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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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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8)... 댓글:  조회:4294  추천:0  2018-07-13
국민의 애창가곡 '선구자'에는 그후 작곡자, 작사자 모두에게 좋지 않은 시비거리기 생기기도 했다. 표절시비와 작사자의 친일논쟁등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한 기사를 소개한다.   「선구자」 원제목은 「용정의 노래」” 세계일보 96. 11. 27 장렬한 조국 광복의 웅지를 노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전국민의 애창곡으로 손꼽혀온 가곡 「선구자」의 원제목은 「용정의 노래」였으며 가사도 현재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고 중국에 살고 있는 한 조선족 음악가가 주장,관심을 모으고 있다. 가곡 「선구자」와 관련,이같이 주장하고 있는 사람은 해방 때까지 2년여동안 조두남선생과 중국 흑룡강성에서 음악 활동을 했고,윤해영과는 1944년 처음 만난 후 45년 9월부터 한동안 작사가와 작곡가로 함께 일한 바 있는 김종화옹(75·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작사자로 알려진 윤해영은 국내에서 1933년 어느날 하얼빈에 살고 있던 조두남선생을 찾아가 시 한편을 내어놓으며 곡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후에 오겠다던 그는 지금도 소식이 없어 세인들에게는 표연히 사라진 「독립군」 쯤으로 인식돼 있다가 91년 이후 변절한 친일 시인이라는 주장이 나와 이 노래의 무분별한 방송 연주에 제동이 걸려왔다. 그러나 김옹의 술회 내용이 맞다면, 윤해영은 현재 불리고 있는 「선구자」의 가사를 쓴 적이 없고,애수에 젖은 동요 외에 「척토기」 「발해고지」 「해란강」 「오랑캐 고개」 「낙토만주」 등의 친일시를 썼기 때문에 「변절」 운운할 필요가 없는 친일시인이며 「선구자」의 작사자는 따로 있다는 얘기가 된다. 김옹은 「용정의 노래」에는 「선구자」에 나오는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등의 구절은 전혀 없었으며 그 대신 「눈물의 보따리」 「흘러온 신세」 등 유랑민의 서러움이 주조를 이루었다고 회고했다.<북경=연합> 「선구자」의 수난/작사자 윤해영 변절친일시인 밝혀져 “충격” 조국수복의지를 장렬하게 노래한 「선구자」는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온 국민이 사랑하는 국민가곡이다.  행사장이나 술자리에서,심지어 운동권집회에서도 불리는 「선구자」는 그러나 작사자 윤해영의 새로운 면모가 알려지면서 시비에 휘말렸다. 작곡자 조두남의 회고를 통해 비장한 청년독립지사의 이미지로 알려진 윤해영이 일제괴뢰 만주국을 찬양· 합리화하는 글을 쓴 변절친일시인이었다는사실이 당시 사료를 통해 지난 91년 처음 알려진 것이다. 「선구자」가 「낙토만주에서 터를 닦는 선구자」로 바뀐 친일시까지 발견돼 이 노래를 아껴온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주었다.또 최근 연변대 조선어문학과교수 권철씨(65)는 윤해영이 독립운동가가 아닌 시인이었으며 만주국의 친일조직인 협화협회에서 활동했고, 해방후 함북 회녕으로 가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구체적 행적을 밝혀내 오랫동안 가려졌던 베일을 벗겨냈다.이런 이유등으로 이 노래는 지난해 임정선열5위 영결제전때 조가로 선정됐다가 독립운동 유관단체등의 격렬한 반대로 취소됐다.「선구자」는 작곡시기가 10여년 앞선 박태준곡 「님과 함께」의 모작이라는 표절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   조두남의 ‘선구자’, 음원 표절과 가사 무단도용   항일 독립운동가의 기상과 해방의 꿈을 표현한 노래로 알려졌던 ‘선구자’는 한 때 제2의 애국가로 불리며 애창되었으나 거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곡이 되었다.   가사를 쓴 윤해영은 일제가 세운 만주국에서 ‘오족협화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일제를 찬양하고 옹호하는 작품 활동을 했던 친일 시인이다. 조두남은 윤해영과 함께 다수의 친일 노래를 만든 것이 밝혀졌다.   실제 2003년 옛 마산시가 ‘조두남 기념관’을 개관하려 하면서 시민단체와 충돌했을 당시, 기자는 중국을 방문해 조두남의 행적을 취재한 결과 연변의 학자들로부터 구체적인 자료와 증언을 확보하기도 했다.   1940년대 조두남과 함께 음악활동을 했던 중국 연변작곡가 김종화씨는 ‘선구자’가 ‘용정의 노래’의 가사만 바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용정의 노래’의 눈물 젖은 보따리와 같은 가사를 다 버리고, 지금은 어느 곳에 깊은 꿈이 깊었나 등으로 바꾸었다”고 증언했다.   연변학자들도 조두남이 친일활동을 하고 가곡 ‘선구자’를 조작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박창욱 연변대 역사학부 교수는 “선구자 노래는 ‘징병간다’는 걸 찬양하는 친일노래”라고 단정했다. 만주벌판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선구자는 항일독립군이 아니라 일본군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독립군들은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일본군을 발견하면 인근 산을 향해 급히 도망가기에 바빴다”며, “독립군들은 광활한 벌판이 아닌 산에서 싸웠다”고 말했다.   1940년대 연변에서 함께 음악활동을 한 조두남과 김종화씨.ⓒ구자환 기자 당시 가곡 선구자의 원곡 악보인 ‘님과 함께’가 확보되면서, ‘선구자’의 표절 논란도 드러났다.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인 ‘님과 함께’는 1922년 창작된 노래로 1932년 창작된 선구자보다 10년이 앞선다.   당시 노동은 중앙대 국악대학 교수는 ‘님과 함께’와 ‘선구자’를 비교하면서 “형식이 같고, 마디 수에서 전체적으로 조표와 박자가 같다”며, “전체적인 조표나 박자, 형식 등에서 너무나 일치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2003년 당시 마산시 조두남기념관 공동조사단도 조두남의 친일행적과 선구자에 대한 표절 논란에 대해 중국 현지 연구자들의 조사결과를 인정하고 조두남 기념관은 마산음악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     시대 현대 출생 1912년 10월 9일 사망 1984년 11월 8일 경력 한국음악협회 고문,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 고문 유형 인물 직업 작곡가 대표작 선구자, 에밀레종, 환상무곡 성별 남 분야 예술·체육/현대음악 요약 1912~1984. 작곡가 목차 접기 생애 및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생애 및 활동사항 191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6세 때 미국인 신부 캐논스(Cannons, J.)에게 작곡을 배운 뒤, 11세 되던 해인 1923년 가곡 ‘옛이야기’로 데뷔했다. 1928년 전후로 평양 산정현 잘로교회, 중앙교회, 남문외교회, 연화동교회, 명천교회, 기양교회 등 교회에서 개최하는 부흥회에서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찬송가 지도자로 지냈다. 그 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활동이 여의치 않자 만주로 가 그곳에서 청년기의 작품 활동을 했다. 1943년 3월 만주국 『예문지도요강』의 취지에 따라 일본 중심의 국민음악 창조를 목적으로 조직된 만주작곡가협회애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했다. 또한 1943년부터 징병제를 찬양하고 낙토만주와 오족협화로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내용의 군가풍 국민가요를 작사·작곡해 보급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에서 창작활동을 하다가, 6·25전쟁으로 마산에 피난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마산에 정착한 후 작품 활동보다는 피아노 교육에 힘써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 초대 지부장을 역임했고, 이어 경상남도문화상 심사위원, 한국음악협회 고문,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 고문을 역임하면서 향토문화 발전과 예술진흥에 많은 공헌을 했다. 대표작으로는 가곡 ‘선구자’·‘옛이야기’·‘그리움’·‘제비’·‘접동새’ 등과 교성곡 ‘농촌’, 오페레타 ‘에밀레종’, 피아노곡 ‘환상무곡’ 등이 있다. 작품 경향은 형식면에서는 고전주의, 내용면에서는 낭만주의, 정서면에서는 민족주의이다. 청년기에는 주로 우국(憂國)의 정을 담은 서정적인 노래들을 많이 작곡했고, 장년기에는 민족 고유의 장단과 가락이 어우러진 풍류의 멋이 깃든 민족주의 노래들을 많이 작곡했다. 작곡집으로는 가곡집 『옛이야기』(1962)·『분수』 (1962)·『산도화』(1970) 등과 피아노작품집 『환상무곡』(1970) 등이 있고, 음반으로는 『조두남가곡집』(1973)·『조두남가곡선집』(1979) 등이 있다. 저서로는 수상집 『선구자』(1975)와 『그리움』(1982) 등이 있다. ================      조두남 (趙斗南 1912~1984) 아호는 석호. 작곡가. 피아노 교육자. 평남 평양 출생. 평양 숭실학교 수학. 미국인 신부 죠셉 캐논스(Joseph Cannons)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다. 11세가 되던 1923년에 첫 작품인 가곡 를 작곡하였고 16세 때 첫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그 뒤 만주로 가서 해방 이전까지 그 곳에서 청년기의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의 대표곡인 가곡 는 1933년 만주에서 윤해영의 시에 곡을 붙여 작곡된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창작활동을 하다가 6ㆍ25가 일어나자 마산으로 피난 가서 그 곳에 정착하였다. 마산에 정착한 후 작품활동보다는 피아노 교육에 주력하였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는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 초대지부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한국음악협회 마산시 지부장,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지역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62년 경상남도 문화상, 1976년 눌원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82년 MBC창사 20주년기념 가곡공로상을 받았다.          작품목록   가곡 1. 옛 이야기 (1923년) 2. 선구자 (윤해영 작사, 1933년) 3. 제비 (1937년) 4. 산 (1940년) 5. 뱃노래 (1941년) 6. 접동새 (1943년) 7. 새타령 (1943년) 8. 그리움 (1944년) 9. 산촌 (1958년) 10. 길손 11. 또 한 송이 나의 모란 12. 해당화 13. 목탁소리 14. 학 교성곡 1. 농촌 (1942년) 오페레타 1. 어린의의 정경 (1929년) 2. 에밀레종 (1945년) 기악곡 1. 피아노곡 음반 1. (1973년) 2. (1979년) 가곡집 1. (1947) 2. (1949) 3. (1962, 정양사) 4. (1970, 세광출판사) 저서 1. 수상집 (1975년) 2. (1982년)      ======================   2014.11.14신고의견 쓰기  
15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7)... 댓글:  조회:2731  추천:0  2018-07-13
뒤미처 또 신문에 발표된 윤해영선생의 글에 곡을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동북인민자위군송가》였습니다.《흥안령 높이 솟아 우리들의 새 기상 / 송화강 힘찬 줄기 우리들의 뜻일가 / 손잡고 너도 나도 달려 모인 동지들 / 맹세도 장하구나 동북인민자위군 // 빛나는 청천백일 대지에 붉은데 / 황하수 남북하늘 로선 리념 다르다 / 새로운 민주주의 자유평등 기발아래 / 이 한몸 혁명 위해 붉은 피도 바치리 // 동북은 우리의 터 우리들이 지키여 / 중국의 완전해방 실현하기 위하여 / 칼 들고 싸워 갈길 검산도수 험해도 / 막을자 그 누구냐 정의용사 우리들 // 새 세기 부는 바람 오대양은 끓는다 / 성을 넘어넘어 두만강을 건너서 / 침략자 내적외구 한칼로 베고 / 아세아 하늘가에 평화종을 울리다》(김종화선생은 격동된 심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1946년 7월, 목단강 서장안공영회관에서 부대의 위문공연을 했는데 2일간 걸렸어요. 끝나는 날 윤해영선생이 공연을 관람하고 나를 만나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조두남선생이 이미 조선으로 가고 없어 윤해영의 다른 친구 두세분과 함께 자리를 했었는데 그것이 마지막 상봉이였습니다. 그후 우리 악극단이 도문에 이르러 공연을 할 때 극단의 사람들이 윤해영선생이 떡국장사를 하는지 어느 식당에서 나오는것을 보았다고 합디다. 그가 재취한 후처가 잔치해서 일곱달만에 해산을 했는데 윤해영선생의 아이가 아니였답니다. 그래서 리혼을 하고 떠돌다가 조선으로 건너갔지요. 1949년 16절지 석판인쇄로 된 조선 노래집에서 윤해영선생의 가사로 되여있는《분여받은 땅》인지 하는 노래를 보았어요. 가사 내용은 대개《장군님 주신 땅에 밭갈이 하세》라는 뜻이였습니다. 그후론 소식을 몰라요. (윤해영선생은 조선에서 1956년에 별세했다고 한다. - 필자 주) 문 :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선구자노래》가 확실히 있었습니까? 답 : 1962년엔가 어느날 서울방송을 들을라니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오더군요. 1944년 봄에 녕안에서 조두남선생의 신곡작품으로 발표한 그《룡정의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노래제목이《선구자노래》로 되여있더라구요.  특히 가사에서 보면 류랑민의 서러움이 력력히 보이는《눈물 젖은 보따리》거나《흘러온 신세》같은 구절은 없어지고 그 대신《활을 쏘던 선구자》,《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로 되였더군요. 원 가사에는《선구자》라는 문구가 전연 없었답니다.《룡정의 노래》를 발표한 그 당시 목단강지대는 물론 한국 전체에서도 항일투쟁이 이미 저조기에 들어갔으며 군경들의 경계가 삼엄한 때인데 커다란 녕안극장에서 감히《조국을 찾겠노라 말 달리던 선구자》라고 노래 할수 있었겠습니까? 그 시기 서울에서는 일장기를 걸고야 음악회를 했다고 하는데 그처럼《선구자》를 노래했다면 그것은 민족해방 투사가 아니라 우매한 사람일수밖에 없습니다. 연주에 참가한 나 역시 나이가 어리긴 했어도 단군력사를 배웠고 애국가를 부르며 자라났으므로 일본놈이 되기 싫어 종래로 일본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이긴 했어도 그런 담량까지는 갖지 못했었습니다.《선구자노래》는 원래의 곡이긴 하지만《룡정의 노래》를 가사로부터 제목에 이르기까지 고친것입니다.  한국의 책을 보면《선구자노래》는 1932년에 창작된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당시 룡정에서 불렸다고도 하는데 그때 룡정에서 살았거나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 그런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답니다. 그리고 예술가란 자기의 작품을 자랑하기를 좋아한답니다. 조두남선생도 그러한 분이였습니다. 그런데 나하고 2년나마 사귀여왔고 무랍없는 사이였지만 그런 말 한마디 없었다구요. 더구나 1944년 봄에 녕안에서 가진 신작발표공연에서 처음으로《룡정의 노래》를 내놓았던것이랍니다.  문 : 조두남선생의 다른 애호가 어떤것이 있습니까? 답 : 그분은 장기를 아주 잘 두었습니다. 신안진에서 그분을 당할 사람이 없었답니다. 한다하는 오장기도 조두남선생한테 졌으니까요.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평양에 계실 때 담배돈이 떨어지면 거리에 나가 장기박보풀이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한테 가서 고개를 기웃거리면 벌써 장사군들이 슬그머니 돈을 쥐여주며 자리를 뜨기를 바랐다는겁니다. 평양에서도 그의 장기가 소문이 자자했던가 봅니다.  문 : 김선생님 외에 조두남선생을 아시는 분이 생존해계십니까? 답 : 있지요. 조두남선생의 작곡으로 된《고향생각》을 시창한 남수억(南寿亿)선생이랍니다. 지금 팔가자에 계십니다.  필자는 1995년 5월 16일 오후 1시 20분에 화룡시 팔가자진 상남촌에 사시는 남수억선생을 찾았다. 남수억선생은 1922년 4월 4일 연길현 팔도향에서 출생하셨다고 한다. 그날 취재석에 동석한 분들로는 남수억선생의 부인 안경숙(安京淑 69세), 박장길(朴长吉 35세 연길시조선족예술단), 김윤찬(金允灿 47세 한국 서울신문사 사진부 차장) 등이였다.  ▲ 목단강 ⓒ 봉황망(凤凰网) 당시 취재자료를 보자. 문 : 신안진으로 언제 갔습니까? 답 : 내가 7세 때에 조선 청진으로 이사를 갔다가 1942년 봄에 신안진으로 다시 이사를 갔댔습니다.  문 : 조두남선생이 신안진으로 언제 왔습니까? 답 : 1942년 가을인가 겨울인가일겁니다. 자그마한 연출대가 신안진에 와서 공연을 했는데 조두남선생이 손풍금을 쳤답니다. 약침쟁이였는데 안원장이 붙들어서 술을 먹이면서 치료했습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권녕일이 주동이 되여 조두남선생이랑 목단강에 가서 민족예술절에 참가했습니다. 나는 1944년 녕안에서 가진 조두남선생의 신작발표회에서 노래《고향생각》을 불렀습니다.  문 : 조두남선생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답 : 키가 크고 몸이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걀죽했습니다. … 나는 팔가자림업국 기본건설과에서 일하다가 1980년에 퇴직했습니다. 