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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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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윤동주와 윤혜원 댓글:  조회:2298  추천:0  2018-08-04
                시인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의 삶과 문학적 공로                                   -육필원고 가져와 증보판과 영인판 시집 발간-                                                                                                                  申  吉  雨               1. 윤동주 육필시와 윤혜원 부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여사가 2011년 12월 10일 오전 1시 20분 호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작고하였다. 장례는 시드니에서 치른 뒤, 2012년 봄에 경기도 광주 가족묘원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부군 오형범 장로와 장남 철주 등 2남 2녀를 두었다. 윤 동주의 형  제자매로 유일한 혈육이 떠난 것이다.                  가장 선호 받는 시인 윤동주(1917~1945)     윤동주 유고를 가져온 윤혜원과 오형범 여동생 부부.     우리는 이들을 따로 생각할 수가 없다. 이들이 친남매라서가 아니다. 100여 편이나 되는 윤동주의 시가 알려지고, 그 다량의 원본 원고를 확인할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여동생 부부의 노력과 활동이 없이는 가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동생 윤혜원 부부가 만주 용정(龍井)에서부터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오면서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가지고 월남하지 않았다면, 윤동주의 육필원고 영인본과 시집 증보판도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친여동생 부부로서보다도 90평생을 오로지 윤동주를 위해 살았다고 할 만큼 두 분의 한결같은 삶과 노력이 없었다면, 윤동주도 오늘과 같이 찬란한 빛을 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1948년 1월 30일에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판에는 모두 31편의 시가 실렸을 뿐이다. 친구였던 정병욱 교수가 보관한 유고 19편에 강처중 등에게 보내서 보관된 12편을 골라 도합 31편을 묶어서, 정지용의 서문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1955년 2월 윤동주 10주기를 기념하여 정음사에서 발행한 시집에는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포함하여 그 수가 3배인 93편으로 늘어났다. 1976년의 3판에는 다시 23편을 추가하여 모두 116편이 됐다. 이 증보판들과 1999년에 민음사에서 발간한《윤동주 자필시고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 여사 부부가 월남하면서 서울로 가지고 온 자료들 덕택이었다.     따라서, 윤동주는 위대한 시인으로, 여동생 부부는 그를 더욱 빛나게 한 사람으로 각기 우리 현대문학사에 크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들 부부는 1999년에 을 제정하여, 2000년부터 해마다 시상해오고 있다. 연변에서 발행되고 있는 초중용과 고중용 잡지에 발표된 중국조선족 중고등학생들의 작품 수백 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한다. 윤동주를 기리기보다 윤동주 같은 훌륭한 문인들을 일찍 발굴하여 육성하자는 뜻이 더 많은 강하게 실린 사업이다.     후원자로 참여하고 있는 연세대학교가 해마다 수상자들을 초청하여 1주일 정도로 국내 문화관광과 교육 활동을 맡아 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을 시키고 있다. 나아가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이 인문학부에 합격시켰다.     그리고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의 묘소 관리에도 지극 정성이었다. 이들 묘소의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재미동포인 현봉학(玄鳳學) 박사가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에서 수선(修繕)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시멘트로 20여㎝ 높이로 둥글게 두르고,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새로 상석을 설치했다.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2003년 봄에 80세 노인으로 2개월여에 걸쳐 윤동주와 송몽규의 묘소를 개수했다.사방 4m 위치에다 폭 60㎝의 대리석판을 둘러 세우고, 그 안을 잔디로 심어 네모진 봉분 모습으로 만들었다. 묘비는 역시 봉분 앞에다 그대로 세웠다. 상석은 새로 오석 하나로 만들어 설치했다. 묘의 왼쪽 앞에다 따로 개수비를 세웠다.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의 묘소도 윤동주의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개수했다. 묘비와 상석은 예전 그대로 설치했다. 본래 명동 장재촌에 있던 것을 1990년 4월 5일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윤혜원은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48년에 오형범과 결혼하고, 그해 12월에 함께 북한을 거쳐 서울로 월남했다. 1948년은 조부가 9월 4일에 작고하고, 모친도 9월 26일에 별세한 해였다. 이때 부부는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등을 가지고 왔다. 윤혜원 부부는 1970년 10월 15일 윤동주 25주기를 맞아, 고인의 친필 유고와 유품 전시회를 국립도서관에서 1주일 동안 개최한 바도 있다.     이러한 의미 있는 삶을 산 윤혜원이 2011년 12월 10일에 작고했다. 이에 윤혜원 오형범 부부의 주요 활동을 소개하여 그들의 문학사적 사회적 기여와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2. 윤혜원의 가족과 생애       윤혜원(尹惠媛)은 파평 윤씨로 1923년 0월 0일에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중국 길림성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5)과 모친 김룡(金龍, 1891~1948)의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증조부 윤재옥(尹在玉)이 함경북도 회령에서 종성(鐘城)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886년에 4남1녀 가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 자동(子洞,紫洞)으로 이주해왔고,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8)이 1900년에 지금의 명동촌으로 이주를 하였다. 이들 일가는 1910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할아버지는 부유한 소지주로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교를 졸업한 뒤 북경과 일본에 잠시 유학했던 지식인으로 명동학교 교원으로 있었다. 광명중학의 윤동주 학적부 아버지의 직업란에는 ‘상업(포목상)’이라 되어 있다. 어머니는 교육자요 독립운동가인 규암(圭岩) 김약연(金躍淵)의 누이동생이다. 형제자매는 3남1녀인데, 윤혜원 여사는 외동딸이었다. 시인 윤동주(1917~1945)는 6살 위인 오빠이고, 남동생으로 윤일주(尹一柱, 1927~1985)와 윤광주(尹光柱, 1933~1962)가 있다.    윤일주는 1946년에 월남하여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를 지냈는데, 젊어서 많은 동시를 썼으나 형 동주에게 누가 될까 하여 발표를 않았는데, 간경화증으로 작고한 뒤에 아들 윤인석(尹仁錫, 성균관대) 교수가《민들레 피리》로 묶어 1987년 5월 30일 정음사에서 간행했다. 연세대 교정에 세운 윤동주 시비를 설계했다.     윤광주는 신체가 허약했으나 30세에 폐결핵으로 용정에서 작고하였는데, 시인으로 활동하여 시 3편(「다시 만나자 고향아」「고원의 새봄」「아침 합창단」)이 중화인민공화국 창건30주년기념 시선집(1969)에 수록되었다. 발표된 24편의 시를 수집하여 연변일보 등에 게재되기도 했는데, 시인 심연수(沈連洙)의 남동생과 문학친구로 지냈다.     출생지 명동촌은 윤동주의 큰외숙인 김약연(1868~1942) 목사가 1899년에 종성에서 가솔을 이끌고 이주해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정착한 곳이다. 그는 1901년 4월에 명동에 서당 규암재(圭岩齋)를 차리고, 뒤에 명동서숙(明東書塾), 명동소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아들 김정규(金定奎)는 교장을 지냈고, 손자 김석관(金錫觀)은 학감으로 윤동주의 스승이었으며, 뒤에 윤동주 묘비를 짓고 썼다.     윤혜원은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했는데, 1948년에 오형범(吳瀅範)과 결혼했다. 오형범은 윤동주와는 면식도 없었고, 사후에 맞선으로 윤혜원과 결혼을 했다. 윤동주가 시인인 것도 월남하여 그가 시인으로 알려진 뒤에야 알았다고 하였다.     부부는 1948년 함경북도 성진을 거쳐 함경남도 원산으로 왔다가, 12월에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했다. 이때 용정의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스크랩 철, 사진 등을 가져왔다. 대부분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에 쓴 작품들이다.     그때, 사진 봉투는 원산에서 월남하고자 할 때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용정으로 되돌아가는 친척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가 열차 에서 검문하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에 사진들을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중요한 사진 몇 장은 지니고 월남할 것을… 하며 필자에게도 몇 번이나 아쉬워함을 말했었다. 윤동주의 사진들이 많지 않은 것은 이런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윤혜원 부부는, 6․25 직후 부산에서 많은 고아들을 돌보며 살았다. 그 뒤에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1970년에는 필리핀으로 가서 목재 사업을 하였다. 1986년부터는 아들과 함께 호주 시드니에 정착하여 살다가, 윤 여사는 2011년 12월 10일에 작고했다.                   3. 윤동주 묘소의 개수와 관리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의 묘소 관리에도 지극 정성이었다. 그 주변 묘들도 배려하고, 가까이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의 묘소도 똑같이 보살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까 감옥에서 죽었다. 만 27년 1개월 16일의 삶이다. 묘소는 1945년 3월 6일 길림성 용정시의 동북쪽인 합성리 마을 뒤 동산의 교회공동묘지에 설치되었는데, 봉분만 있는 평범한 잔디묘였다. 세로 검정 글씨로 “詩人尹東柱之墓”라 새긴 화강암 묘비는 1945년 6월 14일에 가족들이 세웠다.                                                               2003년 6월 28일 필자가 용정의 숙소로 초대받은 자리에서,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며 몇 가지 사실을 들려주었다. 이 내용들은 그 뒤 이들의 부탁을 받고,〈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로, 2004년 12월 1일에 발간한 윤동주 60주년 추모사화집《님을 그리며》에 싣고, 2004년 12월 11일 서울 문학의집에서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 주최로 연 행사에서 발표했다. 그 중에 묘비에 관련된 것 두 가지만 소개한다.       윤동주의 묘비 전면 표제는 “詩人尹東柱之墓”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째서 “詩人”이라 했을까? 사실 묘비를 세운 1945년에는 윤동주가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창작일자로 가장 빠른 시는 1934년 12월 24일자로 된 3편이 있다. 최초로 공개된 시는 1935년 10월에 숭실중학교 학생회에서 간행한 제15호에 게재된 「공상」이다. 동시는 1936년「병아리」가 연길의 11월호에 발표되고, 이어서「빗자루」(12월),「오줌싸개지도」(1937.1.),「무얼 먹고 사나」(37.3.), 「거짓부리」(37.10.)가 발표되었다.     1939년 1월 23일에는 시「遺言」이 조선일보 학생란에 실리고, 이어서 시「아우의 印象畵」와 산문「달을 쏘다」가 같은 난에 게재되었다. 동시「산울림」은 지에 발표되었다. 1941년에 연희전문 문과 발행의 6월호에 시 「새로운 길」이 실리고, 「자화상」도 6월호에 발표되었다.     사후에 최초로 발표된 시는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 4면에 게재된 「쉽게 씌어진 시」이다. 3월 13일에는 「또 다른 고향」이, 7월 27일자에 「소년」이 실렸다.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있던 정지용이 게재한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보아, 묘비에 “시인 윤동주”라 한 것은 의문이다.     그런데, “詩人”이라고 붙인 사람은 조부와 부친이었다고 여동생 부부이 증언했다. 그 근거는 윤동주가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19편을 묶어서 3벌을 만든 육필원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스승인 이양하 교수가 출판은 아직 때가 아니라 했던 그 시집이다. 출판은 되지 않았으나 시집은 이미 완성한 것이었고, 그 육필시집을 보았기 때문에 ‘시인’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가족이 세운 묘비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물론 윤동주가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발간한 첫 유고시집부터이다.     또 하나, 묘비에는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나온다. 어째서 연호가 아닌 서기를 썼을까? 윤동주는 서기 1945년 2월 16일에 일본 후꾸오까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묘비는 같은 해 6월 14일에 세워졌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비에는 연도가 모두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되어 있다. 비문 속의 연도도 서기이고, 묘비문 끝에도 “1945년 6월 14일 謹竪”라 새겨져 있다. 당시에는 다들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같은 해 3월 7일에 작고한 송몽규(宋夢奎)의 묘비에는 서기가 아닌, 연호 “康德”으로 새겨져 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현석칠(玄錫七) 목사의 묘비에도 “康德”으로 되어 있다. “강덕”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당시 연호였다.     