 버들치,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야. 아주 선수야. 복싱으로 말하면 아주 프로급의 아웃복서야. 확 달려드는 체하고 슬쩍 빠져나가는 폼이 아주 잽에 능란한 놈이야.   남자는 버들치를 복서에 비교하고 있었다. 낚시질에도 복싱용어를 사용하며 비유하는 걸 보면 이 남자의 몸은 링을 떠났어도 생각은 아직 그 살벌한 주먹질이 오가는 링을 떠나지 않고 있는지 몰랐다. 문자는 남자가 하는 말의 뜻을 다는 리해 못해도 버들치가 아주 치고 빼고 도망치는데 뛰여난 놈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한마디 했다.   -오빠도 저렇게 잘 치고 빼고 달아나군 했어요? 링 우에서.   -아니, 난 오히려 인파이터였지. 훅과 어퍼킷에 능한.     문자는 남자가 입에 떠올리는 복싱용어를 자기가 거의 다 알아듣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빠 장례식을 마친 후부터였을가 문자는 TV를 볼 때 남자들처럼 스포츠 채널을 즐겨보기 시작했고 스포츠 채널에서 복싱경기 장면이 나오면 아주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군 했다.   -후에 장사를 하고 다른 비즈니스로 사업을 확장하면서도 나는 늘 링 한가운데를 지키는 인파이터였지. 중심을 잃지 않고 항상 내 위치를 단단히 지키며 내 공간을 확보하고 내 공격 반경을 넓혀가는.   낚시코에 다른 낙지다리살을 끼우며 남자가 말했다.   다시 얼음구멍에 낚시를 드리웠을 때 방금 그 두마리 고기는 이미 멀리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놈들 놀라서 도망쳤는 모양이네요. 그림자도 안 보이네요.   -아마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한번 미끼맛을 제대로 본 놈이면 그 맛 못 잊어 다시 돌아올 지도 몰라. 멀리 도망 안 가고 가까운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이쪽 동태를 관찰하고 있을 수도 있어. 한번 놀랐다고 아예 꼬리 내리고 포기해 버리는 건 프로의 근성이 아니지.   링 우에서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서 챔피언의 월계관까지 따안았던 복서답게 남자는 물고기들에게도 미끼를 뜯어먹기 위한 프로근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장사도 그렇게 프로근성으로 했을가? 장사에서는 프로이기보다 오히려 아마추어였을 남자. 그 남자가 눈알이 돌아가는 소리 들리도록 리해득실 계산과 리속 챙기기에 빠른 장사군들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어쩜 쉽게 포기하지 않고 목표물을 향해 끈질기게 접근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복서의 프로근성 덕분이였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오늘 이 남자의 말들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깊게 생각하지?   꼭 남자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세상과 삶을 고기잡이에 빗대여 이야기해오는 것처럼 들리고 거기에 자기 좋은 식으로 꿰여맞추어 해석해 생각하는 자신이 속으로 약간 민망스러웠다. 소설을 쓴답시고 시를 쓴답시고 감성에 예민하던 십대 후반과 이십대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가을락엽 한잎에도 슬픔을 담았던 그 순수했던 감성의 시절…   아 그리고 언제부터였던가, 그 감성이 무뎌지기 시작하고 그 감성의 표현을 위한 글쓰기보다 일상에 더 신경을 쓰고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쫓겨서 살기 시작했던 때가.   대학에 입학해서 만난 남편은 작은 손짓 하나, 눈길 한번으로도 문자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따스한 숨결로 문자의 넋을 송두리채 빼앗아가기에 충분했다. 문자는 소설 대신 그 사랑을 읊는 시를 쓰기 시작했고 그 사랑을 세상 높이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저 했다.   그러나…   그리고 대학졸업 그리고 취직 그리고 결혼생활 그리고 직장생활 그리고 아들의 출생 그리고… 그리고… 아들의 결혼… 그리고… 그리고… 퇴직…   그리고 그리고 지금… 남편은 침대에 누워있고 문자는 지금 그 남편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가슴에 숨긴 채 이렇게 어린 시절 옆집 오빠였던 남자와 오늘아침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겨울호수에 와서 얼음구멍 앞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있는… 이 현실…   문자는 자신에게 물었다. 만약 저 남자 대신 내가 링 우에 올라선 복서였다면 나는 아웃복서였을가 인파이터였을가… 주어진 삶에 대한 반항 같은 거 한번도 해보지 않으며 그냥 주어진 대로 잘 적응하면서 살아온 세월.   힘든 시간들도 더러 있어서 그 때마다 남편과 힘을 합쳐 잘 이겨내왔다고 자부해온 인생인데 그러나 그게 정말 강하게 맞서서 이 악물고 싸워서 이겨냈던 게 맞는 것일가.   그냥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자신을 위안하면서 그냥 그렇고 그렇게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왔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소설은 어데로 가고 시는 어데로 갔을가 하고 자기 자신에게 물었던 적이 몇번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생활이 네모칸 원고지에 쓰는 소설이 아니고 삶이 격정으로 읊는 랑만의 시가 아님을 깨달아 다시 필을 들 용기를 내지 못하였는지 모른다. 아니, 다시 감성의 날개를 펼쳐 펄럭이기도 귀찮아지고 그냥 격정없이 무감각한 시간들을 무덤덤하게 사는 것이 더 편해서 그냥 그 날이 그 날 같이 대충대충 살아왔다는 게 더 맞을지 몰랐다.   남편이 사랑이노라고 던져온 미끼에 입질 한번도 해보지 않고 의심 같은 거 한번도 해보지 않고 낚시라는 거 구경도 못해본 철부지 물고기처럼 덥석 물어버렸던 자기의 사랑선택. 과연 그 선택이 잘된 선택이였을가 아니면 잘못된 선택이였을가에 대해서는 살아오면서 한번도 의심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퇴직 후 남편과의 단둘의 삶은 외롭기보다 오히려 늦게 찾아온 행복처럼 좋았고 살아온 날들에 대한 후회 같은 건 해보려고조차 않았다.   그런데 그 행복을 오래동안 이어가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남편.   문자는 지금도 남편이 쓰러지던 그 날의 정경을 떠올리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퇴직 후로 부쩍 새벽잠이 적어서 항상 새벽 서너시면 일어나서 어성대며 문자가 일어나서 머리정돈을 마치기를 기다려서 꼭 함께 아침시장에 다녀오군 하던 남편이였다. 그날도 그렇게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시장에 가서 날마다 먹던 때시걱거리를 신선한 거로 골라 사들고 돌아왔고 건강관리를 한다고 일부러 엘레베터를 리용하지 않고 함께 걸어서 3층 층계를 오르고 있던 중이였다.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며 계단 방향이 바뀌는 데서 남편이 어이쿠 숨차하면서 쇠로 된 란간을 붙잡고 섰다. 문자는 별 생각없이 숨을 고르는 남편의 손에서 채소가 든 비닐봉지들을 받아들고 몇 층계 남지 않은 계단을 마저 먼저 올라가 집 출입문에 열쇠를 꽂았다.   열쇠를 돌려 문을 밀어 열고 채소를 문어구 현관쪽에 내려놓을 때 문자의 귀에 어-어- 하는 남편의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고 허리를 펴고 고개를 돌려 층계 아래를 내려다 보는 문자의 눈에 가슴을 부여잡고 옆으로 쓰러지는 남편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이구 여보, 웬 일이예요?   문자의 입에서 놀란 울부짖음이 터졌고 엎어지듯 달려내려가 남편을 붙들고 당신 왜 이래요? 하고 아우성치듯 련발하는 소리에 옆집 문이 열리고 잠옷바람의 옆집 젊은 남자가 달려 내려왔다. 이미 입이 한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남편을 안아들다 싶이 해서 집으로 들여다 침대에 눕혀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앰불러스가 도착했었다.   악몽 같던 그 날 새벽의 일…   20여일 간의 입원치료로 한쪽으로 돌아갔던 입은 거의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으나 그 때 힘을 잃은 왼쪽 다리는 지금도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지탱하기에는 력부족으로 아직 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날부터 시작된 남편과 문자의 어두운 시간들. 그러나 그 어두운 시간도 문자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아무런 불만 없이 남편의 병수발을 들고 있었다. 오히려 남편이 자신에게 갑자기 닥친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주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화를 내군 했다.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억울하고 답답했으면 저럴가. 문자는 남편의 그런 화도 다 고스란히 받아주었다. 함께 한집에 살아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고마워하기로 했다. 평생을 함께 한 남편인데… 남편 옆을 지킬 건 안해인 문자 자기 밖에 없음을 문자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장가간 아들에게 쓰러진 남편을 부담으로 떠넘길 수는 없었다.   가령 남편과 내가 링 우에 선 선수였다면 우리 둘은 어떤 복서에 가까웠을가. 우리는 어떤 주먹을 주고박는 파이터 상대였을가.   분명한 건 문자는 절대로 남편을 쓰러뜨린 파이터 상대가 아니였다는 사실이였다. 그렇다면 남편은 운명의 어느 주먹에 맞아 그렇게 어이없이 예고없이 쓰러지고 말았던 것일가. 남편을 향해 치명적인 강타 한방을 날린 운명의 심술은 도대체 어떤 이름을 가진 심술의 주먹질이였을가.     문자는 피터지게 치고박는 그 치렬한 복싱 링 우에 한번 올라서보고파 지는 자신을 느꼈다. 이제라도, 이제라도 이 세상을 향해 주먹 한번 날려보고 싶었다. 상대를 맞히지 못하는 헛주먹질이라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그저 자기의 온 힘을 다 담고 한번 주먹이란 걸 날려보고 싶었다. 남편을 쓰러뜨리고 문자 자기의 생활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준 그 운명의 파이터를 향해 주먹 한번 날려보고 싶었다.     6.  사랑하는 모든 령물을 사랑하여라   -그 봐, 내 말 맞지? 저기 두마리가 슬슬 다가오기 시작하는 게 보이지?  틀림없이 방금 그 두놈이라니까. 꼬옥 붙어서 다니는 폼이 영낙없이 아까 그 놈들 맞아.   남자가 말했다. 문자도 다시 신경을 그 두마리 물고기에게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남자 말 대로 슬슬 다가오는 두마리 물고기는 꼭 방금 왔다 간 그 두마리가 옳았다. 물고기에게도 낙지다리 미끼 맛의 유혹은 너무나 큰 것이구나. 그 유혹 밑에 목숨을 앗아갈 낚시코가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는 걸 물고기들은 아직 간파하지 못하고 있구나.   문자는 두마리 중 어느 놈이 방금 자기의 낚시코에 꿰여 매달았던 낙지다리 미끼를 한입 크게 물어 떼여간 놈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느긋한 꼬리질로 선자리 맴돌 듯 앞으로 나왔다 뒤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오는 놈이 꼭 아까 번개같이 달려들어 미끼만 뜯어먹고 낚시코는 묘하게 피해 도망친 놈일 것이였다.   그렇게 혼난 놈이면 다시 드리워진 미끼를 보고 그 미끼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그 죽음의 냄새에 민감하기보다도 당장 다시 입술을 감미롭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미끼의 맛이 더 유혹적인 모양이였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 문자 자기에게도 저렇게 치명적이도록 유혹적인 미끼가 앞에 던져져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소설 쓰기가 소녀 때의 문자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것 같았고 시 쓰기가 문자 가슴을 뜨겁게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다 치명적인 유혹은 아니였던 모양이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끝까지 도전해 보고픈 욕망으로 문자를 괴롭혔던 것들은 아니였다. 그럼 무엇이였을가, 문자를 오늘의 인생에까지 오게 한 그 치명적인 유혹은.   지금 집 안방 침대에 누워 안해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남편?   그래, 남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편에게 빠져 인생을 이날이때까지 송두리채 바쳐 그 남편이 이끄는 대로 그 남편과 함께 살아오고 만들어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치명적으로 유혹적이고 벗어날 수 없는 유혹이라면 지금 얼음으로 뒤덮인 겨울호수에 이렇게 겨울낚시대 달랑 들고 다른 한 남자와 앉아 낚시질 즐기고 있는 문자 자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남편이라는 유혹이 아닌 다른 어떤 유혹의 덫에 걸려 이 곳에 와 앉아있단 말인가.   누워있는 남편이래도 그 남편이 있는 집이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공간이고 따스한 공간이여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을 내놓고는 이 세상 어떤 다른 공간에도 더 가보고 싶지 않고 들려보고 싶지 않아지는 문자였다. 집에 장기환자 한명 있으면 그 환자보다도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더 지치고 힘들어져 먼저 쓰러지고 말 거라며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지만 그러나 문자는 무거운 남편을 부축해 식탁 앞에 앉히는 일도, 화장실 변기에 앉히는 일도, 침대에 눕혀주고 몸 닦아주고 씻어주는 일도 힘들지 않았다. 내 남편이니까, 나에게만 의지하는 남편이니까.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고 나와 함께 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손자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니까. 함께 살아온 거의 40년 인생을 함께 이야기 나누는 사람이니까. 그냥 그 남편과 함께 하는 공간. 그 공간 이외의 다른 공간을 남편과 함께 할 수 없길래 문자도 점점 바깥세상과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자신을 집안에 가두어가고 있었다.   구정에 아들네 부부가 와서, 자기네가 와있는 며칠 동안만이라도 아버지를 돌보겠으니 엄마더러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라고 했지만 문자는 정작 자기가 나가서 찾아가볼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가볼 곳도 많고 그래서 찾아가봤던 곳도 많았던 세상인데 그러나 그렇게 찾아갔던 모든 곳들도 다시 혼자 찾아가기에는 너무나 자기와 상관 없는 세상 같이 아득히 먼곳에 있는 것 같았고 굳이 찾아가보고픈 욕망 같은 것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문밖의 세상은 이제 자기와 상관 없는 세상 같았다. 병든 남편이 누워있는 공간, 그 공간 이외의 공간은 이제 문자 자기의 공간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게 이제 자기의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느껴지기 시작한 답답함, 답답함…   답답해서 창문을 열어 실내공기를 환기시켰고 답답해서 옷장 문을 열고 안에 걸어놓았던 옷들을 다시 깨끗이 씻어 해볕에 널어 말렸다. 답답해서 다시 또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고 답답해서 겨울인데도 앉아 부채질을 했다. 답답해서 오전에 닦았던 바닥을 오후에 다시 또 닦았고 답답해서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앞의 녀자를 멍하니 들여다보군 했다. 거울 속의 녀자가 낯설게 보여서 당황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독서를 즐겼는데 책읽기도 심드렁해지고 귀찮아졌고 머리를 다듬는 일에도 게을러졌다. TV 화면을 멍하니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한참 보고도 뭘 봤는지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냥 창문 앞에 서서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 창밖세상이 뿌옇게 보여서 닦은 창문유리를 자꾸자꾸 또 닦았다.   남편이 짜증내고 화를 내도 더 어르고 달래고 다독이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닦아주고 옷 갈아입히고 부축해줬다.   문자는 자기가 마시는 공기에도 색갈이 있다고 생각했다. 회색빛 공기라고 생각했다. 짙은 담배연기 같은 회색빛 공기. 그래서 들이마실수록 답답해지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문자는 시도 때도 없이 답답한 가슴을 작은 주먹으로 콩콩 두드려대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도 답답해서 후유- 후유- 큰숨을 내쉬였다. 한숨이라고 인정하기 싫었다. 그냥 큰숨을 내쉬는 거라고 스스로 변명했다.   -저 두놈,  참 정이 좋네. 꼭 붙어서서 꼬리질도 구령에 맞춘 것처럼 꼭같이 치네.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감탄의 어조로 말했다. 문자는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두마리 지금 한창 련애하는 사이겠죠 뭐. 물고기들도 눈 맞는 놈들끼리 련애하겠죠.   -그래, 그런 것 같애. 죽어도 꼭 둘이 함께 붙어 죽으려고 환장한 것처럼 둘이 꼭같이 움직여요…   남자는 다시 경어체를 말끝에 붙이며 물고기를 유인하느라 살살 움직이던 낚시를 더 움직이지 않고 정지시켰다.   -정 좋은 물고기들이네요. 그런 걸 잡으려고 미끼 던져놓고 기다리는 우리도 참 조금 너무한 거 아니예요?   -하긴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런데 하필 왜 련애하는 두놈이 우리 미끼를 탐내서 기웃거리는 거라냐…   남자가 참 어이없다는 어투로 말했다.   -우리 그냥 저 물고기 두마리 잡지 말아요.   -어떻게? 자기네가 잡히겠다고 자꾸만 슬슬 접근해 오는데 우리가 뭐 저들 둘을 오라고 했남?   -쫓아보내면 되잖아요? 미끼를 꿴 낚시 드리우지 말고 낚시대로 물을 휘저어 쫓아보내면 되잖아요?   문자가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가… 그래, 우리 둘 오늘 좀 덕을 쌓아야 되겠네. 물가에서는 잡은 물고기를 놓아줘 방생도 하려니…잡기 전에 쫓아버리는 심술 피워주는 것 쯤이야 뭐.   남자가 먼저 얼음구멍에서 낚시를 꺼냈다. 낚시줄을  낚시대에 감고 다시 물에 넣어 휘휘 저었다. 커플 물고기가 놀라서 후닥닥 꼬리를 쳐 달아났다. 도망치는 데는 정말 빠른 놈들이였다.   문자는 고기를 잡은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아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오빠, 참 잘했어요. 고기잡이 와서 고기를 잡는 것보다 놓아주는 것이 더 멋있고 기분 좋은 일인 줄 오늘에야 알았네요.   -그래, 사람이 살아가면서 놓아줄줄 아는 것도 큰 지혜중 하나지. 하나라도 더 쥐려고 더 가지려고 아득바득하느라 미처 놓아줘야 할 것들을 보아낼 줄 모르고 보았다 해도 아쉬워서 놓아주지 않고 기어코 자기 것으로 붙잡고 있어서 그렇지… 그런데 그게 행복으로 이어지겠냐. 원래 자기 것이 아닌 건 억지로 내 것으로 만들어봤자 결국은 나를 괴롭히는 거로 될 뿐이지.   남자가 말 속에 말을 깔고 이야기해왔다. 이 남자 참, 주먹질만 잘하고 장사만 잘하는, 그래서 돈만 많은 부자로만 알았는데 물고기 잡이에 인생도리를 곁들여 멋지게 풀이해내는 재간이 있구나. 장사하고 기업을 하면서 느끼고 깨우친 게 너무 많은 남자구나. 문자는 어렸을 적 공부 잘하고 총명하다고 칭찬받았던 자기보다도 이 남자가 열배 백배 더 지혜롭고 세상을 깨우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참 멋지게 살아온 거 같아요. 하는 말씀 참 값진 인생 경험담인 거 같아요.   -그래, 경험담이겠지…   남자가 허구피 웃었다.   -멋지게 살아봤자 역시 다른 사람과 꼭같은 한평생이 아니겠어? 늙어서 돌이켜보면 다 부질없고 덧없는 인생이지 싶어. 왜 그렇게 남보다 더 멋진 걸 가지고 싶고 더 많은 걸 가지고 싶어서 싸우고 빼앗으며 달려왔는지 모르겠어. 내 이 두 손안에 쥐여봤자 얼마를 쥐겠다고…   남자가 두 손을 펼쳐보이며 도리질했다. 남자의 입에서 후유- 하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갑자기 정서가 다운되여 한숨까지 내쉬는 남자가 문자는 너무 안스러워졌다. 내 남편보다는 백배 더 건장하고 우리보다는 천배 더 풍부한 물질을 누리고 살고 있을 이 남자에게도 이렇게 큰 한숨으로 이어져야 할 아픈 사연이 있구나.   그래, 있겠지. 왜 없을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인생에도 남 모를 아픔과 슬픈 사연은 다 감추어져있겠지. 그저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게 다를 뿐이지.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왔을 이 남자는 누구보다도 아픈 시간들을 많이 이겨내고 견뎌냈는지 모를 일이였다. 남자의 단 한번의 한숨의 무게가 너무 문자의 가슴에도 무겁게 맞혀와서 문자는 남자가 펼쳐보이는 그 두 손을 꼭 잡아 위로해주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오빠니까, 걍 동네 오빠니까. 지금 이 곳에 단둘 뿐인 이 공간에 그 한숨을 들어주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니까.   그러나 문자는 손을 내밀지 못했다.   속으로 남자를 향해 속삭였다.   -오빠, 나도 걍 오빠 손 잡고 5분이고 10분이고 아무 말 없이 앉아있고 싶어요. 그러면 내 가슴도 많이 시원히 열리고 편안해지고 따스해질 것 같애요.       7.  약속할 수 있어 아름다운 인생   -문자야.   -네.   -저 놈들 다른 겨울 낚시군들에게 잡히지 않고 이 겨울 무사히 잘 나겠지?   -아무렴요. 세상 챔피언 복서가 둘이 행복하게 잘살라고 특별사면을 베풀어 놓아준 생명인데 잡히면 안되죠. 이 겨울도 무사히 잘 나고 추위가 끝나고 봄이 와서 얼음이 다 녹으면 아마 이 호수에서 가장 영악한 두마리 물고기로 힘차게 꼬리치며 생명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거예요.   문자는 시를 읊조리듯 정서를 한껏 담아서 호소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느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자신의 물기 어린 촉촉한 목소리인가.   문자는 그렇게 속삭일 수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아직도 그렇게 감성적일 수 있는 자신이 고마웠다.   -네 남편은 좀 어떠냐?   남자가 드디여 남편의 안부를 물어왔다. 어쩜 이 남자는 아침에 문자를 만나서부터 첫마디로 이 물음을 던져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자는 했다.   문자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잘 이겨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이제 이 추운 겨울이 가고 따스한 봄이 오면 그이를 휠체어에 태워서 해볕쪼임도 자주 나오려구요.   -그래야지… 아직 젊은데…   -오빠 집의 언니는 어때요? 건강이 좀 안 좋다더니…   문자는 동창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동네 오빠의 안해이니까 남자 앞에 그냥 언니라고 칭했다.   -아, 좋아지겠지 뭐. 치매가 그리 쉽게 낫는 병도 아니구… 석달 전에 병원에서 나와서 지금 집에 와있어. 간병인을 불러서 잘 간호하면서 약물치료 꾸준히 하고 있어.       문자는 흠칫 놀랐다. 아픈 줄은 알았지만 치매인 줄은 몰랐다. 그렇게 이쁘고 그렇게 도고하던 녀자가 치매라니… 벌써 치매라니…   -치매였어요? 전혀 몰랐는데…   -그래, 살아오면서 맺힌 한이 너무 많았겠지. 그 맺힌 한을 풀지 못하고 가슴에 쌓아놓기만 했던 것이 너무 많았겠지. 화났던 것들, 억울했던 것들, 이루지 못했던 것들… 그 모든 것들 다 가슴에 한으로 쌓아만 두고 미처 삭일 수가 없었겠지. 그래서 다 잊어버리고 싶어서 기억을 버리기 시작했겠지… 이제는 나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10년은 늙어버린 사람의 것처럼 들려왔다.   -아 오빠, 정말 전혀 몰랐어요. 알았으면 언녕…   남자가 문자의 말을 끊었다.   -알았던들 어쩌겠냐, 다른 병도 아니고 치매인데… 어쩜 그렇게 다 잊고 기억에서 비우고 사는 게 그 사람에게는 편안한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옆에서 바라보는 우리는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정작 당사자는 아픈 줄 모르고 편안한 일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오히려 위로가 좀 되기도 해.   남자가 다시 씩 얼굴에 웃음을 피워물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냐… 왔다가 가는 인생, 그 사이 거의 누구나 다 한번 쯤 겪게 되는 로년기 병이라는 거… 나만 아프지 말란 법 없고 누구만 건강하란 법은 없으니까… 다 자기 아플 만큼만 아프고 다 덜 아프고 다 차츰 나아지고 다 더 잘되겠지.     -그럼요. 생명이 그리 쉽게 무너지겠어요? 어떻게 이겨온 세월인데…   문자도 씨익 웃었다.   -오빠, 우리 오늘 낚시질 그만해요. 우리 그이 점심식사 내가 덥혀줘야 해요.   -그래? 그렇겠구나. 점심이라도 한끼 맛있는 거 사주려 했는데.   -알아요. 그 맘 알았으니까 후에 다시 기회 잡아서 꼭 사달라고 할게요.   -오케이. 약속하는 거야. 이번엔 니가 내게 련락해줘라. 사람이 서로 목소리도 주고받으며 수다라도 떨어야지… 남자도 명랑한 목소리로 흔쾌히 대답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서 앉아있는 문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문자는 그 손을 주저없이 받아쥐였다. 으쌰! 남자가 일부러 과장해서 힘쓰는 모습을 하며 뒤로 당기자 문자도 씩씩하게 벌떡 일어섰다.   -알았어요, 오빠. 이젠 내가 오빠에게 전화 걸게요. 우리 전화로 자주 련락해요. 아, 그리고 오빠, 우리 낚시질 언제 다시 한번 와요. 겨울낚시 안되면 여름낚시라두요.   -조오치… 아까 놓아준 두놈 그때 와서 다시 잡을가?   남자가 장난기 섞인 어조로 눈을 찡긋해왔다.   -안돼요. 그 애들은 그냥 사랑을 이어가게 건드리면 안돼요. 아이들이랑 많이 낳고 오손도손 잘살게 내버려둬야 해요. -알았습니다. 문자녀사님…   남자가 다시 익살 섞인 어조로 경어를 사용했다. 타이밍 잘 맞게.   그 롱담에 문자도 더 크게 활짝 웃어줄 수 있었다.   문자는 남자를 마주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다음번엔 오빠네 언니도 많이 좋아져서 함께 낚시질 왔음 좋겠어요.   -조오치… 내가 대신 약속하마.   남자가 과장된 목소리로 시원하게 대답하며 오른손을 활짝 펴고 내밀었다. 그 손에 문자도 오른손을 내밀어 힘껏 마주쳤다. 겨울날 얼음호수 우에서의 멋진 하이파이브였다.   -오빠 참 멋있는 남자예요.   문자는 남자를 향해 오른손 엄지를 척 내들었다. (끝) 장백산 2017년 2월호   
13    [단편] 두팔을 펼치면 날개인것을 (조광명) 댓글:  조회:1799  추천:0  2017-08-19
단편소설   두팔을 펼치면 날개인것을 조광명 1. 검사를 받는 내내 안해는 멀쩡했다. 오히려 일 바쁜 사람에게 도움은 못 주고 페만 끼친다고 미안해했다. 그런 안해를 보며 홍은 또 한번 참 헛갈렸다. 괜히 멀쩡한 안해를 억지로 데리고 병원에 온건 아닌지 안해에게 약간 미안해지려 했다. 그러나 분명 안해의 증상은 더 심각해지고있었다. 어제 퇴근해 집에 들어섰을 때 홍은 현관에 놓인 신발장의 문들이 다 열려있고 그 안이 텅 비여있는것을 발견했다. 묻지 않고도 짐작할수 있었다. 신발장에서 부패한 냄새가 난다고,신발장안에 곰팡이들이 꼈다고 안해가 신발장 문들을 다 활짝 열어놨을것이고 신발장안의 신발들은 안해에 의해 다 버려졌을것이다. -이젠 신발들이군. 도대체 다음번엔 어떤것들이 버려질가? 이젠 버려질것도 별로 없을것 같은 가장집물이였다. 그러나 몰랐다. 안해의 민감한 코에 의해서 언제 어느것들에게서 부패의 냄새가 감지되여 버려질것인지. 안해가 두통을 호소해온건 약 일년전부터였다. 홍이 이 도시에 와서 꾸린 작은 피혁제품제조업체에 함께 출근하며 제품의 출고전 품질관리를 꼼꼼히 체크해주던 안해는 일년전부터 갑자기 두통을 호소해오기 시작했다. 가죽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라서 본드사용은 필수적일수밖에 없었고 홍은 생산에 사용되는 모든 접착제를 다 국가 환경보호부문의 인증을 받은 환경보호제품으로만 구매해서 사용하고있었다. 뿐만아니라 생산라인작업실은 하루 24시간 환기시스템을 가동시키고있어서 실내작업하는 현장 작업자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그런냄새 같은건 전혀 맡아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현장근무하는 직원 그 누구도 본드냄새가 불편하다고 불만 같은것을 제출해온적이 없었다. 국가 표준 미달의 불량접착제를 사용해서 직원들의 건강에 해가 가게 할수는 없다는것이 오너로서의 홍의 기업경영륜리 최저기준이였고 안해 역시 이 몇년 동안 공장 현장라인에서 거의 직원들과 동고동락하고 지내면서도 한번도 불쾌한 본드냄새가 맡아진다고 이마를 찡그려 표현해온적이 없었다. 그러던 안해가 언제부턴가 본드냄새가 싫다고 이마를 찡그리기 시작했고 그런 증상은 어느날 두통으로 이어졌다. -공장 울안에만 들어서도 본드냄새가 너무 강해서 숨이 콱콱 막혀요. -태양혈이 팽창해 터질것 같이 툭툭 뛰고 뒤통수가 땡길 지경이예요. -아 또 두통이 와요… 안해는 신경질적으로 공장의 모든 창문들을 활활 열어제꼈다. 그러고도 두통이 풀리지 않고 더 심해지자 공장과 가까운 공단내 약방에 가서 진통제를 사왔다. -당신 본드품질 철저히 체크해봤어요? 언제부턴가 안해는 품질체크에 너무 민감해져있었다. 아무리 품질관리에 신경을 쓴다고해도 그러나 회사에 생기는 사고의 대부분은 품질문제때문에 생겼다. 원부자재 구매에서부터 완제품 출고에 이르기까지 사람손을 수십번도 넘게 거쳐야 하는 생산과정 어느 환절에서 구멍이 생기면 그건 곧장 제품의 하자로 이어졌고 그건 곧 완제품 페기로 이어져야만 했다. 공장으로서는 대단한 손실이 아닐수가 없었다. 생산과정중에 그 문제를 발견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완제품으로 나와서 포장작업전에 진행되는 마지막 인스팩션단계에서 품질문제가 발견되면 그건 정말 환장할노릇이였다. 그러나 홍에게 경제적손실 같은건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였다. 제품납기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바이어로부터 쏟아지는 책망과 클레임, 그보다도 신용상실이 더 큰 문제였다. 제품 페기로 인한 경제적손실은 품질관리를 책임진 안해에게 그대로 스트레스로 이어지는것 같았고 안해는 그때마다 공장이 받아안는 손실때문에 속으로 끙끙 앓으며 괜히 신경이 예민해지군 했다. QC라인을 책임지고있는 안해로서는 그 모든 스트레스를 다 자기 책임으로 받아안고 삭여내는것 같았다. 손실때문에 가슴 졸이고 그 손실을 미연에 발견해서 차단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것 같았다. 그런 안해가 생단단계의 품질관리뿐 아니라 원부자재 구매에도 신경이예민해져있음을 홍은 잘 리해할수 있었다. -우리 회사 초창기때부터 수많은 본드업체들중선정해서 그냥 꾸준히 납품 받아오던 업체야. 몇년사이 품질이 업그레이드되면 됐지. 그리고 지금까지 한번도 본드문제로 상품검사에 걸리거나 세관검사에 걸린적이 없잖아? 본드문제로 바이어들로부터 클레임당한적도 한번도 없고 말야. 당신도 몇년 동안 본드냄새 싫다는 이야기 전혀 없다가 요즘 와서 왜 갑자기 그래? 당신의 후각 어느 신경계통에 문제가 생긴게 아니야? 한번 큰 병원에가서 검사해봐. 그러나 안해는 그냥 참으며 스스로 약방에서 구매한 진통제로 뻗쳤고 더 날카로와진 신경으로 품질관리에 더 철저히 림했다. 그러다 어느날 그 두통증상이 심해져 오바이트로 이어지던 날 홍은 안해를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달렸다. 병원에서는 온 하루 모든 최신 첨단설비를 다 사용해가며 이런저런 검사를 수도 없이 해대더니 결론은 아무 증상도 발견되는것이 없다는것이였다. 정상이라니 다행이였다. 병원 1층에서부터 6층까지 몇번이나 오르내리며 대기해 줄을 서고, 피를 뽑고, 소변을 검사하고, 처음 보는 최첨단 설비들앞에 서거나 그 설비들밑에 누워서 검사를 받으라 기진맥진해진 안해는 그러나 정상이라는 검사결과에 오히려 의아해했다. 그 정상이라는 결과를 이상한것이라고 했다. 심한 두통을 못 이겨 눈알이 빠질 정도로 오바이트할 정도인데 정상이라니… 홍도 병원의 검진결과가 믿어지지 않았다. 정상인 사람이 왜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본드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것인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교수라고 진찰비도 다른 의사들에 비하여 몇배 넘는 특진비로 받는 담당의사는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홍에게 간단히 한마디 했다. -본드냄새에 민감하다면 환자를 출근시키지 말고 집에서 쉬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각종 의료기기들의 검사결과가 프린트된 종이 여러장을 이리저리 뒤집어보고난 의사는 심드렁한 어조로 모든게 정상이라는 안해를 환자라고 칭하며 집에서 쉬라고 권고해왔다. 홍은 그날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안해의 요구를 무시하고 차를 병원에서 직접 집으로 몰고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며칠동안 홍은 아침마다 함께 집문을 나서려는 안해를 억지로 윽박질러 집에 떼여놓느라 언성을 높여야 했다. 집에만 돌아오면 멀쩡해지는 안해는 심심해 견딜수가 없다며 부득부득 공장으로 다시 나가겠다 했으나 홍은 제발 집에서 쉬며 사람속 덜 태워달라고 어르고 달랬다. 안해는 마지못해 홍의 말을 따랐고 홍은 안해가 담당하던 인스팩션 업무를 QC라인에 몇년간 근무한 녀성직원에게 맡겨 잘 처리해나가고있었다.그리고 안해는 가정주부로서의 배역에 충실하려 애썼고 홍은 안해가 일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본드냄새를 맡지 않으면 두통의 시달림에서 벗어날수 있을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였다. 안해는 본드냄새뿐이 아닌, 모든 냄새에 민감해져가고있었다. 1년사이 여러차례 발작한 안해의 냄새에 대한 민감한 반응과 그때마다 표현되는 안해의 과격한 행동은 안해를 완전 낯선 사람으로 만들군 했고 그런 안해의 모습은 마침 그때마다 공장에 터지는 여러가지 사고들로 가뜩이나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홍의 마음을 더욱 지치고 힘들게 만들고있었다. 홍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듯 그 큰 신발장안에 달랑 자기의 신발만 넣고 거실로 향했다. 안해는 주방에서 한창 료리중이였다. 낮시간사이 신발장과의 전투를 벌였을것임에도 아무 일도 없은듯 보글보글 된장국을 끓이고있다가 들어서는 남편을 바라보며 따스한 미소를 보내왔다. 안해의 이마에 질끈 동여져있는 머플러를 보며 홍은 오늘도 안해가 심한 두통을 앓았음을 짐작할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편인 자기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않은 안해, 안해는 웬간한 두통은 홀로 진통제를 먹고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스스로 그 고통의 고비를 잘 넘겨주고있었다. 남편의 저녁퇴근시간에 맞춰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며 남편을 챙겨주는 안해의 사랑은 변치않고있었다. 홍은 웃는 얼굴로 안해와 눈길을 마주치고 지친 몸을 그대로 쏘파에 던졌다. 그리고 오늘아침 홍은 잠간 공장에 들려 하루 생산일정을 체크해 포치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안해를 달래서 차에 앉혔다. 작은 두통이니까 괜찮다고, 잘만 치료하면 금방 나을거라고 위안하며 병원을 찾아 전번에 했던 검사들을 다시한번 쭈욱 받도록 했다. 여러가지 선진의료장비들을 리용해 진행한 검사결과는 역시 정상이였다. 정상이지만 두통이 있다니까 꾸준히 사용해보라며 의사가 다시 처방해준 신경안정제와 두통치료제 등 약을 병원 1층 약방에서 잔뜩 구매한후 안해를 집에 다시 데려다주고나니 벌써 오후 2시가 훌쩍 넘었다. 2. 