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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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행 (외 2편)
2015년 03월 20일 07시 18분  조회:1147  추천:2  작성자: 최화길
수필
고향행 ( 2)
 
  이번의 고향행은 미리 준비된것이 아니였다. 지난 한학기에 걸쳐 있었던 민족간부조선어훈련반의 교수를 담당한것이 인연이 되여 민족간부들과 어 울리게 되였는데 그중의 한 학원이 내 고향에 처가집이 있어서 우리는 자연 한고향인연이 거론되였다. 아무때건 자기가 처가로 떠나게 되면 나한테 알리겠으니 나더러 편히 자기자가용으로 함께 가자는것이였다. 물론 그 얘기가 술자리에서 있었던지라 그냥 스쳐지나는 소리로 들었는데 당사자가 잊지 않고 이번 련휴에 처가로 떠나게 되니 함께 동행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전화가 왔다. 사실 지난 여름방학에 다녀온 고향이다보니 이번 련휴에는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인 나였으나 그 마음이 고마워 함께 가자고 선선히 응낙했다.
  고향가는 일보다 더 즐거운 일이 이 세상에 더 있을가 싶다. 국경절날 떠나기로 약속이 되였는데 전날부터 흥분이 실렸다. 고향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모의 얼굴이 떠오르는가 하면 언제나 인자함만을 보여주는 고모 부의 환한 미소도 함께 떠오르면서 종시 잠을 이룰수 없었다. 정말 한밤을 그대로 하얗게 밝히는 체험이였다. 그래도 피곤기라곤 찾아보기 어려울만 큼 정신은 되려 올똘하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 었다.
  그렇게 잠을 설치고 눈을 뜨니 겨우 아침 5시였다. 8시반에 만나기로 약정이 되였으니 그 시간대면 한잠을 자도 되련만 도무지 재잠을 청할수 없을만큼 마음은 연고없이 들떠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련휴로 가는 걸음 인데 무엇인가 사들고 가야 하지 않는가 하는 예전에는 생각도 못하던 자상함도 떠올리는 시각이였다. 그래야지 무엇인가 사들고가야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하는 자문자답을 하면서 떠올린 생각이 고향에서는 사먹기 힘든것을 고르기에 이르렀다. 여름방학에 갔을 때 들을라니 우리 여기서는 시장에서 흔히 살수 있는 우리 민족의 떡 등속을 거기에서는 파는 곳이 없었다. 아마도 조선족이 좀 적은편이여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음식도 맛보려면 오직 자신이 손을 써서 만들어야 했다. 이미 고희를 넘기신 고모 이고 보면 생각은 있어도 손수 만들어먹기에는 귀찮을것이 뻔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더는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발길은 말없이 떡집을 향했다. 요사이 한국에서 들어온 부부가 떡집을 경영하고있는데 경기가 좋아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차례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너무 이른 아침이여서 좀 주춤하였는데 떡집문을 떼고들어서니 그게 아니였다. 나보다 먼저 와서 줄을 선 사람이 대여섯 잘되였다. 내가 되려 조급증이 날 정도였다. 떡이 포장되는대로 손님들의 손에 들리워지다보니 떡집에서 좋이 한식경을 기다려야 했다. 참 일찍 오기 다행이였다. 나의 뒤로도 줄을 지었으니 말이다. 그러구려 내가 떡 한가방 꼴똑 채웠을 때는 시침이 7곱시반을 가르켰다. 나는 밥도 안먹은 빈속으로 또 다른 한 시장 을 떠올렸다. 우리 이곳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순대매장으로 부랴부랴 걸음 을 재우쳤다. 순대는 꼭 사가야 했다. 고모부가 떡을 좋아한다면 고모는 떡보다 순대를 더 좋아하는것을 잘 아니깐!  8시를 다 채워서야 떡 한보따 리에다 순대 한짐을 다 챙겼다. 그때까지도 빈속이였으나 전혀 배고프다는 생각이 뜨지 않았다. 되려 어떤 포만감으로 하여 마음이 든든하였다.
