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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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석
2020년 01월 01일 23시 11분  조회:533  추천:0  작성자: 리문호
송화석
 
길을 가다가 풀섭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풀을 헤치니
돌이 울고 있었습니다
 
-돌아 너는 왜 울고있니 ?
-아 시인님
저는 천만년의 고독을 지닌
대자연의 녀인이에요
답답해 죽겠어요
이내  마음을 열어주세요
 
나는 불쌍히 여겨
집에 데려와
때를 벗기고
물로 앃어 주었습나다
그러자 몸매와 무뉘가
선명히 드러났습니다
 
-이 무뉘들은 왜 생겼니 ?

-나의 눈물 자국이에요
사람들은 년륜이라 하지요
땅이 뒤집혀 공룡들이 죽을 때
나도 땅에 묻혔지요
 
-오, 그때가 륙천만년 전
날 지독하게 기다렸구나
사람들은 너를 송화석이라하지
 
-송화석아,
내 너의 마음을 열수 있어도
백년을 못 사는
한 녀인의 마음을 열지 못 하겠구나
 
-아, 시인님, 사람들의 마음은
나 보다 더 굳은가요?

-글세, !?

 
그때부터 나는 송화석을
책장에 모셔 놓고
매일 밤 그와 속 사정을 나눕니다
약속 했지요, 이제 또
륙천만년을 기다리자고
혹시 그때는 그 녀인이
마음을 열지도 모른다고…
 
