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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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와 최영
2022년 01월 31일 20시 19분  조회:2638  추천:0  작성자: 최상운
                                     항우와 최영
 
 
     중국력사와 조선력사를 공부를 하다 보니 어떻게 보면 항우와 최영장군의 운명이 비슷하였다는 감이들었다. 그 두 사람의 태여난 국적과 시대는 다르지만 무명 소졸로부터 시대의 이름난 영웅이였다는 점과 두 사람 다 자기에게 다가온 절호의 기회를 놓쳐 불우한 운명을 마치였다
     먼저 항우에 대한 이야기 부터 하련다. 진시황의 6국을 통일하여 통일된 진나라를 세운 후였다. 진시황의 뒤를 이어 호해가 황제가 되던해 기원전 209년 7월에 중국 력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그 봉기를 주도한 사람은 진승과 오광이었다. 거세차게 일어났던 진승과 오광의 봉기는 내부 분렬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진승과 오광의 봉기는 실패 하였지만 다른 봉기대오는 장성하였다.
    남방 회계군에서도 강대한 농민 봉기가 일어났는데 주동자는 항량(項梁)과 그의 조카 항우(項羽)였다. 항량은 초나라 대장군 항연의 아들이였다. 아버지 항연은 진나라 대장 왕전이 초나라를 멸망시킬 때 싸움에서 패하고 자살했다.  항량은 아버지 원쑤를 갚고 초나라를 재건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조카 항우는 몸이 웅장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항량을 따라다니며 많은 무예를 배웠다.
    항량은 원래 하상 사람인데 남과 원쑤진 일이 있어서 회계군 오중으로 피신해 있었다. 항량은 문무를 겸비하였기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형님으로 대접하며 따랐고, 그는 병법과 무예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이때 진승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항량은 위훈을 세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젊은이들을 데리고 관가로 쳐들어가 군수를 죽이고 회계군을 점령했다. 그리고 며칠 만에 8천명이나 되는 봉기군을 조직했다 이 봉기군은 그곳 젊은이들로 구성되였기에 “자제병”이라고 불렀다.
    항량과 항우는 8천명의 자제병을 거느리고 장강을 넘어 광릉군을 점령하고 이어 회하를 건너 북으로 전진했다. 도중에 각지의 봉기군들이 찾아와 항량의 군대에 가담했다.
    이듬해에 류방도 1백여명의 봉기군을 데리고 항량의 군대에 가담했다.
    류방은 패현 사람인데 진나라 때 정장이라는 작은 벼슬을 지냈다. 열 개의 리가 한 정이였으니, 정장은 열 개의 리를 관할하는 관리였다. 그런데 어느 날 류방에게, 여산으로 갈  민부들을 압송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민부들을 압송하여 여산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매일 몇 명씩 도망을 쳤다. 류방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여산에 도착하면 그 책임을 져야만 했고, 엄격한 진나라 법에 의하면 살 가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방은 민부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여산에 가면 매를 맞아 죽지 않으면 일에 지쳐서 죽고 말 것이다. 가령 죽지않고 살아 남는다고 해도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 너희들을 다 놓아주겠으니 각자 제 살길을 찾아가라”
    민부들은 모두 류방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수십 명은 류방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류방은 그들을 데리고 탕탄산으로 들어가 숨었다.
    패현 현청의 아전인 소하와 옥지기인 조참은 류방의 인품이 좋다는 것을 알고 일찍부터 친분을 맺었으며 왕래가 잦았다.
    진승이 진현을 점령하자 소하와 백성들은 패현 현령을 죽이고 사람을 탕탄산에 보내여 류방을 데려왔다. 사람들은 류방을 패현의 수령으로 올려놓았으며, 그를 “패공”이라고 불렀다. 얼마 지나 장량도 류방을 찾아와 대오에 가담했다.
    항량은 류방을 인재라고 여기어 그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류방은 항량의 수하가 되었다.
    봉기군을 재정돈한 항량은 진나라 대장인 장한의 군대를 대패시켰으며, 항우와 류방도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 진나라 장수 이유를 죽였다. 패했던 장한은 항량이 경계를 늦춘 틈을 리용하여 맹렬한 반겪을 감행했다. 항량은 그 전투에서 전사하고 항우와 류방의 군대는 팽성까지 물러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항량의 군대를 대패시킨 장한은 봉기군의 원기가 다시는 살아나자 못하리라고 보고 북으로 올라가 조나라를 공격했다. 이 절호의 기회를 노린 항우와 류방은 장한의 뒤를 엄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진나라 조정에서는 장한을 모함하여 죄를 들씌웟다. 장한도 살길을 찾아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항우한테 투항하였다.