  고향이란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것일가? 차에 앉은 우리 일행중 사위가 되는 그 사람 내놓고 우리 둘은 그냥 들뜬 상태였다. 기사를 맡은 남편과는 달리 안해가 되는 사람은 끝없이 종알거리고있었다. 여기가 바로 어렸을적에 오빠와 함께 고기잡이 하던 곳이라고 하는가 하면 좀 지나서는 이 산이 바로 오빠와 함께 나물캐러 다니던 산이라고 하면서 이십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어제일처럼 떠올리는것이였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옆에서 들어줄 사람이 궁하다는 생각에 말을 하지 않은것뿐이다. 나의 눈에도 역시 개울에서 반두질하며 뛰놀던 동년이 그려진 강이 아니던가? 성범이랑 인주랑 쌍가마 그리고 순자랑 함께 벌거벗은채로 시름없이 첨벙거리며 목욕하며 희희닥거리던 동년이 다시 되사는듯하였다. 아니 아주 되살아서 지금 달리고있는 차창에 아른거리는 환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두시간여 달려온 피로가 없지 않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조금도 피로를 모르고있었다. 기사를 맡은 남편 역시 안해의 기 분에 따르는듯 그렇게 시물시물 웃고있었다. 애처럼 즐거워하는 안해모 습이 보기좋았던것임이 틀림없었다. 모르긴 해도 이번 고향행차에 대하여 은근히 기뻤으리다. 어떤 일상에서 오늘과 같이 이렇게 기뻐하고 흥분하는 모습을 보았으랴 싶을 정도였으니깐!
  고향이란 나 혼자만의 그리움의 의미지가 아니였다. 이 세상 고향을 둔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꼴똑 담긴 곳이라는 생각이 새삼스 러웠다. 
  내가 이 시간대면 거의 집에 도착한다는것을 이미 전화련락을 받은 고모와 고모부는 아예 집앞 뜨락에서 서성이고있었다. 이맘때라고 짐작해 서라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서성대고있는 모습에서 고모와 고모부의 그리 움도 함께 읽는 찰나였다. 사실 나를 먼저 집까지 태워주고서야 처가로 달리는 그 남편의 안해 립장에서는 얼마나 야속했으랴 하는 생각이 떠오르 는 순간이기도 했다. 엄마 보러 가는 안해의 마음이야 나보다 더 급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엄마가 집 뜰안에서 서성거릴것을 생각하니 내가 막 미워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누구면 안그러랴! 날개라도 돋혔으면 언제나 할것없이 아무때건 훨훨 날아가고싶은 곳이 아니랴!
  고향, 떠나갈 사람들 거의 다 떠나버린 고향, 짜개바지친구 하나 찾을수 없는 고향이기에 얼핏 스치는 생각에는 스산하고 한산한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였다.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음에도 한치의 변화가 없는 고향에만 유독 살아있는 농익은 정으로 하여 마음은 뜨거워났으며 내 마음에 앙금이 되였던 옥생각들을 다 풀어주는 고향이였다. 유독 나의 애명을 불러줄수 있는 곳이고 나의 천진한 과거와 없지 못해 유치했던 성장과정을 손끔보듯 그렇게 환히 알고있는 고향이기에 고향에 머무는 내내 나는 아이로 다시 태여난 기분이였고 다시금 되돌릴수 없는 세월을 억지로가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되돌려본 아름다운 추억이였다.
  기쁨과 환락은 짧은것이다. 제한된 련휴였으니 떠나야 하는 서운함도 함께였다. 떠나기 전날부터 무엇인가 보낸다는 소리를 곱백번도 외우고 있는 고모를 보며 나는 나에게 수요되는것 하나도 없다고 그렇게 딱 잘라 말했건만 그래도 아니란다. 안해를 한국에 보낸 내가 어떻게 자취생활을 하고있는지가 궁금해서 밤잠도 안온다며 세월타령에 밤가는줄 모르더니 어느새 올망졸망 숱한 보따리를 꿍져놓았다. 큰딸이 로씨야에서 뜯어말려 가져왔다는 고사리에 사위가 짬짬이 잡아서 말리운 메기, 붕어에다 늦게 심어서 지금도 삶아먹는다는 풋강냉이 그리고 손수 심어 깨끗이 말리워 빻은 고추가루 이렇게 짐을 꿍지다보니 내가 가지고간 떡보따리보다 한배 는 더 큰 보따리가 주어졌다. 사실 이런 올망졸망한 보따리에 든것이 시장 에 나가면 다 있지만 차마 당장에서 그 말을 할수가 없었다. 내가 가져간 것은 돈만 주면 손쉽게 사는것이였지만 고모가 나에게 챙겨준것은 그런것 들이 아니였다. 이를 어찌 올망졸망한 보따리로만 보랴! 이는 오직 따뜻한 마음이고 뜨거운 숨결이 아니랴! 이런 끓어번지는 정앞에서 난 단 한마디 말도 할수 없었다. 오직 넣어주는 그대로 받아야만 했다. 받지 않을 그 어떤 구실도 있을수 없었고 또한 찾을수 없었다.