아, 내가 기다리다
송화석으로 굳어지면
그 녀는 구름이 되여
비로서 나에게 올가요
모르겠네요,
먼 후날이나 알 일…
 
2020,1,1 화원신촌에서

                민간 예인 신옥화선생님을 찾아서
                        
 
(심양시조선족문화관) 서영화
 
필자는 1993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심양시 소가툰구 성교향 화원신촌에 살고 계시는 심양시의 우수 민간예술가, 료녕성의 우수 민간예인 칭호 수여자이며  100여수의 고전음악 록음자인 저명한 민간예인 신옥화 선생님의 자택을 여러 차레 방문하였다. 그 이는 갈때 마다 친절하게 열정적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며 기구만장한 자기의 경력을 들려 주군하였다. 나는 신옥화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잡지의 편폭 제한으로 간략하게 적어 보련다
나의 고향은 조선 경기도 인천에서 가까운 한 산골이며 농사를 짓던 부친 신학봉과 모친 려씨의 큰 딸로 태여 낳고 형제는 5남매였다. 부친 신봉학은 내가 9살 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뜨게 되니 어머님은 혼자서 살길이 막막하고 우리 5남매를 먹어 키울수 없는지라 아이들을 다 재워 놓고 젓 먹이만 데리고 깊은 밤에 가출하였다. 나는 울면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였지만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몇끼를 굶은지라 맥이 다 빠져 길을 잃고 다리 부근에 누워 있느라니 웬 할아버지가 나를 강변 땅굴로 데려가 떡을 두개 주었다. 후에 나를 찾는 주인이 나서지 않으니 백발 마나님집에 데려 가는 것이였다。 그 집은 부자집이였다.그런데 그 집에는 무남독녀가 있었는데 내가 들어간지 몇일이 지나 앓게 되자 무당에게 점을 치니 이 집에 들어 온 옥화 때문이라는 것이였다. 나는 그 집에서 쫓겨나 <<엄마야, …>>하며 쌀쌀한 저녘 바람을 맞으며 울고 있는데 지나던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 구경하고 있었다. 문득 사람들속에서 한 로친이 나를 데려가는 것이였다. 그 로친은 무당이였다. 그 집에서 나는 무당이 가는 곳 마다 떡도 받아 오고 닭도 받아 오는 심부름을 했으나 그 집 아바이가 우리도 딸이 셋이나 되니 옥화를 키울수 없다며 그집 외가집으로 가게 되였다 내가 간지 몇일이 지나 그집 사돈이 찾아와 나들이를 가게되니 집을 봐 달라며 나를 빌려 갔다 사돈댁에는 15살 쯤 되여 보이는 딸이 있었는데 밤에 겁이 많아서 내가 자면 무섭다고 막 때리군하여 9살난 나는 재 밤중에 처량하게 울군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소란해 못 살겠다며 무당집에 가서 고발하자 <<고약한 것들이 아이를 왜 맨날 때리는냐>>하며 무당이 나를 업고 다시 자기 집에 데리고 같다. 무당 집에는. 웬 낯선 남자가 있었는데 이튼날 무당이 하는 말이 <<우리집에는 언니가 셋이나 되여 있을수 없으니 너는 저 삼촌을 따라 가거라. 그 집에 가면 너 혼자이니 좋을 거다>> 하여 삼촌의 자전거 뒤에 타고 따라가게 되였다 그 집에는 할머니 한 분이 있었는데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물도 깃고 방과 마루도 딲고 겨울엔 강가에 나가 손이 새파랗게 얼도록 빨래를 하였지만 잘 못 빨았다고 손잔등을 때렸다 밤에는 등잔불 아래서 헌 솜 타는 일을 하다가 졸면 담배 대통으로 사정없이 때리군 하였다 이래도 맞고 저리도 맞으며 11살이 되여 더는 견딜 수 없는 지라 쑥 캐러 산에 같다가 산 마루를 넘어 도망하였다. 그러다 만난 집이 비교적 잘사는 리봉원댁이였다 그 집 할머니에게 정황을 엿 주니 불쌍 하다고 동정하면서 자기집 셋째 망내 아들의 몸종으로 일하게 하였다 나는 막내 아들의 밥상을 날라 주고 세수물을 떠다주고 잘 때는 발을 씻어 주고 부채질을 해주었다 힘 들었지만 매도 안맞고 욕도 먹지 않으니 좋았다
이 소문이 퍼져 도망 친 집 로친의 딸이 면장의 처인데 날 찾으러 왔다 .<<아이구, 우리 엄마가 하도 때리니까 동망왔지>>하며 나를 데리고 가는데 자기 조카네 집이였다. 그 집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시고 딸이 없는데 생활은 영 가난한 집이였다 농사일을 도와야지 나무해다 불 때야지 11살 나는 나에게는 너무나 벅차고 모질은 일이였다 한번은 나무 하다가 다쳐서 다리가 뚱뚱 부어 동네 사람들은 얼마 살지 못 하고 죽는다고  그랬지만 그래도 살아 났다. 내가 13살 나던 해 동네에 연출하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춤도 추고 창가도 불렀는데 남 명창 이동백. 송망각, 오태석, 임방울, 정경령, 녀 명창은 이중성, 박초월, 임소양, 이하중성 9명 이였다. 연출을 보고 집에 와 누우면 노래와 춤추던 모습이 사물사물 떠올라 잠을 들수가 없었다.
