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1월 2017 >>
   1234
567891011
12131415161718
19202122232425
2627282930  

방문자

검색날짜 : 2017/11/10

전체 [ 17 ]

17    세계에서 가장 몸값 높은 화가 - 잭슨 폴락 댓글:  조회:3473  추천:0  2017-11-10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잭슨 폴락, 20세기 문화의 아이콘이 되다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잭슨 폴락은 살아생전에 유럽의 현대 미술 화가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았던 최초의 미국 화가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나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한 그는 1928년 로스앤젤레스의 메뉴얼 미술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폴락의 작품들은 전형적인 미국 서부 풍경에 기초한 작업과 구상 회화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서부에 위치한 자신의 고향을 여행하고 그곳의 풍경을 보면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폴락의 미술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은 멕시코의 벽화가인 의 작업실에서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페인트를 붓고 떨어뜨리는 것이 예술적 기법일 수도 있으며, 그림 표면에 에나멜 페인트와 래커, 모래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당시 폴락은 알코올 중독, 우울증과 싸우는 중이었습니다. 1937년에는 정신병원에 넉 달간 입원해 심리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후 그의 작품들은 추상적인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페인의 현대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와 후안 미로의 작품들에서 따온 모티프들과 시케이로스로부터 배운 기법들을 통합하여 자신의 그림에 이용하였습니다.   폴락은 1945년 여성화가 리 크래스너와 결혼해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프턴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헛간을 개조해 작업실로 꾸미고 이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우선 그는 커다란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사방을 돌며, 캔버스 위로 물감을 흘리고, 끼얹고, 튀기고, 쏟아 부으면서 몸 전체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은 떨어뜨린 물감의 흔적이 층위를 쌓아가면서 화면의 밀도를 높여감과 동시에 작가의 다이내믹한 제작행위를 직접 캔버스에 기록하는 것이었으므로 ‘액션 페인팅’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폴락은 미국 미술계의 첫 번째 슈퍼스타로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1947년부터 1952년까지의 작품은 미술계에 대변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1948년 뉴욕의 금세기 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가졌고, 1950년에는 빌럼 데 쿠닝, 아실 고키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 참여하는 등 예술적인 열정을 불태웠으나, 알코올 중독과 창조성의 한계에 가로막힌 그는 육체와 정신의 쇠락으로 방황하다 1956년 만취상태에서 과속으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고 전해집니다.   폴락은 평소 커다란 크기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넓은 공간에 캔버스를 놓고 사방에서 작업했습니다. 그는 막대기나 팔레트나이프를 이용해 캔버스 위해 페인트를 붓거나 떨어뜨리기(드리핑)를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모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던 폴락은 그들의 방법을 착안해 작업에 이용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왼손에는 페인트 통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팔레트나이프 등을 이용해 재빨리 페인트를 튀기며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것이었습니다. 폴락이 말하길, 그림은 그림만의 독자적인 운명을 갖지만, 최종 작품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예술적인 의지에 좌우된다고 말했습니다.   폴락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술계를 놀라게 할 회화들을 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폴락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혼란스러운 작품을 만들 뿐이라고 비평하기도 했지만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같은 저명한 비평가들은 “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라며 폴락의 재능을 칭송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팝 아트 같은 뒤이어 등장하는 미국의 미술 운동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폴락은 비로소 20세기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20세기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잭슨 폴락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천재적이면서도 알코올에 중독되어 기벽을 일삼던 폴락과 그의 아내 크레이즈너의 이야기를 주된 소재로 삼았습니다. 폴락에게 그녀와의 사랑은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예술적 진폭을 더욱 크고 넓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그의 작품들을 보면 조금은 특별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저에게 왜 예술가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을까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져준 영화이기도 합니다. 1912년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태어난 폴락은 아들 5형제 중 막내였는데 화가가 꿈이었던 어머니 덕에 일찍부터 미술에 눈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공황 시절에는 공공사업진흥국(WPA) 연방미술사업계획에서 화가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초창기만 해도 폴락의 작품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폴락의 작품들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풍경화나 구상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폴락의 작품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 멕시코의 벽화가인 를 만나면서 한 단계 도약합니다. 캔버스에 유화 채색이라는 고전적인 방법 대신 다양한 기법들에 눈을 뜨게 된것입니다. 운좋게도 그는 당대 미술계의 유명한 후원자 페기 구겐하임을 만나 1943년에 개인전을 열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는 이후 이젤에 고정된 캔버스를 버리고 바닥에 캔버스를 펼쳐놓고서 캔버스 위로 물감을 뿌리고, 쏟으면서 몸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게 바로 액션 페인팅, 드리핑(dripping)이라는 기법입니다. 드리핑이란 붓이나 주걱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칠하거나 바르는 것이 아니라, 그림물감을 캔버스 위에 흘리거나 붓든지 또는 튀겨서 제작하는 회화기법을 말합니다. 폴락은 이 드리핑 기법으로 안료를 직접 캔버스에다 흘림으로써 얻어지는 우연적인 표현 효과를 성취하였습니다. 폴락의 드리핑 기법은 다다이스트들의 오토마티슴(회화나 시에서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기법)과 흡사한 점이 많으나 그 궁극적인 목표가 회화의 새로운 형식적 요소의 개발이라는 점과 정신 보다는 육체의 적극적 활용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드리핑 기법은 잭슨 폴락, 하면 떠오르는 그의 전형적인 작품 양식이기도 합니다. 층층이 다른 물감을 사용하면서 그 물감들이 우연하게 번지고 퍼지며 만들어내는 흐름과 윤곽은 회화를 미지의 카오스 상태로 밀어넣어 그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느낌을 주는 회화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린버그를 필두로한 미국 비평계는 폴락의 드리핑 행위를 보고 다분히 미국적인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즉, 미국인들의 개척정신과 남자다움등으로 상징화된 폴락의 예술 행위 뒷면에는 백인우월주의의 폭력성도 같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새로운 사조를 이끌어낸 폴락은 미술계의 인기스타였습니다. 추상표현미술주의의 선구자였고,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화가였습니다. 미술계에 긍정적인 큰 반향을 일으키고 여러 번의 개인전을 열고 비엔날레에도 참여했던 폴락이었지만 알코올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창조의 고뇌로 고통받는 약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1956년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했으니 그가 좀 더 오래 살아남았다면 현대 미술계가 어떤 진전을 겪었을지 또 모를 일입니다. 지난 2006년 폴락의 작품 한 점이 1억 4천만 달러에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생전에는 가장 위대한 미국의 화가였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몸값 높은 화가이기도 한 잭슨 폴락, 어지럽고 난해하기만한 그 물감의 폭풍 속에서 잭슨 폴락의 액션페인팅을, 그 몸짓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가치디자인그룹 SY Kim     빌럼 데 쿠닝(1904~1997)은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 추상 표현주의 화가다.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는 즉흥성과 유연성, 긴장감  이 감도는 화면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전통적인 회화의 여성이미지와 대비되는  연작은 그로테스크하고 부정적인 이미지  로 대중과 미술계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는 잭슨 폴록과 더불어 액션 페인팅의 거장으로  불리워지나 폴록과는 달리 그의 작품 대부분이  형상이 묘사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인물을 변형시키거나 거의 추상에 가까운 묘사를  하고 있지만, 그는 인물이나 풍경과 같이 재현적인  요소들을 고수하였으며, 이는 구상과 추상사이의  긴장감, 유연성, 즉흥성을 드러내보여 주었다 [출처]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작성자 어니
16    [이런저런] - 200만원짜리 그림 = 1800억짜리 그림 댓글:  조회:2424  추천:0  2017-11-10
200만원에 팔아넘겼던 그림이 1800억짜리 진품이었어요 (ZOGLO) 2017년11월10일  연합뉴스   도둑맞았던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의 명화 'Woman-Ochre'가 31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9일(현지 시간)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삼촌 부부의 유품을 정리하던 론 로즈먼(Ron Roseman)이 놀라운 발견을 했다고 전했다.   당시 뉴멕시코에 있는 리타(Rita)와 제리 얼터(Jerr Alter)의 집을 정리하던 론 로즈먼은 남은 물건을 골동품상에게 팔았다.   그는 삼촌 부부의 침실에 있던 그림까지 총 합해 2,000달러(한화 약 220만원)에 남은 물건들을 넘겼다.   이틀 후 그는 FBI의 연락을 받았다. 알고 보니 그가 팔았던 그림이 추상표현주의의 창시자인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의 도둑맞았던 작품 'Woman-Ochre'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좌) Twitter 'Ron Roseman' / (우) UAMA   해당 작품은 가치가 무려 약 1억 6,500만 달러(한화 약 1800억 원)에 달하며, 지난 1985년 아리조나 뮤지엄 오브 아트 대학(UAMA)에서 도둑맞은 것이다.   CCTV가 없던 당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녀가 그림을 훔쳐갔고 두 사람의 몽타주가 현재까지 UAMA에 빈 캔버스와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론은 삼촌 부부가 몽타주와 무척 닮았다고 증언했지만, 그들이 범인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몇십 년간 포기하지 않고 범인을 추적했던 브라이언 시스톤(Bryan Seastone) 조사관은 드디어 돌아온 작품을 보고 기쁨을 표현했다.   그는 "이 사건은 30년간 미스터리로 남았었다"며 "마침내 그림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UAMA   박물관 측은 그림의 훼손 여부를 살핀 뒤 금고에 보관할 예정이다.    한편 'Woman-Ochre'는 아리조나 뮤지엄 오브 아트 대학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작품 중 하나로 오일 캔버스에 여성을 묘사한 그림이다.   