     공교롭게도 항우 먼저 류방의 군대는 진나라 임금이 있는 패상까지 곧장 진격했다. 류방이 인솔하는 대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한 왕 지영은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알고 대신들을 데리고 나와 류방한테 항복했다.   
     거록대전에서 진나라 대장 왕리를 죽이고 장한을 항복시킨 항우는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함곡관으로 진군했다. 그런데 함곡관에 이미 와 있던 류방의 군대들이 항우 군대의 입관을 저지했다. 대노한 항우는 군사를 명해 함곡관을 맹공격하게 했다. 함곡관을 쉽사리 함락한 항우의 군대는 그 승세를 타서 신풍, 홍문까지 진군해 그 곳에다 진을 쳤다. 거기서 류방의 군대가 있는 패상까지는 불과 40리였고 항우는 이튼날 총공격 실시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항우의 숙부 항백은 류방의 모사 장량과 친구지간이였다. 항백은 친구 장량의 목숨이 위태로을까 봐 야밤을 틈타 류방의 진영으로 가서 장량에게 빨리 피신하라고 알려주었다. 장량이 그 말을 전하자 류방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야단났네, 이 일을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그러자 장량이 말했다.
     “항백을 불러 도와 달라고 해야지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더러 항우에게 사정해 우리를 용서하게 해야지요.”
    이에 류방은 급히 주안상을 차리고 항백을 불러 극진히 대접하면서 자기 딸과 항백의 아들을 혼인시켜 사돈을 맺자고 했다. 항백은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래일 아침 일찍, 항우를 찾아가 좋은 말로 사죄를 하시오. 그러면 내가 곁에서 도와드리리다.”
    이튼날 아침 류방은 장량과 번쾌, 군사 1백명을 데리고 항우를 만나러 홍문으로 갔다. 항우를 보자 류방은 무척 겸손한 태도를 보이며 말했다.
    “저와 장군은 함께 진나라를 치기로 하고 함양으로 진군했는데 장군은 북쪽으로 진군하고 저는 남쪽으로 진군하였지요.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제가 먼저 관중으로 들어와 함양을 함락하게 되었고, 오늘 이렇게 장군을 뵙게 되였으니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듣자하니 어떤 소인배들이 장군과 저 사이를 이간시키려하는 모양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그자들의 말을 듣지 마시길을 바라옵니다.”
   성미가 곧은 항우는 류방의 가련한 상을 보자 노기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항우는 즉시 연회를 차리게 하고 잔을 들어 류방에게 권했다. 항우의 태도는 점차 화애롭게 변해 갔다. 연회에서 항우의 모사 범증이 항우에게 눈짓을 하며 옥 술잔들 자꾸 가슴 앞으로 들어 보였다. 어서 류방을 죽여버리라는 재촉이였다. 그러나 항우는 본체만체하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범증은 구실을 대어 밖으로 나와서는 항우의 사촌형인 항장을 찾아가 당부했다.
    “항왕은 마음이 너무 무던해서 안 되겠네. 임자가 술상 앞으로 가서 류방한테 술을 권하고 흥을돕는 다고 칼춤을 추다가 기회를 봐서 한칼에 베여버리게”
     그런데 항장이 칼춤을 추는 것을 본 항백이 자칫하다가는 자신과 사돈을 맺은 류방의 목숨이 위태로을 것 같아서 “칼춤이란 둘이 추어야 멋이지 혼자 추는 법이 어디 있나” 하며 칼을 빼들고 나가 칼춤을 추면서 류방을 보호했다. 일이 그렇게 되니 항장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사태가 위태로워지자 류방의 모사 장량은 기회를 엿봐 밖으로 빠져 나와서 번쾌를 불렀다.
     “큰일났소. 지금 연회석에서 항장이 칼춤을 추고 있소. 칼끝이 패공을 겨누곤 하는데 자칫하면 큰일이 나겠소.”
    “뭐요! 그자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단 말이오? 내가 들어가 보리다.”
    보검과 방패를 들고 달려간 번쾌는 앞을 가로막는 문지기들을 밀쳐버리고 노기 충천해 군막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에 노기를 띤 시커먼 사람 하나가 느닷없이 연회석으로 뛰여들자 항우는 급히 검을 쥐며 외쳤다.
    “이놈, 넌 누구냐?”
    장량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
    “패공의 차부인 번쾌입니다. 시간이 지체되여 배가고파 그러는 것 같사옵니다.”
