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운
http://www.zoglo.net/blog/cuishangyun 블로그홈 | 로그인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수필

다시 읽어 보는 삼국지
2022년 02월 21일 09시 19분  조회:552  추천:0  작성자: 최상운
                                        다시 읽어 보는 삼국지
 
                                        1, 중국력사편
 
   항우를 이긴 류방은 진나라보다 더 강대한 한(漢)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202년, 류방은 정식으로 한나라의 황제가 되었는데 력사상에서 한고조(漢高祖)라고 한다. 고조는 락양을 도읍으로 정했으나 나중에는 장안(西安)으로 천도를 했다.
   고조는 초한전쟁에서 공로가 큰 대장들을 왕으로 책봉 하였다. 이들을 제후왕이라 하였다. 그들은 전국시기의 6국 귀족들처럼 한 지역씩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세력이 점차 막강하게 확장되면서 조정의 말을 듣지 않는 형국으로 되여가고 있었다.
   왕으로 책봉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공로가 크고 병력이 강한 이들로는 초왕으로 임명받은 한신, 양왕으로 임명받은 팽월, 회남왕으로 임명받은 영포였다.
   왕으로 책봉 받은 그들의 세력이 커지자 고조는 그들로 인하여 자기의 세력이 약해짐을 느끼자 사냥꾼의 토끼를 잡은후 사냥개를 잡는 식으로 임명받은 제후왕들을 하나하나씩 제거하였다. 처음에는 한신을 모해해 죽이였고 한신과 역모했다는 죄명을 씌워 팽월을 죽였다. 한신과 팽월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포는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자기의 종말이라고 생각하고 그럴바에는 선수를 쓰자며 반란을 일으켰다.
   영포는 승리를 거듭해 형초일대의 넓은 땅을 차지했다. 그 소식을 들은 고조는 이번에도 직접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집압하려갔다.
   량쪽의 군사가 대치하게 되자 고조는 대군을 지휘하여 영포를 맹공격했고 , 영포의 군사들은 화살을 빗발치듯 쏘았다. 고조가 잠깐 방비를 늦추는 사이 화살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러나 고조는 고통을 참으면서 맹공격을 계속했다. 영포는 대패해 달아나다가 도중에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고조는 만년에 이르러 척부인을 총애했으며 척부인의 아들 여의(如意)를 조왕으로 책봉했다. 고조는 려황후의 아들인 태자 류영이 유약해서 늘 근심하던 터였으며 오히려 여의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는 태자 류영을 페하고 여의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대신들을 모아놓고 의논해 보니 다들 반대했으며 심지어는 승상 장량마저 동의하지 않았다. 고조는 태자를 페할 방법이 없었다.
  고조는 병이 들어 살날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대신들을 불러놓고 백마 한 마리를 잡았다. 대신들과 함께 그 백마 피를 마시면서 이렇게 맹세하게 했다.
   “류씨 성이 아닌 사람을 왕으로 세우지 않고, 공로가 없는 자에게는 작위를 주지 않는다. 이 맹약을 위반하는 자는 모두들 힘을 합쳐 없앤다.”
   고조는 병세가 위급해지자 려후를 불러 후사를 부탁했다.
  기원전 195년, 고조는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려후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심복 대신인 역시기에게 은밀히 이렇게 말했다.
  “지금 있는 장수들은 대부분 선제와 함께 군사를 일으킨 사람들이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휘두르기가 어렵소. 선제께서 승하하시고 없는 지금 그들이 무슨짓을 할지 모르오. 아예 모두 죽여버리는 것이 좋겠소.”
   역시기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랐다. 그는 혼자서 감당할 수 가 없어서 려후의 오빠인 려석지에게 이 어마어마한 일에 동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려석지의 아들 려록이 이를 듣고는 가까운 친구인 역기에게 알려주었다. 역기는 이일을 아버지인 역상에게 전했다.
역상은 그 말을 듣자마자 역시기를 찾아가 꾸짖었다.