윤해영선생은 이름은 들었고《룡정의 노래》를 작사하여 조두남선생이 곡을 붙여서 녕안에서 있은 신작발표공연에서 불렀답니다.  김종화선생과 남수억선생의 회상담을 들어보면 조두남선생은 신안진에서 살았었고 녕안에 살았던 윤해영선생과 래왕하면서《룡정의 노래》,《목단강의 노래》,《산》,《흥안령마루에 서운이 핀다》등 노래를 창작했다. 그리고《선구자노래》는《룡정의 노래》의 가사를 뜯어고친 재판에 불과하다. 그런데 조두남선생은 왜서 1932년에 윤해영을 만난 뒤로는 다시 상봉하지 못했고 윤해영이《선구자노래》라는 가사를 썼다고 했을가?  김종화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조두남선생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조선생이 아니라 다른 제삼자가 조두남선생의 이름을 빌어 력사를 분식한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물론 이는 김종화선생께서 조두남선생을 존경하는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력사는 력사인것만큼 조두남선생이 글로써 남겼으니 믿지 않을수도 없는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조두남선생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을가?  광복후 랭전으로 말미암아 조선반도가 분단되고 중국과의 래왕도 끊어졌으니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국 국민한테 해도 윤해영, 김종화 등 동료들이 모를거라는 생각에서 한 말일가?  그리고《룡정의 노래》를《선구자노래》로 뜯어 고친것은 조두남선생의 소행일가 아니면 제삼자의 소행일가?  노래의 가사가 후세인에 의하여 임의로 고쳐진다면 그것은 력사의 진실을 뜯어 고치는것과 같다.《동북인민행진곡》의 제4절 마지막 구절의《아세아의 평화를》하는것이《새 동북을 건설하자》로,《동북인민자위군송가》의 제2절 첫구절《빛나는 청천백일 대지에 붉은데》가《빛나는 혁명기발 대지를 휩쓰는데》로 그리고 제4절 두번째 구절과 세번째 구절《장성을 넘고넘어 두만강을 건너서 침략자 내적외구 한칼로 베고》가《장성을 넘어넘어 황하장강 건너서 간악한 내외 원쑤 한칼로 베고》로 후에 고침으로써 민족색채가 사라지고 완전한 혁명노래로 탈바꿈 한것과 같이 한수의 애수의 노래 -《선구자노래》가 비장한 민족 투사의 노래로 된것이 아닐가? 조두남선생은 1932년 윤해영이라는 사람이 가사를 주고 표연히 사라진후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 아마 독립군이였을것이라고 전설적인 이야기를 창작했는데 그것 또한 무엇때문일가?  광복전 몇해간 윤해영과 래왕하면서 여러수의 노래를 창작했고 아울러 동료들과 함께 윤해영의 집에서 파티까지 가졌으면서도 왜서 윤해영을 독립군 전사로 미화하고 희생되였을것으로 추측을 했을가? 그렇다면 윤해영은 독립군이였던가?  만일 조두남선생의 회상을 사실이라 믿어서 윤해영이《선구자노래》를 1932년에 썼다고 하자. 하지만 이미 알려진 윤해영의 광복전 창작품에서 이른바《선구자노래》를 내놓고 애수에 젖은 동요외에《발해고지》,《해란강》,《사계》,《오랑캐고개》,《락토만주》등은 친일시들이다.  1938년에 창작한《오랑캐고개》에서 시인은《오늘은 이 고개에 / 오색기 나붓기고 / 폭도군 젊은이들이여 / 노래소리가 우렁차서 / 두만강 나루터엔 다리가 걸리고-》로 일제통치를 구가했다.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 "혈연의 강(류연산)"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봉황망코리아미디어 
14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6)... 댓글:  조회:3357  추천:0  2018-07-13
     한 시인의 안타까운 민족 배반                ~의 시인 윤해영의 만주에서의 친일 창작활동                                                                                      오양호(인천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시인)                                            Ⅰ 윤해영은 누구인가  윤해영의 ‘선구자’는 한 때 ‘애국가’에 버금갈 만큼 있기 있는 가곡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 가곡을 열창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77년부터 만주이민문학을 연구해1) 오던 나는 윤해영이 독립군이 아닌 시인이고, 그것도 여러 편의 친일시를 쓴 것을 발견하고, 그 충격과 번민 속에 있을 때 1993년 3월 마침 문민정부가 출범하여 대통령식이 거행되는데 ‘애국가’가 제창된 후 가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속에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보게 되었다. 나로서는 너무나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윤해영의 가 내 머리를 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머뭇거리지 못하고 「동아일보」에 칼럼을 썼고2), 「동아일보」가 내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3) 선구자를 국가행사에서는 부를 수 없는 가곡이라는 공감대가 천천히 대중 속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 후「국어국문학회」지에 이란 논문을 발표하였고4), 이 논문을 읽은 독자들이 논문내용을 인터넷에까지 여기저기 퍼 날랐다.5)  윤해영尹海榮이 시인으로 밝혀진 것은 1990년이다6). 그 이전까지는 윤해영은 베일에 싸인 신비한 존재였다. ‘신비한’이라는 말은 그가 만주천지를 주름잡던 독립군이자 가곡 의 작사자로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 한국인들에게는 애국가만큼 숭엄한 가곡으로 애창되어 온데다가, 더욱이 이곡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기 에 그에 대한 신비감은 더 강했다.     1932년 10월의 어느 저녁 무렵, 만주 모란강변에 있는 서장안가西長安街의 한 싸구려 여인숙에 묵고 있던 조두남趙斗南에게 윤해영이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윤청년은 평소 만주의 평원을 무대로 일제와 싸우다가 쓰러져간 독립투사의 혼을 위로하고 아울러 만주지역에 사는 동포가 선열을 추모하며 노래할 수 있는 장엄하고 위대한 노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는 목단강에 젊은 작곡가 조두남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작시 한 편을 들고 그 곳을 헤맨 끝에 조두남을 찾아냈다고 했다.   두 명의 청년은 의기투합했다. 윤해영은 조두남에게 용정에서의 동포들의 고생과 독립운동의 상황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조두남은 윤해영의 시에 감격하여 ‘내 민족이 함께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고 희망을 잃지 않으며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남긴 그 소원에 응하기 위해서 젊은 정열을 기울여 작곡에 착수했다.7)     조두남은 불과 16세가 되던 1928년 첫 작곡집을 출판하는 재능을 보였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재기가 출중하였던 까닭에 1930년대에는 그에 대한 소문이 인근지역은 물론 만주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932년에 조두남의 이름을 듣고 만주의 용정에서 찾아온 윤해영이라는 청년으로부터 노랫말이 적힌 메모를 받아서 작곡한 노래가 이다. 이노래는 라는 제목으로 불려졌으나, 해방 후 선구자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8)     1933년 내가 만주 하얼빈에 살고 있을 때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함경도 말씨를 쓰는 그는 시 한 편을 내 놓으며 곡을 붙여달라고 하고는 표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가 그 노래를 곧 찾으러 오겠다고 했기에 나는 작곡을 해 놓고 기다렸으나 그 청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주고 간 시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독립군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에게 왔다 간 뒤 어쩌면 어디에선가 전사했을 것이다9).    전설 같은 내력이다. 그러나 우리는 윤해영이나 조두남에 대한 이런 신비한 내력에 관계없이 가곡 를 애창한다. 가사 전체가 가지고 있는 비극적 서사성과 곡이 주는 장중한 선율이 우리를 항상 압도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에서는 윤해영의 이력을 이렇게 기술하기도 한다.     룡정은 조선인들이 집중된 곳으로서 전후로 여러 가지 반일 단체와 반일 문화 조직들이 발족되어 반일투쟁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 유서 깊은 도시를 선배들에 대한 경모의 심정을 담아 노래한 것이 (선구자)이다. 작사자 윤해영은 반일 사상이 경정한 열혈청년이었다. 그는 계속하여 많은 작품을 썻으며 해방직후에도 (김종화 작곡)등 우수한 작품을 남기고 조선 회령으로 나갔다10).    조두남이 윤해영을 보는 것과 같은 견해이다. 그러나 김덕균은 다른 하나의 사실을 더 전해준다. 즉 윤해영이 해방 후에도 와 같은 ‘우수한 시’를 썼다는 사실과 공산주의자가 되어 북한으로 갔다는 내력이다. 와 같은 ‘우수한 작품’은 대할 수 없으니 구체적인 언급을 할 수 없지만, 글의 문맥으로 보아 그 ‘우수한 작품’은 사회주의 이념을 찬양한 글일 듯하다.   「만주시인집滿洲詩人集」에 수록된 ,「반도사화와 낙토만주半島史話와 樂士滿洲」에 수록된 , 역시「반도사회와 낙토만주」에 수록된 는 의 시의식과는 제목만 봐도 거리가 멀다. 작품 제목이 모두 친일문제를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윤해영의 시가 문제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에 있다.   와 의 시의식이 정반대를 형성하는 점은 완전히 독자들의 예상을 뒤집는다. 시 가 민족의 독립의지를 너무나 곡진하게 서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만주시인집」에 수록된 다른 세편의 시 ,, 도 와 동일한 시의식이 작품을 지배하는 점 역시 그러하다.  박팔양朴八陽은「만주시인집」의 서문에서 윤해영의 를 인용하면서 ‘만주 땅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우리의 고향’이라며 칭찬하고 있다. 당시 만주 문인의 대부 노릇을 하던 박팔양이 민족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빌미로 윤해영의 시를 인용하고 있다.  이 글은 윤해영의 이런 문제의 시 6편, 곧 를 지배하는 시의식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과제이다.   Ⅱ, 민요적 율격과 반민족적 시의식   와 는 형식면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시의 내포(Connotation)는 그렇지 않다. 먼저 시 형식을 검토해 보자.     ①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드래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 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깊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②   一, 五色旗 너울 너울 樂土滿洲 부른다       百萬의 拓士들이 너도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福을 받은 百姓들       希望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二, 松花江 千里언덕 아지랑이 杏花村       江南의 제비들도 봄을 따라 왔는데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       荒蕪地 언덕우에 힘찬광이 두르자     三, 끝없는 지평선에 五穀金波 굼실렁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흥겨워      우리는 이 나라의 터를 닦는 선구자      한 천년 세월 후에 榮華萬世 빛나리11)    시 ① ② 의 각 행 첫 음절이 3음절로 된 것을 제외하면 시 ① ②가 모두 4음절로 이루어진 4음보격 율격양식이다. 또 두 시가 모두 3연으로 되어 있는 점도 같다. 4보격 음보의 연속은 우리말의 발화구조에 잘 어울릴뿐더러 4보격으로 율격적 효과 창출에 도움을 준다. 또 말의 자연스러움을 훼손시켜야 하는 부담도 가장 적다. 이런 점에서 4음 4보격은 완전한 율격적 평형을 얻고 안정성을 확보하게 된다. 4보격 특유의 유장한 율동감을 가장 자연스럽게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두 시의 경우도 만주 황야를 달리는 선구자에 대한 고양된 정서, 그리고 그 만주를 약속된 땅으로 생각하며, 어떤 숭고한 정신에 대한 교시적 헌사의 의미가 4음4보격 때문에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시 ①은 한국인들이 체험했던 반일적 민족 정서를 4보격의 장중한 시어로 형상화시켰다. 그 결과 가곡의 가사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곡 를 해설하는 한 연구자는 이 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를 부르며 비장하고 엄숙한 기분을 느껴보던 청소년기를 가지고 있다. 는 가사에 내포되어 있는 바와 같이 독립투사들의 고혼을 달래기 위하여 만든 노래이다. 장엄하고 엄숙하고 비감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이 노래는 숱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오늘에도 불려지고 있다.12)    ‘장엄하고 엄숙하고 비감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이유가 4음4보격의 운율이 가지고 있는 특징 때문이다. 물론 가곡으로 불릴 때는 그 곡이 가지고 있는 음악성이 지배한다. 그렇지만 의 경우 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율격적 특성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4음4보격이 한국의 기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민요 가락이기 때문이다.  4음4보격의 율격은 그 연원이 고려가요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잘 아는 등을 지배하는 율격은 4음4보격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임란을 거치고,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 시조, 가사의 장르를 넘으면서 서민들의 기층문화의 영역에까지 이 율격이 영향력을 뻗친다. 곧 판소리, 잡가, 민요에서도 4음4보격이 지배적인 율격 형태로 정착한다. 이런 점에서 위의 시 ① ②는 우리 민족의 미의식 속으로 깊숙이 들어올 수 있는 요소를 구비하고 있다. 바로 이 시가 가지고 있는 감탄할만한 율격적 특징이다.  4음4보격의 민요는 원래부터 민요적 전통으로서 존속되어 온 것이 아니다. 상층문화의 영향력이 기층문화의 저변에까지 확대되고, 민요가 이것을 새로이 받아들임으로써 확장된 영역이다. 시 ②가 선 자리가 바로 여기다. 시 ②는 민요에서 파생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록 문학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념성의 표출’이다. 곧 일본에 대한 ‘관념적 찬미’다. 이것은 시조나 가사가 4음4보격의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고 가장 우세한 가락의 자리를 형성하던 15, 6세기 이후에 일어났던 현상과 비슷하다. 당시의 4음4보격은 새로운 지배 이념이 된 유가儒家적 세계관의 구체적 실천을 이상으로 삼았던 지배계층(사대부)들의 미의식을 가장 잘 표현하는 율격모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가치질서의 재편과 더불어 이의 확산을 위해 4음4보격의 형식을 절대화하였던 것이다. 4음4보격의 이런 민요 율격화의 과정은 시 ②가 차용하고 있는 민요 율격과 발상에서 그 시대와 지배계층의 성격이 유사하다.  시 ①과 ②는 형식면에서는 꼭 같다. 그러나 시 ①을 지배하는 시 의식은 생생한 체험에 바탕을 둔 민족의식이고, 시 ②는 체험되지 않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바로 지배 계층의 속성인 그 ‘관념론적 진술’이다. 시 ①과 ②가 형식면에서 동일하면서도 내용면에서 반대가 되는 것은 시의 이런 기본 심상에서 찾을 수 있다.  만주의 새로운 지배 계층, 친일 세력은 일본이 장차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 믿기에 일본 민족이 우수하다는 것을 주장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니 추상화, 관념화가 불가피했다. 당시는 친일 세력이 당당한 지배 세력이었고, 그 지배 세력은 하나의 이상을 민중 속에 실현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 윤해영은 민요의 형식, 또는 파생적 민요 형식이라도 빌어 와야 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윤해영은 대단한 지력자적 면모를 띤 시인이다. 시 ②가 반민족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보다 먼저, 그리고 더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사항이 이런 점이다. 