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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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날개를 심다(조광명)
2010년 08월 03일 09시 10분  조회:1175  추천:29  작성자: 조광명

단편소설

                      날개를 심다

                                                        조광명


날개의 꽃잔치
날개를 심고있었다. 눈부시게 화려한 은백색의 아름다운 날개였다. 그 고운 날개의 깃털 하나하나씩을 뽑아서 땅에 꽂고있었다. 밭고랑처럼 쭉 줄을 낸 땅우에 날개의 깃을 심고있었다. 한줄로 나란히 심어진 그 깃털들을 바람이 불어와 파르르 날리고있었다. 그 날림이 해빛을 받아 억새꽃처럼 찬연하게 반짝이고있었다.
-와, 너무 이쁘다.
딸애가 옆에서 감탄을 퐁퐁 토해내며 좋아서 손벽을 치고있었다.
그 날개의 깃털들에 물을 주고있었다. 예쁜 핑크색의 조리에 투명한 생명수를 골똑 담고 깃털에 물을 주고있었다. 노을빛을 받아 물방울들이 노란 진주로, 빨간 진주로 반짝였다. 작은 무지개가 찬연하게 만들어지고있었다.
-와, 너무 이쁘다.
딸애가 옆에서 감탄을 퐁퐁 토해내며 손벽을 치고있었다.
-정말 날개가 자라는거야? 정말 여기서 하늘만큼 큰 날개가 나오는거야?
-그럼. 날개가 나오지, 날개가 자라나오지. 훨훨 하늘을 나는 날개들이 자라나오지. 그리고 우리 공주처럼 훨훨 하늘을 날지.
나는 딸애를 안아 하늘로 번쩍 들어 비행기를 태워주었다. 와우, 와우… 놀란듯 즐거워라 부르짖으며 자극을 즐기는 딸애의 비명소리가 하늘에 메아리쳤다. 그래, 날아라 훨훨, 하늘에 날아라.
그때 하늘이 열리고있었다. 푸른 하늘 한자락이 쫘악 무대의 막이 량옆으로 갈라지듯 열리고있었다. 그 갈라진 틈새로 정말로 거대한 깃털들이 떨어지기 시작하고있었다. 그 깃털들이 눈발처럼 휘날려 방금 내가 심은, 내가 내 딸과 함께 심은 그 깃털들 주변에 화살 박히듯 쫑 쫑 쫑 박혀 심어지고있었다. 어느새 내 주변은 온통 깃털의 천지였다. 억새밭보다 무성한 깃털의 바다가 되여있었다. 그 깃털의 바다속에 나와 내 딸이 멍 때리며 서있었다.
깃털들이 자라는 소리가 막 들려오고있었다. 부화된 알속에서 병아리들이 부리로 톡톡 계란껍질을 터뜨리듯 그렇게 여기저기서 톡톡 땅이 터져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그 땅이 톡톡 갈라지는 소리가 더 빨라지고 더 커지더니 드디여 슬로우모션으로 꽃잎들이 한순간에 피듯 그렇게 날개들이 땅우에 막 꽃처럼 피여나고있었다.
아아아, 날개의 바다. 날개의 꽃바다. 정말 날개들은 알록달록 꽃의 색갈로 그렇게 오색찬연하게 땅을 덮고 설레이고있었다. 황홀한 날개의 꽃바다가 출렁이고있었다.
드디여 날개들이 땅을 치고 땅을 떠나 하늘로 치솟기 시작하고있었다. 날개들이, 몸뚱이 없는 날개들이 하늘로 훨훨 비상하기 시작한다. 날개가 하늘을 나는건지 꽃들이 하늘을 나는건지… 나는 정신이 없었다. 이제 날개들은 다 땅을 떠나 하늘에 넘치고있었다. 채색의 구름처럼 하늘을 쫘악 뒤덮고있었다. 이제 땅에는, 내가 깃털을 심은 땅에는 날개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날개들은 다 하늘에 날고있었다. 날개들은 다 하늘에, 하늘에 꽃바다의 물결을 이루고있었다.
나는 급히 딸애의 손을 잡았다.
-자, 이젠 우리가 날 차례야. 우리도 날아야 돼.
-어떻게 날아?
-저렇게, 저렇게 날개들처럼 쫙 두팔을 벌리고 나는거야.
나는 딸애에게 두팔을 벌리는 시늉을 하고있었다. 그 순간, 정말 내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거대한 날개가 쭈욱 뻗어져 나왔다.
나를 따라 두팔을 벌린 내 딸애의 겨드랑이에서도 이쁜 핑크색의 날개가 천사의 날개처럼 너무 예쁜 깃털을 달고 나오고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날면 되는거야?
딸애는 내게 날개를 푸덕이는 동작을 해보였다. 순간 딸애의 몸이 땅을 떠나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천사처럼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기다려, 아빠와 함께 나는거야.
나는 급히 딸애를 쫓아 날개를 푸덕이기 시작했다. 나도 날아오르고있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나와 딸애 주위로 오색찬연한 날개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원무를 추고있었다.
검은 날개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어떤 자락이 눈앞에 흔들린다.
무엇일가, 도대체 그것은.
생각을 모아 그 자락의 끝이라도 잡으려고 애쓰지만 그러나 그건 아련히 피여오르다가 그대로 해볕에 증발되여 사라지는 한줌 안개처럼 도무지 생각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다. 손안에 잡히지 않는 한줌의 안개, 그 안개에 가려진 마음의 눈이 너무 답답해 눈을 감고 머리도 흔들어보지만, 그러나 머리속은 점점 짙어가는 안개의 밭인양 더욱더 하얗게 비여져갈뿐이다.
분명 다 그렸다고, 더 그려넣을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손은 화필을 놓지 않고있었다. 그랬다. 지금까지 그린 이대로라도 충분히 완성된 그림일수 있지싶지만 그러나 나는 내 손의 감각을 믿기로 한다. 손이 지금까지 이 그림을 그리는데 사용한 붓을 놓고파하지 않는한, 버리지 않는한 붓은 아직 저 캔버스우에 단 한점 혹은 단 한줄이라도 더 찍고 그어나가야할 뭔가를 남겨놓고있었다. 그것을 붓은 알고있었다. 그래서 내 손을 떠나지 않고있었다. 내 손도 그 붓을 버리지 못하고있었다. 결국 내 손에 들려져 있는 이 붓이 쓰레기통으로 시원히 날아가 깨끗이 버려지지 않는한 내 그림은 아직 내 머리속에 소용돌이치는, 나로서도 딱히 알수 없는 정체모를 역설의 냄새 같은것을 다 그려내지 못한것이고 그 그림뒤에 감춰져 있는 정감의 온도 같은것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것이다.
뭘가, 도대체 뭘가, 한달넘게 내 손에 들려져 있던 이 붓을 아직도 내 손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있는 정체불명의 이 허깨비 같은것은. 그 안개 같고 허깨비 같은것을 좇아 나는 그렇게 캔버스앞 의자에 아침부터 지금까지 꼬박 두시간이상 앉아있는것이다.
뭐지? 도대체 뭐지?
부르르… 하고 테블우에 올려놓은 핸드폰의 진동이 책상면을 흔들며 부르릉 울린다. 보나마다 수진이 그녀다. 어제 금요일, 이 그림을 시작한 그날부터 한달동안 향아를 데리고 어린이집으로 오가느라 수고했던 수진이는 이번 주말엔 꼭 아빠와 함께 자겠다고 떼질쓰는 향아를 데리고 집으로 왔었다. 그런 수진과 함께 향아를 가운데 앉히고 셋이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친후 나는 하루만 더 기다려달라고, 오늘밤이면 그림을 완성할것 같다고, 발길을 돌리기 아쉬워하는 그녀를 기어코 되돌려 보냈던것이다.
