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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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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나들이] 1.그리는 고향
2013년 05월 16일 08시 40분  조회:1906  추천:0  작성자: 김재진
 한국 나들이            
                               
                    김 재진
 
1.  그리는 고향 
 
 
사람들은 고향을 어머니라 부른다.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고장이기에…
“죽기전에 고향 땅이라도 한번 밟아 보았으면 원이 없겠다…”
이는 할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인데 아버지께서도 꼭 같은 말씀을 여러번 하셨다. 허지만 그이들은 그토록 가고프던 고향에 가보지 못하신채 저세상으로 떠났다. 저세상엔 국경이란 없을테니 고향에 가셨을테지! 이세상에도 국경이란 것이 없었으면, 아니, “3.8선”만이라도 없었으면 고향 그리는 그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눈물 흐르게 하지 않았으련만…
왜서인지 타향에서 세상뜨면 “객사”라고 로인들은 매우 꺼리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로인들이 객사 할 수밖에 없었던지 모른다. 객사를 면코자 저저마다 모지름을 다 썼건만 저주로운 삼팔선 때문에, 반세기 남아 한 민족의 허리를 끊어지라 칭칭 휘감고 숨통을 조이는 “군사 분계선” 때문에 타향에서 떠도는 유혼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림시”라고 지껄이면서 한반도 지도 위에 꾸불 꾸불 줄을 그어 놓던 그 잡놈들을 저승에 서라도 잡아 처단하고 우리 민족의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풀어야 할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1932년, 18세에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갔었다. 키가 한메터 륙십도 안 되는 아버지는 남 달리 왜소한 체구셨지만 또한 남 달리 강의하고 부지런 하셨다. 뿐만 아니라 고등소학 정도의 “하늘ㅡ천, 땅ㅡ지, 가물ㅡ현, 누를ㅡ황…” 따위의 서당글도 읽으셨는지라 그이는 세상 만사 모르는 것을 빼고는 죄다 아는 듯 한 총명한 사나이셨다. 아버지는 벨프 회사에서 배달 일을 맡아 하셨다. 아는 사람 한명 없이 외롭게 사는 타향 살이, 그리워도 갈 수 없는 고향, “하루 빨리 돈 벌어갖고 고향에 가 부모님 잘 모시며 남 부럽지 않게 살리라…”아버지는 밤마다 바다 건너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나의 아버지께서 고역과 고독에 쪼들리는 바로 그 때 한 친구가 생겼고 힘이 돼 주었다. 동료인 나까무라는 아버지보담 한살 위였고 고아였다. 그와 함께 허무한 시간을 보내며 처음으로 술도 마셨고 여자의 손도 잡아보았다. “여자하구 술, 사람 잡아 먹어, 아는고?” 왜소하고 똑똑하고 불쌍한 나의 아버지를 아껴주는 딸 가진 사장님의 타이름이였다. 사장님의 딸을 탐내던 나까무라는 군에 뽑혀 먼 남쪽땅 어느 한 곳으로 “성전”하러 가게 되였다. 그들은 헤여지면서 의형제를 맺고 함께 문신점에 가서 동전잎만큼한 일장기 같은 검은 도장을 하나씩 오른 손목등에 찍었다. 쏘련 홍군이 보기만 하면 잡아 간다는 누구인가의 롱담에 순진한 아버지는 그것을 참말로 믿고 광복나던 날 아침 집 뒷 마당에서 화로불을 피워놓고 윤두를 달궈 지져버렸다. 얼마나 뜨거웠으리오만은 그는 검은 점 하나 때문에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그에게는 가정이란 보짐이 있었고 또한 언젠가는 그 보짐을 이고지고 고향에로 돌아가야 할 의무와 포부가 있었던 것이다. 손목의 검은 점을 “자백”하여 중국“문화혁명”의 한페지였던 “계급대오 청리”라는 정치 방망이에 모질게 얻어 맞았고 자식들까지 련루 받았었다. 이 모든건 타향살이가 가져다 준 불행이 아니겠는가? 타국으로 가지도 오지도 않고 고향에서만 살 수 있었더라면 무슨 일로 이처럼 억울한 정치적 재앙을 당하겠느냐 그말이다.
1940년, 할아버지의 독촉으로 가문의 장남인 아버진 일본으로부터 고향에 돌아 와 어머니를 맞으셨다.