   “황제께서 붕어한 지 나흘이 넘었다면서요? 그런데 황후께서는 발상은 하지 않고 대신들을 죽일 작정부터 하시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러다간 큰일이 납니다. 대신들과 장군들이 격분해 일어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큰 난리가 일어날 건 말할것도 없고 자칫하다간 대감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 말에 역시기는 겁을 먹고 급히 려후를 찾아갔다. 려후도 생각해 보니 대신들을 모두 죽일 자신이 서지 않아 그일을 포기했다. 그리고 발상을 하라고 명했다.
   대신들은 고조의 장례를 치르고 태자 류영을 황제로 올려놓았는데 그가 바로 혜제 이다 그리고 려후는 태후로 되었다.
   려태후는 척부인과 그녀의 아들 여의를 증오했다. 고조가 척부인과 척부인의 아들을 사랑했고 그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고 한일을 감슴속에 품고, 어느때던 화풀이를 하리라 별러왔다. 그녀는 먼저 척부인을 노예로 만들었고, 사람을 보내여 여의를 봉읍지에서 장안으로 불러왔다.
   려태후가 동생 여의를 죽이려는 것을 안 혜제는 여의를 자기 궁궐에 데려다놓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잤다. 그러자 려태후도 손을 쓰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혜제는 활쏘기를 하려 사격장을 나갔다. 여의도 데리고 가려고 하였으나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지 못했다. 혜제가 활쏘기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오니 여의는 시체가 되어 침상에 누워 있었다. 동생이 독살당했다는 것을 안 혜제는 시체를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여의를 죽인 려태후는 척부인에게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고 두 눈을 도려냈다. 그리고 두손과 두발을 잘라낸 다음 변소에 버렸다.
척부인의 그런 모습을 본 헤제는 어머니 려태후의 비인간적인 소행에 치를 떨었으며 큰 병을 얻어 몸져눞고 말았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태후에게 이렇게 전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옵니다. 소자는 태후의 소생으로서 더 이상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사옵니다”
   그후 혜제는 조정대사를 려태후에게 맡겨버리고 관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혜제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려태후는 궁 밖에서 갓난아기를 얻어와 혜제의 소생이라고 속이고 태자로 삼았다. 기원전 188년 헤제가 죽자 이 아이가 황제로 되었는데 철모르는 어린아이라 조정 대사를 맡아볼 수가 없어서 려태후가 조정에 나가 집정 했다.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려태후는 가즌 수단을 가리지 않고 본가의 려씨 형제들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집정한 지8년째 되는 해 려태후는 중병으로 드러눞게 되였다. 임존전에 그녀는 조나라 왕으로 있는 동생 려록을 상국으로 올려놓고 북군을 관할하게 했으며, 다른 남동생 려산은 상장군으로 임명하여 남군을 통솔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했다.
   “지금 우리 려씨가 집권하고 있는 것을 안좋게 보는 대신들이 조정에 적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라. 내가 죽으면 궁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말고 궁을 꼭 지켜야 한다. 장례에는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 남들이 그 기회에 어떤 일을 할지 모르니 절대 명심하고 궁을 잘 지켜야 한다. 알겠느냐?”
   려태후가 죽은 후에 군권은 려산과 려록의 손에 들어갔는데 둘은 이 기회를 리용해 바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반란을 계획하고 있는 려씨 가문의 음모를 안 류장은 사람을 보내여 제나라 왕으로 있는 형 류양에게 알리고 장안을 진격하라고 했다. 제나라 왕 류양이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으로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려록이 당황해 하는데 상국인 주발과 대신 진평은 려씨 종족을 없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류양과 합세하여 일거에 려록과 려산을 죽여버렸다. 려씨세력을 전부 없앤 다음 대신들과 의논하여 어린 황제를 페위시키고 고조의 아들인 대왕 류황을 황제로 세웠다 그가 바로 한나라 문제이다.
   문제는 나라를 잘 다스리였다.
   문제를 거쳐 환제에 이르러 한나라의 국세가 기울리기 시작하였다. 나라 안에는 청렴한 정치를 요구하는 후한의 정직한 무리들과 저항을 일삼는 환관들 간의 투쟁이 끄칠새 없었다.
   환제가 죽은 후 두황후는 두무와 상의하여 황족 중에서 열두 살밖에 안 되는 소년을 뽑아 황제로 올렸는데 그가 바로 영제이다.
