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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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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대들은 누구의 "얼굴"을 그려봤는가... 댓글:  조회:3492  추천:0  2018-04-06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마음 따라 피여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따라 올라갔던 오색빛 하늘아래   구름속에 나비처럼 날으던 지난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덤으로 더...  가곡“얼굴(신귀복 작곡)”이야기      두 교사가 5분만에 만들어낸 즉흥곡 윤연선 ‘고아/얼굴’ 1975년 지구레코드사   ‘얼굴’의 빅히트로 작곡가 신귀복도 학내외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사실 그는 한국 중고등학교 음악교육계의... 작사가 심봉섭도 ‘얼굴'의 진짜 주인공과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주인공은 덕수 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김말순씨....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얼굴, 내마음 따라 올라갔던 하이얀 그때 꿈을, 풀잎에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 빛 하늘아래 구름속에 나비처럼 나르던 지난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작사자 심봉석(1941년생)충남 공주출생 서울사대 생물과 출신의 시인 작곡자 신귀복(1937년생)경기도 안성출생, 작곡자이며 교육학자, 경희대학교 음악대학과 동 대학원 졸업 후 중,고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후학을 양성 했다.   주요작품으로는 등이 있다.     가곡“얼굴(신귀복 작곡)”이야기    은 사춘기 소녀가 풋사랑 소년의 모습을 생각하는 노래 같다. 소녀 취향의 로맨티시즘과 수줍고 풋풋한 사랑의 감정이 표출돼 있다.   그러나 실상은 소녀도 아니고 사춘기는 오래 전에 안녕을 고한 두 청년 교사가 즉흥적으로 나름의 구원의 여인상을 머릿속에서 상상하며 만들었다.   때는 1967년 어느 날, 두 사람은 서울 동도공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이 학교 교무실이 “얼굴”의 요람이다. 아침에 교무회의가 열리고 있었는데 교장님의 말씀이 몹시 지루하게 느껴졌다. 지리함에 지친 생물교사 심봉석(沈奉錫)이 먼저 소근대며 말했다. “교장 얘기 따분한데 서로 애인 생각하면서 노래하나 지웁시다. 제목은 ‘얼굴’이 어떻습니까?” “좋죠, 심교사가 가사를 짓고 나는 곡을 지어서 나중에 연결하면 좋겠군요” 음악교사 신귀복(申貴福)도 대 찬성이었다. 두 사람은 열심히 메모지에 작업을 시작했다. 드디어 조회가 끝 난후 두 교사와 동료교사 10여명이 음악실로 갔다. 악보에 심교사의 가사를 써 놓고 피아노를 쳤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썩 좋다고 칭찬했고 어떤교사는 “맹물(생물)교사가 무슨 가사를 쓰느냐”며 농도 걸었다. 심교사는 좀더 멋진 노래를 만들고 싶어서 보름 동안을 소공동 모 음악다방에 매일 퇴근 후 두 시간씩 앉아 다듬었다. 1절 마지막 구절의 ‘맴돌다’를 ‘맴돌곤 하는 얼굴’로 바꾸면서 멋을 부리는데 만 일주일 간 고심했다.     신귀복 교사는 작곡 후 “누구의 얼굴을 그리며 작곡했느냐”는 추궁을 부인과 친지들로부터 귀찮을 정도로 많이 당했다. 이런 추궁은 심교사도 매일반, 후에 결혼한 부인에게서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심 교사는 이렇게 해명한다. “양정고교를 매일 우리 집 앞을 지나가던 동그란 얼굴의 여학생이 있었지요. 말도 한 번 건넨 일이 없고 이름도 모르는 소녀였으나 매일 만났으므로 통통한 얼굴의 여학생이 인상에 남았나 봅니다.” 억지로 의 모델을 찾으라면 그 여학생의 이미지를 닮은 허구의 여인이 모델이라는 설명이다.   그때 신교사는 KBS라디오의 ‘노래고개 세고개’프로의 심사위원으로 있었는데 담당 프로듀서에게 악보를 보여 주었다. 그 노래가 방송을 타고 전국에 소개되자 여학생의 펜 레터가 쇄도했다. 악보를 보내달라는 요청으로 3개월간 무려 8,000매를 복사해서 우송했다. 일본의 한 교포는 청와대로 폊지를 보내 악보를 요청했다.     1937년생인 신교사의 고향은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구포동 184의 2, 안성초등학교 바로 옆집이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한참 걸어 깨끗한 거리에 서 있는 학교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 뒤쪽에 붙은 몇 채의 작은 집 틈에 그의 생가가 있다. 지금은 학교와 그의 생가 사이가 담으로 막혀 있는데 그가 어릴 땐 담이 없었다. “집 마당을 지나면 곧장 학교 운동장이 되었지요. 30초면 등교를 했으니까요” 학교는 그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학교는 지대가 좀 높은데 그의 생가와 학교사이엔 축대가 없이 언덕에 호박을 심어 경계를 삼고 그리로 올라서 학교를 갔다. 학교 수업이 끝나도 그는 계속 남아서 놀고 오르간도 혼자 쳐 보았다. 매일 혼자 아무렇게나 두들겨 보며 신기해했고 점점 흥미를 느꼈다. 교과서에서 배운 노래도 혼자 흉내 내어 쳐보고했다. 매일 연습을 하는데 나중에 음악을 아는 담임교사의 눈에 띄어 그에게 악보 읽기 등의 기초이론을 지도 받았다. 그의 생가는 지금 방이 5개되는 ‘ㄷ’자형의 낡은 기와집으로 여러 가구가 옹기종기 산다. 본래는‘ㅡ’자형의 마당이 너른 집이었다. 그는 이글의 취재를 위해 여름 휴가 중 하루를 틈을 내 고향집을 함께 가 주었다. 주인은 없고 10세가량의 소녀 혼자 집을 지키고 마당에서는 고추가 햇볕을 받아 검붉게 말려지고 있었다. 