    항우는 번쾌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찬탄해 말했다.
    “과연 대단한 장사로군, 그에게 술 한되와 돼지 다리하나를 상으로 내줘라.”
    술 한 되를 단숨에 들이키는 번쾌를 지켜보고 있던 항우는 그 호걸스러운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어 물었다.
    “술을 더 마시겠는가?”
    번쾌는 거친 음성으로 대답했다.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술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더 주면 더 먹겠습니다. 애당초 회왕께서 뭐라고 약조를 하셨습니까? 먼저 함양을 점령하는 사람을 그곳이 왕으로 세운다고 하였지요. 그러다 패공께서 먼저 함양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패공은 창고를 봉해놓고 군대는 함양에서 나가 패상에 주둔시키고 대왕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공이 많은 패공께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이간을 일삽는 소인배들의 말을 듣고 패공을 죽이려고 하시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진나라 왕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답변이 궁색해진 항우는 그를 불러 장량 곁에 앉혔다. 그사이에 정신을 차린 류방은 볼일을 본다며 그 자리를 빠져 나갔으며 장량과 번쾌도 따라나갔다. 류방은 그 기회에 자신의 군영으로 몰래 돌아가고 싶었지만 작별인사도 없이 간다는 것이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것 같아 망설이였다. 그것을 본 번쾌가 발을 동동 굴렀다.
    “천하를 도모하는 사람이 그 잘난 예의에 발목이 잡힌단 말입니까! 지금 우리는 도마 위에 오른 고기가 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신세인데 예의가 다 무엇입니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경황입니까? 어서 가십시다. 안가시면 큰일이 납니다.”
     류방이 빠져 나간 후 장량은 한참 동안 있다가 류방이 군영에 도착했 때쯤에 항우의 군막 안으로 들어가 사과를 했다.
    “패공은 원래 주량이 적은데다 오늘 과음을 해서 미처 대와님께 작병인사도 못 드리고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패공게서 대왕님게 드리는 한 쌍의 백벽이고, 이것은 아부(범증)께 드리는 옥 술잔이옵니다.”
    백벽을 받은 항우는 아무 말이 없는데 법증은 성이 나서 옥 술잔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보검을내리쳐서 산산조각을 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한탄을 했다.
     ‘정말 큰일을 못할 사람이야 저런사람을 도와주는 내가 부질없지. 항왕의 천하를 앗을 자는 저 류방뿐이거늘 우리는 장차 류방의 포로 신세를 면치 못할 거다.”
     홍문의 연회는 이렇게 초한(楚漢) 전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류방과 항우간의 치렬한 싸움끝에 항우는 대패하고 자결까지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홍문연”은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벌이는 연회석”을  일걷는 말이다.
     항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니 항우는 장군으로 될수 있는 재목이였으나 나라를 다스릴수 있는 큰 인재는 아니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 최영장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최영은 1315년 개성에서 사헌 규정의 벼슬을 하던 최원직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최영은 지칠줄 모르는 담력과 용맹을 지닌 고려말기의 용맹한 장수였다. 실로 그는 100여차에 달하는 왜적과의 싸움에서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무적의 명장이였다.
    당시로 말하면 외적의 침임으로 나라가 어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고려정부는 변고를 들을 때마다 군사를 풀어 해적과 싸웠으나 특별한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허탕을 쳤다. 개경정부에서는 의론이 분분했다.
    항시 방비를 튼튼히 갖추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왜적의 소굴을 들이쳐 된맞을 보여야 한다는 바른 소리가 있는가 하면 도적이란 어느때고 있기마련이니 군사를 크게 일으켜 봤됐자 그때뿐이고 도적은 또 생긴다는 비뚤어진 소리도 있었다.
   이들의 견해인즉 지금까지 여러차레 허탕을 치지 않았는가, 공연히 자기 이발만 부려뜨리지  않았는가, 그러니 사절도 파견하고 요구하는 물건도 좀 주어 적당히 무마하는것이 좋겠다는것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적극적인 싸움을 다음세기로 밀어 던질번 했던 위험이 사라지게되였다.
    오래지 않아 최영과 같은 무장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것이였다.
    최영이란 이름이 고려조정에 처음 알려 진것은 그가 양광도 순문사의 휘하에서 수차 왜적을 사로잡아 원쑤들을 전률케 한 때부터였다.
    최영이 왜적이 친입했다는 급보를 받고 현지에 당도했을 때는 왜적 수십놈이 한창 마을에 달려 들어 외양간에서 소를 끌어 내고 있었다.
