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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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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황혼 댓글:  조회:2847  추천:0  2018-06-14
황혼      / 윤동주 햇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죽한 일(一)자를 쓰고......지우고......  까마귀 떼 지붕 우으로  둘, 둘, 셋, 넷, 자꼬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황혼 / 윤동주 햇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죽한 일자(一字)를 쓰고 …… 지우고 …… 까마귀떼 지붕 위로 둘, 둘, 셋, 넷, 자꾸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北)쪽 하늘로, 내사…… 북(北)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1936. 3. 25. 평양에서     황혼 / 윤동주 햇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죽한 일자(一字)를 쓰고.... 지우고.... 까마귀 떠 지붕 위으로 둘, 둘, 셋, 넷 자꾸 날아 지나간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Gloaming / Yun Dong Zu  Through a crack in the sliding door  The rays of the sun write.... and erase....  a long line,  and two, two, three, four crows continuously  fly high up over the roof.  All way out, wriggling, into the north sky  I....  wish to spread my wings in the north sky.  (2006 英譯 董一成)     ====================== “젊음은 거기 남아 있거라” 詩句처럼… ‘불멸의 靑春’으로 승화       ▲  일본 교토 우지시 우지강변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지난 10월 새로 만들어진 이 시비에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라고 새겨져 있다.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ㅡ생애의 마지막 동선을 찾아…  1942년 도쿄로 유학 떠나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에 응해   입학뒤 ‘참회록’에 심경 담아   도시샤大·하숙집 터 詩碑 외에   동주가 소풍오던 우지 강변에   ‘새로운 길 · 화해의 碑’ 세워져   1943년에 체포돼 2년형 언도   2년뒤 후쿠오카 형무소서 별세   비극적 삶을 산 청년의 이상이   대체불가능한 ‘섬광의 사건’ 돼  ◇ 삶의 최후 동선을 따라 = 윤동주의 말년은 일본 체류 기간이다.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3월에 일본의 심장 도쿄(東京)로 유학을 떠났다. 성공회 계열의 릿쿄(立敎)대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원치 않았던 창씨(創氏)였지만,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항증명서 발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름을 ‘平沼東柱(히라누마 도오주)’로 고쳤다. ‘평소’라는 새로운 성씨는 파평(坡平) 윤 씨에서 ‘평(平)’을 가져왔고, 그네들의 비조(鼻祖)가 못에 관한 전설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서 ‘소(沼)’를 가져와 만들었다. 창씨에 응하면서도 고스란히 ‘윤 씨’의 맥락적 전통을 지킨 그 나름으로 고육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송몽규도 ‘송 씨’의 성을 그런대로 지킨 ‘소오무라(宋村)’로 창씨하였다. 입학이 결정되고 난 직후에 윤동주가 쓴 ‘참회록’은, 이러한 과정에 따르는 부끄럼 자체를 부끄럼의 대상으로 삼은 고백 시편이었다.  그가 도쿄에 머무른 시간은 릿쿄대에 입학하고 첫 여름방학을 맞은 7월 하순까지의 5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절 윤동주는 ‘흰 그림자’를 비롯하여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을 남겼다.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에게 부친 편지에 동봉했던 이 시편들은, 윤동주 최후의 작품들이자 그가 일본 유학 시절 어떠한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지남(指南)과도 같다. 1942년 4월 14일 창작된 ‘흰 그림자’는 윤동주의 유고를 지상에 남기는 데 큰 공헌을 한 정병욱이 자신의 아호인 ‘백영(白影)’을 취한 작품이기도 하다. ‘흰 그림자’는 황혼을 배경으로 쓰였는데, 황혼은 ‘낮과 밤’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는 시간으로서 불안한 운명과 함께 행복했던 과거와 부정적 현실 사이에 놓인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창작일이 밝혀진 최후의 작품인 ‘쉽게 씌어진 시’는 ‘남의 나라’라는 중의법이 타국과 객지라는 이중의 울림을 동반하면서 시인으로서 느끼는 생성과 소멸의 동시적 가능성을 잘 담아낸 명편이다. 