아니나다를가 핸드폰 액정화면에는 “미야”가 깜빡깜빡 유혹의 윙크를 보내오고있었다. 미야는 내가 수진에게 달아준 닉네임이다. 언젠가 격렬한 사랑을 나눈후 내 품에 안긴채 내 핸드폰에 저장된 자기의 닉네임을 보고 수진이는 미야? 무슨 뜻이야? 미녀도 아니고 미아도 아니고 미야라니? 하고 의아해하는 눈길을 던져왔었다.
-미녀야수라는 뜻이야.
-뭐? 내가 왜 야수인데?
당장이라도 그 눈으로 다시 나를 잡아먹을듯, 사랑의 물기를 함초롬히 머금은채 동그라니 올롱해지는 수진의 귀여운 눈.
-너 야수지 그럼. 항상 나를 잡아먹으려고, 야금야금 씹어먹으려고 혈안이 되여있잖아?
-피, 아예 킬러라 하시지 그랬어? 몬스터라 하시지 그랬어?
-킬러라 하면 어감이 너무 강하잖아. 몬스터도 그렇구… 괴물은 아니잖아. 내게 수진이는 야수지만 너무 예쁜 야수니까.
-정말 예뻐?
역시 그녀도 녀자였다. 예쁘다는 말에 약했다. 냉큼 얼굴에 화사한 기쁨의 꽃물결을 피워올리며 내게 고운 입술을 보내왔다…
수진은 미대 대학동기인 나와 안해가 련애를 할 때 우리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대학 일년 후배였다. 미대 녀대생들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미모를 자랑하면서도 성격이 활달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여서 미대 거의 모든 행사에서 리더로 활약하는 그녀의 모습은 항상 우리 선배들에게도 부러움과 찬사의 대상이 되군 했다. 당연히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여 우리 동기중에서도 몇몇 플레이보이기질이 있는 친구놈들이 레브레터를 날려보내봤으나 기분 좋게 거절당한 에피소드도 알 사람은 다 알고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항상 당당하고 도고한 한마리의 고니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자기 련애는 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련애하는 우리 둘사이에 늘 끼여들어 “훼방군” 역할을 하는것이 나로서는 잘 리해가 가지 않았으나 그러나 그렇게 야무진 후배가 우리뒤를 쫓아다니는것이 싫은건 아니였다. 오히려 너무 귀여워 우리 두 사람 다 그녀를 정말 친녀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해주어야만 했다.
졸업후 그녀는 그림 그리기보다 사회활동에서 더욱 두각을 드러냈고 어느날 문득 전체 미대와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이슈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이 도시의 최대의 화랑을 갖춘 아트홀 경영자로 당당히 군림했던것이다. 화가로서의 성공보다도 아트 에이전트로의 성공을 더 기대한다던 그녀의 꿈을 마침내 이루어냈던것이다. 그러나 아직 어쩜 너무 어린 나이에 그렇게 거대한 사업에 감히 손을 댈 정도로 그녀의 꿈이 다부지고 컸을줄은 나와 내 안해가 될 사람 모두 너무 뜻밖이였다. 사업가로의 화려한 데뷔를 공식선언하는 첫리셉션에서 그녀는 결혼을 앞둔 나와 안해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이제부터 수진이가 언니와 선배의 공식 에이전시가 되는걸 동의하는거지?
-당연하지, 우리야 너무 고맙지.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의 결혼을 미리 축하한다는 덕담을 하던 그녀는 내 안해될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잠간 어울리는 사이 내게 이런 애매한 말을 던졌다.
-두 사람 결혼 너무 일찍 하는게 아냐? 졸업한지 이제 몇년 됐다구… 나만 괜히 너무 심심해지잖아?
-응? 이젠 사업가가 됐으니까 몸이 열두쪽 되도록 정신없이 바빠지겠으면서두 뭐.
-아니지, 그래도 항상 철없는체하고 쫓아다니며 선배를 가까이서 쳐다볼수 있었던 때가 좋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 그 어떤 애잔한 아쉬움 같은것이 묻어있는것이 잠간 보여 괜히 순간적으로 내가 당황해졌어야만 했다…
-그림 다 되였지? 이젠 그림 가지러 가도 되는거지?
통화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까이 대기 바쁘게 그녀의 약간 달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림 보러 오겠다고 한다. 그림 가지러 오겠다고 한다. 나를 보러 오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 완성된 그림을 빨리 보고파하는 그녀의 달뜬 마음을. 그림을 가지러 달려오겠다는 그녀의 그 마음보다 더 뜨거워졌을 그녀 육체의 열망을. 지금 거의 완성되여가고있는 이 그림을 시작한지 한달동안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찾지 말아달라는 나의 뜻대로 한번도 내 화실문을 따고 들어오지 않고 향아를 보살펴준 그녀였다. 그 한달동안 내 몸안에 그녀를 향한 열망이 뜨거운 용암으로 쌓일대로 쌓여졌다면 그녀의 몸속에도 역시 나를 향한 사랑의 열망이 보물처럼 차넘치고있으리라.
-어, 아직은 아니야.
-어제 향아를 데려다주러 갔을 때도 거의 완성되였다고 했잖아? 밤이면 완성될것 같다구 하더니…
그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있는게 전화기너머로도 알려왔다.
-아니야, 아직은. 조금만 더 기다려줘야 할것 같아. 마지막 한획, 그것이 아직 남아있어. 미안해…
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전엔 그녀가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리면 더 그림이 잘 나오군 했지만 이번 그림만은 그녀가 보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싶었었다. 완성되기전에는 보여주기 싫은 그림이였다. 내 이번 그림의 색감과 톤을 그녀에게 보인다면 그녀가 괜히 어떤 근심을 앞세우면서 이 그림의 계속되는 창작을 저애할수도 있다는 내 로파심 섞인 리기의 생각때문이였다. 어쩜 그녀가 싫어할수도 있는 그런 그림이였다. 다른 사람이 그린다면 싫어할 리유없이 좋아하겠지만 내가 그린다면 걱정을 앞세워 싫어할수도 있는 그림이였다. 그녀가 내게 기대하는 다른 명랑한 톤으로 그려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전의 《불타는 날개》계렬의 작품이나 《푸르른 날개》계렬의 작품처럼 생명력이 넘치는 붉은 색조와 푸른 색조로 그렸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알고있었다. 지금까지 내 가슴속 한구석에 단단한 먼지의 화석처럼 쌓여있는 그 칙칙한 색갈들을 이제는 그림으로 다 토해내야 한다는것을. 아직도 남아있고 어쩜 더 강해지는 이 세상으로의 분노와 절규이지만 이제는 그 모든것을 감히 그림으로 토해내도 괜찮은 시간이 되였다는것을. 지금까지는 가슴 밑바닥에 피고름으로 감춰두고 억누르고있었던것이지만 그러나 그건 치유책이 아님을 나는 나 스스로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어차피 그건 언젠가는 그림으로 그려내야만 하는것이였다. 그림으로 그려내고 그 그림속에 다 토해내고 진짜로 내 마음을 비워내야 했던것이였다. 그녀 수진의 헌신적인 사랑과 피타는 노력에 힘입어 많이 극복되고 이겨내고있었지만, 향아의 해맑은 웃음을 보며 향아와 주고받는 사랑의 힘으로 많이 치유되고있었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 먹물보다 검게 감추고있던 피눈물을 이제는 정말로 다 토해내야할 시간이 왔음을 나는 깨닫고있었던것이다. 진짜 재생의 나를 위해서도, 향아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녀의 인생을 위해서도 이제 새로운 결단의 시간이 왔음을 나는 알고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가슴속에 쌓여있는 그 죽음의 검은 색을 드디여 그녀 수진이 몰래 내 그림에 담아내기로 결정했고 이번 이 작업만은 수진이 몰래 진행하고팠던것이다. 이번 그림을 시작한이후 한번도 수진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한달동안 검은색앞에만 매달려있는중이였다. 한달내내 너무 가슴이 아픈 작업의 시간이였고 붓질 한번 한번은 지금까지 나를 아프게 했고 절망하게 했고 쓰러지게 했고 피 토하게 했던 그 모든 시간을 다시 떠올려 내 심장의 살결과 함께 갈기갈기 다시 찢어지는 시간으로, 참으로 다시 쓰러질것 같은 힘들고 지친 작업의 시간이였다. 이제는 그 힘든 작업을 끝내야 했다. 그 검은색의 블랙홀 같은데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그 검은색에 지쳐 필을 놓을 때가 되였음을 쓰러질것 같은 내 몸의 한계로 깨닫고있으면서도 황당하게도 나는 아직도 그림에 모자라는 그 무엇인가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고있었다. 아, 토해내는것이, 다 토해내는것이, 다 토해내고 철저히 비워내는것이 이렇게도 힘들구나…
안타까웠다.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 안개의 자락 같은 정체를 마지막 한획의 붓질로 그려낼수 없는것이. 그 마지막 한획때문에 내 가슴은 아직도 미어질것 같은 통증으로 안으로 검은 피를 뚝뚝 떨구고있었다.