비문은 은사인 김석관 선생이 지어서 썼고, 묘비는 가족들이 세웠다. 그러므로, 연호 대신 서기를 쓴 것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하여 오형범 장로는 다음과 같이 의견을 말해 주었다. 윤동주는 한국 사람인데 억울하게 잡혀가서 일본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니 어떻게 일본이 세운 만주국 연호를 쓰겠는가? 그래서 서양에서 두루 쓰고 있는 서기를 쓴 것이다.     한창 나이의 자식을 잃은 어버이로서도, 윤동주의 스승으로서도 그들은 심정적으로 일본(만주국)의 연호는 쓰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윤동주의 가족은 일찍부터 모두가 기독교 신자였기에 서기가 어렵지 않게 선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윤동주의 묘소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재미동포인 현봉학(玄鳳學) 선생이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에서 수선(修繕)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시멘트로 20여㎝ 높이로 둥글게 두르고,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새로 상석을 설치하였다. 가로 90㎝, 세로 60㎝, 높이 20㎝ 정도이다.     현봉학은 1984년 봄 재미동포인 신태민(전 경향신문 부사장) 댁에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고, 그해 여름에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중국 연변을 방문하여, 여러 유지와 주정부에게 윤동주가 애국시인이며 그 묘소와 유적들을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윤동주를 알지 못했고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내년 재방문 때에는 꼭 묘소를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하였다.     다음해 7월에 두 번째로 방문하여, 용정시 대외문화경제교류협회 최근갑 이사장, 용정중학교 유기천 교장, 연변대학 농학원 김동식 교수 등으로부터 묘소를 발견했으니 안내를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폭우로 버스는 동산 묘지 언덕의 진흙땅에 빠지고, 걸어서 올라갈 수도 없어서 단념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윤동주 묘는 1985년 5월 14일에 일본의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가 찾아냈다. 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윤일주 교수가 다음해에 연변대학 초빙교수로 가게 된 오무라 교수를 만나 윤동주 묘소 사진을 주며 묘소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오무라 교수가 1985년 4월 12일에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가서, 연변대학의 권철, 이산해 교수와 용정중학교의 한생철 선생의 도움으로 동산에 있는 묘지를 찾아냈다. 묘는 사진으로 찾아냈고, 묘비의 비문으로 확인하였던 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그 뒤 용정중학에서 학적부을 발견하고, 송몽규 무덤, 윤동주 생가터, 영동교회터 등을 더 찾아냈다.       윤동주 묘소의 2차 개수는 윤혜원 부부가 2개월 정도 직접 인부들을 데리고 작업하여 2003년 7월 15일에 완료하였다. 봉분 밑의 시멘트 테를 제거하고, 사방 4m 위치에 폭 60㎝의 대리석판을 둘러 세웠다. 그리고 석판 안쪽은 모두 잔디를 심어 봉분 모습을 네모진 모습으로 여유롭게 만들었다. 묘비는 역시 봉분 앞에다 세웠다. 전의 오  석판 상석을 치우고, 새로 오석 하나로 된 상석을 새로 설치했다. 가로 100㎝, 세로 60㎝, 높이 15㎝의 크기이다. 묘의 왼쪽 앞에 따로 가로 60㎝, 높이 40㎝의 개수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 1917~1945)의 묘소도 윤동주의 묘소도 똑같은 모양으로 개수해 놓았다. 다만 개수비가 없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강덕(康德) 12년 을유 5월 20일에 세운 묘비와 1991년 7월에 용정중학동창회에서 수선했다고 새긴 상석도 그대로이다. 본래 명동 장재촌에 있던 것을 1990년 4월 5일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소 앞에는, 가로 300㎝, 세로 150㎝ 정도를 대리석으로 네모지게 테를 두르고 그 안에다 잔디를 심어 참배하기에 좋게 계절(階節)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2003년 6월 6일 연길 문인들과 함께 묘소를 방문했을 때 노부부가 인부들을 데리고 개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뜻밖의 만남을 반기고, 우리가 비탈진 자리에서 참배하는 것을 보고 느껴서 계획에도 없는 계절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웃으면서, “보태 드린 것 없이 한 몫 했네요”라고 하자, 오형범 장로가 “윤동주는 29살 젊은이로 죽었는데 환갑을 지낸 분들이 절을 하는 것을 보니 민망했었지요” 하고 답변했다. 참배자를 위한 배려겠지만, 내 손을 꼬옥 잡아주던 부부의 손이 그냥 따스하기만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80세 늙은 동생이 오빠에게 마지막 정성을 드리는 거지요”라며 웃던 그때의 노부부의 순수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4. 윤동주 문학상 시행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1999년에〈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했다. 윤동주 같은 시인을 발굴하여 격려 육성하고, 윤동주의 삶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취지와 목표로 만든 것이다.     제1회 윤동주 문학상은 2000년 2월 16일에 연변에서 시상을 했다. 이 문학상은 재미동포 현봉학 박사가 주도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후원으로 시작되었다. 윤동주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감동하고, 1984년 봄에 맨 먼저 윤동주 묘를 찾으러 나섰던 열정이 만든 것이다.     심사대상 작품은 연변인민출판사가 발행하는 초중과 고중용 월간지에 1년 동안 실린 중국 조선족 중고등학교 학생작품들로, 거의 1,000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심사위원은 연변대학 교수 2명과 연변작가협회,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각각 1명씩 모두 5명으로 구성되었었다.              2003년 연변대학 수필창작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던 필자도 그 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5월 13일 연변대학의 최상철 교수, 허춘희(연변인민출판사), 김흠(연변교육출판사), 한석윤(연변작가협회)과 함께 5명이 심사했는데, 고중조와 초중조 각에 1등 1명, 2등 3명, 3등 6명씩 선정하고, 전체 대상 1명을 따로 선발했다. 시상식은 5월에 해왔는데, 조류독감으로 7월 18일 연길빈관에서 윤혜원 부부와 현봉학 박사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윤동주 문학상은 연변인민출판사가 주관을 하는데, 시상식에는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는 윤혜원 오형법 부부는 해마다 참석해 왔고, 연변의 문인들과 각급 학교 교사, 언론인들이 참석하고 있다.     문학상은 그 후에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교육문화원(전남 광주), 국제라이온스 포항지부 등이 후원단체로 참여하고 있고, 수상자들을 해마다 한국으로 초청하여 모국 방문과 문화 관광을 시키고 있다.     특히 연세대학교는 문학상 수상자들의 초청과 국내 체재 및 안내를 맡아왔는데,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을 인문학부에 합격시킨 바 있다.     문학상을 창립부터 후원했던 미국의 현봉학 박사도 작고하고, 윤동주 친여동생인 윤혜원 여사도 작년 연말에 별세하였다. 형제자매로 유일한 오형범 장로도 90세를 맞는 고령이다. 그러나 윤동주 문학상은 많은 분들의 관심과 후원으로 계속될 것이며, 유능한 문인들의 배출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5. 윤혜원 오형범 부부의 삶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출생하여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해방되기 꼭 6개월 전에 그는 만 27년 1개월 16일을 살고 갔다.     윤혜원은 1923년 출생이니 6살 아래다. 오형범은 윤동주와 면식도 없었고, 1948년에 맞선으로 윤혜원과 결혼했다. 윤동주가 시인인 것도 월남하여 그가 시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뒤에 알았단다.     그런 그가 윤동주의 자필원고와 시작 노트 등을 가지고 와서 윤동주 시집의 증보판과 육필원고본을 펴내게 하였고, 90평생을 처남 윤동주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이들 부부는 오래 전부터 오빠 윤동주의 고결한 이미지에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 봐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살았다. 그들이 월남하여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옮겨 산 것도 그런 뜻이었다. 남들을 만나도 늘 조심하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대하며 항상 봉사하고 베푸는 삶을 살았다. 필자가 윤혜원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6월 6일 윤동주 묘소에서였다. 연변의 문인 몇몇과 용정의 윤동주 묘소에 갔다가 개수 작업을 하고 있던 두 분을 뜻밖에 만난 것이다.     이 개수가 평생에 다시는 할 수 없을 줄로 여기고 마지막 정성을 쏟는다는 말처럼 진지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후에 연길 숙소에 초대되어 점심을 대접받은 적이 있는데, 평생에 80노인이 손수 마련한 식사는 처음이었다. 맛있는 음식에 셋이 반주로 먹었던 포도주 맛은 지금도 생각나게 한다.     두 분의 요청으로 상지대 서시작품비 사진을 용정중학교 윤동주 전시실에 게시했고, 완공된 윤동주 묘소를 촬영한 사진들도 갖다 드렸다. 윤혜원 여사는 묘소 사진들을 보며 “내 남편한테 절하고 싶다”고 했다. 평생을 친오빠 윤동주를 위해 산 남편이고, 오늘의 윤동주가 있기까지에는 그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지원할 때 집안의 기둥으로서 의과로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권고에 밥도 안 먹고 고민했는데, 결국 할아버지가 젊은이의 뜻을 꺾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여 문과로 진학한 것과, 일본 동지사대학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할 때 이를 계기로 만나지도 않던 민단과 조총련 인사들이 화합하고, 또 동지사대학 동포동문 모임인 코리아 클럽(Kore Clup)이 창설된 것을 감격해 하며 들려주었다.     또 서시의 일본어 번역이 잘못된 소견과, 윤동주의 스크랩북 원본을 심연수의 형인 심연호 씨가 소장한 경위와, 윤동주가 사귄 여성들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윤동주가 ‘아리랑’과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노래를 자주 불렀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나는 부부의 부탁으로,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 몇 가지를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가 발간한 추모사화집《님을 그리며》에 싣고, 2004년 12월 11일에 서울 문학의집에서 개최한 한일세미나에서 발표한 바 있다. 이 기간에 문학의집에 을 마련하여 2주 동안 전시했었다. 2005년 2월 12일부터 15일까지는 일본 후쿠오카 감옥 마당에 가서 를 갖고 세미나도 개최하였다.     에 감동을 받고, 2000년 7월에 학술대회에 참석했다가 앞장서서 용정의 동산공원 묘소를 찾아내어 참배했던 윤동주, 그리고 묘소 개수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윤혜원 여동생 부부, 나와는 인연이 참 많다. 그래선지 윤혜원 여사는 마치 나의 누님 같은 느낌과 생각이 드는 분이다. 삼가 다시 명복을 빈다.         ////////////////////////////////////////////////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의 '마지막 증인'으로 불렸던 여동생 혜원(88)씨가 지난 11일(2011년 12월), 오전1시30분쯤 시드니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3일 오후 1시 노던서버브공원묘지(Northern Suburbs Memorial Gardens Crematorium)에서 화장으로 치러진 장례예배에는 평소 고인이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의 신자들과 호주한인문인협회(회장 남공)와 재호주광복회(회장 황명하) 회원 등이 참석했다. 윤동주 시인은 3남 1녀의 장남으로 고 윤혜원씨는 1924년생으로 윤 시인의 일곱 살 아래 동생이 된다. 윤혜원씨는 4남매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마지막 피붙이였으며 2남 일주씨는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재임 중이던 50대에, 3남 광주씨는 30대 초반에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국 길림성 용정(龍井)에서 태어난 둘째 혜원씨는 46년 결혼 후, 48년 12월 한국으로 오면서 고향 집에 남아있던 시인의 육필 원고와 습작노트를 가져와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사진도 챙겼지만 기차안에서 소련군에게 불심검문을 당하자 창밖으로 내던졌다고 한다. 고인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에 발간된 윤동주 시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출간)가 발간 후 문단의 관심을 끌자 서울에 살던 동생 일주씨가 누나에게 연락했던 것이다. 유고시집에는 당시 친구들이 가지고 있었던 작품 31편만이 실렸고, 현재 116편이 실린 증보판의 작품 중 85편이 혜원씨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윤혜원씨 부부는 6.25 직후 부산에서 고아들을 돌봤고 1986년 호주로 이민왔다. 그동안 오빠 윤동주의 생애가 지나치게 극화되거나 신비화되는 것을 꺼려 언론 인터뷰 등을 피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족은 부군 오형범씨와 2남 2녀이다. 