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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조선족문단의 주력으로 부상하는 70후들
2019년 11월 29일 07시 22분  조회:391  추천:0  작성자: 장학규
 
평론
 
산동조선족문단의 주력으로 부상하는 70후들
 
장학규

 
 
70후는 사각지대일가?
 
어느 문학 모임에 갔다가 후배문인으로부터 70후가 난청(难听)세대 아니냐는 불평 아닌 불평을 들었다. 60후는 문단의 대표주자라 당연히 주목받고 있고 8090후는 단절이 와서 발굴이요 배양이요 하면서 난시법석을 떨고 있는데 유독 70후에 대해서만은 함구하면서 전혀 배려가 없다는 지청구였다. 기성 문단을 마지막으로 지키는 세대를 이렇게 푸대접해도 되느냐 하는 볼멘소리로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많이 미안한 구석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60후에 대해서는 쟁의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해도 무방할 듯 싶다. 나이로 만 50세에서 59세를 아우르는 이 세대는 문학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지난 세기 8~90년대를 거치면서 탄탄한 실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정력상으로도 한창 최고봉을 자랑하는 세대임에 틀림 없다. 우리 문단을 일구고 이끌고 또 키워왔던 선배문인들은 마침 정년퇴직 년세를 넘긴 분들이라는 점에서 60후가 문단의 중임을 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80 이후의 문인들은 신세대로서 기성문단과의 접목이 잘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에 태여난 이들은 상대적으로 글로벌화가 잘 되여진 행운의 세대이기도 하다. 전 세대들이 주어진 공간에서만 움직이면서 제한된 자원에 의지해 문학창작을 어렵사리 진행했던 점과는 달리 이들 신세대들은 전국 각지 나아가서 세계를 안방처럼 들락거리면서 인터넷이나 모바일이라는 뉴매개체로 나름대로 문학세계를 구축해왔다. 물론 여러모로 성숙이 요청되는 세대이기는 하나 추세적으로 시대의 앞장에 서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70후는 좀 애매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다. 재래문단의 막차에 올라탔던 이들은 미처 날개를 굳히기도 전에 터진 보물 같이 다가온 리향과 출국의 이슈에 매몰돼 터전을 잃고 뿔뿔히 흩어져 각자 도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전 세대와 같은 견고한 발판을 마련하지도 못했고 후 세대들처럼 네트워크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채 맹점에 망각되여 고군분투해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러한 력사시대적 배경에 위치해있었기에 70후들은 어쩌면 전 후 세대들보다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는 절대 아니다. 이들은 재래식의 기성문단을 나름대로 답습했던 고로 문학수양을 상대적으로 잘 닦을 기회를 가진 동시에 문단과 단절되지 않았으며 60후보다 훨씬 쉽게 신식 매개체와 도킹되면서 자신들의 문학 령역을 넓혀갈 수 있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문단은 70후가 “하프”의 역할을 논다고 말할 수 있다. 앞을 받쳐주고 뒤를 끌어주는 “하프”가 70후이다. 또 경제학적으로 비유하면 “중산층”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독보적인 실력을 갖춘 “중산층”이 두터울수록 그 문단은 비전이 있고 미래가능성을 점칠 수가 있다. 
이제 이들을 주력이라고 부르게 되는 리유를 산동조선족문단에 견주어 살펴보려 한다. 
 
 
산동을 문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가?
 
우선 개념 정리가 필요한 듯 싶다. 
문단의 사전적의미는 아주 간단하다. 즉 문인들의 사회가 곧 문단이다. 
중국의 해석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문단은 “문인의 모임 자리(文人聚会之所)”라는 것이다. 풀이하면 일정한 문인들이 모여서 어울려 활동하면 곧 문단이라는 말이다. 
“문인들의 사회”, “문인들의 모임”이란 제기법이 좀 애매하긴 하다. 구경 어느 정도의 규모여야 사회고 모임인지 판단이 모호하다. 
 
일찍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에 흑룡강에서 “북방문단”이란 제기법이 나왔을 당시 문학회의를 하면 모이는 규모는 왕왕 30여 명 좌우가 최고 수치였다. 문단에서 활약했던 작가들도 50명 정도로 손꼽을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현재의 료녕문단을 보더라도 정기적인 창작활동을 진행하는 작가수는 역시 거기서 거기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산동을 지역적으로 구분하면 청도, 위해, 연태, 기타 등 4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연변작가협회 청도지역창작위원회로 공식 지정된 청도조선족작가협회의 정식 회원은 55명이다. 이중 위해시에 11명, 연태시에 3명, 제남을 포함한 기타 지역에 2명,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청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회원들은 문학 포럼, 강좌, 탐방 및 회의때마다 참석하는 회원들이고 지면에 자주 이름을 올리는 사람들이다. 
 