   영제는 국사엔 관심이 없고 환관을 총신하면서 먹고 마시고 놀줄밖에 몰랐다. 국고의 돈이 바닥나는 것에도 상관하지 않았다.
   조정의 부패와 지주 토호들의 압박으로 백성들은 빈궁해질 대로 빈궁해진 데다가 해마다 이어지는 자연재해에 더는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곳곳에서 바란을 일으켰다.
  거록이란 곳에 맏이가 장각, 둘째 장보, 셋째는 장량이 라는 걸출한 인재가 있었다. 이들 삼 형제는 능력이 출중했거니와 마음씨도 좋아서 어려운 백성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장각은 의술에 정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어 다들 그를 좋아했다.
  지주 토호들의 압박과 자연재해에 시달리는 농민들이 태평세대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그는 종교를 리용해 농민을 조직하기로 하고 태평도를 창시했다.
  그와 제자들은 민간에 깊이 파고들어가 태평도를 열성적으로 전도했다. 10년 동안 태평도는 전국 각지로 전파되었고 신도 수는 수십만으로 늘어났다.
  장각은 전국8개주의 수십만 신도들을 36개방으로 나누었다. 큰 방은 1만여 명이 넘었고 작은 방은 6-7천명이 되였다. 각방에는 수령을 하나씩 세우고 전 조직은 장각이 지휘했다.
   갑자년(184년)3월 5일에 36개방은 일시에 봉기를 일으키기로 비밀리에 약정했다. 그런데 봉기를 한 달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겼다. 봉기군 내부에 변절자가 생겨 이 사실을 후한 왕조에 고해 바쳤던 것이다.
   그러자 장각은 봉기일을 앞당기기로 결정했다. 장각은 천공장군을 자칭하고 장보는 지공장군으로, 장량은 인공장군을 자칭했다. 장각의 명령이  전해지자 36방의 농민들은 일시에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 봉기군들은 머리에 황색 두건을 써서 “황건군”이라고 불렀다.
황건군의 소식을 들은 영제는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외척인 하진을 대장군으로 세우고 황보승, 주준, 노식을 장군으로 삼아 두 갈래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진압하도록 했다.
   그러나 관군은 위세가 당당한 봉기군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싸움에서 패배한 관군은 도주하기에 바빴다. 대장군 하진은 영제에게 상주하여 각 주와 군의 병력을 조달받는 한편 각지의 병정들을 모집하여 황건군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자 종실 귀족들과 주, 군의 장관들, 호강 지주들은 황건군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모집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서로 땅을 쟁탈했다. 그 결과 나라는 순식간에 분렬되기 시작하였다.
   후한 조정과 호강 지주들의 피비린내 나는 진압 속에서 황건군은 고단한 싸움을 계속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황건군의 수령인 장각이 불행히도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장보와 장량이 봉기군을 이끌고 관군들과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그들도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로 부터 후한에는 삼국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장강을 사이두고 강동에는 손권이 장악한 오(吳)나라가 형성되였고 장강 이북에는 조조가 장악한 위(魏)나라가 세워졌으며 사천에는 류비가 촉(蜀)나라를 세웠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이야기는 먼저 위왕 조조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조조(曹操)의 자는 맹덕이고 소명은 아만이였다. 패국 초연(안휘성 호현)사람으로 아버지 하후승이 환제 때 대환관 조등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조등의 성을 따라 조씨성으로 고쳤다.
   조조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꾀가 많았으며 임기응변에 능했다. 당시 여남 사람 허소가 인물 평가를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어느날 조조가 그를 찾아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 달라고 했다. 허소는 말하기를 꺼려했으나 조조가 하도 요청을 하자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치세(治世)에는 능신(能臣)이고 난세(亂世)에는 효웅(梟雄)이 될 사람이네.”
   그는 20세 때 락양 북부위가 되였다. 당시 락양은 큰 도시로 황족과 높은 관리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세도만 믿고 무슨 짓이든 했으나 아무도 감히 그들을 어쩌지 못했다.
  조조는 부임하자마자 다섯 색갈을 칠한 곤장을 열개를 만들어 관청앞에 매달아놓으라고 명했다. 그 누구든지 법과 금령을 어기면 사정없이 곤장을 친다는 뜻이 였다.