아이의 눈이 무섭소
자박자박 작은 슬리퍼가 층계를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물쇠를 걸지 않고 빼꼼히 열어놓고있은 반지하실문이 살그머니 열리는 기척이 들린다. 나는 오른손에 붓을 든채로 의자에 앉은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잠든체하고 눈을 감고 기다리기로 한다. 이제 내옆에 다달은 딸아이는 아빠가 잠든걸 확인하느라 숨죽여 아빠 눈앞에 고 귀여운 손을 살살 좌우로 흔들어볼것이고 한번 더 확인하느라 아빠의 코밑에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대어 아빠의 숨결을 확인해볼것이다. 그래도 내가 아무 반응이 없으면 마지막 확인작업으로 내 눈초리끝을 조심스레 살짝 터치해볼것이고 그래도 내가 눈을 뜨지 않고 그냥 깊은 잠에 빠진 시늉을 하고있으면 드디여 그 작은 코구멍으로 내쉬는 숨결조차 다 안으로 가다듬으며 고양이걸음으로 살그머니 내 등뒤로 발자욱소리 죽여 돌아갈것이다.
드디여 내 어깨에 떨어지는 딸애의 두손.
-왁!
-에크머니…
-놀랬지?
나는 화들짝 놀란 시늉을 과장해서 선물한다.
까르르… 딸애의 웃음이 내 작업실에 넘친다.
-와, 향아가 언제 내려왔지? 아빠 너무 놀랬잖아?
-놀랬어? 많이?
-그럼… 너무 놀래서 막 심장이 콰당콰당 뛰잖아?
-진짜?
딸애는 아빠 심장이 정말 많이 놀라서 많이 뛰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내 가슴에 그 귀여운 머리를 가져다댄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딸애의 머리를 내 가슴에 꼭 껴안고 킁킁 딸애의 곱슬머리에 코를 대고 그 젖살내음 채 가시지 않은 애기풀냄새를 맡는다.
그게 나와 딸애의 《왁! 놀랬지?》 유희의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레퍼토리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였다. 감은 눈이지만 앞에 손이 움직이는걸 느낄수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눈앞에 작은 손이 움직이는게 느껴지지 않는다. 코밑에 다가오는 따스한 손가락의 느낌도 없다. 눈썹을 간질이는 느낌도 없다. 음? 이상하군.
나는 눈을 가늘게 밑으로 뜨고 곁눈질로 딸아이의 동정을 살핀다. 딸아이는 내 옆에 선채로 앞에 세워져 있는 캔버스를 뚫어져라 쳐다보고있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듯 머리를 갸웃하며 눈살을 찌프리기도 하고 잠간 고개를 뒤로 젖혀 좀 시야를 조절해보기도 하면서 거의 끝나가는 내 그림을 열심히 들여다보고있었다.
나는 오늘은 딸아이와의 《왁! 놀랬지?》유희절차가 생략되였음을 깨닫는다. 딸애를 놀래지 않으려고 쩝쩝 입을 다시며 하품하는 시늉을 한다. 지금 막 잠에서 깨는듯이.
-어, 우리 공주 언제 내려왔어?
손에 들었던 화필을 놓고 손으로 그 작은 어깨를 끌어다 딸아이를 내 무릎에 앉힌다.
-아빠, 깼어?
-음…
-많이 피곤하지?
잠든체하는 아빠를 정말로 피곤해서 잠든줄 알고 걱정해주는 딸애의 마음이 뭉클하니 너무 가슴에 벅찬 감동을 준다.
-아니. 향아를 이렇게 꼭 안으니까 너무 좋아, 너무 힘이 나.
나는 아이를 품에 꼭 보듬어안는다.
-아빠가 이렇게 안아주니까 향아 너무 좋다… 엊저녁 아빠 나를 꼭 안고 잔거 맞어?
-당연하지. 지금처럼 이렇게 꼭 안고 뽀뽀를 하면서 잤는데두… 향아 꿈에 아빠가 향아를 안고있는거 못봤어?
-아니, 봤어. 너무 좋았어.
딸애는 벌써 아빠 기분을 맞춰줄줄 안다. 꾸지도 않았을 꿈을 아빠 말대로 꾸었다고 기분 좋게 응수해온다.
-근데 아빠, 이 그림 아빠 그린거 맞아?
-그럼, 당근이지.
-근데 왜 핑크색 없지?
딸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색갈이 핑크색이여서 근간 내 그림들에는 핑크색이 양념처럼 많이 들어가군 했었다.
-음… 이번에는 핑크색 없는 그림이야. 괜찮지?
-응. 괜찮아. 그런데 아빠 지금 그린거 뭐지?
-향아 보기엔?
-음… 높은 벽 같기두 하구… 음… 아니야, 검은 길 같기두 하구… 음… 아냐 아냐,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거 같기두 하구… 음… 잘 모르겠어.
-그래?
나는 가슴속 은밀한 곳이 갑자기 쿡 하고 뾰족한것에 찔리는 아픔을 순간적으로 느꼈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시도때도없이 내 가슴을 찔러오던 그 아픔보다 더 강한것이였다. 그림을 향해있는 아이의 얼굴을 옆으로 돌려 그 얼굴에 정성껏 뽀뽀해주었다. 네가 보아냈단 말이지? 정녕 네가 보아냈단 말이지? 아빠가 그려 넣지 않고 숨겨놓은걸 네가 거의 다 보아냈단 말이지?