이외 청도조선족작가협회 산하의 독서회에서 36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80년대 이후의 세대들로서 일주일에 한번꼴로 모여 독서소감을 나누고 가끔 한두편씩 글을 발표하면서 작가의 꿈을 익혀가고 있다. 협회의 외곽 대오로서 든든한 뒤심이 되고 있다.
한편 200여명을 헤아리는 재청도조선족대학생들도 방대한 지원군이다. 이들은 작가협회의 행사때마다 도우미로 봉사해주면서 문단을 흘끔흘끔 기웃거리고 있다. 여기에 청도 소재 2개 민족학교와 산동 각 대학교 한국어학과의 수백에 달하는 선생님들도 엄청난 파워를 가진 력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까지는 수업과 학문에 여념 없어서 많은 분들이 동참을 망설이고 있지만 언젠가 한번 땅하고 터지면 그대로 황하의 홍수를 이루지 않을가 싶다. 
 
산동에는 또 흑룡강신문이 20여년간 자리를 틀고 앉아 여러모로 문인들을 떠밀어주고 있다. 흑룡강신문 산동지사는 전문 문학면을 내여 산동 문인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발표해주었는가 하면 위챗 계정에 “좋은 글” 코너를 개설하여 4년 여 간 지속적으로 현지 작가들의 글을 내주고 있다. 
산동은 또 불행하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 하나 더 있다. 자칫 모순 같은 이 말은 산동에서만 성립되는 론점으로 불행한 것은 공식적인 문학잡지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고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경제가 상대적으로 활성화된 지역이여서 국가의 허용범위내에서 비공식 잡지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중에는 전문 문학적인 글만을 고집하는 “해안선”이라는 계간잡지도 있다. 15년 간 46기를 발행하면서 수천 편(수)의 글을 발표했다. 물론 “해안선”의 멤버들이 모두가 청도조선족작가협회 회원인 것은 아니다. 
 
산동의 문인들은 해마다 많은 행사를 치르고 있다. 신년회, 38여성의 날 기념, 여름철 문학탐방, 송년회 등 정기적인 행사 이외에도 출간기념식, 문학세미나, 도서판매 이벤트 등 활동을 자주 조직하면서 문학창작을 격려하고 협회의 위상을 제고시키고 있다. 
 
이보다 더 주목할 일은 해마다 35만자에 달하는 회원작품집 “갯벌의 하얀 진주”를 출간한 것이다. 올해로 9권째에 이르는 이 대형 책자는 회원들의 작품을 점검하고 집대성한다는 의미 자체보다 지역 공식 문학지의 역할을 놀고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처럼 산동은 작가 수, 작품 수, 후비력, 문학진지 등 제반 여건을 미비하나마 갖추고 있다. 문단이라 칭해도 “상상력의 가장자리(想象力的边缘)” 정도로 리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70후 작가와 작품 및 성과 분석
 
일전 어느 잡지에서인가 연변대학 우상렬 교수가 쓴 “평론도 재미있게 쓸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무척 공감이 가는 말이다. 펑론이라고 꼭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하게 문자 유희로 인테리어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장절에서는 좀 자유스러운 무드를 만들어보고 싶다. 
 
거두절미하고.
단순 청도조선족작가협회 회원 상대로 분석해보면 55명 회원 중 70후가 15명으로 21.5%를 차지하면서 최대의 년령그룹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문단에 이름이 알려진 작가들로서 협회내에서도 중요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리더십이 서서히 안착되여 가고 있다. 
 
일례로 리홍철 시인은 2~3대 회장직을 력임한 바 있고 김영분 수필가는 현임 사무국장으로 활약하면서 협회 전반 사무를 도맡아하고 있다. 구인숙 작가는 김영분씨를 도와 행사의 세세한 부분을 도맡아 처리한다. 그런가하면 김국화 시인과 전향미 수필가는 전임 사무국 정, 부 국장으로 자기들끼리는 “정부” 사이라고 롱을 하고 있다. 이밖에 김미령, 윤명해 작가는 협회 부회장 직책도 맡고 있다. 
아래에 한사람 한사람씩 거론하면서 그들의 면면을 소개하도록 하자. 
 