신교사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말리던 고추를 상상했는지 한참동안 말없이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카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천주교 학교인 안법중고교에 진학해서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불었다. 그는 생가를 나와서 중고교 시절에 살았다는 큰 양옥집에 들러 다시 회상에 잠긴다. 그리고 얼마를 걷다가 문득 발을 멈췄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밴드 연습소리 때문이다. 그는 소리를 따라 홀리듯 끌려갔다. 그가 간곳은 안법중고교, 그의 모교이다. 그는 바로 이 학교 밴드부에서 활약했다. 방학인데도 학교에 나와서 나무 그늘에서 연습하고 있는 후배를 보며 그는 혼자 미소를 지었다. 교무실에 들어가니 동기동창이라는 이윤희 교사가 반갑게 손을 내민다. 그는 “이 친구 별명이 이름을 거꾸로 한 ‘복귀신’이었는데 방과 후엔 혼자 남아서 트럼펫을 불고 연습한 성실하고 고지식하고 꼼꼼한 성격이었습니다.”하고 신교사의 지난날을 들려준다. 두 사람은 가끔 만나는 것 같이 보인다. 최근의 안부를 묻고 두 사람은 학교를 나와 대폿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유명한 ‘안성 막걸리’를 마시며 회포를 밤새 풀자면서...     안법고교 재학시절 군청의 의뢰로 작곡가 이흥렬이 를 작곡한 일이 있다. 작곡 후의 멜로디는 안법고교 밴드부가 시연을 했다. 이 학교 밴드부는 KBS주최 전국관악 경연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을 한 밴드의 명문이다. 학생들은 힘껏 연주를 하고 제법 잘 했다고 자신에 차 있었는데 이흥렬은 박자가 안 맞는다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과연 학생들이 냈던 소리와는 달리 절묘했다. 신교사는 그에 감동을 받고 “나도 저런 훌륭한 작곡가가 되어 좋은 곡을 많이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경희대 작곡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 공군에 입대해 군악대에서 트럼펫을 불었다. 그는 밴드부에서 악보 읽기를 배우고 다른 악기도 조금씩 배운 것이 작곡의 밑거름이 됐다고 믿는다. 군 제대 후 그는 동도공고, 금옥여고를 거쳐 경희대 강사, 강원대 강사를 거쳐 1984년 서울시 교육위원회 장학사로 부임했다가 학교로 복귀, 서울강서구 소재 공진중학교장이다(1998년 당시)     그의 첫 작곡은 1966년 노랫말은 송강(松江) 정철(鄭撤)의 시조이다. 작곡을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뜻대로 좋은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던 어느 날 그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꿈에 홍난파가 나타나 왜 작곡을 않고 게으름을 피우느냐고 꾸짖었다. “능력이 없습니다.”하고 그가 대답했다. “능력이 없으면 내가 곡을 줄테니까 따라해” 그러면서 난파는 “미미라...”하는 음계를 불러 주었다. 신교사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스스로 놀라서 잠을 깼는데 입 속으로 그는 중얼중얼 멜로디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곧장 일어나 종이에 적었다. 그리고 평소 좋아하던 시조 를 가사로 적어 넣었다.   말하기 좋다하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 내가 남의 말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이 가사는 말 조심하라는 교훈적인 시조로 펴소 그의 좌우명이다. 이 곡도 KBS합창단을 통해 방송으로 소개됐다.     은 그의 두 번째 작곡이자 대표곡이다. 1983년까지 김성태편 교과서에 수록됐고 TV드라마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돼 대중적으로 애창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여고생들의 애창곡이다. 멜로디가 쉽고 콧노래로 부르기도 쉽다. 그가 작곡 후 처음 고향에 갔을 때는 친지들이 플래카드를 써들고 환영을 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에는 에피소드가 많다. ‘자신이 작사 작곡 했다’는 가짜가 수없이 나타나 직접 그들을 만난 일도 있다. ‘관악구 모학교 학생들은 우리학교 교감이 작사ㆍ작곡 둘다 했다’며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ㆍ신 두 사람은 당시 동도공고 교사가 증인이라며 일축했다 음식점에서 어느날 신교사가 친구와 식사를 하는데 종업원이 을 흥얼거렸다. 그 친구는 종업원을 불러 “그 노래 누가 만든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이 분이 바로 작곡가”라고 소개 하니까 그 여자는 “아저씨 웃기시네요”하면서 가려고 했다. “정말 이 아저씨란 말야”하니까 “작곡가가 누구건 알바 아sP요”하면서 계속 노래를 불렀다. 어느날엔 신교사가 덕소에 가는데 검문소에서 신분증이 없어 저지를 당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작곡가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헌병은 어떤 노래냐고 물었다. 그는 노래를 불렀더니 그 노래 잘 안다며 통과시켜주었다.     신교사는 이 후에 박목월 시 등의 가곡과 교가 62곡, 기악곡 등을 작곡해 2매의 독집 디스크를 출반했다. 그는 처음으로 사랑을 주제로 하는 가곡를 발표했다. 가사는 여류 김성옥 씨의 시, 시인이 가사를 주면서 한번 작곡해 보라고 해서 작곡을 했다가 KBS FM에서 위촉이 와서 1987년 9월 15일 KBS FM특집 프로에서 소개했다. 그는 방송 전에 어느 모임에서 직접 이 노래를 불러 봤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방송에서 초연한 연주가는 메조소프라노 정영자 씨, 작사자는 “시보다 곡이 더 좋다”며 만족해한다고, 멜로디는 맑고 깨끗한 서정이 넘친다, 곱고도 부드럽다. 