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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 보는 삼국지
2022년 02월 22일 18시 05분  조회:642  추천:0  작성자: 최상운
                                              다시 읽어 보는 삼국지
 
                                               2,  조선력사편
 
   기원전 2세기경 준왕이 고조선을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중국 연나라에서 위만이 1천여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준왕은 위만에게 “박사”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게 했다. 그런데 위만은 기원전 194년에 준왕을 몰아 내고 스스로 왕이 되였다. 이 때로부터 력사상에서 “위만 조선”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위만이 나라를 다스린 뒤부터 고조선의 세력은 날로 커져갔다. 이런 고조선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건 바로 중국의 한나라였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한나라는 기원전 109년에 고조선을 공격해 왔다. 그때는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두 나라의 싸움은 약 1년 동안 계속되였고, 긴 싸움에 모두들 지쳐 갔다. 그러자 고조선에서는 한나라에 항복하려는 관리들이 생겨났다. 결국 변심한 관리들은 싸움을 계속하려 했던 우거왕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비록 왕은 죽었지만 용맹한 장수 성기가 지키고 있던 왕검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자 한나라의 장군 순체는 “성기를 죽이면 벼슬을 주겠노라”고 관리들을 부추켰다. 이미 분렬되기 시작한 관리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성기를 처치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108년 여름 고조선은 멸망하고 말았다. 고조선의 멸망이 더욱 가슴 아픈 건 전쟁 때문이 아니라 관리들의 분렬과 배신이 그 리유였기 때문이였다.
   
   이제 부터 이야기는 고구려로 넘어간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이였다. 주몽의 탄생 경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처음 부여 왕 해부루는 나이가 많도록 아들이 없어 명산대천에 빌어 아들 낳기를 발원하였다. 어느 날 해부루가 타고 있던 말이 곤연 연못가에 이르러 큰돌을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부하들로 하여금 그 돌을 밀쳐보라고 하였다. 그 돌 밑에는 노란 개구리 모양를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이것은 분명 하늘이 내려주신 내 아들이다.”
    왕은 기뻐하며 궁중으로 데려다가 기르고 이름은 황금 개구리란 뜻으로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점점 자라자 태자로 삼았다.
    그 뒤에 아란불이라는 재상이 천도할 것을 아뢰며 이런말을 하였다.
     “요새 하느님이 내게 현몽하여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 땅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인즉, 너희는 속히 피해 가라, 동해가에 가면 가섭원이라는 땅이 있어, 토지가 비옥하고 농사짓기에 알맞츰하니 그곳으로 가 도읍을 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마침내 그곳으로 천도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고 하였다.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어느 날 금와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유화라는 녀인을 만났다. 유화는 물의 신인 하백의 딸로, 아버지이 허락없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와 정을 통했다가 집에서 쫓겨나오고 말았다.
    금와왕은 그런 유화를 불상히 여겨 궁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어느 날 햇빛이 그녀를 비추더니, 유화는 곧 커다란 알을 낳았다.
    해모수가 햇빛이 되여 찾아온 것이였다.
    금와왕은 알을 밖에 내다 버리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그알을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는지라 길바닥에 버렸더니 소와 말도 그 알을 밟지 않고 피해 갔다. 마지막으로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그 알을 품어주었다. 왕이 더욱 이상하게 여겨 그 알을 깨트리라고 하였으나, 까지지 않아 도로 유화에게 갔다 주었다. 유화가 그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얼마 동안 놓아두자 한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의 생김이 비범하고 영특하여 나이 7살에 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 맞쳤다. 부여의 속담에 활 잘 쏘는 사람들 주몽이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그 아이를 주몽이라 하였다.
    금와왕에게는 아들 7형제가 있었는데 주몽과 함께 놀이를 하면 7형제 모두가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장자 대소가 주몽을 시기하여 부왕께 은근히 아뢰였다.
