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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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를 돌아보다(1~3)
2020년 10월 27일 08시 18분  조회:1392  추천:0  작성자: 최상운
상서(湘西)를 돌아보다.(1)
                                     
                             1. 장사와 소산
 
   신종코로나 때문에 꽉 막혔던 려행 길이 열리여 오늘 속칭 상(湘)이란 략칭을 가지고 있는 호남성을 려행하게 되여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장강 중류 남안에 위치한 호남성의 대부분이 동정호 이남에 있다하여 호남이란 이름을 얻게 되였으며 또한 경내의 최대의 강(湘江)의 남북을 관통하고 있으므로 속칭 상(湘)이라 한 것이다.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 있는 호남은 산천경개가 수려하고 영험하여 걸출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 되였다. 호남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인 모택동이 태여난 곳이다. 그리고 당과 정부의 주요 요직을 맡았던  류소기, 팽덕회, 하룡, 주용기 등 동지들의 고향이 모두 여기에 있다.
    호남성은 여러가지 특산물과 과일, 공예품이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중국의 4대 명자수의 하나인 상수와 국내외에 명성을 떨친 국화석조각은 관광객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호남성 경내에는 유명한 력사문화도시인 장사시와 익양시가 있다. 오늘날 새롭게 관광의 도시로 떠 오르고 있는 호광의 도시 장가계시도 있다. 호남성의 면적은 21만여 평방킬로 메터이고 인구는 6599만명이다. 한족, 토쟈족, 묘족, 둥족, 요족, 회족, 위글족, 쫭족 등 민족들이 살고 있다.
    우리길림성호남방문행려행단  일행은 9시20분에 연길을 떠나 11,30분에 장춘룡가(龍嘉)공항에 도착하여 대오와 회합하엿다. 오후 13시30분에 련운항을 거쳐 16시30분에 장사황화(黃花)공항에 도착 하였다.
   공항에서 장사시 관광국의 진녀사가 우리를 친절히 맞이하였다. 진녀사는 로고를 아끼지 않으시고 호남성을 찾아온 려행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는 호남은 워나 가난한 성이 였는데 여러분과 같은 재신(財神)들이 많은 거금을 가지고 왔기에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였다고 하면서 재삼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이였다. 호남성은 장강 이남에 속하므로  기후가 온안하고 습기가 많은 편이라 했다. 일년에 200날은 구름이 덮혀 있거나 비가 내린다고 하였다. 려행자들에게는 비가 자주내리여 불편하겠지만 몹시 덮지않고 춥지 않기에 려행하기 좋은때라고 하였다.
    진려사의 말에 의하면 장사(長沙)는 호남성의 소재지로서 호남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과학기술, 금융의 중심이라고 했다. 국무원에서 처음 공포한 24개 력사문화도시의 하나이며 대외에 개방한 관광도시의 하나라고 했다. 총 면적은 11.819평방킬로메터이며 총 인구는 602만명이며 그중 도시인구가 200여만명된다고 하였다.
    장사는 3천여 년의 력사를 갖고 있는 문화도시로서 풍경이 수려하고 관광명소가 많은 관광휴양 명승지라고 하였다. 1988년말에 국가로부터 중국 우수관광도시 칭호를 수여 받았다고 하였다. 국가에서 공포한 도시 종합 실력 50강 중에서 19위를 차지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장사는 모택동 주석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였다.
   1972년에 도심에서 수km떨어진 마왕퇴의 (서한시기)의 묘지에서 2000년전의 녀자 시체가 ( 206 - 25년 )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여 장사가 전세계에 소개되였다고 했다. 이 시체는 특별히 만든 신관의 지하실에서 조용히 누워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려장을 풀 사이 없이 장사시를 떠나 고추 소산으로 향하였다. 소산(韶山)은 풍류 이름 소 (韶) 자에 뫼산 (山 ) 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산이다. 장사에서 서남쪽으로 104km 떨어진 소산기 경내에 있다. 소산의 주봉은 남악 72개 봉 중의 하나로 해발 519m로서 기세가 웅장한 산이였다.