뛰여넘을수 없게, 무너뜨릴수 없게 높고 두터운 담장…
날아넘을수 없게 아스라하니 끝이 보이지 않는 추락을 위한 절벽…
그리고 시커먼 구멍으로 욕망을 토해내듯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함정 같은 굴뚝…
그리고 가야할 방향을 잃고 뻗어야할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검은 길… 빛을 잃어 동굴처럼 시커먼 터널…
그리고… 검은 거품을 부글부글 끓이며 이 세상 모든걸 다 삼킬 듯 표효하며 달려오는 검은 파도…
그리고… 무너지는 담벽들…
그리고… 무너지는 건물들…
그리고… 그 아래에 깔려 신음하는 인간들의 아우성…
그 모든걸 감춰놓은 그림이였다. 그 모든걸 다 그려넣고픈 충동을 누르고 그 모든것들은 다 감춰서 그려넣지 않고 달랑 검은 날개 하나만 그려넣은 그림이였다. 그 한쪽 날개마저도 다 그려넣지 않고 부러진 날개로, 화폭에 넘치게 부러진 날개 모양만 대충 알릴가말가 그려넣은 그림이였다. 흑색 안료를 거칠고 두텁게 많이 사용한, 얼핏 보기에 검은 색 유화 안료만 덕지덕지 떡칠하듯 수십층 마구 덧칠해놓은 너무 거칠은 그림이였다.
화폭에 그려넣지 않고 작업하는 동안 내내 머리속에 골똑 차넘치는 그 이미지들을 붓끝에 간신히 눌러 숨겨놓고 날개 하나만 달랑 그렸는데, 상처 입어 부러진 날개 하나만 달랑 그렸는데 내 아이는 날개밑에 감춰놓은 그것들을 보아내고있었다. 크게, 거칠게, 눈에 보이게 그린 날개 대신 오히려 그 날개밑에 감춰놓은 내 머리속을 꽉 채우고있던 이미지들은 거의 다 보아내고있었다. 아, 내가 다시 마주하고싶지 않은 색갈, 그럼에도 너무 오랜 시간동안 내 가슴속에 무거운 앙금으로 쌓여있던것들… 내가 너무 피하고싶었던것들, 그럼에도 나약한 인간으로 마주할수밖에 없었던것들… 그래서 숨겨놓았는데, 그림 그리는 내내 가슴을 비틀어 쥐어짜는듯하던 그 고통을 겨우 누르며 억지로 숨겨놓았는데 딸애는 숨겨놓은 그것을 다 보아내고있었다. 아이는 그림 대신 내 가슴속을 들여다보고있은것일가…
-향아 눈에는 이 그림이 그렇게 보였어?
-그럼 아니였어?
아이는 오히려 의문을 눈에 골똑 담고 올롱한 눈으로 쳐다본다.
-아니, 맞아, 다 맞아. 향아가 본것이 너무 맞아. 우리 향아 천재구나…
천재구나 하는 내 목소리는 떨리고있었다.
나는 딸아이를 덥석 높이 안아들며 온 오전 앉아있다시피 한 의자에서 일어섰다. 항상 그랬듯, 그림이 거의 완성되여갈즈음 되면 느끼군 하는 그 피곤을 나는 오늘 벌써 많이 느끼고있던중이였다. 그 피곤했던 몸에 딸애를 번쩍 높이 쳐들어안으며 나는 억지로 목소리톤을 명랑하게 꾸며냈다.
-그래, 우리 향아 난다, 훨훨 난다…
나는 딸애를 목에 목마태우고 반지하실에 내 작업실로 마련한 화실을 나섰다.
내가 캔버스에 거의 완성시켜가고있는 그림의 제목은 《검은 날개》였다. 그래서 전체 그림의 톤 역시 검은 색이였다.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의 바탕에 그린 검은 색의 날개였다. 한달동안 그려넣고픈 그 모든 흑색이미지들을 억지로 감추고 감추며 캔버스에 담아낸건 고작 시커먼 거대한 날개 하나뿐이였다. 그것도 상처를 입은 부러진 날개였다. 날개로 보아주면 날개이지 날개의 모양을 아무나 인츰 보아내기에도 좀 힘든 컨셉의 그림이였다. 그 커다란 날개 하나만 캔버스에 넘치게 그려넣고 딸애가 보아낸 그 모든것들은 마음속에만 수없이 그리며 캔버스에 담지 않고 바탕색에 다 마구 버무려 보이지 않게 했음에도 딸애는 다 보아냈던것이다.
놀라운 통찰력, 내가 그림에 숨기고자 했던 진실을 아이의 눈은, 그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의 눈은 어렵지 않게 보아내고있었다. 당연한듯 보아내고있었다. 그리고 그 진실우에 상징으로 그려넣은것은 오히려 보아내지 못하고있었다. 상징보다도 진실 그 자체만을 보아내는 아이의 섬뜩하리만치 무서운 눈.
아이의 눈이 무섭소
아이의 눈이 무섭소
세상을 보는 내 아이의 눈이 무섭소
세상을 모르며 세상을 다 아는
내 아이의 눈이 너무 무섭소
내 아이에게 그 눈을 준 세상이 너무 무섭소…
나는 딸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빠는 향아를 너무 사랑해.
가슴이, 가슴이 너무 짠하게 아파왔다. 채색만 담아야할 그 눈으로, 핑크색 꽃잎과 푸른 색 하늘빛만 담아야할 그 눈으로 검은 담장과 검은 절벽과 검은 길… 그 모든것을 다 보아낸 영악한 내 아이의 눈… 그래서는 안되는데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는데 여섯 살짜리 딸아이는 벌써 금기의 그 벽을 넘어서 있었다. 어쩜 운명적으로 불행의 그림자 같은것에 너무 익숙해있고 그 불행의 색갈과 모양을 보아내는데 너무 본능적으로 익숙한 아이일지 모를 다는 생각에 가슴이 더욱 쓰리고 아파왔다.
천재의 눈을 가진 내 딸을 안고 나는 속으로 아픈 진통을 삼키고있었다.
층계를 올라 1층 집문을 열고 들어서며 나는 아이의 그 순진무구한 눈에 꼭 입을 맞추었다. 아이야, 이 살벌한 세상을, 이 너무 오염된 세상을, 때로는 더러 눈을 감고 사는 지혜를 너는 배워라, 나중에. 하고 속으로 속삭였다.
옷을 벗어라 날개를 주마
내겐 항상 고마운 그녀였다. 서로 몸을 나누는 사이로 그냥 지내고있지만 그건 정말 그녀의 피타는 정성과 눈물나는 노력으로 이루어낸 기적 같은것이였고 아직까지도 나는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감히 못해주고있었다.
아직도 내 가슴속에 그냥 그 자리를 커다랗게 지키고있는 안해의 모습때문이였다. 너무 급작스레 내곁을 떠남으로 내게 너무 큰 비통을 주었던 안해, 그 충격으로 나는 안해와 함께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한걸 한탄하며 세상과 담을 쌓기 시작했고 줄어드는 내 체중과 함께 내 삶의 의욕 역시 내 몸에서 많이 빠져나가고있었다. 그런 방황의 시간이 일년이 거의 다 되여가던 또 하나의 크리스마스시즌 어느날, 너무 미칠것 같은 슬픔과 고독을 이길수 없어 입구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오색불빛을 반짝이는 어느 술집을 홀로 찾아들어간 그날, 나는 내 지갑안의 지페 몇장이 욕심나서 렴치없이 내 허락도 없이 마구 내 사타구니를 파고드는 호스티스의 손길에도 내 남성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것을 느꼈어야 했고 그제야 나는 안해가 내곁을 떠난 몇달동안 내 그것이 한번도 일어선적이 없었던걸 새삼스레 깨닫고있었다. 그 깨달음은 이미 피페해질대로 피페해진 내 가슴에 더욱 스산한 가을 찬바람을 불어넣어주었고 나는 그 가을 찬바람만 들어찬 가슴이 터질것 같이 숨조차 쉴수 없어서 쿨룩쿨룩 비린내나는 마른 기침을 뱉어내기 시작해야만 했다.