<<엄마, 나 명창이 될래요>>하고 조르면 양 엄마는 <<이년 그건 기생들이 하는 거다>> <<그럼 나 기생이 될래요>>하며 꼭 명창이되고 싶었다
<<아버지, 나 소리 배우게 해줘요>> 하고 양 아버지게 조르면 << 그건 쌍놈이 하는 짓이다.>> , << 그럼 나 쌍놈이 될래요>>라고 졸라댔다
기실 소릴 배우려면 돈이 많이 들어  가난한 그 집에서 양딸에게 배우라고 할리는 만무한 것이다 옆집 머슴이 나무하러 산에 가며 아리랑 노래를 부르면 나는 정신차려 듣고 한 곡조 배웠다
그 후로 잠만 깨면 아리랑을 불렀다, 부엌에서도 아리랑, 물을 길어도 아리랑, 절구질해도 아리랑, 방아를 찧으면서도 아리랑, 얼마나 열심히 불렀는지 아리랑 계집애라는 별명까지 동네 사람들이 지어 주었다 그리고 장타령하는 구걸쟁이,  엿타령하는 엿장사가 마을에 들어 오면 끝까지 따라 다니며 배우군 하였으며 농사때는 농부가도 배웠다. 들에 나가서는 밤나무 잎을 줄에 끼어 목에 걸고 동네 애들과 함게 농부가도 부르고 굿 놀이도 하였다 이래 나두어서는 않되겠다고 생각한 집주인은 나를 인천항구에 있는 삼촌네 집에 보냈다
그 집 삼촌과 딸은 월급 몇 푼 받으며 인천방직공장에 다녔다 그들이 출근하면 나는 불 때주고 설거지하고 마루 딱고 마당 쓸고 하였다 온지 얼마 안되여 노래 배워 달라는 말은 못하고 소침해 세월을 지내느라니 삼촌 엄마가 << 너 왜 그러니 ?>>하기에 << 나 노래 배우러 왔는 데요>> 하였다  그들은 토의 끝에 휴일을 타서 삼촌이 나를 데리고 인천 직업소개소에 데리고 같다 직업 소개소의 중계로 50세 좌우로 보이는 로친과 계약을 맺었는데 <<이 애를 3년 공부 시켜 3년 벌어 먹고 돌려준다>> 는 내용이다 그 때 내 나이 13살이니 19살이 되야 계약이 끝난다 그리하여 나는 그 로친의 학비로 학당에 가 전광태란 선생님의 면접을 거쳐 노래 공부를 하게 되였다 면접 하는 날 전광태 선생님은 나의 노래를 듣고 <<야, 너 노래 잘하는구나. 음, 됬다! 희망이 있다>>하였다
그 이튼날 입학금 7원과 월사금 2원, 비종 담배 한 곽을 갇추어 학당에 정식으로 같던 것이다 배우고 싶었던 노래를 배우게 되니 남이 한마디 배우면 나는 두마디를 배울 결심으로 특별히 노력하였다 아침 3시 반이면 일어나 5시 까지 노래 복습을 하였다. 집안에서 부르면 남들이 잠 못 자니 후원에 나가 눈 우에서 련습했고 따뜻한 봄철이나 여름 가을에는 산이나 공원에 찾아가 련습했는데 인천이라 항구의 련락선이 들락 날락 하는 바다를 끼고 있으니 그 넓은 바다를 향해 소리를 치면 파도 소리가 되 받아 귀에 들릴 때 까지 소리를 하였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17살 나던해 10월에  졸업하였다 졸업한후 청혼이 물 밀듯 들어 오고 별이 별 부자들이 나에게 눈독을 들이는 지라 인천에서 살수 없어 청진으로 가게 되였다 갈 때 청진에서 날 데리러 온 사람이 몸 값으로 양아버지에게 500원을 주었으며 50원을 더 달래서 옷 한 벌을 해 입고 고리짝 하나를 샀다 그리고 청진에 와서 사업(기생) 허가증을 내였다. 사업하려고 알아 보니 내가 배운 고전음악으로는 장사가 안되였다. 그 당시는 류행가가 류행할 때여서 판소리나 남도창이 시세에 맞지 않을 때였다 하여 하는 수 없이 시집을 가려고 생각하였지만 진작 시집 갈려고 하니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양아버지가 항상 부탁한 <<재산가. 애편쟁이, 칼찬집(경찰)에 가지말아, 그저 구루마를 끌어 먹는 소금에 조밥을 먹더라도 너를 깊이 생각해 주는 사람한테 시집 가거라 >> 하는 말이 떠 올랐다 나서는 사람마다 다 3원칙에 걸리는 사람들이였다 하여 하는수 없이 술집 기생으로 불리워 다니며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출근 시간은 오후 4시 부터 한번 불리워 놀아주면 일반적으로 2시간인데 2시간 넘으면 4시간으로 돈 받고 5시간을 넘으면 10시간으로 계산하는데 그 술집에서는 돈을 받아 몇%는 나에게 주기로 규졍되여 있다 그 당시 우표 한장에 3전 이였으니 한번 놀아주면 몇원이 차례진다. 하도 노래를 잘하고 춤 잘추고 인물 고우니 소문이 나서 시간이 팽팽하게 째워져 휴식 시간이 별로 없어 힘 들었다 그리고 하루에 2시간을 청진에서 유명한 지만수 선생에게 한 달에 월사금 6원 주고 가야금과 남도소리를 교수 받았다. 이렇게 1년 반을 지내 왔지만 번 돈은 술집 주인이 가지고 손에 들어 오는 돈은 별로 얼마 되지 않았다 차차 이 직업에 실증이 나기 시작하여 시집을 가야겠다고 생각 했다 그러다 우연히 화물차 운전수와 만나 성대히 결혼식을 치른 후 목단강으로 갔으며 거기에서 26살 때 8.15 해방을 맞이했다