   그때 대환관 건석의 숙부가 조카의 권세를 믿고 법을 마음대로 어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그는 통금 시간이 지났는데도 칼을 차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에 조조는 그를 붙잡아다가 곤장을 때렸다. 그 다음부터 아무도 금령을 더 어기지 못했다. 따라서 락양의 치안이 많이 호전되였다. 조조의 이름도 널리 알려졌다.  
   한시기 동탁(童卓)이 헌제를 옹위하면서 조정이 대권을 장악하게 되였다. 동탁은 태사로 되었고, 헌제를 협박하여 상부(尙父)라고 부르도록 했다. 동탁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조정을 흔들리자 많은 대신들과 지방의 할거 세력들은 반동탁련맹을 무어 동탁을 진공하여 동탁을 죽이였다.
   동탁의 난 이후로 후한 왕조는 이름만 남아있었을 뿐이였다. 각지 주와 군은 이미 지방세력들의 할거지로 변했다. 관료와 호강 지주들은 서로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몇 년간의 고군분투 끝에 조조의 세력은 점차 강대해졌다. 조조는 연주(산동 동성서남부와 하남성동부)로 진격한 황건군을 대패시키고 연주를 본거지로 삼았다. 투항한 일부 황건군을 받아들이여서 군대를 확장시켰다. 그다음에는 도겸과 려포를 무찌르고 그 지방과 군사를 차지함으로써 하나의 강대한 할거세력을 이루었다.
   196년 조조는 동탁이 불 질러놓은 락양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헌제를 허성으로 모셔왔다. 이때로부터 허성은 후한의 림시 도성이 되었고 명칭도 허도로 바뀌었다. 헌제를 위해 조조는 허도에다 궁궐을 지었다. 그러자 헌제는 정식으로 조회를 보기 시작했다. 조조는 스스로 대장군이 되었으며 헌제의 명의로 각 주와 군에 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조조는 북방의 원소 세력을 소멸하고 북방의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였다.
   조조가 북방을 통일하고 있을때, 남방에서는 다른 할거세력이 점차 강대해지고 있었다. 그 세력의 수령은 강동의 주인인 손책(孫策)과 손권(孫權)형제였다. 강동이란 지금의 장강하류의 강남일대를 말한다.
   손책의 자는 백부이며 오군 부춘(절강성부양)사람으로 명문집안에서 태여났다. 아버지 손견은 농민 봉기를 진압한 공로로 장사태수를 책봉 받았다.
   손견은 반동탁 련합군에 가담하여 북상하다가 원술를 만나 원술군의 파로 장군으로 임명되였다. 형주를 쟁탈하던 싸움에서 승전하고 가던중 노양에서 복병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손견이 죽은 다음 맏아들인 손책이 그 직무를 이어받아 군대를 통솔했다. 손책은 언제나 전쟁터에서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손랑(孫郞)이라고 불렀다.
   손책은 군사들이 백성의 재물을 노략질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백성들의 리익을 해치는 일을 하면 엄하게 다스렸다. 그래서 손책의 군대는 강동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어느날 손책이 사냥할려 갔다가 오공태수 허공(손책이 오공을 진공할때 태수 허공을 죽이였다.)의 문객들의 쏜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손책의 몸은 신속히 악화되였다.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안 손책은 모사 장소 등을 불러서 당부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오, 월 땅은 인력과 자원이 풍부한 데다가 방어하기 좋은 장강까지 있어서 큰 위업을 이룩 할 수 있소. 부디 내 동생 손권을 잘 보필해 주길 바라오.”
   그리고는 동생 손권을 가까이 불러 관인(官印)과 인수(印綬)를 넘겨주며 당부했다.
   “강동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장에서 승부를 겨루고 천하를 다투는 일에서는 아우가 나보다 못하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의 각자 힘을 다하게 하여 지금의 강동을 보존하는 데는 내가 아우보다 못하네”
   손책이 죽은 후 동생 손권이 형의 직무를 대신해 강동의 대권을 장악했다. 당시 손권의 나이 겨우 열아홉이였으나 장소와 주유의 보좌로 형의 업적을 계승해 강동을 발전시키였다.
