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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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황산 (4~5)
2020년 11월 22일 08시 24분  조회:1415  추천:0  작성자: 최상운
10월의 황산

4. 굉촌으로 가다.
 
     이번에 갈곳은 굉촌고대촌락(宏村古村落)이였다. 굉촌은 황산시 서북쪽에서 70km상거한 이현 벽양진에서 10km떨어져 있는 제련향 인민정부 소재지에 있었다. 굉촌으로 가는 길가에 전국문명촌 굉촌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걸려있었다. 우리는 제련향진에 도착한후 굉촌으로 집적 가지 않고 제련향진을 돌아보았다.  제련향진은 작은 진이라 하지만 큰 도시에 못지지않게 잘 건설하였다. 제련향진의 거리를 돌아보니 넓은 거리 량켠에 4 - 5층으로 된 건축물들이 줄비하게 있었다. 제련향진의 건물을 보니 다른 지방보다 특이한 데가 있었다. 흰벽체에 검은 기와를 얹었고 가파롭고 높은 룡마루와 하늘을 향하여 거뜩 쳐든 처마가 이색정 풍치를 돋구고 있었다.
    가이드 호도가 이런 말을 했다. “ 옛날 휘주지방에서는 산이 많고 경작지가 적어 남자들은 거진 타지로 일하려 나가게 되였습니다. 남자애들은 13살이 되면 외지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다나니 마을에는 부녀들과 아이들만 남게 되였습니다. 불순한자들의 침입을 막기위해 집을 지을때 벽체는 높고 창문은 작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제련향진을 돌아 보고나서 인츰 굉촌마을로 향하였다. 굉촌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굉촌(宏村)이라는 현판을 단 문루가 있었다. 문루 아래에는 마을로 들어갈수 있는 검사구가 있었다. 검사구에서는 입장표와 건강검진증을 검사하였다. 특이한것은 의무일군과 65세이상이 로인들은 무상으로 들어갈수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강이 있었고 그강을 건널수 있는 아치형 다리가 있었다. 나는 다리우에서 굉촌마을을 보았다. 굉촌 마을은 전부 북남방향으로 앉아 있고 마을 뒤에는 설강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면서 보니 마을 앞으로는 구비구비 흐르는 두 줄기의 강이 마을 한복판에 있는 월당(月塘)을 지나 다시 마을 남쪽에 있는 호수에 흘러들어가는 것이였다. 마을의 형태는 소우(牛)형으로 되여 있는데 그야말로 설계가 교묘하기로 건축사상 보기 드문 창조라고 여겨졌다.
    마을 앞에는 넓은 호수가 있었는데 마을로 들어가자면 호수를 건너는 아치형 다리를 건너야 했다. 청조(淸朝)의 강희황제가 이곳으로 왔다가 말을 타고 이 다리를 건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굉촌에 대한 안내도를 보니 굉촌에는 왕씨, 호씨, 부씨, 장씨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왕씨가 제일 많다고 했다. 촌에는 명나라때의 민가가 한채 있고 청나라때의 주민 주택이 132채가 있었다. 주택을 보니 모두다 팔자형(八子) 조벽으로 되여 있고  문틀과 문은 나무로 되여있고 나무창살로 돼 있었다. 문간방은 벽돌 조각으로 되여있었다. 그리고 문 안에는 정자가 있고 천장에는 채색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장식이 화려하고 조각이 섬세하였다. 그 많은 집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으로는 남호서원 (南湖書院)과 승지당(承志堂), 그리고 경수당(敬修堂)이였다. 남호서원과 승지당 그리고 경수당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옛적부터 굉촌 사람들은 학업에 열중하였으며 부지런히 공부하여 훌륭한 인재들을 배양하였구나! 라고 생각 했다.
    굉촌 마을 길은 청석을 깔아놓은 길이였다.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서 보니 길 아래에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 냇물은 이  마을의 생명수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가 가가호마다 사용하고 있는 수도와 같은 존재라 하였다. 이 수로는 마을 전체에 물을 공급한다고 했다. 하지만 마을에서 제일 권력이 세고 부자인 집에서는 이 수로를 사용하지않고 단독으로 된 움물을 사용하였다.
   마을 어귀에는 이 마을의 조상의 령전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후세들이 과거에 급제하였거나 결혼할때면  꼭 이곳에 오시여 제를 지내며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한다.
   남호서원이나 승지당, 경수당을 보면 대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네벽으로 된 방이였는데 한곳을 내놓고는 전부 천방으로 가려져 있었다. 방 앞뜰에 가리막이 없는 네모난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이 구멍으로 했빛이 들어와 실내 공기를 환기해 주며 밝게 해 주는 작용을 했다.
