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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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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내가 봤던 코끼리가 죽다니..." 댓글:  조회:4187  추천:0  2018-06-05
서울대공원서 33년간 관람객 맞은 명물 코끼리 '칸토' 숨져 2018.06.04.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3년간 발톱 농양 앓다 사망 서울대공원 코끼리 '칸토'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서울대공원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지난 33년간 즐거움을 줬던 수컷코끼리 칸토(약 40세 추정)가 숨졌다. 서울대공원은 지난 3년간 발톱 농양을 앓던 아시아코끼리 칸토가 2일 오후 4시 숨을 거뒀다고 4일 밝혔다. 6∼7세로 추정되던 1985년 서울대공원에 반입된 칸토는 30년을 건강히 지내다 2015년 4월 오른쪽 앞발톱 부분에 농양이 발생했다. 코끼리에게 발질환은 가장 흔한 질병으로 해외 동물원에서도 발 질환으로 폐사하는 예가 다수 있다. 칸토는 서울대공원 코끼리 중 가장 덩치가 크고 무게가 5t 가까이 되며 공격성이 강해 발 관리가 어려웠다. 이에 사육사들은 '대동물관 아시아코끼리 발관리 계획'을 세우고 소독과 항생제 투여 등 치료를 꾸준히 해왔지만 올해 들어 급격히 상태가 악화했다. 칸토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현재 부검을 통해 검사 중이며, 서울대공원은 추후 칸토의 골격표본을 제작할 계획이다. 한편, 현재 서울대공원에는 2016년 태어난 희망이를 비롯해 5마리의 아시아코끼리가 있다.
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세계평화생태공원 만들자"... 댓글:  조회:4490  추천:0  2018-06-05
역설의 땅 DMZ.. 야생 동식물에는 '천국' 이동경  2018.06.05.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뉴스데스크] ◀ 앵커 ▶ 뉴스데스크는 남북관계를 대결에서 평화로 전환시키는 첫 시험대가 될 DMZ를 보도합니다.   분단 65년은 비무장지대를 희귀 야생동식물의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왕래를 막은 대결의 공간에서 동식물은 평화의 삶을 고스란히 지켜온 겁니다. 그 '역설의 땅'에 깃든 자연 생태를 이동경 기자가 소개합니다. ◀ 리포트 ▶ 깎아지른 암벽을 거침없이 뛰노는 토종 산양. 서식지 파괴로 그 수가 600여 마리로 줄면서 1급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됐는데 DMZ에선 심심찮게 포착됩니다. 국제 멸종위기종인 두루미, 많을 땐 1천 마리가 DMZ에서 겨울을 납니다.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 DMZ의 청정수가 두루미에게 최고의 보금자리를 제공합니다. 정전 이후 65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엄격하게 제한된 이곳 철책 너머에는 이제 그 어느 곳보다도 풍부하고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 자취를 감춘 사향노루, 역시 멸종위기에 내몰린 저어새와 독수리, 수달과 삵 등 한반도 멸종위기종의 41%가 국토 면적의 2%도 되지 않는 DMZ에 몰려 살고 있습니다. [이우신/서울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 "'멸종위기종의 최종 피난처'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인간의 간섭이 배제되고 특히 군사보호지역이기 때문에 보호되는 부분이다." 구불구불한 물줄기가 뱀꼬리를 닮은 사미천 주변으로 습지가 형성됐습니다. 한국전쟁 전만 해도 농사를 짓던 평야였지만 반세기 넘게 방치되면서 원시 형태의 습지로 돌아간 건데 이런 습지가 DMZ에 서른 곳이 넘습니다. 또 폭격으로 사라진 마을 터는 울창한 숲으로 변해 한반도에선 보기 힘든, 너른 평지의 숲 '평원림'을 이뤘습니다. [김귀곤 명예교수/서울대학교 조경학] "제가 만난 학자는 '아마존이라든가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의 다음 가는 생태계가 DMZ 생태계다.'라고 해요. 그 규모뿐 아니라 그 구조나 기능면에서도." 이런 DMZ의 생태가 과거 남북화해 국면에서 오히려 위협받았던 사실은 향후 DMZ 보존을 위해 시사하는 게 많습니다. 2004년 생태에 대한 고민 없이 남북 경협사업의 하나로 북측 DMZ 모래 채취 사업이 진행됐고 개성공단의 성장 뒤에 숨어 공업 폐수가 DMZ로 무단 방류됐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서재철 전문위원/녹색연합] "생활오수만 잡아줄 수 있는 폐수처리장을 가동함으로써 공업폐수가 비무장지대 안 사천강 일대로 유입돼서 지금도 (오염돼 있습니다. 당시) 개성공단을 빨리 조성해서 가동시키는 것이 지상 과제였기 때문에." 남과 북의 총부리 사이에서 생태 천국으로 자리매김한 역설의 땅 DMZ. 총부리가 걷힌 미래엔 어떤 모습일지, 평화만큼 어려운 과제로 놓여있습니다. MBC뉴스 이동경입니다. 이동경 기자 ====================== (서울=연합뉴스) 윤동진 기자 =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6·12북미정상회담 개최를 축하하며 열린 '평화맞이 예술마당'에서 서화가 여태명씨와 캘리그라퍼 강병인씨가 대형 캘리그라피를 그리고 있다. 2018.6.10  