그 기침은 한번 터지면 멈추기 힘든 기침이였고 나는 그 기침으로나마 내 가슴속을 꽉 채우고있는 슬픔을 다문 얼마라도 뱉어낼 수 있음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기침을 뱉어낼 수록 내 슬픔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제 나는 기침을 멈추고 그대로 까무룩 잠들었음 좋겠다는 환상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그때쯤 아트홀을 경영하고있는 수진에게서 전화가 왔고 전화에 들리는 나의 무기력하고 염세주의적인 목소리에 너무 놀랐는지 수진이는 당장 내게로 달려왔다.
-선배, 왜 이래? 사람몰골이 이게 뭐야? 그렇게 훤칠했던 사람이 이게 뭐야?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눈에 눈물을 퍼올렸고 손님이 왔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의자에 앉은채로 입으로 아니고 코로 흥흥 비웃음 같은 웃음을 킬킬 쏟아내는 나의 머리를 무조건 그 품에 안았다. 어린애를 달래듯 내 머리를 그 품에 꼭 안고 손으로 내 마른 목덜미를 어루쓸어주었다.
-선배, 언니를 잃고 슬퍼하는 그 마음은 리해되지만 그러나 이건 아니잖아? 이제는 언니를 보내줘. 이렇게 붙잡고있는다고 간 사람이 다시 돌아오겠어? 선배가 이렇게 자기 몸을 다 버려가며 아직도 언니에게서 헤여나오지 못하는걸 알면 언니도 너무 가슴이 아플거야. 언니는 이미 다른 길에 오른 사람이잖아? 그 길로 가게 놓아줘. 그냥 이렇게 붙잡고있으면 언니도 가야할 곳으로 못가고 그냥 허망에 떠돌게 되잖아? 선배, 정말 사랑했다면 이젠 놓아주는게 맞아. 죽은 사람은 죽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죽은 사람몫까지 더 잘 살아야지. 그게 선배곁을 떠난 언니가 진짜 바라는걸거야. 선배, 오늘부터 제발 언니를 놓아줘.
그리고 그날 온 오후 그녀는 슬픔의 먼지와 절망의 쓰레기들로 어질러질대로 어질러져 있는 내 집을, 아니, 아직 안해가 떠나지 않고 집안 구석구석 어디에나 숨결로 냄새로 남아있는 안해와 나의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허락없이 마음대로 집안을 정리하는 그녀를 나는 그대로 멍하니 바라보고있기만 해야 했고 저녁때쯤 그녀는 나와 안해의 집을 내만의 집으로 바꾸어놓았다. 안해가 사용하던 물품들을 전부 정리하여 차를 불러 어디론가 실어갔고 반지하실에 있는 화실을 전시장처럼 화실의 네 벽에 줄느런히 걸어놓고있던 안해의 유작들도 전부 떼여냈다.
-언니의 이 그림들은 내 아트홀에 소장했다가 임자가 나지면 처리할거야.
그녀는 내 의견 같은건 아예 묻지도 않고 그렇게 단 반나절만에 내 주변을 확 정리하여 바꾸어놓았다. 생의 의욕을 거의 다 잃고 황페하게 무너져 있는 내게 물었던들 어쩌랴… 나는 이미 내 의지를 다 잃을 정도로 너무 무기력해져 있었는데…
그리고 그날 저녁 그녀는, 죽은 안해의 냄새로만 숨막히게 가라앉아있던 집에 참으로 오랜만에 살아있는 녀자의 냄새를 피우며 하얀 김이 솟구치는 음식들을 차려올렸다.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 내 손에 쥐여주고, 나와 자기 사이에 놓았던 빈 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건 아내의 몫이었다.
-언니, 선배의 모습 보이지? 언니를 잊지 못해 이렇게 힘들어하는 선배의 모습 보이지? 언니, 이젠 놓아줘. 선배를 놓아줘. 선배에겐 아직 살아가야할 많은 날들이 남아있잖아? 그 세월을 함께 못할바엔 이젠 놓아줘야지 안그래? 놓아주고 언니 갈 길을 가. 언니는 섭섭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린 언니를 이미 떠나보냈다구, 언니가 우리곁을 떠나는 그날 우린 언니를 우리곁에서 이미 떠나보냈다구… 그게 인연인데, 거기까지가 인연이였는데 자꾸 붙잡고있으면 어떡해? 언니, 아쉬워하지 말고 떠나가. 내가 있잖아? 이제부터 선배는 내가 챙겨줄게. 언니도 그랬잖아, 언니랑 선배랑 련애할 때 철없이 쫓아다니는 나를 보고 그랬었잖아? 언니가 잠시라도 선배곁을 비웠을 때 다른 사람이면 안되지만 내라면 언니의 후배 수진이라면 마음 놓고 선배를 맡길수 있을거 같다구… 그 말 아직도 유효한거지 언니? 그동안은 내가 너무 등한했어. 일을 핑게로 언니를 떠나보낸 선배의 슬픔속에 내가 끼어들기 주저되여서 지금까지 선배를 방치해두었던거야. 그게 잘못이였어. 그러나 이제라도 내가 달려왔잖아, 언니의 뜻대로 내가 달려왔잖아? 이젠 내가 선배를 보살필게. 언니의 후배노릇 착실히 할테니까 이제 언니는 마음놓고 떠나가줘. 그 뜻으로 언니, 우리 마지막잔 함께 해.
수진이는 자기잔의 술을 목을 젖혀 다 마시고나서 내 안해몫으로 부어놓았던 잔까지 단숨에 굽냈다.
그리고 다시 자기 술잔에 술을 부어 내게 건배를 제의했다.
-선배, 이제 언니를 바래는 의식은 끝냈어. 이제는 선배가 나를 받아들이는 의식을 치뤄야 해. 자, 나랑 한잔 해.
그렇게 짠 하고 부딪쳐오는 수진의 잔에는 내 와인컵에 부은 량보다 훨씬 많은 량의 술이 담겨져 있었고 수진은 그 잔도 단숨에 굽을 내였다.
-선배, 왜 들지 않아? 오늘은 내 말을 들어야 해. 아니, 오늘부터 내 말을 들어야 해. 이제부터 선배는 원래의 선배로 돌아오는 련습을 시작해야 하는거야.
그렇게 그녀는 억지로 내게 술을 권했고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 잔을 굽내야만 했다.
-고맙다, 수진아.
-고맙긴… 내가 너무 미안할뿐인데…
그녀도 눈물을 쏟고있었다. 그 눈물을 보면서 나는 지금 내앞에 울고있는 수진이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간데 약간 놀라고있었다. 얼마만에 사람을 앞에 마주하고 앉은 밥상인가, 얼마만에 안해가 아닌 살아있는 다른 한 녀자한테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을 가져보는것인가, 얼마만에 한 사람의 살아있는 생명의 목소리에 고마움을 느끼고있는건가…
그리고 며칠후 수진이는 함께 며칠 려행이나 다녀오자며 비행기표를 들고 왔다. 티켓에 인쇄된 목적지를 보는 순간 나는 다시 한번 꺽 숨이 막히는듯한 아찔함에 눈을 꼭 감아야 했다. 목적지는 내 사랑하는 안해와 함께 허니문을 즐기러 갔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해일에 안해를 잃은 저주의 섬나라 인도네시아였다.
