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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행 련재(7)
2017년 11월 10일 07시 00분  조회:1457  추천:0  작성자: 최상운
                               14. 강화도를 찾아
 
 
    나는 부여를 돌아본후 배제의 력사를 대략 앓았으니 이제는 한차원 높여 고려 력사를 알고 싶었다. 하여 한시기 고려국의 림시수도였던 강화도를 가기로 일정을 잡았다.
   강화도(江华岛)는 한국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있다. 나는7시30분에 숙사를 떠나 2시간만에 김포공항 뻐스역에 도착하였다. 김포공항뻐스역에서 김포ㅡ강화도행 뻐스에 몸을 실었다. 뻐스가 달려 30분만에 강화도 뻐스역에 도착하였다.
   강화도에 왔으니 강화도 력사를 알아야 했다. 자료에 의하면 강화의 옛 이름은 감비고차라고 불러왔고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군제를 두어 헐구군이라 칭하였으며 신라 때에는 해구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를 주재시켰다. 고려조에 이르러 태조 22년에 현으로 개편되였으며 이어 현대 지명으로 강화군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강화도는 고려와 조선시기에 나라에 커다란 변란이 있을 때마다 조정에서는 강화도로 천도(遷都)함으로써 강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강화도는 사실상39년간이나 고려의 왕도 역활을 하게 되였고 그 후에도 수차 천도가 있었다. 처음 강화에 천도한 것은 고려 제23대 고종 때였다. 그 해 대륙에서 특세한 신흥세력 몽골군이 송경(지금의 개성)을 침범하자 당시의 실권자 합하 최우의 제의에 의하여 8월에 개성으로 부터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그 다음 고종의 뒤를이은 24대 원종도 강화에 머물러 있었기에 사실상 30여년간 고려의  서울이였다. 그 뒤 25대 충렬왕은 재위 17년12월에 또다시 거란군의 화를 입어 강화에 왔다가 2년 후에야 겨우 송도로 환도하였다. 그리하여 강화는 한시기 고려의 림시수도였고 고려의 정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충렬왕이 강화도를 버리고 개성으로 돌아왔지만 강화와 송도의 수난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제 25대(충열왕) 10년에는 원나라의 침입으로  충렬왕이 일시로 강화도로 피난했던 일이 있었다. 고려 말기의 공민왕 10년에는 또 홍두적의 난을 당하여 천도를 론한 적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 정종, 태종, 3대 왕들도 강화도를 매우 중시하여왔다. 그들은 일시적이나마 강화에서 강행한 일이 있었다. 태종은 강화도에 호부사를 두어 방어를 강화했으며 13대왕 선조도 강화도방어에 주력해 왜병이 접근치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력사적 사실을 안 조선 제17대왕 효정으로 하여금 성의 축조와 군량 보충을 강화케 했고 19대왕 숙조는 유수에 진무사를 겸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각 진에 돈을 설취하여 분담 수비하게 하였으며 문수산성을 축성하여 모든 것을 완비하게 축조하였다. 강화군의 이런 사실은 조선력사에서 고려시기와 조선시기의 제왕들은 특별히 강화도에 중시를 돌렸음을 알수 있었다.   
   왜서 제왕들은 강화도를 이렇게 중시하였을까? 내 개인적인 판단이라면 강화도가 가지고 있는 그 특수한 지리적 위치때문이라고 보아진다. 강화도는 개성과 서울이 멀지않고 인천시와 김포시를 마주하고 있었다. 강화도는 인천시와 김포시 사이에 넓지않은 해역이 있었다. 지금은 다리를 놓아 인천과 김포에서 차들이 마음대로 다니지만, 예전에는 강화도를 가자면 배를 타고 이 해역을 건너야 하였다.    강화도는 천연적이 방패막인 해역이 있어 해변가에 방어 시설을 갖추어 놓으면 금성철벽으로 될수있었다. 또 강화도에는 비옥한 토지가 있어 식량도 충족히 장만할수 있었다. 이런 자연조건이 있었기에 제왕들은 이곳을 림시 피난처로 삼았을 것이다.