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력사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104  추천:0  2018-06-05
  1950년 6월25일 시작된 전쟁은 3년하고도 1개월을 끌었어. 그런데 1951년 봄부터는 휴전 얘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왔지. 유엔군도 공산군도 결정적인 승리로 한반도를 통일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야. 1951년 7월 마침내 개성에서 첫 휴전 협상이 열린다. 문제가 많았어. 북한 점령 지역이었기에 유엔군이 평화를 상징하는 흰 깃발을 달고 가면 그걸 촬영해서 “백기를 든 제국주의자들”로 선전하는 식이었으니까. 유엔군 쪽도 발끈해서 신경전을 벌였지. 한 번은 공산군과 유엔군 측이 자그마치 2시간11분 동안 말 한마디 없이 눈싸움만 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어.  ⓒNARA 1953년 4월9일 판문점에서 공산군과 유엔군이 설전을 벌이는 모습. 이런 분위기에서 협상이 잘될 리가 없지. 그래서 선택된 곳이 개성과 문산 사이의 중립지대인 당시 경기도 파주군 널문리라는 곳이었어. 널문리에는 작은 주막이 있었는데 판문점(板門店)은 이 널문리 가게를 한자로 번역한 거야. 판문점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뒤에 이런 얘기가 돌았단다. 그곳은 숙명적인 장소라고. 왜냐면 세 글자 모두 한자 획수가 8획이었기 때문이야. 글자 셋에 8획, 즉 분단의 대명사인 38선이 연상되지 않니. 숙명적인 땅이든 그저 우연의 일치이든 판문점은 휴전 협상 2년과 정전협정 후 65년간, 수많은 사건과 사연을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어. 앞으로 몇 주간 그 얘기를 들려주려 해.   휴전 협상은 북한군 대표와 중공군 대표, 그리고 유엔군 대표 사이에서 이뤄졌어. 한국군의 작전권이 유엔군에 귀속돼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지. 한국군 장교도 연락 장교로 판문점 휴전 회담에 참석하곤 했는데 우리말을 전혀 쓰지 못했어. 유엔군 소속 장교의 공용어는 영어였으니까. 하루는 공산군 측에서 거친 항의를 해왔지. 유엔군 공군기가 판문점 북쪽에 기관총을 쏴대서 어린이가 죽었다는 거야. 미군 장교가 현장 조사를 해야 하지만 마침 자리를 비운 터라 한국군 연락 장교 이수영 대령이 대신 가야 했지. 그런데 슬프게도 ‘English only’.  “우리 공군기가 귀측을 침범한 적이 없고 어린이가 사망한 사건도 우리 책임이 아니오.” 이 얘기를 너랑 비슷한 영어 실력으로 읊었을 거야. 그런데 더욱 웃지 못할 코미디가 벌어졌어. 이수영 대령의 ‘통역관’은 연세대학교를 세운 선교사 언더우드의 손자 리처드 언더우드(한국명 원득한)였던 거야. 그는 전쟁 당시만 해도 그렇게 한국어가 능숙하지는 않았다고 해. 한국인의 엉터리 영어를 미국인이 서툰 한국어로 번역하는 모습이 얼마나 민망했겠니.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인민군 장교 장춘산 대좌가 야유를 보내. “어이 이 대령, 우리말 다 까먹었소?” 이수영 대령은 또 더듬더듬 영어로 답했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 우리말을 하고 싶을 때는 우리말로 하고, 영어로 하고 싶으면 영어로 합니다.” 아빠는 이수영 대령이 이 말을 어떻게 했을지 짐작이 가. “위 아 프리 컨트리, 이프 위 원트 코리언, 위 스피크 코리언, 이프 위 원트 잉글리시, 위 스피크 잉글리시.” 장춘산 대좌는 아주 진한 욕설과 함께 가래침을 뱉고 돌아섰다고 해. 이런 ‘대결’은 판문점에서 수시로 펼쳐졌는데 그 가운데 인민군 대표였던 남일 대장이라는 이의 에피소드가 유명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유명한 골초였던 남일에게 회담장에서 흡연 중 멋있게 보이라고 파이프를 선물했다고 해. 미군 대표 조이 제독이 담배를 권하며 이 담배는 파이프가 필요 없이 그냥 피우는 고급 궐련이라고 하자, 남일은 그것을 뜯어서 가루를 파이프에 담아 피워댔어. 그러면서 한마디. “나는 지금 미국을 태우고 있소.”  