-수진이 너?
꺽 막혔던 숨을 겨우 고르고 다시 톺아쉬며 입을 열었으나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수진은 강인한 어투로 대꾸해왔다.
-선배, 가는거야. 그곳으로 가는거야. 언니가 그곳에서 선배를 떠날 때 선배는 그곳에 언니를 혼자 두고 올수 없어서 선배 자신도 그곳에 두고 왔던거야. 그곳에 두고 온 선배를 그곳에 가서 다시 찾아와야 해. 가, 선배. 가서 이번엔 진짜로 언니를 바래는거야. 그리고 언니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오는거야.
강인한 어투였지만 목소리는 떨리고있었고 그 떨리는 목소리로보다도 눈빛으로 더 많은것을 강렬히 호소해오는 그녀의 마음이 가슴에 맞혀와 나는 고개를 끄덕일수밖에 없었다. 며칠전 처음 다녀간후로부터 수진은 날마다 내게 한번씩 꼭꼭 들려주었고 수진의 그 모든 정성이 내게서 안해를 떠나보내기 위한 모지름임을 나는 알고있었다. 그래서 나도 수진의 그 고마운 마음을 받아들여 이젠 안해를 떠나보내야 되겠다고 마음을 정리하고있던중이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안해를 잃은 그곳으로의 려행을 일방적으로 정하고 티켓까지 미리 끊은 수진의 마음을 나는 알수 있을것 같았다. 힘들겠지만 떠나야할 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찾은 수마트라섬에서 나는 바다물보다 더 짜디짠 피눈물을 안해의 이름을 목이 쉬도록 피터지게 부르며 한없이 한없이 쏟아냈고 그러는 내옆에 수진은 항상 함께 해주며 함께 눈물을 흘려주었다.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이 있다는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나는 그때 깨달을수 있었다. 수진에게 미안해서라도 더 울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그렇게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쓰나미가 덮쳤던 해변가인가싶게 평화와 랑만과 행복의 얼굴들만을 보여주는 해변가에서 이젠 눈물도 없는 텅빈 가슴으로 묵묵히 꽃잎을 바다물에 띄워 안해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고 호텔로 돌아온 그날 밤, 수진이는 기어코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침대옆에 걸상을 놓고 내 가슴에 엎드려 자장가 부르듯 소곤소곤 자기의 아트홀 경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득히 먼 하늘 그 끝에서 들려오는듯 점점이 멀어지는 최면의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정말 오랜만에 엄마품에 안긴 애기처럼 그렇게 편하게 잠속으로 빠져들수 있었다.
그러다 잠결에 달빛이 너무 교교하게 내 몸을 어루쓸며 내 이름을 부르는것 같아 눈을 떴을 때 나는 내옆에 옷을 벗고 누워있는 그녀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몸뚱이를 발견해야 했다. 싫지 않았다. 그 몸뚱이를 안고싶다는 작은 설레임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걸 느낄수 있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1년전 안해를 잃은 곳에서, 그 사랑을 바래는 피눈물의 제사를 지내러 온 곳에서 그 안해의 후배의 몸뚱이를 옆에 두고 안고파하는 이 작은 설레임이란… 그러나 미안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쩜 이 순간을 안해에게 보여주려고 이곳으로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안해에게 이 모든것을 속임없이 그대로 보여주는것이 오히려 안해에게 미안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것을 다 보여주는 우리를 안해도 웃으면서 우에서 내려다볼것 같았고 그래야지 안해도 마음놓고 내게서 떠날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진이는 내 몸을 뜨겁게 하려고 노력하고있는중이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였다. 그녀의 손에 잡혀있는 내 그것은 아직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있었다. 뜨거운 몸으로 내 몸을 비벼대는 그녀의 애탄 숨결이 느껴졌으나 그러나 죽은 내 몸은 일어설줄 모르고있었다. 그새 나는 너무 오래동안 내 자신을 방치해두고있었고 스스로를 학대해버리고있었던것이다. 드디여 몸이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그녀가 내 몸우에 올라왔고 그 하얀 몸뚱이의 뜨거운 꿈틀거림에도 역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나를 의아한 듯 잠간 동작을 멈추고 내려다보던 그녀의 눈에 혹시 하는 의문의 빛이 언뜻 스치는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발견했다.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래, 맞어. 난 이미 내 남성을 잃은 놈이야. 너를 안고파도 안을수 없는 놈이야. 내 눈의 속삭임을 읽어낸 수진은 또 한번 눈물을 쏟고야말았다.
-괜찮아, 선배. 이제부터 비우기 시작하면 돼. 언니도 너무했어. 어쩜 선배를 이 지경으로까지 만들어놓으며 놓아주지 않은거야? 이젠 떠나보냈으니까 정말로 잊어야 해. 깨끗이 떠나보내고 다 비워내고 다시 꼭 채워넣어. 내가 함께 채워줄게. 아니, 내가 싫다면 다른 녀자래도 좋아. 다른 녀자가 선배의 가슴속에 들어와도 돼. 그걸 내가 도와줄게. 선배를 반드시 원래의 씩씩하던 선배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거야.
그 려행에서 돌아온 이튿날로 수진은 무조건 나를 끌고 병원으로 갔고 그 병원에서 의사는 기질적원인이 아닌 심인성 원인에 기인한것이므로 하루빨리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사랑을 향해 마음을 여는것이 유일한 치료방법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병원에서 돌아온후 수진은 아예 짐을 내게로 옮겨와버렸고 죽은 내 남성을 살리기 위한 수진의 피타는 노력은 그날부터 이어졌다.
우선 놓고있었던 화필을 강박하다시피 다시 내손에 쥐여주었고 무조건 그림을 그리도록 강요했다. 이미 황페해질대로 황페해져 도무지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 내 머리속에 령감의 감로수를 주기 위해 내 귀가에 잔잔히 음악소리보다도 아름다운 시들을 읊어주었고 죽어버린 내 야망을 일깨우기 위해 내앞에 옷을 벗어 누드모델이 되여주기를 서슴치 않았다. 아트홀 경영만 해도 정신없이 바쁘겠는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사양해도 원래의 나를 찾아주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고집처럼 더해만 갔다.
-내게는 선배 한사람의 생명이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게 더 중요해. 내 애타는 노력이 보인다면 사양을 하지 말고 다 받아들여주는게 오히려 맞지 않을가. 마음을 열어, 열고 다 비워, 비우고 다시 받아들여.
수진은 내게 그렇게 애타게 절규했다. 그 마음에 너무 미안하고 그 절규를 물리칠수 없어 나는 다시 아침조깅을 시작하고 수진이가 가져다주는 미술계 동태에 관한 책자들을 읽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무런 창작의욕이 없는 내 오른손에 그래도 열심히 붓을 드는 련습을 했다.