홍은 점심도 먹지 못하고 차를 돌려 소방행정서비스기관으로 달렸다. 혹시 회의에 늦어지면 또 어떤 불리익을 당할지 알수 없어서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차를 달려 참가한 기업소방안전교육 회의는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싱겁게 끝났다.곧이어 전번 소방안전검사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기업체들의 벌금납부가 이어졌다. 소방안전 교육은 명색을 위한 허울일뿐이고 진짜 목적은 “소방안전 블랙리스트”기업들로부터 벌금을 거두기 위한 회의임을 홍은 잘 알고있었다. 그 벌금을 내기 위해서 달려온것이였다. 회의에 불참하거나 지각해서는 절대 안되고 그리고 반드시 업주가 참가해야 하고 반드시 현금으로 벌금을 내야 한다고 못박은 회의통지였다. 며칠전 검사때 받은 4만원 벌금고지서와 함께 요구대로 현금으로 들고온 4만원을 돈다발 네뭉치로 내고 받은 령수증에는 벌금액이라는 항목 대신 기업소방안전전문가초청교육비 및 안전설비 종합세트비용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회계장부처리조차도 불가능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 한장일뿐이였다. 회의장 좌석수로 어림짐작해도 오늘 회의에 참석한 업체수가 500여개는 될것 같았다. 20여분 회의에 2000여만원의 수입이 생기는셈이였다. 20여명 직원을 거느리고 날마다 피터지게 일하는 소형기업의 10년 매출액의 합계로도 감히 넘보지 못할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리윤액으로 따지려면 몇십년에도 이루지 못할 “순수 마진”이였다. -토비같은 놈들… 속으로 이런 욕이 나갔으나 행정부문 갑앞에 을의 신세인 소형업체 사장인 홍은 그 욕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어쩜 행정부서들은 이번의 화재같은 사고들이 기업에 더 자주 발생하기를 바라는것인지도 몰랐다. 그 사고들마다가 행정부서들의 공공연한 기업갈취에 명분과 “합리성”을 부과해줄것이기때문이였다. 그리고 행정부서들은 자기들이 정한 관리규정을 따르지 않고 어기는 기업이 더 많기를 원하는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야 벌금을 때릴수 있으니까. 수입창출이 되니까.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행정부문들이 수입창출단위로 변색되여 운영될 때 그 행정부문들의 감독과 령도를 받아야 하는 기업들이 허리를 펼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썩은 행정은 건강한 기업의 기둥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벌레 같은 존재였다. 생각해보면 참 뜻하지 않게 당한 봉변이였다. 홍이 안해를 데리고 병원에다녀오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들이닥친 소방안전검사였고 생산라인 관리자가 변명 같은것도 못해보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채 덜컥 받아안은 벌금고지서였다. 며칠전 홍의 공장이 위치한 공단과 10여키로 떨어진 공단의 한 공장에서 작은 화재가 발생했고 그 화재로 당직 근무중이던 직원 한명이 질식사당하는 사고가 터졌다. 그 소식은 이튿날로 주변 공장들로 쫙 퍼졌고 홍은 그때 속으로 대충 짐작했었다. 또 소방안전검사가 대대적으로 한번 진행되겠군. 그러나 홍은 별로 걱정될것이 없었다. 생산기업 공장건물 소방안전규정에 따른 소방안전시스템을 홍의 공장은 이미 다 갖추어놓고있었던것이다. 구정후 년초에 진행된 년례 소방안전검사에서도 아무 탈 없이 패스되였길래 걱정할게 없었다. 그날 그 검사팀을 맞이했던 관리자에 의하면 벌금의 리유가 공장에 비치한 소방장치가 이미 로후해져서 소방기능을 잃은것이기때문이라는것이였다. 관리자가 올 구정후 새로 구매해서 비치한 장비들이라며 회계에게 가서 구매령수증까지 찾아다 보여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자기들의 검사를 경과하지 않은, 그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업체의 제품을 사사로이 구매해서 비치했길래 소방안전에 큰 우환이 있다는게 리유였다. 검사는 5분도 되지 않아서 끝났고 무작정 벌금고지서가 발급되였다. 무조건 벌금을 안기기로 작정하고 진행하는 불의습격식의 검사에서 기업이 피해갈 방법은 아무데도 없었다. 우에서 정한 각종 규제와 규정에 따라 업체들이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놓고있어도 그 열가지 규정외 림시로 벌금을 안길수 있는 리유를 백가지라도 더 만들어낼수 있는게 검사관들의 직업능력과 권한이였다. -수업료 한번 또 멋있게 왕창 냈군. 이번달도 또 장부가 아주 마이너스로 가겠군… 또 한달 애끓이면서 뼈빠지게 일해서 거꾸로 밑지는 사업을 하고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속으로 허구피 웃고 차에 올랐다. 키를 돌려 시동을 걸며 홍은 참고참았던 한마디를 드디여 뱉아냈다. -에잇, 거지같은 놈들. 온 하루 거의 자리를 비운 공장에도 빨리 돌아가봐야 했고 홀로 집에 있는 안해도 걱정이 되였다. 3. 이번에 새로 뽑은 디자인으로 만든 샘플은 기대처럼 그 프레임의 옆선이 탄탄하게 나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디자이너와 샘플실 직원을 불러 원인을 분석하고있는데 전화가 왔다. 휴대폰 화면에 뜬 전화번호가 안해의 전화번호임이 확인되는 순간 홍은 느닷없이 꿈틀해나는 가슴속의 당황함 같은것을 느껴야 했다. 홍은 미팅중이던 두 직원을 퇴근하라고 내보내고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당신 빨리 집으로 오세요. 안해는 다짜고짜 홍의 귀가를 호소해왔다. -응? 왜? 집에 무슨 일 있어?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집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사실 홍의 물음은 당신에게 무슨 일 있어? 였다. 애써 태연하게 물었지만 이미 홍의 가슴은 후두둑 뛰고있었다. 어투로 이미 홍은 안해가 또 발작했음을 알수 있었다. 이번엔 또 어떤것에서 자극을 받고 발작한것일가. 전번 신발장 사건후 안해가 거의 한달동안 두통을 호소해오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였다. 그런데 좀 마음의 탕개를 늦추려고 하는데 또 걸려온 안해의 전화. 홍은 느닷없이 가슴이 꽉 막혀오는것 같았다. -아, 미쳐, 이 냄새… 온 집안에 곰팽이냄새가 골똑 찼어요… 음식 썩는 냄새… 당신 들어올 때 슈퍼에 들려 세척제랑 소독수 사오는거 잊지 마세요. -뭔 소리야, 당신… 또 두통이 와? -머리가 터질것 같아요… 홍은 정신없이 차를 집으로 몰았고 안해가 사오라는 세척제와 소독수 사러 슈퍼에 들릴사이 없이 차를 주차하기 바쁘게 직접 집으로 올라가는 엘레베터에 몸을 실었다. 출입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 홍에게 안겨온건 너무나 뜻밖의 광경이였다. 안해는 주방에서 랭장고 문을 활짝 열고 그 안을 향해 선풍기를 돌리고있었다. 이미 랭장고안은 아무 음식물도 담겨있지 않은채 깨끗이 정리되여 새것처럼 닦여져있었다. 머리에 질끈 머플러를 동여맨 안해는 들어서는 홍을 보자 더욱 신경질적으로 선풍기를 랭장고앞으로 더 당겨 세워놓았다. -온 집안에 썩는 냄새예요. 집이 다 썩고있어요… 안해는 못 찾고있던 분노의 표출구를 마침내 찾은듯 씩씩대고있었다. 막 투우장에 뛰여들려고 하는 투우처럼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아무것도 없는 랭장고안을 들여다보고있었다. 정말이지 안해의 눈에는 뻘건 피발이 서있었다. 얼마나 두통이 심했으면 저렇게 안구 모세혈관까지 다 터졌을가… 홍은 그런 안해가 안스러워 안해를 품에 안아주고팠으나 독살스런 안해의 눈빛때문에 아무 행동도 감히 할수가 없었다. -당신 이 선풍기 거꾸로 들고 랭장고 아래쪽 칸을 말리세요. 말려야 냄새가 빠져요… 안해는 홍의 손에 선풍기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싱크대우에 설치된 붙박이문을 열고 그안의 그릇들을 들어내렸다. -그릇들에도 다 곰팡이가 끼였어요. 곰팡이냄새가 심하게 나요. 안해는 싱크대 수조에 물을 넘치도록 받아 그 물에 세척제를 아낌없이 섞었다. 내려놓은 그릇들을 그 물에 넣고 행주로 빡빡 문대여 씻기 시작했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홍은 거의 망연자실 상태로 멍하니 안해가 하는 짓을 바라보기만해야 했다.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인지를 빨리 판단하느라 안해가 넘겨준 선풍기옆에 멍때리고 서있었다. 안해는 홍에게 꽥 소리질렀다. -당신 멍해서 뭘해요? 선풍기 거꾸로 들고 랭장고 아래칸을 말리라 했잖아요? 홍은 안해에게 조심히 물었다. -당신 괜찮아? -괜찮게 생겼어요? 집이 다 썩어나가는 판인데… 안해는 홍더러 주방에서 나가라고 지시했다. 씻던 그릇들을 활팽개치고 자신이 직접 선풍기를 거꾸로 들고 섰다. 선풍기 팬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랭장고아래칸을 향해 바람을 날렸다. -다 썩고있어, 세상이 다 썩고있어… 모든게 다 부패하게 썩어가고있어… 안해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중얼거렸다. 홍은 안해의 몸에서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결전에 나선 투사의 모습이면 지금 선풍기를 거꾸로 든 안해의 저 결사적인 자세보다 더 전투적인 자세일가. 자칫 더 건드려선 안될 폭발 직전의 기운앞에 홍은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당신 뭐해요? 거실 바닥을 물걸레질이라도 하지… 바닥이 다 썩고있잖아요? 바닥 썩는 냄새 안 맡아져요? 거실바닥은 타일로 되여있었다. 홍은 차라리 집문을 박차고 나가고싶어졌다. 그날 밤 안해는 홍의 품에 안겨 울었다. 집이 썩고있는것 같다고. 옷장에서도 곰팽이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난다고… 옷장도 썩고있어서 래일 새거로 바꿔야 할것같다고… 온 집안에 풍기는 부패의 냄새때문에 미칠것 같다고… 세상이 다 썩고있다고… 썩고있는 세상이 무섭다고… 홍은 안해를 달랬다. 당신이 너무 민감해서 그렇다고. 며칠전 홍이 퇴근길에 사온 2.5리터짜리 식용유도 안해는 개봉하자마자 사용도 하지 않고 내다 버리라 하였다. 식당에서 사용하고 버린 기름을 다시 사용해 만든 띠꺼우유地沟油라고. 신선하고 달콤한 땅콩기름냄새가 아닌 썩은 냄새가 난다고 홍더러 내다버리라고 했다. 홍은 안해의 말을 무시할수 없어서 개봉한채 한방울도 사용하지 않은 기름통을 그대로 들고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그래도 그냥 그대로 버리기 아쉬워 쓰레기통에 던져넣기전에 기름통 아구리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홍의 코에는 고소한 기름냄새만 가슴 뻐근하게 맡아졌다. 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금 산 기름을 통채로 버리고 다시 슈퍼에 가서 제일 비싼 올리브유를 사와야 했다. 안해는 그 기름도 백프로 순도 높은건 아니라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지못해 사용하는듯 료리에 조금씩만 넣었다. 홍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해주며 안해에게 냄새에 너무 민감하면 이 세상을 살기 힘들다고 이야기해줬다. 가짜가 살판치고 불량품이 활개치는 세상에 당신 혼자만 너무 정품 코를 가져서 그렇다고… 그러면서 홍은 자기 코도 어쩜 안해의 코에 비하면 짝퉁코인지 모르겠다며 안해더러 홍 자기의 코 냄새를 맡아봐달라고 했다. 짝퉁코 냄새가 맡아지냐고… 그렇게 억지로 안해의 코에 자기 코를 대고 코끼리 맞대고 킁킁대며 안해의 입에 입맞추는데 성공했다. 드디여 안해의 울음이 멈추고 안해가 홍의 몸에 팔을 둘러왔을 때 홍은 참으로 오랜만에 안해의 옷을 벗겼고 그렇게 몸을 불태우던 중간중간 홍은 안해가 자기 몸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본다는 느낌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안해는 남편인 내 몸에서도 부패의 냄새를 맡고있는걸가? 그리고 그날 사랑놀음이 끝난후 안해의 샤워시간은 이전에 비해 배나 길게 이어졌다. 홍은 사랑뒤의 나른함보다도 몇배 더 심한 비애 같은것을 느끼며 그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었다. 부패의 냄새가 나는 남편과 한이불 덮고 잔다는것이 안해에게는 얼마나 큰 고역일가… 4. 캔톤페어 전시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이 붐볐다. 전시회에 출품한 업체들과 세계 각지에서 메이드인차이나의 새로운 제품 정보를 찾아 모여온 무역회사와 바이어들로 전시장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상업 정보의 각축장이였다. 홍은 비록 이번 전시회에 부스를 임대해서 출품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자체브랜드를 런칭해 이런 국제급 전시회에 출품해서 전세계 바이어들을 상대로 무역을 해보아야지 하는 꿈이 있었다. 그보다도 당장은 중국 각지의 우수업체들이 참가하는 이런 대형 박람회에서 가죽제품의 세계적인 패션흐름 트랜드를 읽기 위해 어제부터 오늘 이틀째 공장 모든 업무를 관리자들에게 맡기고 이렇게 파주 캔톤페어 컨벤션센터에 몸을 담고있었다. 점심이 지나도록 발바닥이 아플 정도로 전시장을 돌며 구경하다가 더는 걷기가 힘들어서 잠간 전시장 한쪽 코너에 마련된 커피숍에 앉아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전화가 울렸다. 공장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회사에 일이 생겼을 때 관리자들 선에서 해결할수 있는 일은 될수록 관리자들이 방법을 강구해서 해결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온터라 이렇게 홍이 자리를 비운 사이 공장에서 전화가 걸려올 때는 꼭 관리자들 차원에서 해결할수 없는 문제가 공장에 발생했음을 의미했다. 무슨 문제가 생겼지? 은근히 걱정되였으나 홍은 차분한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 재무담당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래일이 가죽원단 업체들의 결제일인데 회사 계좌의 잔금이 얼마 안된다는 내용이였다. -오늘이 H무역회사에서 전번달 수입해간 물량에 대해 결재해줄 날이잖아? 그 금액이면 원단값 충분히 결제해주고도 더러 남을건데. -H무역에 어제 이미 결제청구서를 넣었고 오늘 결제독촉 전화도 했습니다. 그런데 H무역도 해외바이어로부터 받은 신용장에 문제가 생겨서 은행결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리유로 이번달은 결제해줄수가 없다는 답변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이변이였다. 홍은 갑자기 뒤목이 뻣뻣해지는 느낌에 전화기를 손에 든채 눈을 감고 목을 좌우로 둬번 움직였다. 그러나 머리속은 쉬지 않고 빨리 회전시키고있었다. 이런 경우를 처음 접하는건 아니였다. 생산업체에 항상 필요한건 류동자금이였다. 아무리 많이 생산하고 아무리 많이 출고하고 아무리 많이 수출해도 그것이 현금으로 빨리 이어져 회전되지 않으면 공장은 돌아가기 힘들었다. 그래서 홍은 아무리 어려워도 항상 회사 계좌에 현금을 어느 정도 보유하고있었다. 그런데 어제 직원들에게 월급을 발급하고 오늘 아까 전시에 새로 나온 새로운 자동화 설비 몇대를 구매하며 예약금으로 몇만원을 걸어놓는바람에 당장 회사 계좌가 거의 바닥나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오늘이 H무역의 회계결제일이여서 별로 걱정하지 않았던 일이였다. 열심히 만든 제품이 출고와 함께 현금으로 바꿔지는 경우는 없었다. 오더를 발주해오는 회사마다 다 결제조건이 있어서 짧아서 한달, 길게는 석달만에야 출고제품에 대한 결제가 이루어지는것이 업계의 불문률이였다. 그 결제일대로 결제가 이루어지면 그나마 다행이였다. H무역은 지금까지 한번도 결제일을 미룬적이 없이 꾸준히 좋은 합작관계를 이어오던 업체였다. 그런 업체가 난색을 표시해올 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기때문일것이였다. 믿어줘야만 하고 기다려줘야만 했다. 홍은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K패션은? K패션은 근년래 국내 패션업계에서 두각을 내밀기 시작해 거족적인 발전을 자랑하는 대형업체로 향항증시 상장 준비중이라는 소문도 업계에 나돌고있었다. 홍의 회사는 업계에서는 아무 이름도 없는 작은 업체이지만, 그래서 아직 자체 브랜드 제품을 런칭할 정도는 못되지만 언젠가 자기의 브랜드로 된 제품을 시장에 내놓고싶은 꿈을 가지고 품질관리를 꾸준히 해오고있었다. 그런 덕분에 작년부터는 국내 1선도시 일류백화점에만 백여개의 자체매장을 가지고있는 K패션으로부터 OEM 생산요청이 와서 그 오더를 받아 납품해오고있었다. - K패션은 갑자기 국세국에서 세무조사가 들어와서 모든 은행업무가 다 동결되였답니다. -뭐? 홍은 저도 몰래 목소리톤이 높아지는걸 어쩔수 없었다. 홍의 공장 생산량의 절반은 K패션에 납품되고있었다. 국내 패션업계에서 알아주는 일류기업인 대신 결제조건은 까다로워서 납품후 3개월을 결제일로 정해놓고있었다. 대형회사의 갑질이면 갑질일수도 있었지만 그런 대형업체들의 오더발주에 의뢰할수 밖에 없는 소형생산업체로서는 그 결제조건을 따라줄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석달치 결제액이면 소형제조기업인 홍의 공장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적지 않은 금액이였다. -언제 발생한 일이야? -국세국에서 며칠전에 K패션 총부 재무부에 갑자기 들이닥쳤대요. 그리고 곧바로 은행업무 동결처분이 내려졌고요… 그래도 믿겨지지 않아서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확실한거야? -K패션 총부 재무부가 지금 야단도 아니랍니다. 재무부 총경리 리명박리사가 세무국에 조사받으러 불려가서 며칠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있다는 이야기도 우리 회사 결제담당인 박근혜양으로부터 직접 확인받은 내용입니다. -음… 좀 심각하군… 혹시 향항증시 상장을 위한 기업정보공개내용을 작성하면서 전체 그룹 재무구조에 대한 회계조작이 있었을수도 있는 상황이였다. 기업정보공개내용을 거짓으로 부풀리는건 증시 상장을 노리는 회사마다 거의 진행하는 사전작업중의 한가지 “관행”임을 홍 역시 얻어들은 상식으로 알고있었다. 혹시 웃선을 잘못 찾았나? 증시 상장을 밀어줄 배경인물을 잘못 잡으면 저렇게 재수없이 세무조사에 걸려들수도 있는것이였다. 아무쪼록 K패션이 이번 위기를 잘 넘겨야 할건데… 홍은 K패션에 관한 더 불길한 소식이 더는 들려오지 않기를 바라며 저도 몰래 새여나오는 한숨을 느꼈다. 머리속에 떠올릴수 있는 업체들의 리스트를 재빨리 회전시켰다. 그러나 결제 프로세스에 갑자기 생긴 구멍을 메워줄 업체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찾아야 했다. 결제를 제때에 해주지 못해서 원단을 공급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여서는 절대 안되였다. 