모두 도쿄에서의 윤동주가 가졌을 불안과 성찰의 양면적 시간을 잘 보여준다. 그러다가 윤동주는 그해 10월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1년 가까이 교토에 살면서 새로운 미래를 계획했던 윤동주는, 1943년 7월 14일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다녀오려고 차표까지 사서 짐까지 부쳐놓고 떠나오려던 때, 교토 시모가모(下鴨) 경찰서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피체된다. 송몽규와 함께 ‘재(在)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그룹 사건’으로 일경에게 체포된 것이다. 송몽규와 윤동주 그리고 교토3고 학생 고희욱은 서로 어울리면서 조선독립, 민족계몽에 대해 논의했고 특히 “징병제를 이용, 무기를 가지고 군사 지식을 체득,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즈음 무력 봉기를 일으켜야 된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이 체포 사유였다. 이어 윤동주는 1944년 6월 사상불온, 독립운동, 비일본 신민, 온건하지만 서구 사상이 농후한 등의 죄목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윤동주 삶의 최후 동선이었던 셈이다.  ▲  일본 교토 도시샤대 인근 윤동주 하숙집 터에 자리 잡은 시비. ◇ 교토의 가을, 우지(宇治)강에 새로 세워진 시비 = 지지난 주에 교토를 찾았다. 교토 여행은 두 번째였다. 이번에는 철저하게 윤동주의 자취를 따라 걸었다. 교토의 가을은 단연 고즈넉하고 잔잔했다. 먼저 도시샤대를 찾았다. 도시샤대 역시 연희전문학교처럼 개신교 계통의 미션스쿨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도시샤대가 그가 그토록 흠모해 마지 않았던 정지용의 모교였다는 사실이다. 도쿄에서 교토로 옮겨오던 날, 윤동주는 아마도 정지용의 시 ‘압천(鴨川)’을 수없이 되뇌고 있었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교정에는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시비 앞에는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가 원문과 일본어 번역문으로 나란히 새겨져 있다. 정지용이 시집 서문에서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라고 말했던 그 무서운 ‘고독’이 이곳에서 정점으로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 세워진 윤동주 시비는 윤동주를 사랑하고 흠모하던 일본인들의 정성으로 가능했다. 그에 비해 정지용 시비는 윤동주 시비가 세워진 것을 알게 된 충북 옥천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살아서는 정지용이 윤동주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죽어서는 윤동주가 정지용 시비를 이곳에 파생시켰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그만큼 윤동주는 이미 정지용의 인지도와 영향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간 곳은 도시샤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윤동주의 하숙집 터였다. 거기에는 교토조형예술대 다카하라 교사가 아담하게 지어져 있다. 교토조형예술대의 본 건물과는 조금 떨어진 주택가에 단아하게 위치해 있었다. 그 앞에는 ‘윤동주유혼지비(尹東柱留魂之碑)’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과 서시가 양국어로 새겨진 시비가 함께 서 있었다. 거기서 또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송몽규의 하숙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었다. 아마도 윤동주와 송몽규는 매일 하숙집에서 각각 교토대와 도시샤대를 걸어서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우지에 위치한 아마가세 구름다리를 찾았다. 윤동주는 도시샤대 재학 시절 급우들과 함께 이곳으로 소풍을 와서 그의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특별히 기억할 일은, 지난 10월 28일 시쓰카와(志津川)의 우지강변에 또 하나의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시비에는 그가 연희전문학교 입학 직후에 쓴 ‘새로운 길’과 함께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詩人 尹東柱 記憶と和解の碑)’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걸어갔던 “새로운 길”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나한테 주어진 길”로 이어지기까지의 길지 않은 시간이 거기 아득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교토의 가을이, 막 상류 댐을 열어 급류로 흘러내리던 우지강을, 그날 소풍을 나왔던 도시샤대 학생들의 평화처럼 감싸고 있었다. ◇ 윤동주의 죽음과 후쿠오카 = 후쿠오카는 ‘아시아로 열린 창’이라는 별명답게 항구 도시의 외관을 띠고 있었다. 