   우리는 소산에 도착한후 모택동 생가를 가기전에 모택동 동상앞에 집결하여 기념활동을 하였다. 모택동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3년에 모택동생가로 가는 어귀에 모태동 동상을 건설하였다. 동상은 모택동이 1949년10월1일 개국 대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할 때의 형상에 따라 설계하였다. 동상의 높이가 6m이고 기반의 높이가 6.26m,  총 높이가 12.26m로서 모태동 탄생일을 상징하였다. 우리가 동상광장으로 갔을 때 근3,000 여명 려행객들이 동상앞에 모여있었다. 유람객들은 저마다 모택동 동상 기념 마크를 사서 달고 다니였다. 유람단체마다 화환을 동상앞에 증송하였으며  동상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기념행사를 끝마치자 모태동 생가를 향하였다. 생가는 동상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었다. 입구 앞에는 많은 사람들의 몰려들었는데 줄을 서서 마스크를 끼고 신분증과 건강검진증(健康碼)을 검사하였다.
   모택동 생가는 소산시 소산충에 있었다. 모택동이 살던 집은 흙벽에 회색기와를 얹은 보통 농가로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소산충 중에 있었다. 나는 모태동의 생가와 생가 주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모택동생가 뒤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산이 있고 앞에는 호수가 있어 풍수리론에 의해 본다면 배산임수 (背山臨水)의 좋은 터라고 생각되였다. 외국의 풍수지리를 안다는 사람이 모택동 생가와 소산을 보면서 소산은 산맥이 강하고 온후하여 위인이 태여날 곳이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1883년12월26일에 모택동이 바로 소산충에 있는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모택동이 살던 이 집에는 그의 가족사진과 평소에 쓰던 가정기물, 각종 농기구가 있었다. 그중 모택동이 소년시절에 쓰던 멜대와 물통, 호미등이 있었다. 모택동의 침실에는 책상과 그 위에 놓은 등잔이 있는데 모택동은 소년시절에 늘 이 등잔불 밑에서 공부하였다 한다.
    모택동 생가는  1929년에  국민당정부에 의해 몰수되여 파괴를 당하였다.  1950년 원래의 모양대로 다시 복원하였다 한다. 당년에 모택동이 탄생한 방과 서재, 그리고 그의 부모의 방에는 일부 원물과 사진들을 전시해 놓았다. 부근에는 모택동이 소년시절에 로동하던 밭과 수영했던 못이 있었다. 1964년에 새로 소산모택동생가 전시관을 건설하고 모택동의 혁명활동유물, 사진과 자료들을 전시하였다 한다.
    이밖에 소산에는 또 최근에 모택동 도서관, 모택동 시사비림, 모택동의 문물창고와 소산렬사능원을 새로 건설하였다.
   1991년초 호남성위원회는 소산에 대형 모택동동상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강택민 총서기는 이를 충분히 긍정하였다. 그해10월 17일에 중공중앙판공청은 모택동 동상 건립을 비준하였다. 1993년 6월에 6m높이의 석고모형을 만들어 해방군총후근부에서 특별렬차로 남경 천광기계공장에 운송해 갔다. 8월21일 모택동동상이 우선 남경천광기계공장 광장에 모셨다. 남경은 일찍 국민당 총독부 소재지였는데 44년후에 남경시민들이 당년에 남경을 해방한 위인을 기념해 거형의 동상을 이곳에 높이 모셨던 것이다. 1993년 12월2일 동상이 남경으로부터 강소, 안휘, 호북, 강서를 지나 호남에 도착했다. 강서를 지날 때 원래는 쉬려고 하지않았는데 자동차가 고장나 할 수 없이 강서 경내에 잠시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강서성의 백성들은 “강서는 모택동 동지가 제일 일찍 혁명활동을 하시던 곳이며 그의 두번째 고향인데 여기에서 하루를 묵어가게 해달라”고 하였다.