  조조가 북방에서 원소의 잔여세력을 소탕하고 있을 때 형주의 류표 밑에 있던 류비는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는 자기를 도와 모략을 꾸밀 인재들을 맞아들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서서였다 류비는 서서의 비범한 지혜에 탐복하며 그를 군사로 임명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서가 류비에게 제갈량을 천거해 주었다. 류비가 제갈량을 세번 찾아가 진심으로 자신을 도와 달라고 청들었다.  류비의 성심에 감동한 제갈량은 흔쾌히 류비를 따라 나섰다.
   이때 제갈량의 나이 27세였다. 그때로부터 제갈량은 자신의 재능과 지혜를 다해 류비를 보좌했다. 제갈량의 도움으로 류비는 한 지역을 차지하고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해 나가는 력사적 행보를 내딛기 시작했다. 제갈량의 도움으로 류비는 사천에다 촉(蜀)국을 세웠다.
   건안 25년(220년)에 조조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그의 자리를 태자 조비가 물려받아서 위나라 왕이자 승상이 되였다. 이제 조정의 대권은 조비의 손으로 넘어갔다.
   조비가 왕이 된 해의 가을에 그의 친신들이 황제 자리를 양도하라는 상주서를 헌제에게 계속 올렸다.
   30여 년 동안 이름만 황제로 있던 헌제는 대신들의 상주서를 보자 곧 자리에서 물러났다. 조비는 그를 산양공으로 봉했다. 그리고나서 친신들의 옹위를 받으면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되여 류방이 세운 한나라는 서서히 막을 내렸다.
   조비가 황제가 됐다는 소식을 들은 류비이 대신들은 류비를 황제로 올려 한나라의 계통을 승계하게했다. 221년 한중왕 류비는 정식으로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소열제(昭烈帝)이다. 력사상에서는 촉한이라고 한다.
   오왕 손권은 조비와 류비가 황제로 된 후 229년4월에 정식으로 황제가 되였다. 촉한의 일부대신들은 손권이 황제로 되는 것이 비법적이라면서 동오와 즉시 왕래를 단절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들을 설득했다. 지금의 적은 동오가 아니라 북쪽에 있는 위나라이므로 동오와 련맹을 맺고 함께 위나라를 토벌해야 한다는 것이 였다. 촉나라와 오나라가 합세하여 위나라를 진공하였는데 적벽싸움에서 대승하였다.
    나라가 강성해 지자 오만해진 류비는 재갈량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관우와 장비의 원쑤를 갚으려고 70만 대군을 거느리고 오나라를 징벌하려고 떠났다. 그러나 참패를 당하였다. 그후 류비는 병으로 죽었다. 류비가 죽고 류선이 황제로 되였다.
    263년 위나라 승상 사마소는 촉왕 류비와 제갈량이 죽자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수십만의 대군을 모아서 일시에 촉한 을 멸망시킬 준비를 했다. 등애(鄧艾)와 제갈서(諸葛緖) 종회(鐘會)에게 군사를 주어 대거 촉을 진공했다. 드디어 촉은 멸망하고 말았다.
   촉이 멸망한 뒤에도 후주 류선은 줄곧 성도에 있었다 그러다가 종횡, 강유의 병란이 일어나자 사마소는 류선을 성도에 두었다가는 또 시끄러운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락양으로 데려왔다.
   류선은 우매하고 무능한 사람이였다. 후세 사람들은 우매한 사람을 보고 아두란 말로 조롱하게되였다 한다.
   조조가 죽은후 위나라의 대권은 사마의가 틀어 쥐게 되였다. 사마의는 조조의 아들 조상과 조희를  제거하고 나서 2년 후에 병이 들어 죽었다. 승상 직무는 아들 사마사가 이어 받었으며 위나라 대권은 사마사와 사마소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반대하는 대신들을 가차없이 제거해 버렸다.
   그러던중 사마사도 올래 살지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사마사가 죽자 사마소가 대장군이 되였다. 사마소는 사마사보다 더욱 사나워서 못하는 것이 없었다.
   황제인 조모는 이를 참지 못하고 하루는 상성 완겸을 비롯한 대신 셋을 불러놓고 격분해 이렇게 말했다.