    “주몽은 사람에게서 태여난 아이가 아닐 뿐더러, 재주가 뛰여나고 용감하니 만약에 미리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렴려되옵니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아니하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는 임무를 맡겼다. 주몽은 말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 좋은 말에는 사료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나뿐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그것을 모르고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뒤 왕과 함께 벌판에서 사냥할 기회가 있었다. 주몽의 활솜씨를 잘 아는 왕은 화살을 적게 주었는데도 주몽이 잡은 집승이 월등히 많았다.  왕자와 신하들이 또 음모를 꾸며 주몽을 없애려고 하자 이를 눈치챈 유화가 주몽을 살짝 불러 말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고 하니 너의 용맹과 재주로 어디에 간들 아니되겠느냐 여기서 지체하다가 해를 당하기 전에 멀리 가서 네 뜻을 펴도록 하여라.”
   주몽은 이말을 듣고 즉시 뜻이 맞는 몇 사람과함께 길을 떠났다. 엄자수 (지금의 압록강 동부)에 이르러 물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는데다 군사가 바로 뒤까지 쫓아온지라 붙들릴 곤경에 이르렀다. 주몽은 수신에게 빌었다.
    “강을 건너려는데 다리가 없고 쫓아오는 군사는 다가오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으리까?”
    그러자 곧 물 속에서 자라들이 수없이 나와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강을 건너자 자라들은 곧 훝어지니 쫓아온 군사들이 건너지 못하여 주몽은 죽음을 면하게 되였다.
    주몽 일행이 모둔곡에 이르러 세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마의, 한사람은 나바의 , 또 한 사람은 수조의를 입고 있었는데 생김새가 비범해 보였다.
    주몽이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말하였다.
     “내가 바야흐로 대명을 받들어 국가의 터전을 닦으려는 이때 마침 이 세사람을 마나게 되였으니 어찌 하느님이 돌보심이 아니겠는가.”
    주몽은 그들의 재능을 혜아려 각자 임무를 맡기고, 그들과 함게 졸본턴에 이르렀다. 토지가 비옥하고 강산이 험고하여 도읍을 정할 땅으로 적합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이 때문에 비류수(沸流水) 위에 살며 나라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성을 고씨라하였다.
  그때 주몽이 나이는 22세이였다. 사방에서 이 소문을 듣고 몰려드는 사람이 많아지자 차차 국가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나라를 세운다음 부근에 있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국토를 넓혀 나갔다. 기원전 37년, 졸본부여 땅에 고구려를 건국하고 자신의 성을 “고”씨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주몽은 고구려의 첫 번째 왕인 “동명성왕”이 되였다고 한다.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밀우고, 이제부터는 백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백제(百濟)의  시조는 온조왕(溫祖王)이다. 그의 아버지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다. 주몽이 처음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왔을때, 부여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두째 딸을 주몽의 안해로 주었다. 이 부인의 몸에서 큰아들 비류(沸流)와 둘째아들 온조가 태여났다. 그러던 중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瑜璃)가 찾아와 태자자리에 오르자 비류와 온조는 오간, 마리등 10여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으로 내려오니 백성들이 많았다.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았다. 여러 신하들이 하남땅에 이르러 말하였다.
     “여기는 북으로 한수에 접하고 동으로는 높은 산을 의거하고 남으로는 기름진 평야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 땅이 도읍하기에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고 백성을 두 무리로 나누어 한무리를 데리고 미추홀로 가서 도읍을 정했다.
    한편 온조는 하남 위레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온조의 형 비류는 미추홀이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싸 생활하기에 불편함을 느껴 아우 온조의 위례성으로 와보니 도읍으로서의 면모를 다 갖추고 백성들이 편안한지라 , 후회의 한숨을 쉰 나머지 죽고 말았다. 그 백성이 모두 위레성으로 돌아와 백제의 형세는 더욱 굳건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뒤 온조는 처음 남으로 내려올 때 백성이 즐겨 따랐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다. 백제는 하남 위례성으로 부터 공주로 도성을 옮기였다가 마지막 백제가 망할때 까지 부여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백제가 나라를 세운 뒤 세 번째로 옮긴 서울이 소부리성이다. 소부리성은 지금의 충청남도부여로서 금강이 뒤로 흘러 감싸주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부여로 온 백제왕은 중국의 양나라와 교역을 강화하여 남조의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백제 문화는 꽃을 피우게 되였다.