   력사적으로 보면 조선반도는 거란과 몽골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 지리적으로 보면 몽골과 거란은 내륙국가였다. 오랜세월 한량한 넓은 초원에서 살아온 몽골인은 양, 말, 소 등 동물을 키우며 살아온 유목민족이였다. 몽골인은 유목생활을 하면서 말을 잘 타고 칼과 활을 잘 다루었다. 거란족도 몽골인과 비슷한 유목생활과 농경생활을 하였다. 거란인도 말을 잘 타고 칼과 활을 달 다루었다. 거친환경속에서 생활하여온 몽골인과 거란인은 거친성격과 용맹한 기질를 같고 있었다. 몽골군과 거란군은 말타고 칼을 쓰며 활 쏘는데는 능하지만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어 해병은 없거나 약하였다. 륙지 싸움에서는 강했지만 해전에서 싸운 경험이 없었다. 하기에 몽골군과 거란군은 조선을 침입하여 조선의 대부분땅을 점령하였지만 강화도만은  점령할수 없었다. 이런점을 파악한 고려정부에서는 강화도를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강화도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고려왕조가 39간 있었다는 고려궁지를 찾아갔다. 고려궁지란? 고려시기에 있었던 옛 궁궐터를 말한다. 고려궁지에 대한 말을 하자니 먼저 고려궁지에 깃든 력사이야기를 해야겠다. 고려 제23대왕 고종 12년에 몽골의 사자 저여고일행이 나라의 보배를 가지고 몽골로 돌아갈 때 압록강을 건너는 도중에 변강백성들에게 살해를 당하게 되였다. 몽골에서는 이것이 모두 고려사람들의 소행이라고 하면서 6년동안 고려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후 이것을 구실로 몽골군은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입하였다. 준비가 없었던 고려군은 몽골군의  진공에 거듭 싶패하면서 고려의 수도 송도까지 위협을 받게 되였다. 황급해난 고려왕 고종은 부득불 개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수도를 옯기되였다. 강화도로 천도해 온 고종은 2년에 거쳐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 있는 궁궐을 본따 연경궁을 본궁으로, 궁궐과 관아를 지어 똑 같이하고 궁궐 뒷산도 송악산이라 불렀다.
   고려는 강화도에 천도한 후39년간(1232ㅡ1270년) 몽골과 항전하였다. 1270년에 몽골의 드센 공세와 희유에 고려왕은 하는수없이 몽골이 제기한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주었다. 몽골과 화친하면서 수도를 다시 개성으로 옮기였다. 그리하여 강화도에 있던 궁궐들은 무너졌다고 한다. 현재 왕궁 옛터에는 강화지역을 다스리였던 유수부만 남아 있을 뿐이였다.
   고려궁지에는 고려의 문물을 보관한 외규정각이 있었는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이 외규정각에 있던 많은 서적과 은궤, 지도 등을 략탈해 갔다고 한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관장 되여있는 고려시대의 고서들은 그때에 략탈해 간 것이라 한다. 다행히 고려의 국보인 8만대장경만은 절에가 있었으므로 무사히 남겼다 한다.