   “사마소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길 가는 행인들도 다 알고 있소. 이렇게 앉아서 죽기만 기다릴 수야 없지 않소? 오늘 경들과 함께 목숨을 내놓고 싸워 놈을 주살하려고 하는데 동조해 주겠소?”
   어린 조모는 용기만 있었지 사마소와 싸워 이길 방법을 몰랐다. 격분하여 이성을 잃은 조모는 보검을 손에 쥐고 수례에 오르더니 궁을 지키던 금위군과 시종들을 이끌고 함성을 지르며 궁 밖으로 달려나왔다.
    그러자 사마소의 심복 가충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금위군과 맞붙었다. 조모는 앞으로 나가면서 “나는 황제다 네놈들이 역모를 하라는 게냐” 하고 소리치며 칼을 휘둘렀다. 가충의 병사들은 황제가 직접 칼을 들고 나서자 두려워 도망치려고 했다.
   가충의 수하에 있는 성제라는 자가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자, 가충은 버럭 하를 내면서 고함을 질럿다.
   “물을 것이 있느냐? 사마공이 너희들을 뭣하려 길렀겠느냐””
  이 말에 고무된 성제는 창을 꼬나들고 달려들어 조모의 가슴을 있는 힘껏 찔렀다. 창에 가슴이 뚫린 조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자신의 수하가 황제를 죽였다는 말을 들은 사마소는 덜컥 겁이 났다. 그는 급히 대신들을 불러 이일을 의논했다.
그러자 로신하 진태가 말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성제를 죽이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야 천하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게 됩니다.”
  사마소는 이 일을 질질 끌다가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까 봐 황제를 죽인 대역죄를 성제한테 뒤집어 씌우고 그의 가문 사람들을 다 죽여버렸다. 그리고 조조의 후대중에서 열다섯 살인 조환을 황제로 올려놓아는데 그가 바로 원제이다.
   촉한을 멸망시킨 사마소는 동오로 진격할 준비를 했지만 중병이 들어 시작도 못하고 죽어버렸다.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은 원제 조환을 패위시키고 자신이 황제가 되였다. 국호를 진(晉)으로 고쳤다. 그가 바로 무제(武帝)이다. 265년부터 316녀까지 진나라는 락양을 도읍으로 하였기에 력사상에서는 서진(西晉)이라고 한다.
   무제는 황제로 등극하자 동오를 칠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모사들과 의론한끝에 양호의 책략을 받아들이였다. 양호의 책략을 자세히 보고받은 무제는 즉시 두예를 평안동장군으로 삼아 형중의 모든 군대를 통솔하게 했다. 두예는 명을 받고 군마를 모집해 조련시키고 식량을 비축하면서 동오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듬해 두예는 군사를 몰고 가서 내부 싸움으로 갈등을 겪고 있던 오나라를 멸망시키였다.
   류방이 세운 한나라가 세나라로 분렬되였다가 다시 통일된   진나라로  되였다.
  다시 읽어보는 삼국지 중국편 이야기는 여기에서 끊고, 다음으로 조선 력사 이야기로 넘어간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35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35 산수(傘壽)에 이르고 보니 2023-09-07 0 1887
134 "인물전3" 걱정도감 2023-03-17 0 786
133 (인물전 2)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사나이 2023-02-17 0 708
132 오래 살라는 축복인줄 아세요 2022-12-31 0 1213
131 우리 집 밥상 변천사 2022-11-18 0 972
130 합심하여 가교적 역활을 하자 2022-10-01 0 3343
129 엉뚱한 생각 2022-07-19 0 2347
128 천려일득 2022-06-21 0 1199
127 녀황제와 녀왕들 2022-03-13 0 860
126 다시 읽어 보는 삼국지 2022-02-22 0 641
125 다시 읽어 보는 삼국지 2022-02-21 0 552
124 2022-02-09 0 1454
123 항우와 최영 2022-01-31 0 2637
122 황진이 2022-01-28 0 1962
121 고조선 단군신화 2022-01-17 0 1674
120 손도 2021-06-11 0 1357
119 뜻밖의 선물 2020-12-27 0 1583
118 10월의 황산 (1~3) 2020-11-22 0 1456
117 10월의 황산 (4~5) 2020-11-22 0 1415
116 상서를 돌아보다(1~3) 2020-10-27 0 1391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