   정치 국세란 언제나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평화롭던 백제도 이웃나라의 간섭과 친입을 받게 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신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신라는 박혁거세에 의해 기원전 1세기경 지금의 경주에서 건국되여 1천년의 력사를 엮어왔다.
   신라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다. 처음 왕위에 오를때에는 명칭은 거서간(居西干)이고 나이는13살이였다.
   지금의 경주 땅에 사로륙촌이라는 6개의 부족이 있었다. 어느날 여섯 촌장들이 함께 모여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데, 나정이라는 우물 옆에서 흰 말이 무릅을 끊고 엎드려 울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달려가 보니 말은 간곳없고 그자리에 터다란 붉은색 알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그 알을 깨고보니 그속에 어린아이가 들어있는지라,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집에다 길렀다. 그 아이가 크면서 점차 기골이 장대하고 숙성하여 비범한 재질이 있으므로 6촌의 사람들이 신기하게여겨오던 중 13세가 되던 해에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사람들은 혁거세가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여났다 해서 “박”이라는 성을 달았고 기원전 57년에 신라의 첫 번째 거서간(거서간이란 진한의 말로는 임금이란 뜻임)으로 되였다.
    기원전 19년에는 아진포(지금의 경북 영일)에서 궤짝하나가 발견되였다. 멀리 다파나국 왕비가 알을 낳았는데 흉한 징조로 여겨 궤짝에 넣어 물에 띄운 것이였다. 그안에는 이미 알에서 태여난아이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까치 한 마리가 계속해서 따라 다니였다고 한다.
   그 아이는 까치 “鵲”자에서 한쪽을 딴 석“昔”이라는 성과 궤를 열고 나왔다는 뜻으로 “탈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탈해는 신라의 제4대왕이 되였다.
    또 다른 신화가 있다.
    탈해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65년의 일이다. 시림이라는 슾에서 갑작그레 닭 우는 소리가 들리자 왕은 그곳으로 사람을 보냈다. 숲에 가 보니 커다란 나무에 금궤가 걸려 있었고 나무 밑에서 흰닭이 울고 있었다.
   금궤 안에는 남자 아이가 있었는데 아이는 금궤안에서 나왔다고 해서 “金”이라는 성을 얻었고, 이름은 “알지”가 되였다. 그리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찾아갔던 숲을 “시림’에서 “계림”으로 바꿔었다고 한다.
    탈해왕은 김알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지만 그를 질투하는 세력들의 반대가 심하여 왕위를 물려주지 못하고 있다가 김알지의 7대후손인 미추가 신라의 왕으로 되였다.
   우에서 한 이야기들은 모두 신라왕의 탄생 신화였다. 신화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박씨, 석씨, 김씨가 차레로 왕위에 올랐다. 3-4세기 무렵 신라는 낙동강 동쪽의 땅을 차지하며 커다란 나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신라라는 나라의 이름을 사용한것은 6세기경의 였다. 그전까지는 서라벌, 사로, 사라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조선반도의 동남쪽에 터전을 잡은 신라(新羅)는 몰라보게 국력이 강성하여 졌다. 신라는 국력이 강화되자  서북방향으로 지역을 넓혀 한강변까지 진출하였다. 신라는 백제를  견제하는 한편, 북쪽의 고구려와 대항하기에 이르렀다. 백제와 신라 사이는 국혼을 맺고 화친한 후 일시 평온이 유지 되었으나 신라 진흥왕이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백제의 국경을 침범하여 한사주를 차지하고 그 여세를 몰아 삼년산서을 탈취하고 옥천까지 진격해 왔다.
    한편으로391년,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은 즉위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396년에는 백제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북쪽의 땅을 차지하였다. 그후 중국으로 령토를 넓혔는데, 그 때 중국은 여러개 나라로 나뉘어 있어서 매우 혼란스러웠다.
   고구려는 서쪽으로 후연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어느날 고구려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후연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광개토 대왕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후연까지 공격을 했다. 그 결과 고조선이 땅이였던 료동성의 일부 지방의 땅까지 되찾을수 있었다.
