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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시론을 위하여
2015년 04월 19일 22시 56분  조회:3746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인 이승하 (신인상·미래작가상 심사위원)

  

 

1960년 4월 18일 경북 김천에서 출생.

1984년〈중앙일보〉신춘문예에「화가 뭉크와 함께」가 당선되어 등단.

1989년〈경향신문〉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작품소개

  

1987년 시집《사랑의 탐구》

1989년 시집《우리들의 유토피아》

1991년 시집《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1993년 시집《폭력과 광기의 나날》

1994년 시집《박수를 찾아서》

1995년 시집《생명에서 물건으로》

1997년 시론집《한국의 현대시와 풍자의 미학》

1997년 소설집《길 위에서의 죽음》

1998년 산문집《그렇게 그들은 만났다》

1998년 선집《젊은 별에게》

1999년 시론집《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

2000년 시론집《한국 현대시 비판》

2001년 시집《뼈아픈 별을 찾아서》

2001년 시론집《한국 시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2002년 시론집《백년 후에 읽고 싶은 백 편의 시》

2002년 에세이《헌 책방에 얽힌 추억》

2003년 산문집《빠져들다》

2004년 시론집《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10대 명제》

2004년 시론집《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교실》

2005년 시집《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2006년 문학평론집《한국 시문학의 빈터를 찾아서》

2007년 문장작법《청소년을 위한 시쓰기 교실》

2007년 시집《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

2007년 산문집《피어있는 꽃》

2008년 문학평론집《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2009년 시선집《공포와 전율의 나날》

2010년 시집《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2010년 시론집《한국문학의 역사의식》

2013년 재외동포문학연구서《집 떠난 이들의 노래》

2014년 시론집《함동선의 시세계》

2014년 시집《불의 설법》

2014년 문학평론집《한국 시문학의 빈터를 찾아서2》

 

  

수상

  

1991년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

2002년 제2회 지훈문학상

2008년 제13회 시와시학상 작품상



우리 시대의 창조적 시론을 위하여

 

 

김준오 선생의 시론을 등불삼아서

 

 

이승하

 

 

 

  하늘에 계신 김준오 선생님께

 

 

  선생님이 돌아가신 해가 1999년, 어언 16년이 다 되어갑니다. 서울대 국문학과를 나온 선생님께서는 나이 마흔인 1977년부터 부산대 국문학과에 재직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과 인연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991년에 삼지원에서 낸『시론』개정판을 봤더니 제 등단작을 ‘눌언(말더듬)의 시’라고 명명한 뒤, “언어의 위기의식의 산물로 우리는 또한 눌언의 시와 수다의 시를 보게 된다.”, “눌언과 수다는 둘 다 정상적 언어행위가 아니다. 이런 비정상적 언어행위를 통하여 시인들은 비정상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세계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의식을 표명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저는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선생님께서 제 시에 대해 언급을 해주신 것이 고마워 저서『한국 현대 장르 비평론』『도시시와 해체시』『현대시의 환유성과 메타성』, 편저『한국 현대시와 패러디』, 유고문집『문학사와 장르』『현대시의 방법론과 모더니티』 등을 보며 큰 가르침을 얻었고, 제 딴에는 스승의 한 분으로 생각하며 사숙해 왔습니다. 선생님께서 좀 더 오래 사셨다면 저는 시집 해설을 써주십사 하고 간청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선생님께서는 정년도 채우지 못한 연세에 돌아가셨고, 저는 김현을 잇는 탁월한 시 연구자가 돌아가셨다고 애통해했습니다. 선생님의 드높은 연구정신을 기려 후학들이 ‘김준오시학상’을 제정해 운영해 오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학교에 있다 보니 간간이 논문도 쓰고 비평적 글쓰기도 하게 되지만 누가 뭐래도 저는 제 자신을 시인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등단 30년이 되는 해에 11번째 시집을 냈으므로 시집을 너무 많이 낸 셈이라, 작품이 모인다고 시집부터 낼 일 아니라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등단 30년이 지난 지금, 회의가 일곤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는 산문화와 장형화와 소통 불능이 지나친 느낌이 있고, 문예지의 폭발적인 증가로 시인이 양산되고 있고, 시단에 뚜렷한 논의나 담론은 없고, 독자는 유수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을 외면하고 하상욱의『서울 시』 같은 시집에 열광하고 있고……. 이런 말을 저도 자주 하지만 자주 듣기도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동일성 시학에 대한, 도시시와 해체시에 대한, 장르론의 시대적 양상에 대한, 자기 풍자와 외적 풍자에 대한, 구조주의 비평과 현상학적 비평에 대한, 문학사와 패러디 시학에 대한 논의를 다시금 꺼내보면서 안타까움으로 땅을 치는 심정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선생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오늘날 시단의 문제점들에 대해 좋은 방안을 내놓으면서 생산적인 담론을 유도했을 테지요.

