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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学奎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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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로 맞다든 운명의 시련
2015년 12월 26일 15시 19분  조회:828  추천:0  작성자: 장학규
두번째로 맞다든 운명의 시련

박옥남의 단편소설 “썰물”(흑룡강신문 1993.4.17 진달래 부간)을 두고
 


흠집 많은 글

지나치게 비감적이고 체념적인 글이여서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몇가지 의문을 제기해본다. 
첫째, 우리민족의 현상태가 과연 소설에서 반영한것처럼 그렇게 처참한가 하는것이다. “썰물”을 읽으면서 필자는 본세기초의 대이민의 장면과 겹쳐지는듯한 환영이 들었었다. 비록 작자의 발뺌이 여러곳 되지만 그 어수선하고 허탈에 가까운 장면은 아무래도 1세들의 전철이라 해야겠다. 
다음은 주인공의 행위가 모순투성이이다. 동서의 편지 한장에 만삭이 된 안해로 하여금 도보로 17리 길을 걷게 하고 쇠울타리를 타고 넘게 하는 역사를 시키는 남편이 어쨌던 정상적이 못되는 축이다. 
세번째로는 제목의 내연인데 썰물이라면 해안에 사납게 덮쳐들었다가 물거품만 남겨놓고 꼬리 빳빳이 바다로 내빼는 그것이다. 어찌보면 오늘날 성행되는 류행어 “바다로 나간다(下海)”는 말과 상통된다고 할가. 그렇지만 여기서 결국엔 두가지 함의로 나타나고있는데 “하해”라는 긍정적자세에 앞서 썰물현상자체에 접근하는 피난살이식 삶이 더 핍진하게 그려진것이다. 
 
문제를 시정하는 돌파구
괴변같기도 하지만 필지는 상술한 의문에 스스로의 대답을 주고저 한다. 물론 작품에서 반영한 사실들은 보편성을 띠지 못했다. 필경 오늘날의 대추세는 도시에로의 진출이지 살길이 막혀서 부득불 나서 자란 고향땅을 도망치듯 떠나가는 현상은 국부적인것이다. 국부적이라는 전제가 붙게 되는이상 그것의 존재함을 의미하게 되는것도 무리는 아닐것이다. 존재하는 모든것은 합법칙성을 갖는다는 철학적 명제로부터 볼때 우리는 그런 현상을 외면하거나 무시할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니까 필자의 초점도 여기에 맞춰진것이다. 무엇때문에 근 한세기의 이민사-대규모적인 이민-를 가지고있는 우리가 당초보다 별로 나을데 없는 생활상태를 유지하고 있는것인가? 이번의 도시에로의 “이민”도 어쩌면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르는 격이 아닐가? 악성순환의 결과가 나타날 우려는 없을가? 이런 물음에 얼마만한 해답을 준다는 의미에서 “썰물”은 우리민족의 현재와 장래를 판단하고 구상하는데 “급시우”로 된다고 필자는 인정하고있다. 
 
우리 비극의 근원은 문화의 폐단
“썰물”은 하나의 비극이다. 그 어설픈 기분과 초라한 행색은 읽는이로 하여금 슬픔과 격분에로 끌려가게 한다. 잘 살려고 땅의 부름대로 고향이고 조상이고 할것없이 팽개치고 몰려왔던 우리민족이 오늘날 역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이미 때를 묻힌 땅을 떠나려는것이다. 그것도 당연과 묘하게도 일치를 이룬 “보따리행차”인것이다. 하다면 우리는 언제가야 종착역을 모르는 이런 떠돌이 인생을 결말짓고 드디여 충실하고 보람찬 삶을 누릴것인가? 이런 현상의 근원을 “썰물”에 맞추면서 풀어보는것도 무익한 일은 아닐것이다. 
소설이 제시하다싶이 “근용”이는 생활개선을 위해서라면 고생을 달게 받아낼줄 아는 위인이다. 그래서 어지러운 토목일도 마다하지 않고 수천리 타향길로 만삭이 된 안해를 끌고 떠나는것이다. 오직 “아이들이 어렸을때 벌어야 한다”는 리유때문에 5푼 변리도 두럽지 않았고 고향에서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그에게는 유리했던것이다. 자명한바 고향에서는 “근용”이의 리유가 실현될 가망이 없는것이다. 거꾸로 풀이한다면 “근용”이가 “아이들이 어렸을때 벌어야 한다”는 당당한 리유를 세워놓았을때 그의 가슴에는 이미 5푼 변리돈 맡아 멀리 가느냐 아니면 천시, 지리, 인화(天时地利人和)의 3대 우세를 가진 고향에서 알맞는 일감을 찾느냐 하는 천평이 놓여진것이다. 결국 그는 체면 유지에 백기를 들고만것이다. 체면유지, 이것이 바로 우리문화에서 홀시할수 없는 하나의 폐단이라고 지적하지 않을수 없는 대목이다. 
우리민족은 결코 게으른 민족이 아니다. 근년에 세게 불어치는 한국바람, 독련체바람에서도 볼수 있는바와 마찬가지로 우리민족은 곳곳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생을 견뎌내며 부지런히 일들을 하고있다. 문제는 고향이라는 이 괴물에 있다. 왜 꼭 나가야만 하는가. 해종일 빈둥빈둥 놀지언정 “남(본민족)”이 보는데서는 “구차한 노릇”을 안한다는 태도들이다. 
“초라해요. 너무너무 초라해요. 부끄럽단말이예요.”
“근용”이 딴에는 이만한 리유라면 아주 근사해보였을테이지만 아버지와 딸을 남겨두고 간 그 허름한 초가삼간을 근용이의 집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몇이나 될가.
“저것 보지. 근용이가 떠나갔으니 저건 근용이의 집이 아니야. 그러니 근용이는 초라하지 않아. 부끄럽지도 않구.”
이런 멍텅구리는 없을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체면유지라는것도 어찌보면 눈 감고 아웅하는 격이 아닐가. “안불견 심불번(眼不见心不烦)”의 자아모순에 빠져 자신을 망치고 후대를 망친것이 체면유지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직접적혜택이라고 하면 과한 빈정거림이 될지도 모르겠다. 
 