이듬해인 41년 초봄, 아버지는 다시 보짐을 싸들고 북간도라는 곳 백두산 기슭으로 오셨다. 북간도(北间道)라고 누가 언제 어떻게 지은 이름인지는 모르나 이곳은 절라도와는 달리 땅이 넓고 비옥 한데다가 인가가 적어 땅 뚜져 먹고 살기는 꽤 좋은 고장이였다. 쓰렁바우(화룡 구세동)엔 고향 강진 칠량 동백에서 부모와 함께 전해에 건너와 정착한 경환이라 부르는 친척집이 있었다. 아버지는 일년간 그집에 머물면서 뙉밭도 일구고 단칸짜리 초막집도 하나 지어놓았다.
이듬해인 42년 초봄, 아버지께선 고향에 돌아가 식구들을 데려 왔다. 출가한 큰 고모님을 제외하고 하내, 할매, 작은 고모, 삼촌, 어머님과 그 등에 업힌 큰 누님, 아버지까지 일곱 식구, 업고 끌고 부축 하면서 강진에서 경성까지 걷고 경성에서 두만강변 남양까지 기차를 탄 후 다시 걸어서 쓰렁바우에 닿았다. “봄 추위엔 여우도 눈물 짠다”고 한다. 그때의 초봄은 지랄나게도 추웠다고 한다.  
이듬해인 43년 초봄, 경환삼촌의 부친님께서 황무지를 일구면서 기아에 못 이겨 풀뿌리 하나를 주어드셨다가 중독되여 그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세상 뜨셨다. 밥이나 배불리 먹으며 살아보려고 정든 고향을 등지고 낯선 타향에 온지 3년도 안 되여 급급히 저 세상으로 가셨다.
이듬해인 44년 초봄, 하내는 열여덟살 작은 고모님을 고향으로 데리고 가 시집 보내시고 돌아 오셨다. 세상 부모들이란 본디 사랑하는 자식들을 가까이에 두고싶어 하는 법이다. 헌데 할아버지는 왜 막내 딸을 그 머나먼 곳, 고향으로 시집 보냈을까? 나는 리해가 가지않았고 하나밖에 없던 나의 삼촌마저 병환으로 세상 뜨셔 우리 가까이에 친척 한분도 없다는 것이 하냥 한스럽기만 하였었다.
“고모님, 하내는 왜 고모님을 이 멀디먼 곳에 다시 돌려 보내신겁니까?"
“세상 뜨시믄 고향땅에 묻히실라고.”
고향 갔을 때 나는 고모님을 만나 그 의문을 안 풀 수가 없었다. 도리켜 보면 할아버지나 아버지 어머님께선 고향땅을 영영 떠나는 것이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 해 본적이 없다. 헌데“8.15”와 함께 두만강이 막히고“6.25”를 이어3.8선이 생기고 귀향길이 꽉 막혀버릴줄이야 그들이 어찌 알 수 있었으며 그막힘 또한 림시가 아니고 이처럼 장구 할줄이야 뉘라서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민족의 렬등성이라고 할까, 추악성이라고 할까? 왜서 한 민족인 우리가 갈라져 살아야만 하느냐 그말이다.  
60년대 초, 중국이 극히 곤난하던 시기 조선과 린접한 이곳에는 외류 바람이 모질게 불었다. 연변 화극단 배우로 있다가 중어 고중에 들어갔던 나의 둘째 누님도 조선으로 갔었다. 중어에 능숙하지 못하고선 중국땅에서 큰 노릇 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라 느낀 그는 김일성대학 예술학부에 지망을 두고 건너갔던 것이다. 일은 뜻대로 되여지질 않고 고작해서 붙었다는 것이 함흥 예술학교라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헌데 아버지는 견결히 그딸을 다시 조선으로 보냈다. 어느 때이건 길이 트이면 둘째 딸 거점을 발판 삼아 제일 먼저 고향으로 달려 갈거라는 아버지시였다.
둘째 누님은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가정을 이루고 잘 살았었고 “주체사상” 강사라고 했던지 선동원이라고 했던지 잘 쓰이였는데 인민군에 군관이였던 시동생이 죄를 지어 사라지고 온 가족은 두만강변 광산으로, 수도 평양에서 변강 산골마을로 “정배” 오게 된 것이다. 두만강역으로 쫓겨 온 것이 잘 된 일이였다. 둘째 누님께서 건너오지 않으면 우리가 가고, 거이 한해에 한번씩은 만날 수 있게 되였으니 말이다.