   12월26일 오전 9시, 모택동 동상은 1.300여km의 로정을 거처 5일만에 드디어 소산에 당도하게 되였다. 소산사람들은 일찍부터 폭죽을 터뜨리고 북과 꽹과리를 울리면서 길 옆에 모여 환성을 울렸는데 15리 길옆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100대의 모터사이클로 호송대를 구성해 동상을 호위하면서 소산에 들어섰다고 한다. 동상광장에 모인 만여 명의 군중들은 모택동의 동상을 보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모주석께서 돌아오셨다! 모주석께서 고향에 돌아오셨다!”고 높이 위쳤다 한다. 12월 26일, 추산에 의하면 기념활동에 참가한 사람이 무려 26만 명이나 되며 차량 1만여대 , 동상광장에 쌓인 폭죽종이 두께가 80cm나 되였다고 한다. 거인은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있다.
   모택동은 고향을 떠난후 5섯번 왔다 가셨다 한다.
   소산을 국내의 수많은 관광객이 참관하였으며 오대주 141개 나라의 관광객들이 다녀왔다고 한다. 중국 당, 정 지도자들인 류소기, 주은래, 등소평, 화국봉, 양상곤, 강택민, 리서환, 호금도 등 모두 소산에 왔었다. 호지명, 시하누크, 네원 등  외국수반들도 오시였다.
   호남은 력사적으로 많은 위인들이 배출된 곳이다.
   잠시 력사인물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현대사를 놓고 보면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는데 크나큰 공헌을 한 위인들중 모택동주석과 류소기주석은 장사시에서 멀지않은 다른 곳에서 탄생 하였다는 점이 주목을 받게 되였다. 모택동은 소산에서 탄생 하였다면 류소기는 소산에서 남쪽으로 38km떨어져 있는 영향현 화명루 탄자충에서 탄생하였다.
                     
                                 2 . 장가계로 가다.

   우리는 소산을 돌아본후 장사시 한 호텔에서 하루밤을 자고 이튼날 아침 여섯시에 장사를 떠나 상서지방의 중심도시인  장가계로 향하였다. 장사를 떠난 뻐스는 400여 km를 달리여 오전 10 시에 장가계(張家界)시에 들어섰다.
   장가계에 도착하기전에 가이드가 교체되였다. 교체된 가이드는 깜직하게 생긴 30세 좌우인 녀자 였다. 뻐스에 오른 그녀는 려행객들에게 깍드시 인사를 하더니 자아소개를 했다. 자신의 본명은 손여홍인데 부르기 좋게 손도라 불러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손도 자신은 투쟈족이라 했다.
   손도(孫導)의 말에 의하면 장가계시는 호남성 서북부에 위치해 있다고 했다. 동쪽으로 장사시와 400km 떨어져 있으며 면적은 9518평방킬로메터이고 인구는 170만명이며 그중 도시 인구가 50만명이 된다고 했다. 이곳에는 투쟈족, 묘족, 바이족을 위주로한 17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총인구의 68프로를 차지한다고 했다.  1994년에 대용시를 장가계시로 고쳤다고 했다.
    장가계시 주변을 상서(湘西)지역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상서는 장사시와 달리 평원지대가 아니고 대부분은 산악지대에 속한다고 하였다. 산이 많고 경작지가 적어 과거 이곳은 호남성에서도 빈곤한 지역으로 구분 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손도는 이런말을 했다. 사람들은 흔히 호남상서라 하면 과거 토비(土匪))가 많았던 곳이라 생각하고 있지요. 왜서 그렇게 생각했을가요? 이제 상서 지방을 돌아 보고나면 리해가 갈것입니다..  력사적으로 상서 지방은 소수민족이 많이 집결하여 사는 편벽한 곳입니다. 까놓고 말하면 사람이 살기 힘든 곳입니다.
    손도는 상서는 하룡원수가 태여난곳이라 했다. 하룡원수(1896년-1969)는 1896년에 쌍식현 홍가관에서 탄생하여 청소년 시절을 보내였습니다. 하룡원수도 한때는 토비로 몰리기도 하였습니다. 1916년  하룡은  “두 자루의 식칼을 들고 혁명하여” 당지의 염국을 점령하였으며 집을 떠나 혁명에 투신 하였습니다.