왜냐하면 결과적이긴 하지만 발상 자체가 우리민족의 고유한 4음4보격의 양식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그 내용이 본질적으로 반민족적인 것과 제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조선조의 가사가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던 사대부의 논리가 민요형식으로까지 확산된 것은 민족 정서의 지속과 변화로 설명할 수 있지만, 타민족의 지배 논리가 가장 민족적인 형식으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동일한 시각의 해석을 절대로 할 수 없다. 민족 정서를 기층에서부터 뒤집어엎으려는 기도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섭고 두렵다.  그러면 시 ①과 ②가 가지고 있는 내포(Connotation)는 어떤가.  시인은 한 시대를 예언하는 지식인이다. 그렇다면 시인으로서의 윤해영이 남긴 반민족적인 행적에 대한 문책은 지나가는 말로 면책될 문제가 아니다. 그의 예술적 행위가 어떤 시인의 그것 보다 강하게 우리들 앞에서 생생히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를 열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점을 생각할 때 가곡 와 시인 윤해영의 문제는 온 국민이 알아야 할 급박한 과제이다.  시 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시①과 ②는 다 같이 매 연 제 3행이 명사로 끝난다. 먼저 이점이 문제다. 시 ①에서는 모두 ‘선구자’이고, 시 ②에서는 제 3연만 ‘선구자’다. 그런데 그 ‘선구자’의 내포(Connotation)는 정 반대이다. 지칭하는 대상이 앞의 것은 ‘우리, 곧 조선’이고 뒤의 것은 ‘일본’이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에서)      우리는 이 나라의 터를 닦는 선구자. (에서)    의 ‘이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만주국이다. 그러나 그 만주국이라는 것은 일본이 세운 허수아비 나라이며, 꼭두각시 정부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연, 제 1연과 제 3연의 제 3행은 그 시상이 서로 비슷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주제와 시상이 반대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시 ①      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시 ②           이역하는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시 ①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시 ②    제 1연에서는 해란강 물줄기를 따라 말을 달리며 독립운동을 하던 거룩한 선구자의 시의식 대신, 만주국의 복을 받은 백성이란 시상이 자리 잡고 있고, 제 2연에서는 망명지의 땅을 누비며 무예를 닦던 선구자의 자리에 만주국의 흙을 개척하는 백성들이 서 있다.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이란 것이 다름 아닌 시 ②의 제 1연 제 2행의 그 척사拓士이다. 척사들의 개척으로 황야인 만주가 열리기에 만주국으로서는 그 공로를 마땅히 칭송해야 할 일이다. 윤해영이 이런 일에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란 시가 바로 그런 행적을 보여 준다.    ③    고향을 떠나든 날 진달래 꺽거훗고    하룻밤을 오구나니 눈이 상기 쌓였구나    찬바람 滿洲벌판이 바로 예가 거기리      사나히는 城을 쌓고 婦女들은 흙을 날라    創世記 神話처럼 새 部落은 일워졌다    아들 딸 代代孫孫이 이 땅우에 사오리      언덕은 무연하고 온갖 雜草 욱어진데    나는야 소를 모라 것친 땅을 일구는 이    地平線 저-너머로 봄바람은 부러온다13)    이글의 형식은 연시조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렇다면 형식면에서는 아주 민족적이다. 앞에서 고찰한 시 ②가 4음4보격의 민요율격으로 민족 정서를 파고들어 가려던 그런 시의식과 동일하다. 아니 그런 전략을 앞지른다. 우리민족 고유의 형식 시조에 주제를 담고 있는 까닭이다.  진달래를 꺾어 그 꽃잎을 뿌리며 고향을 떠나 말로만 듣던 만주를 찾아온 남녀는 힘을 모아 만주국의 국민으로서 자손만대가 복을 누리며 살 마을을 만든다. 그 계절은 봄, 희망이고, 평화의 봄이다. 이상향을 만주, 곧 만주국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다. 1940년대의 만주 현실이 이렇다고 믿을 조선 사람은 많지도 않고, 내놓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어려울 탠데 를 쓴 윤해영은 그렇지 않다. 현실이 고통스러우면, 시는 그런 현실을 뛰어 넘기 위해 이상향을 노래할 수 있다. 낭만주의 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런 문학적 특질은 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윤해영이 시조형식을 차용해 쓴 시 ③을 낭만적 시각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아니 그렇게 할 근거가 없다. 척토, 곧 땅을 개척한다는 것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고, 가장 고통스런 문제인데 그 힘든 노동을 찬양하고 있는 까닭이다. 낭만시의 대상은 현실 너머에 있다. 1930년대부터 만주로 이주한 우리 민족이 그 황야를 힘들게 개척했다는 것은 그 때의 역사가 분명히 증명하는 일이다. 그런 비참한 현실을 이렇게 미화시킨다. 관념적 과장이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정치적 선동문학의 전형이다. 이렇게 윤해영은 1940년대 민족 현실을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인식하고 있다. 현실의 배반이고, 민족의 배반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은 민족의 한과 고통이 육화된 아리랑과 같은 작품을 날조하던 당시의 반민족적 기류와 그 궤도를 같이한다.      ④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니     새 하들 새 땅이 이 아닌가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세         말밥굽 소-리 끈어지면     동-리 삽살개 잠이드네       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五族의 새살림 평화롭네       븨였던 곡간에 五穀이 차고     입담배 주머니에 쇠소리 나네       보아라 東方에 이 밤이 새면     격양가 부르며 萬사람 살리14)    만주 봉천의 홍아협회라는 데서 발행되던 만주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에 실린 이다. 이것은 아리랑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대표 민요 아리랑에 ‘오족협화五族協和…’ 운운하는 구절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고, 민족 정서와도 정면으로 대립된다. 그리고 만주를 밝고 활기차며, 희망의 대지로 인식하는 시 의식 또한 현실성이 약하다. 유민으로 떠돌고, 독립군으로 쫓기고, 두만강을 건너가 도둑 농사를 짓다가 월강죄로 참수를 당하고, 가난으로 딸을 팔아가며 목숨을 잇고, 마적 떼에 시달리면서도 독립군의 군자금을 대었던 민족사의 그 엄혹한 내력이 무시되고 있는 까닭이다. 민요 아리랑은 어떤 경우라도 민족의 고난사와 연결된다. 따라서 민족사와 연결되지 않은 밝음은 가짜다.  이런 점은 당시 최남선이 만주에 거주하면서 고 외치며 ‘만주는 이제 왕도의 지표 하에 새 역사의 건설이 재촉되고 잇다. 이에 대한 일본제국의 지도력이 아모러한 저해도 늣기지 아니할 것은 진실로 무론이다’고 하면서 ‘우리가 어떠케 이 위대한 천직을 소홀히 할 것인가. 그리고 만주낙토화 이외에 무슨 조흔 일을 다시 어듸에서 어들 것인가’라며 정신을 팔던 언사와 일치한다.  시인 유해영의 1940년대 초의 정신이 이러하지만 한「중국조선족 문학사」는 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문학적 의미를 높이 평가한다.    는 1930년대 초기에 창작 된 후(조두남 작곡) 널리 보급되어 크낙한 영향력을 산생한 노래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현대의 령마루에 서서 흘러간 민족의 력사를 돌이켜 보면서 외래의 강포에 대항하고,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연히 떨쳐나 슬기와 용맹, 절개와 위훈으로 자랑을 떨친 우리 조상들, 특히 선구자들을 절절하게 추모하면서 민족의 비운을 찬 몸에 지니고 나라와 민족을 건져 낼 선구자들의 출현을 그 같이 고대하고 있다.  이 노래는 그 시적 정서가 비장하고 겨레의 넋이 세차게 사품치고, 민족의 념원과 정서를 대변함으로 하여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아주 널리 전승되어 불리우고 있다15).    의 주제를 염두에 둘 때 윤해영에 대한 위와 같은 문학사적 평가는 용인될 수 없다. 특히 시 ②, 제 2연의 제 3행이 의 바로 그 시의식과 동일함이 분명하고, 제 3연의 ‘아리랑도 흥겨워’의 그 아리랑도 이름이 아리랑이지 우리 민족의 한을 달래는 민요 아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이다. 은 일본 추종세력들이 우리의 고유민요 형식에 당시의 반민족적 정서를 담아낸, 그래서 민족주의자들을 훼절하게 만들던 노래의 하나다. 죽느냐 사느냐의 실존의 문제에 늘 쫒긴 것을 감안 하더라도 은 의 그 도저한 민족성을 너무 크게 훼손시키고 있다. 인용 ④의 가사에 이런 내용이 확연히 나타난다.   전편을 지배하고 있는 활발함도 만주를 희망의 땅으로 인식하는 데서 온다. 이것은 만주국 국가에 나타나는 ‘세계동화원지즉 흥천지동류世界同化遠之則興天地同流’란 의미나 ‘조선인의 오래 폐쇄되얏던 종족적 원기는 일본의 국책에 자극되야 바햐흐로 진장의 고조를 보이고 잇다. 그리고 이를 추진함에 놀라운 종족 번식의 고율이 잇다. 이 두가지가 합하야 조선인의 발전력은 역외로 향하여도 저절로 활발하지 아니치 못할 터’16)라며 순천안민順天安民을 기원하던 언사와 같이 간다. 또  이란 민요를 날조해서 ‘오족의 새살림 풍년든 땅에/ 춤추며 노래로 배 떠나가네’ 라는 정신세계와도 같다. 가 형식면에서 시조로 나타나는 것, 이 민요란 이름으로 날조되던 그 의식과 발상이 동일하다.  오족협화란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 대동아 건설정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정신을 바꿔야 하고, 그 정신 개조가 예술의 형태로, 그것도 우리 민족 고유의 모습을 갖춘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윤해영의 와 시조 가 놓인 자리가 바로 그러하다.  이런 점을 에서 살펴 보자.    ⑤     오날 이 고개엔     五色旗 발붓기고     목도군 절믄이들의     노랫소리가 우렁차서     豆滿江 나룻터엔 다리라 걸니고     南쪽으로 通한 길은 널버저……     이 봄도 나의 族屬들이     무테이 무테이 이 고개를 넘으리     한숨도 恐怖도 다 흘러간 뒤     다-만 希望의 깁분 노래 불으며 불으며     무테이 무테이 이 고개를 넘으리17)                              에서    ‘昭和 十二年 四月 於 龍井’(1937년)이라고 창작일자가 명기된 이 시는 일본의 만주 점령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정신적 갈등은 어디에도 없다. 오색기가 봄바람에 나부끼는 아래에서 젊은이 들이 목도를 메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우렁차단다. 긴긴 봄날 목도를 메는 일이 고통스러울 텐데 어째서 그 소리가 우렁차게만 들릴까. 두만강을 건너 넓은 길을 메우며 떼를 지어 밀려오는 동족들을 보았지만 한숨과 공포가 사라졌단다. 관념이 너무 앞서 있다. 현실에 대한 막연한 선험적 희망이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만 아니다.      물ㅅ 개와 坐首의 딸과 살아서    사람과 갓튼 물ㅅ 개를 낫코    물ㅅ 개와 갓튼 사람이    사람과 갓튼 사람을 나서    그 어른이    큰아큰 中原을 통트러 다스렀다는    아리숭한 이야기가 있다.    몽고 건국 설화와 연루된 첫 연이다. 만주의 내력을 몽고족으로부터 끌어 오고, 청나라로부터 끌어와 오족이 화합했다고 기뻐하고 있다. 삭막한 대륙을 무대로 살아 온 만주족에게 있어서는 ‘물’은 외경의 대상이다. 그런 물에서 사는 물개와 사람 사이에서 누르하치 같은 영웅이 태어났고, 그래서 몽고족은 본질적으로 큰 힘을 지닌 족속이 됐다고 찬미하고 있다. 물론 ‘오랑캐 고개’란 말 속에는 이런 신화를 그냥 웃으며 말해 버리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없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시 는 두만강을 건너던 북간도 이사군의 한숨의 관문이었고, 10년 전부터는 밀수꾼 젊은이들의 공포의 관문이었는데 이제는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넘는 관문이 되었다며 그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시대에 대한 고통스러운 반응이 없고, 현실을 완전히 낙관적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다. 작가의 선험적 진술이 리얼리티를 거세시킨다.    Ⅲ, 순수 서정, 그 역사의식과의 결별    윤해영의 시가 앞 항의 내용과 같이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만주시인집」에는 외에 , , 가 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세상에 알려진 바 없는 윤해영의 시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로 대표되는 민족의식의 맞은편에 가 놓여있기에 우리는 이런 시에 더 주목해야한다. 따라서 이런 작품에 나타나는 시의식도 한번 검증할 필요가 있다.  세 작품의 전문을 찬찬히 읽어 보자.     寂寞한 江이로다   거룩한 江이로다   고원일흔 자식들 젓줄을 빨리기   해란강 백리 언덕에 주름t살은 잡혓느니   전설의 물ㅅ 줄기 더드머 오르면   영란이 핀언덕에 어진사슴이   호사로운 두 뿔을 빗처보든 시절엔   정정한 낙엽송의 아지 가지가   은하의 별빗좃차 가렷다건만   이주민의 斧鐵에 역사가 빗날 때   쓸어지는 환목의 모닥도막을   가삼에 안고서 흘럿느니   銀河長長 天心에 별이 종종   流城에는 아리아리 人煙이 종종-   강낭ㅅ 대 마디마디에 希望을 매즌   어진 族屬들이 벌떼처럼 茂盛해서   입히 필때면   懷鄕病 절믄이들의   로맨스도 실어갓다.   금심만흔 사나히들의   큰 뜻도 실어갓다.   한世記 雜多한 이地城의 歷史를   늘근 해란강 백사장에 차즈리                            전문     오월의 석양   발해 옛터에   집팽이와 나와   풀숩에 스다.   歷史란 모도다   거짓말 갓태서   六宮의 남은 잣최   줏추돌도 늘것는데   第一官址 드놉흔곳   應靈寺 鍾이 울어울어……   기와 片片 어루만저   회고에 잠기우면   저-언덕 밧가는 농부   그 시절 백성인듯!   멍에민 소장등에   태고가 어리우다18)                     전문     1. 봄   그옛날 오막사리가 사랏다는   傳說이 시린 각담에      냉이와 달래는   보람업비 파르럿고!      한그루 활작핀   살구나무 가지에는      그래도 벌들의 살임은   옛갓치 오븟하이    2.여름   구진비 뿌리는 黃昏이면      영산가닥 입입에   落水가 지름지름!      새끼 기르는 오치래기 둥지엔   지붕이 업서서 실탄다.    3.가을   알뜰이 길너논 코쓰모쓰   꽃치 폇건만     여름은 벌서   늘거서 갓네      쌀살한 바람이   몸맵시를 흔들고      파-란 하날이   너무도 매몰차      코쓰모쓰는 季節의   계못 자식 이란다.   4.겨울   욋딴집 저녁 굴뚝에   煙氣가 숫지다.      아마 靑솔가지를 때는 게지   바람도 새들도   모두 잠들어      삽사리 컹컹   寂寞을 불으다.      조각달 눈빗우에 조으는 밤   감자 입김쉬는 火爐가엔      金僉知 보는 趙雄傳   혼자서 흥겨우리19)                    전문    위의 시 세편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는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과거에 가 있다는 점이다. 에서는 한 세기전의 역사는 강가 백사장에 묻혀버렸고, 에서는 옛 궁터에 종이 우는 석양이다. 한 때 민족의 웅지가 피어났던 대국의 성터에는 풀이 무성한데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지금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과거의 영화가 꿈으로만 남은 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구조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는 그런 과거지향의 시상이다. 도 봄에서 시작된 생성의 세계가 겨울의 적막함으로 끝나고 있다. 겨울은 죽음의 시간이고, 과거의 시간이다.  둘째는 공간적 배경이 민족사와 깊이 연관된 곳이거나 그 현장이다. 해란강은 간도 이민들에게는 생명의 젖줄이다. 시 은 그런 해란강이 이민사와 연결되면서 민족사의 한 시대를 형상화한다. 백의민족이 개척의 혼을 기르던 간도, 그 굽이굽이에서 저항의 숨결을 생성해내던 공간이 해란강이다. 항쟁의 일 번지 청산리가 있고, 전쟁의 원귀가 뒤엉킨 수해가 있고, 이제는 전설 속으로 사라져 버린 선구자들이 말을 달리던 용정을 있게 한 근원이 해란강이다. 의 육궁터나 의 김첨지, 조웅전 읽는 외딴집도 이런 민족사와 간련된 속에 서 있다.  세 번째의 특징은 작품의 정조가 낭만적 소멸구조로 시의식이 하강되다가 곧 회복됨으로써 긴장을 이루는 점이다. 이것은 서정시로서의 유기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에서 이런 점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위에서 잠깐 말했지만 해란강은 만주이민의 고난의 현장이자 북간도의 상징이다.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남강산맥과 영액령산맥의 분기점인 증봉산, 계관라자산에서 시작되는 이 강물은 비옥한 분지, 북간도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흐르다가 마침내 두만강으로 잦아든다. 