행위 충동이 주는 계시
물론 필자는 도시에로의 진출을 비난하려는 생각이 꼬물도 없다. 개혁개방의 대형세하에서 인구류동, 도시진출은 불가피면적이다. 그 폭이 크고 그 규모가 클수록 나가는 사람에게나 나가지 않는 사람에게나 모두 리로운것이다. 문제로 되는것은 우리 행위의 충동성과 맹목성에 있는것이다. 
“근용”이는 동서의 편지 한장을 달랑 받고 고향을 떠나가는것이다. 그것의 진위를 가릴 념도 않고 만삭이 된 안해와 어린 아기를 끌고 낯선 타향길에 나서는 그 행위에 우리민족의 못난 형상이 반영되여있다. 
“남들이 다 떠나가버리고나니 여기서 살 맥이 안나요.”
“근용”이의 대답에서 우리는 그 행위의 천진함과 유치함을 인츰 보아낼수 있는것이다. 그러니 앞날의 타산보다도 “남이 다 갔다.” “여기서 실기 싫다.”는데 그 출발점이 귀결되는것이다. 
 
악성순환의 고배
필자의 근심이나 우려도 그래서 생겨난것이다. 우리가 시장경제의 대추세에 수응하는 본능이 너무나도 미약하고 소극적이기때문이다. 일단 대추세와 본능 이 량자가 충돌을 일으킬때 우리가 산산쪼각난다고 판단을 내리지 않을 아무런 근거도 없다. 반면에 그런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것을 “썰물”은 형상적으로 해답해주고있는것이다. 
“근용”이의 안해는 집문을 나서기 바쁘게 “진짜 남자라면 녀편네 이런 고생 시키지 말아야 남자지.” “한국 같은데선 녀자 일 시켜먹고 사는 남자 사람값에두 못간대요.” 하면서 돈 벌기전에 호강 부릴 생각부터 다듬는다. 한국형편이 우리같았을적에 그 녀성들도 피타는 노력을 경주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무턱대고 “횡적비교”를 하는 여기에 우리의 운명은 이미 주어져있다. 
한편 우리의 체면유지의 폐단과 행위의 충동성 및 맹목성으로 하여 다시 한번 운명의 우롱과 시련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 “남이 다 가니” 나도 가야 하고 그러니 여기 한무리 저리 한부락이 모여사는 현상이 다시 출현될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래부터 응집력이 강한 민족이니깐. 다른 종족과는 배합이 잘 안되는 민족이니깐. 또 부분적으로 이미 실증된 사실이다. 그렇게 한해, 두해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익숙해지고 그러면 또다시 체면유지가 머리를 쳐들게 될것이라는것을 지나온 력사로부터 짐작할수 있는것이다. 그때 가서 또 한번 서로서로 샘을 쓰고 자비심을 비기다가 월경과 도시진출에 이은 제3차 대추세가 나타나면 다시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질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것을 어쩔수 없다. 소위 썰물이 나갔다가 밀물이 들어오는것처럼. 제발 밀물만은 되지 말아줍소서 하고 기원할수밖에 없는 필자다. 
 
맺는 말
“썰물”은 력사의 차원에서 우리민족의 렬근성가운데서 몇가지 흠집을 면바로 짚어내였다. 민족발전 민족부흥을 기하는데 유익한 탐색을 하였다는데서 필자는 그래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싶다. 한편 문학작품으로선 너무 산만하고 합법칙성이 기울어졌다는 유감이 드는것을 어쩔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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