 

  저는 요즈음 시단의 제 현상에 대한 비난을 유보하고, 제가 쓰고 있는 시를 몇 편 떠올려보면서 제 생각을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1980년대의 해체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해체시는 우리 현대시의 전망이고 가능성이다. 사실 형태와 장르와 세계관을 해체한 해체시는 그 다원주의적 열린 태도와 조립에 의한 의미 창조, 우리 삶을 바라보는 인식 유형, 그리고 그 신선한 감수성으로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소외문화와 정치적 억압구조에 대한 몸부림으로서 해체시는 필연성을 지닌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경박한 태도, 거칠고 야비한 어조, 그리고 그 지나친 허무주의와 극단적 상대주의는 극복되어야 할 과제다.

 

 

  평단에서는 저를 해체시를 쓴 시인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저는 『우리들의 유토피아』(1989)나 『폭력과 광기의 나날』(1993) 같은 시집에다 ‘형태와 장르와 세계관을 해체한’ 시를 싣기도 했었습니다. 박남철 시인이 최근에 작고했다는 소식을 접하곤 해체시의 명맥이 끊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지더군요. 저는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자주는 아니지만) ‘도시시와 해체시’를 쓰고 있는 구시대의 시인입니다. 졸시를 한 편 보여드립니다.

 

 

 

 

 

 

 

 

 

 

 

 

 

 

 

 

 

 

 

 

 

 

 

 

 

해 뜨는 들판에다 다시

기(基)를 세운다 절망의 성기를

기는 열을 내고 빛을 내고

 

 

고마워해야 하리

우리는 모두 하늘 향해 발기한 기 덕분에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다

 

 

보온밥통의 밥을 먹고 냉장고의 물을 마신다

그럼 영혼은 피 줄줄 흘리다가도 멎고

육체를 녹이는 산성비도 피할 수 있다

 

 

욕망하는 현대인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하늘을 향해 튼튼하게 발기하는 기여

너의 치부 깊숙이 나의 치부를 박아 넣으리라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죽은 아이들아

얼마나 많은 사산아를 수습해야

저 기가 가동을 멈출까

 

 

후폭풍이 너와 나의 살 껍질을 벗기는

이 들판에 누가 또다시 기를 세운다

아주 많은 죽음 이후

 

-「다시, 기를 세우며」 전문

 

 

