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아야 방아야 한숨방아 눈물방아 쿵쿵찧니 돌쌀되박 하루해를 어찌사노 하아까막 아득하다 내 팔자야 내 팔자야...
우리민족의 구전민요의 한 구절이다.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 시절 아녀자들에게 제일 고된 일이 방아찧기와 베짜기라 했다. 집단부락이나 조건이 하락된 마을에서는 돌로 만든 연자방아를 놓거나 물의 흐름을 리용한 물레방아를 놓았다지만 연변의 경우 이주의 첫 정착지가 깊은 산골이 대부분이라 산재부락위주였다. 그러니 대부분은 발방아거나 절구에 의거하여 조나, 보리를 빻았다.
올 여름방학에 집에 왔던 아들놈이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 집에 인사차로 갔다가 거기에서 정미기를 보고서 쌀이 되는 과정을 처음 목격하고 와서 전기가 없던 이전에는 무슨 물건으로 쌀을 빻았나 물어 보았다 그래서 아래 와 같은 대답을 했다.
연자방아의 경우 연변의 농촌에 60년대까지 남아 있어 시골출신 중년세대들에게 서먹한 공구가 아니다. 연자방아는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밀, 보리를 빻을 때 마소의 힘을 이용한 방아인데 대부분 눈을 싸맨 당나귀가 끌게 돼 있었다. 라도향의 소설이 제목으로도 된 물레방아는 방아채 한쪽을 파내어 물받이를 만들고, 반대쪽에는 공이를 달아 가운데를 받친 원시적인 물방아이다. 물받이에 물이 차면 그 무게 때문에 아래로 내려가 반대쪽의 공이가 들리고 물받이가 기울어져 물이 쏟아지면 공이가 아래로 떨어져서 확 속의 곡식을 찧는다. 역시 60년대까지 남아 있어 기억하는 시골사람들이 많다.
현대의 기계만 보면서 자라온 아들놈은 나의 해석을 듣고도 얼빤한 눈치를 보였다. 아들에게는 나의 그 해석이 타임머신을 타고 아득힌 먼 원시적인 생산현장으로 돌아간 삭막한 해석으로 들렸을것이다.
방아에서 가장 보편화가 되고 사용빈도가 많았던 방아는 발 방아다. 디딜방아라고도 통칭되는 발 방아는 필자의 집에 90년대 초까지 남았고 그 방아를 주제로 나의 첫 소설이 탄생한지라 방아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스크린화면처럼 생생하다. 이 방아로 해서 우리 부산함도 많았는데 그 장본인은 아버지였다. 농망기에 시골아낙네들은 보통 점심기간대면 찾아 와서 방아를 찧는데 워낙 그 방아소리가 생경스러운 쿵덕쿵이라 낮잠을 쉬는 아버지를 방해하군 했다. 성미가 괴팍한 아버지는 아낙네들이 돌아간 후 달려 나가서 당장에서 방아채를 뽑아 던진다. 이거 부산해서 못살겠다. 하지만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방아채가 제자리로 돌아갔고 다시 쿵덕거리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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