   마을 한복판에는 커다란 맑고 푸른 호수가 있었다. 호수 주위에는 2-3층으로 된 집들이 있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호수주위에 살던 사람은 이 마을에서 권력이 있고 돈 많은 부자들이 살던곳이라 했다. 마을에는 작은 도박장이 있었다. 권력가와 부자들만이 놀수있는 아늑한 곳이였다. 도박장 한쪽켠에는 작은 비밀 경비실까지 있었다. 마을을 돌면서 인상적이 였던 곳은 이 마을에서 제일 잘 살았던 부자 집 집안을 보는 것이였다. 널직한 집안에는 한 가족이 일상적으로 모여 식사를 하는곳과 손님을 접대하는 영빈실 그리고 로인이 사는 방과 젊은 부부가 사는 방이 따로 있었다. 부부가 살았다는 방을 보니 한 방안에 본댁이 사는 침실과 첩이 사는 작은 침실이 따로 있었다. 내가 부자인데도 왜서 침실만은 작을가? 머리를 갸웃듯 하자 가이드가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들은 북경에 있는 고궁으로 가 보았을 것입니다. 고궁에 있는 황제가 쓰던 침실을 보십시오 궁전에 비하여 얼마나 작습디까? 침실이 작은 원인은 부부가 좁은 칸에서 생활해야 정이 깊어 지기 때문이라 합니다.”
    굉촌은 명나라 이후로 한 마을에서 과거에 합격된 사람이 제일 많은 촌이라 한다.
   굉촌 마을을 한바퀴 도는데 두시간이 걸리였다. 나는 잘 보전된 굉촌 고대촌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력사의 비극인 “문화대혁명”때 이곳 굉촌 고대마을은 어떻게 보내였을가? 내가 궁금해 하는데 가이드 호도가 내 궁금증을 풀어주기라 하듯 이런 말을 했다.
    “문화대혁명”때 이곳도 홍위병에 의하여 보귀한 문물이 많이 파손되였다고 합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승지당 대문가 문루우에 새겨진 조각을 찬찬히 보면 새로 조각한것이 보입니다. 그 당시 굉촌으로 들어온 홍위병들은 승지당 문루의 조각품을 긁어 버리고 그자리에 모주석의 초상을 걸어 놓았됐습니다. 개혁개방후 촌에서는 파괴된 력사 문물들을 원상태로 복원하였습니다.”
    지금 굉촌에 있는 건물을 보면 명나라때 지은 건물 한채는800여년이 되고 그외 대부분은 건물들은 청나라때 건축한 건물로서 400년이 넘는 건물들이 많았다.  
   지금 환남지구에 속하는 굉촌고대촌락은 유명한 관광승지로 되였으며 2000년에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였다 한다.
   가이드 호도는 또 이런 말을 하였다.
   “휘주 지방은 일명 환남지구라 합니다. 항일전쟁 시기 환남지구는 신사군이 주둔지였습니다. 신사군이 항일활동을하던 지구였습니다.  1937년 10월에 남방 8성의 홍군유격대를 국민혁명군 륙군 신사군으로 개편하였습니다. 1941년 1월4일 국민당정부는 돌연히 환남사변을 조작하여 신사군을 습격하였다. 그번전투에 신사군 장병이 7000명이 희생되였습니다.”

 
5. 서채청대민가촌으로 가다.
 
    우리는 굉촌 고대촌락에서 점심을 자신후 인츰 새 향선지인 서채청대민가촌(西遞淸代民居村落)으로 향하였다. 서채 청대 민가촌은 굉촌 고대촌에서 50키로 떨어져 있었다.
    굉촌 고대촌락을 떠나 두시간 만에 서채청대민가촌 입구에 도착하였다. 려행 안내문을 보니 서채청대민가촌은 지금까지 9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북송때 건설하기 시작한 이 촌에는 124채의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 건축한 주택이 남아 있었다. 이촌은 휘주지방을 대표하는 서추(曙秋)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전형적인 마을이였다. 사람들은 이 마을은 청나라때의 건물이 많이 현존하고 있으므로 청나라때의 서채민가촌이라 부른다고 한다. 서채청대민가촌은 일명 “호가촌(胡家村)이라 부르는데 서채청대민가촌에는 200여세대의 호(胡)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채청대민가촌으로 가려면 이현을 지나 서채청대민가촌 뻐스 정류소에서 내려 산등성이까지 올라 갈수 있는 케불카를 가라 타야 했다.
    케불카를 타고 한참 올라가자 산너머에 넓은 골짜기가 보이였다. 길을따라 내려가니 산중턱에 서채 청대민가촌이 나타났다. 마을로 가면서 사방을 둘러보니 마중켠 산자락에 다락을 쌓아 만든 밭들이 그림같이 아름답게 보이였다. 산마다 울긋불긋 이름모를 꽃  들이 활짝 피여 있었다.
    서채청대민가촌은 산비탈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였는데 첫인상이 신기해 보였다. 안내도를 보니 서채청대민가촌에는 중심 골목길이 두갈래가 있고 그 골목길을 따라 99갈래의 작은 골목길이 있다고 했다.