신교사는 매년 신곡을 발표해 1997년에는 한국 음악 저작권협회에 등록한 곡만 64곡이다. 최근작으로는 , , , ,   등이 있다. 그는 작곡가협회 부회장, 동요 동인회 회장, 한국관악협회 부회장, 대한민국군악동우회 회장, 음협 이사 등을 맡고 있다.     한편 작사자 심봉석 씨는 상봉교역(相奉交易)이라는 조그마한 의류 수출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남녀 재킷 등 캐주얼웨어 전문이다. 그는 충남 공주군 탄천면 인양리 516번지에서 1941년에 태어났다. 서울사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작사 당시는 동도공고에 근무하며 미혼이었으나 그 후 서울사대 동기동창인 김말순 씨와 결혼했다. 학교 교단을 완전히 떠난 것은 1984년부터로 이 때 사업을 시작한 것   둥글넓적한 호인형의 심봉석 씨는 얘기에 이르자 꿈꾸는 표정을 지었다.   시인이 아니면서 지은 노랫말이 히트했던 지난날의 순수한 감정으로 돌아간 표정이다. “의 노랫말을 쓴 제 얼굴을 보자는 여성 팬들의 편지가 전국에서 쇄도해서 몇 년 전까지도 큰 곤욕을 치렀어요. 지금도 술집이나 다방에 다른 사람과 함께 가서 그들이 종업원들에게 이 분이 작사자라고 소개하면 종업원들이나 친구들이 불러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못하는 대로 을 부르기도 하지요” 신촌의 어느 술집 여주인은 의 열렬한 팬이어서 지금도 술값을 안 받는다고 웃음을 짓는다. 사업차 외국에 가면 교포들이 모인 자리에서 노래 부르라는 청을 받고 을 불렀다가 앙코르까지 받아 몇 번씩이나 부르곤 했다고 작사의 희비(喜悲)를 털어 놓는다.   그는 첫 작사인 의 히트에 자신과 용기를 얻어 ,등 몇 편의 가사를 지었다. 신교사가 곡을 붙인 는 고교 교과서에 ,은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돼있다.   신귀복 교사와 심봉석 교사는 1968년에 서로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됐으나 지금껏 1년에 서너번은  만나며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그 우정은 로 해서 더욱 깊어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둥근 얼굴 늘 미소짓는 얼굴이 비슷한 인상이다. 아마도 서로 상대이 얼굴에 대한 인상을 무심코 속에 그려 본게 아닐지...   한편 대중가요로 편곡돼 불리기도 한 은 그래서 대중가요로 아는 이도 있지만 대중가요는 결코 아니라고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강조한다. 끝     주1. 이글은 1998년 이향숙 님이 지으신 가곡의 고향을 옮겨온 글입니다.   주2. 가곡“얼굴”의 고향은 서울 마포 염리동 대원군 별장이었던 지에 있는 는 2004. 9. 21자로 서울디자인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 되었습니다. 학교주소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강로 44번지 (구 주소는 마포구 염리동 150번지)이며 참고하십시오.   [출처: 가곡의 고향/한국문원/1998년 이향숙저]   // 道軒 이경우 옮김               가곡 /얼굴 심봉석 작사 신귀복 작곡    1절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2절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빛 하늘나래 그름 속에 나비처럼 나르던 지난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 우리 3천만의 국민가곡이라고 해야 할 이 노래는  1967년 동도공고 재직시의 동료교사였던 심봉석 생물교사가 노랫말을  쓰고 申선생이 작곡한 선생의 대표작으로, 이제는 신귀복 선생이 음악  회에서 관례화되어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부르며 피날레  를 장식하는 고정 레파토리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한때 장르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 곡은 처음에 예그린악단의 서구장이 녹음하였고 뒤이어 소프라노  허순자가 녹음하였는데 1975년 어느날 가수 윤연선이 찾아와 데몬스  트레이션은 클래식풍으로 깔끔하게 노래하였는데 정작 출시음반은  대중가요풍으로 불러 일반대중의 큰 인기를 끌자 다른 가수들도 덩달  아 따라 불러 가요곡으로 알려져 클라식한 음악회에서는 성악가들이  레파토리로는 기피하는 경향마저 있었습니다.     작곡자 신귀복선생은 처음부터 전혀 그럴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전주교대에서 가르치던 천길량선생이 이곡을 가르치는 강의실을 이  학교의 학장이 보고 대학의 강단에서 어찌 대중가요를 가르치느냐고  힐난하였습니다. 이러한 논의에 신귀복선생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노래가 되는 단음계는 3가지로 나누어 지는데  (1) 대중가요가 되는 자연 단음계는 #나 b 기호를 쓰지 않고 작곡하며  (2) 서정가곡이 되는 화성 단음계는 #이나 b 기호를 이용하여 작곡하며  (3) 또 한가지 예술가곡이 되는 가락 단음계에서는 올릴 때에는 #를,      내릴 때에는 b을 붙여 작곡하므로 이곡의 악보를 보면 이론상으로      엄연한 가곡입니다.  그런데 申선생은 여기에다 참으로 중요한 한가지를 덧붙였습니다.   어떤 장르의 노래를 막론하고 모든 노래가   미성년 어린이가 노래 부르면 동요가 되고   일반 성년 어른들이 노래부르면 가곡이 되고  전공한 전문직업 성악가가 부르면 예술가곡이 되고  대중가요 가수가 부르면 대중가요가 되는 것이 전부이므로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노래를 불러 심금을 울리고 정서에 짜릿한  카탈시스를 맛보며 마음에 위로와 치유를 느끼며 이를 즐기는 것이  요체일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생활가곡의 대두입니다.  申선생은 1937년 1월 4일 경기도 안성군 구포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이 사회를 보거나 담화중에 비상한 기억력으로 음악가들의 생년  월일과 출생지의 번지까지 줄줄이 외우는데는 정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먹고 아무리 신귀복 선생님처럼 숭내내 볼려도 아는게  없으니 그저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4    "산에 사는 산사람은 말이 없다"... 댓글:  조회:2360  추천:0  2018-04-06