    놈들은 고삐를 잡고 놓지 않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칼로 찍었다. 다른 한무리는 쌀을 비롯하여 옷가지며 가장집물을 닥치는대로 털어 냈다. 도적이 괴수인듯 검은색 투구를 쓴 짐승같이 우악스럽게 생긴 놈이 부녀들한테 달려 들었다. 놈이 한 아낙네의 등에 업힌 아이를 무우 뽑듯 훌적 뽑아 던지고 와락 그러안는 찰나에 망을 보던 왜적 한놈이 달려 와 “두령님 적이 나타났소이다.” 라고 고하였다.
    두령놈이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머리를 돌리니 한 30명 돼 보이는 고려군사들이 짓쳐 오고 있었다. 놈은 벌씬 한번 웃고는 “달려오는 놈들에게 화살을 먹여라”라고 소리쳤다. 고려군을 얕잡아 보았던지 배로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고 맞설 심산인것 같았다. 놈들이 아군을 향하여 화살을 날리였다. 잠시 달려 오던 군사들의 대오에 혼란이 일어 난듯 하더니 다시 짓쳐 왔다. 그중에서 한명이 유표하게 앞서 달려 왔다. 그는  왼손으로 말 고삐를 잡은채 말우에서 몸을 일으키며 위로제쳤다가 오른손에 꼬나든 장창을  힘껏 던지고 있었다.
   6척장신의 헌걸한 장수였다. “악!”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맨 앞쪽에서 싸리울바자에 의지하여 화살을 날리던 왜적 하놈이 정통으로 창을 맞고 쓰러지는것을 본 두령놈은 그제야 안되겠던지 큰소리로 웨쳤다.
    “빨리 배를 타라!”
    장창을 던진것은 최영이였다. 그가 던진 창으로 놈이 등가슴을 뚫고 땅바닥에 그대로 못 박아 놓았다. 그는 달려오는 서슬에 창을 홱 뽑아 잡고 달아나는 왜적을 무섭게 추격하였다.
     바다에서는 두척이 왜선이 기우등거리고 있었다. 한척이 배는 벌서 뭍을 벗어 났다. 뒤에 떨어 진 배의 앞뒤로 왜놈들이 달라붙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밀고 당기며 법석 끓었다.
    최영은 달리는 말에서 창을 힘껏 던졌다. 창은 닻줄을 잡아당기던 놈의 잔등을 뚫고 들어 가 돛대에 못 박아 놓았다. 놈이 한쪽손에는 닻줄이 이직도 쥐여 져 있었다. 최영이 던진 창에 저의 패거리 한놈이 또 뒈지는것을 본 놈들은 일시에 배에서 물러나 잎서가는 배를 향해 죽어라 혜염쳐 갔다. 최영은 말에서 곧장 물에 뛰여 내려 갑옷을 벗어 던지고 헤염쳐서 두놈을 끓어 냈다. 뒤미처 바다가에 군사들이 이르렀다. 아군도 왜놈들도 모두 젊은 장수 최영을 보고 입을 닥 벌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는 대호군으로 승진하였다. 그 시기 최영은 나라를 지키는 싸움이라면 대소를 가리지 않고 참가하였다.
    그는 원나라 침략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의 일환으로서 1356년6월 고려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거너 적의 병참기지 8개를 들이쳐 침략자들을 멀리 쫓아 버렸다.
    다음해에는 최영이 평안남도 방면의 체복사로 일하고 있는데 왜적이 병선 400여척으로 오에포에 침입하였다는 말을 듣고 주야로 달려 복병하였다가 놈들을 불의에 엄습하여 소탕해 버리였다.
     그후 14세기 60년대초 홍두적의 1차, 2차 칩입을 물리치기 위한 전투에서도 고려군지휘를 맡아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는데서 결정적 역활을 하였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져 있다.
    “최영은 성질이 강직하고 충실하며 또 청렴하였다. 전선에서 적과 대치하여서는 태연하였으며 화살이 비발같이 지나도 조금도 두려워 하는 기색이 없었다. 군사를 지휘함에 있어서는 규률을 엄격히 세워 반드시 이겼으며 전사가 한걸음만 물려서도 곧 목을 베였다.그러기에 크고 작은 수많은 전투에서 어디서나 승리를 쟁취하였고 패한적이 없었다.”
    실로 그의 전 생애는 마지막시기까지 반침략 나라의 방위를 위한 투쟁과 결부되여 있었다.