  떠나오면서 나는 끝내 눈굽을 적시고야 말았다. 이제 앉으면 얼마나 더앉겠는가 싶은 애달픔도 애달픔이였지만 언제나 나보다 한발 앞서 나를 생각하는 청고한 사랑에 감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고향으로 가는 목적은 없지 못해 무엇인가 더 보태주고 싶은 마음이였다면 내가 고향에 가서 가져오는것은 나의 한생에도 다 못쓰 고 죽을 위대한 사랑이였다.
  고향, 나에게 둘도 없는 고향, 나는 오직 그 품에 안겨야만 사는 보람과 더불어 사는 의미를 터득하는것이 아닐가?!   
  
 
 
 
나이, 내것만은 아니다
 
 
   사춘기 그때는 왜서 나이에 그렇게 민감했던지? 나이말이 나오면 한살 이라도 올려붙이지 못해서 안달이였다. 그만큼 나이 한살 더 많은것으로 어깨를 살리기도 한적이 있다. 실은 한살이 아니라 생일이 한달 빠른것으 로도 우에 올라서려고 바득거렸다. 오뉴월 하루볕이 새롭다는 속담을 내세워 등치면서도 형님이나 오빠노릇에 몰입했는지도 모르겠다. 오죽했 으면 나이 한살 더붙이는것으로 얼굴을 붉히다 못해 주먹질이 오갈정도 였으랴!
  그때 나이에 대한 리해는 담배를 마음대로 태우고 술을 시름놓고 마시는 그런 알량함도 속일수 없다. 어쩌면 나이와 자유는 정비례인듯한 유치함이 였다. 아니면 꽃같은 처녀손을 잡고 청실홍실 늘이는 연애생활이 부러워 서였을가? 그때만 해도 결혼하면 알콩달콩 신혼을 즐기는 새신랑 새각시가 부러운것이 사실이였으니깐! 아무튼 나이를 올려붙이는데는 특별한 다른 뜻이 없이도 그렇게 신경을 썼으니 오늘날 생각해보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짚어진다.
  세월의 흐름에 실려 덧없이 먹은 나이가 불어나면서 그런 덧붙이기는 고사하고 나이를 되려 줄이고싶은 마음이 한두번이 아니다. 벌써 마흔고 개를 넘기다니 래일모레 오십줄이라니 하는 한탄같은 신음을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많이 들어오는 터이다. 해놓은 일 없이 나이만 늘어간다는 세월 타령이다. 어찌보면 우리의 힘으로 막을수 없는 막무가내앞에서 인생에 대한 허심탄회한 반성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직 먹을수만 있고 뱉을수는 없는 년륜같은 시간의 기록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지는 자신을 놀랍게 발견하게 된다.
  일찍 성인 공자는 나이에 대하여 정채로운 선견지명을 내놓은적이 있다. 바로 삼십이립, 사십불혹, 오십지천명, 육십이순, 칠십고희다. 말하자면 나이도 때가 있다는 뜻이되겠다. 그때 그때가 서로 다른 생명의 의의가 부여된다는 암시라고 봐도 무방할것 같다. 그리고 그 나이면 그나이로서 충실히 갖춰야 할 어떤 순리를 깔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함께 터득 된다. 그러고 보면 나이는 오직 나이에 그치는것이 아니다. 나이도 일종 사회성 을 띠는 존재라고 보아야 할것 같다.
  일떠세울 때는 세워야 하고 막힘이 없이 쭉 치달을 때는 치달아야 하며 고개를 숙이고 명상에 잠길 때는 명상에 잠길줄도 알아야 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릴 때가 되면 성근하게 귀를 귀울릴줄도 알아야 하니 말이다. 그냥 내가 생겨난 그대로를 고집하는것은 나이에 대한 배반이고 나이에 대한 부정이다. 어찌보면 세월과 엇서는 아름다운 몸부림이라고 할수 있겠 지만 결국엔 나이를 헛먹었다는 사회지론이 따르게 되는것이다. 이렇게 나이에 대한 행위철학은 우리가 알던 모르던 그물처럼 존재하는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나이에 매워 살자는 말은 절대 아니지만 나이에 따르는 무형의 준칙을 누가 부정하랴!