후쿠오카 형무소 터는 시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치우친 사와라(早良)구에 있다. 후지사키(藤崎) 지하철역에서 퍽 가까운 곳에 있었다. 1996년에 새로 지은 형무소 건물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지금은 형무소 터만 남아 공원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후쿠오카 구치소는 형무소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어서, 이곳에서 추모 묵념을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옳지 않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때는 막 일본 프로야구 저팬시리즈에서 후쿠오카를 연고지로 한 소프트뱅크가 우승하여 후쿠오카 각 백화점이 세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 명예교수는 후쿠오카 현립대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다가 은퇴한 분으로서, 연세대에서 춘향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문학 연구자이다. 그분은 형무소 터와 함께 그가 1994년부터 만들어 운영 중인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해주었다.  동국대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문학평론가 고노 에이치(鴻農映二)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대체 혈액 실험을 위한 실험 대상으로 쓰였다는 취지의 발표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일본군은 생리식염수를 개발 연구하고 있었는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독립운동을 한 죄로 윤동주 등이 그 실험 대상이 된 것이라고 추측된다고 밝힌 것이다. 그때 후쿠오카 앞바다 물을 혈관에 직접 주입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2000년대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 해제 문서에서도, 일본 패전 후 전범 재판 문서에서도, 규슈(九州)제국대에서 대체 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는 저 중국 하얼빈(哈爾濱)에 남겨진 731부대의 악명과 함께, 일본 제국의 마지막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윤동주가 죽자 명동촌 집으로 그 소식을 알리는 전보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버지 윤영석이 시신을 넘겨받으러 떠난 며칠 뒤 다시 “동주 위독함, 원한다면 보석할 수 있음, 만약 사망 시에는 시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규슈제국대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이라는 내용의 때늦은 우편물이 도착한다. ‘쉽게 씌어진 시’에서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라고 노래한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27년 1개월 남짓 되는 짧은 생이었다. 한 줌 재가 되어 부친의 품에 안겨 돌아와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용정 땅에 묻혔다. 유족들은 그의 묘비에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표현을 적어 넣었는데, 이 기념비적 순간은 ‘청년 윤동주’를 ‘시인 윤동주’로 태어나게끔 해주었다.  도쿄에서 쓴 작품 가운데 한 편인 ‘사랑스런 추억’에서 윤동주는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라고 씀으로써, 그 말을 예언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그는 영원한 청춘으로 남아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젊음을 항구적으로 탈환케 하고 있다.   이러한 윤동주만의 특권은, 삶의 비극성을 불멸의 기억으로 바꾸어내는 예술사의 한 장면을 선연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시에 나타난 부끄럼과 성찰의 의지는 후천적으로 노력해 얻은 성정이라기보다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 같은 것이어서 더욱 슬프고 아름답다. ‘나한테 주어진 길’과 ‘허락된다면’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난 감각 역시 그의 천성이 능동적이지 않고 자성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시가 비록 연륜을 오래도록 쌓은 원숙함과는 전혀 다른 청년기의 과정적 속성으로 일관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청년의 이상과 실존의 한 장면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대체 불가능한 섬광의 사건이 된 셈이다. 그래서 그의 ‘부끄럼’과 ‘성찰’은 윤리적 차원은 물론, 실존적 차원으로까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 실존의 어둑함을 따라 우리의 기억이 환해지는 가을 여정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박돈, 황혼(윤동주 탄생 100돐 맞아  그림전, 윤동주 시 황혼에서), 캔버스에 유채 [제공=갤러리서림]