잭슨 폴락(Jackson Pollock)과 함께 액션 페인팅의 대가로 뽑히는 빌럼 데 쿠닝의 '여성'을 연속해서 그린 작품 중 하나이며, 2006년 시리즈 중 한 작품인 'Woman III'가 1억 3,000만 달러(한화 약 1500억 원)에 경매된 바 있다. ///인사이트 ========================== 빌럼 데 쿠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빌럼 데 쿠닝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 1904년 4월 24일 - 1997년 3월 19일)은 20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이다.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추상표현주의의 화가로 구상도, 추상도 할 수없는 표현과 격렬한 필촉이 특색이다. 드 쿠닝은 잭슨 폴락과 대등한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인 작가이고, 추상표현주의의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서, 20세기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생애[편집] 1904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사춘기에는 상업미술 회사에서 일하는 하면서, 로테르담 미술공업학교의 야학으로 공부했다. 네덜란드에 있었던 시기에 몬드리안 등의 "더 스테일" 운동을 접했다. 1926년 미국으로 건너와 이후 미국에서 활동한다. 1927년경 아르메니아에서 온 화가 아실 고치와 알게 되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드 쿠닝은 1930년대 중반까지 상업 미술 작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또한, 마크 로스코 등 다른 추상화가들과 함께 WPA (공공사업 촉진국)의 연방 미술 계획 업무에 종사했다. 연방미술계획은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화가들에게 공공건물의 벽화 제작 등을 위촉했던 곳이다. 1948년, 뉴욕 이건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다. 1940년대 경부터 드 쿠닝은 인물 표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195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여자" 시리즈가 잘 알려져 있다. 폴록의 "드립핑"(물감을 뚝뚝 떨어지는) 회화와 달리 데 쿠닝이 그리는 "여자"는 캔버스에 붓으로 그린 것이지만, 감정의 향하는 대로, 붓을 놀린 것처럼 보이는 화면은 거의 추상에 접근하고 있다. 그 후 화면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를 배제한 추상적인 작품을 그렸던 시기도 있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다시 "여자"를 테마로 작품을 만들어 냈다. 대표작[편집]《발굴》 (1950)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여자와 자전거》 (1952-53) (뉴욕 휘트니 미술관) ====================================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 1904년 4월 24일 - 1997년 3월 19일)은 20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이다.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추상표현주의의 화가로 구상도, 추상도 할 수없는 표현과 격렬한 필촉이 특색이다.   드 쿠닝은 잭슨 폴락과 대등한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인 작가이고, 추상표현주의의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서, 20세기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5    [이런저런] - 앞굴러가기 = 20m = 15.54초 = 기네스북 기록 댓글:  조회:3110  추천:0  2017-11-10
앞구르기로 20m를 16초 만에 …20대 모델 기네스 경신 (ZOGLO) 2017년11월10일  중국의 한 20대 모델이 앞구르기만으로 20m를 약 16초 만에 주파해 새로운 기네스북 기록을 세웠다. 지난 9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 등 외신들에 따르면 앞선 6일 패션위크가 열린 중국 베이징의 한 행사장 런웨이에서 류펑(26)이 앞구르기만으로 20m를 15.54초 만에 달려 기네스북 기록을 경신했다. 기존 최고 기록은 영국의 아티스트 레오라니 프랑코가 2013년에 세운 17.47초였다.   관련 영상 캡처. 다만, 이들의 앞구르기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등’부터 땅에 대는 방식이 아니다. 가슴을 땅에 대고 다리를 위로 들어 올려 발가락부터 땅에 대는 순서다. 평균 이상의 유연함을 자랑해야 선보일 수 있는 기술인 셈이다. 도전을 생각했을 때부터 류펑은 자기 몸이 얼마나 유연한지 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도 자기가 세계기록을 깰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신기록 수립 사실을 알고는 무척 좋아한 것으로 알려졌다. 류펑은 “앞구르기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마다 내가 오래도록 기억되는 사람이기를 바란다”고 유쾌하게 말했다. ///세계일보  
14    [이런저런] - 쇠못 639개나=1.3kg 먹은 사람 댓글:  조회:2723  추천:0  2017-11-10
배 아파 병원 갔더니… 배 속에서 쇠못 639개 발견 (ZOGLO) 2017년11월10일  사진=데일리메일 복통을 호소한 남성의 배 속에서 길이 5㎝의 쇠못 639개가 발견됐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지난 3일(현지시간) 인도에 거주하는 프라딥 쿠마르 달리(48)가 최근 한 병원을 찾았다가 배 속에 있는 쇠못 639개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복통을 호소하던 프라딥은 2주전 병원으로 실려 왔고, 엑스레이 등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프라딥의 위 안에는 뾰족한 쇠못이 잔뜩 들어 있었다. 또 대량의 흙들도 함께 발견됐다. 다행히 위를 뚫고 나온 쇠못은 하나도 없었고, 의료진은 프라딥의 위 일부분을 절개한 뒤 자석을 이용해 하나씩 못을 꺼냈다. 사진=데일리메일 인도 캘커타 대학병원 의사 시드하르사 비스와스(Dr Siddhartha Biswas)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복부가 비정상적으로 커져 있었고, 못으로 가득 차 있었다"며 "다행히 위를 뚫고 나온 못은 한 개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수술을 통해 꺼낸 못은 모두 639개, 무게만 해도 무려 1.3㎏다. 프라딥은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쳐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프라딥은 조현병을 앓고 있으며, 식용 불가능 한 물건들을 먹는 특이한 식습관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일보
13    [쉼터] - 바다야 파도야 우릴 부른다... 댓글:  조회:4731  추천:0  2017-11-10
  살아 있는 산호초를 만날 수 있는 환상의 섬 오키나와 따뜻한 것이 그리워지는 겨울. 그래서 사람들은 유독 겨울에 동남아 여행을 떠나는 모양이다. 비행기로 2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키나와는 국내 관광객에겐 생소한 섬. 살아 있는 산호초를 간직한 환상의 섬 오키나와는 동서양의 문화와 다채로운 해양 스포츠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작고 아름다운 섬이다   비취빛 바다, 작열하는 태양의 필리핀 세부 산호로 둘러 쌓인 에매랄드 빛 바다, 원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순수 전통 가옥과 큰 눈을 깜빡이며 여행객을 맞는 필리핀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순수, 필리핀은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오랜 여운을 남긴다. 코르도바, 그리고 바디안… ‘남국의 여왕’이라 불리는 필리핀의 섬 세부   오봇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태국 크라비 최근 아나운서 신동진·노현희 커플이 다녀와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크라비는 방콕에서 남쪽으로 814㎞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방콕, 파타야 등 유명 휴양지에 비해 아직까지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오붓한 허니문을 즐기기에는 그야말로 제격인 곳.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방콕까지 5시간 30분. 방콕에서 다시 비행기로 한 시간이 걸린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생각하는 내성적인 커플이라면 조용한 섬, 크라비에 금방 반하고 만다   지상천국을 꿈꾸는 낭만파, 필리핀 엘니도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은 낭만파 신혼부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여행지는 엘니도. 마닐라에서 남서쪽으로 430㎞ 떨어진 곳에 있는 엘니도는 스페인어로 ‘제비가 있는 섬’ 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엘니도는 팔라완 섬 북부에 있는 엘니도 마을과 그 앞바다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 약 500개를 기칭하는 말이지만, 신혼여행지로서는 해양보존 구역 내에 위치한 2개의 리조트 미니룩과 라겐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평온한 휴식제공터, 태국 후아힌 방콕에서 남서쪽으로 15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휴양지 후아힌. 태국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관광지인 방콕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관광천국이라면, 후아힌은 평온한 휴식을 주는 낙원과도 같은 곳이다.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고 자연의 훼손이 적은 반면, 최고급 리조트 시설이 갖춰져 있어 위락시설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것. 자연 그대로의 순수를 만끽하면서 다양한 해양스포츠가 지루함을 덜어주는, 휴식과 관광이 접목된 최적의 여행지라 할 수 있다.   유럽인이 가장 선호하는 휴양지로 알려진 신비의 섬 발리 이슬람신자가 90% 이상인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주민 대부분이 힌두교신자들인 발리는 신과 인간, 문명이 공존하는 독특한 느낌으로 사랑받는 허니문 여행지다. 세계적인 휴양지답게 아름다운 리조트들이 모여 있는 반면, 섬의 중앙에 있는 아궁산을 중심으로 사원들이 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발리의 힌두 문화는 여는 휴양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국적인 매력을 풍긴다.   모래에 물에 자연에 나를 맡긴다, 일본 가고시마 일본 열도 최남단의 가고시마는 서울에서 비행기로 1시간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인구 1백80만명의 작은 도시이다. 연중 18℃ 내외의 따뜻한 기온, 야자나무 등 아열대성 식물들이 남국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시내 중심부엔 활화산 사쿠라지마가 우뚝 솟아있다. 이 때문에 흰 눈 대신 화산재가 1년 내내 흩날린다   볼거리&놀거리 지천, 호주 골든코스트 해외여행 경험이 많아 웬만한 곳은 시들하게 느껴지거나 새로운 곳에서 관광다운 관광을 즐기고 싶은 허니무너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는 호주의 골드코스트. 호주의 대표적인 관광지 퀸스랜드의 브리즈번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으며, 무려 40㎞에 이르는 아름다운 해안을 자랑하는 천혜의 휴양지다. 아열대 지역에 속해 항상 따뜻하고 맑은 날씨를 자랑하는 골든코스트는 연중 3백일 이상 맑은 날이 계속된다. 해변, 수영장, 기타 모든 시설이 연중 개방되어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신혼부부들에게 1년 내내 최대의 지상낙원이 되어주는 곳이다   한가로운 해변과 이국적인 리조트에서의 휴식, 아로마 적당히 여유롭고 적당히 볼거리도 있는 관광은 없을까? 넉넉하면서도 값싼 먹거리와 화려하면서 방대한 규모의 불교 사원, 시끌벅적한 수상시장 등 무궁무진한 볼거리, 한가로운 해변과 이국적인 리조트에서의 휴식과 귀족적인 분위기의 아로마 마사지…. 마음과 몸의 아름다움을 찾는 스파 여행    괌 자체는 최적의 휴양지다 테러 여파로 미국령인 괌 출입국이 간단치는 않다. 입국에서부터 기분이 언짢을 수 있을 정도. 미국비자를 받아 놓은 사람들도 지문과 시진 확인 절차를 거친다. 15일 이내 관광객들은 비자가 필요없지만 성수기엔 입국절차가 2시간까지 걸리기도 한다. 출국시에도 부치는 짐을 공항직원이 엑스레이로 꼼꼼히 검사하고 간혹 집을 수색당하는 경우도 있다   수마트라의 보물 니아스(Nias) 원시적인 바다, 울창한 열대림, 적적하리만치 조용한 해변, 아주 가끔 씩 해변의 울창한 야자수 사이로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망중한을 즐기려는 듯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만을 응시한 채 모닥불 옆에 앉아있는 이방인, 그리고 그 뒤로 높은 파도 위를 미끄러지며 환호하는 써퍼들의 구릿빛 얼굴과 하얗게 드러난 이…. 일상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한가로운 여유와 원시적인 낭만을 갖고 싶은 여행자들에게 더 없이 완벽한 조건을 지닌 곳. 그런가 하면 매년 여름 세계 최고수준의 파도타기 대회가 열려 세계각국의 선수들이 이곳의 원시적인 바다와 자연적인 환경에 매료되어 방문을 거듭하는 곳.   자연이 숨쉬는 원시적인 휴양지, 띠오만 섬 프로펠러의 굉음이 멈추고 이윽고 띠오만에 도착했다는 기내 안내방송이 나오자 가방을 챙기려는 승객들의 손놀림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소형 여객기만 이착륙이 가능한 조그만 활주로, 그리고 시골의 간이역과 같은 작고 한가로운 공항청사가 이곳이 아직까지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소규모의 휴양지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 했다   ‘필리핀 남부의 여왕’ 세부 후텁지근한 아스팔트의 열기가 금세 피부로 느껴진다. 인천공항에서 4시간 남짓 날아간 필리핀 세부 막탄공항. 마닐라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한국에서 필리핀 직항로가 있는 공항이다. 2년전 직항편이 생긴 이후로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세부는 제주도의 2배반 크기로 본섬과 국제공항이 있는 막탄섬으로 이뤄져 있다. 막탄섬은 1521년 마젤란의 상륙으로 필리핀에서 가장 먼저 서양문명이 전달된 곳이기도 하다   딱! 둘만(요트속), ‘천국의 빛깔’ 타히티 타히티는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색깔의 바다를 가진 섬이다. 산호와 바다의 깊이, 하늘 빛깔, 구름, 햇볕의 각도에 따라 바다 색이 달라진다. 새하얀 산호가 그대로 비치는 연한 푸른색부터 옥색, 청자색 등 맑고 정갈하고 화려한 푸른색들이 스펙트럼처럼 띠를 이루고 있다   온천·호수·단풍, 홋카이도 눈의 고장, 스키 천국으로 알려진 일본열도 최북단 섬. 그러나 사계절 뚜렷한 천혜의 자연공원. 특히 나카야마토계곡의 가을단풍, ‘온천 백화점’이라 불리는 다양한 수질의 노천온천은 세계적이다.   기타        