  꼭 같은 말일지라도 애입에서 나왔다면 천진하고 귀엽다며 들어주지만 칠십을 넘긴 로옹의 입에서 나왔다면 오망 아니면 치매라고 하는 현실을 우리가 어찌 스칠수 있으랴! 이십대가 하는 일들이 우리 눈에 안들어오듯 이십대의 눈에도 우리 오십대들의 어떤 사유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것도 따져보면 바로 나이차이에서 유래된것이다. 세월은 오직 공정하다고 보아 야 한다. 그때를 살아온 우리들의 삶이 다르고 그때의 사회배경이 다른만큼 우리는 우리의 사유로 모든 오늘의 현실을 부정할 힘이 없는것도 사실이잖은가? 종점이 주어진 우리의 생명을 놓고 말하면 오직 안타까움 이지만 우리는 그런 안타까움에 빠져서는 안되는 불쌍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의 입에 잘 오르는 노래 “내 나이가 어때서”를 열창하는것은 아닌지?
  이 세상에 나이에 깔려죽은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나이를 치받고 우뚝 일어서서 백년을 청춘의 기백으로 산 사람이 없는것도 자명한 일이다. 뱀 을 그려놓고 다리를 덧붙이는 소행인지는 몰라도 오십대를 넘기면 육체적 인 나이보다 정신적인 나이로 사는것이 어떠랴 싶다. 풀떡풀떡 뛰던 육체 적인 어제를 미련하기보다는 풍만한 오늘의 정신력으로 살아가는것이 더 지혜롭고 총명하지 않겠는가?
  천고마비로 일컽는 이 가을, 홀연 높아진 푸른 하늘아래 풍성한 열매 들을 껴안고 흐느적이는 여유를 만끽하면서도 고운 단풍잎에 눈길이 간다. 수확의 희열뿐이 아닌 쓸쓸하고 소슬한 가을바람을 감수하며 애처롭게 떨고있는 단풍잎이다. 그냥 빨간 단풍으로 고운 여생이 될수 없는것이 운명인줄 뻔히 알기라도 하는듯 나무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악이 눈에 밟혀온다. 우리들의 인생도 저 고개만은 그냥 지나칠수 없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여유작작 산책하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잎이 지면 나무는 또 봄을 기다리고 봄이면 새잎을 피우고 한여 름을 왕성하면 나무잎은 결국 락엽이 되여 새로운 꿈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것이 아니랴! 한번으로 끝나는 우리들의 인생, 나이와는 상관없이 사는 그날까지 행복하게 사는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내 령감의 발원지
 
   거의 매일을 누가 부르기라도 하는듯 달려가는 곳이 있다. 바로 내가 사는 아빠트에서 한 500미터 상거한 목단강이다. 시골태생이고 또 내가 태여난 곳에는 큰강도 없다보니 수영에 대해선 거의 까막나라인 나지만 기어이 강변으로 줄달음치는 그 연유에 대해선 나도 어떤 확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냥 강을 마주하면 언제던지 속이 후련해나고 어떤 답답함도 시원히 푸는듯한 감수가 전부일뿐이다.
  오늘도 이른 아침 동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마주하고섰다. 어제 저 녁에도 마주했던 강물이건만 오늘 아침에 마주한 강물은 또 다른 느낌이다. 빨간 아침노을을 싣고 흐른다. 아주 여유작작한 느긋함과 질서정연한 흐름 이다. 누가 쫓기라도 하는듯 그런 서두름이 없고 그렇다고 느릿느릿 잔꾀 를 부린다는 그런 느낌도 아니다. 그냥 마음이 내키는대로 생긴대로 나름이 주어진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다. 흠잡을데 없이 보기에 가관이다.
  산이 좋고 물이 맑아 세상에 소문이 자자한 고산호 경박호가 발원지라고 알고있는 목단강물은 내가 사는 녕안땅을 굽이쳐 흐르고있다. 물론 녕안땅 만이 아닌 동으로 말없이 흘러흘러 끝간데 없는 바다가 귀향일것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서있는 여기는 근근히 목단강의 한 구간 그것도 크지 않 은 자그마한 구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의 생활자체가 생활속의 한 구간인것처럼. 필경 나의 생활반경도 주어진것이며 제한된것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사는가가 나름일뿐이다.
  목단강이 어떤 굴곡을 거치며 바다에 이르는가에 대하여 다는 모르지만 또한 다를 알수도 없지만 내 눈에 비쳐든 이 한구간에서의 만남만으로도 나의 마음을 적시기에는 족하다.