3    "자그마한 세계" 댓글:  조회:2035  추천:0  2018-06-14
  + 고 작은 것  고 작은 것  제비꽃이 피지 않으면  봄이 아니다.  고 작은 것  매미가 울지 않으면  여름이 아니다.  고 작은 것  고추잠자리가 날지 않으면  가을이 아니다.  고 작은 것  눈가루가 내리지 않으면  겨울이 아니다.  고 작은 것  고 작은 것들이 모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만들고  고 작은 것  고 작은 것들이 모여  우주를 만든다.  (제해만·아동문학가, 1944-1997)  + 고 조그만 것이  고 조그만 산새 알에서  하늘을 주름잡는 날개가  어떻게 나올까?  고 조그만 꽃씨 속에서  아름다움을 주는 꽃이  어떻게 나올까?  고 조그만 새싹이 자라  밀림을 만드는 아름드리 나무가  어떻게 나올까?  고 조그만 아기가 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어떻게 나올까?  (전영관·아동문학가)  + 고 작은 것이  개미 한 마리가  고 작은 것이  나 먼저  산꼭대기에 올라와 있다  평지를 걸어와도 힘들 텐데  헉헉거리지도 않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늠름하기까지 한 개미  내가 나를 본다  그리고 개미를 본다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닌데  기진맥진하여 늘어진 나와  한마디 불평 없이  큰일을 해내는 개미 한 마리  지구를 등에 지고  다시 내려온다  그런데 또  개미는 웃음까지 등에 지고  나보다  먼저 내려와 있다.  (선용·아동문학가, 1942-)  + 고 작은 것이  까만 씨앗들이 고물고물 움직인다  가던 길 멈추고 한참을 들여다보곤  다시 걷다가 멈추고  작은 몸통에 검은 투구를 걸치고  여섯 개의 다리는  쉴 틈이 없다  긴 행렬이 되어  앞으로만 간다  까만 씨앗들이  굼질굼질 움직이더니  벌써 저만치 가고 있다  (김시현·아동문학가)  + 들리지 않는 말  풀섶 두꺼비가  엉금엉금 비 소식을 알려온다  비 젖은 달팽이가  한 잎 한 잎 잎사귀를 오르며 길을 낸다  흙 속에서 지렁이가  음물음물 진흙 똥을 토해낸다  작고  느리고  힘없는 것들이  크고  빠르고  드센 것들 틈에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바닥 숨을 쉬고 있다  (김환영·극작가이며 삽화가, 1959-)  + 작은 풀꽃  후미진 골짜기에  몰래 핀 풀꽃 하나  숨어 사는 작은 꽃에도  귀가 있다.  나직한 하늘이 있다.  때때로  허리를 밀어 주는  바람이 있다.  초롱초롱 눈을 뜬 너는  우주의 막내둥이.  (박인술·아동문학가)  + 큰 나무 아래 작은 풀잎  얘야, 네가  큰 나무를 보러 왔다면  그 아래 피어난  키 작은 풀잎을 꼭 찾아보아라.  해마다 어깨 겯고 새로 돋는  풀잎, 풀잎이 만드는  작은 세상.  얘야, 네가  키 작은 풀잎을 보러 왔다면  그 위에 아름 굵은  큰 나무 꼭 쳐다보고 가거라.  어지간한 비바람쯤  끄떡도 않지.  밑동 튼실하게  뿌리박은 나무.  (이미애·아동문학가)  + 모래 왕국  난 지금  모래 나라의 임금님입니다.  산도, 골짜기도, 들판도, 강도  마음대로 바꾸어 갑니다.  옛날얘기 속 임금님이라도  자기 나라 산과 강을  이렇게 바꿀 수는 없겠지요.  난 지금  정말로 위대한 임금님입니다.  (가네코 미스즈·일본의 천재 동요시인, 1903-1930)  + 모래알의 크기  티끌 하나는  그 크기가 얼마일까요?  눈에 들어가면  모래알보다 더 크지요.  모래알 하나는  그 크기가 얼마일까요?  밥 속에 있으면  바윗돌보다 더 크지요.  (민현숙·아동문학가)  + 모래 한 알  모래 한 알이 작다고 하지 마  눈에 한 번  들어가 봐  울고불고 할 거야.  모래 한 알이 작다고 하지 마  밥숟갈에 한 번 들어가면  딱! 아이구 아파! 할 거야.  모래알들이 작다고 하지 마  레미콘 시멘트에 섞이면  아파트 빌딩으로 변할 거야.  (정용원·아동문학가)  + 작은 벌레, 그들에게는  온종일 가도 가도  내 눈에는  그냥 한 곳을 맴도는 것만 같은데  작은 벌레, 그들에게는  넓고 넓은 새 땅을  찾아가는 거란다  온 힘 다해 기어가도  내 눈에는  늘 그 자리인 것 같은데  작은 벌레, 그들에게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 땅을 찾아가는 거란다  (권영세·아동문학가)  + 가시   꼴랑  요 작은 것  하나가  내 발가락  비집고 들어와서는  하루 종일  내 생각  몽땅 뺏어갔잖아  (조무호·아동문학가)  + 씨앗  씨앗은 크지 않아도 된다  까만 점 하나가 만든 나무숲  그 숲에 둥지 튼 비비새 한 마리  까만 씨앗 한 개가 하는 일은  작은 점 하나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정두리·시인이며 아동문학가, 1947-)     + 은행 한 알   동그란 은행 한 알에  나무 한 그루 들었다.  