그녀의 도움으로 방황으로 시들었던 내 시간은 그렇게 다시 서서히 삶에 대한 의욕을 되찾는 시간으로 바뀌고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붓을 든 내 오른손에 미세한 떨림이 오면서 힘이, 나로서도 모를 힘이 서서히 가해지는걸 느낄수 있었다. 그 미세한 떨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온몸의 본능으로 깨닫고있었다. 그건 신내림 같은것이였다. 그건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는것이였다.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온몸의 힘을 오른손에 모았다. 흥분으로 벌떡벌떡 뛰는 가슴을 간신히 눅잦히며 참으로 오랜만에 오른손에 힘주어 듬뿍 붉은 색 유화물감을 붓에 두툼히 발랐다. 그리고 그것을 무조건 캔버스에 힘차게 쫙 그어나갔다. 그렇게 화필이 시원히 쫙 광목천우에 그어지는 소리가 내 몸에 어떤 형언할수 없는 오르가즘 같은것을 가져다주었다. 아, 얼마만인가? 이 주체할길 없는 떨림과 설렘과 흥분은… 그때 나는 힘차게 그어진 붉은 색이 내 몸에 검은 색으로 죽어 흐르던 피의 색을 다시 붉은 색으로 바꿔 물들여주고 뜨겁게 펄펄 끓이는 소리를 분명 들을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머리속에서 푸덕이기 시작하는 생명의 날개짓소리도 나는 분명히 들을수 있었다. 나는 흥분으로 덜덜덜 떨리는 오른손에 지금까지 죽은채 억눌려있던 그 절망과 방황의 시간들에 대한 분노를 다 담아 으스러지게 으스러지게 붓끝에 힘을 주었다. 머리속에 푸덕이는 그 빨간 색의 날개를 미친 듯 캔버스에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퇴근후 저녁식사도 못한채 내 앞에 옷을 벗고 누드로 비스듬히 누워 모델이 되여주고있던 그녀도 나의 이 반상적인 변화를 눈치채고 눈에 경이로움의 빛을 겁난듯이 띄우고있었다.
-선배, 괜찮아?
-움직이지 마, 그대로 있어.
나는 명령조로 소리질렀다. 벌거벗은 그녀의 몸뚱이를 보면서 하늘과 땅, 그리고 이 세상 모든것을 다 불태우는 태양처럼 붉게 불타는 날개를 그려나가고있었다. 내 눈에는 그녀의 몸이 보이지 않았다. 날아오르는 새, 붉게붉게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짓만 보였다.
도대체 뭘 그리는지도 모르며 정신없이 붓으로 캔버스를 쫙쫙 그어댄지 한참. 그림의 륜곽이 캔버스에 거의 다 드러났을 때 나는 더는 주체할수 없는 어떤 환희의 열망에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확 붓을 던지고 그녀에게로 덮쳤다. 미처 상황파악을 못하고 허둥대는 그녀를 화실 맨바닥에 끌어내려 눕히고 어느새 붉은 불기둥처럼 치솟아있는 나의 남성을 그녀의 몸에 무조건 콱 꽂았다. 아프다고 소리치는 그녀를 무시하고 마구 돌진했다. 그녀의 열락에 젖은 신음소리와 환희의 흐느낌소리를 펌프질로 뽑아올리며 한풀이하듯 그렇게 용맹히 달렸다. 달리는 내내 둑 무너진 저수지가 토해내듯 한없이 쏟아지는 눈물로 나는 내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모든것들을 한꺼번에 다 비워내고있었다. 드디여 그녀의 손톱이 내 등에 날카로운 아픔을 주면서 깊이 박힐 때 나는 내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젖가슴에 내 이빨자욱을 내고야말았다.
그때 나는 내가 깨물은 그녀 가슴의 이빨자욱 상처에서 빠알간 날개가 돋아나오는것을 오르가즘이 주는 환각속에 보아야만 했고 그녀가 내 등에 손톱을 박아 낸 상처에서 뾰족이 날개가 싹트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우리는 날개로 푸덕이고있었다. 푸득여 훨훨 날고있었다.
수진과 함께 수마트라섬을 찾고 돌아온지 꼭 반년이 되는 시점이였다. 그리고 그날이후 그녀가 나와 함께 더해준 그 반년동안 나는 기적적으로 《불타는 날개》계렬의 작품을 열점이나 완성할 수 있었다. 그건 불가사의한 기적이였다. 남들에겐 모르지만 내겐 내 생명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새 생명의 환호 그것에 다름아닌 기적 같은것이였다. 그 기적의 작품들앞에 내가 너무 환희를 느끼며 흐느낄 때 수진이는 뒤에서 꼭 내 몸을 안아주면서 속삭였다.
-선배, 이젠 내가 선배의 옆자리를 꼭 지키고있지 않아도 될것 같애. 이제 그 옆자리를 비워줄 때가 온것 같애.
뜻밖이고 아쉬웠지만 그러나 나는 짐을 다시 싸는 그녀를 막지 못했다. 꼬박 일년을 나와 함께 하며 그동안 허니문 려행에서 안해를 잃어 결혼생활이 뭔지 몰랐던 내게 진짜 부부생활의 소중함과 달콤함을 다 가르쳐준 그녀였지만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아직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있는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기때문이였다. 내 마음이 아직도 안해의 그림자를 다 비워내지 못하고있고 그래서 수진이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있는것을 그녀도 너무 잘 알아 내게 자신에게로의 사랑을 강요하지 않기 위해 나를 떠나고있음을 나는 너무나 알수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 듣고싶어. 그러나 강요하지는 않을게. 나중에 그 말을, 내가 아닌 다른 녀자에게 빼앗긴다 해도 아쉬워하지는 않을게. 선배와 함께 한 1년시간이 내게도 기적과 환희의 시간이였으니까.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 기다리고있겠다는거, 그건 내 권리니까, 괜찮지?
그녀는 나때문에 힘들었던 그 시간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그림들로 수진이는 이듬해 자기의 아트홀에서 나의 개인전을 열어주었고 그중 한점을 국전에 출전시켜 결국 대상이라는 영광을 거머쥐는 행운을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리는 그림마다 거의 다 그 소장가치를 인정하는 임자를 만나 팔려나갔고 팔리지 않는 그림은 그 예술적가치를 인정한다면서 수진이가자기의 아트홀 소장품으로 다 사줬다. 물론 그 구입가는 개인소장을 위한 아트작품 수집가들이 매겨주는 값보다도 더 나가는것이였다.
피를 뿌려라 검은 날개우에
금방까지 앞에서 비비디바비디부 하고 춤을 추며 재롱을 떨던 딸애는 지쳤는지 쏘파에 누운채로 어느새 잠이 들어있다. 향아야, 씻고 자야지 하는 나의 말에도 깰줄 모른다. 눈 감으면 금세 잠드는 아이, 그 잠속에서 아이는 또 어떤 꿈속의 세상을 만나게 될가. 낮에 봤던 그림속 검은색 날개만은 제발 다시 보지 말기를 바라며 나는 딸애를 안아들고 침실로 향했다. 깨워서 씻기느니 그대로 잠재우는게 나을것이다. 딸애의 꿈을 깨울 권리가 나에게는 없는줄 나는 알기때문이다.
다시 거실로 나와 쏘파에 앉은 나는 리모콘을 눌러 아까 딸애가 아빠앞에 노래를 부르느라고 한껏 낮추었던 티부이의 볼륨을 다시 좀 높였다. 그리고 지금 예능프로그램이 나오고있는 채널을 돌려 이 시간대에 뉴스를 방송하고있는 다른 채널로 돌렸다.