12    시의 령혼이 빛나고 있는 곳은 실재계, 상징계, 영상계에 있다 댓글:  조회:1872  추천:0  2017-11-10
4.하이퍼시는 현실이 아니라 실재를 촉구 /최룡관     하이퍼시는 현실을 추구하는것이 아니라 실재를 촉구한다. 이말은 아주 간단한 말같지만 의미심장한 말이다. 시에서의 현실은 실재를 위한 받침돌과 같은것이다.  시는 현실계에 의하여 생기는것이 아니라 실재계에 의하여 생기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생활에서 오지만 생활그대로가 아니다는 말로 풀이할수 있다. 자크 라캉은 삼위체라는 리론으로 실재계를 말하였다. 삼위체란  실재계, 상징계, 영상계라는 말이다. 이 론의대로 하면 시에서  현실이라는 언어는 값이 가는 언어가 아니다. 시는 현실인것이 아니라 실재계, 상징계, 영상계에 속하는 문학이 된다. 삼위체라는것은 불가분리의 개념이라고 할수 있다. 시를 쓸 때 대상을 정하고 그에 대응하는  다른 대상 즉 이미지를 생각하는것은 상상계라 할수있고, 상상하면 새로운 대상을 얻는 순간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상징계(혹은 영상계)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의 욕망은 한차의 상징계에서 끝나는것이 아니라 또 다른 대상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것을 실재계라 한다. 그러니 실재계란 하나의 상징을 정하는 일이 아니라 여러개의 상징을 얻으려는 욕망이라고 할수있다. 그래서 실재계는 끝이 없다고 해야 마땅하다. 하이퍼시는 바로 이 실재계를 만들어내는 작업일것이다. 시에서 실재계는 재구성이라는 단계를 거쳐서 체현되는것이라고 하겠다. 재구성이라는것은 사물을 보이는대로 느끼는대로 있는 그대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둔갑시키거나 한사물의 사실을 다른 사물의 운동으로 대체하는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되면 라캉이 말하는 삼위체에 도착하게 될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라고 자크 라캉은  20쪽에서 밝히고 있다. 시로써 말해보자   피겨 쏘나타    메일 내용 영하의 파도는 지느머리에 칼날을 세운다  칼날은 레코드의 바늘이다  영하의 파도는 불협화음이다 금녀지 덩굴줄기에 접목된  옥송골의 발톱은  벼랑을 넘을 때마다  파란날이 번쩍이고  수만번의 거절은 옥의 티를 일어낸다 누운 절벽은 끝내 등돌려 둥지되고  돌고래 날치 갈매기를 연이어 부화한다 음률에 짜여진 몸짓  피아노의 건반을 오르내리 구르며  옥타브의 협곡 에베레스트빙하를도 하나 하나 넘는다 새기고 새긴 얼음조각에서 매화꽃이 피어나  쏘나타의 소리줄에 매화연이 날리고 지구촌 안방마다 매화연(宴)에 취한다 숫돌과 칼의 화음은 서슬이 푸르다            ㅡ강동한 전문   이 시는 제2회 윤동주문학상을 획득한 작품이다.  미국맨하탄에서 료리사들의 세계적인 료리경기가 열리였다. 료리사인 시인은 그 경기를 보고 이 시를 썼다고 한다. 필자는 자크 라캉의 삼위체에 맞는 작품이 아닐가 생각된다. 상상이 강렬하며 이미지들은 무의식의 산물들이다. 행마다 변형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들이 창출된다. 뒤의 이미지는 앞의 이미지를 밀어버리며 사물들이 파도처럼 사품치며 미끄러진다. 거이 30개의 이질적인 물질들이 야릇하게 짝을 지으면서 서로 어울리는가면  분리되고 도약한다. 나타나는가 하면 사라지고, 소용돌이를 이루는가 하면 흘러가버린다. 어느것도 강자가 없다. 강해졌다가 약해지고 높이 떴다가 떨어지고 앞에 섰다가 뒤로 밀린다. 어느것도 현실이 아니다. 죄다 가상을 이루어 부재를 향하여 질주한다. 어느것도 모방스러운것은 없다. 재조직되고 재구성되고 변형되며 생성된다. 중심도 없고 주체도 없다. 어느것이나 다 곁이고 겉이고 변죽이다. 이 시를 꽃밭이라면 여러가지 모양과 여러가지 색갈의 꽃들이 피여있는 꽃밭이다.  강동한은 미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시인이고 김은자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시인이다. 아래에 김은자의 시를 보기로 하자.   치과의사는 하얀 가운을 입고 끌을 꺼냈다 어제밤 나는 썩은 이에서 푸른 싹이 돋는 꿈을 꾸었다 치과의사는 음악이 흐르는 동안 이빨을 뽑자고 했다 나는 그 음악을 잡아 뽑은 자리에 심는다 그것은 너를 벗는 짧은 시간동안 일어난 일 마취에서 벗어났을 때 병원창문밖 채송화가 붉은 옷을 입고 춤을 추고있었다 파란 비닐장갑에 묻은 피처럼 선명한 하늘 치과의사는 꽃속으로 드릴 돌아가는 소리를 냈다 시끄러운 기계소리로  둥근 구멍이 뚫리는 아침 세상밖으로 던져진 시간이 흰이빨을 드러낸채 웃고있다 피흘리고있다    ㅡ의 전문   발치란 이빨을 뽑는다는 말이겠다. 첫두행이 한개 단위이고 삼사행이 한개단위이다. 현실로부터 초월로 상승하면서 실재계를 나타내고있다. 실재계란 현실에 없는 이야기를 말한다. ,  이 2행과 4행은 현실적으로 존재할수 없는 부재의 세계이다. 나는 나는 하면서 시인은 현실인것처럼 말할뿐이다.   채송화가 붉은 옷을 입고 춤을 추고있었다 파란 비닐장갑에 묻은 피처럼 선명한 하늘 치과의사는 꽃속으로 드릴 돌아가는 소리를 냈다 시끄러운 기계소리로  둥근 구멍이 뚫리는 아침 세상밖으로 던져진 시간이 흰이빨을 드러낸채 웃고있다 피흘리고있다   부드럽고도 싱싱하고 싹싹하고도 탄력있는 언어들이 혀에서 또르르 굴러 입밖으로 나올 때 청이슬이 되여 동동 뜬다. 시인은 마지막에 여섯행으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언어들이 현실계와 실재계를 자유로이 드나들면서 실재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있다.  , , , 등은 다 현실세계이지만 나머지 언어들은 다  초월을 보여주는 실재계라고 부를수 있다. 실재계와 초월은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언어라고 하겠다. 시의 힘과 시의 예술성은 현실계에 있는것이 아니라 실재계에 깃들어있다. 실재계야말로 시인의 탐구의 대상이며, 시의 령혼이 빛나고 있는 곳이다.  시에서 나타나는 실재계를 시적현실이라고 한다. 에서 은 의사가 낀 장갑이라고 할수 있으므로 현실이고, 은 비닐장갑에 묻은 하늘이라 했기에 실재계이다. 는 이발을 빼는 의사이므로 현실이고, 에서 이란 언어가 이빨대용이므로 실재계이다. 심상운시인은 디지털시를 말할  때 현실계를 염사라하고, 실재계를 접사라고 하였는데 과 이 접사이다. 현실계가 실재계로 넘어가는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틈이 생기게 된다. 그것을 문턱이라고도 한다. 문턱은 기승전결에서 말하는 전(转)과 같은 작용을 한다. 이 보이지 않는 문턱은 중요한 분계선이다.   문턱을 넘지 않으면 현실계가 되고 문턱을 넘으면 초월계가 된다. 한 실재계가 다른 실재계로 전의할 때에도 문턱이 작용하게 된다.  한 실재계에서 다른 실재계로 전의하면,  비중심이 되고, 주변적인것이 되고, 탈중심화가 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현실계는 실제적인 존재이고, 실재계는 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각색되는 비현실적인 허상이나 가상이 된다. 현대시는 초월이 한번 나타나도 되지만 하이퍼시는 새로운 실재계가 여러번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하이퍼시의 고칠수 없는 고질병이다.
11    [그것이 알고싶다] - 재외동포의 뿌리 알아보기... 댓글:  조회:2633  추천:0  2017-11-10
해외교포 2017년 11월 08일 작성자: 고구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재외동포    [정의] 외국에 거주하는 동포. [내용] 교포(僑胞) 또는 해외교포(海外僑胞)·해외동포(海外同胞) 등이라고 한다. 종전에는 일반적으로 교포라 하였다. 해외교포란 한반도 밖의, 바다 건너의 교포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재외교포란 재일교포·재미교포 등의 재외를 종합한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중국의 화교(華僑)에 대해 한인교포를 한교(韓僑) 또는 조교(朝僑)라 하였다. 한교는 한국인교포를 말하고 조교는 조선인교포를 말한다. 우리 나라 행정부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재외동포이다. 재외동포란 외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혈통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재외동포는 다시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재외국민(在外國民)이고 하나는 한국계 외국인(韓國系 外國人)이다. 재외국민이란 한국적을 갖고 외국에 거주하거나 영주권을 갖고 있는 자를 말하고 한국계 외국인이란 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을 말한다. 최근 학계와 언론계에서 한민족을 강조하여 해외한민족, 재외한인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교포 형성사]   우리 나라에서 외국으로 이주한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인들이 중국 산동성 문등현(文登縣)에 건립한 신라방(新羅坊)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신라방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후손을 현재 파악할 수는 없다. 그 뒤 고려시대와 임진왜란시 및 병자호란시 많은 한인이 해외로 이주하였으며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을 때에도 많은 한인이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 또는 일본에 흡수 동화되어 현재로서 알 길이 없다. 우리 나라에서 국가의 보호하에 정식으로 이주한 것은 1902년 수민원(綏民院)이 건립되고 이에 따라 하와이로 이주한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현재 외국에 거주하는 교포의 이주사는 이보다 앞선 1860년에서 시작된다. 1860년 러시아의 연해주로 한인들이 이주한 기록이 나온다. 이때부터 함경북도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하였고, 특히 1869년의 흉년으로 많은 농민들이 연해주와 만주로 이주하였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의 북간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갔으며 특히 20세기에 들면서 우국지사들이 유민의 대열에 참가하여 러시아와 중국으로 이주한다. 특히 한국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던 1905년, 한국이 일본에게 합방 당하던 1910년,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우국지사들의 큰 물결이 북방으로 흘러간다. 수민원이 생겨 정식으로 하와이로 이주하던 노동이민은 1905년 일본의 저지로 중단된다. 3·1운동 이후 한인들은 일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일본영토에 포함되었으나 일본으로 이주하는 사람은 적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호황기를 맞아 산업이 부흥하고 부족한 노동력을 한국에서 충당하기 위해 한인들을 유인하는 정책을 썼다. 처음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집에 처자를 둔 농민들로 1∼2년 일본에서 돈벌이를 하고 돌아오려는 임시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노동자의 수도 증가하였고 체류기간도 장기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은 1932년 중국에 만주국을 건립하더니,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39년에는 연합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감행하였다. 이런 가운데 부족한 노동력을 한국에서 징발하여 처음에는 탄광, 군수공장, 국가시설 건립에 동원하였고 후기에는 징용과 징병으로 징집하여 갔다.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일본에는 200만 명의 한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해방을 맞아 귀국을 서둘렀으나 배가 부족하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귀국조건이 까다로워졌다. 마침내 한국으로의 도항작업이 끝났을 때에는 60만 명의 한인들이 일본에 남게 된다. 이들이 재일교포를 이루게 된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미군과 결혼한 여자들이 년간 100명 안팎으로 미국에 이주하였고 많은 고아들도 미국의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해외이주에 획을 긋는 것은 1965년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부터이다. 이에 따라 년간 2만 명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 무렵 캐나다로의 이민도 시작된다. 1962년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가 계약노동자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기술이수를 목적으로 3년 계약으로 하였으나 8천여 명의 광부와 1만여 명의 간호사 대부분은 계약기간 완료 후 독일에 남아 취업을 계속하였고 가게를 마련하여 독일 이외의 유럽 여러나라들에도 분산되어 오늘날 유럽의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다. 이때 중남미로의 이주도 시작되었다.   재외교포 이민사의 또 하나의 큰 계기가 된 것은 베트남(월남)전쟁이다. 베트남전쟁에 한국군만 파견된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건설회사들이 많이 진출하였고, 베트남에 있는 미국회사에 한인들이 많이 고용되었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나자 많은 기업들이 중동으로 이주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분산되어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호주·뉴질랜드까지 이주하였다. 이리하여 오늘날 세계 120여 개 국가에 한인교포들이 거주하고 있다. [교포 분포현황] 1995년 1월 1일 외무부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대한민국 인구가 4,485만 명, 북한 인구가 2,295만 명, 재외교포가 522만 명으로 교포는 전체 인구의 7.2%를 점한다. 