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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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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윤동주와 하숙집 터 댓글:  조회:4186  추천:0  2018-07-03
  윤동주 하숙집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수성동 계곡 방향으로 더 올라가다 보면 왼쪽은 누상동 오른쪽은 옥인동으로 나뉜다. 그 사잇길 윤동주의 옛 하숙집 터가 나온다. 지금은 멀끔한 현대식 주택으로 바뀌었지만, 1940년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윤동주가 머물며 시를 썼던 곳이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찬이면서 문학도였고 젊은 청년시 절에는 언어가 맑고 청아했던 시인 백석의 시를 좋아했다고 한다. 시인 백석의 시집 ]이 100부 한정판매로 시중에서 구하기가 힘들자 도서관에서 시집을 빌려와 밤새도록 필사해서 책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문학을 아끼고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친구들과 밤새 하숙집에서 릴케를 논하고 니체를 논하고 백석과 정지용을 읊조렸을 그의 문학적 열정과 밤새 붓끝을 잡고 설레며 한 자 한 자 적어나갔을 주옥같은 시를 생각하면 일제의 간악한 최후의 발악 앞에 희생당한 윤동주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질 듯한 슬픔이 느껴진다.   시인은 자신이 존경하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 하숙하며, 문학적 의견을 나누고 배움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이 시기에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는 명시들이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의미가 깊은 장소다. 시인은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1943년 7월 체포돼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2월 16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갔어도 그가 남긴 시 , , 등은 애송시로서 남아 있다.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ㅡ 연희전문학교시절 하숙집 터     좀 아쉬웠던게 정말  하숙집 터만 남아있고  집은 새로 지어져서ㅠㅠ 잘 보존이 됐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음...     윤동주 하숙집/시인의 언덕                        만주 용정에서 태어난 시인 윤동주가 서촌으로 이사한 까닭은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식사가 부실해졌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후배 정병욱과 함께 1941년 5월 하숙집을 구하러 서촌으로 왔다. 서촌에서 사직단을 건너 금화산을 넘으면 바로 연희전문학교여서 통학하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뒷날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정병욱은 다음과 같이 회고를 하였다. “그해 하숙집을 찾아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 있는 하숙집 광고를 보았는데, 그 집을 찾아가니 문패에 ‘김송(金松)’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하고 문을 두드리니, 과연 나타난 주인은 바로 소설가 김송, 그분이었다.우리는 김송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저녁 식사가 끝나면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논하기도 하고, 때로는 성악가인 그의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은 알차고 보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반이던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이 집에서 살면서 문학과 음악을 즐기고, 상당수 대표작을 여기서 창작하였다. 정병욱은 이 시절 윤동주의 일과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그 무렵 우리의 일과는 대충 다음과 같다. 아침 식사전,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증턱까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세수는 산골짜기 아무데서나 할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끝내고 조반을 마친 다음 학교로 나갔다. 