두만강에 얽힌 우리 민족의 애환은 巴人의 「국경의 밤」과 같은 작품이 특징 있게 그 서사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해승은 에서 이 강을 이렇게 설명한다.    원래 지형이 복잡하고 험준한 데다가 삼림 또한 거대하므로 그 원시림에서 흘러나오는 수 많은 물줄기는 산골마다 경지를 살찌게 하였고, 일찍이 여락민이 정착하여 풍요한 곡창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해란강이야 말로 간도인들에게는 다시 없는 샘이며 생명의 젖줄인 것이다.  유동(柳洞), 부동(釜洞), 서작동(西作洞), 청산리(靑山里) 등 마을 이름도 그렇거니와 용수골, 통수골 매바위골 등 산골의 이름들도 한국적인 지명이 많다. 그런데 개척시대에 해란강변에서 제일 큰 마을은 용두레촌이었다. 두만강, 횔여 방면에서 강을 건너 남강 산맥을 넘어가노라면 오랑캐령에 이르게 되며 거기서 북으로 흐르는 육도하를 따라 백리 가량 북상하면 넓은 평원에 이르러 해란강에 합쳐지는데 그곳이 통칭 용두래골(龍井)이다20).    그러니까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분명 구원의 땅인 간도, 그 중심지인 용정을 있게 한 강이 해란강인 것이다. 김학철이 간도지방을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항일 투쟁과 역사를 증언하는 소설을 쓰면서 그 제목을 「해란강아 말하라」고 했고, 이욱이나 김효원이 그들의 시집을 묶으면서도 「해란강의 두견새」라 했으며, 이근전이 자전적 장편「고난의 년대」의 배경을 이 강변에서 전개해간 까닭 역시 이런 점에 있다.  이런 내력으로 볼 때, 윤해영이 의 서두를 ‘적막한 강이로다/ 거룩한 강이로다’한 것은 관념적 진술이 아니다. 당대의 조선족으로서는 절로 나올 말이다. 그리고 이 강을 이주민의 고난사와 연결시킴도 민족적 의식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그가 일찍이 노래했던 바로 그 ,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와 바로 연결되는 시의식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의 결말은 서두의 이런 현재시제와는 달리 과거시제로 끝난다. 바로 낭만적 소멸 구조다.  ‘-갓다’, ‘-갓다’, ‘늘근 해란강의 백사장에 차즈리’로 되어 있다. 이것은 현재가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점은 시의 중반부의 톤과 역접된다. 그래서 다소의 긴장을 형성한다.     銀河長長 天心에 별이 종종   流域에는 아리아리 人煙이 종종-   강낭ㅅ대 마디마디에 希望을 매즌   어진 族屬들이 벌떼처럼 茂盛해서     밝고, 다정한 이미지다. 그러나 그 다음을 잇는 것은 ‘회향병, 로맨스, 근심, 역사’와 같은 하강 이미지들이다. 그래서 또 시의 톤이 잡자기 떨어지며 꺾인다. 다시 소멸구조, 비극적 정조를 이룬다. 하지만 상승과 하강의 대립, 이런 것은 서정시의 정석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가 서정시로서 거둔 성과는 만만치 않다.   도 시 의식은 과거에 가 있다. 찬란한 과거, 역사에 대한 회고가 오월 석양 무렵의 밝음과 대비를 이룬다. 한시에서 즐겨 쓰는 대구법 형태다.   또 ‘제일 궁지 드놉은 곳/ 음영사 종이 울어 울어……/ 기와 편편 어루만져/ 회고에 잠기우면’이란 구정과 ‘저-언적 밧가는 농부/ 그 시절  百姓인 듯/ 멍에 멘 소 장등에/ 태고가 어리우다’는 어조가 비슷한 문구로 병렬되어 있다. 찬란한 과거가 현재의 무심한 자연과 대비되어 세월의 덧없음을 선명히 드러냄으로써 회고의 정을 돋운다.   발해란 나라가 고구려 사람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나라였고, 그 국세가 송화강 이남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다 차지한 대국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그런 나라의 성터를 민족의 흥망이 또한번 바뀌는 역사 앞에서 바라본다. 시인의 착잡한 심회가 큰 무리 없이 개진되어 있다. 이런 억제된 감정이 아니었으면 외연(Denotation)의 회고를 내포로 연결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곧 서정적 자아는 음영사 종이 우는 석양에 허물어진 궁궐터를 바라보며 다시 찾을 길 아득한 민족의 영화를 생각한다. 이런 시의식이 처연하고 감미롭게 다가옴은 시의 소재를 우리의 가장 찬란했던 한 시대를 선택함으로써가 아니라, 이 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장치, 곧 낭만적 소멸구조 때문이다.    역시 시점은 과거에 가 있고 낭만적 정조가 중심 시상이다. ‘봄’은 전설이 서린 돌각담, 냉이. 달래가 파란 속에 오고, 옛날처럼 살구꽃이 피고, 벌들도 부산히 날아들지만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그때의 오막살이와 그때 사람들은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봄날의 화창함이 겨울의 닫힌 이미지로 끝나버렸다. 다른 봄의 예고가 마지막 행에서 시도되지만 그것은 효과가 없다. 김첨지의 ‘조웅전’도 흥이 없고, 칭얼대는 손자도 없고, 새도 바람도 자고 삽살개만 짓는 적막한 천지인 까닭이다.   ‘여름’은 여름 저녁 한 때의 밝음이 가볍게 스켓치 되고, ‘가을’은 소멸적 시상이 코스모스, 가을, 하늘 등의 오브제를 통해 소박한 서정으로 처리되고 있다. ‘겨울’에서는 ‘겨울밤-조웅전-전통적 서경의 자장’으로 변전된다.   는 이렇게 시대감각이나 역사의식이 거의 배제된 순수서정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같은 열정과 비장미도 없고, 와 같은 아세(阿世)도 없고, 처럼 현실을 부정하는 시의식도 없다. 존재를 존재 자체로 바라보고, 시로 육화하려는 자세가 기본 틀을 이루고 있다.  윤해영의 시의 다른 특징, 민족적 허무의식이다. 무섭고 두렵다. 의 힘과 양양함이 사라진 소멸의식이 전편을 지배하고 있다. 나 는 이런 민족의 소멸의식이 마침내 이 시인을 절망으로 몰아가 생성시킨 혼혈아일지도 모른다.   Ⅳ, 한 시인의 안타까운 종말을 정리하며    지금까지 이 글은 윤해영의 와 를 대비하고, 와 의 시 의식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와 는 형식면에서 다 같이 4음4보격의 민요적 율격이지만 시의 주제는 완전한 대립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곧 가 민족의 투혼과 독립의지의 형상화라면, 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건설에 대한 송축이다. 이런 점에서 는 일본의 만주 점령을 합리화 하는 정신을 앞장서서 수행한 작품이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둘째, 와 의 시 의식은 당시 만주를 大日本건설의 전진기지로 만들려 했던 일본의 그 정신과 동일한 것임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윤해영이 당시의 정신적 사정을 문학이란 형식, 그것도 민요라는 형식에 담아내었다는 점에서 민족적인 것과 완전히 대치된다.   는 일본이 그들의 대동아 건설을 효과적으로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만주 개척 사업에 적극 동참하고, 그런 정신을 함양해야 된다는 시의식이 주제를 이루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시조란 형식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윤해영이 에서 형식을 내용과 일치시킴으로써 거둔 시적 성취가 무너져 내리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윤해영의 와 는 결과적으로 의 그 도저한 민족의식을 아주 지략적으로 배반하였다.   셋째, 이런 점에서 윤해영을 일제에 항거하고 그 투혼을 노래한 민족문인의 차원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윤해영 평가에서 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문학사적 태도는 재고되어야 한다.   넷째, 윤해영의 는 모두 그 시의식이 과거에 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일종의 민족적 허무주의에 빠져있다.  기대의 세계를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 라면, 그 기대의 세계가 사라져버린 이후에 오는 허망감이 이고, 그 절망을 극복하지 못함에서 야기된 돌이킬 수 없는 회고의 정, 반민족적 정서가 지배하는 작품이 와 라 하겠다.  유약한 시인의 불행한 인생유전이 치욕의 민족사와 합치되는 부끄러운 과거를 하필 의 시인 윤해영에게서 발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인의 작품에서 단편적이긴 하지만 고난의 시대를 뚫고 나왔던 자존적 민족과거사를 발견했고(), 영화로웠던 시대에 대한 그리움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에서는 ‘은하장장 천심에 별이 종종/ 流域에는 아리 아리 인연이 종종’과 같은 생동적 모국어가 그 엄혹한 시대에 새로운 서정시의 가능성으로 활용되는 예도 보았다. 이런 점에서 윤해영의 시 몇 편은 한 시대가 생산한 혼혈아라 하겠다.    Ⅴ.마무리; 불행한 시인을 위한 변호   젊은 시인의 혼을 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잃어버린 조국을 호곡하던 윤해영씨! 해방이 되자 당신이 찾아간 북쪽의 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다시 를 불렀습니까.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만주 땅에서 고혼이 될 것이지! 를 땅에 묻지도 않은 채 당신이 시대를 앞지르며 외친 그 가 이 무명의 후배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해방공간에서 그렇게 종적 없이 사라질 양이면 왜 끝까지 부르지 못할 노래를 남겼나요. 의 장중한 선율, 의 배반, 이 아이러니가 나를 야유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당신의 일생 또한 약소민족의 후예이기에 당했던 비극!  나는 2011년 한해를 만주, 북경, 장춘에서 백석白石과 함께 혹시 당신의 다른 자취가 있을까 하고 안타까와 찾아 헤맸지만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득한 만주공간에서 그렇게 종적이 없이 사라질 양이면 왜 부르지 못할 노래를 남겼나요. 지금도 그들은 독도를 죽도라며 우리를 넘보고 있는데!         오양호吳養鎬 약력    경북 칠곡 출생. 경북고, 경북대 졸업. 영남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지도교수 조동일.1981).『현대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수년 전부터 월간『시문학』에 시를 발표하고 있고, 수필집에『백일홍』(신곡문학대상)이 있다. 평론집으로『낭만적 영혼의 귀환』『*문학의 논리와 전환사회』『*한국현대소설의 서사담론』등이 있다. 1970년대부터 만주조선족 문학연구를 하여 『한국문학과 간도』『*일제강점기 만주조선인 문학연구』『*만주이민문학 연구』(심연수문학상 수상), 백석의 만주행을 고찰한『그들의 문학과 생애, 白石』이 있다.  교토대(京都大) 객원교수 시절(‘일·한교류기금’ 지원) 재교토 유학생들과 “정지용기념 사업회”를 결성했고, 그 후 옥천군의 지원을 받아 도시샤(同志社)대학에 ‘정지용시비’를 세웠다. 대산재단의 지원금을 받아 정지용시를 일본어로 번역 출판하였다(『鄭芝溶 詩選』, 東京, 花神社, 2002). 북경의 중앙민족대(객좌교수), 장춘의 길림대(특빙교수)에서 중국조선족문학을 강의했다. 현재, 인천대 명예교수.(*표 저서;문화공보부,문화체육부,문화부, 대한민국학술원선정 우수도서)                          1) 오양호, 『영남어문학』4집. 영남어문학회,1977,10월. 이 소논문은 박계주가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쓴 소설에 대한 고찰이다. ‘영남어문학회’는 그 후 한민족어문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한국문학과 간도』간행을 준비 할 1980년대 초 나는 홍대 앞 극동방송국에서 북만주 조선동포에게 만주조선인 문학 방송도 했다.   2) 오양호, 「동아일보.」,1993, 3, 10(수)일.   3) 「동아일보」1993, 3, 12일(금). “이런 사실을 안 이상 이 노래는 며칠 전 문학평론가 오양호교수(인천대)가 본지 기고문에서 지적한 대로 적어도 정부의 공식행사에서만은 삼가야겠다는 의견을 외면할 수 없게 됐다. 회절한 시인의 작품을 애송한다는 것은 국민적인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4) 오양호, ,「국어국문학」 114호.(국어국문학회, 1995년 5월)   5) 그 중의 한 사람이 노무현 정권 때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낸 김삼웅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행동을 비난하는 글 수편이 「동아일보」 독자투고 난에 오르기도 했다.   6)「동아일보」1990,2,28(수). . 이때는 윤해영이『만주시인집』에 발표한 시가 친일성향의 시로 밝혀지면서이다. 극동방송 사장 윤지관 목사 방에서 오양호, 연변대 권철, 윤동주 재종제 가수 윤형주,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가 모여 윤해영의 시를 검토했다. 나는 그 후 만주 자료를 뒤지던 중 윤해영의 본격적인 친일 시 를『半島史話와 樂土滿洲』(滿鮮學會社.新京特別市.1943) 우연히 발견했고 그 충격이 아주 커서 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글은 17년 전의 그 논문의 일부분을 조금 수정 보완한 것이다.   7) 박찬호, 『1895~1945 한국가요사(Kankoku Kayoshi)』, ( 안동림 역, 현암사,1992),117쪽   8) 김영준, 『한국가요사 이야기』(아름출판사, 1994), 389쪽   9) 조두남, 『그리움』(세광출판사, 1982), 41~43쪽. “나의 넋두리, 나의 세월의 앙금, 윤해영과의 상봉” 참조   10) 김덕균, 『조두남과 용정의 노래』중국조선족 발자취 총서·4(민족출판사,1991,북경), 566쪽   11) 윤해영, 「半島史話와 樂土滿洲」(滿鮮學會社,1943. 新京特別市), 690쪽   12) 김영준, 「한국 가요사 이야기」(아름출판사,1994), 388쪽   13) 윤해영, 「반도사화와 낙토만주」(만선학회사, 1943, 신경특별시), 539쪽   14) 「在滿朝鮮人通信」16호(1936,11월호). 맨 뒷 표지에 광고처럼 수록되어 있음.   15) 「중국조선족 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1990), 193쪽   16) 최남선, 「재만조선인통신」39호, 24쪽   17) 윤해영, 「滿洲詩人集」(第一協和俱樂部 文化部, 1942, 吉林市). 12쪽   18) 「만주시인집」15~16쪽   19) 「만주시인집」, 13~15 쪽   20) 李海承,「잊어버린 해란강」(진명출판사,1988). 57쪽    
13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5)... 댓글:  조회:3036  추천:0  2018-07-13
      ▲ 조두남 수상집 (1982) 조두남의 회고는 이렇게 이어진다. 문법적으로 조금 다듬어 지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그대로 옮긴다.  나는 그날 처음 만난 윤씨로부터 내가 말로만 들었을뿐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북간도 용정땅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에 까지 뻗쳐 들어온 일본 경찰의 세력과 본토박이 중국 사람의 노골적 적대감, 그 속에서 고생을 견디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우리 동포들의 생활, 또 용정을 배경으로 벌이는 독립군들의 용감한 활약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으면서 나는 독립투사들이 오고 가며 거친 발걸음을 잠시 쉬는 일송정 용정 고개를 쉽게 머리 속으로 떠올릴 수 있었고,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흐르고 있는 해란강 물줄기도 또 용주사 종소리도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했다. 차근차근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윤해영은 그가 내민 가사에 곡을 붙여주면 달포쯤 지난 다음에 다시 찾아와 노래를 배워 가겠다는 말만 남긴 채 바람처럼 떠나갔다. 바쁜 걸음으로 떠나가는 그를 바라보면서 나는 무척이나 약한 듯한 그의 몸이 만주 벌판의 거센 바람을 이겨낼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우리 민족이 다 함께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며 희망을 잃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지어 달라며 떠나간 윤해영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후 해방이 될 때까지 만주 벌판을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윤해영의 소식을 물었으나 그는 끝내 찾을 길이 없었다. 당시 항일전선에 몸바쳐 나선 혁명 동지들은 서로의 정체를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따라서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름도 여려 번 바꾸고 때로 적의 음모로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 낌새가 보일 때면 어디론가 사라져 숨어 살기 때문에 절친했던 동지끼리라도 연락이 끊어지기 일쑤고 심지어는 동지 중 누가 죽는다 해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나는 윤해영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옛날에 목단강변의 석양 사이로 불쑥 나타났듯 꼭 그렇게 그가 나타나 줄 것만 같았다. 