재외교포를 지역별로 집계하면 중국에 194만398명, 미국에 180만1684명, 일본에 69만6811명, 독립국가연합에 56만1145명, 중남미에 9만34명, 아시아·태평양지역에 8만6711명, 캐나다에 7만3032명, 유럽에 6만6086명, 중동에 9,356명, 아프리카에 3,316명 등이다. 이러한 교포수는 중국의 화교, 이스라엘의 해외유태인, 그리고 이탈리아 해외교포 550만 다음으로 많으며 우리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교포를 많이 가진 나라가 되었다  [생활양상]   교포의 생활은 각국에 이주한 시기와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무엇보다 거주 국의 법적제도와 주민들의 태도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다른 환경에 거주하면서도 한인들에겐 공통된 특성이 있다. 이를 보기 위하여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며 이주한 역사의 순서에 따라 독립국가연합, 중국, 일본, 미국, 중남미, 유럽 순으로 그곳 교포들의 생활을 살펴본다.       (1) 중국교포   중국에는 1995년 1월 1일 현재 194만398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교포들의 분포는 길림성에 118만2714명이고 이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82만1479명이 포함되어 있다. 흑룡강성에 45만2633명, 요령성에 23만1462명, 내몽고자치구에 2만2641명, 북경에 1만1848명, 하북성에 6,250명, 산동성에 5,953명, 상해에 1,334명, 그리고 이들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교포가 2만5563명이다. 한인들의 분포는 동북 3성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장백조선족자치현이 있다.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을 청 태조의 발상지라 하여 사람들의 입주를 금하였다. 이것을 ‘봉금령’이라 한다. 봉금령으로 인하여 한인들이 가까운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에 거주할 수 없어 러시아의 연해주 보다 늦게 한인들이 이곳에 이주하게 된다. 연해주를 점령한 러시아는 봉금령에 아랑곳없이 무주의 땅으로 침입하여 중국이 더 이상 봉금령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한인의 이주를 허락하며 관내의 중국인 이주를 장려하였다. 정확한 이주 년대를 알 수 없으나 1869년 한반도에 큰 흉년이 있어 한인들은 대거 두만강을 건너 이주하였다. 이곳을 북간도라 하였다. 러시아의 연해주와 같이 중국의 북간도로 이주한 한인들은 초기에는 농민이 주류를 이루었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우국지사들의 망명이민이 증가하였다. 당시 북간도에서는 연길 보다 용정(龍井)이 한인들의 중심지였다. 한인들은 연해주에서와 같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만들고 특히 중국인이나 만주족이 버린 늪지대를 개간하여 논을 만들고 벼농사를 시작했다. 중국인의 통념으로 벼농사는 양쯔강 이남에서나 가능하고 만주와 같은 북부에서는 밭농사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이러한 곳에 논을 만들고 벼농사를 일구어 중국인은 한인을 ‘물오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중국에 벼농사를 지어 경제적인 공헌을 하였으나 중국에서도 한인들이 고생하기는 연해주와 다를 바가 없었다.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던 한국인들은 애써 일구어 놓은 논밭을 중국인에게 빼앗기고 소작인이 되었다. 더욱이 중국의 지주는 러시아보다 더 가혹하여 지주에게 바치는 토지세 이외에 지주의 집에 가서 노력봉사를 하여야 하고 굴뚝세, 문지방세, 인두세 등 가진 잡부세를 부담하여야 했으며, 심지어 중국식으로 머리를 깍게 하고 중국옷을 입게 하였다. 중국으로 이주한 한인 우국지사들은 초기 교육부터 시작하여 용정(龍井)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학교를 건립한다. 서전의숙을 효시로 창동학교, 광성학교, 명동학교, 정동학교, 길신여학교, 봉명학교 등이 개인의 공헌으로 세워지고 종교단체에서는 은진서숙, 해성서숙, 대성학교, 청일학교, 동흥학교 등을 건립하였다. 한편 압록강의 대안인 서간도에는 신성학교, 삼광학교, 삼성학교, 사양학교, 삼성여학교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등이 세워졌다. 이들 학교에서는 무엇보다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것으로 이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이 독립운동의 역군이 되고 해방 후에도 남한과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다. 한국에서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중국에도 확산되어 용정을 중심으로 크고작은 항일운동이 전개되었고 상해(上海)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한국에서 우국지사들이 만주로 대거 이주하여 무력 항일전쟁을 계속하였다. 유명한 봉오동전투나 청산리전투가 전개되는 것도 1920년 만주의 북간도 영내이다. 1932년 일본이 만주에 만주국을 건립하면서 항일의병의 일부는 관내로 이동하고 만주에 남은 사람들은 지하로 들어가 중공군과 합작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중국은 짱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과 마오쩌뚱(毛澤東)의 공산당군이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것을 ‘해방전쟁’이라 하는데 만주에서 중공군과 합작으로 동북연군을 편성한 한인들은 해방전쟁에 역시 큰 공헌을 하였다. 해방전쟁이 끝나자 바로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났고 중국에서는 ‘항미원조(抗美援朝)’라 하여 북한을 도와주었다. 이에 중국 교포가 적극적으로 북한을 후원하고 북한을 위해 참전하였다. 항미원조가 끝날 무렵인 1952년, 중국은 연변에 조선족자치주를 허용하여 한인에 의한 자치주가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에 거주하는 교포들은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거주하는 사람과 자치주 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구분되었다. 이에 따라 자치주를 ‘집거지구’라 하고 다른 지역을 ‘산재지구’라 한다. 집거지역인 자치주는 인구에서만이 아니라 경제·문화·교육 등 모든 면에서 재중(在中)한인의 중심지가 된다.   자치주의 공용어는 한국어이며 외부의 간판도 한국말을 먼저 쓰고 한자를 쓴다. 자치주의 수도인 연길에는 자치단체인 인민정부와 인민위원회, 당위원회 등이 있다. 연길에는 고등교육기관인 연변대학을 위시하여 의학원, 농학원 등이 있어 산재지구에서도 이곳으로 유학을 온다.   연길에서 출판되는 한글교재는 중국 전체의 한인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언론기관으로 TV·라디오방송국이 있고, ≪연변일보≫가 있다. 또한 2개의 출판사가 있고, 많은 연구소와 연구회 등이 있다. 연변에는 극장을 비롯해 곡마단, 영화관 등 문화 시설이 있어 문화의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다. 연길의 시장에는 북한사람들도 장사를 하는, 국제적인 시장이다. 한편 한국에서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연길은 소비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한국과의 왕래에서 가장 큰 소득은 한국과 미국의 교포들이 세운 연변과학기술대학이다. 장백조선족자치현은 압록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한의 해산과는 100m도 안 되는 거리에 있어 서로 소리를 질러 대화가 가능할 정도이다. 산악지대인 장백은 인삼의 재배로 유명하다. 자치현이기 때문에 자치주와 같이 한글을 공용어로 사용하고 모든 영역을 교포들이 이끌고 있다. 산재지구란 연변을 제외한 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 등 한인 교포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을 말한다. 이들 산재지구에도 한인들은 대도시에 집중적인 거주지를 갖고 있다. 예컨대 요령성 심양에는 교포들의 집거지역인 서탑지구가 있다. 서탑지구에는 6층 건물의 한인들 문화예술관이 있다. 이곳에는 문화예술활동을 하는 방이 여럿 있으며 각종 행사를 진행한다. 민족문화예술관 이외에 서탑지구에는 민족학교, 민족식당, 민족백화점, 민족서점 등이 있다. 민족백화점은 한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으로 맷돌, 독, 키, 멍석 등 한인들만 사용하는 것도 이곳에서 살 수 있다. 이러한 구역이 길림성의 길림시·장춘시와 흑룡강의 할빈시·목단강시 등 한인 교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 있다. 북경에도 1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거주하지만 북경에는 한인교포들의 집거지역이 없다.   중국은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한인교포들은 유리한 입장에 있다. 특히 한인들은 벼농사를 지어 중국인보다 높은 수익을 올리고 중국 내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문맹율이 가장 낮은 민족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재중교포들은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민족으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대약진에 이어 1960년대에 시작하여 10년이나 계속된 문화대혁명 당시 연변에서 주덕해(朱德海) 주장을 위시하여 민족주의자들이 수난을 겪었으며 한국어를 폐지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이 지나면서 연변을 비롯해 원상을 회복하였으나 주덕해는 하북성의 한 농촌에서 문화대혁명의 끝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중국교포는 한반도 외부에 자치주와 자치현을 갖고 있는 유일한 교포이다. 중국교포는 중국 55개 소수민족에서 한족보다 교육수준이 높고 일인당 국민생산고가 높은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중국교포는 한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하고 한국적 전통문화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중국 건설에 큰 공을 세워 자부심도 강하다.     (2) 일본교포   1995년 1월 1일 현재 일본에는 69만6811명의 교포가 있으며 오사카에 24만9255명, 도교에 14만9001명, 고베에 8만3653명, 나고야에 7만7152명, 요고하마에 3만9550명, 후쿠오카에 3만4582명, 시모노세키에 3만3935명, 니가다에 1만2385명, 센다이에 1만954명 그리고 삿포로에 6,344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와 같이 거의 전국에 교포가 분산되어 있으면서 오사카 이꾸노구에 집거하고 있다. 해방후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잔류하게 된 사람은 60만 명이며 이들이 재일교포를 형성한다. 해방 초기 모든 사람들이 귀국을 서둘렀고 지역마다 ‘조선인연맹’을 결성하여 귀국을 돕거나 일제강점기 억압되었던 한글과 한국사를 가르치는 사설학교들이 도처에 자생적으로 성립되었다. 조선인연맹은 자발적인 집단이고 전국적인 조직을 가졌으나 좌경하여 일본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뒤늦게 이것을 안 반대파가 ‘거류민단’을 결성하였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재일교포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대결과 투쟁을 일삼은 것이다. 조선인연맹은 ‘한신교육사건’이 있은 뒤 해산 당한다. 한신교육사건이란 오사카와 고베지역의 한인들이 일본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기준미달인 한인한교에 폐교령을 내린 것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사건이다. 해산 당한 조선인연맹은 그 후 북한 외상 남일(南日)의 ‘남일선언’이 있은 뒤 ‘조선인총연맹(조총련)’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북한을 지지하는 집단으로 탈바꿈하였다. 민단과 조총련은 사사건건 대립했지만 가장 심한 대립은 1960년의 북송사건과 1974년의 문세광(文世光)사건 때이다. 북송사건이란 북한의 감언이설로 10만 명의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간 사건을 말한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단은 사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2년간 계속된 북송은 바로 중단되었다. 북송된 사람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북송된 사람들은 아직도 마치 인질과 같이 북한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일본의 가족이 오늘까지 계속 생활용품을 보내고 있다. 문세광사건이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 참가한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陸英修)를 문세광이 저격한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문세광이 살던 이꾸노구의 민단지부들이 조총련지부를 습격하여 조총련이 대피한 사건이다. 일본은 민단·조총련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심한 차별을 하였다. 재일교포는 14세가 되면 구청에 가 외국인등록을 한다. 이때 열 손가락 지문을 찍었다.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지만 고등학교 진학시 한인학생을 받지 않는 학교도 많다. 학교를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된다. 한인은 결혼에서 또 한번 좌절을 경험한다. 말하자면 재일한인의 일생은 좌절의 연속인 것이다. 이러한 편견과 차별에서 전환점을 이루는 것이 박종석의 ‘히다치사건’이다. 1970년 히다치회사에 합격한 박종석은 한인이라는 이유로 입사를 거부 당했다. 이것을 안 박군의 일본인 동창이 중심이 되어 ‘박군을 지키는 모임’을 만들고 박군의 억울함을 일본사회에 호소하였다. 