하학 후에는 기차편을 이용하였고,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로 들어와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지성당, 일한서방 등 신간 서점과 고서점을 돌고 나면,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하였다. 극장에 들르지 않으면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 관훈동 헌책방을 다시 순례했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서점에 들러 서가를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된다. 이리하여 누상동 9번지로 돌아가면 조여사가 손수 마련한 저녁 밥상이 있었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김선생의 청으로 대청마루에 올라가 한 시간 남짓한 환담 시간을 갖고 방으로 돌아와 자정 가까이까지 책을 보다가 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누상동 하숙집 분위기는 문학청년의 마음에 들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무섭기만 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기념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출간하려고 스스로 대표작을 골라 편집했는데, 전쟁 분위기 속에서 미처 출판되지는 못했다. 이 하숙집에서 지은 시는 「태초의 아침」「또 태초의 아침」「새벽이 올 때까지」「십자가」「눈 감고 간다」「못 자는 밤」「돌아와 보는 밤」등 수 없이 많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윤동주는 밤으로 인식을 하면서 새벽이나 아침을 오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인다. 9월에 이 동네를 떠나 11월에 아현동으로 이사하는데, 이곳에서 「별 헤는 밤」「서시」등의 명작을 창작하는데, 이 시들 또한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십자가 /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언더우드관. 스팀스관 아펜젤러관. 언더우드 동상.   스팀스관 / 사적 제275호 / 일제강점기 1920년. 스팀스관은 1920년에 준공된 옛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의 건물로 사적 제275호이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거주하던 찰스 스팀슨의 기부금으로 캠퍼스에 세워진 최초의 석조건물이다. 아펜젤러관 / 사적 제277호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 매사추세스 피츠필드시의 기부를 받아 1921년에 착공해 1924년에 완공했다. 석조 3층의 단아한 고딕풍 건물로 언더우드관과 함께 연세대에 두 번째로 세워졌다. 언더우드관을 중심으로 스팀슨관과 아펜젤라관이 앞으로 들어서 "ㄷ"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당시 이건물은 이학관으로 자연과학계의 강의동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사회복지대학원에서사용하고 있다. 언더우드관 / 사적 제276호 / 완공년도 1924년. 이 건물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1924년 완공된 연면적 2,700m2의 근대식 4층 건물이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자인 고 원두우(元杜尤, H. G. Underwood)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언더우드 관이라 하였다. 설립자의 장남 원한경 교수가 초석을 놓았고, 공사 감독은 스팀슨관과 아펜젤러관을 감독한 화학교수 밀러가 맡았다. 당시 문학관이라 불리었으며 본래는 강의동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은 중앙 현관문이 튜더(Tudor)풍의 아치로 되어 있는 준고딕양식의 웅장한 석조 건물이며, 스팀스관과 아펜젤러관이 건물 양쪽으로 인접하여 건물군이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중앙부에는 1개 층의 탑옥(塔屋)이 솟아 있다.        언더우드관.   최현배 선생 동상.       윤동주 기념관(핀슨 홀).   핀슨 홀과 윤동주. 연희전문학교 창립 초기에 공이 큰 미국 남감리교 총무 핀슨박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핀슨홀로 명명된 이건물은 1922년에 학생기숙사로 준공되었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1917~1945)는 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사색하고 고뇌하며 시 쓰기에 전념하였다.   기념관 입구, 기념관은 2층에 있다. 윤동주 생가 기와. 