화면은 오늘 방금 끝난 덴마크 코펜하겐 기후회의를 특별보도로 다루고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130여개 국가중 두 거대국의 수뇌가 담판 테블에 마주 앉아있는 장면이 화면에 나오고있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예리한 리익분기점이 서로 양보할수 없는 쟁점으로 이슈화되고있었다. 거대 선진국의 수뇌는 개발도상국의 가스배출로 인한 현재진행형의 온실효과책임을 묻고있었고 거대 개발도상국의 대표는 지금까지 선진국이 배출한 탄소량이 지구온난화를 불러온 책임을 물으며 경제발전과 성장의 원리를 주장하고있었다. 기후문제해결의 공동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는 다가올 그린경제의 패권을 다투는 무역분쟁회의처럼 화약냄새가 넘치고있었다. 강대국들의 론리만 통하고 가난한 아프리카나 작은 섬나라 등 약소국들의 목소리는 파묻히고있었다. 온실가스배출 감축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과 대책 제시에서의 각국의 자세는 서로 자국리익을 대변하기 위한 론리들로만 차넘치고 한마음으로 지구의 미래를 구하려는 구체적인 행동들은 거의 나오지 않고있었다. 그래서 결국 겨우 합의를 이루어낸 '코펜하겐협정(Copenhagen Accord)'은 아무런 법적구속력도 가지지 못하는 형식상의 협정에 그치고말았음을 보여주고있었다.
앵커의 말. -지난 7일 기후회의가 개막될 당시만 해도 회의 개최지인 코펜하겐(Copenhagen)의 애칭은 희망을 상징하는 “호펜하겐(Hopenhagen)”이였지만 회의가 페막된 19일 지금, 현지에서는 “노펜하겐Nopenhagen)”이라는 절망의 신조어가 류행어로 떠오르고있습니다.
이어 화면은 이번 세계기후변화회의를 반대하는환경단체 회원들이 회의장밖에서 벌이는 시위장면을 내보내고있었다. 지구를 구하자! 고 웨치는 NGO 시위대원들의 머리우에 전신무장한 전경들의 전기곤봉이 사정없이 내리찍히고있었다. 피, 피가 흐르고있었다. 지구를 구하자! 고 웨친 죄로 피를 흘리고있었다.
순간 나는 내 오른손에 찡하고 흘러드는 어떤 전류 같은것을 느꼈다. 화필을 잡은듯 저도 몰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어느새 나는 허공을 향해 강하게 붓을 긋는 동작을 하고있었다.
그랬다, 오후 늦게 마지막 더 한층 두터운 검은 색 기름칠로, 어딘가 아직 좀 미타하지만 그러나 내 온몸의 신경을 날카롭게 세워놓을대로 세워놓아 나를 지치게 했던 그림 그리기에 마지막 한 덧칠을 하고 이젠 됐어, 이젠 됐어 하고 허탈하게 의자에 몸을 파묻었댔으나 그러나 결국 미완의 작품임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어 아예 며칠 방치해두었다가 다시 그리는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흰 보자기를 씌웠던 내 그림에 진짜로 마지막 피날레를 펼칠 때가 왔음을 내 오른손에 일어나는 전률은 알고있었다.
돈을 주면 살수 있는 유화 안료로만 그려진 내 그림은 내 가슴속에 꽉 차있었던 답답하고 칙칙한것을 다 담아내지 못한 미완성품이였다. 죽어간 내 사랑과 그 사랑을 빼앗아간 자연의 횡포에 대한 분노와 그 횡포앞에 너무 무능하게 당할수밖에 없으면서도 자연이 그런 보복을 할수밖에 없도록 자연을 너무 학대해온 인간문명의 리기에 대한 내 분노를 유화 안료로는 다 담아낼수 없었던것이다. 내 슬픔과 내 안타까움과 내 분노와 내 절규와 내 절망을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유화 안료만으로는 다 담아낼수 없었던것이다. 검은 색의 호소와 절규만으로는 모자라는 그림이였다.
나는 티브이를 끄고 급히 슬리퍼를 발에 꿰였다. 달리듯 층계를 내려가 반지하실문을 열었다.
조금후 나의 손에는 화필 대신 끝이 뾰족한 과도가 들려져 있었다. 불빛에 그 과도는 차가운 금속성의 반사광을 내게 선물하고있었다. 그 칼날에 대고 씨익 하고 썩은 랭소를 날려주며 나는 그림에 덮었던 흰 보자기를 활 벗겨내렸다.
사랑해
검은 날개에 꽃이 피여있었다. 진붉은 피의 꽃이 피여있었다. 검은 색으로만 넘치던 캔버스에 붉은 꽃이 피여 피비린내나는 향기를 흘리고있었다. 그 피의 향기를 마신 검은 날개가 피의 생기를 찾고 푸드득 푸드득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고있었다. 그 날개의 재생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금까지 내 가슴 한쪽에 검은 바위처럼 단단히 박혀있던 고통의 응어리가 조금씩 조금씩 풀려 드디여 빗장을 열고 밖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소리도 함께 들을수 있었다.
가늘게 흐르기 시작하던 그 소리가 점점 커지며 흐르는 속도도 빨라져 내 호흡이 가빠지고 두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할 때 나는 나 스스로를 주체할수 없는 어떤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갈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쓰러져야만 했다. 가슴벽을 쾅쾅 두드리며 마음의 빗장을 열고 밖으로 밖으로 내쏟아지는 그 물결의 힘에 떠밀려 가슴을 부여안고 쓰러져야만 했다. 심장조차 그 물결에 떠밀려 그대로 다 몸밖으로 튀여나온것 같은, 정말로 죽을것 같은 아픔을 못이겨 쓰러진채 한참을 헐떡여야만 했다.
그리고 한참뒤, 오른손에 다시 붓을 들어 《검은 날개》라고 적으려 했던 그림의 제목을 주저없이 《재생》이라고 바꿔 그림에 적어넣으며 나는 참으로 내 가슴이 확 뚫려 그 뚫린 구멍으로 시원한 바람이 막 가슴 터지게 들어오는것을 느끼며 전률해야만 했다.
나는 핸드폰을 손에 꺼내들었다. 길게 숨을 고르고 1번을 길게 눌러 “미야”를 호출했다.
-웬 일이야, 선배? 무슨 일 있어?
수진이 그녀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묻어있었다.
-아니…
나는 떨리는 내 목소리를 간신히 눌러야만 했다.
가슴 벅차게 차오르는 이 감격… 그리고 내 가슴에 넘치는 이 사랑의 물결…
나는 전화기에 대고 갈린 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수진아, 사랑해.
수화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수진이 그녀의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 가슴속의 환희의 흐느낌소리로 그녀의 환희의 흐느낌소리도 함께 충분히 들을수 있었다.
-사랑해, 수진아. 지금 당장 네가 필요해. 지금부터 이 세상 끝까지 네가 필요해. 당장 달려와줘. 우리 딸 향아도 엄마를 기다리고있어.
향아는, 안해가 떠난지 4년되던 해, 그 4주제 기념으로 펼친 내 3차 개인전의 수익금을 기부금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찾아갔던 어느 작은 고아원에서 만난 천사였다. 사천대지진참사때 부모를 잃고 요행 살아난 그 영악하게 질긴 목숨은 이곳 고아원에까지 흘러와 애들과 즐겁게 뛰놀고있었지만 그 눈에는 슬픔이 골똑 배여있었다. 그 작은 눈에 넘치는 슬픔의 자락을 내가 걷어내주어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나는 그 꼬마천사를 내 가슴에 꼭 보듬어안을수밖에 없었다. 함께 간 수진이도 내 마음을 읽었는지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동조를 약속해줬다. 그때 그 꼬마천사가 지금 웃층 내 침대에서 쌔근쌔근 자고있다. 엄마를 기다리는 꿈을 꾸며.
아니, 아이는 지금 꿈속에 푸른 하늘을 즐거이 날아예는 세개의 날개를 보고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 그림은 그 꿈을 그려줄 차례였다.

09년 12월 22일 동짓날 청도 문우재서.

 (<도라지> 2009년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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