유해는 한국 경기도 광주 가족묘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이은형 기자  ///한호일보   =======================   12월 10일(2011년도),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영면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여사가 2011년 12월 10일 오전 1시 20분 호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작고했다.   1948년 1월 30일에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이 실렸을 뿐인데, 1955년 중판에서는 그 수가 3배인 93편으로 늘어났다. 1976년 3판에서는 116편이 됐다. 이 증보판과 1999년에『윤동주 자필시고 전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 여사 부부의 덕택이다.   뒤에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교육문화원(전남 광주), 국제라이온스 포항지부 등이 후원단체로 참여하여, 시상비를 부담하고, 해마다 수상자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모국 방문을 시키고 있다. 특히 연세대학교는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이 인문학부에 합격시켰다.   이들 부부는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 봐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살았다. 그들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계속 옮겨 산 것도 그런 뜻의 실천이었다.   2003년 묘소를 개수한 뒤부터, 2005년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가 국내외에 열린 이후로는 윤동주와 관련된 사실과 에피소드, 추억담과 소감 등을 종종 밝혀 왔다.   윤혜원 여사는 “오빠의 시 중에서「서시(序詩)」를 제일 좋아한다”라며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라고 전했다.   장례는 시드니에서 치른 뒤 경기도 광주 가족묘원으로 안장할 예정이다. =====================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생명의 시인 윤동주'의 작가 다고 기치로가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찻집에서 열린 한국어판 출간기념회에서 유족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한국어 번역을 맡은 이은정 씨,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인 윤혜원의 딸 오인경 씨, 다고 기치로, '윤동주 평전'을 쓴 송몽규의 누나 송우혜 작가, 오인경의 남편 강석찬 씨. ///2018.4.16 =================   저항시인 윤동주의 마지막 핏줄 여동생 윤혜원 여사 별세                                                                                                                              본지 자문위원 신길우 수필가                                                               [편집]본지 기자                육필원고 가지고 와 증보판과 영인판 시집 발간           12월 10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영면         [서울=동북아신문]시인 윤동주(1917~1945)의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여사가  2011년 12월 10일 오전 1시 20분 호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작고하였다. 장례는 시드니에서 치른 뒤 경기도 광주 가족묘원으로 안장할 예정이라 한다. 유족으로는 부군 오형범 장로가 있고, 2남 2녀를 두었다.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한 윤 여사는 1948년에 오형범(吳瀅範)과 결혼하고, 그해 12월에 월남하면서 용정의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스크랩 철, 사진 등을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 왔다.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에 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1948년 1월 30일에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이 실렸을 뿐인데, 1955년 중판에서는 그 수가 3배인 93편으로 늘어났다. 1976년 3판에서는 116편이 됐다. 이 증보판과 1999년에『윤동주 자필시고 전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 여사 부부가 서울로 지참해 온 자료들 덕택이다.      윤혜원 부부는, 6․25 직후 부산에서 많은 고아들을 돌보면서 건축업에 종사하였다. 1970년에는 필리핀에 가서 사업을 하고, 1986년부터는 아들과 함께 호주 시드니에 정착하여 살았다.      또한 이들 부부는, 윤동주 시집을 읽고 감명을 받은 재미 동포 현봉학 박사가 주도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후원으로 1999년에〈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연변의 잡지에 발표된 중국조선족 중고등학생들의 작품 수백 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하여 왔다.      뒤에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교육문화원(전남 광주), 국제라이온스 포항지부 등이 후원단체로 참여하여, 시상비를 부담하고, 해마다 수상자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모국 방문을 시키고 있다. 특히 연세대학교는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이 인문학부에 합격시켰다.    윤혜원 부부는 2003년에는 용정에 있는 윤동주와 고종사촌인 송몽규의 묘소를 2개월여에 걸쳐 개수도 하였다.      윤동주는 3남 1녀의 장남이었다. 2남 윤일주(1927~1985)는 1946년에 월남하여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로 근무했는데, 많은 동시를 썼으나 형 동주에게 누가 될까 발표를 않다가 아들 윤인석(수원대) 교수가 엮어 1987년에『민들레 피리』로 정음사에서 발간했다. 3남 윤광주(1933~1962)는 시인으로 현재 24편이 알려져 있다. 윤혜원(1923년생)은 마지막 혈육으로 평생을 오빠 윤동주를 위한 여러 활동을 남편과 함께하며 살았다.      윤혜원 여사는 “내 남편 오형범 장로에게 절하고 싶다”고 했다. 오늘의 윤동주가 있기까지에는 오형범 장로의 공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이들 부부는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 봐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살았다. 그들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계속 옮겨 산 것도 그런 뜻의 실천이었다.    2003년 묘소를 개수한 뒤부터, 2005년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가  국내외에 열린 이후로는 윤동주와 관련된 사실과 에피소드 추억담과 소 감 등을 종종 밝혀 왔다.                                우리의 ‘아리랑’과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자주 불렀다는 윤동주,  "오빠의 시 중에서「서시(序詩)」를 제일 좋아한다.“는 윤혜원 여사는,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도 말했다.      
8    윤동주와 "소금물" 댓글:  조회:3210  추천:0  2018-08-04
  1980년대 초반 월간 문예지 이었던  일본인 고오네 에이치(鴻農映二)씨는 1980년 10월호에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라는 글을 통해 윤동주는 '생체실험'의 대상이었으며 주사를 맞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 후배인 정병욱 교수 등의 증언을 실었다    ▲ 2009년 8월15일 방영된 SBS 광복절 특별판  학창시절 축구 선수로 활약했을 정도로 건강했던 윤동주 시인은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지 1년도 안 되어서 사망했다. 사망을 전후한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그가 생체실험에 희생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立教大学]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함께 일본 유학 길에 오른 고종사촌 단짝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사학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릿쿄대학에 진학한 지 한 학기만인 그 해 10월 윤동주는  송몽규가 있는 쿄토의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입학을 한다. 도지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한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1943년 , 윤동주는 도지샤대학  영문과 동기들과 함께 교토의 한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우지강 아마가세 구름다리에서 찍은 사진  한 달 뒤인 7월 14일, 일본 경찰에 붙잡힌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 받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사촌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4일 전인 7월 10일에 붙잡혔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감옥에서 순국했다. 해방을 불과 반 년 앞두고 그는 스물일곱의 생애를 마쳤다.  1945년 2월. 윤동주의 고향집에 한 통의 전보가 배달된다. ‘16일 동주 사망, 시신 가지로 오라.’      용정서 대한해협을 건너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찾아가 시장례식인계받고, 현지에서 화장하여 다시 돌아와야 했다  윤동주 장례는 3월 6일 치러진다. 약 20일이 걸렸다.  문익환의 부친인 문재린 목사의 주관으로 어릴 때 뛰놀던 마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 윤동주의 장례식   윤동주가 어린시절 뛰놀던 마당에서 윤동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영정 왼쪽 첫 번째 사람이 문재린 목사(문익환의 부친)다. 사진에는 장례식 날짜와 사망 날짜, 29세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1945년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후쿠오카 형무소에 갔던 이는 그의 당숙 윤영춘(가수 윤형주의 부친.윤형주는 윤동주의 육촌 동생이 된다.). 그는 윤동주와 함께 수감 중이던 동주의 고종사촌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당시 송몽규가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고 전했다고 증언했다. 송몽규도 3주 후 옥사했다.  문제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다는 의문의 주사다. 이에 대해 일본인 문학평론가 고노 에이지 는 ‘그 의문의 주사’는 당시 규슈제국대학에서 실험하고 있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당시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제는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일본인 간수들은 ‘하루만 늦게 왔어도 시체를 실험용으로 가져갔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시신 기증이 예정됐던 곳 역시 규슈제대였다.  생리식염수 대신 바닷물을 주입한 규슈제대의 실험을 감안하면 윤동주가 맞았다는 주사 역시 ‘바닷물’일 가능성이 크다.  약리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인체에 바닷물을 주입할 경우, “바닷물에 포함된 동물성 플랑크톤 등으로 인한 세균 감염이 발생할 수 있고, 뇌까지 혈액이 전달되면 혈액이 뇌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 때의 증상이 뇌일혈과 같다.”고 한다.  같은 시기 후쿠오카 감옥에서 수감자들이 주사를 맞은 뒤 받았다는 ‘암산 테스트’는 현대의학에서도 임상실험의 부작용을 알아보기 위해 널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암산은 ‘신경기능을 통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판단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RA)에서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을 확인한 결과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대에서 실시한 미군 대상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한다.   1945년 5월 추락한 미군 B29 폭격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 11명이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이들 중 여섯 명은 산 채로 해부된 뒤 소각되었다. 규슈제대 의학부는 산 사람의 혈액을 뽑아낸 뒤 바닷물을 주입하는 생체실험을 진행했던 것이다  첫 시집 가 출판된 것은 해방 3년 후, 1948년이다. 31편의 시를 싣고 있었던 정음사판에 이어 1955년에 10주기에 93편의 작품을 담은 유고시집이 간행되었다.     규슈제국대학에서의 생체실험을 다룬 소설이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샤쿠(遠藤周作)의 이다.  규슈제대에서 행해진 미군 포로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다루고 있다. 이 끔찍한 생체실험은 집도 책임자였던 이시야마(石山)라는 의사였는데 그는 종전 뒤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취조 받다가 자살해 버렸다. 그의 죽음과 함께 이 실험의 전모는 묻혀 버렸다. 이때 기소된 30여 명의 관계자는 교수형과 무기징역 등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출처] 윤동주 시인 여동생 윤혜원 여사 생전 증언 "일본 생체실험 주사 주입이 우리 오빠 사망 원인"|작성자 몽드메  
7    [작문써클선생님께] - "사과" 이야기 하나 해볼가요... 댓글:  조회:3645  추천:0  2018-08-04
★ "사과" 비밀 이야기 하나 ★ 새 왕비는 백설공주에게 사과 한 개를 주었어요. 공주는 일곱 난쟁이들이 돌아오기 전에 사과를 먹기 시작했어요. 일곱 난쟁이가 집에 돌아왔을 때 백설공주가 쓰러져 있었어요. 그리고 공주의 옆에는 먹다 남은 사과가 있었죠. 일곱 난쟁이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사실 새 왕비가 준 사과에는 마법이 걸려 있었어요. 어떤 마법이냐고요?  여러분에게만 살짝 알려 줄게요. 이, 이런. 백설공주가 욕심을 내다 그만...  일곱 난쟁이와 나누어 먹었다면 쓰러지지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만약 지금 여러분에게 사과가 있다면 누구와 나누어 먹고 싶은가요? 맛있는 사과를 나누어 주고 싶은 소중한 사람. 과연 누구일까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고마운 친구? 나를 아주아주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정말 소중한 사람입니다.”