    나는 가이드의 뒤를 따라 마을 중심 골목으로 갔다. 중심 골목길에는 일명 천가(天街)라 불리우는 긴 골목길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천가를 상업거리라 하였다. 천가 량쪽에는 음식점, 마트, 약방, 점포, 과일가계가 줄지어 있었다. 중심길에는 각종 차량들이 붐비고 있어 마치 이곳은 어느 농촌 마을이 아니라 도시의 번화한 상업거리를 방불케 했다.
    거리와 골목길은 청석을 깐 길이였다. 나는 중심거리를 한참 걷다가 중심거리를 떠나 작은 골목길에 들어섰다. 작은 골목길을 걸으면서 보니 양식이 독특한 집들이 길 량켠에 줄줄이 있었다. 집집마다의 대문은 모두 정교하게 다듬은 청석을 높이 쌓아 만든 문간방으로 되여있었다. 문간방 상단에는 모두 돌 조각과 벽돌 조각으로 된 처마가 얹혀있었다. 처마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정밀하게 조각돼 있었는데 그 모양이 천태만상이였다. 그리고 집안 문가름대와 문창, 들보에도 모두 정교한 그림이 조각되여 있었다. 서채청대민가들은 오랜세월을 겪으면서 색갈이 퇴화되여 마을 전체가 어둡게 보이였다.
    우리는 두시간동안 서채청대민가촌을 돌아본후  최신에 건설한 서채촌의 명물인 유리다리를 보려고 갔다. 유리다리를 여러번 건너보아서인지 별로 큰 흥치를 느끼지 못하였다.  서채민가촌의 유리다리는 장가계에서 본 유리다리와 비슷해 보였으나 다리편폭이 졻았다. 장가계의 유리다리는 흔들린다는 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는데 이곳이 유리다리는 약간 흔들린다는 감이 들었다. 서채민가촌에는 유리다리 외 외줄 삭도가 있었다. 담량이 있는 사람은 외줄 삭도를 탔다.
    서채청대민가촌 고대 건축물은 국내외에 호평이 높다고 한다. 국내외 전문가들로 부터 서채민가촌의 건물을 보고 명(明) 청(淸)나라의 건축기술을 그대로 보존한 주택박물관이라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지금 서채청대촌민가촌은 환남의 유명한 관광명승지로 되였으며 2000년에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였다 한다.
    서채청대민가촌에는 약재로 쓰이는 붉은 장미꽃과 백랍 록차가 많이 생산되고 있었다. 서채청대민가촌의 시장거리를 보면 장미꽃, 백랍, 록차를 파는 가계가 여러개 있었다. 서채청대민가촌은 장미꽃, 백합, 록차를 생산하기 좋은 토질과 기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마을에서는 장미꽃, 백합, 록차를 생산함과 동시에 가공하고 판배하는 작은 기업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작은 기업들은 성장하여 지금은 환남지구의 기둥산업으로 부상 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서채청대민가촌을 돌고 나니 12시가 되였다. 우리는 간의 음식점에서 점심을 자신후 인츰 남경으로 향하였다. 예정대로라면 서채청대민가촌에서 집적 양주로 가게 되였는데 려행사의 배치에 따라 양주로 가지않고 남경으로 가게 되였다. 서채민가촌에서 남경까지 가는데 7시간이 걸리였다.
    남경의 한 호텔에서 하루밤을 보내였다. 아침 5시가 되자 우리는 남경에서 태주공항으로 출발하였다. 남경에서 태주공항까지 가는데 5시간이 걸리였다. 보고싶던 남경을  뻐스안에서 보게 되였다. 남경에서 태주공항으로 가는 길은 남경시 중심가를 거치지 않은 외환로 길이였다. 남경시내를 벗어나 두시간 달리자 진강시에 이르렀다. 장강을 사이두고 진강시와 양주시가 있었다. 진강시는 력사적으로 이름이 있는 곳이였다. 삼국시기에 손권이 이곳에 오나라 도읍으로 정하고 위, 촉과 패권 다틈을 하던 곳이라 한다. 나는 무한 장강대교란 말을 많이 들었지만 여짓껏 보지못하였다. 그날 처음으로 장강대교를 보게 되니 기뻐났다. 진강시에 있는 장강대교는 최근에 건설한 다리로서 무한 장강대교 보다 연장길이가 더 길었다. 무한 장강대교는 철로와 공로로 된 쌍층 다리이지만 진강 장강대교 공로형 다리였다.
    장강대교를 건너자 차는 속도를 내였다. 3시간 만에 태주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날 13시30분에 태주공항을 떠난 항공기는 15시50분에 장춘 룡가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16시에 고속전철을 타고 연길에 도착하였다.
    이번 황산려행길에서 많은 것을 보았다. 집에 돌아와 기억을 더듬어보니 기억속에 남는것은 황산의 아름다운 소나무와 높은산, 신비하고 거대한 바위, 산주위를 에워싼 구름, 온천이 잊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구화산의 대불상, 굉촌의 학당들, 서채민가에서 보았던 고거(古居)들이 기억속에사라지지 않았고 여러 명소에서 보았던 안내문에 씌여진 우리 조선글이  인상적이였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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