이때 양식있는 일본인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이 모임은 일본 전국으로 확산 되었으며, 한국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히다치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움직임은 다시 미국에까지 확대되었다. 불리한 일본법원은 박군에게 승소판결을 내려 히다치에게 박군의 월급을 지불하고 박군을 채용할 것을 명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한인들은 자신감을 얻고 갖가지 권익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단이 주동이 되어 공공아파트입주권을 획득하고, 아동수당과 노인복지수당을 얻게 되었으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지문날인제도를 폐지시켰으며, 현재는 지방의회의원을 선출하는 투표권요구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재일교포는 오늘날까지 일본인의 편견과 차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고 일본인으로부터 게으른 민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리한 환경과 조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한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중국이나 미국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어렵겠지만 재일교포는 이것을 이겨내고 있다.   (3) 미국교포   1995년 1월 1일 현재 미국에는 184만7716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10만 명이 넘는 도시만 열거하면 로스앤젤레스 50만5951명, 뉴욕 45만3333명, 시카고 22만3365명, 샌프란시스코 13만6662명, 시에틀 11만8427명, 그리고 휴스턴 10만4549명 등이다. 미국의 모든 주에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로스앤젤레스·뉴욕·시카고처럼 한인들이 다수 집결되어 있는 곳도 있다. 재미교포의 역사는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밭의 노무자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일본의 방해로 1905년 한인의 이주가 중단되었다. 미국으로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되는 것은 1965년 미국이 새이민법을 발표하고 한국인 2만 명의 이주를 허가한 이후부터이다. 초기의 이민들은 불리한 조건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재미교포와는 세대차이가 심하여 연속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1965년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한국에서 이미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자녀의 교육 또는 보다 낳은 삶을 위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 때문에 이들을 ‘엘리트 이민’이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대학졸업이라는 학력이 미국에서는 유리한 것이 아니었고 한인들은 교수, 연구원, 의사 등 몇 영역을 제외하고 대부분 미국 사회의 저변에서 출발해야 했다. 그러나 미국사회의 저변은 오히려 한인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다. 이에 한인들은 자영업을 선택하여 구멍가게에서 시작하여 술병가게, 야채가게, 생선가게, 식품점, 음식점, 세탁소, 주유소 등을 경영하고 이런 사업에 성공하면 식당, 봉제공장 또는 모텔을 소유하면서 재산의 규모를 늘려 나갔다. 이처럼 한인들은 한 직업을 장기간 유지하지 못하고 직업과 직종을 자주 바꾸는 특성을 보였다. 이보다 중요한 특색은 한인들의 업소가 대부분 흑인마을에 있다는 점이다. 한인은 유색인종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며 수입의 일정 양을 지역사회에 환원하는 습관을 몰라 흑인들과 마찰을 자주 일으켰다. 한인들은 자녀의 교육을 중요시하여 가게는 흑인가에 있어도 주거지는 부유한 백인마을에 있는 경우가 많다. 거주지와 상점이 떨어져 있고 부유한 백인마을에 거주하면서 돈만 벌어 가는 한인들을 흑인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러한 불만이 노출된 것이 1992년 5월 LA에서 있었던 한인촌사건이다. 흑인청년이 고속도로에서 백인경찰에게 집단폭행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들 가해자가 무죄로 판결되자 흥분한 흑인들이 시내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흑인들은 한인촌을 습격하여 가게를 불지르고 기물을 부수거나 약탈해 갔다. 한인들은 이것을 보고도 방어할 도리가 없었다. 이 LA사건은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1937년 소련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와 더불어 해외교포의 3대비극으로 일컬어진다. 이 사건이 있은 뒤 많은 교포들이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다른 도시로 분산되어 갔다. 한인들이 로스앤젤레스를 떠났다 하여도 이곳의 한인촌은 여전히 재미(在美)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고 한국을 대표하는 말 그대로 한인촌이다. 이 곳 한인촌에는 거리의 표지판에 한글이 쓰여져 있으며 한인을 대상으로 하는 소도매상이 밀집되어 미국 서부는 물론 중부에서까지 한국제품을 구입하기 위하여 이곳을 찾는다. 이곳에는 상점뿐만 아니라 신문사와 방송국 그리고 한인회관 등이 밀집돼 있고, 특히 발달한 통신망을 이용하여 한국에서의 뉴스를 동시에 들을 수 있다.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어를 모르는 한인들이 거주하기 편리하고 한국을 옮겨다 심은 것과 같다하여 이곳을 ‘한국 나성구’라는 별명까지 있다. 로스앤젤레스를 위시하여 뉴욕·시카고 등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대도시에는 일정한 날을 정하여 ‘코리언 퍼레이드’를 행한다. 한국을 상징하는 여러 대의 꽃차에 군악대와 농악대가 가두를 행진하며 한국을 마음껏 자랑하는 행사이다. 시가행진에 이어 공원이나 극장에서 갖가지 놀이·경영대회·잔치 등을 베풀어 한인들은 고향의 맛을 음미하고, 미국인에게는 한국을 소개하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 LA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역사는 짧지만 이해 빠른 속도로 미국사회에 진출하여 이른바 모범적인 중간층 소수민족이 되었다. 이것이 흑인들의 반감을 얻게 된 까닭의 하나이다.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미국, 캐나다의 한인은 근면한 민족으로, 자녀의 교육열이 높은 민족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한인 2세, 3세들의 사회상승률은 높은 편이다.   (4) 남미교포 1995년 1월 1일 현재 멕시코를 포함한 중남미 여러 나라에는 9만34명의 교포가 거주하고 있다. 쿠바를 포함하여 한인들이 없는 나라가 없으며 1000명 이상 거주하는 나라로 브라질에 3만8131명, 아르헨티나에 3만2387명, 과테말라에 1,890명, 칠레에 1,459명 그리고 페루에 1,149명이 살고 있다. 중남미로 이민이 시작된 것은 1905년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메리다주에 도착한 1,031명의 계약노동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대농장에 팔려와 가진 고생을 했다. 그 뒤 이들의 후손이 멕시코 농촌에 거주하거나 일부는 쿠바에까지 유입되어 그 흔적이 없어졌다. 두 번째로 이주한 사람들은 한국전에서 포로가 되어 북한도 남한도 거부하고 이 곳 중립국을 택한 사람들로 1956년 브라질에 50명과 아르헨티나에 12명이 도착하여 주민들과 결혼해 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정식 이민이 남미에 도착한 것은 1963년 브라질에 도착한 17가구 92명이었다. 이들은 양국 정부의 합의에 따라 농업을 위한 계획이민으로 남미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농장의 조건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이주한 한인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대부분 쌍파울루로 이주하여 수용소에 있다가 결국 빈민가로 유입하게 되었다. 6회에 걸친 이민집단들이 모두 농장을 포기하고 단 한번 카톨릭의 주선으로 이주한 53세대 313명만이 농장건설에 성공하였다. 당시 한국에서 이민 가는 사람들에게는 미화 1천 불 만을 지참하게 하여 남미로 이주한 사람들은 평생 입을 옷을 가져갔다. 빈민가에 이주한 한인들은 이것을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길밖에 없었다. 남자는 차를 몰고 밖에서 기다리면 여자들은 옷보따리를 들고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보부상’ 노릇을 하여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가져간 옷을 다 팔고는 현지에서 옷을 도매로 구입해 팔기도 하고 집에 재봉틀을 놓고 옷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재봉틀 한 대가 두 대가 되고 차차 원주민을 고용하기도 하면서 사업을 확대하여 갔으며, 마침내 쌍파울루의 의류도매상가를 잠식하면서 브라질 의류상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의류의 제조에서 도매·소매 그리고 의류원단을 짜는 견직업에까지 진출하여 남미의 의류계를 지배하게 된다.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등 남미의 다른 나라에 이주한 한인들도 대체로 유사한 과정을 거쳐 그 나름대로 성공하였고 주재국의 특성에 따라 직업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다. 남미의 한인들은 남미 여러 나라가 경제적·정치적으로 불안하여 그곳에 영주하는 것보다 자녀를 미국에 유학시키거나 큰 돈은 미국에 예치하는 등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으로 이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남미를 경유지로 생각하고 최종 거주국은 미국 또는 최소한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 심지어 호주에까지 행선지를 잡는 사람도 있다.   (5) 유럽교포 1995년 1월 1일 현재 유럽에는 6만6086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터키를 포함하여 한인들이 없는 나라가 없으며, 그 중에서도 한인이 다수 거주하는 나라가 있다. 1000명 이상 거주하는 나라를 보면 독일 2만9202명, 프랑스 9,584명, 영국 9,091명, 스페인 6,784명, 이탈리아 4,549명, 그리고 오스트리아 1,423명이 거주하고 있다. 유럽 여러 나라는 미국과 달리 단일민족 또는 몇 개의 민족이 이룩한 나라들로 민족의식이 강하다. 이곳에 한인이 정착하게 된 것은 대략 네 가지 경로로 구분된다. 한국전 때 한국에 주둔한 군인 또는 병원과의 인연으로 이주한 사람, 그곳에 유학하여 10여 년을 머물어 영주하게 된 사람, 서독의 광부·간호사처럼 계약노동자로 이주하였다가 임기가 완료되었으나 계속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 그리고 최근 한국상사의 파견근무자로 이주하였다가 한국기업을 포기하고 그곳에서 사업을 계속하며 정주하는 사람 등이다. 이들 중 대표적인 경우가 옛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로 파견됐다가 정주한 사람들이다. 서독으로부터 기술인수라는 명목으로 젊은 남자가 광부로 갔으며, 여자들은 병원의 간호사로 역시 3년 계약으로 갔다. 이들 광부와 간호사는 1만8000여 명이었는데 대부분 미혼이었기 때문에 독일에서 결혼을 하였다. 남자보다 여자가 많아 남자들은 대부분 한국여자와 결혼하였으나 한국여자는 한국광부 아니면 유학생 또는 독일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한국의 광부였다. 한국 광부들은 3년 계약이 끝난 뒤 여자 때문에 독일에 남아 다른 직장에서 근무하였다. 한국여성들은 상냥하고 친절하여 병원에서 인기가 많아 계약기간을 넘기고 모두 재계약으로 체류기간을 연장받았다. 광부출신들은 광산에서 고생하였기 때문에 강한 의지와 생활력을 갖고 있다. 더욱이 고생을 하면서 얻은 동지애는 비할 데 없이 강하여 어떤 사람이 어느 도시에서 식품점을 개점하면 서독에 있는 모든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그의 사업을 도왔고 혹시 사업을 하다 실패하게 되면 그가 재기할 때까지 계속 도움을 주었다. 이리하여 독일은 물론 독일 이외의 다른 나라로 진출해 사업을 하는 사람까지 서로 도우면서 한인들은 협력하여 유럽 전역에서 자리를 잡고 사업을 확대하였다. 최근에 볼 수 있는 유럽으로의 이민 형태는 상사직원이 영주하는 것이다. 한국의 재벌기업의 현지 상사직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4∼5년이 지나면 현지에서 사업에도 익숙해지고 무엇보다 자녀의 교육 때문에 귀국을 주저하게 된다. 따라서 여지껏 행한 사업을 계속하면서 한국본사에 사표를 낸다. 이럴 경우 초기에는 본사에서는 크게 노하며 마치 배신자 취급을 하였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이런 일을 장려한다. 이는 후배들의 진급을 위하여 자리를 내어주는 일인데다, 사표를 냈다 하여도 결국 유럽 현지에서 본사의 제품을 판매하기 때문에 회사로서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귀화를 신청하면 현지정부는 빨리 수용하여 그 사람의 사업과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 나라의 중상류 사회에 바로 진입하게 되었다. 1975년 이후 동남아시아로 퍼져 나간 한인들이 유럽의 상사직원과는 다르나 처음부터 사업을 시작하였다는 의미에서 기업이민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유럽의 최근의 이주자와 유사하다 하겠다. 동남아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은 기념품상점, 식당, 여행사 등을 차려 어려운 노동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이주국에 정착하는 셈이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분산된 한인들이 한인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번창하였던 것과 같이 유럽 여러 나라의 교포들도 한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많이 하였다. (6) 독립국가연합 교포   1995년 1월 1일 현재 독립국가연합 내에는 46만1145명의 교포가 거주하고 있다. 멀리 벨라루시아나 우크라이나에도 교포가 있으나 보다 많은 인구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그리고 러시아연방에 거주한다. 