십여년 전, 우리회사 20여명은 두만강가로 여름들놀이를 갔었다. 돈을 들여 둘째 누님을 강가에 불러오고 날이 어두워진 후 재선이와 한국에서 온 외사촌 동생 갑배가 허리를 치는 강물을 건너가 인민군 총칼 앞에서 둘째 누님을 만나고 몸에 지녔던 돈을 털어 주었다. 물론 지키고 섰는 인민군에게도 돈을 준 것이다.    
둘째 누님이 건너간지도 45년, 이산 가족이 하나 더 늘어났을 뿐 아버지께서 념원 하시던 고향으로 통하는 그 길은 오늘도 트이지 않아 민족의 눈물을 자아내고 수많은 고혼이 눈도 감지 못한채 이국 타향에 버려졌다.
통일의 그날은 결코 오고야 말것이다. 윗 세대에서 놓쳐버린 그 념원을 우리 세대에서 기어이 이룩하여 다음 세대에 한을 남기지 말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1983년, 아버지께서 중풍에 걸리셨다. 그해부터 고향에 계시는 친척들과 서신 래왕을 가지게 되였다. 놀라웁고 반가웁고 감사한 것은 친척들 모두가 고향을 버리지 않고 그곳 그땅에서 그대로 살고 계신 것이다. 20세기 80년대 초, 두 나라가 건교하기 10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은 “분계선”을 에돌아 고향으로 달려 갔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참고 참다가 인젠 더는 기다릴 수도 참을 수도 없다는 그러한 발광적인 기세로 나아갔다. 불쌍하신 나의 아버지는 그렇게도 귀향길을 바랬었건만 옆문이 방금 트이는 때 중풍이라는 병마한테 반신을 꽉 잡혀 어쩌는 수가 없게 되였다.
85년 봄, 아버지께선 나더러 할아버지 할머니의 유골을 파내여 태운후 두만강에 띄워 고향에 보내드리라고 하였다. “강 풀릴꺼 오래 기다렸어야, 내 앓는거 다 느그 하내 고향에 못 보내드린 죄다. 잘 듣거라 잉, 나 죽으믄 지사고 뭐고 싹 다 소용 없응께 집어치우고 날려 부려, 그길로 고향 갈란다.” 살아서 한번 다시 못 가 본 곳, 이몸 죽어서 넋이라도 날아가리라는 그곳ㅡ 고향이였다!
고난에 쫓겨 쪽박 차고 눈물 뿌리며 떠나야만 했던 고향땅, 꼭 언제인가는 금이 환향(锦衣还乡) 하리라 다지고 또 다지며 꿈 속에서도 그려보며 불러보던 곳ㅡ 절라도 동백마을이다! “락엽은 귀근(落叶归根)”이라 하였던가? 마감하는 인생도 뿌리에 떨어지고 쏠리고… 물론 바람 타고 멀리 가 떠돌다가 하는 수 없이 떨리는 몸 쪼그리며 마감하는 가련한 잎사귀도 있겠지만은…
나는 아버지께서 분부 하신대로 할아버지 할머니의 골회를 두만강에 띄워 보냈고 아버지의 골회도 삼년제를 지낸 후 그길로 두만강변에 모시고 가 송별제를 지내고 띄워 보냈다. 오매불망 그리던 고향으로 가시라고.
내가 나서 자란 서성오대엔 스무 일 여덟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종(锺)씨 성을 가진 중국집 한집과 장씨 성을 가진 북간도집 한집 외에는 공 남식, 허 귀태, 리 동식, 문 사빈, 문 희봉, 박 종수, 박 상환, 조 영섭, 조 영경, 서 수일, 위령감 등 몽땅 다 절라남도가 나서 자란 정든 고향이라는 그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남도마을”이라 불렀고 그곳 사람들을 “남도치”라고 불렀다. 나는 소시적 그런 호칭이 달갑지가 않았다. 그무슨 “절라도 깍쟁이”, “절라도 개똥새”라는 말 같지않은 수식어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물론 “개똥새”라는 그단어는 지금도 그 참 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말이다. 우리마을 “남도치”들은 성격이 호방하고 마음씨가 고왔다. 비록 빈궁한 환경속에서 엮어가는 고달픈 인생살이들이였지만은 서로돕고 부추기면서 화목하고 즐겁게 살았다. 어머니는 떡 한 쪼각이라도 있으면 이웃들과 나누어 먹었고 아버진 아침마다 술 두냥씩 사다놓고 이친구 저친구 불러다가는 아침 반지술을 함께 마시곤 하셨다. 쌀이 하도 귀한 세월이라 마을 나그네들은 술만 둬모금 얻어 마시고 밥은 집에 가 먹는 것이 습관이였다. 쌀보다 더 귀한 것이 언제나 돈이였지만 아버지는 부지런 하신데다가 머리도 좋고 손 재주 또한 출중하여 남보다 돈을 잘 벌었다.  