   1929년에 하룡의 고향집은 적군에 의해 소각되였고 1975년에 다시 복원 되였다고 합니다.
   장가계시는 “대리석의 고향”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장가계는 풍부한 자연 경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가계시에서도 손꼽히는 무릉공원은 국가급 풍경명승지로서 1992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였습니다.
    우리일행은 장가계시에 도착한후 잠간 휴식하고는 인츰 천문산(天門山) 구경을 떠났다. 차를 타고 오면서 보니 높고 웅장한 산이 장가계시를 둘러쌓여 있어 마치 신비한 세상으로 온 감이들었다. 뻐스에서 내리자 가이드가 정면에 보이는 높은 산을 가리키면서 저 높은 산이 장가계시에서도 제일 유명한 천문산이라고 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천문산은 그 기세가 기이하고 우람져 명산으로 보이여 대번에 빨리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였다.
   천문산 정상으로 올라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그렇지 않으면 케불카를 타야 했다. 천문산 케불카는 세계에서 최장길이가 가장긴1차선 순환식 관광용 전용케불카이다. 케불카의 전체 길이는 7.455m이며 상하 높이 차가 1.279m나 된다. 천문산 케불카는 원시상태의 공중 화원에서도 현대 도시 생활의 분위기를 만끽할수 있는 곳이였다. 외바줄에 매달려 허망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너무도 아짜아짜하고 긴장하여 저도 몰래 등곬에 땀이 흐르게 되였다.
    천문산은 장가계의 여러 명산중에서 력사상 가장 먼저 알려진 산으로 기록된 산이다. 해발이 1.518.6m인 천문산은 장가계 시내에서 8km 떨어져 있다. 이 산은 장가계의 으뜸가는 간판명소로 손색이 없다. 천문산은 예로부터 기이하고 특이한 석회암지질과 아름다운 자연풍경으로 유명하며 심오한 문화바탕과 이채로운 인문고적으로  장가계의 문화적 영혼, 정신적 영혼, 상서의 제일 가는 신성한 산 이라는 아름다운 명성을 가진 산이였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와 고찰에 의하면 장가계시 지역은 수억년전에 바다였는데 지질변화로 인하여 지면이 상승하고 바다물이 빠지게 되였다 한다. 바다물이 빠지면서 석회질암석은 싯기여 내려가고 단단한 화강암석만 남게 되였다 한다. 신비하게도 남은 암석들이 형태가 기이한 석림(石林)으로 형성 되였다 한다.
   케불카를 타고 주봉에 올랐다가 천문산을 한바퀴 돌고나면 마지막 절경인 천문동에 이르게된다. 구름우에 우뚝 솟은 천문산은 그 기세가 비범했다. 천메터 높이의 절벽에 걸려 있는 천문동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천연 석화암동굴로서 천하 기경을 자랑하며 이곳이 깊고 호방한 “천문화”와 “신선문화”를 만들어 냈다.  천문동에서 산아래로 내려오려면 999개의 계단을 밟고 내려올수도 있고 계단식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수 있었다.
   천문산은 장가계의 두번째 국가삼림공원이다. 천문산 정상에는 원시 상태에 가까운 생물생태가 완벽하게 보존되여 있어 일년 사시장철 야생적인 분위기가 넘쳐 흐르며 게다가 카르스트 구릉과 석순이 도처에 분포되여 있고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나무들이 어울져 있어 그야말로 하늘의 신선이 내려와 다듬어 놓은 분재대공원을 방불케 했다. 부지면적이 10.000평방메터가  더 되는 천문산 사(寺)는 명조이래로 불공하려 오는 이가 가장 많은 상서의 불교 중심지이다. 또 천문동개(天門洞開), 귀곡현영(鬼谷見影), 외뿔서수(獨角瑞琇) 등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풀 수 없었던 6대 수수거끼는 천문산의 신비감을 더욱 잘 돋보이게 했다.