   고려궁지는 외래 침입자의 략탈과 파괴로 인해 여러 차례나 불에 타버려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궁지를 돌아보면 눈물이 앞선다. 열세에 처했던 우리 민족의 수난사가 떠오른다. 왜 강대국이 되지 못하고 남의 침략만 받았야만 했던가?...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였고 고려 또한 몽골과의 싸움에서 번번히 실패하고 결국 몽골이 건립한 원나라의  예속국으로 된것은 인구의 대소간의 차이도 있었지만 고구려나 고려조정에 현명한 군주가 없고 내부 분렬과 나라의 정치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진다. 또 우리 조선민족은 농경민족이였기에 싸움할줄모른다. 우리 조선민족들이 싸움할때엔 몽둥이와 쟁기를 들고 싸움하지만 몽골인은 싸운다치면 칼과 창을 들고 싸운다. 몽골인은 인구는 많지 않지만 싸움을 잘한다. 몽골기병 한 명이면 농경민족 국가의 보병40명을 당한다고 한다. 몽골민족은 문화가 발달하지 못 하였지만 힘으로 광활한 중국의 령토를 점령하고 강대한 원나라까지 세웠던 것이다. 몽골인과 상반되게 당나라가 고구려를 삼킬수 있은것은 당나라군이 싸움이 잘 하여서가 아니라 병사가 많아서 이긴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고려궁지를 돌아본 후 강화도의 문물인 북문, 남문을 돌아보안고 유적지 칠성단을 돌아보았다. 북문과 남문은 지금 복원하여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칠성단은 고조선의 시조 단군이 하늘에 제를 지냈다는 곳이였다.
   나는 칠성단을 본후 고추 철종 대왕이 거처하였던 옛집 룡흥궁 을 찾아갔다. 룡흥궁이라 하니 대단히 범위가 큰 줄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정작와보니 룡흥궁은 보잘것 없는 허술한 초가였다. 비좁은 강화읍 거리의 한 모퉁이에 낮다란 담장에 둘러쌓인 한 채의 작은 초가집이였다. 철종 대왕은 왕으로 되기 전에 이 초라한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왕족이였건만 당파싸움으로 강화도에 밀려 내려와 농사를 지은 철종대왕은 운이트여 하루아침에 농부가 일약 왕으로 되였다.
    강화도를 돌고보면 강화도는 하나의 노천 박물관이라는 감이 들었다. 곳곳에 력사 유적과 문물이 있다. 고조선의 시조 단군이 하늘에 제를 지냈다는 칠성단이 있으며 유명한 강화도 지석묘가 있었다. 잠깐 강화지석묘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강화지석묘는2000년 11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였다. 지석묘의 높이는 2.6m이고 덮개돌이 길이는 7.1m이며 넓이는 6.5m이다. 덮개돌이 무게는 55t에 달한다.
    강화도에는 지석묘 외 불교의 교리를 숭상하여 지은 전통사, 보문사, 정우사가 있으며 옛날의 강화의 면모를 보여주는 남문, 서문, 북문이 있고 고구려 합하(군정 대신) 연개소문이 태어났다는 미니산이 있으며 유명한 계곡인 협하동천과 동막 바다가가 있다.
 
 
                                15. 아름다운 도시 속초
 
 
    한달전에 강릉을 돌아보고 기분이 좋았다. 그 기분이 다 가라않기전에 동해안에서 경치가 아름답기로 소문높은 도시 속초로 가보기로 계획을 잡았다. 오늘 여유시간이 있자 속초구경을 떠났다.
    속초는 한국의 동북부 동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로서 강릉시와 50키로상거해 있었다. 속초는 산과 바다가 잘 어울린 도시이고 산과 바다가 있어 기후가 서늘하고 공기가 깨끗하여 유람객들의 즐기는 곳이다. 
    나는 숙소에서 의정부 뻐스역까지 간후 시간표대로 의정부-속초행 뻐스에 올랐다. 뻐스가 역에서 출발하여 두 시간 반에 속초뻐스역에 도착하였다. 의정부에서 속초까지 가는 로정에는 남양주시, 양평군, 홍천군, 인제군을 지나야 하였고 험준한 한계령, 미시령을 넘어야 하였다.
    미시령을 넘어 속초를 향하여 내려가노라면 산 릉선은 점점 낮아지고 속초와 가까워지면서부터 구릉지대가 형성되고 그 구릉 지대에는 푸른 소나무들이 빼곡히 자라고 있어 멀리서 보면 푸른 파도가 설레는 삼림 바다로 보인다. 그 삼림 바다 입구에 한국 영화 “대조영” 촬영지가 보이였다. 내가 보건대도 영화를 찍기 한참 좋은 곳이였다.