  시의 제 1연인 사진은 폴란드 화가 백친스키의 그림 「폼페이 화산 유적에서 발견된 두 남녀」입니다. 폼페이 화산이 폭발하면서 엄청난 화산재가 인근 마을을 덮쳤는데, 때마침 한 몸을 이룬 남녀가 그 모습 그대로 화석이 되어 후대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화가가 그 화석을 직접 보고 이 그림을 그렸는지 소문을 듣고 이 그림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가 이 그림을 봤을 때는 마침 일본 동북부 지방 해저에서 발생한 쓰나미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를 뒤흔든 2011년 3월이었습니다. 원전 사고가 나면 인간이 이런 모습으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시로 써보았던 것입니다. ‘基’는 그러니까 발전시설을 다룰 때 쓰는 단위입니다. 원전 1호기, 2호기 하지 않습니까.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났을 때도 그랬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마을을 덮친 화산재 이상으로 큰 재앙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기 생산의 대부분을 원자력발전소에 의지하고 있는데, 쓰나미 같은 천재지변이 아니더라도 원자력발전소가 안전시설을 완벽히 갖췄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크고 작은 사고가 전국 21개 원전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640회 이상 일어났다는 통계치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원전에서 대형사고가 일어난다면? 이런 상상으로 쓰게 된 「다시, 기를 세우며」가 해체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저는 이 시를 쓰고선 ‘도시시와 해체시’에 값하는 시를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도시시를 산업사회에서의 삶의 양식과 의식을 반영하고, 그 문제적 양상을 제기한 시라고 하셨지요? 해체시에 대해서는 종래의 시에서 소재에 지나지 않는 현실을 전혀 예술적으로 가공하지 않은 생경한 원료 그 자체로 보여주는 반미학의 새로운 시학에 근거하고 있으며, 현실을 판단하지 않고 전시하며, 변용하지 않고 편집한다고 하셨지요? 극단적인 실험이라는 형식적인 측면보다 저는 반미학과 ‘의심하기’라는 내용적인 측면을 중시했기에 해체이론, 해체미학의 자장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사사진과 그림이 텍스트의 구성 요소가 된 저의 일련의 시들을 이데올로기적 탈중심주의 관점에서 논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중심의 해체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이며, 다원적 글쓰기 방식이라고 진단하셨지요. 장르혼합식 글쓰기가 시를 사회적․역사적․이데올로기적․미적인 다원적 문맥에 놓이게 한다는 선생님의 평가는, 중심의 해체를 시도하는 제 시의 경향을 적시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날 가미카제 특공대원에 대한 글을 읽고 몹시 힘들어 했었습니다. ‘神風特別攻擊隊’의 한 사람을 소재로 한 미당의 시「松井伍長頌歌」를 미당문학관에서 읽었을 때도 몹시 괴로웠는데 조선인 자살특공대의 수가 17명이나 된다는 기사를 읽고 잠을 못 이루며 애통해하다가 써본 시가 있습니다.

 

 

눈앞에 들어온 미국 항공모함

시계를 본다 그대 목숨 이제 1분 남았다

59초, 58초, 57초, 56초, 55초, 54초, 53초, 52초, 51초, 50초, 49초,

나 이제 죽는다 나는 사라진다

48초, 47초, 46초, 45초, 44초, 43초,

어무이―! 아부지요―! 누부야―! 형니임―!

마지막으로 한 번씩 불러본다

42초, 41초, 40초, 39초, 38초, 37초, 36초, 35초, 34초, 33초, 32초

조종대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31초, 30초, 29초, 28초, 27초, 26초, 25초, 24초, 23초, 22초, 21초

목표 지점! 항공모함의 함수를 향해

방향타를 꺾는다 급강하 시작

20초, 19초, 18초, 17초, 16초, 15초, 14초,

엄청난 풍압, 어금니를 깨문다

13초, 12초, 11초, 10초,

저 먼저 갑니더 하늘나라로 갑니더 나중에 뵙겠심더

9초, 8초,

눈을 감는다

심장이 따갑게 뛰고 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7초, 6초, 5초, 4초,

순간 눈을 뜨자 눈앞에 와락 달려드는 쇳덩어리

3초, 2초, 1초,

목련꽃 진다

 

-「어떤 목련에 대한 생각」 마지막 연

 

 

  사진이 남아 있는 탁경현이나 노용우 같은 젊은이는 20대에 전사했지만 이 시에 등장시킨 박동훈은 17세 소년이었습니다. 「松井伍長頌歌」에서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 이는 인재웅이라는 젊은이였지요. 지금부터 70년 전, 태평양을 항해하고 있는 미국 항공모함을 향해 경비행기를 몰고 돌진한 박동훈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탁경현(1920〜1945)