   천문산으로 오르는데는 두개의 교통설비가 있었다. 하나는 장가계시로부터 집적 케불카를 타고 천문산에 오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가계시로부터 천문산으로 오르는 공로가 있었다. 일명 통천대도(通天大道)라 하는 이공로는 총길이는 10km이고 99개의 굽인돌이를 지나고 있었다. 통천대도는 아쓸아쓸한 절벽에 길을 냈는데 해발이 높을수록 굽이돌이가 더 많았다. 산으로 올라 갈수록 경치는 변화무쌍하며 그 기상이 무궁무진 하였다. 통천대도를 따라 올라 가다보면 마치 지상에서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는 기분이 든다.
  사람들은 통천대도를 돌아보고 나서 통천대도는 세상에 둘도없는 <굽이돌이 대 가관> 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한 명인은 통천대도를 보고 “천계는 손에 대이고 한보 사이 거리다.” 라는 명언을 남기시였다.
   우리는 천문산을 돌아보고 나서 저녁 9시에 장가계시에 있는 5성급 호텔에 주숙 하였다. 려행을 떠나기 전에 려행사에서는 지금 신종 코로나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 전국의 여러 호텔에는 일인용  치솔과 치약이 없으므로 자체로 준비해 가지고 가라고 했다. 호텔에 들고 보니 말과같이 모든 설비들이 호화롭고 보기가 좋았는데 일인용 치솔과 치약만은 없었다.
 
                             3. 장가계국가 삼림공원으로 가다.

   이튼날 우리는 나라에서 제일 처음으로 국가 삼림공원으로 명명된 장가계국가삼림공원(張家界)國家森林公圓)으로 갔다. 장가계국가삼림공원은 장가계시 북쪽에서 35km 떨어진 무릉원구 경내에 있었다. 장가계국가삼림공원은 무릉원의 3대 경관구의 하나로 총 면적은 1.3만혁타르이고 해발 800여m이다. 제일 높은 곳은 해발 1.300m나 된다. 자연풍경이 아름다워 제일 중요한 관광명승지 중의 하나이다.
   천문산으로 갈때는 케불카를 타고 산으로 올랐는데 장가계 국가삼림공원으로 갈때에는 려행용 뻐스를 타고 삼림공원 입구까지 갈수 있었다. 입구에서 한참 올리 걸으면 삼림공원으로 올라 갈수 있는 전용뻐스정차장이 있었다. 정차장에서 문표 검사와 신체 검사를 마치고 전용뻐스를 타고 산으로 올라가게 되였다.
   입구에서 정차장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아름들이 나무들이 꽉 들어차 있어 삼림공원이라는 감을 직감하였다. 입구에는 강택민 주석과 주용기 총리가 장가계 삼림공원에 대한 글이 새겨진 비석이 있었다. 길옆에는 맑디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무숲속에서 풍겨오는 나무 향기와 냇물에서 뿜겨오는 시원한 공기가 페부에 스며들자 정신이 맑아지면서 힘이 솟구치였다.
   정차장 입구를 가지전에 길옆 너럭바위우에서 야생 원숭이들이 재롱을 피우는 것이 보이였다. 나는 여짓껏 동물원에서 원숭이를 보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야생원숭이를 보니 신기해 보였다. 야생원숭이가 보이자 길손들은 걸음을 뭠추고 원숭이들 한테 과일과 빵을 던져 주었다. 먹이를 던져주자 보이지 않던 많은 원숭이들이 나타나 서로 먹이감을 빼앗느라고 야단이였다. 나도 야생 원숭이들에게 먹이를 던져 주면서 한편으로 사진을 찍었다. 야생원숭이로 하여 장가계 삼림공원은 이채를 돋구어 주었다.
   이번 려행을 통하여 려행을 떠날때 꼭 세가지 필수품을 지니고 다녀야 함을 알게 되였다. 첫째는 마스크를 끼고 다녀야 하며 둘째는 신분증 휴대하여야 하며 세째는 건강증(健康碼)이 있어야 했다. 장가계 삼림공원 입구에서도 이 세가지를 검사하는 것이였다.