우선 리홍철 시인이다. 1972년에 화룡시 룡문촌에서 출생한 리홍철은 “화룡치”로 통한다. 선배인 허강일 작가와 같은 고향이라고 해서 스스로들 “화룡 2천재”라고 부른다. 둘 다 하늘이 내린 재간둥이인지 아니면 재앙투성이인지는 옆에서 알 바 없다. 아무튼 주변에서는 “낡회”라고 칭한다. 새 회장에 비해 낡은 회장이란 뜻으로 “낡회”란 약칭이 붙어진 것이다. 요즘에는 청도서 “줘마네 목장”이란 식당을 꾸리고 청해성 서녕시 주변 장족목장의 청정양고기를 공수해온다고 “홍사장”이라고 개칭되였다. 역시 리홍철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달아진 호칭이다. 이 친구는 화룡 골안에서 호랑이를 애완묘(宠物猫)처럼 키워오면서 이쑤시개가 필요할 땐 호랑이 꼬리에서 털 한대씩 뽑아 이를 쑤셔왔다는 뻥쟁이로 말도 엄청 빨리 해서 귀를 도사리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리홍철은 입이 빠른 만큼 데뷔도 무척이나 일찍했다. 열여덟살 나던 1989년에 벌써 연변일보에 시 <이발자국>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리홍철은 한번 대디딘 걸음이 걷잡을 수 없이 일사천리로 내달리면서 지금까지 시, 수필, 소설 등 작품을 450여편(수)를 발표했다. 그간 연변일보 대성상을 포함 해외문학상, 동포문학상 등 굵직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면서 문단 중견의 위치를 굳히고 있다. 
리홍철의 작품에서 소설이 차지하는 분동은 작지만 무게는 상대적으로 크다. 작가가 직접 겪은 서부생활 배경의 소설들 때문이다. 우리에게 많이 생경한 만큼이나 신비한 면사포를 쓰고 다가온 리홍철의 소설들은 문단에 생신한 바람을 불어넣어주었다. 그중 대표작이 <줘마>이다. 일망무제한 초원의 장막에서 길가는 행객들과 부딪치면서 “줘마”는 바깥세상을 동경한다. 그러나 종당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장막으로 되돌아간다. 혹자는 결말이 비극적으로 처리되였다고 비판한다. 그건 타민족의 문화를 모르고 하는 얘기이고 문학의 사명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한 판단이다. 자기의 자대와 시각으로 함부로 타민족의 모습을 저울질한 우를 범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은 리홍철의 현재까지 작품 중에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으며 리홍철의 문학적 평가에서 빠질 수 없는 작품이 될 것이라 믿는다. 
 
1975년 길림성 영길현에서 태여난 김영분은 얼핏 첫인상에도 조용한 스타일이다. 가깝게 지낸다는 언니 문인 김신자씨의 말을 빈다면 맏며느리 같은 형상이다. 무던하고 다심하고 주변을 잘 챙겨준다. 풍편에는 말을 꽤나 잘한다고 들리는데 정작 모임때에는 긴 말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얼굴이 찡그려질 때가 없고 항상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고 “아, 그렇네요. 맞아요.” 그렇게 짤막하게 반죽을 쳐주어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김영분은 속성파(速成派)에 속한다. 2016년에 료녕신문에 처녀작 <얼굴>을 발표해서부터 짧디짧은 2년반 사이에 50여 편 작품을 각 문예지에 발표하고 글쓰기를 시작해서 1년 만에 연변작가협회 회원증을 따낸 실력파이다. 가방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바쁜 와중에도 끈질기게 한달에 꼭꼭 한편 이상 글을 쓰는 근면함이 있다.  칭찬할라치면 “정말로? 이 정도가 부지런한 거예요?”하고 기업인다운 반문이 나온다. 
이미 문단에 발을 붙인 김영분의 작품은 성격과 직업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한결 성숙미가 있다. 일례로 수필 <칼있으마>를 들 수 있다. 파워와 결단력을 가리키는 “카리스마”를 우리말로 “칼있으마”로 변형시켜놓고 “칼”의 속성을 끄집어내여 “이루고저 하는 것에 열정을 집중해서 하나하나 실천해나가는 성실하고 꿋꿋한 모습”이 “칼있으마”라면 지금 여러가지를 시도하면서 새롭게 인생에 시동을 거는 자신도 그걸 가지고 있다고 역설한다. 이 글은 제목부터 내용, 그리고 구조까지 새롭게 안겨오는 좋은 글이다. 
 