    광개토 대왕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410년에는 동부여까지 공격해서 령토를 더욱 넓히였다. 이런 활략으로 고구려는 한시기 조선력사에서 가장 큰 땅을 가지게 되였다고 한다.
   광개토 대왕이 죽어서”국강상광개토경평안로태왕”이라는 긴이름을 얻게 되였는데 이를 줄여 “광개토 대왕”이라 부르게 되였다 한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땅을 넓혔고, 나라를 평안하게 했으며,  백성들에게 사랑은 받았던 왕”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광개토 대왕은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광개토 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대를 이었다.
   
   654년, 김춘추가 신라 왕이 되면서 신라와 당나라는 더욱 튼튼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다 보니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당나라가 한편을 이루어 싸우는 일이 많아졌다. 마침내 660년, 신라와 당나라 련합군은 백재를 공격했다.
    당시 백제는 의자왕이 민심을 잃고, 관리들 사이에서는 분렬이 일어나 매우 어지러웠다. 백제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신라군은 황산벌 까지 진격해왔다. 백제의 장군 계백은 5천 결사대를 이끌고 대항하였다.
    계백은 전쟁에 나가기 전 전 가족들을 제 손으로 죽였다. 적에게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뜻이였다 그런 각오 때문인지 백제 군사들은 무서운 기세로 전쟁에 임했다.
    이때 신라군에 사기를 돋구는 일이 벌어졌다.
    신라의 나이어린 군사 반굴과 곤창이 혼자서 백제 진영에 뛰어들었다. 반굴은 전투 끝에 죽었고 관창은 포로가 되였다. 계백은 어린 관창의 용기가 기상해 돌려보냈지만 관창은 또다시 백제군의 진영으로 뛰여들었다. 결국 계백은 관창의 목을 베여 말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이 모습을 본 신라 군사들은 더욱 힘을 내서 싸웠다. 백제의 5천 결사대는 결국 지고 말았다. 신라군은 힘을 몰아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까지 격파했다.
     결국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어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백제는 력사에서 사라지게 되였다.
   
    666년, 고구려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무려 24년간이나 왕의 배후에서 나라를 좌지우지했던 연개소문이 죽자, 세아들인 남생과 남건, 남산이 각각 권력을 잡기위해 다투었다.
    가장 먼저 큰아들인 남생이 권력을 잡았다. 어느날 남생은 국경을 살피기 위해 두 아우에게 나라일을 맡기고 떠나게 되였다. 그 때 남건과 남산의 귀에 남생이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한편 평양성을 떠난 남생에게도 아우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런 가운데 흥분한 남건은 스스로 권력을 잡고 남생의 아들인 헌충을 죽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남생은 아들 헌성과 함께 당나라의 편이 되였다.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당나라는 남생과 헌성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 때 이미 고구려는 수,당나라를 비롯해 거란, 신라와의 계속되는 전쟁으로 힘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가 12개 성을 바치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마침내 668년, 신라 군사 27만명과 당나라 군사 50만명이 련합한 라-당 련합군이 평양성으로 공격해 왔다. 평양성은 순식간에 라-당 련합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약 700년의 고구려 력사도 그대로 끝이 나고 말았다.
    668년 신라는 삼국통읠을 하였지만 당나라가 신라를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목적은 조선반도를 통채로 삼키려는 것이였다. 당나라가 신라를 지배하려고 하자 신라는 반발하여 당나라와 맞서 싸우게 되였다
    670년 부터 7년간에 걸친 라-당 전쟁이 시작되였다. 크고작은 22번의 전투 끝에 결국은 신라는 승리를 거두게 되였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당나라의 사정도 나빠졌다. 당나라 왕인 고종의 황후 무씨가 권력을 쥐면서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더 이상 조선반도에 대한 욕심을 부릴 수 가 없었다 그리하여 676년, 신라는 원산만과 대동강 남의 땅을 차지하며 완전한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력사는 흘러가는 강물처럼 합하였다가도 갈라졌다가 다시 합하였다.
    신라가 비록 통일된 신라로 되였건만 후에 다시 신라, 후백제, 태봉국으로 분렬되였다가. 왕건에 의하여 다시 통일된 고려국으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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