    나는 속초 뻐스역에 도착한후 속초에 관 한자료를 사서보았다. 한국에는 유람지와 뻐스역에는 그 지역에 관한 안내도가 있어 관광하는데 도움이 되였다. 속초에 관한 자료를 보니 속초는 정말로 살기 좋은 고장이구나 하는 감이 들었다. 속초에는 여러개 부두가 있었다. 대포항부두, 동명항부두, 외옹치항부두, 장사항부두가 있었다. 이런 부두가 있으므로 속초는 대외수출을 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부두와 함께 거기에 따르는 서비스 산업들이 흥성하고 있었다. 부두마다에는 구전한 설비를 갖추어 놓았다. 내가 한국으로 오기전에 연변에서 한국에서 물건을 구입하거나 보낼때 비용을 절략하고 빨리 운송하자면 로씨야의 쟈르비항과 속초항을 리용하고 있단는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속초 뻐스역에서 택시를 타고 먼저 속초에서 제일 큰 부두인 대포항으로 갔다. 부두를 휙돌아 본후 인츰 차를 돌려 한국의 자랑이며 속초의 자랑인 설악산으로 향하였다. 설악산은 속초시내에서 멀지않은곳에 있었다.
    설악산 입구에 들어서니 기분이 확 바꾸어지는감이들었다. 설악산 입구로부터 높은산이 량쪽에 솟아 있어 곬은 깊었다. 졻은 곬으로 길이 났는데 골짜기로 부터 서늘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시원한 바람은 몸에서나는 열기를 식혀주었다.
    나는 차창밖으로 보이는 아아하게 치솟은 기묘한 산 봉우리를 보면서 련신 “아!”소리를 련발했다.나는 한국에와서 많고많은 이름있는 산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웅위롭고 험악한 산은 처음으로 보았다. 높이 치솟은 바위들은 당장에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산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산세가 더 험악했다.
   나는 설악산을 보면서 명산 중의 명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는 못 다녀 봐도 중국의 백두산과 제주도의 한라산을 보았지만 이렇게 웅장하고 험악한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 오늘에야 설악산의 유명함을 알게 되었다. 여름이라 설악산에 눈이 없었다. 눈이 있으면 설악산은 더 위용을 떨친다고 한다. 설악산은 예전에는 어찌도 유람객이 많이 오는지 인파산이라고 불렀다 한다.
   설악산에는 유명한 산봉우리들과 바위돌이 있었다. 그 중에 권금성, 대청봉, 금강굴, 대등령, 흔들리 바위, 계조암, 울산바위, 비룡폭포가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권금성에다 케불카를 안장하였다. 케불카란? 일명 삭도라고 한다. 케불카는700m 높이의 권금성에 안장되었는데 단 5분간이면 꼭대기까지 올라갈수 있다. 탑승하여 올라갈 때 지상과 멀리 떨어질수록 수려한 설악산의 산계를 감상할 수 있다.
    외각에서 볼 때 설악산에서 가장 웅장하고 험악해 보이는 봉우리는 울산바위이다. 울산바위는 설악산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일명 천후산이라고도 한다. 높이는 650m로서 사방의 절벽으로 되어 있어 나는 새도 앉기 어렵다는 여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돌산이다. 산 봉우리에는 돌 항아리 다섯 개가 있는데 항아리 안에는 몇천 년이나 묵은 천연 비물이 고여 있다고 한다.
    설악산의 주봉은 대청봉이다. 설악산의 정상인 대청봉은 해발 1,708m로서 태백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이고 한국에서는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대청산 정상에 올라 사방을 보면 설악산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나는 흥미롭게 살악산을 구경하고 나서 오던길에 두 곳을 들려보았다. 한 곳은 바로 미시령권에 있는 속초 시립박물관이고 다른 하나는 실향민촌였다. 실향민촌은 이북 사람들의 많은 실정에 따라 이북의 가옥을 본따 지은 마을들을 말한다.