  + 문답법을 버리다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나무는 말을 삼간다  나무는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삼가는 것이다.  할 말 있으면 새를 불러  가지 끝에 앉힌다.  새가 너무 말을 많이 하면  이웃 나무의 어깨 위로  옮겨 앉힌다.  동네가 시끄러우면  건너편 산으로  휘잉 새를 날려보내기도 한다.  (강수성·아동문학가)  + 말  산에 사는 산사람은  말이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을  산에서 살다보니 말을 잃었다.  지저귀는 새소리 듣기 좋고  피고 지는 꽃들이 보기 좋고  산이 좋고, 물이 좋고  구름도 좋고  그 많은 것 어떻게  말로 다 하나  그저 빙그레 바라만 본다.  (정원석·시인)  + 고요함에 대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에 둘러싸인 작은 밭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플 때까지 괭이질하며  가끔 그 허리를  녹음이 짙은 산을 향해 쭉 편다.  산 위에는  작고 흰 구름이 세 조각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그래서 나는 고향인 도쿄를 버리고 농부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의견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흙은 고요하다.  벌이가 안 되는 것은 괴롭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야마오 산세이·일본의 시인이며 생명운동가)  + 난초 앞에서  무지가 난초처럼 조용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무지는 반드시 행위로 나타난다  이윽고 오늘 아침 난초꽃이 피어났다  괜히  밖에서 백합꽃도 피었다  긴 장마 동안  아무런 꽃도 필 수 없다가  오 무지여 암흑의 행위여 가거라  이 꽃들에게  할 말이 없을 때가  얼마나 영광인가  (고은·시인, 1933-)  + 경청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정현종·시인, 1939-)  + 침묵하는 연습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 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 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유안진·시인, 1941-)  + 묵언(默言)  절마당에 모란이 화사히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저 꽃의 문을 열고 있나  꽃이 꽃잎을 여는 것은 묵언  피어나는 꽃잎에 아침 나절 내내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말하려는 순간 혀를 끊는  비  (문태준·시인, 1970-)  + 묵언(默言)의 날  하루종일 입을 봉(封)하기로 한 날,  마당귀에 엎어져 있는 빈 항아리들을 보았다.  쌀을 넣었던 항아리,  겨를 담았던 항아리,  된장을 익히던 항아리,  술을 빚었던 항아리들.  하지만 지금은 속엣것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거꾸로 엎어져 있다.  시끄러운 세상을 향한 시위일까,  고행일까,  큰 입을 봉한 채  물구나무 선 항아리들.  부글부글거리는 욕망을 비워내고도  배부른 항아리들,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항아리들!  (고진하·시인이며 목사, 1953-)  + 침묵 수행   눈과 얼음으로  담벼락을 높이 둘러친  겨울숲이 안거에 들었다  봉쇄 수도원처럼  침묵으로 정진하고 있다  눈 내리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새 날아가는 소리도  멋모르고 숲속에 들어왔다가  얼어붙은 채 허공에 걸려있다  길도 끊기고  한 번 발 들이밀면  결코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무덤 같은 곳이라  저절로 숨이 턱턱 막히는 곳이다  겨울숲에서는  살과 살이 붙어서내는  화로 같은 말을 잃어버릴 것이다  뼈와 뼈가 부딪혀내는  칼날 같은 소리를 잊어버릴 것이다  겨울숲에  한참 앉아있으면  안거 끝내고 나가는  나무가 하는 말이라든가  바위의 소리라든가  눈 깜빡거리며 들을 수 있겠다  (김종제·시인)  + 말줄임표  글자들이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보았니?  글을 읽다  만난  말줄임표(……)  생각의 오솔길  걸어가고 있는 게지.  우리가  생각의 발자국  따라갈 때처럼…….  (심효숙·아동문학가, 1962-)  + 묵언(默言)   내 나이  어느새 쉰 셋  불혹의 고개 넘은 지  오래  이제 침묵으로  말할 때가 되었다  입으로 내뱉은 말  많은 날에는  마음 한구석이 왠지  허허롭고 편치 않다  앞으로 남은  세월에는  입은 바위처럼 무겁게  귀는 대문처럼 활짝 열고  마음은 깃털같이 가볍게  하루하루 살아야지  가슴속 깊이  푹 익은 얘기  말없이 눈빛으로 말해야지  (정연복, 1957-)   
3    "1,000억 재산이 그 사람 시 한줄만도 못해"... 댓글:  조회:2293  추천:0  2018-04-06