전화기를 다시 귀가에 대고 역시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상황을 알겠으니까 회계로서도 다른 대안이 있나 잘 검토해보고, 나도 될수록이면 빨리 회사로 들어가도록 할게. 홍은 샌드위치와 커피잔을 손에 든채 박람회장을 빠져나왔다. 차를 원단시장쪽으로 향했다. 원단시장행은 원래 오늘 스케줄에 계획 없던것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잘 지켜오던 원단구매금액 결제시간을 지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뒤로 미룰수 밖에 없었다. 그건 자칫 원단공급상들에게 신용을 잃는 결과로 이어질수도 있는것이였고 원단공급업체앞에 신용을 잃는다는건 공장운영을 하지 말라는것과 같은 결과로 이어질수도 있는 상황이였다. 당연히 래일 회계가 원단공급업체들마다에 전화를 해서 량해를 구하고 결제일을 뒤로 미뤄달라고 사정해보겠지만 그러나 상황을 이미 보고받은 이상 사장인 자기가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홍은 결단내렸다. 전화상으로가 아닌, 직접 방문으로 매장마다를 일일이 찾아서 돌며 량해를 구하고 원단의 지속적인 공급을 요청해야만 하는 상황이였다. 5. 이번엔 바퀴벌레였다. 아까 전화에서 안해는 홍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침실 옷장안에 바퀴벌레가 숨어있는것 같아요. 다행히 두통을 호소해오는것이 아니여서 약간 안도의 숨이 나가기는 했으나 그러나 홍은 안해의 목소리에서 두통을 호소해올 때보다도 더 큰 불길함을 감지해야만 했다. 가슴을 와당탕 치고 올리받치는 순간적인 고통의 관통을 느껴야 했다. 그래도 아무 일 아니라는듯 껄껄껄 웃음을 전화에 쏟아부어넣었다. -아 그럼 사람 사는 집에 바퀴벌레 한두마리 함께 사는것도 정상이지… 그놈들도 사람 사는 집이니까 찾아들지 사람 없는 빈집이면 찾아들겠어? 그놈들도 좋은 사람의 따스한 인정이 그리웠던 모양이지 뭐. 당신 좋은 사람이잖아… 아빠트 엘레베터앞 복도에서도 그리고 주방에서도 바퀴벌레는 심심찮게 발견되군 했다. 아열대지방의 무더운 기후는 음식물 쓰레기들을 쉽게 부패하게 했고 그래서 이 도시에서 바퀴벌레와 쥐를 발견하는건 일상 다반사였다. 안해도 집 주방에 가끔 바퀴벌레가 출몰하고있는걸 언녕부터 알고있었다. 바퀴벌레가 발견될 때마다 녀성 특유의 호들갑을 떨며 징그럽다고 진저리치군 했던 안해였다. 그런 안해가 꼭 마치 오늘 처음 바퀴벌레의 존재를 발견한듯 전화까지 해오는건 냄새에 과민반응을 보여오던 것 못지 않게 홍에게 미리 불안한 긴장감을 던져왔다. -여보, 롱담할 때가 아니라니깐요. 정말 우리 집에 바퀴벌레가 살고있는것 같단 말이예요. 당신 휴대폰을 귀 가까이 대고 잘 들어봐요. 사락사락하는 소리 들리지 않아요? 바퀴벌레가 옷장안에서 옷을 갉아먹는 소리라니깐요… 홍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숨이 컥 막히는것을 느꼈다. 다리맥이 풀리며 그 자리에 물앉고싶어졌다. 그러나 홍은 용케도 잘 버텼다. -알았어. 나 화과산에 가서 손오공한테서 금방망이 얻어서 돌아갈테니까 당신은 아무짓 하지 말고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있어요. 나 저녁에 가서 금방망이 휘둘러서 그놈들 다 잡아서 납작하게 두드려줄테니까… 홍은 그렇게 롱담으로 안해를 달랬다. 그러나 가슴은 숨을 들이쉴수 없게 답답했다. 좁은 공간의 엘레베터에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전비상구 층계를 찾아 걸어내리는데 층계가 휘청휘청 하늘로 들리는것 같아서 벽을 짚고 한참 서서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저녁에 집에 도착했을 때 안해는 멀쩡했다. 이미 저녁 밥상을 다 준비해놓고 방긋 웃으며 홍을 맞이했다. 그러나 안해에게 가방을 넘기고 옷을 갈아입으려고 옷장문을 연 홍은 경악하고말았다. 옷장에는 옷이 한벌도 걸려있지 않았다. 옷장안은 텅 비여있었다. 돌아보는 홍에게 뒤에 따라섰던 안해가 조용히 한마디 던져왔다. -옷에 바퀴벌레들이 알을 너무 쓸어놔서 아까 다 내다버렸어요. 그리고 바퀴벌레 약을 사다 놨어요. 옷장안을 다시 들여다보니 과연 옷장안 바닥에는 가루약 같은것이 한층 뿌려져있었다. 고개를 둘러보았다. 벽을 따라 바닥 모서리로 약가루가 쭈욱 선을 그으며 뿌려져있었다. 홍은 갑자기 가슴이 꺽 막혀오는 통증을 다시한번 느꼈다. 오늘만 해도 두번째였다. 그러나 이번 통증은 아까 가죽도매시장에서 느꼈던 통증보다도 훨씬 더 강한것이였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나며 어지럼증이 왔다. 이대로 쓰러지고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속을 스쳤다. 안돼. 쓰러져선 안돼. 무너져선 안돼. 하늘이 무너져도 넌 버텨야 돼. 홍은 자신에게 웨치며 팔을 뻗어 옷장에 기대여 섰다. -당신 괜찮아요? 안해도 홍에게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급히 물어왔다. -아, 괜찮아. 나 좀 시원한 물… -얼음정수기도 버렸어요. 그 안에 바퀴벌레들이 둥지 틀고있어서요… 홍은 갑자기 안해를 그대로 안고 창문을 열고 아래로 뛰여내리고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너무 섬뜩한 충동에 스스로도 놀라며 홍은 아래입술을 피나도록 깨물었다. 입속에 흘러드는 그 피비린내 나는것을 꿀꺽 삼키고서야 홍은 숨을 내쉴수가 있었다. -잘했어. 밥 먹자… 홍은 웃으며 안해와 함께 식탁에 마주앉았다. 속으로 빌었다. 제발 오늘밤, 오늘밤만 무사해라. 정말이지 래일은 안해를 데리고 정신과병원에 다녀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홍은 이러다가 내가 오늘밤 먼저 미쳐버리고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밤 안해는 온 밤 자지 않았다. 남편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배려심으로 왼손엔 손전등을 켜들고 오른손엔 스프레이 살충제를 들고 집안 구석구석을 비추며 바퀴벌레사냥에 나섰다. 그런 안해를 말리지도 못하고 누워서 바라보며 홍 역시 온 밤 거의 실면했고 새벽에 잠간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홍은 침대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혼곤히 잠들어있는 안해를 차마 깨울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만 무사해라, 오늘 하루만 무사해라… 6. 홍은 그렇게 빌며 조용히 집문을 나섰다. 비가 내리고있었다. 아열대기후라 여름 우기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스콜처럼 비가 쏟아지군 했다. 그러나 이미 초겨울에 들어선 건조기때 내리는 아침비는 뼈속까지 오싹하도록 차거운것이였다. 다행히 크게 내리지 않아 홍은 가방안에 항상 넣고 다니는 우산도 펼치지 않은채 주차장까지 걸어서 갔다. 차에 오르기전 홍은 차옆에 서서 비에 씻겨 시원해진 겨울의 아침공기를 몇모금 더 심호흡해 들이마셨다. -그래, 괜찮을거야. 좋아질거야. 그랬다. 괜찮아져야 했다. 좋아져야 했다. 더 나은 삶을 살려고 이렇게 아득바득하는것이 아니던가. 차에 시동을 건 홍은 기분전환이라도 하려고 카오디오를 켰다. 홍이 운전할 때 즐겨 듣는 뮤직전문방송채널에서는 미국 가수 스팅(Sting)이 부른 노래 프레절(Fragile)이 흘러나오고있었다. Fragile 연약한 If blood will flow when fresh and steel are one 날카로운 쇠붙이에 살이 부딪쳐 흘린 피 Drying in the color of the evening sun 저녁의 태양 빛과 함께 굳어진다면 Tomorrow's rain will wash the stains away 래일의 비가 그 피의 얼룩을 지워주겠죠 But something in our minds will always stay 그러나 언제나 우리 맘속에 머물러있는 그 무엇 Perhaps this final act was meant 아마도 그 마지막 행위는 To clinch a lifetime's argument 우리 한평생의 론쟁을 끝내려는것이겠죠. That nothing comes from violence and nothing ever could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이룰수 없고 For all those born beneath an angry star 불운을 타고난 모든것들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깨우쳐주죠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계속해서 비는 내리리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떨어뜨리는 눈물처럼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떨어뜨리는 눈물처럼 On and on the rain will say 쉼없이 비는 속삭이리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쉼없이 비는 내리리 Like tears from a star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흘리는 눈물처럼 On and on the rain will say 계속해서 비는 말하겠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트럼펫과 첼로와 기타가 함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선률에 실려 흘러나오는 보컬 스팅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그 뜻깊은 가사로 더욱 홍의 가슴을 후줄근히 적셔주었다. 홍은 갑자기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걸 느껴야 했다. 억지로 눈을 슴벅이며 좌우로 흔들리는 와이퍼사이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래, 연약해선 안되였다. 보이지 않는 폭력에 둘러싸인 세상에 인간은 정말이지 너무나 연약한 존재였다. 저렇게 알수 없는 리유로 언제부터인가 무너져가고있는 안해와 그리고 그 안해옆에 강한 남자로 서있어주기에 너무 힘이 부쳐가는 요즘… 더 연약해져서는 안되였다. 홍은 량볼에 힘주어 어금이를 꽉 악물었다.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계속해서 비는 내리리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떨어뜨리는 눈물처럼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떨어뜨리는 눈물처럼 On and on the rain will say 쉼없이 비는 속삭이리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쉼없이 비는 내리리 Like tears from a star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흘리는 눈물처럼 On and on the rain will say 계속해서 비는 말하겠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눈앞 멀리 도로변에 새로 일떠서는 56층 고층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홍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그래, 새롭게 시작하는거야. 다 이겨내고 새롭게 시작하는거야. 그 고층건물 20층에는 홍과 안해가 이 도시에 와서 지금까지 분투해서 쌓아온 결과물이 300평방메터 면적의 사무공간으로 확보되여있었다. 날마다 치솟는 제조원가때문에 이제는 단순히 제조업만으로는 더 버티기 힘들었다. 중국도 이제는 제조업이 갈 때까지 간 시점이였다. 이젠 제조업에서 벗어나야 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다. 홍과 안해는 합의를 보았다. 홍은 그냥 제품제조를 책임지고 공장운영을 이끌어가고 안해는 사무실을 따로 내고 온라인상거래 부서를 새로 구성해서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직접 온라인에서 판매하는데 도전해보기로 했다. 만들기만 해서는 기업을 살려나가기가 점점 힘들었다. 팔줄 알아야 했다. 시장에서 팔줄 아는자가 살아남을수 있는자였다. 그래서 홍은 재작년부터 지하철역을 옆에 끼고 새로이 일떠서기 시작하는 오피스텔 고층건물을 눈여겨보다가 작년 년말 과감히 투자했다. 지금까지 공장을 경영하면서 모아온 돈을 탈탈 털어 선불금을 내고 십년 은행 할부 조건으로 300평방메터의 공간을 분양받았다. 그 건물이 한달전에 업주들에게 공식적으로 사용 인계되였고 홍은 그 즉시로 사무실 인테리어에 들어갔다. 인테리어회사에 맡겼지만 그러나 업주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자칫 눈속임 부실공사로 이어질수 있어서 홍은 이틀이나 사흘에 한번씩 지나가는 길에 그 건물에 들려 인테리어 진행상황을 체크하군 했다. 인테리어가 끝나면 당장 사무기구를 갖추고 안해에게 그 사무실 키를 넘겨줄 작정이였다. 그런데 그 새로운 중임을 한몫 맡아줘야 할 안해가 지금 저렇게… 후유… 다시 터져나오는 한숨을 고개를 저어 털어버리며 홍은 그 고층 오피스텔 건물을 지나쳐 공장이 있는 공단으로 향했다. 7. 아직 채 끝나지 않은 스팅의 프레절 노래 후렴구가 딱 멈춰지며 높은 오디오소리로 전화벨소리가 울린건 그때였다. 블루투스로 휴대폰과 카오디오가 자동 련결되여있었던것이다. 홍은 전화벨소리에 훌쩍 놀라는 자신을 발견했다. 리유없이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온 하루 거의 전화기를 붙들고 싸우다싶이 해야 하는 홍에게 전화벨소리는 절대 기피대상이 되여서는 안될것이였다. 그러나 요즘 홍은 전화벨소리에 많이 민감해져있었다. 혹시 또 하는 마음속으로 미리 밀고 들어오는 불안함때문이였다. 네비게이션 액정 화면에 뜬 번호는 역시 혹시나 했던 안해의 번호였다. -당신 미안해요… 아침도 챙겨드리지 못하고… 안해의 목소리는 멀쩡했다. 목소리로만으로는 안해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있는것 같았다. 혹시 안해는 간밤 자신이 온 밤 자지 않고 바퀴벌레사냥을 했다는것을 모르고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그랬으면싶었다. 자신이 저질렀던 그 기이한 행각들을 다 기억하고있다면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온 지금 안해 스스로도 자신의 그 이상한 행동을 리해할수 없어서 더욱 미치고싶어질것이였다. 홍은 그게 더 걱정이 되였다. -아, 괜찮아… 당신 혼자 아침을 꼭 챙기고… 나 오늘 될수록 일찍 집에 들어가도록 할게 . -그런데 당신 지금 어디예요? 안해는 느닷없이 홍의 위치를 물어오고있었다. 홍은 또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응… 지금 막 우리 새로 분양받은 오피스건물을 지나고있어. 이십여분이면 공장에 도착할거야… -아아악… 갑자기 카오디오에서 안해의 울부짖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신 그 건물 빨리 지나쳐요. 그 건물 지금 막 무너지려 하고있단 말이예요. 안해는 전화기 저쪽에서 막 다급히 소리지르고있었다. 아닌 밤중에 이 무슨 홍두깨 내미는 소리란 말인가. 그래도 홍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방금 지나친 그 건물을 뒤쪽 유리창너머로 얼핏 쳐다보았다. 멀어져가는 그 고층건물은 멀쩡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야? 지금 막 새로 일떠선 건물이 왜 무너진단 말이야… 홍은 저도 몰래 흥분되여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건물 불량시공으로 지어진 위험한 건물이란 말이예요. 그 건물 지하받침 구조물이 무너지고있는 소리가 지금 막 들린단 말이예요. 홍은 갑자기 숨이 꺽 막혀오고 귀가 멍멍해나면서 오디오에서 터져나오는 안해의 그 다급한 고함소리가 메아리로 멀리서 맞혀 들려오는것처럼 들렸다. -건물 멀쩡하니까 걱정 잡아매고 당신 잠 좀 더 자요… 당신 잠이 모자라서 그래요… 자신의 목소리도 먼 산에 부딪쳤다 되돌아오는 울림처럼 들려와 홍은 아뜩한 현기증을 느꼈다. 마침 옆골목으로 새여나가는 갓길이 보였다. 무조건 깜빡이를 켜고 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차들이 뜸해진 곳까지 어떻게 차를 운전했는지 모르며 홍은 브레이크 밟아 차를 세우며 왼손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숨이 막혀 막 터질것만 같은 가슴이였다. 운전석과 조수석사이에 있는 수납공간에 항상 비치하고있던 물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안돼, 안돼, 숨을 쉬여야 해. 막힌 숨을 뚫어야 해… 눈앞이 캄캄해져오는 자신에게 홍은 악을 바락바락 쓰며 속으로 웨쳤다. 전화가 끊어진 카오디오에서는 다시 스팅의 프레절 노래가 후렴구로 반복되여 울려나오고 있었다.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계속해서 비는 내리리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떨어뜨리는 눈물처럼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떨어뜨리는 눈물처럼 On and on the rain will say 쉼없이 비는 속삭이리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쉼없이 비는 내리리 Like tears from a star like tears from a star 별이 흘리는 눈물처럼 On and on the rain will say 계속해서 비는 말하겠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8. 그날 오후 홍은 날이 어두워지기전에 공장 사무실을 나섰다. 오랜만의 조기퇴근이였다. 아까 점심때부터 홍이네 공장이 위치한 블럭의 건물들에만 느닷없이 정전사태가 발생하여 홍은 아예 오후 휴업을 선포했다. 그리고 온 오전 걱정된 안해때문에 자신도 일찍 집으로 돌아가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홍은 손에 들었던 가방을 다시 내려놓고 혼자 사무실에 남아 그새 밀린 일들을 처리하는데 몇시간을 보냈다. 아침 출근길에 안해의 전화 사태로 갑갑해진 가슴은 온 하루 더해만 지는 불안감으로 더욱 숨을 들이쉬기도 힘들게 답답함을 호소해왔고 홍은 몸은 공장에 있어도 신경은 온통 안해에게로 향해져있었다. 아침에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안해에게 전화를 걸어 무사히 공장에 도착했음을 알렸었다. 그러자 안해는 전화기 저쪽에서 엉엉 울었다. -당신이 안전하면 됐어요. 너무 걱정되였단 말이예요. 당신이 그 건물옆을 지나다가 무너지는 건물에 혹시 봉변이라도 당했을가봐… -여보, 나 지금 멀쩡하잖아… 당신 혹시 옅은 잠속에 꿈을 잘못 꾼것일수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 건물 멀쩡해. 무너지지 않아. -아니예요. 꿈이 아니예요. 지금도 그 건물이 밑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고 건물이 옆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모습이 내 눈에 보인단 말이예요. 