리화는 한번 연구해볼만한 대상이다. 실제 발표작품은 많지 않으면서도 문단에 잘 알려진 케이스이다. 10여년전 처음 협회 활동을 나와서 지금까지 발표작이 50여 편이다. 가히 많다고 할 수 없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라지》잡지 ‘장락주문학상’에 흑룡강신문 ‘랑시문학상’을 거머쥔 베테랑이다. 그리고 편집들로부터 원고 청탁을 자주 받는 작가중의 한사람이다. 
리화는 1979년 길림성 안도현에서 출생하여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흑룡강신문사에 입사한 학원파이다. 남과의 대화에서 거의 토를 달지 않고 태클을 전혀 걸줄 모르는 성격이다. 작은 가슴에 큰 용암을 품어서인가, 리화는 자기의 속심을 술로 푼다. 술을 억수로 좋아하는 타입이고 술상에서 먼저 일어서는 법이 극히 드물다. 비단 술을 즐길 뿐만 아니라 술을 맛나게 마실 줄도 안다. 취기가 올라도 전혀 흐트러지는 말이나 행동이 없고 술잔을 굽낼 때마다 “캬, 맛좋다”하며 제법 호매롭고 무드를 살릴 줄 안다. 애리한 외모에 말쑤가 적은 반면 글은 생각밖으로 기세가 당당하고 스케일이 크다. 그래서 실제 인물과 글을 이어주기가 쉽지 않다. 리화의 글에서 풍겨나오는 남성적인 파워와 한량다운 풍류는 다른 사람이 절대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리화의 글에는 술이 특히 많이 등장한다. ‘장락주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선녀야, 계곡물에 막걸리 부어라>는 제목부터 향기로운 술냄새가 풍긴다. 그림처럼, 시처럼 떠오르는 이런 제목의 재생적 효과는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물론 글 속 주인공의 초탈한 움직임과 심리적 발로는 그대로 일품이다. 모름지기 이 수필은 언제까지도 계속 회자될 것이라 믿는다. 
 
전향미는 70후 중에서 맏언니 격이다. 열정이 넘쳐나고 마음이 뜨겁다. 불의에 참지 못하고 할 말은 꼭 하고 사는 사람이다. 
1971년 길림성 서란에서 출생한 전향미는 장춘중의학원을 졸업했다. 흔히 문학과 의학은 서로 통한다고 한다. 의학은 인간의 신체를 다루고 문학은 인간의 령혼을 연구하는 리유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직업은 물과 불만큼이나 성격이 다르다. 로신이 문학과 의학 사이를 넘나들면서 차거웠다 더웠다 하자니 너무 힘들어서 의사를 때려치웠다는 것처럼 전향미도 의료계를 떠난 지 이슥하다. 
아무튼 전향미에게는 태생적으로 문인의 끼가 다분히 슴배여있는 듯 하다. 전향미의 글은 흥분점이 많고 즉흥적인 모습이 진하다. 가히 달필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얼음에 박 밀듯 파죽지세를 이룬다. 전향미의 글은 꼭 어느 한편을 대표작이라 뽑아놓고 해석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다. 세부적인 특색이 강한 리유때문이다. 
 
으슬으슬 추운 날엔, 따끈한 구들장에 엉덩이 지지며 둘러앉아 부컬짝 요란스레 두들겨보자. 소리치다 배고프면 김치국에 밥 말아 먹고 된장국에 밥 비벼 먹자.( <우리 함께 고향 가서 살자> 에서)
내가 뒤따라 나가면서 “우리 집 개고기 어떻습니까”하고 묻자 “개고기 좋아. 그런데 로반냥 사람이 더 좋아”라고 하신다. 어깨가 으쓱해져서 “사람이 개보다 더 좋단 말씀입니까?”했더니 하늘을 향해 꺼이꺼이 웃어제낀다. 아무렴 그렇겠지. 개와 PK를 한다면 내가 낫겠지. 이 얘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조본산의 소품 볼 때 웃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이 남자다. 개도 표정이 무궁무진하다고 했거늘.(<개장집 사람과 개 이야기>에서)
딸애 방 문에는 “전씨성을 가진 녀자 환영하지 않음”이라는 종이장이 붙어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남편의 오케이 싸인이 능청스레 웃고 있다. (<사춘기 딸과 엄마>에서)
 