   정차장에서 떠난 뻐스는 30분달리여 국가삼림공원 안에 있는 양가계경구(楊家界景區)에 이르게 되였다. 양가계경구는 새로 발견된 구역이다.
   양가계경구에서 산 정상으로 오를수 있는 케불카가 안장되여 있었다.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케불카를 타고 산 정상에 오르게 되였다. 장가계에 와서 두번째로 타는 케불카여서 두렵지 않았다. 마음놓고 경관을 감상 할수 있고 사진을 찍을수 있었다.
    산 정상에는 삼림공원을 한바퀴 돌수 있는 길이 있었다. 구불 구불 에도는 벼랑길을 따라 걸으면서 조심스럽게 란간을 잡고 건너편 산과 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경구전체가 아름다운 그림으로 돼 보이였다. 마치 신선이 인간세상에 내려와 천하에 둘도없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 할수도 없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놓았다는 감이 들었다.
   나는 그림같이 아름답고 신비한 양가계의 바위산과 그 산과 어울린 나무들을 보면서 이곳을 석림(石林) 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삼림(森林)이라고 해야 하나?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우리는 양가계경구를 보고나서 30분 휴식하고는 다른 경구인 원가계경구(袁家界景區)로 향하였다. 원가계 경구도 다른곳에 못지지않게 기이한 산과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원가계경구에서 제일 인상이 깊엇던 것은 일명 “천교”라 불리우는 유명한 “천하제1다리”를 건너는 것이였다. 눈이 뒤집일듯이 아찔하게 깊은 산 골짜기에, 그 골짜기를 건널수 있도록 만든 쇠바줄로 된 다리가 있었다. 다리를 건널때 다리가 바줄 다리여서 흔들리면 어떨가? 혹시 떨어지면 어쩔가? 근심했는데 근심할 필요가 없었다. 다리는 어찌도 견고하고  든든하게 만들었던지 많은 사람들이 다니였지만 흔들리지 않고 평온하였다.
    평온하게 다리를 건너고 나서 어떻게 이 깊은 골짜기에 이렇게 든든한 다리를 만들었을가? 생각해 보았다. 생각해 보니 인츰 답안이 나왔다. 위대하고 지혜로운 중국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못해내는 일들을 기적처럼 척척 잘 만들어 내고 있잖은가. 슬기로운 재주를 가진 장가계 사람들도 지혜를 발휘하여 “천교”와 같은 인간 기적을 창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가계 국가삼림공원을 돌면서 나는 무엇때문에 장가계 삼림공원 안에 장가계, 양가계, 원가계라는 사람의 성씨를 단 구역들이 있을가 궁굼하였다. 내 궁금증을 풀어주기라 하듯이 가이드 손도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려행객 여러분 여러분들은 장가계국가삼림공원안에 장가계구역과 양가계구역, 원가계구역이 있는 것을 보았지요. 분명 이곳은 옛적부터 소수민족들이 살던 구역 이였음을 의미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을 염황 자손이라고 하지요. 우리 투쟈족들은 염황 자손이라 여기지 않고 치우의 자손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염황자손이나 치우의 자손들 모두가 중화민족이지요. 하지만 력사는 중화민족을 여러개 민족으로 분리해 놓았지요.
   약 4천 년 전, 황하와 장강 류역에는 많은 부락이 있었어요. 전설에 의하면 그중 한 부락의 수령이 황제(黃帝)였다고 합니다. 그는 원래 희수(姬水)에서 살다가 남쪽으로 내려와 황하를 건너 탁록에 정착하고 농사와 목축을 발전시키기 시작 했답니다.