우즈베키스탄에는 22만336명, 카자흐스탄에 10만3525명, 그리고 러시아연방에 10만8325명이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주한 초기의 한인들은 농민들이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토를 마련한 한인들은 러시아인들에게 이것을 빼앗기고 소작인이 되거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농지를 개간해야 했다. 소작인이 되었다하여 편안한 것은 아니다. 한인들은 토지세, 인두세 이외에도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은 세금,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은 세금을 내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인이 러시아의 국적을 얻으려면 러시아정교(正敎)의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를 받으려면 교리문답을 배워야 하며 교리문답을 배우려면 러시아어를 알아야 했다. 따라서 학력이 없는 농민들에게 러시아 국적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는 사람이 증가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한인을 세 종류로 나누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사람, 러시아 국적을 취득치 않은 사람, 그리고 잠시 후 귀국할 사람으로 나뉘었다. 한인들은 귀화한 사람을 ‘원호(元戶)’ 그리고 귀화하지 않은 사람을 ‘여호(余戶)’라 불렀다. 러시아의 국적을 취득하면 토지의 소유가 가능하여 국적을 취득치 못한 사람과는 다른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보다 당시 러시아 극동지구의 총독 여하에 따라 한인들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한인에게 호의를 갖는 그로데코프 같은 총독이 부임하면 여호라도 대우를 받았고, 운테르베르겔 총독처럼 한인에 대해 비우호적인 총독이 부임하면 원호라도 심한 고생을 하였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우국지사들이 중국의 북간도와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주를 한다. 이것은 농민의 이주와 달리 망명이민이라 할 수 있다. 연해주에 망명한 우국지사들은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도왔다. 1910년 6월 한인 대표들은 모임을 갖고 13도의군을 조직하고 고종의 러시아 파천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일합방이 알려지자 한인 대표들은 신한촌에 모여 한국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8624명이 서명을 했으며, 이것을 미국 국무장관 앞으로 발송을 하였다. 또한 특공대를 조직하여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려다 실패하였다. 한인들은 권업회를 조직하여 장기전을 도모하고 애국심의 함양과 선전을 위해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의병활동은 러시아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했다. 당시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기회 있을 때마다 러시아에 압력을 가하여 한인들의 활동을 저지하였던 것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원동(遠東)지역은 구제정 러시아군인, 첵코군, 백군, 홍군 등이 혼합되어 혼잡을 이루었고 설상가상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4대 강국이 간섭을 하여 이른바 시베리아전쟁이 시작되었다. 1917년 연해주에 상륙한 일본군은 다른 연합국 부대가 철수한 뒤에도 그대로 남아 1922년까지 머물렀다. 한인들은 이때 일본군에 대항하는 러시아 유격대에 가담하여 일본군의 병영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원동지역 중요 도시를 공격하였고 한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을 공격하였다. 이것을 ‘신한촌사건’ 또는 ‘4월 참사’라고도 한다. 1920년 4월, 일본군은 가두에서 수백 명을 사살하였고 가택수색으로 수천 명을 체포하였으며 공공건물을 방화하는 등 신한촌을 초토화하고 물러갔다. 1921년 6월, 러시아의 자유시(自由市)에서 있었던 사건은 한국인 의병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산발적으로 항일전쟁을 하던 의병부대들이 정비를 가다듬고 새로운 편성을 위하여 자유시에 모였다. 이것을 기회로 러시아군은 일본의 권유로 한인 부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한인부대를 포위하고 한인 부대간의 갈등을 기회로 한인부대를 향하여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한인 의병 700여 명이 사망하고 1000여 명이 부상한다. 이에 한인부대들은 서둘러 만주로 돌아가고 말았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한인들도 태도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1917년 3월 크라스노야르시크에서 전로한인총회(全露韓人總會)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원호와 여호의 대립이 있어 결국 총회는 둘로 나뉘어 한 무리는 다음 해 하바로브스크에서 모임을 갖고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후일 고려공산당으로 발전하였다. 1922년 일본군이 러시아 원동지역에서 철수하자 러시아는 이곳을 소비에트화하며 집단농장 건설을 추진한다. 한인들은 이에 적극 협력하여 원동지구 건설에 노력한다. 그러나 한인들은 또다시 무서운 시련을 경험하였다. 1937년 중국에서 중일전쟁을 발발하고 유럽에도 전운이 감돌자 스탈린은 연해주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1937년 9월 추수가 끝난 한인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가축을 싣는 화차에 실어 한 달 여의 시베리아 횡단 끝에 중앙아시아에 하차시켰다. 추위에 시달리며 가는 도중 노약자와 어린이가 죽었다. 특히 하차한 곳에서 많이 죽어 2세 이하의 어린이는 다 죽었다고 한다. 하차한 곳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이며 이 곳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우며 강우량이 적어 유목민에게나 적합한 곳이다. 한인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더지와 같이 땅굴을 파고 겨울을 지냈다. 다음해 봄 한인들은 강을 찾아 운하를 파고 논을 만들어 가져간 벼를 심었다. 대륙성기후라 일조량이 많고 물만 있으면 벼농사에는 좋은 조건이다. 한인들은 첫해 농사에 성공하였고, 계속 벼농사에 성공하여 강제이주 3년 후에 원상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 한인들이 재배한 쌀이 이웃 한민족은 물론 유럽의 소련에까지 확대되어 ‘한인’하면 쌀, 쌀하면 ‘한인’을 연상하게 되었다. 강제이주를 당한 다음해 농사에는 성공하였으나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강제이주를 명령한 스탈린은 다시 한인을 적성민족으로 간주하여 한국어를 소련의 소수민족언어에서 제외시키고 한국어 학교를 폐쇄하였으며 한국어를 가르치던 교사를 해임하거나 다른 과목을 가르치게 하였다. 한인들은 자기가 거주하는 공화국 이외의 지역으로 여행할 수 없었으며, 군대에도 갈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은 다른 민족보다 빨리 모국어를 잃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은 모두 농장에 배치되어 농업에 종사했는데 성실하여 많은 노동영웅을 배출했다. 이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김병화와 황만금이다. 김병화는 북극성농장에 배치되어 이곳에서 열심히 일하여 노동영웅 칭호를 두 개나 받았으며, 그가 사망한 뒤 그 농장을 ‘김병화농장’이라 개칭하게 되고 다쉬켄트 한 거리를 ‘김병화거리’라 명명하게 되었다. 황만금이 이끈 농장은 ‘포리토젤’농장으로 이곳은 전 소련에서 관광공사에 등록된 유일한 농장이 되었다. 관광공사에 등록된 농장이란 외국인에게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는 뜻이며 소련 내에 있는 3만 여 개의 집단농장에서 포리토젤농장만이 등록된 것이다. 스탈린에 의하여 한국어가 소련의 소수민족언어에서 제외되고 탄압을 받았을 때 카자흐공화국 서기장은 당시 카자흐공화국에 이주한 한국계 신문인 ≪레닌기치≫(후에 ≪고려일보≫가 됨)를 계속 간행하게 하였고 한인들의 극장을 계속 보호하였다. 이것으로 ≪레닌기치≫는 구소련에 있는 유일한 한국어판 신문으로 살아남았고 카자흐스탄 수도인 알마타에 있는 ‘조선극장’은 유일한 한국어 사용 극단으로 남아 지방공연을 하면서 한 맺힌 한인들을 위로하는 유일한 집단이 되었다. 소련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이후 열심히 일을 하여 타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열이 높아 자기를 희생하면서 2세, 3세들을 교육시켰다. 그 결과 한인 2세, 3세들은 화이트칼라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이 와해되고 독립국가연합이 설립되면서 모두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공화국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국어를 선포하여 우즈벡 공화국에서는 우즈벡어가, 카자흐스탄에서는 카자흐어가 국어가 되었고 이때까지 사용하던 러시아어는 외국어, 국제어가 된 것이다. 화이트칼라직에 종사하는 한인들은 공용어인 우즈벡어 또는 카자흐어를 몰라 결국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 형편에 놓였다. 이들은 현재 중앙아시아를 떠나 조상들이 살던 연해주로 재이주를 하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재소한인들은 도시마다 고려인협회를 조직하고 고려인문화센터를 설립하여 한국어학습과 한국전통문화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각 도시의 고려인협회는 다시 공화국의 고려인협회 그리고 이들을 망라한 독립국가연합의 고려인협회를 갖고 있다. 이들 고려인협회가 친한적인 성격이 강하자 북한은 서둘러 통일촉진위원회(약칭 아소크)를 조직하여 고려인협회를 견제하고 사람을 모아 북한관광을 시키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사할린에는 4만 여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사할린 남부가 일본의 영토였던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징용당한 사람들이다. 그 당시 광산 등에서 근무하다 광복이 되자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고 이곳에 있던 일본인들만 철수하고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곳에 남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인 처를 가진 한인 남자들이 일본으로 철수하여 사할린에 남아있는 한인들의 귀환을 위하여 노력하고 사할린에 남은 사람들도 소련의 국적 또는 북한의 국적을 거부하면서 한국으로 귀환하기만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들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러시아는 한국과의 국교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한국정부는 이들은 일본이 책임져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모두에게 버림받고 억울한 세월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정세가 호전되었고 일본의 변호사와 국회의원들이 활동하는 가운데 1988년 이후 러시아와 한국이 수교를 시작하면서 원한에 사무친 사할린 억류 한인들이 한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2세, 3세는 도시로 진출하여 지식인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주로 중아아시아에 거주하거나 타지에 살아도 중앙아시아를 고향으로 생각하여 명절이나 연휴에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친척집을 찾아간다. 중앙아시아에 뿌리 내린 한인들은 두 가지 면에서 특성을 가졌다. 하나는 교포들이 갖는 민족문화의 보존과 자부심이고 다란 하나는 전 독립국가연합에서 모범적인 소수민족이 된 것이다. 이곳의 교포들도 다른 곳의 한인과 같이 이웃한 유목민을 무시하고 대전통(大傳統)인 러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는데 주력하여 왔다. 따라서 이웃한 문화와 섞이지 않고 한국적인 전통을 많이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인은 역경을 성실로서 극복하려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이것을 유감없이 발휘한 곳이 재독립국가연합의 교포들이다. 이들은 말하자면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127개 민족 가운데 모범적인 소수민족이다. [한인 교포들의 특성] 한인교포들은 이주 시기와 방향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구한말과 일제 초기의 한인들은 주로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 만주로 이주하였고, 현재는 이들의 3세, 4세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제시대는 일본에 노동자로 이주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강제로 동원되어 갔다. 이들은 현재 2세, 3세가 지배적이다. 광복 후 1960년대의 교포들은 남북미대륙과 유럽 등 서구문화권으로 이주하여 문화적 충격을 크게 받으며 적응의 어려움을 경험하였고, 이들은 1세가 지배적이다. 교포들이 어느 나라에 이주하든 모두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시련을 경험하고 고생하였으며, 특히 국권을 상실하였을 때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비록 이주의 시기와 장소가 서로 다를지라도 그들이 경험한 시련은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인의 특성을 발휘하여 모두 거주국의 모범적 소수민족이 되었다. 한인들은 위기와 악조건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자기를 희생하며 자녀교육에 헌신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 결과 다음 세대의 사회상승률이 높아진다.   