6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사과 댓글:  조회:2273  추천:0  2018-08-04
                     詩人 윤동주           ※ 필명은..         동주(童舟, 童柱)입니다.          한자로는 두 가지입니다.         본명인 東柱는 '동쪽의 기둥' 이라는 의미이고,         필명인 童舟는 아이동 자에 배주 자를,         또 한 개인 童柱는 아이동 자에 기둥주 자를 썼습니다.          Mizmor S린.이 참말로 사랑하는 詩입니다.         여기에선 한글 맞춤법 규정에 따르지 않고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나의 習作期의 詩 아닌 詩'에 써진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詩人이 스무살되던 해(1936년), 12월 중의 기록으로 잡습니다.         앞서 기록된 詩 끝에 '一九三六. 十二月'이라고 끝맺음이 되어있고, 이어 기록되었거든요.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아픕니다.           그래서 눈물이 나는 시랍니다.         그대로 일상의 곤궁함이 뼈 속으로 아주~ 살며시,          그러나 너무도 선명하게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슬프지만,          아름답게 보듬어지는 한 가족의 사랑이...         붉은 사과 한 개 속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비참했던 우리 민족의 삶이 생생히 묘사된 사실문학이라 한다면,         ... 어려운가요?         이 한 편의 시 속에 담긴  가족의 애틋한 사랑은 너무도 귀합니다.          마치 진흙 속의 진주 처럼 가족 간의 사랑이 매우 고결한 빛을 냅니다.          제 눈엔, 제 가슴엔 그렇게 보입니다.                                 "붉은 사과 한개를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넷이서                        껍질채로 송치까지                        다ㅡ 나눠먹었소."                                                           /윤동주                                 이 시는 1930년대~40년대의 고통받는 민중의 사회상이며,          또 인간, 특히 가족 관계 속의 情(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시입니다.         단순히 개인주의적 낭만시, 서정시를 지나,          아이들을 위해 쉽고 예쁘게 씌어진 童詩를 지나,          이에서 더 나아가 민족의 歷史요, 人間事, 苦海 속 사랑의 의미를 또한 봅니다.          제도와 권력의 횡포가 낳은 불평등 사회의 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         억압받는 약자 계층이 필연적으로 앓을 수 밖에 없었던 탈출구 없는 빈곤...         이러한 일이 어찌 오래 전, 일제 치하 뿐이겠습니다?          그 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 있다라면...         이젠 사과 한 개를 껍질 채로 송치까지 다아 나눠먹은 일가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 때보다 더한 정서적 폭정과 학정 속에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사로잡고서 우리의 영혼을 핍절하게 만드는 것은 더 이상 일제가 아닙니다.           이 소중한 가족의 사랑을 빼앗고 입에 담지못할 온갖 패륜을 돌려주는 사회...          참 슬픈 세상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 사랑이 있다면 희망이 있을 것을...          과연 이 시대가 빼앗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처한 이 곤궁하고 괴로운 상황 속에서         소망하고 되찾아야 할 것이 있다면 풍요가 아니라          나를 돌보며 너를 위하는 바로 이 '사랑'이겠습니다.         나만 먹이지 않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넷이서 다~ 나눠 먹습니다. 껍질 채로 송치까지...                             단순히 참여적 측면에서 제 감상을 이해하진 말아주십시오.         혹이라도 시가 너무 맑고 아름다워서 그 맑은 물줄기 속에서         고통의 맥박을 듣지 못하실까 하여 편중하여 말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진실로 이 詩가 전해주는 아름다움은          고통스런 현실을 이기는'사랑의 힘'임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가 '동주의 詩, 사과'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     ===================     윤동주 빗자루     요오리 조리 베면 저고리 되고 이이렇게 베면 큰 총되지. 누나하고 나하고 가위로 종이 쏠았더니 어머니가 빗자루 들고 누나하나 나하나 엉덩이를 때렸소 방바닥이 어지럽다고ㅡ 아아니 아니 고놈의 빗자루가 방바닥 쓸기 싫으니 그랬지 그랬어 괘씸하여 벽장속에 감췄드니 이튿날 아침 빗자루가 없다고 어머니가 야단이지요       이 시는 방바닥을 어지럽혀서 엄마에게 빗자루로 맞자 빗자루가 방바닥을 쓸기 싫어서 누나와 나의 엉덩이를 때렸다고 생각하고 벽장 속에 감춰두니 엄마가 이튿날 아침에 빗자루가 없다고 야단한다는 내용이다. 동시이지만 핑계를 빗자루에게 두는 관점을 달리하여 표현하는 솜씨가 있다. 누나와 나는 종이를 가위로 베어서 저고리를 만들고 총을 만들고 놀면서 방바닥을 어지럽히니 어머니가 빗자루로 누나와 나의 엉덩이를 때려서 어머니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빗자루를 벽장 속에 감추었더니 다음날 아침에 어머니가 빗자루로 청소를 하려다 빗자루가 보이지 않자 빗자루를 찾는 야단을 한 것을 동시로 표현한 것이다. 관점은 어린 아이다우나동시의 특성인 운율이나 대구 등은 보이지 않는다./전한성   윤동주 빨래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하는 오후   쨍쨍한 7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     이 시는 고요한 7월의 오후에 빨랫줄에 널려 있는 흰 빨래들 중에 작은 빨래만 빨리 마른다는 내용이다.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하는 오후’는 오후의 시간을 묘사한 것으로 흰 빨래를 의인화하여 표현했다. ‘두 다리를 드리우고’는 땅을 향하하여 펼쳐저 있는 모습을 말하고 ‘귓속 이야기하는’은 고요한 상태임을 말한다.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는 고요한 상태에서 쨍쨍한 햇빛을 활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오후에는 크기가 작은 아담한 빨래만 마른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전한성     윤동주 사과     붉은 사과 한 개를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넷이서 껍질 채로 송치까지 다아 나눠 먹었소.   이 시는 붉은 사과 한 개를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네사람이 껍질 뿐만 아니라 송치(사과의 내부에 씨가 있는 곳)까지 알뜰하게 나누어서 먹었다는 내용이다. 가족이 공동체로 사과 한 개도 나누어 먹는 가족애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과가 몹시 귀한 것이어서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나누어 먹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껍질과 송치까지 먹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붉은 사과’가 당시에 관습적인 상징으로 쓰인 것인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전한성     ===================@@ 여기서 송치는 원래 옥수수 이삭의 속을 뜻하는 말이지만 이 시에서는 사과 씨가 있는 딱딱한 부분을 뜻한다.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시대는 일제 강점기이다. 그 당시에는 일제의 탄압에 먹을 것이 많이 부족했던 때이다. 윤동주 시인의 사과라는 시는 그런 상황에서 사과 한 개를 껍질부터 속까지 남김없이 나누어 먹는 가난한 가족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게 하는 마음아픈 시이다.  
5    [록색평화주의者] - "백두산 호랑이 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032  추천:0  2018-08-04
[르포] '멸종 위기' 백두산 호랑이가 돌아왔다! 강민수 2018.08.04.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앵커] 남한에서는 멸종됐고, 북한에서도 거의 사라진 백두산 호랑이. 요즘 중국에서는 이 야생 호랑이의 개체 수가 크게 늘고 있는데요. 세계 최대의 호랑이 국가공원까지 건립중입니다. 강민수 특파원이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중국 헤이룽장성 동북부에 위치한 라오흐어셴, 러시아 국경 근처인 이곳에서 최근 야생 호랑이에 의한 피해가 극심합니다. [리카이중/말 농장 관리인 : "밤 11시쯤 말 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호랑이에게 물려간 말은 큰 말이에요."] 가축들이 습격당한 또 다른 작은 웅덩이 주변으로는 호랑이 발자국이 선명합니다. 야생 호랑이가 많아지면서 일반인들도 쉽게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너 여기 서서 뭐하니! 그래 가! 가!"] 가정집 뒷마당에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말 아름답다! 일어나지마! 돌아와!"] 중국 환경 당국이 야생 호랑이 보호 육성을 위해 조성을 시작한 호랑이 국가 공원, 동쪽으로는 러시아 국경, 남쪽으로는 북한 두만강 접경까지 만 오천 제곱킬로미터 규몹니다. 그 결과 한때 밀렵과 난개발로 인해 멸종 위기였던 야생 호랑이는 최근 50여 마리까지 증가했습니다. 지난 7월 23일 밤 호랑이 국가 공원 관리국이 설치한 무인 카메라에 찍힌 호랑이 모습입니다. 중국 당국은 수십만 개의 카메라와 관측장비를 설치해 호랑이의 이동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가오다빈/호랑이 국가공원 훈춘관리국 처장 : "최종의 목표는 장백산(백두산)에 호랑이가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한 세대, 안되면 여러 세대의 노력으로 말이죠."] 호랑이에게 국경은 없습니다. 러시아 그리고 중국에 존재하는 한 한반도로의 복귀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북중러 3국 접경지대 훈춘에서 KBS 뉴스 강민수입니다.
4    [그것이 알고싶다] - 신비한 "얼음골" 댓글:  조회:4303  추천:0  2018-08-04
"이 폭염에 얼음이 꽁꽁?".. 신비한 '밀양 얼음골' 최진석 2018.08.04.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앵커] 극한 폭염속에도 경남 밀양 얼음골에선 주먹만한 얼음 기둥이 관측됐습니다. 신기한 건 이례적인 더위 속에서도 이 얼음이 평년보다 더 오랫동안, 꽁꽁 얼어있다는건데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최진석 기자가 소개합니다. [리포트] 경남 밀양 재약산 해발 600m. 불볕더위에 바깥 온도는 36도를 넘어섰지만 바위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나옵니다. 바위 안쪽 온도를 재보니 서늘한 가을 기온인 9.2도. 바위 틈엔 주먹만한 얼음 기둥까지 있습니다. 이 지역의 명소이자 천연기념물 224호인 얼음골입니다. 불볕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시원한 바람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미경/부산광역시 북구 :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참 많이 힘들었는데, 너무 선선한 바람이 부니까 너무 너무 좋아요."] 바위 틈에서는 에어컨을 틀어놓은 것처럼 차가운 자연 바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열화상카메라로 온도를 재보니 1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곳의 얼음은 보통 장마철인 6,7월이면 다 녹아 없어지지만 올해는 계속되는 폭염의 상황에도 더 꽁꽁 얼어붙은 채 남아있습니다. [변희룡/부경대 지구환경과학과 명예교수 : "10여 년 관측했는데, 올해 얼음이 가장 오래 관측됐거든요.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면씻겨지는데 장마철에 비가 많이 안왔어요."] 기록적인 폭염 속에 더위를 식히려 지난달에만 2만 여명이 찾은 밀양 얼음골. 신비로운 비밀을 간직한 채 더위에 지친 이들의 색다른 피서지가 되고 있습니다. KBS 뉴스 최진석입니다.