웃음을 질질 흘리면서 내려보지 않을 수 없는 능란한 필치가 돋보인다. 
전향미는 짧은 경력에도 흑룡강신문 ‘록환문학상’ 대상을 거머쥐는 등 등단 6년에 수차 상을 타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권연이는 연변대학과 한국 국민대학의 쌍석사 출신이다. 1978년 태생인 권연이는 길림성 교하시에서 태여났으며 70후에서는 늦깍이에 고학력자에 속하나 스스로 자꾸 정신줄이 없다거나 자신감이 떨어진다고 푸념한다. 규모가 엄청 큰 학교에서 한개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신분이라 바쁜 업무에 쫓기다 보면 뭐나 다 챙기기 어려우면서도 언제봐도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지 않고 항상 자기 몸에서 문제점을 반성하는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미 80여 편(수)의 작품을 발표하여 기성문인의 반렬에 들어선 권연이는 중국조선족교원수필 최우수상을 비롯해 수차 수상의 영예를 지녔고 수필 <죽음을 준비하다>는 2017년 《송화강》문학상 대상 후보작에 오르기도 했으며 시 <마지막 잎새>, <눈비>, <빨간 탱고화 신고>, <20세 질주> 등 4수는 《민족문학》잡지에 전재되기도 했다.
 
사랑한다고/ 숨막히도록 껴안고/ 죽어도 놓지 않을 듯 하더니/ 한줄기 새벽 찬비에/ 무더위도 사랑도 질식해버리고 말았네/ 빈허울만 남겨놓고/ 여름은 그렇게 식어버렸네/ 금세 돌아서서 떠날 차비를 하고 있네// 나는 잡지 않기로 했다네/ 기어이 떠나려는 여름을 잡지 않기로 했다네/ 저 산너머에서/ 까치발하고 서성이는/ 내가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올/ 가을이 기다린다네// 나는 가을을 부를 거네/ 나는 가을로 갈 거네// (시 <잡지 않기로 했다네> 전문)
 
뿌리 깊은 나무는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던가. 그만큼 권연이는 사람도 듬직하여 쉽게 드놀지 않는다.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사람 치고 거짓말 같이 글이 태평무사하고 느끗하다. 
 
구인숙은 1972년 료녕성 심양시 소가툰에서 출생하여 료녕사범대학 외국어과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엘리트이다. 외견에서도 지적미와 세련미가 확연히 드러나는 구인숙은 문장을 다듬을 때 글자 한자도 꼼꼼히 따지는 성미이다. 글을 봐달라고 보내온지 얼마 안되여 어느 단어를 수정했다면서 재다시 보내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단어 하나를 두고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경상도와 함경도의 부동한 발음과 리해를 분석하는 신고도 아끼지 않는다. 커피숍 사장님이여서 손님(독자)에게 배려를 돌리는 세심함이 일견에도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한 덜덜한 모습도 보인다.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 거잖아요.” 하는 식으로 주변에서는 꽤나 신경을 모으는 일에도 가볍게 넘어갈 줄 아는 센스가 있다. 그러기에 구인숙의 글에는 <그 순간 만큼은 이 세상을 얻었다>, <더위에는 남녀가 없다>와 같은 소탈하고 어찌보면 속세에 때묻은 듯한 글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제되고 질서적인 글들이다. 요즘 《민족문학》잡지에서 구인숙의 수필 <정주간>을 전재한다는 희소식이 날아왔다. 이제 서서히 날개를 펼 시점인 거 같다. 
 
  1970년에 흑룡강성 탕원현에서 태여난 리길룡은 일단은 먼저 기업인이다. 일찍 청도에 진출하여 컴퓨터학원을 꾸렸다가 지금은 무역업에 올인하고 있다. 20여년을 경제사회에서 굴렀던 만큼 장사군 기질이 다분하다. 2000년도에 사업건으로 현지 진출 민족신문사에 들린 것이 계기가 되여 흑룡강신문에 <갈림길>이란 글을 발표하면서 중단편소설 수십편을 발표했다. 목단강사범학교를 나온 것이 큰 밑천이 된 것이다. 고참 청도조선족으로서 그의 글에는 조선족들의 눈물겹고 피어린 정착사가 아프게 기록되여 있다. 중편소설 <엄동설한에도 꽃은 핀다>를 비롯해 대부분 글들이 초창기의 어두운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깡패, 마약, 매춘, 칼부림, 살인 등 그 시절의 아픈 상처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2017년에 중단편소설집 <강원랜드>를 출간한 리길룡은 지금 장편을 완성하고 수개중에 있으며 동시에 본인이 익숙한 인터넷 공간에서 줄기차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74년 범띠인 김미령 역시 료녕성 사람으로 무순에서 태여났다. 일찍 1997년에  등단한 김미령은 수필 <바다가 준 행복>으로 《은하수》잡지 2등상, 수필 <슬퍼서 산다>가  한국 KBS방송국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인생경력이 굴곡적이였던 만큼 글에서는 진한 아픔이 비쳐지고 있다. 글을 처절하게 다루는 전형으로 <빌려쓰는 인생>, <엄마가 필요해>, <살다가 살다가> 처럼 제목부터 온통 상처다. 
 