여긴 뿌리  여긴 줄기  여기는 잎  천백 살 되었다는  용문산 은행나무도  처음엔 요만했을 거야  조그만 씨앗 속에서  큰 꿈 키웠을 거야.  천년을 꿈꾸는  은행 한 알  (유은경·아동문학가)  + 한 그루 작은 나무의 힘  터벅터벅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따라갑니다.  손자처럼  지팡이가 할아버지를 따라갑니다.  한 그루, 작은 나무  그 편안하고 든든한 힘.  할아버지 곁을 맴도는  나무 지팡이  여름 한낮, 할아버지에게는  한 그루 큰 나무입니다.  쪽빛 바람이 모이는  시원한 그늘입니다.  (이상현·아동문학가)  + 이슬  몸 안 가득  해를 품음이여  우습게 보지 마라  작다고  업신여기지 마라  작다고  해를 품는 가슴이니.  (박두순·아동문학가)  + 새끼발가락  미끄러지는 바람에  새끼발가락 하나를 다쳤다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어, 온몸이 기우뚱!  어, 지구가 기우뚱!  (현경미·아동문학가)  + 빗방울  또르르  유리창에 맺혔다.  대롱대롱  풀잎에도 달렸다.  방울방울  빗방울이 모여서  졸졸졸  시냇물이 흐른다.  (작자 미상)           6월12일, 허베이성 한단시 민간 전지공예 예술가 펑스핑(馮石萍)이 월드컵 주제 전지공예 작품을 만들고 있다. 얼마 전 허베이성 한단시 민간 전지공예 예술가 펑스핑(馮石萍)은 월드컵을 앞두고 2주일 동안 메시, 호날두, 네이마르 등 축구스타를 본 딴 전지공예 작품을 만들었다. /신화망              
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소똥구리연구",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540  추천:0  2018-06-14
환경부 '1마리 100만원 수배'                  소똥구리 화천서 발견 홍성우 기자  2018.06.14.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멸종 위기 야생 동물 Ⅱ급..이튿날 잃어버려 '멸종 위기 야생 동식물 Ⅱ급'으로 지정된 소똥구리가 최근 강원 화천군에서 한 농부에 의해 발견돼 화제다. 지난해 환경부는 국립멸종위기복원센터에서 5년간 복원을 진행할 목적으로 소똥구리를 50마리에 5000만원에 산다는 공고를 냈다. 소똥구리는 동물의 배설물을 데굴데굴 굴리는 습성이 있다.2018.6.14/뉴스1 © News1 홍성우 기자 (화천=뉴스1) 홍성우 기자 = 강원 화천군에서 환경부가 그토록 찾던 '멸종 위기 야생 동식물 Ⅱ급' 소똥구리가 발견돼 화제다. 지난 13일 오후 강원 화천군 오음리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강아지와 산책을 하던 송주희씨(29·여)는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는 다른 생명체의 움직임을 얼떨결에 봤다. 가까이가 쪼그려 앉아 관찰해보니 2㎝ 크기 벌레가 야생동물의 배설물을 타고 동그랗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던 것이다. 송씨는 난생처음 보는 벌레의 이름이 알고 싶어 흰장갑을 낀 손바닥 위에 벌레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송씨의 지인들은 하나 같이 소똥구리가 맞다고 입을 모았다. 이 소똥구리는 지난해 말 환경부가 복원할 목적으로 50마리를 5000만원에 산다는 입찰공고를 낸 멸종 위기 야생 동식물 Ⅱ급이다. 1마리당 100만원인 셈이다. 이런 까닭도 모르는 송씨는 이튿날 소똥구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송씨는 “죽은 척하고 있는 소똥구리가 갑자기 움직이자 페트병을 가지러 간 사이 1분 만에 사라지고 없었다. 주위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다”며 “소똥구리가 이렇게 비싼지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입찰공고를 통해 이미 소똥구리를 사들여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송씨는 지난해 TV프로그램을 통해 20대 청년 농부로 알려진 바 있다. 지난해 말 환경부가 복원할 목적으로 소똥구리 50마리를 5000만원에 입찰공고한 포스터. © News1 홍성우 기자  
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공상 댓글:  조회:4458  추천:0  2018-06-14
...시 「공상(空想)」은 윤동주가 쓴 시들 중에서 최초로 활자화된 것으로서, 그 점에서는 아주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공상」은 1935년 10월에 발간된 『숭실활천(崇實活泉)』지에 게재되었다. 『숭실활천』은 숭실중학교 학생회에서 간행하던 학우회지로서 1922년에 창간되었다.1 공상(空想) 空想 ─ 내 마음의 塔 나는 말없이 이 塔을 쌓고 있다. 名譽와 虛榮의 天空에다 무너질 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無限한 나의 空想 ─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벌려서 나의 바다에서 自由로이 헤엄친다. 黃金 知慾의 水平線을 向하여.   윤동주는 이때 시를 실었을 뿐 아니라 『숭실활천』의 편집도 했었다고 한다. 