시인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야기   일제시대 시인 백석은 천재적인 재능과 훤칠한 외모로 당시 모든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설에 의하면 그가 길을 지나가면 여인들이 자지러졌을 정도라 했습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인, 기생 김영한과의 러브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 만큼이나 가슴이 애립니다.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1936년 회식 자리에 나갔다가 기생 김영한을 보고 첫 눈에 반하게 됩니다. 이 잘 생긴 로맨티스트 시인은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는 손을 잡고,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백석은 이백의 싯귀에 나오는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김영한에게 지어줬다고 합니다. 그렇게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됩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장애물이 등장합니다.  유학파에, 당대 최고의 직장인 함흥영생여고 영어선생 이었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켜 둘의 사랑을 갈라 놓으려 합니다.  백석은 결혼 첫날밤에 그의 연인 자야에게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리고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을 가자고 제안합니다. 그렇지만 자야는 보잘것 없는 자신이 혹시 백석의 장래에 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염려로 이를 거절합니다.  백석은 자야가 자신을 찾아 바로 만주로 올 것을 확신하며 먼저 만주로 떠납니다. 만주에서 홀로된 백석은 자야를 그리워하며 그 유명한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짓습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즈녁히 와서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동안이라고 믿었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맙니다.  해방이되고 백석은 자야를 찾아 만주에서 함흥으로 갔지만 자야는 이미 서울로 떠나버렸습니다.  그 후 38선이 그어지고 6.25가 터지면서 둘은 각각 남과 북으로 갈라져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후 백석은 평생을 자야를 그리워하며 북에서 1996년 사망하게 됩니다. 남한에 혼자 남겨진 자야는 대한민국의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을 세워 엄청난 재력가로 성장합니다. 훗날 자야는 당시 시가 1,000 억원 상당의 대원각을 조건없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를 합니다. 그 대원각이 바로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 '길상사'입니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했던 자야는 폐암으로 1999년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가 떠나기 전 1,000억원 상당의 재산을 기부했는데 아깝지 않냐란 기자의 질문에 자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1,000억 재산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  "내가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 고 하니  백석의 시처럼 눈이 푹푹내리는 날 백석에게 돌아가고 싶었나 봅니다. 첫눈이 양탄자처럼 쌓이는 새벽이 오면.... 응앙응앙 가픈 숨 몰아쉬는 흰나귀 타고 찾아올 자야를 기다리던 백석의 사랑에 가슴이 아려옵니다.  사랑하지만 떠나야 하고 때론 그리워해도 만날 수 없는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린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큰 기쁨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더 큰 욕심을 부리며 사는건 아닌지 반성해봅니다.  (자~ 백석과 김영한 그리고 보고 싶은 법정스님과 서울 북악산 기슭에 위치한 옛 대원각  현 길상사의 모습입니다.)          
2    [그것이 알고싶다] - 개는 "문명의 공간"속에서 산다... 댓글:  조회:4870  추천:0  2018-04-06
지구를 정복한        '사피엔스-개 동맹' 2018.03.29.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한겨레21]  동물 전사와 눈빛 교환하며 매머드 사냥 인간과 개의 3만 년 역사가 생태계를 바꾸다 중국 산시성에서 한 무리의 사냥개들이 주인의 지시에 따라 산토끼를 쫓고 있다. EPA 2011년 5월2일 파키스탄 북부 국경 지역인 아보타바드의 작은 마을. 굉음이 울리며 헬리콥터 두 대가 다가왔다. 헬리콥터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친 3층집 마당에 진입했고, 중무장한 미 해군 ‘네이비실’ 대원 79명을 차례로 토해냈다. 발이 4개 달리고 코를 킁킁거리는 동물도 있었다. 개였다. 오사마 빈라덴 제거 작전에 투입된 개는 독일 셰퍼드나 벨기에 말리노이즈였을 거라고 이틀 뒤 가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 군견에게는 빈라덴의 은신처를 발견하는 임무가 주어졌을 것이다. 3층에서 발견된 빈라덴은 곧장 사살됐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조 바이든 부통령,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인간과 개의 협동 작전을 지켜보았다. 사라진 네안데르탈인 2008년 12월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열린 제41회 사하라 국제페스티벌의 개막행사에서 아라비아 그레이하운드라는 사냥개 ‘슬루기’가 토끼사냥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아마 개가 최초로 인간 사회로 들어와 한 일 중 하나가 ‘사냥’이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정리되지 않은 견해가 학계에 있다. 