3    [바로 잡아야 합니다] - 윤동주 시 "편지"가 오도되고 있다!... 댓글:  조회:2462  추천:0  2018-08-04
평소에 늘 궁금하게 여기던 사안이었는데...  컴의 여러 카페, 블로그 속을 뒤지다보면 윤동주 의 " 편지" 란 시가 오도되여 띄워져 있습니다.  저두 그 노래의 원 詩가 윤동주가 지은 것인지 궁금했었는데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에는 그런 내용의 시가 결코 없습니다.  대신 동일한 제목인 "편지"가 있긴 하죠. 인터넷을 여기저기 다 뒤져봐두 모두 앨범에 실린 "편지"의 작가가 "윤동주"라고 나와있는데 만일 윤동주의 "편지"가 아니라면 다 바뀌어야 할 듯 싶습니다.  무슨 원인으로 왜곡되였는지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함을 대성질호 합니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오도된, 왜곡된 시를 윤동주 시로 둔갑해가지고  배워주고 배우고 있다는 자체가 민족 시인, 저항 시인 윤동주에 대한 모독임을 절실히 반성해야 지당하다고 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 실린 윤동주의 "편지" 입니다.  누구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계신 분 계시면 답글이나 꼬리말 부탁드릴게요. 아래에 윤동주 시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지 /윤동주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가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1936.12.(추정) ( 참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원문 그대로 수록 )    ====================/// @@ 오도되여 "류행"되고 있는 "편지"...   편지 /(김상규?) 詩 : 윤동주 / 作曲 : 고승하 / 노래 : 안치환 그립다고 써 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 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은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 만 쓰자 그립다고 써 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 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 만 쓰자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 만 쓰자 ==============역시 ??? 편지                                        윤동주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낫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어   진정 못 잊는 다는 말은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은 말고   가다가 그리울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윤동주- =======================///@@     는 윤동주가 지은 동명의 시가 있어서 혼동된 듯하다. 필자불명의 와는 달리 윤동주의 시는'흰 봉투에 눈송이를 넣어 누나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다'는 내용의 시이다.아래가 잘못 알려진 필자불명의 의 전문.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그리고 이것이 윤동주 시인의 이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온다기에  1936.12.(추정)          
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편지 댓글:  조회:3741  추천:0  2018-08-04
윤동주 -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1936.12. (추정).   윤동주 시인의 시 "편지"는 죽은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내용입니다.   윤동주에겐 사실 누나가 없는 걸로 저자는 알고 있습니다. 밑으로 여동생 "혜원"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꼭 이 詩에서 말하는 누나는 친누나가 아니라고 합시다...  물론 교과서 식으로 말한다면 누나는 "조국"이란 의미도 되겠지만..  저자는 "조국"을 제외한 상태에서이야기 하겠습니다...  (청년 윤동주에게도 애틋한 로맨스가 분명히 있었다는 아니면 어린시절 연민의 대상이 있었다는 가정하에) 이 詩의 소년의 누나는 분명 소년이 있는 곳을 떠나 있습니다  소년은 너무나도 그리운 누나에게... 보낼 편지로 누나가 좋아하던..  눈을 담아 보내고 싶습니다 "글씨도 쓰지 말고/우표도 붙이지 말고/말쑥하게 그대로/편지를 부칠까요 하지만 누나는 편지가 닿지 안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운 이에게 ... 소년은 그렇게 편지를 띄우고 있었습니다.   ==============/// 이 작품은 그의 나이 19세 무렵 쓰여졌다 하겠다 . 누이가 가신 나라에 눈이 오지 않아 그 누이 같이 희고 고운 눈을 보내고져 하는 시인의 동심적인 글. 군더더기 없는 하얀 눈처럼 덧 붙침 없이 말쑥하게 부칠까요? 하고 물어보는 시인이 누이에 대한 배려. 일방적인 자기 생각으로만 강요하는 세태에 비하면 얼마나 말쑥한가.  윤동주 시인은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소망 하며 늘 시 마다 부끄러워 했다.   ============================///    
1    다시 보는 윤동주 댓글:  조회:3384  추천:0  2018-08-04
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향년 27세) 파평 윤씨. 윤동주(尹東柱)  시인, 작가, 독립운동가 아명 윤해환(尹海煥) 출생 1917년 12월 30일 사망 1945년 2월 16일(향년 27세) 출신지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북간도 명동촌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 시) 사망지 일본 제국 후쿠오카현 후쿠오카 형무소 학력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 중퇴 도시샤대학 문학부 제적 가족 윤영석(父), 김용(母) 종교 개신교 (장로회)   1. 소개2. 생애 2.1. 사망과 의혹 3. 사조4. 성격과 일화5. 작품 5.1.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 6. 중국의 자국 시인화 6.1. 윤동주와 코리안 디아스포라6.2. 한국인과 조선족간의 민감한 문제 7. 기타8. 참고 항목   1. 소개[편집] 동주야.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그 앞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습작기 작품이 된단들 그게 어떻단 말이냐 넌 영원한 젊음으로 우리의 핏줄속에 살아 있으면 되는 거니까 예수보다 더 젊은 영원으로 동주야  난 결코 널 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니 1987년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 시인(詩人)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한 일제강점기의 저항(항일)시인이자 독립운동가다. 윤동주가 사망한 지 6달이 지나서 일제로부터 독립했으므로 생전에 조국의 독립을 보지는 못했다.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의미인 ‘해환(海煥)’. 동생인 윤일주는 ‘달환(達煥)’, 갓난아기 때 세상을 떠난 동생은 ‘별환’이다.(윤동주의 막내 동생은 윤광주였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지내다 1965년에 사망한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대한민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전설적인 문인이다. 더군다나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의한 문인들의 절필, 변절이 심화되어 1940년대쯤부터는 다수의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했기 때문에, 윤동주는 이육사와 더불어 194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고작 김일성 회고록에 '시인 윤동주는 평양 숭실학교 졸업생이다' 정도로 매우 간단하게 쓰여진 게 전부이며 한국 학생들처럼 그의 시를 공부하거나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연구가 정체되어 있는 북한 국문학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2017년 12월 30일,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다. 2. 생애[편집] 만주 북간도 명동촌 일대, 지금의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에서 기독교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윤영석(尹永錫)과 어머니 김용(金龍)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촌(동쪽은 조선을 의미, 즉 조선을 밝히는 마을이란 뜻)은 윤동주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그 마을의 실질적인 정신적 리더는 목사인 김약연이었는데, 그는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일제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 민족의 지도자를 신앙으로 양육한 외숙부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자랐다. 항일과 통일 운동으로 유명한 민족주의자 문익환 목사도 바로 이 명동촌 출신이며,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참고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도 거사전 이 명동촌에서 사격 연습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알려져 있다.  명동촌 사람들은 항일 감정으로 인해 일본을 일본이라 부르지 않고 왈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1] 이 때문인지 윤동주는 18살인 1935년 평양에서도 일본 순사들 멱살 잡기가 연일 화제였던 숭실학교[2]로 건너왔으나 일제가 신사참배운동을 강요하자 문익환 등과 함께 동맹 퇴학을 감행한다.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를 자퇴함으로써 드러낸 것이다. 숭실학교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38년 3월 19일에 정식으로 폐교한다. 유소년 시절 대부분을 만주에서 보냈기에, 윤동주의 시에는 만주, 북간도에 대한 묘사가 빈번하다. 별 헤는 밤이 대표적이다. 숭실중을 거쳐 진로를 결정할 무렵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 문과[3]로 진로를 정하고, 경성에 있는 연희전문학교 문과(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진학을 희망한다. 연희전문학교는 민족주의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태극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문학은 민족사상의 기초 위에 서야 하는데 연희전문학교는 전통과 교수, 학교의 분위기가 민족적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야." 라고 후배에게 이야기 할 정도. 당시에도 연희전문 문과는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연희전문 문과는 일제강점기 때 국학 연구의 중심이었던 학교이기도 했다. 이때 학과 문제로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문과 졸업하면 신문기자밖에 더 되냐' 는 반대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의대나 법대를 원했고, 윤동주는 문과를 고집하여 매일 이 문제로 밥그릇, 물그릇이 날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아버지와의 싸움을 말리고 고생 끝에 윤동주는 문과로 진학을 가게 된다. 실은 할아버지도 아버지에게 동의했으나, 너무 싸움이 심해져 어쩔 수 없이 중재에 나선 모양. 결국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로 진학에 성공, 서울에 살던 시기에 많은 명시가 쓰였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전횡이 갈수록 심해지던 시기 무사히 졸업하고, 졸업 후 학문에 대한 열의로 유학을 결정, 1942년 일본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흉흉해진 도쿄의 분위기로 인해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하지만 그는 함께 교토에서 조선인 유학생으로 지낸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1943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윤동주의 시에 담겨 있는 독립 의지로 인해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고, 여러 자료 등을 통해 살펴보면 이미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송몽규는 일제의 요시찰인이었다. 송몽규가 교토에서 사촌이자 유학생인 윤동주, 교토3고학생 고희욱과 어울리며 조선독립, 민족계몽에 대해 논의했고 특히 "징병제를 이용,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즈음 무력봉기를 일으켜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윤동주가 이에 동의해 위 3인 외 다수의 조선인 유학생이 더해진 민족주의 그룹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파악한 일본 경찰은 송몽규, 윤동주를 포함한 조선인 유학생 그룹을 체포한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일본 내무성 1943년 12월 특고월보, 일본 사법성 사상월보 109호, 교토지방재판소 송몽규, 윤동주 판결문에 나와 있다(번역본은 송우혜 저 '윤동주 평전'수록) 윤동주, 송몽규와 같이 투옥되었던 고희욱은 제3고등학교 재학생이었는데, 담당검사가 다름 아닌 3고의 선배. 독방에 수감되었지만 기소유예로 6개월 만에 풀려났다. '윤동주 평전'의 저자 송우혜 씨가 생존한 고희욱 씨를 직접 만나 관련 증언을 듣고 평전에 실었다. 수감 후 윤동주는 2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수감된 뒤 1년 7개월 뒤인 1945년 2월 건강이 악화되어 뇌일혈로 병사했다. 불과 광복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죽기 직전, 윤동주가 무언가를 말했지만 일본인 간수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하는데, 어떤 전기에서는 한국어가 아니었겠느냐고 추측하고 있고 '아'라는 외마디의 소리였을 가능성도 있다. 윤동주 사후 육필 원고를 바탕으로 펴낸 에 친구 강처중이 그를 생각하며 쓴 발문엔 당시 간수가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온 유족들에게 마지막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고 전했다고 한다. 2.1. 