윤동주 시인의 생가 지붕 수막새 기와에는 특이한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집안의 깊은 신앙심과 애국심을 나타내는 태극문양과 무궁화 그리고 십자가. 이런 문양을 보며 조국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던 시인은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또 다른 고향집을 보게 된다. 연희전문학교에는 건물마다  정면 꼭대기와 출입문 그리고 돌계단에 조차 태극이 새겨져 있고, 정원 곳곳에 무궁화가 만발하였으며, 뒷면 벽 꼭대기에 새겨있는 열두송이 무궁화를 본 윤동주 시인은 고향을 발견한 듯 남다른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연희는 민족적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로, 만주에서 볼 수 없는 무궁화가 캠퍼스에 만발하여 있고, 도처에 우리 국기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일본말을 쓰지 않아도 되고, 우리 말로 가르치는 조선문학도 있다(고향에 돌아간 윤동주의 연희전문 소개말 중, 장덕순의 증언) 명동촌 막새기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명동촌의 사람들은 모두 집의 지붕 막새기와에 무궁화, 십자가, 태극문양 등을 새겨 넣을 만큼 애국심과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100여년이 지나 우여곡절 끝에 우리 앞에 그 편린을 드러낸 그들의 용광로같은 조국애가 우리 가슴에 뜨거운 북을 울린다.  -김재흥선생(김약연 목사의 증손) 기증-   참회록 / 육필 원고와 해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래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1941년 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과정을 밟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때 일본에 유학하고자 하려면 필수적인 것이 창씨개명이었다. 창씨개명 압박에 못이겨 숭실학교를 자퇴까지 했던 윤동주이지만, 결국 일본유학 수속을 위하여 성씨를 라 바꾸게 된다. 윤동주는 1942년 1월 졸업증명서 등 도일 수속을 위하여 연희전문에 창씨계를 제출하는데, 창씨계를 제출하기 5일 전인 1월 24일의 시작품은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된다. 참회록은 일제가 강요하는 창씨개명에 굴복한 자신에 대한 참회로, 시에서 나오는 만 24년 1개월은 1917년 12월생으로  1942년 1월에 만 24년 1개월이 된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당시에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창씨개명이었지만 그로 인해 상당한 괴로움을  표현했다. 그의 괴로움과 번민은 시 본문 뿐 아니라 원고 여백에 쓰여진 낙서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공상(空想) 내 마음의 탑(塔)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名譽)와 허영(虛榮)의 천공(天空)에다, 무너질 줄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무한(無限)한 나의 공상.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펼처서,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황금(黃金), 지욕(知慾)의 수평선(水平線)을 향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1955년 증보판 / 표지그림, 김환기.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48년. 그의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으로 유고 시집 를 출간하였다.(정음사) 1955년에는 윤동주의 서거 10주년을 기념하여 유고를 보충한 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1948-   용재 백낙준 박사상 여기 모신 이 어른은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다시 세운 초대총장 백낙준 박사이시다. 교육과 학문 민족봉사와 자유정신의 구현에 뜻을 두시고 일생동안 연세와 민족을붙들고 키운 연세의 정신적 지주시며 민족교육의 스승이시며 겨레의 지도자시고 하나님의 종이시다. 일찌기 연세를 국학연구의 발상지로 민족교육의 터전으로 진리 자유의 전당으로 힘써 이끄시며 연세는 연세인의 연세요 한민족의 연세요 세계의 연세임을 밝히시고 연세에 맡기어진 하늘의 사명을 일깨워 주시다 그러기에 용재 선생에게 있어서 연세는 사랑이요 생명이시니 여기 연세인과 함께 영원히 계시다. 
2    [고향문단소식] - "시조잔치" 닐리리... 댓글:  조회:2662  추천:0  2018-07-03