인민군 대표 남일은 전라도 강진 출신일까 ⓒ위키백과 휴전 협상 당시 인민군 대표였던 남일은 군인이자 외교관이고 교육 전문가이자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남일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출신이야. 고려인은 소련 땅 연해주에 살다가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송두리째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옮겨진 조선인들을 말해. 남일은 거기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했는데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면서 소련군 장교로 입대했어. 이 사람의 소련군 참전 이력은 가히 세계사적이야. 우선 “미국 정보기관이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 대위로 스탈린그라드에서 싸웠고 전후 소련군이 폴란드를 지배할 때 사단 참모장을 지낸 자”( 1982년 2월23일)였지.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반환점 같은 사건이었어. 단일 전투에서 소련 민간인과 양국 군인을 합쳐 200만명이 죽어갔다면 알 만하지? 소련군은 지옥 같은 시가전 끝에 독일군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단다. 남일은 그 지옥의 한복판에 있었어. 그뿐이 아니야. 남일은 1943년 7월, 무려 탱크 6300대가 서로 엉키고 맞붙으며 불을 토하고 피를 뿜었던 ‘세계사상 최대 전차전(戰車戰)’ 쿠르스크 공방전에도 참가했고,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도 그 공을 인정한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참모장으로서 바르샤바 작전과 베를린 점령 작전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야. 아마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치열한 전장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일 거야. 그가 회고록이라도 남겼더라면 동서양과 이념을 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지도 몰라.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외교학을 강의한 적이 있다”( 1963년 12월16일)라는 기사에서 보듯 그는 군인이자 외교관이었고 교육 전문가이자 엘리트 지식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파란만장한 남일의 삶은 뜻밖에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아. 특히 그의 유년 시절은 완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어. 또 1976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뒤 남일의 행적은 북한에서도 거의 지워져버렸단다. 가장 신기하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 하나. 전라도 강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 인민군 대장 남일이 강진 출신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해방 직후 강진군 병영면 면장을 지내기도 한 남주익이라는 이의 장남 남정욱이 일본 유학 이후 행방이 묘연했는데 휴전 회담 기사에 실린 남일의 사진을 보고 이웃 사람들은 대번에 그가 남정욱이라고 지목했다는 거야. 사실 남일은 특출한 미남이야. “어쨌건 그는 미남자다. 탄력 있는 근육, 적당하게 탄 얼굴, 통찰력을 말하는 두 눈, 강한 의지력을 상징하는 일자로 다물어진 입이 인상적이다. 재치 있는 두 볼, 균형 잡힌 얼굴, 호색적인 미남이다”( 1951년 7월25일)라고, 여차하면 적군 대장을 찬양했다고 잡혀갈지 모를 기사가 나왔을 정도로 미남이니 쉽게 알아보긴 했을 거야. 그러나 전쟁 통에 ‘괴뢰군 총참모장이 우리 아들이요’ 했다가는 온 가족이 몰살당할 수도 있었으니 소문은 쉬쉬 묻히고 말았어.  판문점의 이름은 이처럼 기구하면서도 미스터리한 사연으로 이리저리 얽혀 있단다. 한국군 장교의 ‘콩글리시’를 미군 통역관이 혀 꼬부라진 우리말로 통역해 인민군 장교에게 전하는 코미디가 펼쳐지고, 다 큰 어른들이 두 시간 넘게 눈싸움을 하며 맞서기도 했지. 북한군 대표 중 하나였던 이상조는 부산 동래 출신이었고 남한 측 참관자였던 백선엽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이었어. 둘은 자신의 고향 사람들과 적대해서 싸운 셈이지. 거기에 북한 대표 인민군 대장 남일. ‘세계사적 전투’의 경험자인 그는 제대로 된 전기 하나 남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반도의 반대편 사람들 중 일부는 그를 자기 고향 사람이라 여기고 있으니 어이없지? 