사망과 의혹[편집] 당시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는 정말 건강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윤동주가 복역 중 생체실험을 당해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있다. 윤동주는 실제로 복역 중에 어떠한 주사를 자주 맞았고 함께 수감된 고종사촌 형이자 친구 송몽규 또한 이 주사를 자주 맞다가 1945년 3월 7일 급사했다. 윤영춘이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후쿠오카 교도소에 들를 당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동주와 나는 계속 주사를 맞고 있어요.그 주사가 어떠한 주사인지는 모릅니다." 라는 말을 하여 오래 전부터 살해당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많았다. 그리고 1980년 5월호 현대문학지에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고노오 에이치씨가 윤동주와 송몽규가 혈액대체 실험을 위한 실험 재료로 쓰여서 사실상 살해당했다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윤동주의 죽음과 얽힌 음모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일본군은 전시 체제라 생리식염수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후쿠오카 형무소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괘씸죄로 윤동주가 실험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윤동주에게 주사한 물은 다름 아닌 후쿠오카 앞바다의 바닷물로, 일본군이 연구하던 이런 생리식염수 연구는 이미 십 수 년 전 유럽에서 동물에게 실험하여 이미 검증이 끝난 실험이었다고... 731부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일본군은 파시즘에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으므로 윤동주의 죽음에 대한 이 설은 설득력있게 받아들여 지고 있다.바닷물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혈관으로 들어가는 점은 엄연히 다르다. 위생상 두 방법 다 안 좋긴 마찬가지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건 토하거나 나중에 배변으로 나올 수 있지만, 살균작업을 거치지 않은 무수한 세균이 득실거리는 바닷물이 영양실조 상태의 인간 혈관에 주사된다면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2000년대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해제 문서 중에서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문서에 당시 큐슈제국대학이 실제로 연구하고 있던 대체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생리식염수 대체용액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쓰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혈장대체용 생리 식염수이다. 이것은 전쟁 당시 수요 때문에 미국도 연구한 것인데, 다만 일본의 경우는 기술상의 문제로 해수를 생리식염수로 바꾸는 실험을 했다.기사 딱히 고문당한 일도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생체실험이 윤동주의 사인으로 유력하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당숙인 윤영춘이다.[4][5] 일각에서는 뇌일혈이라는 사인도 일제의 조작 아닌가 했지만 해수 속의 세균감염의 증상과 비슷한 것으로 확인된 상태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동주에서도 주사로 인해 사망했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던 주사로 인해 1800여명이 사망했다고 언급된다. 그렇지만 윤동주가 생체실험 희생자라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기사 주요 골자는 생체실험에 의한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3. 사조[편집] 시는 15살 때부터 썼고, 만주에서 지내던 시절의 시는 대체적으로 신변잡기를 소재로 삼은, 발랄한 형태의 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20세를 넘어가면서부터 점점 삶에 대한 고뇌, 조국의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고뇌가 시의 주제로 등장하게 되지만 30년대까지는 대체적으로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옛날의 평화로 돌아가고 싶다는 노스텔지어적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연희전문 시절인 1941년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삶에 대한 고뇌,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주제의식이 한층 더 강렬하게 표현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윤동주의 유명한 작품인 별 헤는 밤, 서시[6], 자화상, 참회록 등도 이 시기의 작품들. 더불어 그는 시를 쓴 날짜를 모두 적어둬 그의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집 는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지인 강처중, 정병욱 등이 윤동주의 자필본을 기초로 1946년에 출판했다. 세간에는 정병욱(1922~1982)이 이 시집 출간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아니고 경향일보 기자 강처중이 주도적이었다. 거기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등이 합세. 원래 19수의 시만 있던 시집(1946)이 31편의 시집(1948)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이 시집을 간행할 적 경향일보 주필이던 정지용이 도움을 주었으며 추천사를 써준 것도 정지용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 정지용과 강처중은 각각 납북, 월북 등의 사정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이름을 언급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바람에 정병욱 교수만이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윤동주의 7살 터울 여동생 윤혜원씨가 1948년 12월 고향 집에서 윤동주의 미발표시(85수)들을 품에 안고 내려와 현재의 116편의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 되었다. 그 밖에도 윤동주는 2권 분량이 될 시를 남겼으나 스승 이양하(1904~1963)에게 이걸 전해 주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분실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범우사(윤동주 시집) 참조. 기사1 기사2 4. 성격과 일화[편집]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의 성격은 같은 하숙집에서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의 회고록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가 있는데, 학교 갈 때나 사석에서 만나면 매번 옷이나 신발이 새것처럼 깨끗하고 반듯했다고 한다.   2016년 3월 6일 KBS에서 「불멸의 청년, 윤동주」가 방송되었다. 해당 방송분에서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1년 후배인 유동식 교수에 의하면 윤동주는 피부가 희고 깨끗했는데, 됨됨이 자체도 깨끗한 선비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시도 그렇지만 윤동주 자체가 맑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조용했지만 항상 미소 짓고 있었다고 한다. 발간되자마자 직접 구입해 이사할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는 정지용 시집에는 인상 깊은 구절에 옆줄을 치고[7]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적어놓은 글귀도 있다. 정지용의 시를 읽으며 동시를 재평가하게 되고, 자신도 동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유품으로 남아있는 책들을 보면 인상깊은 구절에 옆줄을 치고 중간중간 자신의 감상이나 소견을 메모한 흔적이 있다.   학창시절에는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며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배웠다고 한다. 북간도에서 기독교계 학교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라 일제가 학교 담장조차 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북간도에서 다니던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중학생 때는 '가톨릭 소년'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는 등, 어릴 적 그가 기독교 문화의 토양에서 자라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가 청년기를 넘어서까지 기독교 신앙을 간직했는지는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십자가' 등 그의 시들을 통해 유추해볼 때 적어도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된다. 간도에서 어릴 적부터 기독교계 학교를 다녔던 것이 추후 상급 학교로 진학할 때 서울 소재 기독교 학교인 숭실학교나 연희전문학교를 선택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에도 당시 일본에서 흔치 않던 기독교계 대학이었던 릿쿄대학[8]에서 유학을 했었는데,[9] 당시 교목(校牧)이었던 다카마츠 다카하루[10] 교수에게 특별히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윤동주는 남이 자신의 시를 지적하는 것에 따라 고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병욱의 지적이나 조언만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별 헤는 밤의 '그러나~'로 이어지는 마지막 연은 정병욱의 조언으로 추가된 것이다. 이 방송에서 정병욱의 회고록인 「동주 형의 기록」도 인용되는데, 그에 의하면 항상 남보다 먼저 느끼고 깊이 생각하고 무엇이든 예사로 넘기지 않았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거나 유심히 쳐다보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길가에 난 이상한 풀에 꽃이 피어있으면 꺾어서 단춧구멍에 꽂고 다녔다고 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육필 원고를 세 부 만들어 한 부는 정병욱에게 주고, 다른 한 부는 스승인 이양하 교수에게 전했는데, 제자의 안위를 걱정해 원고 출판을 만류했다고 한다. 한글과 한국어 모두 엄격히 금지된 시대에 한글을 사용해 한국어로 쓴 시를 출판한다는 것은 시인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것이었다.게다가 윤동주의 시를 보면 알겠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도 내포되어 있으니 스승으로서는 만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포기하지 못해서 용정의 아버지께 보여드렸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출판하지 못했다고. 학창시절에 이미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한다. 돈이 많아서 유학까지 간 것이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와중에도 계속 공부한 것이다.[11] 이때 윤동주는 300원(현대의 가치로 약 300만 원)이 없어 출판하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동기였던 모리타 하루에 의하면 키가 크고 항상 바른 자세였으며, 자신을 '윤동주'라 소개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학교 동기였던 기타지마 마리코에 의하면 동급생들에게 한국어로 아리랑을 들려준 적도 있다고 한다. 누군가가 윤동주에게 노래를 청하자 활짝 웃으며 한국어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약간 허스키하고 저음인 목소리였는데 노래를 잘 했다고 한다. 송몽규와 체포될 당시에는 1년 가까이 일본 경찰에게 미행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1년 동안 미행한 끝에 내건 죄목이 '독립운동(개정치안유지법 5조 위반)'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시는 편지와 함께 강처중에게 보내 무사할 수 있었는데, 정병욱이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항아리에 담은 뒤 마루 밑에 묻어서 보관했고 편지는 모두 태웠다고 한다. 윤동주와 그 가족들의 묘는 문화대혁명 때 파헤쳐지는 바람에 소재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1985년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나선 오무라 마츠오 교수가 비석을 찾아내면서 다시 윤동주의 묘가 드러났다. 발견 당시 무덤은 봉분조차 없었고 완전히 버려져 폐허였다고 한다.   위의 방송에서 2010년에 공개된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도 나왔는데, '조선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 '장래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게 될 때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봉기를 결행해야 한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를 위한 것이라는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한다.' 등 윤동주의 독립 의지와 저항정신이 엿보이는 구절이 여럿 있다.   강처중에 따르면 소심하고 좀체 말이없는 성격탓에 친구가 없을것이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의 방엔 친구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낮이고 밤이고 친구들의 부름에, 산책권유에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도 별말없이 그저 묵묵히 걸었고 얼굴은 침울했다고 한다. 그도 가난했지만 항상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들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해서 항상 그의 외투와 시계는 부지런히 전당포를 드나들었다고 한다.   책을 볼 때는 책에 줄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정독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전시물자수탈에 의해 학교 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양과 맛임에도 불구하고 배고파하는 후배들에게 밥을 나눠줬다고 한다.   