   나는 속초 뻐스역에서 뻐스를 타고 귀로에 올랐다. 차는 달리여 미시령 터널을 자나서 뒤돌아 보면 한계령 미시령이 설악산과 이어진 태백산맥이 옳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늘에야 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한 백두대간이 조선반도를 뻗치면서 북측의 금강산을 낳았고 남측의 설악산을 낳아 태백산맥은 련련이 지리산까지 뻗어 나가는 사이에 많은 명산들을 만든것을 알게 되였다.  백두대간에서 우리 민족이 형성되였고 삶의 터전을 닦으면서 살아왔다. 
 
 
                                 16.  장충단 공원을 보고서
 
 
    오늘은 장충단 공원으로 가기로 일정을 잡았다. 소문에 의하면 장춘단 공원은 규묘가 작지만 력사적 의이를 가지고 있는 문물이 많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문물이 어떤것인지? 알고싶어 장충단 공원으로 갔다.
    서울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동대문역에서 내려 6호 출구로 나가면 곧장 장충단 공원에 이르게 되였다. 이 공원은 여느 공원처럼 규모가 크지 않은 자그마한 공원이였다. 공원 입구를 거쳐 들어가면 처음으로 보게 되는것은 장충단비였다. 화강암으로 된 이 비는 높이 2m인데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때가 끼여 글씨가 잘 알리지 않았다. 비 옆에는 소개판이 있어 장충단 비와 이 공원의 유래를 알 수 있었다.
    장충단 비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호였다. 이 비는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사해 직후 일본인들과 싸우다 희생된 많은 장병들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것이였다.
    1900년에 고종 황제는 남소영에 장충단을 꾸려 사당과 부속건물을 건립하고 이 비를 세워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였다. 제사를 지낼 때 군악이 연주되고 군인들이 조총을 쏘았다 한다. 처음에는 을미 사변 때 전사한 시위대장 홍계훈 이 결호를 주신으로 삼고 대관 김재호, 리송학, 리종구 등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였다. 그러다 다음 해 을미사변때 순국한 궁내 부대신 리경식을 비롯하여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당시에 순국한 문신들을 추모함으로써 문무의 많은 렬사들이 장충단에 건사하는 신주에 포함되였다 한다.
    장충단 비석의 (奬忠壇)이란 비문은 조선국 말대 황제 순종이 황태자일 때 쓴 글이였고 뒷면의 글은 충정공 민영환이 쓴 것이라 한다.
    1908년 장충단은 일제로 하여 폐사되고 1920년 후반부터는 이 일대를 장충단 공원으로 부르게 하여 벚꽃나무를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으며 일본군이 중국상해를 침법할때  일본군이 전사한 것을 용사라 하여 일본군의 동상과 이토히부미의 보리사인 박문사를 세웠다. 광복 후 일본군 육탄용사 동상과 박문사는 허물어 버렸다. 장충단 공원에는 렬사비가 많았다.
   장춘단 공원 길옆에는 사명대사의 동상 건립문도 있었다. 사명대사의 속성은  임씨이고 이름은 유정 호는 송운 또는 사명이라고 하였다. 서기 1544년 중종 39년10월 17일 영남 밀양에서 탄생 하였다. “어려서 유학을 배웠고 다음으로 불도를 수행하여 성불하다가 나라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이 무엄하게 국토를 유린하매 위급 존망의 국운을 만회하려 승군을 조직하고 한편 전속에서 참혹하게 허덕이는 수많은 중생들을 제도하려 분연히 칼을 들고 혹은 무술의 실력을 발휘하여 적을 나라 밖으로 물리치게 하는데 위대한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서대부의 영직을 받았다. 수년 후 대패한 왜적이 다시 재침하리라는 정보를 듣고 국명으로 사신이 되여 적정을 탐지할겸 또는 수교차로 왜국에 건너가 막부의 수장인 도쿠가와 와 교섭하여 사로잡혀간 남녀 3천 여명과 노략질하여간 많은 보물을 도로 찾아왔다. 이어 선조 왕은 대사에게 영의정을 제수하니 이를 끝내 사양치 못하다가 3일 만에 사퇴하고 묘향산에 올라가 전해에 입적한 사승 서산대사의 위탁을 받은 후 고향에 돌아가 만년을 고요히 보내다가 1610년 광해2년 8월26일 가야산 해인사 홍계당에서 사세하니 나이는 67세 자동호데라는 존사 사호를 받았다.”고 쓰여 있었다.