나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짐 없이 아침 술 심부름을 다녔다.
“얼릉 거시기 불러 와!”술주전자를 놓기 바쁘게 두번째 임무가 떨어진다.
“거시기 누굽니까?” 내가 돌아져 나가며 묻는데ㅡ
“거시기 몰라? 머시기, 남식이 말이여!” 먼 등뒤에서 피끗 들린다.
한번은 남식이 대신 동식이를 불러왔다. 공 남식이란분은 우리집 남쪽에서 살고 리 동식이란분은 우리집 동쪽에서 살았기에 틀리는 수가 없는 것이였다. 급한 나머지 아버지께서 꼭 명단을 잘 못 부른 것일텐데 권력이 진리라고 내가 벌로 듣고 잘 못 모셔 온 것으로 억울한 판결을 받았던 것이다.
공 남식이 그분을 불러 아침술 드시는 차수가 제일 많았다. 절라도에서 살 때 남들보담 가까운 동네였고 북간도에 와서도 앞뒤집으로 살고있으니 그럴 것이다.
공 남식어르신님은 오른손의 식지가 반밖에 없어 벼모를 꼽지 못한다. 하기에 모철이면 그는 벼모 나르는 지게군질만 한다. 옛날 왜놈들의 강제병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도끼로 자기 식지를 찍어버리고는 소깔 작두에 다쳤다고 거짓말을 하였던 것이다. 전쟁판에 끌려가면 목숨 잃기가 일수인데 목숨을 잃고나면 누가 처자들을 먹여살리고 누가 그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아침 술주전자가 굽 날 때마다 “뚱보상점”령감이 어린것에게 술을 적게 떠 준 것이라고 둬마디씩 푸념질을 하시군했다. 이것 또한 잘못된 시비이다. 사실 일 여덟살 된 놈이 술심부름 도중에 한모금 반모금씩 탐오하고 있었음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두분이 마주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마시는 술이 웬 맛일고? 호기심에 끌리여 처음엔 혀끝으로 살짝 맛 보던 것이 다음엔 목구멍으로 꼴깍 맛 보고… 매웁던 맛이 달콤한 맛으로 변하고 기분이 동동뜨고… 여기까지에서 술 맛보기를 멈췄기에 나로서는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께서 흑룡강성 한 조선족마을에 “족닥기”(부친님께서 일본 공장에서 보신 실로 벨트 짜는 기계를 모색하여 발명한 벼짚으로 가마니 짜는 기계인데 많은 사람들이 보고 만들려 하였지만 성공하는 사람이 없었다. 80년대에 와서 누군가가  그 족닥기 기술로 국가 특허를 탔고 연길에서 소농구 공장이란 이름으로 공장화 생산까지 하다가 망하고 말았다.) 만들어주러 겨울내내 나가 계시다보니 나의 술심부름이 끝났고 아버지께서 돌아오신 후 그임무는 동생한테로 넘어갔다.
농한(农闲)기 철이면 어른들은 마을 우사(牛舍) 온돌방에 토초연기를 꽉 채우며 고향 추억으로 시간을 보낸다. 대관절 뭔 이야기가 그리도 재미지는지 어른들은 지붕이라도 날려 보낼듯 앙천대소 하다가도 또 무슨 이야기가 그처럼 그들의 가슴을 쓰리게 긁어 내리는건지 온돌장이 꺼져라 한숨을 짓기도 한다. 소시적 남의 집 감을 훔쳐 먹다가 잡혀 혼줄 나던 일로부터 시작하여 화투판에서 치마 밑 쫙 트인 고쟁이 안의 속살에 눈길 팔다가 아낙네들한테 돈 다 떼우던 이야기, 저마다 자기가 겪은 일과 자기네 마을에서 생겼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시간이 가고 해가 지는줄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기문이라는 키 큰 로인은 림꺽정, 홍길동전, 삼국지, 옥루몽등 조선 고전 소설뿐만 아니라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등 중국의 옛글도 줄줄 읽어 내려가는듯 이야기를 잘 하였다.