그 일에 대해 문익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동주는 숭실학교에 한 학기(필자 주: 두 학기의 착오)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그동안 학교 문예지 편집을 맡았었고 거기 동주의 시 한 편이 실렸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갓 편입해온 학생에게 그 일이 돌아간 것은 에서 먼저 숭실에 나가 있던 이영헌(李永獻, 현 장로회 신학대학 교수)이가 문예부장이 되면서 동주에게 그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때 동주는 내게도 시를 한 편 써 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한 편 써 내었더니 하면서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시는 나와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었다. 동주가 살아 있어서 내가 하는 성서번역을 도와주었다면(살아 있다면 기꺼이 도와 주었을 것이다) 나는 영영 시를 써보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2   이것은 윤동주 자신의 시의 변모와 관련해서도 아주 흥미있는 일화다. 그가 위의 시 「공상」을 학교 잡지에 싣던 무렵에, 문익환의 시를 보고는 라는 매우 야무진 무안을 주며 되돌려주었다는 것은, 당시 그 자신의 이랄까 하는 것을 뚜렷이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라고 자부한 그 자신의 「공상」이란 시에서 연역해낼 수 밖에 없다.   「공상」이라는 시를 다시 곰곰이 뜯어 읽어보자. 그가 을 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아무래도 그런 인상을 부인할 수 없다. 「공상」뿐만 아니라 1936년 10월 이전의 시들은 대개 그런 분위기이다. ...   이렇게 일관된 일련의 시적 경향들은 1935년 10월에 이르기까지 윤동주가 생각했던 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마도 문익환의 시는 이런 기준과 구도에 도저히 미치지 못했기에 그의 눈에 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학소년 취향의 관념적이고 또 상당한 현학취미를 보이는 시들은 1935년 10월을 끝으로 그뒤로는 일제히 자취를 감춘다. 이 시는 화자가 황금 같은 지식을 이루어 명예를 얻어 허영을 부리고 싶은 공상을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는 공상을 한다. 그러나 화자의 공상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상이 아니다. 탑을 쌓듯이 나는 말없이 무너지지 않는 공상을 하고 있다. 그 공상은 명예를 얻고 허영을 부리는 것이다. 화자는 명예를 얻기 위해 무너질 줄 모르고 한 층 두 층 탑을 높이 쌓듯이 천천이 그리고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무한한 나의 공상은 끝이 없이 넓은 내 마음의 바다에 펼쳐져 있다. 화자는 두 팔을 펼쳐서 화자의 꿈과 희망과 이상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공상을 한다. 화자가 명예와 허영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황금 같은 지식의 욕심에 도달할 수 있는 지욕(知慾)의 수평선을 향하여.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 사전에는 ‘현실적이 아니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마음대로 상상함’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사전적 의미의 공상이 아니라 화자가 실현하고 싶은 이상을 이루는 생각을 ‘공상’이라고 하였다.   ‘내 마음의 탑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와 허영의 천공에다 무너질 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는 화자가 원하는 명예와 허영이 이루어졌다고 상상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하여 마음의 탑을 말없이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는 말이다. ‘명예와 허영의 천공’은 화자가 일차적으로 이루고 싶은 꿈, 이상이다. 화자가 바라는 ‘명예와 허영’은 지식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이다. ‘허영’이라 한 것은 화자가 공상하는 지금의 위치에서 이루기 어려운 것이므로 ‘허영’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화자가 ‘탑’을 쌓는 것은 ‘탑’이란 무엇인가 기념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바벨탑처럼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쌓는 것일 수도 있다.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는 화자가 말없이 화자의 꿈과 이상의 세계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아다. ‘무너질 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는 화자가 꿈꾸는 이상의 세계를 막연하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신념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반드시 이룰 수 있도록 견고하게 계획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무한한 나의 공상 ──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황금 지욕(知慾)의 수평선을 향하여.’