나는 유해영에 대해 이름 석자 밖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조국이 해방된 그 기쁨을 송두리째 그에게 또 그처럼 조국 광복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죽어간 숱한 이름 모를 독립 투사들에게 바쳤다. 머나먼 낯선 땅에서 자칫하면 내 나라 내 민족을 잊어 버리기 쉬운 동포에게 조국의 얼을 심어 주려던 갸륵한 윤해영은 그토록 바랬던 해방이 된 지금 어느 차가운 땅속에서 이 기쁨을 누릴까? 낮에는 어두운 숲속 둥지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논 밭 가까이에 나와 들쥐를 잡아먹는 접동새 마냥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밤에만 외진 길을 걸어야 했던 서러운 우리 독립투사들! 그 넋이 피어서인지 는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불리어졌다. 해방을 맞고 나서 나는 과거의 한이 담긴 라는 제목 대신에 윤해영처럼 높푸른 기상을 지닌 독립투사들을 일컫는 로 제목을 바꾸어 달았다. 또 유랑민의 서러운 심정이 뚝뚝 묻어나는 2∙3절의 가사에서도 “눈물 젖는 보따리”나 “흘러 흘러 온 신세” 같은 구절을 빼버리고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등을 넣고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는 일절의 것을 그대로 후렴으로 반복시켰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해방을 맞아 새로운 희망과 환희에 들떠 있는 사람들에게 만주 벌판에서의 쓰라린 유랑 생활의 한이 배어있는 지난날의 가사를 그대로 부르게 하는 것보다는 조국 광복을 위해 고생하던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기리는 내용이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윤해영이 살아 있더라면 나는 꼭 그에게 새로운 가사를 지어달라고 졸랐을 터이지만 그럴 수도 없고 해서 윤씨가 나에게 시를 건네주면서, 좀 더 강렬한 내용을 담고 싶었지만 그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처지를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말을 토대로 가사의 2∙3절 가운데 일부를 내가 뜯어 고쳤다. 해방이 되자 는 많이들 불리어 왔으나 1963년 12월 30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개최됐던 ‘63송년음악회’ 때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반주로 지금은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였던 바라톤 김학근씨가 부른 것을 그때 기독교 중앙방송국 음악과장이었던 최성진씨가 그 연주를 테이프에 녹음하여 이 곡을 이란 프로의 시그널 뮤직으로 7년동안을 매일 방송함으로써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곡은 하나의 소품에 지나지 않으나 소절 소절마다 정열을 기울여 정확하게 불러야 작곡자의 의도를 잘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조두남 제2수상집 41~43쪽, 세광출판사, 1982)     ▲ 마산조각공원     ▲ 마산조각공원 안의 마산음악관 논란은 핵심은 조두남이 남긴 이같은 회고의 글이 사실이냐 허구냐 하는 것이다. 조두남 기념관에 반대했던 이들은 조두남이 자신이 작곡한 유명가곡 를 미화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했다, 즉 소설을 썼다고 주장한다. 과연 조두남이 소설을 쓴 것일까? 선생이 세상에 없으니 이에 대해 대답해 줄 사람이 없다. 아무튼 이와같은 조두남의 기록에 따르면 의 원본인 원래 가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의 원본, 1932년의 가사)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서 거친 꿈이 깊었다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눈물 젖은 보따리 지금은 어느 곳에서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흘러흘러 온 신세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지금의 가사와 2절과 3절에 한군데 씩이 다르고 나머지는 같다. 조두남은 해방후 2절의 “눈물 젖은 보따리”를 “활을 쏘는 선구자”로 3절의 “흘러흘러 온 신세”를 “맹세하던 선구자”로 자신이 바꿨다고 했다. “맹세하던 선구자”는 괜찮은데, “활을 쏘는 선구자”는 좀 어색하다. ‘활’을 쏜다는 게 시대적으로 좀 안 어울린다는 얘기다... ///여성경제신문 
12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4)... 댓글:  조회:4018  추천:0  2018-07-13
윤해영 (시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윤해영 출생 1909년 함경북도 사망 1956년? 직업 작가,교육인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장르 시 윤해영(尹海榮, 1909년 ~ 1956년?)은 일제 강점기에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이다. 목차  [숨기기]  1생애 2 3 4 생애[편집] 함경북도 출생으로 룽징에서 교사로 근무했다는 것 외에는 신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가 항일 정신을 담은 노래로 알려져 대한민국에서 오래 불리면서 이 노래의 작사가로 유명해졌다. 윤해영은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의 회고록을 통해 신비한 독립투사 청년으로 묘사되었다. 조두남은 1932년 〈선구자〉를 작곡할 때 하얼빈의 한 여관에서 윤해영을 만나 가사를 받았으나 이후 홀연히 사라져 다시 보지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만주 지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역이 되면서 오랫동안 접근이 쉽지 않아 조두남이 묘사한 내용에 따른 이같은 인식이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당시 조두남과 함께 활동했던 음악인 김종하가 조두남의 회고록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폭로하면서 윤해영의 실제 행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새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윤해영은 조두남의 회고에 등장하는 시기보다 늦은 1940년대에 주로 활동한 인물로, 〈용정의 노래〉, 〈만주 아리랑〉, 〈오랑캐고개〉, 〈해란강〉, 〈아리랑 만주〉, 〈사계〉, 〈발해고지〉, 〈척토기〉, 〈낙토 만주〉 등 일본 제국의 만주 침략으로 세워진 만주국의 건국 이념을 찬양하는 다수의 친일 시를 발표했다.[1] 이 가운데 〈낙토 만주〉는 만주국에서 정책적으로 널리 보급한 노래이며, 〈아리랑 만주〉는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한 《만선일보》의 공모전에서 당성된 작품이다. 또한 무단장에서 관제 단체인 오족협화회지부의 선전과 간부를 지낸 인물인 것으로 드러났다. 학계의 연구가 잇따라 윤해영이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친일 시인이었다는 것은 통설이 되었으나, 문예비평가 김영수는 2005년에 《몽상의 시인 윤해영》에서 윤해영의 시에 등장하는 '오족', '오색기' 등 만주국의 상징이 실제로는 고구려 사상을 상징한다는 이설을 제기하기도 했다.[2] 김영수는 윤해영이 검열을 속이기 위해 만주국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에 다른 뜻을 숨겨 사용했는데, 이를 표면만 읽은 학자들이 오독했다고 주장했다. 일제 패망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가서 토지 개혁 정책을 찬양하는 〈분배받은 땅〉이라는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1956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만주에서 애창된 〈동북인민 행진곡〉, 〈동북인민자위군 송가〉도 윤해영 작시의 노래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11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3)... 댓글:  조회:3017  추천:0  2018-07-13
가곡 의 수난과 진실   경남의 마산조각공원에 가보면 정자가 하나 서있다. 일송정(一松亭)이다. 가곡  가사에 나오는 중국 길림성 용정에 있는 일송정을 본떠 세워놓은 것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선구자 1절 가사)   그런데 일송정 정자 옆에는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흰 화강암 비석이 하나 서있다. 자세히 보면 무언가를 지운 자국이 있다. 원래는  노래비였다. 10여년전 가곡 가 작사 작곡자의 친일 시비에 휘말리면서 그 모양이 된 것이라고 했다. 의 작곡자는 젊은 시절 일찌기 만주에서 작곡활동을 하다가 해방후 마산에 터를 잡았던 조두남(1912~1984)이다. 작사자는 윤해영이라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시인인데, 해방후에 북한에 들어가 살다가 195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조두남이 윤해영의 시를 받아 를 작곡한 시기는 1932년경으로 알려져있다. 친일 논란은 조두남 사후 20년쯤 후인 2천년대 초반의 일이다. 일제 때의 예술가 치고 친일 논란의 대상이 안된 사람을 몇이나 찾을 수 있을까? 부수기로 말한다면 창원의 용지공원에 우뚝 서있는  노래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도 다 부숴야 하나? 친일 논란이 있기는  작사자인 시인 이원수(1911-1981)나 작곡자인 홍난파(1897~1941)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시대에 활동하여 친일 행적을 의심받고 있는 안익태, 현제명, 김동진 작곡가 등과 이들의 작품인  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부의 친일 주장과 달리 ‘의 작사자인 시인 윤해영은 친일시인이 아니라 민족시인이며 저항시인이었다’는 내용의 (2005) 이란 책을 쓴 김영수는 그의 책 속에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낸 이인범(1914~1978)과 조두남의 다음과 같은 대화의 기억을 실어놓았다.   “1970년대 초 조두남이 성악가 이인범의 병문안을 갔을 때 그 집 근처까지 필자(김영수)가 동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필자는 이인범이 일제 말기에 일본 군가를 부르며 순회공연을 한 사실을 말하면서 조두남에게 당신도 만주에서 음악활동을 했다면 일본을 찬양한 곡들을 작곡했을 터인데 이실직고하시오라고 웃으면서 물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자 (조두남은)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악극단을 위해서 하루 밤에 1,2곡 후딱 작곡을 해치웠지, 그러면서 반드시 당국을 지지하는 노래를 두 세곡 부르지 않으면 악극단 공연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라고 하던 말이 기억이 났습니다. (, 173쪽)   친일의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의 음악인들은 누구나 같은 처지였기 때문에 숨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목숨 바쳐 조국을 찾겠노라 독립투쟁을 한 선열들을 생각하면 사소한 생계형 친일이라 한들 어찌 옹호하거나 변명하겠는가? 그러나 예술 작품은 탄생한 그 당시 상황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는 일리가 있다. 예술 작품은 아니지만 1919년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를 보자. 이를 기초한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일제 말기 변명하기 어려운 짙은 친일의 흔적을 남겼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에 끝까지 친일로 돌아서지 않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해마다 광복절에 낭독되는 기미독립선언문의 의미나 가치가 변하지 않듯 문학, 예술 작품도 그러한 관점에서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온 가곡 도 귀중한 음악적 자산으로 존중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지워진 노래비에도 가사를 다시 새겨넣기 바란다. 일제 강점기, 우리민족에게 슬프고 잔인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늘 아프게 한다. (광화문문화포럼 2015년 5월호, 글 : 이정식, 가곡 에세이  저자)
10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2)... 댓글:  조회:3803  추천:0  2018-07-13
"가곡 "선구자" 작사 윤해영, 친일시인 아니다"  2005.07.14.  SNS 공유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비평가 김영수씨 "몽상의 시인 윤해영"서 주장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가곡 "선구자"의 작사가인 윤해영(1909-?) 씨가 친일시인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원로 문예비평가 김영수(金榮秀.79) 씨는 최근 펴낸 "몽상의 시인 윤해영"(우신출판사)에서 "윤해영의 시에 등장하는 "오족" "오색기"는 만주국과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려는 낱말이 아니라 한민족을 상징하는 "고구려오족"이나 오행사상을 도상(圖像)한 조선군대의 의장기(儀仗旗)나 대방기(大邦旗)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윤해영이 가곡 "선구자"의 원작시 "용정의 노래"에서 보여준 민족의식을 버리고 만주국을 찬양하는 "낙토 만주" 등을 통해 친일분자로 변절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김씨는 "윤해영은 비평적 용어로 "저의(底意)있는 기지(機智)"를 통해 일제시대 억압과 금지에 선수를 쳤다"면서 "그는 만주국의 건국이념인 오족협화라는 말과 그들의 국기인 오색기라는 말을 역으로 이용해 단일적 현실을 묘사하는 협의상징(steno-symbol)으로만 해석하는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고, 검열을 우롱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윤씨가 남긴 "용정의 노래" "만주 아리랑" "오랑캐고개" "해란강" "아리랑 만주" "사계" "발해고지" "척토기" "낙토 만주" 등 9편의 시를 꼼꼼하게 분석했다. 김씨는 "그의 시에서 "오족"이라는 낱말은 "만주 아리랑"과 "아리랑 만주"라는 두 편에서만 나오는데 왜 하필 "아리랑"을 주제로 한 맥락 속에서 "오족협화"로 오해받을 이 말을 구사했을까"라고 묻는다. 또 "만주국의 국기인 "오색기"란 낱말도 "오랑캐고개"와 "낙토 만주"라는 두 편의 작품에서만 나오는데 왜 건국의 서사와 관련해서만 이 말이 구사되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윤해영은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시집 "만주시인집"이나 "만선일보" "반도사화와 낙토 만주" 등 어용신문과 잡지를 역이용해 역사적 불의와 허상을 담은 시로 정면 항거했다"면서 "그는 만주국에서 사용하는 일상적 낱말을 차용하는 등 당국의 허를 찌르는 예술적 표현의 기교로 덫을 놓아 검열과 감시를 피해간 저항시인"이라고 강조했다. 이른바 윤해영은 "오족" "오색기"라는 낱말을 통해 당국의 검열자들이 "어용성"에 추호도 의심을 갖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시인의 이같은 시적 전략을 간과한 채 표면상에 나타난 단어 등으로 시를 오독하고, 그를 변절한 친일시인으로 못박았다고 김씨는 주장했다. 김씨는 친일시비에 휩싸여 있는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에 대해서도 "그가 일제를 찬양한 노래를 작곡한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예술가로서 전모를 파악하려면 어떤 환경, 어떤 동기, 어떤 목적으로 그런 노래를 만들었는지 알아야 한다"면서 "그가 "징병령 만세"를 작곡한 것은 친일을 통해 출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종사하던 악극단의 생존과 운영을 위해 당국에서 규정한 공연규칙을 지키다보니 부득이 작곡가로서 짊어지지 않으면 안될 짐이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2년 전 만주에서 만난 조두남의 제자로부터 "징병령 만세"는 음정의 템포가 맞지 않아 부를 수 없게 작곡해 놓았다는 증언을 책에 밝혀 놓았다. 경주에서 집필활동을 하는 김씨는 14일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윤해영론을 쓴 것은 조두남의 "선구자"와 관련된 친일논란이 계기가 됐지만 이 곡의 작사가인 윤해영의 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시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이 컸다"고 말했다. 그는 "윤해영의 시 "낙토 만주"가 만주국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꿈이 깃든 "아리랑 만주"라는 것이 여러 편의 시를 연계해 해석했을 때 드러났다"면서 "후대 학자들이 윤해영의 불분명한 전기, 문학적 편견 등을 깨고 새로운 시각으로 그의 문학에 접근할 기회를 열어놓고자 책을 썼다"고 밝혔다. 김씨는 I.A. 리처즈의 "문예비평의 원리", 헨리 M. 드러커의 "이데올로기와 정치" 등 서구 이론서를 다수 번역했고, "성서와 문학" 등을 저술했다.