안해의 증상은 심각했다. -당신 오늘 그 오피스텔 건물 부근에 절대로 다시 가선 안돼요. 우리 그 사무실 분양받은 거 포기하면 돼요. 미련 갖지 말아요. 사무실 인테리어 걱정되여서 다시 가보면 절대 안돼요. 홍은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서 안해를 둘쳐업고 병원으로 달려가고싶었다. 그러나 그러나 홍은 두려웠다. 그렇게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는 안해를 대하면 자신이 먼저 미쳐버리고 말것 같았다. 그런 안해를 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홍은 온 하루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꿈틀꿈틀 놀라면서도 그때마다 그 전화들이 안해에게서 걸려온것이 아님에 안도의 숨을 내쉬군 했다. 차에 올라 키를 돌려 시동을 걸며 홍은 하아… 하고 장탄식을 토했다. 막막했다. 집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기 겁났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고있었다. 안해는, 안해는 오늘 또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있을것인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아 아니, 감히 상상을 할수가 없어서 홍은 그렇게 멍하니 운전대앞에 앉아만 있었다. 도대체 어데서부터 잘못된걸가.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렇게 일욕심 많고 살림욕심 많던 안해였는데. 그렇게 자기 몸 헤아리지 않고 일에 매달려 둘이 함께 뭔가 자그마한걸 하나 만들어놓고 함께 그걸 키워가는데 그렇게 열성을 부리고 보람을 느끼던 안해였는데. 그런데 그런 안해가 지금…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싶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안해가 미쳐가고있는 집을 내놓고는 갈 곳이 없었다. 그래, 미치자. 같이 미치자. 나도 당신과 함께 미쳐주마. 홍은 그렇게 중얼대며 파크위치에 두었던 스틱을 드라이브 위치로 당겼다. 한창 퇴근시간대여서인지 길에 차가 많이 밀렸다. 엑셀을 밟는 시간보다 브레이크를 밟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렇게 굼벵이 기여가듯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는 차안에 홍은 그냥 후유~ 후유~ 가슴이 꺼질듯한 한숨을 이어갔다. 그렇게 해도 가슴속은 조금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분양받은 오피스텔 고층건물과 가까워질수록 그 한숨의 두께는 점점 두꺼워져갔다. 아침 안해의 전화때문일것이였다. 얼마를 기였는지… 멀리 그 건물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물들기 시작하는 석양빛을 받아 찬란한 빛을 눈 시리게 반사하는 건물을 바라보며 홍은 더구나 억장이 무너지는듯한 한숨을 토해내야만 했다. 이 도시에 와서 분투한 그 모든 피눈물의 시간들이 응고되여있는 저 건물속의 300평방메터 되는 작은 공간, 그 공간에서 새롭게 새롭게 시작하려 했는데 그 공간의 주인공이 되여야 할 안해는 무너짐을 호소해오고있었다. 무너질거라고, 그렇게 쌓아온 모든 시간들이 허무하게 다 무너질거라고 호소해오고있었다. 아, 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홍은 느닷없이 차의 속도를 높여 그 건물을 향해 돌진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안해가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기전에 자신을 먼저 파괴해버리는게 나을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나 그건 안될 짓이였다. 홍은 저앞에서 빛을 반사해 찬연한 건물을 바라보며 속으로 웨쳤다. -여보, 다 잊고 다 버리고 우리 다시 시작해… 우린 아직 젊잖아, 충분히 다시 멋있게 시작할수 있다구. 홍은 안해를 향한 그 호소가 역시 자신을 향한것임을 깨달으며 등받이 깊숙이 묻었던 허리를 쭉 펴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홍은 그 찬연한 석양빛속에 하얀 날개가 펼쳐지는것을 발견했다. 건물 꼭대기에 하얀 날개가 우아하게 펼쳐지고있었다. 홍은 갑자기 숨이 꺽 막혀오고 오금이 저려왔다. 아니야, 잘못 본거야. 착시현상이겠지싶어 급히 왼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눈을 크게 뜨고 차창너머로 그 건물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잘못 본게 아니였다. 직감으로 홍은 웨쳤다. 안돼! 안돼! 안해였다. 안해가 하얀 치마를 입고 그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서있었다. 홍은 본능적으로 오른발에 힘을 주었다. 엑셀을 콱 밟았다. 차가 튕기듯 앞으로 치고 나갔다. 쾅! 하고 앞차를 들이박으며 홍은 터져나오는 에어백의 충격에 정신을 잃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때 홍의 눈에는 자기 차를 둘러싼 사람들 너머로 저앞에 고층건물에서 날아내리는 하얀 날개의 모습이 맞혀왔다. -안돼!!!! 홍은 울부짖으며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옆 문을 뛰쳐나갔다. 날개를 펼치고 날아내리는 안해를 받아안으러 두팔을 날개처럼 펼치고 그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간 홍은, 안해가 날아내린 그 건물의 밑에서부터 화산연기 같은 먼지파도가 치솟으며 건물이 기우뚱 도로쪽으로 크게 기우는것을 감지했다. 새로 일어선 건물이 정말 거짓말처럼 무너지고있었다. 스스로 긴 목을 꺾어 무너지는 기린처럼 그렇게 옆으로 살풋이 기울어지며 쓰러지고있었다. 홍은 무너지는 그 건물밑으로 두팔을 펄럭이며 날아 들어갔다.     조광명 략력: 1986년부터 문학작품 발표 시작.  시집 《좌선, 어느 30대의 아침》,  수필집 《그리하여마침내 도시여》 출간.  현재 광주 거주.   장백산 2017년 1월호
12    [단편] 날개를 심다(조광명) 댓글:  조회:1175  추천:29  2010-08-03
단편소설                       날개를 심다                                                         조광명 날개의 꽃잔치 날개를 심고있었다. 눈부시게 화려한 은백색의 아름다운 날개였다. 그 고운 날개의 깃털 하나하나씩을 뽑아서 땅에 꽂고있었다. 밭고랑처럼 쭉 줄을 낸 땅우에 날개의 깃을 심고있었다. 한줄로 나란히 심어진 그 깃털들을 바람이 불어와 파르르 날리고있었다. 그 날림이 해빛을 받아 억새꽃처럼 찬연하게 반짝이고있었다. -와, 너무 이쁘다. 딸애가 옆에서 감탄을 퐁퐁 토해내며 좋아서 손벽을 치고있었다. 그 날개의 깃털들에 물을 주고있었다. 예쁜 핑크색의 조리에 투명한 생명수를 골똑 담고 깃털에 물을 주고있었다. 노을빛을 받아 물방울들이 노란 진주로, 빨간 진주로 반짝였다. 작은 무지개가 찬연하게 만들어지고있었다. -와, 너무 이쁘다. 딸애가 옆에서 감탄을 퐁퐁 토해내며 손벽을 치고있었다. -정말 날개가 자라는거야? 정말 여기서 하늘만큼 큰 날개가 나오는거야? -그럼. 날개가 나오지, 날개가 자라나오지. 훨훨 하늘을 나는 날개들이 자라나오지. 그리고 우리 공주처럼 훨훨 하늘을 날지. 나는 딸애를 안아 하늘로 번쩍 들어 비행기를 태워주었다. 와우, 와우… 놀란듯 즐거워라 부르짖으며 자극을 즐기는 딸애의 비명소리가 하늘에 메아리쳤다. 그래, 날아라 훨훨, 하늘에 날아라. 그때 하늘이 열리고있었다. 푸른 하늘 한자락이 쫘악 무대의 막이 량옆으로 갈라지듯 열리고있었다. 그 갈라진 틈새로 정말로 거대한 깃털들이 떨어지기 시작하고있었다. 그 깃털들이 눈발처럼 휘날려 방금 내가 심은, 내가 내 딸과 함께 심은 그 깃털들 주변에 화살 박히듯 쫑 쫑 쫑 박혀 심어지고있었다. 어느새 내 주변은 온통 깃털의 천지였다. 억새밭보다 무성한 깃털의 바다가 되여있었다. 그 깃털의 바다속에 나와 내 딸이 멍 때리며 서있었다. 깃털들이 자라는 소리가 막 들려오고있었다. 부화된 알속에서 병아리들이 부리로 톡톡 계란껍질을 터뜨리듯 그렇게 여기저기서 톡톡 땅이 터져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그 땅이 톡톡 갈라지는 소리가 더 빨라지고 더 커지더니 드디여 슬로우모션으로 꽃잎들이 한순간에 피듯 그렇게 날개들이 땅우에 막 꽃처럼 피여나고있었다. 아아아, 날개의 바다. 날개의 꽃바다. 정말 날개들은 알록달록 꽃의 색갈로 그렇게 오색찬연하게 땅을 덮고 설레이고있었다. 황홀한 날개의 꽃바다가 출렁이고있었다. 드디여 날개들이 땅을 치고 땅을 떠나 하늘로 치솟기 시작하고있었다. 날개들이, 몸뚱이 없는 날개들이 하늘로 훨훨 비상하기 시작한다. 날개가 하늘을 나는건지 꽃들이 하늘을 나는건지… 나는 정신이 없었다. 이제 날개들은 다 땅을 떠나 하늘에 넘치고있었다. 채색의 구름처럼 하늘을 쫘악 뒤덮고있었다. 이제 땅에는, 내가 깃털을 심은 땅에는 날개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날개들은 다 하늘에 날고있었다. 날개들은 다 하늘에, 하늘에 꽃바다의 물결을 이루고있었다. 나는 급히 딸애의 손을 잡았다. -자, 이젠 우리가 날 차례야. 우리도 날아야 돼. -어떻게 날아? -저렇게, 저렇게 날개들처럼 쫙 두팔을 벌리고 나는거야. 나는 딸애에게 두팔을 벌리는 시늉을 하고있었다. 그 순간, 정말 내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거대한 날개가 쭈욱 뻗어져 나왔다. 나를 따라 두팔을 벌린 내 딸애의 겨드랑이에서도 이쁜 핑크색의 날개가 천사의 날개처럼 너무 예쁜 깃털을 달고 나오고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날면 되는거야? 딸애는 내게 날개를 푸덕이는 동작을 해보였다. 순간 딸애의 몸이 땅을 떠나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천사처럼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기다려, 아빠와 함께 나는거야. 나는 급히 딸애를 쫓아 날개를 푸덕이기 시작했다. 나도 날아오르고있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나와 딸애 주위로 오색찬연한 날개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원무를 추고있었다. 검은 날개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어떤 자락이 눈앞에 흔들린다. 무엇일가, 도대체 그것은. 생각을 모아 그 자락의 끝이라도 잡으려고 애쓰지만 그러나 그건 아련히 피여오르다가 그대로 해볕에 증발되여 사라지는 한줌 안개처럼 도무지 생각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다. 손안에 잡히지 않는 한줌의 안개, 그 안개에 가려진 마음의 눈이 너무 답답해 눈을 감고 머리도 흔들어보지만, 그러나 머리속은 점점 짙어가는 안개의 밭인양 더욱더 하얗게 비여져갈뿐이다. 분명 다 그렸다고, 더 그려넣을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손은 화필을 놓지 않고있었다. 그랬다. 지금까지 그린 이대로라도 충분히 완성된 그림일수 있지싶지만 그러나 나는 내 손의 감각을 믿기로 한다. 손이 지금까지 이 그림을 그리는데 사용한 붓을 놓고파하지 않는한, 버리지 않는한 붓은 아직 저 캔버스우에 단 한점 혹은 단 한줄이라도 더 찍고 그어나가야할 뭔가를 남겨놓고있었다. 그것을 붓은 알고있었다. 그래서 내 손을 떠나지 않고있었다. 내 손도 그 붓을 버리지 못하고있었다. 결국 내 손에 들려져 있는 이 붓이 쓰레기통으로 시원히 날아가 깨끗이 버려지지 않는한 내 그림은 아직 내 머리속에 소용돌이치는, 나로서도 딱히 알수 없는 정체모를 역설의 냄새 같은것을 다 그려내지 못한것이고 그 그림뒤에 감춰져 있는 정감의 온도 같은것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것이다. 뭘가, 도대체 뭘가, 한달넘게 내 손에 들려져 있던 이 붓을 아직도 내 손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있는 정체불명의 이 허깨비 같은것은. 그 안개 같고 허깨비 같은것을 좇아 나는 그렇게 캔버스앞 의자에 아침부터 지금까지 꼬박 두시간이상 앉아있는것이다. 뭐지? 도대체 뭐지? 부르르… 하고 테블우에 올려놓은 핸드폰의 진동이 책상면을 흔들며 부르릉 울린다. 보나마다 수진이 그녀다. 어제 금요일, 이 그림을 시작한 그날부터 한달동안 향아를 데리고 어린이집으로 오가느라 수고했던 수진이는 이번 주말엔 꼭 아빠와 함께 자겠다고 떼질쓰는 향아를 데리고 집으로 왔었다. 그런 수진과 함께 향아를 가운데 앉히고 셋이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친후 나는 하루만 더 기다려달라고, 오늘밤이면 그림을 완성할것 같다고, 발길을 돌리기 아쉬워하는 그녀를 기어코 되돌려 보냈던것이다. 아니나다를가 핸드폰 액정화면에는 “미야”가 깜빡깜빡 유혹의 윙크를 보내오고있었다. 미야는 내가 수진에게 달아준 닉네임이다. 언젠가 격렬한 사랑을 나눈후 내 품에 안긴채 내 핸드폰에 저장된 자기의 닉네임을 보고 수진이는 미야? 무슨 뜻이야? 미녀도 아니고 미아도 아니고 미야라니? 하고 의아해하는 눈길을 던져왔었다. -미녀야수라는 뜻이야. -뭐? 내가 왜 야수인데? 당장이라도 그 눈으로 다시 나를 잡아먹을듯, 사랑의 물기를 함초롬히 머금은채 동그라니 올롱해지는 수진의 귀여운 눈. -너 야수지 그럼. 항상 나를 잡아먹으려고, 야금야금 씹어먹으려고 혈안이 되여있잖아? -피, 아예 킬러라 하시지 그랬어? 몬스터라 하시지 그랬어? -킬러라 하면 어감이 너무 강하잖아. 몬스터도 그렇구… 괴물은 아니잖아. 내게 수진이는 야수지만 너무 예쁜 야수니까. -정말 예뻐? 역시 그녀도 녀자였다. 예쁘다는 말에 약했다. 냉큼 얼굴에 화사한 기쁨의 꽃물결을 피워올리며 내게 고운 입술을 보내왔다… 수진은 미대 대학동기인 나와 안해가 련애를 할 때 우리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대학 일년 후배였다. 미대 녀대생들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미모를 자랑하면서도 성격이 활달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여서 미대 거의 모든 행사에서 리더로 활약하는 그녀의 모습은 항상 우리 선배들에게도 부러움과 찬사의 대상이 되군 했다. 당연히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여 우리 동기중에서도 몇몇 플레이보이기질이 있는 친구놈들이 레브레터를 날려보내봤으나 기분 좋게 거절당한 에피소드도 알 사람은 다 알고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항상 당당하고 도고한 한마리의 고니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자기 련애는 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련애하는 우리 둘사이에 늘 끼여들어 “훼방군” 역할을 하는것이 나로서는 잘 리해가 가지 않았으나 그러나 그렇게 야무진 후배가 우리뒤를 쫓아다니는것이 싫은건 아니였다. 오히려 너무 귀여워 우리 두 사람 다 그녀를 정말 친녀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해주어야만 했다. 졸업후 그녀는 그림 그리기보다 사회활동에서 더욱 두각을 드러냈고 어느날 문득 전체 미대와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이슈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이 도시의 최대의 화랑을 갖춘 아트홀 경영자로 당당히 군림했던것이다. 화가로서의 성공보다도 아트 에이전트로의 성공을 더 기대한다던 그녀의 꿈을 마침내 이루어냈던것이다. 그러나 아직 어쩜 너무 어린 나이에 그렇게 거대한 사업에 감히 손을 댈 정도로 그녀의 꿈이 다부지고 컸을줄은 나와 내 안해가 될 사람 모두 너무 뜻밖이였다. 사업가로의 화려한 데뷔를 공식선언하는 첫리셉션에서 그녀는 결혼을 앞둔 나와 안해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이제부터 수진이가 언니와 선배의 공식 에이전시가 되는걸 동의하는거지? -당연하지, 우리야 너무 고맙지.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의 결혼을 미리 축하한다는 덕담을 하던 그녀는 내 안해될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잠간 어울리는 사이 내게 이런 애매한 말을 던졌다. -두 사람 결혼 너무 일찍 하는게 아냐? 졸업한지 이제 몇년 됐다구… 나만 괜히 너무 심심해지잖아? -응? 이젠 사업가가 됐으니까 몸이 열두쪽 되도록 정신없이 바빠지겠으면서두 뭐. -아니지, 그래도 항상 철없는체하고 쫓아다니며 선배를 가까이서 쳐다볼수 있었던 때가 좋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 그 어떤 애잔한 아쉬움 같은것이 묻어있는것이 잠간 보여 괜히 순간적으로 내가 당황해졌어야만 했다… -그림 다 되였지? 이젠 그림 가지러 가도 되는거지? 통화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까이 대기 바쁘게 그녀의 약간 달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림 보러 오겠다고 한다. 그림 가지러 오겠다고 한다. 나를 보러 오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 완성된 그림을 빨리 보고파하는 그녀의 달뜬 마음을. 그림을 가지러 달려오겠다는 그녀의 그 마음보다 더 뜨거워졌을 그녀 육체의 열망을. 지금 거의 완성되여가고있는 이 그림을 시작한지 한달동안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찾지 말아달라는 나의 뜻대로 한번도 내 화실문을 따고 들어오지 않고 향아를 보살펴준 그녀였다. 그 한달동안 내 몸안에 그녀를 향한 열망이 뜨거운 용암으로 쌓일대로 쌓여졌다면 그녀의 몸속에도 역시 나를 향한 사랑의 열망이 보물처럼 차넘치고있으리라. -어, 아직은 아니야. -어제 향아를 데려다주러 갔을 때도 거의 완성되였다고 했잖아? 밤이면 완성될것 같다구 하더니… 그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있는게 전화기너머로도 알려왔다. -아니야, 아직은. 조금만 더 기다려줘야 할것 같아. 마지막 한획, 그것이 아직 남아있어. 미안해… 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전엔 그녀가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리면 더 그림이 잘 나오군 했지만 이번 그림만은 그녀가 보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싶었었다. 완성되기전에는 보여주기 싫은 그림이였다. 내 이번 그림의 색감과 톤을 그녀에게 보인다면 그녀가 괜히 어떤 근심을 앞세우면서 이 그림의 계속되는 창작을 저애할수도 있다는 내 로파심 섞인 리기의 생각때문이였다. 어쩜 그녀가 싫어할수도 있는 그런 그림이였다. 다른 사람이 그린다면 싫어할 리유없이 좋아하겠지만 내가 그린다면 걱정을 앞세워 싫어할수도 있는 그림이였다. 