    전설에는 사명당의 왜국에 가 항복서를 받을 때 왜국에서는 사면당을 불태워 죽이려고 사명당을 쇠로 만든 집에 들게 하고는 불을 지펴 쇠집을 달구었다고 했다. 놈들이 사명당의 아무이 도술이 높다고 한들 이제는 꼼짝 못하고 타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문을 열더니 그만 안연실색 했다고 한다. 재로 되여야 할 사명당은 서리 낀 집안에서 춥다고 했다고 하였단다. 왜놈들은 하는수없어 사명당에게 머리를 숙여 죄를 뉘우치고 사명당의 요구를 받어주었다고 한다.
   사명당의 동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한국 유림독립운동 빠리 장서비가 있다. 이 비는 1973년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평화 회의가 열리자 곽종석, 김복환 등 한국 유림의 대표자 137인은 조선 독립을 청원하는 긴 편지를 이 회의에 제출한다. 유림인들은 나라를 위하여 적과 싸움보다 글로서 청원을 올리여 국제 세계평화인들의 동정을 받아 침략자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원했던 것이였다. 그 계획은 아둔 계획이였다. 파리장서 청원서는 기각당하고 청원서의 주요 인물인 곽종서는 일본경찰에 의해 투옥되고 2년간 감옥 생활을 하고 출옥하자 타계했다.”
   장충단 공원에는 수표교란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모양새가 개성의 선죽교와 비슷하다. 수표교란 물의 붓고 낮춤을 측정하는 다리이지만, 예전에는 이 다리 근방에 소나 말을 파는 시장이 있었기에 마전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 다리는 세종 1422년에 세운 다리라 한다.
    장충단 공원에는 리준 렬사의 동상도 세워져 있었다. 리준 렬사는 조선왕 고종을 만나 을사조약이 (1905) 강압적으로 체결된 것이니 세계 각국에 이 사실을 알리자는 건의를 제출하여 왕의 허락을 받고 1907년에 로씨야를 걸쳐 헤이그에서 열리는 세계평화 회의장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 대표로서 이 회의에 참석하려 노력하였지만,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무산되고 세계 렬강들은 큰 반응이 없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격분한 이준 열사는 그만 통분하여 헤이그에서 자결했다. 그의 유체는 헤이그에 있다가 1968년에 서울로 돌아 왔다. 1964년에 그의 동상을 이곳에 세웠다 한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렬사란 정부의 공식적인 명을 받고 가서 희생된 분에게 올리는 칭호이고 의사란 정부와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의거를 일으킨 분에게 올리는 칭호라 했다. 리준렬사는 왕의 부탁을 받고 간 사람이기에 렬사라고 했다.
  20세기 초반 제국주의 렬강들은 식민지 쟁탈에 혈전을 벌리고 있을 때 아무런 힘도 없는 조선이 세계평화회의에 장서를 보낸다거나 조선 나라의 대표로 말한다. 하여 그들의 의견을 들어줄리 만무하였다. 야만적인 일본 침략자들은 조선에 대하여 더 한층 략탈과 탄압을 가였다.
    나는 장충단 공원을 돌아보고 나서 이런 견해를 가지였다. 조선의 독립은 오로지 무장투쟁으로 일본 침략자를 몰아내는 길밖에 없다 고. 장충단 구경을 마지막으로 한국기행을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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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손도 2021-06-11 0 1357
119 뜻밖의 선물 2020-12-27 0 1583
118 10월의 황산 (1~3) 2020-11-22 0 1456
117 10월의 황산 (4~5) 2020-11-22 0 1414
116 상서를 돌아보다(1~3) 2020-10-27 0 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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