개는 언제 가축이 되었는가? 개가 처음 인간에게 길들 때의 풍경은 어떠했나? 늑대와 개의 화석이 많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의 가축화는 여전히 수수께끼 중 하나다. 또 하나의 미스터리도 있다. 3만 년여 전 갑작스러운 ‘네안데르탈인 실종’과 ‘호모사피엔스 등장’이라는 인류사의 격변이다.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호모사피엔스는 유라시아 대륙에 진출한 뒤 홀로 살아남았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친 기후변화와 사냥감의 감소 속에서도 번성했다. 반면 그전부터 유라시아에 살던 네안데르탈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라졌다. 2015년 미국에서 출판된 에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고생물학자 팻 시프먼은 호모사피엔스의 옆에는 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호모사피엔스는 늑대와 비슷한 종을 사냥개로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시프먼이 ‘늑대-개’(wolf dog)로 부른 이 동물은 호모사피엔스보다 빨랐으며 냄새를 잘 맡았고 컹컹 짖어대며 도망가려는 사냥감을 잡아둘 수 있었다. 사냥꾼들은 더 많은 고깃덩어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주장은 대략 구석기시대 말부터 신석기시대 초인 1만8천∼1만2천 년 전에 개가 가축이 됐다는 주류 이론을 뒤집었다. 주류 이론에서 늑대는 유목하는 원시 부족을 쫓아다니거나 마을에 정주하는 이들의 청소동물(scavenger)로 살다가 개로 진화한다. 지금의 길고양이처럼 인간이 버린 음식을 먹고 살다가 인간 사회에 진입했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2009년 벨기에의 고예동굴에서 사육화한 늑대로 보이는 화석이 발견됐고, 방사능 연대 측정을 해보니 그보다 한참 전인 3만6천 년 전이었다. 이때라면 수렵채집인들이 사냥으로 먹고살던 구석기시대다. 그렇다면 이 동물의 쓰임새는 무엇이었을까? 시프먼은 고인류의 식량이던 매머드 대량 발굴터에서 이 동물이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그 시기가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진 직후라는 점에 착안했다. 그의 가설은 과감해진다. 유라시아로 진출할 때 호모사피엔스에게는 늑대 집단에서 교배해 만들어낸 개가 있었다. 개가 냄새를 맡고 사냥감을 발견해 쫓았고, 사피엔스가 올 때까지 포위하며 잡아두었다. 사피엔스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면 됐다. 개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개는 호모사피엔스가 사냥하고 던져주는 음식 덕분에 안정적으로 먹이를 공급받고, 한밤중에는 다른 경쟁자들의 공격에서 보호받게 되었다. 개의 처지에서 보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길들여진 게 아니었다. 인간과 동맹함으로써 종의 안녕과 생존을 지속한 것이다. 이 시기 급작스럽게 줄어든 매머드 개체 수는 획기적인 사냥기술 발전과 관련 있다고 시프먼은 설명한다. 사피엔스는 매머드를 사냥하며 경쟁자인 네안데르탈인과 육식성 포유류를 앞질렀다. 네안데르탈인은 경쟁에서 밀려나 도태됐다. 다른 육식성 포유류도 마찬가지였다. ‘사피엔스-개 동맹’은 지구 생태계를 바꾸었다. 개의 관점에서 역사를 본다면? 구석기시대 ‘사피엔스-개 동맹’이 지구 생태계에 변화를 몰고 왔다면, ‘인류세’라는 지금은 어떨까? 생물학자로 출발해 포스트휴먼 철학자로 거장이 된 도나 해러웨이는 현대사회에서 동물은 세 주체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첫째, 노동자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과 자본의 실핏줄이 되었던 말과 노새 그리고 현대 테마파크 산업의 돌고래까지, 이들은 노동하여 인간에게 이윤을 갖다바친다. 둘째, 상품이다. 펫숍의 기니피그, 고양이, 개 등 동물은 사고팔린다. 인간의 목숨값은 불의의 사고 때만 보험회사가 산정하지만, 동물의 목숨값은 언제나 ‘시세’가 정해져 있다. 셋째, 동물은 소비자다. 반려견과 반려묘는 시장에서 큰손이다. 그들이 제공받는 사료, 유기농 간식, 병원 치료, 펫시터 공유 서비스 등의 국내시장 규모는 1조8천억원에 이른다. 그들이 주는 ‘생명’의 활력과 교감은 산업을 창출하고 자본가와 노동자를 먹여살린다. 인간을 제외하면 개는 지구 생태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국에서 공식 통계로 한 해 6만 마리가 버려지지만, 다른 측면에서 개는 다른 종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가족’이라 하면서, 월 8800원에 ‘도그 티브이’를 틀어주고, 집에 없을 때는 ‘도그 시터’를 불러 보살피고, 죽으면 장례식을 치르고 화장해준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캘리포니아대학(UCLA)의 그레고리 오킨 교수는 2017년 학술지 에 개·고양이가 일으키는 기후변화 효과를 산정한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에는 개·고양이가 16억3천만 마리 산다. 이들의 사료를 만들 때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무려 6400만t이었다. 차량 1360만 대가 내뿜은 온실가스, 미국인 6200만 명의 음식을 만드는 데 쓰이는 에너지양과 같았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개와 고양이가 먹는 사료가 육식이기 때문이다. 공장식 축산은 온실가스의 주요 배출원 중 하나다. 개가 문명의 공범인 셈이다. 인간과 개의 공진화 영국 앨트카에서 2005년 열린 워털루컵 토끼사냥 대회에서 사냥개 두 마리가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토끼 한 마리를 쫓고 있다. 