9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 댓글:  조회:3795  추천:0  2018-07-13
[필진] 겨레를 속여 온 친일노래 '선구자' 2006.01.04.  SNS 공유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한겨레] 선구자에 얽힌 작곡가 조두남의 대 국민 사기극 이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나서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로 시작되는 조두남 작곡 윤해영 작시의 '선구자'를 불러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노래말의 내용이 장엄하기도 하거니와 곡에 나오는 "말 달리는 선구자"는 바로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투사를 연상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 시위현장에서 동지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이 노래를 부르면 은근히 콧등이 시큰해 졌던 기억이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곡 선구자가 이렇게 자리매김 되도록 일조한 작곡가 조두남의 회고록이 완전히 날조된 것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조두남이 말하는 선구자의 진실 조두남의 회고록 '그리움'에 의하면 이야기는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두남이 목단강의 싸구려 여인숙에 기거하고 있을 때 윤해영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선구자의 가사를 주며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염원하고 민족의 구심점이 될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며 가사를 전해 주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조두남이 그의 이름을 물으니 그는 자신의 이름이 윤해영이란 것을 밝히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 날 이후 조두남은 '윤해영의 행방을 여러 차례 수소문 했으나 끝끝내 찾을 수 없었노라'고 하여 그의 행적을 신비로 포장함으로서 자신의 선구자를 미화 하였습니다. 조두남의 회고가 거짓임이 드러나다 1932년 목단강의 싸구려 여인숙에 홀연히 나타나 조국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며 선구자의 가사를 전해주고 종적을 감춘 신비의 독립시인 윤해영을 조두남은 다시 만난 적이 없다고 했지만 그의 말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증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바로 중국 길림성에서는 꽤 알려진 음악가인 김종화씨입니다. 그는 조두남이 단장으로 있던 고려악극단원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습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1944년 만주 흑룡강성의 녕안시의 녕안극장에서 있었던 조두남의 신작 발표회에 윤해영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그날 발표된 곡 들이 선구자의 원작 이라 할 수 있는 '용정의 노래' 뿐 아니라 윤해영이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지었다는 '목단강의 노래' '산' '아리랑 만주'등의 신곡을 발표하였는데 그날 발표된 곡 대부분이 윤해영의 시에 곡을 붙인 것 이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즉, 선구자의 가사를 전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윤해영'은 계속해서 조두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드러난 것 입니다. 선구자의 작사자 윤해영 그런데 왜 조두남은 선구자의 작사자인 윤해영을 1932년 여인숙에서 만난 이후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만 했을까요 ? 바로 윤해영이 당시 만주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일제를 찬양하고 옹호하는 작품 활동을 하던 친일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일제가 만주침략을 노골화 하고 있을 때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소극적으로 일제를 옹호하던 다른 문인들과 달리 그는 적극적이고도 열성적으로 일제를 찬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만주 최대의 친일단체인 '오족협화회'의 간부로 활약하면서 '만주괴뢰정부'를 찬양하는 [낙토만주]를 공공연히 외친 유일한 문인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두남 자신도 '스파이와 오드르'라는 악극을 작곡하였는데 이 내용이 스파이가 설치니 일본인들은 조심하라는 내용이 담긴 친일 악극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두남은 자신의 친일행적을 은폐하기 위하여 윤해영과의 관계를 숨길 수밖에 없었고 한 술 더 떠서 해방 이후 자신과 윤해영의 행적을 미화하기 까지 한 것입니다. 가곡 선구자 무엇이 문제인가? 가곡 선구자는 원곡이라고 할 수 있는 용정의 노래에서 비롯됩니다. 원래 용정의 노래는 만주를 떠도는 유랑민의 애환을 표현한 서정적인 노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광야에서 말 달리는 선구자 같은 내용으로 개작하면서 오늘날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선구자'라는 말이 독립투사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단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로 윤해영이 만주괴뢰국을 찬양한 '락토만주'란 시에는 '선구자'란 말이 등장하고 당시 선구자가 어떤 의미로 쓰여 지던 단어였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오색기 너울너울 락토만주 꿈꾼다. 백방의 전사들이 너도 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 희망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중략) ... 끝 없는 지평선에 오곡금파 금실렁 노래가 들리 누나 아리랑도 흥겨워 우리는 이 나라에 터를 닦는 선구자 한 천년 세월 후에 천야만야 빛나리 이 낙토만주에서 '선구자'란 말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선구자란 독립운동을 하는 선구자가 아니라 만주국의 건국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선구자라 지칭한 것이며 당시 만주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선구자가 아닌 '산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오족이란 일본. 조선. 만주. 몽골. 한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윤해영이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는 일제의 나팔수였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곡'선구자'를 부르며 콧등이 시큰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며 광야에서 말달리던 선구자를 동경해야 할 이유는 더 더욱 없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문익환 목사님은 조두남의 선구자가 이러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평생 '선구자'를 부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도 '일송정 푸른 솔에..말달리는 선구자...'로 우리의 가슴을 비장하게까지 했던 이 노래가 지난 60년간 이 나라의 백성들을 속여 온 조두남에 의해 날조된 거짓 노래임을 인식하고 다시는 이 노래를 부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다른 친일 매국노들이 자신들의 친일 반민족 행적을 은폐하기 위하여 애국자를 껍질을 뒤집어썼을까?" 하는 의문에 다시 한 번 가슴이 갑갑해 집니다. PS : 이 글은 KBS 라디오에서 방송된 "사건과 인물(2005년 6월26일 방송)"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하여 한토마에 올린 적이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보지 못한 관계로 다시 올립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  
8    [그것이 알고싶다] - 력사를 직시하기... 일본 "국기(國旗)"?... 댓글:  조회:4157  추천:0  2018-07-13
일본의 국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일본의 국기 이름 日章旗 닛쇼키, 日の丸 히노마루 용도 국기 비율 2:3 채택일 1870년 2월 27일 (민간기) 1999년 8월 9일 (디자인 변경 후 국기) 요소 흰색 바탕의 가운데에 붉은 원이 있다. 일본의 국기는 일장기(일본어: 日章旗 닛쇼키[*], 영어: Flag of Japan)를 의미하며, 히노마루(日の丸)라고 부른다. 1999년 8월 9일에 통과된 일본의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의 규정에 의하면, 국기의 형태는 가로세로비가 3대 2인 직사각형이며, 가운데 동그라미의 지름은 세로의 5분의 3으로, 중심은 기의 중심에 위치한다. 바탕은 흰색, 가운데 원은 붉은색이다. 흰 바탕은 순수함과 고결함을, 붉은 원은 성실함과 밝고 따뜻함을 나타낸다. 목차  [숨기기]  1규격과 색상 2역사 2.1일본 제국 시대 2.2현재의 일본 3거부 운동 4역대 깃발 5같이 보기 규격과 색상[편집] 일본의 국기 규격과 색상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국기 규격 색상 하양 빨강 RGB 255–255–255 (#FFFFFF) 188–0–45 (#BC002D) 역사[편집] 일본 제국 시대[편집] 일장기가 국기로 쓰이기 시작한 때는 1870년 2월 27일(메이지 3년 음력 1월 27일)로, 메이지 유신에 따른 일본 제국의 성립으로부터 2년 후이다. 일장기를 처음으로 제창한 곳은 일본 제국을 수립하였던 사쓰마 번이며, 일본 제국의 성립 8년 전인 1860년에 미일 수호 통상 조약 비준으로 미국에 건너 간 한 사절단이 "일장기"를 이용했다는 기록이있다. 당시는 도쿠가와 왕조가 잇따르는 불평등 조약(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을 통해 명성을 잃고 있어, 미토 번의 무사들이 사쿠라다 문밖의 변을 일으킨 이후로, 사쓰마 번, 조슈 번, 히코네 번 등의 도쿠가와 왕조를 쓰러뜨리고 일본 제국을 세우려고하는 정치 세력이 도쿠가와 왕조의 '접시꽃'을 부정하기 위하여, '일장기'를 새로운 체제 운동의 목표로 사용한 것이다.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사절단에 참가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제국의 성립 후에 "제실론"(帝室論)을 저술하여 천황에 의한 지배를 찬양하고 있다. 일장기는 일본 제국의 77년간(1868년 ~ 1945년)의 공식 국기 역할을 했으며, 1931년 2월, 일본 제국의회에 일장기에 법적 근거를 부여하는 〈대일본 제국 국기 법안〉이 상정됐다가 천황기가 등장함에 따라 폐기되었으며, 이는 그 후로 일본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현재의 일본[편집]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주권을 박탈당한 일본 제국은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의 시행을 통해 새로운 국가인 일본국(日本國)이 법적으로 성립되었으며, 1999년에 시행된 〈국기와 국가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 일장기와 기미가요에 법적 근거가 부여되었다. 거부 운동[편집]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로 인한 착취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피해로 인해, 동북아시아권에서는 반일 감정으로 인한 '일장기'에 대한 증오의 감정도 강하다. 역대 깃발[편집] 기 사용 기간 쓰임 1603년 - 1868년 에도 막부 시절의 기 1870년 - 1945년 일본 제국 시절의 국기 (비율 7:10) 1945년 - 1952년 군정기 당시에 사용한 기 1952년 - 1999년 제2차 세계 대전 패망 이후에 사용된 일본의 국기 (비율 7:10)  
7    [그것이 알고싶다] - 력사를 직시하기...일본 "군기"?... 댓글:  조회:5167  추천:0  2018-07-13
요약 일본 자위대의 깃발이자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의 군기 목차 개요 형태 역사적 배경 상징과 논란 개요 일본의 군기(軍旗).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깃발이며 현 자위대의 군기이기도 하다. 종종 우리나라에서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로 잘못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은 일본에서도 사용되지 않는 말로 고사성어 욱일승천(旭日昇天)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에 16줄기의 햇살이 도안된 모양이다. 붉은 태양 주위에 16줄기의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으로 햇살 줄기의 수는 4개, 8개, 12개, 24개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낸다. 욱일기 역사적 배경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일본이 군국주의를 강화하던 1870년대였다. 1870년 16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문양의 욱일기가 일본 제국주의 육군의 군기로 공식 채택됐으며, 1889년에는 해군도 군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면서 ‘대동아기(大東亞旗)’로 부르기도 했다. 독일 나치의 하켄크로이츠(Hakenkreuz)와 같이 전범기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하켄크로이츠의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종전 이후 잠시 동안만 사용되지 않았을 뿐 1952년 해상자위대와 육상자위대를 창설하면서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해상자위대는 군국주의의 깃발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육상자위대의 깃발은 줄기 수만 8줄기로 바뀌었을 뿐이다. 상징과 논란 일본 내에서는 욱일기를 전범기로 인식하지 못하며, 아무런 규제 없이 상품의 로고, 응원기, 대중문화에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인식과는 달리 한국과 중국에서는 욱일기를 전범기이며,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긴다. 2013년 7월 동아시안컵 축구대회 한일전 경기가 시작되기 전, 관중석에 등장한 욱일기로 인해 적절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또한 2014년에는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발간하는 공식 주간지 의 50호 표지에 욱일기가 사용되었는데,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비난의 여론이 일어나자 공식 홈페이지 소개 표지에는 욱일기 대신 일장기로 교체되는 사건도 있었다. ====================  ...욱일기는 제국주의의 광풍이 몰아쳤던 20세기 초반 일본의 침략전쟁을 상징하는 깃발입니다. 과거 일본의 침략에 큰 피해를 봤던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타이완 등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일부 일본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여전히 노출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SBS 뉴스 ========================   요약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일본의 군기로, 일본이 침략 전쟁을 강화했던 시기에 사용함.    욱일기는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의 붉은 태양 주위에 욱광(아침 햇살)이 퍼져 나가는 모양을 덧붙여 만든 일본의 군기로, 일본이 아시아 각국을 침략할 당시에 쓰던 것이다. 욱일승천기는 잘못된 말이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으로 전 세계에 경제 불황과 사회적 불안이 만연하였다.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농민들의 피해가 극심하였고, 공업 부문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일본의 군부 세력은 사회 불안과 경제 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침략주의 정책을 강화하였고, 군부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 등으로 사회주의의 확산을 두려워하던 지주와 자본가들도 이러한 군부 세력에 지지하였다. 그 결과 1930년대 일본의 군인 세력은 국가 정책 결정의 중심에 있게 되었고, 군비를 확장하여 침략 전쟁을 강화하였다.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침략하고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욱일기를 사용하였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고 육군과 해군이 해체되면서 욱일기의 사용도 중단되었다. 이후 욱일기는 일본의 극우파 세력이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데, 최근 독도 문제로 한일 양국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스포츠 경기 등에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욱일기 일본의 침략 전쟁을 추진했던 히로히토 천황의 어린 시절 모습 =====================     1. 욱일기? 전범기? 우선 전범기 라는 개념은 날조에 가깝습니다. 국어사전으로도 외국에서도 사전적으로 정의된 바가 없고, 국제적으로도 사용 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단 전범이라는 단어 자체가 전쟁 범죄 혹은 전쟁범죄를 일으킨 사람을 뜻하기 때문에, 전범+기 라는 표현 자체도 문맥상 말이 되지 않는 말 이기도 합니다.   2. 그 당시 일본의 국기는 무엇이었는가? 흔히들 욱일기를 나치 독일의 국기와 동일시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 걸로 압니다.     이 깃발은 나치 독일의 공식 국기 였습니다.   욱일기는 일본군의 상징이었고, 일본의 국기는 아니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야 똑같은 거지만, 해외 국가들 입장에선 얘기가 좀 다르게 되죠.      이들에게 대외적으로 알려진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은 일장기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황실 그리고 그 일본군의 모든 만행을 주관하던 일본군 대본영의 문양은 국화 문양이었죠.   요건 아직 일본황실 상징입니다. 우리가 화내야 할건 이런것들이죠.   3. 그래도 욱일기는 2차대전기 일본군의 상징이 아닌가? 욱일기는 1870년 일본 육군의 군기로 정해졌고, 1889년부터는 일본 해군의 군기로도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태동보다 욱일기가 일본군의 군기가 된 시기가 빨랐어요. 이건 일본인들이 자기네들 욱일기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도 자주 쓰는 말이죠, 하겐크로이츠처럼 나치 시기를 특정하는 게 아니라 철십자 처럼 전통적으로 군기로 쓰였다! 라고 말이죠.,.   4. 그럼 이 사진은 뭐냐     많은 분들이 욱일기를 나치 독일의 국기와 동일시 하는 데 이 사진을 증거로 들곤 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사진은 말레이시아에서 일본 해군이 독일 해군의 기지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주최한 오찬에서 찍힌 사진입니다. 사진 속의 욱일기는 일본 해자대가 현재까지도 쓰는 형태의 욱일기 이고, 하겐크로이츠가 있는 깃발은 나치 독일의 해군기 입니다. 해군 간의 행사이기 때문에 서로의 상징을 건 것이지 이게 국가 간의 상징을 대표하는 그런 사진은 아니라는 거죠.   5.종합하자면 결론을 짓자면, 흔히 인터넷에서 말하는 '전법기'라는 프레임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을 욱일기로 국한 시켜 버리는 것 또한 또 다른 의미의 역사왜곡 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ps, 그래서 미국이 2차대전 끝나고 일왕 폐위 안시키고 국기 일장기로 유지시겼던 게 전 정말 맘에 안듬, 결국 달라진게 하나도 없거든요.   ps2. 그리고 요게 현재 일본 정부의 마크인데, 이건 일본 전국시대 한 가문의 문장이기도 했습니다. 오다 노부가나의 가신이었던 한 하급 무사가 그에게서 하시바라는 성을 하사했고,  태정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성을 다시 한번 바꿈과 동시에 저 문장을 가문의 문장으로 정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니다.     ======================= 욱일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구 일본 제국 해군기, 해상자위대기 욱일기(일본어: 旭日旗 교쿠지쓰키[*])는 빨간색 원 주위에 욱광(旭光)을 그린 깃발이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구(舊) 일본 제국 시대에 사용된 일본군의 군기(軍旗)이자 현재의 일본 자위대(自衛隊)의 기(旗)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는 흔히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라고도 부르지만 이는 잘못된 명칭이다.[1] 목차  [숨기기]  1개요 1.1일본 제국 시대 1.2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2사진 3비슷한 기치 4 5 개요[편집]   욱일기를 내거는 니콜라옙스크 주둔 일본 제국 해군 육전대 일본 제국 시대[편집] 1870년(메이지 3년) 16줄 욱일기가 일본 제국 육군기로 사용되었으며[2] 이와 유사한 기가 1889년 일본 제국 해군 군함기로도 사용되면서 모든 일본군에서 욱일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어서 일본 제국 해군의 각종 장군기(將軍旗)도 8줄 욱일기를 응용하여 사용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편집]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자 일본군도 해산되었다. 그러나 일본국 헌법에 따라 자위(自衛) 목적으로 창설된 해상자위대가 1952년부터 16줄 욱일기를 다시 군기로 사용하였고, 육상자위대 또한 변형한 8줄 욱일기를 군기로 사용하였다. 사진[편집] "); zoom: 1;"> 구 일본 제국 육군기   육상자위대기 비슷한 기치[편집] "); zoom: 1;"> 마케도니아 공화국   아사히 신문   카렌 국민 해방군   티베트의 기   애리조나주   소련 공군   러시아 공군 도네츠크 주   계평화통일가정연합    
6    송몽규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였다... 댓글:  조회:3129  추천:0  2018-07-13