는 화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곳이 황금과 같이 고귀한 것이고 그것은 화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욕심을 모두 충족하는 것이다. 화자가 ‘무한한 나의 공상 ──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라 한 것은 화자의 ‘무한한 나의 공상 ──’이 이상, 꿈을 의미하는 ‘내 마음의 바다,’라는 것을 관습적 상징으로 말한 것이다. ‘나는 두 팔을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는 화자가 꿈꾸는 이상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공상을 한다는 의미이다. ‘황금 지욕(知慾)의 수평선을 향하여.’에서 ‘황금 지욕(知慾)’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수평선을 향하여.’라 하여 화자가 도달하려하는 곳인 ‘수평선’은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다. ‘수평선’은 ‘하늘과 바다가 멀리 맞닿아 경계를 이루는 선’으로 그곳은 ‘리’ 있는 곳이다. ‘황금 지욕(知慾)’에서 ‘지욕(知慾)’은 사전에 없는 말로 화자가 만들어 낸 조어로 보인다. 그 의미를 한자의 뜻으로 풀어보면 ‘알고자 하는 욕심’ 또는 ‘욕심을 앎’이다. 여기에서는 앞의 의미로 쓰였다고 본다. ‘황금’은 화자가 알고자 하는 ‘지욕(知慾)’이 황금과 같이 귀한 것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거나 ‘지욕(知慾)’을 수식하는 것으로 보면 황금과 같은 귀한 지식을 욕심낸다는 의미로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뜻으로 쓰였다 하더라도 화자는 무엇인가 귀한 것을 알고자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화자가 이로 인하여 명예를 얻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자는 현재 상태에서 이러한 바램이 ‘허영’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상을 이루려는 공상을 하는 것이다.     ========================= -윤동주 시인 서거 73주년에 부쳐                                  /이효상 2월 16일(2018년)은 윤동주시인 서거 73주년이 된다. 오늘도 우리는 시대의 아픔을 안고 해방을 꿈꾸며 밤하늘에 별빛같은 삶을 산 시인 윤동주와 시를 다시 기억하게 된다.  윤동주 시인이 시인으로 자리한 것은 문학에 심취해 1935년 10월에 발간된 『숭실활천(崇實活泉)』제15호에「공상(空想)」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시는 최초로 활자화 된 것으로 황순원의 시와 양주동박사의 글이 함께 게재되며 주목받게 된다. 윤동주시인은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자선시집을 77부 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 했다. 시집 제목을「병원」으로 하려고 했을 만큼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고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치유와 위로의 심장이 간절했던 것같다. 그러나 은사이자 멘토인 이양하교수는 일제의 출판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충고했고, 또 출판경비를 조달하기도 만만치 않아 출판을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친필로 쓴 시작 노트 세권을 만들어 그 중 한권을 이양하 교수에게, 또 한권은 후배 정병욱에게, 그리고 나머지는 본인이 소장했다. 그러나 끝내 두권은 사라졌고 다행히 정병욱에게 준 한권만 남게 되었다. 악랄한 일체 치하에서 사상범으로 몰려 후쿠오카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위대한 시인의 존재와 그가 남긴 명시들이 하마터면 문학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한 것이다.    윤동주의 시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데는 연희전문학교 친구였던 강처중의 역할이 컸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중 강처중에게 편지와 함께 시를 적어 보내었고 해방후 경향신문 기자로 있던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 4면에 윤동주의 시 를 발표하였다. 윤동주 시를 소개한 이는 정지용 시인이었다. 그것도 윤동주 생전에 가장 존경하던 시인 경향신문 편집국장 정지용주간의 해설까지 붙여서 실은 것이다. 사후 첫 활자화된 시로 그 해 3월1일자 김용호가 발행한「문화창조」(2호)에 윤동주의 시 이 함께 발표된다.