영국에선 2006년부터 사냥이 법으로 금지됐다. AP 연합뉴스 우리는 개에게 ‘유사 인격’을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가 생명을 대하는 방식은 분열증적이다. 개·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은 ‘의인화’하지만, 돼지나 닭 등 밥상에 오르는 동물은 ‘사물화’한다. 동물 삶의 디테일에서 전자는 과시의 대상이고, 후자는 은폐의 대상이다. 개가 이렇게 특별한 지위에 오른 이유는, 아마 인간과 함께 하면서 독특한 능력을 진화시켜왔기 때문일 것이다. 시프먼은 진화 과정에서 ‘하얀 공막’(눈의 흰자위)이 호모사피엔스와 개에게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당신의 개를 보라. 개는 당신이 무엇을 바라보는지 신경 쓴다. 눈빛을 읽어낸다. 개처럼 흰자위가 보이는 동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인간 등 일부 영장류와 개과 동물에서 발견될 뿐이다. 눈동자가 흰자위에 둘러싸여 있으면, 상대방이 시선을 파악하기 쉬워진다. 사피엔스와 개는 사냥에 성공하기 위해 숨죽이며 시선을 교환했을 것이다. 우리 몸에는 개와 함께한 흔적이 새겨 있다. 그레고리 오킨 교수는 반려동물의 온실가스 배출을 다룬 논문을 출판하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개 기르는 사람을 비난하는 게 아니니 오해 마시라. 다만, 개의 생태에 비쳐 시장에서 생산되는 육식 사료가 너무 많아졌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인류는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이래 이렇게 고기를 많이 먹은 적이 없었다. 진화 속도는 문명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진화의학자 마크 핸슨과 피터 글루크먼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의 몸은 아직 문명에 낯설다’. 그래서 성인병에 걸린다. 최대의 육식 시대를 사는 건 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희생자는 비좁은 공장식 농장에서 살다 도축되는 동물이다. 우리는 개가 ‘동물의 공간’에 살 거라 착각한다. 아니다. 개는 ‘문명의 공간’에 산다. 사피엔스가 동물 전사와 눈빛을 교환하면서 매머드를 사냥하기 시작한 3만 년 전부터, 그들은 인간과 함께 지구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 의미든. ///남종영 편집장 
1    그대들은 함경북도 사투리 노래 "명태"를 아는가... 댓글:  조회:3143  추천:0  2018-04-06
함경북도 사투리 노래  "명태" / 강산에 명태 하 하 하 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노래 되고 시가 되고  약이 되고 안주 되고  내가 되고 니가 되고  그댄 너무 아름다워요  그댄 너무 부드러워요  그댄 너무 맛있어요  감사합니데이  랩)) 내장은 창란젓 알은 명란젓 아가리로 만든 아가리젓  눈알은 굽워서 술안주하고 괴기는 국을 끓여 먹고 어느 하나 버릴것없는 명태!  그 기름으로는 또 약용으로도 쓴데지에이요(ㅡㅡ;)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노래 되고 시가 되고  약이 되고 안주 되고  내가 되고 니가 되고  그댄 너무 아름다워요요요  그댄 너무 부드러워요요요요  그댄 너무 맛있어요요요요요  잘먹겠습니데이~  명태!! 그 많은 유래중에 조선시대 단정돈 명천 지방에 사는 태씨성의 어부가 처음 잡아서 해서리 명천의 명자! 태씨성을 딴 태자! 명태라고 했데제이니~(ㅡㅡ; 역시.. 힘듭니다.;;;;)  *간주*  그댄 너무 아름다워요요요요요요  그댄 너무 부드러워요요요요요요  그댄 너무 맛있어요요요요요요요  고맙습니데이  랩)) 이거는 먹고도 죽지(?!) 겨울 철에 잡아 얼린 동태  3, 4월 봄에 잡히는 춘태  알을 낳고서리 살이 별로 없어 뼈만 남다싶이한 심태(ㅡㅡ;;)  냉동이 안된 생태 겨울에 눈맞아 가며 얼었다 녹았다 말린 황태  영걸이 어디갔니 (영걸이는 강산에의 본명입니다)  (..태, ..태, ..태.. ....ㅡㅡ;)  이 밖에도 다른 잡는데 방법에 따라 지방에 따라 뭐뭐 이래 많은지..  영걸이 왔니 문희는 어찌 안왔니  아바이마!! 밥잡수소 예~~  ==========================     평양공연 예술단 합류…"북한공연은 12년만…어머니 삶이 한국 근현대사"    싱어송라이터 강산에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설레고 만감이 교차합니다. 실향민인 부모님이 살아생전 못 가보신 곳을 전후 세대인 제가 가수가 돼 그 역사 속으로 가는 것이니, 뭉클하네요." 싱어송라이터 강산에(55)는 4월 1일과 3일 평양에서 열릴 우리 예술단의 공연에 합류한 소감을 묻자 "내 어머니의 삶이 한국 근대사"라며 감회가 누구보다 남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6년 금강산에서 열린 'CBS 금강산콘서트'에 출연해 북한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평양에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그때는 개성공단도 열려있고 지금처럼 큰 정치적인 배경은 없었다. 그저 북한에서 공연한다는 생각에 설레었고, 우리 문화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흥분됐었다"며 "하지만 이번엔 정치적으로 초민감 한 상황에서 평양이란 북한의 중심부로 가니 그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예술단 평양 공연에 합류한 강산에[연합뉴스 자료사진]     그가 만감이 교차하는 배경에는 집안의 남다른 역사가 숨어있다. 