시내에서 영화를 본 날이면 중국집에서 한잔하기도 했는데 술에 취해도 남의 뒷담화 한 일이 없었다.   밤에 공부나, 시를 쓰다가 산책을 즐겨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후배 정병욱을 불러서 같이 산책을 갔다고. 정병욱이 5살이나 어린 후배임에도 반말을 전혀 하지 않고 '정 형' 이라 부르면서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가 자신의 친필 원고 1부를 정병욱에게 맡길 때, 표지에 '정병욱 형 앞' 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볼 수 있다.[12]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도, 지금의 기준으로도 엄청난 미남이기에[13], 일본유학 당시 여러 일본 여인네들을 울렸다는 도시전설도 존재한다. 이 때문인지 백석과 임화, 황순원과 함께 수업시간에 여학생들에게 자주 관심을 받는 시인이다. 윤동주를 회고한 글에 이렇게 쓰여 있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 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美男)이었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中)   잊지 못할 윤동주를 여기서 볼 수 있다.http://felicityk.egloos.com/1260659   5. 작품[편집]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14] 서시(序詩) 자화상(윤동주) 소년 눈 오는 지도 돌아와 보는 밤 병원(윤동주) 새로운 길 간판 없는 거리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십자가 바람이 불어 슬픈 족속 눈감고 간다 또 다른 고향 길(윤동주)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15] 참회록 간(윤동주) 황혼이 바다가 되어 국어영역에서 꽤 자주 나온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이 많고, 주제의식 또한 분명한 데다[16], 1940년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민족 시인인 이육사의 시보다는 은유의 난이도가 낮고, 이상(작가)처럼 시에 어려운 기교를 부린 것도 아니기에, 수험생들에게 사랑받는 작가 중 하나.[17] 시에 담긴 주제의식 또한 학생들에게 상당히 건전하고 권장할 만하기에, 출제위원들도 잘 출제하는 듯. 다만 자주 나오는 만큼, 내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위에서 말한 사실이지만, 친일 행적이 없는 작가이기에[18][19] 유난히 출제위원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소문이 있다. 2011년 수능에서도 그의 시 이 또 출제되면서 모든 장르의 작가를 통틀어 수능에서 가장 많이 출제된 작가가 되었다. 또 그의 시가 일본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20] 시인 백석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듯.[21] 5.1.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편집] 인 것으로 확인되었다.">[22], 김소월의 , 필자불명의 의 가사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노래를 지은 작곡가 고승하도 문방구 노트 표지에 인쇄된 시와 당시 학교에 적응을 못해 자퇴하려던 학생이 편지처럼 쓴 시에서 영감을 얻어 곡을 만든 것. 노래가 완성된 시기가 1984년이니 꽤 오래전부터 오해가 시작된 듯하다.">[23] 등 특히 는 윤동주가 지은 동명의 시가 있어서 혼동된 듯하다. 필자불명의 와는 달리 윤동주의 시는 '흰 봉투에 눈송이를 넣어 누나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다'는 내용의 시이다. 아래가 잘못 알려진 필자불명의 의 전문.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그리고 이것이 윤동주 시인의 이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온다기에 심지어, 잘못 알려진 시를 부산일보에서 확인도 안하고 기사에 실었다.#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을 바로잡는 기사도 있는데, 윤동주 作이라고 아는 시들과 대조해 보는 것도 좋은 일.# 6. 중국의 자국 시인화[편집] 윤동주의 묘소는 윤동주가 태어난 북간도에 있는데, 윤동주가 죽은지 얼마 안 되어 해방이 되고 관동군이 무너지고 소련군이 쳐들어오고 만주가 공산화되는 현실속에서 윤동주의 가족과 친인척들은 모두 북간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40년 넘게 북간도에 방치되어 있었다.[24] 그러다 어느 일본인 교수가 마침 중국에 가게 되자, 유가족들이 그의 묘소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다행히 윤동주 묘소가 찍힌 사진을 유가족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92년 한-중 국교가 수립된 뒤 육촌동생 윤형주가 재종형인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갔더니[25] 풀이 무성하고 비석이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석도 세우고 묘소도 제대로 정비했다. 그런데 생가와 묘소를 새로 꾸미는 과정에서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포장해 버리고 조선족들은 그를 중국 조선족이라 주장하고 있는 실태다. 윤동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명분이 섰다 "명분이 섰다" 라고 운운하는데 주목하자. 中 동북공정이 덧칠한 항일시인 윤동주 생가 대문 경계석에 '중국 조선족'으로 국적 바꿔 / 대표작 '서시'도 한자로 번역한 조형물 설치 6.1. 윤동주와 코리안 디아스포라[편집] 중화인민공화국법상  은 이라는 명확한 합의를 가지고 있다.[26] 재만 조선인들의 조선족이라는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는 대장정 이전의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아닌 인민공화국 건국, 즉 1949년 10월 1일 이후부터다. 따라서 윤동주는 조선 출신 재만 조선인의 후예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상단에서 서술한 중국측의 공작과 같이 중국 국적을 소유한 "조선족"이 아니다. 윤재옥은 고종 즉위 22년인 1886년 북간도로 이주했고 그의 증손 윤동주는 1917년에 출생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사망했다. 윤동주는 그렇다면 한국인인가?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으며. 한민족으로서의 민족개념 외에 국가로서의 근대 한국(韓國) 개념은 개화기인 1897년 8월 17일 광무 건원 대한제국[27] 시기부터 문헌상 실질상 양면 모두에서 존재하였다. 윤동주가 디아스포라 조선인으로 윤동주 생전에 한국의 개념이 부재했기에 윤동주는 한국인이 아니고 되려 현대에 일컬는 조선족의 정체성과 직접적 연관점을 찾을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 또한 현재 조선족은 남북한의 국적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시문학의 현대 연구에서 만주, 중국지역 대비 재일 조선인 측에 코리안 디아스포라적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례가 훨씬 많은 원인 중 하나다.[28] 6.2. 한국인과 조선족간의 민감한 문제[편집] 위와같은 기념이나 추모행태를 동북공정같은걸로 생각해서 윤동주를 중국인화하려 한다며 중국 정부를 성토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중앙정부는 위와 같은 일개 소수민족 시인에 아무 관심 없다. 이렇게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매김 하려는 인물들은 대부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인사들이다. 한국인 입장에서야 중국 조선족들이 "민족공동의 시인"으로서 접근해주길 바라겠지만, 민족주의의 확산을 강력히 우려하는 전체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실제로 이는 매우 민감한 문제다.[29] 조선족들의 입장도 사실 이해할 만한데, 20세기 초반에야 형성된 중국 조선족은 대표적인 문학이나 시인이 드물기에, 윤동주야 말로 자기 고장 출신의 거의 유일한 네임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윤동주를 조선족 차원이 아니라 남북한을 아우르는 전민족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이는 오히려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억제하고 있는 중국 중앙정부의 어그로를 끌 우려가 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중국 당국에 의해 이런 "중국조선족" 출신 민족시인로서의 추모마저도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일 뿐. 사실 이런 문제는 천년이상 한반도에 자리잡고 단일민족으로 정체성을 확립해온 우리에겐 생소해도 유럽엔 굉장히 흔하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만 해도 독일과 폴란드가 자국인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로 글을 쓴 유대계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독일 작가로 봐야하는지 체코 작가로 봐야하는지 논란이 되는 가운데 이스라엘이 자기네 작가라고 꿋꿋하게 우기고 있다. 7. 기타[편집] 2010년 12월 30일, 구글에서 그의 탄생 93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구글 두들 로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1980년대에 TV문학관 특선으로 저항시인 3부작이[30] 방영되었는데, 윤동주 편에서 송승환이 열연했다. 2014년 최근에는 EBS [31]에 그의 삶이 총 6부작으로 그려졌다. 이 라디오 드라마는 윤동주 역 성우의 윤동주의 실제 성격을 고려하지 못한 목소리 연기로, 윤동주의 팬들이라면 감정이입을 못하고 이따금 폭소를 쏟아낼 수도 있을 것이나, 마지막 6부에서는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이 저려올 것이다. 추가로, 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 드라마가 그 책을 많이 참고하였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도 좋을 것이다. ebs 라디오 인물열전 1~6부작 숭실중학 재학 시절에 찍은 사진 중에 앞에는 정일권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앉아 있고, 그 뒷줄의 가운데에 문익환 목사[32]가 있고, 그 오른쪽에 윤동주가 서있는 사진이 있다. 문익환의 왼쪽 사람이 장준하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젊은 시절의 장준하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생김새가 다르기에 확실히 장준하가 아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코만 봐도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익환의 왼쪽에 서있는 분은 코가 휘어져 있는데, 젊은 시절 장준하의 코는 휘어져 있지 않다. 의 3번째 개정판을 보면 이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이 책에 실린 문익환 목사의 말에 따르면 "이 사진은 은진중학교 출신으로 숭실에 전학 간 학생들끼리 모여서 찍은 것이다. 앉아있는 친구는 이영헌이라고 장로회신학대 교수를 지낸 사람이고, 내 왼쪽은 잘 아는 윤동주, 오른쪽은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은 잊었다. 그 사람은 숭실시절 이후 전혀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장준하 선생은 은진중학교에 다닌 적이 없을 뿐더러, 선생의 유족들 또한 "사진에 있는 분은 장준하 선생님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증언하셨다고 이 책의 저자 송우혜는 말한다. 문익환 자신이 장준하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장준하와 윤동주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사진은 정일권 항목 참조.) 또, 송우혜의 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문익환 본인이 말하길, 숭실중학에 한 학년 아래로 진급하게 된 윤동주가 평소에는 물욕이 없는 사람인데 유난히도 자신의 모자와 바꿔 달라고 조르기에 문익환이 윤동주에게 호떡을 실컷 얻어먹고 모자를 바꿔 쓴 후에 찍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일권도 숭실중학에 다녔는가하는 점을 따져야 할 것이다. 저 사진은 윤동주와 문익환이 숭실중학에 다니던 시절에 찍은 사진이니 말이다. 고로,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정일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덧붙여, 숭실중학의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일제가 숭실중학에 압력을 행사하자 윤동주, 문익환은 자진 퇴학[33]을 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북간도 유일의 5년제 학교인 광명중학으로 진학했다. 문익환 목사의 말에 의하면 이때의 일을 '솥에서 뛰어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광명중학이 일본식 교육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윤동주, 문익환과 정일권은 이 광명중학의 동창이다. 이 광명중학을 문익환은 5학년으로 편입했고, 윤동주는 4학년으로 편입했으니 각기 1년, 2년을 다녔고, 이때 윤동주의 성적표를 보면 일본어 성적이 제일 나빴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윤동주가 일본어로 수업을 받은 것은 이 광명중학교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전에 다녔던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숭실중학은 민족주의계 학교로 수업을 모두 조선어로 했으니, 전 과목을 일본어로 수업했던 광명중학의 성적은 나빴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고종사촌인 송몽규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연희전문학교를 같이 다닌 동갑내기 절친한 벗이자 사촌형이다.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일본인들 중에서도 팬이 존재하며 연구자의 완역본이 출간되기도 했으며, 1995년엔 일본 NHK와 KBS가 합작으로 그의 사망 5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든 바 있다. 여기서 중국에 있는 그의 고향 및 일본에서 그가 유학 당시 지내던 곳, 지인들 인터뷰도 나왔으며 일본인 대학 동창생도 나와서 인터뷰한 바 있다. 당시 방송에서 일본인 동창생은 "그는 말이 없고 과묵하며 항상 뭔가 글을 적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2012년 다큐멘터리에도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34]도 있다. 시 낭송회를 열기도 하는등 여러모로 팬층이 꽤 있는편. 