그녀가 내게 기대하는 다른 명랑한 톤으로 그려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전의 《불타는 날개》계렬의 작품이나 《푸르른 날개》계렬의 작품처럼 생명력이 넘치는 붉은 색조와 푸른 색조로 그렸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알고있었다. 지금까지 내 가슴속 한구석에 단단한 먼지의 화석처럼 쌓여있는 그 칙칙한 색갈들을 이제는 그림으로 다 토해내야 한다는것을. 아직도 남아있고 어쩜 더 강해지는 이 세상으로의 분노와 절규이지만 이제는 그 모든것을 감히 그림으로 토해내도 괜찮은 시간이 되였다는것을. 지금까지는 가슴 밑바닥에 피고름으로 감춰두고 억누르고있었던것이지만 그러나 그건 치유책이 아님을 나는 나 스스로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어차피 그건 언젠가는 그림으로 그려내야만 하는것이였다. 그림으로 그려내고 그 그림속에 다 토해내고 진짜로 내 마음을 비워내야 했던것이였다. 그녀 수진의 헌신적인 사랑과 피타는 노력에 힘입어 많이 극복되고 이겨내고있었지만, 향아의 해맑은 웃음을 보며 향아와 주고받는 사랑의 힘으로 많이 치유되고있었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 먹물보다 검게 감추고있던 피눈물을 이제는 정말로 다 토해내야할 시간이 왔음을 나는 깨닫고있었던것이다. 진짜 재생의 나를 위해서도, 향아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녀의 인생을 위해서도 이제 새로운 결단의 시간이 왔음을 나는 알고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가슴속에 쌓여있는 그 죽음의 검은 색을 드디여 그녀 수진이 몰래 내 그림에 담아내기로 결정했고 이번 이 작업만은 수진이 몰래 진행하고팠던것이다. 이번 그림을 시작한이후 한번도 수진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한달동안 검은색앞에만 매달려있는중이였다. 한달내내 너무 가슴이 아픈 작업의 시간이였고 붓질 한번 한번은 지금까지 나를 아프게 했고 절망하게 했고 쓰러지게 했고 피 토하게 했던 그 모든 시간을 다시 떠올려 내 심장의 살결과 함께 갈기갈기 다시 찢어지는 시간으로, 참으로 다시 쓰러질것 같은 힘들고 지친 작업의 시간이였다. 이제는 그 힘든 작업을 끝내야 했다. 그 검은색의 블랙홀 같은데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그 검은색에 지쳐 필을 놓을 때가 되였음을 쓰러질것 같은 내 몸의 한계로 깨닫고있으면서도 황당하게도 나는 아직도 그림에 모자라는 그 무엇인가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고있었다. 아, 토해내는것이, 다 토해내는것이, 다 토해내고 철저히 비워내는것이 이렇게도 힘들구나… 안타까웠다.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 안개의 자락 같은 정체를 마지막 한획의 붓질로 그려낼수 없는것이. 그 마지막 한획때문에 내 가슴은 아직도 미어질것 같은 통증으로 안으로 검은 피를 뚝뚝 떨구고있었다. 아이의 눈이 무섭소 자박자박 작은 슬리퍼가 층계를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물쇠를 걸지 않고 빼꼼히 열어놓고있은 반지하실문이 살그머니 열리는 기척이 들린다. 나는 오른손에 붓을 든채로 의자에 앉은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잠든체하고 눈을 감고 기다리기로 한다. 이제 내옆에 다달은 딸아이는 아빠가 잠든걸 확인하느라 숨죽여 아빠 눈앞에 고 귀여운 손을 살살 좌우로 흔들어볼것이고 한번 더 확인하느라 아빠의 코밑에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대어 아빠의 숨결을 확인해볼것이다. 그래도 내가 아무 반응이 없으면 마지막 확인작업으로 내 눈초리끝을 조심스레 살짝 터치해볼것이고 그래도 내가 눈을 뜨지 않고 그냥 깊은 잠에 빠진 시늉을 하고있으면 드디여 그 작은 코구멍으로 내쉬는 숨결조차 다 안으로 가다듬으며 고양이걸음으로 살그머니 내 등뒤로 발자욱소리 죽여 돌아갈것이다. 드디여 내 어깨에 떨어지는 딸애의 두손. -왁! -에크머니… -놀랬지? 나는 화들짝 놀란 시늉을 과장해서 선물한다. 까르르… 딸애의 웃음이 내 작업실에 넘친다. -와, 향아가 언제 내려왔지? 아빠 너무 놀랬잖아? -놀랬어? 많이? -그럼… 너무 놀래서 막 심장이 콰당콰당 뛰잖아? -진짜? 딸애는 아빠 심장이 정말 많이 놀라서 많이 뛰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내 가슴에 그 귀여운 머리를 가져다댄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딸애의 머리를 내 가슴에 꼭 껴안고 킁킁 딸애의 곱슬머리에 코를 대고 그 젖살내음 채 가시지 않은 애기풀냄새를 맡는다. 그게 나와 딸애의 《왁! 놀랬지?》 유희의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레퍼토리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였다. 감은 눈이지만 앞에 손이 움직이는걸 느낄수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눈앞에 작은 손이 움직이는게 느껴지지 않는다. 코밑에 다가오는 따스한 손가락의 느낌도 없다. 눈썹을 간질이는 느낌도 없다. 음? 이상하군. 나는 눈을 가늘게 밑으로 뜨고 곁눈질로 딸아이의 동정을 살핀다. 딸아이는 내 옆에 선채로 앞에 세워져 있는 캔버스를 뚫어져라 쳐다보고있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듯 머리를 갸웃하며 눈살을 찌프리기도 하고 잠간 고개를 뒤로 젖혀 좀 시야를 조절해보기도 하면서 거의 끝나가는 내 그림을 열심히 들여다보고있었다. 나는 오늘은 딸아이와의 《왁! 놀랬지?》유희절차가 생략되였음을 깨닫는다. 딸애를 놀래지 않으려고 쩝쩝 입을 다시며 하품하는 시늉을 한다. 지금 막 잠에서 깨는듯이. -어, 우리 공주 언제 내려왔어? 손에 들었던 화필을 놓고 손으로 그 작은 어깨를 끌어다 딸아이를 내 무릎에 앉힌다. -아빠, 깼어? -음… -많이 피곤하지? 잠든체하는 아빠를 정말로 피곤해서 잠든줄 알고 걱정해주는 딸애의 마음이 뭉클하니 너무 가슴에 벅찬 감동을 준다. -아니. 향아를 이렇게 꼭 안으니까 너무 좋아, 너무 힘이 나. 나는 아이를 품에 꼭 보듬어안는다. -아빠가 이렇게 안아주니까 향아 너무 좋다… 엊저녁 아빠 나를 꼭 안고 잔거 맞어? -당연하지. 지금처럼 이렇게 꼭 안고 뽀뽀를 하면서 잤는데두… 향아 꿈에 아빠가 향아를 안고있는거 못봤어? -아니, 봤어. 너무 좋았어. 딸애는 벌써 아빠 기분을 맞춰줄줄 안다. 꾸지도 않았을 꿈을 아빠 말대로 꾸었다고 기분 좋게 응수해온다. -근데 아빠, 이 그림 아빠 그린거 맞아? -그럼, 당근이지. -근데 왜 핑크색 없지? 딸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색갈이 핑크색이여서 근간 내 그림들에는 핑크색이 양념처럼 많이 들어가군 했었다. -음… 이번에는 핑크색 없는 그림이야. 괜찮지? -응. 괜찮아. 그런데 아빠 지금 그린거 뭐지? -향아 보기엔? -음… 높은 벽 같기두 하구… 음… 아니야, 검은 길 같기두 하구… 음… 아냐 아냐,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거 같기두 하구… 음… 잘 모르겠어. -그래? 나는 가슴속 은밀한 곳이 갑자기 쿡 하고 뾰족한것에 찔리는 아픔을 순간적으로 느꼈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시도때도없이 내 가슴을 찔러오던 그 아픔보다 더 강한것이였다. 그림을 향해있는 아이의 얼굴을 옆으로 돌려 그 얼굴에 정성껏 뽀뽀해주었다. 네가 보아냈단 말이지? 정녕 네가 보아냈단 말이지? 아빠가 그려 넣지 않고 숨겨놓은걸 네가 거의 다 보아냈단 말이지? 뛰여넘을수 없게, 무너뜨릴수 없게 높고 두터운 담장… 날아넘을수 없게 아스라하니 끝이 보이지 않는 추락을 위한 절벽… 그리고 시커먼 구멍으로 욕망을 토해내듯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함정 같은 굴뚝… 그리고 가야할 방향을 잃고 뻗어야할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검은 길… 빛을 잃어 동굴처럼 시커먼 터널… 그리고… 검은 거품을 부글부글 끓이며 이 세상 모든걸 다 삼킬 듯 표효하며 달려오는 검은 파도… 그리고… 무너지는 담벽들… 그리고… 무너지는 건물들… 그리고… 그 아래에 깔려 신음하는 인간들의 아우성… 그 모든걸 감춰놓은 그림이였다. 그 모든걸 다 그려넣고픈 충동을 누르고 그 모든것들은 다 감춰서 그려넣지 않고 달랑 검은 날개 하나만 그려넣은 그림이였다. 그 한쪽 날개마저도 다 그려넣지 않고 부러진 날개로, 화폭에 넘치게 부러진 날개 모양만 대충 알릴가말가 그려넣은 그림이였다. 흑색 안료를 거칠고 두텁게 많이 사용한, 얼핏 보기에 검은 색 유화 안료만 덕지덕지 떡칠하듯 수십층 마구 덧칠해놓은 너무 거칠은 그림이였다. 화폭에 그려넣지 않고 작업하는 동안 내내 머리속에 골똑 차넘치는 그 이미지들을 붓끝에 간신히 눌러 숨겨놓고 날개 하나만 달랑 그렸는데, 상처 입어 부러진 날개 하나만 달랑 그렸는데 내 아이는 날개밑에 감춰놓은 그것들을 보아내고있었다. 크게, 거칠게, 눈에 보이게 그린 날개 대신 오히려 그 날개밑에 감춰놓은 내 머리속을 꽉 채우고있던 이미지들은 거의 다 보아내고있었다. 아, 내가 다시 마주하고싶지 않은 색갈, 그럼에도 너무 오랜 시간동안 내 가슴속에 무거운 앙금으로 쌓여있던것들… 내가 너무 피하고싶었던것들, 그럼에도 나약한 인간으로 마주할수밖에 없었던것들… 그래서 숨겨놓았는데, 그림 그리는 내내 가슴을 비틀어 쥐어짜는듯하던 그 고통을 겨우 누르며 억지로 숨겨놓았는데 딸애는 숨겨놓은 그것을 다 보아내고있었다. 아이는 그림 대신 내 가슴속을 들여다보고있은것일가… -향아 눈에는 이 그림이 그렇게 보였어? -그럼 아니였어? 아이는 오히려 의문을 눈에 골똑 담고 올롱한 눈으로 쳐다본다. -아니, 맞아, 다 맞아. 향아가 본것이 너무 맞아. 우리 향아 천재구나… 천재구나 하는 내 목소리는 떨리고있었다. 나는 딸아이를 덥석 높이 안아들며 온 오전 앉아있다시피 한 의자에서 일어섰다. 항상 그랬듯, 그림이 거의 완성되여갈즈음 되면 느끼군 하는 그 피곤을 나는 오늘 벌써 많이 느끼고있던중이였다. 그 피곤했던 몸에 딸애를 번쩍 높이 쳐들어안으며 나는 억지로 목소리톤을 명랑하게 꾸며냈다. -그래, 우리 향아 난다, 훨훨 난다… 나는 딸애를 목에 목마태우고 반지하실에 내 작업실로 마련한 화실을 나섰다. 내가 캔버스에 거의 완성시켜가고있는 그림의 제목은 《검은 날개》였다. 그래서 전체 그림의 톤 역시 검은 색이였다.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의 바탕에 그린 검은 색의 날개였다. 한달동안 그려넣고픈 그 모든 흑색이미지들을 억지로 감추고 감추며 캔버스에 담아낸건 고작 시커먼 거대한 날개 하나뿐이였다. 그것도 상처를 입은 부러진 날개였다. 날개로 보아주면 날개이지 날개의 모양을 아무나 인츰 보아내기에도 좀 힘든 컨셉의 그림이였다. 그 커다란 날개 하나만 캔버스에 넘치게 그려넣고 딸애가 보아낸 그 모든것들은 마음속에만 수없이 그리며 캔버스에 담지 않고 바탕색에 다 마구 버무려 보이지 않게 했음에도 딸애는 다 보아냈던것이다. 놀라운 통찰력, 내가 그림에 숨기고자 했던 진실을 아이의 눈은, 그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의 눈은 어렵지 않게 보아내고있었다. 당연한듯 보아내고있었다. 그리고 그 진실우에 상징으로 그려넣은것은 오히려 보아내지 못하고있었다. 상징보다도 진실 그 자체만을 보아내는 아이의 섬뜩하리만치 무서운 눈. 아이의 눈이 무섭소 아이의 눈이 무섭소 세상을 보는 내 아이의 눈이 무섭소 세상을 모르며 세상을 다 아는 내 아이의 눈이 너무 무섭소 내 아이에게 그 눈을 준 세상이 너무 무섭소… 나는 딸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빠는 향아를 너무 사랑해. 가슴이, 가슴이 너무 짠하게 아파왔다. 채색만 담아야할 그 눈으로, 핑크색 꽃잎과 푸른 색 하늘빛만 담아야할 그 눈으로 검은 담장과 검은 절벽과 검은 길… 그 모든것을 다 보아낸 영악한 내 아이의 눈… 그래서는 안되는데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는데 여섯 살짜리 딸아이는 벌써 금기의 그 벽을 넘어서 있었다. 어쩜 운명적으로 불행의 그림자 같은것에 너무 익숙해있고 그 불행의 색갈과 모양을 보아내는데 너무 본능적으로 익숙한 아이일지 모를 다는 생각에 가슴이 더욱 쓰리고 아파왔다. 천재의 눈을 가진 내 딸을 안고 나는 속으로 아픈 진통을 삼키고있었다. 층계를 올라 1층 집문을 열고 들어서며 나는 아이의 그 순진무구한 눈에 꼭 입을 맞추었다. 아이야, 이 살벌한 세상을, 이 너무 오염된 세상을, 때로는 더러 눈을 감고 사는 지혜를 너는 배워라, 나중에. 하고 속으로 속삭였다. 옷을 벗어라 날개를 주마 내겐 항상 고마운 그녀였다. 서로 몸을 나누는 사이로 그냥 지내고있지만 그건 정말 그녀의 피타는 정성과 눈물나는 노력으로 이루어낸 기적 같은것이였고 아직까지도 나는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감히 못해주고있었다. 아직도 내 가슴속에 그냥 그 자리를 커다랗게 지키고있는 안해의 모습때문이였다. 너무 급작스레 내곁을 떠남으로 내게 너무 큰 비통을 주었던 안해, 그 충격으로 나는 안해와 함께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한걸 한탄하며 세상과 담을 쌓기 시작했고 줄어드는 내 체중과 함께 내 삶의 의욕 역시 내 몸에서 많이 빠져나가고있었다. 그런 방황의 시간이 일년이 거의 다 되여가던 또 하나의 크리스마스시즌 어느날, 너무 미칠것 같은 슬픔과 고독을 이길수 없어 입구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오색불빛을 반짝이는 어느 술집을 홀로 찾아들어간 그날, 나는 내 지갑안의 지페 몇장이 욕심나서 렴치없이 내 허락도 없이 마구 내 사타구니를 파고드는 호스티스의 손길에도 내 남성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것을 느꼈어야 했고 그제야 나는 안해가 내곁을 떠난 몇달동안 내 그것이 한번도 일어선적이 없었던걸 새삼스레 깨닫고있었다. 그 깨달음은 이미 피페해질대로 피페해진 내 가슴에 더욱 스산한 가을 찬바람을 불어넣어주었고 나는 그 가을 찬바람만 들어찬 가슴이 터질것 같이 숨조차 쉴수 없어서 쿨룩쿨룩 비린내나는 마른 기침을 뱉어내기 시작해야만 했다. 그 기침은 한번 터지면 멈추기 힘든 기침이였고 나는 그 기침으로나마 내 가슴속을 꽉 채우고있는 슬픔을 다문 얼마라도 뱉어낼 수 있음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기침을 뱉어낼 수록 내 슬픔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제 나는 기침을 멈추고 그대로 까무룩 잠들었음 좋겠다는 환상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그때쯤 아트홀을 경영하고있는 수진에게서 전화가 왔고 전화에 들리는 나의 무기력하고 염세주의적인 목소리에 너무 놀랐는지 수진이는 당장 내게로 달려왔다. -선배, 왜 이래? 사람몰골이 이게 뭐야? 그렇게 훤칠했던 사람이 이게 뭐야?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눈에 눈물을 퍼올렸고 손님이 왔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의자에 앉은채로 입으로 아니고 코로 흥흥 비웃음 같은 웃음을 킬킬 쏟아내는 나의 머리를 무조건 그 품에 안았다. 어린애를 달래듯 내 머리를 그 품에 꼭 안고 손으로 내 마른 목덜미를 어루쓸어주었다. -선배, 언니를 잃고 슬퍼하는 그 마음은 리해되지만 그러나 이건 아니잖아? 이제는 언니를 보내줘. 이렇게 붙잡고있는다고 간 사람이 다시 돌아오겠어? 선배가 이렇게 자기 몸을 다 버려가며 아직도 언니에게서 헤여나오지 못하는걸 알면 언니도 너무 가슴이 아플거야. 언니는 이미 다른 길에 오른 사람이잖아? 그 길로 가게 놓아줘. 그냥 이렇게 붙잡고있으면 언니도 가야할 곳으로 못가고 그냥 허망에 떠돌게 되잖아? 선배, 정말 사랑했다면 이젠 놓아주는게 맞아. 죽은 사람은 죽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죽은 사람몫까지 더 잘 살아야지. 그게 선배곁을 떠난 언니가 진짜 바라는걸거야. 선배, 오늘부터 제발 언니를 놓아줘. 그리고 그날 온 오후 그녀는 슬픔의 먼지와 절망의 쓰레기들로 어질러질대로 어질러져 있는 내 집을, 아니, 아직 안해가 떠나지 않고 집안 구석구석 어디에나 숨결로 냄새로 남아있는 안해와 나의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허락없이 마음대로 집안을 정리하는 그녀를 나는 그대로 멍하니 바라보고있기만 해야 했고 저녁때쯤 그녀는 나와 안해의 집을 내만의 집으로 바꾸어놓았다. 안해가 사용하던 물품들을 전부 정리하여 차를 불러 어디론가 실어갔고 반지하실에 있는 화실을 전시장처럼 화실의 네 벽에 줄느런히 걸어놓고있던 안해의 유작들도 전부 떼여냈다. -언니의 이 그림들은 내 아트홀에 소장했다가 임자가 나지면 처리할거야. 그녀는 내 의견 같은건 아예 묻지도 않고 그렇게 단 반나절만에 내 주변을 확 정리하여 바꾸어놓았다. 생의 의욕을 거의 다 잃고 황페하게 무너져 있는 내게 물었던들 어쩌랴… 나는 이미 내 의지를 다 잃을 정도로 너무 무기력해져 있었는데… 그리고 그날 저녁 그녀는, 죽은 안해의 냄새로만 숨막히게 가라앉아있던 집에 참으로 오랜만에 살아있는 녀자의 냄새를 피우며 하얀 김이 솟구치는 음식들을 차려올렸다.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 내 손에 쥐여주고, 나와 자기 사이에 놓았던 빈 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건 아내의 몫이었다. -언니, 선배의 모습 보이지? 언니를 잊지 못해 이렇게 힘들어하는 선배의 모습 보이지? 언니, 이젠 놓아줘. 선배를 놓아줘. 선배에겐 아직 살아가야할 많은 날들이 남아있잖아? 그 세월을 함께 못할바엔 이젠 놓아줘야지 안그래? 놓아주고 언니 갈 길을 가. 언니는 섭섭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린 언니를 이미 떠나보냈다구, 언니가 우리곁을 떠나는 그날 우린 언니를 우리곁에서 이미 떠나보냈다구… 그게 인연인데, 거기까지가 인연이였는데 자꾸 붙잡고있으면 어떡해? 언니, 아쉬워하지 말고 떠나가. 내가 있잖아? 이제부터 선배는 내가 챙겨줄게. 언니도 그랬잖아, 언니랑 선배랑 련애할 때 철없이 쫓아다니는 나를 보고 그랬었잖아? 언니가 잠시라도 선배곁을 비웠을 때 다른 사람이면 안되지만 내라면 언니의 후배 수진이라면 마음 놓고 선배를 맡길수 있을거 같다구… 그 말 아직도 유효한거지 언니? 그동안은 내가 너무 등한했어. 일을 핑게로 언니를 떠나보낸 선배의 슬픔속에 내가 끼어들기 주저되여서 지금까지 선배를 방치해두었던거야. 그게 잘못이였어. 그러나 이제라도 내가 달려왔잖아, 언니의 뜻대로 내가 달려왔잖아? 이젠 내가 선배를 보살필게. 언니의 후배노릇 착실히 할테니까 이제 언니는 마음놓고 떠나가줘. 그 뜻으로 언니, 우리 마지막잔 함께 해. 수진이는 자기잔의 술을 목을 젖혀 다 마시고나서 내 안해몫으로 부어놓았던 잔까지 단숨에 굽냈다. 그리고 다시 자기 술잔에 술을 부어 내게 건배를 제의했다. -선배, 이제 언니를 바래는 의식은 끝냈어. 이제는 선배가 나를 받아들이는 의식을 치뤄야 해. 자, 나랑 한잔 해. 그렇게 짠 하고 부딪쳐오는 수진의 잔에는 내 와인컵에 부은 량보다 훨씬 많은 량의 술이 담겨져 있었고 수진은 그 잔도 단숨에 굽을 내였다. -선배, 왜 들지 않아? 오늘은 내 말을 들어야 해. 아니, 오늘부터 내 말을 들어야 해. 이제부터 선배는 원래의 선배로 돌아오는 련습을 시작해야 하는거야. 그렇게 그녀는 억지로 내게 술을 권했고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 잔을 굽내야만 했다. -고맙다, 수진아. -고맙긴… 내가 너무 미안할뿐인데… 그녀도 눈물을 쏟고있었다. 