하지만 그 후 수십 년간 판문점에서 일어난 일들에 비하면 대수로울 것도 없어. 판문점의 기묘한 역사는 막 시작된 셈이니까.   ===========================================/// 력사를 옳바르게 알아보기와 미래로 정확히 발전하기...   2021-06-01    ‘톈안먼 탱크맨’ 세상에 알린 사진기자가 남기고 간 말... 2019.09.17      이 결정적 순간을 뷰파인더에 담아낸 주인공은 미국 텍사스 출신의 찰리 콜 기자. 위 사진에서 오른쪽에 안경을 쓴 인물이 콜 기자다. 콜 기자는 지난 1987년 우리나라에서 6월 항쟁 등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에도 이전 3년간 한국에 머무르며 일한 바 있다. (위) 찰리 콜은 '탱크맨' 사진을 세상에 알린 네 명의 사진기자 중 한 명이었고 지난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지난 금요일 알려졌다. 그러면서 그의 용기와 기지 또한 다시 주목받게 됐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 당시 지를 위해 베이징의 한 호텔 발코니에서 원격 사진 렌즈를 이용해 '탱크맨' 사진을 찍게 된 그는, 일부러 사진의 왼쪽 아래에 사람의 모습이 오도록 구도를 잡음으로써 사람을 향해서 오는 탱크들의 위용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호텔을 감시 중이던 공안이 곧 들이닥칠 것에 대비해 사진이 찍힌 필름 롤을 사진기로부터 재빨리 빼낸 후 비닐봉지에 싸서 화장실 변기 물탱크 속에 숨겼다. 그리고 빈 필름 롤을 대신 사진기에 끼워두었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공안이 그의 방으로 쳐들어왔고 예상대로 필름을 빼앗겼지만, 콜 기자가 지혜를 발휘해 대비한 덕분에 역사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한 사진은 무사히 도쿄의 AP통신 지국으로 보내져 마감에 맞춰 지에 보도될 수 있었다. 이 사진으로 콜 기자는 1990년 세계보도사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양영은 기자        '톈안먼 탱크맨' 포착한 美사진기자 찰리 콜 별세 2019-09-13   인쇄     1989년 탱크 맞선 중국시민 사진 촬영…세계보도사진상 수상 톈안먼서 전차 행렬 가로막는 '탱크맨'. 제프 와이드너 촬영. [AP=연합뉴스 자료사진]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1989년 중국의 6·4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때 맨몸으로 진압군의 탱크에 맞선 '탱크맨'(Tank Man)의 모습을 카메라 앵글에 담은 사진기자 중 한 명인 찰리 콜이 별세했다. 향년 64세. 13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미국인인 찰리 콜은 오랫동안 거주해오던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지난주 숨을 거뒀다. 찰리 콜은 1989년 톈안먼 광장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베이징호텔의 발코니에서 흰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의 시민이 홀로 돌진하는 탱크 앞을 가로막는 사진을 찍었다.   찰리 콜과 제프 와이드너 등 당시 4명의 기자가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앵글로 이 시민의 모습을 촬영했다. 세계 언론은 지금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진 속 시민에게 '탱크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탱크맨은 지금도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하는 상징적인 단어로 쓰인다. 이 사진은 톈안먼 민주화 시위의 상징물이 됐다. 1989년 세계보도사진상은 찰리 콜에게 돌아갔다. 찰리 콜은 생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그(사진 속 시민)의 행동은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졌다"며 "나는 사진기자 중의 한 명이었을 뿐이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찰리 콜은 '탱크맨' 사진을 촬영하고 나서 중국 공안이 호텔 방에 들이닥칠 것을 우려해 곧바로 사진을 비닐봉지에 담아 화장실 변기 물탱크 속에 숨겼다. 