    다른 부락의 수령인 염제(炎帝)는 자기 부락 사람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발전 하다가 구려(九黎) 부락의 수령인 치우(蚩尤)와 싸우게 되였다 합니다. 치우는 형제가 81명이였는데 무두가 머리가 쇠처럼 단단하고 몸은 맹수 처럼  매우 사나웠다고 합니다. 치우의 침입을 받은 염제는 탁록에 가서 황제한테 원쑤를 갚아 달라고 간청 했답니다. 예전부터 치우를 없애버리려고 벼르고 있던 황제는 염제와 련합한후 다른 부락 사람들까지 모아 탁록 들판에서 치우와 생사 결전을 벌리였다고 합니다. 결국 황제는 치우를 이기고 그 무리들을 소탕 하였다 합니다. 싸움에서 패배한 치우의 무리들은 고향을 등지고 서쪽으로, 남으로 도망쳐 심산속에서 살게 되였다 합니다. 오늘날 치우의 후손들은 토쟈족, 묘족 등 소수민족으로 되였다고 합니다.
    나의 가족은 토쟈족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유명한 토쟈족 의사 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때는 토비(土匪)였다는 불미스러운 명예를 가지게 되였습니다. 아버지는 토비무리에 랍치당하여 토비의사로 생활을 했답니다.
    상서에 뿌리 밖은 치우의 후손들은 대부분 토쟈족으로 되였고 운남방향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묘족으로 되였다 합니다. 상서지방 특히는 장가계 주위의 험한 산속에 흩어져 운둔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종족을 위주로 하여 부락을 형성 하였답니다. 그런 종족들은 점차 장가계, 양가계, 원가계 등 여러 종족마을을 형성 하였습니다. 마을과 지역마다에는 그 지역을 통치 할수있는 지도자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칼과 총을 가지고 있었다 합니다. 그들은 타민족과 외래인들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아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무리를 사람들은 토비라 불렀습니다.
   여러분들도 알고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일은 1949년 10월 1일로 정하였습니다. 1949년 10월1일부터 중국에 사는 사람을 중화인민 공화국 공민이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상서지방에서는 1953년에야 정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 인정받았다 합니다. 중앙정부와 지방소수민족 단체간의 협상을 통하여 소수민족의 자치권리를 보장한 전제하에서 토쟈족 자치주로 되였습니다. 한시기 우리 투쟈족자치주에는 민족군대가 있었으며 총과 칼을 휘대 할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중앙정부와의 협상을 통하여 토쟈족 자치주에서 토비에 가담 하였던 사람의 많음을 감안하여 그들에게 립공 속죄할 기회를 주었답니다. 1952년에 3만명의 토쟈족 사람들의 항미원조전쟁으로 갔습니다. 전쟁에서 3000명 희생자를 냈다고 합니다. ”
   나는 여짓껏 소수민족의 력사를 몰랐는데 손도의 말을 들고서야 투쟈족과 기타 소수민족의 력사를 알것 같았다.  
   산길을 따라 온 오전 걷고 나니 배가 출출해 났다. 점심을 어디에서 먹을가 생각하는데 가이드가 앞을 가리키면서 여기서 멀지않은 곳에 음식점이 있으니 마음껏 자시라고 했다. 한 50메터 걸으니 산능선을 따라 지은 음식점들이 줄줄이 있었다. 려행객들은 저마다 음식점을 찾아 갔다. 나는 “원씨음식점”이란 간판을 단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어찌도 많은지 음식을 주문하여 한참 지나서야 음식이 식탁에 올랐다. 값을 치르고 보니 음식값은 장가계시내의 음식점보다 3배는 더 비싸다는 감이들었다. 시내에서 5원이던 맥주를 그곳에서는 15원을 하였다. 출출하던차 점심을 먹고나니 졸음이 왔다. 하지만 낮잠을 잘수없었다.
   점심을 먹고는 인츰 길을 떠났다. 종점으로 갔다가 다시 되돌아 왔다. 되돌아 음식점 가까이로 왔다가 방향을 돌리여 서쪽으로 한참 내려 걸으니 지하동굴이 있었다. 지하동굴에는 계단식 엘리베이터가 장치되여 있었다. 계단식 엘리베이트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식 얼리베이터를 10여번 갈아타고 아래로 내려가 보니 출구가 있었다. 출구를 나와 보니 출구에서 멀지않은 곳에 정차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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