그 눈물을 보면서 나는 지금 내앞에 울고있는 수진이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간데 약간 놀라고있었다. 얼마만에 사람을 앞에 마주하고 앉은 밥상인가, 얼마만에 안해가 아닌 살아있는 다른 한 녀자한테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을 가져보는것인가, 얼마만에 한 사람의 살아있는 생명의 목소리에 고마움을 느끼고있는건가… 그리고 며칠후 수진이는 함께 며칠 려행이나 다녀오자며 비행기표를 들고 왔다. 티켓에 인쇄된 목적지를 보는 순간 나는 다시 한번 꺽 숨이 막히는듯한 아찔함에 눈을 꼭 감아야 했다. 목적지는 내 사랑하는 안해와 함께 허니문을 즐기러 갔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해일에 안해를 잃은 저주의 섬나라 인도네시아였다. -수진이 너? 꺽 막혔던 숨을 겨우 고르고 다시 톺아쉬며 입을 열었으나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수진은 강인한 어투로 대꾸해왔다. -선배, 가는거야. 그곳으로 가는거야. 언니가 그곳에서 선배를 떠날 때 선배는 그곳에 언니를 혼자 두고 올수 없어서 선배 자신도 그곳에 두고 왔던거야. 그곳에 두고 온 선배를 그곳에 가서 다시 찾아와야 해. 가, 선배. 가서 이번엔 진짜로 언니를 바래는거야. 그리고 언니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오는거야. 강인한 어투였지만 목소리는 떨리고있었고 그 떨리는 목소리로보다도 눈빛으로 더 많은것을 강렬히 호소해오는 그녀의 마음이 가슴에 맞혀와 나는 고개를 끄덕일수밖에 없었다. 며칠전 처음 다녀간후로부터 수진은 날마다 내게 한번씩 꼭꼭 들려주었고 수진의 그 모든 정성이 내게서 안해를 떠나보내기 위한 모지름임을 나는 알고있었다. 그래서 나도 수진의 그 고마운 마음을 받아들여 이젠 안해를 떠나보내야 되겠다고 마음을 정리하고있던중이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안해를 잃은 그곳으로의 려행을 일방적으로 정하고 티켓까지 미리 끊은 수진의 마음을 나는 알수 있을것 같았다. 힘들겠지만 떠나야할 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찾은 수마트라섬에서 나는 바다물보다 더 짜디짠 피눈물을 안해의 이름을 목이 쉬도록 피터지게 부르며 한없이 한없이 쏟아냈고 그러는 내옆에 수진은 항상 함께 해주며 함께 눈물을 흘려주었다.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이 있다는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나는 그때 깨달을수 있었다. 수진에게 미안해서라도 더 울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그렇게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쓰나미가 덮쳤던 해변가인가싶게 평화와 랑만과 행복의 얼굴들만을 보여주는 해변가에서 이젠 눈물도 없는 텅빈 가슴으로 묵묵히 꽃잎을 바다물에 띄워 안해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고 호텔로 돌아온 그날 밤, 수진이는 기어코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침대옆에 걸상을 놓고 내 가슴에 엎드려 자장가 부르듯 소곤소곤 자기의 아트홀 경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득히 먼 하늘 그 끝에서 들려오는듯 점점이 멀어지는 최면의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정말 오랜만에 엄마품에 안긴 애기처럼 그렇게 편하게 잠속으로 빠져들수 있었다. 그러다 잠결에 달빛이 너무 교교하게 내 몸을 어루쓸며 내 이름을 부르는것 같아 눈을 떴을 때 나는 내옆에 옷을 벗고 누워있는 그녀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몸뚱이를 발견해야 했다. 싫지 않았다. 그 몸뚱이를 안고싶다는 작은 설레임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걸 느낄수 있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1년전 안해를 잃은 곳에서, 그 사랑을 바래는 피눈물의 제사를 지내러 온 곳에서 그 안해의 후배의 몸뚱이를 옆에 두고 안고파하는 이 작은 설레임이란… 그러나 미안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쩜 이 순간을 안해에게 보여주려고 이곳으로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안해에게 이 모든것을 속임없이 그대로 보여주는것이 오히려 안해에게 미안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것을 다 보여주는 우리를 안해도 웃으면서 우에서 내려다볼것 같았고 그래야지 안해도 마음놓고 내게서 떠날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진이는 내 몸을 뜨겁게 하려고 노력하고있는중이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였다. 그녀의 손에 잡혀있는 내 그것은 아직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있었다. 뜨거운 몸으로 내 몸을 비벼대는 그녀의 애탄 숨결이 느껴졌으나 그러나 죽은 내 몸은 일어설줄 모르고있었다. 그새 나는 너무 오래동안 내 자신을 방치해두고있었고 스스로를 학대해버리고있었던것이다. 드디여 몸이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그녀가 내 몸우에 올라왔고 그 하얀 몸뚱이의 뜨거운 꿈틀거림에도 역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나를 의아한 듯 잠간 동작을 멈추고 내려다보던 그녀의 눈에 혹시 하는 의문의 빛이 언뜻 스치는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발견했다.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래, 맞어. 난 이미 내 남성을 잃은 놈이야. 너를 안고파도 안을수 없는 놈이야. 내 눈의 속삭임을 읽어낸 수진은 또 한번 눈물을 쏟고야말았다. -괜찮아, 선배. 이제부터 비우기 시작하면 돼. 언니도 너무했어. 어쩜 선배를 이 지경으로까지 만들어놓으며 놓아주지 않은거야? 이젠 떠나보냈으니까 정말로 잊어야 해. 깨끗이 떠나보내고 다 비워내고 다시 꼭 채워넣어. 내가 함께 채워줄게. 아니, 내가 싫다면 다른 녀자래도 좋아. 다른 녀자가 선배의 가슴속에 들어와도 돼. 그걸 내가 도와줄게. 선배를 반드시 원래의 씩씩하던 선배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거야. 그 려행에서 돌아온 이튿날로 수진은 무조건 나를 끌고 병원으로 갔고 그 병원에서 의사는 기질적원인이 아닌 심인성 원인에 기인한것이므로 하루빨리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사랑을 향해 마음을 여는것이 유일한 치료방법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병원에서 돌아온후 수진은 아예 짐을 내게로 옮겨와버렸고 죽은 내 남성을 살리기 위한 수진의 피타는 노력은 그날부터 이어졌다. 우선 놓고있었던 화필을 강박하다시피 다시 내손에 쥐여주었고 무조건 그림을 그리도록 강요했다. 이미 황페해질대로 황페해져 도무지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 내 머리속에 령감의 감로수를 주기 위해 내 귀가에 잔잔히 음악소리보다도 아름다운 시들을 읊어주었고 죽어버린 내 야망을 일깨우기 위해 내앞에 옷을 벗어 누드모델이 되여주기를 서슴치 않았다. 아트홀 경영만 해도 정신없이 바쁘겠는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사양해도 원래의 나를 찾아주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고집처럼 더해만 갔다. -내게는 선배 한사람의 생명이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게 더 중요해. 내 애타는 노력이 보인다면 사양을 하지 말고 다 받아들여주는게 오히려 맞지 않을가. 마음을 열어, 열고 다 비워, 비우고 다시 받아들여. 수진은 내게 그렇게 애타게 절규했다. 그 마음에 너무 미안하고 그 절규를 물리칠수 없어 나는 다시 아침조깅을 시작하고 수진이가 가져다주는 미술계 동태에 관한 책자들을 읽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무런 창작의욕이 없는 내 오른손에 그래도 열심히 붓을 드는 련습을 했다. 그녀의 도움으로 방황으로 시들었던 내 시간은 그렇게 다시 서서히 삶에 대한 의욕을 되찾는 시간으로 바뀌고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붓을 든 내 오른손에 미세한 떨림이 오면서 힘이, 나로서도 모를 힘이 서서히 가해지는걸 느낄수 있었다. 그 미세한 떨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온몸의 본능으로 깨닫고있었다. 그건 신내림 같은것이였다. 그건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는것이였다.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온몸의 힘을 오른손에 모았다. 흥분으로 벌떡벌떡 뛰는 가슴을 간신히 눅잦히며 참으로 오랜만에 오른손에 힘주어 듬뿍 붉은 색 유화물감을 붓에 두툼히 발랐다. 그리고 그것을 무조건 캔버스에 힘차게 쫙 그어나갔다. 그렇게 화필이 시원히 쫙 광목천우에 그어지는 소리가 내 몸에 어떤 형언할수 없는 오르가즘 같은것을 가져다주었다. 아, 얼마만인가? 이 주체할길 없는 떨림과 설렘과 흥분은… 그때 나는 힘차게 그어진 붉은 색이 내 몸에 검은 색으로 죽어 흐르던 피의 색을 다시 붉은 색으로 바꿔 물들여주고 뜨겁게 펄펄 끓이는 소리를 분명 들을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머리속에서 푸덕이기 시작하는 생명의 날개짓소리도 나는 분명히 들을수 있었다. 나는 흥분으로 덜덜덜 떨리는 오른손에 지금까지 죽은채 억눌려있던 그 절망과 방황의 시간들에 대한 분노를 다 담아 으스러지게 으스러지게 붓끝에 힘을 주었다. 머리속에 푸덕이는 그 빨간 색의 날개를 미친 듯 캔버스에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퇴근후 저녁식사도 못한채 내 앞에 옷을 벗고 누드로 비스듬히 누워 모델이 되여주고있던 그녀도 나의 이 반상적인 변화를 눈치채고 눈에 경이로움의 빛을 겁난듯이 띄우고있었다. -선배, 괜찮아? -움직이지 마, 그대로 있어. 나는 명령조로 소리질렀다. 벌거벗은 그녀의 몸뚱이를 보면서 하늘과 땅, 그리고 이 세상 모든것을 다 불태우는 태양처럼 붉게 불타는 날개를 그려나가고있었다. 내 눈에는 그녀의 몸이 보이지 않았다. 날아오르는 새, 붉게붉게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짓만 보였다. 도대체 뭘 그리는지도 모르며 정신없이 붓으로 캔버스를 쫙쫙 그어댄지 한참. 그림의 륜곽이 캔버스에 거의 다 드러났을 때 나는 더는 주체할수 없는 어떤 환희의 열망에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확 붓을 던지고 그녀에게로 덮쳤다. 미처 상황파악을 못하고 허둥대는 그녀를 화실 맨바닥에 끌어내려 눕히고 어느새 붉은 불기둥처럼 치솟아있는 나의 남성을 그녀의 몸에 무조건 콱 꽂았다. 아프다고 소리치는 그녀를 무시하고 마구 돌진했다. 그녀의 열락에 젖은 신음소리와 환희의 흐느낌소리를 펌프질로 뽑아올리며 한풀이하듯 그렇게 용맹히 달렸다. 달리는 내내 둑 무너진 저수지가 토해내듯 한없이 쏟아지는 눈물로 나는 내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모든것들을 한꺼번에 다 비워내고있었다. 드디여 그녀의 손톱이 내 등에 날카로운 아픔을 주면서 깊이 박힐 때 나는 내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젖가슴에 내 이빨자욱을 내고야말았다. 그때 나는 내가 깨물은 그녀 가슴의 이빨자욱 상처에서 빠알간 날개가 돋아나오는것을 오르가즘이 주는 환각속에 보아야만 했고 그녀가 내 등에 손톱을 박아 낸 상처에서 뾰족이 날개가 싹트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우리는 날개로 푸덕이고있었다. 푸득여 훨훨 날고있었다. 수진과 함께 수마트라섬을 찾고 돌아온지 꼭 반년이 되는 시점이였다. 그리고 그날이후 그녀가 나와 함께 더해준 그 반년동안 나는 기적적으로 《불타는 날개》계렬의 작품을 열점이나 완성할 수 있었다. 그건 불가사의한 기적이였다. 남들에겐 모르지만 내겐 내 생명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새 생명의 환호 그것에 다름아닌 기적 같은것이였다. 그 기적의 작품들앞에 내가 너무 환희를 느끼며 흐느낄 때 수진이는 뒤에서 꼭 내 몸을 안아주면서 속삭였다. -선배, 이젠 내가 선배의 옆자리를 꼭 지키고있지 않아도 될것 같애. 이제 그 옆자리를 비워줄 때가 온것 같애. 뜻밖이고 아쉬웠지만 그러나 나는 짐을 다시 싸는 그녀를 막지 못했다. 꼬박 일년을 나와 함께 하며 그동안 허니문 려행에서 안해를 잃어 결혼생활이 뭔지 몰랐던 내게 진짜 부부생활의 소중함과 달콤함을 다 가르쳐준 그녀였지만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아직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있는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기때문이였다. 내 마음이 아직도 안해의 그림자를 다 비워내지 못하고있고 그래서 수진이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있는것을 그녀도 너무 잘 알아 내게 자신에게로의 사랑을 강요하지 않기 위해 나를 떠나고있음을 나는 너무나 알수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 듣고싶어. 그러나 강요하지는 않을게. 나중에 그 말을, 내가 아닌 다른 녀자에게 빼앗긴다 해도 아쉬워하지는 않을게. 선배와 함께 한 1년시간이 내게도 기적과 환희의 시간이였으니까.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 기다리고있겠다는거, 그건 내 권리니까, 괜찮지? 그녀는 나때문에 힘들었던 그 시간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그림들로 수진이는 이듬해 자기의 아트홀에서 나의 개인전을 열어주었고 그중 한점을 국전에 출전시켜 결국 대상이라는 영광을 거머쥐는 행운을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리는 그림마다 거의 다 그 소장가치를 인정하는 임자를 만나 팔려나갔고 팔리지 않는 그림은 그 예술적가치를 인정한다면서 수진이가자기의 아트홀 소장품으로 다 사줬다. 물론 그 구입가는 개인소장을 위한 아트작품 수집가들이 매겨주는 값보다도 더 나가는것이였다. 피를 뿌려라 검은 날개우에 금방까지 앞에서 비비디바비디부 하고 춤을 추며 재롱을 떨던 딸애는 지쳤는지 쏘파에 누운채로 어느새 잠이 들어있다. 향아야, 씻고 자야지 하는 나의 말에도 깰줄 모른다. 눈 감으면 금세 잠드는 아이, 그 잠속에서 아이는 또 어떤 꿈속의 세상을 만나게 될가. 낮에 봤던 그림속 검은색 날개만은 제발 다시 보지 말기를 바라며 나는 딸애를 안아들고 침실로 향했다. 깨워서 씻기느니 그대로 잠재우는게 나을것이다. 딸애의 꿈을 깨울 권리가 나에게는 없는줄 나는 알기때문이다. 다시 거실로 나와 쏘파에 앉은 나는 리모콘을 눌러 아까 딸애가 아빠앞에 노래를 부르느라고 한껏 낮추었던 티부이의 볼륨을 다시 좀 높였다. 그리고 지금 예능프로그램이 나오고있는 채널을 돌려 이 시간대에 뉴스를 방송하고있는 다른 채널로 돌렸다. 화면은 오늘 방금 끝난 덴마크 코펜하겐 기후회의를 특별보도로 다루고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130여개 국가중 두 거대국의 수뇌가 담판 테블에 마주 앉아있는 장면이 화면에 나오고있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예리한 리익분기점이 서로 양보할수 없는 쟁점으로 이슈화되고있었다. 거대 선진국의 수뇌는 개발도상국의 가스배출로 인한 현재진행형의 온실효과책임을 묻고있었고 거대 개발도상국의 대표는 지금까지 선진국이 배출한 탄소량이 지구온난화를 불러온 책임을 물으며 경제발전과 성장의 원리를 주장하고있었다. 기후문제해결의 공동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는 다가올 그린경제의 패권을 다투는 무역분쟁회의처럼 화약냄새가 넘치고있었다. 강대국들의 론리만 통하고 가난한 아프리카나 작은 섬나라 등 약소국들의 목소리는 파묻히고있었다. 온실가스배출 감축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과 대책 제시에서의 각국의 자세는 서로 자국리익을 대변하기 위한 론리들로만 차넘치고 한마음으로 지구의 미래를 구하려는 구체적인 행동들은 거의 나오지 않고있었다. 그래서 결국 겨우 합의를 이루어낸 '코펜하겐협정(Copenhagen Accord)'은 아무런 법적구속력도 가지지 못하는 형식상의 협정에 그치고말았음을 보여주고있었다. 앵커의 말. -지난 7일 기후회의가 개막될 당시만 해도 회의 개최지인 코펜하겐(Copenhagen)의 애칭은 희망을 상징하는 “호펜하겐(Hopenhagen)”이였지만 회의가 페막된 19일 지금, 현지에서는 “노펜하겐Nopenhagen)”이라는 절망의 신조어가 류행어로 떠오르고있습니다. 이어 화면은 이번 세계기후변화회의를 반대하는환경단체 회원들이 회의장밖에서 벌이는 시위장면을 내보내고있었다. 지구를 구하자! 고 웨치는 NGO 시위대원들의 머리우에 전신무장한 전경들의 전기곤봉이 사정없이 내리찍히고있었다. 피, 피가 흐르고있었다. 지구를 구하자! 고 웨친 죄로 피를 흘리고있었다. 순간 나는 내 오른손에 찡하고 흘러드는 어떤 전류 같은것을 느꼈다. 화필을 잡은듯 저도 몰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어느새 나는 허공을 향해 강하게 붓을 긋는 동작을 하고있었다. 그랬다, 오후 늦게 마지막 더 한층 두터운 검은 색 기름칠로, 어딘가 아직 좀 미타하지만 그러나 내 온몸의 신경을 날카롭게 세워놓을대로 세워놓아 나를 지치게 했던 그림 그리기에 마지막 한 덧칠을 하고 이젠 됐어, 이젠 됐어 하고 허탈하게 의자에 몸을 파묻었댔으나 그러나 결국 미완의 작품임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어 아예 며칠 방치해두었다가 다시 그리는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흰 보자기를 씌웠던 내 그림에 진짜로 마지막 피날레를 펼칠 때가 왔음을 내 오른손에 일어나는 전률은 알고있었다. 돈을 주면 살수 있는 유화 안료로만 그려진 내 그림은 내 가슴속에 꽉 차있었던 답답하고 칙칙한것을 다 담아내지 못한 미완성품이였다. 죽어간 내 사랑과 그 사랑을 빼앗아간 자연의 횡포에 대한 분노와 그 횡포앞에 너무 무능하게 당할수밖에 없으면서도 자연이 그런 보복을 할수밖에 없도록 자연을 너무 학대해온 인간문명의 리기에 대한 내 분노를 유화 안료로는 다 담아낼수 없었던것이다. 내 슬픔과 내 안타까움과 내 분노와 내 절규와 내 절망을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유화 안료만으로는 다 담아낼수 없었던것이다. 검은 색의 호소와 절규만으로는 모자라는 그림이였다. 나는 티브이를 끄고 급히 슬리퍼를 발에 꿰였다. 달리듯 층계를 내려가 반지하실문을 열었다. 조금후 나의 손에는 화필 대신 끝이 뾰족한 과도가 들려져 있었다. 