  할머니가 나한테 정중하게 묻던 그 물음이 새삼스럽다. 사람이 살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물음이였다. 그때가 내 나이 열두살, 세상물 정에 어섯눈이나 떴을가 하는 소년에게는 당치도 않는 물음이였다. 아마 자신이 나와 길게 같이 할 시간이 없었음을 미리 알았는지는 오늘까지도 수수께기지만 이런 당돌한 물음에 나더러 확답을 해라는것이였다. 일시 떠오르는것이 없었다. 아니 머리가 하얗게 비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그래도 작심한듯한 할머니의 물음은 집요하였다. 그리고 꼭 어떤 답을 주어야 한다는 기대가 눈에 력연하였다. 의아한 눈길로 할머니 얼굴을 빤히 쳐다 보며 그때 내가 준 대답이였다. 잘먹고 잘사는것이 아닙니까? 동문서답 이였다. 할머니의 물음은 그것이 아니였건만 내가 할수 있는 대답은 그것이  전부였고 또 더 다른 정면적인 답은 머리에 없었다. 그만한 대답 에도 만족이라는듯 할머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은 이미 정해 놓은듯한 답을 나에게 주는것이였다. 그건 너나 내나 바라는바이고 생활 하며 제일 중요한거는 오직 사랑이란다. 또박또박 꼬집어 답을 주었지만 답 자체가 나에게는 천방야담이 아닐수 없었다. 사랑이란 낱말조차 입에 오르지 않은 그때고 보면 아리숭한 물음이자 역시 희미한 답이였다. 하지만 그말이 할머니가 나에게 남긴 유언이기도 했다. 나에게서 시원한 대답도 들어보지 못한 할머니는 며칠을 더 벋티지 못하고 이세상을 영영 떠났던것이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이것밖에 또 하나 잊지 못할 명언이 있다. 어렸을 적에 내가 좀 부랑져서 걸핏하면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애들과 맞다 들었다. 불보듯 뻔했다. 내가 맞아들어오는 때가 반이 넘었다. 그러면 금이야 옥이야 하며 나를 물고빨던 할머니였지만 이때만은 아예 모르쇠를 대는 눈치였다. 나의 역성을 들어주기는 고사하고 되려 나를 책망하고 닥달하였다. 심하면 맞아온 나에게 비짜루를 들기도 하였다. 참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지만 그런 봉변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그런 일이 반복되던 어느 여름날 밤 나를 품에 꼭 껴안고 하던 말이 오늘까지도 나의 머리속에 파랗게 살아있다. 때린 사람은 다리를 꼬부리고 자도 맞은 사람은 다리를 쭉 펴고잔단다 알겠니? 그러니 절대 남을 때리겠다고 헤덤비지 말거라. 그말이 어떤 효과를 발생했는지는 몰라도 그후로 나는 바락바락 악을 쓰며 달려들어 싸우는 일이 거짓말같이 사라진건만은 오늘 묻는다 해도 사실이 였다고 떳떳하다.
  소리없이 갈길에 충성하는 강을 마주하면 지켜야 할 비밀이 따로 없다. 그냥 시원히 터치고싶고 여유도 없이 깡그리 털어놓고싶다. 그만큼 믿음이 굳다. 그리고 믿어서 어떤 손해나 낭패 같은것이 있을리 없다. 속이 깊고 마음 또한 너그럽기로 인간이 왜소하게 보이는 강이다. 오직 자신이 숙명 에 충직하고 오직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기에 삶의 거울을 마주한것처럼 숙연해질뿐이다.
  생활의 강자는 결국 생활을 사랑하는자 라는 말이 있다. 생활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철학이 아닌가싶다. 그리고  생활에 대한 많은 명언 명구의 집합이라는 생각도 함께 한다. 뿌리를 떠나면 금방 말라버리는 나무처럼 땅속을 깊이 파고드는 뿌리가 있기에 땅우에는 푸름을 떠인 숲이 우거지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반경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바로 숲속의 한그루 나무에 해당한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자신이 발붙힌 땅 그리고 자신이 하는 사업과 자신이 영위하는 생활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때만이 우리는 생활이란 무엇인가를 깨닫는것이며 그런 뜨거운 사랑이 은근히 앞설 때 만이 쪼박지만한 글이라도 얻게 되는것이 아닐가?
  흘러도 흘러도 끝없이 흘러야만 하는 강, 그것이 강의 숙명이라면 사랑 하고 또 사랑해도 끝없이 사랑만을 기발처럼 추켜들어함은 할머니의 유언 에 답을 줄수 있는 나의 숙명이다.
  생활이 글의 광산이라면 생활에 대한 사랑은 령감의 발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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