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는 유진오의 시집「창」과 윤곤강의「피리」를 출판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정병욱이 가진 노트의 26편과 강처중이 받은 원고 5편을 모은 31편의 시로 유고시집을 긴급 제작 발간하게 된다. 추모식용으로 벽지표지로 만든 유고시집「하늘과 별과 시」가 추모식에  10권이 나옴으로 죽었던 시인이 다시 시로 부활하게 된다.    유고시집「하늘과 별과 시」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으로 세상에 첫 얼굴을 내밀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이 시인과 그의 시를 기억하던 정병욱과 강처중, 그리고 정지용,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의 공로로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역사적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역사의 기록은 소중하고 신성하다.    이 시집과 더불어 1948년 백민문화사에서 3월 1일자 발행한「백민」잡지에 고 윤동주 라는 이름으로 이라는 시가 발표되고, 이후 1953년 9월 시와 평론집「초극」에 윤동주 시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비평「윤동주의 정신적 소묘」가 고석규에 의해 발표된다.    시인으로서 대중성을 확보하며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시집을 정음사에서 보급용 초판으로 2종을 출간한 1955년 2월 15일 10주기 추모식때이다. 이때 유고본에 실렸던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은 제외된다. 편집은 정병욱의 자문을 받아 윤일주가 하고 표지화를 김환기가 담당했다. 이때 윤동주 시인의 동생 윤혜원이 월남하면서 가지고 온 노트의 80편의 시를 추가하므로 111편의 시가 수록되게 된다. 1967년에는 백철, 박주진, 문익환, 장덕순의 글을 책 말미에 추가 수록하고 판형을 바꾸어 재 간행하게 된다. 그후 그동안 게재 유보되었던 시 작품 23편을 추가하여 출판하게 된다.   1972년「현대시학」1월호는 윤동주 시집 46편이 수록되면서 시인의 시와 시세계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시인의 시와 죽음을 공공연히 비하하던 소리가 있어 왔으나 1977년에 시인의 죽음에 대한 ‘일경의 극비문서 전문’과 ‘재판 판결문’등이 공개되면서 다시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중국의 개방 개혁의 물결을 타고 연변대 교수로 부임한 와세다 대학  오오무라 마쓰오(大村益夫) 교수가 용정의 동산중앙교회 묘지에 가서 40년간이나 잡초에 묻혀있던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내고 평전을 써서 세상에 알린다. 그러자 대한민국 정부는 이런 윤동주 시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게 된다.   지난해 연말 ‘별이 된 윤동주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회’를 열었다. 크리스천 시인이자 민족저항시인이었던 윤동주 시인의 시 정신을 기리며 두 주간 인사동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크리스천만이 아닌 일반인들 특히 시인, 주부, 교수, 수녀, 승려, 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수천여명이 넘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전시회는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만주 북간도를 중심으로 시작해서 그의 사후 출판된 유고 시집과 육필원고 그리고 추모 기념 작품들까지 300여점의 작품을 통해 처절했던 시인의 삶의 궤적을 소개하였다. 이 전시회에서 참석자들은 1948년 유고시집과 1955년 발행된 초판시집, ‘별헤는 밤’, ‘십자가’ 등 캘리그라피로 쓴 시 작품 등을 주목하였고, 기념강연과 시낭송 시음회를 통하여 시인의 정신을 되새겼다.    모두들 왜 그렇게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북간도에서 태어나 주변인물이기에 무관심해왔던 한국**는 가슴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야 하겠다. 윤동주 시인은 사실 한국**의 보배이자, 자랑이다. 윤동주시인은 식민지 시대의 지성인으로 마땅히 감당해야할 고뇌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맑은 영혼과 깨끗한 시심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수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잠시 죽은 것 같았던 그 죽음이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고 다시 시로 부활하여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 윤동주로 살아 오늘도 울림이 있는 감동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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