1917년 9월 28일~1945년 3월 7일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에 방학을 맞아 귀향한 송몽규와 윤동주.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윗줄 오른쪽이 윤동주. 윤동주의 왼쪽은 윤동주 조부의 육촌 동생인 윤길현. 송몽규의 왼쪽은 윤동주의 당숙이자 몽규, 동주와는 학우였던 윤영선[1]이며, 오른쪽은 그의 조카사위인 김추형.   1. 소개2. 생애 2.1. 출생2.2. 학업2.3. 독립군 투신2.4. 학업 재개2.5. 체포와 사망 3. 사후4. 송몽규 전집5. 대중문화   1. 소개[편집] 그들은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나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고, 거의 평생을 동반자로서 살아갔다. 그들은 같이 일본에 유학했고, 같은 도시에서 같은 사건, 같은 죄목으로 얽혀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으며, 같은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일 간격을 두고 나란히 옥사했다. 두 사람은 참으로 평생을 두고 생과 사를 함께 나누었다. 그래서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은 도저히 빠뜨릴 수 없는 존재로 크게 자리 잡고 있다."-《윤동주 평전》 宋夢奎.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사촌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으로 활동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으로서 어린 시절 같이 자라고, 학업과 유학을 함께 했으며, 윤동주와 함께 잡혀가 똑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아명은 송한범(宋韓範). 문호는 문해(문학의 바다). 필명으로 몽규(夢奎)를 우리말로 풀어쓴 "꿈별" 등이 있다. 이 본명은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큰 별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가명으로는 '고문해(高文海)'가 있다. 아명은 '한범'으로 어린 시절 송몽규를 알던 사람에게는 '한범이'로 불리는 일이 많다. 1917년 9월 28일생이며, 1945년 3월 7일 해방을 몇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본적지는 함경북도 경흥(慶興)이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출생지는 만주 간도성(間島省) 연길현(延吉縣) 지신촌(智新村) 명동둔(明東屯). 지금의 중국 조선족 자치구이다. 성격이 부끄럼 많고 조용한 윤동주와는 대조적으로, 소년 시절부터 활동적이고 리더쉽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와 거의 모든 생애를 함께 한 형제 같은 인물. 다만 윤동주와는 달리 그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에 회고한 문익환 목사에 따르면 그 당시 어려서부터 성적을 보면 송몽규, 윤동주, 윤영선, 문익환 자신이 항상 선두 그룹이었는데, 그 중에서 윤영선은 나중에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자신은 윤동주가 자신보다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고, 윤동주는 또 자신보다 송몽규가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동주는 몽규를 보고 "대기는 만성이다"라고 벼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뒤집어보면 현재는 내가 뒤쳐진다는 걸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윤동주가 약관의 나이에 쓴 시가 사망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을 보면, 그 윤동주가 열등 의식을 가졌던 당시 송몽규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2. 생애[편집]   2.1. 출생[편집] 송몽규의 아버지는 북간도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5세 때 충청도에서 연해주로 가다가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우상동에 머물러 가문을 일으켰으며, 송창희는 서울에 유학을 다녀왔다. 송씨 문중은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웠는데, 송몽규의 삼촌 손창빈은 홍범도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1920년 전사, 송창근은 일본-미국으로 유학하여 1931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몽규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의 딸로서, 윤동주의 아버지인 윤영석(永錫, 1895-1962)의 큰 누이동생인 윤신영(信永,1897-?)으로 그녀는 윤동주의 고모가 된다. 송창희는 25세 때 명동에 왔는데, 체격과 인물이 뛰어나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큰 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자기 큰 딸과 선을 보게 하여 결혼시켰다고 한다. 송창희는 윤 장로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조선어와 양잠을 가르쳤다. 송몽규는 1917년 파평 윤씨 가문에서 친정집에 와 있던 윤하현 장로의 큰딸 신영에게 9월 28일 태어났다. 이후 12월 30일 이 집안의 외아들 영식의 가족에서 아들이 태어나서, 3달을 차이 두고 윤동주와 함께 태어나, 5살이 될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윤창식이 따로 집을 구하고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송몽규의 동생으로는 여동생 한복(1923년생), 남동생 우규(1931년생)가 있다. 2.2. 학업[편집] “윤동주는 문학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송몽규는 연설을 잘했으며, 정치적 리더십이 두드러져 장래 희망을 일찌감치 독립군으로 정해놓고 있었다.” - 문익환 평전 1925년, 8살 나이로 같은 마을의 또래였던 윤동주, 문익환,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 교장이자 외숙부 김약연 선생에게 사사 받았으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활발하고 리더쉽이 강한 인물로, 학생들을 모아서 연극 등을 공연하는데 주도했고,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으로 찍은 문예지를 내기도 했다. 이 때,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서 수입해온 아동지 《어린이》,《아이생활》을 구독하여 읽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윤동주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 김신묵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에서 '인민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송몽규가 큰 일을 했다고 한다. 김신묵 장로는 문익환목사의 어머니이다. 1929년 봄,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교회학교를 인민학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몽규 역시 고작 12살 나이에 송창희 선생의 주장에 따라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워낙 다부진 성격이라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윤동주와 함께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20여리의 등교길을 매일 함께 다녔다고 한다. 룡정으로 이사하면서 1932년 4월에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송몽규는 윤동주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1934년 12월, 중학교 3학년으로 18세 나이로 꽁트 《숟가락》을 써서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다. 아명인 송한범으로 실렸다. 윤동주보다 이른 나이였으며 윤동주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1934년부터 문해(文海)라는 호를 썼다. 글(文)의 바다(海)라는 뜻으로 송몽규가 문학에 품고 있었던 큰 뜻을 짐작케 한다. 송몽규는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사각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는데 사용했는데,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이 도장이 찍힌 게 몇 권 있다고 한다.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은 민족주의자였는데, 송몽규는 이때부터 민족의식을 강하게 가졌다고 한다. 2.3. 독립군 투신[편집] 돌연 송몽규는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하여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남경으로 떠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한인반으로서는 2기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하여 장개석에게 지원을 받아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던 학교로서, 100여명의 조선인 학생이 군사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장개석은 이를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송몽규는 '왕위지'라는 중국식 가명으로 교육을 받았다. 은진중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 선생[2]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1914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라사행(羅士行) 같은 시기에 송몽규와 함께 은진중학교 선배를 통해서 점조직으로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때 잡지를 만들었는데 김구가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1년간 교육을 받다가 중국의 재정지원 중단으로 반이 해체되자 학교를 떠났다. 1935년 11월에는 중국의 제남지구(濟南地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이웅의 일파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는데, 1936년 3월, 산동성 성도 제남(濟南)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 이래로 일본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송몽규는 강제귀국 조치를 당하고, 1936년 6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등의 혐의로 본적지 함경북도 웅기경찰서(雄基警察署)에 구금되었으며, 고문과 취조를 받다가 8월 말 무렵 석방되었다. 이 떄부터 경찰의 요시찰인물이 된다. 이후 송몽규가 일본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특고월보』에서는 송몽규가 1936년 3월에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권유로 자수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1936년 특고경찰이 작성한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따르면 송몽규가 체포된 시간과 장소는 '1936년 4월 10일, 제남'으로서, 북간도 대랍자에서 일본 경찰에 자수했다고 기록된 '1936년 3월'과는 다르다. 『사상월보』에 실린 판결문에는 송몽규가 1936년 4월 부터 본적지 옹기경찰서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는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명시된 체포 시기, 정황과 일치한다. 송옹규는 송몽규가 일본 경찰에 잡혀서 본적지로 압송되는 현장을 우연하게 목격하였다. 이 역시 자수설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일 송몽규가 집안 어른들 권유에 따라서 자수를 해서 압송되었다면 본가에서 연락이 가서 압송 때부터 뒷바라지를 시작했을 것인데, 정작 옹기 본가 사람들은 송몽규의 압송 현장을 우연히 보고서야 체포되었다는걸 알게 되었고, 무슨 사건으로 체포된 건지 전혀 몰라서 집안 어른들이 알아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2.4. 학업 재개[편집] 1937년 4월, 용정대성중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했다고도 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간도에 있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를 졸업했다고도 한다. 조선족 신문에서는 전자, 국가보훈처 국립유공자 보훈록에서는 후자로 쓰고 있다. 본인은 은진중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요시찰인 딱지가 붙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8년 4월에 서울로 가서 연희전문학교에 윤동주와 나란히 합격하였다. 경제적으로 유망한 학과에 가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희전문 문과에 갔다. 하지만 당시 연희전문은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였기 때문에 사촌 간이 나란히 합격했다는 것은 크나큰 경사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1938년의 8월에 송몽규는 시 《밤》을 적어서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또한 연희전문에서는 1932년에 창간된 문과학생회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文友)》를 이어받아 문예부장으로서 활동했다. 문우의 마지막 호인 1941년 판에서 필명 '꿈별'로 '《하늘과 더불어》'[3]를 발표했다. 윤동주는 이 때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문우에서 함께 발표하였다. 편집인은 일본 유학을 함께 하게 된 강처중(姜處重).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도저히 2-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4] 송몽규는 자신들이 참가하게 된 문우 마지막 호에서 안타까운 심경이 가득한 후기를 남겼다. 대학에서 송몽규는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이 한국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쓰게 하여 고유의 문화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는데 있다고 보았고, 민족문화를 지키고 향상시키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39년 2월 부터 동급생 윤동주, 백인준(白仁俊), 강처중(姜處重)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인잡지 간행, 문학작품 품평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를 2등으로 졸업하였고, 1942년 봄에 윤동주와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을 떠나면서 도항증명서를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된다. 윤동주는 후에 이 때의 감정을 이라는 시로 드러내었다.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합격했으며, 윤동주는 릿쿄대학에 들어갔다가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하여 송몽규와 재회했다. 42년 10월 부터 43년 7월까지, 도시샤대학의 윤동주와 제3고등학교 학생 고희욱(高熙旭) 등과 함께 교토 시내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 기회를 노려서 민족의 독립을 기획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는 학문적 연구를 하는 활동을 했다.  2.5. 체포와 사망[편집] 1943년 7월 10일,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7월 14일 체포되었다.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시모가모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1944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1944년 4월 13일에 윤동주와 함께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을 비판하였으며, 일본이 머지 않아 패전할 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서 대세를 몰아 조선 독립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윤동주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절명했으며, 3월 7일 송몽규 역시 사망하여 순국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옥사에는 생체실험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5]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혔으며, 윤동주의 비문을 지었던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라는 비문을 썼다. 3. 사후[편집]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 송몽규의 조카가 되는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송몽규의 일생도 함께 정리하였다. 그 동안 무덤의 위치가 잘못 알려져 있어서 찾을 수 없었으나,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수록된 증언 덕분에 올바른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0년 4월에 송몽규의 묘는 윤동주가 묻혀 있는 용정으로 이전하여 윤동주의 묘에서 10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사후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4. 송몽규 전집[편집] 송몽규의 작품은 거의 남지 않았는데,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 연희전문학교에 에 발표한 《하늘과 더불어》,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밤》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문단이 곧 송몽규 전집(…)이다. - 술가락 -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6]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 하늘과 더불어 -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太陽(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思念(사념)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意欲(의욕)의 殘滓(잔재)만 쓰디쓴 追憶(추억)의 反(반)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戀人(연인)이 없어 孤獨(고독)스럽지 않아도 故鄕(고향)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祈願(기원)하련다.   - 밤 -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5. 대중문화[편집] 윤동주의 「이런 날」(1936. 6. 10)에서 언급되는 '형'이란 송몽규를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사이 좋은正門의 두돌긔둥끝에서 五色旗와 太陽旗가 춤을추는날, 금(線)을 은地域의 아이들이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乾燥한學課로 해ㅅ말간 倦怠가 깃들고 ‘矛盾’ 두자를 理解치 하도록 머리가 單純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頑固하던 兄을, 부르고 싶다. -1936년 6월 10일 ― 윤동주 이런 날 윤동주를 주제로 한 59편의 시를 엮어 이라는 시집을 낸 이탄 시인이 해당 시집 내에 라는 시를 적어놓은 것이 있다. 송몽규 이 탄 항상 윤동주의 뒤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윤동주의 앞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윤동주의 조용한 얼굴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독립군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의 그림자는 남겨놓고 떠났다 학교는 그럭저럭 윤동주와 맞먹었어도 생각하는 것, 그것을 옮기는 것은 송몽규였다 실천자, 그는 혼자 돌아다니는 윤동주를 나무라지 않았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일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고종사촌의 아들 송몽규도 일본에 와 있었다 송몽규의 그림자는 넓고 넓었다 그는 그 안에서 쓰러진 벼농사를 일으켜 세우고 물을 대주는 일도 해야 했다 신작로에 말없이 백힌 돌 하나 그 돌 하나만이라도 뽑아서 뾰족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의 힘을 누를 것인가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에게 덤벼들 것인가 벌은 날아다니는 곤충 개미는 애써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곤충 이 두 곤충의 삶을 비교하여 벌은 벌대로 개미는 개미대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 만해의 부릅뜬 언어, 조선독립의 이유서 벌은 일본이고 개미는 조선일지라도 각기 살아가야 한다 벌이 어떻게 개미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송몽규의 생각도 이러했으리라 벌은 하루 종일 꿀을 모아야 하지만 저 허리가 잘록한 개미, 기어다니는 개미는 개미대로 즐거워야 한다 송몽규의 온몸은 이런 생각으로 차 있었다 이런 투로 그의 그림자는 그림자로 가득했다 윤동주의 뒤 윤동주의 앞 항상 그림자 안에서 지냈다 윤동주는 그림자만 보아도 뜻을 알았다 그 뜻에 다치거나 그 뜻에 흠집이 생기거나 그 뜻에 동티가 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림자에 더 첨가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림자를 잘 보관시키도록 해야 했다 마당에 서 있는 사철나무 껌껌해도 볼 수 있는 사철나무 항상 빛을 잃지 않은 사철나무의 뜻을 새삼 나무만큼 알았다 저 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떠 있다 사철나무나 저 별들은 변하지 않는 두 사람의 우정 하나가 동적이면 하나는 정적이다 윤동주는 조용한 성품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두 사람이 같았다 하나는 그림자, 하나는 그림자에 싸인 사람 송몽규, 윤동주와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함께 했던 벗 강처중(1916-?) 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의 발문에서 아래와 같이 둘을 추모하였다. (전략)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殞命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후쿠오카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 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윤동주의 생애를 다룬 2016년작 한국 영화 에서는 박정민이 송몽규 역으로, 윤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과 함께 사실상의 공동 주연으로 열연했다. 이 작품으로 그해 다수의 주요 영화제에서 신인 남우상을 차지했을 정도.   [1] 형은 윤영춘이다. 때문에 윤영춘도 윤동주의 당숙이다.[2]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동양사학 출신으로서, 민족주의자였다.[3] 목차에서는 "하늘과 더브러"로 되어 있다.[4] 출처[5] 동주(영화)에서도 송몽규(박정민 분)가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 앞에서 '형무소에서 이상한 주사를 맞고 있는 바람에 동주는 먼저 죽었고 자신도 얼마 안 남았으니 고향에 묻어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6] 아내
5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이런 날 댓글:  조회:2950  추천:0  2018-07-13