1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참대곰아, 나와 놀쟈... 댓글:  조회:2671  추천:0  2017-11-10
세계적으로 인공사육 판다 개체군 규모 520마리 [ 2017년 11월 09일 ]     기자가 쓰촨(四川) 청두(成都)에서 열린 중국판다번식기술위원회 2017년 연차국제학술대회에서 알아본데 의하면 10월 6일까지 2017년 세계에서 인공 생육 판다 63마리중에서 58마리가 살아나 인공사육 개체군 규모가 520마리에 달한다고 했다. 이는 중국판다보호연구센터 워룽선수핑기지(卧龍神树坪基地)에서 촬영한 판다이다(9월 23일 촬영). ///인민망                                                  
9    옥수수로 집을 짓을수 없다?... 있다!... 기니스북에 올려야 ... 댓글:  조회:2695  추천:0  2017-11-10
2만근 옥수수로 건축한 '황금농가'...서란 촌민 작품 [ 2017년 11월 09일 ]     11월 8일, 길림성 서란시 이함촌 촌민 류홍재(刘洪财)는 2만여근의 옥수수로 '황금농가'를 건축하는데 성공했다. ///봉황넷                                    
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이색 "동물사진"대회 댓글:  조회:3153  추천:0  2017-11-10
가장 웃긴 '동물사진'을 뽑는 이색 사진대회 (ZOGLO) 2017년11월9일  2017 코미디 야생동물 사진 어워즈 출품작. 출처=데일리메일 동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공개됐다. 영국매체 데일리메일은 지난 6일(현지시간) ‘2017 코미디 야생동물 사진 어워즈’ 결승에 오른 사진들을 소개했다. 멸종동물 보호단체인 본 프리 파운데이션이 주최하는 ‘코미디 야생동물 사진 어워즈’는 매년 재미있는 야생동물 사진을 선발하고 있다. 이 상을 처음 기획한 탄자니아 출신 톰 술람은 “탄자니아라는 가장 많은 야생동물이 사는 나라에 살면서 인간의 파괴적인 행동이 야생동물에게 얼마나 유해한지 알게됐다”며 “상을 통해 작은 도움을 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각국에서 사진을 통해 경쟁하며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경쟁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상의 의의를 덧붙였다. 올해는 세계 86개국에서 3500장이 넘는 사진이 대회에 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매체는 그 중 결승에 오른 40개의 작품을 공개했다.  올해 역시 이색적인 사진들이 많이 출품했다. 무술 자세를 잡는 캥거루부터 깜짝 놀란 바다 코끼리, 손가락 욕을 하고 있는 일본 원숭이 등 눈에 띄는 출품작이 많았다. 이중 부문별 우승작은 오는 12월 14일에 발표될 예정이다. 아래는 절로 웃음을 자아내는 출품작 몇 점이다. ///세계일보  
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코끼리야, 나와 놀쟈... 댓글:  조회:2790  추천:0  2017-11-10
'여기가 지옥' 사진에 포착된 인도 '불타는 코끼리' (ZOGLO) 2017년11월9일  인도 서벵골주에서 군중이 던지는 불덩이를 피해 달아나는 코끼리 사진. 최근 인도 야생동물보호 잡지 '생크츄어리'(SANCTUARY)가 주최한 사진 경연대회에서 '올해의 생크츄어리 야생동물 사진가'상을 받았다. [촬영 Biplab Harza, 'sanctuaryasia' 홈페이지 캡처] 인도 동부에서 군중이 던진 불덩이를 피해 도망치는 코끼리들의 사진이 공개돼 충격을 주고 있다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 데일리메일 등이 7일(현지시간) 전했다.  '지옥이 여기 있다'라는 제목의 이 사진에는 성체 코끼리 한 마리와 새끼 코끼리 한 마리가 불타는 기름 찌꺼기 덩어리 '타르볼'과 크래커를 던지며 야유하는 군중을 피해 도망치는 모습이 담겼다.  이 사진은 야생동물 사진가 비플라브 하즈라가 인도 동부 서벵골주 반쿠라에서 촬영한 것으로, 최근 인도 야생동물보호 잡지 '생크츄어리'(SANCTUARY)가 주최한 사진 경연대회에서 '올해의 생크츄어리 야생동물 사진가'상을 받았다.  이 지역은 코끼리와의 충돌로 사망자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으로, 이번 사진은 현지에 만연한 인간과 코끼리 간 충돌을 보여준다고 외신은 평가했다.  '생크츄어리' 측은 "이 지역에서는 코끼리처럼 가죽이 두꺼운 후피동물에 이런 식의 모욕을 주는 일이 일상"이라고 설명했다.  세계자연기금(WWF)의 크리스티 윌리엄스는 "이런 종류의 충돌은 매일 증가하고 있다"면서 도로나 수송관 신규 설치 등 인간 활동으로 코끼리들이 점점 더 서식지에서 밀려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과 코끼리의 공존은 특히 어렵다면서 코끼리는 거대한 동물이지만 "결국 이기는 건 인간"이라고 덧붙였다.  인도에는 전 세계에 분포한 아시아 코끼리의 70%에 달하는 3만 마리가 서식하고 있다. 이 중 서벵골에는 800마리가 있다.  ///연합뉴스
6    [쉼터] - 우리 연변에도 "랭면찰떡"축제가 있었으면... 댓글:  조회:2941  추천:0  2017-11-10
철령 제1회김장찰떡문화축제 관광객 발길 사로잡아 2017-11-07                (흑룡강신문=하얼빈)  11월 4일,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서 주최한 ‘철령제1회김장찰떡문화축제’가 철령시 룡수산기슭에서 진행, 이곳 관광객들과 시민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우리 민족 우리 문화 천년만년 이어가자'란 주제로 진행된 이번 문화축제에는 철령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철령시조선족기업가협회 민간단체 책임자들과 철령시은주구조선족로인협회, 채하동조선족로인협회, 소교자로인협회, 룡상로인협회, 철령현 쌍정자향 포동촌로인협회 등 6개 로인협회 무용팀 성원들 그리고 철령시 은주구 채하가 평안주민구역에 살고 있는 한족주민 도합 500여명이 참가했다.       이날 축제는 찰떡치기, 김치담그기 전시 및 체험, 문예공연전시 등 행사로 관객들과 시민들이 함께 하는 공감의 자리가 되였다. 특히 철령시조선족문화관에서는 집체무 “장백산아래 우리 집”, 가야금병창, 강강수월래 등 문예종목을 선보이는 외에 19차 당대회의 성공적인 페막을 축하하기 위해 새로 안무한 부채춤 “잊을수 없는 그날”을 선보였다. 문예공연연출에 참여한 6개 조선족로인협회에서는 새로 개편한 조선족무용으로 조선족무용의 진수를 뽐내였다.   이날 관광객들과 시민들이 서로 어울려 흥겨운 노래가락 속에서 김장김치만들기와 찰떡치기를 체험하는 장면을 보면서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 김영주 관장은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일조하게 되여 보람을 느낀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소개에 의하면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서 추천한 '조선족찰떡치기기예'는 2016년에 철령시시급무형문화재에 등록된 바 있다.   /료녕신문  
5    한어말 "뉴스"프로를 조선말로 번역한 첫 사람은 누구?!... 댓글:  조회:4553  추천:0  2017-11-10
뉴스프로를 민족언어로 번역한 첫 사람 평생영예칭호 수상자 권병록  2017-11-9    원래 지난 달 중순으로 잡혔던 권병록(83세)의 인터뷰는 그의 건강상황때문에 미뤄져서 10월 26일에야 그의 댁에서 어렵사리 만날수 있었다. 지팽이에 의지해서 겨우 걸음을 옮기긴 했지만 취재를 와줘서 반갑다며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올 4월에 산책을 나갔다가 락상사고를 당한 후로 건강이 급격히 안좋아졌다고 안로인 김정숙(82세)은 근심 어린 얼굴로 설명해줬다. 권병록은 중앙인민방송국의 각지역 인민방송국 련합방송프로와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뉴스련합방송’프로를 민족언어로 번역한 첫 사람이다. 1953년 중국의 첫 소수민족방송국인 연변인민방송국에서는 전국 소수민족지구 방송력사상 처음으로 시사조를 설립했다. 당시 아무런 설비도 없는 간고한 상황하에서 연변어문전과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한지 1년밖에 안된 권병록은 번역임무를 맡게 되였다. “당시 사무실조차 없어서 집에서 일했습니다. 14평방메터의 작은 집을 두 칸으로 나누고 한쪽에서는 형님네 부부가, 한쪽에서는 저하고 녀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살았죠. 그 작은 칸에 사무상을 들이고 쏘련제 록음기를 올려놓고 번역을 했습니다.” 시계도 없어서 날이 어두워지면 라지오를 켜놓아야 했다. 전기세조차 자부담해야 했던 시절, 권병록은 책상에 엎드려 졸다가도 10시에 선률이 흘러나오기만 하면 정신을 다잡고 방송을 받아 적었다. 기록은 통상 아침 5시가 돼야 끝났다. 듣는 과정에 미처 받아 적지 못해서 물음표를 쳐놓았던 부분을 차례로 채워놓고 보면 날이 밝군 했다. 통신원이 와서 원고를 가져가면 그제야 잠을 잤고 오후가 되면 단위로 출근을 해서 원고번역을 했다. 중국 소수민족가운데서 가장 일찍한 중앙텔레비죤 련합방송프로의 번역프로인 조선어 ‘국내외뉴스’는 그렇게 매일매일 이어져갔다. 1960년부터 권병록은 홀로 ‘국내외뉴스’프로를 맡게 되였다. 뉴스의 내용은 고금중외 모든 분야가 포함되는데다 그것을 짧은 시간내에 번역해서 알아듣기 쉽게 다듬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번역이 끝나면 자체적으로 심사를 하고 방송원이 출근해서 록음을 한후 다시 넘겨주면 두번째 심사를 한 후 기계조작실에 넘기군 했다. “매일 밤, 공원 서쪽 수림속 외딴 곳에 지어진 낡은 2층짜리 건물에서 낡은 라지오를 벗삼아 매일 5천자에 달하는 조선어 ‘국내외뉴스’를 써냈습니다. 아침 6시 30분에 라지오에서 해당 프로가 흘러나오고나서야 시름놓고 퇴근하군 했죠. 밤중에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어 따뜻한 물 한모금 조차 마실수 없었지요.” 집에 돌아오면 반겨주는 것은 안해가 지어놓은지 이슥한 아침밥, 두 아이도 학교에 가고 안해도 인쇄공장에 출근한지 오래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안해 김정숙은 지금도 할 얘기가 많다.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어요. 집안 대소사는 물론, 두 아이도 거의 내 손에서 크다싶이 했지요. 명절에 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였지요. 왜냐하면 ‘국내외뉴스’는 매일 있었으니까요. 그때는 남편이 너무나 원망스러웠어요.” 당시는 지방프로보다 뉴스번역에 대한 수요가 많았기때문에 권병록은 방송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였다. 주은래 총리와 모택동 주석이 서거 했을 때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뉴스속보 번역임무도 몇날며칠 자지 않고 원만히 완수해냈다. 1984년,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뉴스련합방송’프로를 조선어프로로 번역하는 새로운 임무가 생겼다. 이미 연변인민방송국에서 ‘련합방송프로’의 번역을 30년간 해온 그는 갓 사업에 참가한 번역일군들과 손잡고 우리 민족 방송사에 또 다시 새로운 장을 쓰기 위한 준비를 했다. 드디여 예정보다 한달 앞선 6월 4일에 중앙텔레비죤방송극의 ‘뉴스련합방송’프로가 ‘국내외뉴스’라는 타이틀을 달고 방송되기 시작했다. 이 프로는 광범한 조선족 시청자들이 국내외 뉴스를 받아보는 중요한 창구로 자리매김하며 광범한 호평을 받았다. “번역에 있어서 어제보다 빠르고 남들보다 빠르게 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매일 시간을 짜내 한어 학습을 했습니다.” 방송프로의 번역외에도 권병록은 많은 문자번역사업에 참여했다. 일찍 1972년 모주석어록 제2판 번역문(총 386페지)의 심사에 참가했고 2001년 22만자에 달하는 《등소평리론개론》도 번역해 출판, 발행됐다. 권병록은 일찍 제1기 연변번역사업자협회 부회장, 중국조선어규범위원회 번역분과 위원 등을 력임했으며 중대외사활동의 번역사업도 맡았다. 197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9.9’국경절 기간 중국 문화혁명후 첫 길림성우호방문단의 번역을 맡았고 1971년 6월 심양에서 펼쳐진 중조압록강발전소 공안담판의 중국측 번역을 맡기도 했다. 권병록은 또 퇴직한지 이슥한 2007년, 상급의 부탁을 받고 혼자 한어로 7만자에 달하는 ‘연변TV 30년, 휘황한 력사’를 집필, 우리 민족 방송인들에게 길이 남을 교과서를 완성했다. ///연변일보 /글·사진 리련화 기자