김염화는 1977년에 길림성 룡정시에서 출생하여 연변대학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현재 청도농업대학 한국어학과 학과장으로 사업하는 학자형 작가이다. 키가 웬간히 큰 남자도 김염화 옆에 서면 해발고도를 의심해야 할 정도로 인물 체격이 쭉 빠진 사람이다. 줄곧 순탄하게 엘리트 길을 걸어온 거 만큼이나 글을 자로 잰듯 모나게 쓴다. 김염화의 평론 <행복을 꿈 꾸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추락>을 보면 전문학자의 흔적이 대번에 보인다. 소설의 인물형상을 관계도를 그려서 보여주는가 하면 사건의 시공간적 구조를 파헤치는 프로다운 솜씨도 나타낸다. 인물형상부터 스토리 전개까지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살피고 조명했다. 흔히 독후감 형식의 평론에 치우치는 것과는 격이 다르고 프레임 자체가 한차원 업그레이드되여있다. 평론인이 결핍한 산동문단에는 가뭄에 단비요 혜성 같이 나타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외에 연변문학에 발표된 단편소설 <추락>으로 얼굴이 알려진 윤명해 소설가(1975년생), 20여년 간 수필만 고집하면서 수십편 작품을 발표한 김명숙(1973년생), 그리고 김국화(1970년생), 리숙(1974년생), 림복화(1973년생), 최영란(1974년생) 등이 아직 있으나 지면상 관계로 더 전개하지 않는다.

 
리더가 수요되는 세대
 
얼핏 보기엔 좋은 소리만 해서 허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70후 역시 더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한 세대를 이끌어갈만한 리더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윤림호선생이 북방문단에서 거목으로 자리매김했을 때가 30대 후반, 40대 초반이였다. 조광명선생이나 한영남선생도 30대에서 느끗하게 한몫을 담당했었다. 70후면 만 40세에서 49세 사이로 문단에서 한 목소리를 낼 때가 틀림없다. 어쩌면 60후보다 더욱 날파람이 있어야 할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크게 뚝 부러질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문학을 취미로 한다거나 생계가 우선이라거나 업무가 바쁘다거나 하는 핑계도 얼마든지 일리가 있고 설복력이 있다. 그러나 반론적으로 문학은 그런 경우에 해야 제맛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 문학을 하는 것이지 팔자 좋고 똥집이 편한 사람은 글을 쓰지 못한다고 말하면 억지고 궤변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언어수련을 좀 더 해야 하지 않을가 생각한다. 전세대들은 참말로 어려운 여건속에서 문학창작을 해왔다. 볼 것이 제한되여 있는데다가 봉페된 환경에서 들은바도 많지 않았다. 신문마저 희귀했던 그 시절 갖은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독서했고 오로지 쓰고 또 쓰면서 문학수양을 쌓았다. 요즘 세상은 책이 도처에 널려있고 티비나 인터넷을 통해 지식이 쓰나미처럼 전달된다.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정보도 섭취할 수 있다. 사람하기에 달렸다는 말이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글을 발표해서 30편에서 50편 사이가 관건적인 시기이다. 이때는 경험적인 이야기가 바닥이 나는 대목이고 스스로도 자기 글을 판단할 수 있는 시점이다. 아이구 이젠 쓸게 없소, 못 쓰겠소 하고 맥버리면 바로 끝장이다. 그리고 그 3~50편 글을 가지고 평생 문인입네 하고 자랑하고 만족하면서 살게 된다. 지금 대개의 문인방에서 살판치고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류형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맞아죽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문학엔 지름길이 없다. 오직 꾸준한 노력과 지구력만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2019년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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