북만주에서는 8.15 해방을 맞이하자 조선족 군중문예 활동이 환발하게 진행되였다 나는 남동생 신동석을 찾아다가 학교에 붙였고 1946년에는 참군 시켜 군속이 되다보니 조직의 신임을 얻게 되였다 그 때 목단강에서는 업여 문공단이 성립되였는데 나는 매일 두 시간씩 참가하여 련습했고 한 달에 한 번씩 공연하여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그 시기 나는 남편과 리혼하고 혼자 있을 때였다 원인은 결혼후 그 해에 아이를 가졌다가 락산한 후 다시 임신을 하지 못 하였기 때문이다
목단강 업여문공단에 한 동안 다니다가 조선 평양에로 가는 도중 심양에 도착하여 아는 사람의 만류로 인해 정착하게 되였다 심양역전 앞에서 국수집을 하다가 9개월만에 돈 천원을 날려 버리고 그만 두었으며 화평구 서탑 구시장안에 집 한 칸을 잡고 살게 되였다 이틀이 안 되여 심양조선족문화관에서 <<항미원조 군속 위안을 위한 8.15해방 경축공연>>에 연출해 달라는 요청이 왔지만 랭정하게 거절하자 목단강에서 온 심양시 민위 림과장이 재삼 설복 요청에 의해 부득불 <<사막의 어머니>> 극의 주역을 맏게 되였다. 연출이 끝난후 심양 민위의 령도들은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심양시 소가툰구 련맹촌에 있는 박룡웅과 결혼하였다. 있는 밑천으로 한족 기업가와 합자하여 다디미 공장을 꾸렸으며 2틀 갈이 땅을 사서 농사를 했는데 무당 1200근의 수확을 올렸으며 벼 이삭 하나에 170알이나 열렸던것이다 남들이 3벌 김 매면 6벌 김매는 열성으로 얻은 결실이였다 그런데 나는 평생 농사를 지을 팔자가 아닌가 보다
동북 삼성 문예공연대회가 심양에서 열리면서 연변가무단이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조선족문화관을 찾아 민간 예인을 찾아 달라는 요청을 하였던 것이다 문화관의 추천으로 목단강에서 소학 교원을 하던 김성민 선생이 나를 찾아 왔다 나는 김성민을 잘 모르지만 그는 목단강시에서 나의 연출을 보았기에 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농촌에서 조용히 농사를 짓는 것이 꿈이고 남편이 반대하여서 연변가무단의 요청을 답복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편지가 사흘이 멀다하게 왔고 사람이 7번이나 찾아와서 하는수 없이 령감에게 2주 있다가 오마하고 연변으로 가게 되였다 연변에 도착하니 귀빈을 접대하듯 모시는데 침실에 들어서니 침대도 이부자리도 새 것으로 갈아 놓은 깨끗한 방이였다 그리고 처녀 한 명을 시중으로 시켜 세수물도 떠 오고 방도 치우는 분에 넘치는 대우를 하였다 이튼 날 연변가무단 령도들이 찾아와 인사를 하였다. 과거 천하디 천한  매창녀가 이런 사람 대접을 받아 보긴 처음이였다 연변 가무단은 음악조, 성악조, 무용조, 화극조가 있다고 소개하면서  <<예술 수준을 높이 제고 하도록 지도해 주십시요, 지금 화극조에서 춘향전을 하자고 하는데 선생님이 춘향역을 해도 좋고 또한 옛 풍속과 동작, 표현등 각방면에서 지도해 줘야 하겠습니다 음악조에서는 장구치는것과 가야금, 꾕과리를 배워 주시고 성악조에서는 노래(창)을 가르치시고 무용조에서는 무용동작을 가르켜 주십시요>>. 그리하여 네개 조에 두시간식 하루에 8사간을 지도하였다 <<춘향전>> 은 6개현과 장백에까지 순회공연을 하였는데 방송국에서 온다 에데서 온다하며 꽃다발이 계속 올라 왔고 신문에 대서특필하여 보도 됬으며 연변일대가 들썽하였다
2주일 있기로하고 간 것이 한달 반 되여서야 돌아 왔다 령감은 펄쩍 뛰면서 다시 안보내려고 하였지만 단동에 있는 시형의 설복하에 다시 가게 되였다 1956년에는 가무공연이 북경에서 열려 연변가무단은 1등상을 타고 돌아 왔다
그 후 나는 연변예술학교가 성립되면서 <<신옥화 선생님이 오지 않으면 예술학교 간판을 걸수 없다>고 까지 요청하기에 가서 고전 음악을 가르켰으며 각종 활동에 열심히 참가하고 교수하기에 노력하였다 그 곳에 있는 동안 나의 선생 지만수 선생을 만나게 되였다 그는 나를 보자 감격하여 <<야, 너 여기 있었구나>>하며 하는 말이<<나 같은 전문가를 청할것 뭐요, 여기 신옥화 같은 분이 있는데, 서도 남도창을 겸비한 전문가요>>하며 남도창을 겸비한 사람은 북조선에 임소양이 있고 동북엔 신옥화 밖에 없다고 높이 평가해 주었다
문화 대혁명때 성분 부확실하다는 리유로 돈화 산골 쌍두대대에 하향 같다가 만 4년을 마치고 55세에 다시 연길로 올라 왔다 조직에서는 나더러 마음대로 선택하라기에 령감의 아들이 심양소가툰에 있으므로 그리로 가겠다고 하여 다시 소가툰으로 돌아 왔다
이 상 서술은 신옥화 선생님의 비상한 기억과 섬세한 세부 내용에서 주요한것만 추린 것이다 필자는 그 이의 장편소설과 같은 경력에 아쉬움을 금치 못하며 이만 필을 놓는다  
 
(리문호 편집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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