 

                                                                               노용우(1922〜1945)

 

 

  폭약을 잔뜩 적재한 비행기의 연료통에는 기지로 돌아올 연료가 넣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무슨 죄가 있어 ‘가서 죽어라’는 명령에 복종해야 했던 것일까요? 아, 죄가 있기는 했습니다. 식민지에서 태어났다는 죄였지요. 저는 동훈 소년의 마지막 1분을 생각해보았습니다. 항공모함을 향해 방향타를 꺾어 돌진하는 것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동훈 소년이 겪었을지도 모를 그 1분의 공포감과 절망감을 시로 써보았지만 이것이 뭐 애도가 되겠습니까, 명복을 비는 일이 되겠습니. 그저 가슴이 아프고 답답할 따름이었습니다. 죽은 소년과 청년들에 대한 애통한 마음이 이 시를 쓰게 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사진 한 장을 보고 깜짝 놀라서 순식간에 쓴 시가 있습니다. 코가 베어져 사라진 사진의 주인공은 비비 아이샤라는 이름의 아프가니스탄 여인입니다. 조혼제도와 남존여비사상의 희생자로, 남편의 학대를 못 이겨 달아났다가 붙잡혀 코와 귀를 절단하는 보복을 당했는데 다행히 서방에 이 사실이 알려져 미국 캘리포니아 주 그로스먼 재단 병원에서 인조 코 성형수술을 받아 다시 코 있는 얼굴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사진을 보고 일본 교토에 있는 ‘이총(耳塚)’이 생각났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왜군이 조선인 12만 6000여 명의 코를 전리품으로 베어와 만든 무덤이 교토에 있습니다. 이총은 사실 비총(鼻塚)입니다. 에도시대 말기의 유학자인 하야시 라잔이 코무덤이 잔인하다면서 귀무덤으로 바꿔 부르자고 해서 명칭이 바뀌었을 따름이지요. 왜군은 전과를 보고하기 위해 조선인 목을 베어 본국에 보냈지만 그 수가 늘어나자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시를 쓴 뒤에 교토의 이총을 찾아가 묵념을 드리고 왔습니다.

 

 

엎어지면 코 베어가는 세상

코 없는 얼굴이 날 빤히 쳐다본다

아침 신문에서 만난 코 달아난 얼굴

그대 후유- 안도의 한숨 내쉴 수 없으리

킁킁 냄새를 맡을 수 없으리

코가 간지럽지 않으니 재치기할 수 없으리

감기 결려도 콧물 흘릴 일 없는

코 아픈 아프가니스탄의 여인이여

 

 

 

 

 

 

 

 

 

 

 

 

 

 

 

 

 

 

 

 

 

 

 

 

 

 

 

 

 

 

 

 

 

 

 

 

교토에 가면 귀무덤이 있다

12만 6000명의 코가 그 무덤에 있다는데

그 많은 사람의 사지 육신은 조선반도에서 다 썩었는데

소금에 절여져 현해탄을 넘은 코는

400년이 지났는데 썩지 않았을까

개수에 따라 매겨진 전공

그 무덤을 파보면

코 뼈다귀가 소복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까

 

 

내 오늘 코에서 단내가 나도록 계단을 오르내렸다

코끝도 안 보이는 그를 코가 빠지도록 기다렸다

코가 납작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내 코가 석 자

코가 비뚤어지도록 홧술을 마시고

드르릉드르릉 코를 골며 잠잔다

코기토 에르고 숨(Cōgitō ergo sum)!