“아부재ㅡ, 엄마 저녁 잡수라우 빨리ㅡ” 저녁식사 통지가 와서야 “넬 봅세.”하고 인사 하며 하나 둘씩 아쉬운듯 자리에서 일어난다.“잡것들 어떡코럼 살고 있는지 한번 잔 가 봤으면 속 시원하겄다…” 이것이 매일 같고 이야기마다 같은 공동한 결말이고 가슴속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애절한 념원이였다! 그 념원 끝끝내 실현 못한채 그들은 떨어지잖는 걸음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남도마을” 몇십명 “남도치”일세는 모두 이미 북망산에 가신 고인이 되였고 고향에 다녀온 사람은 단 둘, 조 영경로인과 우리 어머니 오 식임씨 뿐이시다.
나는 1984년도 백두산 아래 두만강가에 자리한 숭선 “화룡 간부 료양소”에 가서 휴양한적이 있다. 8월의 어느날 난데없는 경찰들이 나타나 나와 한 침실에 들어 휴양하고 있는 김씨 친구를 체포 해 갔다. 김씨는 나보다 두 세살 위인데 투도공사 무장부에서 일 할 때 한 친구한테 보총 탄알 몇발을 주었다한다. 그때엔 탄알을 주고 받고 그것으로 노루나 멧돼지를 잡아다가 나누어 먹는 일이 많았었다. 헌데 그 친구라는 애들 넷이 무장부의 보총 한자루를 훔쳐가지고 대련으로 가다가 렬차에서 몽땅 잡혔다. 스물 서너살씩 먹은 애들이 대련에가 려객선을 랍취해갖고 한국으로 간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이였다. 이것은 진짜로 나라를 배반하고 타국으로 도주하는 엄중한 정치범죄 행위인 것이다. 무엇때문에, 무엇하러 한국으로 가려고 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지만 한국이란 그애들 마음속의 조국이였다는 것만은 의심 할바가 없는 일이다. 그렇잖으면 애들은 왜 일본이나 로씨아로는 가려하지 않았겠는가? 그애들은 청춘의 꿈도 피워보지 못한채 형장에 쓰러져버렸다. 이렇게 되여 아무것도 모르고 탄알을 준 김씨도 련루 받아 잡혀가게 되였던 것이다…
1990년 봄, 나의 큰 누님께선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에 다녀 오셨다. 그후로 93년 봄, 서울서 사는 나의 외사촌 형님 윤 윤현씨(큰 고모님의 큰 아들)네 부부가 이곳을 다녀 갔고 95년 여름 광주 광역시에 계시는 나의 팔촌 형님 김 재옥씨부부가 관광단을 따라 백두산에 오셨다가 들리였다. 97년 초가을 강진에 계시는 나의 작은 외숙부님 오 병준씨는 큰 아들 며느리와 함께 오셔서 놀다 가셨다. 윤현형은 나보다 일곱살 위였는데 그의 외삼촌인 나의 아버지를 꼭 떼여 닮아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 할 지경이였다. 얼굴로부터 자그마한 체구, 눈길, 말투, 행동거지뿐만 아니라 밥 드시는 모습까지도 꼭 같았다. 그들 부부는 나와 함께 북경에 가셔 세계에서 제일 큰 왕궁ㅡ 고궁도 돌아보고 세계에서 제일 긴 돌담ㅡ 만리장성의 팔달령에도 올랐다.
광주 재옥형님께선 귀국하신 후 인츰 “뿌리(根)”라 제목한 책 한권을 펴 내셨는데 한페지엔 이렇게 쓴 것이 있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 청주군 31세 손 김 재진 남매 7명이 살고있다. 그들 부친 김 세환숙은 일제말 1942년 봄 장녀 김 서례등 가족 6명이나 거느리고 정 들었던 고향을 뒤로하고 강진을 떠나 북간도땅 지금의 연변으로 오게 되였던 것이다. 그들은 낯 설고 물도 선 수천만리 이국땅에서 일제의 갖은 핍박아래 모진 고생을 겪어야만 했고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고향은 더욱 그리워졌고 귀향의 꿈은 한창 부풀었으나 고향으로 가는 길은 꽉 막혀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이산의 슬픔과 한을 간직한채 하는 수 없이 이곳에 남아 정착하게 되였고 중국땅에서 소수 민족인 조선족으로 남아 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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