충청도 출신인 그의 어머니는 함경도로 시집을 가 1949년 첫 아이를 출산했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어머니는 남편과 생이별하고서 아이만 둘러업고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목숨을 건 피란을 해 거제에 정착했다고 한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인 아버지 역시 전쟁으로 피란 통에 처자식과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거제에 둥지를 틀었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같은 피란민 처지인 어머니와 가정을 꾸렸고 거제에서 강산에와 그의 누나가 태어났다. 그는 "14살 차이인 우리 형은 갓난아기 때 엄마 품에서 내려왔다"며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일본 강점기와 한국전쟁, 피란 시절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한 마디로 내 어머니의 삶이 한국의 근현대사"라고 설명했다. "어머니는 전쟁 얘기만 나와도 몸서리를 치셨어요. 포탄이 날아다니고 사람들이 죽는 아비규환에서 생을 지내왔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요. 어머니 톤으로 하자면 '아이고 야야, 아이고 야야'라며 말문을 잇지 못하셨죠. 영상이나 자료를 통해 역사를 간접적으로 접했지만, 트라우마로 신경성 약까지 드시는 어머니의 삶을 옆에서 보면서 그 공포를 몸으로 가슴으로 체득하게 됐죠. 그래서 어떤 명분이 있어도 전쟁은 반대입니다." 그러면서 강산에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쓰면서 대표곡 '...라구요'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 내 어머니 레파토리/ 그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남은 인생 남았으면 얼마나/ 남았겠니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어머니/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번 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라구요' 중) 12년 전 금강산 공연에서 '...라구요'와 '넌 할 수 있어',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등 7~8곡을 부른 그는 이번에는 2~3곡을 부를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라구요'는 꼭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그쪽(북측 실무단)에서 '넌 할 수 있어'와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 괜찮다고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명태'란 노래를 꼭 부르고 싶다. 함경도 사투리가 나오는 곡으로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라고 소개했다. '영걸이 왔니 무눙이는 어찌 아이 왔니/ 아바이 아바이 밥 잡쉈소 어/ 명태 명태 라고 흠흐흐흐 쯔쯔쯔/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명태' 중) 그는 선곡이 확정되면 평양 무대에서 동행할 다른 기타리스트와 함께 '투 기타'로 연주하며 노래할 계획이다.   ======================= “만찬에서 북측 음악인들이 술을 권하며 ‘... 라구요’(1993)에 대해 많이 묻더라고요.” 가수 강산에는 지난 3일 북한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예술인의 합동 무대 ‘우리는 하나’ 공연 후 통일전선부 소속 초대소인 미산각 만찬에서 ‘...라구요’와 ‘명태’에 대한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강산에가 ‘우리는 하나’와 지난 1일 평양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북 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 공연-봄이 온다(‘봄이 온다’) 공연에서 부른 두 곡은 모두 실향민 부모님의 사연을 담은 노래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강산에 부모님의 고향은 함경도. 강산에는 함경도 사투리를 활용해 만든 노래 ‘명태’를 1일 공연에서 불러 북측 음악인들의 관심을 샀다. 강산에는 4일 한국일보에 “만찬에서 만난 북측 음악인들이 ‘명태’ 내레이션 부분을 ‘랩’이라고 부르며 ‘그 부분이 좋다’고 하더라”고 했다. ‘조선시대 함경도 명천 지방에 사는 태씨 성의 어부가 처음 잡아 해서리 명천의 명자 태씨 성을 딴 태자 명태라고 헤떼이제니’ 부문에 흥미를 보였다는 설명이었다. 가수 강산에가 3일 북한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예술인의 연합무대 '우리는 하나' 에서 '....라구요'를 부르다 돌아가신 이북출신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울먹이고 있다.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강산에는 3일 공연에서 ‘....라구요’를 부를 때 결국 눈물을 떨궜다. 고향을 잃은 서러움이 절절하게 묻어난 노래에 북측 관객도 울었다. 강산에는 “내가 말을 못 잇고 있으니 관객들이 손뼉을 쳐 응원해줬다”고 고마워했다. 북한 관객의 응원에 힘입어 강산에는 다음 곡인 ‘넌 할 수 있어’를 무사히 마쳤다. 강산에는 “북한 관객이 응원해 줘 더 힘을 내 노래했다”고 말했다. 강산에는 지난 1일 공연 사전 연습을 하면서부터 “부모님 고향에 와 있다는 실감”을 했다. 무대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지만, 3일 마지막 무대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강산에는 “‘...라구요’를 부르고 말을 하는데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정말 많이 나더라”며 눈물을 떨군 이유를 들려줬다. 강산에는 2006년 금강산에서 공연한 적은 있지만, 평양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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