코 없이 살아가라는 세상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코가 없다」 전문

 

 

  사진 한 장이 저로 하여금 이 시를 쓰게 했고 일본행 비행기에 올라타게 했습니다. 아아, 12만 6,000명의 코가 베어져 이룬 무덤이 있다니! 저는 시가 우리 삶 가운데 들어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가 무기라는 김남주의 시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내면세계 추구나 자아에 대한 탐색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역사의식, 사회의식, 그리고 현실참여의식 같은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일종의 정치의식이라고 할까요. 개인의 삶은 사회의 부조리한 조건들로 말미암아 굴절되기 쉽고, 그런 이유로 개인은 사회와 맞서는 의지를 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회가 ‘건전한 사회’(에리히 프롬)가 아닐 때는 말입니다. 저는「화가 뭉크와 함께」라는 시로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도 선생님이 말씀하신 일종의 ‘정치시’를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80년대와 정치시」라는 글에서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지요.

 

 

  우리의 삶이 정치화되고 시가 정치화되는 것은 하나의 필연적인 과정이다. 허세욱이 최근 중국 정치시를 번역ㆍ해설한 「反體制의 政治抒情詩」와 김광규가 번역한 「에리히 프리트의 참여시」는 현대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정치시에 있음을 반영하고 고무한다 하겠다. (중략) 정치시에서 시인의 시각은 매우 배타적이고 고정적이다. 이것은 적어도 진실의 면에서 정치현실이라는 전체상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런 시각 밖의 진실은 또 한 번 왜곡되고 은폐되기 때문이다. 정치시는 애국시고 우국시지만 80년대 정치시는 너무 거칠다. 물론 거칢 자체는 우리의 정치시가 아직 저항과 투쟁에 근거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80년대 정치시는 그 존재 이유와 존재 가치를 너무도 명백히 지니고 있다.

 

 

  저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지 않는 정치시를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잘 알면서도 줄기차게 실패작을 쓰고 있는 이유는, 아직도 이 세상에는 불의와 부조리가, 몰상식과 몰염치가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폭력과 광기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이기 때문입니다.

 

  언제쯤 제12시집을 내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음 시집은 서정시집이 아닐 듯합니다. 저는 30년 동안 정신병원에 면회 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참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의 생을 정신병원 안에서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그들의 싸늘한 눈빛 혹은 멍한 표정이 가슴에 대못을 쾅쾅 박고는 했습니다. 또 몇 년 전부터 전국 여러 곳 교도소를 다니며 교화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떠오른 생각을 갖고 시를 썼습니다. 그들 모두는 오랜 시간 벽에 갇힌 채 감시를 받고 있지만, 그들에게도 구속할 수 없는 삶의 희망과 꿈이 있는데, 그것을 시의 소재로 삼고는 했습니다. 다정다감한 서정시가 아니라, 조금도 곡필이 없는 거친 시, 윤기 없는 시를 저는 쓰고 있습니다. 이런 시는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는, 이 모순된 세상을 향한 저의 ‘절규’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저작들을 수시로 펼쳐보면서 제 시어의 동력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제 시가 선생님의 시론에 빚진 게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발전하고 있는 것 같지만, 깊이 감춰진 모순들은 끊임없이 증식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있고 심신의 고통은 멈추지 않지요. 제 시는 바로 그런 고통에 대한 부르짖음이며 ‘생사의 고백’(코스타 가브라스)입니다. 선생님의 시론이 제게 빛인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도 선생님의 시론을 머리맡에 두고 보며 힘을 내봅니다. 제 시에 피를 돌게 하는 귀중한 시론에 늘 감사를 드리며 명복을 빕니다.

 

 

  ㅡ『시와사상』 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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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청록파시인 - 박두진 2015-04-17 0 3804
412 청록파시인 - 조지훈 2015-04-17 0 4046
411 참여시인 - 김수영 2015-04-17 0 3693
410 저항시인 - 심훈 2015-04-17 0 3712
409 심훈 시모음 2015-04-17 2 5025
408 <등산> 시모음 2015-04-17 0 5110
407 <동그라미> 시모음 2015-04-17 0 3608
406 <자연> 시모음 2015-04-17 0 3776
405 <하루살이> 시모음 2015-04-17 0 3521
404 <흙> 시모음 2015-04-17 0 3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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