시대와 더불어 피여나는 우리의 시조... 제1회 교원시조문학상 시상식 연길서 (ZOGLO) 2018년7월2일 시대와 더불어 문학을 사랑하는 교원대오가 점점 늘면서 교정에 새로운 시조문화가 꽃피고 있다.   지난 6월 30일 오전,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교원시조사랑회(회장 허송절) 제1회 교원시조문학상 시상식이 연길 루요하비스호텔 회의실에서 있었다.   교원시조문학상은 교원들의 시조사랑회를 중심으로 더욱 많은 교원들이 우리 민족 고유의 문학형태인 시조에 대한 리해를 깊이 하고 학생들한테 좀 더 잘 가르치기 위해 2006년에 설치했다. 연변교원시조사랑회는 다년간 어린이들의 시조백일장, 두만강국제청소년시화전 등을 개최하면서 우리 문화 보급에 앞장서왔다.   답사를 하는 연변시조사랑회 허송절 회장   심사를 거쳐 리명호의 작품 "파도"가 금상을, 박초란의 "풀처럼 꽃처럼"이 은상을,황향숙의 "봄이 동상을, 연변대학사범분원의 차현민학생의 "파도"가 신인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였다. 연변대학 우상렬 교수는 심사평(김창희 시인 대독)에서 "교원들이 창작한 시조들이 또 하나의 새로운 문학풍경선으로 다가오고 있다."며 중국조선족문단에 생기를 더해주고 있다고 평했다.   금상수상자 리명호(아들 대령)과 함께   리명호의 '파도"는 우리 조선족이 꿈을 찾아 해외에서 신고스레 일하는 현실적 실존을 잘 노래했다. 즉 희망, 비극, 희망의 묘한 순환구조를 형성한 점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은상 수상자 박초란(중)과 함께 박초란의 "풀더러 꽃더러"는 우리 삶에 항상 항상 꿈이 있어 희망적이고 생기가 넘쳐남을 노래하고 있다면서 박초란의 시는 수수께끼를 푸는듯한 묘미를 주고 있다고 평했다.     동상 수상자 황향숙(중)   황향숙의 "봄"은 봄의 도래를 노래했다. 감칠맛 나고 재미나게 노래한 이 시조는 전반 시적경지를 '택배'로 잘 의인화 했다고 평했다.   신인상 수상자 차현민(중)   원로작가 림원춘옹은 축사에서 교원들의 시조사랑이 자라나는 후대들에게로 이어져 우리 말과 글이 아름다운 시조로 태여나고 그것이 오래오래 가기를 희망하였다. ///조글로미디어 문야
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지구는 하나!!! 댓글:  조회:2029  추천:0  2018-07-03
  + 자연을 칭찬하기  친구만 칭찬하지 말고  강아지만 칭찬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묵묵히 걸어가는 길도 칭찬하자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매를 익힌 감나무도 칭찬하자  풀숲에서 목청껏 노래하는 풀벌레들도 칭찬하자  둥둥 달을 띄워 놓고 있는 연못도 칭찬하자  동생만 안아주지 말고  고양이만 안아주지 말고  나무도 안아주자  풀들도 안아주자  꽃들도 안아주자  돌들도 안아주자  (권창순·아동문학가, 1961-)  + 지구의 일기  나는 더워서 입기 싫은데  엄마는 자꾸 옷을 입혀요  두껍고 딱딱한 콘크리트 옷  나는 뛰놀고 놀고 싶은데  꼼짝 말고 있으래요  머리 깎아야 한다고  소나무 전나무 갈대 솜털까지  자꾸만 깎아요  나는 아파서 살살 하라는데  아빠는 등을 너무 빡빡 밀어요  때도 아닌데 구멍 나게 밀어요  곰보딱지 같다고 집들을 밀어요  산도 밀어요  나는 따가워서 싫은데  엄마는 뭘 자꾸 발라요  농약도 바르고 제초제도 바르고  냄새 고약한 폐수도 발라요  (이병승·아동문학가, 1966-)  + 나무  나무는  청진기  새들이  귀에  꽂고  기관지가  나쁜  지구의  숨결을 듣는다.  (정운모·아동문학가)  + 분리 수거  친구야,  쓰레기를 분리 수거하듯  우리 감정을 분리 수거할 수 없을까?  누군가를 칭찬, 격려했던 감정을  사랑이란 마음 상자에 담아  쓰고 또 쓰도록 하고  누군가를 시기, 질투했던 감정은  미움이란 마음 상자에 담아  재활용 공장으로 보내어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없을까?  정말 그럴 수 없을까?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미워했던 마음을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게.  (오은영·아동문학가, 1959-)  + 흙  흙은 너무 지쳐서  겨우내 잠을 잔다.  북풍이 몰아쳐도  곤하게 잠을 잔다.  살갗은 얼어도  품 속 개구리알 씨앗들을  제 체온으로 다독인다.  잠 속에서도 다독이는 건  흙의 버릇이다.  실뿌리 하나라도  감기 들까 걱정이다.  입춘 무렵 흙은  잠이 깨어도  자는 척 누워 있다.  품 속 어린것들  선잠 깰까 봐.  (최춘해·아동문학가, 1932-)  + 흙에 생명을 주는 주인공                         또르륵  또르륵  한여름 밤 고요 속에  풀밭에서  아주 작으나  청량하고 또렷한 소리  그러나  그 소리가  이젠 점점  사라져 간다  그리고  흙의 생명도 잃어간다.  농약과 제초제가 주범이다.  흙이 살아야  인간도 살텐데...  지렁이의 걱정이다.  (조춘구·시인)  + 장갑과 호미    -원유 유출 피해 지역 갯마을  빨간 코팅 목장갑 한 켤레  갯돌에 걸터앉아 쉽니다.  갯바위의 끈적끈적한 기름때  까맣게 타르 장갑 되도록  닦고 닦아도 끝이 없다고  손 놓고 주저앉았습니다.  몇 발짝 옆 모래밭의 호미도  기름떡을 캐다 지쳤습니다.  육백 리터짜리 플라스틱 통  백삼십 개를 채워도 끝없으니  이 노릇을 어쩌면 좋겠느냐고  물음표로 바닥에 누웠습니다.  (안학수·아동문학가,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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