     전장에 나가면 명장이요. 조정에 들어 와선 공명정대한 정치가인 최영의 생애는 군사가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풍모에서도 고려시기 다른 봉건관료들과 구별되였다.
    그는 임금에게 추호의 사심도 없이 충성을 바친 충신중의 충신이였다.
     어떻게 보면 최영의 최후의 운명도 항우처럼 아쉬움만 남긴 운명이였다고 볼수있다.
     고려에서 명나라의 사신 채빈을 죽인 이후 명나라에서는 채빈의 오만 무레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고려 조정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계속하엿다.
     “고려국의 처사는 믿을 수 없다. 친교를 거부한다.”
     명나라에서는 이런 말을 계속햇고 채빈을 죽인 값으로 부녀자 1천명, 학생 1천명, 내시 1천명, 우마 각 1천 필을 보내야 한다는 등 고려에 대하여 위협적인 행동을 자행하였다. 이런 소식을 들은 고려의 실권자 최영은 비장한 각오를 했다.
    “사태의 심각성에 비추어 우리가 선수를 쓰는 수밖에 없다. 전날 고구려의 땅이였던 료동은 현재 비어 있는 상태이니, 이때를 놓치지 말고 옛땅을 회복하자.”
      이때 명나라에서는 료동땅에 철령위를 둔다고 하였다. 철령위에 고려의 북쪽땅이 거의 포함된다고 하였다. 여기에 최영은 우왕에게 료동징벌의 필요성을 상주하였다. 이 료동공략은 급진적으로 추진되였다. 팔도도통사에 최영,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애 리성계를 임명하고 그 밑에 수십 명의 장군과 7만명의 군사를 배속시키였다.
    그때 우군도통사 리성계는 다음과 같은 불가론을 내세워 료동징벌을 반대하고 나섰다.
    첫째 ; 소국으로서 대국을 치는 것이 불가하고,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불가하고, 셋째 전 병력을 동원하면 이를 틈타 허점을 노린 왜구의 침입이 걱정되고, 넷째 여름 장마철이라 활이 힘이 약해지고 전염병이 염려된다는 것다.
    중책을 맡은 우군도통사의 이같은 반대는 불길함을 예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도 최영은 계획대로 료동징벌군을 출동시켰다.
   5월 초순에 좌우군은 위화도에 이르러 일단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왕과 최영은 안주에 이르러 총지휘를 하고 있었다. 최영은 도통사의 자격으로 작전명령을 내려 선봉부대로 하여금 즉시 압록강을 건너 진격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강을 건너지 않고 회군하겠다는 주장을 하니 의견 불일치로 료동징벌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 주었다. 며칠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주모자 리성계는 회군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성계는 오래 전부터 고려가 망할때가 되였다는 한 도사의 말을 믿고 고려에 대하여 반기를 들 뜻을 가지고 있었다.
    왕과 최영은 이같은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듣고 즉시 서경으로 들어가 지휘하려고 하였으나 회군하는 속도가 빨라 수숩할 길이 없었다.
    “고려는 망하는구나”
    최영이 탄식을 하며 왕을 모시고 개성 화원으로 들어가니 이때 최영의 휘하에는 50여 명의 군졸밖에 없었다. 개성에서 다시 나머지 군사를 모아 천여명의 군사로 반란군을 저지하기 위한 첫 전투가 벌여졌다. 처음에는 역적을 토벌한다는 대의명분과 의기로써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결과는 뻔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왕이 있는 화원은 고립상태로 되어갔고 화원에는 왕과 왕비(최영의 딸) 최영 몇사람뿐이였다.
   리성계는 최영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했다.
    “이번 거사는 나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오. 료동을 징벌한다는 것은 대의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고려가 위태롭고 국민이 원하는 바가 아니므로 원한이 하늘에까지 닪았기 때문이오. 나로선 부득이한 일이였소.”
     “쓸데없는 소리다. 옛날 이인임의 말만 들었다라면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 텐데!”
    한마디 말이 있을뿐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침내 최영은 명나라에 대한 역적이란 죄목으로 고봉현에 귀양 갔다가 두 달 후에 처형되였다.
    최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나니 최영은 용맹한 장수였지만 훌륭한 군사가로는 될수없겠다는 감이든다. 리성계가 한말을 참고로 삼았더라면 고려를 지키고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면치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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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뜻밖의 선물 2020-12-27 0 1583
118 10월의 황산 (1~3) 2020-11-22 0 1456
117 10월의 황산 (4~5) 2020-11-22 0 1415
116 상서를 돌아보다(1~3) 2020-10-27 0 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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