불빛에 그 과도는 차가운 금속성의 반사광을 내게 선물하고있었다. 그 칼날에 대고 씨익 하고 썩은 랭소를 날려주며 나는 그림에 덮었던 흰 보자기를 활 벗겨내렸다. 사랑해 검은 날개에 꽃이 피여있었다. 진붉은 피의 꽃이 피여있었다. 검은 색으로만 넘치던 캔버스에 붉은 꽃이 피여 피비린내나는 향기를 흘리고있었다. 그 피의 향기를 마신 검은 날개가 피의 생기를 찾고 푸드득 푸드득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고있었다. 그 날개의 재생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금까지 내 가슴 한쪽에 검은 바위처럼 단단히 박혀있던 고통의 응어리가 조금씩 조금씩 풀려 드디여 빗장을 열고 밖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소리도 함께 들을수 있었다. 가늘게 흐르기 시작하던 그 소리가 점점 커지며 흐르는 속도도 빨라져 내 호흡이 가빠지고 두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할 때 나는 나 스스로를 주체할수 없는 어떤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갈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쓰러져야만 했다. 가슴벽을 쾅쾅 두드리며 마음의 빗장을 열고 밖으로 밖으로 내쏟아지는 그 물결의 힘에 떠밀려 가슴을 부여안고 쓰러져야만 했다. 심장조차 그 물결에 떠밀려 그대로 다 몸밖으로 튀여나온것 같은, 정말로 죽을것 같은 아픔을 못이겨 쓰러진채 한참을 헐떡여야만 했다. 그리고 한참뒤, 오른손에 다시 붓을 들어 《검은 날개》라고 적으려 했던 그림의 제목을 주저없이 《재생》이라고 바꿔 그림에 적어넣으며 나는 참으로 내 가슴이 확 뚫려 그 뚫린 구멍으로 시원한 바람이 막 가슴 터지게 들어오는것을 느끼며 전률해야만 했다. 나는 핸드폰을 손에 꺼내들었다. 길게 숨을 고르고 1번을 길게 눌러 “미야”를 호출했다. -웬 일이야, 선배? 무슨 일 있어? 수진이 그녀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묻어있었다. -아니… 나는 떨리는 내 목소리를 간신히 눌러야만 했다. 가슴 벅차게 차오르는 이 감격… 그리고 내 가슴에 넘치는 이 사랑의 물결… 나는 전화기에 대고 갈린 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수진아, 사랑해. 수화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수진이 그녀의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 가슴속의 환희의 흐느낌소리로 그녀의 환희의 흐느낌소리도 함께 충분히 들을수 있었다. -사랑해, 수진아. 지금 당장 네가 필요해. 지금부터 이 세상 끝까지 네가 필요해. 당장 달려와줘. 우리 딸 향아도 엄마를 기다리고있어. 향아는, 안해가 떠난지 4년되던 해, 그 4주제 기념으로 펼친 내 3차 개인전의 수익금을 기부금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찾아갔던 어느 작은 고아원에서 만난 천사였다. 사천대지진참사때 부모를 잃고 요행 살아난 그 영악하게 질긴 목숨은 이곳 고아원에까지 흘러와 애들과 즐겁게 뛰놀고있었지만 그 눈에는 슬픔이 골똑 배여있었다. 그 작은 눈에 넘치는 슬픔의 자락을 내가 걷어내주어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나는 그 꼬마천사를 내 가슴에 꼭 보듬어안을수밖에 없었다. 함께 간 수진이도 내 마음을 읽었는지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동조를 약속해줬다. 그때 그 꼬마천사가 지금 웃층 내 침대에서 쌔근쌔근 자고있다. 엄마를 기다리는 꿈을 꾸며. 아니, 아이는 지금 꿈속에 푸른 하늘을 즐거이 날아예는 세개의 날개를 보고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 그림은 그 꿈을 그려줄 차례였다. 09년 12월 22일 동짓날 청도 문우재서.  ( 2009년 6기)  
11    이런 사랑방법 댓글:  조회:948  추천:27  2009-02-27
산과 산이 마주앉아서그렇게 사랑하더이다나무와 나무가 마주 보며그렇게 사랑하더이다물과 물이 손잡고 흐르며그렇게 사랑하더이다말없이아픔도 행복도 없다는 듯그렇게 선자리서 영원히 사랑하더이다  
10    좋은 아침 댓글:  조회:893  추천:26  2009-02-27
    나를 향해 날아오는 파리 한 마리가 있었다.     어망 결에 팔을 뻗치고 손바닥을 펼쳐 파리를 덮쳤다.     느낌이 왔다. 내 손바닥 피부에 뭔가 닿는 느낌.      정말 미세한 느낌이었지만, 그건 분명히 다른 한 생명이 죽음의 벽을 향해 달려드는 그런 무모한 <충돌>이었다.     꽉 움켜쥐었던 손바닥을 펼쳤을 때 나는 거의 만신창이 되어있는 파리의 시체를 보아야 했다. 죽으려고, 죽으려고 나를 향해 날아온 파리였다. 화장지로 손바닥안의 파리 시체를 닦아서 변기통에 넣고 물을 내렸다. 그리고 손바닥을 비누칠해 빡빡 문대어 씻었다.      -완전 죽으려고 작정을 했었구먼, 아침부터. 그놈의 파리가 간밤 꿈을 잘못 꾸었었나?    잠에서 일어나 아직 제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 부스스한 머리로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배설하고 나오다가 겪은 <살생>이었다. 살생으로 시작하는 하루였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큐큐가 있었다. 308국도 1차선을 타고 제한속도 60키로를 초과하지 않게 딱 미터기 바늘이 60위에서 춤출 정도로 엑셀을 밟고 달리는 데, 역시 1차선을 타고 마주 달려오던 큰 버스 뒤에서 난데없는 노란색의 작은 큐큐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중간선을 넘어서 나를 향해 무작정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상거한 거리가 50미터나 될까 말까한 너무 가까운 거리였고, 나는 본능적으로 오른쪽 백미러를 통해 나를 추월하려는 차가 2차선에 없음을 감지하며 전방에 꽤 긴 공간이 있는 2차선을 향해 핸들을 꺾고 엑셀을 밟아야 했다. 2700CC의 힘 좋은 엔진이 부르릉 하고 떨며 급가속하는 게 알렸다.      쌩-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노란 큐큐가 내 차 옆을 스쳐 지났다.     -지럴,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먼. 아침부터, 죄꼬만 큐큐가. 하고 속으로 저주를 퍼부으며 왼쪽 백미러를 보니 큐큐는 어느새 저만치 뒤에 노란 점으로 작아지고 있었다.      뭔 급한 일이 있어서 저렇게 정신없이 내달리는 걸까? 자기 생명을 가지고 노는 걸까? 글쎄 자기 생명을 가지고 노는 거야 상관할 바 못된다 치더라도, 이건 남의 생명까지 위협하며 장난도 유분수지...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생명을 가지고 저렇게 무모한 장난질을 할까?     그리고 10분후 쯤 나는 카 오디오의 FM교통방송을 통해 308국도 아무 구간에서 노란색 큐큐차가 1차선을 타고 마주오던 트럭을 들이박고, 트럭 뒤를 달리던 차들이 연속 앞차를 들이박아 4중 연쇄 추돌사고까지 생겨서 교통이 크게 밀리고 있다는 안내방송을 들어야만 했다.      -이크, 그놈의 죄꼬만 큐큐 끝내 일을 쳤구먼. 아침부터 죽으려고 작정을 했었구먼...    꼭 아까 그 노란색의 큐큐차일 것이라고 단정하며 뻔한 결말의 시나리오를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아까 달리던 기세로 봐서는 시속 80키로는 훨씬 넘는 속도였을 거니까, 그리고 도로위에서 트럭이 1차선을 타고 달릴 때는 역시 속도가 제한속도에 가까웠거나 넘어섰을 속도였을 거고...아마 작은 큐큐는 새벽 내 손바닥 안에 만신창이 되었던 파리의 꼴이 되었을 것이었다.      가슴속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아까 하마터면 큐큐와 정면충돌할 번 했다가 다행히 2차선이 비어있어서 모면할 수 있었던 그 아찔했던 순간에도 없었던 서늘함이었다. 만약 2차선 내 금방 앞에서 달리는 차가 있었다면...차는 글쎄 쇠로 된 물건이니까 어떻게 구겨졌든 괜찮겠지만, 그 안의 생명은...파리가 아닌 인간의 생명은...     트럭을 향해 달려든 큐큐는 어쩜 내 손바닥을 향해 달려들었던 파리보다도 더 무모한 충돌을 감행했는지 모른다. 쾅 하고 부딪는 순간 어쩜 파리 목숨보다도 못한 인간의 목숨이었을 것이다.      아침 나를 향해 날아오던 파리에게나, 금방 나를 향해 무모하게 돌진해오던 큐큐에게나 그 <돌진>의 이유는 다 있었을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러나 그 이유의 해명이 있기 전에 씌어진 충돌과 죽음이라는 시나리오. 파리의 죽음은 변기통 물을 내리는 것으로 끝났지만(모르지...그 파리에게도 가족들이 있어서 파리들의 동네에서는 울음통이 터지고 추도식도 치루어 졌는지도...) 그 큐큐의 무모한 운전으로 인한 충돌 뒤에는 일단 신속한 사고현장처리를 위한 교통경찰들의 출동과 사고차량 견인차들의 동원, 그리고 사고과실 분석과 사고차량 수리, 보상... 등등이 죽은 생명에 대한 아쉬움보다도 더 절실한 사안으로, 살아있는 관련된 자들을 꽤 오랜 시간동안 귀찮게 하고 불편하게 할 것이었다. 살아있는 자들에겐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더 절실한 거니까...     그리고 20여분 뒤, 나는 주차장 관리인에게 환한 얼굴로 아침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굿모닝!    좋은 아침! 이라는 뜻이다. 바람도 한 점 없고, 햇볕도 쟁그러운, 한낮이면 제법 따스해 질 것 같은 정말 좋은 아침이었다.  
9    댓글:  조회:914  추천:32  2009-02-27
버려야 할 말들은 너무 많다그 많은 말들이 내 안에서 너무 요란하게 싸운다아껴야 할 말들이 너무 많다그 많은 말들이내 안에서 너무 조용히 죽어간다벽 한 구석에 거울 대신 나를 세워놓고회초리 대신 혀 한 발 길게 그려놓고그 혀를 핥아아아, 벽에서 피멍든 말의 씨앗들이 뱀의 혀같이 나붓나붓...  
8    푸른 소로 태어나라 댓글:  조회:947  추천:22  2009-02-20
마른 혀로 그대의 얼굴을 핥아그대 감격은 신음을 흘려줄건가딱딱한 그대 얼굴에서 부서져 내리는세월의 앙금들 이제 은유의 시간은 지나우리 차가운 몸뚱이속의 더러운 내장들은육식을 거부하고 초식을 갈망한다네 나의 들판으로 가세나의 들판엔 소들이 있네초식으로 피둥피둥 살이 찌어탄탄한 엉덩이로 서있는 소들이 있네 소꼬리에 매달리는 파리처럼소잔등에 주둥이 박는 등에처럼내 들판에 엎어져도 좋네 한가로이 새김질하는 소들의 뱃가죽 밑으로 슬슬 기어이제 초식의 이발을 갈 시간이 왔지 않은가 아직은 싱그러이 살아있는 나의 풀들풀을 씹어 푸른 물을 몸에 올리고혈관 속에 푸른 피 흘러도 좋네 그대 푸른 혀로 내 얼굴을 핥아줄 그 시간을 기대하겠네음메 음메 소처럼 울며 푸르른 소로 태어날 그 시간을 기대하겠네.  
7    [시]내 안의 바람 댓글:  조회:826  추천:19  2009-02-17
하- 입 벌리고 바람을 먹는다헛배가 불러 온다배속에 들어찬 헛바람은혈관을 통해 온 몸을 돌아다니는지몸이 괜히 바람처럼 펄럭이려 한다광야의 허수아비처럼 헛 팔 휘둘러 투닥투닥 쫓을 것 없이 쫓아갈 것 없이바람개비처럼 팽글팽글 헛돌아 헛돌아하, 바람을 만들려 한다지금 바람을 만들어 바람으로 흐르고자 한다바람의 인자는 이렇게도 무서운 것이었던가몸속에 독처럼 둥지를 틀어둥지에서 솨아 솨아 달려 나오는 바람바람으로 몸은 어디를 달려갈 것인가 지금 부는 바람은 다시 오지 않는다한 번 지나간 바람은 다시 오지 않는다다시 오지 않는 바람 그 끝에 묻어바람도 아닌 것이 바람처럼허푸허푸 숨이 가쁘다아아, 마신 바람 그것보다 훨씬 커진 바람이회오리치며 용트림 치며날아오른다.  
6    [시]3월의 시인 댓글:  조회:940  추천:13  2009-02-17
아직 안개는 차오르지 않았는데 물 가슴 자오록이 적시며 싯귀 한 구절 바람 속에 주절대어 누가 시인이 아니랄가봐 누가 못난 시인이랄가봐 바람 분 흔적은 꽃잎에 남고 마음 운 흔적은 낱말에 남아 꽃향기 흘려 낱말로 흐느끼네 아아 이끼처럼 시린 시인의 푸른 어깨
5    [수필]나는 그렇게 못하는데 너는 그렇게 한다. 댓글:  조회:895  추천:16  2009-02-06
  인간으로 태여나 인간으로 살면서 인간의 냄새가 싫어질 때 있다.   어느날 뻐스안에서 였다. 나는 자리에 앉았고 내옆에는 좌석이 없어서 서있는 사람이 한사람 있었는데 며칠을 머리를 감지 않았는지 머리칼이 꼭 금방 수탉 몇마리가 헤집어놓은 재더미같고 옷도 며칠이 아니고 몇 달을 씻지 않았는지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그런 차림새였는데 ...그런데 그 량방은 뻐스에 오르자부터 휴대폰을 꺼내들더니 온 뻐스안이 떠나가게 <와라 와라>떠들어대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근데 옷에서 나는 냄새도 냄새거니와 그 입에서 나는 냄새가 더 뻐스안이 진동할 지경이여서 냄새에 민감한 나로서는 그야말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싫은 이 인간의 냄새 그리고 싫은 인간의 이 목소리...   교통비 아끼려고 이미 오른 뻐스니까 내릴수도 없고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달리는 뻐스속에 흔들리는 내 인생이 너무 싫어지는 순간이였다. 인간의 냄새가 싫어지는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무슨 인간일가? 나는 왜 인간으로서 인간의 냄새를 싫어하고있는걸가?   별로 심각한채 눈을 감고 이런 생각을 굴리고있었다.   그런데 눈을 감았다는거, 눈을 감고 보기 싫은걸 보지 않아도 된다는거 그때처럼 고마웠던적은 없었다. 분명 옆에서 풍기는 냄새는 그냥 그 냄새이겠는데 그래서 코를 막고 그 싫은 냄새를 맡지 않는다는건 불가능한거니까 그냥 숨을 들이쉬면서 그 냄새를 맡고있었을것인데. 눈을 감고 그 냄새의 발원지를 보지 않고 내 나름대로의 헛생각을 굴리고있노라니 방금 꼭 토할 것만 같던 그 고약한 냄새의 강도도 좀 많이 약해진 것 같았고 그리고 내 청각은 어느새 그 요란한 통화내용에로 신경을 돌리고있었다.   그런데 그 통화내용이 더 걸작이였다. 이미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 통화의 분위기는 벌써 많이 무르익어있었고 현재 진행중인 통화의 내용은 분명 어떤 녀인과의 사랑의 속삭임이였다.   -정말이야,난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아.   -정말이야, 거짓말 하면 난 개야, 아니, 개새끼야 아니야 개보다도 못한 놈이  야. 아니야, 개아들이야. 아니야 개손자야.   -정말이야, 난 너를 위해서 이 세상에 태여난 것 같아 난 이제 너만을 위해 살거야.   -온 세상을 다 준대도 너와 바꾸지 않아. 사랑해.   이렇게 누구나 다 평생에 한번쯤 미친듯이 사용했을 사랑의 밀어들을 밀어가 아닌 공개방송으로 뻐스안에서 떠들어대는데 ...눈뜨고 뻐스안을 살펴보지 않아도 온 뻐스안이 그 량반의 목소리 하나로 요란하고 다른 소음이 없는걸 봐선 뻐스안이 모든 사람들이 그 소리를 <경청>하고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누구나 다 속으로 생각하고있을거였다.   -그놈자식, 공중장소에서 너무하는군, 공중질서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한심한 놈이군.   하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남이야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혹은 일부 아니꼬운 눈길이 자기를 향하고있건 말건 그 량반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더니 급기야 통화내용이 더 높은 고지를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뭐라고 오늘 저녁  너에게로 오라고?   -그럼 나 너의 세방에서 잘거야. 크크.   -나 너와 사랑을 나눌거야. 정말이야.   -정말이야. 그래도 돼? 아, 만세!   그러더니 전화에 대고 뽁뽁뽁 입맞추는 소리 요란히 내더니 이런 내가 눈을 더 감고있을래야 감고있을수가 없게 눈을 뜨지 않을래야 뜨지 않을수가 없게 뻐스바닥을 쾅쾅 발로 내리치며 흥분을 표출하는게 아닌가.   --음음, 너무 좋아 너무 좋아. 너무 사랑해, 내 지금 당장 가서 목욕부터 할거야.   --왜는 왜야? 너에게 나의 깨끗한 몸을 보여줘야지. 깨끗한 몸으로 너에게 달려가야지..   그리고 계속되는 그 휴대폰을 향한 요란한 키스와 발 구르기.   하도 희한하고 억이 막혀서 멍하니 그 량반을 쳐다보다가 난 문득 자문했다.   난, 사랑하는 내 녀자에게 저렇게 사랑고백을 했던적 있던가? 난 내 사랑을 저렇게 진솔하게 온 세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칠 정도로 표현했던적이 있던가?   없었다.!   그래서 한심한 그 친구의 그 무아경의 흥분상태를 쳐다보며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그래, 잘해봐 ,친구 너는 그렇게 했지만 나는 그렇게 못했다.   그러면서 또 어느 한 내 글쟁이 친구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느 신문사의 편집으로 있으면서 내게 원고청탁을 무조건 아무날 몇시까지 보내오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다싶이 해놓고 내가 시간이 바빠 힘들것 같다니까 <야. 이자식아, 내가 써달라면 써줘야지. 네가 뭐 그리 대단하냐. 씨발, 써주지 않았다만 봐라, 내가 도끼들고 달려가서 네 그것을 거세해버리지 않나?>   하고 무지막지하게 원고청탁을 해오던 내 귀여운 친구의 모습을   그래, 친구야. 너는 그렇게 멋있게 원고청탁을 해오지만 난 그렇게 못해봤어. 옛날 나도 편집일적엔...   부럽다. 대방의 사정같은거, 주변의 분위기 같은거 의식하지 않고 내 기분이 내키는대로 내 살고픈대로 내 가지고있는 모습 그대로 남앞에 보여주며 그렇게 진솔하게 살수 있다는 그 모습이...
4    [시]비, 꽃 (조광명) 댓글:  조회:1195  추천:37  2008-09-05
비, 꽃  조광명 하늘이 흐렸다  비가 내리려 하는것이다  꽃 한송이가 아직 터치지 못한 망울을 뾰족이 날 세워  하늘을 견주고 바람과 함께 춤을 추고있다  꽃은 피고픈것이다  비가 내린다  날씨가 개려 하는것이다  꽃 한송이가 만삭 무당녀자 마지막 살풀이춤 추듯  비속에 산전신고의 피 흘리며 악을 쓰고있다  꽃은 피고야말것이다  해가 다시 떴다  비온 뒤 항상 더 맑은 하늘  꽃 한송이가 활짝 피여 기막힌 향을 흘리고있다  하늘을 떠이고 땅에 뿌리내린 생명은 향기롭다  꽃은 꽃으로 피여난것이다  2008년 5월 17일 청도 문우재서  <<연변문학>> 2008년 8월호
3    [시]천개의 잔(조광명) 댓글:  조회:1153  추천:90  2008-09-05
천개의 잔 조광명  천개의 잔에 입 맞췄다  천개의 맛을 알아버렸다  천갈래 만갈래  선택의 맛은 길마다에 서로 달랐다  천갈래 만갈래  걸어온 길이 한데 모여  결국엔 죽음 한갈래에로만 향한 길  이제 천개의 잔을 버리고  이제 천개의 맛을 버리고  이제 죽음 그 마지막 잔에  입 맞출 시간이 왔다  그 길 저쪽에  엄마의 젖맛에 처음 행복하던  엄마 품의 그 아이가  마지막 맛을 감빨려고  내 생의 아이같이 기다리고있다  2008년 5월 16일 청도 문우재서 <<연변문학>> 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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