노년층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중년과 청년층들도 꽤 자주 보인다.[35] 2015년 일본의 중견 시인이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일본어로 완역했으며, 이에 대한 일본인 독자들의 평가는 "서시를 쓴 시인이 누구인줄 몰랐지만 이 시를 익히 알고 있었다. 작가가 윤동주였나." "윤동주의 시 몇 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천재성이 있는 작가였나." 하는 극찬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윤동주 시인의 시는 전부 작가가 어휘선택을 쉽고 간결하면서도, 영혼의 울림이 있게끔 고르고 고른 시어들로 구성된 시라 모르는 사람이 봐도 보통 수준이 아닌 것임을 파악 가능한 것. 대신, 이것을 한자나 어순이 비슷한 일본어로 번역할 때에는 높은 싱크로율로 일본인들도 찬양하는 명시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기타 영어나 외국어로 번역되면 무슨 학생이 쓴 시가 되어버린다는 단점이 있다.에서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이라는 명구절조차 영어로 "쿠쿠 쿠쿠 나인 브라덜스 쿠쿠" 라는 괴이한 번역이 되기 쉬우므로.">[36] 여하튼 일본인들조차 그 재능을 인정하는 천재. 위에서 언급했듯 일부 일본 교과서에도 '서시'가 실려 있다. 의 첫 대목인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는 한국인을 넘어 일본인들도 울려버린 명 구절이다.   우연히 윤동주의 사진을 본 후 "이런 미남이 무슨 시를 썼나??"하면서 찾아보다 빠져들었다는 예도 보이며, 윤동주의 시를 알게 된 후 윤동주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아보다 충격을 받았다는 예도 있다. 가수 윤형주의 육촌형이며 건축사학자이자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였던 윤일주의 친형이기도 하다. 그가 일본에서 체포되기 전 마지막으로 다녔던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에는 현재 윤동주의 시비(詩碑)가 서 있다. 시비에 적혀 있는 시는 서시. 그의 친필과 일본어 번역이 적혀있다.[37] 이 시비를 보기 위해 다수의 한국인 관광객이 일본 교토여행 중 도시샤대학 캠퍼스를 찾기도 한다. 시비 위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놓은 한국과 관련된 물품이 놓여져 있다. 가끔씩 소주나 담배, 동전 등도 보인다. 그가 일본에서 약 6개월 정도 다녔던 도쿄에 위치한 릿쿄대가 성공회 미션스쿨인 관계로 성공회대학교와 자매결연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한 다리 건너 릿쿄대학 동문 등 관계자들에게 윤동주가 알려져 윤동주 추모 감사성찬례, 시 낭송회 등을 열기도 한다. 상기한 도시샤대학 시비 말고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윤동주의 시비가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이 배우는 '윤동주=자아성찰'의 코드는 소설가 마광수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윤동주 연구'에 의해 정립되었다. 오늘날 윤동주가 국민시인으로 발돋움하기까지 지대한 공로를 세운 것이 바로 마광수. 어째 현재의 마광수에 대한 인식은 "야설이나 쓰는 노망난 할배" 정도지만(...) 모종의 사건 필화 사건. 자세한 것은 마광수 참조.">[38]으로 체포되기 이전에는 유망한 국문학자로 기대를 받았는데 바로 이 논문 덕이다. 논문은 1986년, 2005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윤동주의 생을 다룬 영화 '동주(영화)'가 2016년 2월 17일 개봉했다. 감독은 이준익. 윤동주 역에는 영화 쎄시봉에서 6촌 동생으로 출연한 배우 강하늘이 캐스팅되었다. 흑백으로 촬영되었고, 일본 형무소에서 취조받는 씬과 과거를 번갈아 가며 스토리를 이어가는 연출. 평단의 평은 전체적으로 좋다. , 등으로 유명한 이정명 소설가의 책 중 "별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소설이 있다.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서 벌인 일과 간수의 죽음, 그리고 우리말의 아름다움 등이 시각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스토리도 흥미진진하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간수의 죽음을 수사하는 다른 간수가 윤동주 시인과 죽은 간수, 그리고 수감자들 사이의 비밀을 알아가는 내용이다. 서브컬처계에서는 드물게 하이큐!!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했는데 니시노야 유가 치룬 기말고사 답안지에서 윤동주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 영화 의 엔딩으로 교장이 윤동주의 를 낭독한다.http://tvpot.daum.net/v/mP_g4nVZ4Yk$ 자막이 별헤는밤이라고 적어놨다 무한도전에서 개코, 황광희, 오혁이 윤동주 시인을 주제로 한 "당신의 밤" 노래를 제작해 불렀고, 여러 음악 차트에서 오랜 기간동안 1위를 차지했다. 윤동주 시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는 내용의 가사로 "서시", "별헤는 밤"의 가사를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8. 참고 항목[편집]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 한자로 일(日)자와 왈(曰)자는 표기가 비슷하다. 왈자가 가로로 긴 모양.[2] 숭실중고등학교에서는 윤동주가 우리 학교 출신이라며 자부심을 은근 강요한다.[3] 지금의 이과-문과의 이분법이 아닌 문학과를 의미한다.[4] 한국의 시인(1912~1978), 영문학자, 중문학자이자 윤형주의 아버지. 윤동주보다 5살 많다. 외국어에 능통해 영문학과 중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윤영춘 본인도 윤동주가 체포될 시기 비슷하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아들 윤형주에 의하면 일본 메이지학원 고등부에 다닐 정도로 일본어에 능통했지만 본인의 수감과 5촌 조카 윤동주의 옥사를 겪는 바람에 일본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 이후 일본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5] 무릎팍도사 문성근편에서 문성근이 일본군 징집문제로 장준하, 윤동주, 그리고 그의 아버지 문익환의 얘기를 했다. '문익환은 신학자로 절대로 입대할 수 없다는 의지로 신학교장과 담판을 지어 전학가게 되었고, 장준하는 입대 뒤 탈영해 독립군으로 들어가려 하였고, 윤동주는 일단 입대한 뒤 일본군이 약해질 때를 틈타 내부에서 난을 일으키자 했었으나 윤동주의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생체실험을 받다 죽었다.'라고 한다.[6] '서시'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정본에 따르면 제목이 없다.[7] 이 당시에는 세로쓰기였다.[8] 일본성공회 소속 미션스쿨[9] 그러나 릿쿄대학은 윤동주가 처음부터 원해서 갔다기 보다는, 교토제국대학 입학 시험에 떨어진 후, 일본에서 다닐 수 있는 다른 대학을 찾던 중 차선책으로 가게된 것이다. 기독교계 대학이라는 것이 릿쿄대학을 선택할 때 고려된 한 요소가 되었을 수는 있어도, 기독교대학을 가고싶어서 릿쿄대학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게 맞다.[10]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반전(反戰)을 주장했던 기독교계 인물로서, 특히 윤동주를 만나 사제의 연을 맺던 당시가 일본정부로부터 요주의인물로 철저히 감시받던 때였다. 어쩌면 윤동주가 이 때부터 일본정부의 감시 하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11]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가난의 느낌이 강하다. 일제강점기는 고사하고 60~70년대의 배움에 뜻이 있어도 형편때문에 이루지 못 했던 사람들이 주위에 널렸음을 생각해보면 유학하는 부자 아들내미들보단 가난했겠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는 확실히 잘사는 집안이다.[12] 조선시대엔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았다. 오성과 한음에서도 보면 알 수 있다. 이때의 풍습을 지켜왔으면 현재처럼 존칭 때문에 싸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13] 윤동주의 실물을 본 몇 안되는 이, 즉 친구인 문익환 목사나 육촌 동생인 윤형주 씨의 증언으로는 "확실히 그 당시 한국인들 중에서도 잘생겼다." 라고 인정한다. 윤형주 씨는 본인도 1960년대 활동 당시에 미남 취급을 받았는데 그런 본인보다 더 잘생겼다고 말하는걸 보면 확실히 미남은 미남이다.윤형주 씨가 관련된 언급을 한 것은 사실이나, 윤형주는 1947년생인데 윤동주는 1945년에 옥사하였으므로 윤동주의 실물을 보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14] 밑의 목록은 1941년에 시집에 실으려 했던 19편의 시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15] 현대의 맞춤법에 따른 표기로는 '쉽게 쓰인 시'.[16] 어느 정도냐 하면, 윤동주의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물으면 무조건 '자기반성과 성찰'을 고르면 끝이다. 물론 윤동주가 지은 '오줌싸개 지도' 같은 동시 비슷한 녀석이 출제되면 그런 거 없겠지만 수능에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주제로 한 시가 출제된다.[17] 그러나 고등학교의 문턱을 넘어서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시인이기도 하다. 사실 그저 '저항의식'이라거나 '자기반성'이라고 기계적으로 외우고 있다가 전공 강의를 듣거나 시집을 사서 제대로 읽어보면 도저히 헤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시들이다. 앞서 이육사보다 난이도가 낮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렇지만은 않다. 그러니 고등학교 때 아는 시라고 훌쩍훌쩍 넘어가지 말고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하며 천천히 읽어보자..[18] 굳이 친일 행적으로 트집잡을 만한 것이 있다면, 창씨개명 하나 정도. 하지만 당시에 창씨개명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할 수 밖에 없었고, 윤동주의 경우도 하지 않을 시에 일본으로 유학 가는 것이 무산되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에서 퇴학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히라누마 도슈로 개명했다. 하지만 자신의 시집 원고에는 언제나 윤동주로 표기했고, 외국 친구들에게도 자신의 이름을 윤동주로 소개했다고 한다, 게다가 창씨개명 신청서를 내기 5일 전에 벌써 참회록을 써놓고 자책과 반성을 했다.[19] 그리고 애시당초 창씨개명했다는 도슈라는 이름은 윤동주의 동주(東柱)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일 뿐이다. 창씨개명 때 이름을 아예 일본식으로 갈아엎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걸 생각하면...[20]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은 꽤 많다. 그들의 모임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21] 백석 시인의 시집 《사슴》은 100부 한정으로 출판되었었고,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필사한 것을 소장하였다고 한다.[22] 원작은 뇌성마비 시인 김준엽의 작품 인 것으로 확인되었다.[23] 필자는 알 수 없지만, 안치환의 노래 의 가사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노래를 지은 작곡가 고승하도 문방구 노트 표지에 인쇄된 시와 당시 학교에 적응을 못해 자퇴하려던 학생이 편지처럼 쓴 시에서 영감을 얻어 곡을 만든 것. 노래가 완성된 시기가 1984년이니 꽤 오래전부터 오해가 시작된 듯하다.[24] 집안이 개신교였던 관계로 공산화된 지역에 있을 수 없어서 대부분의 친인척들이 아예 남으로 내려왔다.[25] 윤형주보다 나이가 많은 윤동주의 친척들은 이 시기에 이미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윤형주가 대표라 북간도에 갔다고 한다.[26] 때문에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재일 조선인과 다르게 대한민국과 북한 국적을 지니지 못한 상태이고 이국 국적 취득도 중국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가능하다.[27] 약칭 국호로써 대한제국은 대한과 한국을 동시에 사용하였다.[28] 윤동주의 창작활동은 대부분 1942년 일본 유학 이전 조선에서 거주하고 있었을 때 이루어졌다.[29]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중국은 민주국가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30] 하나는 백윤식이 열연한 이상화 편, 다른 하나는 김흥기가 열연한 이육사 편이다. 이상화 편에서는 미니어처로 관동대지진이 재현되었다.[31] 회당 10분짜리 음성 드라마[32] 문성근의 부친으로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은진중학-숭실중학-광명중학을 함께 다닌 친우다.(징집령에 대한 판단이 가른 운명).[33] 그 당시의 숭실중학에 재학하던 다수의 학생들이 이 문제로 자진 퇴학을 했다.[34] 1984년엔 의 완역본이 출간되기도 했으며, 1995년엔 일본 NHK와 KBS가 합작으로 그의 사망 5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든 바 있다. 여기서 중국에 있는 그의 고향 및 일본에서 그가 유학 당시 지내던 곳, 지인들 인터뷰도 나왔으며 일본인 대학 동창생도 나와서 인터뷰한 바 있다. 당시 방송에서 일본인 동창생은 "그는 말이 없고 과묵하며 항상 뭔가 글을 적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2012년 다큐멘터리에도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35] 윤동주의 시와 그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는 과정에서 과거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36] 가령 김소월의 에서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이라는 명구절조차 영어로 "쿠쿠 쿠쿠 나인 브라덜스 쿠쿠" 라는 괴이한 번역이 되기 쉬우므로.[37] 윤동주 시비 옆에는 역시 같은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출신인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있다. 정지용 시인의 시비에는 압천(鴨川)이라는 시가 적혀있다. 윤동주 시인은 처음 일본에 오기 전 도쿄에 위치한 릿쿄대학을 다니다가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했다. 그가 좋아했던 정지용 시인이 다녔던 대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대학 역시 릿쿄대학과 마찬가지로 개신교 미션스쿨이다.[38] 소설 필화 사건. 자세한 것은 마광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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