그의 예감대로 중국 공안이 호텔 방에 들어와 그의 카메라 필름들을 훼손했지만 숨겨둔 필름은 도쿄의 AP통신 지국으로 보내져 현상되고 나서 데드라인 안에 시사지 뉴스위크에까지 전송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찰리 콜은 격동의 아시아 민주주의 현장을 쫓아다녔다. '탱크맨' 사진을 찍기 전에는 한국에서 3년간 머무르면서 1987년 6월 항쟁 등 한국의 민주화 운동 시기를 현장에서 기록했다. ========================== 1989년 6월 4일 천안문 광장 시위 현장에서 찍은 탱크를 막아선 남성(일명 ‘탱크 맨’)의 모습. 이 사진은 또 다른 사진기자 아더 창이 포착한 사진이다. [로이터=연합뉴스] 1989년 중국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당시 맨몸으로 진압군 탱크 행렬에 맞선 ‘탱크맨(Tank Man)’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기자 찰리 콜이 별세했다.     다리 부상 인한 패혈증 지난 5일 사망 '탱크맨' 사진으로 세계보도사진상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현장도 누벼    13일 BBC 등에 따르면, 미국인 찰리 콜은 15년 동안 거주해오던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지난 5일 숨을 거뒀다. 64세. 찰리 콜의 가족은 보도자료를 통해 그가 다리 부상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찰리 콜은 1989년 6월 중국 톈안먼 광장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베이징호텔의 발코니에서 흰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의 시민이 도로에 홀로 서서 이동하는 탱크 앞을 가로막는 사진을 찍었다.       찰리 콜과 제프 와이드너 등 당시 4명의 기자가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앵글로 이 시민의 모습을 촬영했으며, 1989년 세계보도사진상은 찰리 콜에게 돌아갔다.     탱크맨이 누구인지 신원은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사진은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당시 이 탱크맨은 군복을 입은 두 명의 남성에 의해 도로 밖으로 끌려갔으며, 이후 행방은 알려진 바가 없다고 BBC방송은 전했다. 당시 찰리 콜은 언론에 탱크맨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고, 자신은 그 참상을 세상에 꼭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 6월 4일 대만 타이페이에서 톄안먼 민주화 시위 30주년을 맞아 열린 추모식에서 시민들이 '탱크맨' 사진을 보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에 찰리 콜은 ‘탱크맨’ 사진을 촬영하고 나서 중국 공안이 호텔 방에 들이닥칠 것을 우려해 곧바로 사진을 비닐봉지에 담아 화장실 변기 물탱크 속에 숨겼다. 그의 예감대로 중국 공안이 호텔 방에 들어와 그의 카메라 필름들을 훼손했지만 숨겨둔 필름은 AP통신 도쿄지국으로 보내진 뒤 마감시간 내에 시사지 뉴스위크에까지 전송돼 세상에 알려졌다.     지금까지도 탱크맨 사진은 중국 내에서 사용이 금지되고 있다. 톈안먼 시위로 인한 정확한 사망자수는 공식 발표된 바 없다. 중국 당국은 한때 민간인과 군을 포함해 약 200명이 숨졌다고 언급한 적이 있지만, 목격자들과 기자들은 최소 3000명이 숨졌다고 증언하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찰리 콜은 2009년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 복잡한 사태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한컷의 단순한 사진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며 자신이 사진 속에 담지 못한 시위대의 위대함과 톈안먼 민주화 시위의 숨겨진 역사적 기록에 대해 강조하기도 했다.          찰리 콜은 중국뿐 아니라 1987년 한국의 민주화 운동 당시에도 현장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1987년 6월 독재 권력에 맞서다 숨진 이한열 열사와 당시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던 미국인 사진작가 킴 뉴턴(Kim Newton)의 사진에도 현장을 누비는 찰리 콜의 모습이 담겨있다.       김다영 기자 [출처: 중앙일보]  ===================== ...콜은 1980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프리랜서 사진기자로서 아시아의 민주주의 현장 곳곳을 취재했다. 1985년 필리핀 민주화 운동과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 등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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