               이런 날                                        윤동주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五色旗오색기와 태양기(太陽旗)가 춤을 추는 날 금(線선)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루의 乾燥건조한 學課학과로 해말간 권태(勸怠)가 깃들고 '모순(矛盾)'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이런 날 /윤동주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루의 건조한 학과로 햇말간 권태가 깃들고 '모순'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 일제 침략에도 개돼지처럼 받아들이는 조센징들 비판하는 시. ==================== 다시 용정으로... 중국 용정 광명중 5학년 시절의 윤동주(왼쪽). 오른쪽은 대성중 4학년이던 고종사촌 송몽규. 연변윤동주연구회 홈페이지 캡처   1936년 3월 다시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4월 6일 5년제 일본학교인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한다. 대학에 진학하려면 기독교계나 민족계가 아니지만 광명중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다. 착잡한 심경을 시 ‘이런 날’(1936년 6월 10일)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로 표현하고 있다. 오색기는 만주국 국기이고, 태양기는 일본 국기다. 윤동주에게는 서슴없는 능멸이었다. 모순을 모르고 ‘머리가 단순’하게 된 아이들을 깨우듯이, 1936년 8월 13일엔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말소했다.  이 시기에 윤동주는 여러 시인의 작품을 스크랩해 두곤 했다. 1935년 10월 27일에 간행된 ‘정지용 시집’을 동주는 평양에서 1936년 3월 19일 구입해 내지에 서명해 둔다. 이미 읽어 왔겠지만 시집을 구입하고 더욱 깊이 읽었던 윤동주는 정지용 시 10여 편을 모방하며 습작해 본다.     윤동주 시 ‘오줌싸개 지도’의 육필원고. 유족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가톨릭 신자였던 정지용은 ‘가톨릭청년’을 편집했는데, 광명 시절 윤동주는 가톨릭 만주 옌지(延吉) 교구에서 낸 월간 어린이잡지 ‘가톨릭청년’에 다섯 편의 동시를 발표했다. 동주는 ‘오줌싸개 지도’를 1936년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에 써 놓았고, 이후 1937년 1월호에 발표했다. 시 한 편 완성하는 데 1년 이상 걸린 것이다.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쏴 그린 지도.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윤동주, ‘오줌싸개 지도’  제목과 1연만 보면 재미있고 귀엽다. 엄마 아빠 모두 떠나고, 남은 두 아이의 이야기다. 2연을 보면 엄마는 별나라 갔고, 아빠는 돈 벌러 만주에 갔다. 아이들은 누가 돌보고 있을까. 윤동주가 보관하고 있던 발표본에는 수정한 흔적이 있다. 오줌 ‘싸서’니 ‘싸’가 아니라, 오줌 ‘쏴’라고 고친 흔적이 분명히 있다. 원고지에도 ‘쏴’라고 썼는데, 투고했을 때 잡지사 편집부에서 ‘싸서’로 고쳤다. 그것을 다시 동주는 왜 ‘쏴’라고 고쳤을까. ‘싸서’보다 ‘쏴’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부모 없는 아이가 밤이 무서워 참다 참다가 쏴버리는 오줌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두 아이의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만주로 돈 벌러 다녀야 하는 난민이다. 당시 북간도 주요 도시에는 조선인 중 부자들이 가기도 했지만 일제의 착취가 극심해지면서 ‘돈 벌러 간 만주 땅 지돈가?’라는 구절처럼 만주 등 해외로 떠난 사람이 많았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라는 구절은 관념으로 갑자기 나온 그럴듯한 문구가 아니다. 이미 10대 때 쓴 동시들을 보면 그의 시에는 그가 자주 인용하던 ‘맹자’의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홀아비, 난민, 고아 등 ‘죽어가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이불’이 나오는 또 한 편의 시가 있다.   지난 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 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윤동주, ‘눈’  만주의 12월 ‘지난 밤’은 누군가 죽지 않았을까 염려스러운 을씨년스러운 밤이다. 그런 밤에 내리는 눈이란 모든 사물을 얼려버리는, 생명을 죽여버리는 적대적 대상이다. 그런데 윤동주는 악한으로 상징될 눈을 ‘소복이 왔네’라고 표현한다. 싸늘한 ‘지난 밤’에 ‘지붕이랑 길이랑 밭’을 이불같은 눈이 덮는다.  왜 이 시에도 ‘이불’이 나올까. 낮에 온돌방은 군불을 때니 훈훈하다. 뜨거운 아랫목의 화끈한 기운을 종일 이불로 덮어둔다. 전기밥솥이 없었던 시대에 이불은 공깃밥을 따스하게 보온하는 보온기구 역할도 했다. 밤에 온돌방의 난방기구는 이불 외에는 따로 없다. 그 이불 속에 들어가 몸을 훈훈히 덥히며 자면 머리 위로는 코 시린 웃풍이 지나곤 했다. 이 시에서 핵심적인 단어인 ‘이불’을 제목으로 두면 시의 의도가 너무 빤히 드러나 암시효과가 일어나지 않는다. 원고지를 보면 제목을 ‘이불’이라고 썼다가 ‘눈’으로 바꾼 흔적이 보인다. 본래 제목이 ‘이불’이었는데 지우고 ‘눈’으로 바꾼 것은 썩 괜찮다.  2연은 ‘그러기에’로 시작한다. 이 단어는 ‘추워 한다’고 하는 사물에 대해 ‘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원인과 결과를 이어주고 있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을 덮어주기 위해 ‘그러기에’ 눈은 추운 겨울에만 내린다는 것이다. 약자를 생각하는 따스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윤동주, ‘호주머니’     이 시는 1936년 12월에서 1937년 1월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동시다. 시에서 주인공은 호주머니다. 호주머니는 채울 것이 없어 걱정한다. 돈 없는 사람들이 주머니에 뭘 넣을 수 있을까. 가장 추운 겨울에 채울 만 한 게 주먹 두 개란다. ‘갑북갑북’은 ‘가득가득’이란 평안도 방언이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모자랐던 시대에 소년은 주먹 두 개만 넣어본다. 넉넉하지 않은 일상을 주먹 두 개로 견뎌내자는 뜻일까. 가난도 절망도 ‘주먹 두 개 갑북갑북’이라는 해학으로 녹여버린다. 이토록 간결하고 투박하게 사랑해야 할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그 영혼의 의자에 들어앉기 시작했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4    윤동주와 "4총사" 댓글:  조회:2841  추천:0  2018-07-13
                Look by look   윤동주의 사람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2017. 11. 30. 18:00 URL 복사 본문 기타 기능       영원한 청년, 윤동주에 대해 알면서 많은 사람을 알았습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윤동주가 존경했던 시인 정지용과 영화 '동주'를 통해 알게 된 송몽규 열사와 강처중. 이번 포스트에서는 그들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사진 출처 : 도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영화 '동주' 송몽규 1917년 9월 28일 ~ 1945년 3월 7일 영화 '동주'를 통해서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윤동주와 이종사촌 관계. 그리고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이기도 합니다. 은진 중학교 재학 중 중국 난징에서 김구 선생이 무관을 양성하기 위해 설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한인 특별반 2기생으로 입학해 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뒤 독립운동에 투산 하였다가 일본 영사관에 잡혀 치안유지법 위반과 살인 등의 혐의로 조사받다가 석방되었습니다. 1938년 4월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밤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그리고 윤동주의 시 '이런 날'에서 형 '송몽규'를 가리킨다고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런 날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루의 건조한 학과로 해말간 권태가 깃들고 '모순'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그는 방에서 시를 쓰던 윤동주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계몽과 독립을 위해서는 시를 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총대를 멘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를 쓰는 윤동주를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방식대로 독립을 위해 노력한 것이지요. 그는 결국, 일본 유학 중에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인 거 같다는 정보를 전하고, 본인 역시 실험대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윤동주를 사후 3주 후에 사망하였습니다.   강처중 연희전문시절 함께 기숙사 핀슨홀에서 생활을 했던 핀슨홀 3총사가 바로 윤동주, 송몽규, 강처중입니다. 그리고 2년 후 후배 정병욱이 입학하면서 4인방이 되었습니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일본 유학까지 함께 하게 되었고, 죽음도 비슷한 시기에 맞이하게 되었죠. 그리고 6개월 후 해방이 되고 1947년 2월 윤동주 사망 2주기를 앞두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를 알리기로 하였습니다. 윤동주 시집 발간하는데 후배 정병욱의 역할 윤동주 시집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강처중의 역할도 컸습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 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듯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그 소리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獄死)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초판에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름은 10년 후 증보판에서 사라졌습니다. 증보판이 나오던 시기에 정지용은 월북하였고, 강처중은 해방 전 후언론계의 남로당 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위 내용은 발문에 있던 내용입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강처중은 윤동주의 유고 시집에서 윤동주와 송몽규를 그리워하였습니다.   사진 출처: (우) 뮤지컬 '달을 쏘다' 정병욱 1922년~ 1982년 연희 전문 후배로 앞서 소개한 인물들과 윤동주, 이렇게 4인방이었습니다.  윤동주는 본인이 만든 시집을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에게 본인의 시집을 건넸는데요. 본인이 가지고 있던 것은 옥사하면서 없어졌고, 이양하 교수에거 건넨 시집도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정병욱에게 건넨 것은 정병욱의 어머니에게 부탁해 고향 집에 보관되어 지금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자신의 집 마루에 숨겨두었던 시를 모아 1948년 발간하였습니다.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 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는 추모기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글에서 윤동주를 추억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저자 윤동주 출판 카멜북스 발매 2017.12.01.   윤동주의 주변 인물을 보니 그를 알 수 있었어요. 곧은 성품과 나라에 대한 걱정. 그의 친구들이 그리 했던 거처럼 그의 친구들도 그랬습니다. 지인들로 인해 그를 조금이나마 추억 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윤동주의 사람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작성자 카멜북스  
3    [쉼터] - 랑비는 최대의 수치, 절약은 문명의 표징 댓글:  조회:2808  추천:0  2018-07-13
손님초대밥상을 두고 2018년 07월 10일 작성자: 김춘식 [두만강칼럼]  손님초대밥상을 두고 사람마다 각이한 생각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푸짐히 차려야 성의를 충분히 표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검박하게 차려도 대방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 간 한 한국인이 친구네 집으로 초대되였다. 저녁때가 되자 친구의 며느리가 저녁밥상을 올려왔다. 시아버지 밥상 하나, 손님 밥상 하나, 남편 밥상 하나였다. 이렇게 밥상이 세개인데 작은 밥상마다 밥 한그릇과 된장국 한그릇, 반찬은 꽁치 하나 구워놓고 단무지 다섯개를 썰어놓았다. 그리고 자그마한 김 일곱장, 시금치를 데쳐 썰어놓은 데다 갓을 좀 올려놓은 것 뿐이다. 이것이 외국에서 온 시아버지의 친구를 초대하는 밥상이다. 만약 우리 조선족 녀성들이라면 아마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렸을 것이다. 벤츠회사는 독일에서 제일 큰 공업집단회사인데 한번은 슈트트가르트에서 년도보고회를 하면서 일부 기자들을 초청했다. 집행 행사를 회사 행정본부 식당에서 거행했는데 식사 때 매 사람당 국 한공기, 남새샐러드 한접시, 고기 한덩어리와 감자료리를 내주었다. 손님들은 빡빡 긁어먹었다. 어떤 손님들은 빵으로 접시에 발린 남새국물까지 찍어먹었는데 아주 자연스러웠고 ‘얼굴이 깎일가봐’ 걱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식사 후에 자기절로 선택하는 단음식을 공급했는데 식사량이 많은 사람은 자기절로 더 보충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라면 식탁이 좁을세라 산해진미를 가득 차려놓았을 것이다. 내가 이번에 한국에서 돌아와 고향에 정착하게 되자 여러 친척들이 번갈아가며 우리 식구들을 초대했는데 집에서 초대하든 음식점에서 초대하든 식탁마다 너무나 푸짐했다. 료리가 십여가지씩 되는 데다 접시마다 량이 또한 많아서 절반도 먹나 마나 했다. 어떤 음식에는 겨우 저가락 몇번 오갔을 뿐이다. 음식을 좀 적게 올리라고 미리 귀띔해도 어쩌다 초대하는 귀인인데 어떻게 약소하게 대접하냐며 듣지 않았다. 내가 계산해보니 끼니마다 천원씩은 소비하는 것 같았다. 옛 직장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적어서 몇년 많이는 20여년이나 함께 지냈던 동료들이라 귀국하자 마자 돌림으로 식사초대를 하는데 역시 식탁마다 풍성했다. 그대로 버려지는 음식도 아깝고 음식값도 만만치 않아 좀 적게 주문하라고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뭐, 그러면 성의가 부족하다나? 그래서 후에는 별수없이 이 핑게 저 핑게를 대며 극력 초대를 막는 수 밖에 없었다. 귀한 친척이라고 반가운 동료라고 진정을 다해 대접해주는 그 성의는 너무 감사하지만 그들이 번마다 적지 않은 돈을 팔고 또 많은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들은 손님초대에서의 과소비는 체면 때문이란다. 과소비는 어떻게 보면 랑비이다. 랑비는 최대의 수치이고 절약은 문명의 표징이다. 절약이란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자는 것이지 한끼 굶자거나 식사를 적게 하란 말이 아니다. 입에 맞게 먹을 수 있을 만큼 음식을 장만해 식탁을 꾸미라는 것이다. 손님초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평소보다 색다른 음식 하나만 더 올려도 괜찮다. 손님을 초대하는 식탁에서 차린 음식이 꼭 남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주인의 진심어린 성의를 표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절약은 결코 린색이 아니다. 절약을 린색과 혼돈해서는 안된다. 위인이고 부자라도 자신이 쓰는 비용이나 남을 위해 쓰는 비용을 랑비함이 없이 아껴쓸 것을 권장한다. ‘소 같이 벌어서 쥐 같이 먹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는 어렵게 마련되는 돈을 가치없이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데 써서는 안된다. 프랑스 사람들은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는 례의는 지키고 있지만 음식에 대해서는 거의 개의치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유럽인들의 공통점이다. 이는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바이다. 한국인들도 손님초대에서 우리처럼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지 않는다. 전문점에 가서 순대국 한그릇이나 뼈다귀국 한그릇, 김치찌개 한그릇에 막걸리 한두병이면 그만이라 역시 공감이 가는 손님초대법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길림신문 2018.7.9
2    [록색평화주의者]"평화의 랭면", "통일의 랭면" 거듭나기만을... 댓글:  조회:2853  추천:0  2018-07-13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랭면관 —옥류관 탐방 [ 2018년 07월 11일 ]       올해 4월 27일 조한 정상이 판문점에서 회담을 진행할 때, 조선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한국 대통령 문재인에게 평양에서 가져온 랭면을 맛보게 했다. 이로 하여 평양랭면은 순식간에 글로벌 핫 키워드로 되였으며 조선 지도자들이 외빈을 초대할 때 늘 랭면을 만드는 옥류관도 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날리게 되였다. 9일, 기자는 평양 옥류관을 탐방하여 조선 3대 지도자의 관심과 조선인민의 사랑을 깊이 받고 있는 이 랭면관에 대해 료해했다. 옥류관은 평양 대동강반에 위치해있는데 청자기와 흰벽으로 구성된 2층 조선전통건축이다. 옥류관 봉사부 직원 명예화의 소개에 의하면 옥류관은 조선의 김일성 주석이 1958년 8월 지시를 내려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1960년 8월에 준공되였다고 한다. 옥류관이라는 이름은 김일성 주석이 지은 것으로 대동강을 옥류라고도 하기에 옥류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옥류관은 건설 초기 본관 건축 하나 밖에 없었고 면적은 약 4400평방메터였으나 그후 옥류관을 찾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자 두개 별관을 확장건설했으며 1988년 5월 두개의 별관이 정식으로 준공되여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재 옥류관은 도합 3개의 관으로 나뉘는데 본관, 1호관과 2호관이다. 2010년 10월, 김정일 장군의 지시하에 옥류관은 또 료리관을 설립하여 철갑상어료리, 메추리구이 등 특색료리를 만들었으며 동시에 외국료리도 만들 수 있게 되였다. 현재 옥류관의 총 면적은 19200여평방메터에 달하며 수많은 초대행사를 담당하고 있는데 조선의 김일성 주석, 김정일 장군과 최고지도자 김정은 동지는 여러차례 옥류관을 시찰하고 옥류관의 건설과 봉사 사업에 대해 지도했다. 명예화는 한국 전 대통령 김대중과 전 대통령 로무현이 조선을 방문한 당시에도 옥류관에서 초대를 받았다고 밝혔다. 올해 4월 27일 북남 정상회담에서 조선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한국 대통령 문재인에게 옥류관에서 만든 랭면을 맛보게 했으며 이로 하여 옥류관의 랭면은 ‘평화의 랭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였다. 오늘날, 세계 각지의 손님들이 평양을 방문하면 꼭 옥류관에서 랭면을 맛보는데 여기에는 많은 중국손님들도 포함된다. 며칠전, 한국롱구팀의 선수들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에도 옥류관에서 식사했는데 그들도 이곳의 랭면을 아주 좋아했으며 일부 선수들은 2그릇 심지어 세그릇씩 먹었다. 명예화의 소개에 의하면 옥류관의 랭면은 세가지 종류가 있는데 바로 쟁반고기랭면, 평양랭면, 쟁반랭면이다. 쟁반고기랭면은 김정일 장군의 지도하에 고대 조선의 왕궁에서 먹던 식단과 식기를 참조했으며 끊임없는 개량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쟁반고기랭면의 그릇은 굽이 높은 쟁반이며 일인분은 400그람의 랭면에 280그람의 닭고기, 계란, 배조각 등 보조재료를 겯들였다. 평양랭면은 전통 랭면의 제작방법을 이어왔는데 랭면그릇은 놋그릇이며 일인분은 200그람 혹은 100그람에 랭면에 소량의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계란, 배조각, 오이채 등 보조재료를 겯들였다. 쟁반랭면의 그릇도 굽이 높은 쟁반이며 일인분은 200그람 혹은 100그람의 랭면이 담겨있으며 보조재료는 평양랭면과 같다. 하지만 식기가 다르기에 세팅효과가 다소 부동하다. 평양랭면은 모든 보조재료를 랭면 우에 쌓아놓지만 쟁반랭면은 랭면우에 펴놓는다. 명예화의 안내로 기자는 본관에 위치한 연회청을 참관했다. 본관 연회청은 동시에 320명이 식사할 수 있는데 한국롱구팀의 선수와 한국예술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모두 이곳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기자가 본관에 도착했을 때에는 정식 영업시간이 아니여서 접대원들이 식기와 랭면을 차리고 있었다. 정식 영업이 시작되자 조선민중들이 륙속 연회청에 진입해 식사를 했다. 명예화의 소개에 의하면 옥류관은 평균 매일 6000여명의 손님을 접대하며 많은 단체손님은 사전에 예약해야 한다고 한다. 옥류관 료리사 박영옥은 1992년부터 지금까지 26년간 옥류관에서 일했다. 그녀는 기자에게 랭면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원인은 주로 두가지가 있는데 한 방면으로 랭면은 메밀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영양이 풍부하고 쉽게 소화되며 혈액지질을 낮출 수 있어 건강음식에 속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 방면으로 랭면육수는 여러가지 식재료를 우린 것으로 감칠맛이 강해 랭면과 함께 먹으면 더욱 시원하고 조화롭다고 밝혔다. 이번 북남 정상회담에 박영옥 료리사도 판문점에 파견되여 랭면 제작에 참여했는데 이 경력에 대해 그녀는 “우리가 만든 랭면이 전 민족의 사랑을 받고 평화의 랭면, 통일이 랭면이 되였습니다. 나는 평화와 통일에 한몫을 기여했다는 생각에 아주 자호감을 느낍니다.”라고 감격스레 말했다. 취재가 끝난 후 기자는 옥류관에서 쟁반고기랭면을 시켰는데 접대원은 랭면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한잔의 평양소주도 들고왔다. 명예화의 소개에 따르면 평양사람들이 손님을 접대할 때 ‘먼저 술을 마시고 후에 랭면을 먹는’ 습관이 있는데 먼저 한잔의 소주를 마시고 다시 랭면 한그릇을 먹으면 편안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기자도 그대로 맛보았는데 랭면의 량이 넉넉하고 맛도 아주 훌륭했으며 평양소주를 겯들이니 또 다른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인민넷 기자 망구신).                
1    [동네방네] -" 흑사과 맛보세요"... 댓글:  조회:2714  추천:0  2018-07-13
‘흑사과 본 적 있으세요?’... 사과 한알에 150元 (ZOGLO) 2018년7월12일  최근 칭장(青藏)고원에 거주하고 있는 한 노인이 8년 간 노력 끝에 흑사과 재배에 성공해 화제가 되고 있다.    칭장고원에 거주하고 있는 한 노인은 8년 전 흑사과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항상 꽃을 피우지 못해 열매를 수확할 수 없었다. 8년 째 되는 올해, 흑사과 나무에 드디어 꽃봉오리가 맺혔고 노인은 결국 흑사과 재배에 성공할 수 있게 됐다.   이 흑사과는 칭장고원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특산품, 흑사과나무를 재배하기는 어렵지만 흑사과의 당도는 일반 사과보다 높아 인기가 높다.    가격은 한개당 150위안(약 2만 5천원)으로 매우 비싼 편이다. /봉황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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