4    "그림으로 조선족 력사 문화 알리고싶다"... 댓글:  조회:3916  추천:0  2017-11-10
주훈 화책 출간, “그림으로 력사문화 알리고 싶다”   2017-11-9    주훈의 화책 《그림으로 보는 우리의 가치관-중국조선족풍속도》 출간 주훈의 화책 《그림으로 보는 우리의 가치관-중국조선족풍속도》가 일전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됐다. 주당위 선전부와 주정신문명건설위원회판공실에서 편찬한 이 화책은 생업편, 조화편, 례의편, 풍속편 등 4개 부분으로 나눠 화가가 최근 3년동안 완성한 작품 대부분과 그 이전에 마무리한 일부분의 작품 도합 180여점의 그림으로 꾸며졌다. 지난 40여년동안 주로 조선족민속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온 주훈의 이번 작품은 자치주창립 60돐 경축 헌례작품으로 이미 출간된 《중국조선족풍속도》채색판과 자매화책으로 연변 대외 홍보 정품도서이다. 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인 김기덕은 화책의 머리말에 “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는 중국조선족의 훌륭한 풍속문화는 세월이 흐를수록 참신한 의미가 부각되여 사회주의핵심가치관을 육성하고 실천함에 있어서 자못 중요한 현실적 의의를 띠고 잇다. 이 화책은 조선족의 이미력사와 그 와중에 널리 전해진 감동적인 전설, 순박한 풍속이야기, 전통적 미덕의 풍부한 내용을 생동하고 직관적으로 그려내기에 최선을 다했다. 또한 새로운 창의와 대담한 시도로 풍부하고 다채로운 조선족 민속풍정을 그림속에 녹여냈다. 본 화책은 력사의 귀중한 정신적 재부를 독자들이 리해하기 쉽게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데 취지를 두고 사상감정과 예술적 분위기의 조화를 가져왔기에 그 어느 도서보다도 사회적 가치가 큰 것으로 느껴진다.”고 적었다. 주훈은 “세월이 흐르면서 조선족 민속의 가치도 날따라 커가고 있다. 조선족의 력사를 제대로 인식해야만이 전통의 전승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다. 이번 화책을 통해 조선족의 유구한 력사문화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밝혔다. ///연변일보 신연희 기자
3    [쉼터] - 128년전의 메뚜기와 그림... 그림 몸값 또 오르겠쑤... 댓글:  조회:3524  추천:0  2017-11-10
반고흐 그림에서 128년전 말라붙은 메뚜기 발견 (ZOGLO) 2017년11월9일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옥철 특파원 =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올리브 트리'에서 128년 전에 말라붙은 것으로 추정되는 메뚜기가 발견됐다고 그림을 소장한 박물관이 밝혔다. 8일(현지시간) 폭스뉴스에 따르면 미국 캔자스시티 넬슨 앳킨스 박물관의 줄리안 저거제이고이셔 디렉터는 지역신문 캔자스시티 스타에 "반고흐가 실외에서 작업했던 것 같다. 아마도 바람이 불고 먼지가 날리는 작업 환경이었을 것"이라며 "메뚜기와 파리가 캔버스에 앉았을 수 있다"고 말했다. 메뚜기 사체는 가슴과 몸통 부분이 날아가고 날개 일부만 남아있어 눈에 잘 띄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흐는 프랑스 생 레미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 감정가들은 메뚜기가 한 세기 이상 그림에 말라붙어 있었던 상태가 맞다고 확인했다. 곤충학자들은 메뚜기가 캔버스에 떨어지면서 물감 속에 묻혀 바로 죽은 것으로 판단했다. 감정가들은 고흐의 붓 자국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메뚜기 사체를 찾아냈다.  넬슨 앳킨스 박물관은 소장한 104점의 프랑스 유화를 대상으로 정밀 분석 작업을 해왔다. 반고흐 그림 '올리브 트리'[폭스뉴스 홈페이지 캡처] 반고흐 그림에서 발견된 128년 된 메뚜기 사체 [폭스뉴스 홈페이지 캡처]
2    [그것이 알고싶다] - 비행기 속 숨은 비밀 알아보기... 댓글:  조회:3140  추천:0  2017-11-10
[한겨레] [여행 전문가도 모르는 비행기 속 숨은 비밀 3가지] ① 검은 삼각형-날개 제빙 상태를 살피는 곳 ② 창문에 난 구멍-내부 기압 차 견디기 위해 ③ 비행기 좌석 옷걸이-트레이 고정 잠금쇠 이용 항공 여객 연인원 1억명 시대다. 국토교통부 통계를 보면, 2016년 항공 여객 연인원은 1억391만명이었다. 단순 계산을 하면, 한국인 1인당 1년에 두 차례 비행기 여행을 떠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항상 비행기에 대한 이야기는 새롭다. 곳곳에 안전과 효율을 중시하는 섬세함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아무 설명 없이 붙어있는 삼각형의 스티커, 기내 객실 창문에 있는 작은 구멍, 트레이를 고정하는 고리 등 그 용도가 궁금한 항공기의 숨겨진 ‘비밀’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1. 검은 삼각형이 붙은 자리의 의미는? 객실 벽에 있는 작은 삼각형. 사진 게티이미지스뱅크객실 전후의 중간 정도 창가 쪽 자리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검은 색 삼각형 표식이 붙어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삼각형이 붙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신경이 쓰일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해당 표식은 승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승무원이나 기장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질의응답 서비스 ‘쿠오라’에 올라온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해 “이 삼각형이 붙은 자리가 객실 내부에서 날개의 상태를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자리”라며 “특히 겨울에 날개의 제빙 상태를 살피는데 가장 좋은 곳을 표시한 것”이라고 전했다. 비행기 날개의 제빙 상태는 안전 운항을 위해 꼭 살펴야 할 요소다. 실제로 캐나다에서는 수십년 전 날개 위에 쌓인 눈을 제거하지 않고 이륙하려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사고도 있었다. 심지어 이 자리에는 이름도 있다. 텔레그래프 역시 쿠오라에 올라온 답변을 인용해 “1960년대 TV 시리즈인 ‘트와일라이트 존’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상공 20만 피트의 악몽’편에 출연한 윌리엄 샤트너가 앉았던 자리에 삼각형 표시가 있어서 ‘윌리엄 샤트너 자리’라고 부른다”고 밝혔다.  2. 창문에는 왜 작은 구멍이 나 있을까? 비행기 객실 창문에 있는 작은 구멍. 사진 게티이미지스뱅크비행기에 구멍이 나 있다고? 객실의 창문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아래쪽에 작은 구멍이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이 구멍은 당신의 안전을 위한 과학적 장치이니 안심해도 좋다.  허핑턴포스트 US에 의하면, 비행기의 창문은 모두 세 개의 투명한 아크릴 판으로 되어있는데, 이중 구멍은 중간 판에만 있다고 한다. 판이 세 개나 있는 이유는 약 1만2000m 상공의 낮은 기압 속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외부와 대략 1800m의 고도로 맞춰진 내부의 기압 차를 견디기 위해서다.  세 겹의 아크릴판을 그냥 겹쳐놨을 경우 아주 급격한 기압 변동(기내 폭발 등)이 있을 때 석 장이 모두 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중간 판에 구멍이 있으면 구멍을 통해 공기가 흘러 여압이 중간 판에서 바깥쪽 판으로 전해진다. 이러면 비상의 사태가 발생해도 바깥쪽 판만 깨지고 나머지 두 장은 살아남을 수 있다. 이 구멍이 ‘브리더 홀’(breather hole)이라 불리는 이유다.  성에나 김이 가장 적게 서리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 비행기가 순항 고도에 올라가면 객실과 외부 사이에는 대략 70도 정도의 기온 차가 생긴다. 이렇게 되면 차량과 마찬가지로 김이 서리거나 성에가 생기게 마련. 그러나 이 구멍을 통해 공극(air gap) 사이에서 공기가 순환하며 각 판 사이의 온도 차를 줄여 물 또는 얼음 결정이 생기는 걸 막는다고 한다. 3. 비행기 좌석에도 옷걸이가 있다? 비행기 좌석에 있는 다용도 잠금쇠. 사진 게티이미지스뱅크항공 여행 중 입고 탄 옷을 적당히 둘 때가 없으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러나 라이브해커스의 한 에디터는 몇몇 비행기에서 트레이를 고정하는 잠금쇠를 코트 걸이 또는 옷걸이의 용도로 쓸 수 있다는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트레이 잠금쇠 중에 ‘다용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부가 있다는 것. 예를 들면, 위 사진에 있는 잠금쇠가 그렇다.  물론 옷뿐 아니라 이어폰이나 가방을 걸어 둬도 화를 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허핑턴포스트 US는 ‘꼭 잠금쇠가 아니더라도 따로 코트가 걸 수 있는 옷걸이가 있는 좌석도 있다’며 ‘항공사별로 항공기를 제작한 후 로크웰 콜린스 등의 인테리어 회사에 주문제작을 한다’고 전했다. 다음에 비행기를 타면 반드시 옷걸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1    [문단소식] - 김응준 시백 "모아산"에 오르고 또 오르다... 댓글:  조회:4357  추천:0  2017-11-10
김응준 시집 《모아산》 출간   날짜  2017-11-9    김응준 시인의 21번째 시집 《모아산》이 일전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됐다. 《모아산》은 시인이 지난 2004년 정초부터 2005년 상반년에 이르는 기간에 쓴 시편과 이전의 시집에서 루락된 몇편의 시를 골라 묶었는데 이 중 일부 시들이 간행물을 통해 볕을 본 외 대부분의 시들은 시집을 통해 처음 볕을 보는 작품이다. 시집은 련정편, 겨레편, 향토편, 인생편, 자연편으로 나뉘여 180여수의 시가 수록됐다. 한편, 시집 출간을 두고 김응준 시인은 “그동안 나의 시를 아껴주는 여러 문우들과 독자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고 전하면서 “현재 또 다른 시집이 출간준비과정에 있다. 힘이 닿는데까지 필을 놓지 않겠다.”고 로익장의 의지를 밝혔다. 1934년 훈춘시에서 태여난 시인은 1954년에 처녀작을 발표한 이후 꾸준한 창작열을 이어가며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일획을 그어왔다. 그동안 시인은 《별찌》, 《남자와 녀자와 사랑과 시》, 《김응준시선집》, 《사랑으로 가는 길》 등 20부의 시집과 동시집 《꽃도 웃고 나도 웃고》, 수필집 《짚신으로부터 구두에로》를 출간해냈으며 그의 작품들 중 70여수가 여러 상을 수상했다. ///연변일보 박진화 기자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